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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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 10세는 1475년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1492년 추기경이 되었으나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된 후 이탈리아 각지를 떠돌다 로마에 정착했다. 1513년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르네상스 문화를 후원하며 예술가들을 지원했지만, 면죄부 판매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려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촉발했다. 그는 1521년 사망했으며, 그의 과도한 지출과 종교 개혁은 부정적인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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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0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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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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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레오 10세 |
직함 | 로마 주교 |
본명 |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 |
출생일 | 1475년 12월 11일 |
출생지 |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
사망일 | 1521년 12월 1일 |
사망지 | 로마, 교황령 |
매장지 |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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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경력 | |
소속 교회 | 가톨릭 교회 |
재임 시작 | 1513년 3월 9일 |
재임 종료 | 1521년 12월 1일 |
선임자 | 율리오 2세 |
후임자 | 하드리아누스 6세 |
서품 | 1513년 3월 15일 |
서품 집전자 | 라파엘레 산소네 리아리오 |
축성 | 1513년 3월 17일 |
축성 집전자 | 라파엘레 산소네 리아리오 |
추기경 임명일 | 1489년 3월 9일 (궐위 추기경) 1495년 3월 29일 (공개) |
추기경 임명자 | 인노첸시오 8세 |
이전 직책 | 몬테카시노 수도원장 (1486–1504) 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 성당 추기경 (1492–1513) 페사로 교황청 관리 (1503–1504) 아말피 교황청 관리 (1510–1513) |
추가 정보 | |
다른 이름 | 레오 |
2. 생애 초기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는 1475년 12월 11일 피렌체에서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와 클라리체 오르시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정해졌으며, 7세에 삭발례를 받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회 봉사직과 특전을 받았다. 아버지 로렌초는 아들의 성직 생활에 대해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이며 사치와 악행을 경계하라는 조언을 편지로 남기기도 했다.[2]
아버지 로렌초와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정치적 후원으로, 조반니는 1492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추기경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아버지 로렌초가 사망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1494년, 형 피에로, 동생 줄리아노와 함께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추방된 후 조반니는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로마에 정착하였다. 1503년 형 피에로가 사망하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 교황 율리오 2세의 지지를 얻어 1512년 스페인 군대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에 복귀하여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했다. 이후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도 피렌체를 친척에게 맡겨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2. 1. 어린 시절

조반니 데 메디치는 1475년 12월 11일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리며 막후 정치를 통해 피렌체 공화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이고, 어머니는 클라리체 오르시니이다. 조반니는 이들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49] 아버지 로렌초는 아들 삼형제 중 장남 피에르는 멍청하고, 차남 조반니는 영리하며, 막내 줄리아노는 착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50] 이러한 평가처럼 조반니는 뚱뚱하고 시력이 나빴지만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다.
아버지 로렌초의 뜻에 따라 조반니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헌되어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는 장남이 가문의 대를 잇고 차남 이하 아들들이 성직자가 되는 당시 귀족 사회의 관습을 따른 것이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 역할을 하면서 종교 권력이 지닌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로렌초는 일찍부터 메디치 가문 출신이 고위 성직자가 되도록 노력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동생 줄리아노를 피렌체 대주교로 만들려 했으나, 교황 식스토 4세와의 갈등으로 실패했고, 1478년 파치 음모 사건으로 동생이 사망하면서[51] 계획은 좌절되었다. 로렌초는 대신 차남 조반니를 추기경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노력했다.
조반니는 7살에 삭발례를 받았고, 곧 풍족한 교회 봉사직과 여러 특전을 받았다. 아버지 로렌초는 아들의 성격을 일찍부터 걱정하여, 조반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직 생활 초기에 악과 사치를 피하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편지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네가 주의해야 할 규칙이 하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라. 이것은 너의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그날의 업무를 정리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2] 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 로렌초는 친척 관계였던 교황 인노첸시오 8세를 설득하여, 조반니가 13세이던 1489년 3월 9일에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게 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추기경의 휘장을 달거나 추기경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3년 뒤에야 가능했다. 그 사이 조반니는 아버지의 인문주의 궁정에서 안젤로 폴리치아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 마르실리오 피치노, 베르나르도 도비치오 비비에나와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또한 1489년부터 1491년까지는 피사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했다.
1492년 3월 23일, 16세의 조반니는 공식적으로 추기경단에 합류하여 로마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로부터 조언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8일 아버지 로렌초가 사망하면서 조반니는 잠시 피렌체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곧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사망 후 열린 1492년 콘클라베에 참여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다. 이 콘클라베에서 그는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선출을 반대했지만 막지 못했다.
이후 조반니는 형 피에로와 함께 피렌체에서 살았다. 당시 피렌체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영향력이 강했고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침공을 겪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결국 1494년 11월, 피렌체 시민들이 봉기하여 메디치 가문은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형 피에로는 베네치아와 우르비노로 피신했지만, 조반니는 독일,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 등지를 여행했다.[3]
1500년 5월, 조반니는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겉으로는 정중한 환영을 받았고, 이후 몇 년간 로마에서 예술과 문학에 몰두하며 지냈다.
