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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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라는 설로, 《일본서기》 등 일본 측 사료에 근거하여 주장되었으나, 한국 측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 부족, 일본 학계의 회의적인 시각 등으로 인해 논란이 있는 학설이다.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가 가야를 점령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실질적인 통치를 했다는 내용이 있으나, 광개토왕릉비의 기록, 왜왕의 책봉 기사, 칠지도 등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교역 기관, 가야인의 일본 열도 진출, 백제의 군사 기구 등 다양한 관점에서 임나일본부설을 해석하며,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는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최근에는 일본 학계에서도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축소하거나, 가야와 왜의 외교적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보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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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나일본부설 | |
|---|---|
| 개요 | |
| 명칭 | 임나일본부 (任那日本府) |
| 일본어 명칭 | 미마나니혼푸 (みまなにほんふ, 任那日本府) |
| 위치 비정 | 한반도 남부 |
| 역사 | |
| 성립 시기 (일본 측 주장) | 4세기 후반 ~ 6세기 중엽 |
| 주요 내용 (일본 측 주장) | 일본이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 |
| 쟁점 | 고대 한일 관계 해석 일본의 한국사 왜곡 논란 |
| 논쟁 | |
| 한국 측 입장 | 일본의 식민사관에 기반한 허구 주장 가야사 연구를 왜곡하는 요인 |
| 일본 측 입장 | 일본서기 등의 사료를 근거로 존재 주장 현재는 학계에서 비판적 시각이 우세 |
| 관련 사서 | |
| 주요 사서 | 일본서기 |
| 기타 참고 사료 | 광개토왕릉비, 중국 사서 |
| 관련 연구 | |
| 주요 연구 분야 | 고대 한일 관계사, 가야사 |
| 주요 쟁점 | 사료 해석의 차이, 정치적 해석의 문제 |
| 현대적 관점 | |
| 학계의 비판적 시각 | 식민사관 극복 노력 가야사 연구의 객관성 확보 필요 |
| 역사 교육에서의 논쟁 | 교과서 서술 문제 역사 인식의 차이 |
2. 관련 사료
임나일본부설은 주로 일본서기 기록을 바탕으로 주장되었으나, 그 외에도 고대 왜와 한반도 남부 지역의 관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사료들이 존재하며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있다. 이러한 사료들은 임나일본부라는 명확한 통치 기구의 존재를 입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요 관련 사료는 다음과 같다.
- 일본서기: 720년 편찬된 일본 역사서로, 진구 황후가 369년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562년까지 통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 근거로 제시되지만, 기록의 신빙성과 해석에 대한 비판이 많다.
- 광개토왕릉비: 414년 건립된 고구려 비석으로, 신묘년(391년) 기사에 왜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 측은 이를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 근거로 해석하려 했으나[57], 비문 훼손, 판독 문제, '渡海' 주어 논란 등으로 한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왜 격퇴 기록으로 보는 등 해석이 크게 엇갈린다. 비문 조작 가능성도 제기된다.
- 중국 남조(南朝) 사서: 송서, 남제서, 양서 등에 5세기 왜의 다섯 왕(왜의 오왕)이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받으며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명목상의 군사적 지배권을 인정받으려 한 기록이 있다. 이는 왜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음을 보여주지만, 실제 지배력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칠지도: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된 철제 칼로, 명문에 백제가 왜왕에게 바쳤다는 내용이 있어 일본 측에서는 왜의 우위와 백제의 복속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기도 한다.
- 한국 측 사료: 삼국사기 강수 열전이나 봉림사 진경대사 탑비 등에 '임나(任那)' 또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며, 이는 주로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56]
- 고고학적 증거: 한반도 남부, 특히 가야 지역에서 일본 열도 양식의 유물인 전방후원분이나 옥제 곡옥 등이 출토되는 것을 왜의 진출 및 교류의 증거로 보기도 한다.[5][6][7][8][9]
이처럼 다양한 사료들이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논의되지만, 각 사료의 성격과 내용을 둘러싼 해석 차이가 크다. 특히 일본서기 기록의 과장과 오류 가능성, 광개토왕릉비 해석 논란 등으로 인해,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시절 주장되었던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직접 지배설로서의 임나일본부설은 현재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학계 내에서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58]
2. 1. 한국 측 사료
'임나(任那)'라는 용어는 한국의 역사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 강수(强首) 열전에는 강수 본인이 "신은 본래 임나 가라 사람입니다(臣本任那加良人)"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으며[56], 924년에 세워진 봉림사(鳳林寺) 진경대사(眞鏡大師) 탑비에는 진경대사의 속세 성씨가 "임나 왕족(任那王族)의 후예인 김해 김씨"라고 기록되어 있다.[56] 이를 통해 '임나'는 주로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가야)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391년) 기록 역시 중요한 한국 측 사료로 간주된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번역:''' 백잔(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기록에서 깨진 글자(□□)와 전체 문맥 해석을 두고 논란이 있다. 일본 측에서는 깨진 글자를 '임나(任那)' 등으로 보고, 왜가 백제, 신라, 임나를 정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으려 했다.[57]
그러나 한국 학계에서는 당시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했던 역사적 상황, 비문 내 다른 기록에서 고구려가 왜를 여러 차례 격파했다는 내용 등을 근거로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즉, "왜가 신묘년에 (신라를) 침입하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왜 격퇴를 강조하는 해석이다.
