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슈트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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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슈트라서는 1897년 바이에른 왕국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의 정치인이다. 그는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자였으며, 전쟁 경험을 통해 관료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가 탈당하여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아돌프 히틀러와 노선 갈등으로 인해 탈당하고 '검은 전선'을 결성하여 반나치 운동을 펼쳤다. 나치 집권 후 망명 생활을 거쳐 종전 후 서독으로 귀국하여 '연대주의'를 주창하며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변화했다. 그는 1974년 뮌헨에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반나치 투쟁과 사회주의적 이념이 재조명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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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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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토 요한 막시밀리안 슈트라서 |
국적 | 독일 |
출생일 | 1897년 9월 10일 |
출생지 | 바트빈츠하임,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
사망일 | 1974년 8월 27일 |
사망지 | 뮌헨, 바이에른주, 서독 |
가족 | 그레고어 슈트라서 (형) |
모교 | 훔볼트 대학교 |
직업 | 철학자, 편집자, 정치인 |
군사 경력 | |
소속 | 자유군단 |
복무 기간 | 1914년–1919년 |
계급 | 중위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독일 사회민주당 (1917년–1920년) |
주요 경력 | |
독일 대학 출정 학도 단체 | 전국 의장 |
[[파일:Flag of Germany (3-2 aspect ratio).svg|23px]] 공화파 지도자 동맹 | 전국 부의장 |
[[파일:Flag of the NSDAP (1920–1945).svg|23px]] 국가 사회주의 관구 사업단 | [[파일:Black Front logo.svg|20px]] 투쟁 출판사 선전 부장 겸 편집장 (1925년 10월 – 1930년 7월 4일) |
[[파일:Black Front flag.svg|25px]] 흑색 전선 | 임시 지도자 (1930년 - 1945년, 종전으로 해산) |
[[File:Logo of the German Social Union.svg|25px]] 독일 사회 연맹 | 대표 (1956년 - 1960년, 퇴임 후 명예 대표) |
2.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오토 슈트라서는 1897년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프랑켄 중부 지방 바트 빈트샤임에서 가톨릭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5남매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페터는 니더바이에른의 Deggendorf|데겐도르프de에서 대법원 참사관을 지냈다. 슈트라서 가는 오래된 바이에른 농가 출신이었다.[1]
아버지 페터는 사회적 정의감이 강한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다. 가명으로 "신로"라는 책을 출판하여 가톨릭과 군주제의 반동 세력을 비판하고, 신생 독일의 바람직한 모습을 그렸으나, 직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아내의 만류로 출판을 포기했다. 페터가 암으로 사망했을 때, 히틀러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
오토의 강직한 정의감과 사명감은 프랑켄 지방의 전통과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다.[1]
1914년 8월, 16세의 나이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지원하여 바이에른 육군에 입대했다.[1] 종전 시에는 포병중위로 진급했으며, 1급 철십자 훈장과 Militärverdienstorden (Bayern)|바이에른 공로 훈장de을 받았다. 적 포대를 포획하고 적군을 포로로 만든 공적으로 프로이센의 푸르 르 메리트 훈장에 해당하는 바이에른의 Militär-Max-Joseph-Orden|막스 요제프 훈장de 서훈 대상자로도 신청되었으나, 독일 혁명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 기관지를 구독하여 "붉은 중위(der rote Leutnant)"라고 불렸다.[1]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3] 1919년 미국군과의 조우는 그에게 '배후의 일격' 신화와 거리를 두게 했다.[13] 동료의 자살과 부대 내 가혹행위를 목격하며 관료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키웠다.[14] 귀족적이면서 민주주의적인 장교단의 자세에 감명을 받아 소수 엘리트 사상을 품게 되었고, 이는 훗날 '흑색 전선' 조직 구상의 중핵이 된다.[15] 1917년 루덴도르프의 지령으로 병사들을 교화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 한 병졸로부터 "토지를 갖지 못한 자신에게, 조국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사회주의적 감정을 키웠다.[16]