2. 2. 추기경 서임
7세 때 탁발례를 받았으며, 아버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영향력과 메디치 가문의 부를 바탕으로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13세가 되던 해인 1489년 3월 8일(또는 9일)[52]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 의해 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52] 이는 1488년, 당시 15세였던 누나 마달레나 데 메디치(1473-1528)가 38세였던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사생아 프란체스케토 키보(1450-1519)와 정략 결혼을 하면서, 아버지 로렌초와 교황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결과였다.[53]추기경에 서임되었지만, 추기경의 휘장을 사용하거나 추기경단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3년 동안 보류되었다. 이 기간 동안 조반니는 아버지의 인문주의 궁정에서 안젤로 폴리치아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 마르실리오 피치노, 베르나르도 도비치오 비비에나와 같은 학자들로부터 훌륭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1489년부터 1491년까지는 피사에서 필리포 데키오와 바르톨로메오 소치니에게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였다.[49]
1492년 3월 23일, 마침내 공식적으로 추기경단에 합류하는 것이 허락되어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그는 아버지로부터 추기경으로서의 처신에 대한 조언이 담긴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8일 아버지 로렌초가 사망하자, 16세의 조반니는 잠시 피렌체로 돌아가야 했다. 얼마 후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하자,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1492년 콘클라베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로마로 향했다. 이 콘클라베에서 그는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선출에 반대했지만, 그의 선출을 막지는 못했다.
2. 3. 망명과 로마 복귀
1494년 10월 샤를 8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피렌체를 침공하고, 11월에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선동으로 피렌체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조반니는 메디치 가문의 다른 일족들과 함께 피렌체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54] 그의 형 피에로는 베네치아와 우르비노 등지로 피신했으며, 조반니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를 여행했다.[3]1500년 5월, 조반니는 로마로 돌아왔고 당시 교황이었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그를 환대했다.[55][56] 그는 로마에 있는 메디치 가문의 마다마 궁전에 머물며 수년간 예술과 문학에 몰두하는 시간을 보냈다.[55]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즉위했다. 같은 해 형 피에로가 전투 중 사망하면서[57] 조반니는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1511년 10월 1일, 조반니는 볼로냐와 로마냐 지역의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교황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이 프랑스와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율리오 2세는 조반니를 교황 특사로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교황군과 함께 파견했다. 1512년 4월, 가스통 드 푸아가 이끄는 프랑스군과의 라벤나 전투에서 교황군이 패배하면서 조반니는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이후 탈출에 성공했다.[58] 이러한 과정을 거쳐 메디치 가문은 스페인 군대의 도움을 받아 1512년 피렌체로 복귀할 수 있었다.
2. 4.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 회복
교황 율리오 2세는 1508년 캉브레 동맹 전쟁을 주도하여 베네치아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전쟁 중 이탈리아 내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1510년, 교황은 프랑스를 배신하고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교황이 프랑스에 성무정지 조치를 내리자, 프랑스는 루이 12세의 주도로 교황 율리오 2세의 폐위를 추진하며 1511년 11월 피사에서 공의회 소집을 선언하였다.[59]피렌체는 캉브레 동맹 전쟁 동안 중립을 지켰으나, 1511년 5월 프랑스군이 볼로냐를 점령하자 프랑스의 승리를 예상하고 피사 공의회 개최 요청을 수용했다. 이 결정에 분노한 교황 율리오 2세는 피렌체에 성무정지를 명하고 응징을 예고했다. (당시 피렌체 공화정은 1494년 이후 친프랑스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전세는 역전되어 1512년 8월, 신성 동맹군은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냈다. 이후 동맹국들은 만토바에 모여 피사 공의회를 개최한 피렌체를 응징하기로 결의하였다.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과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볼로냐를 출발하여 8월 29일 피렌체 공화국 영토인 프라토(Prato)를 공격하였다.[60]
스페인군은 프라토를 점령한 뒤 21일간 잔혹한 약탈, 파괴, 강간을 자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최대 6,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수도 피렌체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항복을 유도하려는 목적이었다.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프라토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피렌체 내 메디치 가 지지자들이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격화되고 조반니 추기경으로부터 항복 권고 서신이 도착하자, 피렌체의 수상 피에르 소데리니는 사임을 하고 망명을 택했다.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교황 특사로 임명받은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1512년 9월 1일, 1,500명의 교황군을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하였다. 이로써 1494년 추방된 이후 18년 만에 메디치 가문은 다시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3. 교황 재위
