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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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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만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등장하여 기원후 4세기까지 로마와 그리스 역사에 기록된 민족 집단이다. 스키리족, 킴브리족, 테우토니족 등이 게르만족으로 분류되었으며, 킴브리 전쟁을 통해 로마와 충돌했다. 기원전 1세기에는 켈트족을 제치고 남부 독일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아리오비스투스와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을 거치며 라인강을 경계로 로마와 대립했다. 이후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 롬바르드 왕국, 서고트 왕국, 앵글로색슨족 등 다양한 세력으로 분화되었으며, 바이킹 시대에는 노르만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부에서 기원하여 남동쪽으로 이동했고,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게르만어를 사용했다. 초기 로마 제국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아르미니우스의 테우토부르크 숲 전투 패배 이후 라틴 문화의 전파가 억제되었다. 3세기에는 3세기 위기를 겪으며 게르만족의 침입이 격화되었고, 4세기 민족 대이동을 통해 서로마 제국 멸망에 영향을 미쳤다. 게르만족은 정착 농경과 목축을 병행했으며, 자유민, 반자유민, 노예로 계층이 나뉘었다. 게르만 신앙은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는 다신교였으며, 아리우스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19세기 이후 언어학과 고고학을 통해 게르만 민족에 대한 정의가 발전했고,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독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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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민족명게르만족
기원 발상스칸디나비아반도
민족 계통인도유럽인
언어게르만어파
종교게르만 종교 → 기독교
역사
기원북유럽 청동기 시대의 야스토르프 문화에서 유래
철기 시대에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북독일에서 형성됨
문화 및 사회
특징전사 사회
농업과 목축 기반의 경제
사회 구조가부장적 씨족 사회
부족 단위의 연합체
거주 지역라인강다뉴브강 사이의 지역
북해와 발트해 연안
민족 분파
주요 분파북해 게르만족 (잉가에보네스족)
엘베 게르만족 (헤르미노네스족)
베저-라인 게르만족 (이스타에보네스족)
오데르강 하구
비엘바르크 문화 (비스와강 하구)
프셰보르스크 문화
고고학적 문화
관련 문화야스토르프 문화
비엘바르크 문화
프셰보르스크 문화
기타
로마자 표기Germanen (독일어), Germani (라틴어)

2. 역사

기원전 80년경 그리스의 역사가 포세이도니오스갈리아 지방에 침입한 부족에 대해 기술하면서 '게르만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기록은 후세의 고대 로마 역사가들의 인용을 통해 전해진다.[42]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떠나 「갈리아 전기」에서 게르만인에 대해 기록하면서 이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9년 테우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 연합군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로마는 게르마니아 중앙부 진출을 포기하고, 라틴 문화의 확산도 억제되었다.[1] 98년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저술했는데, 이는 현재까지 게르만족 연구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지만, 일부 잘못된 기술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세기경에는 가장 오래된 룬 문자가 만들어졌다. 375년 훈족의 공격을 피해 서고트족이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 제국 영내로 들어오면서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 제국군이 패배하고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는 등 게르만족의 이동은 큰 혼란을 야기했다. 이후 게르만족은 각지에 정착하여 여러 국가를 세웠다.

415년 서고트족은 서고트 왕국을 건국하여 남갈리아와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다. 451년 카탈라우누스 전투에서 서로마 제국, 서고트 왕국, 알란 왕국의 연합군은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을 격파하여 훈족의 갈리아 정복을 막았다.

5세기에는 게르만 부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과 유트족이 그레이트브리튼섬(현재의 영국)에 침입하여 칠왕국을 세웠다. 이 사건은 아더왕 전설의 원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476년 서로마 제국은 헤룰족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황제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보내는 대신 이탈리아 총독의 지위를 얻었다. 이후 이탈리아 왕위는 동고트족, 롬바르드족을 거쳐 프랑크족에게 통합되었다.

481년 클로비스는 프랑크족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그는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옛 서로마 주민과의 화합을 추구했다.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이슬람 세력을 격퇴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시대(재위 768년-814년)는 프랑크 왕국의 최전성기였다. 샤를마뉴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 문명"을 형성하여 지중해 문명과의 분리를 시도했다.

8세기에서 9세기경에는 영문학 최고(最古)의 작품 중 하나인 서사시 『베오울프』가 성립되어 고대 게르마니아의 풍속을 전하고 있다.

