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테이 토모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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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테이 토모야스는 일본의 기타리스트, 작곡가, 프로듀서로, 1980년대 록 밴드 BOØWY의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BOØWY 해체 후 솔로 활동을 시작하여, 1988년 솔로 데뷔 앨범 ''Guitarhythm''을 발매했으며, 이후 키카와 코지와 함께 듀오 Complex로 활동하기도 했다. 솔로 활동을 재개한 후, 1990년대부터 해외 활동을 시작하여 유네스코 행사, 올림픽 폐막식, 다양한 페스티벌 등에 참여했다. 2012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활동 반경을 넓혔으며, 롤링 스톤스와의 협연, Spinefarm Records와의 계약 등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음악은 팝 록, 디지털 록, 펑크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독특한 기타 스타일과 무대 매너로도 유명하다. 호테이는 두 번 결혼했으며, 2007년에는 폭행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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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테이 토모야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본명 | 호테이 도모야스 (布袋 寅泰) |
출생일 | 1962년 2월 1일 |
출생지 | 군마현 다카사키시 |
국적 |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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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신지마가쿠엔 고등학교 (중퇴, 후에 명예 졸업) |
직업 | 기타 연주자 싱어송라이터 작사가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
활동 기간 | 1981년 - 현재 |
장르 | 록 로큰롤 디지털 록 일렉트로 |
담당 악기 | 기타 보컬 베이스 키보드 피아노 드럼 프로그래밍 |
레이블 | Virgin Records Spinefarm Records |
소속사 | DADA MUSIC IRc2 CORPORATION (일본 국내) |
배우자 | 야마시타 쿠미코 (1986년 결혼, 1997년 이혼) 이마이 미키 (1999년 결혼) |
공식 웹사이트 | HOTEI.COM |
음악 활동 | |
과거 소속 그룹 | Boøwy Complex |
대표 앨범 | Strangers |
관련 인물 | 이마이 미키 (배우자)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호테이는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에서 태어난 일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는 무역상으로 1년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는 탓에 일본으로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어 모자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48] 아버지는 엄격하고 멋을 아는 인물로, "토라야스 군"이라고 불렸으며, 귀가하는 날 저녁 식사는 가족 모두 정장을 하고 식탁에 앉아 테이블 매너도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싫어하는 인물이었지만, "억울하지만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은 엄청났다"라고 회고했다. 영화 『신・의리없는 전쟁』에 창룡 역으로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나도 아버지가 한국인이어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4]
어머니는 홋카이도 요이치정 출신으로 사할린에서 자랐으며, 일본과 러시아의 혼혈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 다카사키역 앞에서 클럽을 운영했다.[37] 아버지가 엄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서민적이고 천진난만한 인물로 호테이를 "토모짱"이라고 불렀다.[49] 직업상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써서, 호테이의 수업 참관에는 매번 화장과 머리 손질을 꼼꼼하게 하고 고가의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왔다고 한다.[37] BOØWY 초창기에는 호테이의 음악 활동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1986년 7월 2일 BOØWY 첫 일본 무도관 원맨 라이브에 초대한 후 "당신이라면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라고 말했다.[127][50]
생가에는 두 개의 표찰이 걸려 있었는데, 호테이는 아버지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양친이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37] 여동생은 갈라파고스의 보컬로 활동했던 카노 타마키이다. GUITARHYTHM ACTIVE FLY INTO YOUR DREAM』에서 오프닝 액트를 맡는 등 음악적 교류가 있었다.[51] 조카는 싱어송라이터 타구치 하나이다.[53][54] 의붓아들은 JET SETS의 타구치 료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며,[37] 어린 시절 피아노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할리우드 영화의 사운드트랙이나 아르헨티나 탱고를 좋아해서, 그녀의 요청으로 이러한 곡들을 연주했다.[37]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트럼펫 고취대에도 입대했다.[55] 초등학교 고학년 시기에는 전자 오르간도 배웠으며, 발표회에서 무대에 섰던 군마 음악 센터는 후년 BOØWY나 솔로 라이브에서도 사용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어린이 회장을 맡았으며[127][56], 해외 유학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50]
옷차림에도 어린 시절부터 신경을 써서, 카브 스카우트의 제복을 동경하거나,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장발에 자수 장식의 벨보텀 청바지를 입는 소년이었다.[57][37] 니이지마 학원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기타를 시작하기 전까지 "우선 공부에서 낙오. 스포츠에서는 농구부나 축구부, 테니스부에도 들어갔지만 연습에 몰두할 투쟁심이 생기지 않아 퇴부."하는 냉담한 나날을 보냈다.[37]
14세 때, 가마이시시에 사는 사촌의 집에서 팝 음악을 접했고,[57] 마크 볼란의 포스터를 보고 감명을 받아 기타를 시작했다.[58][59] 처음 산 기타는 스트라토캐스터 타입이었고, 이때의 자금은 어머니 지갑에서 훔친 1만 엔이었다. 처음 산 레코드는 에머슨, 레이크 & 파머의 『두뇌개조의 나날』과 비틀즈의 적반이었다.[37]
중학교 3학년 3학기, 에어로스미스의 일본 공연을 관람했을 때, 록시 뮤직과 스파크스, 10cc, 크라프트베르크, 브리지트 퐁텐 등 자신의 스타일에 영향을 준 음악을 배웠다.[37]
이후 "지기 리기"라는 밴드를 결성했다.[37] 10인 편성의 빅 밴드로, 멤버로는 후에 BOØWY의 멤버가 되는 후카자와 카즈아키와, 군마 TV 이사 제작국 국장인 나카가와 신이치로도 재적하고 있었다.[62] 야가미 토오루에 따르면, 당시의 다카사키 일대에서는 히무로 쿄스케와 마츠이 츠네마츠가 결성한 "데스 페널티[63]"와 "지기 리기"가 인기를 양분하고 있었다.[64]
고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아버지에게 한국에도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본가를 처분하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4.5조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이것을 계기로 아버지와 절연 상태가 된다.
"지기 리기"에서 활동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BLUE FILM"을 결성했다.[37] 얼마 지나지 않아 "BLUE FILM"의 멤버와 마에바시시 내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BLUE FILM"에서는 호테이가 밴드 스타일을 고안했고, 신세이도 다카사키점의 악기 판매 코너의 치프와 친해졌고, 이 치프의 조언으로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여 도쿄의 레코드 회사나 음악 사무소에 보냈다.
고등학교 3학년 3학기에 니이지마 학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66] 중퇴의 이유는 학교 측에서 머리 모양을 지적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예수님이 저보다 더 깁니다"라고 말했다.[67] 2017년 5월 26일, 니이지마 학원에서 명예 졸업을 맞이했다.
고등학교 중퇴와 동시에, "BLUE FILM"으로 "EAST WEST '79" 간토 고신에쓰 대회에 출전했다. "FLY AWAY" 명의로도 A'ROCK 본선회와 ROCK INN에 출전하여 전국 대회까지 진출했고, 전자로 아이디어상을 수상했다.[69] 콘테스트 후, 17세 말에 상경한다.[37]
2. 1. 어린 시절
호테이는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에서 태어난 일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는 무역상으로 1년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는 탓에 일본으로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어 모자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48] 아버지는 엄격하고 멋을 아는 인물로, "토라야스 군"이라고 불렸으며, 귀가하는 날 저녁 식사는 가족 모두 정장을 하고 식탁에 앉아 테이블 매너도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싫어하는 인물이었지만, "억울하지만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은 엄청났다"라고 회고했다. 영화 『신・의리없는 전쟁』에 창룡 역으로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나도 아버지가 한국인이어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4]어머니는 홋카이도 요이치정 출신으로 사할린에서 자랐으며, 일본과 러시아의 혼혈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 다카사키역 앞에서 클럽을 운영했다.[37] 아버지가 엄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서민적이고 천진난만한 인물로 호테이를 "토모짱"이라고 불렀다.[49] 직업상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써서, 호테이의 수업 참관에는 매번 화장과 머리 손질을 꼼꼼하게 하고 고가의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왔다고 한다.[37] BOØWY 초창기에는 호테이의 음악 활동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1986년 7월 2일 BOØWY 첫 일본 무도관 원맨 라이브에 초대한 후 "당신이라면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라고 말했다.[127][50]
생가에는 두 개의 표찰이 걸려 있었는데, 호테이는 아버지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양친이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37] 여동생은 갈라파고스의 보컬로 활동했던 카노 타마키이다. GUITARHYTHM ACTIVE FLY INTO YOUR DREAM』에서 오프닝 액트를 맡는 등 음악적 교류가 있었다.[51] 조카는 싱어송라이터 타구치 하나이다.[53][54] 의붓아들은 JET SETS의 타구치 료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며,[37] 어린 시절 피아노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할리우드 영화의 사운드트랙이나 아르헨티나 탱고를 좋아해서, 그녀의 요청으로 이러한 곡들을 연주했다.[37]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트럼펫 고취대에도 입대했다.[55] 초등학교 고학년 시기에는 전자 오르간도 배웠으며, 발표회에서 무대에 섰던 군마 음악 센터는 후년 BOØWY나 솔로 라이브에서도 사용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어린이 회장을 맡았으며[127][56], 해외 유학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50]
옷차림에도 어린 시절부터 신경을 써서, 카브 스카우트의 제복을 동경하거나,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장발에 자수 장식의 벨보텀 청바지를 입는 소년이었다.[57][37] 니이지마 학원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기타를 시작하기 전까지 "우선 공부에서 낙오. 스포츠에서는 농구부나 축구부, 테니스부에도 들어갔지만 연습에 몰두할 투쟁심이 생기지 않아 퇴부."하는 냉담한 나날을 보냈다.[37]
14세 때, 가마이시시에 사는 사촌의 집에서 팝 음악을 접했고,[57] 마크 볼란의 포스터를 보고 감명을 받아 기타를 시작했다.[58][59] 처음 산 기타는 스트라토캐스터 타입이었고, 이때의 자금은 어머니 지갑에서 훔친 1만 엔이었다. 처음 산 레코드는 에머슨, 레이크 & 파머의 『두뇌개조의 나날』과 비틀즈의 적반이었다.[37]
중학교 3학년 3학기, 에어로스미스의 일본 공연을 관람했을 때, 록시 뮤직과 스파크스, 10cc, 크라프트베르크, 브리지트 퐁텐 등 자신의 스타일에 영향을 준 음악을 배웠다.[37]
이후 "지기 리기"라는 밴드를 결성했다.[37] 10인 편성의 빅 밴드로, 멤버로는 후에 BOØWY의 멤버가 되는 후카자와 카즈아키와, 군마 TV 이사 제작국 국장인 나카가와 신이치로도 재적하고 있었다.[62] 야가미 토오루에 따르면, 당시의 다카사키 일대에서는 히무로 쿄스케와 마츠이 츠네마츠가 결성한 "데스 페널티[63]"와 "지기 리기"가 인기를 양분하고 있었다.[64]
고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아버지에게 한국에도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본가를 처분하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4.5조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이것을 계기로 아버지와 절연 상태가 된다.
