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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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민사원은 짐 존스가 1950년대에 설립한 종교 단체로, 초기에는 인종 차별에 반대하며 흑인 신도들을 포용했으나, 이후 공산주의 사상을 추종하며 교주의 권위가 강화되었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로 이전한 후, 존스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사회주의적 이상을 설파하며 추종자들을 통제했다. 1970년대 후반, 가이아나에 존스타운을 건설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강제 노동과 감시를 통해 신도들을 억압했다. 1978년, 조사단의 방문과 탈출 시도 이후 존스는 신도들에게 집단 자살을 강요하여 9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다.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 미국 민간인 최대 사망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사이비 종교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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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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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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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분류 | 기독교 신흥 종교 운동 유토피아/사회 변동 교회 운동 |
성향 | 절충 오순절 (진보 기독교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요소 포함) 신지학 뉴소트 |
정치 체제 | 반(半)-회중주의 |
창립자 | 제임스 워렌 "짐" 존스 |
창립일 | 1955년 |
창립 장소 |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
모체 | 메소디스트 |
지도자 | 제임스 워렌 "짐" 존스 (1955–1978) |
해체일 | 1978년 12월 4일 |
본거지 | 존스타운 |
위치 | 미국 인디애나주 캘리포니아주 가이아나 존스타운 |
신도 수 | 3,000–5,000명 (20,000명 이상이라고 주장되었으나 입증되지 않음) |
기타 정보 | |
관련 단체 | 가이아나 이민 전 캘리포니아주 내 7개 교회 |
소멸 원인 | 1978년 11월 18일 교주와 함께 집단 자살 |
2. 역사
짐 존스는 공산주의에 심취했고, 적색 공포 기간 동안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겪는 박해에 좌절했다.[2] 마르크스주의를 보여주기 위해 교회를 침투하는 방법을 택했다.[2][4]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반발을 살까 두려워했지만, 한 감리교 감독의 도움으로 교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3]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인민사원의 발전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도 | 주요 사건 |
---|---|
1952년 | 존스,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서머셋 사우스사이드 감리교회에서 학생 목사로 활동. 흑인 신도 포함 문제로 교회를 떠남.[4] |
1954년 | 인디애나폴리스에 자신의 교회(커뮤니티 유니티 교회) 설립.[4] |
1955년 | 첫 번째 교회 건물을 구입하고, 윙스 오브 딜리버런스로 명명. 이후 피플스 템플 풀 가스펠 교회로 개명.[4] |
1956년 | 조셉 매트슨-보제에 의해 독립 하나님의 성회 국제(IAoG) 목사로 안수.[7] |
1959년 | 그리스도 교회(제자)에 가입, 인민사원 기독교 교회 풀 가스펠로 이름을 변경.[4] |
1960년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를 열고 사회 서비스 확대.[14] |
1961년 | 핵전쟁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위치를 찾아야 한다고 설득.[22] |
1962년~1963년 | 브라질 여행.[24] |
1965년 |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 밸리로 이동 시작.[26] |
1968년 | 인민사원의 캘리포니아 지부가 그리스도의 제자회에 가입. |
1970년 |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예배 시작.[31] |
1971년~1972년 |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 영구 시설 설립.[32] |
1974년 | 가이아나에 토지 임대 계약 체결.[88] |
1977년 | 존스타운 정착지 설립.[89] |
존스는 파더 디바인의 영향을 받아 금욕을 설교하고, 카를 마르크스를 인용하며 예수를 공산주의자로 묘사했다.[19] 인민사원은 구성원들에게 템플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고, 재산을 기부하면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종교적 공동체주의"를 제안했다.[14]
1961년 핵전쟁 환상을 본 존스는 1965년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 밸리로 이동했다.[26] 1968년 인민사원 캘리포니아 지부는 그리스도의 제자회에 가입했고, 1970년부터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예배를 시작했다.[31]
존스는 후기 비의 운동, 윌리엄 브래넘, 파더 디바인의 가르침에 자신의 공산주의적 세계관을 결합한 신학을 발전시켰다.[29] 그는 전통 기독교를 "하늘 신"이라 칭하며, 자신을 참된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라고 주장했다.[29]
캘리포니아에서 존스는 추종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공포를 사용하고, 기획 위원회를 통해 공동체 생활 방식을 구현했다. 회원들은 재산을 교회에 넘기고, 모든 소득을 공동체에 바쳐야 했다. 존스는 성생활과 결혼까지 통제했으며, 일부 회원들은 낙태를 강요당하고 성적 학대를 당했다.[95]
1974년 가이아나에 토지를 임대하고 1977년 존스타운 정착지를 설립했다.[89] 존스는 존스타운을 "사회주의 낙원"이자 언론 감시로부터의 "성역"으로 보았다.[90] 1978년 말까지 인구는 약 1,000명으로 증가했다.[89][94]
1978년 11월 17일 레오 라이언 하원의원이 존스타운을 방문했고, 11월 18일 사원 경비원들이 라이언과 기자 등을 살해했다.[99] 같은 날 존스는 신도들에게 청산가리가 든 음료를 마시게 해 918명이 사망했다.[103]
2. 1. 초기 역사 (1950년대)
짐 존스는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 봉사자였다. 1952년경 인디애나 주의 한 감리교회 청년부 지도자로 봉사했으나, 인종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교회를 떠났다. 이후 <해방의 날개>라는 조직을 설립했고, 이는 후에 <인민사원 완전 복음 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4] 1964년 개신교 교단인 <예수의 사도>에 통합되어 목사 안수를 받았으나, 인민사원이 커지면서 교주로 활동하자 이 교단에서 탈퇴하여 목사 안수 자격을 상실했다.설립 초기, 인민사원은 백인 중심의 교회를 비판하며 흑인을 차별 없이 받아들여 흑인 신도가 많았다. 이는 당시 인종 문제가 심각했던 미국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동시에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6]

존스는 교회를 세우기 전 공산주의에 심취했고, 적색 공포 시기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받는 박해에 좌절했다.[2] 그는 자서전적 녹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2][4]
1954년, 존스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임대 공간에 자신의 교회를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커뮤니티 유니티 교회라고 명명했다.[4]
존스는 이전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안수기도를 통한 치유를 관찰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수입을 창출하여 사회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4] 존스와 인민사원 신도들은 의도적으로 치유를 위조했는데, 이는 사람들의 믿음을 높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될 재정적 자원을 창출하기 위함이었다.[4] 이 "치유"에는 닭 간과 다른 동물 조직이 사용되었으며, 존스는 이것이 치유된 사람들의 몸에서 제거된 암 조직이라고 주장했다.[5]
1955년, 존스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인종 혼합 지역에 첫 번째 교회 건물을 구입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 교회를 윙스 오브 딜리버런스라고 명명했고,[6] 그해 말에는 '''피플스 템플 풀 가스펠 교회'''로 개명했는데, 이것이 그가 "피플스 템플"이라는 문구를 처음 사용한 것이었다.[4] 존스의 치유와 자칭 영매 계시는 심령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6]
