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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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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홍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조조를 섬기며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젊은 시절 조조가 반동탁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여하여 형양 전투에서 조조를 위기에서 구출하고, 양주에서 군사를 모집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연주에서 장막의 반란을 진압하고, 관도 전투, 형주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특히 하변 전투에서 조휴의 조언을 받아 장비를 격퇴했다. 조비가 즉위한 후에는 재산을 잃고 어려움을 겪었으나, 조예 시대에 다시 중용되어 후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유했지만 인색했으며, 《삼국지연의》와 게임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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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홍 청나라 삽화
청나라 시대의 조홍 그림
이름조홍
로마자 표기Jo Hong
자렴
시호공후
출생 및 사망
출생지예주패국 초현
사망년도232년
관직
표기장군220년 ~ 220년대 초
후장군227년 ~ 220년대 후반
표기장군220년대 후반 ~ 232년
작위
가족 관계
자녀조부
조진
순찬의 부인
소속
주요 군주조조, 조비, 조예
참여 전투
주요 전투동탁 토벌전
복양 전투
관도 대전
한중 공방전

2. 생애

조홍은 조조의 재종사촌으로, 젊은 시절 백부 조정(曹鼎)이 상서령을 지낸 연줄로 기춘 현장(縣長)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2] 190년 조조가 동탁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 조홍은 조조에게 합류하여 장교로 복무했다. 형양 전투에서 조조가 서영에게 패하고 말을 잃자, 조홍은 자신의 말을 내주며 "세상에는 조홍이 없어도 되지만, 당신이 없이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조홍은 조조를 따라 걸어서 변강의 강둑까지 호위했고, 강이 깊어 건널 수 없게 되자 배를 찾아 조조와 함께 초현으로 돌아갔다.[3]

조홍은 양주 자사 진온과 친분이 있어, 그에게 병력을 요청해 2,000명의 정예 병사를 얻었다. 이후 단양군 태수 주흔의 도움으로 약 1,000명의 병사를 더 모집, 총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롱캉에서 조조와 합류하여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었다.[4][5]

194년, 연주에서 장막여포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홍은 본군에 앞서 동평·범을 점령하고 식량을 보급했다. 조조가 여포를 패주시킨 후에는 동아에 근거하여 제음군, 산양군, 중모 등 10개 현 이상을 공격하여 함락, 응양 교위와 양무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196년, 조조는 헌제를 맞이하려 조홍에게 병력 지휘를 맡겼으나, 동승원술군의 장노와 함께 요새를 지켜 실패했다. 이후 조조가 동승과 화해하고 허도에 헌제를 맞이하자, 조홍은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200년, 관도 전투에서 서황과 함께 적의 축비를 격파했다.[36] 조조가 오소를 공격할 때 관도를 지켜 장합·고람의 공격을 막았고, 이들이 항복하려 하자 의심했지만 순유의 조언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형주유표를 정벌, 무음·엽·저양·박망 등지에서 유표군을 격파하고 려봉 장군과 국명정후에 봉해졌다. 조조의 각지 정벌에 따라 도호장군이 되었다.

217년, 유비군의 장비·마초·오란·뇌동 등이 하변으로 쳐들어오자, 조휴의 진언에 따라 오란을 격파하고 장비를 패주시켰다.[38] 조홍은 대연회를 열었으나, 양부가 여인의 육체를 드러내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책망하자 즉시 중단했다.

220년, 조비(문제) 즉위 후 위장군, 표기장군으로 승진, 야왕후에 봉해지고 총 2,100호의 영읍과 특진 대우를 받았다. 조홍은 자산가였지만 인색했고, 식객 중에는 불법을 저지르는 자도 많았다. 조비는 과거 차용을 거절당한 일로 조홍을 원망, 식객의 죄를 연좌시켜 사형에 처하려 했다. 변태후의 중재로 사형은 면했지만 작위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226년, 조예(명제) 즉위 후 후장군과 낙성후로 복권, 1,000호의 영읍을 받고 다시 표기장군에 임명되었다. 232년 사망 후 '''공후'''로 시호되었고, 아들 조복이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조조와의 만남

