마다가스카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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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다가스카르의 역사는 기원전 500년경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정착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아랍인,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민족과의 교류를 거쳐 여러 왕국이 등장했으며, 16세기에는 포르투갈의 '발견' 이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1896년 프랑스에 병합된 마다가스카르는 1960년 독립했으며, 독립 이후 사회주의 정책, 쿠데타, 민주화 과정을 겪었다. 현재는 안드리 라조엘리나가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며, 홍역 유행, 가뭄 등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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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다가스카르의 역사 - 메리나 왕국
15세기부터 1897년까지 마다가스카르섬 중앙고원을 통치한 메리나 왕국은 안드리아마넬로 왕이 주변 공동체를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랄람보 왕이 이메리나라는 이름을 붙여 왕국을 확장했으며, 19세기에는 마다가스카르 대부분을 통일했으나, 19세기 후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1897년 프랑스 식민군에 의해 멸망했다. - 마다가스카르의 역사 - 마다가스카르 계획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럽 유대인들을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강제 이주시키려던 구상이었으나, 독일 패배와 전쟁 장기화로 폐기되고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마다가스카르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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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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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기원전 500년 - 서기 700년경) | 초기 정착민과 정착지 |
탐험 시대 (700년 - 1500년경) | 상인, 탐험가, 이민 |
왕국 시대 | 메리나 왕국 (1540년–1897년) |
식민 시대 | 프랑스 보호령 (1882년–1897년) |
식민 시대 | 프랑스 식민지 (1897년–1958년) |
공화국 시대 | 제1 공화국 (1958년–1975년) |
공화국 시대 | 제2 공화국 (1975년–1992년) |
공화국 시대 | 제3 공화국 (1992년–2010년) |
과도 정부 시대 | 최고 과도 통치 기구 (2009년–2014년) |
공화국 시대 | 제4 공화국 (2014년–현재) |
관련 항목 | |
관련 항목 | 범주 코먼스 포털 |
2. 초기 정착과 부족 사회 형성 (기원전 500년 ~ 기원후 1500년)
마다가스카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초기 증거는 서기 490년경 안다바코에라에서 발견되었지만,[9] 그 이전에도 인간이 방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기원전 8,500년경 코끼리새 뼈에 인간의 칼자국이 발견되었고,[10][11] 기원전 2000년경에는 수렵 채집인들이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했다는 증거도 있다.[12][13]
최근 여러 연구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인들은 원래 순다 열도에서 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이었다.[17][18][19][20][21][22][23][24][25] 이들은 서기 초나 300년 전, 혹은 더 일찍 아웃리거 카누(''waka'')를 타고 마다가스카르 서해안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6][27] 어떤 학자들은 이주가 기원전 500년에서 20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고도 한다.[29][30]
말라가시어는 동남 바리토어에서 유래되었으며, 마안얀어가 가장 가까운 친척 관계이다.[33][34] 마안얀족은 말레이와 자바인에 의해 노동자 및 노예로 무역 함대에 실려왔으며, 서기 50–500년경에 마다가스카르에 도달했다.[35][36] 이들은 말라가시 구전 설화에서 '*tau-ulu*'에서 유래된 ''Ntaolo''('첫 번째 사람들'이라는 뜻)로 알려져 있다.[37] 초기 정착민들은 해안 열대 우림을 개간하기 위해 ''tavy'' (화전 농업)를 시행했다.[42] 이들은 거대 여우원숭이, 코끼리새 등 마다가스카르의 풍부한 거대 동물군과 마주쳤으며, 이들은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 멸종되었다.[43]
600년경, 초기 정착민들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중부 고원(''이메리나'')의 숲을 개간하기 시작했으며, 토란(''사온조'')과 쌀(''바리'')을 심었다. 중부 고원의 숲에 정착한 이들은 바짐바(보르네오의 바리토 강 유역 민족의 언어에서 유래한 "숲의 사람들"을 의미)로 알려져 있다.[44] 메리나족 왕조의 조상인 라판드라나는 바짐바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44]
반면에, 남서부 해안에 남아 있었던 어부들은 베조( "해안의 사람들"을 의미)로 불렸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남서부 부족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7세기경부터 1500년경까지, 바짐바 족과 베조 족은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온 상인과 노예들을 맞이했다. 이들은 때때로 베조 족과 바짐바 족에 통합되었다.[47] 마다가스카르의 기록된 역사는 7세기에 오만인들이 북서 해안에 무역 거점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이슬람교, 아랍 문자(소라베 문자로 알려진 마다가스카르어 표기에 사용됨) 등을 도입했다.[48] 마다가스카르는 동아프리카 해안의 중요한 무역 항구 역할을 했다. 6~7세기경 반투족 또는 스와힐리족 선원이나 상인이 마다가스카르 서쪽 해안으로 항해를 시작했다는 증거가 있다.[49]
10세기 또는 11세기부터 아랍인과 잔지바르의 노예 상인들이 마다가스카르 서부 해안에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들은 자피라미니아의 조상들을 포함했다. 마지막 아랍 이민자 집단인 안탈라오트라는 섬의 북서부에 정착하여 마다가스카르에 이슬람교를 처음으로 도입했다.[50] 아랍 이민자들은 원주민에 비해 수는 적었지만, 계절, 달, 요일, 동전에 대한 마다가스어 이름, 할례, 공동 곡물 창고 등 다양한 문화적 특징에 영향을 남겼다.[51][52]
구전 설화에 따르면,[53] 새로운 오스트로네시아 씨족(말레이족, 자바인, 부기스족, 오랑 라우트)[54]는 섬의 북서부와 동쪽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은 ''호바''[44]라고 불렸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안드리아나'' 또는 ''라온드리 아나(raondriana)''로 알려졌다.[44][57][58] 이들은 대부분 바짐바 씨족과 동맹을 맺었다.[59][60]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페르시아와 아랍 상인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을 대체하여 코모로 제도와 마다가스카르 해안 일부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 송나라와 촐라 왕조의 경쟁으로 인도네시아의 해양 제국은 쇠퇴했지만, 포르투갈인들은 16세기에 마다가스카르에서 자바인 선원들을 만났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동아프리카 출신의 반투족이 6세기와 7세기 초부터 섬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을 수 있다.[49] 중세 시대에 아랍, 페르시아, 신-오스트로네시아 노예 상인[47]이 반투족을 마다가스카르로 데려왔다고 한다.[63] 수년간의 혼인이 말라가시족을 형성했으며, 이들은 반투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로네시아어인 말라가시어를 사용한다.[64] 초기 말라가시어에는 스와힐리어 차용어가 많이 존재한다.[20]
마다가스카르의 최초 거주민은 동남아시아 도서부에서 건너왔으며, 이후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혼혈하여 유럽인 도달 이전에는 그 DNA상의 비율이 반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르네오계 DNA는 보르네오와 마다가스카르섬 사이의 인도양 연안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므로, 보르네오 사람들은 직접 마다가스카르섬까지 항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두 섬 사이는 8300km나 떨어져 있지만, 당시 동남아시아 도서부 해민의 기술 수준이라면 충분히 현실적인 항해이다.