존스는 독립 하나님의 성회 국제 (IAoG)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었는데, 이 교회는 후기 비 운동을 받아들인 국제적인 교회 단체였다. 1955년 6월, 존스는 윌리엄 브래넘과 처음으로 합동 집회를 열었다.[7] 1956년, 존스는 조셉 매트슨-보제에 의해 IAoG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존스는 이 단체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IAoG와 함께 일하면서, 존스는 1956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인디애나폴리스의 캐들 태버내클에서 열리는 치유 대회를 조직하고 주최했다. 군중을 끌어모을 유명 인사가 필요했기에, 그는 브래넘 목사와 다시 강단을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8]
브래넘은 기도하러 온 사람들에게 치유를 선언하기 전에 그들의 이름, 주소, 그리고 왜 기도하러 왔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존스는 브래넘의 방식에 매료되어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존스와 브래넘의 집회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첫 합동 캠페인에서 11,000명의 청중을 끌어모았다.[9]
대회가 끝난 후, 존스는 교회의 이름을 성령 충만 복음주의와 연결하기 위해 "피플스 템플 기독교 교회 풀 가스펠"로 변경했으며, 이후 이름은 피플스 템플로 축약되었다.[10] 존스는 1950년대 후반에 브래넘, 매트슨-보제와 함께 여러 주에서 부흥 캠페인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합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존스는 이 기간 동안 브래넘의 "메시지"를 따르고 홍보했다고 주장했다.[11]
존스는 다른 오순절 설교자들과의 회의를 이용하여 널리 홍보했고,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숨겼다.[6] 그 회의에는 최대 11,000명이 참석했고,[6] 존스와 다른 설교자들은 "치유"를 행하고, 개인 정보—주로 주소, 전화 번호 또는 사회보장번호—를 공개하여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이는 사립 탐정들이 사전에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6]
템플은 평등주의 이념을 강조하며, 가난한 회원들이 어색함을 느끼지 않도록 편안한 옷을 입도록 요청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쉼터를 제공했다.[14] 템플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회원 수를 15%에서 거의 50%로 늘렸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 설교자 아치 아이제임스(이전에는 조직화된 종교를 포기했음)를 고용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6] 아이제임스 목사는 존스의 사회주의 집단 프로그램에 헌신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14] 1959년,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제자)에 가입하여, '''인민사원 기독교 교회 풀 가스펠'''로 이름을 변경했다.[4]
1960년 2월, 템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를 열고, 임대료 지원, 취업 알선 서비스, 무료 통조림, 의류, 그리고 겨울 난방용 석탄 등을 포함하도록 사회 서비스를 확대했다.[14] 존스와 그의 아내 마르셀린은 템플의 무료 급식소 서비스를 월 평균 약 2,800끼로 늘리는 데 기여했다.[14] 존스가 인디애나폴리스 인권 위원회에 임명되면서 템플의 대중적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는 사업을 통합하려는 공개적인 시도를 했고, 많은 지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15]
존스는 파더 디바인과 국제 평화 선교 운동의 창시자에 대해 광범위하게 읽었다.[16] 존스와 템플의 구성원들은 디바인을 여러 번 방문했고, 존스는 그의 저술과 설교 녹음 테이프를 연구했다.[17] 템플은 구성원들을 위해 디바인의 텍스트를 인쇄했고, 구성원들이 성관계를 삼가고 입양만 해야 한다고 설교하기 시작했다.[17]
1959년 존스는 디바인이 설교에서 사용했던 새로운 격정적인 수사 스타일을 시험했다.[18] 그의 연설은 존스가 그룹 앞에서 개별 구성원들에게 도전하면서 완급 조절과 고조를 통해 구성원들을 사로잡았다.[18] 그 연설은 또한 템플의 근본적인 "우리 대 그들" 메시지의 시작을 알렸다.[18] 존스는 템플의 노인들을 위한 집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라는 원칙에 따라 세워졌다고 주의 깊게 설파하며, 카를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을 인용했다.[19] 그는 기독교 신자들이 "각자 필요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사도행전 (4:34–35)의 텍스트와의 유사성을 인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했다.[19] 존스는 이러한 구절을 반복적으로 인용하여 예수를 공산주의자로 묘사하는 동시에 성경의 많은 부분을 공격했다.[19]
템플은 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14] 다른 교회보다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14] 템플은 구성원들이 혈연 관계가 아닌 템플 "가족"과 함께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를 보낼 것을 요구했는데,[14] 이는 구성원들을 외부와의 접촉으로부터 떼어내고 템플과 그 목표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 그들의 삶을 전환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14] 존스는 "종교적 공동체주의"라고 불리는 사회주의적 집단에 대한 거래를 제안하기 시작했는데, 구성원들이 템플에 물질적 소유물을 기부하면 템플이 해당 구성원들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14]
템플은 종교로 위장했을 때조차 대부분의 미국 중서부 사람들을 공산주의 이상으로 개종시키는 데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20] 1959년 쿠바 혁명을 찬탄한 존스는 1960년 가난한 흑인 쿠바인들을 인디애나에 있는 자신의 회중으로 이주시키려는 시도로 쿠바를 방문했지만 실패했다.[20] 템플의 종교적 메시지는 이 기간 동안 무신론과 존스가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이라는 미묘한 개념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바뀌었다.[21]
1961년 존스는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가 핵 공격으로 파괴되는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22] 조력자들에게 템플이 새로운 위치를 찾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1962년 ''에스콰이어'' 잡지 기사에서는 핵전쟁에서 가장 안전한 9곳을 나열했는데, 브라질 벨루오리존치가 위치와 대기 상태 때문에 목록의 맨 위에 올랐다.[23] 존스는 1962년부터 1963년 초까지 브라질을 여행했다.[24]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템플로부터 자금을 요청했지만, 존스가 부재한 동안 템플의 재정이 축소되어 그러한 요청에 충분한 자금이 부족했다.[24] 존스는 브라질에서 추종자가 된 설교자를 인디애나로 보내 템플을 안정시켰다.[25] 존스는 1963년 인디애나로 돌아왔다.[4]
2. 2. 캘리포니아 이전 (1960년대 초)
짐 존스는 정식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 봉사자였다. 1952년 경 인디애나 주의 한 감리교회에서 청년부 지도자로 봉사했으나, 인종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교회를 떠났다.[4] 이후 <해방의 날개>라는 조직을 설립했고, 이는 나중에 <인민사원 완전 복음 교회>로 이름이 바뀐다.[6]
존스는 공산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고, 적색 공포 시기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이 받는 핍박에 좌절했다.[2] 그는 자서전적 녹음에서 "내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 생각은 교회를 침투하는 것이었다."라고 회고했다.[2][4] 존스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반발을 살까 두려워했지만, 한 감리교 감독이 그가 교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3]
1954년, 존스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임대 공간에 자신의 교회를 설립, 처음에는 커뮤니티 유니티 교회라고 명명했다.[4] 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안수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모이고 수입이 창출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4] 존스와 인민사원 신도들은 의도적으로 "치유"를 조작했는데, 이는 사람들의 믿음을 높이고 재정적 자원을 창출했다.[4] 이 "치유"에는 닭 간 등 동물 조직이 사용되었고, 존스는 이것이 암 조직이라고 주장했다.[5]
1955년, 존스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인종 혼합 지역에 첫 교회 건물을 구입, 처음에는 윙스 오브 딜리버런스라고 명명했다.[6] 그해 말, '''피플스 템플 풀 가스펠 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4] 존스는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다른 오순절 설교자들과의 회의를 통해 널리 홍보했다.[6]