교황 레오 10세의 재위 기간(1513년-1521년)은 르네상스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화려한 시대였지만, 동시에 종교 개혁이라는 거대한 폭풍우가 시작된 격동의 시기였다.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예술과 학문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졌던 그는 라파엘로와 같은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하며 로마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69] 교황 즉위식 때 "예전에 비너스(알렉산데르 6세)가 지배했고, 그 후 마르스 (율리오 2세)가 다스렸으며, 이제 미네르바 (레오 10세)의 시대가 오리라"는 문구가 내걸릴 정도로 문화적 치세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정치적, 종교적 도전 과제들로 점철되었다. 그는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세력 다툼 속에서 복잡한 외교 관계를 헤쳐나가야 했으며, 메디치 가문의 세력 확장을 위해 우르비노 전쟁과 같은 군사적 행동도 불사했다.[5][64] 전임 교황 율리오 2세가 시작한 제5차 라테란 공의회를 마무리했지만,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 마련을 위해 독일 지역에서 면죄부(대사) 판매를 승인한 것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표를 촉발하며 종교 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34] 루터는 당시 교황청의 사치와 세속화를 "새로운 바빌론"이라 비판했으며, 실제로 레오 10세의 막대한 지출은 교황청 재정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33] 그는 1521년 말라리아 또는 기관지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선종했으며,[5][6] 그의 치세는 문화적 번영과 함께 서방 기독교 세계의 분열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3. 1. 교황 선출과 피렌체 통치

1513년 3월 9일, 조반니 데 메디치는 교황 율리오 2세의 뒤를 이어 1513년 교황 선거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이 사실은 이틀 후인 3월 11일에 공표되었다.[4] 당시 선거는 프랑스 추기경들이 부재한 가운데, 젊고 귀족적인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은 조반니와 나이 든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은 라파엘레 리아리오 사이의 경쟁 구도로 진행되었다.
선출 당시 조반니는 사제품을 받지 않은 상태였으며, 1513년 3월 15일에 사제로 서품되고 3월 17일에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리고 3월 19일, 37세의 나이로 교황 즉위식을 통해 교황좌에 착좌하였다.[61] 레오 10세는 사제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선출된 마지막 교황이다.[49]
교황으로 선출된 후,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통치를 가족에게 맡겼다. 처음에는 동생 줄리아노에게 통치를 맡겼으나, 1516년 줄리아노가 사망하자 조카인 로렌초 2세 데 메디치가 피렌체를 다스렸다. 1519년 로렌초 2세마저 사망한 후에는 사촌동생인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피렌체 통치를 위임하여 간접적으로 다스렸다.
3. 2. 캉브레 동맹 전쟁
전임 교황 율리오 2세 재임 중인 1508년에 시작된 캉브레 동맹 전쟁은 교황 레오 10세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레오 10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결탁하여 밀라노 공국을 손에 넣으려고 시도하였다. 레오 10세는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레오 10세는 1513년 4월 5일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국왕, 잉글랜드의 헨리 8세 국왕과 함께 메헬렌 동맹을 맺었다.프랑스 왕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처음에는 전선에서 우위를 점하였지만, 1513년 6월에 치른 노바라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베네치아는 그해 10월까지 전쟁을 계속하였다. 레오 10세는 4월에 개회하였던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12월 9일에 재개하였으며, 루이 12세와 평화협정을 비준하는 한편 피사 공의회파는 교회를 분열시킨 이교주의라는 죄목으로 판정하고 공식적으로 파문을 선고하였다.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 계획과 성직자 개혁 문제를 논의하는 동안, 프랑스의 새 국왕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새로운 위기가 형성되었다. 젊고 열정적인 인물이었던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을 다시 손에 넣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레오 10세는 즉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스페인의 왕과 동맹을 맺었으며, 잉글랜드의 지원을 보장받는 대가로 토머스 울지를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8월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하였으며, 9월 14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해 10월 레오 10세는 프랑스가 로마와 피렌체에 대한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밀라노를 포기하는 대신 취하였던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 군대를 철수한다는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이 결정은 스페인 국왕의 불신을 샀는데, 그는 로마 주재 스페인 대사에게 보낸 서신에서 "교황은 지금까지 실상 딴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려는 그의 모든 열의는 가면에 불과하였다."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의혹은 레오 10세가 1515년 12월 볼로냐에서 프랑수아 1세와 비밀 회동을 가지면서 더욱 짙어졌다. 교황과 프랑스 국왕의 회동에서 표면상으로 논의된 주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동 위협 인식, 프랑스와 베네치아, 신성 로마 제국 간의 평화 정착, 프랑스 내 교회 문제 등이었다. 이 회동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결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2~3년간 지속된 정치적 음모와 전쟁으로 인해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큰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공의회에서 제시된 세 가지 주요 목표, 즉 기독교 국가들의 평화, 이슬람교 위협에 대항하는 성전, 교회 개혁 등은 모두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때만 달성 가능한 문제들이었다. 결국 공의회는 이러한 목표들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제5차 라테란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1516년 12월 9일 제11회기에서 교황 비오 2세 이후 교황들이 일관되게 비난했던 공의회 우위설의 단죄를 재차 확인한 것과, 프랑스 교회와 성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레오 10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협정을 확인한 것이다. 이 규정은 훗날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레오 10세는 1517년 3월 16일 제5차 라테란 공의회를 폐막하였다. 공의회를 통해 피사 공의회파의 분열 시도는 종식되었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도입한 도서 검열이 재개되었으며, 오스만 제국 토벌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각 지역 교회에 십일조가 의무적으로 부과되었다. 또한 교황의 수위권을 공고히 하여 이에 대한 이의 제기를 어렵게 만들었다.
