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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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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유래한 "라틴 아메리카"라는 용어의 정의에서 시작된다. 이 지역은 유럽 식민지 시대, 독립, 20세기 미국의 개입과 냉전 시대의 대리전을 거치며 복잡한 역사를 겪었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는 다양한 문명이 존재했고, 식민지 시대에는 유럽 열강의 지배와 원주민 문화의 억압이 있었다. 19세기에는 독립 혁명이 일어나고, 20세기에는 좌파 정부의 부상과 미국의 개입, 군사 정권의 등장과 몰락을 겪었다. 21세기에는 좌파 정권의 부상과 우파로의 전환, 그리고 다시 좌파로의 회귀 등 정치적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2. 용어 및 정의의 유래

아메리카 대륙 일부가 로망스어군을 사용하는 문화권과 문화적 또는 인종적으로 가깝다는 생각은 1830년대 프랑스의 생시몽주의자 미셸 슈발리에의 글에서 나타난다. 그는 이 지역 주민들을 "라틴 민족"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라틴 유럽"과 연대하여 "게르만 유럽", "앵글로색슨 아메리카", "슬라브 유럽"에 맞설 수 있다고 보았다.[1] 이러한 관점은 19세기 중후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대신 프랑스를 새로운 문화적 모델로 여기던 라틴 아메리카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2]

'라틴 아메리카'라는 용어 자체는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이 용어는 프랑스와의 문화적 유대를 강조하고, 프랑스가 이 지역에서 문화적,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며, 나아가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세우려는 프랑스의 정치적 목적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되었다.[3]

20세기 중반, 특히 미국에서는 문화적 측면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와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 주목하며 미국 남쪽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여 '라틴 아메리카'로 지칭하는 경향이 나타났다.[4]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단순화에 대한 비판과 함께, 유엔의 지역 구분처럼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로 구분하여 부르는 등 좀 더 세분화된 접근 방식도 제시되었다.

'라틴 아메리카'라는 개념과 정의는 19세기에 등장한 비교적 현대적인 것이므로,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이전 시대를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로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들은 이후 유럽의 정복을 통해 형성된 사회에 강력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므로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3. 콜럼버스 이전 시대

현재의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는 수천 년, 길게는 3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해왔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 이동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하며, 문자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초기 문명의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데스 산맥과 메소아메리카 등지에서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들이 번성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된 인류 정착지는 칠레 남부의 몬테 베르데 유적이다. 이곳의 거주 연대는 약 14,000년 전으로 추정되며, 이보다 더 오래된 정착의 증거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인류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대륙 전역, 그리고 카리브해의 섬들까지 퍼져나갔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로 불리는 지역은 멕시코 북부에서 티에라델푸에고까지 광활하게 펼쳐져 있지만, 다양한 지리, 지형, 기후 조건과 경작 가능한 땅의 차이로 인해 인구는 고르게 분포하지 않았다. 특히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정착 생활은 메소아메리카(멕시코 중남부와 중앙 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고원지대(케추아족, 아이마라족), 그리고 치브차 문화권 등에서 복잡하고 수준 높은 문명을 탄생시켰다.

메소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를, 안데스 산맥에서는 감자와 기후에 잘 적응하는 곡물들을 집중적으로 재배하여 농업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이렇게 생산된 잉여 농산물은 단순히 농민 가족이나 공동체를 넘어 더 넓은 지역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는 사회, 정치, 종교, 군사 분야에서 계층 구조를 형성하고, 안정적인 마을과 주요 도시 중심의 도시화를 촉진했으며, 전문적인 수공예 기술의 발달과 조공 및 무역을 통한 물자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는 라마를 가축으로 길들여 물건 운반에 활용했지만, 메소아메리카에는 노동력을 돕거나 고기를 얻을 만한 큰 가축이 없었다. 기록 방식에서도 차이가 나타나,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문자 체계를 발전시킨 반면, 안데스 산맥에서는 매듭의 형태와 색깔로 정보를 기록하는 키푸를 회계 시스템으로 사용했다.

