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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군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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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거군주제는 군주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다양한 지역에서 나타났다.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 비잔틴 제국,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보헤미아, 헝가리, 서고트 히스파니아, 아라곤,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칸디나비아, 아일랜드, 네덜란드 공화국, 예루살렘 왕국, 몰타 기사단, 베네치아 공화국 등에서 선거군주제가 존재했다. 아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이란, 몽골 제국, 신라, 고구려, 태국, 뉴질랜드, 하와이에서 선거군주제 또는 유사한 형태가 나타났다. 아프리카에서는 알제리 섭정국, 말리 제국, 콩고 왕국, 아샨티 제국 등에서, 아메리카에서는 아즈텍 제국, 니코야 왕국, 아이티 제국에서 선거군주제가 시행되었다.

현대에는 캄보디아, 바티칸 시국, 말레이시아, 아랍에미리트, 사모아 등에서 선거군주제 또는 유사한 형태의 정치 체제가 운영되고 있다. 캄보디아는 왕위 계승위원회가 국왕을 선출하고, 바티칸 시국은 추기경단이 교황을 선출하며, 말레이시아는 9개 주의 군주들이 윤번제로 국왕을 선출한다. 아랍에미리트는 연방 최고 위원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며, 사모아는 의회가 국가 원수를 선출한다.

선거군주제는 또한 초청에 의한 선거, 세습 군주제의 임시적 선거, 그리고 안도라, 에스와티니, 나이지리아, 코스타리카, 파나마, 사우디아라비아, 뉴질랜드, 왈리스 앤 푸투나 등과 같은 특수한 형태를 띠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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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거군주제 - 자유 선거
    자유 선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모든 귀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국왕 선출 제도였으나, 국왕의 권위 약화, 귀족 간 다툼, 외세 개입 등의 문제로 1791년 5월 3일 헌법에서 폐지되었다.
선거군주제
개요
유형군주제
특징군주가 선출됨
관련 개념선거, 군주
상세 정보
정의선거를 통해 군주가 선출되는 군주제 형태이다.
역사적 사례
고대로마 왕국
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코사크
교황령
현대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바티칸 시국
아랍에미리트
특징
선출 방식선거인단에 의한 선출
귀족에 의한 선출
종교 지도자에 의한 선출
권력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
상징적인 존재로 남는 경우
장단점
장점세습 군주제의 단점을 보완 가능
국민의 의사를 반영 가능
단점정치적 불안정 야기 가능
선거 과정에서 부패 발생 가능
현대의 선거 군주국
말레이시아군주: 양 디-페르투안 아공
선출 방식: 술탄들이 번갈아 가며 선출
캄보디아군주: 국왕
선출 방식: 왕족 위원회에서 선출
바티칸 시국군주: 교황
선출 방식: 추기경단에서 선출
아랍에미리트군주: 대통령
선출 방식: 에미리트 수장들이 선출

2. 역사적 사례

역사적으로 많은 왕국들이 공식적으로는 선거군주제를 채택했지만, 실제로는 사망한 군주의 가족 출신에서 후보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선거군주제는 세습 제도를 도입하여 왕위가 왕가 내에서 유지되도록 하고, 상속 순위를 명확하게 규정했다.[1] 오늘날 거의 모든 군주제는 군주가 한 왕가 출신이며, 군주의 직위가 재임 중인 군주의 사망 또는 퇴위 시 한 가족 구성원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으로 이어지는 세습 군주제이다.

선거 군주제와 공화제의 구분은 때때로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많은 공산주의 국가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 선출 방식은 선거 군주제와 유사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공화제로 간주된다. 반면, 바티칸 시국안도라는 본래 의미의 군주제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서유럽 왕실과 동격으로 간주되어 관습적으로 선거 군주제 국가로 여겨진다.

선거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제도는 유럽의 왕국에서 아프리카부족 국가까지 전 세계적으로 널리 나타났다. 선거 방법, 피선거권자, 선거권자의 범위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국가들이 세습 군주제로 전환했지만, 유럽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선거 군주제를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습 군주제로 운영된 사례도 있었다.

2. 1. 유럽

얀 마테이코의 "전성기의 공화국. 황금 자유. 1573년 왕위 선거"


폴란드-리투아니아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를 선출한 국왕 자유 선거 (1764년)


고대 그리스마케도니아[2]와 에피루스에서는 군대에 의해 왕이 선출되었다. 이는 데모스의 에클레시아와 구성이 유사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로마 민회에서 왕을 선출했다.[3] 왕정 폐지 후에도 왕정 설립은 금지되었으나, 실제로는 원수정 시기부터 로마 군주들은 공화주의적 장치를 통해 지위를 위장했다.[4]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은 기능적으로 절대 군주제가 되었지만, 황제는 혈통뿐만 아니라 군단이나 원로원의 선포로 계승되었다.

존은 1199년 귀족과 왕실 고문들로 구성된 의회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5] 14세기, 15세기,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잉글랜드에서는 왕실과 의회 간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상속과 선거 요소가 모두 포함된 군주제가 등장했다.[6] 명예 혁명 이후 의회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스튜어트 왕가를 폐위하고 하노버 왕가로 교체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320년 아브로스 선언에서 귀족들이 국왕을 선택할 권리를 주장했다.[7]

프랑크 왕국은 부분적으로 선거제였다. 10세기 서프랑크 왕실 선거는 카페 왕조로 정착하기 전에 여러 계보 사이를 오갔다.[13] 중세 프랑스는 첫 번째 카페 왕가 왕 시대에 선거 군주제였으나, 필리프 2세의 통치 이후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가 되었다.[14] 프랑스 하원은 1830년 7월 혁명 동안 루이필리프를 프랑스인의 왕으로 선언했다.[15] 나폴레옹 3세는 먼저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황제로 변신했다.[17]

신성 로마 제국은 선거 군주제의 대표적인 사례이다.[13] 1440년부터 1740년까지 합스부르크가 출신이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왕위는 비공식적으로 세습되었다. 황제는 선제후라고 불리는 귀족 회의에 의해 선출되었다. 30년 전쟁 당시 프리드리히 겨울왕이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카를 7세 등 합스부르크 왕가 외에서 선출된 예도 있다.

