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오를레앙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오를레앙은 프랑스 루아레 주의 주도로, 루아르 강 유역에 위치한 도시이다. 갈리아 시대에는 드루이드의 회합 장소였고, 로마 시대에는 '키비타스 아우렐리아노룸'으로 불리며 재건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오를레앙 왕국의 수도였으며, 백년 전쟁 중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잉글랜드 군의 포위에서 벗어났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오를레앙 대학교가 설립되어 학문적 명성을 얻었으며, 현재는 제약, 물류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매년 루아르 축제, 재즈 축제, 조아니크 축제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며, 오를레앙 대성당, 오텔 그로슬로 등 다양한 역사적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루아레주 - 플뢰리레오브레
    플뢰리레조브레는 오를레앙 숲 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예배당 설립, 철도역 개통, 도시 이름 변경, 트램 개통 등 역사적 변화를 겪었으며, 다양한 교통망과 교육 시설을 갖추고 그라차니차, 포르미아와 자매 결연을 맺었고 앙투안 카레, 조수에 에스카르탱, 피에르 페로이 등 유명 인물을 배출했다.
  • 루아레주의 코뮌 - 플뢰리레오브레
    플뢰리레조브레는 오를레앙 숲 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예배당 설립, 철도역 개통, 도시 이름 변경, 트램 개통 등 역사적 변화를 겪었으며, 다양한 교통망과 교육 시설을 갖추고 그라차니차, 포르미아와 자매 결연을 맺었고 앙투안 카레, 조수에 에스카르탱, 피에르 페로이 등 유명 인물을 배출했다.
  • 잔 다르크 - 샤를 7세
    샤를 7세는 백년 전쟁 시기에 프랑스를 통치했으며,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프랑스를 재건했으나 아들과의 갈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잔 다르크 - 교황 베네딕토 15세
    자코모 델라 키에사라는 본명을 가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평화 중재 노력을 펼쳤으나 실패하였고, 전후 인도주의 활동, 외교 관계 수립, 교회법 개정, 선교 활동 강조 등 교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오를레앙
기본 정보
오를레앙의 기
오를레앙의 문장
문장
도시 모토Hoc Vernant Lilia Corde
도시 모토 (번역)이 마음이 백합을 피어나게 한다
위치프랑스
로와레현
아롱디스망오를레앙 아롱디스망
캉통오를레앙-1, 2, 3, 4, 라 페르테생토뱅
INSEE 코드45234
우편 번호45000
시장세르주 그루아르
시장 소속 정당LR
시장 임기2020–2026
면적27.48 km²
인구 (2017년)116,685명
인구 밀도4,246명/km²
도시권 인구285,926명 (2020년)
메트로권 인구454,208명 (2020년)
도시권 면적289.5 km² (2020년)
메트로권 면적3,422 km² (2020년)
주민 애칭Orléanais (오를레아네)
고도116m
최소 고도90m
최대 고도124m
지리 좌표47°54′09″N 1°54′32″E
웹사이트오를레앙 공식 웹사이트
구글 지도 검색어오를레앙
교육
학생 수약 20,000명

2. 역사

오를레앙은 루아르 강 유역의 주요 도시로, 갈리아 시대부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대에는 카르누테스 부족의 중심지인 '''Cenabumlat'''이었으나, 로마 제국 시대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며 '''Aurelianumlat'''으로 불렸고, 이것이 오늘날의 이름 '오를레앙'이 되었다. 이후 알란족이 정착하기도 했다.

메로빙거 왕조와 카페 왕조 시대를 거치며 왕국의 수도 또는 공국의 수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루아르 강의 전략적 위치 덕분에 중세 시대에는 파리, 루앙과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번성했다.

1428년 9월, 오를레앙 공성전 당시의 오를레앙


백년 전쟁 중인 1429년, 영국군에 포위되었으나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극적으로 해방된 오를레앙 공성전은 도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힌다. 이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가 매년 5월에 열린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루아르 계곡을 찾는 왕족과 귀족들 덕분에 번영을 누렸고, 법학으로 유명했던 오를레앙 대학교는 장 칼뱅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프랑스 종교 전쟁 시기에는 위그노가톨릭 세력 간의 충돌로 인해 오를레앙 대성당이 파괴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대성당은 이후 앙리 4세 때부터 재건되기 시작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근대에는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을 겪었으며,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프로이센군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주요 물류 거점이 되었고, 연합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후 오를레앙은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도시 중 하나로, 파괴된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현대적인 도시 계획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는 역사와 문화, 경제, 학문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2. 1. 고대

오를레앙 지역은 갈리아 시대에 '''케나붐'''(Cenabumlat)이라 불리는 카르누테스 부족의 주요 도시이자 요새였다. 이곳은 드루이드들이 매년 회합을 열던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기원전 52년, 갈리아 전쟁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도시는 파괴되었다.[16][37]

3세기 후반, 로마 제국 시대에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도시를 재건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키비타스 아우렐리아노룸'''(Civitas Aurelianorumlat, "아우렐리아누스의 도시") 또는 '''아우렐리아눔'''(Aurelianumlat)으로 명명했다.[17][37] 이 이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의 '''오를레앙'''(Orléans)으로 불리게 되었다.[18]

서로마 제국 말기인 5세기경에는 민족 대이동의 영향을 받아 알란족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은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군과 함께 훈족아틸라에 맞서 싸우기도 했으며,[19] 고아르(Goar)의 지도 아래 오를레앙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다.[19]

2. 1. 1. 갈리아 시대

'''케나붐'''(Cenabumla)은 갈리아의 요새이자 카르누테스 부족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으며, 드루이드들이 매년 회합을 열던 장소였다. 기원전 52년, 갈리아 전쟁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카르누테스족을 공격하여 도시를 파괴했다.[16]

3세기 후반,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이 도시를 재건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키비타스 아우렐리아노룸'''(Civitas Aurelianorumla, "아우렐리아누스의 도시") 또는 '''아우렐리아눔'''(Aurelianumla)으로 개명했다.[17][37] 이후 이 이름이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오를레앙'''(Orléans)이 되었다.[18]

408년, 민족 대이동 시기에 알란족은 반달족과 함께 루아르 강을 건넜다. 442년, 갈리아의 로마 사령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당시 반란을 일으키던 원주민과 서고트족을 통제하기 위해 알란족 부족장 고아르(Goar)에게 오를레앙 지역으로 이동해 줄 것을 요청했다. 451년, 훈족아틸라가 갈리아를 침략하자, 고아르를 따르던 알란족 일부는 왕 상기반(Sangiban)의 지휘 아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로마 연합군에 합류하여 카탈라우눔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알란족은 고아르의 지도 아래 오를레앙을 중심으로 루아르 강 유역에 정착했다. 그러나 알란족은 현지 주민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임금 지급이 지연되거나 부족하다고 생각될 경우 도시의 유력자들을 살해하는 등 가혹한 통치를 행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오를레앙 주변 지역에는 알랭(Allaines), 알랭빌(Allainville) 등 알란족의 정착 흔적을 보여주는 지명이 다수 남아있다.[19]

2. 1. 2. 로마 제국 시대

갈리아 시대 오를레앙의 전신은 '''케나붐'''(Cenabumlat)이라는 요새 도시였다. 이곳은 카르누테스 부족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으며, 드루이드들이 매년 모임을 갖던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카르누테스족이 학살당하고 도시는 파괴되었다.[16][37]

