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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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국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초기 국가, 인도화된 국가, 타이족의 이동, 수코타이 왕조, 아유타야 왕조, 톤부리 왕조, 짜끄리 왕조 시대를 거쳐 근대화와 개혁을 겪었다. 19세기에는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 확장에 따른 영토 할양이 있었고, 20세기 초에는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다. 이후 군부 독재, 민주화 운동, 정치적 갈등을 반복하며 변화를 겪었고, 2001년 탁신 친나왓의 집권 이후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다. 2014년 쿠데타로 군사 정부가 들어섰으며, 2019년 민정으로 복귀했으나 정치적 불안정성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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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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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국가 명칭 | 태국 |
로마자 표기 | Thai |
태국어 표기 | สยาม |
중국어 표기 | 暹羅 |
옛 명칭 | 시암 |
역사 | |
선사 시대 | 스피릿 동굴 (기원전 9000년–5500년) 반 치앙 (기원전 2100년–서기 200년) |
초기 국가 | 수완나품: 전설적인 왕국 싱하나바티 왕국: 기원전 691년–서기 638년 치 투: 기원전 200년–서기 700년 친 린: 서기 9년 – 200년 툰 순: 서기 52년–600년 탐브랄링가: 서기 100년–1277년 랑카수카: 서기 100년–1500년 판판: 서기 300년–700년 라보 왕국: 서기 468년–1388년 드바라바티: 서기 500년–1200년 투 유안: 서기 600년 – 647년 원 단: 서기 600년–800년 하리푼차이: 서기 629년–1292년 응오엔양: 서기 638년–1292년 스리비자야: 서기 671년–1025년 카나사푸라: 서기 790년–974년 니 왕: 서기 800년 – 1289년 |
주요 왕국 | 시안: 1000년 – 1438년 파야오 왕국: 1094년–1338년 수판나붐: 1150년 – 1438년 나콘시탐마랏 왕국: 1278년–1782년 란나: 1292년–1775년 파타니 왕국: 1457년–1902년 송클라 술탄국: 1605년–1680년 세툴 맘방 세가라 왕국: 1808년–1916년 레만 왕국: 1810년–1902년 |
주요 역사 시대 | 수코타이 왕국: 1238년–1438년 아유타야 왕국: 1351년–1767년 톤부리 왕국: 1767년–1782년 라따나꼬신 왕국: 1782년–현재 라따나꼬신 왕국 (1782–1932): 1782년–1932년 태국 역사 (1932–1973): 1932년–1973년 태국 역사 (1973–2001): 1973년–2001년 태국 역사 (2001–현재): 2001년–현재 |
주제 | |
주제 | 태국의 인구 태국 헌법 태국의 군사사 태국의 경제사 태국의 LGBT 역사 이산의 역사 핏사눌록주의 역사 방콕의 역사 |
지역 역사 | |
지역 역사 | 하리푼차이 왕국 란나 왕국 |
기타 | |
관련 항목 | 타이어 타이 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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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사 시대
동남아시아의 인류 거주사는 50만 년이 넘는다. 람팡인과 같은 호모 에렉투스 화석의 발견은 초기 인류의 사례이다. 유해는 람팡주 발굴 중 처음 발견되었다. 이 발견물은 플라이스토세의 약 1,000,000~50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4] 최근 이루어진 반치앙 유적의 고고학 조사 등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4000년에 이미 오늘날의 태국에 초기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한다.[127][128] 이와 함께 벼농사의 발달은 사회적·정치적 조직화를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이러한 발달이 이곳에서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지역에 전파되었음을 시사한다.
동남아시아의 인류 거주사는 50만 년이 넘는다. 최근 반치앙 유적의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기원전 4000년에 이미 오늘날의 태국에 초기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었고, 벼농사의 발달은 사회적·정치적 조직화를 촉진시켰다고 한다.
태국 북동부 이산(อีสาน) 지역 우본라차타니 주 동쪽 끝에 위치한 파타엠에는 4000년~3000년 전에 그려진 많은 암각화가 있다.[117] 또한, 우돈타니 주의 푸프라밧의 암각화는 약 6000년 전의 것으로 여겨진다.[118]
북부 이산 지역의 논녹타와 반치앙 유적 등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2천년기에는[126] 태국에 초기 청동기 문화를 가진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발전과 함께 벼농사가 확인되고,[129][130] 이어지는 기원전 3세기까지 태국 북동부에서 제련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초기 국가 및 인도화된 국가
타이족은 언어학적으로 중국 남부의 여러 집단과 관련이 있으며,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중국 남부에서 동남아시아로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타이족이 남하하기 전에는 말레이족, 몬족, 크메르족 등의 문화가 번성했다.