1918년 9월, 좌골 신경통으로 뮌헨 병원에 입원했지만 11월 6일에 퇴원하여 혁명과 패전을 맞이했다.[1]
2. 1. 출생 및 가문
오토 슈트라서는 1897년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프랑켄 중부 지방 바트 빈트샤임에서 가톨릭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이 2명,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1명씩 있는 5남매였다. 슈트라서 가는 오래된 바이에른 농가 출신이었지만, 아버지 페터는 니더바이에른의 Deggendorf|데겐도르프de에서 대법원 참사관을 지냈다.[1]아버지 페터는 사회적 정의감이 강한 기독교 사회주의자였으며, 가명으로 "신로"라는 책을 출판하여 가톨릭과 군주제의 반동 세력을 비판하고, 신생 독일의 바람직한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직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아내의 만류로 저작 출판을 포기했다. 페터가 암으로 사망했을 때, 히틀러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
오토의 강직한 정의감과 사명감은 프랑켄 지방의 전통과 함께,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다.[1]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8월 2일, 16세의 나이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지원하여 바이에른 육군에 입대했다.[1] 종전 시에는 포병중위로 진급했으며, 1급 철십자 훈장과 Militärverdienstorden (Bayern)|바이에른 공로 훈장de을 수훈했다.[1] 또한 적의 포대를 포획하고 적군을 포로로 만든 공적으로 프로이센의 푸르 르 메리트 훈장에 해당하는 바이에른의 Militär-Max-Joseph-Orden|막스 요제프 훈장de 서훈 대상자로도 신청되었다.[1] 서훈을 받으면 귀족 칭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독일 혁명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기관지를 구독하여 "붉은 중위(der rote Leutnant)"라고 불렸다.[1]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3] 1919년 장비가 잘 갖춰진 미국군과의 조우는 그에게 '배후의 일격' 신화와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13] 동료의 자살과 부대 내 가혹행위를 목격하며 관료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키웠다.[14] 귀족적이면서 민주주의적인 장교단의 자세에 감명을 받아 소수 엘리트 사상을 품게 되었고, 이는 훗날 '흑색 전선' 조직 구상의 중핵이 된다.[15] 1917년 루덴도르프의 지령에 따라 병사들을 교화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 한 병졸로부터 "토지를 갖지 못한 자신에게, 조국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사회주의적 감정을 키우게 되었다.[16]
1918년 9월, 좌골 신경통으로 뮌헨의 병원에 입원했지만 11월 6일에 퇴원하여 혁명과 패전을 맞이했다.[1]
3.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돌아온 오토 슈트라서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17] 1920년 카프 폭동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독일 사회민주당의 베르사유 조약 이행 및 부르주아 헌법 채택에 불만을 품고 탈당했다.[17]
1920년 10월, 작센 할레에서 열린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 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독소 제휴 연설을 듣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하는 사상을 품게 되었다.[18] 그는 묄러 판 덴 브루크와 슈펭글러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묄러 판 덴 브루크를 "독일 혁명의 루소"[19]라고 칭송했다.
오토 슈트라서는 묄러 판 덴 브루크의 "6월 클럽(Juniklub)"에 참여했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묄러 판 덴 브루크의 저서 『제3제국(Das Dritte Reich)』의 이름을 도용하고 왜곡한 것에 반대했다.
