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은 군대의 주요 전술 단위로, 여러 병과 부대를 통합하여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편성된다. 사단의 기원은 중세 유럽 군대에서 시작되어 근세에 이르러 지휘 및 통제의 필요성에 의해 분할되었고, 17세기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 의해 여단 편성이 정비되었다. 18세기에는 "divis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사단 제도가 체계적으로 활용되면서 나폴레옹의 군사적 성공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사단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으며, 현대에는 대부분의 군대에서 표준화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단의 종류로는 보병, 기갑, 포병, 공수, 산악 사단 등이 있으며, 각국은 자국의 군사적 특성에 맞게 사단을 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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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에 관한 - 중대 중대는 군대의 기본 전술 및 행정 단위로, 역사적으로 다양한 규모와 구성을 거쳐 현대에는 100~250명 규모로 유지되며 소대, 중대 본부 등으로 구성되고 대위가 지휘한다.
군사에 관한 - 분대 분대는 군대에서 공식 편제상 가장 작은 병력 단위이며, 육군에서는 소대의 하급 부대로 분대장이 지휘하고, 인원은 6명에서 12명 사이이며, 해군, 헌병, 경찰, 소방대 등에서도 유사한 단위로 존재한다.
사단은 군단의 기본적인 구성 단위이며, 다양한 종류의 부대로 구성되어 독립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함. 현대전에서 사단은 주요한 전술 제대로 기능함.
부대 종류
종류
기계화보병사단 보병사단 기갑사단 동원사단 지역 방위 사단 항공사단 산악사단 공수사단
2. 역사
사단은 지역에 따라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능력을 보유하는 최소의 전략 단위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여러 개의 연대나 여단과 부대를 지원하는 다수의 직할 대대로 구성된다. 사단은 제식편성부대로는 마지막 단위이다. 제식구성이란 편성이 구조도에 맞게 상시편성됨을 말한다. 군단부터는 제식구조를 가지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서 부대규모가 변한다. 즉 군단부터는 직할부대를 제외한 산하부대가 예속이 아닌 배속편성이다.
사단의 편성은 각 나라, 시기, 병과에 따라 상이하지만, 21세기 초 현대의 각 나라의 육군 사단은 2~4개 연대 또는 여단을 기초로 하여, 보병, 기병, 기갑, 포병 등의 주 전투 병과와 공병, 병참, 통신, 헌병 병과 등의 후방 지원 부대 등으로 구성된다.[2] 병력 규모는 대체로 5,000~20,000명 정도이다. 사단장은 육군 소장 계급의 장군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3][4][5]
근대 프랑스 육군의 여명기인 18세기에 발명된 편제이다. 군대의 동원, 지휘, 통제의 시스템이 전근대적인 제약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군의 규모가 거대화되면서 사단편제가 등장했다. 당시엔 서유럽, 그 중에서도 일부 뿐이었고 다른지역엔 사단 시스템이 등장하지 않았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근대적 지리학 지식의 정립, 문서화된 행정체계의 보급, 동원체제의 걸림돌이 되었던 사회경제적인 제약의 극복과 같은 과정이 나타나면서 군대편제의 규모가 꽤 늘어났다. 이전까지는 최고지휘관이 광학기기의 도움을 빌어 전장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으면서 국가의 동원능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운영할 수 있는 군대의 규모는 5만명 가량의 수준이었지만, 앞서 말한 요인으로 이러한 제약이 풀리면서 수십만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동원된 군대를 기존에 자연스럽게 구축된 교통인프라를 통해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유리하도록 "일정기간이상의 독립적인 작전수행이 가능한 규모"로 나누어 편성한 것이 사단이다. 사단의 사전적인 의미가 "장기간 독자적인 전투수행이 가능하도록 편성된 제병합동부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대규모로 동원된 군대를 교통인프라의 제약에 맞도록 편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조직이다. 한편 이 시기에 바로 여러 사단에 대한 통제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군단 편제도 나왔다.
육군의 전투병과와 근무병과로 구성된 기본적인 제병연합 부대이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 독립해서 전술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 부대이다.
2. 1. 기원
사단은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의 전략 단위로, 여러 개의 연대나 여단, 그리고 지원 부대로 구성된다. 현대 육군 사단은 보통 2~4개의 연대 또는 여단을 기반으로 하며, 보병, 기병, 기갑, 포병 등의 주 전투 병과와 공병, 병참, 통신, 헌병 등의 지원 부대로 구성된다. 병력 규모는 5,000~20,000명 정도이며, 사단장은 소장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근대 프랑스 육군에서 18세기에 처음으로 사단 편제가 등장했다. 군대의 규모가 커지면서 효율적인 지휘와 통제를 위해 사단 편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지리학 지식의 정립, 문서화된 행정 체계, 동원 체제의 발전 등으로 군대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이전에는 최고 지휘관이 광학 기기를 통해 전장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5만 명 정도가 한계였지만, 이러한 제약이 풀리면서 수십만 명의 군대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동원된 군대를 교통 인프라를 통해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일정 기간 이상 독립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한 규모"로 나눈 것이 사단이다. 대규모 군대를 교통 인프라의 제약에 맞게 편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조직이다.
서양에서 군대를 소규모 합동 부대로 편성하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사람은 프랑스 원수 모리스 드 사크스(1750년 사망)였다. 그의 저서 《나의 몽상》에는 이 아이디어가 언급되어 있다. 빅토르-프랑수아 드 브로이는 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7년 전쟁에서 사단 체제를 성공적으로 실험했다.
중세유럽에서는 군대가 하나의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병력은 수천에서 수만 명 정도였고, 명확한 편성이 없어 지휘와 전술상의 필요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근세에 들어 기능적인 지휘, 통제, 우회 전술 등의 필요성 때문에 군대를 3개 정도의 집단으로 분할하여 운용하게 되었고, 이것이 사단제의 초석이 되었다.
17세기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브 2세는 소단위 부대 편성을 합리적으로 정비하는 군사 개혁을 실시했다. 3개의 전대로 여단을 구성하게 했으며, 30년 전쟁에서 스웨덴과 동맹 관계였던 프랑스 왕국도 이 방식을 도입했다.