현대 태국 영토에는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500년)와 철기 시대(기원전 500년~기원후 500년) 유적이 많다. 반창 유적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구리와 청동 생산 중심지 중 하나로, 기원전 약 2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오래된 정치 단위는 푸난으로, 메콩 삼각주를 중심으로 현대 태국 영토를 포함했다. 중국 연대기는 기원후 1세기 초부터 푸난의 존재를 확인하며, 고고학적 자료는 기원전 4세기부터 광범위한 인간 정착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지역에는 여러 토착 오스트로아시아어족과 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 문명이 존재했다. 그러나 문헌 및 구체적인 자료 부족으로 13세기 이전의 태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이 시기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고고학적 증거에서 얻어진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태국은 인도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러한 "인도화된 왕국"에는 드바라바티, 스리비자야, 크메르 제국 등이 있다. 아소카 왕의 마우리아 제국 시대와 1천년대 초에 불교가 태국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남인도의 팔라바 왕조와 북인도의 굽타 제국의 영향을 받았다.
태국 북동부 이산(อีสาน) 지역 우본라차타니 주 동쪽 끝에 위치한 에는 4000년~3000년 전에 그려진 많은 암각화가 있다.[117] 우돈타니 주의 의 암각화는 약 6000년 전의 것으로 여겨진다.[118]
신석기 시대에는 벼농사가 확인되는 신석기 문화가 등장했다.[121] 사회 단위는 부족에서 마을로 발전했고,[113] 사회적 조직 구성이 진행되었다.[122] 청동기 시대에는 분산된 마을(무반(หมู่บ้าน))에서 더욱 정돈된 “무앙(เมือง)”[123](국가[124])으로 발전했다.[125] 북부 이산 지역의 와 반치엔 유적 등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2천년기에는[126] 태국에 초기 청동기 문화를 가진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127][128] 기원전 3세기까지 태국 북동부에서 제련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31]
동남아시아의 네그리토인 마니족 (Maniq people)은 태국 남부 원주민으로 말레이 반도에 거주했으며, 현재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에 속하는 몬-크메르어파의 켄시우어 (Kensiu language)(마니어)를 사용한다.[133]
기원전 2세기경부터 중국, 인도, 지중해를 잇는 동서 교역에서 실크로드의 "바닷길"이라고 불리는 해로가 주목받게 되면서, 말라카 해협을 항해하지 않고 말레이 반도를 횡단하는 루트가 병용되었다.[135]
현재 태국에 거주하며 일반적으로 태국인이라고 불리는 주요 민족인 타이족은 타이-카다이어족에 속하는 민족이며,[140] 중국의 양자강 이남 지역이 그 기원으로 생각된다.[141] 11세기-12세기가 되면 메콩강을 따라 대무앙이 성립해 나갔다.[143]
크메르족의 참파는 같은 크메르족의 푸난의 속국이었지만, 5세기 중엽에는 등을 지배하에 두었고[165], 7세기 초에 푸난을 점령했다.[167]
3. 1. 중부 태국
짜오프라야 강 유역은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몬족의 도바라바티 문화의 중심지였다.[149][150][151] 도바라바티는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였다. 기원전 3세기경 아소카 왕이 파견한 전도자에 의해 프라 파톰 체디가 있는 나콘파톰에서 상좌부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지지만,[153] 고고학적 증거 및 불교 연대기에 따르면, 프라 파톰 체디의 초기 건설은 4-6세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154][155] 도바라바티 지배 계급은 힌두교 의식에도 참여했다. 10세기경 도바라바티의 도시 국가들은 라보(현대 롭부리)와 수반나부미(현대 수판부리)의 만달라로 통합되었다. 수리아바르만 1세가 라보를 크메르의 지배하에 두었고, 이후 라보는 힌두교 크메르 도시로 변모했다.
3. 2. 남부 태국
태국 남부는 7세기경에 건국된 스리비자야 왕국의 영향하에 있었다.[144] 스리비자야는 교역의 요충지인 말라카 해협 주변의 많은 항구 도시 국가들을 지배했고,[145] 태국 남부 차야는 해상 교역을 지배하는 10세기부터 스리비자야("삼불제"[146])의 수도 중 하나였다고 여겨진다.[147] 나콘시탐마라트(리골)의 775년 비문에 의해, 8세기 후반에는 자바에 일어난 샤일렌드라 왕조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48]
3. 3. 북부 태국
『차마데비반사(Cāmadevivaṃsa)』에 따르면, 하리푼차이(현재의 람푼)는 은둔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하리푼차이는 북부 지역의 상좌부 불교 중심지였다. 900년경 찌앙센과 하리푼차이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져 몬족 군대가 찌앙센을 점령하고 왕은 도망쳤으나, 937년 프롬 왕자가 몬족으로부터 찌앙센을 되찾고 하리푼차이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21] 1293년에 란나의 왕 망라이에게 함락되었다.