문헌에 마다가스카르의 존재가 처음 등장한 것은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메누티아스라는 섬에 대한 기술이라고 한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큰 섬에 대한 기재가 있지만, 마르코 폴로는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지방과 착각하여 마다가스카르라고 잘못 소개했다. 이것이 마다가스카르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아랍 세계에서는 마다가스카르가 오래전부터 '''Gezirat Al-Komor'''('''달의 섬'''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9세기 무렵부터 아랍인은 마다가스카르에 진출했으며, 동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흑인들을 노예로 마다가스카르에 데려왔다. 이로 인해 연안부의 여러 부족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마다가스카르섬 북부에는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인도양 교역과 함께 동아프리카의 연안 교역으로 번성했던 항만 유적이 있다.
2. 1. 오스트로네시아인의 이주와 정착
마다가스카르에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했다는 초기 증거는 안다바코에라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서기 4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9]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인간이 방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2009년 크리스마스 강에서 발견된 코끼리새 뼈에는 인간의 칼자국이 있었으며, 기원전 8,500년으로 추정된다.[10][11] 북서부와 북동부에서 발견된 뼈의 칼자국과 석기는 기원전 2000년경 수렵 채집인들이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했음을 시사한다.[12][13]최근 고고학,[17] 유전학,[18] 언어학,[19][20][21] 및 역사[22][23][24][25] 연구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인들은 원래 순다 열도에서 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이었다. 이들은 서기 초나 300년 전, 혹은 더 일찍 아웃리거 카누(''waka'')를 타고 마다가스카르 서해안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6][27] 블렌치는 식물 재배종을 근거로 이주가 "최소 기원전 1세기에" 발생했다고 제안했다.[28] 아르디카와 벨우드의 고고학적 연구는 기원전 500년에서 200년 사이에 이주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29][30]
2003–2004년의 보로부두르 호 원정은 고대 인도네시아의 배가 8세기 이후 무역을 위해 마다가스카르와 서아프리카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전통적인 보로부두르 선박에 아웃리거를 장착하여 자카르타에서 마다가스카르와 가나까지 항해했다.[31] 인도네시아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자바에서 인도양을 가로질러 직접 마다가스카르로 왔을 가능성이 있으며, 몰디브를 거쳤을 수도 있다.[32]
말라가시어는 동남 바리토어에서 유래되었으며, 마안얀어가 가장 가까운 친척 관계이며, 수많은 말레이어와 자바어 차용어가 있다.[33][34] 마안얀족은 말레이와 자바인에 의해 노동자 및 노예로 무역 함대에 실려왔으며, 서기 50–500년경에 마다가스카르에 도달했다.[35][36] 이들은 말라가시 구전 설화에서 '*tau-ulu*'에서 유래된 ''Ntaolo''('첫 번째 사람들'이라는 뜻)로 알려져 있다.[37] 고대인들은 스스로 '*''va-waka''*'( "카누 사람들"을 뜻함)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으며, 오늘날 vahoakamg라는 용어는 말라가시어로 '사람들'을 의미한다.