보헤미아 국왕은 신분에 의해 선출되었다. 1526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왕관을 차지했으나, 1618년 보헤미아인들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관을 수여했다.[18] 이는 30년 전쟁의 촉매제로 여겨진다.[18]

헝가리[19]는 1687년까지 선거군주제였다. 서고트 히스파니아는 이전 왕들의 친족 중에서 왕을 선출했다.[21] 19세기 스페인에서는 아마데오 1세가 선출되었으나, 1873년 퇴위했다. 포르투갈의 군주제는 선출 원칙의 잔재를 포함하고 있었다.[25] 1383–1385 위기 이후 왕국 의회는 주앙 1세를 포르투갈의 왕으로 선출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1569-1795)에 폴란드 왕과 리투아니아 대공은 귀족들이 모여 선출했다. 모든 귀족이 직접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유럽 국가 중 가장 광범위한 선거권이었다.[27] 자유 선거(''wolna elekcja'')라고 불린 이 선거는 마그나트에 의한 실권 장악과 왕권 약화, 외국 세력의 간섭을 초래했다.

게르만 전통에 따르면, 스칸디나비아 왕위는 이전 왕이 사망했을 때 선출되었다.[1] 원래 스웨덴 왕은 모라 팅에서 모든 자유인에 의해 선출되었다. 덴마크 군주제 역시 공식적으로 선출제였지만, 프레데리크 3세가 세습적이고 절대 군주제를 제정한 1660년까지 통치 군주의 장남이 보통 선출되었다. 1905년 칼 왕자는 스토르팅에서 노르웨이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1810년 스웨덴 릭스다그는 장 베르나도트를 새로운 왕세자로 선출했다.

예루살렘 왕국에서 왕위는 부분적으로 선출되었고 부분적으로 세습되었다. 왕은 예루살렘 오트 쿠르에 의해 선출되거나 인정받았다. 베네치아 공화국도제가 통치했으며, 선출 과정은 베네치아 대의회에서 시작되었다.[1]

2. 1. 1.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2]와 에피루스의 왕은 군대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이는 모든 자유 아테네 시민의 집회인 ''데모스''의 에클레시아와 구성이 유사했다. 군 복무는 종종 왕가의 남성 구성원과 시민권과 연관되었다.

2. 1. 2.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

고대 로마 왕국에서 왕은 로마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왕이 사망하면 원로는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 위해 ''인테르렉스''를 임명했다.[3] 왕정 폐지 후, 로마 헌법에는 왕정 설립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이는 고전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 시대에도 형식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국 로마는 군주제였다. 로마 제국의 기초 단계였던 원수정 (기원전 27년 ~ 서기 284년) 동안 로마 군주들은 공화주의의 ''법률상'' 장치를 통해 그들의 ''사실상'' 지위를 위장하는 데 종종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원수정을 수립한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경우 특히 그러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즉, "위엄")를 포함한 많은 칭호를 받았지만, 스스로를 ''원로원 으뜸 시민'' 또는 단순히 "원로원 의원 중 으뜸"이라고 칭했다. 로마 원로원에서 선출되었다는 환상은 계속되었다.[4]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 공화국 정부가 먼 과거로 흘러가고 제국이 기능적으로 절대 군주제가 되면서 이 원칙은 약화되었다.

로마 및 비잔틴 황제의 직위는 애매하게 선출제로 남아 있었다 (비록 선출 절차가 엄격하게 정의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원로원의 문제로 이해되었다). 예를 들어, 처음 다섯 명의 황제는 모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출신이었지만, 각 경우 그들의 지위는 권리에 따라 상속된 것이 아니라 선포되었다. 특히 네 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는 프레토리안 근위대가 그를 후보로 지명하면서 "선출"되어 두드러졌다. 따라서 상속은 결코 법적으로 공식적으로 확립될 수 없었다.

이후, 보다 노골적인 권위주의적 도미나투스 시대가 헌법에서 공화주의적 외관을 더욱 벗겨냈지만, 황제는 혈통만큼이나 군단이나 원로원의 선포의 혼합으로 계승되었다 (비록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지만). 상속 금지를 피하고 왕조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많은 비잔틴 황제들은 자신의 상속자들을 공동 황제로 즉위시켜 자신의 죽음으로 왕좌가 공석으로 간주될 수 없도록 하여 선출에 의한 계승의 필요성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로마 왕정에서 왕은 종신직이었지만 세습되지 않고, 원칙적으로 민회가 선거를 통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 중에서 선출했다. 선출은 반드시 가문이나 신분에 따르지 않았으며, 시외 출신이 선출된 사례도 있다. 왕의 일족은 귀족(파트리키)이 되었다. 로마 제국이나 비잔틴 제국에서도 로마 황제원로원에 의해 선출되는 제1시민(프린켑스)으로 여겨졌으며, 전 황제와의 혈연은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선거 군주제의 한 형태라고 여겨진다.

2. 1. 3. 영국

존은 1199년 형인 리처드 1세가 죽자 귀족과 왕실 고문들로 구성된 의회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엄격한 장자 상속에 따른 후계자인 아르튀르 1세 드 브르타뉴가 당시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는 선거군주제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었다.[5]

14세기, 15세기,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잉글랜드에서는 왕실과 의회 간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상속 요소와 유사 선거 요소가 모두 포함된 군주제가 등장했다.[6] 적어도 왕위 계승에 대한 몇몇 왕조적 주장을 가진 다양한 경쟁자들 사이에서는 그랬다. 헨리 4세는 1399년 의회에 의해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선출되었다. 리처드는 자녀가 없었고,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에드먼드 모티머(제5대 마치 백작)는 당시 어린 아이였으므로 의회는 그를 제쳐두고 리처드에 대한 반란을 이끌었던 헨리를 선택했다. 의회는 또한 장미 전쟁 동안의 폐위와 헨리 8세의 왕위 계승에 대한 합의를 확인했다. 배제 위기 동안 찰스 2세 국왕은 그러한 아이디어를 강력히 반대했다.