이후 약 3세기 뒤인 3세기 후반, 로마 제국 시대에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도시를 재건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 도시 이름을 '''키비타스 아우렐리아노룸'''(Civitas Aurelianorum|키비타스 아우렐리아노룸lat, "아우렐리아누스의 도시") 또는 '''아우렐리아눔'''(Aurelianum|아우렐리아눔lat)으로 바꾸었다.[17][37] 이 라틴어 이름이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날의 '''오를레앙'''(Orléansfra)으로 변하게 되었다.[18]

서로마 제국 말기에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영향을 받았다. 408년, 알란족이 반달족과 함께 루아르 강을 건너왔다.[19] 442년에는 갈리아 지역의 로마 사령관이었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알란족의 지도자 고아르(Goar)에게 오를레앙으로 이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과 서고트족을 통제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19] 451년, 훈족아틸라가 갈리아를 침공하자, 고아르를 따르던 알란족의 일부는 그들의 왕 상기반(Sangiban)의 지휘 아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로마 연합군에 합류하여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싸웠다.[19]

고아르는 오를레앙에 자신의 세력 기반을 마련했으며, 그의 후계자들은 오를레앙과 파리 사이 지역까지 영지를 확장했다.[19] 오를레앙과 루아르 강변에 정착한 알란족은 때때로 무질서한 모습을 보였는데, 예를 들어 임금 지급이 늦거나 적다고 생각하면 도시의 유력자들을 살해하는 등의[19] 행동으로 현지 주민들의 원한을 사기도 했다.[19] 오늘날에도 오를레앙 주변 지역의 여러 지명(예: 알랭(Allaines), 알랭빌(Allainville))과 일부 주민들의 이름(알레인, Allaines)에는 알란족 정착의 흔적이 남아 있다.[19]

2. 2. 중세

오를레앙은 갈리아 시대부터 번영한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중세 시대에 들어서 오를레앙은 루아르 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특히 강이 파리와 가장 가까워지는 지점에 위치하고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파리, 루앙과 함께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다.

중세 시기 동안 오를레앙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메로빙거 왕조와 카페 왕조 시대를 거치며 왕국의 수도 또는 공국의 수도로서 지위를 가졌다. 백년 전쟁 중에는 영국군에 포위되었으나 1429년 잔 다르크에 의해 해방된 사건으로 유명하며, 이는 도시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해방을 기념하는 축제가 오늘날까지 매년 5월 7일과 8일에 열린다.

또한 오를레앙은 511년부터 여러 차례 종교회의가 열린 종교적 중심지였으며, 14세기 초에는 대학이 설립되어 학문의 중심지 역할도 수행했다. 생 크루아 대성당과 생 테니얀 성당 등 현존하는 주요 건축물들은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도시의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보여준다.

2. 2. 1. 메로빙거 왕조 시대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오를레앙은 클로비스 1세가 자신의 왕국을 분할하면서 세워진 오를레앙 왕국의 수도였다. 이후 카페 왕조 시대에는 왕가의 소유지로서 오를레앙 백작령, 그리고 나중에는 오를레앙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 공국은 발루아 가문의 분가인 발루아-오를레앙가가 세습적으로 소유했으며, 이 가문 출신으로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대부분의 프랑스 군주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지만, 예외적으로 오를레앙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경우도 있었다. 1108년, 루이 6세오를레앙 대성당에서 상스 대주교 다임베르(Daimbert)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

2. 2. 2. 카페 왕조 시대

카페 왕조 시대에 오를레앙은 왕실 소유 재산이 되었으며, 처음에는 오를레앙 백작령의 수도였다가 이후 오를레앙 공작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 공작령은 발루아 가문의 분가인 발루아-오를레앙가가 세습적으로 소유하였다. 발루아-오를레앙가에서는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프랑스 군주는 대부분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108년 루이 6세오를레앙 대성당에서 샹스 대주교 Daimbert|댕베르프랑스어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 이는 프랑스 군주가 오를레앙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드문 사례 중 하나이다.

2. 2. 3. 백년전쟁 시기



오를레앙은 루아르 강이 가장 북쪽으로 굽이치는 지점에 위치하여 파리와 가까웠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당시 위험한 루아르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몇 개 없었는데, 오를레앙에 그중 하나가 있어 중세 프랑스에서 파리, 루앙과 함께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번영했다. 강 남쪽 강둑에는 다리로의 접근을 막는 투렐 요새(샤틀레)가 있었다.

백년 전쟁(1338년 ~ 1453년) 시기, 오를레앙은 아르마냐크파를 지지하며 부르고뉴파에 맞섰다. 이로 인해 영국군에게 포위되는 위기를 맞았다.

15세기 묘사: 오를레앙 공성전에서 프랑스군이 영국 요새를 공격하는 모습


그러나 1429년 5월 8일, 잔 다르크프랑스군에 합류하여 오를레앙 공성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도시를 해방시켰다. 잔 다르크는 왕실 장군 장 드 뒤누아와 플로랑 드 일리에르의 도움을 받아 남쪽 강둑의 투렐 요새를 점령하고 영국군의 포위를 풀었다.

마르트루아 광장에 있는 잔 다르크 동상


오를레앙 시민들은 잔 다르크를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Orléans프랑스어)라고 부르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 시민들은 그녀에게 시내의 집을 제공했으며, 훗날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혔을 때는 몸값을 모금하여 기부하기도 했다. (비록 이 몸값은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다른 용도로 사용하여 잔 다르크의 석방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오를레앙 시민들은 오늘날까지도 잔 다르크를 기리고 있으며, 그녀가 도시를 해방시킨 것을 기념하여 매년 5월 7일과 8일에 성대한 축제를 연다.

2. 3. 근세

백년 전쟁 이후 오를레앙은 점차 활기를 되찾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루아르 계곡을 따라 왕족과 귀족들의 여행이 잦아지면서 도시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오를레앙 대학교는 특히 법학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며 장 칼뱅, 몰리에르와 같은 인물들이 거쳐가기도 했다. 1560년에는 프랑스 삼부회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회의 기간 중 프랑수아 2세가 오텔 그로슬로에서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오를레앙 대성당은 앙리 4세의 지원으로 재건이 시작되어 오랜 기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한편, 프랑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면서 미시시피 강 하구에서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을 때, 그 중심 도시 중 하나는 당시 오를레앙 공작이자 루이 15세의 섭정이었던 필리프 2세 도를레앙 공작을 기리기 위해 '라 누벨오를레앙la Nouvelle-Orléans프랑스어'으로 명명되었다.

오를레앙 공작 가문은 왕의 형제나 사촌으로서 프랑스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오를레앙 공국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공국 중 하나였으며, 상속과 혼인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루이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필리프 에갈리테)은 당대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으로 알려졌고, 그의 아들 루이 필리프 1세는 훗날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다.

