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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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런던은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로마 시대에 론디니움이라는 도시로 건설되어 발전했다. 앵글로색슨족, 노르만 왕조 시대를 거치며 잉글랜드의 주요 도시로 성장했고, 중세 시대에는 무역과 길드의 중심지가 되었다. 근현대에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 대영 제국의 발전, 산업 혁명을 겪으며 세계 최대 도시로 성장했지만, 대역병, 런던 대화재, 세계 대전, 런던 대공습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 21세기에는 런던 올림픽 개최, 테러, 브렉시트 등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세계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따르면, 런던은 기원전 11세기경 트로이의 브루투스가 건설한 도시로, '카이르 트로이아'(Caer Troia), '트로이아 노바'(Troia Nova)라고 불렸다.[84]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따르면, 기원전 1000년에서 1100년경 트로이의 브루투스가 브리튼섬으로 건너와 고그마고그를 물리치고 도시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런던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브루투스의 도시는 '카이르 트로이아'(Caer Troia), '트로이아 노바'(라틴어로 '신트로이')라고 불렀는데, 민간어원설에 의하면 이 명칭이 '트리노반툼'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트리노반트족은 로마인이 도래하기 전 이 일대에 살았던 철기시대 부족으로 알려져 있다. 제프리는 선사시대 런던 지역사에 대하여 전설 속의 왕들을 나열해 놓았는데, 예컨대 루드 맙 벨리 마우르 왕(웨일스 신화의 루드 참고)은 마을의 이름을 '카이르 루데인'(Caer Ludein)으로 바꾸었는데 여기서 런던이란 지명의 유래가 되었고, 죽어서는 루드게이트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2. 런던의 탄생과 선사시대
그러나 최근 발굴 조사에 따르면, 런던 일대 템스강 주변에서 청동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어, 그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993년 복솔 교 상류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다리 유적은[84] 템스강을 가로지르거나 지금은 사라진 섬과 연결됐던 것으로 보이며, 다리 자재의 수목 조사 결과 기원전 1750년~1285년경의 것으로 밝혀졌다.[85] 2010년 복솔교 남쪽 강변에서는 기원전 4800년~4500년경의 대규모 목조 구조물이 발견되었는데,[87][88] 중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구조물의 정확한 기능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 유적은 모두 템스강의 지류인 에프라 강이 본류로 흘러드는 지점의 남안에 위치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88]
런던 일대 템스 강가에서는 청동기, 철기 시대의 창날과 무기가 여럿 발견되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전투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아 템스강이 부족 간의 주된 영역 경계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89] 그러나 고고학자 레즐리 월러스는 "런던에서는 로마 점령기 이전 철기 시대 정착지나 이렇다 할 거주 흔적이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에, ... 런던이 순전히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 없는 통상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말했다.[90]
3. 고대
최근 발굴조사 결과 런던 일대 템스강 주변에서 극초창기 정착민이 세운 마을 흔적이 남아있음이 밝혀졌다.
한편 런던 일대 템스 강가에서 청동기, 철기 시대의 창날과 무기가 여럿 발견된 바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전투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아, 템스강은 부족 간의 주된 영역 경계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89] 그러나 고고학자 레즐리 월러스는 "런던에서는 로마 점령기 이전 철기시대 정착지나 이렇다 할 거주 흔적이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에, 광범위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도 불구, 런던이 순전히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 없는 통상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말했다.[90]
3. 1. 로마 시대 (서기 47년 ~ 410년)


로마 제국은 43년 브리타니아 침공 후 약 4년 뒤인 서기 47년에 템스 강변에 '론디니움'(Londinium)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91] 론디니움은 강폭이 좁아 다리를 놓기에 충분했고, 유럽 대륙 곳곳을 쉽게 오갈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다. 초기 로마 시대 런던은 하이드 파크 크기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비교적 작았다.
서기 60년경, 이케니족의 부디카 여왕이 쳐들어와 론디니움을 파괴했다.[82] 그러나 론디니움은 곧 로마식 계획도시로 재건되었고, 수십 년에 걸쳐 급속히 성장했다.