"division프랑스어"이라는 단어는 18세기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는 본대와 다른 길로 행군하는 등 총사령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는 부대를 의미했다. 사크스 원수는 보병 연대를 기준으로 한 보·기·포 3개 병과로 구성된 전투단의 임시 편성을 시도했다.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도 7년 전쟁에서 비슷한 부대를 실험적으로 운용했으며, 산악전에서의 여러 병과 연합 부대에 의한 분진합격 전술의 유용성이 제기되었다.
1776년프랑스 육군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단 관구'''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보병·기병·포병·공병 등 각 병과의 부대를 포함하여 1명의 중장이 통솔하는 "사단 관구"를 평시 육군의 구성 단위로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8년에는 보병 여단·기병 여단 각 1개(각 2개 연대 편성)로 사단을 편성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중 1793년부터 1794년에 걸쳐 징병제에 의해 대규모 병력이 건설되었고, 공안위원회의 라자르 카르노는 기존 용병 부대를 혼합하여 군대를 재편성했다. 1793년 국민공회는 사단 제도의 채용을 결정했고, 카르노는 보병, 기병, 포병을 포함한 1개 사단을 편성하여 사단을 3병종 연합의 대부대 단위로 발전시켰다. 1796년, 프랑스 전군은 거의 사단 편제로 통일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 편성에 약간의 수정, 개선을 더해 유기적으로 운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나폴레옹 군의 보병 사단은 2-3개 보병 여단(각 2개 연대)과 1개 포병대 및 정찰을 담당하는 약간의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별도로 기병 사단을 편성했다. 보병 사단 예하의 여단은 통상 2개였으므로, 사단은 보병 연대 4개를 기간으로 하는 4단위제 사단이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경험을 통해 다른 유럽 국가들도 프랑스군의 전술, 군제를 배워갔다. 프랑스의 1788년 타입의 사단 제도가 도입되었고, 징병제와 결합하여 국민군으로 변화하며 근대적 군대가 확립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뷔르헤의 주창에 의해 나폴레옹 군식의 사단 창설이 실현되었다. 영국군은 사단 편제 채용에 소극적이었고, 1807년까지 사단 편제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여단에서의 작전이 많이 사용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각국 육군의 단위 부대 편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병기 기술의 발전으로 포병력이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1851년에 사단 포병을 야포 96문의 연대 편제로 격상시켰다. 화력 증대와 함께 야전 축성 전술이 발전하면서 대규모 기병 부대는 쇠퇴했고, 프로이센 왕국이 1851년에 기병 사단을 편성한 것을 마지막으로 연대 이하의 단위 부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직후에는 프랑스, 독일, 러시아 모두 1788년 타입의 사단 편제로 싸웠지만, 1916년 말 독일군, 1917년 말 프랑스군이 3단위제로 전환했다. 이는 대포와 기관총의 발달로 보병 소총 화력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작전 양상이 운동전에서 진지전으로 변화하면서 사단 수 증가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대전 전부터 3개 여단으로 사단을 편성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러시아와 미국에도 3단위제가 확산되었다. 4단위제 사단에서는 연대 수가 많아 여단을 중간에 두었지만, 3단위제 사단에서는 폐지되었다.
2. 2. 초기 발전
사단은 근대 프랑스 육군의 여명기인 18세기에 발명된 편제이다. 군대의 동원, 지휘, 통제 시스템이 전근대적인 제약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군의 규모가 거대화되면서 사단 편제가 등장했다. 당시에는 서유럽, 그 중에서도 일부 지역에만 해당되었고, 다른 지역에는 사단 시스템이 없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근대적 지리학 지식의 정립, 문서화된 행정 체계의 보급, 동원 체제의 걸림돌이었던 사회경제적인 제약의 극복과 같은 변화가 나타나면서 군대 편제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이전까지 최고 지휘관이 광학 기기의 도움을 받아 전장 상황을 통제하고 국가의 동원 능력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운영할 수 있는 군대 규모는 5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요인들로 이러한 제약이 풀리면서 수십만 명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동원된 군대를 기존의 교통 인프라를 통해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운영하기 위해 "일정 기간 이상 독립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한 규모"로 나눈 것이 사단이다. 사단의 사전적 의미가 "장기간 독자적인 전투 수행이 가능하도록 편성된 제병합동부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대규모로 동원된 군대를 교통 인프라의 제약에 맞도록 편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조직이다. 한편, 이 시기에 여러 사단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군단 편제도 등장했다.
서양에서 군대를 소규모 합동 병과 부대로 편성하는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한 장군은 프랑스 원수 모리스 드 사크스(1750년 사망)였다. 그는 저서 《나의 몽상》에서 이를 언급했지만,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아이디어를 실현하지 못했다. 빅토르-프랑수아 드 브로이가 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7년 전쟁에서 사단 체제를 성공적으로 실험했다.
사단 제도가 체계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전쟁은 프랑스 혁명 전쟁이었다. 공안위원회의 군사 담당자 라자르 카르노는 이전 왕정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 동의했고, 군대는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이는 군대의 기동성을 높이고 운용을 용이하게 했으며, 대규모 프랑스 혁명군을 관리하기 쉽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휘하에서 사단은 규모가 커짐에 따라 군단으로 묶였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성공은 사단 및 군단 제도를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켰고, 나폴레옹 전쟁 말기에는 유럽의 모든 군대가 이를 채택했다.
중세유럽에서는 군대가 하나의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병력은 수천 명에서 수만 명 정도였고, 귀족, 기사와 그들의 가신, 공성 병기를 조작하는 기술자 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명확한 편성이 없었다. 이 때문에 지휘와 전술상의 필요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근세에 들어 기능적인 지휘, 통제, 우회 전술 등의 필요성 때문에 총 병력 수만 명 정도의 군대를 3개 정도의 집단으로 나누어 운용하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사단제의 초석이 되었다.