4. 타이족의 이동
타이족은 타이-카다이어족에 속하는 민족으로, 중국 양쯔강 이남 지역이 그 기원으로 생각된다.[140][141] 황하 유역에서 세력을 확장한 한족의 압박으로, 대략 6세기-7세기에 중국 남부에서 주로 남쪽이나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142] 11세기-12세기가 되면 메콩강을 따라 대무앙이 성립되었다.[143]
5. [[수코타이 왕국]] (1238년-1438년)
1238년 스리 인드라디탸가 크메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수코타이 왕국을 건국했다. 람캄행 왕 시대에 영토를 확장하고 태국어 알파벳을 창제했다고 전해진다. 1316년 람캄행 왕 사후 쇠퇴하여 1365년 아유타야 왕국에 복속되었다. 수코타이 왕국은 란나와 동맹 관계를 맺었으나, 아유타야 왕국의 성장으로 갈등을 겪었다.[22]
6. [[아유타야 왕조]] (1351년-1767년)
1350년 짜오프라야강가에 오늘날 타이 왕국의 전신인 시암 왕국으로 아유타야 왕조가 세워졌다.[28] 라마티보디 1세는 소승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고, 힌두교 법률서와 타이의 전통 풍습을 바탕으로 다르마샤스트라라는 법률을 제정하여 타이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다르마샤스트라는 19세기까지 타이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을 시작으로 아유타야 왕국은 서양과 접촉을 가졌지만, 1800년대까지는 인도, 중국 등 이웃하는 나라들과의 관계가 우선이었다.
아유타야는 말레이 반도의 이슬람 국가들, 현재 인도의 안다만 해 항구들, 1591년-1594년 시암-캄보디아 전쟁의 캄보디아 앙코르 왕국, 그리고 태국 북부의 여러 국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지역에 걸쳐 영향력을 확장했다.
6. 1. 버마와의 전쟁
16세기 중반부터 아유타야 왕국은 따웅우 왕조의 미얀마의 반복적인 공격을 받았다. 1547년-1549년 버마-시암 전쟁은 버마의 침략과 아유타야 함락 시도 실패로 시작되었다. 1563년-1564년 버마-시암 전쟁에서 바인나웅 왕이 이끄는 버마군의 공격으로 1564년 마하 짝끄라팟 왕은 항복했다. 왕족은 바고로 끌려갔고, 왕의 차남인 마힌뜨라티랏이 괴뢰왕으로 임명되었다.[27][28] 1568년, 아버지인 마하 짝끄라팟이 불교 승려로 바고에서 돌아오자 마힌뜨라티랏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발생한 1568년-1570년 버마-시암 전쟁에서 1569년 아유타야가 함락되었고, 바인나웅은 마하탐마라차티랏을 괴뢰왕으로 삼았다.[28]1581년 바인나웅이 사망한 후, 나레수안 왕세자는 1584년 아유타야의 독립을 선포했다. 태국은 1584년부터 1593년까지 반복되는 버마의 침략을 막아냈고, 아유타야 네 번째 포위 공격 중 1593년에 나레수안 왕과 버마 왕위 계승자인 밍이 스와 사이의 코끼리 결투가 있었다. 이 결투에서 나레수안 왕이 밍이 스와를 죽였다. 1594년-1605년 버마-시암 전쟁은 태국이 버마를 공격한 전쟁으로, 1595년 탄인다리 지역의 못따마까지, 1602년에는 란나까지 점령했다. 나레수안은 1600년 따웅우까지 버마 본토를 침략했으나 격퇴당했다.
18세기에 아유타야 왕국의 권력은 점차 쇠퇴했고, 왕족과 관리들 사이의 싸움이 정치를 혼란스럽게 했다. 18세기는 아유타야 왕국의 마지막 시대였다. 란나를 장악하고 강력한 꼰바웅 왕조 아래 왕국을 통일한 바마인들은 1759년-1760년 버마-시암 전쟁에서 1750년대와 1760년대에 아유타야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마침내 1765년-1767년 버마-시암 전쟁에서 몇 달간의 포위 공격 끝에 버마군은 아유타야의 외곽과 내곽 성벽을 돌파하고, 도시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왕족은 도망쳤고, 아유타야의 마지막 왕인 엑카탓은 10일 후 숨어 지내다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7. [[톤부리 왕조]] (1767년-1782년)와 [[짜끄리 왕조]] 초기 (1782년-1851년)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딱신 장군이 타이 왕국을 재통일하여 톤부리에 새로운 수도를 정했다. 그러나 딱신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1782년 차크리 장군이 라마 1세로 즉위하며 짜끄리 왕조를 열었다. 같은 해, 라마 1세는 수도를 톤부리에서 짜오프라야강 건너편 방콕으로 옮겼다.[30]
라마 1세의 뒤를 이은 왕들은 1826년 영국이 이웃 버마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유럽 식민주의의 부상에 대응해야 했다.
타이는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 조약으로 최초로 동남아시아 지역 서양 열강의 등장을 인정했다. 1833년에는 미국과 시암(1939년 이전과 1945년-1949년에 사용되었던 타이의 옛 이름) 간에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후 몽꿋(라마 4세, 1851년-1868년)와 그의 아들 출라롱꼰(라마 5세, 1868년-1910년) 즉위 하에서 시암은 서양 열강과 친선 관계를 굳게 다졌다. 타이인들은 이들 왕들의 능력 있는 외교와 타이 정부의 근대화 개혁 덕분에 타이가 남아시아·동남아시아를 통틀어 식민지화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유일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여긴다. 이는 타이의 오늘날 국명인 프라텟 타이(1939년-1945년에는 비공식 국명으로 사용, 1949년 5월 11일 공식 국명으로 제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프라텟'은 '나라', '타이'는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
1909년의 영국-시암 조약으로 시암과 영국령 말라야 사이의 국경이 정해졌고, 이때 말라야의 토후국 파타니와 케다의 일부였던 파타니 주와 얄라 주, 나라티왓 주, 사툰 주가 타이령이 되었다.
