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관계 (1648년-1814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648년부터 1814년까지의 국제 관계는 세력 균형의 원칙 아래 유럽 열강들의 식민주의 경쟁, 해군력의 중요성 부상, 경제적 이익 추구, 계몽주의와 혁명의 영향으로 특징지어진다.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로 주권 국가 개념이 확립되고 외교의 틀이 마련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해상 및 식민지 경쟁이 심화되었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등 주요 전쟁이 발발하여 유럽의 세력 구도를 재편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전역에 혁명 이념을 확산시키고, 기존 질서를 뒤흔들었으며, 1815년 빈 체제 수립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시기에는 첩보 활동이 증가하고, 군사력의 중요성이 커졌으며, 유럽 외에도 청나라, 무굴 제국, 동인도 회사, 아메리카 식민지 등 다양한 국가와 지역에서 복잡한 국제 관계가 전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국제 관계 (1648년-1814년) | |
---|---|
개요 | |
기간 | 1648년 ~ 1814년 |
주요 특징 | 국가 체계의 발전 주권 개념의 확립 세력 균형 추구 계몽주의의 영향 |
주요 사건 및 전쟁 | |
17세기 |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 30년 전쟁 종결, 유럽 국제 질서 재편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년-1674년): 해상 패권 경쟁 프랑스-네덜란드 전쟁(1672년-1678년): 프랑스의 라인 강 진출 시도 명예 혁명(1688년): 영국 정치 체제 변화, 권리 장전 발표 9년 전쟁(1688년-1697년): 프랑스의 유럽 지배 시도 저지 |
18세기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1714년): 유럽 국가 간 세력 균형 유지 대북방 전쟁(1700년-1721년): 스웨덴의 몰락과 러시아의 부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년-1748년): 프로이센의 부상 7년 전쟁(1756년-1763년): 유럽과 식민지에서 벌어진 최초의 세계 전쟁 미국 독립 혁명(1775년-1783년): 미국의 독립, 계몽주의 사상 확산 프랑스 혁명(1789년): 프랑스 사회 변혁, 나폴레옹의 등장 |
19세기 초 | 나폴레옹 전쟁(1803년-1815년):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시도, 빈 체제 성립 |
주요 국가 | |
프랑스 | 루이 14세 시대의 절대 왕정,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유럽 정치의 중심 국가로 부상 |
영국 | 해상 강국으로 성장, 식민지 확장, 산업 혁명 주도 |
오스트리아 |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유지, 다민족 국가의 한계 |
프로이센 | 군사력을 바탕으로 독일 통일 주도 |
러시아 |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유럽 강국으로 부상 |
스페인 | 식민지 제국의 쇠퇴 |
네덜란드 | 네덜란드 황금 시대를 거쳐 해상 무역 강국으로 성장 |
스웨덴 | 대북방 전쟁 이후 쇠퇴 |
오스만 제국 | 유럽 세력에 밀려 쇠퇴 |
국제 관계 특징 | |
세력 균형 | 특정 국가의 패권 방지, 국가 간 경쟁과 협력의 반복 |
주권 국가 체제 | 국가 간 평등, 내정 불간섭 원칙 확립 |
외교의 중요성 증대 | 전쟁 방지, 국가 이익 추구 |
국제법 발전 | 국가 간 관계 규율 |
사상적 배경 | |
계몽주의 | 이성, 자유, 평등 사상 확산, 혁명과 독립 운동에 영향 |
국가주의 | 민족 정체성 강조, 국가 간 경쟁 심화 |
영향 | |
국제 관계의 근대적 틀 확립 | 현재 국제 사회의 기본 원칙 형성 |
유럽 중심주의 강화 | 유럽 국가들의 세계 지배 심화 |
제국주의의 토대 마련 | 식민지 쟁탈전 심화 |
2. 역사적 전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끝나고 근대 국제 관계의 기초가 되는 주권 국가 개념이 확립되었다.[4] 이후 국가들은 종교나 이념보다는 국익과 영토 확장을 추구하며 '현실 정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5] 17세기 후반, 프랑스는 전문 외교의 기준을 세우고 프랑스어를 외교 언어로 사용하며 다른 국가들의 모델이 되었다.[8] 그러나 당시 외교는 미흡하여 전쟁을 막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6]
1700년경 위트레흐트 조약 등 주요 평화 회의에서 외교관들은 영토를 협상 카드로 사용했다.[11] 17세기 말, 프랑스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우위를 점했으나, 아홉 해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을 거치며 점차 지위를 잃었다.[16] 잉글랜드, 프랑스, 러시아,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 또는 신성 로마 제국)이 주요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프로이센도 성장했다.[17] 영국 해군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승리하며 해상 패권을 장악했다.[18] 오스만 제국은 대(大) 투르크 전쟁 (1683-1699)에서 성스러운 동맹에 패배하여 헝가리 등 광대한 영토를 잃었다.[23]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25년간은 큰 전쟁 없이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이는 세력 균형 외교에 기반한 불안정한 평화였다.[52] 영국은 "균형자"로서 프랑스의 야망을 억제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군대를 지원했다.[54] 사자 동맹 전쟁 (1718–1720)은 스페인이 이탈리아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벌인 분쟁이었으나, 사자 동맹의 해상 승리로 스페인은 물러서야 했다.[57]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1748)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등이 합스부르크의 권력에 도전하는 기회였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이 국제적인 행위자로 부상했고, 외교 혁명을 통해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58] 7년 전쟁에서 프랑스는 패배하여 북아메리카의 누벨 프랑스를 스페인과 대영 제국에 할양해야 했다.[63]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영국은 미국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이는 미국인들의 반발을 사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미국을 지원했지만, 막대한 재정 지출로 인해 프랑스 혁명의 발판을 마련했다.[68] 대북방 전쟁 (1700-1721)은 스웨덴 제국의 몰락과 러시아 제국의 부상을 가져왔다.[40][41]
프랑스 혁명(1789)과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은 유럽 전역에 혁명 이념을 확산시켰지만,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빈 체제가 성립되어 유럽의 세력 균형을 재확립했다.[69] 1793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는 영국 및 다른 주요 강대국들의 연합과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는 혁명 이념을 주변 국가와 유럽 대부분으로 확산시켰지만, 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로 프랑스와 유럽에서 혁명의 성과 일부가 되돌려졌다.[69]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를 이끌고 유럽 국가들에게 승리하며 황제가 되었고, 1814년 퇴위하기 전까지 유럽 외교, 정치, 법의 많은 부분을 재편했다. 그러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의 실패로 그는 유배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74] 나폴레옹은 능력주의, 법 앞의 평등, 재산권, 종교적 관용, 현대 세속 교육 등을 보호, 통합, 성문화, 확장했다.[77] 프랑스 군대는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봉건적 잔재를 타도하고, 재산법을 자유화하고, 영주 권한을 종식했으며, 길드를 폐지하고, 이혼을 합법화하고, 유대인 게토를 폐쇄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78][79]
2. 1. 17세기: 베스트팔렌 조약과 근대 외교의 시작
베스트팔렌 조약(1648)은 30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주권 국가 개념을 확립하여 근대 국제 관계의 기초를 마련했다.[4] 이 조약으로 종교나 이념보다는 국익과 영토 확장을 추구하는 주권 국가들의 새로운 국제 시스템이 시작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해외 선교에 집중하고, 유럽 국가들은 '현실 정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5]17세기 후반, 프랑스는 전문 외교의 기준을 세웠고, 프랑스어가 외교 언어가 되었다.[8] 다른 국가들도 프랑스 모델을 모방하여 전문 외교관을 양성하고, 외교 문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했다.[7] 그러나 당시 외교는 미흡했고, 전쟁을 막을 기회는 자주 무산되었다. 잉글랜드 왕 찰스 2세는 외교에 소홀하여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6]
1700년경, 위트레흐트 조약(1713) 등 주요 평화 회의에서 외교관들은 영토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11]
17세기 말, 프랑스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우위를 점했다.[16] 그러나 아홉 해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 여러 전쟁을 거치며 점차 지위를 잃었다. 잉글랜드, 프랑스, 러시아,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 또는 신성 로마 제국)이 주요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프로이센도 성장했다.[17] 영국 해군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승리하며 해상 패권을 장악했다.[18]

대(大) 투르크 전쟁 (1683-1699)은 오스만 제국과 성스러운 동맹 간의 분쟁이었다.[23]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주도한 성스러운 동맹에는 교황령, 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베네치아 공화국이 참여했고, 1686년 러시아 차르국이 합류했다. 오스만 제국은 빈 포위에 실패하고 후퇴했으며,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 등 광대한 영토를 잃었다. 이 전쟁으로 러시아는 처음으로 서유럽 동맹에 참여하게 되었다.[24][25]
2. 2. 18세기 전반: 세력 균형과 제한적인 평화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25년간은 큰 전쟁 없이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으나, 이는 세력 균형 외교에 기반한 불안정한 평화였다.[52] 로버트 월폴은 무역 국가인 영국과 성장하는 대영 제국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유럽의 평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53] 영국의 역사가 G. M. 트레벨리안은 위트레흐트 조약이 옛 프랑스 군주국으로부터 유럽이 받는 위협을 종식시키고, 영국이 해상, 상업, 금융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53]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무력을 통해 강제되어야 했다. 영국은 "균형자"로서 핵심적인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며, 프랑스의 야망을 억제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군대를 지원했다.[54]