카리브해 지역에는 아라와크족이나 타이노스족과 같은 정착 농경 민족이 거주했으며, 현재의 브라질 지역에는 많은 투피족이 고정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반(半)정착 생활을 하는 인구 집단도 있었는데, 이들은 농사를 짓고 마을에 살았지만 토지 황폐화 등의 이유로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이들 지역은 상대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았고, 사회적·정치적 계층 구조도 덜 발달했다. 한편, 농사를 짓지 않고 수렵 채집 생활을 하는 비정착민들은 주로 척박한 환경에서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살았으며 인구 밀도 역시 매우 낮았다. 서기 1000년경에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인구 규모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연구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5]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두 거대 문명은 14세기 초에 등장한 아즈텍과 15세기 중반에 세력을 확장한 잉카였다. 비록 이들 토착 제국은 이후 유럽인들의 침략으로 정복당했지만, 특히 인구가 밀집되었던 지역에서는 기존의 사회 및 행정 조직 일부가 식민 통치하에서도 유지되었다. 이처럼 토착 인구의 존재 여부와 그 규모는 유럽 제국주의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산맥 고원지대의 콜럼버스 이전 문명들은 식민지 시대 후기 아메리카 태생의 스페인인(크리오요)들에게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으며, 독립 이후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민족주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6] 오늘날 일부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는 국가 정체성의 뿌리를 토착 문화에서 찾으려는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 이념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종종 자국의 식민지 과거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과 연결된다.[7]

3. 1.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스포츠

제국주의식민주의의 영향으로 축구, 야구, 복싱, 크리켓, 농구와 같은 스포츠가 제국에서 식민지로 전파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스포츠 역사를 살펴보면 식민 지배 엘리트와 가난한 피지배층 사이의 권력 불균형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승마 경기가 중요한 여가 활동이었으며, 이는 식민지 시대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많은 식민지 관리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말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 이들의 스포츠 참여를 제한하려 했다. 이는 권력을 이용한 차별적인 통제 시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는데, 많은 원주민들이 식민지를 착취하는 상류층에게 이익을 주는 노동을 포함한 생계를 위해 말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말은 초기 라틴 아메리카 스포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앞서 언급된 승마 경기 외에도 멕시코의 차레아다나, 훗날 아르헨티나우루과이가 될 지역의 다양한 승마 활동이 그 예이다. 이러한 스포츠는 원주민들에게 재능을 발휘하고 명예를 중시하며, 팀워크의 가치를 실천할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말은 식민지 엘리트 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원주민들도 비교적 쉽게 접근하고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8]

4. 식민지 시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이를 계기로 스페인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해상 강국들은 신세계로 탐험대를 보내 무역망을 구축하고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아즈텍, 잉카, 마야, 무이스카와 같이 이미 발전된 문명을 이루고 있던 중남미 지역에 집중했다. 이곳에는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과 함께 많은 양의 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할당받은 브라질 지역에 집중했는데, 이곳에는 대규모 사회나 광물 자원이 부족하여 주로 설탕 생산을 위한 플랜테이션 농업을 개발했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식민지화 과정에서 원주민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가장 큰 원인은 유럽인들이 옮겨온 질병이었다. 콜럼버스 교환이라 불리는 이 과정에서 천연두, 홍역 등 기존에 아메리카 대륙에 없던 전염병이 퍼지면서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이 대규모로 사망했다.[9][10][11]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그의 저서 ''인디언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를 통해 카리브해 지역에서 벌어진 스페인 초기 정착의 참상을 고발하며 일찍이 이러한 비극을 경고했다.

질병뿐만 아니라 스페인 정복자들의 잔혹한 폭력 역시 원주민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스 카사스는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강제로 광산 등에서 밤낮없이 일하게 하고, 남녀를 분리시켜 번식을 막았으며, 도망치는 이들을 개를 풀어 사냥하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증언했다. 그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시험한다"며 원주민을 살해하기도 했다고 기록했다.[12] 라스 카사스는 이러한 전쟁, 노예화,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약 300만 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했다. 그는 이러한 잔혹함에 대해 "미래 세대에 누가 이것을 믿겠는가? 지식을 가진 목격자로서 내가 직접 쓰고 있지만, 나조차도 믿기 어렵다"고 술회했다.

스페인 식민 지배 하에서 원주민들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는 철저히 억압되고 파괴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원주민들의 신앙을 금지하고 기독교 개종을 강요했다. 특히 마야 문명의 경우, 그들의 역사, 천문학, 종교 의식 등이 기록된 고문서(코덱스)들을 불태워버렸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마야 고문서는 드레스덴 코덱스, 파리 코덱스, 마드리드 코덱스, HI 코덱스 단 4개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또한, 수많은 황금 예술 작품들은 녹여져 금괴 형태로 스페인 본국으로 보내졌고,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여겨진 다른 많은 예술품들도 파괴되었다.

