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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소련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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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소련 관계는 1918년부터 1941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련,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의 외교, 경제, 군사적 관계를 포괄한다. 양국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1922년 라팔로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고 군사 협력을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1930년대 초 베를린 조약으로 관계가 유지되었으나, 코민테른의 정책과 스탈린의 소수 민족 탄압은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중반에는 프랑스와 소련의 상호 원조 조약 체결, 스페인 내전에서의 대립 등 긴장이 고조되었고, 집단 안보 체제의 실패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로 동유럽 분할에 합의하고 폴란드 침공 이후에는 경제 협력을 강화했으나,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관계는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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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소련 관계
지도 정보
1937년까지의 독일-소련 위치
1937년까지의 독일-소련 위치
관계 정보 (1918-1933)
해당 국가바이마르 공화국
상대 국가소비에트 연방
관계 정보 (1933-1941)
해당 국가나치 독일
상대 국가소비에트 연방
역사적 배경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제1차 세계 대전 문서 보관소
러시아의 독일 접근 (1924년 12월)1924년 12월 러시아의 독일 접근
소련 집단 안보 정책의 기원 (1930-32)소련 연구

2.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련의 협력 (1918-193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바이마르 공화국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후 소련)은 각자의 필요에 의해 서로에게 접근했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적 제약을 극복하고 과거 영토를 회복하려 했으며, 소련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 적대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 둘러싸여 외교적, 경제적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양국은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용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15]

양국 관계의 공식적인 출발점은 1922년 4월 체결된 라팔로 조약이었다.[20] 이 조약은 상호 간의 전쟁 배상 요구를 포기하고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며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아, 국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라팔로 조약은 이후 양국 관계의 기본 틀을 제공했으며, 특히 독일에게는 베르사유 조약 체제를 우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라팔로 조약 전후로 양국은 비밀리에 군사 협력을 진행했다. 독일 국방군, 특히 한스 폰 젝트 장군의 주도로 추진된 이 협력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금지된 무기 개발과 군사 훈련을 소련 영토 내에서 비밀리에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6][17][19] 소련은 리페츠크(비행 학교), 카잔(탱크 학교), 톰카(화학 무기 시설) 등[2][26][29] 자국 영토 내 시설을 독일에 제공하는 대가로 독일의 선진 군사 기술과 붉은 군대 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받았다.[25] 항공기 제조사 융커스가 모스크바 인근에서 항공기를 생산하고,[26] 크루프사가 포병 관련 활동을 하는 등[29] 산업계의 협력도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도 양국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천연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원자재를 수입했고,[34] 1925년 통상 협정 체결 이후 무역 규모는 꾸준히 증가했다.[35][36] 독일은 소련의 산업 현대화, 특히 군수 산업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 양국은 폴란드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으나,[37][2] 실제적인 동맹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1925년 독일이 서방 국가들과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자 소련은 독일의 이탈을 우려했으나,[3] 1926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양국은 중립 관계를 재확인했다.[39]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양국 관계에는 균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스탈린코민테른을 통해 독일 공산당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3기 노선'을 내세우면서 독일 사회민주당과의 적대 관계를 심화시킨 것은 결과적으로 나치당의 부상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있다.[41][42][45][46] 또한, 소련 내 독일계 민족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171]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930년대 초반까지 비밀 군사 협력은 지속되었지만,[44] 정치적 불신이 커지고 소련이 프랑스, 폴란드와 불가침 조약을 맺는 등[44] 외교 노선이 변화하면서 협력의 동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결국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집권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독일-소련 협력 관계는 막을 내리게 된다.

2. 1.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식

1918년 2월, 야셀다 강 지역에서 독일군과 볼셰비키군이 교류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는 독일의 미래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 중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볼셰비키 정권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 아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는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을 강요당했다.[9]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광대한 서부 영토를 독일 제국에 할양해야 했다.

한편, 독일은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콩피에뉴 휴전 협정을 맺고 서부 전선에서 전쟁을 종결지었다. 독일 제국이 붕괴한 후,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연합국 군대는 볼셰비키에 맞서 러시아 내전에 개입했다.[10]

초기 소련 지도부는 세계 혁명의 일환으로 독일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 소련식 공화국을 세우려는 시도들은 바이에른(25일),[11] 브레멘(26일),[12] 뷔르츠부르크(3일)[13] 등 짧은 기간 존속하거나 스파르타쿠스 봉기처럼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14] 이후 볼셰비키는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소련-폴란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독일의 적대국이었고(예: 슐레지엔 봉기), 소련 역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된 상황이었기에, 소련 정부는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독일을 향한 적대적인 태도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교 노선은 외무 인민 위원 게오르기 치체린과 소련 대사 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 등이 주도했으며, 카를 라데크, 레오니트 크라신,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 빅토르 코프, 아돌프 요페 등도 협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5]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의 많은 지도자들은 베르사유 조약이 부과한 가혹한 조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국방군 사령관 한스 폰 젝트 장군은 조약의 제약을 벗어나 군대를 재건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제2 폴란드 공화국 및 프랑스-폴란드 동맹에 대항하며, 소련과 영국이 동맹을 맺는 상황을 막기 위해 소련과의 협력에 관심을 보였다. 독일의 구체적인 목표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금지된 군대의 완전한 재무장과 폴란드에 대항하는 동맹 결성이었다. 폰 젝트와 소련 간의 첫 접촉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919년에서 1921년 초 사이, 혹은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전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6][17]

1920년 4월 16일, RSFSR의 베를린 특별 대표 빅토르 코프는 독일 외무부에 폴란드에 대한 공동 전쟁을 위해 독일군과 붉은 군대가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지 문의했다.[18] 이는 양국 간 군사 협력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이러한 협력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 전까지 이어졌다. 1921년 초에는 소련 문제를 담당하는 국방군 내 특별 그룹, Sondergruppe Rdeu이 창설되었다.[19]

베르사유 조약은 바이마르 독일의 군대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하고, 항공기, 탱크, 잠수함, 중포, 독가스, 대전차 무기, 다수의 대공포 보유를 금지했다. 국제 연맹의 감시단은 이러한 무기 생산을 막기 위해 독일의 공장과 작업장을 순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이마르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1922년 4월 16일, 제노바 경제 회담 기간 중 라팔로 조약을 체결했다. 독일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와 소련 외무 인민 위원 게오르기 치체린이 서명한 이 조약은 양국 간의 모든 상호 청구를 포기하고, 완전한 외교 관계를 복원하며, 긴밀한 무역 관계를 수립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로써 바이마르 독일은 소련의 주요 무역 및 외교 파트너가 되었다.[20]

라팔로 조약 체결 직후 비밀 군사 협정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만, 오랫동안 양국의 군사 협상은 라팔로 조약과는 별개로 진행되었으며 독일 외무부 모르게 비밀리에 추진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19] 그러나 이후 연구를 통해 이러한 관점은 반박되었다.[21][22][23] 1922년 11월 5일에는 곧 소련에 합병될 다른 6개의 소비에트 공화국들도 라팔로 조약을 준수하기로 합의했다.[24]

소련은 베르사유 조약 감시단의 눈을 피해 바이마르 독일이 무기를 개발하고 시험하며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소련 영토 깊숙한 곳에 시설을 제공했다. 그 대가로 소련은 독일의 선진 기술에 접근하고 붉은 군대 참모부 창설에 대한 지원을 받았다.[25]

독일 장교들은 1922년 3월부터 군사 협력 목적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한 달 뒤, 항공기 제조사 융커스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며 모스크바 외곽 필리에서 항공기 생산을 시작했다.[26] 이 합작 공장에서는 융커스의 최신 금속 항공기 설계가 적용되었으며,[28][27] 안드레이 투폴레프파벨 수호이 같은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했다.[28] 이 공장은 나중에 소련 소유로 전환되었고, 융커스 폭격기를 기반으로 한 소련의 투폴레프 TB-1 및 투폴레프 TB-3 폭격기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28]

독일의 거대 중공업 기업 크루프는 소련 남부 로스토프나도누 근처에서 포병 관련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에는 미래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비행 학교가 리페츠크 근처에 설립되었다.[2][26] 1926년부터 독일 국방군은 카잔의 탱크 학교와 사라토프주의 화학 무기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대가로 붉은 군대는 이러한 훈련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바이마르 독일로부터 군사 기술과 이론을 전수받았다.[29]

소련은 흑해 연안에 잠수함 건조 시설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독일 해군(크리그스마리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독일 해군은 나중에 무르만스크 근처의 기지(폴랴르니)를 제안받아 영국 해군의 감시를 피해 작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냉전 시대에 이 기지는 세계 최대 규모의 무기 저장고 중 하나가 되었다.

2. 2. 라팔로 조약 (1922)과 비밀 군사 협력

라팔로 조약은 바이마르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1922년 4월 16일 제노바 경제 회담 기간 중 체결되었다. 독일 측에서는 외무부 장관 발터 라테나우가, 소비에트 측에서는 게오르기 치체린이 서명했다. 이 조약은 양국 간의 모든 상호 청구를 무효화하고 완전한 외교 관계를 복원했으며, 긴밀한 무역 관계를 수립하여 바이마르 독일이 소련의 주요 무역 및 외교 파트너가 되도록 했다.[20] 1922년 11월 5일에는 곧 소련에 합류할 예정이던 다른 6개의 소비에트 공화국도 라팔로 조약을 준수하기로 합의했다.[24]

조약 체결 직후부터 비밀 군사 협력에 대한 소문이 돌았으나, 오랫동안 이는 조약과는 별개로 독일 외무부 모르게 진행된 것으로 여겨졌다.[19] 그러나 이후 연구를 통해 조약과 군사 협력의 연관성이 밝혀졌다.[21][22][23]

소련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비 확장에 제약을 받던 바이마르 독일에 군사 시설을 제공했다. 독일은 소련 영토 깊숙한 곳에서 조약 감시단의 눈을 피해 무기를 제작 및 시험하고 군사 훈련을 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소련은 독일의 선진 기술에 접근하고 붉은 군대 참모부 창설에 도움을 받았다.[25]

비밀 군사 협력은 1922년 3월 독일 장교들이 소비에트 러시아로 파견되면서 시작되었다. 한 달 뒤인 4월, 항공기 제조사 융커스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며 모스크바 외곽 필리에서 항공기 제작을 시작했다.[26] 이 합작 공장에서는 융커스의 최신 금속 설계 기술이 적용되었고,[28][27] 안드레이 투폴레프파벨 수호이 같은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했다.[28] 이 공장은 나중에 소련이 운영하게 되었으며, 융커스 폭격기를 기반으로 한 소련의 투폴레프 TB-1 및 투폴레프 TB-3 폭격기가 이곳에서 제작되었다.[28]

독일의 군사 협력은 항공 분야 외에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분야위치주요 내용시작 연도관련 기업/조직비고
포병로스토프나도누 근처포병 관련 활동-크루프-
비행 학교리페츠크 근처미래 루프트바페 조종사 훈련1925년국방군리페츠크 전투기 조종사 학교
탱크 학교카잔탱크 운용 및 전술 훈련1926년국방군카마 탱크 학교
화학 무기 시설사라토프주 (톰카 가스 시험장)화학 무기 개발 및 시험1926년국방군톰카 가스 시험장



이러한 시설 운영의 대가로 붉은 군대는 훈련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이마르 독일로부터 군사 기술과 이론을 전수받았다.[29]

소련은 흑해 항구에 잠수함 건조 시설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독일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후 크리그스마리네는 영국 해군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무르만스크 근처의 기지(폴랴르니)를 제안받았다. 이 기지는 냉전 시대에 세계 최대 규모의 무기 저장고 중 하나가 되었다.

