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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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프랑스는 샤를마뉴 사후 카롤링거 제국의 분열로 시작되어, 바이킹의 침략과 카페 왕조의 등장을 거쳐 백년 전쟁으로 이어진 시기이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서프랑크 왕국이 건국되었고, 987년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열어 800년 이상 프랑스를 통치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봉건 제도의 발전과 함께 왕권이 강화되었고, 필리프 2세 치세에 영토를 확장하며 국왕의 권력을 강화했다. 14세기 흑사병과 백년 전쟁으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잔 다르크의 활약과 부르고뉴 공국 합병을 통해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했다. 중세 프랑스는 기독교 사회였으며, 라틴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었다. 문학, 예술, 음악 등 다양한 문화가 발전했으며,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 체제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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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프랑스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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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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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표어 | Montjoie Saint Denis! (몽주아 생드니!) |
공용어 | 라틴어, 프랑스어 (공식) 오크어, 프랑코프로방스어, 브르타뉴어, 바스크어 |
수도 | 파리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통화 | 리브르 프랑 에퀴 |
정치 | |
정부 형태 | 봉건 군주제 |
지도자 칭호 | 프랑스 국왕 |
입법부 | 삼부회 (1302년부터) |
역사 | |
존속 기간 | 987년 – 15세기 경 (중세 프랑스) |
시작 사건 | 카페 왕조의 시작 |
시작 연도 | 987년 |
주요 사건 | 백년 전쟁 |
주요 사건 - 카페 왕조 폐위 | 카페 왕조 폐위 1337–1453 1422 |
종료 사건 | 앙시앵 레짐 |
종료 연도 | 15세기 경 |
이전 국가 | 서프랑크 |
다음 국가 | 프랑스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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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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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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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중세 프랑스의 역사는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와 전쟁, 그리고 사회 변화로 점철된다.
5세기부터 10세기까지는 샤를마뉴가 카롤링거 왕조를 부흥시켰으나, 그의 사후 바이킹의 침입이 잦아지고 제국이 분열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링거 제국은 분열되었고, 샤를 대머리왕은 현대 프랑스와 유사한 영역의 서프랑크 왕국을 통치하게 되었다.[65] 이후 서프랑크 왕국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근대 국가 프랑스로 발전해 갔다.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르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고, 카페 왕조는 이후 발루아 가문, 부르봉 가문까지 800년 넘게 프랑스를 통치했다.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카페 왕조 초기에는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졌다. 로베르 2세는 신의 평화와 휴전 운동을 추진하고 클뤼니 개혁을 지원하는 등 종교적인 면모를 보였다.[58] 필리프 1세 시대에는 제1차 십자군이 결성되어 성지 회복에 나섰다. 루이 6세는 강탈 귀족들을 제압하며 왕권을 강화했고, 루이 7세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으로 아키텐 공작령을 얻었으나, 이후 이혼하고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가 재혼하면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내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의 존 왕과의 대립에서 승리하여 노르망디와 앙주를 프랑스 왕령에 편입시켰다.[60] 루이 9세는 알비 십자군을 통해 남부 프랑스를 왕령에 흡수하고, 제7차 십자군 원정과 제8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백년 전쟁 시기로, 발루아 왕조의 필리프 6세가 즉위하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이 발발했다.[1] 초기에는 프랑스가 열세였으나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결국 프랑스가 승리하여 칼레를 제외한 잉글랜드 세력을 몰아냈다.[1] 백년 전쟁 이후 프랑스는 부르고뉴 공국과 브르타뉴를 합병하여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했다.[1]
2. 1. 카롤링거 왕조와 분열 (5세기 ~ 10세기)
샤를마뉴 사후, 바이킹의 침입이 계속 확대되었고, 그들은 대형 보트를 이용해 론강과 센강 등 내륙 수로를 따라 공격을 감행했다. 샤를 3세 통치 기간(898년 ~ 922년) 동안, 롤로가 이끄는 노르만족이 파리로부터 흐르는 센 강 하류 양안에 정착하여 노르망디 지역이 되었다.(→바이킹)[65]814년 샤를마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후계자들은 정치적으로 제국의 통일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고, 제국은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결국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링거 제국이 분열되었고, 샤를 대머리왕은 대략 현대 프랑스의 영역과 일치하는 서프랑크 왕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은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근대 국가 프랑스로 발전해 갔다.