4. 1. 식민지 시대의 종교

스페인 왕실은 해외 식민지로의 이민을 규제했으며, 여행자는 세비야의 무역청(Casa de Contratación)에 등록해야 했다. 왕실은 비기독교인(유대인, 비밀 유대교인, 무슬림)이 기독교인 행세를 하며 이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행자의 배경을 철저히 조사했다. 이러한 이민 통제는 스페인 왕실이 해외 영토의 종교적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오직 기독교인만이 신세계로 건너갈 수 있도록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이를 위해 개인적인 증언을 통한 종교 증명이 요구되었다. 왕실과 관련된 개인들의 사례는 종교가 신세계로의 이주 허가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아프리카-이베리아계 여성인 프란시스카 데 피게로아는 1600년, 카르타헤나로 항해하기 위한 허가를 얻기 위해 스페인 왕실에 청원했다.[14] 그녀를 대신하여 엘비라 데 메디나라는 증인은 프란시스카의 종교적 순수성을 증언하며 "이 증인은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 조부모님이 옛 기독교인이었으며, 순수한 혈통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어족이나 유대인 계급이 아니며, 최근에 우리 거룩한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들도 아닙니다."라고 기록했다.[15] 프란시스카는 자신의 인종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1601년 '국왕 폐하의 칙령'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입국을 허가받았다. 칙령에는 "세비야의 무역청(Casa de Contratación)의 대통령과 공식 판사들에게. 프란시스카 데 피게로아에게 카르타헤나 주로 가는 것을 허가하라고 명령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16] 이 사례는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로 이주를 시도할 때 종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요소였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개인은 왕실에 청원하고 여행 허가를 받기 위해 기독교 신자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신세계에 정착한 이후에도 종교는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깊숙이 관여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많은 법률이 기독교적 신념과 전통에 기반을 두고 제정되었으며, 이는 식민지 라틴 아메리카에 존재하던 다양한 문화들과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특히 아프리카 문화와 이베리아 문화 간의 충돌은 주요 갈등 요인 중 하나였으며,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아프리카계와 이베리아계 주민 모두를 대상으로 한 공격적인 마녀 재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유럽 전통에 따르면, 마녀(bruja)는 신과 성사를 부정하고 악마를 숭배하며 마녀의 안식일과 같은 의식을 행하는 존재로 여겨졌다.[17] 이러한 신에 대한 거부는 혐오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어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당국 모두 용납하지 않았다. 파울라 데 에길루스의 재판 사례는 마녀 재판과 같은 심각한 경우에도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호소하는 것이 형벌을 줄이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파울라 데 에길루스는 산토도밍고에서 태어나 노예로 자란 아프리카계 여성이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 마법 기술을 배웠다고 알려졌으며, 공공연하게 마법사로 인식되었다. "1623년, 파울라는 마법(brujeria), 점술, 그리고 배교(교회 교리에 반하는 선언) 혐의로 기소되었다."[18] 1624년에 시작된 재판에서 파울라는 처음에는 왕실의 법 절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재판을 시작했다. 그러나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호소해야 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다. 재판의 두 번째 심리 전에 그녀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살베 레지나, 그리고 십계명"을 정확하게 암송했다. 결국, 세 번째 심리에서 파울라는 "우리 주님께 이 끔찍한 죄와 과오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하며... 자비로운 처벌을 요청한다"고 증언하며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호소했다.[19] 이러한 호소 덕분에 파울라는 최소한의 처벌만 받고 이전의 노예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스페인 왕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러한 기독교 중심 정책은 식민주의가 300년 이상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하는 기반 중 하나가 되었다.