3. 1. 독일 사회민주당(SPD) 활동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돌아온 오토 슈트라서는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에 입당했다.[17]1920년 카프 폭동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독일 사회민주당이 베르사유 조약 이행 정책을 계속하며 부르주아 헌법을 채택하는 당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공산주의 혁명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적인 혁명성을 추구하여, 결국 그해 말에 탈당했다.[17]
3. 2. 사상 형성
1920년 10월, 작센의 할레에서 열린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 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독소 제휴를 설파했다. 오토 슈트라서는 네덜란드 신문 특파원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지노비예프의 연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나에게 지노비예프 연설은 경고의 신호였다. 이 남자의 강연 내용은 새로운 구세주의 가르침과 같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정치 탐구에서, 나는 지금까지 독일에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에 부딪혔다. 그 이름은 '국민 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였다."[18]
이러한 경험을 통해 오토 슈트라서는 사회주의와 베르사유 조약에 반발하는 민족주의를 결합하는 사상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오토 슈트라서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는 "독일 사회주의(Deutscher Sozialismus)"를 주장한 메러 폰 덴 브루크와 사회주의와 프로이센주의를 결합하려 했던 슈펭글러가 있었다. 오토 슈트라서는 메러 폰 덴 브루크를 "독일 혁명의 루소"[19]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당시 오토 슈트라서는 메러 폰 덴 브루크가 하인리히 폰 글라이헨루스부름(Heinrich von Gleichen-Rußwurm) 등 좌익 지식인들의 "11월 클럽"에 대항하여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을 상기시키기 위해 조약 조인 달에 맞춰 명명하여 결성한 "6월 클럽(Juniklub)"에 출입하고 있었으며, 지노비예프 연설 내용도 그 기관지 "양심"에 게재했다.
"젊은 민족의 권리"와 독일 부활의 길을 설파하는 메러 폰 덴 브루크와 "서양의 몰락"의 저자 슈펭글러가 "6월 클럽"에서 벌인 격렬한 논쟁은 오토 슈트라서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오토 슈트라서가 존경하는 메러 폰 덴 브루크는 평소 히틀러에 대해 경멸과 혐오감을 품고 "6월 클럽"에서 히틀러의 강연 초청에 반대했지만, 오토 슈트라서는 이러한 반 히틀러 감정을 메러 폰 덴 브루크와 공유했다. 히틀러가 메러 폰 덴 브루크의 저서 『제3제국(Das Dritte Reich)』에서 그 이름을 도용하고, 자기 입맛대로 해석을 더한 "제3제국"은, 메러 폰 덴 브루크나 오토 슈트라서가 생각하는 카를 대제의 신성 로마 제국을 연상시키는 연방적 = 기독교적 유럽 공동체의 이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4. 나치당 시대
1925년 나치당(NSDAP)에 입당한 오토 슈트라서는 형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권유를 받아 입당했으며,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북독일에서 나치 좌파의 대표로 활동했다.[2] 그는 사회주의적인 경제 정책, 반서구 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입장에서 소비에트 연방과의 접근을 주장하며 민족 볼셰비즘적인 운동을 당내에 형성했다.[2]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독일 공산당과 연대하여 데모 및 파업 투쟁도 벌였다.[2]
1926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히틀러는 나치 좌파의 주장을 완패시키고, 당내 권력을 강화했다.
1920년 10월, 오토 슈트라서는 루덴도르프와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히틀러와 처음 만났다.[20] 오토는 히틀러의 첫인상에 대해 "그의 얼굴은 아직 사상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으며,[21] 히틀러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사회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했다.
1930년 1월, 히틀러는 슈트라서 형제에게 출판 활동 자숙을 요구했지만, 오토는 "문제는 출판사가 아닙니다. 문제는 정치입니다."라고 반박하며 히틀러와 갈등했다.[27] 결국 오토는 히틀러에 의해 나치당에서 제명되었다.
1930년 7월 4일, 오토 슈트라서는 나치당 탈당을 선언하고,[32] 검은 전선을 결성하여 반(反)나치 운동을 전개했다.[5] 그러나 오토를 따르는 사람은 적었고, 형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나치당에 남았지만, 오토의 탈당으로 당내에서 어려운 입장에 놓였다.
4. 1. 입당 및 나치 좌파 활동
1925년 나치당(NSDAP)에 입당했다.[2] 오토 슈트라서는 형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권유를 받아 입당했다. (당원 번호 23918)[24][2]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북독일에서, 그레고어와 요제프 괴벨스와 함께 나치 좌파의 대표가 되어, 사회주의적인 경제 정책 및 반서구 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입장에서 소비에트 연방과의 접근을 주장하며 민족 볼셰비즘적인 운동을 당내에 형성했다.[2]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독일 공산당과 연대하여 데모 및 파업 투쟁도 벌였고, 뮌헨의 당 본부와 적대했다.