17세기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많은 군사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소단위 부대 편성을 합리적이고 합목적으로 정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3개의 전대로 여단을 구성했다. 30년 전쟁에서 스웨덴과 동맹 관계였던 프랑스 왕국도 이 방식을 도입했지만, 명칭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여 전대 대신 대대(bataillon|바타용프랑스어), 여단 대신 연대(regiment|레지망프랑스어)라고 칭했다. 연대는 상설 단위로는 최대 규모의 부대였고, 전역마다 연대군이 군 사령관 아래 집결되었지만, 이 시기의 명장 튀렌 자작은 이미 연대보다 대규모 부대 단위로서 여단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division|디비지옹프랑스어"이라는 단어 자체는 18세기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는 본대와 다른 길로 행군하는 등 총사령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는 부대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고, 본대에 합류하는 시점에서 소멸하는 일시적인 조직이었으며, 여러 병과 연합 등도 특별히 의식되지 않았다. 사크스 원수는 보병 연대를 기준으로 한 보·기·포 3개 병과로 구성된 전투단의 임시 편성을 시도했다. 당시 계몽주의를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시대 문헌 재검토가 진행되었고, 사크스 원수도 로마 군단(레기온)에서 힌트를 얻어 기존 연대를 조합하여 여단을 편성하고, 2개의 여단을 합쳐 부대를 편성했다. 그의 부하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도 7년 전쟁에서 비슷한 부대를 실험적으로 운용했으며, 부르세 장군도 산악전에서의 여러 병과 연합 부대에 의한 분진합격 전술의 유용성을 설파했다.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해외 식민지 다수를 상실한 상황에 대응하여,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776년프랑스 육군이 도입한 것이 '''사단 관구''' 제도였다. 이는 보병·기병·포병·공병 등 각 병과의 부대를 포함하여 1명의 중장이 통솔하는 "사단 관구"를 평시 육군의 구성 단위로 하는 것이었다. 중장은 평시부터 각 병과의 공동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 행동에서의 연계를 개선하고, 전시에는 이러한 부대의 지휘관이 될 책임을 졌다.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8년에는 군사 참사회의 결정에 따라 보병 여단·기병 여단 각 1개(각 2개 연대 편성)로 사단을 편성하게 되었다. 기베르 원수는 부르세 장군에 의한 분진합격 전술을 사단 편성과 결합하여 확대 적용할 것을 제창했고, 그 결과 앙시앵 레짐 시대 프랑스 육군에서는 대담한 기동·광정면 전개·포위·섬멸 전략 사상이 싹트고, 대부대에 의한 종심 전개 대형에 의한 공격 전술 방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중 1793년부터 1794년에 걸쳐 징병제로 543개 대대, 45만 명이라는 대병력이 건설되었는데, 공안위원회의 라자르 카르노는 여기에 기존 용병 부대를 혼합하여 군대를 재편성, 전열 보병 209개 반여단과 경장 기병 42개 반여단을 편성했다. 1793년 국민공회는 사단 제도 채용을 결정했지만, 혁명 전 사단 편성은 보병·기병뿐이었고 포병이 없었다. 반면 카르노는 보병 반여단 4개와 기병 반여단 2개에 화포 8문을 더하여 1개 사단으로 만들어 사단을 보·기·포 3병종 연합 대부대 단위로 발전시켰다. 1796년, 프랑스 전군은 거의 사단 편제로 통일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 편성에 약간의 수정 개선을 더해 유기적으로 운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나폴레옹 군의 보병 사단은 2-3개 보병 여단(각 2개 연대)과 1개 포병대(각 야포 4문, 곡사포 2문을 가진 중대 2개) 및 정찰을 담당하는 약간의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별도로 기병 사단을 편성했다. 보병 사단 예하 여단은 통상 2개였으므로, 사단 자체는 보병 연대 4개를 기간으로 하는 4단위제 사단이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 경험을 통해 다른 유럽 국가들도 프랑스군의 전술·군제를 배웠다. 프랑스의 1788년 타입 사단 제도 도입이 진행되어, 징병제와 결합하여 국민군으로 변화하고 근대적 군대가 확립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패전 이후 1807-13년 군제 개혁에서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뷔르헤의 주창으로 국민적 징병에 의한 대병력 조성과 함께 나폴레옹 군식 사단 창설이 실현되었다. 영국군은 지상 병력 열세로 사단 편제 채용에 소극적이었고, 1807년까지 사단 편제를 설치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단 작전이 많이 사용되었고, 사단 편제도 안정되지 못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각국 육군의 단위 부대 편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병기 기술의 질적 향상으로 편제 내 포병력 증강 경향이 나타났다.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1851년 사단 포병을 야포 96문의 연대 편제로 격상시켰다. 화력 증대와 함께 야전 축성 전술 조직화가 진행되면서 대단위 기병 부대는 쇠퇴했다. 프로이센 왕국이 1851년 기병 사단을 편성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후 정찰을 주 임무로 하는 여단 규모 부대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연대 이하 단위 부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직후인 1914년, 프랑스, 독일, 러시아 모두 1788년 타입의 사단 편제로 싸웠지만, 1916년 말 독일군, 1917년 말 프랑스군이 3단위제로 이행했다. 이는 대포 및 기관총 발달로 보병 소총 화력 지위가 상대적으로 저하되고, 작전 양상이 운동전에서 진지전으로 이행하면서 사단 수 증가가 시급해져 보병을 감축하고 포병, 공병에 충당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대전 전부터 3개 여단으로 사단을 편성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러시아와 미국에도 3단위제가 파급되었다. 4단위제 사단에서는 연대 수가 많아 여단이라는 중간 결절을 두어 최하위 장관을 여단장으로 한 반면, 3단위제 사단에서는 이를 폐지했다. 일본군에서는 사단장과 연대장 사이에 보병단장이, 미국군이나 프랑스군에서는 사단장을 보좌하는 부사단장이 설치되었다.