2. 2. 1. 문서 관련 기록

독일-소련 군사 협력과 관련된 대부분의 문서는 독일에서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30] 1920년대 폴란드프랑스 정보 기관은 이러한 협력 관계에 대해 상당히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당시 다른 유럽 열강과 독일의 관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장군의 문서와 다른 독일 장교들의 회고록이 공개되었으며,[19] 소련 붕괴 이후에는 관련 소련 문서 중 일부가 출판되었다.[31]

2. 3. 1920년대의 관계

라팔로 조약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1922년 4월 16일 제노바 경제 회담 기간 중 체결되었다. 독일 외무부 장관 발터 라테나우와 소비에트 러시아의 게오르기 치체린이 서명한 이 조약은 양국 간 모든 상호 청구를 무효화하고 완전한 외교 관계를 복원했으며, 긴밀한 무역 관계 수립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바이마르 독일은 소련의 중요한 무역 및 외교 파트너가 되었다.[20]

조약 체결 직후 비밀 군사 부록의 존재에 대한 소문이 퍼졌으나, 오랫동안 이는 사실이 아니며 양국 간 군사 협상은 라팔로 조약과는 별개로 독일 외무부와 분리되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19] 그러나 이후의 연구들은 이러한 견해를 반박했다.[21][22][23] 1922년 11월 5일에는 곧 소련에 합류할 예정이었던 다른 6개의 소비에트 공화국들도 라팔로 조약을 준수하기로 합의했다.[24]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비 증강에 제약을 받던 바이마르 독일을 위해, 소련은 조약 감시단의 눈을 피해 자국 영토 깊숙한 곳에 무기 제작 및 시험, 군사 훈련을 위한 시설을 제공했다. 그 대가로 소련은 독일의 기술 개발 정보에 접근하고 붉은 군대 참모부 창설에 도움을 받았다.[25]

이러한 비밀 군사 협력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 1922년 3월, 첫 독일 장교들이 군사 협력 목적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파견되었다.
  • 1922년 4월, 항공기 제조사 융커스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며 모스크바 외곽 필리에서 항공기 제작을 시작했다.[26] 이 합작 공장에서는 융커스의 최신 금속 설계 기술이 적용된 항공기가 제작되었고,[28][27] 안드레이 투폴레프파벨 수호이와 같은 소련의 주요 항공기 설계자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했다.[28] 이후 이 공장은 소련이 운영하게 되었고, 융커스 폭격기를 기반으로 한 투폴레프 TB-1 및 투폴레프 TB-3 폭격기가 생산되었다.[28]
  • 독일의 주요 포병 제조업체 크루프는 소련 남부 로스토프나도누 인근에서 활동했다.
  • 1925년에는 미래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조종사 양성을 위해 리페츠크 근처에 리페츠크 전투기 조종사 학교가 설립되었다.[2][26]
  • 1926년부터 독일 국방군은 카잔의 카마 탱크 학교와 사라토프주의 톰카 가스 시험장(화학 무기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29]
  • 대가로 붉은 군대는 이러한 훈련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이마르 독일로부터 군사 기술과 이론을 전수받았다.[29]


소련은 흑해 연안에 잠수함 건조 시설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독일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일 해군(크리그스마리네)은 나중에 영국 해군의 감시를 피할 수 있도록 무르만스크 근처의 폴랴르니 기지 사용을 제안받기도 했다. 이 기지는 냉전 시대에 세계 최대 규모의 무기 저장고 중 하나가 되었다.

독일-소련 간 군사 협력과 관련된 대부분의 문서는 독일 측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폴란드와 프랑스 정보 기관은 이러한 비밀 협력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보가 당시 다른 유럽 열강과의 독일 관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스 폰 젝트 장군의 문서와 다른 독일 장교들의 회고록이 공개되었고,[19] 소련 붕괴 이후에는 관련 소련 문서 일부가 공개되면서 협력의 실체가 보다 명확히 드러나게 되었다.[31]

2. 3. 1. 무역

1930년 인투리스트의 관광 포스터로 독일인들에게 오데사 방문을 장려하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천연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은[32][33] 러시아로부터 원자재 수입에 크게 의존해 왔다.[3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연간 15억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원자재 및 기타 상품을 수입했다.[3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수치는 감소했지만, 1920년대 중반 양국 간의 무역 협정이 체결된 후 1927년까지 무역 규모는 연간 4억 33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증가했다.[35]

독일의 주요 적대국인 프랑스와의 소련 화해 가능성으로 인한 독일의 국제적 고립에 대한 우려는 경제 협상 가속화의 핵심 요인이었다. 1925년 10월 12일, 양국 간의 통상 협정이 체결되었다.[36]

1920년대 후반 독일은 소련 산업의 현대화를 도왔다. 특히 레닌그라드의 볼셰비키 공장과 하르코프 기관차 공장에 탱크 생산 시설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2. 3. 2. 폴란드 분할 계획



소련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군사 및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독일의 지정학적 열망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1920년 7월 19일, 소련 대표 빅토르 코프(Victor Kopp)는 독일 외무부에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하여 "리투아니아 남쪽, 대략 비아위스토크 선에 이르는 독일과의 공동 국경" 설정을 원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37] 이는 사실상 폴란드를 분할하자는 제안이었다. 소련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유사한 제안을 반복하며, 양국 정부 간의 이념적 차이는 부차적이며 공동의 외교 정책 목표 추구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24년 12월 4일,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독일은 1926년에 가입)이 반소련 움직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빅토르 코프는 독일 대사 울리히 그라프 폰 브로크도르프-란차우에게 폴란드에 대항하여 협력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대한 비밀 협상이 승인되었다.[2] 그러나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모험적인 정책 추진은 거부했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는 양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도 있었다. 천연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은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로부터 원자재 수입에 크게 의존해왔다.[32][33][3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연간 15억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원자재 및 상품을 수입했으며,[34] 전쟁 후 잠시 감소했지만 1920년대 중반 무역 협정 체결 이후 1927년에는 연간 4억 3300만 라이히스마르크 규모로 회복되었다.[35] 또한 독일은 소련 산업의 현대화를 지원하고, 레닌그라드의 볼셰비키 공장과 하르코프 기관차 공장에 탱크 생산 시설 설립을 돕기도 했다.

1925년 독일이 서방 국가들과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자, 소련은 이것이 자국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킬 것을 우려했다.[3] 독일 역시 소련 코민테른의 간섭 활동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실용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며, 1926년 4월 24일 베를린 조약을 체결하여 라팔로 조약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향후 5년간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이 조약은 독일 외무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과 소련 대사 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가 서명했다.[39] 그러나 이 조약은 폴란드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어 폴란드 5월 쿠데타의 성공에 영향을 미쳤으며,[40] 로카르노 조약 당사국인 서유럽 국가들에게도 독일의 의도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40]

2. 3. 3. 외교 관계



19세기 후반부터 천연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은[32][33] 러시아로부터 원자재 수입에 크게 의존해 왔다.[3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연간 15억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원자재 및 기타 상품을 수입했으나,[34] 전쟁 후 이 수치는 감소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양국 간 무역 협정이 체결되면서 1927년까지 무역 규모는 연간 4억 33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다시 증가했다.[35] 1920년대 후반 독일은 소련 산업의 현대화를 지원했으며, 레닌그라드의 볼셰비키 공장과 하르코프 기관차 공장에 탱크 생산 시설 설립을 돕기도 했다.

독일은 주요 경쟁국인 프랑스와 소련이 가까워질 가능성을 경계하며 국제적 고립을 우려했고, 이는 소련과의 경제 협상을 서두르는 요인이 되었다. 1925년 10월 12일, 양국 간 통상 협정이 체결되었다.[36] 소련은 군사 및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적 목표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1920년 7월 19일, 소련 대표 빅토르 코프(Victor Kopp)는 독일 외무부에 소련이 "리투아니아 남쪽, 대략 비아위스토크 선에 이르는 독일과의 공동 국경"을 원한다고 전달했는데,[37] 이는 사실상 폴란드를 분할하자는 제안이었다. 소련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비슷한 제안을 하며 양국 정부 간의 이념적 차이보다는 공동의 외교 정책 목표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24년 12월 4일,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1926년 실현)이 반소련 움직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코프는 독일 대사 울리히 그라프 폰 브로크도르프-란차우에게 폴란드에 대항하여 협력할 것을 제안했고 비밀 협상이 진행되었다.[2]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어떠한 모험도 거부했다.

1919년까지 독일과 러시아(소련)는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불신받는 국가로 취급되어 주요 국제 회의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고립 속에서 양국은 라팔로 조약을 계기로 가까워졌다. 독일 외교관들은 소련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 우려했지만, 레닌의 신경제 정책(NEP)이 어느 정도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처럼 보이자 안심하고 관계 개선 정책이 성공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1927년경 베를린은 코민테른스탈린이 혁명적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38]

1925년, 독일은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 및 벨기에와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고 상호 불가침을 약속했다.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 간의 긴장 완화가 자신들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키고 특히 독일과의 관계를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한편 독일은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소련의 영향 하에 있는 코민테른의 파괴적인 간섭 활동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3] 실제로 1925년에는 공산주의 조직인 국제 적색 원조의 여러 구성원들이 반역죄로 재판을 받는 라이프치히에서 체카 재판이 열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6년 4월 24일, 바이마르 독일과 소련은 베를린 조약을 체결하여 기존의 라팔로 조약을 재확인하고 향후 5년간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조약에는 독일 외무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과 소련 대사 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가 서명했다.[39] 이 조약은 폴란드에게 임박한 위협으로 인식되어 5월 쿠데타 성공의 한 요인이 되었으며, 로카르노 조약 당사국으로서 독일의 의무와 상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을 앞두고 우려를 표명했다.[40]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9차 총회와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는 니콜라이 부하린 코민테른 사무총장의 노선 대신 스탈린의 강경 노선이 채택되었다. 스탈린은 서방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기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사회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며 국제 공산당과의 협력을 금지했다. 또한 국제 공산당들이 코민테른, 즉 소련 지도부에 더욱 엄격하게 종속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3기 노선'으로 알려졌다. 독일 공산당(KPD)은 에른스트 텔만의 지도 아래 이 노선을 따르게 되었고, 1920년대 초반 비교적 독립적이었던 모습과 달리 거의 완전히 소련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41][42]

스탈린이 독일 공산당에게 사회민주당과 협력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은 1928년 12월 독일 '산업가 연합'과의 합의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합의에 따라 산업가 연합은 두 가지 조건 하에 최신 무기 기술과 관련 산업 기반을 소련에 제공하기로 했다.[42] 첫째는 소련 루블이 아닌 경화나 물품으로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대공포, 곡사포, 대전차포, 기관총 등 독일제 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외화가 부족했다. 그는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 주요 밀 수출국이었던 점에 착안하여, 부농 계층을 데쿨라크화 정책으로 탄압하고 거대한 집단 농장을 만들어 곡물 생산량을 늘리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대량의 소련산 밀이 1930년과 1931년 세계 시장에 헐값으로 풀렸고, 이는 이미 과잉 상태였던 시장 상황을 악화시켜 북미 지역 농부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통해 독일 무기 대금 지불에 필요한 귀중한 외화를 확보했다.

둘째 조건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독일 산업가들은 독일 내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을 두려워했으며, 특히 KPD와 사회민주당이 해군의 신형 장갑 순양함 건조 예산에 반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군비 증강 목표를 위해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입장을 바꾸도록 지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1928년 여름 내내 독일 무기 제조업자들과 협상하며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1929년부터 독일 공산당원들은 거리에서는 나치 당원들과 싸우면서도, 국회에서는 극우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DNVP)과 히틀러의 NSDAP에 협조하는 모순적인 투표 행태를 보였다.

소련 지도부는 1920년대 외교 정책 기조를 이어갔다. 1930년 6월 27일,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제16차 대회에 제출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보고서에서 스탈린은 자본주의 열강 사이의 국제적 불안정 심화와 정치적 극단주의의 부상을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43]

2. 4. 3기



19세기 후반부터 천연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은[32][33] 러시아로부터의 원자재 수입에 크게 의존해 왔다.[3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연간 15억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원자재 및 기타 상품을 수입했다.[3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수치는 감소했지만, 1920년대 중반 양국 간의 무역 협정이 체결된 후 1927년까지 무역 규모는 연간 4억 33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증가했다.[35] 1920년대 후반 독일은 소련 산업의 현대화를 도왔으며, 레닌그라드의 볼셰비키 공장과 하르코프 기관차 공장에 탱크 생산 시설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독일의 주요 적대국인 프랑스와의 소련 화해 가능성으로 인한 독일의 국제적 고립에 대한 우려는 경제 협상의 가속화에 핵심 요인이었다. 1925년 10월 12일, 양국 간의 통상 협정이 체결되었다.[36]

1930년부터 1932년까지가 바이마르 독일과의 소련의 군사 협력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1931년 6월 24일, 1926년 베를린 조약의 연장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1933년에 국회에서 비준되었다. 1932년 로잔 회담에서 독일 재상 프란츠 폰 파펜이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에리오에게 군사 동맹을 제안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소련은 약간의 불신을 품게 되었다. 소련은 또한 프랑스와 그 주요 동맹국인 폴란드와의 관계를 빠르게 발전시켰다. 이는 1932년 7월 25일 소련-폴란드 불가침 조약 체결과 1932년 11월 29일 소련-프랑스 불가침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 간의 갈등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에 근본적으로 기여했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이 소련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일부 저자는 스탈린이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을 조장하기 위해 독일 공산당의 정책을 자멸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히틀러의 부상을 의도적으로 도왔다고 주장하지만,[45] 많은 다른 사람들은 이 이론을 일축한다.[46]

이 기간 동안, 더욱 고립주의적인 스탈린주의 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군사 통제 포기로 인해 독일이 소련 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 독일과 소련 간의 무역이 감소했으며, 1934년 소련 수입은 2억 2300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했다.