7. 1. [[탁신]]에 의한 시암 통일 (1767-1782)

400년 이상 권력을 누린 아유타야 왕국은 1767년 버마 군대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수도가 불타고 영토가 분열되었다. 완전한 패배와 버마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시암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버마 지배에 대한 저항은 뛰어난 군사 지도자인 중국계 귀족 탁신이 이끌었다. 처음에는 동남쪽의 찬타부리를 근거지로 삼았던 그는 1년 만에 버마 점령군을 물리치고 차오프라야 강 서쪽 기슭, 바다에서 20km 떨어진 톤부리에 수도를 정하고 시암 국가를 재건했다. 1767년 그는 탁신왕(현재는 공식적으로 "탁신 대왕"으로 알려짐)으로 즉위했다.

아유타야 함락 후 중앙 권력의 부재로 국가는 와해되었다. 남동부 지방에서 군대를 조직한 탁신왕 외에도 다른 4명의 권력 주장자와 군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영향권을 확립했다. 1766년 버마에 대한 우회 공격에서 실패했던 보로마콧 왕의 아들 테프피핏 왕자는 피마이의 통치자로 자리 잡고 나콘랏차시마 또는 코랏을 포함한 동부 지방을 지배했다. 핏사눌록의 총독(이름은 루앙)은 독립을 선포하고 자신의 지배 영역을 나콘사완 지방까지 확장했다. 루안이라는 승려는 스스로 왕자를 자처하고 동료 승려들을 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사왕부리(우타라디트 주의 팡)에 자리 잡았다. 그는 이전에 아유타야에서 불교를 연구하여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보로마콧 왕으로부터 사왕부리의 최고 승려로 임명되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춤폰까지 북쪽으로 나콘 시탐마랏의 총독 대리였던 프라 팔라드가 독립을 선포하고 왕자의 지위에 올랐다.
톤부리에서 권력을 확고히 한 탁신왕은 옛 왕국을 재통일하기 위해 지역 라이벌들을 제압했다. 핏사눌록 총독에게 일시적으로 패한 후 그는 가장 약한 군벌을 먼저 물리치는 데 집중했다. 1768년 피마이의 테프피핏 왕자는 정복당하고 처형되었다.[29] 탁신의 조카 중 한 명인 차오 나라수리야웡세가 테프피핏을 대신하여 총독이 되었다. 왕에게 도전한 마지막 소위 통치자는 사왕부리 왕자(루안) 혹은 차오 프라 팡이었는데, 그는 핏사눌록 총독 사망 후 핏사눌록을 병합했었다. 탁신왕은 직접 원정을 이끌고 그를 제압했지만 왕자는 사라졌다. 파타니의 충성스러운 총독에게 사로잡힌 나콘 시탐마랏 왕자에 대해서는 그를 사면했을 뿐만 아니라 톤부리에 거주지를 제공하는 특혜를 베풀었다.[29]
톤부리 시대에 중국인 대규모 이민이 시암에 시작되었다. 중국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무역, 농업, 수공업이 번성했다. 그러나 최초의 중국인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그러나 나중에 스트레스와 여러 요인으로 인해 탁신왕은 정신 쇠약을 겪었다고 한다. 탁신을 권좌에서 제거하는 쿠데타 이후 차오프라야 짝리(후일 라마 1세)에 의해 안정이 회복되었다. 탁신은 1782년 4월 10일 수요일에 사형을 선고받았다.[30]
7. 2. [[라마 1세]]에 의한 복원 (1782-1809)
짜끄리 왕조를 연 라마 1세 (재위 1782년)는 몬족 출신 귀족 짜끄리 장군이었다.[30] 그는 수도를 톤부리에서 짜오프라야강 건너편 랏타나코신 섬(현재의 방콕)으로 옮겼다.라마 1세는 버마-시암 전쟁에서 버마를 격퇴하고, 란나를 속국으로 삼는 등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또한 삼인 법전을 성문화하고, 불교 경전을 재구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도 남겼다.