인민사원은 평등주의를 강조하며 가난한 회원들에게 편안한 옷을 입도록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쉼터를 제공했다.[14] 흑인 설교자 아치 아이제임스를 고용하여 흑인 회원 수를 늘렸다.[6] 1959년,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제자)에 가입, '''인민사원 기독교 교회 풀 가스펠'''로 이름을 변경했다.[4]
1960년 2월, 인민사원은 무료 급식소를 열고, 임대료 지원, 취업 알선 서비스, 무료 통조림, 의류, 겨울 난방용 석탄 등을 제공하며 사회 서비스를 확대했다.[14] 존스는 인디애나폴리스 인권 위원회에 임명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15]
존스는 파더 디바인과 국제 평화 선교 운동에 대해 광범위하게 읽고,[16] 그의 저술과 설교 녹음 테이프를 연구했다.[17] 인민사원은 디바인의 가르침에 따라 구성원들에게 금욕을 설교하기 시작했다.[17] 1959년, 존스는 디바인이 사용했던 격정적인 수사 스타일을 시험했다.[18] 그는 "우리 대 그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18] 카를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을 인용하며 예수를 공산주의자로 묘사했다.[19]
인민사원은 구성원들에게 혈연 관계가 아닌 인민사원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낼 것을 요구하며 통제를 강화했다.[14] 존스는 "종교적 공동체주의"를 제안, 구성원들이 인민사원에 물질적 소유물을 기부하면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14]
1959년 쿠바 혁명을 찬탄한 존스는 1960년 쿠바를 방문, 가난한 흑인들을 인디애나로 이주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20] 인민사원의 종교적 메시지는 무신론과 존스가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이라는 개념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바뀌었다.[21]
1961년, 존스는 핵전쟁으로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가 파괴되는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22] 새로운 본거지를 찾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1962년 ''에스콰이어'' 잡지 기사에서 핵전쟁 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브라질 벨루오리존치를 언급하자,[23] 존스는 1962년부터 1963년 초까지 브라질을 여행했다.[24] 그러나 존스가 부재한 동안 인민사원의 재정이 악화되어, 그는 브라질에서 추종자가 된 설교자를 인디애나로 보내 인민사원을 안정시켜야 했다.[25] 존스는 1963년 인디애나로 돌아왔다.[4]
2. 3. 캘리포니아 시대 (1960년대 중반 ~ 1970년대)
짐 존스는 정식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 봉사자였다. 1952년경 인디애나 주의 한 감리교회 청년부 지도자로 봉사했으나 인종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교회를 떠났다. 이후 '해방의 날개' 조직을 설립, '인민사원 완전 복음 교회'로 개명했다. 1964년 예수의 사도 교단에 통합되며 목사 안수를 받았으나, 교주로 활동하며 교단에서 탈퇴, 목사 자격을 상실했다.초기 존스의 인민사원은 백인 중심 교회를 비판, 흑인을 차별 없이 받아들여 흑인 신도가 많았다. 이는 당시 사회적 관심과 공격을 동시에 받았다.
1965년 인디애나폴리스를 벗어나 핵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를 찾아 캘리포니아주 북부로 옮겼다. 유키아,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존스는 기독교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흑인, 마약 중독자, 노숙자 등 도시 빈민 계층 구호 활동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다. 무료 식당, 탁아소, 노인 병원을 설립하고, 성매매 여성과 마약 중독자 상담 프로그램도 제공하여,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지 모스콘은 존스를 도시 주택 사업 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러나 존스는 스스로를 예수, 아케나텐, 부처, 레닌, 신적인 존재의 현신이라 칭했고, 신도들은 존스를 "아버지(Dad)"라 부르며 사회 문제 해결을 믿었다. 존스는 신도들에게 파시즘, 인종간 전쟁, 핵전쟁이 올 것이라 경고했다.
1970년대부터 탈퇴자들에 의해 인민사원의 실상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존스가 신도 재산을 훔치고, 기적 치유는 조작이며, 신도 폭행, 스스로를 메시아라 칭한다는 것이다. 폭로가 이어지자 신문기자, 관계 당국, 정치가들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존스는 탈퇴자들이 거짓 증언을 하며 바깥세상이 자신들을 파멸시키려 한다고 주장했지만, 폭행, 학대 사례가 계속 폭로되었고, 신도 친척들은 존스가 신도 탈퇴를 폭력으로 막는다고 주장했다.
존스는 1963년 12월 브라질에서 돌아와 인민사원이 재정 문제와 신도 수 감소로 분열된 것을 발견하고, 교회 건물을 팔고 작은 건물로 이전해야 했다. 돈을 모으기 위해 잠시 부흥회로 돌아가 치유 캠페인을 열었다.[26] 1967년 7월 15일 핵전쟁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에덴이 도래할 것이며, 북부 캘리포니아로 이동해야 한다고 신도들에게 말했다.[26]
존스가 돌아오면서 신도 대다수가 점차 복귀, 재정 상황이 개선되었다.[26] 1964년 동안 이주할 위치를 찾기 위해 여러 번 캘리포니아를 방문했다. 1965년 7월, 존스와 추종자들은 유키아 시 근처 레드우드 밸리, 캘리포니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26] 존스의 조수 목사 러셀 윈버그는 존스의 신도 이동 노력을 반대하며 존스가 기독교를 버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윈버그는 존스가 떠난 후 인디애나폴리스 교회의 지도력을 맡았고, 존스의 충성스러운 추종자 약 140명이 캘리포니아로 이주, 나머지는 윈버그와 함께 남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존스는 버틀러 대학교 교육학 학위를 사용, 유키아 성인 교육 학교에서 역사 및 정부 교사로 일하며 인민사원 신도를 모집,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장점을 가르치고 종교를 강의했다.[26] 1967년, 존스의 추종자들은 인디애나폴리스 신도 중 75명을 더 설득,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했다.
1968년, 인민사원 캘리포니아 지부는 그리스도의 제자회에 가입했다. 존스는 교파적 관계를 이용, 인민사원을 150만 명 교파의 일부로 홍보, 린든 B. 존슨과 J. 에드거 후버 등 제자회 유명 회원들을 언급하고 교파 내 지위 성격을 잘못 표현했다. 1969년까지 존스는 캘리포니아 인민사원 신도 수를 300명으로 늘렸다.
존스는 후기 비의 운동, 윌리엄 브래넘, 파더 디바인 가르침에 영향받은 신학을 발전, 존스 개인의 공산주의적 세계관을 불어넣었다. 존스는 자신의 신념을 "사도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인민사원 캘리포니아 이전 후, 점차 이 개념을 추종자들에게 소개했다. 존스는 "종교의 아편에 취해 있는 사람들은 계몽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를 사회주의로 정의했다. 존스는 전통 기독교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초, 전통 기독교를 "날아가 버리는 종교"라 조롱, 성경을 여성과 비백인 억압 도구로 거부했다. 존스는 전통 기독교 하나님 견해를 "하늘 신"이라 칭하며, "전혀 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신 존스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참된 하나님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존스는 궁극적 현실을 "신성한 원리"라 불렀고, 이 원리가 참된 하나님이라 가르쳤다. 이 원리를 사랑과 동일시했고, 사랑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했다. 존스는 자신이 참된 하나님이 인류를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 보낸 구원자라 주장했다. 존스는 "신성한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존스는 자신의 신성에 대한 생각을 점점 널리 알렸고, "나는 하나님 사회주의자로 왔다"고 말했다.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로 인정받기를 기대했다. 전 인민사원 회원 휴 포트슨 주니어는 존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인용했다.
>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당신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당신의 친구로 본다면, 나는 당신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당신의 아버지로 본다면, 나는 당신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나를 당신의 구원자로 본다면, 나는 당신의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당신의 하나님으로 본다면, 나는 당신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전통 기독교를 더욱 공격하며, 존스는 "글자는 죽인다"라는 소책자를 저술, 배포하여 킹 제임스 성경을 비판하고 제임스 1세를 노예 소유자이자 자본주의자로서 비난, 성경의 부패한 번역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존스는 부패한 지도자들에 의해 숨겨진 복음의 참된 의미를 전하기 위해 보내졌다고 주장했다.