1926년 2월 14일, 히틀러는 밤베르크 회의를 소집하고, 하노버 회의의 비합법성을 비판했다. 회의 결과는 나치 좌파의 완패였다. 슈트라서 초안 폐지, 구 제후 재산 무상 몰수 주장 철회, 히틀러에 의한 전 지역 지도자 임명권 확립, 당내 분쟁을 재판하는 당 법정 설립 및 히틀러에 의한 법정 위원 임명, 친소 외교 노선의 철회가 결의되었다.
4. 2. 히틀러와의 갈등
1920년 10월, 오토 슈트라서는 루덴도르프와 히틀러와의 회담에 참석하면서 히틀러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20] 당시 오토는 SPD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고, 형 그레고어의 제안으로 이 회담에 참여했다. 그레고르는 이미 나치당원이었으며, '니더바이에른 국민지조병단'을 이끌던 나치의 주요 인물이었다.[20]오토는 히틀러의 첫인상에 대해 "그의 얼굴은 아직 사상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21] 또한 히틀러가 루덴도르프에게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하사관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한다.
대화는 대전 이야기로 시작되었고, 이후 당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오토가 히틀러에게 나치의 강령에 대해 묻자, 히틀러는 "강령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권력뿐이다."라고 답했다.[21] 이에 오토는 "권력은 강령을 실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반론했고, 히틀러는 "그건 지식인의 견해다!"라고 반박했다.[21]
이후에도 오토와 히틀러는 사회주의와 유대인 문제 등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했다. 오토는 히틀러가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유대인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무렵, 히틀러는 오토에게 "프랑스의 지원으로 독일의 장관이 되는 것보다, 공산주의자의 교수형대에서 목을 매는 편이 낫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21]
오토는 히틀러에 대해 "장군에게 너무 비굴하고, 논쟁에서도 여유가 없다. 정치적 확신이 없고, 확성기의 웅변만 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21] 반면, 그레고르는 히틀러에게 저항하기 어려운 특별함이 있다고 보았고, 그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사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21]
1925년, 오토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에 입당했다. 그는 당 강령의 사회주의적 요소에 집중했으며, 그의 형제 및 요제프 괴벨스와 함께 북부 독일에서 당의 세력을 이끌었다. 그의 세력은 이념적으로 나치적인 노동조합을 지지하고,[2] 이윤 분배를 지지했으며,[4] 소련과의 더 긴밀한 관계를 옹호했다.[2]
그러나, 슈트라서의 주장은 1926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슈트라서 형제의 출판 활동은 경쟁지인 괴벨스의 『'''공격'''(Der Angriff)』지와의 격렬한 대립을 낳았고, 1930년 1월, 히틀러는 슈트라서 형제에게 출판 활동 자숙과 『투쟁 출판사』 매수를 제안했다. 오토는 히틀러의 제안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문제는 출판사가 아닙니다. 문제는 정치입니다."라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이런 국가 볼셰비즘 사상은 금지했을 텐데."라며 분노했다.[27]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결렬되었고, 오토는 나치당 내 극좌파 숙청을 명령한 히틀러에 의해 제명되었다.
4. 3. 탈당 및 '검은 전선' 결성
1930년 7월 4일, 오토 슈트라서는 신문 지면을 통해 나치당으로부터의 탈당을 선언했다.[32] 이는 1930년 6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요제프 괴벨스에게 오토 등 나치 좌파 간부들의 당 추방을 명령했고, 7월 2일 괴벨스가 베를린 당 간부 회의에서 오토의 당 제명을 결의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32] 오토 등은 항의하기 위해 당 간부 회의를 열 것을 요구했지만, 쿠르트 달뤼게가 지휘하는 친위대에 의해 쫓겨나 당 집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오토는 나치당 탈당 이후, 인랑단, 오버란트단(de) , 북독일 돌격대의 발터 슈테네스 대위, 검은 국방군의 브루노 부흐루커(de) 소령 등과 함께 『'''혁명적 민족 사회주의 투쟁 집단'''(Kampfgemeinschaft Revolutionärer Nationalsozialisten, KGRNS)』을 결성했다.[5] 이 단체는 후에 『'''검은 전선'''(Schwarze Front)』으로 개명되어 반(反)나치 운동을 전개했다.[5]

그러나 오토를 따르는 사람은 24명에 불과했다.[32] 형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나치당에 남았지만, 오토의 탈당으로 당내에서 어려운 입장에 놓여 급속히 영향력을 잃어갔다.