이후 카롤링거 왕조는 두 가문 사이에서 권력 투쟁을 겪으며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기를 반복했다.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카페 왕조를 창설하였고, 이 왕조는 발루아 가문, 부르봉 가문의 분파까지 포함하여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는 수 세기에 걸쳐 프랑스에서 발달하게 될 여러 제도들이 점진적으로 나타났다. 왕실의 승인을 받은 행정 당국은 왕국의 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귀족들은 그러한 승인에 대한 보상으로 왕실에 대해 충성과 군사적 원조를 하였다. (물론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옛 질서는 새 왕조(카페 왕조)가 센강 중류와 그 인접 지역을 넘어선 지역에 대한 직접 통제를 거의 하지 못하면서 사라졌다. 반면에 막강한 힘을 지닌 지역 영주들은 그 세력을 넓혀갔다. 예를 들어 10세기부터 11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블루아의 영주는 보호와 원조를 위해 낮은 신분의 귀족과 맺은 사적인 협의와 혼인을 통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2. 2. 카페 왕조의 등장과 발전 (10세기 ~ 14세기)
위그 카페가 987년에 왕으로 즉위하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카페 왕조는 발루아 가문, 부르봉 가문의 분파까지 포함하여 800년 이상 프랑스를 통치했다.[57] 초기 카페 왕조는 센강 중류와 그 인접 지역을 넘어선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는 거의 하지 못했다.[57] 반면,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블루아 백작들과 같은 강력한 영주들은 혼인과 하급 귀족들과의 사적인 협정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바르셀로나 백작 보렐은 이슬람 세력의 침략에 맞서 위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위그는 로렌의 샤를과의 싸움에 휘말려 있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 변경백국이 점점 더 독립하게 되었고, 다른 스페인 공국들도 상실되었다.[58] 위그 카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카롤링거 왕위 계승자를 물리치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가 중 하나가 될 기반을 마련했다는 큰 업적을 남겼다.[58]
위그의 아들인 경건왕 로베르는 위그 카페가 사망하기 전에 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 로베르 2세는 1023년 국경에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2세를 만나 서로의 영토에 대한 모든 주장을 종식시키기로 합의하여 카페 왕조와 오토 왕조의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로베르 2세는 정부인 부르고뉴의 베르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파문당했지만, 수도승들에게는 경건의 모범으로 여겨졌다.[58] 그의 통치는 신의 평화와 휴전(989년 시작)과 클뤼니 개혁과 관련되어 매우 중요했다.[58]
로베르 2세는 아들 위그 마그누스를 10세에 프랑크 왕으로 즉위시켰지만, 위그 마그누스는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켜 1025년에 사망했다. 다음 왕은 로베르 2세의 또 다른 아들인 앙리 1세(재위 1027~1060)였다. 앙리 1세는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로 즉위했지만(1027),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권력이 거의 없었다. 앙리 1세는 프랑크 왕 중 가장 약한 왕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윌리엄 정복자와 같은 강력한 귀족들이 등장했다.[58]

필리프 1세는 그의 긴 통치 기간(1060~1108) 동안 왕국이 약간 회복되기는 했지만, 그의 전임자보다 더 운이 좋지 않았다.[58] 그의 통치 기간에는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제1차 십자군이 시작되었는데, 그의 가족이 크게 관여했다.
911년 스칸디나비아 침략자들에게 할양된 노르망디 공국은 윌리엄 공작이 1066년 노르망디 정복에서 잉글랜드 왕국을 장악하면서 프랑스 왕실에게는 특히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윌리엄 공작은 자신과 그의 후계자들을 프랑스 외부에서는 왕과 동등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루이 6세(재위 1108~1137) 때부터 왕권이 더욱 공고해졌다. 루이 6세는 봉신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방식 때문에 탐욕스럽고 야심만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봉신들을 상대로 잦은 공격을 벌여 왕권을 강화했다. 1127년부터 루이 6세는 수제르 수도원장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의 정치적 조언은 왕에게 매우 귀중했다. 루이 6세는 많은 강탈 귀족들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1137년 루이 6세가 사망했을 때, 카페 왕조의 권력 강화를 위해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58]
루이 7세(소년 왕 1131~1137, 성년 왕 1137~1180)는 수제르 수도원장의 정치적 조언 덕분에 선조들보다 프랑스에서 더 큰 도덕적 권위를 누렸다.[59] 수제르 수도원장은 1137년 보르도에서 루이 7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결혼을 주선하여 루이 7세는 아키텐 공작이 되었고 상당한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샹파뉴 백작과의 갈등 중 비트리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불태워진 사건에 대해 부부는 의견이 갈렸다.[60]
루이 7세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성지 순례를 통해 속죄를 구했다. 그는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지만, 엘레오노르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교황은 혈족 결혼을 구실로 결혼을 무효화했고, 엘레오노르는 헨리 피츠엠프레스와 결혼했다. 헨리 피츠엠프레스는 2년 후 헨리 2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60] 루이 7세는 이제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이자 아키텐 공작으로서 그의 가장 강력한 봉신이 된 헨리 2세와 마주하게 되었다.
헨리 2세는 반란을 진압한 후, 엘레오노르를 투옥하고 브르타뉴 공작을 자신의 봉신으로 삼아 프랑스 서부 절반을 프랑스 왕좌보다 더 큰 권력으로 지배했다. 그러나 헨리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그의 프랑스 영토 분할을 둘러싼 분쟁과 잉글랜드의 존과 필리프 2세 사이의 장기적인 다툼으로 인해 필리프 2세는 이 영토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1214년 부비네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후, 잉글랜드 국왕들은 남서부의 기옌 공국에서만 권력을 유지했다.[60]

필리프 2세 아우구스투스(1179~1180년 소년왕, 1180~1223년 재위) 치세는 프랑스 군주제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을 마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왕령과 영향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필리프 2세는 앙주 제국과의 싸움에 통치 기간의 상당 부분을 보냈다. 그는 리처드 사자심왕과 동맹을 맺고 헨리 2세를 공격하여 권좌에서 몰아냈다. 리처드가 잉글랜드 국왕이 된 후, 두 국왕은 제3차 십자군에 참여했지만, 십자군 원정 중 그들의 동맹은 깨졌다. 프랑스에서의 전투 외에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국왕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수장에 각자의 동맹국을 임명하려고 했다. 부비네 전투(1214년)에서 프랑스가 대승을 거두면서, 노르망디와 앙주 합병이 확정되었고, 프리드리히 2세가 황제가 되었다. 필리프 2세는 서유럽 정치를 지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루이 왕세자(미래의 루이 8세, 1223~1226년 재위)는 잉글랜드 내전에 개입했다. 프랑스 국왕들이 플랜태저넷 왕가와 싸우는 동안, 교회는 알비 십자군을 요청했다. 그 후 남부 프랑스는 대부분 왕령에 흡수되었다.