7. 3. [[라마 2세]]와 [[라마 3세]] 시대 (1809-1851)
라마 2세와 라마 3세의 통치 기간은 태국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문화, 예술,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라마 2세 시대에는 문화와 예술이 크게 발전했다. 특히 무용, 시, 연극 등이 절정에 달했다. 왓포 사원은 이 시기에 국가 최초의 대학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라마 3세 시대에는 대외 관계, 특히 영국과의 관계가 중요해졌다. 이 시기에 버니 조약이 체결되어 태국은 영국에게 상업적 양보를 하게 되었다. 한편, 캄보디아와 라오스 지역에서는 베트남의 영향력이 커졌고, 이로 인해 사이암-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8. 근대화와 개혁 (1851년-1910년)
몽꿋(라마 4세)과 쭐라롱껀(라마 5세) 시대에 프랑스와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 영토를 확장하며 시암을 포위했다. 서쪽에서는 영국이 인도, 버마와 말레이를 정복했고, 동쪽에서는 프랑스가 남베트남과 베트남을 정복하고 캄보디아를 "보호"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암은 이 지역에서 새로운 정복자들에게 치외법권을 상실했다.[36]
1855년 라마 4세는 영국과 통상무역에 관한 조약(보링 조약)을 체결했다.[282][288]
1893년 프랑스 위기 이후, 쭐라롱껀 왕은 서구 열강의 위협을 깨닫고 시암의 행정, 군사, 경제 및 사회에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개인적 지배와 의존 관계에 기반한 전통적인 봉건 구조에서 중앙 정부(국왕)에 간접적으로만 연결된 주변 지역을 가진 국가에서 확립된 국경과 현대적 정치 제도를 갖춘 중앙 집중 통치 국가로 발전했다.[36]
1904년 4월 8일 앙탕트 코르디알은 시암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을 종식시켰다. 시암의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권이 개략적으로 설명되었는데, 프랑스 인도차이나에 인접한 동부 지역은 프랑스 영역이 되고, 버마의 테나세림에 인접한 서부 지역은 영국 영역이 되었다. 영국은 메남 강 유역 동쪽에 프랑스의 세력권을 인정했고, 그 대가로 프랑스는 메남 강 유역 서쪽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양측 모두 시암 영토를 병합하려는 생각은 부인했다.[37]
1910년 쭐라롱껀 왕이 사망했을 때 시암은 오늘날 태국의 국경을 달성했다.
8. 1. 서구 식민주의와 속국 할양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 조약으로 타이는 최초로 동남아시아 지역 서양 열강의 등장을 인정했다.[276][277] 1833년에는 미국과도 외교 관계를 시작했다.[278] 몽꿋(라마 4세, 1851년-1868년)와 그의 아들 출라롱꼰(라마 5세, 1868년-1910년) 즉위 하에서 시암은 서양 열강과 친선 관계를 굳게 다졌다. 타이인들은 이들 왕들의 능력 있는 외교력과 타이 정부의 근대화 개혁 덕분에 타이가 남아시아·동남아시아를 통틀어 식민지화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유일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여긴다.19세기, 태국의 라마 1세 이후 통치자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열강의 힘을 인식하게 된 것은, 이웃 나라인 버마(꼰바운 왕조)가 1824년부터의 제1차 영-버마 전쟁에 의해 영국에 패배하고 일부 영토를 잃는 등 유럽 열강의 위협에 노출된 것 때문이다.[274][275]
1909년 영국-시암 조약으로 시암과 영국령 말라야 사이의 국경이 정해졌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었다. 이때 말라야의 토후국 파타니와 케다의 일부였던 파타니 주와 얄라 주, 나라티왓 주, 사툰 주가 타이령이 되었다.
9. 국가 형성 (1910년-1932년)
1912년 궁궐 반란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군주제의 지위가 이미 도전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11][312] 라마 6세는 왕 직속 의용부대인 국토방위대 '수아파'(Wild Tiger Corps|야호대영어)를 창설했지만,[310] 이에 반발한 군부 청년들은 1912년 절대 군주제에 반대하고 입헌주의를 요구하는 쿠데타를 계획했다.[311]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100명 이상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다.[312]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태국은 중립을 선언하고 상황을 주시했다.[314] 1917년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국이 유리해지자, 라마 6세는 1917년 7월 22일 연합국 측에 서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했다.[314] 같은 해 9월 28일, 태국은 국기를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의 국기 색과 같은 현재의 삼색기로 변경했다.[314][315]