5. 망명과 귀국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오토 슈트라서는 나치 독일을 탈출해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체코슬로바키아(프라하)[6], 스위스, 프랑스 등으로 도피했고, 1940년에는 포르투갈을 거쳐 버뮤다로, 1941년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6] 그는 캐나다에서 "오타와의 죄수"로 알려지게 되었다.[6]
나치당에서 탈당한 슈트라서는 뜻을 같이하는 이전 나치당 당원들과 함께 검은 전선이라는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 나치당을 분열시키려 했으나, 1933년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막지 못했다.[5] 망명 기간 동안 슈트라서는 검은 전선 외에도 독일 밖에 있는 자유 독일 운동을 이끌었다. 1941년에 만들어진 이 단체는 전 세계 독일인들의 지지를 받아 히틀러와 나치즘을 몰락시키려 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슈트라서를 나치의 "최대 적"으로 규정하고, 그의 목에 500000USD의 현상금을 걸었다.[6] 슈트라서는 한동안 몬트리올에 정착했다. 1942년에는 독일계 체코인 아돌프 슈미트 소유의 노바스코샤 주 클래런스 농장에서 잠시 살다가, 근처 파라다이스의 잡화점 위 임대 아파트에서 10년 넘게 살았다.[6] 망명 중에도 그는 ''뉴 스테이츠맨'' 등 여러 영국, 미국, 캐나다 신문에 나치 독일과 그 지도자에 대한 기사를 썼다. 또한 당시 ''몬트리올 가제트'' 기자이자 훗날 정치인이 된 도널드 C. 맥도날드가 대필한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그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펼쳤다.[32] '''"제2 혁명은 진행된다"''', '''"죽은 마르크스주의 - 살아있는 사회주의"''', '''"사회주의의 혁명인가, 파시스트의 전쟁인가?"''' 등의 팸플릿을 프라하에서 독일 국내로 보내 돌격대나 친위대 사무실에 뿌렸다. 아마추어 무선가이자 단파 라디오 개발을 담당했던 루돌프 포르미스와 함께 몰다우 강이 보이는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약 64.37km 떨어진 술집을 거점으로, 하루에 한 시간씩 세 차례 독일을 향해 반 히틀러 성명을 방송했다.[32] 그러나 알프레트 나우요크스가 이끄는 SD, 게슈타포 요원이 오토의 아지트를 습격하여 포르미스를 살해했다. 오토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해적 방송 죄로 체코 당국으로부터 발신기를 압수당하고 4개월 형을 선고받았다.[32]
1934년 11월 1일, 독일 국적을 박탈당하고 무국적자가 된 오토는 5년간 체코에 머물렀으며, 이 시기에 체코를 방문한 인도 독립 운동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만나기도 했다.[32]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오토 슈트라서는 서독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연합국과 서독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6] 1950년 동독은 슈트라서에게 국민 전선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미국 점령 하의 바이에른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기에 거절했다.[7] 그는 서독은 미국의 식민지이고, 동독은 러시아의 식민지라고 생각했다.[8] 1955년, 마침내 귀국이 허가되어 독일 시민권을 회복하고 뮌헨에 정착했다.[9] 1956년에는 "민족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정당인 독일 사회 연합(Deutsch-Soziale Unionde)을 창당하려 했으나,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10] 슈트라서는 1974년 뮌헨에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나치즘 비전을 계속 옹호했다.[10]
5. 1. 망명 생활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 오토 슈트라서는 나치 독일을 탈출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오스트리아로 도피한 후, 체코슬로바키아(프라하)[6], 스위스, 프랑스를 거쳐 1940년에는 포르투갈을 거쳐 버뮤다로 갔다. 1941년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6] 그곳에서 "오타와의 죄수"로 명성을 얻었다.[6]나치당을 탈당한 슈트라서는 뜻을 같이하는 전 NSDAP 당원들과 함께 독자적인 정당인 검은 전선을 결성하여 나치당을 분열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정당은 1933년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대항할 수 없었다.[5] 망명 기간 동안, 슈트라서는 검은 전선 외에도 독일 외부에 있는 자유 독일 운동을 이끌었다. 1941년에 창설된 이 단체는 전 세계 독일인들의 지원을 받아 히틀러와 나치즘의 몰락을 가져오려 했다.