3. 3. 우르비노 전쟁
1515년 12월 프랑스와 볼로냐 협약을 맺은 후 교황령은 캉브레 동맹 전쟁에서 이탈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메디치 가문 출신인 교황 레오 10세는 자신의 가문이 다스리는 새로운 로마냐 공국을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했다.[62] 이를 위해 레오 10세는 캉브레 동맹 전쟁(1508~16) 중 우르비노 공국의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가 저지른 여러 잘못을 문제 삼았다. 여기에는 1511년 적과의 내통 혐의, 알리아노 추기경 살해, 전쟁 중 출전 거부,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복귀를 위한 정벌 명령에 대한 항명 등이 포함되었다. 레오 10세는 이미 1515년 프랑스와의 볼로냐 협상에서 교황군의 우르비노 공국 공격에 프랑스가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확보한 상태였다.교황은 동생 줄리아노와 조카 로렌초 2세 데 메디치를 로마 귀족으로 임명하고 로렌초에게 피렌체를 맡기는 등 가문의 세속적 기반을 다졌다. 또한 파르마, 피아첸차, 페라라, 우르비노를 아우르는 중부 이탈리아 왕국 건설을 구상했던 줄리아노를 위해 사보이의 필리베르타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1516년 3월 줄리아노가 사망하자, 교황은 이러한 야심을 조카 로렌초에게 집중시켰다.
1516년,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를 로마로 소환하여 과거 행적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으나, 공작이 불응하자 즉시 파문하고 우르비노에서 추방했다.[63] 당시 프랑스,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간의 평화 분위기 속에서 투르크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계 통합이 기대되었으나, 레오 10세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로부터 원정 자금 15만 두카트를 지원받는 대가로 프랑스에 대항하는 스페인-잉글랜드 동맹에 가담했다.[5]
1517년, 추방된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가 우르비노를 되찾기 위해 무력 도발을 감행하면서 우르비노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1517년 1월(또는 2월)부터 9월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공작은 다시 추방당했으며 교황의 조카 로렌초 2세 데 메디치가 새로운 우르비노 공작으로 임명되었다.[5]
그러나 이 전쟁은 과거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정책을 답습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교황령 내 약탈과 혼란이 가중되었고, 십자군 원정 준비는 차질을 빚었으며 교황청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레오 10세가 이 전쟁에 80만 두카트라는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고 추산했다.[64][65][5]
3. 4. 교황 독살 미수 사건(1517년)
우르비노 전쟁은 교황과 추기경단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교황 식스토 4세 시대 이후 추기경단이 세속화되면서 여러 문제점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추기경들이 레오 10세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1517년 5월과 6월, 레오 10세는 추기경들과 개별적으로 만나 "최근에 나를 독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는가?"라고 직접 물었다. 이 과정에서 예닐곱 명의 추기경이 음모 가담 사실을 실토했다. 조사 결과, 페트루치[66] 추기경이 외과의를 고용해 교황의 고질적인 치질 수술을 핑계로 독 묻힌 붕대를 사용하려 했으나, 교황이 자신의 주치의를 고집하여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페트루치 추기경은 즉시 체포되어 산탄젤로 성에 투옥되었고, 리아리오[67] 추기경 등 다른 관련자들도 종복들을 고문하여 증거를 확보한 후 체포되었다. 레오 10세는 이 위기를 추기경단을 개혁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기회로 삼았다. 그는 페트루치 추기경을 처형하고 다른 관련자들을 투옥시켜 본보기를 보였으며, 동시에 추기경단에 급격한 변화를 추진했다.
1517년 7월 3일, 레오 10세는 무려 31명에 달하는 새로운 추기경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는 교회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대규모 임명이었다. 새로 임명된 추기경 중에는 로렌초 캄페지오[68], 위트레흐트의 아드리안(훗날 교황 하드리아노 6세), 토마스 가예타노, 크리스토포로 누마이, 에지디오 가니시오 등이 있었다. 특히 유력 로마 가문의 자제들을 대거 포함시킨 것은 교황청 내 이들의 영향력을 제한했던 이전 교황들의 정책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임명에는 정치적 고려, 가문의 영향력 확대, 그리고 우르비노 전쟁으로 인한 재정 충당 목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일각에서는 교황이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해 추기경들의 음모를 과장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으나, 이는 대체로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
레오 10세는 재임 중 총 8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열어 42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했다. 여기에는 그의 사촌 두 명(한 명은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됨)과 조카 한 명, 그리고 그의 후임자인 아드리아노 플로렌스 보이엔스(훗날 교황 하드리아노 6세)도 포함되었다. 1517년 7월 3일의 31명 추기경 임명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1년 42명을 임명하기 전까지 단일 추기경 회의 최다 임명 기록이었다.
