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은 교황 리베리오가 360년경에 에스퀼리노 언덕에 건설을 명령한 서방에서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현재의 건물은 교황 식스토 3세 시대에 완공되었으며,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탈리아 정부는 바티칸 시국 외부에 위치한 이 대성전에서 바티칸의 특별한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4세기 건축 양식을 따르며, 16세기 금으로 도금된 천장, 13세기 모자이크, 여러 교황의 복원 및 재장식, 그리고 부속 시설로 성탄 토굴, 시스티나 성당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로마인의 구원' 성화가 있으며, 교황은 이 성당을 자주 이용하며, 매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미사를 집전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로마 가톨릭 4대 대성전 - 성 베드로 대성전
성 베드로 대성전은 로마 4대 성전이자 바티칸 시국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며 기독교 성지로, 예수의 사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고, 1506년 착공하여 1626년 완공되었으며, 돔과 내부의 예술 작품들이 특징이다. - 로마 가톨릭 4대 대성전 - 산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
산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은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자 머리"로 불리는 로마 교황의 주교좌 성당으로, 324년 봉헌 이후 재건과 재봉헌을 거쳐 라테라노 궁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당이다. - 초기 기독교 미술 - 성묘교회
성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매장, 부활이 이루어진 곳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의 기독교 성지이며, 여러 교파가 공동 관리하고 건축 양식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적·역사적 의미가 큰 건축물이다. - 초기 기독교 미술 - 라바룸
라바룸은 그리스도의 처음 두 글자를 본뜬 키 로 문양을 새긴 기독교 깃발의 일종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용하기 시작하여 기독교 로마 황제와 비잔티움 제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기호로 사용된다. - 5세기 완공된 건축물 - 보은 삼년산성
보은 삼년산성은 신라 시대에 축조되어 삼국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한 돌로 쌓은 산성으로, 축성에 3년이 걸렸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으며, 성 내부 유적과 출토 유물은 당시 신라의 건축 기술과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5세기 완공된 건축물 - 테오도시우스 성벽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동로마 제국 시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된 이중 성벽으로, 해자, 내외벽, 망루를 갖춘 3중 구조로 육상 6km 구간을 보호했으며, 지진과 홍수 피해를 수리하며 유지되었다.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 | |
공식 명칭 (이탈리아어) |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
공식 명칭 (라틴어) | Basilica Sanctae Mariae Maioris Basilica Sanctae Mariae ad Nives |
위치 | 로마 |
국가 | 이탈리아 |
종교 | 가톨릭 교회 |
전례 | 라틴 교회 |
봉헌 | 성모 마리아 |
숭배 | 로마 백성을 보호하는 성모 마리아 |
유물 | 거룩한 구유 관련 유물 히에로니무스 |
지위 | 교황의 주요 대성전 |
건축가 | 페르디난도 푸가 |
건축 양식 | 로마 건축 로마네스크 건축 (탑) 바로크 건축 |
기공 | 432년 |
완공 | 1743년 |
길이 | 92m |
폭 | 80m |
네이브 폭 | 30m |
최대 높이 | 75m |
교구 | 로마 |
수석 사제 | 스타니스와프 릴코 |
세계 문화 유산 등재 | 역사 지구 (로마) 로마 시에 있는 교황청 소유의 엑스테리토리얼 권한 지역 성 바오로 대성전 |
등재 연도 | 1980년 |
등재 기준 | i, ii, iii, iv, vi |
유산 번호 | 91 |
문화유산 종류 | 문화 |
지역 | 유럽 및 북아메리카 |
웹사이트 |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
2. 역사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의 역사는 교황 리베리오(재위 352년~366년) 시대에 건립 기원이 있으며, '눈의 기적' 전설과 관련되어 '리베리오 대성당'으로도 불렸다.[57][5][10]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교황 식스토 3세(재위 432년~440년)가 에페소스 공의회(431년)의 테오토코스 선포를 기념하여 434년에 봉헌한 것으로 여겨진다.[27][28] 개선문의 봉헌 비문 Sixtus Episcopus plebi Dei|식스투스 에피스코푸스 플레비 데이la가 이를 뒷받침한다.[40] 이 시기 성당 건축은 고대 로마의 제국적 이상을 계승하면서 로마가 기독교 세계의 중심임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반영했다.[26][31] 대성전은 고대 키벨레 여신의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는 설도 있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재위 590년~604년) 시대에는 역병 퇴치를 기원하는 행렬의 중심지가 되는 등 중요성이 부각되었다.[32] 이후 대성전은 여러 차례의 개보수와 1348년 지진 같은 자연재해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5세기 바실리카 양식의 초기 구조를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로마의 주요 성당 중 매우 드문 사례이다.