명예 혁명 이후 의회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는데, 그 결과 스튜어트 왕가를 폐위하고 왕위 계승권이 훨씬 멀었던 하노버 왕가로 교체되었다. 윌리엄 3세메리 2세는 제임스 2세를 대신하여 의회에 의해 선택되었다. (메리는 제임스의 딸이었고, 윌리엄은 제임스의 조카였으며, 윌리엄과 메리의 뒤를 메리의 여동생인 앤이 이었다.) 의회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가톨릭 신자(따라서 제임스 2세의 남성 후손)를 계승 순위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왕위 계승법 (2013년)은 남성 우선 상속 제도를 절대적 장자 상속 제도로 대체하고 로마 가톨릭 신자와 결혼한 사람의 계승 자격 박탈을 종료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320년의 아브로스 선언에서 필요할 경우 귀족들이 국왕을 선택할 권리를 주장했는데, 이는 선거군주제를 의미했다.[7] 탄니스리 또한 11세기 초 말콤 2세가 직접 상속을 도입할 때까지 왕위 계승 방식이었다. 맨 섬 또한 탄니스리를 사용했다.[8]

2. 1. 4. 프랑스

골족은 1년 이상 임기로 선출되는 왕, 즉 '릭스'(rix)에 의해 통치받았는데, 이는 왕으로 번역될 수 있다. 후보는 과거 왕의 친척 중에서 선출되었다.[12]

프랑크 왕국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선거제였다.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선출되었고,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은 때때로 선출되었다. 10세기 서프랑크 왕실 선거는 카페 왕조로 정착하기 전에 여러 계보 사이를 오갔다.[13] 중세 프랑스는 첫 번째 카페 왕가 왕 시대에 선거 군주제였는데, 왕들은 재위 기간 동안 아들을 공동 왕이자 후계자로 선출하는 습관을 들였다. 선거는 곧 형식적인 절차가 되었고 필리프 2세의 통치 이후 사라졌다.[14]

프랑스 하원은 왕위를 공석으로 선언한 후 1830년 7월 혁명 동안 229 대 33의 투표로 루이필리프를 프랑스인의 왕으로 선언하여 선거 군주제를 만들었다.[15]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먼저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황제로 변신했을 때 다시 일종의 선거 군주제를 잠시 가졌다.[17]

2. 1. 5.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은 선거 군주제의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이다.[13] 1440년부터 1740년까지 합스부르크가 출신이 항상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왕위는 비공식적으로 세습되었다. 황제는 선제후라고 불리는 소수의 귀족 회의에 의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세속 선거 자리는 세습되었다. 그러나 영적 선제후(그리고 다른 대(대)주교)는 일반적으로 종교 지도자로서 대성당 참사회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동시에 제국 직속령의 영토(보통 교구 영토의 일부를 포함)의 군주(공작)로 통치했다. 따라서 주교후도 선거 군주제였다. 이는 공주-수녀원장 또는 수도원장이 성직자 교회법에 의해 선출되고 관련 영토에서 제후 통치자로 제국에서 임명된 공작-수도원령에도 해당한다.

신성 로마 제국은 선거로 선출된 로마 왕이 로마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제위를 겸하는 체제였다. 이 때문에 황제가 제위를 유지한 채 로마 왕 선거에서 적자를 선출하는 방법도 이용되었다. 다만 30년 전쟁 당시의 프리드리히 겨울왕이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의 카를 7세 등 합스부르크 왕가 외에서 선출된 예도 있다.

2. 1. 6. 보헤미아

중세 시대부터 보헤미아 국왕은 보헤미아 왕관 영지의 신분에 의해 선출되었다. 1526년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관을 차지한 이후, 이는 항상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유지되었고, 이들은 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으며, 이 상황이 무기한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1618년 보헤미아인들은 이미 페르디난트 2세를 국왕으로 선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량에 따라 국왕을 선택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행사하기로 결정하고,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관을 수여했다. 이로 인해 그는 "겨울 왕"으로 불리게 되었다.[18]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를 반란 행위로 간주하고,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에 대한 지배를 다시 확립했으며, 그 결과 보헤미아 선거 군주제를 폐지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배타적 통치를 사실상, 법적으로 확립했다.[18]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30년 전쟁의 촉매제로 여겨진다.[18]

2. 1. 7. 헝가리

헝가리[19]는 1687년까지 선거군주제였다. 이 선거권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 20년 더 지속되었는데, 이곳은 법적으로 헝가리 왕령에 계속 속해 있었지만, 자녀가 없던 국왕 러요시 2세모하치 전투 이후 사망한 후 헝가리에서 분리되었다.[20]

2. 1. 8. 이베리아

서고트 히스파니아는 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라 이전 왕들의 친족 중에서 왕을 선출했다.[21] 서고트 왕들은 왕국의 업무를 관리하기 위해 장남을 임명하여 왕이 사망했을 때 장남이 왕위를 확보할 수 있을 만큼 정치적 능력을 갖추도록 했다.[22] 5세기에 세습적 계승이 점차 안정되었으나, 프랑크족의 침략으로 서고트족은 다시 선거제를 채택했다. 6세기 위기 이후 레오비길드 가문이 세습적 계승을 부활시키려 했지만, 스윈틸라가 전복되었고 633년 톨레도 제4차 공의회는 선출 계승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23]

아라곤 왕위는 처음에는 "부유한 사람들"인 남작들이 선출했다. 이후 이 권리는 코르테스가 상속인의 계승을 확인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24]

19세기(1870년~1873년) 스페인에서 선거군주제 시도가 있었다. 영광스러운 혁명과 이사벨 2세의 퇴위 이후, 직접 남성 투표를 통해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스페인에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군주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1869년 10월 아마데오 1세가 최종 선택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1873년 10월 11일까지 지속되었고, 스페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로 퇴위했으며, 그 후 의회는 공화국을 선포했다.