3. 5. 십자군 원정 계획
레오 10세는 당시 서유럽 세계를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의 진군을 막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구체적으로 계획했다. 그의 계획은 교황이 직접 기독교 국가들 간의 휴전을 선포하고 분쟁을 중재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프랑스의 왕이 십자군을 이끌고, 잉글랜드, 스페인, 포르투갈은 선박을 건조하여 연합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기독교 국가 간의 평화를 이루려는 레오 10세의 외교적 노력은 실패했다. 대신 추기경 토머스 울지가 자신의 모국인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를 중재하도록 시도했다. 십자군 조직을 위해 십일조로 모은 자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1519년, 헝가리는 셀림 1세와 3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셀림 1세의 뒤를 이은 쉴레이만 대제는 1521년에 전쟁을 다시 시작했고, 같은 해 8월 28일에는 베오그라드 성을 함락시켰다. 이 소식에 크게 놀란 레오 10세는 프랑스와의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에 30,000 두카트의 지원금을 보냈다.
한편, 레오 10세는 그리스 귀일교회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1521년 5월 18일에는 교서를 통해 라틴 교회 성직자가 그리스 교회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거나, 라틴 교회 주교가 그리스 교회 사제를 서품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는 후임 교황인 클레멘스 7세와 바오로 3세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지만,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 사이의 오랜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 6. 후원 활동
레오 10세가 교황 즉위 직후 동생에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교황직을 주셨으니 마음껏 즐기자"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를 처음 언급한 베네치아 대사는 당시 로마에 없었고 레오 10세에게 편견을 가졌던 인물이라 이 말의 역사적 신빙성은 매우 낮다. 그럼에도 이 일화는 교황 재임 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인문주의적 소양과 예술,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평가받는다.레오 10세는 로마를 기독교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1515년 한 추기경은 "자신들의 후원과 보호를 위해 모든 지역으로부터 편지를 들고 사람들이 영원한 도시 로마를 향해서 오고 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는 추기경 시절부터 예술 후원에 관심을 보여 라파엘로의 디자인에 따라 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 성당을 복원했으며, 교황이 된 후에는 자코포 산소비노에게 비아 줄리아에 산 조반니 데이 피오렌티니 성당 건축을 맡겼다. 또한 라파엘로와 아고스티노 키지에게 성 베드로 대성전과 바티칸 공사를 서두르도록 재촉했다. 역사가 윌 듀랜트는 레오 10세 시대의 바티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로마의 지성과 지혜의 중심지, 학자, 교육자,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환영받고 그들에게 숙박을 제공해주는 곳, 위엄 있는 교회의 기능은 물론, 격식적인 외교적 환영식, 화려한 연회, 극공연과 음악회, 시 낭독, 미술작품 전시 등이 진행되는 곳, 당시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궁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바티칸의 개량공사와 장식에서, 문학적 혹은 예술적 천재, 그리고 능력 있는 유럽 특사의 모임에서, 니콜라오 5세로부터 레오 10세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노력으로 바티칸은 예술뿐 아니라 문학과 르네상스의 찬란함이 절정을 이루었다. 단순히 문화의 양적인 면만을 볼 때도, 역사는 결코 이와 같은 때가 없었다. 심지어 페리클레스 때의 아테네도, 아우구스투스 때의 로마도 그렇지 못하였다."[69]
특히 레오 10세는 라파엘로를 총애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비롯해 시스티나 경당의 벽걸이, 바티칸 궁전 회랑의 천장화와 벽화 등 수많은 작업을 맡겼다. 라파엘로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크게 슬퍼했으며, 그를 로마와 주변 지역의 고대 유물 관리자로 임명하기도 했다.[39] 반면, 미켈란젤로와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으나 그의 까다로운 성격을 염려하여 로마보다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메디치 가문 예배당) 관련 작업을 맡겼다.