843년 프랑크 왕국은 분할 상속으로 인해 세 나라로 분열되었고, 이후 서프랑크 왕국동프랑크 왕국으로 재편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왕국의, 동프랑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8세기 후반부터 11세기까지 노르만인덴마크인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들은 바이킹으로 알려져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민족과의 혼혈설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9세기 후반 바랴그는 키예프 루스 건국에 관여했다. 11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에 영토를 가지고 있던 노르만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노르망 왕조를 열었다. (노르만 정복)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아이슬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국가를 형성하며 스칸디나비아 3국, 즉 왕국을 이루었다.

1130년 노르만계 용병단은 아랍인을 몰아내고 남이탈리아를 정복하여 시칠리아 왕국(호엔슈타우펜 왕조)을 세웠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사가가 성립되어 전승을 기록했다. 노르웨이에서도 사가가 만들어졌다.

2. 1. 기원

북유럽 청동기 시대의 고고학적, 언어학적 증거에 따르면 스칸디나비아 남부 지역에서 오늘날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까지의 영역에 거주하던 여러 게르만 민족들 사이에 공통적인 물질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42] 함부르크 남쪽 베센슈테트(Wessenstedt) 근처의 철기시대 유물들도 이러한 문화의 흔적을 보여준다.[43] 기원전 850년에서 760년 사이, 그리고 기원전 650년에 스칸디나비아에서 일어난 급격한 기후변화는 이들이 독일 북동부 발트해 연안과 비스와강 유역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44] 또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경지가 고갈되어 이들은 남서쪽 방향의 해안가 범람원으로 이동하여 정착했다.[45]

2. 2. 초기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지역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으나, 갈리아 전쟁 때보다 더 길고 많은 세금이 지출되어 전쟁 종료를 기념할 성대한 개선식을 수십 년이 흘러도 못하였다. 내부에서는 갈리아 전쟁 때와 비교되어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1] 9년 게르만족 출신으로 로마군에 복무하며 로마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 특히 군사적인 지식을 쌓아두었던 아르미니우스가 무능하고 군사적 재능마저도 없던 바루스의 점령군을 토이토부르크 숲으로 유인해 대패시켰다.[1] 이후에도 게르만 탈환은 계속되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치세 말년, 골치 아픈 게르만 문제로 인해 라인강, 도나우강과 주요 방어 거점을 중심으로 국경 정책을 펴고 긴 리메스와 방어군을 배치하면서 방어적인 태도로 변모했다.[1] 게르마니쿠스와 같은 명장들이 죽는 악재가 겹쳤다.[1] 결국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오히려 로마가 정복당한다.[1]

2. 3. 로마 제국과의 갈등

기원후 2세기,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같은 게르만 민족이 도나우강 유역의 로마 국경 지대로 이주하면서 마르코만니 전쟁이 발발했다.[46] 3세기에는 49년 동안 18명의 황제가 즉위하며 로마 제국의 내정이 불안정해졌고, 이 시기에 제국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했다.[47]

166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시대에 다뉴브 강 북쪽의 여러 민족들이 대규모 침입을 감행하면서 마르코만니 전쟁이 시작되었다.[46] 168년 (안토니누스 역병 기간) 마르코만니, 콰디, 사르마티아 이아지게스 등의 바르바리아 군대가 이탈리아를 공격하여 밀고 들어왔다.[46] 이들은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격하여 오피테르기움(오데르조)를 파괴하고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46] 로마는 로마군의 승리, 일부 민족의 로마 영토 이주, 다른 민족과의 동맹 체결을 통해 180년까지 전쟁을 종식시켰다.[4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후계자 코모두스는 다뉴브 강 북쪽에서 정복한 영토를 영구적으로 점령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 후 수십 년 동안 ''리메스''의 방어가 강화되었다.[46] 로마는 마르코만니와 콰디의 왕을 선택할 권리를 재확인했고, 코모두스는 로마 백부장이 없는 한 그들이 집회를 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46]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로마 국경 지역에는 새로운 이름을 가진 민족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아마도 더 작은 집단들이 합쳐진 결과일 것이다.[46] 이러한 새로운 연합체 또는 민족들은 로마 제국의 국경과 접해 있었다.[46] 이전 시대의 많은 민족 이름들이 사라졌다.[46] 알레만니는 라인 강 상류 지역에 나타났고, 3세기부터 로마 자료에 언급된다.[46] 고트족은 다뉴브 강 하류 지역에서 언급되기 시작하며, 238년 히스트리아 도시를 공격했다.[46] 프랑크족은 라인 강과 베저 강 사이의 영토를 점령한 것으로 처음 언급된다.[46] 롬바르드족은 중앙 엘베 강으로 권력 중심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46] 알레만니, 고트족, 프랑크족과 같은 집단은 통일된 정치체가 아니었으며, 서로 싸우는 여러 개의 느슨하게 연합된 집단을 형성했고, 그중 일부는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했다.[46] 로마는 또한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해적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라틴어 용어인 삭슨족의 해상 공격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습격에 대처하기 위해 영국 해협 양쪽에 삭슨 해안이라는 방어 체계가 구축되었다.[46]