초기 정착민들은 해안 열대 우림을 개간하기 위해 ''tavy'' (화전 농업)를 시행했다.[42] 이들은 거대 여우원숭이, 코끼리새 등 마다가스카르의 풍부한 거대 동물군과 마주쳤으며, 이들은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 멸종되었다.[43]
600년경, 이들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중부 고원(''이메리나'')의 숲을 개간하기 시작했으며, 토란(''사온조'')과 쌀(''바리'')을 심었다. 중부 고원의 숲에 정착한 이들은 바짐바(보르네오의 바리토 강 유역 민족의 언어에서 유래한 "숲의 사람들"을 의미)로 알려져 있다.[44] 메리나족 왕조의 조상인 라판드라나는 바짐바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44]
반면에, 남서부 해안에 남아 있었던 어부들은 베조( "해안의 사람들"을 의미)로 불렸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남서부 부족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마다가스카르의 최초 거주민은 아웃리거 카누의 존재와 언어학 연구, 그리고 2005년에 매튜 할스가 발표한 DNA 연구를 통해 1세기 전후, 보르네오섬에서 항해 카누로 인도양을 횡단하여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한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2. 2. 바짐바와 베조
초기 정착민들은 섬의 남동부 해안을 따라 최초의 집중 거주지를 형성했지만, 처음에는 북부 해안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있다.[41] 이들은 경작을 위해 처녀 해안 열대 우림을 개간하기 위해 ''화전 농업'' (''tavy'')을 시행했다.[42] 초기 정착민들은 거대 여우원숭이, 코끼리새, 거대 포사 및 마다가스카르 하마를 포함한 마다가스카르의 풍부한 거대 동물군과 마주쳤으며, 이들은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 멸종되었다.[43]600년경, 이 초기 정착민 집단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중부 고원(''이메리나'')의 숲을 개간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토란 (''사온조'')과 쌀 (''바리'')을 심었다. 중부 고원의 숲에 정착하기로 결정한 수렵 채집인이자 농부인 이 ''Vahoaka Ntaolo''는 전통에 따라[44] 바짐바(숲의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45] 메리나족 왕조의 조상인 라판드라나, 라포히와 랑기타 등 메리나 왕족의 두 창시자 여왕도 바짐바로 불렸다.[44]
반면에, 처음부터 남서부 해안에 남아 있었던 어부들은 (아마도 첫 상륙 지점의 해안)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베조''(해안의 사람들)로 불렸으며, 이는 오늘날 남서부 부족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21]
2. 3. 다양한 이주민 유입과 교류
7세기경부터 1500년경까지, 내륙의 바짐바 족과 해안의 베조 족은 새로운 방문객이나 이민자들을 맞이했다. 이들은 중동(시라지 페르시아인, 오만 아랍인, 아랍계 유대인), 아프리카(스와힐리족), 아시아(구자라트인, 말레이족, 자바인, 부기스족) 출신의 상품 및 노예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때때로 해안의 베조 족과 내륙의 바짐바 족에 통합되었다.[47]마다가스카르의 기록된 역사는 7세기에 오만인들이 북서 해안에 무역 거점을 설립하고 이슬람교, 아랍 문자(소라베 문자로 알려진 마다가스카르어 표기에 사용됨), 아랍 천문학 및 기타 문화 요소를 도입하면서 시작되었다.[48] 이 시기 마다가스카르는 동아프리카 해안의 중요한 대양 횡단 무역 항구 역할을 했으며, 아프리카에 실크로드로 가는 무역로를 제공하고 들어오는 선박의 항구 역할을 했다. 반투족 또는 스와힐리족 선원이나 상인이 6~7세기경 마다가스카르 서쪽 해안으로 항해를 시작했다는 증거가 있다.[49]
일부 마다가스카르 민족의 전통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한 최초의 반투족과 아랍인들은 632년 무함마드 사망 후 발생한 내전의 난민이었다고 한다.[50] 10세기 또는 11세기부터 아랍인과 잔지바르의 노예 상인들은 스와힐리 해안을 따라 다우를 타고 내려와 마다가스카르 서부 해안에 정착지를 건설했다. 특히 이들은 자피라미니아, 즉 안테모로족, 안타노시족 및 기타 동부 해안 민족의 전통적인 조상들을 포함했다. 마지막 아랍 이민자 집단인 안탈라오트라는 스와힐리 식민지에서 이주해 왔다. 그들은 섬의 북서부(마하장가 지역)에 정착하여 마다가스카르에 이슬람교를 처음으로 도입했다.[50]
아랍 이민자들은 원주민인 오스트로네시아인과 반투족에 비해 수는 적었지만,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다. 특정 지역의 계절, 달, 요일, 동전에 대한 마다가스어 이름은 아랍어에서 유래되었으며,[51][52] 할례, 공동 곡물 창고, 다양한 형태의 인사말(예: ''살라마'')과 같은 문화적 특징도 마찬가지이다.
구전 설화에 따르면,[53] 새로운 오스트로네시아 씨족(말레이족, 자바인, 부기스족, 오랑 라우트)[54]는 역사적으로 그들의 출신 섬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호바"[44](고대 부기스어 ''uwa'', "평민"에서 유래)라고 불리며, 섬의 북서부와 동쪽 해안에 상륙했다. 아델라르(Adelaar)는 초기 프로토-동남-바리토어에 나타난 고대 말레이어(산스크리트화), 고대 자바어(산스크리트화) 및 고대 부기스어 차용어를 관찰한 결과, 최초의 호바(Hova)의 물결은 적어도 7세기 초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55] 마레(Marre)와 달(Dahl)은 말라가시어에 산스크리트어 단어 수가 현재 인도네시아어에서 발견되는 방대한 수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정착민들이 힌두교의 영향이 초기 단계, 즉 서기 400년경에 왔어야 함을 의미한다.[56]
호바는 아마도 인도네시아의 해양 제국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동남부에서는 ''다이아나(diana)''로, 중앙 및 서부에서는 ''안드리아나'' 또는 ''라온드리 아나(raondriana)''로 알려졌다.[44][57][58] (고대 자바어 ''(ra)-hadi-an'', "주님" 또는 "주인"에서 유래,[20] 현대 자바어 ''라덴'', 부기스 귀족 칭호 ''안디''와 "왕"을 뜻하는 타갈로그어 단어 ''하리''에서도 발견됨). 그들은 대부분 바짐바 씨족과 동맹을 맺었다:[59][60]
- 현재 안코알라(Ankoala)의 북서부 지역(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의 "강어귀"를 뜻하는 ''쿠알라(kuala)''에서 유래)에서 호바 ''오랑 라우트(Orang Laut)'' (말라가시어로 ''안탈라오트라(Antalaotra)'')가 인도양 작전을 위한 기지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 동쪽 해안(베치미사라카)에서 호바 지도자들은 "신-베조(neo-Vezo)" 씨족에 의해 ''필로(ha)베(Filo(ha)be)''라고 불리기도 했다.