괴벨스는 슈트라서를 나치의 "최대 적"으로 비난했고, 그의 목에 500000USD의 현상금을 걸었다.[6] 슈트라서는 한동안 몬트리올에 정착했다. 1942년에는 독일계 체코인 아돌프 슈미트가 소유한 노바스코샤 주 클래런스의 한 농장에서 잠시 살다가, 근처의 파라다이스로 이사하여 잡화점 위에 있는 임대 아파트에서 10년 넘게 살았다.[6]
그는 망명 중에도 ''뉴 스테이츠맨''(New Statesman)을 포함한 여러 영국, 미국, 캐나다 신문에 나치 독일과 그 지도자에 관한 기사를 기고했다. 또한 당시 ''몬트리올 가제트''(Montreal Gazette) 기자이자 이후 정치인이 된 도널드 C. 맥도날드가 대필한 일련의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다.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펼쳤다.[32] '''"제2 혁명은 진행된다(Die Zweite Revolution marschiert)"''', '''"죽은 마르크스주의 - 살아있는 사회주의(Der Marxismus ist tot - Der Sozialismus lebt)"''', '''"사회주의의 혁명인가, 파시스트의 전쟁인가?(Sozialistische Revolution oder Faschistischer Krieg?)"''' 등의 팸플릿을 프라하에서 독일 국내로 보내 돌격대나 친위대의 사무실에 뿌렸다. 아마추어 무선가이며 단파 라디오 개발도 담당했던 루돌프 포르미스와 팀을 이루어 몰다우 강이 보이는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약 64.37km 떨어진 술집을 거점으로 하루에 한 시간씩 세 차례 독일을 향해 반 히틀러 성명을 방송했다.[32]
그러나 알프레트 나우요크스가 이끄는 SD, 게슈타포의 요원이 오토의 아지트를 습격하여 포르미스를 살해했다. 오토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해적 방송의 죄로 체코 당국으로부터 발신기를 압수당하고 4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32]
1934년 11월 1일, 독일 국적을 박탈당하고 무국적자가 된 오토는 5년간 체코에 체류했으며, 이 무렵 체코를 방문한 인도 독립 운동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면회했다.[32]
5. 2. 귀국 및 말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토 슈트라서는 서독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연합국과 서독 정부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6] 1950년 동독은 슈트라서에게 국민 전선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미국 점령 하에 있던 바이에른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기에 거절했다.[7] 그는 서독은 미국의 식민지이고, 동독은 러시아의 식민지라고 생각했다.[8]1955년, 마침내 귀국이 허가되어 독일 시민권을 회복하고 뮌헨에 정착했다.[9] 1956년에 "민족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정당인 독일 사회 연합(Deutsch-Soziale Unionde)을 창당하려 했으나,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10] 슈트라서는 1974년 뮌헨에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나치즘 비전을 계속 옹호했다.[10]
6. 사상과 유산
오토 슈트라서의 사상은 그의 정치 활동과 시대적 배경에 따라 변화했다.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노선은 오토에게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는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을 '삶'과 '원리'의 투쟁으로 보았고, 일국 사회주의의 승리를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철학'의 승리로 해석했다.[17] 그러나 오토의 이러한 관점은 히틀러와의 갈등을 야기했다. 이념과 당 강령을 중시한 오토는 현실 노선을 우선시하는 히틀러를 비판했고, 히틀러는 오토를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자'로 여겼다.[1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토는 나치당의 몰락과 망명 생활을 경험하며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그는 탈이데올로기를 추구하며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했고, 유럽 연방 구상, 군축, 관세 및 여권 폐지, 국제 경제·금융 기구 개발, 통화 통일 등을 주장하며 과거의 폐쇄적인 자급자족 경제 체제에서 벗어났다.[33] 또한 인터내셔널리즘과 평화를 옹호하며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프로이센 주의 해체를 주장했다.[34]
전후 저서에서 오토는 "독일적 사회주의"를 '''연대주의'''(Solidarismus)로 대체했다. 그는 생시몽의 공상성을 지적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따라 과거의 환상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35] 그러나 그는 여전히 관념적 정신주의를 중시하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종교적 세계관과 연결시켰다. 전후 "연대주의"는 모든 인위적 제도를 신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에 일치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그 중심에는 "기독교인의 자유"와 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인간 존재가 있었다.[36][37]