2. 3. 1. 르네상스 시대

''Aurelia Franciae civitas ad Ligeri flu. sita'' (1581년 오를레앙 모습)


르네상스 양식의 오텔 그로슬로


백년 전쟁이 끝난 후, 오를레앙은 이전의 번영을 회복했다. 다리를 통한 통행료와 세금 수입, 그리고 도시를 통과하는 상인들 덕분에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루이 11세 왕은 주변 지역의 농업(특히 보스(Beauce) 지역의 비옥한 땅)을 장려하고 피티비에에서 사프란 재배를 재개하는 등 오를레앙의 번영에 기여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는 부유한 귀족들이 루아르 계곡을 여행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도시가 더욱 번성했다. 이러한 유행은 왕 자신이 시작한 것으로, 그의 왕실 영지에는 인근의 샹보르 성, 앙부아즈 성, 블루아 성, 쉬농소 성 등이 포함되었다.

오를레앙 대학교 또한 도시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법학을 전문으로 하여 유럽 전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 칼뱅은 이곳에서 공부하고 머물며 종교 개혁 관련 논문의 일부를 집필했으며, 칼뱅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로마 가톨릭과 결별한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대학에 장학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이 도시에서 보호를 받았다. 몰리에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장-바티스트 포클랭(Jean-Baptiste Poquelin)도 오를레앙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대학 규칙을 어기고 카니발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1560년 12월 13일부터 1561년 1월 31일까지 오를레앙에서 프랑스 삼부회(Estates General)가 열렸다. 이는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장남인 프랑수아 2세가 1560년 12월 5일 오를레앙의 오텔 그로슬로에서 그의 왕비 메리 스튜어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기 때문이다.

오를레앙 대성당은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앙리 4세가 초석을 놓았고, 건설에는 한 세기가 걸렸다. 따라서 후기 르네상스 양식과 초기 루이 14세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며,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건설된 대성당 중 하나이다.

2. 3. 2. 종교 전쟁 시기

백년 전쟁이 끝난 후, 오를레앙은 과거의 번영을 되찾았다. 상인들이 도시를 드나들며 루아르 강의 다리를 통해 많은 통행료와 세금을 거두었다. 루이 11세는 보스 평야를 중심으로 농업을 장려하고 피티비에 지역에서 사프란 재배를 활성화하여 도시의 부흥에 기여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이 루아르 계곡의 샹보르 성, 앙부아즈 성, 블루아 성, 슈농소 성 등을 방문하면서 오를레앙은 유행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오를레앙 대학교는 도시의 명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법학 분야에서 명성이 높아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종교 개혁장 칼뱅은 이곳에서 공부하며 그의 저서 일부를 집필하기도 했다. 잉글랜드헨리 8세로마와의 관계를 끊는 과정에서 칼뱅의 저서에 영향을 받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를레앙 대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많은 프로테스탄트(위그노)들이 프랑스 종교 전쟁 시기에 오를레앙에 피신처를 마련했다. 한편, 몰리에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장-바티스트 포클랭도 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카니발 참가로 학칙을 위반하여 퇴학당했다.

1560년 12월 13일부터 1561년 1월 31일까지 오를레앙에서는 삼부회가 열렸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2세가 1560년 12월 5일 오를레앙의 오텔 그로슬로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의 곁에는 왕비 메리 스튜어트가 있었다.

오를레앙 대성당(생 크루아 대성당)은 종교 전쟁의 혼란 속에서 위그노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앙리 4세가 직접 초석을 놓아 재건이 시작되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 현재의 대성당은 고딕 양식과 네오고딕 양식이 혼합된 모습을 보여주며,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대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2. 4. 근대

백년전쟁(1338년~1453년) 시기, 오를레앙은 아르마냐크파를 지지하며 부르고뉴파영국군에 맞섰다. 1428년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으나, 1429년 5월 잔 다르크(오를레앙의 소녀)가 등장하여 극적으로 도시를 해방시켰다. 이 역사적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에도 매년 5월 7일과 8일에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오를레앙은 511년 이후 여러 차례 종교회의가 열렸던 중요한 도시였으며, 14세기 초에는 대학이 설립되어 학문과 지식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도시에는 고딕 건축 양식 이후의 건축물들이 주로 남아 있으며, 생테냔 성당은 11세기의 크리프타 위에 15세기에 건설된 건물로 내진과 수랑 부분이 현존한다.

이후 근대 시기 동안 오를레앙은 종교 전쟁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개척 역사와도 연관을 맺었다. 또한 오를레앙 공작 가문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가 전개되었으며, 19세기에는 나폴레옹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등을 겪으며 전략적 요충지로서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4. 1. 17세기 ~ 19세기

17세기에는 종교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생 크루아 대성당의 수복 작업이 시작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대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서쪽 정면이 건조되어 완성되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화 과정에서 미시시피강 유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가 확보되었는데, 당시 루이 15세의 섭정을 맡고 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기리기 위해 중심 도시의 이름이 '라 누벨-오를레앙'(뉴올리언스)으로 명명되었다. 역대 오를레앙 공작들은 왕족으로서 주로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영지인 오를레앙을 방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를레앙 공국은 샤르트르, 블루아 등을 포함하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공국 중 하나였으며, 공작 가문은 상속과 유력 귀족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루이 필립 2세(필리프 에갈리테)는 당대 세계 최고의 부호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19세기에 들어 오를레앙은 또다시 역사적 격변을 맞이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인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프로이센군에게 잠시 점령당했다. 필리프 에갈리테의 아들인 루이 필리프 1세7월 혁명 이후 프랑스의 국왕(재위 1830-1848)으로 즉위했다. 1852년에는 파리-오를레앙 철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이 회사는 파리에 현재 오르세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유명한 오르세역을 건설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오를레앙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다시 한번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고, 같은 해 10월 13일 프로이센군에게 점령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루이 도렐 드 팔라딘 장군의 지휘 아래 루아르 군을 창설하여 오를레앙 인근 보스 지방을 거점으로 프로이센군에 맞섰다.

2. 4. 2. 20세기 이후

1944년 프랑스 오를레앙의 미군 의무병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군은 오를레앙 플뢰리-레-오브레(Orléans Fleury-les-Aubrais) 기차역을 주요 물류 철도 중심지로 활용했다. 이 기간 동안 조르주 5세 다리(Pont Georges V)는 투르엘 다리(pont des Tourelles)로 이름이 변경되기도 했다.[20][38] 인근 마을 보뉴-라-롤랑드(Beaune-la-Rolande)에는 강제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전쟁 중 미국 공군은 오를레앙 시와 기차역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오를레앙은 전쟁 이후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도시 중 하나였다. 장 케리젤(Jean Kérisel)과 장 로이에(Jean Royer)가 주도한 재건 및 도시 개선 계획은 1943년 초에 채택되었으며, 공사는 1945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재건 과정에서는 로열 거리(Royale)와 아케이드 등 파괴된 건물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동시에, 건축가 폴 아브라함(Pol Abraham)의 지휘 아래 4구역(îlot 4)처럼 혁신적인 조립식 건축 공법도 도입되었다.[21]

과거 대도시의 면모를 지녔던 오를레앙은 현재 약 25만 명의 인구를 가진 중간 규모의 도시로 자리 잡았다. 파리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물류 비용 절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들을 유치하며 경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3. 지리

오를레앙은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루아레 주의 주도이다. 북쪽으로는 보스 평야와 오를레앙 숲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솔로뉴 지역과 연못들이 자리 잡고 있다. 루아르 강 유역의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루아르 강이 도시를 관통하며 북쪽으로 굽이치는 지점에 위치한다. 오를레앙이 속한 르와르 계곡 지역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파리보르도를 잇는 A10 고속도로와 클레르몽페랑을 거쳐 지중해 방면으로 향하는 A75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3. 1. 위치 및 지형

오를레앙 상공에서 바라본 모습


조르주 5세 다리


조르주 5세 다리와 오를레앙 대성당


오를레앙은 프랑스 중부에 위치하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루아르 강이 북쪽으로 굽어지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파리 남서쪽 120km 거리에 위치한 오를레아네 지방의 중심지이며, 북쪽으로는 보스 지역과 오를레앙 숲이 있고, 남쪽으로는 솔로뉴 지역과 접한다. 오를레앙은 슐리쉬르르와르와 샬롱쉬르르와르 사이에 펼쳐진 르와르 계곡에 속하며, 이 계곡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도시에는 루아르 강을 가로지르는 5개의 다리가 있다.