2세기에 론디니움은 성장이 절정에 달했고, 카물로두눔을 대신해 브리타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 인구는 6만 명에 달했으며, 바실리카, 로마 신전, 공중 목욕탕, 원형극장 등 주요 공공건축물이 건설되었다. 론디니움의 바실리카는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론디니움은 브리타니아 현지인은 물론 유럽 대륙, 중동, 북아프리카 출신 등 로마 제국 전역의 시민들로 구성된 다민족 도시였다.[92]
서기 180년에서 225년경, 로마인들은 론디니움의 육지 쪽에 런던 월을 건설했다. 이 성벽은 길이 3km, 높이 6m, 두께 2.5m였다. 런던 월은 이후 1,600년간 런던의 경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시티오브런던의 경계선도 옛 성벽의 경로를 대략적으로 따라간다.
3세기부터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불안과 세력권 후퇴로 론디니움의 성장도 점차 쇠퇴했다. 3세기 말에는 색슨족 해적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았다.[93] 이에 대응하여 255년경부터 강변 쪽에도 성벽을 추가로 건설하여 론디니움을 한 바퀴 둘러싸게 되었다. 런던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도시 입구가 일곱 곳 있는데, 그중 루드게이트, 뉴게이트, 올더스게이트, 크리플게이트, 비숍스게이트, 올드게이트의 여섯 곳이 바로 이 로마 시대에 지어진 성벽 입구에서 유래했다. (무어게이트는 중세 시대에 유래)
5세기 들어 로마 제국이 급격히 쇠퇴하고, 410년에는 브리타니아 점령도 끝났다. 이에 따라 론디니움도 빠르게 쇠퇴하였으며, 5세기 말에는 사실상 폐허가 되었다.
3. 2. 앵글로색슨족 시대 (5세기 ~ 1066년)
로마 제국이 물러간 후, 앵글로색슨족이 런던 지역에 정착했다. 초기에는 런던 성벽 바깥, 현재의 스트랜드 일대에 '룬덴윅' (Lundenwic)이라는 교역 마을을 형성했다. 이 마을은 올디치와 트라팔가 광장 사이의 지역으로, '윅' (-wic)이라는 접미사는 교역이 이루어지던 곳임을 나타낸다.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초기 앵글로색슨 시대의 런던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고, 격자형 패턴으로 잘 짜여진 도시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10,000명에서 12,000명의 시민을 수용할 정도로 성장했음이 밝혀졌다.[83]
7세기 초, 런던은 에식스 왕국에 병합되었고, 604년 에식스의 새베르흐트 왕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멜리투스가 런던 주교로 서임되었다. 켄트의 애델베르흐트 왕의 후원으로 최초의 세인트 폴 대성당이 건립되었으나, 이후 파괴되었다.[83] 8세기부터 런던은 머시아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730년경에는 머시아 왕국의 직접 통치하에 들어갔다.
9세기부터 바이킹의 침략이 잦아졌고, 런던은 842년과 851년에 약탈당했다. 865년 덴마크의 '이교도 대군세'가 잉글랜드 전역을 휩쓸었고, 871년 런던에서 겨울을 보냈다. 886년 웨식스의 알프레드 대왕이 런던을 점령하고, 마을의 중심지를 로마 성벽 안쪽으로 옮겨 '룬덴부르' (Lundenburh)로 개칭했다. 로마 성벽은 보수되었고, 방어용 해자도 다시 파였으며, 런던교 역시 이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템스강 건너 남쪽 서더크에는 '수트링가 게워르크' (Suthringa Geworc, 서리인의 보루)라는 요새화된 마을이 들어섰다. 옛 룬덴윅 마을은 '엘드윅' (Ealdwic, 옛 마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 '올디치' (Aldwich)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이후 런던은 고유의 지방 정부를 발전시켰다. 911년 에텔레드가 사망하자 런던은 웨식스 왕국에 편입되었고, 918년 웨식스는 머시아의 남은 영토를 모두 병합했다. 런던은 윈체스터와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었으나, 도시의 규모와 상업적 부를 바탕으로 정치 활동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이 커졌다. 애설스탠 왕은 런던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열어 법령을 제정했고, 애델레드 2세는 978년 런던에서 '런던법'을 반포했다.
