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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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국은 7세기 후반 도나우강 하류 지역에 건국되어 1018년 동로마 제국에 멸망할 때까지 존속한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1185년 아센 왕조의 반란으로 건국되어 1396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이어진 제2차 불가리아 제국으로 구분된다. 제1차 제국은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의 연합으로 시작되어 기독교를 수용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며 발칸반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과 내부 분열로 멸망했다. 제2차 제국은 아센 왕조에 의해 부활하여 한때 발칸반도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몽골의 침입과 오스만 제국의 팽창으로 인해 쇠퇴하여 결국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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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은 7세기 초에 건국되어 9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티베트의 고대 왕국으로, 당나라와 빈번한 외교 및 전쟁을 벌였으며, 8세기 후반에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종교적 갈등과 왕위 계승 분쟁으로 멸망했다.
불가리아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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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정식 국호 | 불가리아 공화국 |
현지 이름 | 불가리아 제국 |
데모님 | 불가리아인 |
역사 | |
성립 이전 | 오드뤼사이 왕국 (기원전 460년 ~ 기원후 46년) 트라키아 고대 대불가리아 (632년 ~ 668년) |
존속 기간 (제1제국) | 681년 ~ 1018년 |
존속 기간 (제2제국) | 1185년 ~ 1396년 |
멸망 이후 | 오스만령 불가리아 (1396년 ~ 1878년) |
정치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수도 (제1제국) | 플리스카 (681년 ~ 893년) 프레슬라프 (893년 ~ 972년) 스코페 (972년 ~ 992년) 오흐리드 (992년 ~ 1018년) |
수도 (제2제국) | 터르노보 (1185년 ~ 1393년) 비딘 & 니코폴 (1393년 ~ 1396년) |
국교 (681년 ~ 1204년) | 불가리아 정교회 |
국교 (1204년 ~ 1235년) | 로마 가톨릭교회 |
국교 (1235년 ~ 1396년) | 불가리아 정교회 |
기타 종교 | 텡그리교 슬라브 이교 |
지도자 칭호 (681년 ~ 700년, 852년 ~ 889년, 889년 ~ 919년) | 카나수비기 |
지도자 이름 (681년 ~ 700년) | 아스파루흐 |
지도자 이름 (852년 ~ 889년) | 보리스 1세 |
지도자 이름 (889년 ~ 919년) | 시메온 1세 |
지도자 칭호 (919년 ~ 927년, 980년 ~ 1014년, 1185년 ~ 1190년, 1356년 ~ 1396년) | 차르 |
지도자 이름 (919년 ~ 927년) | 시메온 1세 |
지도자 이름 (980년 ~ 1014년) | 사무일 |
지도자 이름 (1185년 ~ 1190년) | 페터르 4세 |
지도자 이름 (1356년 ~ 1396년) | 이반 스라치미르 |
공용어 | 불가르어 불가리아어 |
2. 역사
불가리아 제국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 제1차 불가리아 제국 (681년 ~ 1018년)
-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기 (1018년 ~ 1185년)
- 제2차 불가리아 제국 (1185년 ~ 1396년)
- 오스만 제국의 지배기 (1396년 ~)

5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슬라브인과 불가르족이 모에시아를 침략했다.[1] 681년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족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강화 조약을 통해 도나우강 하류 남북 지역에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건국했다. 9세기 크룸 치세에 불가리아는 영토를 확장하고 법과 질서를 확립했다. 보리스 1세와 시메온 1세 치세에는 불가리아의 기독교화와 키릴 문자 발명 등으로 문화적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971년 수도 프레슬라프가 함락되고, 1018년 비잔티움 제국에 완전히 병합되면서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했다.