레오 10세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는 훌륭한 청음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으며, 거의 광적인 수준으로 음악을 사랑했다. 교황으로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유럽 각지에서 뛰어난 성악가, 기악 연주자, 작곡가들을 초빙했으며, 당대 최고의 류트 작곡가였던 프란체스코 카노바 다 밀라노도 그의 궁정에서 활동했다. 교황청 기록에 따르면 음악가들은 금세공인 다음으로 높은 급여를 받았으며, 교황 개인 금고에서도 많은 보상을 받았다. 이들은 교황과 손님들을 위한 사적인 연회뿐만 아니라, 레오 10세가 중요하게 여겼던 종교 의식의 격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는 교황 성가대의 수준 향상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적의 성악가들을 고용했다. 또한 화려하게 장식된 악기 구입과 피렌체 등지에서의 악보 확보에도 많은 돈을 투자했다.[20] 나아가 악보 보급을 위한 인쇄 기술 발전도 장려했는데, 오타비아노 페트루치에게 1513년부터 15년간 오르간 악보 인쇄 독점권을 부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미사곡 연주 외에도 개인 예배당에서 복음서를 그리스어로 노래하는 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학문과 문학 분야에서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513년 11월 5일 헌법을 통해 율리우스 2세 시절 소홀히 다뤄졌던 로마 대학교를 개혁했다. 모든 학부를 복원하고 교수들의 급여를 인상했으며, 멀리서 뛰어난 교사들을 초빙하여 1514년에는 88명의 교수를 갖춘 명문 학부로 발전시켰다.[38] 야누스 라스카리스를 로마로 초빙하여 그리스어 교육을 장려하고, 그리스어 인쇄소 설립을 지원하여 1515년 로마에서 최초의 그리스어 서적이 인쇄되도록 했다. 저명한 라틴어 학자인 피에트로 벰보와 야코포 사돌레토를 교황 비서로 두었으며, 베르나르도 아콜티, 마르코 지롤라모 비다, 잔 조르조 트리시노, 마테오 반델로 등 당대의 많은 시인과 작가들을 후원하고 교황청 내 직책을 부여했다.
레오 10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자선 활동에도 힘썼다. 노인, 병자, 퇴역 군인, 순례자, 가난한 학생, 국외 추방자, 장애인, 빈민 등 소외된 계층에게 매년 6,000 두카트가 넘는 금액을 기부하며 자비로운 교황으로 기억되었다.[32]
그 외에도 유대인에게 호의를 보여 로마에 히브리어 인쇄소 설립을 허가했고, 다니엘 봄베르크의 지휘 아래 탈무드[45]와 미크라오트 게돌롯[46] 출판을 지원했다. 또한 경건한 평신도 단체인 신성한 사랑의 기도회(훗날 테아티노회의 모태) 결성을 승인하고, 파올라의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시성했다.[47]
하지만 이러한 광범위한 후원과 자선 활동, 그리고 우르비노 전쟁과 같은 정치적 활동 및 개인적인 사치로 인해 교황청 재정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교황 즉위 2년 만에 전임자 율리우스 2세가 모아둔 막대한 재산을 모두 소진했고, 임기 말에는 교황청 금고가 40만 두카트의 빚을 지게 되었다.[33] 이러한 재정 압박은 레오 10세의 재위 기간 동안 논란이 된 면죄부 판매 강화로 이어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종교 개혁을 촉발하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34]
3. 7. 마르틴 루터의 등장과 종교 개혁

레오 10세의 치세 중에 서방교회 개혁 운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서방교회는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이후 교황 중심의 개혁 반대파 세력은 개혁 찬성파를 분리시켜 현재의 서방교회는 여러 교단으로 나뉜 형태가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전날, 독일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수사신부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령(면죄부) 판매를 위한 선전위원들이 직권을 남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면죄부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게시했다. 일부 신학생들이 루터의 주장에 공감하여 95개조 반박문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고 인쇄기를 이용해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뜨렸다.
루터의 반박문은 불과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2달 후에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초기에 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1518년 2월에는 아우구스티노회 총대리에게 소속 수사들의 발언을 단속하라고 지시하는 데 그쳤다.
1518년 5월 30일, 루터는 자신의 95개조 반박문에 대한 해설서를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교황청은 루터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화형에 처하기 위해 같은 해 8월 7일 로마 법정에 출두하라고 명령했으나, 이 소환은 나중에 취소되었다. 대신 루터는 1518년 10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교황 특사인 가예타노 추기경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가예타노 추기경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레오 10세가 11월 9일 발표한 교서를 통해 교황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대사령을 선포할 권리가 있음을 밝혔음에도 루터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한동안 별다른 진전 없는 교섭만 이어졌고, 그 사이 독일 전역에서는 이 논쟁이 대중들에게 깊숙이 파고들었다.
결국 1520년 6월 15일, 레오 10세는 교황 칙서 Exsurge Domine|주님, 일어나소서la를 반포하여 루터의 주장을 41개 항목에 걸쳐 반박했다. 신학자 요한 에크를 교황 대사로 임명하여 이 칙서를 독일에 전달하게 했다. 이어서 1521년 1월 3일에는 칙서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 교황의 선언la을 통해 루터를 공식적으로 파문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에게 이단 문제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다.
레오 10세의 치세 동안 루터주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레오 10세는 로마 교황청 관료들의 급료를 충당하기 위해 북유럽의 부유한 인사들을 성직자로 계속 임명했으며, 1516년 말에는 아르킴볼디를 덴마크의 교황 대사로 파견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금을 모금하게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덴마크, 노르웨이, 홀슈타인 지역에서 교회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자국 내 성직자들의 로마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음을 인지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 국왕은 교황 대사 아르킴볼디가 스웨덴 문제에 간섭한 것을 빌미로 그를 덴마크에서 추방하고, 1520년 루터파 신학자들을 코펜하겐으로 초청했다.