또한, 이 신묘년 기록 자체가 특정 연도의 사건이라기보다는 396년부터 404년까지 이어진 고구려 남진 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적으로 서술한 부분이라는 견해도 있다. 일부에서는 비문 일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최근에는 일본 학계 내에서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58]
2. 2. 일본 측 사료
임나(任那)는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가량(任那加良)'이나 진경(眞鏡)대사 탑비에 쓰여진 '임나왕족(任那王族)인 흥무대왕 김유신'[56]처럼 한국 사료에도 등장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의 다른 이름으로 보지만, 일본 측 사료에서는 가야 전체 또는 반파국, 안라국 등 특정 국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일본 측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여러 사료를 제시한다.
- 일본서기: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가 369년에 가야 지방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562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스진 천황부터 덴무 천황 시기까지 '임나' 관련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 광개토왕릉비: 신묘년(391년) 기사에 대해 일본 측은 비문의 손상된 글자를 '임나(任那)'로 보고 "왜가 바다를 건너(渡海)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아왔다.[57]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 #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
> #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논란 부분 참고)
그러나 한국 학계에서는 이 해석에 강하게 반박한다. 신묘년 기사는 396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의 남진 정책 명분과 성과를 요약한 것으로 보며, 비문 자체의 훼손 및 조작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渡海'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고, 당시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했던 정황, 비문 다른 부분에서 고구려가 왜를 격파했다는 기록 등을 근거로 "고구려가 왜의 침입에 맞서 백제와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 명분을 설명하는 부분이라는 해석도 있다. 최근에는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도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늘고 있다.[58]
- 중국 남조(南朝) 사서: 송(宋), 제(齊), 양(梁) 등의 역사서에는 왜왕이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요청하며 스스로를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으로 칭하고, 송 황제가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명목상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예를 들어 451년 송 문제는 왜왕 제(인교 천황으로 추정)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칭호를, 478년 송 순제는 왜왕 무(유략 천황으로 추정)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 칭호를 내렸다. 왜왕 무는 상표문에서 "개'''부'''의동삼사"를 자칭하기도 했다. (왜의 오왕 참고) 한편 479년 남제서에는 남제 고제가 가라국 왕 하지왕(가실왕 또는 질지왕으로 추정)에게 "보국장군·'''본'''국왕" 칭호를 내렸다는 기록도 있어, 왜의 일방적인 주장과는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 고고학적 증거:
- 신라, 백제, 가야 지역에서 일본산 옥제 곡옥이 다수 출토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한반도에는 곡옥 제작에 쓰이는 경옥 산지가 없으며, 일본 이토이가와 주변과 미얀마 등지에만 존재한다.[5] 화학 성분 분석 결과 한반도 출토 곡옥이 이토이가와산과 동일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6]
- 한반도 서남부(전라남도) 지역에서 일본 고유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이 발견된 것을 임나사현과 연결시키려는 주장도 있다.[7][8][9]
- 기타 일본 기록:
- 713년 성립된 『히젠 국 풍토기』 마츠우라 군 조에 '임나'가 언급된다.
- 815년 성립된 『신찬성씨록』에는 임나 출신 10개 씨족과 그 조상이 기록되어 있으며, '임나(任那)' 외에 '미마나(彌麻奈, 未末那, 御間名)'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한 논의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흠명 천황 2년(541년)부터 15년(554년) 사이이다.[35][36] 이 시기는 이미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이므로, 해당 기록은 실제로는 안라국(아라가야)에 있던 왜 관련 세력, 즉 '안라일본부'에 대한 기록으로 추정된다.[35]
2010년 한일 역사 공동 연구 위원회에서는 '임나일본부'(원 표기 "在安羅諸倭臣等")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37]
1. '임나일본부'의 고훈(古訓)은 '미마나노 야마토노 미코토모치(みまなのやまとのみこともち)' 즉 '임나의 왜의 파견 관리' 정도의 의미이며, 통치 기구라기보다는 흠명 15년 기사의 "在安羅諸倭臣等"(아라에 있는 여러 왜 신하들)이 그 실체에 가깝다.
2. 관련 기록 대부분은 백제 왕이 주도하고 가야 제국 수장들과 왜 관리들이 참여한 '임나 부흥 회의'에 관한 것이다.
3. 이 왜 관리 집단은 독자적인 강한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회의는 백제가 주도했다.
4. 왜 관리들은 때때로 야마토 왕권의 의사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다.
5. 구성원 중에는 야마토 왕권에서 파견된 인물 외에 현지의 한일 혼혈 인물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시절 주장되었던 한반도 남부 지배 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는 실체가 없으며, 실제로는 가야 지역에 거주하거나 파견된 왜인 관리 또는 외교 사절단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3. 중국 측 사료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 제(齊), 양(梁) 나라의 역사 기록에 나오는 왜왕(倭王)의 책봉 기사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중 하나로 제시된다. 이 기록들에는 왜왕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인정해달라고 중국 왕조에 요청하고, 중국 왕조가 이를 일부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송서'''(宋書):
- 3세기 이전 기록에 보이던 변한(弁辰)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438년 조에 처음으로 "임나(任那)"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 451년 조에는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두 나라 이름이 함께 기록된다.
- 같은 해(451년), 송 문제는 왜왕 제(인교 천황(允恭天皇)으로 추정)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六國諸軍事)"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는 왜왕이 요청했던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작호에서 백제가 제외된 것이다.