루이 9세(재위 1226~1270)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사회 전 영역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고, 왕은 훌륭한 기사이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았다. 사후에 루이 9세는 시성되어, "성왕 루이"(성왕 루도비코)라고 불렸다. 루이 9세는 모든 이를 위한 공평한 정의를 원했고, 새로운 법정을 만들었으며, 스스로 나병환자를 치료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수학, 읽기, 쓰기, 문법, 수사학, 그리고 철학 분야에서 훌륭한 실력을 갖추었다.
1229년 국왕은 파리 대학교의 장기적인 파업(1229년 파리 대학교 파업)과 싸워야 했다. 왕국은 취약했다. 툴루즈 백작령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왕실 군대는 랑그도크에서 저항 세력과 싸우느라 바빴다. 툴루즈 백작 레이몽 7세는 1229년 파리 조약에 서명했는데, 그의 딸이 후계자를 낳지 못했고, 따라서 툴루즈 백작령은 프랑스 국왕에게 넘어갔다.
잉글랜드의 헨리 3세는 아키텐에 대한 카페 왕조의 봉건적 지배를 아직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노르망디와 앙주를 회복하고 앙주 제국을 재건하기를 바랐다. 그는 1230년 생말로에 상륙했다.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의 헨리 3세 동맹국들은 항복했다. 왕은 직접 반격을 이끌었다. 이것은 생통주 전쟁(1242)으로 발전했다. 결국 헨리 3세는 패배했고 루이 9세의 봉건적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성 루이는 고딕 건축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지원했다. 그의 생트샤펠은 매우 유명한 고딕 건축물이 되었고, 그는 모건 성서의 제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왕국은 성 루이 치하에서 제7차 십자군 원정과 제8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두 원정 모두 프랑스 국왕에게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그는 제8차 십자군 원정에서 사망했고 필리프 3세가 국왕이 되었다.
13세기에 왕관은 남부 지역에서도 중요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알비파 또는 카타리파 이단자들에 대한 교황-왕실 십자군(1209)은 하부(1229) 및 상부(1271) 랑그도크를 왕실 영토에 편입시켰다. 필리프 4세의 플랑드르 점령(1300)은 덜 성공적이었고, 2년 후 금박차 전투에서 패배했다.
필리프 3세(1270~1285)는 전투와 승마 능력을 바탕으로 "대담한 자"라고 불렸지 그의 성격이나 통치 능력 때문은 아니었다. 필리프 3세는 아라곤 원정에 참여했고, 1285년 이 원정으로 목숨을 잃었다. 필리프 3세는 1271년 삼촌으로부터 툴루즈를 상속받았고, 그의 아들과 상속자를 샹파뉴와 나바라의 상속녀와 결혼시켰다.
필리프 4세는 왕권을 중세 시대에 달성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지만,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켰고 일반적으로 프랑스를 쇠약하게 만들었다. 필리프 4세는 외교 정책의 노력을 프랑스 북부 국경에 집중했다. 아키텐을 둘러싼 분쟁은 수년 동안 쟁점이었고, 1294년 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군은 가스코뉴 깊숙이 진격했고, 에드워드 1세는 플랑드르와 프랑스 북부 국경의 다른 동맹국들과 연합했다. 연합군은 1297년 프랑스 군대에게 완패했고 휴전이 체결되어 전쟁 전 상태가 유지되었다.
플랑드르는 완고하게 반란을 일으키고 복종하지 않았다. 1302년 쿠르트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극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결국 왕은 플랑드르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고, 1305년 마침내 평화가 체결되었지만 여전히 플랑드르 시민들을 달래지는 못했다.
필리프 4세는 아비뇽 유수로 이전된 교황청에 순종적인 프랑스 꼭두각시를 성공적으로 설치했다.
필리프 4세에 의해 더 많은 행정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왕은 오래된 동맹에 서명하고 파리 고등법원을 설립했다.
필리프 통치의 더 기이한 사건 중 하나는 템플 기사단의 파괴에 관여한 것이다. 1312년 클레멘스 5세는 기사단의 해산을 명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템플 기사단의 소유물은 요한 기사단에게 넘겨졌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이단으로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2. 3. 백년 전쟁과 발루아 왕조 (14세기 ~ 15세기)
1328년 카페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자, 발루아 왕조의 필리프 6세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면서 백년 전쟁(1337년-1453년)이 발발하였다.[1]프랑스는 전쟁 초기(1337-1360)에 영국군에 밀려 패했으나, 전쟁 중기(1369-1396) 초반에는 상황을 역전시켰다. 하지만 1415년 영국의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프랑스는 다시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 왕실 내부가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로 나뉜 상황에서,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을 맺고 파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프랑스 왕실의 영역은 루아르 강 이남으로 제한되었다.[1]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잔 다르크가 등장(1429년)하여 전세를 뒤집었다. 그녀는 오를레앙을 구하고 랭스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치르게 했다. 비록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 군에 붙잡혀 영국군에 팔려 1431년 루앙에서 화형당했지만,[1] 프랑스의 상황은 반전되었다.