4단위제 사단
사단
여단
연대
연대
여단
연대
연대
3단위제 사단
사단
연대
연대
연대
일본 육군의 3단위제 사단
보병사단
보병단
보병연대
보병연대
보병연대
2. 3.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주요 교전국의 보병 사단 규모는 프랑스군[2]과 러시아군에서 약 16,000명, 독일 제국군에서 17,5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영국군에서 약 18,000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사단 규모는 1914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고, 영국과 독일 모두 사단 부대의 하위 부대 수를 줄였다. 그러나 병력 수는 줄었지만 1917년까지 사단의 무장은 훨씬 더 개선되었다. 반면에 1917년 프랑스에 도착한 미국 보병 사단은 28,061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17,666명이 소총병이었다.[8]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사단 체계는 수적으로 정점에 달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창설된 보병 및 기병 사단 외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공수, 전차, 기계화, 기동 사단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사단이 등장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어느 시점에서든 천 개가 넘는 사단 규모의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1941년–1945년의 대조국 전쟁 동안 창설된 소총 사단의 수는 약 2,000개로 추정된다. 나치 독일은 수백 개의 번호가 매겨지거나 명명된 사단을 보유했고, 미국은 최대 91개의 사단을 운용했다.
전쟁 중 사단 구조의 주목할 만한 변화는 정방형 사단 (각각 2개 연대로 구성된 2개 여단으로 구성됨)에서 삼각 사단 (여단 없이 3개 연대로 구성됨)으로의 전환이 완료된 것이었는데, 이는 많은 유럽 군대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10] 이는 유연성을 높이고 지휘 체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행되었다. 삼각 사단 구조는 "2 전진, 1 후방" 전술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사단의 연대 2개가 적과 교전하는 동안 1개 연대가 예비로 남을 수 있게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모든 사단은 자체 포병 부대를 갖추도록 예상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국가에 따라) 연대 규모였다. 사단 포병은 더 큰 교전에서 화력을 증강하기 위해 군단 수준의 지휘부에서 가끔 차출되었다.
전쟁 중 미국은 연대 전투단을 사용했는데, 이는 부착되거나 자체 사단 부대가 보병 연대에 분할되어 자체 기갑, 포병 및 지원 부대를 갖춘 더 작은 합동 무기 부대를 창설했다. 이 전투단은 여전히 사단 지휘를 받지만 전장에서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졌다.
사단 내의 '''자체''' 부대는 사단 지휘 하에 직접 운영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연대에서 통제하지 않는 부대였다. 이러한 부대는 주로 지원 부대였으며, 신호 중대, 의무 대대, 보급 수송대 및 행정 부대가 포함되었다.
'''부착된''' 부대는 특정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단 지휘 하에 배치된 더 작은 부대였다. 이러한 부대는 일반적으로 전차 대대, 전차 격파 대대 또는 기병 정찰 중대와 같은 전투 부대였다.
2. 4. 현대
현대 사단의 편성은 각 나라, 시기, 병과에 따라 다르지만, 21세기 초 현대의 각국 육군 사단은 2~4개 연대 또는 여단을 기본으로 한다. 보병, 기병, 기갑, 포병 등의 주 전투 병과와 공병, 병참, 통신, 헌병 병과 등의 후방 지원 부대로 구성된다.[2] 병력 규모는 대체로 5,000~20,000명 정도이며, 사단장은 육군 소장 계급의 장군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3][4][5]
사단은 지역에 따라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능력을 보유하는 최소의 전략 단위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여러 개의 연대나 여단과 부대를 지원하는 다수의 직할 대대로 구성된다. 사단은 제식편성부대로는 마지막 단위이다. 제식구성이란 편성이 구조도에 맞게 상시편성됨을 말한다. 군단부터는 제식구조를 가지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서 부대규모가 변한다. 즉 군단부터는 직할부대를 제외한 산하부대가 예속이 아닌 배속편성이다.
현대에는 대부분의 군대가 사단 구조를 표준화했다. 이는 국가별로 사단의 규모나 구조가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단은 10,000명에서 1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며,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체 지원 능력을 갖춘 부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단의 직접적인 편성은 주력 전투 병과의 여단 또는 전투단 1~4개와, 전투 지원 여단 또는 연대(보통 포병) 1개, 그리고 정보, 군수, 정찰, 공병 등 필요한 특수 지원 임무를 위한 직할 대대 몇 개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군대는 각 사단 유형에 대한 이상적인 편제 강도를 표준화하며, 이는 사단의 정확한 부대, 인원, 장비 할당을 명시하는 편성표 및 장비표 (TO&E)에 담겨 있다.
현대 사단은 20세기 후반에 많은 군대에서 주요 식별 가능한 전투 부대가 되었고, 여단을 대체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이러한 추세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사단이 주력 전투 부대로 가장 많이 사용된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교전국들이 1,000개 이상의 사단을 투입했다. 그 이후 기술 발전으로 각 사단의 전투력은 증가했다.
3. 구조
보병사단은 시기와 국가에 따라 구성이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3~4개의 연대와 여러 개의 사단 직할 대대로 편성된다. 1953년 11월 당시 미국 육군 보병사단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총 18,180명 규모)
구성
내용
사단사령부
보병연대 (3개)
각 연대마다 3개 보병대대 (3,661명)
포병여단
5개 포병대대, 야포 72문
전차대대
공병대대, 의무대대, 병기대대
수색중대, 통신중대, 헌병중대, 보충중대, 군악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사단 체계는 수적으로 정점에 달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창설된 보병 및 기병 사단 외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공수, 전차, 기계화, 기동 사단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사단이 등장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어느 시점에서든 천 개가 넘는 사단 규모의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1941년–1945년의 대조국 전쟁 동안 창설된 소총 사단의 수는 약 2,000개로 추정된다. 나치 독일은 수백 개의 번호가 매겨지거나 명명된 사단을 보유했고, 미국은 최대 91개의 사단을 운용했다.[10]
전쟁 중 사단 구조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는 정방형 사단(2개 여단, 각 여단은 2개 연대로 구성)에서 삼각 사단(3개 연대로 구성, 여단 없음)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는 많은 유럽 군대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방식으로, 유연성을 높이고 지휘 체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행되었다. 삼각 사단 구조는 "2 전진, 1 후방" 전술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사단의 연대 2개가 적과 교전하는 동안 1개 연대가 예비로 남을 수 있게 했다.[10]
제2차 세계 대전의 모든 사단은 자체 포병 부대를 갖추도록 예상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국가에 따라) 연대 규모였다. 사단 포병은 더 큰 교전에서 화력을 증강하기 위해 군단 수준의 지휘부에서 가끔 차출되었다.