포르투갈의 군주제는 상호 서약, 코르테스의 동의, 왕위에 오르기 전의 환호성을 요구하는 선출 원칙의 잔재를 포함하고 있었다.[25] 포르투갈 초대 왕 아폰수 1세는 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여 세습적 계승 라인을 확립하는 서고트족의 선례를 따랐지만, 계승에 의문이 있을 때마다 선출 원칙이 재개되었다.[22] 1385년 코르테스는 왕 요한을 옹립하면서 왕위를 선출직으로 확정했다.[26] 1383–1385 위기 이후 1385년 4월 6일 왕국 의회는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주앙 1세를 포르투갈의 왕으로 선출했다. 그의 이복 형제인 페르난두 1세는 1383년 10월에 남자 상속자 없이 사망했고, 다른 파벌들은 페르난두의 외동딸이자 카스티야의 왕비 겸 레온인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공주, 또는 그녀의 삼촌 발렌시아 데 캄포스의 인판테 주앙 공작과 시푸엔테스의 인판테 데니스 경 중 한 명을 위해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격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의회는 대신 페드루 1세의 젊은 (그리고 사생아) 아들을 선출하여 카스티야 왕의 영향력을 피했다.

2. 1. 9.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1572년 야기에우워 왕조의 지그문트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선거군주제로 전환되었다. 초기에는 소규모 위원회에서 왕을 선출했으나, 점차 모든 슐라흐타(폴란드 귀족) 구성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1569-1795)에 폴란드 왕과 리투아니아 대공은 오늘날 바르샤바의 구역인 볼라의 들판에서 귀족들이 모여 선출되었다. 폴란드에서는 귀족의 모든 아들이 귀족이었기에, 약 50만 명으로 추산되는 모든 귀족이 직접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유럽 국가 중 가장 광범위한 선거권이었다.[27] 선거 기간 동안 국왕의 기능은 인테르렉스(보통 폴란드 수석 주교)가 수행했다. 이 독특한 폴란드 선거는 자유 선거(''wolna elekcja'')라고 불렸다.

선출 원칙은 이미 중세 말 폴란드 정치 문화에 확립되었지만, 1570년대에 그 규칙이 크게 바뀌었고, 그 시대에 개발된 원칙은 폴란드 분할까지 지속되었다. 1573년부터 1764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13번의 왕위 선거가 있었다. 특히 1575/1576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선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첫째, '연방의 시민들은 ''사실상'' 처음 선출된 국왕을 폐위'해야 했다. 둘째, 두 명의 후보가 승자로 선포되었고, 이후 귀족들은 스테판 바토리에 대한 다수 선택을 확정하고 이를 인정받아 막시밀리안 2세와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야기에우워 왕조 단절 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선거 군주제가 행해졌으며, 국왕 자유 선거를 통해 국내외의 유력자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대귀족(마그나트)에 의한 실권 장악과 왕권의 현저한 약화로 이어졌으며, 여러 외국 세력의 간섭도 초래했다. 그 때문에 말기에는 개혁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제3차 폴란드 분할로 국가 자체가 소멸하면서 종언을 맞이했다.

2. 1. 10. 스칸디나비아

게르만 전통에 따르면, 스칸디나비아 왕위는 이전 왕이 사망했을 때 선출되었다.[1] 왕위 계승은 항상 이전 왕의 상속인으로 제한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스웨덴에서는 왕가가 에릭 가문과 스베르케르 가문 사이를 세대 간에 오갔다. 원래 왕은 이전 왕의 후손 중에서 선출되어야 했는데, 이는 신의 혈통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왕 간의 공동 통치도 가능했다. 왕이 많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왕위 계승 분쟁이 흔했다. 그러나 9세기에 단독 통치가 나타나면서 이 지역 전역에서 내전의 빈도가 증가했다. 이후 기독교화로 인해 노르웨이에서는 1163년, 덴마크에서는 1170년에 장자 상속이 공포되었지만, 지방 의회에서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요구 사항에서 선출적 아이디어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 후에도 유력자들은 비록 현직 왕이 살아 있었지만 새로운 왕을 선출했다. 이는 귀족의 지속적인 권력을 보여주었다.[28]

원래 스웨덴 왕은 모라 팅에서 모든 자유인에 의해 선출되었다. 선출 군주제는 1544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해 신분 의회가 바사 왕가의 구스타브 바사 왕의 상속자를 왕위 계승자로 지정했다. 덴마크 군주제 역시 공식적으로 선출제였지만, 통치 군주의 장남이 보통 선출되었다. 이는 프레데리크 3세가 세습적이고 절대 군주제를 제정한 1660년까지 지속되었다. 노르웨이 군주제는 원래 세습제였지만, 12세기와 13세기에 선출제로 바뀌었다. 후보자는 왕족이어야 했지만, 왕위는 장남에게 자동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귀족 평의회에서 선출했다. 1905년 칼 왕자는 1905년 노르웨이 군주제 국민투표 이후 스토르팅에서 새롭게 독립한 노르웨이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이 국민투표에서 군주제가 지지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왕국은 1389년 마르그레테 1세 덴마크에 의해 덴마크 왕실 아래 통일되었지만, 그녀의 후계자 중 많은 사람들이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스웨덴과 다른 왕을 선출하면서 통일 왕국이 분열되었다. 선거는 보통 크리스티안 2세 덴마크가 스웨덴을 재정복한 후 스웨덴 왕위에 반대 투표를 한 많은 사람들을 스톡홀름 대학살 (1520)에서 처형하면서 덴마크의 침략으로 경쟁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스웨덴 왕위에 대한 덴마크 왕에 대한 지지가 대부분 끝났다.

1810년 스웨덴 릭스다그는 프랑스 원수이자 폰테코르보 공 장 베르나도트를 새로운 왕세자로 선출했다. 이는 호르슈타인고토르프 왕가의 스웨덴 분파가 자녀가 없는 칼 13세 왕과 함께 멸망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도트는 결국 칼 14세 요한 스웨덴으로 왕위에 올랐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베르나도트 왕가를 창건했다. 이 경우 군주의 선택에 있어 선출적 측면이 특히 두드러졌는데, 베르나도트는 스웨덴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프랑스 평민이었으며 스웨덴 왕위에 대한 가장 멀리 떨어진 왕조적 주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선택은 나폴레옹 전쟁의 위기 시대의 긴급한 정치적, 군사적 고려에서 비롯되었다.