"지기 리기"에서 활동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BLUE FILM"을 결성했다.[37] 얼마 지나지 않아 "BLUE FILM"의 멤버와 마에바시시 내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BLUE FILM"에서는 호테이가 밴드 스타일을 고안했고, 신세이도 다카사키점의 악기 판매 코너의 치프와 친해졌고, 이 치프의 조언으로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여 도쿄의 레코드 회사나 음악 사무소에 보냈다.
고등학교 3학년 3학기에 니이지마 학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66] 중퇴의 이유는 학교 측에서 머리 모양을 지적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예수님이 저보다 더 깁니다"라고 말했다.[67] 2017년 5월 26일, 니이지마 학원에서 명예 졸업을 맞이했다.
고등학교 중퇴와 동시에, "BLUE FILM"으로 "EAST WEST '79" 간토 고신에쓰 대회에 출전했다. "FLY AWAY" 명의로도 A'ROCK 본선회와 ROCK INN에 출전하여 전국 대회까지 진출했고, 전자로 아이디어상을 수상했다.[69] 콘테스트 후, 17세 말에 상경한다.[37]
2. 2. 학창 시절
호테이는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에서 태어난 일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4] 그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T. Rex의 리더인 마크 볼란의 포스터에 영감을 받아, 그는 어머니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14살에 스트라토캐스터를 샀다.[5] 그의 첫 밴드인 Blue Film은 히무로 쿄스케가 이끄는 밴드 Death Penalty에게 학교 대항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6] 호테이는 졸업 직전에 퇴학당했는데, 그 이유는 긴 머리에 대한 경고를 받고 "예수도 머리가 길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4]3. BOØWY (1981–1988)
'''BOØWY'''는 호테이 토모야스가 히무로 쿄스케와 함께 결성한 전설적인 일본의 록 밴드이다.
=== 결성 ===
호테이는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도쿄로 갔다. 그는 히무로 쿄스케와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들은 새로운 밴드를 위한 오디션을 열기로 결정했으며, 1981년에 6인조 가 되었다.[5] 이름을 Boøwy로 바꾼 후, 그들은 1982년에 첫 번째 앨범 ''Moral''을 발매했다.[5]
상경 후, 호테이는 마에바시 시절 알고 지내던 선배의 도움으로 이케부쿠로에 하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밴드는 음악적 차이로 해체되었다.[37] 자금이 바닥나 유라쿠초의 커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신주쿠를 거쳐 후쿠시의 미군 하우스로 이사했다.[37]
1980년 7월, 고향 라이벌이었던 히무로 쿄스케에게 연락을 받고 롯폰기에서 재회했다.[71][72] 두 사람은 음악적 취향이 비슷하여 의기투합했고, 함께 밴드를 결성하기로 했다.[70] 이후 히무로는 당시 소속사였던 비잉에 호테이를 데려가 새 밴드 결성 의사를 밝혔다. 사장인 나가토 오사유키는 밴드 결성을 허락하고, 멤버 선정과 곡 제출을 요구했다. 이 시기에 BOØWY의 대표곡인 「IMAGE DOWN」, 「NO. NEW YORK」 등이 제작되었다.
같은 해 가을, 마츠이 츠네마츠가 밴드에 가입했다.[71] 이후 모로호시 아츠시, 후카자와 카즈아키, 타카하시 마코토, 키무라 마모루 등이 합류하여 연내에 결성 멤버가 갖춰졌다.[37][75]
=== 데뷔 및 활동 ===
호테이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도쿄로 상경하여 히무로 쿄스케와 친분을 쌓았다.[5] 1981년, 이들은 6인조 밴드 보이/暴威일본어를 결성하여 신주쿠 LOFT에서 데뷔 라이브를 가졌고, 다음 날 다카하시 마코토가 합류했다.[75] 밴드 내에서 호테이는 곡 제작, 편곡, 사운드 프로듀스, 밴드 스타일 고안 및 라이브 홍보 전단 제작 등을 담당했다.[37]
1982년, 밴드명을 BOØWY로 변경하고 앨범 ''MORAL''로 메이저 데뷔했다.[5] 같은 해 모로호시와 후카자와가 탈퇴하여, 이후 히무로, 호테이, 마츠이, 다카하시의 4인조로 활동했다. BOØWY는 1985년 런던 마퀴 클럽 공연을 포함, 6년 동안 6개의 정규 앨범을 발매하며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7] 1986년에는 첫 밀리언셀러 앨범 ''Beat Emotion''을 발매했고,[8] 해체된 1988년에는 오리콘 차트에서 한 해에 3개의 1위 앨범을 기록한 최초의 남성 아티스트가 되었다.[8] 2003년 HMV 재팬은 Boøwy를 "가장 중요한 일본 팝 음악가 100인" 목록에서 22위로 선정했다.[9]
BOØWY 초기, 호테이는 AUTO-MOD와 "PETS"라는 밴드에도 참여했다.[76]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는 여성에게 의지하거나, 즉석 만남, 술집 빈 병을 현금으로 바꾸는 등의 방법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했다.[37] 1983년, 예전 밴드 동료 츠치야 히로시를 매니저로 영입하고 밴드 개인 사무소 "Ø-con' nection"을 설립했다.[75] 같은 해, 싱글 「FUNNY BOY」가 신주쿠 유선 방송에서 3주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세션 뮤지션으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스톱!! 히바리군!의 엔딩 테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삽입곡, 산토리타코하이 CM 송 등에 참여했다.[78][79]
1984년, BOØWY는 유이 음악 공방으로 이적하고, 레코드 회사도 도쿄 EMI로 옮겼다.[37] 호테이는 이즈미야 시게루의 백 밴드 "타워즈"에 참가했으며, 나카지마 미유키, 야마시타 쿠미코, 스즈키 마사유키, 요시카와 코지 등의 레코딩에도 참여했다.[80] 1985년 12월 24일, BOØWY의 시부야 공회당 라이브에서 야마시타 쿠미코와의 결혼을 발표했다. 1986년 이후, 야마시타의 앨범 프로듀싱, 곡 제공 및 라이브 서포트 멤버로도 활동했다.[80] 1987년 12월 24일 시부야 공회당 라이브에서 해산 선언 후, 1988년 4월 4일・5일 『“LAST GIGS”』를 끝으로 BOØWY 활동을 종료했다.
=== 해체 ===
1981년, 밴드 이름을 "'''暴威'''"로 정했다.[37] 같은 해 5월 11일, 신주쿠 LOFT에서 데뷔 라이브 『暴威 LOFT FIRST LIVE』를 개최했다.[75] 1982년 1월, 밴드 이름을 "'''BOØWY'''"로 개명하고,[37] 3월 21일, 빅터 음악 산업을 통해 BOØWY의 기타리스트로서 『MORAL』로 메이저 데뷔했다. 같은 해 10월 9일, 모로호시와 후카자와가 탈퇴하여, 이후 해산까지 히무로, 호테이, 마츠이, 다카하시 4인조로 활동한다.
1983년, 예전 밴드 동료였던 츠치야 히로시를 BOØWY의 매니저로 영입하고, 멤버와 츠치야의 5인 체제로 밴드의 개인 사무소 "Ø-con' nection"을 설립한다.[71][77] 1984년 10월 7일, BOØWY는 사무소를 유이 음악 공방으로, 레코드 회사도 도쿄 EMI로 이적한다.[37]
1987년 12월 24일, 시부야 공회당 라이브에서 해산 선언을 하고,[75] 다음 해인 1988년 4월 4일・5일의 『“LAST GIGS”』를 통해 BOØWY 멤버로서의 활동을 종료한다.
3. 1. 결성
호테이는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도쿄로 갔다. 그는 히무로 쿄스케와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들은 새로운 밴드를 위한 오디션을 열기로 결정했으며, 1981년에 6인조 가 되었다.[5] 이름을 Boøwy로 바꾼 후, 그들은 1982년에 첫 번째 앨범 ''Moral''을 발매했다.[5]상경 후, 호테이는 마에바시 시절 알고 지내던 선배의 도움으로 이케부쿠로에 하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밴드는 음악적 차이로 해체되었다.[37] 자금이 바닥나 유라쿠초의 커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신주쿠를 거쳐 후쿠시의 미군 하우스로 이사했다.[37]
1980년 7월, 고향 라이벌이었던 히무로 쿄스케에게 연락을 받고 롯폰기에서 재회했다.[71][72] 두 사람은 음악적 취향이 비슷하여 의기투합했고, 함께 밴드를 결성하기로 했다.[70] 이후 히무로는 당시 소속사였던 비잉에 호테이를 데려가 새 밴드 결성 의사를 밝혔다. 사장인 나가토 오사유키는 밴드 결성을 허락하고, 멤버 선정과 곡 제출을 요구했다. 이 시기에 BOØWY의 대표곡인 「IMAGE DOWN」, 「NO. NEW YORK」 등이 제작되었다.