애델레드 2세 치세에 바이킹의 침략이 다시 시작되어, 994년 덴마크의 스베인 튜구스케그 왕이 런던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013년 잉글랜드가 덴마크에 항복할 때까지 런던은 최후의 보루로 남았으나, 결국 항복하고 애델레드 2세는 해외로 피신했다. 스베인 튜구스케그 왕이 사망하고 애델레드 2세가 복귀했으나, 스베인 튜구스케그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1015년 다시 공격해왔다.
1016년 애델레드 2세가 런던에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왕위를 계승했다. 런던은 크누트 대왕의 포위 공격을 받았으나,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다시 병력을 충원하러 떠나자 덴마크군은 공격을 재개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아산둔 전투에서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패배하면서 런던을 포함한 템스강 이북의 잉글랜드 전 영토를 크누트 대왕에게 할양했고, 몇 주 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사망하면서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전역을 장악했다.
1042년 크누트 대왕 왕조가 단절되고 에드워드 참회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잉글랜드 왕조가 복귀했다. 에드워드 참회왕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립하는 데 힘썼으며, 웨스트민스터는 점차 정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1066년 에드워드 참회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고, 결국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이어졌다. 해럴드 2세가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 1세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살아남은 위탄 의원들은 런던에서 회의를 열어 에드거 애델링을 왕으로 옹립했으나, 노르만군은 런던으로 진격하여 윌리엄 1세에게 항복했다.
3. 3. 노르만 시대와 중세 시대 (1066년 ~ 15세기 말)
노르만 왕조는 런던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런던탑을 비롯한 요새를 건설했다. 런던탑은 잉글랜드 최초의 석조 성채였다. 베이너드 성, 몽피셰 성과 같은 요새도 건설되었다.[12] 그러나 1067년 윌리엄 1세는 런던시에 기존의 권한, 특권, 법령을 인정하는 칙령을 내렸다. 런던의 자치 정부는 1199년과 1215년 존 왕이 선거권을 승인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1176년에는 런던교가 건설되기 시작하여 1209년에 완공되었다. 이 다리는 18세기까지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였다.
1070년경부터 잉글랜드 최초의 유대인 사회가 런던에 뿌리내렸으나,[12] 수세기에 걸쳐 탄압받는 신세가 되었다. 1190년에는 새 국왕 즉위식에 유대인들이 참석한 이후 왕이 유대인들을 학살하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대인들을 향한 폭력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13] 1264년 제2차 배런 전쟁 당시에는 시몽 드 몽포르 백작 휘하 군대가 런던을 점령하여 부채 장부를 빼내려는 과정에서 유대인 500명이 목숨을 잃었다.[15] 1290년에는 에드워드 1세의 '축출령'으로 유대인들은 잉글랜드를 강제로 떠나야 했다.[13]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 당시 런던은 와트 타일러가 이끄는 반란군의 침공을 받았다. 반란군은 런던탑을 습격하여 대법관과 대장경 등을 살해했다. 와트 타일러는 스미스필드에서 윌리엄 월워스 시장경과의 대치 중 사망했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중세 시대 런던은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길드 조직이 발달하여 런던시를 좌우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1100년 런던의 인구는 15,000명이 넘었으며, 1300년에는 약 80,000명으로 증가했다. 14세기 중반 흑사병으로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했지만,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 덕분에 빠르게 회복되었다.
4. 근현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런던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중심으로 연극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엘리자베스 1세 통치 말기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여왕의 측근들과 부유한 런던 시민들은 미들섹스, 에식스, 서리 등에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는 도시도 농촌도 아닌 곳에 살고 싶어하는 '별장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했을 때, 런던은 여전히 좁은 도시였다.
런던에는 외국인 혐오증이 만연했고, 1580년대 이후 더욱 심해졌다. 많은 이민자들이 폭력 위협과 학대에 시달렸고, 추방 시도나 어려운 시민권 취득 과정에 환멸을 느꼈다. 네덜란드 도시들이 더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런던을 떠났다.[19] 1600년경 런던 거주자 10만 명 중 약 4,000명이 외국인이었으며, 대부분 네덜란드와 독일 출신 노동자와 상인이었다.[20]
19세기에 런던은 대영 제국의 수도이자 세계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1800년 100만 명이던 인구는 1900년에 67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 시기 런던은 세계적인 정치, 금융, 무역의 중심지였다. 19세기 런던은 영국의 경제력 확대와 함께 부유해졌지만, 수백만 명이 비위생적인 슬럼가에 밀집되어 사는 가난의 도시이기도 했다. 1829년 로버트 필 내무대신은 런던 전역을 포괄하는 런던광역경찰청을 설립했다.