- 남동부에서 자피라미니아(Zafiraminia)와 자피카지맘보(Zafikazimambo) 씨족의 지도자("다이아나")들은 "신-베조(neo-Vezo)"와 동맹을 맺고 이후 안타이사카(Antaisaka), 안타이모로(Antaimoro) 및 안타마바오카(Antambahoaka) 왕국을 설립했다.
- 서부: 사칼라바 왕국을 세운 마로세라나(Maroserana) 왕조는 동부 해안의 자피라미니아의 결과이다.
- 중앙에서는 호바 지도자(''안드리아나'') (예: 안드리 아네리네리나, 안드리안토마라 및 그들의 후손[58])와 바짐바 씨족의 족장(예: 라판드라나와 그의 후손[61]) 사이의 반복적인 동맹으로 메리나 왕국과 베칠레오 왕국이 탄생했다.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페르시아와 아랍 상인들은 곧 아프리카 해안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을 대체하여 결국 코모로 제도와 마다가스카르 해안 일부 지역까지 그들의 지배력을 확장했다. 한편, 송나라와 촐라 왕조의 새로운 해군 강국 간의 경쟁으로, 인도네시아의 해양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지만, 포르투갈인들은 16세기에 마다가스카르에서 자바인 선원들을 여전히 만났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동아프리카 출신의 농업-목축민인 반투족이 6세기와 7세기 초부터 섬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을 수 있다.[49] 다른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기록은 일부 반투족이 스와힐리 선원과 상인의 후손으로, 다우를 사용하여 마다가스카르 서해안까지 항해했다고 시사한다.[62] 중세 시대에 아랍, 페르시아, 신-오스트로네시아 노예 상인[47]이 반투족을 스와힐리 상인에 의해 마다가스카르로 데려와 외국의 노예 수요를 충족시켰다고도 한다.[63] 수년간의 혼인이 말라가시족을 형성했으며, 이들은 주로 말라가시어를 사용하며, 말라가시어는 반투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로네시아어이다.[64] 초기 프로토-동남부 말라가시어에는 많은 (프로토-)스와힐리어 차용어가 존재한다.[65] 이러한 기층 언어는 특히 가사 및 농업 어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예: 스와힐리어 ''ng'ombe''에서 유래된 ''omby'' 또는 ''aombe'', "소고기"; 스와힐리어 ''kitunguu''에서 유래된 ''tongolo'' "양파"; 말라가시어 ''nongo'' "항아리"는 스와힐리어 ''nunggu''에서 유래[20]).
마다가스카르의 최초 거주민은 아웃리거 카누의 존재와 언어학 연구를 통해 동남아시아 도서부에서 건너왔다는 것이 확실시되었지만, 2005년에 매튜 할스가 발표한 DNA 연구에 의해 1세기 전후, 보르네오섬에서 항해 카누로 인도양을 횡단하여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한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그 후,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보르네오계(말레이-폴리네시아계) 사람들은 혼혈하여 유럽인 도달 이전에는 그 DNA상의 비율이 반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르네오계 DNA는 보르네오와 마다가스카르섬 사이의 인도양 연안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므로, 보르네오 사람들은 직접 마다가스카르섬까지 항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두 섬 사이는 8300km나 떨어져 있지만, 적도 무풍대를 통과할 필요가 없을 뿐더러, 항상 무역풍이 순풍이 되는 항해이므로, 당시 동남아시아 도서부 해민의 기술 수준이라면 충분히 현실적인 항해이다. 보르네오섬에서 자바해를 건너 수마트라섬이나 자바섬에서 보급을 한다면 난이도는 더욱 낮아진다. 자바섬에서 마다가스카르섬까지 6000km라고 해도 평균 시속 5노트로 범주할 수 있다면 30일 이내에 도달할 수 있다.
문헌에 마다가스카르의 존재가 처음 등장한 것은 그리스의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한 메누티아스라는 섬에 대한 기술이라고 한다. 이 메누티아스가 마다가스카르라는 것이 유력하다(이론도 존재한다).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 문헌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동방견문록』에는 큰 섬에 대한 기재가 있지만, 마르코 폴로는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지방과 착각하여 마다가스카르라고 잘못 소개했다. 이것이 마다가스카르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한편, 아랍 세계에서는 마다가스카르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아랍 지도에서 마다가스카르는 '''Gezirat Al-Komor'''('''달의 섬'''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Komor의 이름은 마다가스카르 북서쪽에 있는 코모로 제도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또한 아랍인은 9세기 무렵부터 마다가스카르에 진출했다. 더 나아가 아랍 상인들은 동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흑인들을 노예로 마다가스카르에 데려왔다. 이로 인해 연안부의 여러 부족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마다가스카르섬 북부에는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인도양 교역과 함께 동아프리카의 연안 교역으로 번성했던 항만 유적이 있으며, 연안 교역의 수출품으로서 녹니석으로 만들어진 용기가 생산되었음이 탄자니아의 킬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도 판명되었다.
3. 봉건 시대와 왕국들의 등장 (1500년 ~ 1895년)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마다가스카르는 봉건 시대와 여러 왕국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새로운 이민자들의 유입은 기술, 문화, 정치적 변화를 가져와 16세기 마다가스카르에 격변을 일으켰다. 해안 지역에는 안타카라나 왕국, 보이나, 메나베, 베조 왕국 등이, 남부에는 마하팔리와 안탄드로이 왕국이, 동해안에는 안테사카, 안타바호아카, 안테모로, 안타날라, 베치미사라카 왕국이 성립되었다.[44][57][58] 내륙에서는 메리나, 베칠레오, 베자노자노, 시하나카, 치미헤티, 바라 왕국이 탄생했다.[59][60]
이러한 왕국들은 대부분 공통의 언어, 관습, 전통, 종교 및 경제를 보존했다. 섬 서부 씨족장들은 인도양 인접국과의 무역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는데, 처음에는 아랍, 페르시아, 소말리아 상인들과, 그 다음에는 유럽 노예 상인들과의 무역을 통해서였다.[72] 이로 인해 마로세라나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신성한 지위를 얻고 새로운 귀족과 장인 계급을 창출했다.[73] 중세 시대에는 베치미사라카족 동맹과 사칼라바 추장령 등 대규모 추장령들이 섬의 상당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칼라바의 영향력은 현재 안치라나나, 마하장가, 툴리아라 주에 걸쳐 확장되었다.