2. 5. 1930년대 초



19세기 후반부터 천연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은[32][33] 러시아로부터의 원자재 수입에 크게 의존해 왔다.[3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연간 15억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원자재 및 기타 상품을 수입했다.[3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수치는 감소했지만, 1920년대 중반 양국 간의 무역 협정이 체결된 후 1927년까지 무역 규모는 연간 4억 33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증가했다.[35] 1920년대 후반 독일은 소련 산업의 현대화를 도왔으며, 레닌그라드의 볼셰비키 공장과 하르코프 기관차 공장에 탱크 생산 시설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독일은 주요 경쟁국인 프랑스와 소련이 가까워질 가능성을 경계하며 국제적 고립을 우려했고, 이는 소련과의 경제 협상을 서두르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1925년 10월 12일, 양국 간의 통상 협정이 체결되었다.[36]

한편, 소련에는 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중심으로 많은 독일계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1928년부터 1948년까지 스탈린의 불신과 박해를 받았다. 독일계 민족은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았는데, 초기에는 계급적 요인이 박해의 주요 원인이었으나, 1933년 나치 독일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이들과의 민족적 연계성이 주요한 박해 기준으로 작용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에는 세금 부담이 급증했으며, 일부 독일계 정착촌 주민들은 우랄 산맥 동쪽으로 영구적으로 추방되기도 했다.[48]

2. 6. 소련 내 독일 민족 박해

1920년대 소련독일계 주민들은 소련의 민족 구획 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문화적 자치를 누렸다. 우크라이나에 8개의 민족 구역이 있었고, 러시아 본토에도 다수,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특히 볼가 독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볼가 독일 ASSR)에는 독일계 학교와 신문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1929년 9월, 강제 곡물 징발과 농업 집단화 재도입에 불만을 품은 수천 명의 독일계 소련 농민(대부분 메노나이트파)이 모스크바에 모여 캐나다로 이주하기 위한 출국 비자를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큰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소련-독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독일에서는 소련 내 독일인을 돕기 위한 자선 단체 "고난 속의 형제"가 설립되었고, 당시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도 이 목적을 위해 20만 라이히스마르크를 기부했다. 소련 정부는 처음에 5,461명의 독일인 이민을 허용했지만, 나머지 9,730명은 원래 거주지로 돌려보냈다.[169][170][171]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 한 해 동안 소련 정부는 소련 내 독일 민족 기관의 수와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171]

소련 내 독일인(특히 반혁명가로 간주된 이들)을 겨냥한 최초의 대규모 체포와 공개 재판은 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 관련 사건 중에 일어났다. 이후 1934년 11월 5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칙령에 따라 국내 반독일 캠페인이 소련 전역으로 확대되었다.[171] 같은 시기(1933-1934년) 독일에서는 러시아와 소련의 기근 동안 식량 꾸러미와 돈을 보내 폴크스도이체(독일계 주민)를 돕기 위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172]

소련 정부는 국경을 넘나드는 소수 민족(독일인, 폴란드인, 핀란드인 등)의 민족적 유대에 대해 깊이 우려하여, 1934년 서부 국경을 따라 새로운 국경 보안 구역을 설정하기로 결정했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 NKVD는 이 지역에서 잠재적으로 불충하다고 여겨지는 민족(독일인 포함)을 소련 내부 지역으로 강제 추방했다.[171] 독일 민족 기관들도 점차 폐지되었다.[173]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대숙청 기간 동안 NKVD는 소수 민족들을 대상으로 소련 시민과 외국 시민을 가리지 않고 "간첩 및 사보타주 병력 파괴"를 명분으로 한 대규모 작전(NKVD 민족 작전)을 수행했다. 여기에는 NKVD 독일인 작전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소수 민족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이 시기에 볼가 독일 ASSR과 그 공화국 내의 독일 학교를 제외한 소련 내 모든 독일 민족 구역과 학교, 그리고 다른 소수 민족 구역과 학교가 폐지되었다.[171][174]

독일침공이 현실화되자, 소련 정부는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독일계 주민 전체를 강제 이주시키는 조치를 즉시 시행했다. 약 120만 명의 독일계 소련 시민이 유럽 러시아에서 시베리아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되었다.[175][176]

3. 나치 독일과 소련의 관계 (1933-1941)



19세기 후반부터 천연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러시아로부터의 원자재 수입에 크게 의존해왔다.[32][33][3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연간 15억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원자재 및 상품을 수입했으나,[34] 전쟁 이후 규모가 줄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인 1920년대 중반 양국 간 무역 협정이 체결되면서 1927년까지 연간 4억 3300만 라이히스마르크 규모로 교역량이 회복되었다.[35] 이 시기 독일은 소련의 산업 현대화를 지원하며 군사 기술 협력도 진행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나치 정권은 독일 공산당을 탄압하고 노골적인 반소련, 반공산주의 정책을 펼쳤다.[44]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이미 동유럽, 특히 러시아 지역을 독일 민족의 레벤스라움(생활 공간)으로 삼겠다는 구상을 밝혔으며, 유대 볼셰비즘을 격렬히 비난했다.[50]

이에 소련은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을 중심으로 나치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한 집단 안전 보장 정책을 추진했다. 소련은 국제 연맹에 가입(1934년)하고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과의 협력을 모색했다.[53][54] 그러나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체결[52],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의 양측의 대립, 그리고 독일 주도의 반코민테른 협정(1936년) 체결 등으로 인해 양국 간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소련의 집단 안보 노력은 서방 국가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불신, 그리고 소련 내부의 대숙청(1934-1940)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과 내부 혼란 등으로 인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4][52][64][65][66]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30년대 후반, 유럽의 국제 정세는 점차 불안정해져 갔으며, 독일과 소련의 관계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3. 1. 히틀러 집권 초기의 관계

막심 리트비노프는 나치 독일을 소련에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겼다.


나치 독일의 반소련 선전 포스터, 1939년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 독일 내 독일 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나치 정권은 독일에 있는 소련 무역 사절단, 기업, 언론 대표, 심지어 개인 시민들을 상대로 경찰력을 동원한 조치를 취했다. 또한,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인 반소련 선전을 펼쳤다.[44] 히틀러는 이미 1926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동유럽, 특히 러시아 지역에 독일 민족을 위한 레벤스라움(생활 공간) 확보를 주장했으며, 공산주의를 국가를 파괴하는 유대 볼셰비즘으로 규정하며 적대감을 드러냈다.[50]

이러한 베를린의 공세적인 태도에 대해 모스크바는 처음에는 비교적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소련 언론은 새 독일 정부에 대해 몇 차례 조심스러운 비판을 제기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독일의 반소련 행위가 계속되자 소련 역시 나치즘에 반대하는 선전 활동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3년 5월 무렵에는 양국 간의 긴장이 다소 완화되는 듯 보였다. 1931년에 합의되었던 베를린 조약 연장안이 1933년 5월 5일 독일에서 비준되었기 때문이다.[44] 1933년 8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독일 대사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센에게 향후 양국 관계는 전적으로 독일의 태도에 달려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51]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은 1933년 8월과 9월 사이, 독일 국방군이 사용하던 리페츠크, 카마, 톰카의 세 군사 훈련 및 시험 시설에 대한 접근을 갑자기 중단시켰다.[44] 결국 1934년 1월 26일, 나치 독일이 제2 폴란드 공화국과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국 간의 정치적 협력 관계는 사실상 파탄났다.[52]

1930년부터 소련의 외무 인민 위원(외무장관)을 맡고 있던 막심 리트비노프는 나치 독일을 소련의 가장 큰 위협으로 인식했다. 당시 붉은 군대의 군사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소련이 유럽 전체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집단 안전 보장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국제 연맹 및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과 협력하여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 연맹과 국제 평화에 대한 소련의 기존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33년과 1934년 사이 소련은 스페인, 미국,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여러 국가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받았고, 마침내 1934년 9월에는 국제 연맹에 가입했다. 이러한 소련 외교 정책의 전환은 주로 히틀러의 집권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되지만,[53][54] 일부에서는 1932년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관계 개선 시도 역시 이러한 변화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3]

헤르만 라우슈닝은 1940년에 출간한 저서에서 히틀러가 범슬라브주의와 신슬라브주의에 맞선 피할 수 없는 투쟁을 언급했다고 기록했다. 이 책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볼프강 해넬 등 일부 역사가는 조작된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리처드 슈타이그만-갈, 이언 커쇼, 휴 트레버-로퍼 등은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주요 자료로 사용하지 않는다. 라우슈닝에 따르면 히틀러는 슬라브 민족에 대해 "우리는 독일 인종 이상과 범슬라브 대중 이상 사이의 최종 전투를 어떤 식으로든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이익도 연결할 수 없는 영원한 심연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섬기고 복종하도록 운명지어진 대중 위에 독일 인종 의식의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위대한 대륙 공간을 정복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단독으로, 모스크바와의 협약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투쟁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계의 영구적인 지배로 가는 문을 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러시아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목표로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56]

역사가 에릭 D. 바이트는 스탈린 정권이 수백 명의 독일 시민, 특히 공산주의자들을 나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게 넘겨주는 등 두 정권 간의 협력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또한 독일 공산당(KPD) 정치국 구성원들이 나치 독일에서보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더 높은 비율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57]

한편, 소련은 나치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모색했다. 1935년 5월 2일, 프랑스와 소련은 5년 기한의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58] 이후 프랑스 의회가 이 조약을 비준한 것은 히틀러가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 재무장을 단행하는 명분 중 하나로 작용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세계 대회에서는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다양한 정치 세력과 폭넓은 연합을 추구하는 인민 전선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는 공산당들이 1934년부터 이미 추진해오던 노선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열린 제7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몰로토프는 독일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해, 다소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59]

1936년 11월 25일,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공동으로 저지한다는 명목 아래 반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했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도 1937년에 가입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1933년에 이탈리아-소련 조약을 맺은 바 있었다.)[60]

경제적인 측면에서 소련은 1930년대 중반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61] 소련은 과거 무역에서 발생한 부채를 주로 원자재로 상환하려 했고, 독일은 재무장을 위한 자원이 필요했다. 양국은 1935년에 신용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62] 1936년 독일 내 원자재 및 식량 부족 위기가 심화되자 히틀러는 "비용에 관계없이" 재무장을 추진하기 위한 4개년 계획을 지시했다.[63]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필요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추가적인 신용 협정이나 더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맺으려는 소련의 제안을 거부했다.[62]

리트비노프가 추진했던 집단 안보 전략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영국을 통치하던 보수당은 소련을 나치 독일 못지않은 위협으로 간주했으며, 일부는 소련을 더 큰 위협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소련 내부에서 진행된 대숙청은 서방 국가들은 물론 서방 좌파 진영에서조차 소련을 신뢰할 만한 동맹 상대로 여기기 어렵게 만들었다.[4][52] 대숙청은 소련 외교 시스템에도 큰 타격을 주어 외무인민위원회는 많은 해외 대사관을 폐쇄해야 했고,[64][65] 혼란스러운 행정 체계는 독일과의 경제 협상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내부 혼란은 히틀러로 하여금 소련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66]

3. 2. 1930년대 중반의 관계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독일 총리가 된 후, 나치 독일의 노골적인 반공주의와 반소련 정책은 양국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켰다. 나치는 독일 내 독일 공산당을 탄압하고 소련 관련 기관과 인물들에 대해 적대적인 조치를 취했으며[44], 이는 나의 투쟁에서 드러난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확보 및 유대 볼셰비즘 타도 구상과 맥을 같이 했다.[50]

이에 소련은 기존의 독일과의 협력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외교 노선을 모색했다.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을 중심으로 나치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한 집단 안전 보장 정책을 추진했으며, 국제 연맹 가입(1934년)과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53][54] 특히 1935년 5월 프랑스와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한 것은 이러한 정책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였다.[58] 같은 해 코민테른 제7차 세계 대회에서는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과 연대하는 인민 전선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여 노선 변화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독일과 그 동맹국들은 소련을 고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936년 11월 나치 독일일본 제국은 반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했고, 이듬해 파시스트 이탈리아도 가입했다.[60]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경제적 필요에 의해 양국 간 관계 개선 시도는 있었다. 소련은 과거 무역 부채 상환을, 독일은 재무장에 필요한 자원 확보를 위해 1930년대 중반 경제 협력을 모색했고, 1935년 신용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61][62] 하지만 히틀러 정권의 적대적 태도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62]