19세기 런던은 철도의 출현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새로운 광역 도시철도망 덕분에 중산층과 부유층은 도심으로 통근하며 런던 인근에 교외 시가지가 개발될 수 있었다. 1863년에는 런던 지하철의 첫 노선이 개통되었다. 런던의 도시권역은 이즐링턴, 패딩턴, 벨그라비아, 홀본, 핀스베리, 쇼디치, 서더크, 램버스 등으로 빠르게 확장되었다. 1855년, 도시 인프라 구축을 위한 광역권사업위원회(MBW)가 설치되었다.
광역사업위는 런던의 오수를 정화 없이 템스강으로 흘려보내 1858년 대악취 사건을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셉 베절제트 감독하에 대규모 오수거 체계를 구축했다.[36] 19세기 대규모 토목 사업이었던 이 하수도는 런던의 사망자 수를 급감시키고 콜레라 등의 전염병 발생을 줄였다.[37]
19세기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수정궁에서 개최된 1851년 만국 박람회였다. 약 600만 명이 관람한 이 박람회는 대영 제국 번영의 절정을 보여주었다.[38] 런던은 영국령 식민지와 가난한 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들을 끌어모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아일랜드 대기근 난민을 포함한 많은 아일랜드인이 런던에 정착했다.[39]
1888년, 런던 광역권을 묶는 런던 군이 설치되었다. 1900년, 런던 군은 28개의 광역구로 분할되었다. 19세기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 빅 벤, 국회의사당, 로열 앨버트 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타워 브리지 등 많은 유명 건축물이 세워졌다.
20세기 초, 런던은 빠른 성장을 이어갔다. 트램과 버스 노선이 확장되었고, 지하철 전력화 사업도 진행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런던은 독일군 비행선의 공습을 받았다.[118]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 시기 런던 교외 지역은 더욱 확장되었으나, 대공황으로 실업 문제가 심각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의 런던 대공습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종전 후 런던은 재건 사업을 추진, 1948년 런던 올림픽을 개최했다. 1950년대부터 자메이카,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 영연방 국가 출신 이민자들이 런던에 정착하면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도시로 변화했다. 1960년대에는 스윙잉 런던이라는 청년 문화가 유행했고,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등 런던 출신 뮤지션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1980년대 초 브릭스턴 폭동 등으로 민족 간 갈등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1986년 그레이터런던 의회(GLC)가 폐지되었다가, 2000년 그레이터런던 당국(GLA)이 설치되면서 런던 중앙 행정부가 부활했다.
21세기 초, 런던은 새천년을 기념하여 밀레니엄 돔과 런던 아이를 선보였다. 대영박물관 중앙광장 증축과 같이 기존 관광 시설을 개선하는 사업도 진행되었다.[53]
2005년 7월 6일, 런던은 2012년 런던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어 근대 올림픽을 세 번 개최하는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55] 그러나 바로 다음 날, 2005년 런던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56]
2011년에는 2011년 영국 폭동이 런던에서 시작되어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57] 같은 해, 런던 인구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800만 명을 넘어섰고, 백인 영국인은 런던 인구의 절반 이하를 차지하게 되었다.[58] 2012년 런던 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60] 2022년에는 엘리자베스 라인 철도가 개통되어 런던의 교통 시스템을 혁신했다.[67]
4. 1. 튜더 왕조 (1485년 ~ 1603년)
1475년, 한자동맹이 런던에 잉글랜드 내 주요 무역 기지(''콘토어'')를 설립했다. 이 기지는 '슈탈호프'(Stalhof) 또는 '스틸야드'(Steelyard)라고 불렸으며, 1853년 뤼베크, 브레멘, 함부르크 등의 한자동맹 도시들이 사우스 이스턴 철도에 매각할 때까지 유지되었다.[16] 14~15세기 런던에서 생산된 모직물은 염색 및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저지대 국가 인근 해안으로 운송되었고, 그곳에서 필수품으로 여겨졌다.[17]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시기 런던은 잉글랜드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중심지였다. 