안드리안암포이니메리나(1785–1810)와 그의 아들 라다마 1세(1810–1828)는 마다가스카르의 거의 모든 지역을 메리나의 지배하에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74] 안드리아남포이니메리나는 외교, 정략결혼, 군사 작전을 통해 분열된 메리나 왕국을 재통일하고 법률을 성문화했으며, 수도 안타나나리보 주변 경작지 확장을 위해 제방과 참호를 건설하여 기근을 종식시켰다.[74] 라다마 1세는 영국과 노예 무역을 금지하고 개신교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조약을 체결했다.[74]
라나발로나 1세는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외국 세력에 맞서 마다가스카르의 문화적, 정치적 주권을 지키려 했다. 여왕은 영국과 맺은 조약을 폐기하고, 1835년에는 기독교를 금지하는 왕령을 발표, 영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기독교 개종자들을 박해했다.[74]
라다마 2세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무역을 재개하고 기독교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다시 초청했으며, 라다마 1세의 개혁 대부분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의 자유주의 정책으로 귀족들이 분노하여 재상 라이니보니나히트리니오니가 쿠데타를 일으켜 라다마 2세를 교살했다.[74] 라소헤리나는 고난 재판을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조건으로 왕위를 계승했다.[75] 라나발로나 2세는 성공회를 국교로 지정하고, 전통적인 왕실 우상인 ''삼피''를 불태웠다.[77] 라나발로나 3세는 1883년 즉위하여 프랑스의 위협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78]
마다가스카르 왕국은 19세기 동안 지역 군주제에서 현대적인 국가로 변모했다. 라다마 1세는 소라베 문자를 대체하는 21개 문자로 구성된 새로운 말라가시 라틴 문자를 제정했다.[79] 1830년에는 성경이 이 문자로 쓰인 최초의 책이 되었다.[79] 미국과 마다가스카르는 1867년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1881년 평화, 우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80][81] 라나발로나 1세 통치 기간에는 초기 산업화 시도가 이루어졌고, 1864년에는 최초의 병원과 의과대학이 문을 열었으며, 1875년부터는 영어 과학 저널이 발간되었다.[74] 1894년에는 2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왕국 학교에 다녔다.[74]
3. 1. 부족 간 경쟁과 왕국 형성
새로운 이민자들의 유입은 기술, 문화,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16세기 마다가스카르 봉건 시대의 격변을 야기했다. 해안 지역에서는 안타카라나 왕국, 보이나, 메나베, 베조 왕국, 남부에는 마하팔리와 안탄드로이 왕국, 동해안에는 안테사카, 안타바호아카, 안테모로, 안타날라, 베치미사라카 왕국이 성립되었다.[44][57][58]내륙에서는 해안의 네오-베조 씨족이 "호바(Hova)"라고 부르는 중앙 고원의 다양한 네오-바짐바 씨족 간의 패권 다툼으로 인해 메리나, 베칠레오, 베자노자노, 시하나카, 치미헤티, 바라 왕국이 탄생했다.[59][60]
이러한 왕국/부족의 탄생은 본질적으로 바호아카 엔타올로(Vahoaka Ntaolo) 고대 세계의 정치 구조를 변화시켰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통 언어, 관습, 전통, 종교 및 경제가 보존되었다.
3. 2. 사칼라바 왕국의 부상과 쇠퇴
섬 서부 씨족장들은 인도양 인접국과의 무역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마다가스카르를 동아프리카, 중동, 인도로 연결해주는 아랍, 페르시아 및 소말리아 상인들과의 무역을 통해, 그 다음에는 유럽 노예 상인들과의 무역을 통해서였다.[72] 마다가스카르에서 무역을 통해 창출된 부는 마로세라나로 알려진 강력한 지역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군주들은 영토 내의 신하들의 문화적 전통을 받아들여 왕국을 확장했다. 그들은 신성한 지위를 얻었고, 새로운 귀족과 장인 계급이 창출되었다.[73] 마다가스카르는 소팔라, 킬와, 몸바사 및 잔지바르와 같은 다른 스와힐리 해안 도시 국가들을 위한 접촉 항구 역할을 했다. 중세 시대에 이르러 섬의 상당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대규모 추장령들이 등장했다. 이들 중에는 동부 해안의 베치미사라카족 동맹과 메나베 (현재 모론다바 마을을 중심으로 함) 및 보이나 (현재 마하장가주를 중심으로 함)의 사칼라바 추장령이 있었다. 사칼라바의 영향력은 현재 안치라나나, 마하장가 및 툴리아라 주에 걸쳐 확장되었다.
현지 전통에 따르면, 사칼라바 왕국의 창시자는 피헤레나나 (현재 툴리아라) 출신의 마로세라냐 (또는 마로세라나나, "많은 항구를 소유한 자들") 왕자들이었다. 그들은 마하팔리 지역의 남부 왕자들을 시작으로 이웃 왕자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사칼라바 지배의 진정한 창시자는 안드리미사라였다. 그의 아들 안드리안다히포치 (c. 1610–1658)는 그 후 그의 권위를 북쪽으로, 망고키 강을 넘어 확장했다. 그의 두 아들, 안드리마네티아리보와 안드리만디소아리보는 송가이 지역(현재 마하장가)까지 더 나아가 획득을 확장했다. 그 무렵, 제국의 통일성이 분열되기 시작하여 남부 왕국 (메나베)과 북부 왕국 (보이나)으로 분열되었다. 보이나 왕자들이 극북, 안타카라나 지역으로 영향력을 계속 확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 분열이 일어났다.