- 478년에는 송 순제가 왜왕 무(유랴쿠 천황(雄略天皇)으로 추정)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王)"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왜왕 무는 이때 올린 상표문에서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남제서'''(南齊書):
- 왜국전(倭國傳)에서는 송서와 마찬가지로 "임나·가라"를 함께 기록하는 방식을 따랐다.
- 하지만 별도로 가라국전(加羅國傳)을 두어 가야의 하지왕(荷知王, 가실왕 또는 질지왕으로 추정)이 479년 사신을 보내 제 고제로부터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칭호를 받은 사실을 기록했다. 임나국전(任那國傳)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 '''후대 중국 사서''':
- 660년에 편찬된 한원(翰苑)의 신라 조(新羅條)에는 "임나"가 언급된다. 이 책의 주석(649년 ~ 683년 사이에 성립)에는 "신라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가라와 임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으며, 그 옛 땅은 신라 수도 남쪽 700~800리 지점에 나란히 존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801년에 완성된 통전(通典)의 변방1 신라 조에는 "가라(加羅)"와 "임나제국(任那諸國)"의 이름이 나오며, 이들이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983년에 완성된 태평어람(太平御覽)과 1013년에 완성된 책부원귀(冊府元龜)에도 통전과 거의 유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3. 학계 동향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주로 광개토왕릉비의 391년 신묘년 기사, 8세기 역사서인 《일본서기》의 기록, 백제의 칠지도 명문 등이 제시된다. 이러한 사료, 특히 《일본서기》 기록의 해석을 둘러싸고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 성격, 기능 등에 대해 학계에서 오랜 기간 다양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초기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서기》 기록을 바탕으로 고대 왜가 가야 지역에 통치 기관을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견해가 주를 이루었으나, 1970년대 이후 고고학 발굴 성과가 축적되고 문헌 사료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통설에 대한 여러 수정설과 반론이 제기되었다.[52] 임나일본부를 왜의 외교 사절이나 교역 기관, 혹은 가야 지역에 거주하던 왜인 집단 등으로 보는 다양한 해석이 등장했으며, 백제나 가야 등 한반도 국가들이 주체적으로 설치한 기구라는 시각도 제시되었다. 특히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이나 일본산 곡옥 등 고고학적 자료는 왜와 가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공동 연구를 통해 임나일본부가 통설처럼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통치 기구는 아니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53][54][10] 다만, 이후에도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에서는 과거 통설에 기반한 서술이 유지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55]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역사적 실체 규명 문제와 더불어 한일 간의 민족주의적 감정 등 정치적인 문제[46]가 얽혀 있어,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3. 1. 한국 학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주로 광개토왕릉비의 391년 신묘년 기사, 《일본서기》 진구 황후 편에 신라와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 백제 칠지도 명문 등이 제시된다. 특히 8세기 역사서인 《일본서기》 기록에 기반한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나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 차이가 크다.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의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 양국 연구자들이 합의했다고 발표했다.[53][54] 하지만 이후에도 일본의 일부 역사 교과서에는 임나일본부설을 긍정하는 내용이 실려,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을 가르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55]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연구는 주로 일본 학자들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왜에 의한 임나 지배 기간과 성격을 축소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52] 이 문제는 정치적 요소(한국의 민족주의 등)와 얽혀 있어, 그 실체에 대한 학계의 통일된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일본 고대사학자인 김현구는 『일본서기』에는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삼국의 문화를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국의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삼국 문화가 일본에 전파된 국제 관계 설명 없이 단순히 문화를 전했다는 내용만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한국 측 기록은 12세기의 『삼국사기』이며, 그 이전의 고대 사서가 없어 대부분 『일본서기』를 인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언급했다.
2010년 한일 역사 공동 연구 위원회에서는 임나일본부(원 표기 "在安羅諸倭臣等")에 대해, 일본 측 연구자들이 "기존에 생각되던 것과 같은 (일본의) 출장 기관으로서의 통일된 기구는 아니었으며, 평상시 존재 의의는 크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10]
1990년대 이후 가야 연구는 기존의 금관가야 중심에서 벗어나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자체의 역사 연구로 확장되었다. 또한 고고학적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창원(탁순), 함안(안라) 등 여러 지역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특히 1983년 경상남도 고성 송학동 1호분이 전방후원분으로 소개된 이후 한반도 남서부에서 전방후원분이 잇따라 발견되고, 신라·백제·가야 지역에서 다량 출토되는 비취제 곡옥의 원산지가 일본 이토이가와 주변으로 추정되면서, 일부 지역에 왜인의 집단 거주를 인정하는 연구들이 등장했다.