존스는 그리스도의 제자 교단에서 요구하는 몇 안 되는 교리조차 거부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규정한 성찬 대신, 파더 디바인의 성찬례 관행을 따랐다. 존스는 자신의 세례 방식을 만들어, 개종자들에게 "사회주의의 거룩한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존스는 대중이 자신의 공산주의적 견해 전체 내용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자신의 견해 진실성이 널리 알려지면 정치 지도자 지지를 금방 잃게 되고, 인민사원이 그리스도의 제자에서 축출될 가능성에 직면할 것이라 믿었다. 존스는 또한 교회의 면세 혜택을 잃고 국세청에 재정 거래를 보고해야 할 것을 두려워했다. 존스는 항상 자신의 사회주의적 견해를 "사도적 사회 정의"와 같은 종교적 용어로 표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사도행전의 삶"은 그가 공동체적 생활 방식을 설명하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존스는 추종자들에게 임박한 종말론적 대량 학살적 인종 전쟁과 핵 전쟁에 대해 자주 경고했다. 나치 파시스트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유색 인종을 강제 수용소에 가둘 것이라 주장했다. 존스는 자신이 교회에서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메시아라고 말했다. 요한 계시록 예언을 이용, 미국 자본주의 문화를 구제할 수 없는 "바빌론"이라 가르쳤다. 죄의 본질을 설명하며, "만약 당신이 자본주의 미국, 인종 차별주의 미국, 파시스트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죄 가운데 태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사회주의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죄 가운데 태어나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임박한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종말 이후에는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쳤다.
역사학자들은 존스가 자신의 가르침을 실제로 믿었는지, 아니면 사람들을 조종하기 위해 사용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제프 긴은 "존스가 자신이 하나님의 지상 그릇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추종자들에 대한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그 편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1976년 존 메이허와의 전화 통화에서 존스는 자신이 불가지론자이자 무신론자임을 인정했다. 마르셀린은 1977년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존스가 종교를 통해 사람들을 동원하여 미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홍보하려 했다고 인정하며, 마오쩌둥을 그의 영감으로 언급했다. "짐은 종교의 아편에서 벗어나도록 사람들을 돕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다." 그녀는 기자에게 존스가 한때 성경을 책상에 내리치며 "나는 이 종이 우상을 파괴해야 해!"라고 소리쳤다고 말했다. 존스는 추종자들에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며,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비전을 달성하도록 허가했다. 외부인들은 나중에 존스의 가르침의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며, 그가 자신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고, 단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교와 사회의 다른 요소를 조작한 "도덕적으로 파산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존스는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후 불법 약물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의 편집증을 더욱 심화시켰다. 존스는 캘리포니아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통제하고 조종하기 위해 점점 더 공포를 사용했다. 존스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그들을 파괴하려는 적이 있다고 자주 경고했다. 그 적의 정체는 쿠 클럭스 클랜에서 나치, 레드넥 자경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 정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화재, 교통사고, 죽음 또는 부상이 닥칠 것이라고 자주 예언했다. 그는 끊임없이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홍보하고 실현하는 데 십자군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전술을 통해, 그는 기획 위원회라고 불리는 위원회의 일원이었던 그와 그의 부관들이 지시하는 추종자들 간의 공동체적 생활 방식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존스는 기획 위원회를 통해 추종자들 삶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인민사원에 가입한 회원들은 무료 숙식 제공 대가로 모든 자산을 교회에 넘겨야 했다. 사원 밖에서 일하는 많은 회원들도 공동체 이익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모든 소득을 넘겨야 했다. 존스는 그의 추종자 집단을 지시하여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인민사원을 위한 수입을 올리고, 레드우드 밸리에 농업 운영을 시작하여 식량을 재배하도록 했다. 존스는 대규모 지역 사회 봉사 프로젝트를 조직하여, 그의 추종자들을 버스로 태워 지역 사회 전체에 봉사 활동을 수행하게 했다.
인민사원에서 심각한 학대의 첫 번째 알려진 사례는 기획 위원회가 존스의 비전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규칙을 따르지 않는 회원들을 징계하면서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했다. 인민사원 회원들에 대한 존스의 통제는 그들의 성생활과 결혼할 수 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일부 회원들은 낙태를 강요당했다. 존스는 교회 회원 중 일부 아내들에게 성적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존스는 또한 회중의 여러 남성 회원들을 강간했다.
존스의 통제에 반항하는 회원들은 식량 배급량 감소, 더 가혹한 근무 일정, 공개적인 조롱과 굴욕, 때로는 신체적 폭력으로 처벌받았다. 사원 회원 수가 증가함에 따라 존스는 추종자들 사이 질서를 유지하고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보안 그룹을 만들었다. 그 그룹은 보안 순찰차를 구매하고 경비원들에게 소총과 권총을 지급했다.

레드우드 밸리-유키아 지역의 제한적인 확장으로 인해, 결국 교회의 권력 중심지를 도시 지역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32] 1970년에 템플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예배를 시작했다.[31] 1971년과 1972년에 각각 이 도시들에 영구 시설을 설립했다.[32] 샌프란시스코에서 템플은 스코틀랜드 의례 사원이 있던 1859 기어리 대로의 필모어 구역을 사용했다.[33] 당시 필모어 구역은 흑인 다수 거주 지역이자 서부 해안의 흑인 문화의 거점이었다.[33] 로스앤젤레스에서 템플은 그리스도 과학 제일 교회가 사용하던 1366 S. 알바라도 스트리트 건물을 사용했다.[34]
1972년까지 템플은 레드우드 밸리를 "주 전역의 정치 운동"의 "모 교회"라고 불렀다.[32] 로스앤젤레스 시설은 처음부터 회원을 모집하고 템플의 캘리포니아 전역의 주간 버스 여행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했다.[32] 템플은 로스앤젤레스에 상주 직원을 배치하고 격주로 버스 여행을 마련했다.[32] 로스앤젤레스의 상당한 참석 인원과 수입은 템플의 과장된 회원 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2] 로스앤젤레스 시설은 샌프란시스코보다 더 컸다.[32] 알바라도와 후버 스트리트 교차로의 중심 위치는 와츠와 컴턴에서 온 대규모 흑인 회원들에게 지리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32]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회원 모집 활동은 템플의 회원 수를 1970년대 중반까지 수백 명에서 거의 3,000명으로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35] 나중에 템플의 본부가 레드우드 밸리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지면서 템플은 많은 로스앤젤레스 회원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본부로 북쪽으로 이주하도록 했다.[32]