오토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관료제를 비판하며, 인간의 자발적인 자기 결정의 자유와 책임의 원리를 강조했다. 이는 히틀러의 권위에 도전했던 그의 경험과도 일치하는 사상이었다. 그는 슈펭글러를 "파시즘의 선구자"로 평가하며, 국가 권력에 의한 자신의 박해 경험을 드러내기도 했다.[38] 1974년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 사망할 때까지, 오토 슈트라서는 나치 좌파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6. 1. 슈트라서주의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전환과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은 오토가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을 깊게 한 계기 중 하나였다. 스탈린의 노선은 자기 민족의 삶이 문제이며, 원리나 이론이 문제가 아니라는 국가사회주의의 첫 번째 원리 승인이었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투쟁은 삶과 원리의 투쟁이었으며, 오토에게 일국 사회주의의 승리는 그가 숭배하는 삶의 철학의 승리였다.[17]"우리 보수 혁명가가 끊임없이 인식하는 사실은 유기적 과정이 제1차적이며, 우리의 건축 설계도는 이 과정 안의 설계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바꿔 말하면, 삶과 설계도 사이에 모순이 일어날 경우에는 항상 옳은 것은 삶 쪽이며 설계도는 삶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17]
오토의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관은 히틀러에 대한 태도와 모순된다. 이념과 당 강령을 무시하는 히틀러의 현실 노선에 오토가 반대했던 것은, 이념과 당 강령에 충실하려 했던 그의 독단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현실 노선을 우선시하는 히틀러에게 오토는 독단을 휘두르는 "풀 없는 문사", 현실성을 결여한 "혼란한 살롱 볼셰비키", 무책임한 "방랑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17]
6. 2. 전후의 변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나치당이 소멸하자, 오토 슈트라서는 독일로 귀국하려 했지만 연합군과 서독 정부로부터 귀국을 방해받았다. 1955년에야 서독으로 귀국이 허가되었다.[33]전후 오토에게는 바이마르 시대의 사상과 큰 변화가 나타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비극과 망명 생활은 그의 탈이데올로기를 가져왔고, 개인의 존엄성 사상이 커졌다.[33] 망명 후 오토는 유럽 연방 구상을 더욱 강하게 주장했고, 군축을 설파했으며,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민병 제도의 창설을 주장했다. 관세 및 여권 폐지, 국제적인 경제·금융 기구 개발, 통화의 통일을 기반으로 한 "정신의 올림픽"을 역설했다.[33] 이는 과거 폐쇄적인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주장하던 시절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오토는 인터내셔널리즘과 평화 사상을 고취하며 군국주의에서 벗어났다. 그는 중앙 집권적인 군국주의의 아성 프로이센 주의 해체를 주장했다.[34] 오토는 프로이센을 라인란트, 헤센, 하노버, 튀링겐, 작센, 브란덴부르크로 분할할 것을 제안했다.[34]
전후 출판된 저서 『파시즘(Der Faschismus)』에서 "독일적 사회주의"는 "'''연대주의'''(Solidarismus)"로 바뀌었다. 오토는 생시몽의 공상성을 지적하며 "시대 정신이 달라지고 역사의 진자가 현재의 영점을 넘어 흔들릴 때, 어제의 환상이 내일의 현실이 된다"고 말했다.[35]
그러나 오토에게 관념적 정신주의에 대한 집착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은 저편과의 관계 없이는 의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며, 종교적 세계관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전후 "연대주의"는 국가나 경제와 같은 모든 인위적 제도를 신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에 일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36] 그 중심에는 "기독교인의 자유"와 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인간 존재가 있었다.[37]
오토는 인간의 품위를 경시하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비잔틴적 관료 국가와 관료제를 비판했다. 인간 존재의 자발적인 자기 결정의 자유와 책임의 원리는 히틀러의 권위에 도전했던 그의 자세와 체질에 맞는 사상이었다. 전후 오토가 슈펭글러를 "파시즘의 선구자"라고 평가했을 때,[38] 그는 국가 권력에 의한 자신의 박해 경험과 망명 생활의 경험에서 비롯된 본심을 드러냈다.
1974년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 사망했다. 나치 좌파의 간부로서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7. 저서 목록