아비뇽 유수(1309년~1377년) 이후 교황들이 로마로 복귀했을 때, 라테라노 궁전이 쇠락하여 한동안 이곳이 임시 교황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세 이후 교황 에우제니오 3세, 교황 니콜라오 4세, 교황 클레멘스 10세, 교황 베네딕토 14세 등 여러 교황에 의해 지속적으로 복원 및 확장되었다. 특히 베네딕토 14세는 1740년대 페르디난도 푸가에게 의뢰하여 현재의 파사드를 건설하고 내부를 개조했다. 16세기에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설계한 천장이 추가되었으며, 전설에 따르면 아메리카 대륙의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한다.[36]
1929년 라테란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 영토 내에 있지만 바티칸 시국의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1966년에는 대성전 지하에서 고대 로마 시대의 달력이 새겨진 건물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2015년에는 대성전 밖에서 두 남성이 병사들을 공격하려다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33]
'산타 마리아 마조레'라는 이름은 '위대한 성모 마리아'라는 뜻으로, 전 세계 수많은 성모 마리아 봉헌 성당 중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1. 건립 배경
교황 리베리오(재위 352년~366년)는 360년경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 꼭대기에 성당 건설을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이 성당은 후에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이 되었으며, 서방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첫 번째 성당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10]성당 건립과 관련하여 '눈의 기적'이라는 유명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352년 8월 5일 한여름, 성모 마리아가 자식이 없던 로마 귀족 조반니 부부와 교황 리베리오의 꿈에 각각 나타나 에스퀼리노 언덕에 눈이 내리는 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계시했다. 다음 날 아침, 실제로 언덕 꼭대기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고, 교황과 부부는 그 자리에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57][5] 이 이야기는 1000년 이후에 처음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6] 13세기 초의 『교황 연대기』에는 리베리오 교황이 자신의 이름을 딴 성당, 즉 '리베리오 대성당'을 지었다는 기록만 있다.[7] 그럼에도 '눈의 기적' 전설은 14세기경 널리 퍼졌으며,[4]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5일 축일 미사에서는 성당 돔에서 하얀 장미 꽃잎을 뿌리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이 전설은 1423년 콜론나 가문의 의뢰로 마사치오와 마솔리노가 삼면화로 그리기도 했으며, 이 작품은 현재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57][8]

성당의 초기 이름 중 하나는 '리베리오 대성당' 또는 '산타 마리아 리베리아나'였는데, 이는 교황의 이름이나 '눈의 기적' 전설과 관련되었을 수 있다.[10] 다른 한편으로는, 리베리오 교황이 시치니니 가문의 궁전을 성당으로 개조했기 때문에 '시치니니 대성전'으로 불렸다는 설도 존재한다.[10]
그러나 현재의 대성전 건물은 교황 식스토 3세(재위 432년~440년) 시대에 건설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부에서는 교황 첼레스티노 1세(재위 422년~432년) 때 건축이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11] 식스토 3세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가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된 것을 기념하여 이 성당을 짓고 434년 8월 5일에 봉헌했다.[27][28] 개선문의 봉헌 비문 Sixtus Episcopus plebi Dei|식스투스 에피스코푸스 플레비 데이la(식스토 주교가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그의 건축 기여를 명확히 보여준다.[40]
이 시기 로마의 성당 건축은 로마가 로마 제국의 중심일 뿐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반영했다.[26] 식스토 3세의 대규모 건축 사업은 당시 교황청이 확보한 상당한 부를 바탕으로 가능했으며, 이는 4~5세기 동안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톨릭 교회가 얻은 토지 소유에서 비롯된 수입 덕분이었다.[30] 리처드 크라우트하이머는 이러한 재정적 기반이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과 같은 야심찬 건축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했다고 분석한다.[30] 또한, 미리 루빈은 성모 마리아를 고대 로마 제국의 이상을 계승하고 옛 로마와 새로운 기독교 로마를 연결하는 인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성당 건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31]
성당 내부의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은 에페소스 공의회 이후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활발했던 시기의 분위기를 반영한다.[43] 성모와 그리스도의 생애, 구약 성서의 장면들을 묘사한 이 모자이크는 성모 마리아 묘사의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29]
'눈의 기적' 전설이 퍼지기 전, 이 성당은 '구유의 성 마리아'(Sancta Maria ad Praesepe|상크타 마리아 아드 프라이세페la)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사용된 구유의 유물 일부가 교황 테오도로 1세(재위 640년~649년) 때 이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12][13][14]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은 고대 키벨레 여신의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차례의 개보수와 1348년 지진으로 인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주요 바실리카 양식 성당 중 유일하게 5세기 건축 당시의 기본 구조를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성당의 이름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산타 마리아 마조레it)는 '위대한 성모 마리아'라는 뜻으로, 전 세계 수많은 성모 마리아 봉헌 성당 중 가장 크고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2. 중세 시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은 여러 차례 보수 작업을 거쳤으며, 특히 1348년 지진으로 인해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있는 바실리카 양식 성당 중에서는 드물게 초기 건축 구조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사례로 꼽힌다.