소련의 집단 안보 정책은 서방 국가들의 불신[4]과 소련 내부의 대숙청으로 인한 외교력 약화[52][64][65][66] 등으로 인해 난관에 부딪혔다.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의 대립은 이러한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결국 1938년 9월, 서방 국가들이 소련을 배제하고 독일의 요구를 수용한 뮌헨 협정이 체결되면서 집단 안보 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68] 이는 소련 외교 정책의 또 다른 전환을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3. 2. 1. 스페인 내전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국민군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를 상대로 승리하여 스페인을 장악했다. 이 내전에서 독일은 국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정예 공군 및 전차 부대를 파견했고, 이탈리아 역시 여러 전투 사단을 보냈다. 반면 소련은 군사 및 정치 고문을 파견하고 "공화파" 또는 "충성파"로 불린 정부 측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를 판매했다. 코민테른은 전 세계 공산당을 동원하여 공화파를 위해 싸운 국제 여단에 자원병을 보내도록 도왔다. 다른 주요 강대국들은 이 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3. 2. 2. 집단 안보 실패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권력 장악을 한 후, 나치당은 독일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44] 독일 내 소련 무역 사절단, 기업, 언론 대표, 개인 시민들을 상대로 경찰 조치를 취했으며, 외교 관계에서도 적대감을 드러내며 반소련 선전 캠페인을 벌였다. 이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다.[44]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이미 동유럽에서의 레벤스라움(생활 공간) 확보를 주장하며 유대 볼셰비즘으로 규정하며 비난한 바 있다.[50]

독일의 이러한 공세적인 태도에 대해 모스크바는 초반에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으나, 노골적인 반소련 행위가 계속되자 소련 역시 나치에 대한 선전 캠페인으로 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의 완전한 파탄은 즉각적으로 오지 않았다. 1931년에 연장된 베를린 조약은 1933년 5월 5일 독일에서 비준되었다.[44] 1933년 8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독일 대사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센에게 양국 관계는 독일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전했다.[51] 그러나 같은 해 8월과 9월, 소련은 독일 국방군이 사용하던 세 곳의 군사 훈련 및 시험장(리페츠크, 카마, 톰카) 접근을 갑자기 중단시켰다.[44] 결국 1934년 1월 26일, 나치 독일과 제2 폴란드 공화국 간의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체결은 소련과 나치 독일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깨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다.[52]

1930년부터 외무인민위원을 맡았던 막심 리트비노프는 나치 독일을 소련의 가장 큰 위협으로 인식했다. 당시 붉은 군대의 군사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유럽 전체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소련 지도부의 입장에 따라, 리트비노프는 집단 안전 보장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국제 연맹 및 서방 국가들과 협력하여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려는 시도였다. 이에 따라 국제 연맹과 국제 평화에 대한 소련의 태도도 변화했다. 1933년부터 1934년 사이 스페인, 미국,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여러 국가가 소련을 외교적으로 승인했으며, 소련은 1934년 9월 국제 연맹에 가입했다. 이러한 소련 외교 정책의 전환은 히틀러의 집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지만[53][54], 1932년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관계 개선 움직임 역시 이러한 변화의 일부로 볼 수 있다.[3]

1935년 5월 2일, 프랑스와 소련은 5년 기한의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58] 이 조약의 비준은 히틀러가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 재무장을 강행하는 명분 중 하나로 삼았다. 같은 해 코민테른 제7차 세계 대회에서는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다양한 정치 세력과 폭넓은 동맹을 형성하는 인민전선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는 공산당이 1934년부터 추진해 온 정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1935년 제7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독일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59]

1936년 11월 25일,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반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에는 파시스트 이탈리아도 가입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1933년에 이탈리아-소련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60]

경제적으로 소련은 1930년대 중반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61] 소련은 주로 과거 무역에서 발생한 부채를 원자재로 상환하려 했고, 독일은 재무장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양국은 1935년 신용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62] 1936년 독일은 원자재와 식량 공급 위기에 직면하여 히틀러가 "비용에 관계없이" 재무장을 위한 4개년 계획을 발표할 정도였으나,[63] 히틀러는 추가 신용 협정 제안과 함께 더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모색하려는 소련의 시도를 거부했다.[62]

리트비노프가 추진한 집단 안보 전략은 여러 장애물에 부딪혔다. 영국에서는 1931년부터 집권한 보수당 (영국)이 소련을 나치 독일 못지않은 위협으로 간주했으며, 일부는 소련을 더 큰 위협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소련 내부에서 진행된 대숙청은 서방 국가들뿐만 아니라 서방 좌파 진영에서조차 소련을 신뢰할 만한 동맹 상대로 여기기 어렵게 만들었다.[4][52] 대숙청은 외무인민위원회의 기능을 마비시켜 많은 해외 대사관을 폐쇄해야 할 정도였으며,[64][65] 혼란스러운 행정 구조는 독일과의 경제 협상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히틀러로 하여금 소련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66]

이러한 국제적 긴장 속에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국민군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군사적 지원(공군, 전차 부대, 전투 사단 파견)을 받아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공격했다. 소련은 공화파(충성파)를 지원하기 위해 군사 및 정치 고문을 파견하고 무기를 판매했으며, 코민테른은 전 세계 공산당을 통해 국제여단 자원병을 조직하여 참전시켰다. 다른 주요 강대국들은 중립을 지켰다. 스페인 내전은 집단 안보 체제의 실패와 함께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강대국들이 대리전을 벌이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4.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1939년 8월 23일, 크렘린에서 리벤트로프를 환영하는 스탈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서명.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오시프 스탈린


비밀 의정서에 서명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따른 유럽의 계획 및 실제 분할, 이후 조정 포함.


1939년 8월 19일 독일-소련 통상 협정 (1939년)이 체결되어 경제적 협력의 발판이 마련된 후, 정치적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107][108][109] 독일은 폴란드 침공 계획을 앞두고 소련과의 불가침 약속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8월 22일, 독일 언론은 나치 독일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것이며, 영국 및 프랑스와 진행 중이던 삼국 동맹 협상이 중단되었다고 보도하며 비밀 정치 협상의 존재를 공개했다.[111] 소련은 서방 국가들이 소련의 군사 지원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필요시 폴란드와 루마니아 영토 통과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협상에 대한 진정성이 부족했다고 비판했다.[96]

1939년 8월 23일,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이 이끄는 독일 대표단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다음 날 밤,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 인민 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공식 명칭: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다.[113] 이 조약은 10년 기한의 불가침 조약으로, 양국이 기존의 베를린 조약 (1926년)을 계속 준수할 것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동유럽을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비밀 추가 의정서가 포함되어 있었다.[114]

비밀 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발트 3국(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속하는 지역의 영토적, 정치적 재편의 경우, 리투아니아의 북쪽 경계선은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의 경계를 나타낸다. 이와 관련하여 빌나 지역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관심은 양 당사자 모두가 인정한다.

2. 폴란드 국가에 속하는 지역의 영토적, 정치적 재편의 경우,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은 대략 나레프 강, 비스툴라 강, 산 강의 선으로 경계가 정해진다.

양 당사자의 이익이 독립적인 폴란드 국가의 유지를 바람직하게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국가가 어떻게 경계가 정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향후 정치적 전개의 과정에서만 확실히 결정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양 정부는 우호적인 합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3. 동남유럽과 관련하여, 소련 측은 베사라비아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독일 측은 이 지역에 대한 완전한 정치적 무관심을 선언한다.

비밀 의정서는 양 당사자에 의해 극비로 취급된다.[115]


양측은 비밀 의정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116] 그 내용은 조약 체결 직후부터 소문으로 퍼져나갔다.[117]

8월 24일 소련 관영 신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에 조약 체결 소식이 발표되자, 각국 정부 지도자들과 언론은 큰 충격과 놀라움을 나타냈다. 특히 몇 달간 소련과 군사 동맹 협상을 진행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배신감을 느꼈으며, 협상단은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99][118]

8월 25일,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에게 소련과의 조약으로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양면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났으므로, 영국이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압박했다.[119] 그러나 같은 날 영국이 폴란드와 상호 지원 조약을 체결하자 히틀러는 놀랐고, 이는 8월 26일로 예정되었던 폴란드 서부 침공 계획을 일시적으로 연기하는 요인이 되었다.[119]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1939년 8월 31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서 비준되었다. 이 조약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4. 1. 1939년의 필요와 논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독일자급자족 경제 정책이나 영국과의 동맹이 불가능해지면서 경제적 이유로 소련과의 더 긴밀한 관계가 필요해졌다.[32] 독일은 특히 석유가 부족하여 자체 필요량의 25%만 공급할 수 있었고, 연간 200만 톤의 부족분을 겪었으며, 계획된 동원 총량보다 무려 1,000만 톤이나 부족했다.[32] 반면 소련은 철광석, 망간, 고무, 식용 지방 및 오일과 같은 다른 많은 주요 원자재가 필요했다.[32][76][77][78] 소련의 대독일 수입은 1937년에 528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감소했지만,[47] 대규모 군비 생산 증가와 심각한 원자재 부족으로 인해 독일은 이전의 태도를 바꾸어 1939년 초에 경제 회담을 추진하게 되었다.[79]

1939년 5월 3일, 막심 리트비노프가 해임되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 인민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몰로토프는 리트비노프와 불편한 관계였고, 유대인이 아니었으며(리트비노프와 달리), 독일과의 중립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외무 인민 위원회 내부에서는 리트비노프 지지자들과 유대인들이 숙청되었다.[80][51] 이러한 변화는 순전히 내부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만, 독일에게는 반독일 집단 안보 시대가 끝났다는 신호, 또는 영국 및 프랑스와 진행 중이던 삼자 동맹 협상에서 소련을 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신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81][82][83][84] 이는 소련이 집단 안보라는 기존 노선에서 벗어나 독일과 합의할 준비가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72][73] 독일은 이러한 개편을 경계하면서도 기회로 인식했다.[85][86]

일각에서는 몰로토프가 독일에게 불가침 조약을 제안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영국 및 프랑스와의 회담을 의도적으로 계속했으며, 결국 삼자 동맹 협상이 실패한 것은 소련이 독일과의 조약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87][88] 다른 한편에서는 소련이 삼자 동맹을 진심으로 추진했으나, 서방 국가들과의 동맹 체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자 독일과의 협상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89][90][91][92]

소련이 독일과의 관계 개선으로 나아간 데에는 추가적인 요인들이 작용했다. 1939년 6월 7일 독일이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것[93]과 동쪽에서 일본 제국의 위협이 가시화된 점(1939년 5월 11일 발발한 할힌골 전투) 등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94][95] 몰로토프는 일본의 공격이 삼자 동맹 체결을 방해하기 위한 독일의 사주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96]

7월에는 소련과 독일 간의 공개적인 무역 협상이 진행되었다.[97] 7월 말과 8월 초, 회담은 잠재적인 거래 타결로 나아갔지만, 소련 협상가들은 경제 협정이 정치적 합의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97][98] 독일은 8월 25일로 폴란드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영국 해군의 봉쇄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전쟁 기획자들은 영국의 해상 봉쇄가 현실화될 경우, 소련이 독일의 심각한 원자재 부족을 해결할 유일한 공급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97]

이에 따라 8월 3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독일과 소련이 서로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상대방의 중요 이익을 침해하는 조치를 포기하는 계획을 제시했다.[98] 그는 "발트해흑해 사이에는 우리 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99][100][101] 독일 측은 "독일, 이탈리아, 소련의 이념에는 서방의 자본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공통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며,[100][102] 과거 소련 볼셰비즘에 대한 적대감은 코민테른의 변화와 소련의 세계 혁명 포기로 인해 누그러졌다고 설명했다.[103]

8월 10일까지 양국은 경제 협정의 세부 사항 조율을 거의 마쳤지만, 소련은 독일과의 정치적 합의가 확실해질 때까지 약 열흘간 서명을 미뤘다.[104] 소련 대사는 독일 관리에게 소련이 영국과의 협상을 "별다른 열의 없이" 시작했으며, 이는 독일이 "이해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미 진행 중인 영국과의 병행 협상을 갑자기 중단할 수는 없었다고 덧붙였다.[105] 한편, 독일 내부의 모든 군사 및 경제 연구는 소련의 중립 없이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106]

8월 19일, 독일-소련 통상 협정 (1939년)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소련이 독일에 1억 8천만 라이히스마르크 상당의 원자재를 제공하고, 독일은 소련에 1억 2천만 라이히스마르크 상당의 산업 상품을 공급하는 내용을 담았다.[107][108][109] 또한 독일은 소련에 7년간 2억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상품 구매 신용을 매우 유리한 이자율로 제공하기로 했다.[110][108]

8월 22일, 독일 신문들은 소련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것이며, 영국 및 프랑스와의 삼국 동맹 협상이 중단되었다고 보도하면서 비밀 정치 협상이 공개되었다.[111] 소련은 서방 국가들이 소련의 군사 지원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필요시 폴란드와 루마니아 영토 통과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더 중요한 권한을 가진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고, "간접적 침략" 개념에 대한 이견을 해소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96]

1939년 8월 23일,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이 이끄는 독일 대표단이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다음 날 밤 이오시프 스탈린이 참석한 가운데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서명했다.[113] 이 조약은 10년 기한의 불가침 조약으로, 양국이 기존의 베를린 조약을 계속 준수할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조약에는 동유럽을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비밀 추가 의정서가 포함되어 있었다.[114]

> 1. 발트 3국(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속하는 지역의 영토적, 정치적 재편의 경우, 리투아니아의 북쪽 경계선은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 경계선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빌나 지역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이해관계는 양 당사국 모두 인정한다.