5. 19세기 혁명: 탈식민지 시대

독립 연도별 라틴 아메리카 국가


미국 독립 혁명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라틴 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은 1825년까지 스페인 제국포르투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독립은 부르봉 개혁 하에 존재했던 옛 공동 시장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미 산업 혁명을 시작한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높였다. 특히 영국프랑스, 미국 등은 이 지역에 대한 재정적 투자를 통해 점차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독립은 또한 '라틴 아메리카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새로운 지배층과 지식인 계급을 탄생시켰다. 이들 엘리트는 종종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모델에서 벗어나 사회를 재편하고자 했으며, 새로운 라틴 아메리카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다른 가톨릭 유럽 국가, 특히 프랑스를 모델로 삼으려 했으나, 원주민들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히스패닉 아메리카에서는 독립 이후 대 콜롬비아,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브라질은 통일된 군주제를 유지하며 히스패닉계 이웃 국가들과 달리 내전이나 국가 간 전쟁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 독립한 국가들 내부에서는 연방주의자와 중앙집권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빈번했으며, 이들은 종종 군사력을 동원하여 상대를 억압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해쳤다. 새로운 국가들은 식민 시대의 다양한 문화를 물려받았고, 공유된 유럽어(스페인어 또는 포르투갈어)와 문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려 노력했지만, 각 국가 내부에 존재하던 문화적, 계급적 분열은 국가 통합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각국은 민족주의 의식을 형성하는 오랜 과정을 거쳤다. 새로운 국경선은 종종 수 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아우디엔시아(식민지 시대 행정 및 사법 구역)나 부르봉 왕가의 관청 구역을 기반으로 설정되었고, 이는 점차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지역에서 국경선은 불안정했으며, 특히 19세기 후반에는 자원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대표적인 분쟁으로는 파라과이 전쟁(1864–70)과 태평양 전쟁(1879–84)이 있다. 파라과이 전쟁에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연합군이 파라과이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전쟁으로 파라과이는 심각한 인구 감소를 겪었다. 1864년 약 525,000명이었던 인구는 1871년 221,000명으로 급감했으며, 특히 남성 인구는 약 28,000명에 불과할 정도로 급감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볼리비아페루 연합군을 격파하고, 이전까지 볼리비아와 페루가 통제하던 초석이 풍부한 지역을 확보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볼리비아는 해안 영토를 상실하고 내륙국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라틴 아메리카는 북미 대륙에서 영토 확장을 추구하고 서반구 전체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미국의 부상에 직면했다. 미국-멕시코 전쟁(1846–48)에서 멕시코는 영토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 할양해야 했다. 1860년대에는 프랑스멕시코 제2제국을 통해 멕시코를 간접적으로 통제하려 시도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이 이웃 국가들과의 분쟁을 통해 광대한 아마존 분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1880년대에 이르러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장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는 범아메리카 회의 창설, 파나마 운하 건설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쿠바 독립 전쟁에 개입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천연 자원 수출은 19세기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 국가 경제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부유한 엘리트 계층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 시대의 경제 및 정치 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격차가 심화되었고, 소수의 토지 엘리트가 토지와 자원 대부분을 통제했다. 예를 들어, 브라질에서는 1910년까지 전체 토지의 85%를 인구의 단 1%가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금광 채굴이나 과일 재배와 같은 산업은 이러한 부유한 지주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들 대지주(라티푼디스타)는 지역 사회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주요 고용주이자 임금 지급의 주체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다수 농민이 농업 및 광산 분야의 유력자들에게 종속되는 사회 구조로 이어졌다.

만연한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구조의 특성은 군사적 능력과 후원 제공 능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카우디요의 등장을 촉진했다. 정치 체제는 이론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대통령제나 의원 내각제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카우디요나 과두 정치 세력에게 장악되기 쉬웠다. 정치 지형은 주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로 나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기존 사회 질서 유지가 국가 안정과 번영의 최선책이라고 믿었던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경제적 자유와 개인의 자율성을 통해 진보를 추구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대중적인 반란이 종종 발생했으나, 대부분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예를 들어, 콜롬비아에서는 천일 전쟁(1899-1902) 동안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약 10만 명이 사망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발전하기도 했다: 우루과이, 그리고 부분적으로 아르헨티나, 칠레, 코스타리카, 콜롬비아가 그러했다. 나머지 국가들은 명백히 과두 정치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유지했지만, 이러한 과두 정치인이나 카우디요가 때때로 대중 다수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 모든 정권들은 원자재 공급자로서 세계 경제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공통된 목표를 추구했다.

6. 20세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개입을 강화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이어진 멕시코 혁명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광범위한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중요한 민중 봉기였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전 세계 경제를 강타했으며, 원자재 수출에 크게 의존하던 라틴 아메리카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국가들은 자국 산업 보호 및 육성을 목표로 하는 수입 대체 산업화(ISI)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외부 경제 충격에 대한 취약성을 줄이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려는 시도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은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과 소련 간 이념 대립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 쿠바 혁명(1959)은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며 국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편, 냉전의 긴장 속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 독재 정권이 여러 국가에서 등장하여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어두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20세기 후반에는 군사 독재 정권들이 물러나고 민주화가 진전되는 변화가 나타났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국가들이 외채 위기에 직면하면서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주도로 워싱턴 합의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하게 되었고, 이는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 1. 1930–1960