인민사원의 과장된 주장과는 달리 2만 명 이상의 신도가 있었다고 하지만, 한 소식통에 따르면 실제 등록된 신도는 최대 3,000명 정도였다고 한다.[46] 하지만 사원 해체 이후 사원 기록에서 5,000명의 개인 회원증 사진이 발견되었다.[47] 공식적인 신도 수와는 별개로, 사원은 샌프란시스코에서만 정기적으로 3,000명의 사람들을 예배에 참여시켰다.[48] 정치인들이 특히 관심을 가진 부분은 사원이 6시간의 통보만으로 2,000명의 사람들을 샌프란시스코의 선거 운동이나 행사에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26]
1970년대 중반까지 사원은 레드우드 밸리,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외에도 10여 개 캘리포니아 도시에 위성 교회를 설립했다.[36] 존스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유키아, 베이커스필드, 프레즈노, 새크라멘토에 위치한 지점을 언급했다.[49] 사원은 또한 산타 로사 주니어 칼리지에 지점, 대학 학자금 지원 프로그램, 기숙사를 운영했다.[50][51]
동시에 존스와 그의 교회는 도시의 가장 가난한 시민들, 특히 소수인종, 마약 중독자, 노숙자들을 돕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사원은 캘리포니아 주 복지 시스템과 강력한 연계를 맺었다.[52] 1970년대 동안 교회는 노인을 위한 최소 9개의 요양원, 위탁 아동을 위한 6개의 집, 발달 장애인을 위한 주 면허 40acre 규모의 목장을 소유하고 운영했다.[53] 사원 엘리트는 구성원의 보험 청구 및 법적 문제를 처리하여 사실상 고객 옹호 단체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사회학자 존 홀은 사원을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서 존스에게 맞춰져 있지만 관료적인 사회 복지 기관으로 기능하는 "카리스마적 관료주의"라고 묘사했다.[54]
몇몇 탈퇴 사건이 발생했는데,[58] 특히 1973년에는 "8인조"로 알려진 8명의 젊은 회원들이 함께 탈퇴했다.[59] 8인조는 잠재적 탈퇴자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존스가 그들을 찾기 위해 수색대를 보낼 것이라고 의심했다.[59] 그들의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다. 존스는 여러 수색대를 고용했는데, 그중 하나는 임대 비행기에서 고속도로를 스캔했다.[60] 8인조는 무기가 실린 트럭 3대를 몰고 캐나다로 향했고, 미국 101번 국도를 피했다.[59] 그들은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어 무기를 가져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대신 몬태나의 언덕으로 가서 불만을 기록하는 긴 편지를 썼다.[60]
전 인민사원 회원 지니 밀스는 나중에 존스가 30명의 회원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모아 대규모 탈퇴를 언급하며 "우리의 사도적 사회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자살하고 괴롭힘 때문에 현재 사회주의 집단이 존재할 수 없다는 메모를 남겨야 한다"고 불길하게 선언했다고 썼다.[62] 존스는 격노하며 권총을 기획위원회에 휘두르며 8인조를 "트로츠키주의 탈퇴자"와 "코카콜라 혁명가"라고 불렀다.[61] 인민사원은 존스가 묘사한 자살 계획을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가짜 자살 의식을 거행했다.[62]

샌프란시스코로의 이동은 존스가 자신의 진정한 정치적, 신학적 성향을 더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허용했다.[63] 1976년 봄, 존스는 외부인들에게조차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공공연히 인정했다.[64] 인민사원이 종교적 세금 면제에 대해 국세청 (IRS)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마르셀린은 1977년 ''뉴욕 타임스''에 남편이 마오쩌둥에게서 영감을 받아 종교를 통해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회 변화를 이루려 하고 있다고 인정했다.[26] 그녀는 "짐은 종교를 사용하여 몇몇 사람들을 종교의 아편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다"고 인정하며 성경을 탁자에 내리치며 "이 종이 우상을 파괴해야 해!"라고 소리쳤다고 말했다.[26]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하면서 인민사원은 구성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고 더욱 강조했다.[65] 아이들에 대한 신체적 훈련을 먼저 강조한 다음 어른들에게도 적용했다.[66] 샌프란시스코 인민사원은 또한 광범위한 관찰 과정을 통해 신규 회원을 신중하게 심사했다.[32]
인민사원은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로 대부분의 신흥 종교 운동과 차별성을 보였다.[67] 그것은 진정한 정치적 공감대와 대규모 투표를 통해 여러 저명한 정치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을 결합했다.[68] 존스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한 후 자신이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렸고, 샌프란시스코 선거 방식의 법적 변화는 인민사원과 같은 지역 단체 및 시민 단체의 권한을 강화했다.[69][70]
인민사원의 유권자 동원 노력이 1975년 조지 모스콘 주 상원 의장의 샌프란시스코 시장 출마에 기여한 후, 그는 존스를 샌프란시스코 주택 당국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했다.[71][72] 존스와 인민사원은 모스콘, 제리 브라운 주지사, 머빈 디멀리 연방 하원 의원, 윌리 브라운 주 하원 의장, 아트 아그노스 하원 의원, 하비 밀크 감독관과 같은 캘리포니아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다.[73] 윌리 브라운은 인민사원을 여러 번 방문하여 컬트 활동에 대한 조사와 의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74][73] 존스와 모스콘은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명자 지미 카터의 당시 러닝메이트인 월터 먼데일 미국 상원 의원과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75] 존스는 또한 여러 차례 미국의 영부인 로잘린 카터를 만났으며, 여기에는 개인적인 만찬도 포함되었고, 그녀와 서신을 주고받았다.[76][77]
존스는 주택 당국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세입자들을 쫓아내는 것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78] 인민사원은 또한 샌프란시스코의 흑인 커뮤니티 신문인 ''선 리포터'' 발행인 칼턴 굿렛 박사와 동맹을 맺었고, 그 신문에서 호의적인 언급을 자주 받았다.[79] 그것은 또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칼럼니스트 허브 케인과 다른 지역 신문 및 텔레비전 기자들로부터 호의적인 보도를 자주 받았다.[80]

그러나 인민사원은 존스가 과격한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단체인 심비오니스 해방군을 칭찬하고 SLA 지도자들이 샌프란시스코 인민사원 회의에 참석한 후 경찰의 의심을 받았다.[81] 조이스 쇼의 탈퇴와 곧 그녀의 남편 밥 휴스턴의 의문의 죽음 이후 추가적인 의혹이 제기되었다.[82]
1974년 인민사원의 샌프란시스코 지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존스는 증거 없이 이슬람 국가의 구성원들이 화재를 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존스는 여러 추종자들을 인근 모스크로 보내 그들의 단체에 경고를 했다. 이것은 인민사원과 이슬람 국가 간의 긴장 고조의 시작이었다. 점차적으로 존스는 이슬람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76년 5월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에서 공동 "영적 축제" 집회를 개최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그는 이 행사를 사용하여 긍정적인 홍보를 얻었고, 공동 집회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지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집회에서 존스는 "인민사원과 이슬람 국가가 함께 할 수 있다면 누구든 할 수 있다"고 말하며 평화와 단결을 촉구했다. 존스는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고 월리스 무함마드가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하며 끝을 맺었다.