아비뇽 유수 시기가 끝나고 로마 교황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기존의 교황 관저였던 라테라노 대성전은 크게 파손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이 한동안 임시 교황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바티칸에 새로운 교황 궁전이 마련되면서 교황은 그곳으로 거처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대성당 건립 배경이 된 '눈의 기적' 전설은 후대에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423년 콜론나 가문의 요청으로 화가 마사치오와 마솔리노는 이 전설을 주제로 삼면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현재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2. 3. 근현대
지난 몇 세기 동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은 풍화(風化)의 영향을 받아왔다. 특히 현대 도시의 공해와 높은 습도는 오래된 성당 건물과 예술품들을 위협하고 있다.자동차 등장 이전인 16세기 말엽부터 바티칸의 성당들이 새로 개축되고 장식되었는데,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역시 여러 교황에 의해 개축되고 확장되었다. 대표적으로 에우제니오 3세(1145-1153), 니콜라오 4세(1288-1292), 클레멘스 10세(1670-1676), 베네딕토 14세(1740-1758) 시기에 변화가 있었다. 1740년에는 교황청의 의뢰를 받은 건축가 페르디난도 푸가가 현재의 정면 외관을 세우고 내부를 대폭 수정했다. 1575년부터 1630년 사이에는 대성당 안의 모든 제대를 포함하여 광범위하고 혁신적인 실내 장식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정면이 완성되면서, 1700년대의 유명 조각가들이 동원되어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 성 가롤로 보로메오와 복자 니콜라오 알베르가티, 그리고 겸손과 성령을 상징하는 각종 대리석상이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되어 설치되었다. 중앙 문인 ‘성년의 문(''Porta Santa'')’은 왼편 중앙 원주 회랑에 위치한다.
대성당 내부는 길이가 86m에 달하며, 4세기 때 지어진 바실리카 양식 성당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과 벽화, 부조들이 대성당의 가치를 더한다. 내부에는 많은 부속 예배당이 있으며 곳곳에 수많은 예술품이 자리 잡고 있다.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보르게세 예배당(또는 바오로 예배당)과 성체 예배당은 십자가 모양 본당 주랑의 양 끝을 장식한다.[58]
아비뇽 유수 이후 로마 교황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라테라노 대성전이 황폐해져 일시적으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이 교황 궁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바티칸에 교황 궁전이 세워지면서 교황은 그곳으로 옮겨가 현재에 이른다.