2. 1. 11. 기타 유럽 국가

예루살렘 왕국에서 왕위는 부분적으로 선출되었고 부분적으로 세습되었다. 12세기 중반 왕국의 전성기에는 왕족이 있었고 비교적 명확한 계승 계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예루살렘 오트 쿠르에 의해 선출되거나 최소한 인정받았다. 여기에서 왕은 평등한 자들 중의 으뜸(primus inter paresla)으로 여겨졌으며, 부재 시 그의 임무는 재판관이 수행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697년부터 1797년까지 종신직을 수행하는 도제가 통치했으며, 몇몇 도제는 강제로 퇴위당했다. 그의 권한은 결코 절대 군주의 권한이 아니었지만, 그는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이었으며, 시기에 따라 다양한 제한과 감독 수준 내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선출 과정은 2,000명 이상의 베네치아 귀족으로 구성된 베네치아 대의회에서 시작되었으며, 한 가문이나 동맹이 과정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시스템을 사용했다. 이 시스템은 제비뽑기로 인원을 줄이는 소규모 지명 그룹을 사용했으며 선출에는 특별 다수결이 필요했다.[1]

2. 2. 아시아

고구려에서는 통치자가 원래 다섯 부족의 수장 중에서, 대개는 순노부에서 선출되었다.[38]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부족과 마을 원로들의 회의를 통해 초대 왕을 선출했다.[36] 통일 신라의 왕들은 왕과 동등한 권한을 가진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었다.[37]

몽골 제국에서 대칸은 쿠릴타이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이는 종종 수도에서 소집되었다. 다른 중요한 지도자 직책도 할당되었다.[35] 몽골 고원의 유목민 사이에서는 쿠릴타이를 통해 부족의 대표인 을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다. 칭기즈 칸은 일족이나 유력 부족장의 추대를 받아 황제(카안, 칸)로 선출되었다. 이후의 카안은 모두 칭기즈 칸의 자손 중에서 선출되었지만, 카안 계승에는 정해진 규칙은 없었고, 쿠릴타이에서 제국 내의 지지를 얻은 인물이 선출되었다.

파르티아 제국(기원전 248년~서기 224년)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선거 군주제로 여겨진다.[34] 왕중왕은 왕위에 오르거나 물러나기 전에 마헤스탄(Mahestān)이라고 불리는 귀족 회의에서 승인 투표를 받아야 했다. 이란 샤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의회의 승인 투표를 받아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8세기 초 호타키 왕조와 두라니 왕조가 집권한 이후부터 지르가가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고대 아리아인 부족들은 원시 인도-이란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간헐적으로 이동해 왔다. 그들은 ''simite|시미테ps''(정상 회담)와 ''sabhā|사바ps''(일종의 지방 의회)의 두 종류의 의회를 가진 일종의 지르가 제도를 시행했다. 국왕도 ''simite|시미테ps'' 회의에 참석했다. 인도에서는 이를 각각 ''사미티''와 ''사바''라고 부른다.

시암 왕국과 태국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 중에 반 선거 군주제 시스템으로 전환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1824년, 풋타 롤레르 라 나팔라이는 부왕인 마하 세나누라크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왕위 계승 전통에 따르면, 우파라자가 추정 상속인이었다. 만약 부왕이 없다면, 국왕의 죽음에 참석한 고위 관리들로 구성된 임시 ''아드혹'' ''세나보디''가 후계자를 선출했다.[39] 고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쳇사다보딘이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1867년, 몽꿋은 자신의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고, 결정은 의회에 맡겨졌다. 몽꿋의 이복 형인 데베스 왕자가 이끄는 의회는 쭐랄롱꼰을 몽꿋의 후계자로 선택했다. 그러나 쭐랄롱꼰은 겨우 15세였고, 따라서 의회는 쭐랄롱꼰이 성인이 될 때까지 시 수리야웡세를 섭정으로 선택했다.[40] 1935년 3월 2일, 아난타 마히돈 왕자는 국회와 태국 정부에 의해 그의 삼촌인 쁘라자디폭 국왕의 뒤를 이어 짜끄리 왕조의 8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전 국왕이었던 쁘라자디폭이 퇴위 전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2. 1.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8세기 초 호타키 왕조와 두라니 왕조가 집권한 이후부터 지르가가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고대 아리아인 부족들은 원시 인도-이란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간헐적으로 이동해 왔다는 것은 흔한 신화이다. 그들은 두 종류의 의회, 즉 ''simite|시미테ps''와 ''sabhā|사바ps''를 가진 일종의 지르가 제도를 시행했다. ''simite|시미테ps''(정상 회담)는 장로와 부족장으로 구성되었다. 국왕도 ''simite|시미테ps'' 회의에 참석했다. ''sabhā|사바ps''는 일종의 지방 의회였다. 인도에서는 이를 각각 ''사미티''와 ''사바''라고 부른다.

2. 2. 2. 이란

파르티아 제국(기원전 248년~서기 224년)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선거 군주제로 여겨진다.[34] 왕중왕은 왕위에 오르거나 물러나기 전에 마헤스탄(Mahestān)이라고 불리는 귀족 회의에서 승인 투표를 받아야 했다.

이란 샤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의회의 승인 투표를 받아야 했다.

2. 2. 3. 몽골 제국

몽골 제국에서 대칸은 쿠릴타이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이는 종종 수도에서 소집되었다. 다른 중요한 지도자 직책도 할당되었다.[35] 몽골 고원의 유목민 사이에서는 쿠릴타이를 통해 부족의 대표인 을 선출하는 전통이 있었다. 몽골 제국에서도 칭기즈 칸은 일족이나 유력 부족장의 추대를 받아 황제(카안, 칸)로 선출되었다. 이후의 카안은 모두 칭기즈 칸의 자손 중에서 선출되었지만, 카안 계승에는 장자 상속이나 막내 상속과 같은 정해진 규칙은 없었고, 쿠릴타이에서 제국 내의 지지를 얻은 인물이 선출되었다.