인민사원이 언론과의 동맹을 맺는 동안 샌프란시스코로의 이전은 또한 그룹이 언론의 조사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존스와 수백 명의 인민사원 구성원이 언론 조사 후 인민사원의 가이아나 정착지로 이사했을 때, 모스콘 시장은 자신의 사무실이 인민사원을 조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69][83] 이 기간 동안 밀크는 인민사원 정치 집회에서 연설을 했고[84] 조사가 시작된 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에게 편지를 써서 그 시점에서 인민사원에서 탈퇴하여 가이아나에서 친척들을 데려오려고 했던 티모시 스토엔을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85][86][87]
2. 4. 존스타운 (1970년대 후반)
1974년 인민사원은 가이아나에서 토지를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했다.[88] 이 부지에 설립된 공동체는 인민사원 농업 프로젝트로 명명되었으며, 비공식적으로 "존스타운"이라고 불렸다. 1977년 초 이 정착지에는 50명 정도의 주민이 거주했다.[89]짐 존스는 존스타운을 "사회주의 낙원"이자 언론의 감시로부터의 "성역"으로 보았다.[90] 전 사원 멤버 팀 카터는 인민사원이 존스타운으로 이동한 이유에 대해 "1974년 미국에서 우리가 본 것은 팽창하는 파시즘"이라고 말했다.[91] 카터는 "기업, 즉 다국적 기업이 점점 더 커지고, 정부 내 영향력이 커지고 있으며, 미국은 인종차별적인 곳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설명했다.[91] 그는 인민사원이 가이아나가 "흑인 회원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흑인 국가의 장소"이며, "사회주의 정부"이고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한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라고 결론 내렸다고 말했다.[91]
마셜 킬더프가 잡지 ''뉴 웨스트''에 1977년 기사를 게재한 이후, 전 멤버들의 주장에 근거한 언론의 감시는 존스에게 더 큰 압력을 가했다.[31] ''뉴 웨스트'' 기사가 게재되기 직전, 편집자 로잘리 라이트는 존스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를 읽어주었다.[92] 라이트는 출판 전에 그렇게 한 유일한 이유는 "귀하를 대신하여 캘리포니아 주지사 제리 브라운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모든 지지 편지" 때문이라고 설명했다.[93]
기사에 담긴 주장을 전화로 들으면서 존스는 함께 있던 사원 멤버들에게 "오늘 밤 떠난다. 조지타운(가이아나)에 통보하라"는 메모를 썼다.[93] 존스가 가이아나로 떠난 후, 그는 사원 멤버들에게 그를 따라가라고 권유했다. 1978년 말까지 인구는 약 1,000명으로 증가했다.[89][94] 그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외부 세계의 사악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대 낙원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존스의 명령 하에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인권침해가 있었다. 신도들은 일주일에 6일, 오전 6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으며 하루 작업이 끝나면 사회주의 교육이나 공산권 뉴스에 대한 존스의 '논평' 등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존스는 이 일정을 북한의 시스템과 비교했는데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신도들은 이곳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탈출에 관한 위협과 억압적인 상호감시 체제로 인해 아무도 탈출할 수 없었다.
1978년 11월 17일, 사원 내 학대 혐의를 조사하던 레오 라이언 하원의원이 존스타운을 방문했다.[96] 그의 방문 동안, 많은 사원 멤버들이 그와 함께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고,[97] 11월 18일, 일부는 라이언과 함께 포트 카이투마의 지역 활주로로 향했다.[98] 그곳에서 그들은 사원 경비원들에게 가로막혔고, 경비원들은 그들을 향해 발포하여 라이언, 세 명의 NBC방송국 기자, 그리고 탈주자 한 명을 살해하고 라이언의 보좌관 재키 스피어를 포함한 9명을 부상시켰다.[100][99] 사건의 총격 몇 초가 NBC 카메라맨 밥 브라운(사건으로 사망한 기자 중 한 명)에 의해 비디오로 촬영되었다.[99] 존스는 라이언 의원이 귀국 뒤 미국 정부에 실상 보고는 불 보듯 뻔하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일을 벌였다.
현지 생활에 불만을 가진 버논 고스니(전 하와이 주 경찰관, 1953년~2021년)라는 신도가 조사단 중 한명에게 쪽지를 전달하여 존스타운의 실상을 알렸다.
2. 5. 집단 자살 (1978년 11월 18일)
1978년 11월 18일, 짐 존스는 신도들에게 집단 자살을 강요했다. 무장 경비원들이 신도들을 둘러싼 가운데, 신도들은 청산가리를 탄 음료를 마셨다. 일부 어린이들에게는 강제로 독극물을 먹였으며, 일부 신도들은 총을 맞거나 목이 졸려 사망했다.[101][102] 존스 자신은 머리에 총을 맞은 채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존스는 이 사건 이전에 '하얀 밤'(white night)이라는 이름으로 신도들에게 수십 차례에 걸쳐 집단 자살 연습을 시켰다.[101][102] 1978년 11월 18일은 연습이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 이 집단 자살로 총 914명이 사망했고, 그 중 276명은 어린이였다. 사망자들의 연령대는 최소 2세부터 최고 84세까지 다양했다.[103]
3. 인민사원 집단 자살 원인 분석
짐 존스는 파더 디바인과 국제 평화 선교 운동에 대해 광범위하게 읽었다.[16] 존스와 인민사원 구성원들은 디바인을 여러 번 방문했고, 존스는 그의 저술과 설교 녹음 테이프를 연구했다.[17] 1959년 존스는 디바인이 설교에서 사용했던 새로운 격정적인 수사 스타일을 시험했는데,[18] 이는 인민사원의 근본적인 "우리 대 그들" 메시지의 시작을 알렸다.[18] 존스는 카를 마르크스의 ''고타 강령 비판''을 인용하며,[19] 예수를 공산주의자로 묘사하는 동시에 성경의 많은 부분을 공격했다.[19]
인민사원은 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14] 구성원들이 혈연 관계가 아닌 인민사원 "가족"과 함께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도록 요구했는데,[14] 이는 구성원들을 외부와의 접촉으로부터 떼어내고 인민사원과 그 목표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 그들의 삶을 전환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14] 존스는 "종교적 공동체주의"를 제안했는데, 구성원들이 인민사원에 물질적 소유물을 기부하면 인민사원이 해당 구성원들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14]
인민사원은 종교로 위장했을 때조차 대부분의 미국 중서부 사람들을 공산주의 이상으로 개종시키는 데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20] 쿠바 혁명을 찬탄한 존스는 1960년 쿠바를 방문했지만 실패했다.[20] 인민사원의 종교적 메시지는 이 기간 동안 무신론과 존스가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이라는 미묘한 개념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바뀌었다.[21] 존스는 1961년 핵 공격으로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가 파괴되는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22] 1962년 ''에스콰이어'' 잡지 기사에서 핵전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언급된 브라질 벨루오리존치로 이동할 것을 고려했다.[23]
존스는 후기 비의 운동, 윌리엄 브래넘, 파더 디바인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은 신학을 발전시켰으며, 존스 개인의 공산주의적 세계관을 불어넣었다. 존스는 자신의 신념을 "사도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종교학 교수 캐서린 웨싱어에 따르면, 존스는 1960년대 후반까지 자신의 복음이 사실은 공산주의라는 것을 숨겼다. 존스는 "종교의 아편에 취해 있는 사람들은 계몽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는 그가 사회주의로 정의했다. 존스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조롱하고, 성경을 억압의 도구로 거부했다.[26] 존스는 자신이 참된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라고 주장했다.[28]
존스는 자신의 신성에 대한 생각을 점점 더 널리 알렸고, 심지어 회중에게 "나는 하나님 사회주의자로 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며,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비전을 달성하도록 허가했다. 존스는 추종자들에게 임박한 종말론적 대량 학살적 인종 전쟁과 핵 전쟁에 대해 자주 경고했다. 그는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구제할 수 없는 "바빌론"이라고 가르쳤다.
존스는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후 불법 약물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의 편집증을 더욱 심화시켰다. 존스는 추종자들을 통제하고 조종하기 위해 점점 더 공포를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화재, 교통사고, 죽음 또는 부상이 닥칠 것이라고 자주 예언했다.