한일 역사 공동 연구 (2002년~2010년) 과정에서는 양국 연구자 간의 시각 차이가 드러났다. 홍익대학교 김태식 교수는 임나일본부로 지칭된 것은 안라가 왜인 관료를 맞이한 외교 기관, 즉 "안라왜신관"에 가까우며 이들은 안라에 종속된 왜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왜의 파견군은 규모가 작았고 가야의 의도에 따라 대고구려전에 투입되었다고 보았으나, 일본 측 연구자인 하마다 코사쿠는 이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반론했다.[26] 일본 측 모리 마사아키는 왜인들이 가야 제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외교 교섭 등에 참여한 독립적인 집단이었으며, 안라에 예속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등[27][26] 의견 불일치가 있었다. 다만 최종 보고서에서는 야마토 정권의 일부 세력이 한반도에서 활동했다는 점은 인정되었다.[27]
전방후원분 문제는 한국 학계 내에서도 논쟁적인 주제이다. 1983년 영남대학교 강인구 교수가 경상남도 고성 송학동 1호분(분구 길이 66m)을 전방후원분으로 발표했으나,[28] 이후 한국 연구자들은 축조 시기가 다른 3기의 원분이 겹쳐진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했다.[29] 이 과정에서 송학동 1호분이 일본 관련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찬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30][31] 현재까지 전라남도 11기, 전라북도 2기 등 총 13기의 전방후원분이 확인되었으며, 이들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이라는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축조되었고, 원통형 하니와나 일본산 조개 제품, 내부를 벵골라로 칠한 석실 등 왜계 유물을 동반하는 특징을 보인다. 경북대학교 박천수 교수는 이 무덤들이 지역 토착 수장의 무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규슈 고분과의 유사성이 크다는 점을 들어, 피장자가 규슈 출신 호족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박 교수는 1980년대 한국 학계의 '모든 문화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시각을 비판하며, 전방후원분은 5~6세기 일본 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주장했다. 그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는 부정하면서도, 당시 한반도 남부에 대한 왜의 영향을 인정하고 한국 학계의 민족주의적 연구 경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2][33]
3. 2. 일본 학계
흔히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 관련 기록, 백제의 칠지도 명문 등이 제시된다. 특히 8세기 역사서인 《일본서기》 기록을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와 성격에 대해 일본 학계를 중심으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의 가야 지방 연구에서는 『일본서기』 기록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임나일본부를 왜국(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출장 기관으로 보았다. 이러한 연구는 메이지 시대의 나카 미치요, 스가 마사토모 등에서 시작되어 쓰다 소키치를 거쳐 전후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임나흥망사』에서 집대성되었다.[52] 당시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가 신공 황후의 삼한 정벌(4세기 중반으로 추정) 이후 설치되어 가야 지역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배했으며, 처음에는 임시 군사 기지였다가 상설 기관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통설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1970년대까지 일본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11][12] 『송서』 왜국전에서 왜의 오왕 중 제(인교 천황)와 무(유랴쿠 천황)가 남조 송으로부터 신라, 임나, 가라 등을 포함한 6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인정받은 기록은 이러한 통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낙동강 유역 옛 가야 지역의 고고학 발굴 조사가 활발해지면서 문헌 사료에만 의존하지 않는 연구가 가능해졌다. 이노우에 히데오는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이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본기』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백제가 왜에 영합하여 쓴 사서이므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는 임나일본부가 조선총독부와 같은 식민 통치 기관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왜인들의 정치 집단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4] 또한 우케타 마사유키는 '일본부'가 기관이 아닌 사자(使者)를 의미하며, 왜 왕권이 파견한 단순한 사절단이라고 주장했고,[15] 요시다 아키라는 왜 왕권에서 파견된 부경(府卿)과 가라 제국의 수장(한기) 등이 외교 등 중요 사안을 논의하는 회의체였을 것이라고 보았다.[16]
1990년대에 들어서는 다나카 토시아키 등이 제창한 대가야 연맹 개념에 따라 가야 자체의 역사 연구가 진행되었다. 또한 1983년 경상남도 송학동 1호분이 전방후원분으로 소개된 이후[28] 한반도 남서부에서 전방후원분이 잇따라 발견되고, 신라·백제·가야 지역에서 일본 이토이가와 산으로 추정되는 비취제 곡옥이 대량 출토되면서[5][6], 특정 지역에 왜인의 집단 거주를 인정하는 연구들이 등장했다.