2. 2. 4. 한국

고대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부족과 마을 원로들의 회의를 통해 초대 왕을 선출했다.[36] 통일 신라의 왕들은 왕과 동등한 권한을 가진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었다.[37] 고구려에서는 통치자가 원래 다섯 부족의 수장 중에서, 대개는 순노부에서 선출되었다.[38]

2. 2. 5. 태국

시암 왕국과 태국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 중에 반 선거 군주제 시스템으로 전환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 1824년, 풋타 롤레르 라 나팔라이는 부왕인 마하 세나누라크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마하 세나누라크는 1817년 7월 16일에 사망했다. 왕위 계승 전통에 따르면, 부왕 또는 우파라자가 추정 상속인이었다. 만약 부왕이 없다면, 국왕의 죽음에 참석한 고위 관리들로 구성된 임시 ''아드혹'' ''세나보디''가 후계자를 선출했다.[39] 고위 귀족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아 쳇사다보딘이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 1867년, 몽꿋은 자신의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고, 결정은 의회에 맡겨졌다. 몽꿋의 이복 형인 데베스 왕자가 이끄는 의회는 쭐랄롱꼰을 몽꿋의 후계자로 선택했다. 그러나 쭐랄롱꼰은 겨우 15세였고, 따라서 의회는 쭐랄롱꼰이 성인이 될 때까지 시 수리야웡세를 섭정으로 선택했다.[40]

  • 1935년 3월 2일, 아난타 마히돈 왕자는 국회와 태국 정부에 의해 그의 삼촌인 쁘라자디폭 국왕의 뒤를 이어 짜끄리 왕조의 8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전 국왕이었던 쁘라자디폭이 퇴위 전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3. 아프리카

알제리 섭정국(17세기~19세기)은 선출 군주제였으며, 데이는 시기에 따라 알제리 디반 또는 해적들의 회의인 타이파(Taïfa)에 의해 선출되었다. 선출된 데이들은 알제리의 총독-술탄 또는 알제리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아프리카의 말리 제국은 입헌 군주제와 선거 군주제의 기능을 모두 수행했다. 만사 또는 황제는 세습적인 권리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바라로 알려진 대의회에서 승인을 받아야 했다.

콩고 왕국은 혈통적 지위가 훨씬 덜 중요하게 작용하는 선거군주제의 예시였다. 귀족들은 왕의 후계자를 선출했고, 후계자가 전임자와 다른 가문 출신인 경우가 흔했다.

이러한 형태의 선거군주제는 1400년경 왕국이 시작된 시점부터 20세기 초 완전한 붕괴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다.

전 식민지 시대에 아샨티 제국의 왕과 족장, 이페오요 제국의 통치자 등 여러 서아프리카 통치자들은 왕족들 중에서 선거인으로 알려진 귀족 회의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 관행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2. 4. 아메리카

마오리 부족은 1858년 포타타우 테 웨헤로웨로를 군주로 선출했다. 마오리 왕 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현재 마오리 군주는 쿠이니(여왕) 응아 와이 호노 이 테 포이다. 이 자리는 원칙적으로 세습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모든 마오리 군주는 전임 군주의 자녀였다.

하와이 왕국은 1864년부터 헌법적으로 세습 군주제였으나, 왕족이 단절될 경우 입법부가 새로운 왕조의 군주를 "토착 알리이"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1872년 카메하메하 5세 사망 후 국민투표에서 윌리엄 찰스 루날릴로가 승리하여 1873년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1874년에는 칼라카우아 국왕이 입법부에 의해 선출되었다. 1891년 칼라카우아 사망 후에는 그의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방계 혈족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아즈텍 제국틀라토아니는 원로, 귀족, 사제들로 구성된 회의에서 4명의 후보군 중에서 선출되었다.

니코야 왕국의 ''만케메''(왕)는 ''모네히코''로 알려진 장로회에 의해 선출되었다.

프랑스 탐험가 오렐리-앙투안 드 투낭은 마푸체에 의해 최고 지도자인 대토키로 선출되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아라우카니아와 파타고니아 왕국의 왕이라고 선포했다.

미국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대통령이 종신으로 통치하는 선거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제안은 재선 가능성이 있는 4년 임기로 하는 안에 압도적으로 부결되었다.

1804년에 수립된 아이티 제국의 왕위는 1805년 헌법에 따라 선거로 선출되었다.[41]

3. 현대의 선거군주제

현재 세계에서 세습이 아닌 상호 선거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제도는 유럽의 왕국에서 아프리카부족 국가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선거 방법이나 피선거권자, 선거권자의 범위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크게 다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습 군주제로 전환된 사례가 많지만, 유럽에서는 실질적으로는 세습 군주제였음에도 공식적으로는 선거 군주제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다.

선거 군주제와 공화제의 구분은 때때로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많은 공산주의 국가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 선출 방식은 선거 군주제와 매우 유사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공화제로 간주된다. 이와 반대되는 사례는, 본래 의미의 군주제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서유럽 왕실과 동격으로 간주되는 바티칸 시국안도라로, 이들은 관습적으로 공화국이 아닌 선거 군주제 국가로 여겨진다.

현대의 선거군주제 국가는 다음과 같다:

3. 1. 캄보디아

캄보디아 헌법 제13조는 국왕이 9인으로 구성된 왕위계승위원회에서 종신직으로 선출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위원회는 상원 의장, 국회의장, 총리, 캄보디아의 두 주요 불교 상가 니카야의 두 총대주교, 상원 제1 및 제2 부의장, 국회 제1 및 제2 부의원으로 구성된다.[48] 헌법 제14조는 왕위 후보자는 30세 이상이어야 하며 앙두옹 국왕, 노로돔 국왕 또는 시소와스 국왕의 후손이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48]

캄보디아에서는 노로돔 가문과 시소와트 가문의 두 왕가의 구성원, 입법부의 정·부의장, 총리, 그리고 상좌부 불교 2개 종파의 지도자로 구성된 왕실 평의회가 종신 국왕을 선출한다.