태국은 유럽에 자동차 수송 부대와 비행 부대를 포함한 1,200명이 넘는 원정군(Siamese Expeditionary Forces|태국 원정군영어)을 파병했다.[316][317] 이 부대 중 일부는 프랑스군과 함께 독일 전선에 배치되기도 했다.[316][317]
10. 입헌군주제 초기 (1932년-1945년)
1932년 입헌 혁명으로 절대 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다. 6월 27일 임시 헌법 제정으로 왕과 왕족은 존속하지만, 정치 체제는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바뀌었다.[326][327] 이 혁명은 1927년 유럽 유학 중이던 학생 7명이 결성한 인민당이 주도했다.[323][324] 혁명 직후인 6월 28일, 인민대표의회가 개회되었으나, 단원제였으며 모든 의원이 인민당 임명 의원이었다.[328][329] 같은 날, 왕실과의 중재자로 비 인민당원 프라야 마노파콘이 총리로 선출되었다.[327][330] 12월 10일 새 헌법이 공포되었지만, 이 헌법 또한 10년 후 선거까지 인민당 단독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329][331]
1933년 인민당 내 급진파 정책안으로 온건파와 결렬이 발생하며 정국이 불안정해졌다. 6월 20일 일부 급진파와 인민당 계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332] 프라야 파혼이 총리로 임명되었다.[333][334] 10월 11일에는 보워라뎃 왕자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실패했고, 반란을 주도한 왕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망명했다.[335] 라마 7세는 인민당 정부에 반발하여 1935년 3월, 9세 조카 라마 8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336]
이후, 인민당 초창기 구성원이자[323] 1933년 쿠데타 중심 인물이었던[333] 쁘렉 피분송크람이 실권을 장악하고 총리가 되자, 1939년 6월 국호를 "샴"에서 "태국"으로 변경했다.[337][338]
10. 1. [[플렉 피분송크람]]의 독재
1938년 플렉 피분송크람이 총리가 되면서 군부의 지배가 더욱 공고해졌다.[337] 그는 인민당의 초창기 구성원이었고,[323] 1933년 쿠데타의 중심 인물이었다.[333] 1939년 6월, 국호를 "샴"에서 "태국"(''프라텟 타이'')으로 변경했다.[337][338]10. 2.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940년 9월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하자, 플렉 피분송크람은 이를 기회로 삼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국경 분쟁을 일으켰다.[339] 프랑스가 태국의 요구를 거부하자 11월 28일 태국 측을 공습하여 태국-프랑스 인도차이나 분쟁이 발발했다. 1941년 1월에는 프랑스의 우세가 보였으나, 태국은 일본의 중재로 5월 9일 프랑스와 동경 조약을 체결하고, 1904년과 1907년에 태국이 할양했던 영토 대부분을 자국 영토로 병합하게 되었다.[340][341]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영국령 말레이의 코타바루와 태국 남부의 손끌라(싱고라)와 팟타니(파타니)에 상륙했다. 태국군은 저항을 시작했으나,[342] 같은 날 태국은 일본군의 통과를 허용했다.[343] 12월 11일 일본과 협정을 맺은 후, 21일에는 공식적으로 일태 공수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다.[344] 1942년 1월 25일, 플렉 피분송크람은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하고, 태국은 추축국으로 참전하게 되었다.[345]
영국령 버마에 일본군이 침공하자, 태국은 1942년 5월 북부에서 진군하여 버마 동부의 샨 주를 점령했다.[346] 또한 일본군은 태국의 논프라두크와 버마의 탄뷰자야를 잇는 415km의 태국-미얀마 철도 건설을 1942년 6월에 착공하여 1943년 10월에 개통시켰다.[347][348]
한편, 당시 주미 대사[350] 세니 프라모트는 1942년 3월, 미국에서 태국인 외교관과 유학생 등과 함께 반일 운동인 자유 태국(Free Thai)을 조직했다. 영국은 자유 태국 지원자를 영국군으로 받아들여 특수 훈련을 시켜 정보 기관 요원을 양성했다.[351] 또한 태국 국내에서도 프리디 파놈용이 반일 조직을 설립하여 참여하고, 연합국 측과 연락을 취했다.[352] 1944년 7월, 플렉 피분송크람 내각이 총사퇴하고 쿠앙 아파이원의 신내각이 성립되었다.
11. 냉전 시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6년 워싱턴 협정을 통해 태국은 프랑스-태국 전쟁 결과 합병했던 캄보디아와 라오스 영토를 반환했다. 같은 해 아난다 마히돌 국왕이 의문의 죽음을 맞고,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 (라마 9세) 국왕이 즉위했다. 라마 9세는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368]
1947년 군부 쿠데타로 플렉 피분송크람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1949년 프리디와 해군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자유 태국은 막을 내렸다.[377][378] 피분송크람은 1951년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와 정당을 폐지했다.