- 요시다 타카시는 '임나'를 고구려·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왜국과 결탁한 금관 가라 중심의 소국 연합체로 보았고, 임나일본부는 임나가 왜의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해 왜국에 설치를 요청한 군사·외교 기관이며 후대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임나사현이 왜인이 이주한 지역이라고 보았다.[17][19]
- 심정보는 『삼국사기』나 중국 남조 기록(『송서』 등)을 근거로 '임나'라는 지명이 4세기 말부터 존재했음을 확인하고, '일본부'라는 명칭은 왜왕 무가 남조의 승인 없이 자칭한 관청 이름이며[20], 왜국 측이 실제로 임나 지역에 설치한 관청을 그렇게 불렀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대의 민족주의와는 무관한 당대의 명칭 사용이라는 것이다.[21]
- 미야와키 준코는 임나일본부를 낙동강 유역 도시 동맹인 '임나' 내에 설치된 왜인의 군단 사령부와 둔전병 부락으로 보았다.[22]
- 키토 키요아키는 임나일본부가 야마토 정권의 지배 기구라는 견해는 이미 부정되었으며, 안라의 토착 호족과 함께 가야 제국의 정치 회의에 참여하는 존재였을 뿐, 조(調)를 징수하는 기관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23]
- 모리 키미아키는 확실한 사료는 6세기 이후에 등장하며, 소재지는 안라이고 정식 명칭은 '''재안라제왜신'''이었다고 보았다. 구성원은 왜 중앙·지방 호족 및 가야계 인물로 다양했고, 실무는 가야계가 담당했으며 왜 본국과의 연결은 약했다. 또한 가야 제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외교 교섭을 공동으로 진행했다고 주장했다.[24]
- 다나카 토시아키는 이른바 "임나 부흥 회의"는 백제 주도로 신라에 멸망한 금관국 부흥을 명목으로 가야 수장들을 백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회의였으며, "임나일본부"는 이 회의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에 기록된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임나일본부"가 왜 사신으로서 회의에 참여했거나, 가야 제국의 합의체에 왜 사신이 참여했을 가능성을 부정하며, 안라와 왜의 오랜 우호 관계에 기반한 제한적인 관여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왜 사신은 왜계 안라인에 의해 통제되어 안라의 의사에 따르도록 유도되었다고 보았다.[12]
2002년 일본 문부과학성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최근에는 임나의 항구적인 통치 기구의 존재는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25] 모리 마사아키 역시 임나는 특정 소국(금관국 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고, 일본부는 가야, 특히 안라에 거주하던 왜인 집단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유력하다고 주장했다.[26]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한일 역사 공동 연구에서는 이견이 존재했다. 일본 측 일부는 『송서』 왜국전 기록을 근거로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한국 측 연구자들은 대체로 왜의 영향력을 축소하여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김태식 교수는 임나일본부를 안라의 외무 관서였으며 왜인 관료는 안라에 종속된 존재("안라왜신관")로 보았고, 왜군은 가야군의 의도 아래 동원된 빈약한 존재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하마다 코사쿠는 왜군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반론했다.[26] 모리 마사아키는 왜신(倭臣)이 안라에 예속되지 않고 가야 제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했다.[27][26] 최종 보고서에서는 야마토 정권의 일부 세력이 한반도 지방에서 활동했음을 인정하는 선에서 정리되었다.[27]
한편, 한반도 남서부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에 대한 해석도 논쟁거리이다. 1983년 강인구 교수가 송학동 1호분을 전방후원분으로 발표한 이후[28], 한국 학계 일부에서는 이것이 여러 원분이 겹쳐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29], 일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개찬 의혹도 제기되었다.[30][31] 현재까지 전라남도 11기, 전라북도 2기의 전방후원분이 확인되었으며, 이들은 5세기 후반~6세기 중엽에 집중적으로 축조되었고 왜계 유물을 동반하는 특징을 보인다. 박천수 교수는 이 무덤들이 재지 수장의 묘역을 피해 축조되었고 규슈 고분과의 유사성이 많아 피장자가 규슈 출신 호족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는 5~6세기 일본 문화의 한반도 유입 사례라고 주장했다. 그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는 부정하면서도, 이 시대 왜의 영향을 인정하며 한국 학계의 민족주의적 해석을 비판했다.[32][33]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은 웅략(雄略) 8년 기[34]를 제외하면 대부분 흠명 2년(541년)부터 15년(554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35][36] 이 시기는 이미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이므로, 기록은 주로 안라에 있던 일본부에 관한 것이다.[35] 2010년 한일 역사 공동 연구 위원회에서는 임나일본부(원 표기 "在安羅諸倭臣等")가 통일된 출장 기관이라기보다는 평시 존재 의의가 크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37] 분석 결과, 임나일본부(안라일본부)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1. 고훈(古訓) "미마나노 야마토노 미코토모치(임나 왜재)"는 통치 기구보다는 "재안라제왜신등(아라니 하베루 모로모로노 야마토노 마에츠기미타치)" 즉, 안라에 있는 여러 왜 신하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 관련 기록 대부분은 백제가 주최하고 가야 수장들과 일본부 관인들이 참여한 "임나 부흥 회의"와 관련된다.
3. 일본부는 강한 지도력이 없었으며, 회의는 백제가 주도했다.
4. 일본부 관인들은 때때로 야마토 왕권의 의향과 다르게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5. 구성원에는 야마토 왕권 파견 인물 외에 재지 한일 혼혈 인물도 많았다.