3. 2. 바티칸 시국

교황청바티칸 시국에서 교황은 일반적으로 추기경단 중에서 추기경단에 의해 콘클라베를 통해 선출된다.[55] 바티칸 시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군주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콘클라베에서 상호 선출하는 로마 교황을 원수로 하므로 선거 군주제와 유사한 체제를 가진 국가이다.

3. 3.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의 ''양디-퍼르투안 아공''(최고 국가 원수)은 5년 임기로 선출된다. 말레이 주의 9명의 세습 군주들이 군주 협의회를 구성하여 비밀 투표를 통해 다음 ''아궁''을 결정한다. 이 직위는 현재까지 원래는 선임 순위에 따라 주 군주들 사이에서 ''사실상'' 순환되어 왔다. ''양디-퍼르투안 아궁''은 순환 계승이 완료되지 않으면 재선될 수 없다.

또한, 말레이시아 주인 느게리슴빌란은 ''자체적으로'' 선거 군주제이며, 느게리슴빌란의 ''양디-퍼르투안 베사르''는 통치 수장들의 협의회에서 선출된다. 통치 수장들은 족장에 의해 선출된다. 남성 후보는 모계 사회 씨족을 기반으로 결정되는데, 이는 미낭카바우족 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연방 군주제의 부분적인 기초가 되었다.

페락 술탄은 페락의 18대 술탄인 술탄 아흐마딘의 직계 혈통에서 가장 선임인 남성 왕자 중에서 선출된다. 술탄, ''라자 무다''(왕세자), ''라자 디-힐리르''(부왕세자)는 페락의 드완 네가라에서 선출된다. 현임 술탄의 아들은 이전 술탄의 직계 혈통에서 더 선임인 왕자가 있는 경우 ''라자 무다''가 될 수 없다. 이는 선임 왕자가 ''라자 무다''가 될 권리를 포기할 경우 가능하다.

말레이시아 국왕은 5년의 임기를 가지며,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13개 주 중 9개 주의 군주인 9명의 술탄의 상호 선출제이다. 단, 각 술탄이 윤번으로 국왕으로 선출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느그리슴빌란 주에서는 술탄이 주 내의 지역 수장의 선거로 선출되며, 그 지역 수장 또한 지역 내의 원로에 의해 선출된다.

3. 4.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은 연방 최고 위원회에서 임기 5년으로 선출된다.[49] 아랍에미리트가 창설된 이후 이 직위는 연방 최고 위원회의 합의에 따라 아부다비의 알 나흐얀 가문에 사실상 세습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아랍에미리트의 부통령 겸 총리직은 두바이의 알 막툼 가문이 맡고 있다. 선거는 5년마다 열린다.[50][51]

7개의 토후국으로 구성된 연방이며, 대통령과 부통령(겸임 수상)은 7명의 토후 중에서 명목상 선출되나, 실제로는 아부다비의 나하얀가가 대통령직을 맡고 있다.

3. 5. 사모아

공화제이지만, 4대 추장 가문에서 5년 임기의 국가 원수(오 레 아오 오 레 말로)를 의회가 지명한다.

4. 특수한 형태의 선거군주제

역사적으로 많은 왕국이 공식적인 선거군주제를 채택했지만, 후보자는 대개 사망한 군주의 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결국 대부분의 선거군주제는 세습을 도입하여 왕위와 직책이 왕가 내에 유지되도록 보장하고, 상속 순위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명시했다.[1]

세습에 의하지 않고 지도자를 상호 선거로 추대하는 제도는 역사상 유럽의 왕국에서 아프리카부족 국가까지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선거 방법, 피선거권자, 선거권자의 범위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크게 다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습 군주제로 이행한 사례도 많지만, 유럽에서는 실질적으로 세습 군주제로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선거 군주제를 유지한 예도 있다.

선거 군주제와 공화제의 구분은 때때로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많은 공산주의 국가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 선출 방법은 선거 군주제와 매우 유사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공화제로 여겨진다. 이와 반대로, 본래 의미의 군주제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서유럽 왕실과 동격으로 간주되는 바티칸 시국안도라는 관습적으로 공화국이 아닌 선거 군주제 국가로 여겨진다.

4. 1. 초청에 의한 선거

1858년 뉴질랜드 북섬 중부의 여러 마오리 부족은 포타타우 테 웨헤로웨로를 군주로 선출했다. 마오리 왕 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44]

과거 내부 혼란을 겪던 새로운 정치 체제나 국가들은 때때로 군주가 될 사람을 선택하여 초청하기도 했다. 선택된 사람은 미래의 왕국과 거의 또는 전혀 관련이 없을 수도 있었고, 당시의 강대국이나 지역 강대국과 연관이 있거나, 내부 정치 문제에 대해 (바라건대) 편견이 없는 진정한 외부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외국인 왕자나 귀족을 선택함으로써 국가는 외교적 관계를 맺고 궁정의 예법과 의례적 의무에 익숙한 인물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새롭게 설립된 국가들은 새로 선출된 군주를 선택하고 임명하는 추세를 세웠다.[44]

20세기 초, 여러 새롭게 독립한 국가의 첫 번째 군주들은 의회에서 선출되었다. 노르웨이가 대표적인 예이다. 앞서 독립한 그리스의 선례에 따라, 확고한 세습 왕족이 없는 새로운 국가들은 지역 권력 기구의 일원을 높이는 대신, 안정적인 세습 군주제가 결국 이 과정에서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기존의 유럽 왕가 중에서 자체적으로 군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벨기에의 초대 국왕과, 현재 폐위된 그리스, 불가리아, 알바니아 (실패) 및 루마니아의 왕가는 원래 이런 방식으로 임명되었다. 1918년 10월 9일, 새로 독립한 핀란드의 의회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매형인 헤세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을 핀란드 국왕으로 선출했지만, 곧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고 독일에서 군주제가 붕괴되면서 이 움직임은 좌절되었고, 핀란드는 대신 공화국이 되기로 결정했다.[44]

다음은 그 예시이다.