250년 이후부터 고트족은 "로마의 북부 국경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46] 250년 고트족 왕 크니바가 바스타르나이족, 카르피족, 반달족, 타이팔리와 함께 제국으로 침입하여 필리포폴리스를 포위했다. 그는 그곳에서의 승리 후 아브리투스 전투의 습지대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전투에서 로마 황제 데키우스가 목숨을 잃었다.[46] 253/254년에 테살로니카와 아마도 트라키아에 이르는 추가 공격이 발생했다.[46] 267/268년에는 헤룰리족이 주도한 대규모 습격이 있었고, 269/270년에는 고트족과 헤룰리족의 혼합 집단이 습격했다. 고트족의 공격은 270년 이후 고트족 왕 칸나바우데스가 사망한 로마의 승리 이후 갑자기 중단되었다.[46]

로마의 ''리메스''는 3세기 위기(235~284) 기간 중 259/260년에 대부분 붕괴되었고,[46] 게르만족의 습격은 이탈리아 북부까지 침투했다.[46]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상류의 ''리메스''는 270년대에 다시 통제되었고, 300년까지 로마는 위기 기간 중 포기했던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했다.[46] 3세기 후반부터 로마군은 게르만 민족 출신의 병사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고, 일부는 로마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활동했다.[46] 4세기에 로마와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사이의 라인 강 국경을 따라 벌어진 전투는 대부분 약탈 전쟁으로 이루어졌으며, 대규모 전투는 피했다.[46] 로마는 일반적으로 배신, 납치, 암살을 이용하여 바르바리아인들 사이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을 막거나, 그들을 공격하도록 다른 부족들에게 돈을 주거나, 내부 경쟁자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따랐다.[46]

2. 4. 게르만족의 대이동


  • -* : 이동 전 기원전 750년
  • : 기원전 500년
  • : 기원전 250년
  • :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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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년, 훈족의 압력으로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이 남하하여 로마 제국 영토를 위협한 것이 대이동의 시작으로 여겨진다.[35] 이후 많은 게르마니아 출신 민족들이 반복적으로 남하하여 로마 제국 영토에 침입했다. 이동은 침략적인 경우도 있었고 평화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그 원인으로는 타민족의 압력, 기후 변화, 그리고 그것에 따른 경제 구조의 변화가 거론된다.

이후 곧 서로마 제국에서 서로마 황제에 의한 지배 체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서로마 황제 폐지와 민족 대이동과의 관련성이 고려된다. 훈족의 침공을 막은 것이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여 용병이 된 게르만족이었던 것처럼, 제정 말기 서로마 제국은 실질적으로 게르만계 장군에 의해 지탱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로마인들이 그리스인(동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르만족의 힘을 빌려 서로마 황제를 폐지한 사정 등을 고려하면, 오늘날 유럽 세계의 성립에 있어서 그 의의는 크다고 생각된다.

최근 연구에서는 서로마 황제 폐지 이후 서유럽에서 서로마 제국의 연속성이 주목받고 있다. 서로마 제국에 발생한 게르만 왕국의 주민과 왕궁 고관은 대부분 황제 통치 시대부터의 로마계 주민 그대로였으며, 예외적으로 게르만화가 진행되었다고 여겨지는 프랑크 왕국조차 주민의 8할이 로마인이었다. 프랑크 왕국에서 궁정 인사에 있어 로마인의 비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은 8세기 말 카롤루스 대제 시대에 들어서서야 일어난 일이다.

고트족 등 동쪽의 게르만족은 로마인 등과 동화되었지만, 후발의 서쪽 게르만족은 로마화되면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독일, 영국 등의 국가의 근간을 이루었다. 북방 게르만족(노르만인 또는 바이킹)은 대이동 시대에는 덴마크인이 유틀란트 반도까지 진출한 정도였다.