사자 동맹 전쟁 (1718–1720)은 이 시기 서유럽에서 발생한 몇 안 되는 군사적 사건 중 하나였다.[56]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제와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이탈리아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벌인 분쟁이었다.[56] 펠리페 5세는 1714년에 스페인이 합스부르크에게 잃었던 이탈리아 영토 대부분을 되찾고, 심지어 프랑스 왕위까지 노렸다. 스페인 함대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점령했지만,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공화국, 그리고 사보이아가 참여한 사자 동맹이 세력 균형을 회복하고 스페인의 위협을 종식시키기 위해 결성되었다. 이 동맹의 해상 승리가 결정적이었고, 결국 스페인은 물러서야 했다.[57]
2. 3. 18세기 후반: 전쟁의 시대와 제국의 확장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1748)은 표면적으로는 황제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 권리를 둘러싼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등이 합스부르크의 권력에 도전하는 기회였다. 이 전쟁의 결과, 프로이센이 국제적인 행위자로 부상했고, 외교 혁명을 통해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의 오랜 경쟁 관계가 종식되었다.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58]7년 전쟁에서 프랑스는 패배하여 북아메리카의 누벨 프랑스를 스페인과 대영 제국에 할양해야 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루이 15세의 결정이 프랑스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재정을 악화시켜 프랑스 혁명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한다.[63]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영국은 미국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이는 미국인들의 반발을 샀다. 1775년 전투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독립을 선언했다.[66] 프랑스는 미국을 지원하여 영국에 복수했지만, 막대한 재정 지출로 인해 프랑스 재무부가 파산하여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발판을 마련했다.[68]
대북방 전쟁 (1700-1721)은 스웨덴 제국의 몰락과 러시아 제국의 부상을 가져왔다. 스웨덴의 칼 12세는 나르바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를 격파했지만,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스웨덴은 발트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반면 러시아는 핀란드를 얻고 발트해에 접근하여 유럽 열강으로 인정받았다.[40][41]
2. 4.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과 빈 체제
프랑스 혁명(1789)과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은 유럽 전역에 혁명 이념을 확산시켰지만,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빈 체제가 성립되어 유럽의 세력 균형을 재확립했다.[69]

1793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는 영국 및 다른 주요 강대국들의 연합과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의 성공은 프랑스 혁명 이념을 주변 국가와 유럽 대부분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는 프랑스와 유럽에서 혁명의 성과 일부를 되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왕위에 복귀했다.[69]
이 시기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및 그 동맹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국왕, 많은 푀양파, 그리고 지롱드파는 전쟁을 원했다. 국왕은 전쟁이 그의 인기를 높일 것이라고 예상했고, 지롱드파는 혁명을 유럽 전역으로 혁명 수출하고자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전쟁이 군주제와 군대를 강화하고 혁명을 희생시킬 것이라고 우려하여 전쟁에 반대했다.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는 전쟁을 피하고 싶었지만, 1792년 3월 1일에 사망했다.[70]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고(1792년 4월 20일)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측에 합류했다. 프로이센군은 발미 전투(1792년 9월 20일)에서 저지당했다.[71]
프랑스 혁명군은 1792년 가을 벨기에와 라인란트에서 승리했고, 11월 6일 제마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1793년 1월 국왕 처형 이후,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등이 프랑스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프랑스군은 여러 전선에서 패배했지만, 1793년 가을까지 국내 반란을 진압하고 프랑스 본토로의 동맹국 진격을 막았다.
1794년 여름, 프랑스는 플뢰뤼스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연합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1795년 초, 프랑스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정복하고 바타비아 공화국을 세웠다. 프로이센은 1795년 4월 바젤 조약에서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스페인도 평화 조약을 맺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만이 전쟁을 계속했다.[7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를 이끌고 유럽 국가들에게 승리했다. 그는 황제가 되었으며, 1814년 퇴위하기 전까지 유럽 외교, 정치, 법의 많은 부분을 재편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의 실패로 그는 유배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으며, 많은 프랑스인들에게는 영웅으로, 다른 국가들에게는 악당으로 기억되었다.[74]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18일 쿠데타(1799년 11월 9일)에서 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1804년 그는 황제가 되었다. 1805년, 영국 침공을 계획했지만, 영국이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자(제3차 동맹) 유럽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프랑스 해군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에 의해 궤멸되었고, 영국 침공 계획은 무산되었다.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여 오스트리아를 동맹에서 탈퇴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켰다. 1806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10월 14일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1807년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를 격파했다. 틸지트 조약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유럽을 분할하고 바르샤바 공국을 창설했다.
1812년 6월 12일,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했다. 스몰렌스크와 보로디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불태워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철수했고, 그의 군대는 코사크의 공격, 질병과 기아에 시달렸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7개국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퇴위하여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1815년 3월 1일 프랑스로 돌아왔지만(백일천하 참조),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했고 부르봉 왕가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75]
로버츠는 1793년부터 1815년까지의 전쟁으로 400만 명이 사망했으며, 프랑스 사망자는 140만 명이었다고 말한다.[76]
프랑스 외부에서도 혁명은 큰 영향을 미쳤다. 앤드루 로버츠는 나폴레옹이 능력주의, 법 앞의 평등, 재산권, 종교적 관용, 현대 세속 교육 등을 보호, 통합, 성문화, 확장했다고 주장한다.[77]
1790년대와 1800년대의 프랑스 군대는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봉건적 잔재를 타도했다. 그들은 재산법을 자유화하고, 영주 권한을 종식했으며, 길드를 폐지하고, 이혼을 합법화했으며, 유대인 게토를 폐쇄하고 유대인을 다른 모든 사람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종교 재판과 신성 로마 제국이 종식되었다. 교회 법정의 권력과 종교적 권위는 감소했으며, 법 앞의 평등이 선포되었다.[78][79]
외교 관계에서, 1812년까지의 프랑스 군대는 성공적이었다. 로버츠는 나폴레옹이 60번의 전투를 치러 7번만 졌다고 말한다.[77] 프랑스는 벨기에를 정복하여 프랑스의 주로 만들었고, 네덜란드를 정복하여 괴뢰 국가로 만들었다. 라인강 좌안의 독일 지역을 점령하고 괴뢰 정권을 세웠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대부분을 정복하여 괴뢰 국가를 세웠다. 그 결과는 프랑스의 영광이었으며, 정복된 땅에서 자금이 유입되었고, 프랑스 군대에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영국이 이끄는 프랑스의 적들은 1799년에 제2차 연합을 결성했다(영국은 러시아,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와 합류). 이들은 프랑스 군대를 이집트에 가두는 승리를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1799년 10월 파리로 돌아와 정부를 전복하고 스스로 통치자가 되었다.[80][81]
나폴레옹은 1797~1799년 이탈리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는 새로운 법전과 오래된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완료하여 일련의 새로운 공화국을 세웠다. 나폴레옹의 치살피나 공화국은 밀라노를 중심으로 했고, 로마 공화국과 제노바 주변의 리구리아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파르테노페 공화국은 나폴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5개월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는 이탈리아 왕국을 형성했고, 그의 형제 조제프는 나폴리 왕국을 통치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스위스를 헬베티아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이 국가들은 프랑스의 위성 국가였으며, 파리에 보조금을 지불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그들의 정치 및 행정 시스템은 현대화되었고, 미터법이 도입되었으며, 무역 장벽이 감소했다. 유대인 게토는 폐지되었다. 벨기에와 피에몬테는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82]
대부분의 새로운 국가들은 1814년에 폐지되어 전쟁 이전의 소유주에게 반환되었다. 그러나 아르츠는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 혁명에서 얻은 이점을 강조한다.