다리 이름다른 이름비고
유럽 다리 (Pont de l'Europe)
조프르 원수 다리 (Pont du Maréchal Joffre)퐁뇌프 다리
조르주 5세 다리 (Pont George-V)루아얄 다리트램 운행
르네 티나 다리 (Pont René-Thinat)
비에르종 다리 (Pont de Vierzon)철도 다리



루아르 강의 북쪽(우안, Rive droite)은 완만한 언덕 지형으로, 조르주 5세 다리 근처는 해발 약 102m, 마르트루아 광장 근처는 약 110m이며, 북쪽 외곽의 플뢰리레조브레와의 경계인 라 크루아 플뢰리 지점에서는 약 125m까지 높아진다. 반대로 강의 남쪽(좌안, Rive gauche)은 루아르 강과 루아레 강 사이의 생마르소 지역을 중심으로 해발 약 95m 정도의 완만한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이 지역은 "침수 위험 지역"(zone inondable)으로 지정되어 있다.

1960년대 말, 기존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에 오를레앙-라-수르스 지역이 새로 조성되었다. 이 지역은 발도를레앙과 루아레 강(그 발원지는 라 수르스 식물원에 있다)을 사이에 두고 오를레앙 시와 분리되어 있으며, 해발 고도는 약 100m에서 110m 사이이다.

3. 2. 기후

오를레앙은 프랑스 중부 대부분 지역과 유사하게 해양성 기후(쾨펜 기후 구분 ''Cfb'')를 띈다.[47][48][49] 가장 더운 달은 7월과 8월로 평균 기온은 19.7°C이며, 평균 최고 기온은 25.8°C이다. 가장 추운 달은 1월로 평균 기온은 4.4°C이며, 평균 최저 기온은 1.7°C이다. 역대 최고 기온은 2019년 7월에 기록된 41.3°C이고, 역대 최저 기온은 1985년 1월에 기록된 -19.8°C이다.[47][48]

연평균 강수량은 635.5mm로 연중 고르게 분포하는 편이다. 월별 강수량은 44.2mm(3월)에서 63mm(5월) 사이이다. 연평균 강수일수(1.0mm 이상)는 109.4일이다.[47][48] 습도는 연중 높은 편이며, 겨울철(12월 90%)에 가장 높고 여름철(7월, 8월 72%)에 다소 낮아진다.[49] 연평균 일조시간은 1,822.6시간이다. 여름철에 일조시간이 길고(7월 232.0시간) 겨울철에 짧다(12월 60.9시간).[47][48]

오를레앙의 기후 (고도: 123m), 1991–2020년 평균, 극값 1938–현재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평균
역대 최고 기온(°C)16.6°C21.9°C26.5°C29.8°C32.7°C37.9°C41.3°C39.9°C35°C30.1°C21.8°C18.6°C41.3°C
평균 최고 기온(°C)7.1°C8.5°C12.6°C16°C19.6°C23.1°C25.8°C25.8°C21.7°C16.5°C10.9°C7.5°C16.3°C
일평균 기온(°C)4.4°C4.9°C7.9°C10.6°C14.2°C17.5°C19.7°C19.7°C16.1°C12.4°C7.7°C4.8°C11.7°C
평균 최저 기온(°C)1.7°C1.3°C3.3°C5.2°C8.8°C11.8°C13.6°C13.6°C10.5°C8.2°C4.5°C2.1°C7°C
역대 최저 기온(°C)-19.8°C-16.4°C-12.9°C-5.4°C-3°C0.8°C3.7°C4.2°C-0.8°C-4.5°C-15.3°C-16.5°C-19.8°C
평균 강수량(mm)48.1mm44.9mm44.2mm47.2mm63mm51mm57.2mm50.5mm51.3mm59.3mm60.3mm58.5mm635.5mm
평균 강수일수(≥ 1.0 mm)10.49.78.89.110.08.07.36.87.79.810.811.1109.4
평균 상대 습도(%)89857974767472727784899080
월평균 일조시간(시간)64.190.9146.1185.8214.7220.1232.0228.5184.5121.473.860.91822.6
출처 1: 프랑스 기상청[47][48]
출처 2: Infoclimat.fr (1961–1990년 상대습도)[49]


3. 3. 루아르 강과 운하



오를레앙에서 루아르 강 좌안을 바라보다


오를레앙은 루아르 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굽어지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슐리쉬르르와르와 샬롱쉬르르와르 사이에 펼쳐진 루아르 계곡 지역에 속하며, 이 계곡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도시에는 루아르 강을 가로지르는 5개의 다리가 있다.

다리 이름다른 이름비고
유럽 다리 (Pont de l'Europe)
죠프르 원수 다리 (Pont du Maréchal Joffre)퐁뇌프 다리
조르주 5세 다리 (Pont George-V)로와이얄 다리트램 운행
르네 티나 다리 (Pont René-Thinat)
비에르종 다리 (Pont de Vierzon)철도 다리



오를레앙을 통과하는 루아르 강


루아르 강의 북쪽 강둑(리브 드루아트, Rive droite)은 작은 언덕 지형으로, 조르주 5세 다리 근처에서는 약 102m, 마르트루 광장(Place du Martroi)에서는 약 110m 높이이며, 플뢰리레조브레 경계에 있는 라 크루아 플뢰리(La Croix Fleury)에서는 약 125m까지 완만하게 높아진다. 반대로 남쪽 강둑(리브 고슈, Rive gauche)은 생마르소(Saint-Marceau) 지역에서 루아르 강과 루아레 강 사이에 해발 약 95m 정도의 완만한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침수 위험 지역"(zone inondable)으로 지정되어 있다.

1960년대 말, 오를레앙 남쪽 약 12km 지점에 오를레앙-라-수르스(Orléans-la-Source) 지역이 조성되었다. 이 지역은 발도를레앙(Val d'Orléans)과 루아레 강(그 발원지는 라 수르스 식물원에 있다)을 사이에 두고 오를레앙 본 시가지와 분리되어 있으며, 해발 고도는 약 100m 에서 110m 정도이다.