> 2. 폴란드 국가에 속하는 지역의 영토적, 정치적 재편의 경우,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은 대략 나레프 강, 비스툴라 강, 산 강의 선으로 경계가 정해진다. 독립적인 폴란드 국가의 유지가 양 당사국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국가의 국경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향후 정치적 상황 전개 과정에서만 최종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양 정부는 우호적인 합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 3. 동남유럽과 관련하여, 소련 측은 베사라비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독일 측은 이 지역에 대한 완전한 정치적 무관심을 선언한다.

>

> 이 비밀 의정서는 양 당사자에 의해 극비로 취급될 것이다.[115]

비록 양측은 비밀 의정서의 존재를 부인했지만,[116] 그 내용은 처음부터 소문으로 퍼져나갔다.[117]

8월 24일 소련 관영 신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에 조약 체결 소식이 발표되자, 각국 정부 지도자들과 언론은 큰 충격과 놀라움을 나타냈다. 대부분은 몇 달간 진행되어 온 영국-프랑스-소련 간의 협상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9] 소련과의 군사 동맹 협상을 진행 중이던 영국과 프랑스 협상단은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118] 8월 25일, 히틀러는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에게 소련과의 조약 체결로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겪었던 양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므로, 영국은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9] 그러나 히틀러는 같은 날 영국이 폴란드와 상호 지원 조약을 체결하자 놀랐고, 이는 8월 26일로 예정되었던 폴란드 서부 침공 계획을 연기하는 요인이 되었다.[119]

이 조약은 1939년 8월 31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서 비준되었다.

4. 2. 조약 및 상업 협정 체결



19세기 후반부터 천연 자원이 부족했던 독일[32][33] 러시아로부터의 원자재 수입에 크게 의존해 왔다.[3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연간 15억 라이히스마르크 규모의 원자재 및 기타 상품을 수입했다.[3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수치는 감소했지만, 1920년대 중반 양국 간의 무역 협정이 체결된 후 1927년까지 무역 규모는 연간 4억 33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증가했다.[35] 1920년대 후반 독일은 소련 산업의 현대화를 돕고, 레닌그라드의 볼셰비키 공장과 하르코프 기관차 공장에 탱크 생산 시설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독일의 주요 적대국인 프랑스와의 소련 화해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이로 인한 독일의 국제적 고립 가능성은 경제 협상 가속화의 핵심 요인이었다. 1925년 10월 12일, 양국 간의 통상 협정이 체결되었다.[36]

1928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9차 총회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대회는 니콜라이 부하린 코민테른 사무총장이 추진한 노선보다 스탈린의 프로그램을 선호했다. 부하린과 달리 스탈린은 서방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기가 임박했다고 보았고, 국제 공산당과 사회 민주주의 운동의 협력을 비난하며 이를 사회 파시스트라고 칭했다. 또한 국제 공산당이 코민테른, 즉 소련 지도부에 훨씬 더 엄격하게 종속될 것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3기로 알려졌다. 독일 공산당(KPD)은 에른스트 텔만의 지도 아래 이 정책에 따라 변화했으며, 1920년대 초 비교적 독립적이었던 KPD는 거의 완전히 소련에 종속되었다.[41][42]

스탈린이 독일 공산당에게 다시는 사회 민주당과 함께 투표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한 것은 1928년 12월 '산업가 연합'(독일의 주요 산업 자본가 그룹)과의 비밀 합의와 관련이 있었다. 이 합의에 따라 산업가 연합은 두 가지 조건 하에 최신 무기 산업과 이를 지원할 산업 기반을 소련에 제공하기로 했다.[42] 첫째, 그들은 소련 루블이 아닌 경화 또는 물품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대공포, 곡사포, 대전차포, 기관총 등 독일제 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자금이 부족했다.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전 주요 밀 수출국이었으므로, 스탈린은 반항적인 부농들을 시베리아 황무지로 추방하는 데쿨라크화를 강행하고, 크루프가 북 코카서스에 만든 50000ha 규모의 농장처럼 거대한 집단 농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30년과 1931년에 막대한 양의 소련산 밀이 저렴한 가격으로 세계 시장에 풀려 북미 농부들에게 큰 어려움을 안겼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통해 독일 무기 대금을 지불할 귀중한 외화를 확보했다.

둘째, 산업가 연합은 정치적 양보를 원했다. 그들은 독일의 사회주의화를 두려워했고, KPD와 사회 민주당이 새로운 장갑 순양함 개발 자금 지원에 반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입장을 바꾸도록 명령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군대 현대화를 위해 1928년 여름 내내 독일 무기 제조업자들과 협상했다. 그 결과, 1929년부터 독일 공산당은 거리에서 나치와 싸우면서도, 국회에서는 극우 독일 국가 인민당(DNVP)과 히틀러의 NSDAP에 충실히 투표했다.

소련 지도부는 1920년대 외교 정책 기조를 이어갔다.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 위원회는 1930년 6월 27일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제16차 대회에 보낸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 보고서에서, 스탈린은 자본주의 열강의 국제적 불안정과 정치적 극단주의 부상을 환영한다고 밝혔다.[43] 1930년부터 1932년까지는 바이마르 독일과의 소련 군사 협력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1931년 6월 24일, 1926년 베를린 조약의 연장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1933년에야 국회에서 비준되었다. 1932년 로잔 회담에서 독일 재상 프란츠 폰 파펜이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에리오에게 군사 동맹을 제안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소련은 독일에 대해 약간의 불신을 품게 되었다. 소련은 또한 프랑스와 그 주요 동맹국인 폴란드와의 관계를 빠르게 발전시켜, 1932년 7월 25일 소련-폴란드 불가침 조약과 1932년 11월 29일 소련-프랑스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 간의 갈등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이 소련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일부 저자는 스탈린이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을 조장하기 위해 독일 공산당의 정책을 자멸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히틀러의 부상을 의도적으로 도왔다고 주장하지만,[45] 많은 다른 학자들은 이 이론을 일축한다.[46]

이 기간 동안, 더욱 고립주의적인 스탈린주의 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군사 통제 포기로 인해 독일이 소련 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 양국 간의 무역은 감소했으며, 1934년 소련의 대독일 수입은 2억 2300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권력 장악을 한 후, 그는 독일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나치는 독일 내 소련 무역 사절단, 기업, 언론 대표 및 개인 시민을 상대로 경찰 조치를 취했으며,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외무장관(1932-1938)의 반대에도 불구하고[44] 외교 관계 악화와 함께 반소련 선전 캠페인을 시작했다.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 제2권(1926년 초판)은 동쪽에 레벤스라움(독일 민족을 위한 생활 공간)을 요구했고(러시아를 구체적으로 언급), 그의 세계관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을 위대한 국가를 파괴하는 유대인(유대 볼셰비즘 참고)으로 묘사했다.[50]

베를린의 이러한 조치에 대한 모스크바의 반응은 초기에 자제되었으나, 독일 정부의 노골적인 반소련 행위가 계속되자 소련도 나치에 대한 선전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5월 무렵에는 갈등 가능성이 줄어든 듯 보였다. 베를린 조약의 1931년 연장은 5월 5일 독일에서 비준되었다.[44] 1933년 8월, 몰로토프는 독일 대사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센에게 소련-독일 관계는 독일의 태도에 전적으로 달려있을 것이라고 말했다.[51] 그러나 소련은 1933년 8월~9월에 독일 국방군(Reichswehr)의 세 곳의 군사 훈련 및 시험장(리페츠크, 카마, 톰카) 접근을 갑자기 중단했다.[44] 소련과 나치 독일 간의 정치적 이해는 1934년 1월 26일 나치 독일과 제2 폴란드 공화국 간의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체결로 사실상 깨졌다.[52]

1930년부터 외무 인민 위원(소련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막심 리트비노프는 나치 독일을 소련에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충분히 강력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소련이 유럽 전반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그는 집단 안전 보장 정책을 추구하여 국제 연맹 및 서방 열강과의 협력을 통해 나치 독일을 억제하려 했다. 국제 연맹과 국제 평화에 대한 소련의 태도가 바뀌면서, 1933-34년에 스페인, 미국,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처음으로 소련을 외교적으로 승인했으며, 결국 1934년 9월 소련은 국제 연맹에 가입했다. 소련 외교 정책의 변화는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지만,[53][54] 1932년 프랑스 제3공화국으로의 소련의 정책 전환 역시 이러한 변화의 일부일 수 있다.[3]

헤르만 라우슈닝은 1940년 저서 ''히틀러의 육성: 1934년 아돌프 히틀러와의 그의 실제 목표에 대한 일련의 정치적 대화''에서 히틀러가 범슬라브주의와 신슬라브주의 모두에 맞서는 피할 수 없는 전투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기록했다. 이 책의 진위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날조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역사가들은 그 신뢰성 문제로 참고 자료 사용을 피한다. 라우슈닝은 히틀러가 슬라브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한다.[55]

"우리는 독일 인종 이상과 범슬라브 대중 이상 사이의 최종 전투를 어떤 식으로든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이익도 연결할 수 없는 영원한 심연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섬기고 복종하도록 운명지어진 대중 위에 독일 인종 의식의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위대한 대륙 공간을 정복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단독으로, 모스크바와의 협약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투쟁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계의 영구적인 지배로 가는 문을 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러시아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목표로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1934)[56]

역사학자 에릭 D. 바이트는 수백 명의 독일 시민,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행정부에 의해 게슈타포에게 인도된 정권 간 협력 사례를 지적했다. 바이트는 또한 KPD 정치국 구성원들이 나치 독일에서보다 소련에서 더 높은 비율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57]

1935년 5월 2일, 프랑스와 소련은 5년짜리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58] 프랑스의 조약 비준은 히틀러가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를 재무장하는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세계 대회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정당들과 폭넓은 동맹을 형성하는 인민 전선 전략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공산당은 1934년부터 이 정책을 추구해왔다. 한편, 1935년 제7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몰로토프는 베를린과의 좋은 관계 유지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59]

1936년 11월 25일,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반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했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37년에 가입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1933년에 이탈리아-소련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60]

경제적으로 소련은 1930년대 중반 독일과 더 긴밀한 관계를 재건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노력했다.[61] 소련은 주로 이전 무역 부채를 원자재로 상환하려 했고, 독일은 재무장을 모색했다. 양국은 1935년에 신용 협정을 체결했다.[62] 1936년까지 원자재와 식량 공급 위기로 인해 히틀러는 "비용에 관계없이" 재무장을 위한 4개년 계획을 제정해야 했다.[63]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추가 신용 협정과 함께 독일과의 더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모색하려는 소련의 시도를 거부했다.[62]

리트비노프의 집단 안보 전략은 여러 장애에 부딪혔다. 1931년부터 하원을 지배한 영국 집권 보수당은 소련을 나치 독일만큼 위협적으로 간주했으며 (일부는 소련을 더 큰 위협으로 보았다). 동시에, 소련이 1934년부터 1940년까지 진행된 대숙청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서방 국가나 심지어 서방 좌파조차 소련을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동맹국으로 인식하지 못했다.[4][52] 더욱이 대숙청으로 인해 외무인민위원회는 많은 해외 대사관을 폐쇄해야 했으며,[64][65] 숙청은 협상에 필요한 소련 행정 구조를 혼란에 빠뜨려 독일과의 경제적 합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히틀러로 하여금 소련을 군사적으로 약하다고 간주하게 만들었다.[66]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독일의 자급자족적 경제 접근 방식이나 영국과의 동맹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소련과의 더 긴밀한 관계가 필요했다.[32] 독일은 석유가 부족하여 자체 필요량의 25%만 공급할 수 있었고, 연간 200만 톤의 부족분을 겪었으며, 계획된 동원 총량보다 무려 1,000만 톤이나 부족했다.[32] 반면 소련은 광석(철과 망간 포함), 고무, 식용 지방 및 오일과 같은 다른 많은 주요 원자재가 필요했다.[32][76][77][78] 소련의 대독일 수입은 1937년에 528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감소했지만,[47] 대규모 군비 생산 증가와 심각한 원자재 부족으로 인해 독일은 이전의 태도를 바꾸어 1939년 초에 경제 회담을 추진하게 되었다.[79]

1939년 5월 3일, 리트비노프가 해임되고 리트비노프와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유대인 출신이 아니며(리트비노프와 달리) 독일과의 중립을 항상 지지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외무 인민 위원회는 리트비노프의 지지자들과 유대인들을 숙청했다.[80][51] 이는 순전히 내부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만, 독일에게 반독일 집단 안보 시대가 끝났다는 신호, 또는 삼자 동맹 협상에서 모스크바를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신호, 혹은 집단 안보라는 낡은 짐 없이 합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 등 복합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81][72][73][82][83][84] 이 개편은 독일에게 경계심과 함께 기회로 인식되었다.[85][86]