1435년 부르고뉴 공작과의 화해를 통해 내부 분란이 종식되었고, 프랑스는 1436년 파리, 1450년 노르망디를 되찾는 등 주요 지역을 회복하며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1558년 영국군은 프랑스 내 마지막 근거지였던 칼레를 떠나야 했다.[1]
백년 전쟁 이후, 프랑스는 이전에는 독립 국가였던 부르고뉴 공국과 브르타뉴를 합병하고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1]
백년 전쟁은 프랑스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특히 1348년 흑사병이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에 상륙하여 피해를 심화시켰다.[1]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 국왕'''[2]
이름 | 재위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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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6세 | 1328년 ~ 1350년 |
장 2세 | 1350년 ~ 1364년 |
샤를 5세 | 1364년 ~ 1380년 |
샤를 6세 | 1380년 ~ 1422년 |
잉글랜드 간섭기 (샤를 6세와 7세 사이) | |
잉글랜드의 헨리 5세 | - |
잉글랜드의 헨리 6세 | 1422년 ~ 1453년 |
샤를 7세 | 1422년 ~ 1461년 |
중세 시대 프랑스 지배자들은 피레네산맥, 알프스산맥, 라인강을 자연적인 국경으로 여겼다. 이러한 인식은 프랑스 왕들의 공격적인 정책과 반복되는 침략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1] 그러나 이 경계 안의 모든 지역이 실제로 왕권에 속했던 것은 아니었고, 왕권의 실제 영향력은 자주 변동했다. 프랑스 왕국은 지역별로 다양한 지리적 특성을 보였다. 북부와 중부는 온대 기후였지만, 남부는 지중해성 기후에 가까웠다. 알프스산맥, 피레네산맥, 메지프 중앙 산맥과의 거리에 따라서도 지역별 차이가 나타났다. 루아르강, 론강, 센강, 가론강 등은 중요한 수로 역할을 했으며, 이 강들을 따라 일찍부터 도시들이 발달했다. 하지만 넓은 숲, 습지 등이 도시들 사이를 가로막아 육로 이동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1]
중세 시대 프랑스의 행정 구역은 왕이 직접 다스리는 왕실 직영지(domaine royal)와 영주들이 다스리는 봉토로 나뉘어 있었다.[1] 로마 제국 시대의 공화정(레스 푸블리카, res publica) 개념은 프랑크 왕국과 카롤링거 왕조를 거치면서 약화되었다.[1] 카페 왕조 초기에는 왕실 직영지가 파리, 부르주, 상스 주변 지역으로 매우 제한적이었다.[1]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은 아키텐, 노르망디 공국, 브르타뉴 공국, 샹파뉴(프랑스), 부르고뉴 공국 등 여러 영주들의 봉토였다.[1]
14세기 흑사병 유행 전, 오늘날 프랑스에 해당하는 지역의 총 인구는 명 정도였다. 파리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거주자가 십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6] 조시아 러셀(Josiah Russell)은 14세기 초 파리 인구를 약 8만 명으로 추정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20만 명으로 보기도 한다.[4] 이는 당시 서유럽 최대 규모이며, 8만 명이라도 베네치아(명)와 피렌체(명)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이다.[5]
중세 라틴어는 중세 프랑스에서 학문, 종교, 행정의 주요 언어였다. 빌레르코트레 칙령(1539년) 이후에는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로 지정되었다.[7]
3. 지리
4. 행정 구역
13세기 초,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영토를 크게 확장했지만, 백년 전쟁 등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기도 했다.[1] 15세기에 샤를 7세와 루이 11세가 현재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1]
11세기경, 카페 왕조는 왕실 직영지를 관리하기 위해 프레보(prévôt)라는 1차 재판관을 설치했다. 프레보는 왕실 수입 징수, 세금 및 관세 징수, 지역 병력 모집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12세기에는 프레보의 권한 남용을 막기 위해 순회 재판관인 바이유(bailli)가 설치되었다. 바이유는 프랑스 북부에서 왕의 행정 대표자로서 사법, 행정, 재정 통제를 담당했다.
5. 인구 통계
1348년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했다.[6] 이와 동시에 발생한 백년 전쟁은 인구 회복을 더디게 만들었다. 14세기 중반 수준의 인구를 회복하는 데는 16세기 중반까지 시간이 걸렸다.[6]
초기 중세 시대에 프랑스는 유대인 학문의 중심지였지만, 14세기에 일련의 박해와 추방으로 프랑스 유대인들은 상당한 고통을 겪었다.
6. 언어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의 저서 속어에 관하여에서 로망스어를 "예"를 뜻하는 단어에 따라 세 그룹으로 분류했다.
현대 언어학자들은 리옹 주변의 "프랑코-프로방스어"를 세 번째 그룹으로 추가한다.
프랑스 북부의 갈로-로망스어군은 오일어군으로, 피카르어, 왈롱어, 프랑시앵어 등이 있으며, 초기 프랑크 침입자들의 게르만어파의 영향을 받았다. 클로비스 1세 시대부터 프랑크족은 북부 갈리아 지역을 지배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스어는 파리와 일드프랑스 주변의 오일어에서 발전했거나(프랑시앵 이론), 모든 오일어의 공통적인 특징을 기반으로 한 표준 행정 언어에서 발전했다(lingua franca 이론).
오크어는 프랑스 남부와 북동부 스페인에서 사용되었으며, 프랑크어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다.
중세 시대 프랑스에서는 다른 언어의 영향도 있었다.