런던은 북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중심지들과 긴밀한 상업적 관계를 맺고 있었고, 외국 상인 공동체의 규모가 컸으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다. 또한 잉글랜드 인쇄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여 종교 개혁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확산에 기여했다. 종교 개혁 이전 런던 지역의 절반 이상은 수도원, 수녀원 등 종교 시설 소유였다.[18]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으로 인해 거의 모든 종교 시설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런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과정은 153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1538년까지 대부분의 대규모 수도원이 폐지되었다. 올드게이트 삼위일체 교회는 오들리 경에게 넘어갔고, 윈체스터 후작 윌리엄 폴렛은 경내 일부에 저택을 지었다. 런던 차터하우스는 노스 경에게, 블랙프라이어스는 코밤 남작 조지 브룩에게, 성 자일스의 나병원은 더들리 경에게 넘어갔으며, 국왕은 성 제임스 나병원을 세인트 제임스 궁전으로 재건했다.[18]
이 시기 런던은 유럽 상업 중심지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무역 범위는 서유럽을 넘어 러시아, 레반트, 아메리카 대륙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기는 중상주의 시대였으며, 머스코비 회사(1555년 설립)와 영국 동인도 회사(1600년 설립)와 같은 독점 무역 회사가 왕실 칙허로 런던에 설립되었다. 특히 영국 동인도 회사는 훗날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고, 2세기 반 동안 런던과 영국 전체에서 중요한 기관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와 웨일스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위그노와 같은 외국에서도 이민자들이 런던으로 유입되면서 인구는 1530년 약 5만 명에서 1605년 약 22만 5천 명으로 증가했다.[18] 런던의 인구와 부의 증가는 연안 해운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런던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필두로 연극이 크게 번성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말기 비교적 평온한 시기에 여왕의 측근들과 런던의 부유한 시민들은 미들섹스, 에식스, 서리에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것은 도시도 농지도 아닌 거주지에 대한 취향인 '별장 운동'의 초기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했을 때 런던은 여전히 비교적 좁은 지역이었다.
런던에서는 외국인 혐오증이 만연했으며, 1580년대 이후 더욱 심해졌다. 많은 이민자들이 폭력 위협과 성추행을 당하고, 외국인 추방 시도와 영국 시민권 취득의 어려움에 환멸을 느꼈다. 네덜란드 도시들이 더 우호적인 것으로 나타나면서 많은 이들이 런던을 영구적으로 떠났다.[19] 1600년경 런던 거주자 10만 명 중 외국인은 약 4,000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다수는 네덜란드와 독일 노동자 및 상인이었다.[20]
4. 2. 스튜어트 왕조 (1603년 ~ 1714년)
17세기 런던은 도시 경계를 넘어 크게 성장했다. 잉글랜드 내전에서 런던은 의회파의 중심지였으며, 왕당파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25][26] 1665년 런던 대역병으로 런던 인구의 5분의 1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25][26] 이듬해 발생한 런던 대화재는 도시의 60%를 파괴했지만, 크리스토퍼 렌, 존 이블린, 로버트 후크 등의 재건 노력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28] 재건된 런던은 화재 예방을 위해 목재 건물 대신 석재와 벽돌 건물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30]
이 시기 런던은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잉글랜드 은행이 설립되고,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런던로이즈가 영업을 시작했다.[32][33] 1700년 런던은 잉글랜드 전체 상품 수입의 80%, 수출의 69%, 재수출의 86%를 담당하며, 중개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33]
4. 3. 18세기
18세기는 런던이 급속하게 성장한 시기였으며, 이는 영국 인구의 증가와 산업혁명의 도래, 발전하는 대영제국의 심장이라는 점이 반영된 결과였다.[117]
1707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었다.[117] 이듬해인 1708년에는 크리스토퍼 렌의 걸작 세인트 폴 대성당이 렌의 생일에 맞춰 완공되었다. 다만 첫 예배는 그로부터 약 10년 전인 1697년 12월 2일에 열렸다.[117] 런던 대화재로 소실되었던 옛 세인트 폴 대성당 자리를 대체하게 된 이 대성당은 영국 내 바로크 건축의 정수로 손꼽힌다.[117]