몰로토프가 독일에게 불가침 조약을 제안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영국 및 프랑스와의 회담을 계속했고, 삼자 동맹이 소련의 독일과의 조약 체결 결정 때문에 실패했다는 주장이 있다.[87][88] 다른 관점에서는 소련의 삼자 동맹 추구가 진심이었고, 서방 국가와의 동맹이 불가능해지자 소련 정부가 독일로 방향을 틀었다고 본다.[89][90][91][92]

소련을 독일과의 화해로 이끈 추가 요인으로는 1939년 6월 7일 독일,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간의 불가침 조약 체결[93]할힌골 전투 (1939년 5월 11일 – 9월 16일)로 입증된 동쪽의 일본 제국의 위협이 있을 수 있다.[94][95] 몰로토프는 일본의 공격이 삼자 동맹 체결을 방해하기 위해 독일의 사주를 받았을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96]

7월에 공개적인 소련-독일 무역 협상이 진행되었다.[97] 7월 말과 8월 초에 양측 간의 회담은 잠재적인 정치적 거래로 전환되었지만, 소련 협상가들은 경제 거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97][98] 독일이 8월 25일 폴란드 침공을 계획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독일 전쟁 기획자들은 영국의 해상 봉쇄가 소련을 유일한 잠재적 공급원으로 만드는 심각한 원자재 부족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추정했다.[97]

그 후, 8월 3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독일과 소련이 서로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서로의 중요한 이익을 겨냥한 조치를 포기하는 계획을 제시했으며,[98] "발

5.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나치 독일소련의 관계는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기존에 집단 안보를 통해 나치 독일을 견제하려던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이 1939년 5월 해임되고,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그 자리를 계승했다.[80][51] 이는 서방과의 집단 안보 협상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87][88][89][90][91][92], 소련이 독일과의 타협을 모색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동쪽에서 일본 제국과의 할힌골 전투가 벌어지면서 양면에서의 군사적 압박을 피하려는 소련의 전략적 고려도 작용했다.[94][95]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체결되었다.[113] 공식적으로는 양국 간의 불가침 조약이었지만,[114] 이 조약에는 동유럽을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비밀 의정서가 포함되어 있었다.[114] 이 비밀 의정서는 발트 3국, 폴란드, 베사라비아 등의 운명을 결정짓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115], 사실상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약 체결 소식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소련과 군사 동맹을 협상 중이던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외교적 실패로 받아들여졌다.[99][118]

조약 체결 일주일 후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소련은 9월 17일에 이르러 비밀 의정서에 합의된 자국의 영향권에 해당하는 폴란드 동부 지역을 침공했다.[121][123]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으며, 이후 독일-소련 국경 및 우호 조약을 통해 새로운 국경선을 확정하고 영향권을 일부 조정했다.[129] 양국은 점령지 통치와 저항 세력 탄압에 협력하기도 했다.[125][126][127]

폴란드 분할 이후 독일과 소련의 협력 관계는 경제 분야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1940년 2월, 양국은 대규모 상업 협정을 체결하여[131], 독일은 영국의 해상 봉쇄 하에서 필요한 원자재를 소련으로부터 공급받았고, 소련은 독일의 군사 기술과 산업 설비를 얻었다.[131] 소련은 독일에 잠수함 기지(바시스 노르트)를 제공하기도 했다.[132]

한편,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라 확보된 영향권 내에서 세력 확장을 추진했다. 1939년 11월, 핀란드가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자 겨울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할양받았으나[133][134], 이 과정에서 붉은 군대의 약점이 드러나기도 했다.[135] 또한 1940년에는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을 강제 병합하고,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 지역을 할양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과 팽창 속에서도 양국 관계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전쟁이 조기에 종결될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의 우려[144], 발트해 지역에서의 이해관계 충돌[143], 경제 협정 이행 지연 등으로 인해 1940년 여름 양국 관계는 일시적으로 악화되기도 했다.[144][145] 1940년 가을, 독일은 소련의 추축국 가입을 제안했지만[146], 영향권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협상은 결렬되었다.[149][150][151][152]

1941년 1월, 양국은 국경 문제와 경제 협력을 재확인하는 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이 리투아니아 영토 일부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련이 750만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지만[154][155], 이는 불안정한 관계를 봉합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며 1941년 4월 일본 제국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하는 등[157]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히틀러는 이미 1940년부터 비밀리에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159][160] 겉으로는 우호적인 제스처가 오갔지만[161], 물밑에서는 거대한 충돌이 임박하고 있었다.

5. 1. 독일의 폴란드 서부 침공

폴란드 침공: 독일(회색), 소련(빨간색) 및 폴란드의 유럽 동맹국(녹색)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서명 일주일 후인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라 자국의 영향권으로 인정된 폴란드 서부 지역을 침공했다. 이에 9월 3일, 영국,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는 폴란드에 대한 방위 조약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발발했다. 영국이 독일에 대한 해상 봉쇄를 시작하자, 독일 선박들은 소련의 북극 항구인 무르만스크로 항로를 변경했다.[120]

독일 외교관들은 전쟁 초기부터 소련에게 동쪽에서 폴란드를 공격할 것을 촉구했으나,[121][122] 소련은 바르샤바가 함락될 때까지 개입을 주저했다. 9월 7일, 이오시프 스탈린코민테른의 새로운 노선을 통해 전쟁을 제국주의 세력 간의 갈등으로 규정하며, 노동 계급이 특정 편을 들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는 기존의 반파시스트 인민 전선 정책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121] 스탈린은 폴란드를 벨라루스인우크라이나인을 억압하는 파시스트 국가로 묘사하기도 했다.

9월 17일, 소련 붉은 군대는 마침내 폴란드 동부 지역을 침공했다. 이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라 소련의 영향권으로 할당된 지역이었다. 소련은 자국 행위의 명분으로 폴란드 국가의 붕괴와 자국 국경 내 소수 민족인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소련의 침공은 조약의 직접적인 결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폴란드 상황을 보고 몇 주 후에 내려진 별개의 결정이라는 주장도 있다.[121]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의 침공을 비난했지만 군사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1939년 9월 23일 브레스트에서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과 소련의 콤브리 세묜 크리보셰인(Semyon Krivoshein)의 연합 승리 퍼레이드


침공 이후 독일군과 소련군은 폴란드 영토 내에서 만났으며, 양측은 의정서에 따라 점령 지역을 조정하기도 했다. 9월 23일에는 브레스트에서 독일-소련 연합 군사 퍼레이드가 열렸고, 이후 도시는 독일군에서 소련군으로 넘어갔다.[124] 10월 6일까지 폴란드 영토는 독일과 소련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고, 폴란드 국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11월 초, 소련 최고 소비에트는 점령한 폴란드 동부 영토를 소련에 공식적으로 병합했다. 이로써 소련은 나치 독일,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 영토, 그리고 리투아니아와 처음으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과 소련 간의 협력은 더욱 가시화되었다. 양국 점령군은 게슈타포-NKVD 회담을 네 차례 가지며 폴란드 저항 운동을 진압하고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125][126][127] 또한 양측은 포로를 교환했으며, 이러한 협력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추가적인 포로 교환으로 이어졌다.[128] 1939년 9월 28일에는 모스크바에서 독일-소련 국경 및 우호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간의 새로운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이 조약에서는 비밀 의정서를 수정하여 양국 간의 영향권을 재조정하기도 했다.

5. 1. 1. 비밀 의정서 수정

1939년 9월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 스탈린, 리벤트로프가 독일-소련 국경 및 우호 조약에 서명하는 모습


1939년 9월 25일, 히틀러가 아직 리투아니아로 진격하려던 시점에, 소련독일에 세력 범위를 재협상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39년 9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는 독일-소련 국경 및 우호 조약에 서명하여 이전 폴란드 국가 영토 내에서 양국의 국익 경계를 새로 결정했다.[129] 이 조약의 비밀 부속 의정서에서는 폴란드 외 지역의 세력 범위도 재조정되었다. 독일은 이미 점령했던 폴란드 영토 일부를 소련에 넘기는 대가로, 당시까지 독립 상태였던 리투아니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했다.[130]

5. 2. 소련의 폴란드 동부 침공



thumb 이후 독일군과 소련군 장교가 악수하는 모습]]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서명 1주일 후인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라 자국의 영향권으로 인정된 폴란드 서부 지역을 침공했다. 9월 3일, 영국, 호주, 뉴질랜드 및 프랑스폴란드 제2공화국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발발했다.

9월 4일, 영국이 독일에 대한 해상 봉쇄를 시작하자, 독일 항구로 향하던 독일 화물선들은 소련 북극 항구인 무르만스크로 우회했다. 9월 8일, 소련은 이 화물선들을 철도를 통해 소련의 레닌그라드 발트해 항구로 통과시키는 데 동의했다. 반면, 9월 5일 소련은 전쟁에 휘말릴 위험을 이유로 폴란드에게 자국 영토를 통한 군대 및 물자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다. 독일 대사 폰 데어 슐렌부르크는 베를린에 소련 언론에서 독일에 대한 비판이 중단되었고, 사건 보도가 독일의 관점과 일치하며, 반독일 문학이 서점에서 사라졌다고 보고했다.[120]

9월 7일, 이오시프 스탈린코민테른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며, 전쟁을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으로 규정했다. 이는 노동 계급이 독일과 싸우는 영국, 프랑스, 폴란드를 지지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으며,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유지된 코민테른의 반파시스트 인민 전선 정책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121] 스탈린은 폴란드를 벨라루스인우크라이나인을 억압하는 파시스트 국가로 묘사하기도 했다.

독일 외교관들은 전쟁 초기부터 소련에게 동쪽에서 폴란드를 공격하도록 압박했지만,[121][122] 소련은 바르샤바가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입을 주저했다. 소련이 비밀 의정서에 따라 할당된 폴란드 동부 지역을 침공하기로 결정한 것은 9월 9일 독일 대사 프리드리히 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에게 전달되었으나, 실제 침공은 일주일 이상 지연되었다.[121][123]

마침내 9월 17일, 소련 붉은 군대는 폴란드 동부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개시했다. 소련은 이러한 군사 행동의 명분으로 제2 폴란드 공화국 정부의 붕괴와 자국 국경 근처에 거주하는 벨라루스인우크라이나인 보호를 내세웠다. 소련의 침공은 일반적으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직접적인 결과로 간주되지만, 일부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소련의 결정이 조약 체결 몇 주 후에 내려졌다고 주장하며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인하기도 한다.[121] 소련의 침공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그들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침공 과정에서 붉은 군대와 독일 국방군은 브레스트에서 합동 군사 퍼레이드를 열었으며, 이후 브레스트 시의 점령권은 독일군에서 소련군으로 넘어갔다.[124]

10월 6일까지 폴란드 영토는 독일과 소련 두 강대국에 의해 완전히 분할 점령되었고, 폴란드 국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11월 초, 소련 최고 소비에트는 점령한 폴란드 동부 영토를 소련의 일부로 공식 합병했으며, 이로써 소련은 처음으로 나치 독일 및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영토, 그리고 리투아니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과 소련 간의 협력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양국 점령 당국은 네 차례에 걸쳐 게슈타포-NKVD 회담을 갖고 점령지에서의 폴란드 저항 운동 진압 방안과 폴란드 민족 말살 정책을 논의했다.[125][126][127] 또한 독일-소련 국경 및 우호 조약 서명 전후로 양측은 폴란드 포로를 교환했으며, 이후에도 게슈타포와 NKVD 간의 협력을 통해 독일 공산주의자 등 정치범들을 소련에서 독일로 넘기는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128]

9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독일-소련 국경 및 우호 조약에 서명하여 분할 점령한 폴란드 영토에서의 양국 국경선을 확정했다.[129] 이 조약에는 또 다른 비밀 부속 의정서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기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영향권 분할 내용을 수정한 것이었다. 독일은 이미 점령했던 폴란드 영토 일부(루블린 지역과 바르샤바 동부)를 소련에 넘기는 대가로, 당초 독일 영향권에 속했던 리투아니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했다.[130]

5. 3. 확대된 상업 협정

독일과 소련은 1940년 2월 11일에 복잡한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1939년 8월에 두 나라가 서명한 협정보다 4배 이상 큰 규모였다.[131] 이 무역 협정은 독일이 영국의 해상 봉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1]

협정 첫 해에 독일은 소련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원자재를 공급받았다. 주요 품목은 다음과 같다.[131]

1940년 독일-소련 상업 협정: 독일의 주요 수입품
품목수량
곡물100만ton
50만ton
석유90만ton
면화10만ton
인산염50만ton
만주 경유 100만ton



이러한 물품들은 소련과 점령된 폴란드 영토를 통해 운송되었으며, 이를 통해 나치 독일은 영국의 해군 봉쇄를 효과적으로 우회할 수 있었다.[131]

대신 소련은 독일로부터 군사 기술과 장비를 받기로 했다. 여기에는 순양함 1척, 전함 ''비스마르크''의 설계도, 대형 해군 함포, 기타 해군 장비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Bf 109 전투기, Bf 110 전투기, Ju 88 폭격기를 포함한 독일의 최신 군용기 30대도 받기로 했다.[131] 그 외에도 소련은 석유 및 전기 장비, 기관차, 터빈, 발전기, 디젤 엔진, 선박, 공작 기계, 독일 포병, 탱크, 폭발물, 화학전 장비 등의 샘플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131]

더 나아가 소련은 무르만스크 근처 북부 소련에 바시스 노르트(Basis Nord)라는 잠수함 기지를 독일에 제공하여, 독일이 영국의 해군 봉쇄를 피하는 것을 도왔다.[132] 이 기지는 독일 잠수함의 급유 및 유지 보수 장소이자, 연합국의 해상 수송로에 대한 공격 출발점으로 활용되었다.[132]

5. 4. 소련의 핀란드와의 전쟁

1938년 4월, 소련은 집단 안보 정책의 일환으로 핀란드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이는 나치 독일이 핀란드 영토를 통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하고 핀란드의 우호적인 태도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으나, 핀란드가 중립 유지를 고수하면서 협상은 의미를 잃었고 1939년 4월에 종료되었다. 1939년 10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협상이 시작되었다. 스탈린, 몰로토프, 블라디미르 포툠킨이 대표로 나선 소련은 핀란드에 상호 원조 조약 체결, 한코 군사 기지 임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 카렐리야 지협의 70km 깊이 지역 할양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북쪽 국경 지역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핀란드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1939년 11월 7일 협상에서 철수하며 소련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했다.