1929년 체결된 라테란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바티칸 시국 외부에 위치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대해 바티칸의 특별한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3. 건축
최초의 성당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의 건물은 교황 식스토 3세(재위 432-440)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의 모자이크를 비롯한 많은 예술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 대성당의 건축 양식은 고전적인 로마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2세기 제국 시대의 바실리카와 매우 유사하여 초기에는 공회당 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4] 이러한 양식 선택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이 고대 로마 제국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적 미래를 상징하도록 의도된 것일 수 있다.[34]
대성당의 기본적인 구조는 당시 로마에서 전형적이었던 바실리카 양식으로, 높고 넓은 중앙 홀(본당)과 양쪽에 자리한 복도, 그리고 끝부분의 반원형 후진(앱스)으로 구성된다.[26] 내부 기둥들은 현재 건물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최초의 대성당이나 다른 고대 로마 건물에서 가져온 아테네산 대리석 기둥 36개와 화강암 기둥 4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둥들은 18세기에 건축가 페르디난도 푸가에 의해 높이가 조절되고 동일한 금박 청동 기둥머리가 씌워졌다.[35]
시간이 흐르면서 대성당은 여러 차례 개축되고 확장되었다. 주요 개축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재위 1145-1153), 교황 니콜라오 4세(재위 1288-1292), 교황 클레멘스 10세(재위 1670-1676), 교황 베네딕토 14세(재위 1740-1758) 등 여러 교황의 재임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특히 1740년대에 베네딕토 14세의 의뢰를 받은 페르디난도 푸가는 현재와 같은 바로크 양식의 정면 파사드를 설계하고 내부를 대대적으로 수정하였다. 또한 1575년부터 1630년까지는 대성당 내부의 모든 제대를 포함하여 광범위하고 혁신적인 실내 장식 작업이 진행되었다.
주요 건축 요소로는 14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이 있는데, 이는 로마에서 가장 높은 종탑으로 알려져 있다.[35] 16세기에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설계한 격자형 천장은 잉카의 황금으로 도금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36] 후진에는 1295년 프란치스코회 수사 자코포 토리티가 제작한 성모 대관 모자이크가 있다.[36]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풍화 작용과 현대 도시의 공해로 인한 지속적인 보존 문제에 직면해 있다.
3. 1. 외관
12세기에 지어진 대성당 정면은 1743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지시에 따라 페르디난도 푸가가 설계한 새로운 파사드로 가려졌다. 이 재건축 과정에서 휘장이 달린 로지아가 추가되었으며, 푸가는 기존 13세기 정면 모자이크가 손상되지 않고 새로운 설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고려한 설계는 후대 건축 비평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정면 위쪽 아치형 공간 안쪽에는 교황 니콜라오 4세 시대에 모자이크 전문가 필리포 루스티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13세기 모자이크가 보존되어 있다. 중앙에는 왼손에 복음서를 펴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와 그를 둘러싼 네 명의 천사가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 성 바오로, 성 야고보, 성 예로니모가, 왼쪽에는 성 요한 세례자, 성 베드로, 성 안드레아가 그려져 있다. 성 안드레아 옆에는 거의 지워져 식별하기 어려운 인물이 있는데, 성 마티아로 추정된다. 이 모자이크 아래에는 대성당 건립 유래를 담은 또 다른 모자이크가 있다. 순서대로 리베리오 교황이 꿈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 귀족 조반니의 꿈, 조반니가 교황에게 꿈 내용을 알리는 장면, 에스퀼리노 언덕에 눈이 내린 기적을 묘사하고 있다.
대성당의 종탑은 14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약 75m 높이로 로마에서 가장 높다. 대성당 왼편에는 플라미니오 폰지오가 설계한 성구보관실의 날개 부분이 있고, 오른편에도 이와 대칭적인 날개 부분이 있어 대성당 정면이 산타 마리아 마조레 광장을 향해 서 있는 궁전과 같은 인상을 준다.