1018년부터 1185년까지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 테마 불가리아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 불가리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185년, 아센과 페타르의 반란을 통해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이 건국되었다. 1205년 칼로얀은 아드리아노플 전투 (1205년)에서 라틴 제국을 격파했고, 이반 아센 2세는 에피루스 전제공국을 격파하여 불가리아를 지역 강국으로 만들었다. 14세기에는 문학, 예술, 건축이 번성하여 "뉴 콘스탄티노플"로 불린 수도 터르노보는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1371년 이반 알렉산더르 사후 불가리아는 분열되었고, 1393년 터르노보가 함락되고 1396년 비딘 왕국이 멸망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다. 이후 많은 불가리아인 성직자와 학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불가리아 문화를 전파했다.[20]
2. 1. 제1차 불가리아 제국 (681년 ~ 1018년)
5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슬라브인과 불가르족은 모에시아를 침략했다.[1] 670년대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족은 도나우 삼각주 부근 옹갈 지역에 정착하여 슬라브족과 동맹을 맺었다.[1] 680년 옹글로스의 전투에서 불가르족은 비잔티움 제국을 격파했다.[2] 681년 비잔티움 제국과의 강화 조약으로 도나우강 하류 남북 지역에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이 성립되었고,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슬라브 국가가 되었다. 소수파인 불가르족은 지배 계층을 형성했다.[3]8세기 초, 테르벨은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받은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7][8] 그는 717년~71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에서 우마이야 칼리파조 격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9세기 초 크룸 치세에 불가리아 영토는 도나우강 중류에서 드네프르강, 에디르네에서 타트라 산맥까지 확장되었다. 크룸은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국가 기구의 기초를 발전시켰다.[9][10]
9세기에서 10세기 초, 보리스 1세와 시메온 1세 치하에서 불가리아는 문화와 영토의 최성기를 맞이했다. 864년 불가리아의 기독교화를 통해 슬라브-유럽 문화와 문학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유럽 최대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는 Golden Age of Bulgaria|불가리아의 황금기영어로 불린다. 893년 키릴 문자가 발명되고, 고대 교회 슬라브어가 전례에 사용되었다.[11][12][13]
971년, 수도 프레슬라프는 키예프 루스와 동로마 제국에 점령되었다. 976년 독립을 회복했지만, 헝가리 왕국과 동로마 제국에 자주 패배했다. 986년 트라야누스 문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의 대(對) 불가리아 전쟁(968년-1018년)이 격화되었다.[60][61]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사무일 황제가 전사했고,[63] 1018년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완전히 병합되어 서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했다. 이로써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막을 내렸다.[14]
2. 1. 1. 발칸 정착과 국가 형성
680년 옹글로스의 전투에서 불가르족은 비잔티움 제국을 격파하고 도나우강 이남에 정착했다.[2] 이 승리 이후 불가르족과 슬라브족 연합군은 발칸산맥 이남으로 진군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다시 한번 격파, 새로운 국경선을 확정하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만들었다. 681년에 체결된 이 조약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에 매년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21]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은 협정을 맺어 국가를 운영했다. 국가의 수장은 불가르족의 칸이 맡아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슬라브족 지도자는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카르파티아산맥 북방 국경선을 아바르족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21] 이러한 협정은 불가리아 제1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1. 2. 내부적 불안과 생존 투쟁
둘로 가문의 마지막 칸인 세바르 칸이 753년에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불가리아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이후 15년 동안 7명의 칸이 즉위했지만, 이들은 모두 살해당했다.[23][24] 귀족들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파벌과 평화를 원하는 파벌로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이 혼란을 틈타 불가리아를 멸망시키고자 9차례나 원정을 감행했다. 764년 콘스탄티노스 5세는 안키알로 전투에서 텔레츠 칸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을 격파했지만,[23][24] 비잔티움 제국은 더 이상 북쪽으로 진군하지는 못했다.775년, 텔레리그 칸은 콘스탄티노스 5세를 속여 불가리아 궁정에 잠입한 비잔티움 첩자들을 색출해냈고, 수도 플리스카에 있던 비잔티움 첩자들은 모두 처형당했다.[25] 카르담 칸은 792년 마르켈리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승을 거두면서[26]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 승리로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불가리아에 공물을 바치게 되었고, 불가리아는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2. 1. 3. 영토 확장