:거의 20년 동안 이탈리아인들은 훌륭한 법전, 공정한 조세 제도, 더 나은 경제 상황, 그리고 더 많은 종교적, 지적 관용을 누렸다. ... 오래된 장벽이 무너졌고 이탈리아인들은 공통의 국민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83]
스위스에서 프랑스 혁명의 장기적인 영향은 마틴에 의해 평가되었다.
:그것은 법 앞에서의 시민의 평등, 언어의 평등,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것은 스위스 시민권을 창출했고, 권력 분립을 창출했다. 그것은 내부 관세 및 기타 경제적 제한을 억압했다. 그것은 무게와 측정을 통일하고, 민법 및 형법을 개혁하고, 혼합 결혼(가톨릭교와 개신교 사이)을 승인하고, 고문을 억압하고 정의를 개선했다. 그것은 교육과 공공 사업을 발전시켰다.[84]
가장 큰 영향은 프랑스 자체에서 발생했다. 프랑스는 법적 평등의 원칙이 도입되었고, 가톨릭 교회가 정부가 통제하는 사무실로 격하되었다. 권력은 파리에 집중되었고, 강력한 관료제와 군대가 있었다. 프랑스 정치는 양극화되었다. 혁명 원칙의 지지자와 반대자에게 "좌익"과 "우익"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었다.
영국의 역사가 맥스 헤이스팅스는 군사적 천재로서 나폴레옹이 알렉산더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적 영역에서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이 "현대 유럽의 토대를 놓은 계몽 군주였는지, 아니면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 어떤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초래한 광인이었는지"에 대해 논쟁한다.[85]
3. 외교와 전쟁의 양상
17세기(1601~1700년)는 유럽에 거의 평화가 없었던 시기로, 매년 주요 전쟁이 벌어졌다.[2] 이 전쟁들은 유례없이 끔찍했으며, 특히 30년 전쟁(1618~1648)은 독일과 주변 지역의 민간인들에게 극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 및 사회 붕괴를 초래했다.
전쟁과 외교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가진 학자들은 베스트팔렌 조약(1648)을 분기점으로 강조한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와 이념이 전쟁의 강력한 동기였던 30년 전쟁을 종식시켰다.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념이나 종교가 아닌 지위 향상과 영토 확장을 목표로 하는 대략 동등한 강도의 주권 국가들의 새로운 국제 시스템을 열었다. 이후 가톨릭 교회는 해외 식민지 선교 사업에 집중했다.[4] 스콧 해미쉬(Scott Hamish)에 따르면, 현실주의 모델은 외교 정책이 전적으로 '현실 정치'에 의해 인도되었다고 가정한다.[5]
1700년 이전의 외교는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전쟁을 피할 기회는 자주 낭비되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찰스 2세는 외교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동맹국을 찾는 데 실패했다.[6]
1700년까지 영국과 네덜란드는 소규모 육군, 대규모 해군, 거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동맹을 구축하고, 필요에 따라 육상 강국을 지원하거나 용병을 고용했다.[10] 위트레흐트 조약(1713), 빈 조약(1738), 아헨 조약(1748), 파리 조약(1763)과 같은 중요한 평화 회의는 전문 외교관들이 영토를 대가로 승리를 현금화하는 게임과 같은 분위기였다.[11]
3. 1. 세력 균형의 원칙
이 시기에 세력 균형 개념이 국제 관계의 기본 원칙으로 부상했다.[2] 주요 강대국들은 단일 국가나 연합의 지배를 막기 위해 동맹, 영토 조정, 군사 개입 등을 통해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2]17세기 말 유럽의 정치적 상황은 전쟁, 인구, 경제, 외교 등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다. 그중에서도 주요 변화는 일련의 대규모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초기에는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달했으며 훌륭한 해군을 보유한 프랑스가 우위를 점했다.[16] 그러나 프랑스는 아홉 해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을 치르면서 점차 그 지위를 잃어갔다.[16]
1700년경에는 잉글랜드, 프랑스, 러시아,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 또는 신성 로마 제국)이 4대 주요 국가로 자리 잡았다.[17] 프로이센은 공격적인 지도력과 발달된 군사 기술을 바탕으로 부상하고 있었다.[17]
3. 2. 외교의 전문화
프랑스는 전문 외교의 기준을 세웠고, 다른 열강들은 이를 빠르게 모방했다. 프랑스어는 외교 언어로 자리 잡았다.[8] 전문 외교 모델은 다른 국가의 정부 기관으로 점차 확산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다.
최상위 계층에서는 귀족 신분과 가문의 연줄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전문성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새로운 관료제는 문서를 신중하게 보존하고 중앙 기록 보관소를 유지했으며, 전문 사무 직원을 유지하고 단기적인 필요와 국가의 장기적인 동맹 및 가치를 모두 표현하는 업무의 질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었다.[7]
루이 14세는 파리에 꾸준한 정보와 조언을 제공하는 상주 대사와 주요 및 부속 수도의 하급 장관을 갖춘 가장 정교한 외교 서비스를 체계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외교는 왕실 궁정에서 매우 높은 사교를 즐기며 특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부유한 고위 귀족에게 매우 매력적인 직업이 되었다.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프랑스 모델을 모방했다. 프랑스어는 라틴어를 대체하여 외교 언어가 되었다.[8] 18세기 초에 유럽 외교관들은 정교한 예절과 의식 체계를 확립했다. 대부분의 외교관은 높은 지위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이러한 정교한 관습에 익숙했다. 외교 분야에서 의례적 방식은 관련된 여러 국가의 상대적인 힘과 중요성을 구별하고, 고위 외교관들 간의 비공식적인 논의를 용이하게 했다.[9]
3. 3. 군사력의 중요성
이 시기에는 해군력이 국제적 영향력의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부상했다. 특히 영국 해군은 네덜란드와의 일련의 전쟁 이후 대양을 지배하며 해군력을 장악했다. 해군은 세력 투사, 무역로 통제, 해외 식민지로의 영토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18]18세기에는 첩보 활동이 극적으로 확장되었다.[19] 군대는 훨씬 더 커졌고, 이에 따라 예산도 증가했다. 마찬가지로 외무부도 규모와 복잡성이 모두 증가했다. 국가 예산은 이러한 확장을 충당하기 위해 늘어났고, 전임 직원, 고액 연봉의 스파이와 요원을 갖춘 정보 부서가 자리를 잡았다. 군대 자체도 더욱 관료화되었으며, 무관을 파견했다. 이들은 외국 대사관에 주재하는 매우 똑똑하고 사교적인 중간급 장교들이었다. 각 수도에서 무관들은 육군과 해군의 전력, 능력, 전쟁 계획을 평가했다.[20]
다음 표는 17세기 중후반 주요 유럽 국가들의 인구와 군대 규모를 나타낸다.