대성당 정면 오른쪽에는 꼭대기에 십자가가 있고 포신을 위로 세운 듯한 기둥 모양의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 직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는 프랑스 종교 전쟁의 종식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성당 정면 앞 광장에는 1614년에 카를로 마데르노가 설계한 성모 석주가 세워져 있다. 이 석주는 바로크 시대에 역병을 진정시켜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가톨릭 국가들에 세워진 여러 성모 석주의 모델이 되었다(예: 체코 공화국 올로모크의 성 삼위일체 석주). 석주 기둥 자체는 로마 포룸에 있던 막센티우스 공회당의 유일하게 남은 잔해를 가져온 것이다. 기둥 위에는 1614년 베르텔롯이 조각한 '아기 예수를 안은 마돈나' 청동상이 놓여 있다. 마데르노가 만든 분수 바닥에는 독수리와 용이 그려진 교황 바오로 5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3. 2. 내부
현재 건물은 교황 식스토 3세(432-440)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의 고대 모자이크화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대성당의 원래 건축 양식은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로마 건축 양식을 따랐으며, 이는 2세기 제국 시대의 바실리카와 매우 유사하여 초기에는 바실리카를 개조하여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34] 그 설계는 높고 넓은 중앙 홀(본당)과 양쪽의 통로, 그리고 끝부분의 반원형 후진으로 이루어져 당시 로마의 전형적인 바실리카 구조를 보여준다.[26] 대성당은 로마의 주요 바실리카 양식 성당 중 유일하게 원래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귀중한 건축물이다.내부 길이는 86m에 달하며, 본당을 지탱하는 기둥들은 현재 건물보다 더 오래된 것들이다. 이 기둥들은 최초의 대성당이나 다른 고대 로마 건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아테네산 대리석 기둥 36개와 화강암 기둥 4개로 이루어져 있다. 18세기에 페르디난도 푸가는 이 기둥들의 높이를 맞추고 금박을 입힌 동일한 청동 기둥머리를 씌웠다.[35]


대성당의 격자형 천장은 16세기에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디자인한 것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와 페르난도와 이사벨라 여왕이 스페인 출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헌정한 잉카의 황금으로 도금되었다고 전해진다.[36]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4세기에 지어진 종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종탑으로 그 높이가 약 75m에 달한다.[35]
모자이크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의 모자이크는 기독교 후기 고대 시대에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39] 특히 5세기 초에 제작된 개선문과 본당의 모자이크는 성모 마리아 도상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며,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선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9] 이 모자이크들은 후대의 성모 마리아 묘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40], 당시 다양한 모자이크 양식과 높은 수준의 예술적 전문성을 보여준다.[43]
- 정면 모자이크: 대성당 정면 위쪽 아치형 공간 안쪽에는 교황 니콜라오 4세 때 필리포 루스티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13세기 모자이크가 남아있다. 중앙에는 복음서를 펴고 축복하는 그리스도와 네 명의 천사가 있다. 그리스도의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 성 바오로, 성 야고보, 성 예로니모가, 왼쪽에는 성 요한 세례자, 성 베드로, 성 안드레아, 그리고 성 마티아로 추정되는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이 모자이크 아래에는 대성당 건립 설화와 관련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리베리오 교황의 꿈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귀족 조반니의 꿈, 조반니가 교황에게 꿈 이야기를 전하는 장면, 에스퀼리노 언덕 위에 눈이 내린 기적 등이다.
- 본당 모자이크: 5세기에 제작된 본당의 모자이크는 주로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는 장면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43] 예를 들어,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장면이나 이집트 군대가 물에 빠지는 장면 등은 다채로운 색상과 역동적인 표현으로 당시 모자이크 예술의 수준을 보여준다.[40][45] 이 모자이크들은 로마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구약성서를 그들의 '새로운 과거'로 인식시키는 역할을 했다.[43]
- 후진 모자이크: 후진에 있는 '성모 대관' 모자이크는 1295년에 프란치스코회 수사 자코포 토리티가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것이다.[36][41]
예배당 및 기타 공간대성당 내부에는 여러 부속 예배당이 있다.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십자가 모양의 본당 주랑 양끝을 장식하는 보르게세 예배당(바오로 예배당)과 성체 예배당이 있다.[58] 보르게세 예배당에는 조반니 발리오네의 프레스코화가 있다.[36]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과 이름이 같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의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 식스토 5세의 지시로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가 설계했다. 이곳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말구유 성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성당의 중앙 제대 위 닫집에는 세바스티아노 토레지아니가 만든 네 개의 청동 천사상이 있다. 이 시스티나 성당의 마니에리슴 양식 내부 장식은 체사레 네비아와 조반니 구에라의 감독 아래 1587년부터 1589년까지 여러 미술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조반니 발리오네에 따르면, 네비아가 그림의 밑그림을 주로 그렸고 구에라는 미술팀 전체를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성당 성구보관실 아래에는 성탄 토굴 또는 '베들레헴 토굴'이라고 불리는 지하 공간이 있다. 이곳에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불가타) 4세기 교회학자 성 예로니모,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 등 유명한 인물들이 묻혀 있다.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1538년 12월 25일, 이곳 대성당 중앙 제대 아래에 있는 제대에서 사제 서품 후 첫 미사를 집전했다. 또한, 13세기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만든 최초의 성탄 성당과 성탄 구유 재현 장식이 이 토굴 아래에 있다.