크룸 칸(803-814)의 시대에 불가리아는 남북으로 팽창하여 도나우강 중류와 몰다비아를 차지, 오늘날 루마니아 전역을 확보하였다. 809년에는 소피아를[27], 813년에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였다.[30] 804년에서 806년 사이, 불가리아 군대는 아바르족을 격파하고 도나우강 중류에서 프랑크 왕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811년 플리스카 전투(바르비차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군을 대파하고, 니케포로스 1세 황제를 살해한 뒤 그의 유골로 술잔을 만들었다.[28][29] 비잔티움 제국이 회담 중 크룸 칸 암살을 시도하자, 크룸은 트라키아 전역을 약탈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 10,000명의 주민을 도나우강 유역으로 이주시켰다.[31]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으나,[32]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원정은 무산되었다.[33] 크룸 칸은 법제 개혁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졌다.오무르타그 칸(814-831)은 비잔티움 제국과 30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34] 양국은 전쟁 후 경제 복구에 힘썼다. 827년 프랑크 왕국과 북서부 국경을 도나우강 중류로 확정지었다. 수도 플리스카에는 대규모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말라미르 칸(831-836) 통치 기간에는 플로프디프를 병합하였다. 프레시안 칸(836-852)은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차지하여 국경을 아드리아해와 에게해까지 넓혔다. 비잔티움 역사 기록에 저항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확장은 평화롭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35] 839년과 842년 사이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36]
2. 1. 4. 보리스 1세 시대의 불가리아
보리스 1세의 재위 기간(852-889) 동안 불가리아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0년 동안 비잔티움 제국, 프랑크 제국, 대모라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였고[37], 동맹을 맺는 데 실패했다. 863년 8월에는 40일 간의 지진이 발생했고, 흉년으로 인해 국가 전체에 기근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메뚜기떼까지 창궐했다.864년, 보리스 1세는 동방 정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여 불가리아 정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시기는 Golden Age of Bulgaria|불가리아의 황금기영어로 여겨지며, 893년 키릴 문자가 공식 문자로 선언되고 Preslav Literary School|프레슬라프 문학 학교영어가 발전하는 등 불가리아 문화의 전성기였다. 또한 고대 교회 슬라브어가 전례에 사용되기 시작했다.[11][12][13]
2. 1. 5. 황금기


시메온 1세(893-927) 시대에 불가리아는 최대 영토 확장을 이루고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했다.[43]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받은 시메온 1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큰 위협이었으며, 그의 긴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과 계속 전쟁을 벌였다. 그의 치세 말기에 불가리아의 국경은 아티카의 북부 경계에 이르렀다. 시메온 1세는 자신을 "불가리아인의 황제(차르)이자 그리스인의 전제군주"로 칭하였고, 교황에게는 인정받았으나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는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는 그의 치세 말기에 비잔티움 황제와 총대주교에게 "불가리아인의 황제(차르)"로 인정받았을 뿐이었다.
894년과 896년 사이에 그는 비잔티움 제국과 그들의 동맹인 마자르족을[44][45] 불가리아 무역소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솔룬으로 옮겼다는 구실로 일으킨 "무역 전쟁"에서 격파하였다. 불가로피곤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는 참패하였고,[46] 비록 평화를 깬 자는 시메온 1세였지만[47] 불가리아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917년 시메온은 비잔티움 제국과 마자르족, 페체네그인, 세르비아의 동맹 시도를 막았고, 비잔티움 제국은 혼자서 싸우게 되었다. 8월 20일 두 군대가 안키알로에서 벌인 전투는 중세의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였다.[51] 비잔티움 제국은 전례없는 패배를 당했고, 70,000명이 전사하였다. 불가리아의 추격군은 카타시르타이에서 잔존 적군을 격파하였다.[52]
926년의 불가리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알로고투르 공작은 크로아티아를 공격하였지만, 크로아티아는 토미슬라브 왕의 치하에서 불가리아군을 격파하였고 시메온의 서부로의 확장은 중단되었다.[53]
9세기부터 10세기 초두에 걸쳐 보리스 1세와 시메온 1세 치세 하의 불가리아는 그 문화와 영토의 최성기에 서서히 도달하여 슬라브-유럽 문화와 문학의 중추이자 유럽 최대 규모의 국가로 발전했으며, 이 시기는 Golden Age of Bulgaria|불가리아의 황금기영어로 여겨지고 있다. 주요 사건은 893년에 공식 선언된 Preslav Literary School|프레슬라프 문학 학교영어에서의 키릴 문자 발명과 고대 교회 슬라브어라고도 불리는 고대 불가리아어에서의 전례 확립을 포함했다.[11][12][13]
2. 1. 6. 쇠퇴