이후에도 유럽에는 슬라브족이나 마자르인(헝가리인)과 같은 민족이 밀려들어 현재 유럽의 여러 민족이 형성되어 간다.

3. 용어

라틴어 Germanila의 어원은 라틴어 Germaniala와 영어 'Germanic'의 어원이기도 하지만, 여러 제안에도 불구하고 알려져 있지 않다. 어원이 되는 언어조차도 논란의 대상이며, 게르만어, 켈트어, 라틴어 및 일리리아어 기원설이 제기되었다. 어떤 민족 집단이 스스로를 ''Germani''라고 불렀다는 증거는 불확실하다.

4. 주요 게르만 부족

부족명비고
고트족나중에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으로 분화, 고틀란드[32]
노르드족[32]
반달족[32]
부르군트족[32]
알라마니족[32]
앵글족[32]
유트족(독어: Jüten. 영어: Jutes)[32]
튜튼족[32]
프랑크족[32]
색슨족[32]
프리센족[32]
수에비족[32]
암브로네스족(독어: Ambronen. 영어: Ambrones)[32]
바바리아족(독어: Bayern. 영어: Bavarii)[32]
바타비아족(독어: Bataver. 영어: Batavi)[32]
하루데스족(Harudes)[32]
마르코만니족[32]
투리보키족(Tribocci)[32]
밤기오네스족( Vangiones)[32]
네메테스족(Nemetes)[32]
콰디족(Quadi)[32]
루기족(Rugii)[32]
스웨오네스족(Sueones)스웨덴[32]


5. 언어

모든 게르만어족 언어는 기원전 45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유럽어족에서 유래한다. 게르만어족의 조상어는 원게르만어 또는 공통 게르만어로 불리며, 상호 이해 가능한 방언들의 집단을 나타냈을 가능성이 높다.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기원전 5세기경에 게르만 원어가 성립되었고, 그 언어가 서게르만어군, 동게르만어군, 북게르만어군으로 분화되었다.

6. 사회와 정치

카이사르(Caesar)의 기원전 50년경 저술인 『갈리아 전기(De Bello Gallico)』와 타키투스(Tacitus)의 기원후 100년경 저술인 『게르마니아(Germania)』에 따르면, 게르만인들은 정착 농경과 목축을 병행했다.[31]

게르만 사회는 자유민, 반자유민, 노예로 구성된 계층 사회였다.[31] 자유민 중 상층부는 정치적 특권을 가진 귀족층을 형성했다.[31]

게르만인들은 로마인들이 키위타스(civitas)라고 부르는 정치 단위로 나뉘어 생활했다. 각 키위타스는 다시 파르구스(pagus)라고 불리는 촌락 공동체로 구성되었다.[31] 키위타스보다 더 큰 단위는 게누스(gens)라고 불리는 부족이었지만, 타키투스 시대에는 종교 의식 단체의 성격이 강했다.[31]

일부 키위타스는 세습 왕정을 통해 통치되었고, 다른 키위타스는 민회에서 선출된 프린켑스(princeps)가 통치했다. 게르만 사회에서는 정치 권력의 집중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31]

7. 종교

게르만 신앙(Germanic paganism)은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전통적이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종교를 가리킨다.[23] 이는 게르만어 사용 유럽 전역에 걸쳐 균일한 종교 체계를 형성하지 않았지만, 지역, 민족, 시대에 따라 다양했다. 많은 접촉 지역(예: 라인란트와 스칸디나비아 동부 및 북부)에서는 슬라브족, 켈트족, 그리고 핀족과 같은 이웃 종교와 유사했다.[24]

이웃 민족과 다른 역사적으로 관련된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게르만 민족은 수많은 토착 신들을 숭배했다. 이러한 신들은 게르만어를 사용하는 민족에 의해 저술되거나 그들에 대해 쓰여진 문학, 룬 문자 비문, 당대 기록, 그리고 기독교화 이후의 민속 전승 전반에 걸쳐 증명된다. 예를 들어, 두 개의 메르제부르크 주문 중 두 번째(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본의 고대 고지 독일어의 두운시 두 예)는 보덴, 발더, 신트군트, 순나, 프리야, 볼라의 여섯 신을 언급한다.[25]

'신트군트'를 제외하고, 이러한 신들에 대한 제안된 동족어는 고대 영어고대 노르드어와 같은 다른 게르만어에서 발견된다. 비교 방법을 통해, 어원학자들은 초기 게르만 신화에서 이러한 이름들의 초기 게르만 형태를 재구성하고 제안할 수 있다.

