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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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 틸리히는 1886년 독일에서 태어나 1965년 사망한 독일계 미국인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루터교 목사로 임명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군종 장교로 참전했다. 이후 베를린 대학교 등에서 강사, 교수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유니언 신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을 연구했다. 틸리히는 '조직 신학', '용기의 힘', '신앙의 역동성' 등의 저서를 통해 신앙을 '궁극적 관심'으로 정의하고, '상관관계의 방법'을 제시하며 기독교 신학과 현대 사회의 실존적 문제들을 연결하려 했다. 그의 신학은 한국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폴 틸리히는 1886년 8월 20일, 당시 독일 (현재의 폴란드 스타로시에들레) 브란덴부르크주 스타르체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하네스 틸리히는 프로이센 복음주의 교회의 보수적인 루터교 목사였고, 어머니 마틸데 뒤르젤렌은 라인란트 출신으로 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다.
폴 틸리히는 신정통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영향을 받았다. 불트만은 현대인들이 성서와 성서 이야기 속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대적이고 철학적이며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다시 써야 현대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여겼다. 틸리히는 성서의 "비신화화"를 요청하는 불트만의 메시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85]
2. 생애
틸리히가 네 살 때, 아버지는 바트쇤플리스 (현재 폴란드의 트르시치스코즈드루이)로 부임했고, 틸리히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1898년, 쾨니히스베르크인데어노이마르크 (현재 폴란드의 호이나)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했다. 그는 기숙사에서 외롭게 지내면서 성경을 읽었고, 인문주의 사상을 접했다.[10]
1900년, 틸리히의 아버지는 베를린으로 전근했고, 1901년에 틸리히는 베를린 학교로 전학하여 1904년에 졸업했다. 전년도 9월, 어머니는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베를린 대학교(1904년), 튀빙겐 대학교(1905년),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1905-1907년) 등 여러 대학교를 다녔다. 1911년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PhD) 학위를, 1912년 할레-비텐베르크에서 신학 학위를 받았다.[10] 박사 학위 논문은 셸링과 종교사였다.[11] 대학 재학 중 그는 베를린, 튀빙겐, 할레의 윙골프 기독교 학생회 회원이었다.[12]
1912년, 브란덴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로 임명되었다. 1914년 9월, 마르가레테 ("그레티") 베버와 결혼했고, 10월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종장교로 독일 제국군에 입대했다. 참호에서 군종 장교로 복무했고, 전투 외상으로 세 번이나 입원했으며, 용맹함으로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3]
전후,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 사강사가 되었다. 1924년 3월, 한나 베르너-고츠초우와 결혼했다. 1924년부터 1925년까지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 부교수로 재직하며 체계적인 신학을 발전시켰고, 루돌프 불트만과 마르틴 하이데거와 관계를 발전시켰다.[16] 1925년부터 1929년까지 드레스덴 공과대학교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신학 교수를 지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철학 및 사회학 교수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재직 동안, 독일 전역을 여행하며 공개 강연을 했고, 이는 나치 운동과 충돌하게 만들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된 지 10주 후인 1933년 4월 13일, 카를 만하임,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제3제국"의 "적"[22]으로 지목되어 해고되었다.[23][24] 라인홀드 니부어는 1933년 여름 독일을 방문하여 틸리히에게 뉴욕 유니언 신학교 교수를 권했고, 틸리히는 이를 받아들였다.
47세의 틸리히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933년부터 1955년까지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1940년 철학적 신학 교수로 승진하여 미국 시민이 되었다.[1] 유니언에서 ''경계선에서''(1936), ''프로테스탄트 시대''(1948), ''기초의 흔들림''(1948) 등을 출판하며 명성을 얻었다.
1951년 ''조직 신학'' 1권(시카고 대학교 출판부)과 1952년 ''용기의 힘''(예일 대학교 출판부)은 틸리히에게 국제적인 학문적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1955년 하버드 신학대학원 교수가 되었고, 1959년 ''타임'' 표지에 실렸다.[27] 1961년 예술, 종교, 현대 문화 협회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28]
1962년 시카고 대학교 존 누빈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조직 신학'' 3권은 1963년에 출판되었다. 1965년 10월 22일, 심장마비 발병 10일 만에 사망했다. 1966년, 그의 유해는 인디애나주 뉴하모니 폴 틸리히 공원에 안치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86년 8월 20일 독일 브란덴부르크주의 작은 마을 스타르체델에서 루터교회 목사인 아버지 요한 오스카 틸리히와 어머니 빌헬미나 마틸데 사이에서 태어났다. 틸리히의 아버지는 프로이센 출신의 보수적인 루터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라인란트 출신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성향을 가졌다.