개축 및 보존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개축되고 확장되었다. 주요 개축은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1153), 교황 니콜라오 4세(1288-1292), 교황 클레멘스 10세(1670-1676), 교황 베네딕토 14세(1740-1758) 재임 시기에 이루어졌다. 특히 1740년대에 베네딕토 14세의 의뢰를 받은 페르디난도 푸가는 현재의 정면 외관을 설계하고 내부를 대폭 수정했다. 1743년에 추가된 푸가의 로지아식 정면은 기존 13세기 모자이크를 가리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1575년부터 1630년까지 대성당 내부의 모든 제대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실내 장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대 도시의 공해와 습기는 대성당과 그 안의 예술품들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3. 3. 부속 시설
대성전의 높은 제단 아래[46] (또는 성구보관실 아래[46])에는 '''성탄 토굴''' 또는 '''베들레헴 토굴'''이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에는 주세페 발라디에르가 디자인한 수정 성유물함이 있으며,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을 때 사용된 구유의 나무 조각으로 전해지는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46]
또한, 4세기 교회학자이자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불가타 성경을 만든 성 예로니모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47]
대성전 오른쪽 익랑 옆에는 교황 식스토 5세의 이름을 딴 '''시스티나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46] 이는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과는 다른 건축물이다.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가 식스토 5세의 지시를 받아 설계했으며, 성당 내부에는 식스토 5세 자신과 그의 초기 후원자였던 교황 비오 5세의 무덤이 있다. 성당의 중앙 제대 위에는 세바스티아노 토레지아니가 제작한 네 개의 금동 천사상이 있으며, 이 천사들은 성당 모형의 성체 거양대를 받치고 있다.

이 제대 아래에는 '''탄생 경당'''이 있으며, 13세기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성탄 조각상이 이곳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46]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1538년 12월 25일 사제로 서품받은 후 첫 미사를 집전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당시 미사는 중앙 제대 아래 성탄 토굴에서 거행되었다.[47]
시스티나 성당 바로 바깥쪽에는 유명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 그의 가족들의 무덤이 있다.[47]
시스티나 성당 내부의 매너리즘 양식 장식은 1587년부터 1589년까지 체사레 네비아와 조반니 구에라의 감독 아래 여러 미술가들이 참여하여 완성되었다. 미술 전기작가 조반니 발리오네는 많은 프레스코화(전부는 아닐지라도)의 밑그림을 네비아가 그렸고, 구에라는 전체 미술팀을 감독했다고 설명한다.
화가 | 작품 |
---|---|
조반니 바티스타 포초 | 천사의 영광, 방문, 수태고지, 요셉의 꿈, 성 바울과 요한 복음사가,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가다, 유아 학살 |
라탄지오 마이나르디 | 다말, 바레스, 자라, 솔로몬, 보아스 |
헨드릭 판 덴 브루크 (아리고 피아밍고) | 에스롬, 아람, 아미나다브, 나손 |
파리 노가리 | 룻, 이새,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그리고 성가족 |
자코모 스텔라 | 여호사밧과 여호람, 야곱, 유다와 그의 형제들, 이삭의 희생 |
안지올로 네비아 | 오지아스와 요나단, 아비웃과 엘리아김, 므낫세와 아몬, 요시야와 여고니야, 살라디엘과 스룹바벨 |
살바토레 폰타나 | 야곱, 엘리, 엘리에제르와 나단, 헤롯이 무고한 자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하다, 수태고지 |
체사레 네비아 | 하세엘과 에제키아, 사독, 아킴, 아모스 |
볼로냐 출신 에르콜레 | 이집트로의 도피 및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하다 |
안드레아 릴리오 | 헤롯 앞에 선 동방 박사 |
4. 교황과의 관계
교황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을 자주 이용하며, 특히 매년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에는 직접 미사를 집전한다. 대성당 중앙의 닫집 아래 제대는 원칙적으로 교황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예외적으로 수석사제 등 특별히 허가받은 일부 사제만 이용 가능하다.