- 독일 사탕무 종자 재배의 발전과 중요성|독일 사탕무 종자 재배의 발전과 중요성de (1921) - 뷔르츠부르크 박사 학위 논문.[1]
- 우리는 독일을 찾고 있다. 게르하르트 슐츠-프펠처와 오토 슈트라서, 부커 중령, 헤르베르트 블랑의 시대 위기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우리는 독일을 찾고 있다de (1931)[2]
- 독일 사회주의의 건설|독일 사회주의의 건설de (1932)[3]
- 히틀러와 슈트라서를 위한 역사적인 대화의 조항으로서 독일 사회주의의 건설 [분리 조건]|독일 사회주의의 건설 [분리 조건]de (1936)[4]
- 그레고르 슈트라서는(그레고르 슈트라써)|그레고르 슈트라서de (1933) - 미하엘 가이스마이어는 오토 슈트라서의 필명이다.[5]
- 독일 바르톨로뮤의 밤|독일 바르톨로뮤의 밤de (1935)[6]
- 유럽 연방|유럽 연방de (1936)[7]
- 히틀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35년과 1936년의 히틀러 체제의 상황과 발전에 대한 묘사|히틀러는 어디로?de (1937)[8]
- 히틀러는 제자리 걸음을 한다|히틀러는 제자리 걸음을 한다de (1937)[9]
- 전쟁이 일어날까?|전쟁이 일어날까?de (1937)[10]
- 미래의 유럽 : 마사리크의 목표|미래의 유럽de (1939)[11]
- 히틀러와 나|히틀러와 나영어 (1940)[12]
- 내일의 독일|내일의 독일영어 (1941)[13]
- 내 시대의 역사 [경험한 세계사.]|내 시대의 역사영어 (1941)[14]
- 히틀러 주변의 갱스터들 "남아메리카의 나치 갱스터"라는 시사적인 후기 포함|히틀러 주변의 갱스터들영어 (1942)[15]
- 오타와의 죄수: 오토 슈트라서|오타와의 죄수영어 (1953)[16]
- 파시즘. 역사와 위험|파시즘de (1965)[17]
- 나의 투쟁 : [정치적 자서전]|나의 투쟁de (196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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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sser Asked To Join East German R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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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n oder Paradise? Die Bundesregierung, der SPD-Parteivorstand und die umstrittene Rückkehr des NS-Dissidenten Otto Straßer aus Kanada (1948–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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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 Strasser, 76, Theoretician Who Broke With Hitler, Is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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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 and i p.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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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下、Hitler and I pp.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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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 and I 1940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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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l. 1958 p.S.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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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l. 1958 S.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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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l. 1958 S.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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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 and I 1940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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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下、Hitler and I 1940 p.10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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