927년 시메온 1세가 사망한 후, 불가리아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맺어진 평화 조약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시메온의 아들 페터르 1세를 황제로, 불가리아 총대주교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과의 평화는 불가리아에 번영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페터르 1세는 치세 초반부터 내부 불안과 형제들의 불만에 직면했고, 930년에는 라쉬카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54]가장 큰 타격은 북쪽에서 왔다. 934년과 965년 사이에 불가리아는 마자르족에게 다섯 번이나 침략당했다.[55] 944년에는 페체네그인에게 침략당해 제국의 북동부가 약탈당했다. 페터르 1세와 보리스 2세 치하에서 불가리아는 평등주의적인 보고밀주의 이단 때문에 분열되었다.[56]
968년, 불가리아는 키예프 루스에게 공격받았고, 스뱌토슬라프 1세는 프레슬라프를 점령했다.[57] 3년 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가 개입하여 스뱌토슬라프 1세를 도로스톨론에서 격파했다. 보리스 2세는 포로로 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위를 박탈당했고,[58] 동부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2. 1. 7. 멸망
976년 마자르족(후의 헝가리 왕국)과 동로마 제국에게 종종 패배하며 독립을 회복했다. 986년 트라야누스 문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의 대(對) 불가리아 전쟁(968년-1018년)이 격화되었다.[60][61]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벨라시차 전투)에서 사무일 황제가 전사했고,[63] 1018년 불가리아는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완전히 병합되어 서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했다. 이로써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막을 내렸다.[14]2. 2.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 (1018년 ~ 1185년)
1018년 비잔티움 제국에 멸망한 이후,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불가리아에는 테마 제도가 실시되었고,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이 보장되었다.[64] 하지만 바실레이오스 2세 사후 후계자들의 시대에 불가리아에는 압정이 가해졌다.[65] 불가리아 정교회의 오흐리드 수좌주교구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구에 종속되었고,[66] 대주교 자리는 그리스인들이 차지하였고, 불가리아인들이 뽑히는 것은 불가능해졌다.[67] 또한 불가리아 귀족들과 차르의 친척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직위를 받고 아시아 지역으로 이주당했다. 하지만 불가리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다. 1041년, 1072년, 1080년에 연달아 봉기가 일어났으나 이 봉기는 모두 진압되었다. 1040년 미카일 4세에 의해 시행된 재정 개혁으로 불가리아의 농민들에게는 금전으로 세금이 부과되었고,[65] 테마 제도가 프로노이아 제도로 변화하면서 농민들은 영주의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2. 3. 제2차 불가리아 제국 (1185년 ~ 1396년)
1185년 터르노보의 귀족인 아센과 페타르 형제는 세금 경감과 프로노이아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68] 그해 여름, 성 디미터르의 이콘이 터르노보에서 발견되자,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를 돕기 위해 살로니카를 포기했다고 선언하며 거병하였다. 이는 불가리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봉기에 참여하였다. 아센과 페터르는 국가의 계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프레슬라프를 공격했고,[69] 1185년 가을과 1186년 봄 사이에 바르나를 제외한 불가리아 북부를 해방시켰다.1186년 여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는 직접 발칸산맥을 넘어 모에시아를 침공했다. 아센 형제는 도나우강 북쪽으로 후퇴했고, 이사키오스 2세는 반란이 종식되었다고 판단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70] 하지만 아센 형제는 쿠만족 용병대를 이끌고 돌아왔고 전쟁은 남부 트라키아, 로도피, 마케도니아까지 확산되었다.[70] 아센은 비잔틴 군대를 쳐부수고 끊임없이 공격했다. 1187년 로베치에서의 3달간의 포위가 실패한 뒤, 비잔티움 제국은 휴전을 요청했다. 이로써 불가리아의 독립은 사실상 승인되었으며,[70][71] 아센 형제의 막내 동생인 칼로얀이 인질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졌다.
1189년 제3차 십자군이 일어나자 불가리아는 비잔티움과 적대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군사 지원을 제안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응답하지 않았다.[72] 1190년 비잔틴 군은 터르노보 원정을 실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쿠만족 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철수하였다. 불가리아군은 트랴브나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사키오스 2세는 황제의 관과 옷을 버려두고 간신히 탈출했다. 같은 해 페터르는 아센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프레슬라프를 중심으로 불가리아 북동부와 도브루자 지역을 통치했다.[72]
불가리아는 이후 발칸산맥 이남의 비잔티움 제국령까지 정복하였고, 1193년에는 스레데츠(소피아)를 회복하였다. 또한 헝가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오랫동안 헝가리령이었던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탈환하였다. 1194년 아르카디오폴리스에서 비잔티움 제국에게 승리했다. 하지만 아센의 중앙 집권적 정책에 귀족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었다.[72] 1196년 불가리아는 세레스에서 비잔티움에게 승리했으나, 아센이 비잔티움 제국의 사주를 받은 자신의 사촌 이반코에게 암살당했다. 이반코는 왕위를 찬탈하고 비잔티움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비잔티움 제국으로 도망쳐 플로프디프의 영주가 되었다. 하지만 1년 후 귀족들의 반발로 페터르가 암살당하고, 왕위는 그의 막내 동생인 칼로얀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하여 계승하였다.