같은 해 가을, 마츠이 츠네마츠가 밴드에 가입했다.[71] 이후 모로호시 아츠시, 후카자와 카즈아키, 타카하시 마코토, 키무라 마모루 등이 합류하여 연내에 결성 멤버가 갖춰졌다.[37][75]
3. 2. 데뷔 및 활동
호테이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도쿄로 상경하여 히무로 쿄스케와 친분을 쌓았다.[5] 1981년, 이들은 6인조 밴드 보이/暴威일본어를 결성하여 신주쿠 LOFT에서 데뷔 라이브를 가졌고, 다음 날 다카하시 마코토가 합류했다.[75] 밴드 내에서 호테이는 곡 제작, 편곡, 사운드 프로듀스, 밴드 스타일 고안 및 라이브 홍보 전단 제작 등을 담당했다.[37]1982년, 밴드명을 BOØWY로 변경하고 앨범 ''MORAL''로 메이저 데뷔했다.[5] 같은 해 모로호시와 후카자와가 탈퇴하여, 이후 히무로, 호테이, 마츠이, 다카하시의 4인조로 활동했다. BOØWY는 1985년 런던 마퀴 클럽 공연을 포함, 6년 동안 6개의 정규 앨범을 발매하며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7] 1986년에는 첫 밀리언셀러 앨범 ''Beat Emotion''을 발매했고,[8] 해체된 1988년에는 오리콘 차트에서 한 해에 3개의 1위 앨범을 기록한 최초의 남성 아티스트가 되었다.[8] 2003년 HMV 재팬은 Boøwy를 "가장 중요한 일본 팝 음악가 100인" 목록에서 22위로 선정했다.[9]
BOØWY 초기, 호테이는 AUTO-MOD와 "PETS"라는 밴드에도 참여했다.[76]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는 여성에게 의지하거나, 즉석 만남, 술집 빈 병을 현금으로 바꾸는 등의 방법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했다.[37] 1983년, 예전 밴드 동료 츠치야 히로시를 매니저로 영입하고 밴드 개인 사무소 "Ø-con' nection"을 설립했다.[75] 같은 해, 싱글 「FUNNY BOY」가 신주쿠 유선 방송에서 3주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세션 뮤지션으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스톱!! 히바리군!의 엔딩 테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삽입곡, 산토리타코하이 CM 송 등에 참여했다.[78][79]
1984년, BOØWY는 유이 음악 공방으로 이적하고, 레코드 회사도 도쿄 EMI로 옮겼다.[37] 호테이는 이즈미야 시게루의 백 밴드 "타워즈"에 참가했으며, 나카지마 미유키, 야마시타 쿠미코, 스즈키 마사유키, 요시카와 코지 등의 레코딩에도 참여했다.[80] 1985년 12월 24일, BOØWY의 시부야 공회당 라이브에서 야마시타 쿠미코와의 결혼을 발표했다. 1986년 이후, 야마시타의 앨범 프로듀싱, 곡 제공 및 라이브 서포트 멤버로도 활동했다.[80] 1987년 12월 24일 시부야 공회당 라이브에서 해산 선언 후, 1988년 4월 4일・5일 『“LAST GIGS”』를 끝으로 BOØWY 활동을 종료했다.
3. 3. 해체
호테이는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도쿄로 갔다. 그는 히무로 쿄스케와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들은 새로운 밴드를 위한 오디션을 열기로 결정했으며, 1981년에는 6인조 밴드 暴威(Bōi, 폭정)를 결성했다.[5] 이름을 Boøwy로 바꾼 후, 그들은 1982년에 첫 번째 앨범 ''Moral''을 발매했다. 이후 4인조가 된 그들은 일본에서 주요 스타가 되었고,[5] 6년 동안 6개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으며, 1985년에는 런던의 마퀴 클럽에서 공연하기도 했다.[7] 1986년에는 첫 밀리언셀러 앨범 ''Beat Emotion''을 발매했다. 해체된 1988년에는 오리콘 차트에서 한 해에 3개의 1위 앨범을 기록한 최초의 남성 아티스트가 되었다.[8]1981년, 밴드 이름을 "'''暴威'''"로 정했다.[37] 같은 해 5월 11일, 신주쿠 LOFT에서 데뷔 라이브 『暴威 LOFT FIRST LIVE』를 개최했다.[75] 1982년 1월, 밴드 이름을 "'''BOØWY'''"로 개명하고,[37] 3월 21일, 빅터 음악 산업을 통해 BOØWY의 기타리스트로서 『MORAL』로 메이저 데뷔했다. 같은 해 10월 9일, 모로호시와 후카자와가 탈퇴하여, 이후 해산까지 히무로, 호테이, 마츠이, 다카하시 4인조로 활동한다.
1983년, 예전 밴드 동료였던 츠치야 히로시를 BOØWY의 매니저로 영입하고, 멤버와 츠치야의 5인 체제로 밴드의 개인 사무소 "Ø-con' nection"을 설립한다.[71][77] 1984년 10월 7일, BOØWY는 사무소를 유이 음악 공방으로, 레코드 회사도 도쿄 EMI로 이적한다.[37]
1987년 12월 24일, 시부야 공회당 라이브에서 해산 선언을 하고,[75] 다음 해인 1988년 4월 4일・5일의 『“LAST GIGS”』를 통해 BOØWY 멤버로서의 활동을 종료한다.
4. 솔로 활동
Boøwy영어 해체 이후, 호테이는 1988년 EMI Records를 통해 데뷔 솔로 앨범 ''Guitarhythm''을 발매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 입지를 굳혔다.[2] ''Guitarhythm''은 현재 그가 완전히 영어로 부른 유일한 앨범이다. 1990년대 호테이는 일본에서 꾸준히 인지도를 높여갔으며, 주요 투어와 함께 정기적으로 앨범을 발매했고, 일본 및 해외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포함하여 다른 아티스트를 위해 작곡하고 프로듀싱했다. 호테이는 키카와 코지와 함께 Complex로 두 장의 앨범을 제작했으며,[2] 두 앨범 모두 전국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호테이는 대부분의 앨범을 일본 밖, 주로 런던, 베를린, 몽트뢰 등 유럽에서 녹음했다.
1988년 3월 29일, BOØWY의 "LAST GIGS" 직전에 카스야 센지와 함께 개인 사무소 "IRc2 CORPORATION"을 설립했다.[81][82] "LAST GIGS"로부터 반년 후인 1988년 10월 5일, ''GUITARHYTHM''으로 솔로 데뷔했으며, 같은 작품을 내걸고 "GITARHYTHM LIVE"를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오사카 성 홀에서 개최했다.
4. 1. 초기 솔로 활동 (1988–1990)
Boøwy영어 해체 이후, 호테이는 1988년 EMI Records를 통해 데뷔 솔로 앨범 ''Guitarhythm''을 발매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 입지를 굳혔다.[2] ''Guitarhythm''은 현재 그가 완전히 영어로 부른 유일한 앨범이다. 1990년대 호테이는 일본에서 꾸준히 인지도를 높여갔으며, 주요 투어와 함께 정기적으로 앨범을 발매했고, 일본 및 해외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포함하여 다른 아티스트를 위해 작곡하고 프로듀싱했다. 호테이는 키카와 코지와 함께 Complex로 두 장의 앨범을 제작했으며,[2] 두 앨범 모두 전국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호테이는 대부분의 앨범을 일본 밖, 주로 런던, 베를린, 몽트뢰 등 유럽에서 녹음했다.1988년 3월 29일, BOØWY의 "LAST GIGS" 직전에 유이 음악 공방에서 BOØWY 스태프의 수장이었던 카스야 센지와 함께 개인 사무소 "IRc2 CORPORATION"을 설립했다.[81][82] 사무소 이름은 당시 발견된 새로운 천체에서 따왔다. "LAST GIGS"로부터 반년 후인 1988년 10월 5일, ''GUITARHYTHM''으로 솔로 데뷔했으며, 같은 작품을 내걸고 "GITARHYTHM LIVE"를 국립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오사카 성 홀에서 개최했다. 이 라이브에는 마츠이 히사츠네도 서포트 멤버로 참가했다.
4. 2. COMPLEX 활동 (1989–1990)
1988년 12월 10일, BOØWY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요시카와 코지와 COMPLEX를 결성할 것을 발표했다.[83] 1989년 4월 8일 싱글 'BE MY BABY'로 데뷔 후 발매한 작품은 모두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83]1990년 11월 8일 도쿄 돔에서 개최된 'ROMANTIC EXTRA'에서 COMPLEX로서의 활동을 무기한 정지했다.[84] 실질적인 해산 이유는 싱어송라이터로서 급성장하는 요시카와와 프로듀서 관점까지 시야에 넣고 음악 활동을 파악하는 호테이 사이에 틈이 생겨 술집에서의 싸움으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84] 활동 휴지 발표 후 인터뷰에서 요시카와와 호테이 모두 COMPLEX 결성 초부터 갈등이 생겼음을 인정했다.[85] 또한, 컴퓨터를 도입한 사운드 만들기를 지향했던 호테이와 생연주 속에서 노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 요시카와 사이의 음악성 차이도 휴지의 요인으로 작용했다.[86]
호테이는 인터뷰에서 "COMPLEX를 한 2년은 아티스트로서는 별로 전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청 후회하는 부분도 있어[85]", "상업적인 성공 외에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었다[84]"라고 말했다. 해산 라이브 다음 날, 솔로 복귀작 'GUITARHYTHM II' 제작을 위해 런던으로 출국했다.[87] 1991년, 호테이는 히무로의 "COMPLEX가 정말 호테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라는 인터뷰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라고 긍정하며, COMPLEX 활동은 BOØWY 해산 당시 구상에 없었던 것임을 인정했다.[88][89] 1992년 인터뷰에서도 COMPLEX 결성을 후회하는 취지로 말했다.[90]
4. 3. 솔로 활동 재개 (1991–현재)
COMPLEX 해산 후, 호테이 토모야스는 솔로 활동에 전념해왔다. 2012년 여름, 런던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꿈을 향한 의지를 밝혔다.[91] 해외 및 이주 후 런던에서의 활동은 모두 현지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1994년 5월, 나라시의 도다이지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행사 『GME '94 ~21세기 음악 유산을 목표로~ AONIYOSHI』에 참가하여 마이클 케이멘, 조니 미첼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협연했다.[2] 1996년 8월에는 마이클 케이멘의 의뢰로 1996년 하계 올림픽 폐막식에서 기타를 연주했다.[2]
1998년 7월, 프랑스의 벨포르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 「Eu RockeennEs de BELFORT」에 일본인 최초로 출연했다.[2] 1999년 7월에는 덴마크에서 열린 Roskilde Festival에 참가했고, 같은 달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블론디의 오프닝 무대를 맡았으며, 쾰른에서 단독 공연을 개최했다.