사단 내의 '''자체''' 부대는 사단 지휘 하에 직접 운영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연대에서 통제하지 않는 부대였다. 이러한 부대는 주로 지원 부대였으며, 통신 중대, 의무 대대, 보급 수송대 및 행정 부대가 포함되었다.
'''부착된''' 부대는 특정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단 지휘 하에 배치된 더 작은 부대였다. 이러한 부대는 일반적으로 전차 대대, 전차 격파 대대 또는 기병 정찰 중대와 같은 전투 부대였다.
현대에는 대부분의 군대가 사단 구조를 표준화했다. 이는 국가별로 사단의 규모나 구조가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단은 10,000명에서 1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며,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체 지원 능력을 갖춘 부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단의 직접적인 편성은 주력 전투 병과의 여단 또는 전투단 1~4개와, 전투 지원 여단 또는 연대(보통 포병) 1개, 그리고 정보, 군수, 정찰, 공병 등 필요한 특수 지원 임무를 위한 직할 대대 몇 개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군대는 각 사단 유형에 대한 이상적인 편제 강도를 표준화하며, 이는 사단의 정확한 부대, 인원, 장비 할당을 명시하는 편성표 및 장비표(TO&E)에 담겨 있다.
현대 사단은 20세기 후반에 많은 군대에서 주요 식별 가능한 전투 부대가 되었고, 여단을 대체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이러한 추세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사단이 주력 전투 부대로 가장 많이 사용된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교전국들이 1,000개 이상의 사단을 투입했다. 그 이후 기술 발전으로 각 사단의 전투력은 증가했다.
4. 종류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사단 체계는 수적으로 정점에 달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창설된 보병사단 및 기병사단 외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공수사단, 기갑사단, 기계화보병사단 등 새로운 유형의 사단이 등장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어느 시점에서든 천 개가 넘는 사단 규모의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1941년–1945년의 대조국 전쟁 동안 창설된 소총 사단의 수는 약 2,000개로 추정된다. 나치 독일은 수백 개의 번호가 매겨지거나 명명된 사단을 보유했고, 미국은 최대 91개의 사단을 운용했다.
전쟁 중 사단 구조의 주목할 만한 변화는 정방형 사단(2개 여단, 각 여단은 2개 연대로 구성)에서 삼각 사단(여단 없이 3개 연대로 구성)으로의 전환이 완료된 것이었는데, 이는 많은 유럽 군대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10] 이는 유연성을 높이고 지휘 체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행되었다. 삼각 사단 구조는 "2 전진, 1 후방" 전술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사단의 연대 2개가 적과 교전하는 동안 1개 연대가 예비로 남을 수 있게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모든 사단은 자체 포병 부대를 갖추도록 예상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국가에 따라) 연대 규모였다. 사단 포병은 더 큰 교전에서 화력을 증강하기 위해 군단 수준의 지휘부에서 가끔 차출되었다.
전쟁 중 미국은 연대 전투단을 사용했는데, 이는 부착되거나 자체 사단 부대가 보병 연대에 분할되어 자체 장갑차, 포병 및 지원 부대를 갖춘 더 작은 합동 무기 부대를 창설했다. 이 전투단은 여전히 사단 지휘를 받지만 전장에서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졌다.
사단 내의 '''자체''' 부대는 사단 지휘 하에 직접 운영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연대에서 통제하지 않는 부대였다. 이러한 부대는 주로 신호 중대, 의무 대대, 보급 수송대 및 행정 부대 등의 지원 부대였다.
'''부착된''' 부대는 특정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단 지휘 하에 배치된 더 작은 부대였다. 이러한 부대는 일반적으로 전차 대대, 전차 격파 대대 또는 기병 정찰 중대와 같은 전투 부대였다.
현대에는 대부분의 군대가 사단 구조를 표준화했다. 이는 국가별로 사단의 규모나 구조가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단은 10,000명에서 1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며,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체 지원 능력을 갖춘 부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단의 직접적인 편성은 주력 전투 병과의 여단 또는 전투단 1~4개와, 전투 지원 여단 또는 연대(보통 포병) 1개, 그리고 정보, 군수, 정찰, 공병 등 필요한 특수 지원 임무를 위한 직할 대대 몇 개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군대는 각 사단 유형에 대한 이상적인 편제 강도를 표준화하며, 이는 사단의 정확한 부대, 인원, 장비 할당을 명시하는 편성표 및 장비표(TO&E)에 담겨 있다.
현대 사단은 20세기 후반에 많은 군대에서 주요 식별 가능한 전투 부대가 되었고, 여단을 대체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이러한 추세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사단이 주력 전투 부대로 가장 많이 사용된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교전국들이 1,000개 이상의 사단을 투입했다. 그 이후 기술 발전으로 각 사단의 전투력은 증가했다.
사단은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특정 유형의 부대를 적절한 지원 부대와 함께 편성하기 위해 종종 편성된다. 최근에는 사단이 다양한 전투 병과를 대표하는 예하 부대와 함께 합동 병과 부대로 주로 편성되었다. 이 경우, 사단은 종종 더 전문화된 사단의 이름을 유지하며, 해당 전문 분야에 적합한 주요 역할을 여전히 수행할 수 있다.
보병으로 이루어진 사단이다. 차량으로 기동력을 높인 사단을 '''차량화보병사단''', 전차 및 장갑차로 공격력 및 기동력을 높인 사단을 '''기계화보병사단'''이라고 한다.