주요 유럽 국가 | 1648년경 인구 | 1690년경 군대 규모 |
---|---|---|
프랑스 | 1,500만 명 | 13만 명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 800만 명 | 5만 명 |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 140만 명 | 2만 5천 명 |
이탈리아 국가 | 1,200만 명 | 불명 |
저지대 국가 | 350만 명 | 7만 3천 명 (네덜란드) |
영국 제도 | 750만 명 | 8만 명 (잉글랜드) |
스칸디나비아 | 250만 명 | 9만 명 (스웨덴) |
출처: | Stearns, Encyclopedia (2001) 284쪽 | Blanning, Pursuit of Glory (2007) 289쪽 |
3. 4. 경제적 요인의 영향
경제적 고려 사항은 이 기간 동안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역의 확장, 중상주의 정책, 글로벌 시장의 발전은 국가들이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려 함에 따라 외교 관계, 전쟁, 동맹에 영향을 미쳤다.[16]3. 5. 첩보 활동의 증가
18세기는 첩보 활동이 크게 늘어난 시대였다.[19] 10년 중 9년은 둘 이상의 주요 강대국이 전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군대는 규모가 훨씬 커졌고, 예산도 따라서 증가했다. 외무부 역시 규모와 복잡성 면에서 모두 성장했다. 국가 예산은 이러한 확장을 감당하기 위해 늘어났고, 전임 직원, 고액 연봉의 스파이와 요원으로 구성된 정보 부서가 자리를 잡았다. 군대 자체도 더욱 관료화되었으며, 무관을 파견했다. 이들은 외국 대사관에 주재하는 매우 똑똑하고 사교적인 중간급 장교들이었다. 각 수도에서 무관들은 육군과 해군의 전력, 능력, 전쟁 계획을 평가했다.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는 가장 크고, 부유하며, 강력한 국가였다. 프랑스는 많은 적과 소수의 친구를 두었으며, 잘 조직된 정보 시스템을 통해 이들을 모두 추적하려 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외국 서신을 개봉하고 해독한 다음 수신자에게 전달하는 검은 내각을 개척했다. 프랑스의 주요 장관, 특히 마자랭 추기경(1642–1661)은 새로운 방법을 발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국가의 최상의 관행을 결합하여 최고 정치 및 재정 수준에서 이를 지원했다.[20][21]4. 주요 국가 및 지역별 분석
국가/지역 | 주요 내용 |
---|---|
프랑스 |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9년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 여러 전쟁을 치렀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강대국의 지위를 일부 상실했다. 루이 15세 시대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였고, 7년 전쟁에서 패배하여 누벨 프랑스를 영국과 스페인에 할양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시대에는 유럽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몰락했다. |
영국 |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다. 9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주도했고, 7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를 몰아냈다. 그러나 미국 독립 혁명으로 미국 식민지를 잃었다. |
오스트리아(신성 로마 제국) |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대터키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슐레지엔을 차지하며 강국으로 부상했다. |
러시아 |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과 대북방 전쟁 승리로 발트해 지역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오스만 제국 | 대(大) 투르크 전쟁에서 패배하여 헝가리, 폴란드, 서부 발칸 반도 일부를 상실했다. |
스페인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게 되었고, 이전의 합스부르크 왕가 통치보다 더 효율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
네덜란드 | 80년 전쟁 이후 독립을 이루고 해상 무역 강국으로 부상했으나, 영국-네덜란드 전쟁과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을 겪으며 영국에 해상 패권을 넘겨주었다. |
아시아 | 청나라는 십대전역을 통해 중앙아시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의 종교적 불관용 정책과 지나친 군사 원정으로 쇠퇴했다. 동인도 회사는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
아메리카 | 영국은 7년 전쟁 이후 미국 식민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했으나, 미국 독립 혁명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식민지인 아이티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
4. 1. 프랑스
1648년 프랑스는 유럽의 주요 강대국이었다. 프랑스의 인구와 부, 중앙 위치, 강력한 전문 군대는 다른 국가가 필적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30년 전쟁의 피해를 대부분 피했다. 약점으로는 모든 군사적 모험을 감당하기 어려운 비효율적인 재정 시스템과, 프랑스에 대항하여 다른 강대국들이 동맹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었다.[12]루이 14세의 매우 긴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9년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세 번의 주요 전쟁을 치렀다. 병합 전쟁과 재결합 전쟁이라는 두 번의 작은 분쟁도 있었다.[12] 이 전쟁들은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루이 14세의 외교 정책을 규정했고, 그의 성격은 그의 접근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상업, 복수심, 분노가 뒤섞여 루이는 전쟁이 자신의 영광을 높이는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느꼈다. 평화 시기에는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외교관들에게 그들의 임무가 프랑스 군대에 전술적, 전략적 이점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13] 1695년까지 프랑스는 지배력의 상당 부분을 유지했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의 연합에 의해 해상 통제권을 잃었다. 대부분의 국가, 즉 개신교 국가와 가톨릭 국가 모두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14]
17세기 말 유럽의 정치적 상황은 변화했다. 전쟁은 여전히 인구 통계, 경제 또는 외교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주요 변화는 일련의 대규모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가장 많은 인구, 잘 발달된 경제, 그리고 훌륭한 해군을 보유한 프랑스가 우위를 점했다.[16] 프랑스는 일련의 주요 전쟁을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지위를 잃었다.