증기선 ''리넥스플로지블(L'Inexplosible)'' 22호 복제품


오를레앙에서 루아르 강은 '뒤이(dhuis)'라고 불리는 물에 잠긴 둑에 의해 북쪽의 항해가 불가능한 '그랑드 루아르(Grande Loire)'와 남쪽의 '쁘띠트 루아르(Petite Loire)'로 나뉜다. 이 둑은 과거 이 지점까지 루아르 강의 항해를 가능하게 했던 광범위한 시설의 일부이다. 루아르 강은 예로부터 중요한 수운 및 무역로였으며, 기원전 2세기에 도시가 무역 중심지(엠포리움)로 형성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13] 17세기에는 낭트를 통해 카리브해에서 수입된 설탕을 정제하는 주요 중심지가 되었고, 이는 사탕, 초콜릿 제조, 포장용 종이 생산 등 지역 경제의 다른 부문을 활성화했다.[14] 18세기에는 지역 포도원과 루아르 강을 따라 운송되는 와인을 이용한 식초 생산으로 명성을 얻었다.[15] 해양 선박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현재 대형 선박은 하구에서 낭트까지만 항해할 수 있다.

강에서 사용되던 전통적인 배는 바닥이 평평한 '가바르(gabarre)'나 '퓨트로(futreau)' 등으로, 크지만 접을 수 있는 돛대를 이용해 강둑 위에서 바람을 받아 움직였고 다리 아래를 통과할 때는 돛대를 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배는 로와이얄 다리(퐁 루아얄) 근처에서 관광객들이 볼 수 있다. 강의 불규칙적인 흐름은 특히 상류 방향으로의 교통량을 크게 제한했지만, 예인선을 이용해 이를 극복하기도 했다.

2007년 8월, 시청 소유의 ''리넥스플로지블(L'Inexplosible)'' 타입 외륜선 복제품이 루아르 광장(Place de la Loire) 앞에 설치되어 현재 바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2년마다 열리는 루아르 축제(Festival de Loire)는 오를레앙의 역사에서 강이 수행했던 중요한 역할을 되새기게 한다.

강의 북쪽 제방, 시 중심부 근처에는 오를레앙 운하가 루아르 강과 합류한다. 이 운하는 몽타르지 근처 뷔즈(Buges)에서 루앙 운하 및 브리아르 운하와 연결된다. 현재 운하는 전체 구간이 사용되지는 않는다. 오를레앙 시내 구간은 강과 평행하게 이어지며 벽이나 낮은 석축('뮤레', muret)으로 강과 구분되고, 그 위쪽으로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마지막 수문 자리(canal pound)는 1960년대에 야외 수영장으로 바뀌었다가 이후 매립되었지만, 2007년 루아르 축제를 계기로 다시 복원되어 유람선 운항이 가능해졌다. 앞으로 운하를 레크리에이션 용도로 다시 활용하고 유람선 항구를 설치할 계획이 있다.

4. 인구

오를레앙의 연도별 인구 변화[23][24]
연도인구연도인구
179351,500190167,311
180041,937190668,614
180642,651191172,096
182140,233192169,048
183140,161192670,611
183640,272193171,606
184142,584193673,155
184645,788194670,240
185147,393195476,439
185646,922196284,233
186150,798196895,828
186649,1001975106,246
187248,9761982102,710
187652,1571990105,111
188157,2641999113,126
188660,8262009113,224
189163,7052014114,977
189666,6992020117,026



2020년 기준 이 코뮌(commune)의 인구는 117,026명이다.

참고: 1962년부터 1999년까지는 여러 코뮌에 주소 등록을 한 사람들의 중복분을 제외한 수치이다. 그 이후는 해당 코뮌의 인구 통계에 따른 수치이다. 1999년까지는 EHESS/Cassini[40], 2006년 이후는 INSEE[41][42]

5. 경제

정보산업, 전기산업, 계측, 제약(사노피-아벤티스), 물류·로지스틱스, 화장품 제조 등의 산업이 활발하다. 특히 화장품 제조 분야에서는 오를레앙 근교에 위치한 "코스메틱 밸리"가 유명하다. 이곳에는 로레알 외에도 2013년 11월 LVMH 그룹의 핵심 제조 거점인 "엘리오스(Hélios) 연구개발센터"[43]가 설립되어, 디올, 겔랑, 지방시, 프레쉬 등의 브랜드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1992년에는 일본의 시세이도[44]가 진출하는 등 여러 화장품 기업들이 향수 공장과 같은 제조 거점을 이곳에 마련하고 있다.

6. 문화

오를레앙은 루아르강 유역의 대표적인 도시로, 북쪽으로는 보스 평야와 오를레앙 숲, 남쪽으로는 솔로뉴 지역과 접하고 있다. 갈리아 시대부터 번영해 온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 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식초, 겨자, 마르멜로 잼과 같은 특산품으로도 유명하다.

오를레앙의 역사는 백년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15세기 영국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1429년 5월 극적으로 해방되었다. 이 사건은 도시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매년 5월 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이후 종교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등 역사적 부침을 겪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던 만큼, 오를레앙 대성당(생 크루아 대성당), 생 테니얀 성당 등 고딕 시대 이후의 주요 건축물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유적이 남아있다. 또한, 구 시청 건물에는 오를레앙 미술관과 역사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잔 다르크의 집, 오텔 그로슬로, 마르트루아 광장 등도 도시의 중요한 문화 자산이다.

오를레앙은 14세기 초 대학이 세워지는 등 교육의 중심지 역할도 해왔다. 오늘날에도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경제, 과학, 교육 분야가 함께 발달하며 역동적인 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6. 1. 주요 행사


  • 조아니크 축제(Les Fêtes Johanniquesfra): 매년 5월에 열리는 축제로, 1429년 5월 8일 잔 다르크(Jeanne d’Arc)가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것을 기념한다. 오를레앙에서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로 꼽힌다.[50]
  • 오를레앙 재즈 축제(Orléans’Jazzfra): 매년 6월에 개최되는 재즈 음악 축제이다.[50]
  • 루아르 축제(Le Festival de Loirefra): 매년 9월에 5일 동안 열리는 축제이다. 오를레앙 강의 유서 깊은 항구에서 500여 명의 선원과 200여 척 이상의 전통 범선이 참여한다. 루아르(Loire)에서 펼쳐지는 수상 시범을 비롯해 강변 산책, 보트 승선 체험, 수상 창 시합 등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지방 특색 음식을 맛보고 전통 공예품을 구경할 수 있으며, 매일 밤 다채로운 공연이 열린다.[50]

6. 2. 문화 유적

오를레앙은 갈리아 시대부터 번영하였으나, 현재 남아있는 주요 건축물은 대부분 고딕 시대 이후의 것이다. 풍부한 역사만큼 다양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옛 시청과 잔 다르크 동상