190년(초평 원년), 조조가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여 형양에서 동탁군의 서영에게 패하고 추격당했다. 조조는 화살에 맞고 말까지 잃어 매우 위급했는데, 이때 조홍이 자신의 말을 내주었다. 조조가 사양하자 조홍은 "천하에 조홍은 없어도 되지만 조조는 없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그를 구했다.[39]

조홍은 걸어서 변수에 다다랐으나 물이 깊어 건널 수 없었다. 이에 배를 찾아다닌 끝에 배를 구해 조조와 함께 초현으로 돌아왔다.[3] 병사를 많이 잃은 조조는 하후돈과 조홍을 양주로 보내 모병하게 했다. 조홍은 평소 친분이 있던 양주 자사 진온과 단양태수 주흔의 도움으로 4천여 명을 모아 용항에서 조조와 합류하였다.[4][5]

조홍은 큰아버지인 조정(曹鼎)이 상서령을 지낸 연줄로 기춘현장을 지냈다.[2][39]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190년(초평 원년), 조조가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형양(滎陽, 지금의 정저우시 북부)으로 진격했다가 서영에게 패하고 추격당했다. 조조가 화살에 맞고 까지 잃어 매우 위급해지자, 조홍은 자신이 타던 말을 내주었다. 조조가 사양하자 조홍은 '천하에 조홍은 없어도 되지만 조조는 없으면 안 된다'고 답하고는 걸어서 변수(汴水)에 다다랐다. 이 깊어 건널 수 없었기에 조홍이 를 찾아다녔고, 결국 배를 구해 함께 초현으로 돌아왔다.[39] 병사를 많이 잃었기에 하후돈과 더불어 양주로 모병하러 갔다. 자사 진온과는 평소 친했기에, 진온과 단양태수 주흔의 도움으로 사천여 명을 모아서 용항(龍亢)에 있던 조조와 합류하였다.[4][5]

194년(흥평 원년), 조조가 서주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하느라 연주를 비운 사이, 장막이 여포를 불러들여 연주를 장악하였다. 조홍은 선두에 서서 먼저 동평(東平)을 점거하였다. 마침 대기근이 들어 동평과 범현(范縣)에서 식량을 거두어 군에 공급했다. 이후 제음군, 산양군, 하남윤의 10여 개 들을 공략하는 데 공을 세워 응양교위(鷹揚校尉)를 거쳐 양무중랑장(揚武中郞將)으로 승진했다.[6]

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헌제를 영접하고자 조홍을 서쪽으로 보냈지만, 위장군 동승원술의 부하 장노가 험지를 막아서는 바람에 나아가지 못했다.[7] 마침내 허로 천도하면서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8] 197년, 별도로 형주유표군, 장수군과 싸워 무음(舞陰),[40] 섭(葉), 자양(堵陽, 지금의 허난성 팡청 현),[41] 박망(博望) 등 남양군 북부 일대에서 고전하였다. 여봉장군(厲鋒將軍)에 임명되고 국명정후(國明亭侯)에 봉해졌다.[10]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官渡, 하남윤 중모현 소재)에서 대치하였다. 유벽, 유비 등이 여남군 은강현(㶏彊縣) 등 허도 근방을 교란하기에 서황과 같이 가 축비(祝臂)를 무찔렀다.[42] 10월 (음력), 악전고투하던 조조가 귀순해온 허유의 계책에 따라 치중이 있는 오소(烏巢, 진류군 산조현 소재)를 급습하면서 조홍은 본영을 지키도록 했다. 조조와 순우경이 싸우는 동안 원소가 보내온 장합고람을 잘 방어했다. 끝내 순우경이 궤멸되자 장합 등은 투항하였다. 처음에는 의심하여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는데 순유가 안심시켰다.[43] 204년 업 전투에 참전하였다. 또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도호장군(都護―)이 되었다.[14]

217년 장비, 마초, 오란, 뇌동[44]무도군 하변현(下辯縣, 지금의 간쑤성 청 현)으로 왔다. 이에 장기,[45] 조휴, 신비,[46] 조진[47] 등을 데리고 맞붙었다. 218년 장비는 오란과 따로 기동하며 조홍군의 뒤를 끊는 척 시위하였다. 조휴의 진언으로 이것이 허장성세임을 간파하고 바로 오란을 습격하여 쳐부수고 그 부장 임기(任夔) 등을 참했다.[48] 3월 (음력) 장비와 마초는 한중 전선으로 달아났고, 음평 강단(強端)이 오란의 을 전해왔다.[15][16]