9년 전쟁(1688–1697)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영국, 사보이의 유럽 전역 연합 간의 분쟁이었다. 이 전쟁은 유럽 대륙과 주변 해역, 아일랜드, 북아메리카, 인도에서 벌어졌다. 이 전쟁은 최초의 진정한 세계 대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35]
루이 14세는 1678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부상했으며, 수많은 군사적 승리를 거둔 절대 군주였다. 공격, 병합, 준법적 수단을 조합하여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국경을 안정시키고 강화하기 위해 이득을 확대하려 했다.[35] 1688년 9월 루이 14세가 라인강을 건너기로 한 결정은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신성 로마 제국이 그의 영토 및 왕조적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레오폴트 1세와 독일 제후들이 저항하기로 결심하고, 네덜란드 연방과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와 영국을 프랑스에 대항하는 전쟁에 끌어들이자, 프랑스 왕은 마침내 그의 야망을 억제하려는 강력한 연합에 직면했다.[35]
주요 전투는 프랑스 국경 주변에서 벌어졌다. 즉, 스페인령 네덜란드, 라인란트, 사보이 공국, 카탈루냐 공국에서 벌어졌다. 전투는 일반적으로 루이 14세의 군대에 유리했지만, 1696년까지 그의 나라는 경제 위기에 시달렸다. 해양 강대국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도 재정적으로 고갈되었고, 사보이가 동맹에서 이탈하자 모든 당사자들이 협상 타결을 열망했다. 레이스바이크 조약(1697)의 조건에 따라 루이 14세는 알자스 전체를 유지했지만, 로렌을 통치자에게 반환하고 라인강 우안에서 어떤 이득도 포기해야 했다. 루이 14세는 또한 윌리엄 3세를 잉글랜드의 정당한 왕으로 인정했으며, 네덜란드는 자국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장벽 요새 시스템을 획득했다.[35]
카를로스 2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두 경쟁자 중 누가 스페인 왕이 될 것인가가 주요 전쟁을 촉발했다.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표했고, 비엔나에 기반을 둔 그 왕가는 자체 후보를 가지고 있었다.[46] 그러나 파리에 기반을 둔 부르봉 왕가도 후보를 내세웠는데, 바로 강력한 루이 14세의 손자였다.[47]
카를로스 2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왕위를 부르봉 왕가의 후보, 즉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가 된 프랑스인에게 물려주었다. 프랑스는 이 선택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적들의 연합이 빠르게 형성되었고, 1701년부터 1714년까지 유럽의 주요 전쟁이 발발했다.[48] 스페인과 그 모든 유럽 및 해외 영토를 장악하여 프랑스가 막대한 힘을 얻는다는 생각은 프랑스의 주요 경쟁자들에게는 저주였다. 둘째, 스페인 영토를 분할할 가능성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프랑스의 적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1세가 이끄는 대동맹을 결성했다. 여기에는 프로이센과 다른 대부분의 독일 국가, 네덜란드, 포르투갈, 사보이(이탈리아), 특히 영국이 포함되었다.[49]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은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이 되었고, 해외 식민지를 모두 유지했지만 프랑스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스페인은 자국 본토 외의 유럽 영토를 잃었다. 동맹의 전 구성원들이 전리품을 챙기면서, 영국은 뉴펀들랜드, 노바 스코샤, 지브롤터, 그리고 스페인 식민지에서의 무역권을 얻었다.[50]
과도하게 활동적이었던 루이 14세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후계자는 그의 긴 통치 기간 동안 복잡한 외교와 전쟁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의 적극적인 역할은 1722년에 시작되어 1774년까지 지속되었다. 프랑스의 주요 외교 정책 결정자는 플뢰리 추기경이었다. 그는 프랑스가 재건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평화 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세금 징수인이 많은 돈을 챙기는 등 조세 제도가 제대로 설계되지 않아 재정이 항상 부족했다. 파리의 금융 시스템은 발달하지 못했고, 재무부는 매우 높은 이자율로 차입해야 했다.[55]
사자 동맹 전쟁(1718–1720)은 서유럽에서 발생한 몇 안 되는 군사적 사건 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의 빈(구 신성 로마 제국)에서 합스부르크 황제는 이탈리아 대부분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지배권을 놓고 스페인의 새로운 부르봉 왕인 펠리페 5세와 다투었다.[56]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공화국, 그리고 (나중에는) 사보이아로 구성된 사자 동맹은 세력 균형을 회복하고 스페인의 위협을 종식시키기 위해 결성된 연합이었다. 동맹의 해상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이었고, 스페인은 물러섰다.[57]

이 평화로운 휴지기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부르봉-합스부르크 왕조 간의 마지막 갈등이었던 이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황제 카를 6세의 남성 상속자가 아닌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 권리를 둘러싼 것이었다. 실제로는 부르봉 프랑스와 독일의 경쟁 국가인 프로이센, 바이에른이 합스부르크의 권력에 도전할 기회로 여겼다. 분쟁이 확대되면서 스페인, 사르데냐, 작센, 스웨덴, 러시아 등 다른 국가들도 참전했다. 전쟁은 1748년 아헨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영토 변화는 거의 없었다. 전쟁의 주요 결과는 프로이센이 국제적인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증대했고, 결국 외교 혁명을 겪게 되면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의 오랜 경쟁 관계를 끝내고, 영국은 프랑스의 야망을 억제하기 위해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58]

루이 15세는 세계적인 7년 전쟁에서 참패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763년, 루이는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한 후 북아메리카의 누벨 프랑스를 스페인과 대영 제국에 할양했다. 그는 로렌 공국과 코르시카 영토를 프랑스 왕국에 합병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루이 15세의 결정이 프랑스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재정을 악화시키고, 절대 왕정을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불신과 파괴에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증거는 그의 사후 15년 만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63]
1793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는 영국 및 변화하는 다른 주요 강대국들의 연합과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두 번의 짧은 휴전 포함). 프랑스의 수많은 성공은 프랑스 혁명 이념이 주변 국가로, 그리고 실제로 유럽 대부분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1814년(그리고 1815년) 나폴레옹의 최종 패배는 프랑스와 유럽에서 혁명의 일부 성과를 되돌리는 반동을 가져왔다.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된 부르봉 왕가가 왕위에 복귀했다.[69]
이 시기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프랑스를 오스트리아 및 그 동맹국과의 전쟁으로 몰아갔다. 국왕, 많은 푀양파, 그리고 지롱드파는 특히 전쟁을 원했다. 국왕(그리고 그와 함께 많은 푀양파)은 전쟁이 그의 개인적인 인기를 높일 것이라고 예상했다.[70] 프랑스는 선제적으로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고(1792년 4월 20일) 몇 주 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측에 합류했다. 침략해 온 프로이센군은 발미 전투(1792년 9월 20일)에서 저지당하기 전까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71]
새롭게 태어난 공화국은 1792년 가을 벨기에와 라인란트에서 일련의 승리를 거두며 이러한 성공을 이어갔다. 프랑스군은 11월 6일 제마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고, 곧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프랑스로부터 남부 네덜란드의 독립을 보존하고자 했던 영국 및 네덜란드 공화국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1793년 1월 국왕 처형 이후, 이 강대국들은 스페인 및 대부분의 다른 유럽 국가와 함께 프랑스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했다.[7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인이자 정치가 중 한 명으로, 프랑스를 이끌고 수많은 유럽 적들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되었으며, 1814년 퇴위하기 전까지 유럽 외교, 정치, 법의 많은 부분을 재편했다.[74]
나폴레옹은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 전쟁에서 프랑스 최고의 장군이었으며,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을 정복하고 오스트리아를 평화 협상에 나서게 했다. 그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1799년 11월 9일)에서 무능한 정부를 전복하고, 자신이 장악한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1804년 그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75]
1812년 6월 12일, 나폴레옹은 약 7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 스몰렌스크와 보로디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퇴각하는 러시아군에 의해 불태워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 과정에서 그의 군대는 코사크의 공격을 받았고, 질병과 기아에 시달렸다. 그의 병사 중 2만 명만이 살아남았다. 1813년이 되자 나폴레옹에게 불리하게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7개국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6일 전쟁과 파리 점령 이후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그는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1815년 3월 1일 프랑스로 돌아와(백일천하 참조) 군대를 소집했지만,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및 프로이센 군대에 최종적으로 패배했고 부르봉 왕가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75]
프랑스 외부에서도 혁명은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사상은 널리 퍼졌다. 앤드루 로버츠는 나폴레옹이 현대 세계의 핵심 아이디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능력주의, 법 앞의 평등, 재산권, 종교적 관용, 현대 세속 교육, 건전한 재정 등은 나폴레옹이 16년의 권력 기간 동안 보호, 통합, 성문화, 지리적으로 확장했다."[77]
게다가 1790년대와 1800년대의 프랑스 군대는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봉건적 잔재를 직접적으로 타도했다. 그들은 재산법을 자유화하고, 영주 권한을 종식했으며,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기 위해 상인과 장인의 길드를 폐지하고, 이혼을 합법화했으며, 유대인 게토를 폐쇄하고 유대인을 다른 모든 사람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종교 재판이 종식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도 종식되었다. 교회 법정의 권력과 종교적 권위는 급격히 감소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법 앞의 평등이 선포되었다.[78][79]
외교 관계에서, 1812년까지의 프랑스 군대는 꽤 성공적이었다. 프랑스는 벨기에를 정복하여 프랑스의 또 다른 주로 만들었다. 네덜란드를 정복하여 괴뢰 국가로 만들었다. 라인강 좌안의 독일 지역을 점령하고 괴뢰 정권을 세웠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대부분을 정복하여 일련의 괴뢰 국가를 세웠다. 그 결과는 프랑스의 영광이었으며, 정복된 땅에서 필요한 자금이 유입되었고, 이는 프랑스 군대에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했다.[80][81]
나폴레옹은 1797~1799년 프랑스 혁명의 이름으로 이탈리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는 기존 부대를 통합하고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분할했다. 그는 새로운 법전과 오래된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완료하여 일련의 새로운 공화국을 세웠다. 나폴레옹의 치살피나 공화국은 밀라노를 중심으로 했고, 로마 공화국이 형성되었으며, 제노바 주변의 작은 리구리아 공화국도 형성되었다. 파르테노페 공화국은 나폴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5개월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이탈리아 왕국을 형성했고, 그의 형제 조제프는 나폴리 왕국을 통치했다. 또한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스위스를 헬베티아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이 새로운 국가들은 모두 프랑스의 위성 국가였으며, 파리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불해야 했고 나폴레옹의 전쟁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했다. 그들의 정치 및 행정 시스템은 현대화되었고, 미터법이 도입되었으며, 무역 장벽이 감소했다. 유대인 게토는 폐지되었다. 벨기에와 피에몬테는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82]
대부분의 새로운 국가들은 1814년에 폐지되어 전쟁 이전의 소유주에게 반환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 혁명에서 얻은 이점은 강조할만 하다.[83]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 프랑스 혁명의 장기적인 영향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84]
가장 큰 영향은 물론 프랑스 자체에서 발생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와 유사한 효과 외에도 프랑스는 법적 평등의 원칙이 도입되었고, 한때 강력하고 부유했던 가톨릭 교회가 정부가 통제하는 사무실로 격하되었다. 권력은 파리에 집중되었고, 강력한 관료제와 모든 젊은이를 징집하여 공급되는 군대가 있었다. 프랑스 정치는 영구적으로 양극화되었다. 혁명 원칙의 지지자와 반대자에게 "좌익"과 "우익"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었다.