16세기/17세기 건물들, 오를레앙의 뢰 뒤 뤽쉬르 거리, 오텔 그로슬로 앞


오를레앙의 골조 건물


15세기 시청 탑


알자스-로렌 거리 공원에서 바라본 모습


오텔 그로슬로 공원에서 바라본 대성당과 오텔 그로슬로


현재 오텔 드 빌


궁전 공원에서 바라본 모습


잔 다르크 거리와 생트크로아 대성당

  • 생 크루아 대성당(Cathédrale Sainte-Croix): 13세기 말 아프시스부터 재건이 시작되어 16세기 초에 완성되었으나, 위그노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17세기에 다시 복구되었고, 18세기에는 고딕 양식으로 서쪽 정면이 완성되었다. 현재 건물은 앙리 4세가 초석을 놓아 1세기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후기 르네상스 양식과 초기 루이 14세 양식이 혼합된,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건설된 대성당 중 하나이다. 오를레앙 주교좌가 위치해 있다.
  • 생 테니얀 성당(Église Saint-Aignan): 11세기의 크리프타 위에 15세기에 건설된 건물로, 내진과 수랑(袖廊)이 현존한다.
  • 미술관 및 역사미술관: 구(舊) 시청 건물에 오를레앙 미술관(근대 회화, 조각)과 역사미술관(갈로로망 시대 조각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갈로-로마 시대 성벽: 대성당 북쪽(서기 4세기)과 뢰 드 라 투르 누브 거리에 남아 있다.
  • 오텔 그로슬로(Hôtel Groslot): 1550년에서 1555년 사이에 자크 그로슬로(오를레앙의 바이이)를 위해 자크 1세 안드루에 뒤 세르소가 건설한 르네상스 양식의 저택이다. 프랑수아 2세가 1560년 이곳에서 사망했으며, 샤를 9세, 앙리 3세, 앙리 4세 등이 머물렀다. 1790년부터 1981년까지 오를레앙 시청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결혼식 장소로 이용된다.[26]
  • 오텔 드 라 비에이 인텐당스(Hôtel de la Vieille Intendance): "오텔 브라셰" 또는 "왕의 집"으로도 불리는 초기 15세기 건축물이다. 고딕-르네상스 양식의 벽돌 성으로, 왕국의 고위 인사들과 왕들(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등)이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오를레앙 행정법원이 있으며, 일반인에게 개방된 정원에서 건물을 볼 수 있다.[27]
  • 오텔 드 라 모트-상갱(Hôtel de la Motte-Sanguin): 18세기에 루이-필립(오를레앙 공)(1747–1793)의 지시로 건설된 고전주의 양식의 저택. 그의 상속자가 루이 필리프 1세로 프랑스 왕위에 올랐기에 왕족 저택으로도 볼 수 있다. 현재는 공원의 일부이다.
  • 포병학교(École d'artillerie): 오텔 드 라 모트-상갱 옆에 위치하며, 19세기에 루아르 강 근처에 세워진 옛 군사학교 건물이다.[28]
  • 오를레앙 대학교 유적: 15세기 건물인 논문 발표실 등이 남아있다. 1306년 교황 클레멘스 5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장 칼뱅을 비롯한 많은 역사적 인물이 공부하고 가르쳤다. 특히 법학으로 유명하여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 루이 11세의 집(Maison de Louis XI): 생-타냥 광장에 있는 15세기 말 건물. 생-타냥을 존경했던 루이 11세의 지시로 건설되었다.[29]
  • 잔 다르크의 집(Maison de Jeanne d'Arc): 오를레앙 공성전 중 잔 다르크가 1429년 4월 24일부터 5월 9일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원래 건물은 1940년 프랑스 공방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현재 건물은 재건된 것이다.
  • 플라스 뒤 마르트루이(Place du Martroi): 도시의 중심 광장이자 상징이다. 중앙에는 드니 포아티에가 제작한 잔 다르크 기마상이 있다. 이 동상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손상되었으나 폴 벨몽도에 의해 수리되었다.
  • 샹슬러리(Chancellerie): 18세기 오를레앙 공작의 건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정면만 남아있다. 플라스 뒤 마르트루이 옆에 위치한다.
  • 방니에르 문지기 건물(Porte Bannier): 14세기에 지어진 건물 유적으로, 1986년 플라스 뒤 마르트루이의 잔 다르크 동상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지하 주차장 창문을 통해 보거나 특정 조건 하에 방문할 수 있다.
  • 부르고뉴 거리(Rue de Bourgogne): 고대 로마 시대의 동서 간선도로(데쿠마누스)였으며, 오를레앙의 주요 거리였다. 잔 다르크는 1429년 이 거리 동쪽 끝의 "부르고뉴" 문을 통해 도시로 들어왔다. 오늘날에도 프레펙처(지방 행정 관청), 상점, 식당, 술집 등이 밀집해 있으며, 많은 중세 가옥을 볼 수 있다.
  • 투르 블랑슈(Tour Blanche / 흰 탑): 오를레앙 공성전 당시에도 사용되었던 중세 방어탑 중 하나이다. 현재는 도시 고고학과가 사용하고 있다.
  • 독스(Docks): 18세기 오를레앙 항구 유적. 과거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내륙 항구 중 하나였다. 루아르 강을 통해 운송된 포도주, 설탕 등의 상품이 이곳에 저장 및 처리되었다. 식초는 당시 운송 중 변질된 포도주에서 유래하여 오늘날까지 도시의 특산품으로 남아있다. 강둑과 섬에 남아있는 옛 포장도로를 볼 수 있다.
  • 오피탈 마들렌(Hôpital Madeleine): 루이 14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18세기에 건설한 옛 병원 건물이다.
  • 생-샤를 예배당(Chapelle Saint-Charles): 마들렌 병원 부지 내에 있으며, 루이 14세의 건축가 중 한 명인 자크 5세 가브리엘이 1713년에 건설했다.
  • 오텔 카뷔(Hôtel Cabu): 과거 "디안 드 푸아티에의 집"으로도 불렸다. 변호사 필립 카뷔가 1547년에 의뢰하고 자크 1세 안드루에 뒤 세르소가 설계한 16세기 건축물이다. 현재는 오를레앙 고고학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된다.
  • 기타 16세기 저택: 오텔 하트(현재 샤를 페기 센터), 오텔 투탱, 오텔 포메레 도를레앙, 오텔 뒤세르소, 메종 드 라 코키유 등이 있다.
  • 오텔 데 크르노(Hôtel des Créneaux): 종탑(15세기)이 있는 옛 시청 건물. 후기 고딕 양식의 세속 건축물(15세기)로, 현재는 도시 음악학교가 있다.
  • 장 달리베르의 집(Maison de Jean Dalibert): 16세기 건축물.
  • 자크 부셰의 연구소(Étude de Jacques Boucher): 16세기 건물로, "자크 부셰" 광장에서 볼 수 있다.
  • 뤽쉬르 거리(Rue du Luxure)의 저택들: 17세기와 18세기 저택들이 있다.
  • 프레펙처(Préfecture): 1670년에 건축된 옛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1800년부터 루아레(Loiret)의 지방 행정 관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 퐁 드 뢰로프(Pont de l'Europe):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독창적인 경사형 보우 스트링 아치교이다.
  • 퐁 루아얄 / 조르주 5세 다리(Pont Royal / Pont George-V):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1751년부터 1760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영국의 역할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조지 5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퐁 데 투렐(Pont des Tourelles): 1140년에 건설되어 1760년에 철거된 오를레앙 최초의 돌다리 유적. 루아르 강 수위가 낮을 때 물속에서 볼 수 있다.
  • 오를레앙 에피스코팔 궁전(Palais épiscopal d'Orléans): 1635년부터 1641년 사이에 건설된 옛 주교궁. 나폴레옹이 머물렀다. 현재는 오를레앙 대학교의 국제 연구 센터가 있다.
  • 법원(Palais de Justice): 18세기~20세기 건물.
  • 살 드 린스티튀(Salle de l'Institut): "생트 크루아 광장"에 있는 소규모 콘서트홀.
  • 브르토네리 거리(Rue de la Bretonnerie)의 저택들: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양식의 저택들이 밀집해 있다.
  • 알자스-로렌 거리(Rue d'Alsace-Lorraine)의 저택들: 19세기 부르주아 스타일의 주택들이 있다.
  • 라 베뉴즈(La Baigneuse): 르와얄 거리 옆에 있는 폴 벨몽도의 1955년 조각상.
  • 칼뱅 동상: 칼뱅 사원 앞에 있는 다니엘 르클레르크의 2009년 작품.[30]
  • FRAC 센터(FRAC Centre): "레 튀르뷜랑스(Les Turbulences)"라는 별칭을 가진 첨단 건축물. LED로 덮여 있다.
  • 루아레 수용소 연구 센터(Cercil - Musée Mémorial des enfants du Vel d'Hiv): 벨로드롬 디베르 소탕에서 집결된 4,000명 이상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기리는 추모 박물관. 이들은 피티비에 또는 보느-라-롤랑드를 거쳐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31]