승전 후 크게 연회를 열었다. 얇은 비단을 입은 무희들이 을 밟으며 을 추니 모두가 웃고 즐겼다. 양부가 소리 높여 꾸짖기를 “남녀가 유별하고 나라에 절도가 있는 인데 어찌 사람 많은 자리에 나체 여인의 형체가 보인단 말인가! 걸주도 이보다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오!”라며 분연히 소매를 떨치고 나가겠다 하였다. 조홍이 악무를 끊고 양부를 다시 앉히니 장내가 숙연해졌다.[49]

2. 3. 조비와의 갈등과 불우한 말년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자 조홍은 위장군에 임명된 후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작위는 야왕후에서 도양후로 변경되었고, 식읍은 1,000호가 추가되어 총 2,100호가 되었으며, 특진의 지위에 올랐다.[18]

조홍은 부유했지만 재산에 인색했다. 조조사공이었을 때, 관리들의 재산 기록을 조사하게 했는데, 조조는 자신의 재산이 조홍의 재산과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 "내 재산이 어찌 자렴(조홍의 자)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19]

과거 조비가 젊었을 때 조홍에게 돈을 빌리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이후 조비가 조조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 비단 100필을 요구했으나 또 거절당했다.[20] 조비는 이 일로 조홍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았다. 조홍의 시종들이 범죄를 저지르자, 조비는 이를 핑계로 조홍을 투옥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다. 신하들이 조홍을 구명하려 했으나 조비는 듣지 않았다.[21]

조홍은 이전에 조진에게도 불만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224년, 조비는 오질에게 조진을 위한 연회를 열도록 했다. 연회에서 오질은 배우들에게 조진과 주삭을 조롱하는 연극을 하게 했는데, 조진은 뚱뚱하고 주삭은 말랐기 때문이다. 조진은 분노했고, 조홍과 왕충은 오질을 부추기며 조진을 더욱 조롱했다. 조진은 칼을 뽑아 그들을 노려보며 "나를 조롱하는 자는 누구든 죽이겠다."라고 말했다.[22] 조홍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조진은 조비에게 조홍을 처형하면 불쾌한 말을 할 것이라고 했지만, 조비는 직접 처리하겠다고 답했다.[23]

변황후는 조비에게 "자렴(조홍)이 량과 패에서 한 일이 없었다면 너는 오늘날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꾸짖고, 곽여왕에게도 "만약 오늘 조홍이 죽는다면, 내일 황제가 너를 황후 자리에서 내쫓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후는 눈물을 흘리며 조비에게 조홍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조비는 조홍을 살려주는 대신 관직과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변황후가 다시 개입하여 조비는 재산을 돌려주었지만, 이전 지위로 복귀시키지는 않았다.[24][25] 조홍은 사면 소식에 기뻐하며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후회하고 남은 생을 집안에 갇혀 살겠다고 말했다.[26]

조홍의 강등과 실추에 많은 사람들이 분개했다. 226년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즉위하면서 조홍은 후장군, 낙성후로 복권되고 식읍 1,000호를 받았다. 이후 다시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27]

232년 조홍은 사망했고, 시호는 "겸손한 후작"을 의미하는 공후(恭侯)를 받았다.[28] 조홍의 작위는 아들 조복이 계승했고, 다른 아들 조진은 이미 이전에 후작으로 봉해졌다.[29]

3. 성격 및 일화

조홍은 젊었을 때 백부가 상서령이었던 연유로 기춘 현장으로 추천되었다.[33] 초평 원년, 조조가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킬 때 하후돈 등과 함께 무장으로 참여했다.