2010년 7월, FUJI ROCK FESTIVAL에서 록시 뮤직과 협연했다.[147][148] 2011년 9월에는 도쿄 재즈 2011에서 리 리트너, 마이크 스턴과 공연했다.[149]
2013년 10월,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서 개최된 재팬 페스티벌의 메인 스테이지에 출연.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를 일본 북 악단과 함께 선보였다. 11월에는 런던의 O2 Shepherd's Bush Empire에서 원맨 라이브를 개최. 앤디 맥케이, 마이크 에드워즈가 게스트로 참가했다. 야마모토 칸사이가 의상을 담당했다. 같은 달, 뉴욕의 에서 자신 첫 번째 미국 공연을 개최.
2014년 3월, 롤링 스톤스의 『14 ON FIRE JAPAN TOUR』 도쿄 돔 공연에, 밴드 측에서 오퍼를 받아 게스트로 출연. 「RESPECTABLE」로 공연을 했다.[150] 7월에는 스위스의 몽트뢰에서 개최된 『Montreux Jazz Festival 2014』의 Japan Day에 출연. 8월에는 영국의 더비셔에서 열린 『Y Not Festival』의 Big Gin Stage에 출연.
2015년, Spinefarm Records와 계약하고[152], '''HOTEI'''의 아티스트명으로 앨범 『STRANGERS』를 유럽, 일본에서 동시 발매했다.[153] 2016년에는 파리, 암스테르담, 베를린에서 공연했고, 롯폰기 힐스 아레나에서 열린 『일이 국교 150주년 기념 이탈리아·아모레·미오!』에 출연. 주케로와 공연. 같은 해, 베로나의 아레나 디 베로나와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주케로의 라이브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2017년에는 산레모에서 열린 『산레모 음악제』의 주케로의 스테이지에 게스트로 출연. 4월에는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HOTEI EURO TOUR 2017』 개최. 총 4개국 8공연. 5월에는 타이페이와 홍콩에서 첫 아시아 공연 『HOTEI ASIA TOUR 2017』 개최. 2018년에는 브뤼셀을 시작으로 『HOTEI EURO TOUR 2018』 개최. 총 5개국 5공연. 2019년 9월에는 영국 포츠머스와 런던에서 열린 올스타 SAS 밴드 공연에 특별 게스트로 참여하여 로저 테일러, 스파이크 에드니, 저스틴 호킨스 등과 함께 무대에 섰다.
2020년 11월 25일, 호테이는 동료 일본인 요시이 카즈야와 Glim Spanky, 그리고 Carlinhos Brown, Marc Lavoine, Calogero, Yang Kun과 같은 해외 아티스트들과의 콜라보레이션 앨범 《Soul to Soul》을 발매했다.
2024년 7월 4일 밀라노의 산 시로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주케로의 라이브에 게스트로 참여했다.[162] 11월 25일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에서 개최된 「사우디아라비아 국립 관현악단 도쿄 콘서트」에 특별 출연하여, 오케스트라 편곡된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를 선보일 예정이다.[165][166]
4. 3. 1. 해외 진출 및 국제적 협업 (1990년대–현재)
COMPLEX 해산 후, 호테이 토모야스는 솔로 활동에 전념해왔다. 2012년 여름, 런던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꿈을 향한 의지를 밝혔다.[91]1994년 5월, 나라시의 도다이지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행사 『GME '94 ~21세기 음악 유산을 목표로~ AONIYOSHI』에 참가하여 마이클 케이멘, 조니 미첼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협연했다.[150] 1996년 8월에는 마이클 케이멘의 의뢰로 애틀랜타 올림픽 폐막식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1998년 7월, 프랑스 벨포르에서 열린 록 페스티벌 「Eu RockeennEs de BELFORT」에 일본인 최초로 출연했다.[151] 1999년 7월에는 덴마크 Roskilde Festival에 참가했고, 같은 달 독일 함부르크에서 블론디의 오프닝 무대를 맡았으며, 쾰른에서 단독 공연을 개최했다.
2010년 7월, FUJI ROCK FESTIVAL에서 록시 뮤직과 협연했다.[147][148] 2011년 9월에는 도쿄 재즈 2011에서 리 리트너, 마이크 스턴과 공연했다.[149]
2013년 10월,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열린 재팬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일본 북 악단과 함께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를 연주했다.[152] 11월에는 런던 O2 Shepherd's Bush Empire에서 단독 공연을 개최, 앤디 맥케이 등이 게스트로 참여했다. 같은 달, 뉴욕 에서 첫 미국 공연을 가졌다.
2014년 3월, 롤링 스톤스의 도쿄 돔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했다.[153] 7월에는 스위스 Montreux Jazz Festival 2014의 Japan Day에 참가했다. 8월에는 영국의 Y Not Festival에 출연했다.
2015년, Spinefarm Records와 계약하고[152], '''HOTEI'''라는 이름으로 앨범 STRANGERS를 발매했다.[153] 2016년에는 파리, 암스테르담, 베를린에서 공연했고, 이탈리아 국교 150주년 기념 행사에서 주케로와 협연했다. 같은 해, 베로나와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주케로의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2017년에는 산레모 음악제에 출연하고,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유럽 투어를 진행했다. 타이페이와 홍콩에서 첫 아시아 공연을 개최했다. 2018년에는 브뤼셀을 시작으로 유럽 투어를 다시 진행했다.
4. 3. 2. 런던 이주 및 국제 활동 (2012–현재)
호테이와 그의 가족은 영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국제적인 경력을 쌓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2012년 6월 런던으로 완전히 이주했다.[15] 2012년 12월, 호테이는 런던의 라운드하우스에서 영국에서의 첫 번째 주요 공연을 펼쳤다. 2013년 11월에는 런던의 셰퍼드 부시 엠파이어와 뉴욕의 하이라인 볼룸에서 공연했다.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호테이는 "작년에 50세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제 꿈을 실현할 마지막 기회입니다. 저는 전 세계에서 공연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16]2014년 3월 6일, 호테이는 롤링 스톤스와 함께 도쿄 돔 콘서트에 깜짝 게스트로 출연하여 "존경할 만한"을 연주했다. 호테이의 "배틀 위드아웃 오너 오어 휴머니티"는 영국에서 벅스턴 워터의 "자연스럽게 펌핑" 캠페인을 위한 전국 TV 광고에 선정되었다.[17]
2014년 6월, 7월, 8월 동안 호테이는 영국의 콘버리 페스티벌, 스위스의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영국의 Y 낫 페스티벌 등에서 공연했다.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에서 로드 마치의 특별 게스트로 초청되어 솔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Live4Ever는 Y 낫 페스티벌을 취재하며 호테이를 "기술적으로 놀라운 솔로 연주와 강력한 기타 코드를 넘나들며 흥분한 듀라셀 토끼처럼 무대 주위를 뛰어다니는 그의 능력으로 메인 무대에서 오후 세트 동안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멋진 남자"라고 묘사했다.[18]
호테이는 8월 말 도쿄 블루 노트에서 4번의 매진된 공연을 펼쳤으며, 람보르기니 우라칸 자동차 출시 기념 비공개 파티에서도 공연했다. 호테이는 만화 ''루팡 3세''의 2014년 실사 영화를 위해 테마곡 "트릭 어택 (루팡 3세 테마)"을 작곡하고 연주했다.[19] 2014년 10월 1일, 앨범 ''뉴 비기닝스''가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이 기 팝이 두 곡의 가사와 보컬에, 불라 말링가가 한 곡의 보컬에 참여했다.
2015년 6월, 호테이는 이기 팝(Iggy Pop)이 보컬로 참여한 싱글 "How The Cookie Crumbles"를 발매했다. 2015년 10월 16일, Spinefarm Records/Universal Music를 통해 ''Strangers'' 앨범이 발매되었다. 이기 팝 외에도 Rammstein의 Richard Kruspe, Bullet for My Valentine의 Matthew Tuck, Noko, Shea Seger가 참여했다. 앨범 발매와 함께 런던의 이즐링턴 어셈블리 홀(Islington Assembly Hall)에서 공연이 열렸으며, 특별 게스트로 세거(Seger)와 Reef의 Gary Stringer가 출연했다.
2016년 2월, 호테이는 암스테르담, 파리, 베를린에서 쇼케이스를 공연했다. 7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을 열어 더 트루바두르(The Troubadour)를 매진시켰고, 뉴욕의 Highline Ballroom에도 다시 출연했다. 앨범에서 세 번째 싱글 "Move It"이 2016년 4월에 발매되었으며, 리처드 크루스페가 참여했다. 네 번째 싱글 "Walking Through The Night"는 11월에 발매되었으며, 이기 팝이 참여했다.
호테이는 Zucchero Fornaciari의 앨범 ''Black Cat''에 수록된 "Ti voglio sposare"라는 곡에 기타 연주로 참여했다. 2016년 5월 호테이가 함께한 Zucchero의 도쿄 첫 공연, 도쿄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이 주최한 행사, 9월 Zucchero의 베로나 아레나 공연에서 호테이의 이탈리아 첫 라이브 출연 등이 이어졌다.