1891년 작은 시골에서 자랐으며, 1901년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1902년에는 아버지에 의해 입교의식을 받고 정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4살 때, 그의 아버지는 인구 3,000명의 도시인 바트쇤플리스 (현재 폴란드의 트르시치스코즈드루이)로 부임했고, 틸리히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1898년, 틸리히는 쾨니히스베르크인데어노이마르크 (현재 폴란드의 호이나)에 있는 김나지움에 다녔다. 그는 기숙사에서 외롭게 지내면서 성경을 읽었고, 인문주의 사상을 접했다.[10]
1900년, 틸리히의 아버지는 베를린으로 전근했고, 틸리히는 1901년에 베를린 학교로 전학해 1904년에 졸업했다. 1903년 9월, 그의 어머니는 암으로 사망했다. 1905년 할레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베를린 대학교, 1905년에는 튀빙겐 대학교, 1905년부터 1907년까지는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09년 목사후보생고시에 합격해 수련을 받던 중 브로츠와프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은 셸링과 종교사였다.[11] 1911년 신학 분야의 최고 권위인 신학전문직 학위를 받으면서 대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베를린, 튀빙겐, 할레의 윙골프 기독교 학생회 회원이었다.[12]
2. 2. 제1차 세계 대전과 전후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인들처럼 폴 틸리히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신다는 낙관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었는데, 군목으로 복무하면서 그러한 생각은 깨지게 되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적을 죽이는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13] 이는 당시 유럽인들이 19세기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낙관주의를 갖고 있었지만, 전쟁을 계기로 인간의 잔인성을 목격하면서 불안과 절망을 갖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1914년 9월 28일, 마르가레테 ("그레티") 베버(1888–1968)와 결혼했고, 10월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종장교로 독일 제국군에 입대했다.[13] 전쟁 동안 틸리히는 참호에서 군종 장교로 복무했고, 가장 친한 친구와 수많은 병사들을 프랑스 진흙 속에 묻었다. 그는 전투 외상으로 세 번이나 입원했고, 화재 속에서의 용맹함으로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3]
1919년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 사강사가 되었다.[14]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한나 베르너-고츠초우(당시 결혼한 상태였고 임신 중)를 만났다.[14] 1924년 3월, 그들은 결혼했고, 둘 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15]
1924년 틸리히는 마르부르크 필리프 대학교의 부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16] 다음 해에는 《종교적 정황》이 출판되어 학계에서 유명해졌으며, 1929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철학과에서 사회학 정교수로 임명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당시 그가 가르친 내용은 칸트, 헤겔, 아퀴나스 등 철학자들의 가르침, 사회윤리학 등이 있다.[17]
2. 3. 나치와의 갈등과 미국 망명
1933년 독재자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나치 때문에 종교 사회주의 이론가였던 폴 틸리히는 비유대인 중에서는 최초로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그의 책들이 소각당하는 수모를 당했다.[83] 라인홀드 니부어는 1933년 여름에 독일을 방문했고, 틸리히의 해고 소식을 듣고 틸리히에게 뉴욕 시의 유니언 신학교 교수로 합류할 것을 권했고, 틸리히는 이를 받아들였다.
47세의 틸리히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틸리히는 히틀러의 독재와 홀로코스트로 고난받는 동족들과 유대인들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치의 박해가 극심해지면서 1932년 10월 가족과 함께 미국에 가야 했다. 당시 그는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다는 말씀을 묵상했다.