소련과 러시아에서는 보병 사단을 종종 "소총 사단"이라고 부른다. 기계화 보병 사단은 다수의 보병 하위 부대가 무개 차량으로 수송되는 사단이다. 기갑 보병 사단은 다수의 보병 하위 부대가 장갑 수송차 (APC) 또는 보병 전투차 (IFV) 또는 둘 다, 또는 심지어 보병 수송을 위해 설계된 다른 종류의 장갑 전투 차량으로 수송되는 사단이다. 나치 독일의 기갑 보병 사단은 Panzergrenadierde 사단이라고 불렸다. 러시아에서는 "자동차 소총 사단"이라고 알려졌다.
다른 편성에 비해 보병 사단을 편성하는 것이 쉽고 단순하기 때문에, 보병 사단은 역사적인 전쟁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미국 사단 대부분이 보병 사단이었다.
보병 사단은 또한 이동 수단이나 짐말을 사용하여 이동하는 것을 보완하면서 도보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사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했다. 예를 들어, 1944년에 나치 독일은 일부 보병 편성을 정규 사단보다 약간 작고 기관단총, 자동 화기 및 대전차 무기를 더 광범위하게 지급하는 Volksgrenadier 사단으로 지정했는데, 이는 방어전에 사용될 현실을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1945년에는 나치 독일이 크릭스마리네의 구성원을 차출하여 "해군 사단"을 만들었는데, 이는 헤어의 보병 사단보다 품질이 낮았다. 또한 루프트바페의 구성원으로 루프트바페 야전 사단"을 만들었다.
보병 사단은 때때로 수비대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국경 경비 사단", "고정 보병 사단" 및 "요새 사단"이라고 명명되었으며, 나치 독일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4. 2. 기갑사단
전차와 기계화 보병으로 이루어진 중장비 사단이다. 기계화보병사단과 비교할 때 기갑사단의 전차대대의 숫자(비율)가 많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차의 개발로 인해 일부 국가에서는 전차를 사단 규모의 부대로 편성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많은 국가들이 기병 사단과 같은 방식으로 기병을 장갑차량(전차 포함)으로 대체하고 지원 부대를 기계화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부대에 전차는 많았지만 보병 부대가 적어 전투에서 다루기 어려웠다. 대신, 전차, 보병, 포병 및 지원 부대의 수를 조정하여 더 균형 잡힌 접근 방식을 취했다.
"전차 사단" 또는 "기계화 사단"은 장갑 사단의 다른 이름이다. "판저 사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의 장갑 사단을 지칭했다.[10]
전쟁 이후, 대부분의 장갑 사단과 보병 사단은 전차 부대와 보병 부대를 모두 상당수 보유하게 되었다. 차이점은 보통 배속된 대대의 구성에 있었다. 또한 일부 군대에서는 장갑 사단이 다른 사단보다 더 진보되거나 강력한 전차를 장비하고 있다.
4. 3. 포병사단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1942년에 전문화된 "포병 사단"의 개념을 개발했으며, 이는 러시아 내전 후반부터 계획되었다.[10] 포병 사단은 곡사포, 대전차포, 로켓 포병 (다연장 로켓 및 전술 미사일) 및 박격포 (견인 및 자주식) (역사적으로는 공성 포병)만을 사용하는 전문화된 사단이며, 일반적으로 상위 합동 병과 부대에 집중적인 화력 지원을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들은 주로 보병과 기갑 부대를 지원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전투 지원 부대이다.
4. 4. 공수사단
비행기에서 낙하하여 기습을 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경무장사단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영국, 독일은 수송기로 신속하게 수송하거나 낙하산 또는 글라이더로 특정 지역에 투하할 수 있는 특수 경보병 사단을 실험했다. 이는 고품질의 장비와 훈련을 모두 필요로 했으며, 징집병이 아닌 지원병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를 만들었다.
육군이 아닌 루프트바페 소속의 독일 제1 공수 사단은 1941년 크레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과 영국 공수 부대는 1943년 시칠리아 침공에 처음 참여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공수 사단의 사용은 성공에 결정적이었다. 1944년 마켓 가든 작전과 1945년 바시티 작전에서도 연합군 공수 작전이 이루어졌다.
특정 공수 임무에 사용되지 않을 때는 공수 사단은 일반적으로 경보병 사단으로 기능했다.
공중 강습 사단은 주로 헬리콥터를 사용하여 병력을 수송하는 공수 사단이다.
4. 5. 산악사단
산악 사단은 산악전과 같이 언덕이나 산악 지형, 또는 북극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특별한 훈련을 받고 장비를 갖춘 보병 사단이다. 이러한 부대의 예시로는 미국 제10 산악 사단, 독일 제1 스키 사단, 프랑스 제27 알프스 산악 보병 사단 등이 있다.[11]
나치 독일은 점령지에서 게릴라에 대한 후방 보안을 제공하고 민간인들 사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보안 사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보병 사단과 같은 구조였지만, 낮은 질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전선에서 직접 복무할 의도는 아니었다. 이러한 유형의 SS 부대는 "SS ''경찰'' 사단"이라고 불렸다.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보안 사단을 조직했다(:Category:제2차 세계 대전 중 NKVD 사단). 몇몇 경우, NKVD 사단은 소총 사단으로 전선 전투에 투입되었다.[12]
사단은 일반적으로 서수와 유형 이름을 결합하여 지정된다 (예: "제13보병사단"). 별명은 종종 부여되거나 채택되지만, 이는 종종 부대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이탈리아 육군의 사단이 그 예외 중 하나이다. 어떤 경우에는 사단 명칭에 서수가 없는 경우가 있으며, 이는 종종 고유한 부대나 정예 또는 특수 부대로서의 부대의 경우이다.