4. 2. 영국
영국 해군은 네덜란드와의 일련의 전쟁 이후 대양을 지배했다. 섬나라인 잉글랜드는 군대를 소규모로 유지하면서 동맹국 유지를 위해 소규모 국가의 군대를 지원하는 데 보조금을 투자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정책은 외교를 사용하고,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프랑스가 우위를 유지하는 위험을 막기 위해 더 약한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18] 1652년부터 1674년까지 세 차례의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벌어졌으며 거의 모든 전투는 해전이었다. 처음 두 차례의 전쟁은 근본적인 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 1672년,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이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루이는 비밀 조약에 따라 영국의 지원을 요청했고, 네덜란드를 거의 제압했지만, 네덜란드 워터라인의 범람과 스페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네덜란드 측 참전으로 루이는 병력을 분산해야 했다. 영국은 여러 차례의 참패 이후 1674년 네덜란드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결국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합류했다.[17] 명예 혁명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의 지도자 오렌지공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정치적, 재정적, 상업적 권력의 중심지는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서서히 이동했다.윌리엄 3세는 외교 및 외교 정책에 대한 강력한 개인적 통제를 행사했다.[26] 1689년 5월, 영국 국왕이 된 윌리엄은 의회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뢰스윅 조약으로 가능해진 1697년~1701년의 짧은 휴지기를 제외하고 1713년까지 거의 끊임없이 전쟁 상태였다.[30]
9년 전쟁 (1688–1697)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이라고도 불리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영국, 사보이의 유럽 전역 연합 간의 주요 분쟁이었다. 이 전쟁은 유럽 대륙과 주변 해역, 아일랜드, 북아메리카, 인도에서 벌어졌다. 때때로 이 전쟁은 최초의 진정한 세계 대전으로 여겨진다.[35]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가 주요 연합 지도자가 되었다. 윌리엄의 주요 전략은 잉글랜드, 네덜란드,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및 일부 소규모 국가의 군사 동맹을 형성하여 바다에서, 그리고 여러 방향에서 육지에서 프랑스를 공격하는 동시에 네덜란드를 방어하는 것이었다.[37]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후, 영국 정부는 미국 식민지를 제어하기 위해 1765년 식민지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는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영국 자체에서도 매우 논란이 많았다. 미국인들은 이것이 영국인으로서 그들의 역사적 특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를 주장했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에서 미국 애국자들이 보스턴 항구에 세금을 부과한 영국 차를 파괴하자 런던은 강압법으로 대응했다. 식민지들은 단결하여 행동을 조율하기 위해 대륙 회의를 구성했다. 1775년 전투가 시작되었고 미국 애국자들은 13개 식민지를 장악하여 거의 모든 왕실 관리들을 추방했다. 국왕은 타협을 거부했다. 조지 워싱턴 장군이 지휘하는 미국군은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몰아냈다. 13개 주 의회의 만장일치 지지를 확보한 후, 의회는 7월 2일 독립을 투표했다. 토머스 제퍼슨이 주로 작성한 독립 선언서는 7월 4일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66]
1777년 미국인들이 뉴욕 북부의 새러토가에서 영국 침공군을 포획한 후, 프랑스는 영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하고 새로운 미국 독립을 인정했으며, 네덜란드(미국을 인정)와 스페인(인정하지 않음)이 공식적으로 합류했다. 영국은 주요 동맹국이 없었지만, 헤세와 같은 작은 독일 공국에서 수만 명의 용병을 고용하는 데 성공했다. 왕립 해군은 이제 연합 해군에 의해 수적으로 열세였고, 영국 본토에 대한 연합군의 침공 위협은 군사적 상황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남부 미국에 대규모 침공군을 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1781년 요크타운에서 프랑스-미국 연합군이 또 다른 침공군을 포획했고, 프랑스 해군은 영국 구원 함대를 몰아냈다. 미국은 이제 실질적으로 독립했으며, 영국 정책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강력한 영미 대외 무역을 보장하기 위해 매우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68]
4. 3.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
17세기 말, 유럽의 정치 상황은 여러 대규모 전쟁을 거치며 변화했다. 프랑스는 아홉 해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 주요 전쟁에 참여하면서 점차 힘을 잃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 또는 신성 로마 제국)은 1700년경 유럽의 4대 강국 중 하나였다.[17]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대터키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 4. 프로이센
프로이센은 공격적인 지도력과 발달된 군사 기술을 바탕으로 부상하고 있었다.[17]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카를 6세 황제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 권리를 둘러싼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독일의 경쟁 국가였던 프로이센이 합스부르크의 권력에 도전하는 기회로 여겨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 등의 지원을 받았다.[58] 1748년 아헨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고, 큰 영토 변화는 없었으나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이 전쟁의 주요 결과는 프로이센이 국제적인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증대시켰다는 것이다.[58]4. 5. 러시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의 행정 및 군사 시스템을 서구식으로 개조하여 대북방 전쟁에서 승리하고 발트해로 진출했다.[40][41] 1700년,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는 스웨덴에 공동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나르바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를 격파했던 스웨덴의 칼 12세는 알트란슈테트 조약을 통해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투스 2세를 폐위시켰다. 그동안 러시아는 발트해 연안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표트르 대제 치하에서 군사력을 현대화하여 폴타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러시아는 스웨덴 동부 지역 (현재의 핀란드)을 점령했고, 스웨덴은 동부 발트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러시아는 핀란드를 얻고 발트해에 접근하여 유럽 열강으로 인정받았다.[40][41]
차르(차르 전제 정치)가 모든 주요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표트르 대제나 예카테리나 2세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들의 통치 기간 동안 정책의 통일성과 강력함이 유지되었다.[42] 그러나 약한 차르가 있거나 급격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 예측 불가능성과 혼란이 발생했다.[42]
러시아는 발트해 지배권을 놓고 스웨덴과 백 년 동안 투쟁했다. 표트르 대제는 서구식으로 러시아의 행정 및 군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개조하여 대규모 군대를 건설했고, 1720년대에 핀란드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발트해 연안 국가의 소유권을 얻었다. 서쪽에서는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와의 전쟁,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와의 협상을 통해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침공으로 러시아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1814년부터 1840년대까지 유럽 문제에서 강력한 보수적인 목소리를 냈다.[44]
4. 6. 오스만 제국
대(大) 투르크 전쟁 (성스러운 동맹 전쟁)은 오스만 제국과 성스러운 동맹 간의 분쟁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조직한 성스러운 동맹은 교황령, 신성 로마 제국(합스부르크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치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얀 3세 소비에스키 치하), 베네치아 공화국이 참여했다. 1686년 러시아 차르국이 동맹에 가입하면서 중부 및 동유럽 지배권을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었다.[23]
1683년, 오스만 제국 카라 무스타파가 이끄는 20만 병력이 빈을 포위하며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9월 다뉴브 강을 따라 후퇴하며 패배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폴란드, 서부 발칸 반도 일부를 상실하며 최초로 광대한 영토를 잃었다. 이 전쟁은 러시아가 서유럽 동맹에 처음으로 참여한 사례이기도 하다.[24][25]