조조가 형양 전투에서 서영에게 패하고 말을 잃자, 조홍은 자신의 말을 양보하려 했다.[34] 조조가 사양했지만, 조홍은 "천하에 조홍은 없어도 되지만, 조조는 없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말을 내주었고, 자신은 걸어서 조조를 따랐다. 변수에 이르러 강물이 깊어 건널 수 없게 되자, 조홍은 물가를 따라 걸으며 배를 찾아 조조를 건너게 하고 초현까지 함께 피신했다.[35]

흥평 원년 연주에서 장막여포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홍은 동평, 범을 점령하여 본군에 식량을 보급했다. 조조가 여포를 격파한 후에는 동아에 근거지를 두고 제음, 산양, 중모, 양무, 경, 밀 등 10여 개 현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이 공으로 응양교위에 임명되었고, 양무중랑장으로 승진했다.

건안 원년 정월, 조조는 장안에서 탈출해 온 헌제를 맞이하려 했고, 조홍에게 병력을 지휘하여 맞이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동승원술군의 장노와 함께 요새를 지키며 조홍의 진군을 막아 실패했다. 이후 조조가 동승과 화해하고 9월에 허도에 헌제를 맞이했다. 조홍은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건안 5년 관도 대전에서 서황과 함께 적의 군량 수송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조조가 오소를 공격할 때 관도를 지키며, 원소군의 장합, 고람 등의 공격을 막아냈다. 장합 등이 항복을 청하자 그 의도를 의심했지만, 순유의 조언에 따라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 후, 조홍은 별군을 지휘하여 형주유표를 정벌, 무음, 엽, 저양, 박망 등지에서 유표군의 별장을 격파했다.[37] 이 공으로 여봉 장군으로 승진하여 국명정후에 봉해졌다. 이후 조조의 각지 정벌에 따라 도호장군에 임명되었다.

건안 20년 장로를 항복시켜 한중을 평정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건안 22년 겨울, 유비군의 장비, 마초, 오란, 뇌동 등이 하변으로 쳐들어오자 조조는 조홍에게 이를 막게 했다. 조홍은 조휴의 진언에 따라 오란을 격파하고 장비를 패주시켰다.[38]

조홍은 큰 연회를 열고 얇은 옷을 입은 가희에게 춤을 추게 했다. 양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자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책망하자, 조홍은 즉시 춤을 중단시켰다.

황초 원년 조비(문제)가 즉위하자 위장군이 되었다. 이후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여 야왕후에 봉해졌고, 영읍 1000호를 받아 총 2100호가 되었으며, 특진의 대우를 받았다. 얼마 후 도양후로 봉해졌다.

태화 6년(232년) 사망했다. 시호는 '''공후'''이다.

3. 1. 엄청난 부와 인색함

조홍은 엄청난 부자였지만 매우 인색했다. 조조사공으로 있을 때 세금 징수를 위해 재산 조사를 했는데, 초현령은 조홍과 조조 집안을 같은 등급으로 평가했다. 조조는 그 결과에 의아해하며 "내 재산이 어찌 자렴(조홍의 자)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정도였다.[19] 이는 조홍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조비태자 시절 조홍에게 비단 100필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조비는 이 일로 조홍에게 앙심을 품었다.[52]

226년, 조홍의 빈객(식객)이 범죄를 저지르자 조비는 이를 빌미로 조홍을 하옥하고 사형에 처하려 했다. 조진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조홍을 변호하고 구명하려 했으나 조비는 듣지 않았다. 변태후가 크게 화를 내며 조비를 책망하고, 곽후에게 "오늘 조홍이 죽으면 내일 황후도 폐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곽후까지 조비에게 울면서 매달린 후에야 조비는 조홍의 관직과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선에서 그쳤다. 하지만 변태후가 계속해서 조비를 질책한 덕분에 조홍은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52]

3. 2. 가신 관리 문제

만총이 허현령(지금의 허창시)일 무렵, 조홍의 빈객(賓客)이 조홍의 종실 지위를 믿고 여러 차례 법을 어겨 만총에게 체포되었다. 조홍은 만총에게 편지를 써서 봐주기를 청했지만, 만총은 듣지 않았다. 조홍은 조조에게 이 일을 알렸고, 조조는 관계자들을 불렀다. 만총은 더 큰 외압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즉시 사형을 집행했고, 조조는 만총을 칭찬하였다.[53] 비슷한 시기 장사현령(長社, 지금의 창거 시)이었던 양패(楊沛)도 조홍의 빈객이 저지르던 불법 징수 행위를 적발하여 다리를 꺾어 죽였다. 조조는 양패를 칭찬하였다. 이후 양패가 현령으로 발령받자, 권세가였던 조홍과 유훈 등은 자제들에게 몸가짐을 조심히 하라고 단단히 일렀다.[54]