오를레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기에, 오늘날에도 도심 곳곳에서 수백 채의 역사적인 가옥과 저택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지구는 최근 몇 년간 복원된 보행자 구역을 넘어 대로로 둘러싸인 현대 도시 일부까지 확장되어 있다. 많은 역사 유적은 보행자 구역 외곽(뤼 노트르담 드 레쿠브랑스, 뤼 데 카르므, 뤼 드 라 브르토네리, 생-타냥 광장 등)에도 남아 있다.

6. 3. 박물관

오를레앙에는 다음과 같은 박물관들이 있다.[32]

  • 오를레앙 미술관 (Musée des Beaux-Arts d'Orléans): 구 시청 건물 일부를 사용하며, 근대 회화와 조각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샤를 페기 센터 (Charles Peguy Centre)
  • 잔 다르크의 집 (La Maison de Jeanne d'Arc): 1429년 4월 24일부터 5월 9일까지 잔 다르크가 실제로 머물렀던 곳이다. 원래 건물은 공습으로 파괴되어 현재의 것은 복원된 것이다.
  • 오를레앙 역사고고학 박물관 (Musée historique et archéologique de l'Orléanais): 갈로-로만 시대의 조각 등 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변호사 필립 카뷔가 1547년에 지은 오텔 카뷔(Hôtel Cabu) 건물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과거에는 메종 드 디아나 드 푸아티에(Maison de Diane de Poitiers)라고도 불렸다.
  • 자연사 박물관 (Natural Science Museum)

6. 4. 공원


  • 소스 식물원(Parc Floral de la Source)[33]
  • 모트 상갱 정원(Motte Sanguin garden)
  • 샤르팡트리 정원(Charpenterie garden)
  • 식물원(Botanic garden)
  • 앙조랑 공원(Anjorrant park)
  • 샤르보니에르 공원(Charbonnière park)
  • 무앵 루 공원(Moins Roux park)
  • 파스퇴르 공원(Pasteur park)

7. 교통

오를레앙은 다양한 교통망을 통해 프랑스 내 다른 지역과 연결된다. 시내 대중교통으로는 버스와 트램이 운행되고 있으며, 여러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도로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두 개의 주요 철도역을 통해 파리를 비롯한 여러 도시로 이동할 수 있다.

7. 1. 도로

오를레앙은 여러 고속도로가 만나는 중요한 교통 지점이다. 파리보르도(Bordeaux프랑스어)를 잇는 A10 고속도로가 도시 외곽을 지나며, 루아르 강(Loire프랑스어)을 건너는 다리가 시 경계 밖에 위치한 A71 고속도로는 오를레앙에서 시작하여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프랑스어)을 거쳐 지중해로 이어진다. 클레르몽페랑부터는 A75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오를레앙을 지나는 주요 도로는 다음과 같다.

도로 번호구간
A10 고속도로파리 ~ 보르도(Bordeaux프랑스어)
A71 고속도로오를레앙 ~ 부르주(Bourges프랑스어)
A19 고속도로상스(Sens프랑스어) ~ 아르트네(Artenay프랑스어)
국도 20호선파리 ~ 스페인


7. 2. 대중교통

TAO는 오를레앙의 버스와 트램 노선을 운영한다. 첫 번째 트램 노선은 2000년 11월 20일에 개통되었고, 두 번째 노선은 2012년 6월 30일에 개통되었다. 이 네트워크는 29.3km의 철로를 포함하며, 2022년 연간 이용객 수는 1,846만 명이었다.[25]

오를레앙 트램

7. 3. 철도

오를레앙에는 주요 기차역 두 곳이 있다. 중앙역인 오를레앙역과 북쪽 교외에 있는 오브레-오를레앙역이다. 대부분의 장거리 열차는 오브레-오를레앙역에만 정차하며, 파리, 릴, 투르, 브리브-라-가야르드, 네베르 및 여러 지역 목적지와 연결된다.

8. 교육

오를레앙 대학교는 1306년에 설립된 중세 대학교 중 하나였으나, 프랑스 혁명기에 다른 전국의 대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폐지되었다. 프랑스 제1제정기인 1808년부터 1815년 사이에 프랑스 제국대학교령에 따라 오를레앙 대학교구 또는 교육구(아카데미)에 인문학부와 과학부가 설치되었다. 1966년에 현재의 신제 오를레앙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오를레앙 대학교 캠퍼스는 시의 남쪽에 있는 라 소르스(La Source) 지역에 있다.

대학교 캠퍼스. 라 소르스 성(Château de la Source)


오를레앙의 주요 고등 교육 기관은 다음과 같다.

기관명설명
폴리텍 오를레앙(Polytech Orléans)공과대학
IUT기술대학
IAE기업행정연구소
IUP직업대학원
ESAD 오를레앙예술 및 디자인 학교
ESCEM경영 학교
슈피노(SUPINFO)컴퓨터 과학 고등교육기관
엑시아 세시(EXIA CESI)산업공학 학교


9. 자매 결연 도시

오를레앙의 자매 도시는 다음과 같다.[35]