인민사원은 신자들 간에 불평등한 정책 결정력을 가진 복잡한 권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인민사원 신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의 세뇌에서 차용한 마인드 컨트롤 기술에 익숙해져 갔다.[160] 1970년대, 인민사원은 사회주의 모델을 위해 보다 형식적인 계층 구조를 형성했다.[161] 그 정점은 교단의 직원, 그리고 인민사원을 위해 최중요 기밀을 은밀하게 수행하는, 대학에서 교육받은 확실하게 순종적인 8~10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선택된 그룹이었다.[161] 이 그룹은 평등주의 교단에 있으면서 엘리트주의라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교단의 비밀 경찰로 간주되었다.[161]
인민사원의 기획 위원회(Planning Commission영어)는 교단의 이사회였다.[167][168] 이 위원회는 매일 교회의 운영에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중요한 의사 결정, 재정적, 법적인 계획, 교단 조직의 감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169]
일반 신자 그룹은 노동 계급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70~80%가 흑인이었다.[161] 그들 대다수는 교단의 반사회주의적 접근 방식에 매료되었다.[161] 존스는 수십 명의 거의 백인으로 구성된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161] 그들은 20명에서 30명 정도였으며, 법률, 회계, 간호, 교육, 음악, 경영의 지식과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161]
집단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다음과 같은 다양한 분석들이 연구, 주장되고 있다.
- 짐 존스의 카리스마
- 신도들의 사회경제적 배경
- 사이비 종교의 특징
- 집단 심리 및 낯선 환경
자세한 내용은 현재 주장된 분석들 섹션을 참고하라.
또한, 인민사원 신도였던 팀 카터는 대학살설을 주장하였으나, 신빙성에 의심이 간다. 자세한 내용은 대학살설 섹션을 참고하라.
3. 1. 현재 주장된 분석들
인민사원 신도들의 집단자살은 교주의 명령에 따라 자살까지 할 수 있는 사이비 종교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연구된 이론들은 다음과 같다.- 짐 존스의 카리스마: 일제강점기 백백교 교주 전용해처럼, 짐 존스의 카리스마가 신도들을 지배했다는 이론이다.
- 신도들의 사회경제적 배경: 인민사원 신도들 대부분이 빈민층 출신이라 삶에 미련이 없었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 사이비 종교의 특징: 교주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사이비 종교의 특징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이론이다.
- 집단 심리 및 낯선 환경: 젊은 여성이 어린이와 함께 음독자살한 사건과 정글이라는 낯선 환경이 다른 신도들에게 일종의 신드롬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가이아나 정글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주위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258]
3. 2. 대학살설
인민사원 신도였던 팀 카터(Tim Carter)는 짐 존스가 신도들에게 집단 자살을 강요했으며, 무장 경비원들이 배치되었고, 아이들에게는 강제로 독극물을 먹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팀 카터가 제시한 근거는 빈약하고, 그가 정부의 학살 개입설과 은폐설을 지지하고 있어 신빙성에 의심이 간다.[260]4. 조직 구조
인민사원은 겉으로는 짐 존스의 독재적인 통제하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구성원 간에 권한이 불평등하게 분배된 복잡한 리더십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 내에서 신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중국의 세뇌에서 차용한 마인드 컨트롤 기술에 점차적으로 노출되었다.[160]
1970년대에 인민사원은 사회주의 모델에 따른 공식적인 계층 구조를 확립했다.[161] 최상위에는 교단의 핵심 임무를 수행하는, 대학 교육을 받은 백인 여성들로 구성된 소수 그룹이 있었다.[161] 이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결과주의 철학에 익숙해져 있었다.[161] 초기 멤버로는 시러큐스 출신의 사회주의자 샌디 브래드쇼가 있었다.[161] 다른 멤버로는 15세부터 공산주의자였던 캐롤린 레이턴,[163] 사회복지부에서 일했던 샤론 에이모스,[164] 존스의 비서였던 패티 카트멜,[165] 해군 출신 평화주의자 테리 부포드[166] 등이 있었다.[161] 이 그룹은 평등주의를 표방하는 교단 내에서 엘리트주의자로 여겨졌고, 비밀경찰과 같다는 인식을 받았다.[161]
인민사원의 통치 위원회는 기획 위원회였다.[167][168] 구성원은 빠르게 50명에서 1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167][168] 이들은 주중에 레드우드 밸리의 여러 장소에서 회의를 가졌고, 때로는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했다.[167] 기획 위원회는 핵심 의사 결정, 재정 및 법률 계획, 감독 등 교단의 일상적인 운영을 담당했다.[169] 기획 위원회는 다른 여러 위원회를 감독했는데, 그중에는 가짜 인물들의 이름으로 미국 전역의 정치인들에게 대량의 편지를 보내는 일을 담당했던 '전환 위원회',[170] 탈퇴자 알 밀스와 지니 밀스 부부를 상대로 활동을 벌였던 '머틀스 위원회' 등이 있었다.[171]
외부인들이 "병사들"이라고 불렀던 일반 신도 그룹은 주로 흑인 노동자 계급 구성원들로, 70~80%를 차지했다.[161] 이들은 회의를 위한 의자를 배치하고, 헌금함을 채우는 등의 일을 했다.[161] 이들 중 상당수는 교단의 준 사회주의적 접근 방식에 매료되었다.[161] 존스는 또한 법률, 회계, 간호, 교육, 음악, 행정 등의 분야에서 기술을 가진, 주로 백인으로 구성된 20~30대 특권층 구성원 수십 명을 주변에 두었다.[161] 이들은 홍보, 재정 업무, 그리고 더 일상적인 잡무를 수행하며, 좋은 급여를 받는 외부 직업에서 얻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교단에 냈다.[161]
5. 재정 및 신도 확보
짐 존스는 인민사원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신도들에게 헌금을 요구하고, 기부금을 받거나 장신구를 판매했다.[173] 존스는 자신의 옷 조각, 치유 오일, 반지, 열쇠고리, 로켓 펜던트 등을 판매하여 수입을 올렸다.[173] '진실 기업'이라는 다이렉트 메일 부서를 만들어 인민사원 예배 참석자나 라디오 프로그램 청취자들에게 매달 3만~5만 통의 편지를 보내 기부를 받았다.[173] 기부금은 미국 본토, 하와이, 남아메리카, 유럽 등지에서 들어왔으며, 최대 하루 300~400달러의 수입을 기록했다.[173]
존스는 신도 모집을 위해 캘리포니아 고속도로를 따라 버스 여행을 하며 모금 활동을 벌였다.[172] 무장 경비원이 동승한 특별 버스를 탔으며, 연간 순수입 목표를 100만 달러로 정했다.[172] 존스는 템플의 마르크스주의 목표는 숨기고, 자신의 '영적 치유' 능력을 보여주는 팜플렛을 배포하며 사람들을 모았다.[172] 이 과정에서 템플 회원들은 가짜 치유를 하기도 했다.[172] 1973년, 인민사원은 '브라더후드 레코드'라는 자회사를 만들어 템플의 청소년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음악을 제작, 판매했다.[175]
존스는 신도 수를 늘리기 위해 '치유' 능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을 현혹했다.[131] 존스와 템플 신도들은 의도적으로 치유를 조작했는데, 이는 사람들의 믿음을 높이고 재정적 자원을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131] 이 '치유'에는 닭 간 같은 동물 조직이 사용되었으며, 존스는 이것이 암 조직이라고 말했다.[132]
존스는 조지 모스콘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짐 존스를 도시 주택 사업 위원으로 위촉하는등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다.[2] 이는 존스가 도시 빈민 계층 구호 활동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6. 정치적 영향력
인민사원은 캘리포니아 주,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0년대 중반, 인민사원은 캘리포니아 주 여러 도시에 지부를 설립하며 세력을 확장했다.[36]
인민사원은 조지 모스콘, 제리 브라운, 윌리 브라운, 하비 밀크 등 캘리포니아의 주요 정치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73] 이들은 인민사원의 선거 운동 지원, 시위 참여 등 정치적 활동에 힘입어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특히, 1975년 조지 모스콘의 샌프란시스코 시장 선거에서 인민사원의 유권자 동원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모스콘은 당선 후 짐 존스를 샌프란시스코 주택 당국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했다.[71][72]
존스는 주택 당국 위원장으로서 샌프란시스코의 인터내셔널 호텔 세입자 퇴거 반대 투쟁을 주도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했다.[78] 또한, 존스와 인민사원은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 후보를 지지했으며, 존스는 월터 먼데일 부통령 후보와 비공개 회동을 가졌고, 로잘린 카터 영부인과 여러 차례 만나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75][76][77]
하지만 인민사원의 정치적 영향력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존스는 과격 단체인 심비오니스 해방군을 칭찬하고, SLA 지도자들이 샌프란시스코 인민사원 회의에 참석하면서 경찰의 의심을 받았다.[81] 윌리 브라운은 인민사원을 여러 번 방문하고 존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지만,[74][73] 이는 후에 인민사원의 범죄 행위가 드러나면서 비판을 받았다. 하비 밀크 역시 인민사원 정치 집회에서 연설하고 존스를 칭찬하는 편지를 지미 카터에게 보냈지만,[84][85][86][87] 인민사원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그의 판단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7. 비판과 논란