문제 때에는 빈객 문제로 조홍이 처벌받을 뻔하였다. 명제 시절에도 조홍의 유모 당(當)이 무간신(無澗神)이라는 미신을 섬기다 변태후의 선처 지시에도 불구하고 하남윤 사마지(司馬芝)에게 형벌을 당해 죽었다.[55]

4. 평가

조조 곁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56] 변태후는 조비를 책망하며 "양국과 패국에서 조홍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52]북제서》에서 청하왕 고악(高岳)에 대해 논할 때, 종실의 공신으로 한나라유고위나라의 조홍을 언급했다.[57]

5. 가계

관계내용
아들조복, 조진
순욱의 아들 순찬에게 시집갔으며, 대단한 미인이었으나 요절했다.[59]


6. 대중문화 속 조홍

조홍은 삼국지연의에 단역으로 등장한다. 삼국지연의삼국 시대 이전과 당시의 사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소설 속 조홍은 다소 혈기 넘치는 성격으로 묘사되며, 조인과 함께 조조의 거병 초기부터 그를 따르는 무장으로 등장한다. 뚜렷한 활약은 적지만, 조조군의 주요 전투 대부분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동관 전투에서 조홍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조조는 조홍에게 10일 동안 동관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조홍은 적의 도발에 넘어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관문마저 잃는다. 조조는 분노하여 조홍을 처형하려 했지만, 부하들의 만류로 그만둔다. 이후 조홍은 마초에게서 도망치는 조조를 구출하여 자신의 잘못을 만회한다. 그는 마초와 약 100합을 겨루며 조조를 추격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마초가 포기하고 물러나자 조조는 조홍의 공을 인정하여 이전의 실수를 용서했다.[31]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역사 기록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조조 사후, 조홍은 조비의 황제 즉위 찬탈 과정에서 조휴와 함께 궁궐에 쳐들어가 조필을 죽이고 옥새를 빼앗는 역할을 하지만, 그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지 조조전(1998년)에서는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라는 대사와 황금 투구를 쓴 모습으로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1]

6. 1. 삼국지연의

소설삼국지연의》에서 조홍은 조조가 거병할 때부터 많은 전장을 따라다니며 활약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형양에서 서영에게 패한 조조에게 자신의 말을 내어주고, 조조를 업고 을 건너는 장면이 각색되어 삽입되었다.[31] 이후 조조가 여남, 영천황건 잔당들을 토벌할 때, 조홍은 하만과 일대일 대결을 벌여 사오십 합 끝에 뒤돌아 뛰어오르며 두 번의 질로 하만을 쓰러트린다.[31]

장수·유표 연합군에게 패한 일, 관도 대전에서 조조가 오소를 기습하는 사이 하후돈, 하후연, 조인, 이전 등과 본진을 지켜 장합, 고람을 물리친 일, 조조가 남하할 때마다 북방 수비를 담당한 일, 남피 전투에서 원담을 직접 벤 일 등은 모두 연의에 수록되어 있다.[31]

조조의 형주 정벌 때 조인과 함께 선봉에 서서 텅 빈 신야에 입성하지만, 제갈량함정에 빠져 화공에 궤멸된다.[31] 적벽 대전에서 조조군이 패배한 뒤에는 조인이 강릉을, 조홍이 이릉을 방어하지만, 감녕에게 을 빼앗기고 주유의 원군에도 패하여 조인에게 합류한다. 이후 여러 작전을 수행하지만 결국 완전히 패해 양양으로 퇴각한다.[31] 동작대 완공 기념 행사에서는 조휴, 문빙, 장합, 하후연, 서황과 함께 솜씨를 뽐낸다.[31]