1933년 12월 교수직이 나치에 의해 완전히 박탈당했지만, 1934년 5월 유니언 신학교 측에서 교수로 재임명한 덕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4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1]
2. 4. 미국에서의 활동과 말년
1933년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에서 독재를 시작하면서, 종교 사회주의 이론가였던 폴 틸리히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책들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83]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초청으로 1932년 10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83]
1933년부터 1955년까지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종교 철학 객원 교수로 시작하여 신학, 심층심리학, 문학, 춤, 철학 등 해박한 지식을 가르쳤다. 초기에는 영어가 서툴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실력이 향상되면서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감동받았고, 그는 유니언 신학교의 '스타'가 되었다.[83] 1940년에는 철학적 신학 교수로 승진하여 미국 시민이 되었다.[1]
1955년 정년퇴임 후 하버드 대학교의 특별 교수가 되어 강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신학 박사 학위 준비생들과 토론 및 세미나를 열었다. 1962년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옮겨 매 학기 한 과목씩 네 학기 동안 가르쳤으며,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종교역사에 대한 강의도 했다.
1964년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965년 10월 22일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 강연회에서 〈조직신학자에게 있어서의 종교사의 의미〉라는 마지막 강의를 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매장되었고, 1966년 5월 29일 (성령 강림 주일)에 부인의 요구로 인디애나 주 뉴하모니의 폴 틸리히 공원에 안치되었다.[29][30]
3. 신학 사상
틸리히는 "변증신학의 관점에서 구성되고 철학과 지속적 상호관계를 수행하는 신학 체계의 방법과 구조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85] 그는 "신앙은 현대문화를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고, 현대 문화도 신앙을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문화와 신앙이 서로 상응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의 신학은 변증적인 경향을 보이며, 평범한 일상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신학적 답변을 추구했다.[85] 계시는 종교의 근원으로 이해된다. 틸리히는 '신앙이 가장 높은 수준의 이성'이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언급을 확인하면서, 계시가 이성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계시와 이성의 화해를 추구했다. 인간 주체 경험의 두 축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85]
틸리히는 존재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는 확고한 실존주의자였다.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접근 방식으로 "상호 관계의 방법"(method of correlation)을 제시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그 방법의 목적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실존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86] 무(無)는 구체적인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다루는 실존주의 철학의 주요한 모티프이다. 틸리히는 비존재의 불안(실존적인 고통)이 존재 그 자체의 경험에서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키에르케고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틸리히는 우리가 비존재의 충격에 직면하는 가장 내재적인 성찰의 순간을 말한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것은, 스스로 유한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인 성찰의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무엇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틸리히가 사용하는 현상학적인 용어의 대부분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틸리히는 1933년에 하이데거를 만난 적이 있었다. 또한 틸리히는 조직신학에서 신과 존재에 관한 토론 중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존재론의 기본 틀 일부를 사용했다.[86]
틸리히는 신앙이 거룩함의 체험이라는 점에서는 확실하지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불확실성"을 불가피하게 갖고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배척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지닐 때, '''신앙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을 구현할 수 있다. 그래서 틸리히는 "신앙"이, 모험이 불러오는 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나는 의심을 내적인 요소로 갖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말한다.[87] 틸리히는 상징이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신앙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이다.[88]
폴 틸리히는『조직신학』제1권에서 자기 신학의 목적은 변증적인 관점에서 기술되고, 철학과의 지속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수행된 신학적 체계의 방법과 구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89][90] 신학의 과제는 그리스도 예수 상에 나타난 진리의 영원한 기준과, 개인과 공동체의 변화하는 경험들 곧 실재를 인식함에 있어 다양한 질문들과 범주들 사이의 중재하는 것이라고 한다.[91] 허호익 교수는 폴 틸리히의 신학방법론으로서 상관의 방법을 학술적으로 잘 진술하였다.[92]
폴 틸리히는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용기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관계, 즉 절대적 신앙을 전제한다고 말했다.[57] 절대적 신앙은 유신론적 신의 개념을 초월할 수 있으며, 세 가지 요소가 있다.