11월 26일, 소련은 국경 근처에서 마일라 포격 사건을 조작하여 핀란드군에게 도발 책임을 씌우고 철수를 요구했다. 핀란드는 이에 맞서 11월 27일 양국 군대의 국경 지역 철수를 제안했다. 11월 28일, 소련은 1932년 체결된 소련-핀란드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11월 29일에는 핀란드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1939년 11월 30일,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은 핀란드를 침공하며 겨울 전쟁을 일으켰다. 침공은 핀란드 카렐리야 지역 공격과 헬싱키 민간 지역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1939년 12월 1일, 소련은 국경 마을 테리요키(현 젤레노고르스크)에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꼭두각시 사회주의 정부를 세웠다. 이러한 침략 행위로 인해 소련은 12월 14일 국제 연맹에서 제명되었다.

전쟁 초기 소련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고전했고, 결국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1940년 1월 7일 전선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 세묜 티모셴코로 교체되었다(티모셴코는 4개월 후 국방인민위원으로 임명됨). 1940년 2월 중순, 소련군은 마침내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했고, 핀란드는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133][134]

모스크바 평화 조약은 1940년 3월 12일에 서명되었고, 다음 날 정오에 전투가 종료되었다. 핀란드는 카렐리야 지협과 라도가 카렐리야, 살라 및 칼라스자렌토의 일부를 소련에 할양하고 한코 해군 기지를 임대해야 했지만,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며 나치 독일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과도기 평화 참조).

이 전쟁의 결과는 복합적이었다. 소련은 새로운 영토를 확보했지만, 이 침공은 중립국이던 핀란드를 나치 독일과의 협력으로 이끄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 전쟁 과정에서 드러난 붉은 군대의 놀라운 군사적 약점은 소련이 군대를 재편성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소련의 국제적 위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소련군은 핀란드군에 비해 병력 규모에서 4배, 중화기와 항공기에서 거의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큰 손실을 입었다. 이는 소련을 군사적으로 취약한 상대로 보이게 만들었고, 아돌프 히틀러가 소련 침공 계획(바르바로사 작전)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공식적인 전쟁 사상자 수는 20만 명을 넘어섰으며,[135] 훗날 소련 총리 니키타 흐루쇼프는 실제 사상자가 100만 명에 달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136]

5. 5. 소련의 발트 3국 점령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이후 폴란드 침공이 진행되면서 나치 독일소련은 영향권 재조정에 나섰다. 1939년 9월 25일, 히틀러가 아직 리투아니아로 진격하려던 시점에 소련은 세력 범위를 재협상할 것을 제안했다. 1939년 9월 28일,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는 독일-소련 국경 및 우호 조약에 서명하여 이전 폴란드 영토 내에서 각국의 국익 경계를 결정했다.[129]

이 조약의 비밀 부속 의정서에서는 폴란드 외 지역에 대한 세력 범위가 재협상되었다. 독일은 이미 점령한 폴란드 영토 일부를 추가로 확보하는 대가로, 당시까지 독립 상태였던 리투아니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기는 데 동의했다.[130] 이는 발트 3국이 점차 소련의 통제하에 놓이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였다.

5. 6. 소련의 베사라비아 및 북부 부코비나 점령

1939년 8월 23일 체결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는 동유럽을 나치 독일소련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비밀 추가 의정서가 포함되었다.[114] 이 비밀 의정서는 양국 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특히 제3항은 동남유럽 지역에 관한 것이었다.

해당 조항에서 소련 측은 당시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였던 베사라비아 지역에 대한 자국의 이해관계를 명확히 표명했다. 이에 대해 독일 측은 해당 지역에 대한 완전한 정치적 무관심을 선언하며, 사실상 소련의 영향력 행사를 용인하는 입장을 취했다.[115] 이는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적 목표 달성을 위한 소련과의 일시적 협력 필요성과, 소련의 지정학적 영향력 확대 및 국경 안보 강화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러한 합의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유럽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프랑스 등 서방 세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국제 정세 속에서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관철할 기회를 포착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비밀 의정서는 이후 소련이 베사라비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군사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외교적 근거가 되었다. 비록 실제 점령 과정은 이후의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전개되었지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소련의 베사라비아 병합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성격을 띠었다.

5. 7. 1940년 8월의 긴장

핀란드발트해 침공으로 인해 독일과 소련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143] 이러한 침공으로 인한 긴장, 독일의 상품 인도 지연, 그리고 프랑스가 휴전 조약을 체결한 후 히틀러의 서방과의 전쟁이 조기에 끝날 수도 있다는 스탈린의 우려로 인해, 1940년 8월, 소련은 잠시 독일-소련 상업 협정에 따른 물품 인도를 중단했다.[144] 이 중단으로 인해 독일은 상당한 자원 문제에 직면했다.[144] 8월 말까지 관계는 다시 개선되었다.[145]

5. 8. 추축국 가입에 관한 소련의 협상

독일이 일본 및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체결한 후, 1940년 10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리벤트로프는 "소련, 이탈리아, 일본, 독일의 4개국이 장기적인 정책을 채택하고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그들의 이익을 경계함으로써 그들의 국민의 미래 발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역사적 사명"에 대해 언급하며 소련의 추축국 동참을 제안했다.[146] 스탈린은 이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양측의 "상호 이익"을 위한 "영구적인 기반" 마련에 대한 합의 가능성을 언급했다.[147] 스탈린은 추축국 가입 조건을 협상하고 잠재적인 이익 분할을 논의하기 위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베를린으로 파견했다.[148]

베를린에서 열린 회담에서 리벤트로프는 몰로토프에게 비밀 의정서에 서명할 것을 제안했다. 이 의정서는 "소련의 영토적 야망의 초점은 아마도 소련 영토 남쪽, 인도양 방향에 맞춰질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49] 그러나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동의 없이는 이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밝힐 수 없다며 즉답을 피했다.[149] 이후 스탈린은 독일의 4개국 협정 초안에 대한 답변으로 서면 반대 제안을 제출했다. 이 제안에는 독일이 소련의 세력권 내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소련이 4개국 추축국에 가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150][151] 하지만 독일은 소련의 이 반대 제안에 대해 어떠한 응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소련의 추축국 가입 협상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152][153]

5. 9. 1941년 1월 국경 및 상업 협정

1941년 1월 10일, 독일소련은 몇 가지 현안을 해결하는 협정을 체결했다.[154] 이 협정은 양국 사이의 국경을 이고르카 강과 발트해 사이로 공식적으로 설정했다.[155] 또한 1940년 독일-소련 상업 협정의 무역 규정을 1942년 8월 1일까지 연장하고, 해당 협정의 첫해 수준보다 인도량을 늘렸다.[155] 협정은 발트해와 베사라비아의 무역 권리를 정했으며, 소련이 점령한 발트 국가에 있는 독일 재산에 대한 보상과 기타 문제를 계산했다.[154]

협정은 또한 소련이 점령한 발트 지역에 거주하는 독일계 주민과 독일 시민의 독일 이주, 그리고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발트해 및 "백 러시아" "국민"의 소련 이주를 2개월 반 이내에 처리하도록 규정했다.[155] 새로운 협정의 비밀 의정서에서는 독일이 독일-소련 국경 및 우호 조약의 "비밀 추가 의정서"에 포함되었던 리투아니아 영토 일부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750만달러를 지불하기로 명시했다.[154]

이 협정을 통해 소련은 독일로부터 새로운 무기를 제공받았고, 그 대가로 독일에게 사료 곡물 100만ton, 석유 90만ton, 인산염 50만ton, 철광석 50만ton, 크롬 및 기타 원자재를 제공했다.[156]

5. 10. 1941년 중반의 관계

1941년 4월 13일, 소련추축국의 일원인 일본 제국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했다.[157] 이는 표면적으로 독일에 대한 평화적 의도를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의 중립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이 조약이 독일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다고 판단했다.[158]

스탈린은 독일 내부에 소련 침공 여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고 생각하는 등[158]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가 1940년 여름부터 비밀리에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을 논의해 왔다는 사실[159] 및 1940년 말 이미 군대에 전쟁 준비를 명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160] 이러한 침공 준비는 소련이 잠재적인 제4의 추축국으로 참여할 가능성에 대한 양측의 대화와는 별개로 진행되고 있었다.[160]

겉으로는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1941년 5월 1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쾨스트링과 한스 크레브스를 포함한 독일 군사 대표단은 국제 노동절 기념 모스크바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하기도 했다.[161]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제스처 이면에서 독일은 소련 침공 준비를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다.

5. 11. 추가 발전

1928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9차 총회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대회는 니콜라이 부하린의 노선 대신 스탈린의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스탈린은 서방 자본주의의 임박한 위기를 예측하며, 국제 공산당과 사회 민주주의 운동의 협력을 '사회 파시스트'라 비난하고 코민테른, 즉 소련 지도부에 대한 공산당들의 더 엄격한 종속을 요구했다. 이는 3기 노선으로 알려졌으며, 에른스트 텔만이 이끄는 독일 공산당(KPD)은 이 노선에 따라 거의 완전히 소련에 종속되었다.[41][42]

스탈린은 독일 공산당이 사회 민주당과 협력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1928년 독일 '산업가 연합'과의 비밀 합의와 관련이 있었다. 이 합의에 따라 산업가 연합은 소련에 최신 무기 기술과 산업 기반을 제공하기로 했고, 소련은 루블이 아닌 경화나 물품으로 대금을 지불해야 했다.[42] 스탈린은 대공포, 곡사포, 대전차포, 기관총 등 독일제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소련은 외화가 부족했으므로, 스탈린은 반대하는 부농들을 탄압하고(데쿨라크화) 거대한 집단 농장을 만들어 곡물 생산을 강행했다. 1930년과 1931년, 이렇게 생산된 대량의 소련산 밀이 저가로 세계 시장에 풀리면서 이미 과잉 상태였던 시장에 충격을 주었고, 특히 북미 지역 농민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스탈린은 이 곡물 수출로 얻은 외화로 독일 무기 대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독일 산업가 연합은 무기 대금 외에 정치적 양보도 요구했다. 그들은 독일 내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을 우려했고, KPD와 사회 민주당이 장갑 순양함 개발 예산에 반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군대 현대화 계획과 독일 무기 확보를 위해 1928년 여름 내내 독일 무기 제조업자들과 협상했으며,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입장을 바꾸도록 지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29년부터 KPD는 거리에서 나치와 싸우면서도, 국회에서는 극우 독일 국가 인민당(DNVP)과 히틀러의 NSDAP과 함께 사회 민주당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

1930년 6월,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제16차 대회에서 스탈린은 자본주의 열강의 국제적 불안정과 정치적 극단주의 부상을 환영한다고 밝혔다.[43]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된 후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독일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나치 정권은 독일에 있는 소련 무역 대표부, 기업, 언론인, 시민들을 상대로 경찰 조치를 취했으며, 외무 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44] 반소련 선전 캠페인을 벌였다.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동유럽, 특히 러시아 지역에 독일 민족을 위한 생활 공간(Lebensraum) 확보를 주장했고, 공산주의를 국가를 파괴하는 유대인의 음모로 묘사했다.[50]