대공황은 라틴아메리카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세계 경제 침체로 주요 수출품인 원자재 수요가 급감하면서,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의 경제 기반이 흔들렸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과 정부 지도자들은 기존 경제 정책에서 벗어나 수입 대체 산업화(ISI) 전략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국내 산업을 육성하고 중산층을 키워 외부 경제 변동에 덜 민감한 자립 경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 행정부(1933–1945)가 출범하며 대(對)라틴아메리카 정책에 변화를 보였다. 미국은 자국 기업의 이익에 반할 수 있음에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수입 대체 산업화 정책을 용인하는 좋은 이웃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일부 라틴아메리카 국가 내 미국 기업의 국유화를 허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멕시코의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은 미국 석유 회사들을 국유화하여 국영 기업 페멕스(Pemex)를 설립했으며, 멕시코 혁명 이후 지연되었던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광범위한 토지 재분배를 실시했다. 또한, 쿠바에 대한 미국의 내정 간섭 근거였던 플랫 수정안이 폐지되면서 쿠바는 정치적으로 미국의 공식적인 개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미국과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공동의 위협에 맞서 협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후 시대에는 공산주의 확산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부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각국은 미국 또는 소련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한편, 1948년 코스타리카 내전 이후 코스타리카는 새로운 헌법을 통해 상비군을 폐지하고 안정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군사력 부재로 지역 내 영향력 행사는 제한되었고, 이웃 니카라과와의 갈등 해결에 집중해야 했다.

20세기 중반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나,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쿠바였다. 쿠바 혁명은 1933년부터 권력을 장악해 온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독재 정권에 맞서 피델 카스트로가 이끌었다. 당시 쿠바 경제는 설탕 산업 의존도가 매우 높았고, 생산량의 82%가 미국 시장에 수출되었다. 플랫 수정안 폐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쿠바 정치와 사회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쿠바는 부유한 미국인들이 찾는 "미국의 위안소"라는 오명을 안고 있었다. 1940년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헌법이 제정되었음에도, 쿠바는 부패와 바티스타와 같은 독재자의 헌정 중단으로 시달렸다. 바티스타는 1952년 쿠데타로 다시 정권을 잡았다. 혁명 세력은 헌정 질서 회복, 민주주의 재건, 미국 영향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연합했다.

1959년 1월 1일, 혁명군은 마침내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켰다. 초기에 비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던 카스트로는 1959년 5월 농업 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1953-1961)와의 관계 악화를 초래했고, 미국은 외교 관계 단절, 쿠바 자산 동결, 1960년 경제 봉쇄 조치를 취했다. 이후 케네디 행정부(1961-1963)가 지원한 쿠바 망명자들의 피그스만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쿠바 혁명 정부는 더욱 급진화되었다. 쿠바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소련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6. 2. 20세기 후반 군사정권과 혁명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대에는 공산주의 확산이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각국 정부 모두에게 주요 정치적 관심사가 되었다. 냉전의 시작은 각국 정부에게 미국과 소련 중 한 편을 선택하도록 압박했다. 1948년 코스타리카 내전 이후, 코스타리카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합법적인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코스타리카 정부는 헌법에 따라 상비군 보유를 금지하게 되어 지역적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았고, 이웃 니카라과와의 갈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20세기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여러 차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봉기가 있었지만,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쿠바에서 일어났다. 쿠바 혁명은 1933년부터 쿠바의 주요 독재자였던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여 피델 카스트로가 이끌었다. 1860년대부터 쿠바 경제는 설탕 생산에 집중되었고, 20세기에는 생산량의 82%가 미국 시장에 판매되었다. 플랫 수정안이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쿠바의 정치와 일상생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쿠바는 부유한 미국인들이 온갖 불법적인 쾌락을 찾을 수 있는 "미국의 위안소"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1940년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헌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바티스타와 같은 독재자들의 부패와 헌정 중단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바티스타는 1952년 쿠데타를 통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모인 혁명가들은 헌법을 복원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재건하며 쿠바를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기를 원했다. 혁명가들은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던 카스트로는 1959년 5월 농지 개혁과 국유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행정부(1953-1961)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미국은 쿠바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미국 내 쿠바 자산을 동결했으며 1960년에는 경제 봉쇄 조치를 취했다. 케네디 행정부(1961-1963)는 쿠바 망명자들의 침공 작전(피그스만 침공)을 지원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오히려 쿠바 혁명 정부의 입장을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쿠바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임을 선언하고 소련의 동맹국이 되었다. 쿠바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배치하려는 쿠바와 소련의 군사 협력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 시기에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좌파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우파, 기독교 세력, 그리고 각국의 상류층 상당수는 이를 공산주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쿠데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쿠바와 미국의 개입으로 더욱 심화되었으며 정치적 양극화를 초래했다. 남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사 독재 정권의 통치하에 놓였다.