3. 1. 상관관계의 방법
틸리히는 "상관관계의 방법"을 통해 실존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을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설명하고자 했다.[86] 이 방법은 상황 속 문제, 메시지 속 질문, 인간 실존과 신적 자기 계시를 상호 연결한다.[92]
틸리히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상호 의존적으로 보았다. 그는 신을 인간에게, 혹은 인간을 신에게 일방적으로 의존시키지 않았다. 실존적 질문은 신학적 계시 진리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인간은 곤경 분석으로 신의 계시를 끌어낼 수 없으며, 질문 없는 해답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연주의적, 초자연주의적 설명을 모두 거부했다.[92]
신인(神人) 관계의 상관성은 '하나님의 대답과 인간의 질문' 사이의 관계로 설명된다. 인간은 질문에 대한 해답의 충격 속에서 존재 질문을 던진다. 계시는 항상 질문될 것이며, 이미 제기된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이는 기독교 메시지와 인간 실존 상황의 상징적 표현이다. 메시지와 상황은 상관관계를, 대답과 질문의 관계는 실존적 관계를 맺는다. 대답은 내용적으로 계시 사건에, 형식적으로 질문 구조에 의존한다.[92]
틸리히는 '상관'을 데이터 상응성, 개념들의 논리적 상호 의존성, 구조적 전체 속 사물/사건들의 상호 의존성이라는 세 가지 의미로 사용했다. 신학에서 '상관'은 종교적 지식, 종교 경험 속 신과 인간 관계, 신과 세계에 관한 진술 결정에 적용된다. 상징과 상징되는 것,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하나님, 궁극적 관심과 그것을 주는 것 사이의 논리적, 실제적 상관관계를 의미한다.[92]
틸리히는 상관 관계의 근거와 의미를 설명한 후, 기독교 신앙과 인간 실존 관계 설정에 있어 잘못된 세 가지 방법을 지적하고 거부했다. 그의 상관 방법은 다음 오류들을 극복한다.[92]
틸리히는 이 오류들을 지적하며, 상관관계 방법이 질문에서 대답을 추론하거나 대답에서 질문을 연역하지 않고, 질문과 대답을 '상관'시키는 제4의 방법임을 강조한다.[92]
결국 틸리히의 상호관계 방법은 기독교 신앙 내용을 실존적으로 질문하고 신학적으로 대답하여 상호 의존시키는 것이다. 칼 바르트와 달리 틸리히는 인간의 물음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문화적 형식들로 둘러싸여 자신과 자신의 이해, 관심, 불안을 표현한다.[92]
틸리히 체계는 상관관계 원리를 축으로 한다. 그는 종교와 문화, 교회와 사회, 신학과 철학 등의 경계에서 양자를 상관시키고 통합하려 했다. 틸리히는 현 시대 질문에 기독교 진리로 답하는 것이 신학 역할이며, "철학의 질문과 신학의 대답" 관계가 여기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틸리히는 외부 강제 신앙 상태를 '''타율'''(헤테로노미)이라 칭했다. 타율은 독선적이며 자유를 억압한다. 스스로 서는 상태는 '''자율'''(아우토노미)이다. 자율은 이성에 따르고 개인의 존엄성을 내세운다. 근대에서 현대는 자율 시대이다. 그러나 자율적 이성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타율과 자율을 극복하는 최고 규범은 (테오노미)이다. 신율은 유한성 자각, 자기 근저 투시, 신적 힘에 따르는 상태다. 타율처럼 강요되지 않고, 자율처럼 방황 없이 자기를 완성한다. 신율로 이끄는 것이 틸리히 신학 목적이다.