이러한 성격에 기반하여, 임나일본부가 야마토 왕권과는 다른 존재였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 이노우에 히데오: 야마토 왕권이 아닌 가라 제국 재지 호족의 합의체[38]
- 김현구: 백제가 가라 제국 지배를 위해 설치한 기관[39]
- 오쿠다 히사시: 가라 제국이 대(對)왜 외교를 위해 설치한 기관[40]
- 오야마 세이이치: 야마토 왕권 대표와 가라 제국 수장층의 합의체[41]
이 설들은 모두 일본부가 본래 야마토 왕권과 직접 관련 없는 기관이었으나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야마토 왕권의 기관처럼 기술되었다는 이해를 공유한다.[35]
임나일본부 구성원의 다양성은 그 성격을 파악하는 또 다른 단서이다. 왜의 중앙 호족(적신 등), 지방 호족(기비신 등), 가야계 재지 인물(이내사, 마도 등) 세 집단으로 구성되었으며[42], 이들은 안라왕과 함께 친신라·고구려 세력에 대항하는 활동을 벌였기에 백제계 사료에서 '임나(안라)일본부'로 통칭되었을 수 있다.[42] 『백제본기』에 이미 왜 중앙 호족으로 보이는 이름(오호파 신, 가부지비직)이 등장하므로[35], 야마토 왕권 인물의 존재는 확실시된다. 구성원 내에는 서열이 존재하여 중앙 호족이 '대신', 지방 호족이 '신'을 맡고, 가야계 인물들이 실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43]
'일본부(日本府)'의 고훈 '야마토노 미코토모치'는 국내 지방관인 국사(미코토모치)와 마찬가지로 '야마토 왕권의 말을 전하는 자', 즉 대표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상하 관계를 전제하면 지배 기관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외교 사절을 의미할 수 있다.[35] '미코토모치'는 본래 개인을 지칭하므로, '일본부'라는 한자 표기 때문에 거대한 기구로 오해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35]
『일본서기』 킨메이 천황 조에 등장하는 왜인 또는 왜계 도래인 '이키미'는 『백제본기』 기록상 백제가 파견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백제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임나일본부가 백제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백제는 왜국에 일본부 관인의 진퇴를 요청하는 등, 그들을 왜인으로 인식하고 왜국 측의 통제 하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설령 백제에서 파견되었더라도, 이키미 등은 백제와는 별개인 '재안라제왜신등'의 일원으로서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44]
3. 3.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010년)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 기존 통설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일부 보도에서는 위원회가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데 합의했다고 전하기도 했으나[53][54], 위원회의 공식 보고서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위원회에 참여한 일본 측 연구자인 모리 마사아키와 하마다 고사쿠는 임나일본부(원 표기: 在安羅諸倭臣等)에 대해 "종래 이미지되고 있는 것과 같은 출장 기관적인 기구로서의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평시에서의 존재 의의는 크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10][37] 이는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직접 통치하기 위한 왜의 기관이었다는 기존 주장을 사실상 부정하는 내용이다.
위원회 보고서에서 제시된 주요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임나일본부"의 옛 일본어 발음(古訓)은 ミマナノ ヤマトノ ミコトモチ일본어로, 이는 '임나의 왜의 사자' 정도의 의미이며, 통치 기구라기보다는 흠명 15년(554년) 기록에 나오는 '在安羅諸倭臣等'(안라에 있는 여러 왜 신하들)이 그 실체에 가깝다고 보았다.
- 일본서기 등 사료에 나타나는 일본부 관련 기록의 대부분은 백제 왕이 주도하여 가야 제국의 수장들과 일본부 관인들이 참여한 회의, 이른바 "임나 부흥 회의"와 관련된 것이다.
- 이 회의에서 일본부는 강대한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회의 자체도 백제 왕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 일본부의 관인들은 때때로 야마토 왕권의 의향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다.
- 일본부의 구성원에는 야마토 왕권에서 파견된 인물뿐만 아니라, 현지의 한일 혼혈 인물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임나일본부가 고대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강력한 통치 기관이었다는 기존 학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4. 비판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편찬된 사서로, 내용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며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많아 현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상당하다.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일본서기가 백제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의 활동을 왜곡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일본서기 382년 기록[59]에는 대가야를 구원한 인물이 백제 장군 목라근자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그의 가야 제국(諸國) 평정과 대가야 구원이 마치 천황의 명령에 따라 일본에서 파견되어 이루어진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이는 백제가 내륙국인 대가야를 직접 구원할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 지역을 거쳐야만 대가야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지리적 현실과 맞지 않아 설득력이 떨어진다.[60] 일본 학자들은 과거 이 기록을 근거로 일본이 가야를 약 200년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이라는 국호는 고구려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7세기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므로, 4세기에 '일본'이라는 명칭이 포함된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는 주장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61]
임나일본부와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보다 불과 8년 앞서 편찬된 고사기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의문을 더한다. 고사기에는 신공왕후의 임나 정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62]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지배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한국 측 기록 역시 전무하다. 단지 '임나'라는 지명이 광개토왕릉비, 삼국사기, 진경대사탑비 등 일부 기록에 나타날 뿐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왜의 가야 지배를 입증할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면 4세기 이후 가야 유물이 단절되고 6세기경 왜의 유물이 출토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가야 유물이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4세기 당시 야마토 왕조는 가까운 규슈 지역조차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바다 건너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더욱이 4세기는 백제 근초고왕의 전성기로, 강력한 백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배의 수송 능력은 군인 약 25명과 말 2~3필 정도에 불과했다. 이러한 능력으로는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 남부 경영에 필요한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어려웠다.
남조의 송(宋)으로부터 받았다는 왜왕의 책봉 기사 역시, 왜왕이 받은 칭호의 등급이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왜왕은 478년에 안동대장군 칭호를 받았으나, 백제왕은 이미 420년에 그보다 두 단계 높은 진동대장군을 받았고, 고구려왕은 백제왕보다도 두 단계 높은 정동대장군 칭호를 받았다. 당시 중국과 교류가 없던 신라를 제외하면, 왜왕이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칭호는 항상 고구려, 백제보다 낮았다.