3. 3. 메리나 왕국의 통일과 근대화
안드리안암포이니메리나(1785–1810)와 그의 아들 라다마 1세(1810–1828)는 마다가스카르의 거의 모든 지역을 메리나의 지배하에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74] 이들은 적어도 16세기부터 마다가스카르 중부 고원 지대인 이메리나를 통치한 고대 메리나 왕족의 후손이었다.[74]
안드리아남포이니메리나는 외교, 정략결혼, 군사 작전을 통해 분열된 메리나 왕국을 재통일했다.[74] 그는 법률을 성문화하고, 수도 안타나나리보 주변 경작지 확장을 위해 제방과 참호를 건설하여 기근을 종식시켰다.[74] 그는 "Ny ranomasina no valapariako" (바다는 내 논의 경계)라고 선언했으며, 1810년 사망할 무렵에는 바라 부족과 베칠레오 고원 부족을 정복하여 왕국을 섬의 해안까지 확장할 기반을 마련했다.[74]
라다마 1세는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영국이 인도양 무역로를 장악하려던 시기에 왕위를 계승했다.[74] 영국은 모리셔스를 해군 기지로 유지하며, 모리셔스 총독은 마다가스카르를 프랑스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라다마 1세를 마다가스카르 왕으로 인정했다.[74]
라다마 1세는 영국과 노예 무역을 금지하고 개신교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조약을 체결했다.[74] 그 대가로 마다가스카르는 매년 금 1천 달러, 은 1천 달러, 화약, 부싯돌, 머스킷총, 400벌의 잉여 영국 육군 군복을 제공받았다.[74] 모리셔스 총독은 군사 고문관도 파견했다.[74] 1824년, 베치미사라카족을 물리친 라다마 1세는 "오늘날, 이 섬 전체가 내 것이다! 마다가스카르에는 단 하나의 주인이 있다"라고 선언했다.[74] 그는 1828년에 사망했다.[74]
라나발로나 1세는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외국 세력에 맞서 마다가스카르의 문화적, 정치적 주권을 지키려 했다.[74] 여왕은 영국과 맺은 조약을 폐기하고, 1835년에는 기독교를 금지하는 왕령을 발표, 영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기독교 개종자들을 박해했다.[74]
라다마 2세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무역을 재개하고, 기독교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다시 초청했으며, 라다마 1세의 개혁 대부분을 부활시켰다.[74] 그러나 그의 자유주의 정책은 귀족들을 분노하게 했고, 재상 라이니보니나히트리니오니는 쿠데타를 일으켜 라다마 2세를 교살했다.[74]
라소헤리나는 고난 재판을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조건으로 왕위를 계승했다.[75] 1863년 즉위하여 1868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75] 그녀는 런던과 파리에 대사를 파견하고 일요 시장을 금지했으며, 영국, 미국,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했다.[76] 그녀는 국무총리 라이니보니나히트리니오니와 결혼했으나, 여론의 반발로 그는 사임하고 라이닐라리아보니가 국무총리가 되었다.[76]
라나발로나 2세는 성공회를 국교로 지정하고, 전통적인 왕실 우상인 ''삼피''를 불태웠다.[77]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교회와 학교를 짓기 위해 대거 도착했다.[77]
라나발로나 3세는 1883년 즉위하여 프랑스의 위협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78]
마다가스카르 왕국은 19세기 동안 지역 군주제에서 현대적인 국가로 변모했다.[74] 라다마 1세는 소라베 문자를 대체하는 21개 문자로 구성된 새로운 말라가시 라틴 문자를 제정했다.[79] 1830년에는 성경이 이 문자로 쓰인 최초의 책이 되었다.[79] 미국과 마다가스카르는 1867년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1881년 평화, 우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80][81] 라나발로나 1세 통치 기간에는 초기 산업화 시도가 이루어졌고, 1864년에는 최초의 병원과 의과대학이 문을 열었으며, 1875년부터는 영어 과학 저널이 발간되었다.[74] 1894년에는 2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왕국 학교에 다녔다.[74]
18세기 말, 안드리안암포이니메리나 왕은 메리나족을 통일하고 사칼라바족을 물리치고 베칠레우 왕국을 정복하여 19세기 메리나 왕국에 의한 마다가스카르 광역 지배의 기반을 구축했다. 19세기 초, 라다마 1세는 노예 무역 폐지, 학교 설립, 알파벳에 의한 마다가스카르어 표기 도입 등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1828년 사망하고, 라나발로나 1세는 유럽 적대 정책으로 전환하여 1835년 기독교 포교를 금지했다. 1861년 라다마 2세는 다시 유럽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1863년 암살되었다. 라소헤리나가 즉위하고, 1868년 사망 후 라나발로나 2세가 즉위하여 행정 개혁에 힘썼지만, 메리나 왕국은 쇠퇴해 갔다.
4. 프랑스 식민 통치 (1895년 ~ 1960년)
1500년 8월 10일, 포르투갈인 디에고 디아스가 마다가스카르를 "발견"하고 성 로렌스 축일이기 때문에 섬을 '''성 로렌스 섬'''으로 명명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기독교 포교를 위해 선교사를 파견했지만 실패했고, 영국, 네덜란드도 정착을 시도했으나 원주민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1643년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 섬 남단의 톨라냐로(포르 도팽)에 요새를 건설했다. 1673년 지역 부족의 반란으로 철수했지만, 프랑스는 계속 통치권을 주장했다. 18세기에는 안치라나나 근교에 프랑스인 해적 미송이 리바타리아라는 자유의 나라를 설립했다는 전설도 있다.