장안을 거쳐 동관(潼關)으로 진격해오는 마초를 막기 위해 조홍과 서황이 급파된다. 조조는 최소 10일만 사수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인은 조홍의 성급한 성격을 염려한다. 조홍이 관문을 닫고 버티자 마초는 관 아래에서 매일 조조 3대를 하고, 조홍은 참지 못하고 출격하려 하지만 서황이 가까스로 저지한다. 그러나 9일째 되는 , 조홍은 널브러진 모습까지 보이며 도발하는 마초에게 넘어가 출전하고, 군량과 말꼴을 점검하던 서황은 뒤늦게 따라가지만 결국 복병에 당해 동관을 잃는다. 이 일로 조홍은 조조에게 참수당할 뻔하지만, 얼마 후 마초에게 패하여 추격당하는 조조를 구출하며 위기를 모면한다. 마초가 조조를 찌르려는 찰나 조홍이 나타나 사오십 합을 싸워 조조를 구해내고, 조조는 ‘조홍을 죽였으면 자신도 마초에게 죽었을 것’이라며 후하게 포상한다.[31]

장비뇌동파서에, 마초와 오란이 하변에 주둔하자, 조홍은 하변 방면으로 가 오란의 정찰대를 격파하고 임기를 3합 만에 쓰러트린다. 마초가 나오지 않고 지키기만 하자, 조홍 역시 신중을 기해 한중군 남정현(南鄭縣)으로 돌아와 관망한다. 장합이 장비를 업신여기며 출진을 청하자 군령을 달게 받는다는 조건으로 허락하지만, 우려대로 장합은 대패하여 3만 명과 와구관(瓦口關)을 잃고 돌아온다. 조홍은 장합을 처형하려 하지만 곽회의 진언으로 다시 기회를 주고, 장합에게 오천 명으로 가맹관을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장합은 또다시 패배하고, 곽회는 ‘촉나라에 투항할지 모른다’며 장합을 도울 것을 청한다. 하후상과 한호에게 오천 명을 주어 파견하지만 전황은 더욱 악화되고, 유비군이 하후연의 정군산까지 육박했다는 급보를 조조에게 전한다.[31]

6. 2. 게임

삼국지 조조전(1998년)에서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라는 대사와 황금 투구를 쓴 모습으로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1]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9
[2]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3] 서적 Sanguozhi vol. 9
[4] 서적 Sanguozhi vol. 9
[5] 서적 Sanguozhi vol. 1
[6] 서적 Sanguozhi vol. 9
[7] 서적 Sanguozhi vol. 1
[8] 서적 Sanguozhi vol. 9
[9] 서적 Sanguozhi vol. 26
[10] 서적 Sanguozhi vol. 1
[11] 서적 Sanguozhi vol. 1
[12] 서적 Sanguozhi vol. 1
[13] 서적 Sanguozhi vol. 10
[14] 서적 Sanguozhi vol. 9
[15] 서적 Sanguozhi vol. 9
[16] 서적 Sanguozhi vol. 1
[17] 서적 Sanguozhi vol. 25
[18] 서적 Sanguozhi vol. 9
[19]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20]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21] 서적 Sanguozhi vol. 9
[22] 서적 Wu Zhi Bie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1
[23]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24] 서적 Sanguozhi vol. 9
[25]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26]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27] 서적 Sanguozhi vol. 9
[28] 서적 Yizhoushu vol. 6
[29] 서적 Sanguozhi vol. 9
[30] 서적 Xun Can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0
[31] 서적 Sanguo Yanyi ch. 58
[32] 서적 後漢書
[33] 서적 三国志
[34] 기타 拾遺記
[35] 서적 三国志演義
[36] 문서 本来の文字は「氵」+「隱」
[37] 서적 武帝紀 203-08-01
[38] 서적 武帝紀 218-03-01
[39] 서적 위서
[40] 서적 삼국지집해
[41] 서적 한서
[42] 서적 삼국지
[43] 서적 삼국지
[44] 서적 삼국지
[45] 서적 삼국지
[46] 서적 삼국지
[47] 서적 삼국지
[48] 서적 삼국지
[49] 서적 삼국지
[50] 서적 오질별전
[51] 서적 진서
[52] 서적 위략
[53] 서적 삼국지
[54] 서적 위략
[55] 서적 삼국지
[56] 서적 삼국지
[57] 서적 북제서
[58] 서적 습유기
[59] 서적 진양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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