1970년대 남부 콘(Southern Cone) 지역의 독재 정권들은 콘도르 작전을 통해 협력하며, 일부 도시 게릴라를 포함한 수많은 좌파 반체제 인사들을 살해했다.

6. 3. 워싱턴 합의

1980년대와 90년대 동안, 워싱턴 합의로 알려진 일련의 경제 정책 처방이 워싱턴 D.C.에 기반을 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 등에 의해 경제 위기에 처한 개발도상국들에게 추진되었다. 이는 당시 "표준"적인 개혁 패키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를 포함한 일부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사회주의 또는 좌파 정부들은 워싱턴 합의에 반대하는 정책을 주장하고 일부 채택하기도 했다. 반면, 브라질, 칠레, 페루 등 다른 좌파 정부들은 실질적으로 워싱턴 합의 정책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였다. 미국 내에서도 조지프 스티글리츠대니 로드릭과 같은 일부 경제학자들은 IMF와 미국 재무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근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워싱턴 합의는 종종 신자유주의 정책과 동일시되며, 이는 자유 시장의 역할 확대, 국가 역할의 제약, 그리고 다른 국가의 주권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와 같은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인용 필요]

7. 21세기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체는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랜 기간 지속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 모색이 시작되었고, 각국의 정치 상황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칠레에서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독재가 1990년에 막을 내렸다.

또한, 수십 년간 지속되었던 내전들도 종식되기 시작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1992년 차풀테펙 평화 협정을 통해 내전이 끝났으며, 과테말라에서도 1996년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오랜 내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과테말라의 경우, 가톨릭 교회가 진실과 화해 위원회 설립을 요구하는 등 과거사 청산 노력이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들은 21세기 라틴 아메리카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7. 1. 좌파가 되다.

2008년 남미국가연합 정상회의에서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좌파 지도자들


2000년대, 혹은 일부 국가에서는 1990년대 이후부터 좌파 정당들이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에는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 브라질룰라 다 실바지우마 호세프, 파라과이페르난도 루고, 아르헨티나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 키르치너, 우루과이타바레 바스케스호세 무히카, 칠레라고스바첼레트 정부, 볼리비아에보 모랄레스, 니카라과다니엘 오르테가, 온두라스마누엘 셀라야(2009년 6월 28일 쿠데타로 축출), 에콰도르라파엘 코레아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나타난 좌파 정치인들의 물결을 이루었다.

7. 2. 우파로 바뀌다 다시 좌파로 돌아오다.

2023년 현재 우파 정부(청색)와 좌파 및 중도-좌파 정부(적색) 국가 현황


2010년대 중반 남아메리카에서는 '보수주의 물결'(onda conservadorapor)이라 불리는 정치적 현상이 나타났다. 브라질에서는 2014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우마 호세프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며 노동자당의 네 번째 집권을 시작한 시점과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또한, 2014년에 선출된 브라질 국민의회는 농촌 지역 대표, 군인, 경찰, 종교계 등 보수적인 부문의 의원 수가 증가하면서 "재민주화" 이후 가장 보수적인 의회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어진 2015년 경제 위기와 부패 스캔들 수사는 좌파 정책에 반대하며 경제적 자유주의보수주의 가치를 내세우는 우파 운동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2018년 멕시코, 2019년 아르헨티나에서의 선거 승리를 시작으로 중남미 좌파 정당의 재부상이 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은 2020년 볼리비아, 2021년 페루, 온두라스, 칠레, 그리고 2022년 콜롬비아브라질에서의 좌파 승리로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2023년 에콰도르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모두 우파 후보가 승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8. 참고 항목


  •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사
  • 라틴아메리카의 환경사
  • 라틴아메리카 역사학
  •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역사
  •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 라틴아메리카-영국 관계
  •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 역사 저널
  • 라틴아메리카 역사 회의
  • 라틴아메리카학
  • 남아메리카의 역사
  • 핑크 타이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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