교황은 대성당의 관리를 수석사제에게 위임하는데, 수석사제는 일반적으로 대주교 중에서 추기경회의를 통해 추기경으로 임명된다. 과거에는 명의상 안티오키아 라틴 총대주교가 이 직책을 맡았으나, 1964년에 폐지되었다. 수석사제 외에도 대성당에 상주하는 의전사제들과, 매일 고해성사 등 성사 집행을 돕는 구속주회 및 도미니코회 소속 사제들이 봉사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 '바실리카' 칭호는 교황청의 허가나 오랜 관습에 따라 부여된다.[17]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은 라테라노 대성전, 성 베드로 대성전, 성 바오로 대성전과 함께 단 4곳뿐인 "대(大) 바실리카" 중 하나이다.[18] 또한, 다른 대 바실리카들과 마찬가지로 "교황 바실리카"로도 불린다. 2006년 이전에는 4개의 교황 대 바실리카가 성 라우렌시오 대성전과 함께 로마의 "총대주교 바실리카"로 불렸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서방의 총대주교" 칭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의 칭호는 총대주교 바실리카에서 교황 바실리카로 변경되었다.[20] 역사적으로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와 연결되어 있었다.[21]
5개의 교황 바실리카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전 및 성 세바스티아노 대성전과 함께 전통적인 로마의 7개 순례 교회였으며, 1552년 2월 25일 필립보 네리에 의해 정해진 20km의 여정을 따라 순례자들이 로마 순례 중에 방문했다.[22][23][24]
대성전 내 보르게세 예배당에는 '로마인의 구원(Salus Populi Romani)'이라 불리는 유명한 성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성상은 도시의 전염병을 기적적으로 막았다는 전승과 함께, 누가 복음사가가 직접 그렸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로마인의 구원' 성상은 여러 교황에게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된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은 1899년 부활절에 이 성상 앞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비오 12세는 1953년 마리아 해를 시작하며 성상을 로마 시내로 옮기는 행렬을 주관했고, 1954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상 대관식을 거행하며 마리아 여왕 대축일을 제정했다. 이후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리고 교황 프란치스코 등 후임 교황들도 이곳을 방문하여 '로마인의 구원' 성상 앞에서 전례를 거행하며 경의를 표했다.
역사적으로 아비뇽 유수 이후 교황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라테라노 대성전이 황폐해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이 임시 교황 궁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교황 궁전은 바티칸으로 옮겨졌다. 1929년 체결된 라테란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영토 내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바티칸 시국의 치외법권과 유사한 특별한 권리가 인정되고 있다.
5. 주요 예술 작품
- 5세기에 제작된 구약 시대 사건들을 묘사한 초기 기독교 모자이크.
-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약 1290년에 조각한 제대의 콘페시오와 프레세피오 (구유).
- 도메니코 폰타나가 1574년에 설계한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선종 추모비.
- 굴리엘모 델라 포르타가 제작한 체시 예배당의 무덤들.
- 도메니코 파시냐노와 주세페 풀리아가 그린 성구보관실의 프레스코화.
- 귀도 레니가 그린 바오로 예배당(파울린 예배당)의 프레스코화.
- 조반니 란프란코가 그린 교황 클레멘스 8세 기념비 프레스코화.
- 알레산드로 알가르디가 제작한 코스탄초 파트리치의 흉상.
- 카를로 리날디가 1665년에 설계한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임시 관대 (현재는 소실됨).
-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1666년에 제작한 스페인의 펠리페 4세 동상.
- 카를로 리날디가 설계하고 1671년에 완성된 교황 클레멘스 9세의 선종 추모비. 교황의 흉상 부분은 도메니코 구이디가 제작함.
-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제작한 아기 예수를 안은 성 가예타노상.
- 피에트로 브라치가 1750년경에 제작한 중앙 제대 조각.
- 이냐치오 자코메티가 1880년경에 제작한 기도하는 교황 비오 9세 조각상.
- 고대 로마의 농업 달력.

대성전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은 공경을 받는 예술 작품 중 하나는 성모자 성화인 Salus Populi Romani|살루스 포풀리 로마니la, 즉 '로마 백성의 수호자'이다. 이 성화는 대성전의 보르게세 예배당(바오로 예배당)에 있으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광장의 원주 역시 이 성화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로마 백성의 수호자'라는 이름은 로마 시내에 전염병이 퍼졌을 때 이 성화가 기적을 일으켜 막아냈다는 전승에서 유래했다.