부활한 불가리아는 흑해에서 도나우강, 발칸산맥과 동부 마케도니아와 모라바 계곡을 포괄하는 영토를 가졌고,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영향력을 미쳤다. 칼로얀과 이반 아센 2세의 시대에 불가리아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역 강국으로 떠올랐다. 1204년에서 1261년까지의 라틴 제국 시대에, 불가리아 국민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수도 터르노보에 동방 정교회의 전통을 보존한 많은 종교적 유물들을 보유한 자신들을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 후계자로 여겼다.
1185년 반란 이후, 중세 불가리아는 제2차 불가리아 제국으로 부활했다.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1396년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침공으로 정복될 때까지 존속했다.[15]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1256년까지 발칸 반도에서 지배적인 세력이었으며, 동로마 제국을 격파했다.
1205년 아드리아노플 전투 (1205년)에서 칼로얀은 라틴 제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의 조카인 이반 아센 2세는 에피루스 전제공국을 격파하여 불가리아를 다시 지역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그의 통치하의 불가리아는 아드리아 해에서 흑해로 뻗어나갔고, 경제 또한 번영을 누렸다. 13세기 전반 이반 아센 2세 아래에서 불가리아는 과거 세력의 대부분을 점차 회복했지만, 국내 문제와 외국 침공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4세기에는 문학, 예술, 건축이 번성했다.[16] "뉴 콘스탄티노플"로 여겨진 제국의 수도 터르노보는 불가리아 문화의 중심지이자 동방 정교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17]
13세기부터 14세기에는 불가리아는 킵차크 칸국의 종속국이 되었다.[18][19] 1371년 이반 알렉산드르 사후 불가리아는 3개국으로 분할되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놓였다. 1393년 터르노보는 오스만에 점령되었고, 1396년에는 비딘 왕국도 패배했다. 오스만 정복 이후, 많은 불가리아인 성직자와 학자들이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루스 공국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불가리아의 문화와 문헌, 헤시카즘 사상을 도입했다.[20]
2. 3. 1. 칼로얀 치세 (1197년 ~ 1207년)
칼로얀은 형들에 이어 차르가 된 후, 국내 귀족들에게 엄격한 조치를 취하여 정권을 안정시켰다. 또한 마케도니아와 로도피 산맥의 통치관이었던 이반코와 동맹을 맺었다.[74] 1201년 북부 불가리아 최후의 비잔티움 제국령이었던 바르나를 정복하고, 1202년에는 비잔티움 제국과 화약을 체결하여 불가리아가 점령한 지역을 정식으로 승인받았다. 1203년에는 헝가리가 잠시 점령했던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다시 탈환하고 헝가리인을 추방하였다.칼로얀은 불가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199년부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교섭을 시작하여 1204년 로마의 사절인 추기경 레오가 칼로얀을 불가리아의 왕(Rex)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칼로얀은 황제의 칭호가 수여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의 차르'로 선포하였다. 같은 해 불가리아가 로마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협정을 맺어 헝가리와의 전쟁도 종식되었으나, 협정 체결 후 불가리아가 로마 교회에 간섭받는 것은 전혀 없었고 불가리아 교회는 실질적으로 동방 정교회에 속했다.[74][75]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건국한 뒤, 라틴 제국의 보두앵 1세가 불가리아인을 예속민으로 선언하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라틴 제국과 불가리아의 대립을 중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라틴 제국이 트라키아 북동부를 침공하자 트라키아에 피신해 있던 비잔틴 귀족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제위를 조건으로 불가리아에게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불가리아는 트라키아의 반란을 선동하고 필리포폴리스(현재의 플로프디프)와 아드리아노폴리스(현재의 에디르네)를 점령하였다. 1205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고 보두앵 1세는 포로로 사로잡힌 뒤 죽었다. 이후 라틴 제국의 세력은 한풀 꺾여 발칸 반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라틴 제국은 루시온 전투에서 다시 큰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한 비잔티움 귀족들이 배신하고 라틴 제국과 동맹을 맺자, 격노한 칼로얀은 동트라키아를 침공하여 10,000여 명의 비잔틴 인들을 죽이고 정복지 주민을 도나우강 연안으로 이주시켰다. 1201년 바르나를 함락한 이후 주민들을 모두 생매장했으며,[76] 불가록토노스(Bulgaroktonos; 불가리아인의 학살자)라고 불렸던 바실레이오스 2세를 의식하여 스스로에게 '로마인의 학살자'라는 뜻인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라는 별명을 붙였다.