2017년 2월, 호테이는 산레모 음악 축제에서 포르나치아리와 함께 무대에 섰다. 4월, 호테이는 유럽 첫 투어를 마치고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8개 도시에서 공연했다. 2017년 10월 25일, 17번째 솔로 앨범 ''Paradox''를 발매했다.
호테이는 2018년 10월 20일, 셰퍼드 부시 엠파이어에서 특별 콘서트를 열고 3년 만에 런던에서 첫 헤드라인 공연을 펼쳤다. 호테이는 또한 유럽 투어를 다시 진행하여 브뤼셀과 취리히를 다시 방문하고 밀라노에서 첫 헤드라인 공연을 펼쳤다.
2019년 5월, 18번째 솔로 스튜디오 앨범 《Guitarhythm VI》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Man With A Mission, 코르넬리우스, 마이크 가슨, 츠네마츠 마츠이와 타카하시 마코토가 참여했다. 9월에는 영국 포츠머스와 런던에서 열린 올스타 SAS 밴드 공연에 특별 게스트로 참여했다.
2020년 11월 25일, 호테이는 콜라보레이션 앨범 《Soul to Soul》을 발매했다. 여기에는 요시이 카즈야, Glim Spanky, Carlinhos Brown, Marc Lavoine, Calogero, Yang Kun 등이 참여했다.
5. 음악 스타일
BOØWY 시대와 COMPLEX 시대에는 8비트와 뉴 웨이브를 기조로 한 팝적인 악곡(일명 비트 록이나 파워 팝)을 주로 제작했다.[92] 솔로 활동 이후에는 디지털 록, 펑크, 글램 록, 팝 록, 프로그레시브, 테크노, 크라우트 록, 브라스 록, 하우스, 레게, 펑크, 포스트 록, 일렉트로니카, 드럼 앤 베이스, 앰비언트, 로커빌리, 재즈 등 다양한 요소를 도입한 사운드를 전개하고 있으며, 앨범마다 음악 콘셉트를 바꾸며 세계관이 다른 작품을 발표했다.[92] 이러한 자세에 대해 호테이는 "'''날마다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록앤롤'''"이라고 말했다.[92]
자신이 가장 영향을 받은 뮤지션으로 데이비드 보위, T. Rex, 록시 뮤직을[93], 기타리스트로 만든 인물로 마크 볼란, 믹 론슨, 크리스 스페딩을 꼽았다.[94] 특히 데이비드 보위에 대한 경애는 강하며, 인터뷰 등에서 빈번하게 이름이 등장한다. 자신의 음악 콘셉트를 매번 바꾸는 스타일도 보위에게서 받은 영향 중 하나이다. 그 외에도 10cc, 엘비스 코스텔로, XTC, 스파크스, 크라프트베르크, Deaf School영어, 스티브 하일리 & 콕니 레벨, 데보, 토킹 헤즈, DAF, 울트라복스, 지그 지그 스푸트닉, 지저스 존스, 갱 오브 포, 캡틴 비프하트[95], 히라사와 스스무[95], 텔레비전, 데시즈 미드나이트 러너스, 붐타운 라츠, 섹스 피스톨즈, 리 리트너, 알 디 메올라, 브리지트 퐁텐 등 다양한 뮤지션을 언급했다. 현재에도 많은 뮤지션을 애청하고 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레코드 마니아이다.
음악적인 면이나 밴드 스타일에서는 브리티시 무브먼트(특히 글램 록, 펑크, 뉴 웨이브)의 영향이 강하지만, 기타 플레이에서는 레이 파커 Jr., Wah Wah Watson영어, 조니 "기타" 왓슨, 알 매케이 등, 흑인 음악 계열의 기타리스트를 좋아해서 따라 했던 것으로부터, 펑크에 대한 고집도 강하다.
라이브 활동에는 매우 정력적이어서, 현재에도 아레나, 홀, 라이브 하우스 등 다양한 규모의 무대를 밟고 있다. "라이브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어디까지나 라이브를 하고 싶어서 악곡을 만든다" 등 무대를 의식한 발언이 많다. 무대 세트나 연출에 대한 고집도 강하며,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공격적이고 독특한 무대 액션을 평가하는 뮤지션도 많이 존재한다. 서포트 멤버는 투어마다 교체되는 경우가 많으며, 라이브 콘셉트나 서포트 멤버의 스타일에 따라 과거 악곡에도 더 나아가 어레인지를 가해, 때로는 오리지널 테이크와 크게 모습을 바꾼다. 기본적으로 거의 매번 라이브 및 투어 때마다 새롭게 어레인지된 과거 악곡이 선보여진다.
악곡뿐만 아니라 패션, 비주얼, 아트워크도 활동 콘셉트의 일환으로 중시한다. 작품의 세계관에 맞춰 수트나 가죽 재킷, 근미래풍 패션이나 고딕풍 의상도 입고, 메이크업, 스타일링도 바꾼다. Char의 패션에도 강하게 영향을 받아 "군마의 Char"라고 불렸다고도 말하고 있다.[96][97] BOØWY 결성 후에도 처음부터 헤어 메이크업이나 의상, 라이브 콘셉트의 아이디어를 여러 번 멤버에게 제안했다. 『INSTANT LOVE』의 시기에, 아오야마의 킬러 거리에 있던 패션 공방 "T-KIDS"에 갑작스럽게 의상 제공을 신청, 실현시켰다는 에피소드도 있다.[98] 헤어스타일 세팅은 BOØWY 시대부터 2023년 현재까지 일관되게 자신이 하고 있다.[99][100] 고등학교 시절에 레터링의 통신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부터, BOØWY 시대 초기에는 라이브의 선전 전단 디자인도 담당했다.[37]
음악 외에 회화나 아트 작품, 시, 영화, 문학 등도 좋아하며, 곡 만들기에 영향을 받은 에피소드도 저서나 인터뷰 등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앤디 워홀[101], 장 콕토, 아르튀르 랭보, 살바도르 달리, 안토니 가우디, 빈센트 반 고흐, 케네스 앵거, 스탠리 큐브릭, 윌리엄 버로우즈, 고이케 마리코[102] 등을 취미로 꼽고 있다. 여행을 가는 일도 많으며, 다양한 땅에서의 에피소드가 여러 번 악곡에 반영되어 있다. 특히 런던에 대한 애착은 유별나게 강하며, 2012년에 같은 지역으로 이주하기 이전부터 별채로서 애비 로드나 노팅힐에 플랫을 소유하고 있어, 레코딩이나 프라이빗으로 자주 방문했다.
곡 제작은 작곡을 우선(곡 선행)으로 한다. 기타 리프로 만든 것, 베이스 리프로 만든 것, 멜로디로 만든 것, 리듬 패턴으로 만든 것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라이브에 대한 고집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작곡 시점에서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지만, 편곡은 라이브를 의식해서 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라이브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은 CD에서도 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무대에서의 파트는 기타와 보컬뿐이지만[126], 레코딩 시에는 베이스나 키보드 등도 스스로 연주한다. 또한 일부 작품에서는 프로그래밍도 하고 있다.
외출 시 등에서 프레이즈가 떠올라도 녹음하거나 악보에 적어두는 일은 기본적으로 하지 않는다. 본인에 따르면 "잊어버릴 정도의 프레이즈는, 결국 그 정도의 것이다[94]"라며, 『GUITARHYTHM IV』처럼 데모 테이프를 일절 제작하지 않은 앨범도 존재한다. 애초에 기타 악보에 관해서는 자작곡을 악보로 만들 수 없고, 읽는 것도 서투르다. 코드도 기본적인 것 외에는 잘 모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BOØWY 시대 초기에 스튜디오 뮤지션의 일이 들어왔을 때는, 작은 사이즈의 코드북을 숨겨 가지고 스튜디오에 들어갔다.[127]
『THANK YOU & GOOD BYE』 등 일부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서 셀프 프로듀스를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저의 프로듀서라는 입장은 어디까지나 기타리스트의 연장선. 좋은 뮤지션, 좋은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드럼도 베이스도 노래도 알아야 한다는 것. 처음 만든 『MORAL』이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완성도로 되어버린 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이건 스튜디오 작업을 더 잘 알아야 하고, 그냥 연주만 해서는 결과적으로 작품으로서의 어느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절감했다. 그 후 뮤지션으로서의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여러 가지를 클리어하여 프로듀서라고 불리게 되었다[115]"라고 말했다.
타카하시 마코토는 호테이의 음악 스타일, 프로듀스 워크에 대해 "심플하고, 임팩트가 있으며, 게다가 멋있다. 그런 리프를 만들게 하면 호테이는 정말 천재적이었다", "겉보기에는 루츠가 잘 보이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혼자 믹스쳐'. 모든 장르의 음악을 탐욕스러울 정도로 삼켜서, 전부 자기 안에서 소화하여 호테이 스타일로 물들여 버린다. 자신의 루츠 뮤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호테이는 결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의 루츠 뮤직은 '호테이 토모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루츠로 하려고 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루츠가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툴도 많고, 기타 외의 악기도 한두 가지는 뭐든지 해낸다. 레코딩 시에는 꽤 구체적인 프레이즈를 요구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이 드럼도 칠 수 있기 때문이며, 의사소통도 매우 원활했다"라고 저서에 적고 있다.[128]
5. 1. BOØWY 시절
5. 2. 솔로 활동
곡 제작은 작곡을 우선으로 하며, 기타 리프나 베이스 리프, 멜로디, 리듬 패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만든다.[126] 라이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편곡은 라이브를 의식하여 진행하며, "'''라이브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은 CD에서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126] 무대에서는 기타와 보컬을 담당하지만,[126] 레코딩 시에는 베이스나 키보드 등도 직접 연주하고, 일부 작품에서는 프로그래밍도 한다.[126]외출 시 떠오르는 프레이즈는 녹음하거나 악보에 기록하지 않는다. "잊어버릴 정도의 프레이즈는, 결국 그 정도의 것이다"라는 생각으로,[94] 『GUITARHYTHM IV』처럼 데모 테이프를 만들지 않은 앨범도 있다. 기타 악보를 만들거나 읽는 데 서툴고, 코드도 기본적인 것 외에는 잘 모른다고 한다. BOØWY 시대 초기에는 코드북을 숨겨서 스튜디오에 들어갔다.[127]
『THANK YOU & GOOD BYE』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품에서 셀프 프로듀스를 하고 있다. "프로듀서라는 입장은 기타리스트의 연장선"이라며, 좋은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해 드럼, 베이스, 노래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115] 『MORAL』이 만족스럽지 못한 완성도로 끝나면서 스튜디오 작업을 더 잘 알아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후 여러 경험을 통해 프로듀서로 불리게 되었다.[115]
타카하시 마코토는 호테이의 음악 스타일에 대해 "심플하고, 임팩트가 있으며, 멋있다. 리프를 만드는 데 천재적"이라고 평가했다.[128] "혼자 믹스쳐"라고 표현하며, 모든 장르의 음악을 소화하여 호테이 스타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128] 호테이는 자신의 루츠 뮤직으로 돌아가지 않고, '호테이 토모야스' 그 자체를 루츠로 삼았다고 덧붙였다.[128]
6. 기타 스타일
호테이 토모야스는 비트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비트 기타리스트''''라고 칭한다.[103] 그의 기타 스타일은 'BAD FEELING'의 리프에 대표되는 독특한 '''커팅'''이 특징인데, 이는 비트에 대한 집착과 펑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결과이다.