고대 고지 독일어고대 노르드어고대 영어원시 게르만어 재구성주석
WuotanÓðinnWōden*Wōđanaz고대 영어 나인 허브 주문에서 치유 마법과 유사하게 연관된 신과 고대 노르드어 기록 전반에 걸친 특정한 형태의 마법. 이 신은 *Frijjō (아래 참조)의 확장과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BalderBaldrBældæg*Balđraz고대 노르드어 텍스트에서 신에 대한 유일한 묘사가 나오는데, 발드르는 오딘 신의 아들이며 아름다움과 빛과 관련이 있다.
SunneSólSigel*Sowelō ~ *Sōel고유 명사 태양과 동일한 신명. 여신이자 의인화된 태양.
VollaFulla증명되지 않음*Fullōn여신 프리야(아래 참조)의 확장과 관련된 여신. 고대 노르드어 기록은 풀라를 프리그 여신의 시녀로 언급하는 반면, 두 번째 메르제부르크 주문은 볼라를 프리야의 여동생으로 언급한다.
FriiaFriggFrīg*Frijjō고대 고지 독일어와 고대 노르드어 기록 모두에서 볼라/풀라 여신과 관련이 있으며, 고대 노르드어와 롬바르드어 기록 모두에서 오딘 신(위 참조)과도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주문의 마법 공식 구조는 이 증명 이전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기원전 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타르바베다에서 발견되는 베다 시대 인도에서 처음 알려졌다.[26] 고대 게르만 민족의 다양한 그룹에 공통적인 다른 많은 존재들이 고대 게르만 기록 전반에 걸쳐 언급된다. 초자연적인 여성의 다양한 유형인 이러한 존재 유형 중 하나는 두 개의 메르제부르크 주문 중 첫 번째에서도 언급된다.

고대 고지 독일어고대 노르드어고대 영어원시 게르만어 재구성주석
itisdísides*đīsō여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한 유형. 서게르만어 형태는 일부 언어적 어려움을 제시하지만 북게르만어와 서게르만어 형태는 명시적으로 동족어로 사용된다(고대 영어 ides Scildinga와 고대 노르드어 dís Skjǫldunga 비교).



북게르만어와 서게르만어 민속 전승에서 널리 증명된 다른 존재로는 요정, 드워프, 마녀가 있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원시 게르만 민속 참조)

울필라가 번역한 고트족 성서가 포함된 코덱스 아르겐테우스(Codex Argenteus)의 한 페이지


게르만 민족은 기독교가 확산되던 시기에 로마 제국으로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연관성은 개종을 장려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동게르만 민족, 롬바르드족, 그리고 스페인의 스웨비족은 아리우스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는 하느님 아버지가 하느님 아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기독교의 한 형태였다. 아리우스파로 개종한 최초의 게르만 민족은 서고트족으로, 최소한 376년 로마 제국에 진입했을 때였다. 이는 정통파 기독교인들과 아리우스파, 예를 들어 341년 고트족의 선교 주교로 임명되었고 성서를 고트어로 번역한 아리우스파인 울필라(Wulfila)와 같은 이들의 장기간에 걸친 선교 활동에 이은 결과였다. 모든 아리우스파 게르만 민족은 결국 로마 제국 내에서 우세한 기독교 형태가 된 니케아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마지막으로 개종한 이들은 587년 그들의 왕 레카레드(Reccared) 치하 스페인의 서고트족이었다.

8. 현대의 인식

1450년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가 재발견되면서 독일 휴머니스트들은 그리스와 로마에 필적할 만한 영광스러운 고전적 과거를 자국에 부여하고, "게르만족"을 "독일인"과 동일시하는 데 이를 이용했다.[16] 19세기 후반, 구스타프 코시나는 특정한 물건들의 집합체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연결하는 몇 가지 널리 받아들여진 이론을 개발했다. 코시나는 자신의 이론을 사용하여 게르만 정체성을 신석기 시대까지 확장하고, 다양한 게르만족과 다른 민족들이 유럽 내에서 언제 어디로 이주했는지 확신을 가지고 진술했다.[17] 1930년대와 40년대에 나치당은 가장 초기의 선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르만의 "순수성" 개념을 이용했다.[18] 1945년 이후, 이러한 연관성은 학계의 반발과 게르만 기원에 대한 재검토로 이어졌다.[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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