1207년까지 칼로얀은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시대에 차지했던 마케도니아 지방의 대부분을 정복하였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칼로얀의 여동생의 아들인 보릴이 왕위를 찬탈하였으며, 제위 계승자였던 이반 아센 1세의 아들 이반 아센(후의 이반 아센 2세)과 알렉산더르 형제는 루스의 갈리치-볼린 공국으로 망명하였다.
2. 3. 2. 이반 아센 2세의 치세 (1218년 ~ 1241년)
1217년 이반 아센 2세는 용병을 이끌고 와 보릴에게 도전하였다. 7개월 간의 포위 끝에 보릴이 패배하였고[79], 이반 아센 2세는 제위를 되찾았다. 그의 시대에 불가리아의 국력은 절정에 이르러 빼앗긴 땅들을 되찾고 아드리아노폴리스와 알바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이반 아센 2세의 치세 초반 헝가리와의 결혼 동맹을 통해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평화적으로 되찾았다. 1223년 에페이로스 공국이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면서 발칸 반도 정세의 중심으로 부상하자, 불가리아는 에페이로스와 협정을 맺었다. 한편 에페이로스와 대립하던 라틴 제국의 제후들은 이반 아센 2세에게 어린 황제 보두앵 2세의 후견을 요청하였고 이반 아센 2세는 이를 승낙하여 라틴 제국과 동맹 관계가 성립되었다. 에페이로스의 데스포트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는 맹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를 침공하였지만, 1230년 3월 9일 클로코트니챠 전투에서 이반 아센 2세는 대승을 거두었고, 테오도로스를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에페이로스 공국을 불가리아의 봉신으로 전락시켰다. 클로코트니챠 전투를 통해 불가리아의 강역은 트라키아의 대부분, 로도피 지역, 마케도니아 전역, 알바니아에 이르렀으며,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최대 판도와 맞먹는 영역을 지배하는 발칸 반도 제일의 대국으로 떠올랐다.[80]
로마 교회는 불가리아의 견제를 위해 헝가리에게 불가리아 북서부를 공격할 것을 촉구하였으며[80], 헝가리는 일시적으로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획득하였으나 이반 아센 2세의 동생인 알렉산더르에게 격퇴당했다. 이로써 칼로얀 때 성립되었던 로마 교회와의 합작도 파기되어, 1235년 니케아 제국과 반 라틴 제국 동맹을 맺음과 동시에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된 수좌주교구(Patriarch) 설치를 인정받았고, 이로써 제1차 불가리아 제국 멸망 이후 사라졌던 불가리아 정교회가 부활하였다.
이반 아센 2세는 현명하고 자애로운 군주로 명성을 얻었으며, 서방 세계,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와 제국의 무역 확대를 위해 교류하였다. 불가리아 제국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무역 관계가 확대되고 1235년에는 정비된 해군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그의 치세 말년에 몽골 제국이 동유럽을 침공해 러시아를 정복하고 폴란드와 헝가리를 혼란에 빠트렸고, 불가리아에도 침공해왔다. 하지만 1241년 이반 아센 2세가 죽은 뒤에야 불가리아 지배자들은 몽골의 위험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2. 3. 3. 몽골의 침입과 이바일로의 난 (1241년 ~ 1280년)
이반 아센 2세의 사후 불가리아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어린 후계자 칼리만 아센 1세는 황제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지방 귀족들의 할거를 막을 수 없었다. 1242년 몽골의 침입은 불가리아를 황폐화시켰고, 불가리아는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81]1246년 칼리만 1세가 사망한 후, 더 어린 미하일 아센 1세가 즉위하여 섭정들이 권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 니케아, 헝가리의 도전에 직면했고, 영토 일부를 상실했다. 왈라키아 지역 귀족들의 성장으로 왈라키아에 대한 영향력도 잃었다.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대귀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1256년 미하일 아센 1세가 사망하자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으로 내분이 발생했고, 1256년과 1257년 사이 3명의 차르가 바뀌는 혼란이 발생했다. 외침까지 겹치면서 농민들은 전쟁과 약탈로 큰 피해를 입었다. 콘스탄틴 티흐는 비잔티움 제국과 관계 안정을 위해 미카일 8세의 조카와 결혼했지만, 영토 분쟁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1274년 킵차크 칸국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불가리아는 영토 일부를 양도해야 했다. 콘스탄틴 티흐는 헝가리를 공격했다가 패배하여 영토를 빼앗기기도 했다.