칠지도 앞면에 새겨진 후왕(侯王)은 왜왕(倭王)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백제가 왜의 상국(上國)이었음을 시사한다. 뒷면의 '전시후생(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이라는 문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 형태이므로,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임나일본부설은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대한민국과의 역사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영국에게 800년 이상 지배당한 자국 역사(아일랜드의 역사 참조)와 유사하게, 한국 역시 (일제 강점기를 포함하여) 일본에게 800년 이상 지배당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어, 국제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63]
'임나일본부'라는 명칭 자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를 '야마토노미코토모치'(倭御言持; 倭命持; 倭宰)라고 읽는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것이 후에 '임나일본부'로 바뀌었으며, 본래는 임나에 파견된 사신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처럼 임나일본부 문제는 한국의 민족주의 등 정치적인 요소와 얽혀 있어, 그 실체에 대한 학계의 명확한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일본 고대사학자인 김현구는 『일본서기』에는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삼국의 문화를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한국의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삼국 문화가 일본에 전파된 국제 관계 설명 없이 단순히 삼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했다는 내용만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문화 전파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한국 사료는 12세기의 『삼국사기』이며, 고대 한국 사서는 존재하지 않아 결국 『일본서기』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0년 한일 역사 공동 연구 위원회는 임나일본부(원 표기 "在安羅諸倭臣等")에 대해, 일본 측 연구자인 모리 마사아키와 하마다 고사쿠 등이 "종래에 생각되던 것과 같은 출장 기관으로서의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평시 존재 의의는 크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10]
1990년대 이후 가야 연구는 기존의 금관가야·임나가라(김해 지역)와 왜의 관계 중심에서 벗어나, 다나카 토시아키가 제창한 대가야 연맹 개념에 따라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자체 역사 연구로 확장되었다. 또한 1990년대 후반부터는 고고학적 측면에서 창원(탁순), 함안(안라) 등 여러 지역 연구가 진행되었다. 1983년 경상남도 고성 송학동 1호분(분구 길이 66m)이 전방후원분으로 소개된 이후 한반도 남서부에서 전방후원분이 잇따라 발견되고, 신라·백제·임나 세력권 내에서 대량 출토되는 비취제 곡옥의 원산지가 일본 이토이가와 주변으로 추정되면서, 일부 지역에 왜인의 집단 거주를 인정하는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요시다 타카시는 '임나'를 고구려·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왜국과 연대한 임나가라(금관가라) 중심의 소국 연합으로 보았다. 그는 '임나'가 지명인 가야 지역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정치적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임나가 왜국의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해 왜국에 설치한 군사 중심의 외교 기관을 후대에 '임나일본부'라고 불렀으며, 백제에 할양된 4현[17]은 왜인이 이주한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532년 임나가라(금관가라) 멸망[18] 후 안라로 군사 기관을 이전했지만, 562년 대가야 멸망으로 거점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요시다는 한때 부정되었던 4세기 일본부에 대해, 금관가라의 주도성을 인정하면서도 왜국의 군사적 외교 기관으로 간주하고, 임나가 왜의 군사력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해당 지역에 왜인(왜계 호족)이 이주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19]
『삼국사기』 잡지 제3~6에는 임나 지명이 없지만, 『삼국사기』 성립 시점(1145년)에 임나라는 지명이 과거에 존재했음은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제46 열전 제6 강수전에는 "신은 본래 임나 가량 사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임나(대)의 가량(소)을 의미하는 지명으로 해석된다. 또한 『송서』 왜국전에는 왜왕 진이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육국 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을 자칭하고, 왜왕 무가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 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으로 인가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임나 지명이 남조에서도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추지임나가라(追至任那加羅)...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등의 기록이 있어, 임나라는 지명이 4세기 말에 존재했으며 반(反)신라 군사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부'라는 명칭에 대해, 『송서』 왜국전에는 왜왕 무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자칭했으나 남조의 인가는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20] 이를 근거로, 왜왕이 중국풍의 '부(府)'라는 명칭을 가진 관청을 설치하고[21] 자신의 통치 범위 내에 두었지만, 이는 남조의 공인을 받지 못한 자칭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즉, 왜국 측이 임나 지역에 '일본부'라고 부르는 관청을 만들었을 수 있으나, 이는 중국이나 신라 등 주변국의 승인을 받지 못한 왜국 내부의 명칭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한 『삼국유사』(융천사 혜성가)에 "일본병 환국(日本兵 還國)"이라는 구절이 있어, 6~7세기에 왜국이 스스로를 '일본'이라는 미칭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야와키 준코는 과거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임나일본부'란 낙동강을 따라 건설된 도시 동맹인 '임나' 여러 나라 안에 있던 왜인의 '장군부', 즉 군단 사령부와 둔전병 부락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2]
키토 키요아키는 '임나일본부'가 야마토 대왕가의 명령에 따른 왜국의 지배 기구라는 견해는 이미 부정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서기』 기록상 일본부가 가야 여러 나라 중 안라에 있었으며, 안라 토착 호족의 왜부에 존재하여 가야 정치 회의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23] 또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는 '임나의 조(調)' 징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였지만, 실제로는 임나로부터 조를 징수하는 기관이 아니었으며, 임나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연안을 직접 지배했다고 보는 것은 오해라고 주장했다.[23]