4. 7. 스페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발생한 유럽의 주요 전쟁이었다.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었지만,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는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반발을 샀다.[48]신성 로마 제국의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를 중심으로 프로이센, 네덜란드 공화국, 포르투갈 왕국, 사보이 공국, 영국 등이 대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전쟁은 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벌어졌으며, 양측은 엎치락뒤치락하는 접전을 벌였다.[49]
1711년, 레오폴트 1세의 뒤를 이은 요제프 1세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그의 동생 카를 6세가 황제가 되면서, 동시에 스페인 왕위 계승 후보가 되었다. 이는 제국의 지나친 세력 확장을 우려한 동맹국들의 이탈을 야기했고, 결국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었다.[49]
조약에 따라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를 유지했지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스페인은 유럽 내 영토를 잃었지만, 해외 식민지는 유지했다. 영국은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 지브롤터 등을 획득하며 이득을 보았다. 이 전쟁의 결과, 스페인은 부르봉 왕가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이전의 합스부르크 통치보다 더 효율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50]
4. 8. 네덜란드
1648년 80년 전쟁이 끝나면서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간의 전쟁이 종식되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을 이루었지만, 스페인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네덜란드는 당시 세계 최고의 해상 강국으로, 아시아와 아메리카 간의 해상 무역과 발트해에서 포르투갈에 이르는 유럽 내 무역로를 지배했다.[1] 중상주의 경제 정책 시대에 이는 성장하는 식민 강대국인 영국 및 프랑스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1] 1652년부터 1674년까지 세 차례의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벌어졌으며, 거의 모든 전투는 해전이었다.[1] 처음 두 차례의 전쟁은 근본적인 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1]1672년,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이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 루이는 비밀 조약에 따라 영국의 지원을 요청했고, 네덜란드를 거의 제압했지만, 네덜란드 워터라인의 범람과 스페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네덜란드 측 참전으로 루이는 병력을 분산해야 했다.[1] 영국은 여러 차례의 참패 이후 1674년 네덜란드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결국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합류했다.[1] 전쟁은 교착 상태로 이어졌고 네이메헌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프랑스는 주로 스페인 합스부르크와 작은 독일 제후국을 희생하여 제한적인 영토를 획득했다.[1] 명예 혁명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의 지도자 오렌지공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정치적, 재정적, 상업적 권력의 중심지는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서서히 이동했다.[1]
4. 9. 아시아
청나라는 군사력, 외교, 현지 지도자 활용을 통해 서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18세기 중후반, 십대전역을 통해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했다. 준가르족을 멸망시키고 신장 지역을 평정하는 등 중국의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86] 넬친스크 조약(1689)과 캬흐타 조약(1727)을 통해 러시아와의 국경을 확정하고, 소규모 무역을 허용했다.[87] 칭하이성(동부 티베트)에서는 민족 집단을 분리하고 현지 지도자를 활용하여 달라이 라마와 몽골에 대한 균형을 맞추었다.[87] 투르키스탄에서는 현지 무슬림 족장들을 총독으로 임명하고 이슬람 율법을 존중하며 무역에 세금을 징수했다.[88]무굴 제국은 바부르가 건국한 이슬람 왕조로, 아크바르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아크바르는 군사적 성공과 효율적인 재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동인도 회사를 비롯한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89] 그러나 사치스러운 지출과 왕위 계승 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90][91] 아우랑제브는 종교적 불관용 정책으로 힌두교도들의 반발을 샀고,[92] 지나친 군사 원정으로 재정을 악화시켰다. 중앙 정부가 약화되면서 지방 세력들이 동인도 회사와 결탁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고, 이는 무굴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93]
동인도 회사는 상업 무역 회사로 시작했지만, 외교와 군사력을 통해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94] 1803년, 대규모 사병을 보유하고 행정 기능까지 수행했다. 세포이 항쟁(1857) 이후,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을 설립하여 직접 통치했다.[95]
4. 10. 아메리카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후, 영국 정부는 급성장하는 미국 식민지를 제어하기로 결정했다. 1765년 식민지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는 새로운 정책은 영국 자체에서도 매우 논란이 많았다. 미국인들은 이것이 영국인으로서 그들의 역사적 특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를 주장했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자 런던은 강압법으로 대응했다. 식민지들은 단결하여 행동을 조율하기 위해 대륙 회의를 구성했다. 1775년 전투가 시작되었고 미국 애국자들은 13개 식민지를 장악하여 거의 모든 왕실 관리들을 추방했다.[66]조지 워싱턴 장군이 지휘하는 미국군은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몰아냈다. 13개 주 의회의 만장일치 지지를 확보한 후, 의회는 7월 2일 독립을 투표했다. 토머스 제퍼슨이 주로 작성한 독립 선언서는 7월 4일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66]
역사학자 조지 빌리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립은 상호 의존의 새로운 지위를 의미했다. 미국은 이제 그 지위에 따른 특권과 책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주권 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이는 조약과 동맹을 맺고, 외교에서 군사 동맹이 되고, 보다 평등한 기반으로 대외 무역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67]
벤저민 프랭클린은 프랑스 엘리트 여론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프랑스는 1760년대의 패배 이후 복수를 원했고, 미국 반란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1777년 미국인들이 새러토가에서 영국 침공군을 포획한 후, 프랑스는 영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하고 새로운 미국 독립을 인정했으며, 네덜란드(미국을 인정)와 스페인(인정하지 않음)이 공식적으로 합류했다. 영국은 1781년 요크타운에서 프랑스-미국 연합군이 또 다른 침공군을 포획하면서 전쟁에서 패배했다. 미국은 이제 실질적으로 독립했다.[68]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식민지들에 큰 영향을 받았다. 아이티 혁명(생 도맹그)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일어난 노예 봉기의 중심적인 사례가 되었다.[73]
5. 결론
1793년부터 1815년까지의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400만 명(그중 100만 명은 민간인)이 사망했다.[76] 프랑스 혁명의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앤드루 로버츠는 나폴레옹이 능력주의, 법 앞의 평등, 재산권, 종교적 관용, 현대 세속 교육, 건전한 재정 등 현대 세계의 핵심 아이디어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77]
프랑스 군대는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봉건제 잔재를 없앴다. 재산법 자유화, 영주 권한 종식, 길드 폐지, 이혼 합법화, 유대인 게토 폐쇄 등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법 앞의 평등을 보장했다.[78][79]
나폴레옹은 정복 활동을 통해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라인강 좌안의 독일 지역, 스위스,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에 괴뢰 정권을 세웠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영토를 확장하고 정복지로부터 자금을 확보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80][81]
정복된 지역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이탈리아에서는 법전 정비, 공정한 조세 제도, 경제 상황 개선, 종교적·지적 관용 증진 등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인들은 공통의 국민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83] 스위스에서도 시민 평등, 언어 평등, 사상과 신앙의 자유, 스위스 시민권 창출, 권력 분립, 내부 관세 철폐, 무게와 측정 통일, 법 개혁, 혼합 결혼 승인, 고문 억제, 정의 개선, 교육 및 공공 사업 발전 등이 이루어졌다.[84]
프랑스 내에서도 법적 평등 원칙 도입, 가톨릭 교회 권력 약화, 중앙 집권화, 강력한 관료제와 군대 확립 등 큰 변화가 있었다. 프랑스 정치는 혁명 원칙 지지자와 반대자로 양극화되었다.[85]
참조
[1]
서적
An encyclopedia of world history
https://archive.org/[...]