콘스탄틴 티흐의 20년 치세 동안 불가리아는 불안정했다. 말년에 콘스탄틴 티흐는 부상으로 정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황후 마리아 칸타쿠제나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82] 국가 권위가 실추되고 중앙 권력이 약화되면서 불가리아의 무질서는 심화되었고, 군비 조달을 위한 세금 증가, 봉건제 발전으로 인한 영주들의 약탈, 외국의 침략은 농민들의 삶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277년 돼지치기 이바일로가 봉기를 일으켰다. 이바일로의 의용군은 몽골군을 격파하고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로 추대되었다. 콘스탄틴 티흐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해당했다. 이바일로는 터르노보를 포위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는 이바일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반 아센 3세를 내세웠다. 이바일로는 마리아 칸타쿠제나와 결혼하여 황제로 즉위했지만,[84][85] 노가이 칸에게 포위당했다. 이바일로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귀족들은 이반 아센 3세를 옹립했다. 그러나 이바일로는 포위를 뚫고 나타나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했고, 이반 아센 3세는 도망쳤다. 귀족들은 게오르기 테르테르를 차르로 추대했고, 이바일로는 게오르기 테르테르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킵차크 칸국으로 망명했으나 암살당했다.[86]
2. 3. 4. 중흥과 벨버즈드 전투 (1280년 ~ 1331년)
1299년 킵차크 칸국에서 토흐타가 정변을 일으켜 노가이를 죽이자, 노가이의 아들 차카는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차카는 스밀레츠의 아들을 몰아내고 차르가 되었으나, 1300년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에게 살해당하고 그 목은 토흐타에게 보내졌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그 대가로 남부 베사라비아를 할양받았다.[88]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치세에도 킵차크 칸국과의 관계는 계속되어,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은 1319년부터 세르비아,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을 벌인 불가리아를 지원하여 트라키아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몽골과의 관계는 1341년 우즈베크 칸이 사망하고 나서야 그의 후계자들이 더 이상 팽창 정책을 벌이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끝이 났다.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분열된 불가리아를 다시 통일하여 무너져가는 제국의 중흥기를 열었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비잔티움 제국의 내정 간섭을 막고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반항을 억제하면서 중앙 집권화에 성공하였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터르노보의 총주교 요아킴 3세를 배신죄를 씌워 처형하였고, 크런 지방에서 독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동생이자 그의 삼촌인 알디미르가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맺어 그에게 대항하자 싸워서 죽였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공세를 취하여 북부 트라키아와 흑해 연안 지역을 회복하였고, 1308년 비잔티움 제국과 화약을 맺어 이를 인정받았다. 세르비아와는 반 비잔티움 동맹을 맺어 관계가 개선되었고, 1321년 비잔티움 제국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편을 들어 영토 확장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4세기 초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유럽에는 안정이 찾아왔고, 불가리아 및 발칸 국가들도 현재의 국경과 비슷한 영역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헝가리와 세르비아의 성장으로 다시금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1322년 토도르 스베토슬라프가 사망하고 뒤를 이어 즉위한 그의 아들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는 1323년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격하던 도중 급사하고, 이반 아센 2세의 외손녀와 비딘의 데스포트 시슈만 사이의 아들인 미하일 아센 3세가 황제로 즉위하여 시슈만 왕조를 개창하였다. 미하일 3세는 스베토슬라프 대의 정책을 계승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왕위 계승 다툼에 개입하였고, 이후에도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세르비아의 성장으로 동맹 관계로 전환하였고, 세르비아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1330년 세르비아의 스테판 3세 데찬스키와의 벨버즈드 전투에서 대패하여 그 자신은 전사하고 마케도니아는 분할당하였으며, 데찬스키는 미하일의 아들 이반 스테판을 꼭두각시로 내세웠다. 벨버즈드 전투의 결과로 불가리아는 스베토슬라프 대에 안정되었던 중앙 집권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 틈을 타서 동맹을 파기하고 흑해 연안 일대의 메셈브리아와 소조폴 일대를 차지하였다.
불가리아의 귀족들은 이반 스테판을 세르비아의 꼭두각시로 여겼고[89], 결국 1331년 궁정혁명이 일어나 미하일 시슈만의 조카이자 이반 스테판의 사촌인 로베치의 데스포트 이반 알렉산더르가 즉위하여 정세는 급변하였다.