모스크바는 처음에 자제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독일의 노골적인 반소련 행위가 계속되자 소련 역시 나치에 대한 선전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난 것은 아니어서, 1931년에 연장된 베를린 조약이 1933년 5월 5일 독일에서 비준되었다.[44] 1933년 8월, 몰로토프는 독일 대사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센에게 양국 관계는 전적으로 독일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경고했다.[51] 같은 해 8~9월, 소련은 독일 라이히스베어가 사용하던 세 곳의 군사 훈련 및 시험장(리페츠크, 카마, 톰카) 접근을 갑자기 차단했다.[44] 결국 1934년 1월 26일, 나치 독일이 제2 폴란드 공화국과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면서 소련과 독일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사실상 깨졌다.[52]

1930년부터 외무인민위원 (외무 장관)을 맡은 막심 리트비노프는 나치 독일을 소련의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는 소련군이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유럽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집단 안전 보장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국제 연맹에 가입하고 서방 열강과의 협력을 통해 나치 독일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 시기 소련은 국제 연맹과 국제 평화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1933-34년에 스페인, 미국,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1934년 9월에는 국제 연맹에 가입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의 변화는 주로 히틀러의 집권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되지만,[53][54] 일각에서는 1932년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 움직임 역시 이러한 변화의 일부였다고 본다.[3]

헤르만 라우슈닝은 1940년 저서에서 1934년 아돌프 히틀러가 범슬라브주의와 신슬라브주의 모두에 맞서는 피할 수 없는 전투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기록했다. 이 책의 진위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볼프강 해넬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이 책이 날조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리처드 슈타이그만-갈, 이언 커쇼휴 트레버-로퍼와 같은 다른 역사가들은 그 의심스러운 진위성 때문에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것을 피했다. 라우슈닝은 히틀러가 슬라브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한다.[55]

"우리는 독일 인종 이상과 범슬라브 대중 이상 사이의 최종 전투를 어떤 식으로든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이익도 연결할 수 없는 영원한 심연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섬기고 복종하도록 운명지어진 대중 위에 독일 인종 의식의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위대한 대륙 공간을 정복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단독으로, 모스크바와의 협약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투쟁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계의 영구적인 지배로 가는 문을 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러시아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목표로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 아돌프 히틀러 (1934)[56]

역사학자 에릭 D. 바이트는 수백 명의 독일 시민,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행정부로부터 게슈타포에게 인도된 정권 간의 협력 분야에 대해 논의했다. 바이트는 또한 KPD 정치국의 구성원들이 나치 독일에서보다 소련에서 더 높은 비율로 사망했다고 말했다.[57]

1935년 5월 2일, 프랑스와 소련은 5년짜리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58] 프랑스의 조약 비준은 히틀러가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를 재무장한 이유 중 하나를 제공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세계 대회는 파시즘에 반대하려는 정당과 폭넓은 동맹을 형성하는 인민 전선 전략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공산당은 1934년부터 이 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1935년 제7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몰로토프는 베를린과의 좋은 관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59]

1936년 11월 25일,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반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했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37년에 이에 가입했다. (이탈리아는 이미 1933년에 이탈리아-소련 조약에 서명했다.)[60]

경제적으로, 소련은 1930년대 중반에 독일과 더 긴밀한 관계를 재건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노력했다.[61] 소련은 주로 이전 무역의 부채를 원자재로 상환하려 했고, 독일은 재무장을 모색했다. 양국은 1935년에 신용 협정을 체결했다.[62] 1936년까지 원자재와 식량 공급 위기로 인해 히틀러는 "비용에 관계없이" 재무장을 위한 4개년 계획을 제정해야 했다.[63]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추가 신용 협정과 함께 독일과의 더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모색하려는 소련의 시도를 거부했다.[62]

리트비노프의 전략은 이념적, 정치적 장애에 직면했다. 1931년부터 하원을 지배한 영국 집권 보수당은 소련을 나치 독일만큼 위협적으로 간주했으며 (일부는 소련을 더 큰 위협으로 보았다). 동시에, 소련이 1934년부터 1940년까지의 대숙청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서방 국가나 심지어 서방 좌파조차도 소련을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동맹국으로 인식하지 않았다.[4][52]

더욱 복잡한 것은 대숙청으로 인해 외무인민위원회가 많은 수의 해외 대사관을 폐쇄해야 했다는 것이다.[64][65] 동시에, 숙청으로 인해 독일과의 경제적 합의가 더욱 어려워졌다. 숙청은 협상에 필요한 이미 혼란스러운 소련 행정 구조를 붕괴시켰고, 이로 인해 히틀러는 소련을 군사적으로 약하다고 간주하게 되었다.[66]

6. 소련 내 ''폴크스도이체''

1920년대 소련독일계 주민들은 소련의 민족 구획 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문화적 자치를 누렸다. 우크라이나에는 8개의 독일계 민족 구역이 있었고, 러시아 본토에도 다수가 존재했으며,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에도 각각 하나씩 있었다. 특히 볼가 독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볼가 독일 ASSR)에는 독일계 학교와 신문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1929년 9월, 강제 곡물 징발과 농업 집단화 정책 재도입에 불만을 품은 수천 명의 독일계 소련 농민(대부분 메노나이트파)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캐나다로 이주하기 위한 출국 비자 발급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심각한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고, 소련-독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독일에서는 소련 내 독일인을 돕기 위한 자선 단체 ''Brüder in Not''(고난 속의 형제)가 설립되었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도 이 단체에 200,000 라이히스마르크를 기부했다. 소련 정부는 처음에는 5,461명의 독일계 주민의 이민을 허용했지만, 나머지 9,730명은 원래 거주지로 강제 추방했다.[169][170][171]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 동안 소련 정부는 소련 내 독일 민족 기관의 수와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171]

소련 내 독일인, 즉 소련 당국에 의해 '반혁명가'로 간주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대규모 체포와 공개 재판은 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소위 '우크라이나 테러'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이후 1934년 11월 5일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b)의 칙령에 따라, 소련 내 독일인에 대한 탄압 캠페인은 소련 전역으로 확대되었다.[171]

1933년부터 1934년 사이, 독일에서는 소련 내 기근으로 고통받는 폴크스도이체를 돕기 위해 식량 꾸러미와 돈을 보내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172]

한편, 소련은 국경 너머의 민족(독일인, 폴란드인, 핀란드인 등)과의 연결 고리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며 1934년 서부 국경을 따라 새로운 국경 보안 구역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1935년부터 1937년 사이, NKVD는 이 지역에서 '잠재적으로 불충한 민족'으로 분류된 독일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들을 소련 내부 지역으로 대거 추방했다.[171] 이 과정에서 독일 민족 기관들은 점차 폐지되었다.[173]

1937년부터 1938년까지 NKVD는 디아스포라 민족들을 대상으로 소위 "간첩 및 사보타주 병력 파괴"를 명분으로 한 대규모 작전(NKVD의 민족 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소련 시민과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체포하거나 처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여기에는 독일인에 대한 NKVD 캠페인도 포함되었다. 이는 대숙청 기간 동안 소수 민족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의 일환이었다. 이 시기에 볼가 독일 ASSR과 그 공화국 내의 독일 학교를 제외한 소련 내 모든 독일계 및 기타 디아스포라 민족 구역과 학교가 폐지되었다.[171][174]

소련 정부는 나치 독일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여 독일계 주민 전체를 유럽 러시아에서 시베리아소련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키기로 사전에 결정했다. 이 계획은 실제 독일의 침공 직후 즉시 실행되어 약 120만 명의 독일계 시민이 강제로 이주당했다.[175][176]

7. 결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체결 소식은 1939년 8월 24일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를 통해 발표되었으며, 이는 각국 정부 지도자들과 언론에 큰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당시 많은 이들은 영국-프랑스-소련 간의 군사 동맹 협상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9] 소련과의 군사 동맹을 협상 중이던 영국과 프랑스 대표단은 "대화를 계속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118]

아돌프 히틀러는 이 조약을 통해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겪었던 양면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했으며, 이를 근거로 영국이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에게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다.[119] 그러나 히틀러의 예상과 달리, 영국은 조약 체결 다음 날인 8월 25일 폴란드와 상호 지원 조약을 체결하며 폴란드 방어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에 놀란 히틀러는 당초 8월 26일로 예정했던 폴란드 침공 계획을 연기해야 했다.[119]

조약에는 공개된 불가침 협정 외에도 동유럽을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내용의 비밀 추가 의정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의정서는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국가들과 폴란드, 베사라비아 지역의 분할을 규정했다.[115] 양측은 이 비밀 의정서의 존재를 오랫동안 부인했지만[116], 이는 이후 폴란드 분할 점령과 발트 3국 점령 등 실제적인 영토 변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과 소련의 협력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나치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했으며, 이는 독소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조약의 비밀 의정서 존재 여부와 그 역사적 의미, 그리고 조약 전후의 양국 관계에 대한 평가는 이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연구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7. 1. 히틀러, 조약을 깨다

나치 독일의 반소련, 반유대주의 선전 포스터


나치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177] 침공 이후,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통해 얻었던 영토를 불과 몇 주 만에 다시 빼앗겼다. 조약 파기 후 첫 3주 동안 소련은 독일군의 거센 진격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이 과정에서 75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전차 1만 대와 항공기 4천 대를 잃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178]

전쟁 발발 후 6개월 동안 소련군의 피해는 더욱 커져, 사상자 수는 430만 명에 달했다.[179] 또한 독일군은 300만 명의 소련군 포로를 잡았는데, 이들 중 200만 명은 1942년 2월까지 독일 포로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망했다.[178] 독일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1690km 깊숙이 침투했으며, 전선은 3058km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180]

7. 2. 소련의 비밀 의정서 존재 부인

독일소련 양측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비밀 의정서 존재를 부인했지만[116], 처음부터 이에 대한 소문은 퍼져 있었다.[117]

1945년 독일 관리들이 비밀 의정서가 담긴 마이크로필름 사본을 찾아 미국 군대에 넘겼고[116], 이 사본이 서방 언론에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수십 년 동안 공식적으로 비밀 의정서의 존재를 부인하는 입장을 유지했다.[116][117]

1989년 8월 23일 발트의 길 시위 이후, 같은 해 12월 소련의 한 위원회는 해당 의정서가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181] 1992년 소련 해체 이후에야 문서 자체가 기밀 해제되었다.

7. 3. 화해 시기에 대한 전후 해설

라팔로 조약 체결 이후, 조약에 비밀 군사 부록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오랫동안 일반적인 견해는 이러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며, 소비에트-독일 군사 협상은 라팔로 조약과는 별개로 진행되었고 독일 외무부와 분리되어 비밀리에 유지되었다는 것이었다.[19]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이후 연구를 통해 반박되었다.[21][22][23] 실제로는 바이마르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의 제약을 피해 무기 개발 및 시험,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소련 영토 깊숙한 곳에 시설을 제공받았고, 그 대가로 소련은 독일의 기술 개발에 접근하고 붉은 군대 참모부 창설에 도움을 받았다.[25] 이러한 군사 협력은 리페츠크 전투기 조종사 학교, 카마 탱크 학교, 톰카 가스 시험장 등의 시설 운영으로 구체화되었다.[2][26][29]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이후 독일-소련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이미 동방으로의 레벤스라움(생활 공간) 확보를 주장하며 반공산주의 및 반슬라브적 입장을 명확히 했다.[50] 헤르만 라우슈닝은 1934년 히틀러가 범슬라브주의에 맞선 불가피한 투쟁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했다. 다만, 라우슈닝 저서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55]

"우리는 독일 인종 이상과 범슬라브 대중 이상 사이의 최종 전투를 어떤 식으로든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이익도 연결할 수 없는 영원한 심연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섬기고 복종하도록 운명지어진 대중 위에 독일 인종 의식의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위대한 대륙 공간을 정복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단독으로, 모스크바와의 협약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투쟁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계의 영구적인 지배로 가는 문을 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러시아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목표로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56]

한편, 역사학자 에릭 D. 바이트는 두 정권 간 협력의 어두운 측면으로,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수백 명의 독일 시민(주로 공산주의자)을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게 넘겨준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또한 독일 공산당(KPD) 정치국 구성원들이 나치 독일에서보다 소련에서 더 높은 비율로 사망했다고 언급했다.[57] 이러한 사실들은 전후 독일-소련 관계의 복잡한 성격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논점을 제공한다.

8.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 (대리대사)


  • 빌헬름 미르바흐 (1918)
  • 카를 헬페리히
  • 쿠르트 비덴펠트
  • 울리히 그라프 폰 브로크도르프-란차우 (1922–1928)
  •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젠 (1928–1933)
  • 루돌프 나돌니 (1933–1934)
  • 프리드리히 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1934–1941)

9.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

1933년 8월, 몰로토프는 당시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였던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센에게 소련과 독일의 관계는 앞으로 독일이 소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전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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