7. 사회와 정부
중세 프랑스 인구의 대다수(80~90%)는 농민이었다.[13] 11세기까지 농민들은 왕실 군대 복무, 공공 집회 및 법정 참여 등 전통적인 권리를 상실하고 귀족, 교회, 대토지 소유주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14] 8세기 중반부터 1000년까지 귀족과 수도원의 토지 지배가 꾸준히 증가했다.[15] 농노제 개념이 지배적이 되면서 "불자유" 의존민과 "자유" 및 "불자유" 소작농의 구분은 사라졌다.[16]
8세기 중반부터, 특히 북부 지역에서는 농민과 토지 간의 관계가 "이분적 영지" 시스템(영지제)으로 변화했다. 농민들은 영주나 수도원으로부터 소작지를 보유하고(지대 지불), 영주의 소유지인 "영주지"에서도 일해야 했다. 이 시스템은 12세기까지 영주-소작농 관계의 표준이었다.[17][18]
14세기-15세기의 경제적, 인구 통계적 위기는 이러한 추세를 역전시켰다. 지주들은 농노들에게 자유를 제공했고, 교회 및 왕실 당국은 새로운 "자유 도시"(villefranches)를 건설하거나 기존 도시에 자유를 부여했다. 15세기 말까지 농노제는 대부분 사라졌다.[20] "자유"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에 대한 지대를 지불했고, 영주지는 고용 노동자에 의해 경작되었다.[21] 이는 농민들을 어느 정도 해방시켰지만, 경제적 불확실성 시대에는 그들의 삶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21]
갈로-로마 시대의 도시 네트워크는 중세 시대에도 지역 중심지 및 수도로서 생존했다. 일부 도시들은 주교구의 중심지로 선택되었고(파리, 랭스 등), 다른 도시들은 지역 행정 권력의 중심지였다(앙제, 블루아 등).[24]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프랑스의 도시 개발은 확장되었고, 새로운 항구가 등장했으며 공작과 백작들은 새로운 도시를 장려하고 건설했다.[24] 11세기 후반에는 도시의 통치 의회인 "코뮌"이 발전하기 시작했다.[24]
13세기에서 14세기는 도시화가 상당히 진행된 시기였다. 파리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유럽에서도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세기 말에는 인구가 2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두 번째로 큰 도시는 루앙이었고, 오를레앙, 투르, 보르도, 리옹, 디종, 랭스 등도 주요 도시였다.[28] 이 시기는 도시 건설의 시대이기도 했다. 도시 공간 전체를 둘러싼 성벽의 확장, 거대한 고딕식 대성당의 건설, 도시 요새, 성(필리프 2세 아우구스투스의 루브르(1200년경) 등)과 다리 건설 등이 있었다.[30]
카롤링거 시대에 "귀족"(''nobilis'')은 법적으로 정의된 범주가 아니었다.[31] 상당한 토지 소유, 왕과 왕실 법정에 대한 접근, 봉사에 대한 ''honores''와 수혜를 받을 수 있다면 "귀족"이었다.[31]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귀족 계급의 성격은 변화했다. 귀족들은 강력한 지역 토지 소유 기반을 구축하고,[33] 백작령과 공작령을 세습적으로 통제했으며,[34] 결국 이를 사실상 독립적인 공국으로 세웠다.[35] 1000년 이후, 이러한 백작령들은 소규모 영주들이 지역 토지를 장악하면서 더 작은 영지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9세기부터 군사력은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전문 군인이나 ''milites''는 귀족 계급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지역 토지를 획득하고, 개인 성을 건설하고, 사법의 요소들을 장악하여) "기사"라고 부르는 군사 귀족 계급으로 변모했다.[38]
중세 프랑스는 매우 분권화된 국가였다. 당시 로렌과 프로방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루아르 강 북쪽에서는 프랑스 국왕이 노르망디, 앙주, 블루아-샹파뉴,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의 강력한 공국들과 싸우거나 동맹을 맺었다. 루아르 강 남쪽에는 아키텐, 툴루즈, 바르셀로나 공국이 있었다. 노르망디는 북쪽에서, 바르셀로나는 남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두 봉토의 통치자들은 결국 왕이 되었다.
초기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세속과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왕을 선출했지만, 재위 중인 국왕의 장남이 생전에 정기적으로 대관식을 치르면서 장자 상속 원칙이 확립되었고, 나중에 살리카 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국왕의 권위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했다. 11세기 프랑스는 왕의 권력을 희생시키면서 공작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노르망디, 플랑드르, 랑그독과 같은 국가들이 왕국과 비교할 만한 지역적 권위를 누렸다. 카페 왕가는 로베르 왕가의 후손으로, 카롤링거 왕조 왕들을 몰아냈다.[50]
카롤링거 왕조 왕들은 왕위라는 명칭만 가지고 있었지만, 카페 왕가는 그 명칭에 자신의 공국을 추가했다. 카페 왕가는 왕과 공작이라는 이중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왕으로서 샤를마뉴 대제의 왕관을 가지고 있었고, 파리 백작으로서 일드프랑스로 가장 잘 알려진 자신의 개인적인 봉토를 가지고 있었다.[50]
국왕의 봉신들 중 일부는 강력해져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노르망인, 플랜태저넷 왕가, 루지냥 가문, 오트빌 가문, 람누르 가문, 툴루즈 백작가는 프랑스 외부에서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윌리엄 정복자의 노르망디 공략으로,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일어났고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노르망디를 통해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연결했기 때문이다.[51]
프랑스 귀족의 중요한 일부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고, 프랑스 기사들은 십자군 국가를 건설하고 통치했다. 이 귀족들이 중동에 남긴 유산의 한 예로는 트리폴리와 툴루즈 백작들에 의해 확장된 크라크 데 슈발리에가 있다.