모리 키미아키는 『일본서기』를 근거로 할 때, 임나일본부에 대한 확실한 사료는 6세기 이후에나 등장하며, 소재지는 안라이고 정식 명칭은 '재안라제왜신(在安羅諸倭臣)'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왜 중앙 호족, 기비 등 지방 호족, 가야계 인물로 구성되었고 실무는 가야계가 담당했으며, 왜 본국과의 연결은 약했다고 보았다. 그는 이들이 가야 여러 나라와 대등한 관계에서 협력하며 외교 교섭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24]
다나카 토시아키는 이른바 '임나 부흥 회의'는 백제가 주도하여 신라에 멸망한 금관국 부흥을 명목으로 가야 수장들을 소집해 백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회의였으며, '임나일본부'는 이 회의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에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왜 사신으로 보거나, 가야 합의체에 왜 사신이 참여했다는 견해를 부정했다. 다나카는 이 회의 자체가 안라나 대가야 등이 소극적인 가운데 백제의 간청으로 열린 것이며, 이를 '가야 전체의 합의체'로 보는 것은 오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임나일본부'(즉 왜 사신)의 회의 관여는 안라와 왜의 오랜 우호 관계에 기반한 개별적인 사안에 한정되었으며, 왜 사신은 왜계 안라인에 의해 통제되어 안라의 의도대로 유도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2]
일본 문부과학성은 2002년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제작한 역사 교과서의 "왜(일본)는 가라(임나)를 근거지로 백제를 돕고 고구려에 대항했다"는 기술에 대해 "최근에는 임나의 항구적인 통치 기구의 존재는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검정 의견을 냈다.[25]
모리 마사아키는 현재 학계에서는 임나가 백제나 신라와 같은 영역 국가가 아니라 영역 내 소국인 금관국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여러 소국으로 구성된 영역 전체는 가야로 칭해지며, 일본부는 가야에 거주하는 왜인, 특히 왜와 관계가 깊었던 안라에 거주하는 왜인 집단을 가리킨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주장했다.[26]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한일 역사 공동 연구에서는 이견이 드러났다. 일본 측에서는 『송서』 왜국전에 왜왕 무가 남조 송으로부터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사 등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가 전혀 없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나왔다. 반면 한국 측 연구자들은 일본의 지배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홍익대학교 김태식 교수는 임나일본부로 불린 것은 안라가 왜인 관료를 맞이한 "실질적으로는 안라의 외무 관서"였으며, 이 관료들은 안라에 종속된 왜인이었다고 주장하며 '안라왜신관'이라는 호칭을 제안했다. 또한 왜 파견군은 빈약했고 가야군의 의도 아래 대고구려전에 투입되었다고 주장했으나, 하마다 코사쿠는 이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반론했다.[26] 모리 마사아키 역시 왜인들이 가야 제국과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외교 교섭에 공동으로 참여한 독립적인 존재였으며, 안라는 왜신이 자립적으로 활동하던 곳으로 왜신의 안라 예속을 부정하는 등 의견 불일치가 있었다.[27][26] 그러나 최종 보고서에서는 야마토 정권의 일부 세력이 한반도 지방에서 활동한 것은 인정되었다.[27]
1983년 경상남도 고성 송학동 1호분이 영남대학교 강인구 교수에 의해 전방후원분으로 발표되었으나[28], 이후 한국 연구자들은 축조 시기가 다른 3기의 원분이 우연히 겹쳐진 것이라며 전방후원분이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했다.[29] 그러나 송학동 1호분이 일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개찬 공사를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30] 1996년 촬영 사진에서는 전방후원분 형태였으나 2012년 촬영 사진에서는 3개의 분구로 나뉘어 있다는 지적이 있다.[31]
현재까지 전라남도 11기, 전라북도 2기 등 총 13기의 전방후원분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들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이라는 한정된 시기에 축조되었으며, 백제가 남천하기 전 가야 세력권의 서쪽 끝 지역에만 존재한다. 원통형 하니와, 남도산 조개 제품, 내부를 벵골라로 칠한 석실 등 왜계 유물을 동반하는 특징이 있다.
한국 경북대학교 박천수 교수는 한국의 전방후원분이 재지 수장묘를 피하듯 드문드문 존재하고, 석실을 붉게 칠하는 등 규슈 고분과 공통점이 많아 피장자가 규슈 출신 호족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1980년대 한국 학계에서 모든 문화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전방후원분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던 것은 잘못이며, 한국의 전방후원분은 5~6세기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간 문화를 보여주는 예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왜의 통치 기관으로서의 '임나일본부' 존재는 부정하면서도, 한국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국 연구자들의 학설을 비판하며 이 시기 한반도에 대한 왜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32][33]
5. 현대적 의의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가 제작하여 세계 약 50개국에서 사용되는 교과서에는 "5세기의 일본 세력은 한반도 남부까지 지배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미국의 프렌티스 홀(Prentice Hall) 출판사 교과서 『세계 문화』(World Cultures)는 "서기 400년경, 일본은 몇몇 씨족이 연합하여 대부분을 통일하고, 한반도 남부 지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교과서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다.[45]
컬럼비아 대학교의 온라인 백과사전과 미국 의회 도서관은 고조선을 기원전 12세기에 중국인 기자가 한반도 북부에 세운 나라로 설명하면서, 당시 한반도 남부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 지배하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46]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서술이 발견된다. 상하이 인민출판사의 역사 교과서 『세계사강』(世界史纲)은 "신라는, 반도 남방에서 일찍부터 장기간에 걸쳐 왜인의 기반이 되었던 임나 지역을 회복했다"고 서술하고 있다.[47]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웹사이트의 일본 소개 페이지에서는 임나일본부를 언급하며, "5세기 초, 야마토 왕권이 융성했던 시기에 그 세력이 한반도의 남부까지 확대되었다"고 소개했다.[48] 또한, 중국 국영 인민출판사가 발행하는 대학 역사 교재 『세계 통사』(世界通史)는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수용하는 관점에서, "가야는 4세기에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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