1970년대부터 존스 인민사원을 가까스로 탈퇴한 사람들에 의해 인민사원의 실상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존스가 신도들의 재산을 훔치고 있고, 그의 기적 치유는 조작이며, 신도들을 폭행하고,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55] 폭로가 이어지자, 신문기자, 관계 당국, 정치가들이 존스 교주의 인민사원 건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짐 존스는 연설을 통해 탈퇴자들이 거짓 증언을 일삼고 있으며 바깥 세상이 자신들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라고 주장했지만, 점점 더 많은 탈퇴 신도들에 의해 인민사원에서 일어나는 폭행과 학대 사례가 폭로되었으며, 신도의 일가친척들은 존스가 신도들의 탈퇴를 신도의 의지에 반하여 폭력으로 봉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72년,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와 인디애나폴리스 스타는 킨솔빙 시리즈(Kinsolving series)로 불리는 레스터 킨솔빙의 7부작 기사 중 처음 4편을 게재했는데, 이는 인민사원에 대한 최초의 공개 폭로였다.[55] 킨솔빙은 교회 거래, 치유 주장에 대한 내용, 존스가 교회에서 성경을 내던지며 "이 검은 책은 2,000년 동안 여러분을 억압해 왔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의식에 대해 보도했다.[56] 인민사원 신도들은 이그재미너를 상대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신문 편집자를 괴롭히고, 이그재미너와 스타를 상대로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다.[55] 두 신문 모두 4편을 게재한 후 시리즈 게재를 중단했다.[55]
몇몇 탈퇴 사건이 발생했는데,[58] 특히 1973년에는 "8인조"로 알려진 8명의 젊은 회원들이 함께 탈퇴했다.[59] 8인조는 잠재적 탈퇴자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존스가 그들을 찾기 위해 수색대를 보낼 것이라고 의심했다.[59] 존스는 여러 수색대를 고용했는데, 그중 하나는 임대 비행기에서 고속도로를 스캔했다.[60] 8인조는 무기가 실린 트럭 3대를 몰고 캐나다로 향했고, 미국 101번 국도를 피했다.[59] 그들은 몬태나의 언덕으로 가서 불만을 기록하는 긴 편지를 썼다.[60]
전 인민사원 회원 지니 밀스는 존스가 30명의 회원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모아 "우리의 사도적 사회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자살하고 괴롭힘 때문에 현재 사회주의 집단이 존재할 수 없다는 메모를 남겨야 한다"고 선언했다고 썼다.[62] 존스는 격노하며 권총을 기획위원회에 휘두르며 8인조를 "트로츠키주의 탈퇴자"와 "코카콜라 혁명가"라고 불렀다.
8. 여파
존스타운 집단 자살로 총 914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276명은 어린이였다.[232] 이 사건은 2001년 9월 11일 미국 동시 다발 테러 사건 이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었다.[233][234][235] 이 수치에는 같은 날 밤 조지타운의 인민사원 본부에서 사망한 4명도 포함된다.[236]
인민사원의 샌프란시스코 본부는 언론과 희생자 유족에게 둘러싸였다.[237]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 중 하나였으며, 타임지 등 여러 잡지 표지와 수개월 동안 신문 1면에 등장했다.[238]
사건 이후, 미국에 남아있던 신도들은 존스타운 생존자들로 구성된 "테러 조직"의 공격 대상이 될 위험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239][240] 1979년에는 미국 의회 보좌관이 존스타운에서 세뇌된 120명의 암살자들이 살해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41]
인민사원 내부자였던 마이클 프로크스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인민사원의 재산을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242][243] 집단 자살 사건 4개월 후인 1979년 3월 기자 회견을 열고 자살했다. 그는 기자 회견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후 화장실에서 총으로 자살했다.[244]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많은 관련 인물들이 목숨을 잃었다. 폴라 아담스는 가이아나 주재 미국 대사 로렌스 "보니" 만과 결혼했으나,[245][246] 1983년 10월 24일, 만은 아담스와 자신의 아이를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교단을 탈퇴한 해럴드 코델은 집단 자살로 가족 20명을 잃었고,[247] 버논 고스니는 아들 마크(당시 5세)를 잃었다.[248]
인민사원의 집단 자살은 신흥 종교가 파멸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브라이언 R. 윌슨은 실제로 이러한 사건을 일으킨 종교 단체는 인민사원, 브랜치 다비디안, 태양 사원, 옴진리교, 헤븐스 게이트 5개뿐이라고 지적했다.[249]
9. 사회적 영향
인민사원 사건은 사이비 종교의 위험성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사회적 책임 간의 균형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며, 한국 사회에도 큰 교훈을 준다.
존스타운에서의 집단 자살은 신흥 종교가 파멸적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249] 이 사건은 언론과 희생자 가족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으며,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238] 타임지와 같은 주요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수개월 동안 신문 1면에 오르내렸다.[238]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킨 종교 단체는 인민사원, 브랜치 다비디안, 태양 사원, 옴진리교, 헤븐스 게이트 등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249]
인민사원 사건은 사이비 종교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고 건전한 종교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이러한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되, 종교 단체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10. 기타
인민사원에 대한 가장 방대한 자료인 [http://jonestown.sdsu.edu/ Alternative Considerations of Jonestown & Peoples Temple]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 짐 존스 부부가 두 명의 한국 어린이를 입양했다는 기록이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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実証は無く、実態は3,000から5,000人程度であったと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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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し、イジェムズは早々に組織化された人民寺院を辞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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ニューヨーク州シラキュース (ニューヨーク州)|シラキュース出身で24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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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時31歳で、15歳の時にジョーンズとの間に子供をもうけてから、共産主義者であった。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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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会サービス部門で働い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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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ョーンズの秘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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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軍軍人の子供で平和主義者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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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당일 인터뷰에서 그는 방문 목적을, "이곳에 있는 미국인의 보건과 복지를 조사할 것입니다" 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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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der or Suicide: What I Saw _ by Tim Ca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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