피크는 삼각 형태의 하드 타입을 애용하며,[103] '''피크와 손톱을 동시에 현에 대면서 연주'''(피킹 하모닉스)하여 독특한 사운드를 낸다.[103][104] 한번의 라이브에서 손톱이 상당히 닳기 때문에, 투어 중에는 코팅을 꼭 하고 있다.[105] 또한, '''"기타는 왼손보다 오른손이 중요하다"'''고 하며, "같은 프레이즈라도 피킹 하모닉스를 활용하는 등 오른손 사용법에 따라 사운드에 개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106][107]
왼손은 펑크와 뉴 웨이브의 영향으로 스트랩을 길게 하여 허리 위치에서 연주하는 등, 테크닉보다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하여 새끼손가락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92][96][108] 한편 5현 6현을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는 스타일을 많이 사용한다.[109] 호테이의 손은 키가 큰 체형에 비해 작고 부드러운데,[108][110][104] 이 점과 피킹 하모닉스, 5현 6현을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는 스타일이 'BAD FEELING'이나 '2人のAnother Twilight' 등 독특한 커팅을 구사하는 "버릇 프레이즈"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111] 마티 프리드먼은 기타 소리만 듣고 누가 연주하는지 알 수 있는 일본의 개성파 기타리스트로 Char, 마츠모토 타카히로와 함께 호테이를 언급했다.[112]
배킹 시에는 브릿지 뮤트나 뮤트 커팅을 구사하여 '''리듬을 돋보이게 하는 플레이'''를 한다. "겉보기와는 달리 꼼꼼한 성격이라 기타도 리듬을 제대로 새기는 스타일이 더 잘 맞았다"고 하며, 기타를 연주할 때 피킹의 어택감과 리듬감을 의식한다는 발언도 많아, "호테이의 기타는 컴퓨터처럼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113] 스티브 에토는 "망설여질 때는 그의 기타를 들으면 확실하다"고 평했다.[113]
리듬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만, 노래 멜로디에 따르는 리드 기타도 큰 특징이다. 록 음악의 기타 솔로에서 사용 빈도가 높은 펜타토닉 스케일이 거의 사용되지 않고, 서양 7음계로 구성되어 있다.[114] BOØWY 시절에는 "음계는 음이 떨어져 있지 않은 쪽이 귀에 익숙하다", "기타 솔로는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애드립 같지 않도록" '''쉽지만 귀에 남는 프레이즈'''를 추구했다. 기타 솔로에 관해서는 테크닉보다 감정 이입주의라고 여기며, 작곡가로서 멜로디가 샘솟는 타입이며, 뛰어난 애드립을 연주하려면 뛰어난 멜로디 메이커여야 한다고 말한다.[115]
리듬 파트, 리드 파트 모두 하드 록 등의 왜곡된 사운드는 내는 경우가 적다. "기타 노이즈가 싫다", "밋밋하게 왜곡된 기타는 취향이 아니고, 그런 음악은 별로 듣지 않았다"고 말하며,[116] '메탈도 (자신의 취향에) 빠지지 않았다"고 코멘트한다.[116] 2023년 현재, 투어의 서포트 기타리스트를 맡고 있는 쿠로다 아키토시에 따르면, 호테이의 앰프 세팅은 왜곡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있으며, "수퍼 드라이"한 사운드로 플레이하고 있다.[117]
후술과 같이, 마크 볼란이 레스 폴을 연주하는 모습의 포스터를 보고 기타를 시작했지만, 레스 폴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메이저 데뷔 후 사용한 기회도 매우 적다. 레스 폴에 대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소리가 달콤하다. 그러면 볼륨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되고, 프레이즈도 하드 록 스타일이 되어 버린다. LA 메탈 같은 건 싫고, 호랑이 무늬 같은 콜렉터 감각도 없다."고 하며, 초심자에게 레스 폴은 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96]
아마추어 시절에는 크라프트베르크를 들으면서 악곡의 루프에 맞춰 기타 프레이즈를 생각했으며,[120][37] 이상적인 기타리스트 상은 "마크 볼란과 같은 글램한 의상으로, 흑인과 같은 펑키한 커팅을, 크라프트베르크의 비트를 배경으로 춤추면서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였다고 한다.[121]
BOØWY 시대에는 코러스, 아날로그 딜레이, 하모나이저 등 다양한 이펙터를 사용했지만, 솔로 이후 그 수는 감소했다. 하지만 아날로그 딜레이는 현재까지 정평 아이템으로 정착하고 있다.
TAKUYA, SUGIZO 등 호테이의 영향을 받은 기타리스트들이 많다.
이마이 히사시는 "영향을 받은 유일한 기타리스트"로 호테이를 언급하며,[122] "기타 사운드지만, 일렉트로 감, 테크노 감이 있다", "솔로를 연주하지 않아도 멋있는 기타 플레이", "펑크적인 자세"라고 말하며, "세련된 B급 감"이라고 평한다.[123]
브라이언 셋처는 "그는 오래된 사운드를 모던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고 평했다.[124]
ONIGAWARA의 타케우치 사티포는 호테이의 시그니처 모델인 "TC-HOTEI 25th Anniversary"를 사용한다.[125]
독특한 무대 액션 또한 호테이의 상징으로 꼽힌다. 기타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고려하여 자택에서도 서서 연주했었다고 한다. 신주쿠의 츠바키 하우스나 롯폰기의 클라이맥스 등의 디스코에도 자주 갔으며, "기타를 격렬하게 치는 액션으로 점프하면서 춤을 췄다. 자신의 무대 액션의 원형은, 츠바키 하우스와 클라이맥스의 댄스 플로어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37]
7. 사생활
호테이는 두 번 결혼했다. 1986년 1월 가수 야마시타 쿠미코와 결혼했으나[2] 1997년 11월 이혼했다.[2] 야마시타의 앨범 『BLONDE』에 호테이가 참여한 것이 계기였으며[48], 만난 지 2개월 만에 동거를 시작했고, 6개월 만에 혼인신고를 하는 속도위반 결혼이었다.[94][48] 1996년 1월 말에 이마이 미키와의 불륜이 발각되었고,[48] 이것이 이혼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야마시타는 저서에서 BOØWY의 성공으로 호테이가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가 된 것, 호테이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 호테이가 앨범 제작을 위해 런던에 장기 체류한 것, 솔로 활동으로 바빠져 자신의 작품에 관여하지 않게 된 것에 대한 외로움과 엇갈림이 이혼의 원인이라고 밝혔다.[48]
1999년 6월, 이마이 미키와 재혼했다.[5] 2002년 7월에는 딸이 태어났다.[5]
런던에 거주하고 있지만, 콘서트 투어, 녹음, 행사 참석을 위해 일본과 영국을 자주 오간다. 2013년 2월, BBC 월드 뉴스는 호테이와 런던에서의 생활에 대한 특집 기사를 방영했다.[21]
2007년 6월 14일, 호테이는 친구이자 펑크 록 가수인 마치다 코를 폭행한 혐의를 받았다.[22] 이 사건은 두 사람이 함께 결성하려던 밴드를 두고 언쟁을 벌이면서 발생했다.[5] 마치다는 경찰에 신고했고, 호테이는 벌금형을 받았다.[23]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 미나미산리쿠정에 자원봉사자로 방문했다.[129]
8. 음반 목록
- ''Guitarhythm Forever Vol. 1'' (1995년 2월 17일) #1[27]
- ''Guitarhythm Forever Vol. 2'' (1995년 2월 17일) #2[27]
- ''Greatest Hits 1990–1999'' (1999년 6월 23일) #1[27]
- ''Tonight I'm Yours / B-Side Rendez-vous'' (2000년 1월 26일, 2개의 앨범) #4[27]
- ''All Time Super Best'' (2005년 12월 7일) #5[27]
- ''All Time Super Guest'' (2011년 8월 17일) #5[27]
- ''51 Emotions -the best for the future-'' (2016년 6월 22일) #5[27]
- ''Guitarhythm Active Tour 91-92'' (1992년 4월 8일) #2[27]
- ''Guitarhythm Wild'' (1993년 4월 28일) #3[27]
- ''Space Cowboy Show'' (1997년 3월 19일) #3[27]
- ''Space Cowboy Show Encore'' (1997년 4월 25일) #8[27]
- ''Rock the Future Tour 2000-2001'' (2001년 3월 22일) #15[27]
- ''Tomoyasu Hotei Live in Budokan'' (2002년 12월 26일) #18[27]
- ''Monster Drive Party!!!'' (2005년 9월 14일) #25[27]
- ''MTV Unplugged'' (2007년 6월 27일) #38[27]
- ''Climax Emotions -Live at Budokan-'' (2017년 6월 28일) #17[27]
- ''배틀 로얄 믹스'' (1996년 12월 24일)
: 한정 발매.