3. 2. 존재의 근거로서의 신
틸리히는 전통적인 유신론의 신 개념을 비판하고,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로서의 신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신이 존재 자체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힘이라고 주장했다.[86] 신을 어떤 존재자(최고의 존재자 포함)로 이해하는 것은 우상 숭배이며, 신은 존재와 본질을 초월한다고 보았다. 틸리히는 '신 위의 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통적인 유신론의 신을 넘어선, 의심과 불안 속에서도 경험되는 존재의 힘을 강조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유한한 존재를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존재 자체이거나 "존재의 토대"이다. 틸리히는 이를 하나님(신적 존재)과 동일시한다.[86]
틸리히는 신앙이 거룩함의 체험이라는 점에서는 확실하지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불확실성"을 불가피하게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지닐 때, '''신앙의 역동성'''을 구현할 수 있다. 그래서 틸리히는 "신앙"이, 모험이 불러오는 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나는 의심을 내적인 요소로 갖는 "'''궁극적 관심'''"이라고 말한다.[87]
3. 3.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신앙
틸리히는 신앙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으로 정의했다.[31] 신앙은 인간 정신의 가장 중심적인 행위이며, 전인격적인 참여를 요구한다.[32] 그는 신앙이 불확실성과 의심을 내포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통해 '신앙의 역동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3]
틸리히에 따르면, 무신론자도 궁극적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이 관심은 신앙 행위에 있을 수 있다.[34] 그는 종교를 기독교에 한정하지 않고, 사람이 무엇에 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것에 의해 근본적으로 지지받을 때, 그러한 것을 종교라고 불렀다.[35] 이러한 관점은 비종교적인 사람들까지 포괄하여, 종교가 인간에게 결정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틸리히는 진정으로 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은 "우리의 존재, 혹은 비존재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35] 즉,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하여 존재의 근거가 되는 '존재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천상에 살면서 사람을 내려다보는 과 같은 생각은 우상 숭배라고 비판하며 배제했다.[35]
틸리히는 신앙과 의심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35] 신은 이론적으로 증명될 수 없으므로 신앙은 실존적인 결단일 수밖에 없으며, 불확실성과 의심을 내포한다. 그러나 의심 속에서도 믿는 것은 부정을 통해 시작되어 부정을 능가하는 긍정이며,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르트르가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별것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달리, 틸리히에게 신앙은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이며, 신과 관계하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35] 신앙은 단순한 판단이나 인식을 넘어 전인격적인 변혁을 가져오는 것이다. 볼테르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발명해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틸리히에게 신은 믿음에 따라 존재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서 작용하는 것이다.[35]
3. 4. 실존과 그리스도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이 본질로부터 소외된 상태라고 보았다. 유한한 존재는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 필연적으로 본질과 불일치하게 되며, 이는 죄와 소외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과 실존의 간극을 극복한 '새로운 존재'(New Being)이며, 그를 믿는 것은 소외를 극복하고 화해와 희망을 얻는 길이라고 주장했다.[34]
4. 주요 저서
- 《종교적 상황》(''The Religious Situation'') (1925년)
- 《역사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History'') (1936년)
- 《개신교의 기원》(''The Protestant Era'') (1948년)
- 《흔들리는 터전》(''The Shaking of the Foundations'') (1948년)
-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1951년–1963년)
:** Volume 1 (1951년)
:** Volume 2: 실존과 그리스도(''Existence and the Christ'') (1957년)
:** Volume 3: 삶과 영혼: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Life and the Spirit: History and the Kingdom of God'') (1963년)
-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The Courage to Be'') (1952년)
- 《사랑, 힘, 그리고 정의: 존재론적인 분석과 윤리적인 적용》 ''Love, Power, and Justice: Ontological Analysis and Ethical Applications'' (1954년)
- 《성서적인 종교와 궁극적인 실재 찾기》(''Biblical Religion and the Search for Ultimate Reality'') (1955년)
-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 (1955년)
- 《신앙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 (1957년)
- 《문화의 신학》''Theology of Culture'' (1959년)
- 《기독교와 세계 종교의 만남》(''Christianity and the Encounter of the World Religions'') (1963년)
- 《도덕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Morality and Beyond'' (1963년)
- 《지금 이 순간의 영생》''The Eternal Now'' (1963년)
- 《궁극적 관심: 틸리히와의 대화》''Ultimate Concern: Tillich in Dialogue'' (1965년)
- 《절대적인 것을 찾아서》''My Search for Absolutes'' (1967년, 유작)
- 《종교의 철학》 (1969년)
- 《종교의 철학에서 종교적 개념의 정복》
- 《문화의 신학에 관한 고찰》
- 《1936년에 쓴 나의 여행기: 두 세계 사이에서》''My Travel Diary 1936: Between Two Worlds'' (1970년)
- 《기독교 사상의 역사: 그것의 유대적이고 헬레니즘적인 기원에서부터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From its Judaic and Hellenistic Origins to Existentialism'' (1972년)
- 《기독교 사상의 역사》''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1968년)
- 《과학의 체계》''The System of the Sciences'' (1981년)
- 《틸리히의 핵심》''The Essential Tillich'' (1987년)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 《흔들리는 터전》, 《영원한 지금》, 《새로운 존재》: 김광남 역, 뉴라이프.