피분송크람 정권 이후, 살릿 타나라자타이 쿠데타를 일으켜 타놈 키티카촌 정권이 수립되었다. 1958년 살릿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군사정권을 세웠다.[384][385] 1963년 살릿이 사망하자 타놈 키티카촌이 재등장했고, 육군 대장이었던 프라파트와 함께 “타놈=프라파트 체제”라 불리는 장기 군사정권(1963-1973년)을 수립했다.[389][390]
태국은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392]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며 경제적으로 성장했다.[396] 파타야 등의 리조트 개발도 진행되었다.[397] 1967년 태국은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설립을 주도했다.[398]
11. 1. 미국의 영향력 증대
1948년 피분 송크람 정부는 태국이 냉전 시대에 반공주의적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선포했다.[375][376] 미국은 태국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맞서는 중요한 거점으로 여기고, 태국 정부를 지원했다.11. 2. 인도차이나 전쟁과 공산주의 반란
사릿과 타놈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태국은 1954년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가 결성되면서 공식적으로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52] 인도차이나 전쟁이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지는 동안 태국은 중립을 유지했지만, 전쟁이 미국과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전쟁이 되자 미국 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1년 미국과 비밀 협정을 체결하고, 베트남 전쟁에 병력을 파병했으며,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동부 지역의 태국 공군 기지를 사용하도록 허용했다.[52] 베트남은 태국 공산당의 반란을 지원함으로써 보복했는데, 이들은 태국 북부와 북동부, 때로는 남부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52] 전후 시대에 태국은 이웃 국가의 공산 혁명으로부터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52] 미 제7 및 제13 공군은 우돈 공군 기지에 본부를 두었다.[52]1961년부터 1965년까지 반군은 17건의 정치 암살을 저질렀다. 그들은 1965년 여름 무장 세력이 태국 보안군과 교전하기 시작할 때까지 대규모 게릴라전을 피했다. 1965년 하반기에는 25건의 폭력 사건이 더 발생했고,[56] 1965년 11월부터 태국 공산당 반군은 더 정교한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66년 반란은 태국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지만, 반란 관련 사건의 90%는 동북부에서 발생했다.[56] 1966년 1월 14일, 태국 애국전선 대변인은 태국에서 "인민 전쟁"을 시작할 것을 촉구했다. 이 성명서는 갈등의 폭력성을 고조시켰다.[57] 반란은 1983년에야 종식되었다.[58]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면서 동남아시아는 냉전 시대에 접어들었다. 베트남(북베트남), 라오스(파테트·라오), 미얀마(미얀마식 사회주의), 캄보디아(크메르루주) 등 주변국의 공산주의 혁명의 위협에 직면했다.[391] 또한 국내에서도 태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391], 태국은 공산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하며 미국의 지원을 받아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의 일원이 되었다.[392]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국 편에 서서 남베트남에 병력을 파병(퀸 코브라, Queen's Cobras영어, 후에 흑표 사단[393], Black Panthers영어)했고, 북베트남 폭격(북폭)을 위한 지원으로 기지 설립도 허가했다.[394] 1966년 4월에는 하노이를 향해 B-52 폭격기가 출격했다.[395]
11. 3. 1973년 민주화 운동
1973년 탐마삿 대학교에서 (en)Ratchadamnoen Avenue까지 40만 명이 넘는 데모대가 집결하여 경찰 및 군대와 충돌하면서 발포 사건이 발생, 사망자 77명, 부상자 444명에 이르는 큰 참사가 발생했다. "10월 혁명"이라고도 불리는[399] 피의 일요일 사건(10월 14일 정변[400][401], 10·14 정변[402])으로 타놈 키티카촌 정권이 붕괴되었고, 라마 9세 국왕에 의해 탐마삿 대학교 총장이었던 싼야 탐마삭이 임시 총리로 임명되었다.[403]
12. 민주화와 좌절 (1973년-2001년)
1973년 봉기 이후 타이는 군사 정권에서 민간 정부로 전환하는 어렵고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1976년 탐마삿 대학교 학살 이후 군사 정권이 다시 들어섰다.[414][415]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프렘 틴술라논은 의회 정치를 존중하고 태국 공산당 세력과도 협력하는 등 민주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두 차례의 군부 쿠데타 시도가 있었지만,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419][420]
그러나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1980년 6월에는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태국과 라오스 국경 경비대 간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421] 1984년에는 사이냐부리현과 웃타라디트현 사이의 국경 분쟁(삼촌 사건)이 발생했으나, 태국군의 철수로 일단락되었다. 1987년 12월에는 다시 태국-라오스 국경 부근에서 양국 군대가 충돌했지만, 1988년 2월 평화 협상과 휴전 협정으로 이어졌다.[422]
13. 2001년 이후의 정치적 갈등
2001년 탁신 친나왓 총리가 이끄는 타이 락 타이당이 집권했다. 2006년 군부 쿠데타로 탁신 친나왓 정권이 붕괴되고, 수라윳 쭐라논이 임시 총리로 임명되었다.[453][454][455][456] 이후 태국에서는 시위와 폭동이 잇따르며 정치 혼란이 계속되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연합(PAD)과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통합전선(UDD)의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2010년에는 탁신의 부정 축재 몰수 판결에 반발한 UDD의 시위가 격화되었다.
- 3월 14일: UDD가 방콕의 대로를 점거했다.
- 4월 3일: UDD가 도심 상업 지역 일대를 점거했다.
- 4월 10일: 시위대와 치안 부대의 충돌로 일본인 사진 기자를 포함하여 25명이 사망하고 8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암흑의 토요일)[467]
- 4월 22일: 포탄 공격으로 일반 시민 1명이 사망하고 100명 가까이 부상당했다.[468]
- 5월 13일: UDD 간부 1명이 저격당했다.
- 5월 19일: 치안 부대의 진입으로 UDD는 시위 해산을 선언했다.
이 기간 동안 90명 이상이 사망하고 2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469]
2013년-2014년에는 잉락 친나왓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2014년 군부 쿠데타로 쁘라윳 짠오차가 총리로 취임했다.