냉전 종식 이후, 다양한 사단의 유형 이름은 덜 중요해졌다. 현대 사단에 모듈식 여단 전투단(BCT)이 도입되면서 명칭 유형은 더욱 덜 중요해졌는데, 이제 사단은 경보병, 스트라이커, 기갑 BCT의 조합으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 육군의 대부분의 보병 연대는 행정상의 목적으로 "사단"이라고 불리는 여러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위대 및 공수 사단 – 2022년~현재
스코틀랜드, 웨일스 및 아일랜드 사단 – 2017년~현재
왕 사단 – 1968년~현재
여왕 사단 – 1968년~현재
스코틀랜드 사단 – 1968년~2017년
웨일스 공 사단 – 1968년~2017년
경보병 사단 – 1968년~현재
영국 육군은 오랫동안 사단 편제를 도입하는 데 소극적이었지만, 보어 전쟁의 교훈에서 여러 병과 연합 사단을 상비하게 되었고 1907년부터 상설화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임시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남아, 평시에는 사단 예하에 통신, 항공, 정보 등의 부대만이 있었고, 전시 등에 필요에 따라 2~4개의 여단을 지휘 하에 두고 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콜롬비아 육군에서 사단은 2개 이상의 여단으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 소장이 지휘한다. 현재 콜롬비아 육군은 8개의 현역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사단
사령부
관할 구역
제1사단
산타 마르타
콜롬비아 북부 (세사르 주, 라과히라 주, 마그달레나 주, 수크레 주, 볼리바르 주, 아틀란티코 주)
콜롬비아 북동부 (카사나레 주, 아라우카 주, 비차다 주, 과이니아 주, 보야카 주의 쿠바라, 피스바, 파야, 라브란사그란데, 파자리토)
5. 1.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1948년에 정치적 이념에 따라 두 개의 정부로 나뉘었고,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휴전 중인 분단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대한민국 육군의 사단은 항상 준비된 상태를 갖춘 '''상비사단'''과 전시 전력 보강 및 지역 방어를 위한 '''지역방위사단'''(또는 향토사단), 그리고 전투 전력 보강을 위해 지역별 예비군을 모아 편성되는 '''동원 예비군 사단'''(또는 동원사단)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국방개혁 2020 계획에 따라 다수의 사단이 해체되어, 현재 육군은 37개, 해병대는 2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육군 사단은 장성이 지휘하는 주요 전술 부대이다. 현재 육군 39개 사단과 해병대 2개 사단이 있다. 41개의 육군 사단 중 6개는 기계화 보병 사단, 16개는 보병 사단, 12개는 "향토 보병 사단", 7개는 "동원 보병 사단"이다. 제1해병사단은 상륙 작전에 특화되어 있고, 제2해병사단은 경계 작전을 수행하며 DMZ의 한 구역을 담당한다.
대한민국 육군 사단은 일반적으로 외국 사단보다 규모가 작다. 기계화 보병 사단은 약 9,900명, 보병 사단은 약 11,500명으로 완전 편성되며, 다른 유형의 사단은 예비 병력 수준에 따라 규모가 더 작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29,000명의 현역 부대가 2개 사단, 2개 여단 및 지원 부대로 나뉜다.
기계화 보병, 보병, 향토 보병 및 해병대 사단은 소장이 지휘하며, 동원 보병 사단은 준장이 지휘한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육군 부대 명칭에는 숫자 4가 포함되지 않는다.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 사단의 편성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육군 사단을 한국의 실정에 맞춰 축소한 것이었다.
보병 사단 (약 10,000명)
3개 보병 연대 (약 2,650명)
3개 보병 대대
대(對)전차포 중대 (M1 57mm 대전차포 × 6문)
포병 대대
3개 경(輕)포병 중대 (각 중대 M3 105mm 곡사포 × 5문)
정찰 중대 (M20 장갑차 × 4량)
공병 대대
통신 중대
후방 지원대
5. 2. 미국
미국 육군은 약 17,000 ~ 21,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며 소장이 지휘한다. 여단 전투단 체계가 적용된 뒤에는 사단은 4개 여단 전투단과 전투 항공 여단을 예속받으며, 지원, 야전 포병/화력, 기동, 공병 등의 여단이 일시적으로 배속되어 사단을 지원한다.
미국 해병대는 3개 보병 연대, 1개 포병 연대, 전차, 경량 기갑 수색, 상륙 돌격 차량, 수색, 전투 공병, 그리고 본부 대대로 구성된다. 현재 3개 정규 사단, 1개 예비 사단을 갖추고 있다.
1888년 5월 12일에 진대를 폐지하고, 그 대신 사단을 설치하였다. 이것이 상설 사단의 시작이다. 대일본 제국 육군에서는 항구적인 부대인 보병 연대와 다른 여러 병과를 가지고 조직된 전략 단위인 사단이라는 단위를 중시하여 육군 중장으로 보임했고, 더욱이 특히 친임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우수한 젊은 장교를 등용하기 위해, 사단장 직무 대행 형태로 소장이 임명되게 되었다. 중일 전쟁 개전 이전의 평시에는 해외 영토 등에 조선군, 대만군, 관동군, 지나 주둔군의 4군이 있었지만, 이 중 예하에 상설 사단을 거느린 것은 조선군[30]뿐이었고, 나머지는 사단과 비교하여 규모와 병력이 특히 컸다고 할 수 없었다. 대일본 제국 육군은 내지에 있는 사단과, 해외 영토 등에 있는 혹은 임시로 편성되는 군과의 집합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각각 천황[31]에게 직속되어, 천황 아래에 대일본 제국 육군 총사령관과 같은 군직은 없었다.
또한, 내지에 있는 일본군의 전략 조직은 사단뿐이었으며, 상설 사단이 내지에서의 군정 및 작전과 교육을 담당했다. 이 때문에, 유사시에 사단이 외지로 출정하면, 내지에 유수 사단(留守師団)이 설치되었다[32].