: 마이클 케이먼과의 협업.
: 한정 발매.
: ''기타리듬'' I, II, III, IV, V의 미리보기, 라이브 DVD가 수록.
- ''모던 타임스 록큰롤 (파티 믹스)'' (2009년 11월 25일)
: 아이튠즈 스토어 한정 디지털 다운로드.
: 서양 히트곡 커버 앨범. 같은 날 한정 수량의 USB 플래시 드라이브로도 발매.
- ''호테이 메모리얼 슈퍼 박스'' (2012년 2월 1일) #23[27]
- ''Guitarhythm'' (1989년 7월 11일)
- ''Guitarhythm Active Tour '91-'92'' (1992년 3월 25일)
- ''Guitarhythm Wild'' (1993년 6월 16일)
- ''Serious Clips'' (1994년 7월 27일)
- ''Guitarhythm Serious! Climax'' (1995년 5월 17일)
- ''Cyber City Never Sleep'' (1996년 5월 24일)
- ''H'' (1996년 10월 9일)
- ''Space Cowboy Show'' (1997년 4월 25일)
- ''Space Cowboy Show Encore'' (1997년)
: VHS와 DVD 모두 ''Space Cowboy Show''를 구매한 사람들에게만 제공되었다.
- ''SSG Live "Rock the Future"'' (1998년 10월 7일)
- ''Greatest Video 1994-1999'' (1999년 7월 16일)
- ''Tonight I'm Yours'' (2000년 5월 16일), 오리콘 DVD 차트 최고 순위: 8위[28]
- ''Rock the Future Tour 2000-2001'' (2001년 5월 16일) 23위[28]
- ''Hotei Live Jukebox'' (2001년 7월 25일) 18위[28]
- ''Live in Budokan'' (2003년 7월 29일)
- ''Beat Crazy Presents Live @ AX'' (2003년 5월 21일) 31위[28]
- ''Doberman DVD'' (2003년 11월 3일) 38위[28]
- ''The Live! Doberman'' (2004년 6월 30일) 8위[28]
- ''Top Runner Full Version'' (2005년 3월 30일) 56위[28]
: 한정 발매.
- ''Monster Drive Party!!!'' (2005년 9월 14일) 12위[28]
- ''All Time Super Clips'' (2006년 5월 15일) 21위[28]
- ''All Time Super Best Tour'' (2006년 6월 26일) 7위[28]
- ''Hotei presents "Super Soul Sessions" Brian Setzer vs Hotei vs Char'' (2007년 6월 27일) 12위[28]
- ''MTV Unplugged'' (2006년 6월 27일) 26위[28]
- ''Hotei and The Wanderers Funky Punky Tour 2007-2008'' (2008년 4월 23일) 19위[28]
- ''Tōdai-ji+G.V. / Time and Space'' (2009년 11월 25일) 15위[28]
: 한정 발매.
- ''Hotei+Tōdai-ji Tomoyasu Hotei Special Live -Fly into your Dream-'' (2009년 11월 25일)
- ''Guitarhythm V Tour'' (2009년 11월 25일) 154위[28]
- ''30th Anniversary Anthology I "Souseiki"'' (2011년 9월 14일) 3위[28]
- ''30th Anniversary Anthology II "Ifuu Doudou"'' (2011년 9월 14일) 2위[28]
- ''30th Anniversary Anthology III "Ichigo Ichie"'' (2011년 12월 9일) 14위[28]
- ''We Are Dreamer ~50th Birthday Special Celebration Gig~'' (2012년 2월 1일) 10위[28]
- ''Hotei Live In London- Electric Samurai- Live at O2 Shepherd's Bush Empire'' (2014년 8월 27일) 53위[28]
- ''Tomoyasu Hotei Japan Tour 2014 -Into the Light- (2015년 6월 10일) 19위[28]
- ''Hotei Jazz Trio Live at Blue Note Tokyo'' (2015년 6월 10일) 36위[28]
발매일 | 제목 | 최고 순위 | 규격 품번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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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 1995년 2월 17일 2014년 12월 10일 | GUITARHYTHM FOREVER Vol.1 | 1 | AJCH-30008 UPCY-6961 | |
2집 | 1995년 2월 17일 2014년 12월 10일 | GUITARHYTHM FOREVER Vol.2 | 2 | AJCH-30009 UPCY-6962 | |
3집 | 1999년 6월 23일 | GREATEST HITS 1990-1999 | 1 | TOCT-24151 | 싱글 컬렉션 |
4집 | 2000년 1월 26일 | B-SIDE RENDEZ-VOUS | 4 | TOCT-24311 | 커플링 곡 베스트 |
5집 | 2004년 3월 31일 | ELECTRIC SAMURAI | 24 | TOCT-25355 | 기타 인스트 베스트 |
6집 | 2005년 12월 7일 | ALL TIME SUPER BEST | 5 | TOCT-25864: 초회 한정반 TOCT-25865: 통상반 | |
7집 | 2016년 6월 22일 | 51 Emotions -the best for the future- | 5 | TYCT-69103: 초회 한정반 TYCT-60081/3: 통상반 |
발매일 | 제목 | 최고 순위 | 규격 품번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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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1992년 4월 8일 2000년 12월 13일 2014년 12월 10일 | ''GUITARHYTHM active tour 91- | 2 | TOCT-6433 AJCH-30004 UPCY-6957 | |||||||||||||||||||||||||||||||||||||||||||||||||||||||||||||||||||||||||||||||||||||||||||||||||||||||||||||||||||||||||||||||||||||||||||||||||||||||||||||||||||||||||||||||||||||||||||||||||||||||||||||||||||||||||||||||||||||||||||||||||||||||
2nd | 1993년 4월 28일 2000년 12월 13일 2014년 12월 10일 | GUITARHYTHM WILD | 3 | TOCT-7020 AJCH-30006 UPCY-6959 | |||||||||||||||||||||||||||||||||||||||||||||||||||||||||||||||||||||||||||||||||||||||||||||||||||||||||||||||||||||||||||||||||||||||||||||||||||||||||||||||||||||||||||||||||||||||||||||||||||||||||||||||||||||||||||||||||||||||||||||||||||||||
3rd | 1997년 3월 19일 | SPACE COWBOY SHOW | 3 | TOCT-9823 | |||||||||||||||||||||||||||||||||||||||||||||||||||||||||||||||||||||||||||||||||||||||||||||||||||||||||||||||||||||||||||||||||||||||||||||||||||||||||||||||||||||||||||||||||||||||||||||||||||||||||||||||||||||||||||||||||||||||||||||||||||||||
4th | 1997년 4월 25일 | SPACE COWBOY SHOW ENCORE | 8 | TOCT-9851 | 한정반 | ||||||||||||||||||||||||||||||||||||||||||||||||||||||||||||||||||||||||||||||||||||||||||||||||||||||||||||||||||||||||||||||||||||||||||||||||||||||||||||||||||||||||||||||||||||||||||||||||||||||||||||||||||||||||||||||||||||||||||||||||||||||
5th | 2000년 1월 26일 | ''TONIGHT IM YOURS''' | 4 | TOCT-24311 | |||||||||||||||||||||||||||||||||||||||||||||||||||||||||||||||||||||||||||||||||||||||||||||||||||||||||||||||||||||||||||||||||||||||||||||||||||||||||||||||||||||||||||||||||||||||||||||||||||||||||||||||||||||||||||||||||||||||||||||||||||||||
6th | 2001년 3월 16일 | ROCK THE FUTURE TOUR 2000-2001 | 15 | TOCT-24577 | |||||||||||||||||||||||||||||||||||||||||||||||||||||||||||||||||||||||||||||||||||||||||||||||||||||||||||||||||||||||||||||||||||||||||||||||||||||||||||||||||||||||||||||||||||||||||||||||||||||||||||||||||||||||||||||||||||||||||||||||||||||||
7th | 2002년 12월 26일 | 호테이 토모야스 라이브 in 부도칸 | 18 | TOCT-24904 | |||||||||||||||||||||||||||||||||||||||||||||||||||||||||||||||||||||||||||||||||||||||||||||||||||||||||||||||||||||||||||||||||||||||||||||||||||||||||||||||||||||||||||||||||||||||||||||||||||||||||||||||||||||||||||||||||||||||||||||||||||||||
8th | 2005년 9월 14일 | MONSTER DRIVE PARTY!!! | 22 | TOCT-25768 | |||||||||||||||||||||||||||||||||||||||||||||||||||||||||||||||||||||||||||||||||||||||||||||||||||||||||||||||||||||||||||||||||||||||||||||||||||||||||||||||||||||||||||||||||||||||||||||||||||||||||||||||||||||||||||||||||||||||||||||||||||||||
9th | 2007년 6월 27일 | MTV UNPLUGGED | 38 | TOCT-26260 | 한정반 | ||||||||||||||||||||||||||||||||||||||||||||||||||||||||||||||||||||||||||||||||||||||||||||||||||||||||||||||||||||||||||||||||||||||||||||||||||||||||||||||||||||||||||||||||||||||||||||||||||||||||||||||||||||||||||||||||||||||||||||||||||||||