13. 1. [[탁신 친나왓]] 시대 (2001-2006)
2001년 아시아 금융 위기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 가운데, 새로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1998년에 타이 락 타이당(ไทยรักไทย)을 창당한 중국계 태국인 탁신 친나왓(재임 2001-2006년)의 신정부가[445] 2001년 2월에 출범했다.[446] 사업가 출신인 탁신은 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국가는 기업이며, 총리는 국가의 최고경영자(CEO)이다"라고 선언하며 권력을 집중하여 강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정치를 운영했다. 그러나 여러 경제 정책의 성과 등에 힘입어 2005년 2월 총선거에서 타이 락 타이당(ไทยรักไทย)이 압승을 거두었다.[447][448]13. 2. 2006년 쿠데타
2001년 총선거에서 탁신 친나왓이 이끄는 태국국민당이 승리하여 탁신 친나왓(재임 2001-2006년)의 신정부가 출범했다.[445]13. 3. 2008년-2010년 정치 위기
2008년 2월, 사막 숭타라웻 내각(2008년 2월-9월)이 구성되자,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연합(PAD)은 반탁신 운동을 재개했다. 8월 26일, PAD는 사막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총리府 등을 점거했다.[457][458] 이에 맞서 탁신 지지파인 반독재민주전선(UDD)은 "붉은색 셔츠"를 입고 시위를 벌였으며,[459] 9월 2일에는 양측의 충돌로 정권 지지파 1명이 사망했다.[460]9월 9일, 태국 헌법재판소는 사막 숭타라웻 총리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판결을 내려 총리직을 박탈했고, 탁신의 매제인 솜차이 웡사왓(2008년 9-12월)이 총리직을 승계했다. 그러나 10월 7일, PAD는 국회를 포위하여 의원들의 입장을 막았고, 경찰은 시위대에 최루탄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2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1월 25일, PAD는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벌였다. 결국 12월 2일, 태국 헌법재판소는 여당 3당(국민의 힘당, 국민당, 중도주의당)에 해산을 명하고 솜차이 등에게 실직을 명령함으로써 사태를 종결시켰다.[461][462]
솜차이 정부 붕괴 후, 민주당의 아피싯 웨차치와(2008년~2011년)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UDD가 아피싯 총리의 시정연설을 방해했고,[463] 2009년 초부터 반정부 집회를 반복적으로 개최했다.[464] 4월 11일에는 파타야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동아시아정상회의 회의장에 난입했다.[465] 이후 방콕에서도 시위대가 폭동을 일으켜 군이 진압에 나섰고, 1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466]
13. 4. 2013년-2014년 정치 위기
2013년 11월, 탁신 친나왓의 사면을 가능하게 하는 타이 컨트리뷰션당 의원들의 법안 강행 처리 시도에 대해 민주당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반탁신 세력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거세졌다.[477] 법안은 여론의 반발로 부결되었지만, 수텝 투악수반은 아피싯 웻차치와 정부의 부총리 경력을 바탕으로 잉락 친나왓 정부 타도와 탁신 체제 종식을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이어갔다.[478][479] 그는 재무부 점거를 비롯해 정부 기능을 마비시키는 과격한 시위를 강행했다. 2013년 12월 9일, 잉락 총리는 조기 해산과 총선을 발표했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고, 25만 명이 총리 관저 주변에 집결했다. 12월 26일에는 총선 방해를 시도하는 시위대와의 충돌로 2명이 사망하고 15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2014년 1월 13일, 시위대는 "방콕 봉쇄"(Bangkok Shutdown)라는 이름으로 방콕 도심 주요 7개 교차로를 점거했다.[480] 2월 2일 강행된 총선은 각지 시위대의 방해로 사실상 무효화되었고, 헌법재판소는 3월 21일 이 총선의 무효를 결정했다.[481]13. 5. 2014년 쿠데타
2014년 5월 7일, 잉락 친나왓은 정부 고위직 인사에 대한 위헌 판결로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니왓탐론 붕손파이산이 총리 대행을 맡았다.[482][483] 그러나 5월 22일, 군부는 헌법 개정 이후 19번째 쿠데타를 일으켰다.[484][485] 군부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한 후, 8월에는 육군 사령관 쁘라윳 짠오차(재임 2014년~)가 총리에 취임하였다.[486]13. 6. 군사 정부 (2014-2019)
2014년 쿠데타 이후 쁘라윳 짠오차가 이끄는 군사 정부는 새로운 선거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선거를 실시하기 전에 새 헌법을 제정하기를 원했다.[61] 군사 정부는 250명의 입법부를 임명했는데, 일부 비판가들은 이를 "장군들의 의회"라고 불렀고, 다른 이들은 빈곤한 다수의 대표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62][63]2016년 새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헌법이 승인되었다.[65]
13. 7. [[와치랄롱꼰]] 시대 (2016년-현재)
2016년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서거하고, 와치랄롱꼰이 라마 10세로 즉위하였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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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のプミポン国王死去 在位70年、88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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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のワチラロンコン皇太子、新国王に即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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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新憲法ようやく施行 修正経て国王の権限強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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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新政権、7月中旬にも発足 軍政の影消さず民政移管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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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新政権発足 5年ぶり民政復帰 異例の19党連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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