1968
[2]
논문
The Emergence Of The Standing Professional Army in Seventeenth-Century Europe
https://www.jstor.or[...]
1969
[3]
서적
The Triumph of Science and Reason, 1660–1685
1953
[4]
서적
Europe: A History
1996
[5]
간행물
book review
2013-10
[6]
서적
Britain and the World: 1649–1815
1980
[7]
서적
Colbert de Torcy, an emergent bureaucracy, and the formulation of French foreign policy, 1698–1715
1976
[8]
서적
French diplomacy and foreign policy in their European setting
1961
[9]
논문
Early modern diplomatic ceremonial
1980
[10]
서적
The Hessian mercenary state: ideas, institutions, and reform under Frederick II, 1760–1785
2003
[11]
서적
Europe
1996
[12]
서적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1999
[13]
논문
Force, Order, and Diplomacy in the Age of Louis XIV
1993
[14]
인용
War, Diplomacy, and Imperialism, 1618–1763
1974
[15]
인용
War, Diplomacy, and Imperialism, 1618–1763
[16]
서적
The age of the baroque, 1610–1660
1952
[17]
서적
The Age of the Baroque, 1610–1660
1952
[18]
서적
International Relations in Europe
[19]
서적
British Diplomats and Diplomacy, 1688-1800
2001
[20]
논문
The functioning of ambassadors under Louis XIV
https://www.jstor.or[...]
1970
[21]
서적
The Age of Louis XIV: The Rise of Modern Diplomacy
https://books.google[...]
Transaction Publishers
1976
[22]
서적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Dutch Golden Age
Cambridge UP
2018
[23]
서적
Vienna 1683: Christian Europe Repels the Ottomans
Osprey
2008
[24]
서적
The Emergence of the Great Powers: 1685–1715
1951
[25]
서적
Venice, Austria, and the Turks in the Seven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Memoir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91
[26]
논문
The diplomatic service under William III
1927
[27]
서적
The Later Stuarts, 1660–1714
1956
[28]
서적
A History of England: volume I Prehistory to 1714
2013
[29]
논문
Louis XIV and William III, 1689-1697
https://www.jstor.or[...]
1961
[30]
서적
The Later Stuarts, 1660–1714
1956
[31]
서적
The New Cambridge Modern History, VI: The Rise of Great Britain and Russia, 1688-1725
1970
[32]
서적
The sinews of power: War, money, and the English state, 1688-1783
1989
[33]
서적
The Later Stuarts, 1660–1714
1956
[34]
서적
William III and the Defense of European Liberty, 1650-1702
1966
[35]
서적
The Emergence of the Great Powers: 1685–1715
1951
[36]
서적
Britain and the World, 1649-1815
1980
[37]
논문
"'Mynheer Benting now rules over us': the 1st Earl of Portland and the Re-emergence of the English Favourite, 1689–99."
https://www.jstor.or[...]
2006
[38]
서적
A Warrior Dynasty: The Rise and Decline of Sweden as a Military Superpower
Casemate
2014
[39]
서적
Charles XII and the Great Northern War.
1970
[40]
뉴스
Poltava: The battle that changed the world.
History Today
2009
[41]
서적
Charles XII and the Collapse of the Swedish Empire, 1682–1719
https://archive.org/[...]
1899
[42]
서적
A History of Russia
2010
[43]
서적
Strategy and Power in Russia 1600–1914
1998
[44]
서적
A History of Russia. Vol. 1: To 1917
2002
[45]
서적
Wars of the Age of Louis XIV, 1650–1715
2008
[46]
서적
The Emergence of the Great Powers: 1685–1715
1951
[47]
서적
Britain and Colonial Maritime War in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Silver, Seapower and the Atlantic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2013
[48]
서적
The War of Succession in Spain, 1700–15
1969
[49]
서적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4
https://www.amazon.c[...]
2015
[50]
서적
Bourbon Spain 1700–1808
1989
[51]
서적
A Global Chronology of Conflict: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Modern Middle East , vol 2
https://books.google[...]
Abc-Clio
2009
[52]
논문
"Envisioning the French Empire: Utrecht, 1711–1713."
2001
[53]
서적
A Shortened History of England
1942
[54]
논문
"Balance of power intervention: Britain's decisions for or against war, 1733–56."
http://www.tandfonli[...]
1996
[55]
서적
The Making of Modern Europe, 1648–1780
https://archive.org/[...]
2003
[56]
서적
The Quest for Security: 1715–1740
1947
[57]
서적
Europe of the Ancien Régime: 1715–1783
1965
[58]
서적
The War of Austrian Succession 1740-1748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
[59]
서적
The Forging of the Modern State: Early Industrial Britain, 1783–1872
1996
[60]
논문
"'Giants of an Earlier Capitalism': The Chartered Trading Companies as Modern Multinationals."
https://www.jstor.or[...]
1988
[61]
서적
The sinews of power: War, money, and the English state, 1688–1783
1989
[62]
서적
Seeds of liberty: 1688 and the shaping of modern Britain
https://books.google[...]
Souvenir Press
1988
[63]
서적
France Before the Revolut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1995
[64]
서적
Europe: A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P.
1996
[65]
서적
The European World: A History
1970
[66]
서적
American Scripture
1997
[67]
서적
American Constitutionalism Heard Round the World, 1776-1989: A Global Perspective
https://books.google[...]
NYU Press
2011
[68]
서적
A Diplomatic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https://archive.org/[...]
1950
[69]
논문
"The Origins, Causes, and Extension of the Wars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https://www.jstor.or[...]
1988
[70]
문서
Schama 2004, p. 505
[71]
서적
The French Revolutionary Wars 1787–1802
1996
[72]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https://archive.org/[...]
2008
[73]
서적
The Abolition of Slavery: From L.F. Sonthonax to Victor Schoelcher, 1793, 1794, 1848
UNESCO
2003
[74]
서적
Napoleon: A Political Life
https://archive.org/[...]
2003
[75]
서적
The rise and fall of Napoleon Bonaparte
https://archive.org/[...]
2000
[76]
간행물
Why Napoleon merits the title 'the Great,'
BBC History Magazine
2014-11-01
[77]
간행물
Why Napoleon merits the title 'the Great'
BBC History Magazine
2014-11-01
[78]
서적
A History of the Modern World
McGraw Hill
1995
[79]
서적
Napoleon and the awakening of Europe
https://archive.org/[...]
1969
[80]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1989
[81]
서적
European Diplomatic History, 1789–1815: France Against Europe
1969
[82]
서적
Napoleon and the Transformation of Europe
2003
[83]
서적
Reaction and Revolution: 1814–1832
1934
[84]
서적
Histoire de la Suisse
1926
[85]
뉴스
Everything Is Owed to Glory
https://www.wsj.com/[...]
Wall Street Journal
2014-10-31
[86]
서적
Imperial China 900–1800
1999
[87]
논문
Empire and nation in comparative perspective: Frontier administration in eighteenth-century China.
2001
[88]
서적
China: A New History
1992
[89]
서적
The Mughal Empire
1995
[90]
서적
World History
2013
[91]
서적
A History of India
1998
[92]
논문
Jizyah and the State in India during the 17th Century.
1969
[93]
서적
The Mughal Empire
1995
[94]
서적
The East India Company: A History
1993
[95]
논문
History and historiography of the English East India Company: Past, present, and future!.
2009
[96]
서적
An encyclopedia of world history
https://archive.org/[...]
196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