2. 3. 5. 이반 알렉산더르 치세 (1331년 ~ 1371년)
이반 알렉산더르는 40년 동안 불가리아를 통치하였는데, 그의 치세는 불가리아 중세사의 전환기로 여겨진다. 치세 초기 비잔티움 제국이 차지한 흑해 연안의 불가리아령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이 지역을 다시 탈환하였다.[89] 1332년 루소카스트로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3세를 격파하고 불가리아에 유리한 화약을 맺었다. 이후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킨 미하일 시슈만의 동생이자 자신의 삼촌인 비딘의 데스포트 벨라우르를 공격하여 1336년에 진압하였다.이반 알렉산더르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과 협력하여 자신의 여동생 엘레나를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에게 시집보냈고,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차르 즉위를 인정하면서 세르비아와 협력 관계를 형성하였다. 1339년에는 자신의 딸 마리아를 비잔티움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시집보내면서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1345년 이반 알렉산더르는 왈라키아 출신 황후 테오도라와 이혼하고 1355년과 1356년 사이에는 테오도라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이반 스라치미르를 비딘의 데스포트로 임명하였다.[90] 이 시기 대외 관계는 안정되었으나, 벨버즈드 전투 이후 불가리아는 데스포트들의 할거 상태에 빠졌고, 이반 알렉산더르의 치세 동안 도브루자와 왈라키아에는 반독립적인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1365년 이반 스라치미르가 통치하는 비딘이 헝가리의 공격을 받아 1369년 이반 알렉산더르가 왈라키아 공국과 도브루자의 협력을 받아 탈환할 때까지 헝가리령이 되었다.[91] 1366년에서 1367년 사이에는 흑해 연안 지역이 사보이의 아마데오 4세의 침공을 받았고, 안키알로와 메셈브리아 등이 비잔티움 제국에 병합되었다.
이반 알렉산더르 치세에 발칸 반도에 출현한 가장 큰 문제는 동쪽에서 가장 큰 적인 오스만 제국의 진출이었다. 1351년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함대 건설을 호소하였지만 동맹은 실현되지 않았다.[90] 1369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정복하여 오스만의 실질적인 수도로 삼았고, 남부 불가리아로 진군하여 보루이와 플로프디프를 차지하였다. 이반 알렉산더르는 세르비아와 함께 마케도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연합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1371년 2월 17일 사망하였다.
2. 3. 6. 쇠퇴
1371년 이반 알렉산더르 사후 터르노보에서는 넷째 아들 이반 시슈만이, 비딘에서는 이반 스라치미르가 차르를 칭했다. 하지만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과 세르비아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92] 같은 해 마리차강에서 세르비아군이 오스만 제국에 괴멸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이반 시슈만에게 강화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남부 불가리아를 공격했다. 1375년 이반 시슈만은 오스만에 신종과 공납을 조건으로 협약을 갱신했고, 그의 여동생 케라 타마라가 무라트 1세에게 시집갔다. 비딘의 이반 스라치미르와 도브루자 데스포트국 등도 오스만의 속국이 되었다. 1378년 오스만 제국은 조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를 공격, 1382년 소피아가 함락되었다. 세르비아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했고, 이반 시슈만은 합류했지만 이반 스라치미르는 오스만 제국을 지원했다.1387년 라자르의 연합군은 플로크니크에서 승리했지만, 이반 시슈만과 도브루자는 오스만 제국의 보복 대상이 되었다. 1388년 오스만 제국의 찬다를리 알리 파샤(Çandarlı Ali Pasha)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불가리아는 침공당했고, 이반 시슈만은 무라트 1세를 직접 방문하여 다시 강화를 맺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이 대패,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에 대한 직할 통치를 강화했다.[92] 1393년 오스만 제국은 다시 발칸 반도에 공세를 펼쳐 3달 간의 포위 끝에 터르노보가 함락되었다. 이반 시슈만은 니코폴로 도망쳐 다시 조약을 맺고 영토를 보존받아야 했다.[93] 1395년 로비네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니코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이반 시슈만은 투옥되었다. 이반 스라치미르의 비딘 데스포트국은 유일하게 독립 세력이 되었지만, 1396년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의 니코폴리스 십자군에 이반 스라치미르가 참가하면서[94]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한 후 비딘도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되었다. 이반 스라치미르는 아나톨리아로 끌려갔고 중세 불가리아 제국은 소멸했다.
3. 문화
불가리아의 화가와 건축가들은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냈다. 14세기에 이르는 불가리아 문화의 두 번째 황금기에는 문학, 예술, 건축이 번성했다.[16] "새로운 콘스탄티노플"로 불린 제국의 수도 터르노보는 불가리아 문화의 중심지이자 동방 정교회 세계의 중심지였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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