프랑스 왕정은 수세기 동안 강력한 귀족들을 극복하고 16세기에 프랑스에 대한 절대 주권을 확립했다. 프랑스 왕정의 부상에는 여러 요인이 기여했다. 장자 상속 법은 질서 정연한 권력 계승을 보장했다. 둘째, 카페의 후계자들은 명성 높고 오래된 왕가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셋째, 카페 왕가는 교황청의 지지를 받았다. 제1차 십자군은 거의 전적으로 프랑크족 공작들로 구성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왕의 권력은 정복, 몰수, 그리고 성공적인 봉건 정치적 전투를 통해 확장되었다.[57]
중세 시대 프랑스의 권력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인물 | 직위 | 내용 |
---|---|---|
윌리엄 정복자 | 노르망디 공작 (1066년) | 잉글랜드 왕국 정복 |
풀크 5세 | 앙주 백작 (1131년) | 결혼을 통해 예루살렘 왕이 됨 |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 | 포르투갈 초대 국왕(1139년) |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의 증손자이자 포르투갈 왕국의 창시자 |
잉글랜드의 헨리 2세 | 잉글랜드 국왕 (1154년) | 잉글랜드와 서프랑스 대부분을 지배(앙주 왕가) |
아라곤의 알폰소 2세 | 바르셀로나 백작 (1164년) | 최초로 바르셀로나 백작으로서 아라곤 국왕이 된 인물 |
나바라의 테오발드 1세 | 샹파뉴 백작 (1234년) | 삼촌으로부터 나바라 왕국을 상속받음 |
나폴리의 샤를 1세 | 앙주 백작 (1266년) | 프랑스의 루이 8세의 막내 아들,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고 알바니아 국왕을 자칭함 |
헝가리의 샤를 1세 | 헝가리 국왕 (1301년) | 앙주 카페 왕가(카페 왕가)의 후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
신성 로마 제국의 헨리 7세 | 신성로마제국 황제 | 룩셈부르크 백작으로서 프랑스의 필립 4세의 봉신이 됨. 1308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고, 1312년 황제가 됨. |
보헤미아의 요한 | 보헤미아 국왕 (1310년) | 헨리 7세의 아들, 결혼을 통해 보헤미아 국왕이 됨.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편에 서서 전사함. |
나바라의 필립 3세 | 에브뢰 백작 (1328년) | 결혼을 통해 나바라 국왕이 됨 |
헝가리의 루이 1세 | 헝가리 국왕 (1342년) | 헝가리의 샤를 1세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영토 외에 폴란드 왕이 됨 |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4세 | 신성로마제국 황제 (1346년) | 보헤미아의 요한의 아들,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7년 동안 프랑스 궁정에 머물렀다. |
필립 대담왕 | 부르고뉴 공작 (1363년) | 부르고뉴의 아파나주와 플랑드르 상속녀와의 결혼을 통해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을 세움 |
프랑스 왕권의 성장은 초기에 느린 속도를 보였다.
- 초기 카페 왕조는 봉신들의 복종을 강요할 의지나 자원이 없었다.
- 루이 6세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드프랑스 지역의 봉신들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 루이 7세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은 프랑스 왕권의 영향력을 남부 프랑스로 확장시켰지만, 결혼 무효화는 앙주 왕가의 부상을 가져왔다.
-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와 앙주의 정복을 통해 프랑스 내에서 프랑스 국왕을 최고의 권력자로 만들었다.
- 루이 8세는 알비 십자군을 시작하여 북부 프랑스를 남부 프랑스와 전쟁하게 만들었다.
- 루이 9세는 프랑스 왕권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 필리프 3세는 툴루즈를 상속받았고, 그의 아들을 나바라와 샹파뉴의 상속녀와 결혼시켰다.
- 필리프 4세는 중세 프랑스 국왕 중 가장 절대주의적이었지만, 그의 값비싼 정책은 교황과의 갈등과 자원 확보를 위한 템플 기사단의 박해로 이어졌다.
- 300년 이상 이어진 프랑스 국왕의 질서 정연한 계승은 1316년 갑작스러운 왕조 위기로 이어져 발루아 왕조가 부상하게 되었다.
- 필리프 6세는 통치 초기 플랑드르를 복종시키는 등 유망한 통치자였지만, 백년전쟁 발발과 함께 크레시 전투에서 참패했다.
-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또 다른 참패를 당하며 프랑스 왕권을 최저점으로 끌어내렸다.
- 샤를 5세는 전쟁 중에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 샤를 6세의 광기는 프랑스의 고난을 증폭시켰고, 왕족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파벌로 갈라졌다. 프랑스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또 다른 패배를 당했고, 국왕은 잉글랜드의 헨리 5세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상속에서 제외해야 했다.
- 샤를 7세는 통치 초기에는 무관심했지만, 1429년 잔 다르크의 등장과 1435년 부르고뉴 공작과의 화해로 상황이 바뀌었다. 프랑스는 1453년 전쟁에서 승리했고, 프랑스 국왕은 로마 시대 이후 최초의 상비군을 보유하며 다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1302년, 확장되는 프랑스 왕권은 속인(俗人)과 교회 인사 모두를 포함한 주요 영주들과, 주요 특권 도시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총회를 이끌었다. 이 제도를 위한 몇 가지 선례가 있었다. 필리프 3세 치하에서는 두 계급(두 계급)이 따로 협의하는 귀족과 교회 인사들의 회의가 있었다. 필리프 4세와 보니파시오 8세 사이의 분쟁이 1302년 삼부회를 이끌었다. 프랑스 왕은 이 심각한 위기 속에서 세 계급의 의견을 듣기를 원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조금이 그들을 소집하는 가장 빈번한 이유가 되었다.