이 성화는 적어도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통적으로 성 루카 복음사가가 직접 그렸다고 전해진다. 여러 교황들이 이 성화를 특별히 아꼈으며, 마리아론의 주요 상징으로 여겨졌다. 로마 태생의 교황 비오 12세는 1899년 4월 1일 자신의 첫 미사를 이 성화 앞에서 집전했으며, 1953년에는 이 성화가 로마 시내를 순회하며 교회 역사상 최초의 '마리아 해'의 시작을 알렸다. 또한 1951년, 성모 마리아의 새 축일로 천상의 모후 축일이 제정된 것을 기념하여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왕관을 받았다. 이후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등 여러 교황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이 성화를 공경하며 전례 의식을 거행했다.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로마 백성의 수호자' 성화에 대한 깊은 신심을 보이며 자주 대성전을 방문한다. 그는 해외 순방을 떠나기 전과 후에 반드시 이곳을 찾아 기도하며, 이 성화를 자신의 "가장 큰 헌신"이라고 표현했다.[49][51]
참조
[1]
웹사이트
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
https://whc.unesco.o[...]
Whc.unesco.org
2011-06-17
[2]
문서
Lateran Treaty of 1929, Article 15
http://www.vaticanst[...]
[3]
문서
Lateran Treaty of 1929, Article 13
http://www.vaticanst[...]
[4]
간행물
1969
[5]
문서
As reported in the 1911 Catholic Encyclopedia.
1911
[6]
웹사이트
Dedication of St. Mary Major Basilica
https://web.archive.[...]
[7]
간행물
1916
[8]
간행물
1993
[9]
간행물
1913
[10]
웹사이트
Ordinary Time, 5 August
http://www.catholicc[...]
Catholic Culture
[11]
간행물
2009
[12]
웹사이트
Encyclical Slavorum Apostoli
https://www.vatican.[...]
[13]
웹사이트
Crib
http://oce.catholic.[...]
1908
[14]
서적
Relics
https://books.google[...]
Our Sunday Visitor
1984
[15]
웹사이트
Missale Romanum
https://sanctamissa.[...]
1962
[16]
서적
Missale Romanum
1962
[17]
웹사이트
Minor Basilicas in the United States
http://www.catholicc[...]
[18]
웹사이트
Basilicas
http://www.gcatholic[...]
[19]
웹사이트
Modern Catholic Dictionary
http://www.catholicc[...]
1980
[20]
웹사이트
Papal Basilica of Saint Mary Major
https://www.vatican.[...]
2024-07-14
[21]
문서
Patriarch and Patriarchate
[22]
웹사이트
La Visita alle Sette Chiese
http://www.oratorios[...]
[23]
서적
Le sette chiese romane
https://books.google[...]
2011-08-12
[24]
웹사이트
La visita alle Sette Chiese: cenni storici
http://www.gliscritt[...]
2011-08-12
[25]
간행물
1980
[26]
간행물
1980
[27]
간행물
2000
[28]
간행물
1997
[29]
간행물
2000
[30]
간행물
1980
[31]
간행물
2009
[32]
서적
Byzantine Rome and Greek Popes
Lexington Books
2007
[33]
뉴스
Two homeless Arabs attack soldiers at Rome cathedral
http://www.ansa.it/e[...]
ANSA Italy News Service
2015-12-16
[34]
간행물
1993
[35]
간행물
1981
[36]
서적
Vicars of Christ
[37]
웹사이트
Basilica memorial to celebrate the end of the French Wars of Religion
http://members.tripo[...]
2014-03-22
[38]
서적
Il Divoto Pellegrino Guidato, ed Istruito nella Visita delle quattro Basiliche di Roma, per il Giubileo dell'Anno Santo 1750.
https://books.google[...]
Stamperia del Characas, presso San Marco al Corso, Rome
1749
[39]
논문
[40]
논문
[41]
문서
missing Ref
[42]
논문
[43]
논문
[44]
논문
[45]
논문
[46]
웹사이트
Inside the Basilica
https://www.vatican.[...]
[47]
웹사이트
Sacred Destinations: SantaMariaMaggiore, Rome
http://www.sacred-de[...]
[48]
논문
[49]
뉴스
Pope Francis eschews trappings of papacy on first day in office
https://www.theguard[...]
2013-03-14
[50]
웹사이트
Liberian Chapter
https://www.vatican.[...]
[51]
웹사이트
The pope says he wants to be buried in the Rome basilica, not in the Vatican
https://apnews.com/a[...]
2023-12-13
[52]
논문
[53]
웹사이트
Essay of a General List of Cardinals
http://www.fiu.edu/~[...]
[54]
논문
[55]
논문
[56]
논문
[57]
서적
로마 똘레랑스의 제국
(주)살림출판사
[58]
서적
로마 똘레랑스의 제국
(주)살림출판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