- 《기독교 사상사》: 송기득 역, 대한기독교서회.
5. 비판과 평가
폴 틸리히의 신학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듀크 대학교의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와 윌리엄 헨리 윌리몬 교수는 1999년에 쓴 《외국인 거주자》(Resident Alience영어)[93]에서 틸리히를 "최후의 위대한 19세기 신학자"라고 묘사하면서, 틸리히가 19세기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C. S. 루이스는 틸리히가 성서 이야기의 신화적인 용어보다 실존주의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을 비판했지만, 틸리히가 기독교 전통에서 극단적으로 벗어났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종교적으로 정통주의자들은 틸리히를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상가로 여겼다. 시드니 후크는 틸리히의 신관이 스피노자나 헤겔과 같으며, 이들은 무신론으로 비난받았다고 주장했다.[94] 과정신학자인 루이스 S. 포드는 틸리히의 비인격적인 신 개념이 유대-기독교 전통보다는 동양 종교의 신 개념에 가깝다고 비판했다.[95]
마르틴 부버의 제자인 말콤 다이아몬드는 틸리히의 접근 방식이 신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인격적인 "필연적 존재"로 축소한다고 비판했다.[75] 프로테스탄트의 바르트주의 분파는 틸리히의 상관관계 이론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중심주의적으로 축소한다고 비판했다. 틸리히는 바르트의 신학적 접근 방식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외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76]
일부 보수적인 복음주의 기독교는 틸리히의 사상이 범신론이나 무신론에 가깝다고 비판한다.[78] 『복음주의 신학 사전』은 틸리히가 범신론자이거나 무신론에 가깝다고 평가했다.[79] 틸리히의 옹호자들은 틸리히가 "당신은 받아들여졌다"는 설교에서 은총의 경험을 묘사하는 등 고전적인 기독교적 관점을 명확히 표현했다고 반박한다.[80]
반면, 틸리히는 대중 교육과 설교를 통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설교는 열렬한 반응을 얻었으며,[66] 그는 빌리 그래함의 부흥회에 참석할 의향이 있는 유일한 교수였다.[67] 틸리히는 에살렌 연구소의 초기 리더였으며,[69] 뉴에이지 운동에서 "존재의 근거"와 같은 그의 용어들이 사용되기도 한다.[70]
6. 한국 신학에 미친 영향
폴 틸리히의 사상은 1960년대 이후 한국 신학계에 소개되어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상관관계 방법론은 한국적 신학 형성의 중요한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의 실존주의적 신학은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해 실존적 불안과 소외를 겪는 한국인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다. 그의 사상은 박봉랑, 유동식, 변선환 등 한국 신학자들의 토착화 신학, 민중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82]
7. 정치적 관점
틸리히는 사회주의를 지지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6] 1919년에는 출판물을 통해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장하며, 사회주의 구조가 기독교를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30년경 라인홀드 니부어와 함께 "사회주의 기독교 펠로쉽"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기독교 윤리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소외 이론에 공감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정답이라는 역사적 결정론은 거부하였다.
틸리히는 나치즘을 피, 흙, 사회 단체를 3대 기본 신화로 삼는 정치적 낭만주의의 한 형태로 비판했다.[36]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8. 어록
"예수를 가장 효과적으로 위협하고 그분을 죽음에로 몰아갔던 것은 그분의 시대의 "종교적 순응주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교회 안에서도 다르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회들 역시, 비록 그들이 오는 세대에 대해 증언하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오는 세대를 대표하고 있을지라도, 이 세대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은 이 세대의 부패와 그것의 선과 악의 혼합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역사는 교회의 부패에 대한 끊임없는 증언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순응하지 말라는 바울의 경고는 또한 교회에도 해당됩니다."[96]
"모든 심각한 의심과 진리에 대한 실망속에는 아직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당신의 불안을 너무 빨리 해소하려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 유혹자가 당신의 교회이든 당신이 속한 당파이든 아니면 당신의 부모때부터의 전통이든 간에 정말 당신 자신의 진리가 아니면 거기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예수와 함께 갈 수 없다면 모든 심각함으로 (진지한 회의주의자였던) 빌라도와 함께 가십시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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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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