삼부회는 제1계급(성직자), 제2계급(귀족), 제3계급(평민)의 대표자들을 포함했으며, 군주는 항상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왕권에 자문을 구하거나, 지원과 조언을 하도록 그들을 소집했다. 14세기와 15세기 전반기의 원시적인 형태에서 삼부회는 제한적인 선거 요소만 가지고 있었다. 속인 영주와 교회 영주는 왕에 의해 직접 선택되고 소집되었다. 성직자 계급에서는 수도원과 장 대성당과 같이 특정한 교회 기구도 회의에 소집되었고, 이들은 대표자는 수도승 수도원이나 장의 교구 사제에 의해 선출되어야 했다. 제3계급의 대표만이 선거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권 도시인 ''bonnes villes''만이 요청받았다. 그들은 선출된 ''procureurs''(프로퀴뢰르)에 의해 대표되었는데, 이들은 종종 도시의 시정 관리들이었지만, 종종 그 목적으로 대표가 선출되었다. 시골 지역인 ''plat pays''(플라 페이)는 대표되지 않았다. 심지어 ''bonnes villes'' 내에서도 참정권은 매우 좁았다.
프레보(프랑스어: prévôt)는 11세기경 카페 왕조가 설립한 1차 재판관으로, 왕령(royal domain) 지역을 관리했다. 프레보는 봉토화되지 않은 자작령(viscounty) 지역에서 자작(viscount)을 대체했으며, 프레보 직책은 교회의 대성당 장(cathedral chapter)의 프레보(Provost (religion)) 직책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프레보는 왕령 수입과 왕에게 납부되는 모든 세금 및 관세의 징수를 포함한 지역 왕권을 위임받아 수행했다. 또한 왕실 군대를 위한 지역 병력을 모집하는 등 방위에도 책임이 있었다. 프레보는 제한된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법 업무도 수행했다.
11세기에는 프레보들이 점차 세습직으로 만들어 왕의 통제가 어려워졌다. 12세기에는 프레보 직책이 입찰에 부쳐졌고, 그 이후 프레보는 세입 징수인이 되었다. 따라서 프레보는 관할 구역 내에서 왕의 영주권 수입을 징수할 권리를 얻었다. 이것이 프레보의 주요 역할로 남았다.
프레보 또는 그에 상응하는 직책의 직무 수행을 감독하고 남용을 막기 위해, 필리프 2세는 순회 재판관인 바이유(프랑스어: bailli, bailiff)를 설립했다. 이러한 구획은 이전의 군주(예: 노르망디 공작)들에 의해 사용되었다.[56] 바이유는 프랑스 북부에서 왕의 행정 대표자로서, 그의 바이야주(프랑스어: baillage, bailiwick)에서 사법 집행 및 행정 및 지역 재정 통제를 담당했다(프랑스 남부에서는 "세네샬(프랑스어: sénéchal), 세네쇼세(프랑스어: sénéchaussé)"가 상응하는 직책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이야주의 역할은 왕권, 행정 및 사법의 확장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1191년 이후 대집사직이 공석이 되자, 바이유는 정착하여 프레보보다 우월한 강력한 관리로 자리 잡았다. 바이유 관할 구역에는 약 6개의 프레보십이 포함되었다. 왕실이 상소 제도를 도입하면서, 프레보 판결에 대한 상소가 바이유에 제기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4세기에는 프레보가 더 이상 영주권 수입을 담당하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왕실 수입관(receveurs royaux)에게 그 책임이 넘어갔다. 지역 군대 병력(ban and arrière-ban) 모집도 바이유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프레보는 귀족에 대한 소송과 왕실 법정에 속하는 소송(cas royaux)에 대해 바이유와 동시에 관할권을 가지는 하급 재판관의 유일한 기능을 유지했다.
7. 1. 봉건 제도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는 귀족들과 권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객 관계 시스템과 토지를 포함한 호노레스(honores)와 베네피키움(benefices)의 부여를 활용했다. 이러한 관행은 중세 시대에 바살리티(vassalage)와 봉건 제도로 발전하였다. 10세기 중반까지 봉건적 토지 부여(영지, 봉토)는 대부분 세습되었다.[33]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귀족 계급의 성격은 상당히 변화했는데, 귀족들은 점점 더 강력한 지역 토지 소유 기반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고,[33] 백작령과 공작령을 세습적으로 통제했으며,[34] 결국 이를 사실상 독립적인 공국으로 세웠고[35] 국가의 다양한 특권과 권리를 사유화했다. 1025년까지 루아르 강 북쪽 지역은 이러한 사실상 독립적인 국가 6개 또는 7개가 지배했다.[36] 1000년 이후, 이러한 백작령들은 소규모 영주들이 이른바 "봉건 혁명"[37]에서 지역 토지를 장악하고 백작의 권력의 많은 요소들을 장악하면서 더 작은 영지로 분열되기 시작했다.9세기부터 군사력은 점점 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전문 군인이나 ''milites''는 일반적으로 맹세한 영주의 수행원으로 귀족 계급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지역 토지를 획득하고, 개인 성을 건설하고, 사법의 요소들을 장악하여) 역사가들이 "기사"라고 부르는 군사 귀족 계급으로 변모했다.[38]
중세 시대 프랑스의 규모에 대한 논의는 왕과 영주의 영역 구분으로 인해 정리하기가 복잡하다. 왕이 개인적으로 지배하는 왕실 직영지(domaine royal)와 영주가 다스리는 땅으로 나뉘어 있었다. 프랑크 왕국이나 카롤링거 제국에서는 로마시대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공화정)의 개념은 더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초기 카페 왕조는 프랑스 왕국이라는 개념은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카페 왕조 기간에 왕실 직영지는 파리, 부르주(Bourges), 상스(Sens)의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은 아키텐, 노르망디 공국, 브르타뉴 공국, 샹파뉴 공국, 부르고뉴 공국과 나머지 제후들의 영역이었다. 원칙적으로, 각 땅의 영주는 그들의 소유에 대하여 프랑스 왕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파리의 왕은 영주의 땅을 거의 통치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13세기 초에 프랑스 왕의 영토를 확장시켰지만, 이러한 확장은 결과적으로 왕실 가문의 사람에게 일정한 봉토를 주어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는 식의 봉건제("apanage")에 타격을 입혔으며, 백년 전쟁도 봉건제에 타격을 주었다.