크리스티안 2세는 덴마크만의 독립적인 교회를 세우고 로마에 대한 순명과 의무를 폐지하며 국왕이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어야 한다는 루터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했다. 레오 10세는 이러한 크리스티안 2세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1521년 새로운 교황 대사로 프란체스코 데 폰텐티아를 파견하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레오 10세나 새로운 교황 대사 모두 당시 스칸디나비아 교회 내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개혁을 이끌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교황 레오 10세 재위 기간의 가장 지속적인 영향은 그가 종교 개혁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부추겼다는 평가이다.[33] 핵심 문제 중 하나는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열린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년-1517년)에서 결정된 개혁안들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공의회는 교황청을 포함한 기독교 세계 전반의 개혁과 여러 정치적 문제 해결을 목표로 했으나, 레오 10세의 지도 아래 로마의 재정 및 정치적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그의 사치스러운 지출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한 면죄부 판매 승인은 교황청 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 면죄부 판매 과정에서의 착취와 종교적 원칙의 부패는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루터는 이러한 향락적인 로마를 "새로운 바빌론"이라고 비판했고, 교황청의 재정 파탄은 "레오 10세는 세 교황의 수입을 혼자 다 써버렸다. 선대 율리우스 2세가 모은 재산, 레오 10세 자신의 수입, 그리고 다음 교황의 몫까지 3인분을 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레오 10세가 루터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1521년 1월 그를 파문하려 한 시도는 루터교 교리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서방 교회를 더욱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33]
3. 8. 말년과 사망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서거하자, 교황 레오 10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등 강력한 후보자들 사이에서 후계자 선정에 고심했다. 처음에는 프랑수아 1세나 영향력이 적은 독일 제후를 지지하는 듯했으나, 결국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를 1519년 제국 선거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였다.[5] 카를로스 1세가 1519년 6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로 선출되면서 교황령과 프랑스 사이의 동맹 관계는 약화되기 시작했다.이후 레오 10세는 페라라 공국, 파르마, 피아첸차를 교황령에 통합하고자 했다. 1519년 말 페라라 점령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외부 지원의 필요성을 느꼈다. 1521년 5월, 레오 10세는 카를 5세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밀라노 공국과 제노바 공화국을 프랑스로부터 탈환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 반환하고, 그 대가로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교황령에 귀속시키기로 합의했다. 10,000명의 스위스 용병 고용 비용은 교황과 황제가 공동 부담하기로 했으며, 카를 5세는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보호하고 가톨릭 신앙의 적들을 처벌할 것을 약속했다. 레오 10세는 카를 5세의 나폴리 왕국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그를 신성 로마 황제로 정식 책봉하며, 잉글랜드와 스위스가 참여한다는 조건 하에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을 지원하기로 했다.[5]
1521년 8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동맹 참여를 선언했다. 프랑수아 1세는 나바라와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와의 전쟁을 시작했으며, 첫 전투는 1521년 6월 23일에 벌어졌다. 레오 10세는 프랑수아 1세에게 즉각적인 철군과 파르마, 피아첸차의 반환을 요구하며, 불응 시 파문과 함께 프랑스 백성들의 충성 서약 의무를 면제시키겠다고 경고했다. 레오 10세는 선종하기 직전인 1521년 11월, 교황군이 프랑스로부터 밀라노를 탈환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5]
1521년 10월 25일, 레오 10세는 말라리아[5] 또는 기관지 폐렴[6]에 걸렸다. 병세는 잠시 호전되는 듯했으나 11월 말 다시 악화되었고, 회복세를 보이는가 싶더니 12월 1일 갑자기 의식을 잃고 그날 자정에 선종하였다. 죽음이 너무 갑작스러워 종부성사도 받지 못했다.[5]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33] 독살설도 제기되었으나, 근거는 부족한 것으로 여겨진다.[5] 그의 유해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안치되었다.[5][33]
4. 유산 및 평가
레오 10세는 교황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방식, 특히 정치적·재정적 결정과 관련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7] 그의 치세는 르네상스 문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교황청의 재정 파탄을 초래하고 종교 개혁의 불씨를 제공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문화 후원과 예술적 유산레오 10세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이다. 그는 전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시작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사업을 이어받았으며,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지원하여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시대에 로마 르네상스는 절정을 맞았으며, 교황 대관식 때 세워진 개선문에는 "이전에는 비너스(알렉산데르 6세)가, 다음에는 마르스(율리우스 2세)가 다스렸으나, 이제는 미네르바(레오 10세)의 시대가 왔다"는 문구가 새겨질 정도였다. 특히 라파엘로를 총애하여 자신의 초상화, 시스티나 경당의 태피스트리, 바티칸 궁전 회랑의 장식 등 수많은 작업을 의뢰했고, 라파엘로가 요절했을 때 크게 슬퍼했다. 반면,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미켈란젤로와는 다소 거리를 두며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 관련 작업을 맡겼다.