태평양 전쟁 개전부터 말기에 걸쳐, 4 내지 3개의 보병 연대를 기간으로 한 통상의 사단 외에, 전차 사단, 고사포 사단, 비행 사단 등 전문 부대만의 사단이 편성되었다. 이러한 전문 부대만의 사단은 관구를 가지지 않고 군정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작전에 있어서도 타 부대와의 연계를 전제로 한 것으로, 단독 작전 수행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근위사단, 전차사단, 고사포사단 및 비행사단을 제외하고, 사단에 대해서는 단순히 "제○사단"으로 숫자만 붙여 호칭했다. 사단제 발족 당시의 번호는 진대제의 군관의 번호를 그대로 사단 번호로 했다. 이것이 제1사단부터 제6사단이다. 그 후에는 편성된 순서대로 사단 번호를 순서대로 증가시켰다. 우가키 군축에 의한 사단 폐지에 즈음하여 그 번호는 결번 처리되었다.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앞서 우가키 군축으로 결번이 된 사단 번호를 부활시킨 외에도, 잇따라 수를 늘려갔다. 대량 동원 중에는 끊어지기 쉬운 번호로 묶은 사단도 있었으며, 1940년에 주로 내지에서의 보충 임무를 기대하며 설치한 제51부터 제57의 50번대 사단이 그 시작이다. 유수사단의 담당으로 편성된 특설사단에 100번대의 번호를 부여했다(제101사단 등). 그리고, 쇼와 20년 (1945년) 4월에는 본토 결전 제2차 병비로서 편성한 사단에 200번대의 번호를 부여했다(제201사단 등).
사단의 군대 부호는 '''D'''가 사용되었고, 1D(제1사단), 2D(제2사단) 등으로 표기했다. 근위사단은 GD이다.
5. 4. 독일
독일 연방군은 1990년 국가인민군과 병합하고 냉전이 끝난 뒤, 1994년부터 규모를 줄여가기 전에는 1개 산악 사단, 1개 공수 사단, 7개 기갑척탄병(기계화보병) 사단, 6개 기갑사단(전차)을 보유했었다. 2021년 현재 독일 육군은 3개의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소련군에서 사단(diviziya|디비지야ru)은 모든 군에서 부대를 지칭할 수 있으며, 연대 및 대대, 비행대 또는 해군 함선과 같은 해당 군에 적합한 하위 부대를 포함했다. 거의 모든 사단은 군의 병과에 관계없이, 주로 연대인 3+1+1 구조의 주요 하위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23]
러시아 군사 용어에도 비슷한 발음의 군사 조직 단위가 있는데, 이를 ''divizion'' (дивизион)이라고 한다. ''divizion''은 포병 또는 기병 대대, 함선의 특정 승무원(korabel'nyy divizion|코라벨니 디비지온ru, '함선 대대'), 또는 해군 함선 그룹(divizion korabley|디비지온 코라블레이ru)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전차 및 기계화 보병 사단은 거의 비상 편제 상태로 축소되었으며, 많은 사단이 "무기 및 장비 보관 기지"(러시아 약어 BKhVT)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기지 또는 "현원" 사단은 정규 편제 기계화 보병 또는 전차 사단의 모든 중장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인력은 500명 정도로 최소한의 수준이었다. 현원 사단의 장교와 병사들은 주로 장비의 작동 상태를 유지하는 데 집중한다.[25] 전시 동원 시, 이러한 사단은 완전한 인력으로 증강될 수 있었지만, 평시에는 현원 사단은 전투에 부적합했다.
2008년 러시아 군사 개혁 이후, 대부분의 현역 사단은 해체되거나 여단으로 전환되었다.
2013년부터 여러 사단이 재활성화되었다. 2020년, 러시아 지상군은 10개의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영국 육군의 대부분의 보병 연대는 행정상의 목적으로 "사단"이라고 불리는 여러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위대 및 공수 사단 – 2022년~현재
스코틀랜드, 웨일스 및 아일랜드 사단 – 2017년~현재
왕 사단 – 1968년~현재
여왕 사단 – 1968년~현재
스코틀랜드 사단 – 1968년~2017년
웨일스 공 사단 – 1968년~2017년
경보병 사단 – 1968년~현재
영국 육군은 오랫동안 사단 편제를 도입하는 데 소극적이었지만, 보어 전쟁의 교훈에서 여러 병과 연합 사단을 상비하게 되었고 1907년부터 상설화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임시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남아, 평시에는 사단 예하에 통신, 항공, 정보 등의 부대만이 있었고, 전시 등에 필요에 따라 2~4개의 여단을 지휘 하에 두고 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5. 7. 콜롬비아
콜롬비아 육군에서 사단은 2개 이상의 여단으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 소장이 지휘한다. 현재 콜롬비아 육군은 8개의 현역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사단
사령부
관할 구역
제1사단
산타 마르타
콜롬비아 북부 (세사르 주, 라과히라 주, 마그달레나 주, 수크레 주, 볼리바르 주, 아틀란티코 주)
콜롬비아 북동부 (카사나레 주, 아라우카 주, 비차다 주, 과이니아 주, 보야카 주의 쿠바라, 피스바, 파야, 라브란사그란데, 파자리토)
참조
[1]
서적
APP-6C Joint Military Symbology
http://armawiki.zumo[...]
NATO
2011-05-01
[2]
웹사이트
The army of 1914 in Seine-et-Ma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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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3
[30]
문서
第19師団と第20師団は朝鮮軍に隷属した
[31]
문서
天皇は大元帥として日本陸軍の唯一最高の統帥権を有していた
[32]
문서
参謀本部は軍隊では無く官衙(役所)であり、担当は作戦のみで、常設の4軍を除く軍(総軍・方面軍・軍)は作戦軍であり、戦闘序列(指揮系統)を規定するものである
[33]
문서
部隊組織である軍隊のみでなく、管区毎にある連隊区司令部や要塞司令部等の官衙、衛戍病院(陸軍病院)等の諸機関も、師団長が統率した
[34]
웹사이트
防衛力整備計画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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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6
[35]
문서
第6軽機甲旅団の人員は7500名、第9師団の人員は約7000名である。
[36]
뉴스
北・東富士の全域を使用した訓練検閲
https://www.mod.go.j[...]
2023-02-04
[37]
뉴스
朝霞駐に1偵察戦闘大隊が新編「新たな歴史を」
https://dailydefense[...]
2022-04-06
[38]
문서
第24普通科連隊は西部方面混成団に移動
[39]
간행물
MCあくしずVol.40
201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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