10th | |'''"B.C. ONLY 2010" @BIGCAT''' |- |BCTH-100829 | 비매품. 2010년 8월 29일에 BIG CAT에서 열린 팬클럽 한정 라이브를 수록[168] |- |11th |2017년 6월 28일 |'''Climax Emotions 〜Live at 부도칸〜''' |17 |TYCT-60102/4 | |} 8. 1. 정규 음반호테이 토모야스는 1988년 10월 5일 첫 정규 음반 ''Guitarhythm''을 발매하여 오리콘 앨범 차트 2위를 기록했다.[27] 이후 ''Guitarhythm II''(1991년 9월 27일, 1위[27]), ''Guitarhythm III''(1992년 9월 23일, 2위[27]), ''Guitarhythm IV''(1994년 6월 1일, 2위[27])를 발매하며 ''Guitarhythm'' 시리즈를 이어갔다. 1996년 2월 28일에는 ''King & Queen''을 발매하여 1위를 기록했고,[27] 1998년 4월 29일에는 ''Supersonic Generation''을 발매하여 4위를 기록했다.[27]2000년대에도 꾸준히 음반을 발매하여, ''Fetish''(2000년 11월 29일, 8위[27]), ''Scorpio Rising''(2002년 3월 6일, 6위[27]), ''Doberman''(2003년 9월 26일, 9위[27]), ''Monster Drive''(2005년 6월 15일, 10위[27]), ''Soul Sessions''(2006년 12월 6일, 15위[27]), ''Ambivalent''(2007년 10월 24일, 10위[27]) 등을 발표했다. 2009년 2월 18일에는 ''Guitarhythm V''를 발매하여 5위를 기록했다.[27] 2010년대에는 ''Come Rain Come Shine''(2013년 2월 6일, 5위[27]), ''New Beginnings''(2014년 10월 1일, 4위[27]), ''Strangers''(2015년 10월 16일, 일본판 12위[27]), ''Paradox''(2017년 10월 25일, 7위[27]), ''Guitarhythm VI''(2019년 5월 29일, 3위[27])를 발매했다. 2020년 11월 25일에는 ''Soul to Soul''을 발매하여 15위를 기록했다.[27]
8. 2. 싱글wikitext호테이 토모야스는 다양한 싱글을 발매했다. 1989년 4월 3일에는 영국에서만 DANCING WITH THE MOONLIGHT를 발매했으며, 이 싱글은 믹스 버전에 따라 7인치와 12인치 두 종류로 출시되었다. 1990년 12월 12일에는 Déjà-vu를 한정판으로 발매했다.[24] 1991년 6월 29일 발매된 BEAT EMOTION은 오리콘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24]
8. 3. 기타 활동호테이 토모야스는 다양한 영화 및 TV 프로그램,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1998년 영화 《사무라이 픽션》의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2000년에는 영화 《신・인의 없는 싸움》의 음악 감독을 맡아 "신・인의 없는 싸움의 테마"를 작곡, 이 곡은 2003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 빌》의 메인 테마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로 사용되었다.2014년에는 영화 《루팡 3세》의 메인 테마 "TRICK ATTACK -Theme of Lupin The Third-"를 제공했다. TV 프로그램에서는 2013년부터 후지 TV 계열 《스포르토!》의 테마곡 "Get a chance"를 제공하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NHK E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클라시카로이드》의 오프닝 테마 및 삽입곡을 제공했다. 2017년에는 NHK BS 프리미엄 《J-MELO》의 오프닝 테마곡 "Treasure Hunt"와 니혼 TV 《THE MUSIC DAY》의 테마곡 "MUSIC DAY"를 제공했다. 또한, 모모이로 클로버 Z의 "안녕, 사랑스러운 슬픔들이여"(2012년), MISIA의 "Back In Love Again (feat. 호테이 토모야스)"(2012년), 아라시의 "마음의 하늘"(2015년) 등 다양한 아티스트의 곡을 작곡, 프로듀싱했다. 니시카와 타카노리의 "UNBROKEN (feat. 호테이 토모야스)"(2019년), MAN WITH A MISSION의 "Rock Kingdom feat. 호테이 토모야스"(2020년) 등 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도 활발히 진행했다. 2023년에는 카메나시 카즈야에게 일본 TV계 야구 중계 "DRAMATIC BASEBALL 2023" 이미지 송, 그리고 『Going!Sports&News』 테마 송인 "Cross"를 작곡하여 제공했다. 9. 수상 경력
10. 기타페르난데스 (나중에 넥이나 금속 부품 등을 조디악 워크스제로 교체했다)・텔레캐스터 ('''TE-HT''')는 BOØWY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애용하는 흑백 기하학 무늬이다.[130] 이 무늬는 호테이의 트레이드마크로서, BOØWY 시대의 무대 의상이나, 솔로 활동 이후의 "기타리즘 마크"[131]의 모티프, 공식 굿즈의 의장 "GUITARHYTHM 무늬(G 무늬)"에도 사용되고 있다.
10. 1. 사용 기타페르난데스(FERNANDES) TE-HT Main은 BOØWY 시대 중기(1985년)부터 현재까지 오랫동안 라이브, 레코딩 모두에서 사용 빈도가 높다.[143] 이 기타는 BOØWY 시대 초기에 사용했던 손으로 그린 기하학 무늬가 들어간 텔레캐스터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며, 흑백 기하학 무늬(통칭 'G 무늬', 'GUITARHYTHM 무늬')가 특징이다. 이 무늬는 곧은 선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손으로 그린 것을 재현한 것으로 직선이 아니다. EMG제 액티브 픽업 (EMG-SA)이 탑재되었고, 헤드 모양은 잭슨 스타일의 뾰족한 쉐이프를 하고 있다. 현재는 조디악 웍스(ZODIAC WORKS)제 부품으로 대부분 교체되었으며, EMG 픽업도 호테이의 음악 스타일에 맞춰 세부 사항이 변경되었다.[143]페르난데스 TE-HT with Sustainer는 『GUITARHYTHM II』 레코딩부터 사용된 모델로, 서스테이니악(Sustainiac), 트레몰로 암(Tremolo arm), 험버커 픽업을 탑재하고 있다. 리어 픽업 주변에는 스펀지가 채워져 있으며, 주로 연주곡이나 트릭키한 프레이즈에서 사용된다. TE-HT와 달리 기하학 무늬는 완전한 직선으로 그려져 있다.[143] 이 기타들은 기본적인 부분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모델이 제작되었지만, 2007년에 일부가 경매에 나왔다. 색상이나 사양 차이를 포함하여 다수의 모델이 FERNANDES에서 시판되었으며, 일본 아티스트 모델 중에서는 X JAPAN의 『hide 모델』 다음으로 많이 팔린 시리즈이다. 한때 페르난데스에서는 제조 중단되었지만, 제조가 재개되어 현재도 입수 가능하다 (단, 호테이의 기타에 있는 'G 무늬'는 현행 모델에는 없다). COMPLEX 시대에 제작된 MV-480HT는 NATIONAL Glenwood 95를 디자인 소스로, 깁슨사의 레스폴 구조를 조합한 오리지널 모델이다. 2011년 『30th ANNIVERSARY 제1탄 HOTEI THE ANTHOLOGY "창세기" BEGINNING FROM ENDLESS 〜BOØWY COMPLEX GUITARHYTHM〜』에서도 사용되었다. BOØWY 시대 후기에 제작된 MV-95HT는 『BEAT EMOTION』의 재킷에 사용한 그레치사의 슈퍼 액스를 모델로 험버커 타입의 액티브 픽업을 장착한 오리지널 모델이다. 「Marionette」의 PV와 DVD 『“LAST GIGS”』의 「IMAGE DOWN」,「BEAT SWEET」에서 사용되었다.[144] BURNY H-CUSTOM은 통칭 "샤치" (범고래)로 불리며, 『GUITARHYTHM ACTIVE FLY INTO YOUR DREAM』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12현 모델이나 메탈릭 그린 모델도 존재한다. 조디악 웍스 DARKSTAR는 『DOBERMAN』 시기에 TE-HT를 대체하는 새로운 메인 기타로 제작되었다. 나무 바디에 탄소 섬유가 감겨 있으며, TE-HT와 마찬가지로 기하학 무늬가 그려져 있지만, 바디 뒷면까지 무늬가 있다. 조디악 웍스 BLACKFIRE는 『King & Queen 투어』에서 처음 등장한 모델로, 바디의 오른쪽 측면에 매립된 12개의 LED가 VU 미터가 되어 피킹의 강약에 따라 점멸하는 구조이다. 조디악 네오 Eternal Legacy HOTEI Model은 2024년 5월 15일과 16일 도쿄돔에서 개최된 COMPLEX의 『일본 일심』 공연에서 사용된 호테이의 시그니처 모델이다.[145] 1969 ZEMAITIS "Shell Top" Custom Deluxe "Wild"는 팬들 사이에서 "제마이티스 와일드"라고 불리며, 『GUITARHYTHM WILD 투어』의 메인 기타였다. 1984 ZEMAITIS Custom Deluxe "Metal Front"는 현재까지 레코딩, 스테이지 모두 메인 기타 중 하나이다. FENDER TELECASTER Custom은 1994년경 런던에서 구입하여 『GUITARHYTHM IV』의 레코딩과 투어에서 사용되었다. FENDER Custom Shop TELECASTER는 『밤비나』 레코딩부터 사용되었으며, 호테이에게 처음으로 펜더 정품 텔레캐스터였다. GIBSON FLYING V는 『GUITARHYTHM WILD 투어』에서 처음 등장한 모델로, 1995년의 『TOKYO Inter-Live 사이버 시티는 잠들지 않는다』에서는 바디에 형광 도료를 칠하고, 측면에 퍼를 붙인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GRETSCH White Falcon은 『GUITARHYTHM III』와 『7년째의 유령』의 레코딩 등에서 사용되었다. GRETSCH 6120 SH Hot Rod custom Purple (Brian Setzer model)은 친교가 있는 브라이언 셋처 모델이다. RAZO GLAYN은 바디에 나무가 아닌 알루미늄을 사용하고 있다. 『GUITARHYTHM SERIOUS! CLIMAX TOUR』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스릴』의 PV에서도 사용되었다. ESP 텔레캐스터 모델은 ESP에 오더하여 제작된 텔레캐스터 모델로, 흰색 바탕에 검은 라인의 G무늬가 특징이다. 1985년경까지 사용되었다. 10. 2. 사회 공헌 활동참조
[1]
웹사이트
Tomoyasu Hotei's Debut International Album Release 'Strangers' out October 16 Through Spinefarm Records
http://www.animenews[...]
201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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