1890년 영국은 잔지바르 술탄국(탄자니아의 일부)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프랑스 말라가시 보호령을 수락했다.[84] 프랑스는 처음에는 섬의 경제와 외교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 보호령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메날람바 반란과 1896년 조셉 갈리에니 장군의 도착으로 섬은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로 식민지화되고 여왕은 알제리로 망명했다. 1904년-1905년에는 다양한 부족과 부족 지도자들의 대규모 봉기(1904–1905년 마다가스카르 봉기)가 있었고, 전직 프랑스 병장인 코타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85]
1960년 3월 26일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완전한 독립에 동의했고,[137] 같은 해 6월 26일, 마다가스카르는 독립 국가가 되었으며 필리베르트 치라나나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4. 1. 프랑스의 침략과 식민지화

람베르트 헌장 취소에 분노한 프랑스는 1883년 타마타브를 점령했다. 이는 제1차 프랑코-호바 전쟁으로 알려졌으며, '호바'는 메리나 귀족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마다가스카르는 북부 해안의 안치라나나(디에고 수아레즈)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조셉-프랑수아 람베르트의 상속자에게 을 지불했다.[84] 유럽 외교관들은 잔지바르 술탄국 통제를 위해 영국이 헬리고랜드 섬에 대한 권리를 독일 제국에 양도하고 프랑스를 위해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모든 영향력 주장을 포기하는 협정을 마련했고, 이는 마다가스카르의 정치적 독립 종말을 의미했다.
1895년, 프랑스 기동 부대가 마하장가(마준가)에 상륙하여 베치부카 강을 따라 수도 안타나나리보로 진격하여 도시 방어군을 기습했다(그들은 훨씬 더 가까운 동쪽 해안으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했다). 제2차 프랑코-호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20명의 프랑스 군인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6,000명이 말라리아 및 기타 질병으로 사망했다. 1896년 8월 6일,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마다가스카르를 식민지로 선언했다(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103년 된 메리나 왕가는 왕족이 알제리로 추방되면서 멸망했다.[85]
식민지 지배 초기에는 메리나족 등의 반란이 있었지만 프랑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프랑스는 식민 통치 기간 동안 경제 개발을 추진했으나, 마다가스카르인들은 이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4. 2. 제2차 세계 대전과 마다가스카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말라가시 군대는 프랑스, 모로코, 시리아에서 싸웠다.[85] 나치 독일은 최종 해결이 시행되기 전, 유럽계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고려했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된 후, 비시 정부는 1942년까지 마다가스카르를 통치했으며, 그해 영국과 영연방 군대가 마다가스카르 전투에서 전략적 요충지인 이 섬을 점령했다. 1943년 영국은 이 섬의 통제권을 자유 프랑스군에게 넘겨주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무역량이 급감하여 마다가스카르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1940년 프랑스 본국이 나치 독일에 점령되자, 당시 마다가스카르 총독은 비시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실론 해전에서 영국 해군을 격파한 일본군이 마다가스카르에 무혈 진출하여 식민주의를 타도하고, 더 나아가 아프리카 대륙으로 상륙할 것을 우려한 영국은 1942년에 마다가스카르에 파병하여 해안 기지를 점령했다 (마다가스카르 전투).
이후, 독일로부터 마다가스카르 비시 정부군의 원호 요청을 받은 일본 해군 함정이 영국 해군 함정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그 후 정찰병이 상륙했지만, 전선 확대를 원하지 않았던 일본군에 의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군은 안타나나리보 점령도 실시했지만, 일본군에 의한 상륙 및 해방의 가능성이 없어지면서 1943년에 자유 프랑스 정부에게 마다가스카르 전역을 반환했다.
4. 3.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봉기
1948년, 프랑스의 명성이 쇠퇴한 가운데,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 소속 폴 라마디에 총리가 이끄는 프랑스 정부는 마다가스카르 봉기를 진압했다.[131][132][133][134][135][136]이후 1956년 프랑스 정부는 해외 개혁법에 따라 개혁된 기관을 설립했고, 마다가스카르는 평화적으로 독립을 향해 나아갔다. 1958년 10월 14일, 말라가시 공화국은 프랑스 공동체의 자치국이 되었다. 1960년 3월 26일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완전한 독립에 동의했다.[137]
5. 독립 이후의 마다가스카르 (1960년 ~ 현재)
1960년 6월 26일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로부터 정식 독립하여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필리베르 치라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92]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 대한 의존은 계속되었고 경제는 침체되었다.