7. 2. 왕권과 지역 세력
위그 카페가 987년에 왕으로 즉위하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이 왕조는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카페 왕조 초기에는 왕실 직영지가 파리, 부르주, 상스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센강 중류와 그 인접 지역을 넘어선 지역에 대한 직접 통제는 거의 하지 못했다. 반면, 블루아 백작들과 같은 강력한 지역 영주들은 10세기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세력을 넓혀갔다.중세 시대 프랑스의 규모는 왕이 개인적으로 지배하는 왕실 직영지(domaine royal)와 영주가 다스리는 땅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복잡했다. 프랑크 왕국이나 카롤링거 제국에서는 공화정의 개념이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바이킹족에게 하사된 공작령인 센 강 하류의 노르망디 공국은, 1066년에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 프랑스 왕실에게는 다루기 곤란한 지역이 되었다. 프랑스 내에서는 노르망디 공작이 프랑스 왕의 신하였지만, 프랑스 외부에서는 동등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루이 7세 (재위:1137년 ~ 1180년)와 이혼(1152년)한 프랑스의 전 왕비인 아키텐의 엘리에노르는 노르망디 공작과 재혼하였는데, 1154년에 노르망디 공작이 영국왕(헨리 2세)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헨리 2세는 프랑스 왕실보다 더 큰 힘과 더 넓은 영토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의 후손들 사이에서 그의 프랑스 영토를 분할하는 문제로 벌어진 논쟁과 존 왕과 필리프 2세 사이에 긴 분쟁이 벌어지면서, 결국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가 프랑스 내에서 차지했던 영토의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1214년에 벌어진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가 대승을 거둔 이후에, 영국 왕실은 남서부의 기옌 공국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13세기 초에 프랑스 왕의 영토를 확장시켰지만, 이러한 확장은 결과적으로 왕실 가문의 사람에게 일정한 봉토를 주어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는 식의 봉건제("apanage")에 타격을 입혔으며, 백년 전쟁도 봉건제에 타격을 주었다.
8. 종교
중세 프랑스는 주로 기독교 사회였으며, 가톨릭교회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64] 초기 중세 시대에 프랑스는 유대교 교육의 중심지였으나, 14세기에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추방이 심화되었다.[64]
수년간 평화가 지속된 후, 13세기 루이 9세는 유대인의 활동을 제한하는 데 집착하게 되었다. 결국 유대인들은 프랑스에서 여러 차례 추방되었고, 반유대주의적 정서가 작은 마을과 도시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전통을 실천하는 데 있어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왕족이 주도한 이러한 차별적인 행위는 대도시의 일반 민간인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데,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대교 신앙을 허용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64]
그러나 소규모 공동체는 이러한 편견을 자신의 신념에 통합하여, 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간 유혈 사건으로 이어졌다. 유혈 사건은 유대인 기도에 희생 제의가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를 향한 비난이었다. 이러한 허위 사실은 유대인 종교 행사에 기독교 어린이의 희생이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블루아에서는 최대 40명의 유대인이 어린 기독교인 소년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유혈 사건과 박해가 중세 프랑스의 유대교-기독교 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역사가 전해지는 방식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64]
9. 경제
샤를마뉴 사후 시대는 정치적 불안정으로 경제 위기를 겪었으며, 도시 생활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11세기부터 상황이 변했다. 새로운 작물 도입, 기후 개선, 새로운 농업 기술 도입으로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와 함께 도시 생활, 무역, 산업이 성장했다.
14세기에는 전쟁, 악천후, 흑사병으로 인해 경제가 다시 붕괴되었다.[55]
농촌 경제는 영지(마노르)를 기반으로 했고, 도시 지역에서는 경제 활동이 길드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0. 문화
중세 프랑스에서는 문학, 예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가 발전하였다. 북부 프랑스에서는 오일어 문학, 남부 프랑스에서는 오크어 문학이 발전하였으며, 노르망디의 영국 통치 기간에는 앵글로-노르망어 문학이 발전하였다.
미술은 중세 프랑스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시대에는 미니어처들이 정성스럽게 쓰이고 삽화가 그려졌으며, 14세기와 15세기의 대표적인 예로는 『필립 대담공의 시집』, 『잔느 드브뢰의 시집』, 『베리 공작의 아주 풍부한 시간들』 등이 있다. 후기 중세 프랑스에서는 자크마르 드 에스댕, 장 드 보메츠, 콜라르 드 라옹 등 초기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음악에서는 고중세 시대에는 아르스 안티쿠아 양식이, 후기 중세 시대에는 아르스 노바 양식이 널리 유행하였다. 노트르담 악파의 작곡가들은 아르스 안티쿠아 시대에 활동하였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12세기의 레오닌과 페로탱이 있다. 12세기 이후로는 트루바두르 문화가 번성하였고, 고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페르디곤, 베르트랑 드 보른, 라이몽 드 바케이라 등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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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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