연도국가선출된 군주비고
862년루스류리크전통에 따르면, 북부 루스의 여러 부족들이 과거 바랑기아 적들의 지도자였던 류리크를 초대하여 질서를 재건했다. 그의 후손들은 1917년까지 키예프, 모스크바 및 러시아에서 통치했다. 초대 전설은 이후 프스코프[45]와 노브고로드[46][47]를 통치하기 위한 류리크 가문 및 다른 사람들의 초청 관행을 반영한다.
1573년폴란드앙리 3세폴란드의 szlachta는 후보자를 찾기 위해 중부 유럽 너머를 바라보고 프랑스의 앙주 공작 앙리 3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함으로써 전통을 깨뜨렸다.
1810년스웨덴장 베르나도트프랑스 나폴레옹 원수 장 베르나도트를 왕세자로 선출했다. 그는 1818년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이 되었다.
1831년벨기에레오폴드 1세작센-코부르크-고타 출신의 독일 왕자 레오폴드 1세를 초대 벨기에 국왕으로 선택했다.
1832년그리스오토유럽 열강 외교관들은 비텔스바흐 왕가의 독일 왕자 오토를 그리스의 오토 국왕으로 선택했다.
1863년그리스게오르기오스 1세그리스 국민 의회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의 덴마크 왕자 윌리엄을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로 선출했다.
1863년멕시코막시밀리안 1세멕시코 보수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1세에게 제2 멕시코 제국의 왕관을 제안했다.
1866년루마니아카롤 1세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출신의 독일 왕자 카를을 통치 공(나중에 루마니아의 카롤 1세)으로 선출했다.
1870년스페인아마데오 1세스페인의 정치적 혼란 이후, 스페인 코르테스는 새로운 왕가를 내세워 스페인 군주제를 재건하고 사보이 왕가의 이탈리아 왕자 아마데오를 스페인의 아마데오 1세로 선출했다.
1879년불가리아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불가리아 대국민 의회는 러시아가 후원한 독일 왕자 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를 통치 크냐즈(공)로 선출했다.
1887년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 대국민 의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공자 페르디난트 1세를 공(나중에는 차르)으로 선출했다.
1905년노르웨이호콘 7세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칼 공자를 최초의 현대적 독립 군주로 선출했다.
1914년알바니아빌헬름 폰 비트유럽 열강들은 독일 왕자 빌헬름 폰 비트를 알바니아 공국의 통치자로 선택했다.
1918년리투아니아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카를 공작독일이 점령한 리투아니아 왕국은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카를 공작에게 왕위를 제안하는 투표를 했다. 그는 민다우가스 2세가 되었을 것이다.
1918년핀란드헤세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핀란드 의회에 의해 핀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지만, 통치하지 못하고 같은 해 12월 14일에 퇴위했다.
1918년발트 연합 공국메클렌부르크의 아돌프 프리드리히 공작제1차 세계 대전 말, 독일 제국은 메클렌부르크의 아돌프 프리드리히 공작을 발트 연합 공국의 공작으로 인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섭정 위원회는 11월에 한 달도 채 안 되었고 독일 외에는 어떤 국가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에게 멕시코 왕관을 제안함.

4. 2. 세습 군주제의 임시적 선거

많은 왕국이 역사적으로 공식적인 선거군주제를 채택했지만, 후보는 일반적으로 사망한 군주의 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결국 대부분의 선거군주제는 세습을 도입하여 왕위와 직책이 왕가 내에 유지되도록 보장하고, 상속 순위를 다소 정확하게 명시했다.[1]

세습 군주제는 공석이 된 왕위를 채우기 위해 가끔 선거를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왕가가 단절될 수 있다. 왕위 계승이 법률에 의해 얼마나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는지에 따라 동등하거나 거의 동등한 자격을 가진 여러 후보가 나타날 수 있으며, 그들 중에서 선택하기 위한 선거가 치러진다. 이는 공식적인 선출 군주제와는 달리, 임시적인 조치이며, 새로운 군주가 즉위하면 다시 세습이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는, 혁명과 같이 군주가 폐위될 수도 있다. 때로는 군주가 자신의 후계자를 위해 강제로 퇴위해야 할 수도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왕가가 전체적으로 거부되어 왕위가 선출된 후보에게 돌아간다. 임시적인 선거의 예는 다음과 같다.

  • 미하일 로마노프는 류리크 왕조가 단절되고 혼란의 시대가 끝난 후 1613년 젬스키 소보르(전국 회의)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 결과 로마노프 왕조는 이전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오래된 보야르 가문이었으며, 미하일의 아버지인 표도르 로마노프는 당시 필라레트라는 수도원 이름을 가진 모스크바와 전 러시아 총대주교로서 사실상 섭정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필라레트 대주교는 스스로 유능한 정치인이 되어, 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아들을 위해 공동 통치자이자 때로는 섭정 역할을 했다.
  • 1971년 아라비아 반도의 7개 토후국이 연합하여 아랍 에미리트 연합을 형성하고 연방이 되었다. 연방이 형성되자 아부다비의 셰이크 자예드 빈 술탄 알 나흐얀이 다른 6개 토후국의 통치 군주들에 의해 국가 원수이자 연합의 라이스(대통령)로 선출되었고, 자예드 자신은 당시 두바이의 통치자였던 라시드 빈 사에드 알 막툼에게 투표했다.[42][43]
  • 팔라 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팔라는 8세기에 독립적인 지역 군벌들에 의해 선택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이 지역의 많은 동시대 부족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44]

4. 3. 유사한 형태

세습에 의하지 않고 지도자를 상호 선거로 추대하는 제도는 역사상 유럽의 왕국에서 아프리카부족 국가까지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선거의 방법이나 피선거권자, 선거권자의 범위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크게 다르다. 시대가 흐르면서 세습 군주제로 이행한 사례도 많지만, 유럽에서는 실질적으로 세습 군주제로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선거 군주제를 유지했던 예도 있다.

선거 군주제와 공화제의 구분은 종종 자의적이다. 예를 들어, 많은 공산주의 국가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 선출 방법은 선거 군주제와 매우 유사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공화제로 여겨진다. 이와 대조적인 사례는, 본래 의미의 군주제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서유럽 왕실과 동격으로 간주되는 바티칸 시국안도라로, 이에 대해서는 관습적으로 공화국이 아닌 선거 군주제 국가로 여겨진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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