10. 오를레앙 출신 인물

샤를 페기


플로리앙 타뱅


리드사


오를레앙 출신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소피 아드리아센(Sophie Adriansen)(1982년생), 프랑스 작가
  • 파트릭 바룰(Patrick Barul)(1977년생), 축구 선수
  • 조엘리 벨레카(Joelly Belleka)(1995년생), 농구 선수
  • 라울 블랑샤르(Raoul Blanchard)(1877–1965), 지리학자
  • 막상스 보이테즈(Maxence Boitez)(1990년생), 예명 리드사로 활동하는 가수
  • 파트릭 보르너저(Patrick Bornhauser)(1957년생), 레이싱 드라이버
  • 레이몽 브뤼제르(Raymond Brugère)(1885-1966), 외교관
  • 장-바티스트 마르크 부르제리(Jean-Baptiste Marc Bourgery)(1797–1849), 해부학자
  • 펠릭스 카조(Félix Cazot)(1790–1857), 고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 필리프 샹로(Philippe Chanlot)(1967년생), 축구 선수
  • 마리옹 코티야르(1975년생), 배우 (오를레앙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성장)
  • 질 델루슈(Gilles Delouche)(1948–2020), 언어학자
  • 사첼라 에브라르 드제제(Sachtela Evrard Djedje)(1992년생), 예명 베제드림으로 활동하는 가수
  • 에티엔느 돌레(Étienne Dolet)(1509–1546), 학자이자 인쇄업자
  • 조엘-프랑수아 뒤랑(Joël-François Durand)(1954년생), 작곡가
  • 장-루이 페라리(Jean-Louis Ferrary)(1948–2020), 역사학자
  • 조르주 플뢰리(Georges Fleury)(1878–1968), 사이클 선수
  • 알베르 곰보(Albert Gombault)(1844–1904), 신경학자
  • 기욤 고메즈(Guillaume Gomez)(1969년생), 레이싱 드라이버
  • 자크 기욤(Jacques Guillemeau)(1550–1613), 의사
  • 알베르 기요(Albert Guyot)(1881–1947), 레이싱 드라이버
  • 에티엔느 위베르(Étienne Hubert)(1567–1614), 아랍어학자
  • 가스통 딜리에(Gaston d'Illiers)(1876–1932), 조각가
  • 이삭 조그(Isaac Jogues)(1607–1646), 예수회 선교사
  • 스타니슬라스 쥘리앵(Stanislas Julien)(1797–1873), 동양학
  • 귀스타브 랑송(Gustave Lanson)(1857–1934), 역사학자
  • 피에르 르브빌(Pierre Levesville)(1570–1632), 르네상스 건축가
  • 아나톨 로캥(Anatole Loquin)(1834–1903), 작가이자 음악학자
  • 이뱅 모요(Yven Moyo)(1992년생), 축구 선수
  • 이브-마리 파스케(Yves-Marie Pasquet)(1947년생), 작곡가
  • 샤를 페기(Charles Péguy)(1873–1914), 시인이자 수필가
  • 앙투안 쁘띠(Antoine Petit)(1722–1794), 의사
  • 라민 삼베(Lamine Sambe)(1989년생), 농구 선수
  • 야신 세네(Yacine Sene)(1982년생), 농구 선수
  • 플로리앙 타뱅(Florian Thauvin)(1993년생), 축구 선수
  • 크리스토프 탱소(Christophe Tinseau)(1969년생), 레이싱 드라이버
  • 장 자이(Jean Zay)(1904–1944), 법률가이자 정치인
  • 에릭 좀카(Éric Zonca), 영화 감독


관련 인물

  • 장 칼뱅: 신학자이자 칼뱅주의 창시자로, 프랑스 혁명기에 폐지되었다가 1966년 재건된 구 오를레앙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참조

[1] 웹사이트 Répertoire national des élus: les maires https://www.data.gou[...] data.gouv.fr, Plateforme ouverte des données publiques françaises 2023-06-06
[2] 웹사이트 Évolution et structure de la population en 2020 − Unité urbaine 2020 d'Orléans (45701) https://www.insee.fr[...] INSEE 2024-01-24
[3] 웹사이트 Orleans http://www.lexico.co[...] Oxford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Orléans https://www.collinsd[...] HarperCollins 2019-04-12
[5] 사전 Orléans 2019-04-12
[6] 사전 Orléans 2019-04-12
[7] 웹사이트 Évolution et structure de la population en 2020 − Intercommunalité-Métropole de Orléans Métropole (244500468) https://www.insee.fr[...] INSEE 2024-01-24
[8] 웹사이트 Évolution et structure de la population en 2020 − Aire d'attraction des villes 2020 d'Orléans (025) https://www.insee.fr[...] INSEE 2024-01-24
[9] 뉴스 Vérification - Il y aurait près de 20.000 étudiants à Orléans : Vrai ou faux ? https://www.larep.fr[...] 2021-05-06
[10] 웹사이트 Climatological Information for Besançon, France http://www.meteofran[...] Meteo France 2019-02-14
[11] 웹사이트 Orléans (45) https://donneespubli[...] Meteo France 2019-02-14
[12] 웹사이트 Normes et records 1961–1990: Orléans – altitude 123m https://www.infoclim[...] Infoclimat 2019-02-14
[13] 웹사이트 Orleans, emporium des Carnutes https://archeologie.[...]
[14] 웹사이트 Les raffineries de sucre https://archives.orl[...]
[15] 웹사이트 Le vinaigre et Orleans https://archives.orl[...]
[16] 웹사이트 C. Julius Caesar, Gallic War, Book 7, chapter 28 https://www.perseus.[...] 2018-02-16
[17] 웹사이트 Orléans - LAROUSSE https://www.larousse[...] Éditions Larousse 2021-04-28
[18] 서적 Cenabum, Aurelianis, Orléans PUL 1996
[19]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2016-01
[20] 웹사이트 http://www.ina.fr/ar[...]
[21] 서적 L'architecture moderne en France, du chaos à la croissance Picard 1999
[22] 백과사전 Grand Larousse encyclopédique
[23] 데이터베이스 Orléans
[24] 웹사이트 Population en historique depuis 1968 https://www.insee.fr[...] INSEE
[25] 간행물 Rapport annuel 2022 Parc - trafic - événements d’exploitation Tramways https://balise.docum[...] Service Technique des Remontées Mécaniques et des Transports Guidés
[26] 뉴스 L'école Marcel-Proust a découvert la vie de la mairie https://www.larep.fr[...] 2024-10-28
[27] 웹사이트 Tribunal administratif d'Orléans : Histoire du tribunal http://orleans.tribu[...] 2014-11-03
[28] 웹사이트 La Motte Sanguin - Orleans.fr http://www.orleans.f[...] 2014-11-03
[29] 서적 Orléans : Une Ville, Une Histoire
[30]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31] 웹사이트 CERCIL – Study and Research Centre on the Internment Camps in Loiret: Remembrance https://www.memorial[...] Stiftung 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 2020-06-19
[32] 웹사이트 Orléans tourisme : musées à Orléans (Orléans tourism: Museums in Orléans) http://www.tourisme-[...] 2007-10-13
[33] 웹사이트 Park and Gardens in Orléans http://www.tourisme-[...] 2007-10-13
[34] 웹사이트 Festivals de musique – France https://www.idref.fr[...] 2018-05-06
[35] 웹사이트 Les villes amies http://www.orleans-m[...] Orléans 2019-11-15
[36] 웹사이트 Gentilés des communes du Loiret http://www.habitants[...] 2010-09-13
[37] 서적 Cenabum, Aurelianis, Orléans PUL 1996
[38] 웹사이트 World-wide current events of May 16 1941 http://www.ina.fr/ar[...]
[39] 문서 Population municipale légale en vigueur au 1er janvier 2020, millésimée 2017, définie dans les limites territoriales en vigueur au 1er janvier 2019, date de référence statistique : 1er janvier 2017.
[40] 웹사이트 http://cassini.ehess[...]
[41] 웹사이트 https://www.insee.fr[...]
[42] 웹사이트 http://www.insee.fr
[43] 웹사이트 LVMH https://www.lvmh.co.[...]
[44] 웹사이트 フランスの化粧品産業クラスター =コスメティック・バレー= http://www.iti.or.jp[...] 国際貿易投資研究所 2013-11-20
[45] 웹사이트 Orléans http://cassini.ehess[...]
[46] 웹사이트 Population en historique depuis 1968 https://www.insee.fr[...]
[47] 웹인용 Climatological Information for Besançon, France http://www.meteofran[...] 프랑스 기상청 2019-02-14
[48] 웹인용 Orléans (45) https://donneespubli[...] 프랑스 기상청 2019-02-14
[49] 웹인용 Normes et records 1961–1990: Orléans – altitude 123m https://www.infoclim[...] Infoclimat 2019-02-14
[50]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kr.france.fr/[...] 2018-05-09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