재정 파탄과 면죄부 문제레오 10세는 예술 후원, 자선 활동, 친인척 및 지인들에 대한 지원, 우르비노 전쟁과 같은 정치적 목적의 전쟁, 그리고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교황 즉위 2년 만에 검소했던 전임자 율리우스 2세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교황청을 심각한 부채 상태에 빠뜨렸다. 1521년 그의 임기 말 교황청 부채는 40만 두카트에 달했다.[33]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그는 교황의 보석과 가구, 식기류, 심지어 사도들의 조각상까지 저당 잡혔으며, 추기경 직위나 새로 만든 기사단 작위를 판매하기도 했다. 또한 은행가들로부터 거액을 빌렸는데, 그가 사망했을 때 많은 은행가들이 파산할 정도였다.[35]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은 면죄부(대사부) 판매를 승인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33] 레오 10세의 재정 파탄은 후임 교황 하드리아노 6세와 그의 사촌이었던 클레멘스 7세의 재위 기간 동안에도 심각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다.[34]
종교 개혁과의 관계레오 10세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은 종교 개혁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촉발했다는 평가이다.[33]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는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열린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에서 결정된 개혁안들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공의회는 교황청과 추기경단을 포함한 교회 전반의 개혁을 목표로 했으나, 레오 10세의 지도력 아래 로마의 재정적, 정치적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 마련을 위한 면죄부 판매 승인은 광범위한 비판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517년 10월,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종교 개혁의 시작을 알렸다. 레오 10세는 루터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1521년 1월 그를 파문했지만, 이는 오히려 루터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 서방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33]
정치적 실패레오 10세는 메디치 가문의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페라라 공국, 파르마, 피아첸차를 교황령에 통합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5] 또한 조카 로렌초 2세 데 메디치를 우르비노 공작으로 만들려 했으나, 우르비노 전쟁 끝에 원래 공작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이 복귀하면서 영토 확장에 실패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는 프랑수아 1세를 지원했으나 카를 5세의 당선을 막지 못했고, 이후 카를 5세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 대립하는 등 복잡한 외교 관계 속에서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5]
성격 및 개인적 평가레오 10세는 음악과 연극,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고 특히 즉흥시에 능했던 교양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8] 그는 쾌활하고 상냥한 성격과 뛰어난 웅변술을 지녔으며, 관대하고 자비로운 면모도 보였다.[11] 베네치아 대사 마리노 조르지는 그를 "선량하고 매우 너그러우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평가하면서도 "학문을 사랑하고 교회법과 문학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가졌으며, 훌륭한 음악가"라고 덧붙였다.[5]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교황직을 즐기자"고 말했다는 일화처럼[9] (이 발언의 진위는 불확실하지만[10]),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교황으로서의 엄숙한 직무에 대해 다소 가볍게 생각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는 세속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미사 집전 전 기도와 금식, 고해성사를 하는 등 종교 의식에는 성실히 참여했다.[11] 역사가 바바라 터크먼은 그를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촉발한 책임이 있는 교황 중 한 명으로 지목하며, 종교적으로 독실하기보다는 교양 있는 쾌락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17][18]
사생활 및 성적 지향 논란레오 10세의 인품은 한때 음탕함, 살인, 불경, 무신론 등 심각한 비난에 휩싸였다. 특히 그가 예수에 대해 불경스러운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가 퍼지기도 했으나[13], 이러한 비난들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근거 부족으로 기각되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그가 가톨릭 교리를 진정으로 믿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도, "인간적이고 자비로우며 관대하고 상냥하며, 모든 예술의 후원자이자 모든 미덕의 친구"로서 훌륭한 군주였다고 평가했다.[15] 마르틴 루터조차 파문되기 전에는 레오 10세의 도덕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16]
한편, 레오 10세의 사생활, 특히 성적 지향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그의 사후 콘클라베 기간 동안 동성애를 암시하거나 단정하는 내용의 풍자시(파스퀴나드)가 유포되었으며[24], 동시대 역사가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와 파올로 조비오의 기록에도 관련 암시가 나타난다.[25] 루터는 후일 레오 10세가 동성 소년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27]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동시대의 다른 증언이나 교황 칙령 등 반박하는 자료도 존재한다.[28]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레오 10세의 동성애 의혹에 대해 신빙성을 낮게 보거나 주목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우세하지만[29], 일부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30][31]
5. 대중문화
- 1953년 영화 ''마르틴 루터''에서는 필립 리버가 연기했다.
- 1965년 영화 ''고뇌와 환희''에서는 아돌포 첼리가 추기경 시절의 레오 10세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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