1972년 치라나나의 3선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가브리엘 라마난초아 장군에게 전권이 위임되었다.[139] 1975년 디디에 라치라카 해군 중장이 대통령으로 취임, 국명을 마다가스카르 민주 공화국으로 변경하고 사회주의화를 추진했다.[94] 1980년대 들어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 프랑스와의 관계를 회복했으나, 라치라카의 집권은 계속되었다.[51]
1993년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알베르 자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138] 1996년 탄핵당했다.[143]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라치라카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어 광범위한 민영화를 추진했다.[139]
2001년 대통령 선거는 마르크 라발로마나나와 라치라카 간의 격렬한 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라발로마나나가 대통령으로 선언되었고, 라치라카는 프랑스로 망명했다.[138]
2009년 안드리 라조엘리나는 시위를 통해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을 사임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106][107] 2013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에리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가 당선되었고,[111][112] 201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라조엘리나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113][114][115]
2019년에는 홍역 유행으로 1,200명이 사망했고,[116] 2021년에는 40년 만에 최악의 가뭄으로 백만 명 이상이 식량 불안에 시달렸다.[117][118] 2023년 11월, 라조엘리나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나, 투표율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119]
5. 1. 제1공화국 (1960년 ~ 1972년)
1960년 6월 26일,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로부터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오랜 기간 동안의 가혹한 프랑스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다. 필리베르 치라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92] 그러나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 대한 의존은 계속되었고 경제는 침체되었다. 치라나나의 통치는 프랑스 정착민들이 여전히 권력의 위치에 있는 상태로 지속되었다. 프랑스의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마다가스카르는 공산주의로의 움직임에 강력하게 저항했다.[138]1972년 치라나나가 대통령직에 3선되자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특히 같은 해 5월 13일에는 안타나나리보에서의 폭동이 각지로 번져, 치라나나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럼에도 폭동은 수습되지 않았고, 5월 18일 치라나나는 정부를 해산하고, 전권을 육군 가브리엘 라마난초아 장군에게 위임했다.[139] 라마난초아 장군의 임시정부는 이전의 친서방 정책을 뒤집고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선호했다.[94]
5. 2. 제2공화국 (1972년 ~ 1991년)
1972년 필리베르 치라나나 대통령이 3선되자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고, 5월 13일 안타나나리보에서의 폭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치라나나는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폭동은 진정되지 않았고, 5월 18일 정부를 해산하고 가브리엘 라마난초아 육군 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했다.[94]
라마난초아 장군은 장교와 노동자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여 국민투표에서 신임을 얻었다. 새 정부는 사회주의화를 추진했지만, 부족 간 대립으로 국내 정치는 안정되지 못하고 각료 암살 등이 발생했다. 1975년에는 전 외무장관이었던 해군 중장 디디에 라치라카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국명을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에서 마다가스카르 민주 공화국으로 변경하고, 외국 자본을 접수하여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화를 추진했다.[94]
라치라카는 7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경제의 대부분을 국유화하고 프랑스와의 관계를 단절했다.[140] 이러한 정책은 프랑스 이민자들이 마다가스카르를 떠나게 하여 기술 부족을 야기했고, 독립 이후 시작된 경제 쇠퇴를 가속화했다.[93] 1977년 선거에서 라치라카의 정당인 마다가스카르 혁명 전위(AREMA)가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면서 그의 임기는 연장되었다.[93]
1980년대에 마다가스카르는 시장 경제를 선호하며 공산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의 관계를 회복했지만, 라치라카는 여전히 권력을 유지했다.[51]
1989년 3월, 라치라카는 재선되어 7년의 임기를 얻었지만, 이 선거는 부정 의혹이 제기되어 폭동이 발생했다. 1991년에는 정당 결성의 자유화를 계기로 헌법 개정 요구와 대통령 사임을 요구하는 야당 연합의 집회가 빈번하게 열렸다.[94]
5. 3. 제3공화국 (1991년 ~ 2002년)
1993년 최초의 다당제 선거가 치러져 알베르 자피가 디디에 라치라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38] 자피는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했지만, 국제 통화 기금(IMF)과 세계은행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마다가스카르는 IMF와 세계은행의 지침을 시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41]자피 대통령은 새 헌법이 대통령 권한을 제한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행정부 권한 확대를 추진했다. 이로 인해 당시 총리였던 프란시스쿠 라보니가 이끄는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142] 자피는 결국 원하던 권력을 얻었지만, 1996년 특정 법률 공포를 거부하여 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의회에 의해 탄핵당했다.[143]
이어진 선거에서 투표율은 50% 미만이었고, 예상과 달리 디디에 라치라카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39] 그는 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했고, IMF와 세계은행의 영향으로 광범위한 민영화가 진행되었다.
라치라카에 대한 반대는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야당은 2000년 지방 선거를 보이콧했고, 2001년 대통령 선거는 더 큰 논란을 일으켰다. 야당 후보 마르크 라발로마나나는 1차 투표(12월) 후 승리를 주장했지만, 현직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2002년 초 두 진영의 지지자들이 거리로 나와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라발로마나나는 선거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4월 재검표 후, 헌법재판소는 라발로마나나를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라치라카는 결과에 계속 이의를 제기했지만, 라발로마나나는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고, 라치라카는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그러나 마다가스카르에서 라치라카를 지지하는 세력은 계속 활동했다.[138]
5. 4. 혼란기와 현재
2009년, 안드리 라조엘리나는 폭력으로 변질된 시위를 주도하여 마크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주요 반대자로 떠올랐다.[106][107] 2009년 3월 10일, 군 지도부는 국방부 장관에게 사임을 강요하고 반대파에게 72시간의 대화 시간을 주어 위기 해결책을 찾도록 했다. 군은 국민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 의무이기에 대통령의 명령을 더 이상 실행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110] 3월 16일, 군은 대통령궁을 점령했고, 라발로마나나는 사임을 제출했다. 군은 권력을 라조엘리나에게 넘겼다.2013년 12월, 연기되었던 대통령 선거 2차 투표가 실시되었고, 2014년 1월에 에리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111][112] 그는 2009년 쿠데타를 이끌었던 라조엘리나의 지원을 받았다.
2018년 대통령 선거에서 라조엘리나가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113][114][115] 라발로마나나는 부정 혐의를 제기하며 결과에 불복했다. 2019년 1월, 고등 헌법 재판소는 라조엘리나를 최종 승리자로 선언했다.
2019년에는 홍역 유행으로 1,200명이 사망했고,[116] 2021년에는 40년 만에 최악의 가뭄으로 인해 마다가스카르 남부에서 백만 명 이상이 식량 불안에 시달렸다.[117][118] 2023년 11월, 라조엘리나는 대통령 선거에서 58.95%의 득표율로 재선되었으나, 투표율은 46.36%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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