17세기에는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화물과 상품을 거래하기 위해 런던으로 건너왔다. 여기에 이민자의 수도 증가하면서 런던 인구는 더욱 늘어갔다. 일자리와 사업을 위해 런던으로 이주하는 시민들도 생기면서 런던은 크고 북적거리는 도시가 되었다. 7년 전쟁 당시 영국의 승리로 대외적 입지가 올라갔으며, 새로운 대규모 무역시장도 하나둘씩 개방된 점도 런던의 번영에 불을 지폈다.[117]
조지 왕조 시기 런던은 옛 경계선 너머로 팽창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이는 존 로크가 1741~45년에 그린 지도와 1746년에 그린 지도에서 잘 드러난다. 웨스트엔드에 거주하던 부유층을 위해 메이페어 등의 새로운 지구가 조성되었고, 템스강에 지어진 새 다리로 사우스런던과 이스트런던 지역의 개발도 가속화되었으며, 런던항은 런던시로부터 하류 쪽으로 연장되었다.[117]
1780년에는 제2차 대륙회의 의장이었던 헨리 로렌스가 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런던탑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는 1781년 12월 21일 미국 측이 콘월리스 후작을 인도하는 것을 조건으로 런던탑에서 풀려났다.[117]
1762년 조지 3세는 버킹엄 하우스를 넘겨받았다. 이곳은 오늘날 버킹엄 궁전이라 부르는 곳으로, 이후 75년간 존 내시를 비롯한 여러 건축가에 의해 수차례 확장 공사를 거치게 되었다.[117]
같은 시기 영국에서는 '커피하우스 시대'에 접어들며,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커피의 전래로 문을 열게 된 커피하우스는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논하는 장소로 인기가 많았다. 여기에 문해율 증가와 출판업의 발달로 여러 소식을 널리 전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게 되었다. 플리트 스트리트는 이제 막 첫발을 내딛은 전국 언론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117]
18세기 런던은 범죄가 끊이질 않았다. 1750년에는 런던 최초의 치안기동대인 보우가의 주자 (Bow Street Runners)가 설립되었다.[117] 경미한 범죄에도 사형이 선고되는 등 형벌도 가혹했다. 공개 교수형 역시 런던시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며, 대중적인 행사로 취급됐다.[117] 1780년에는 로마 가톨릭교 자유화에 반대하여 조지 고든 경 주도로 신교도들이 봉기한 고든 폭동이 런던시를 휩쓸고 갔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계 성당과 주택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폭동에 가담한 시민 285명이 목숨을 잃었다.[117]
18세기 중반에 들어와서도 런던 교는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건널목이었지만, 1750년 웨스트민스터 교가 완공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두 개 이상의 건널목으로 강을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117] 1798년 프랑크푸르트 은행가였던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가 런던에 도착하여 로스차일드 은행을 건립하였다. 로스차일드 은행은 각국의 철도 건설이나 수에즈 운하 관련 공사를 비롯한 수많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였다.[117]
4. 4. 19세기
19세기에 런던은 대영 제국의 수도이자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1800년 100만 명이던 인구는 1900년에 67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 시기 런던은 세계적인 정치, 금융, 무역의 중심지로 한 세기 동안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파리와 뉴욕이 런던의 경쟁 도시로 성장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었다.
19세기 런던은 영국의 경제력 확대와 함께 부유해졌지만, 수백만 명이 비위생적인 슬럼가에 밀집되어 사는 가난의 도시이기도 했다. 당시 빈곤층의 삶은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와 같은 문학작품에 묘사되어 있다.
1829년, 로버트 필 내무대신(훗날 영국 총리)은 런던 전역을 포괄하는 런던광역경찰청을 설립했다. 런던 경찰은 로버트 필의 이름을 따서 '보비'(bobbies)와 '필러'(peelers)라는 별명을 얻었다.
19세기 런던은 철도의 출현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새로운 광역 도시철도망 덕분에 중산층과 부유층은 도심으로 통근하며 런던 인근에 교외 시가지가 개발될 수 있었다. 이는 런던의 팽창을 촉진했지만, 부유층이 교외로 이주하고 도심에는 빈곤층만 남아 계층 간 거주지 분열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런던 최초의 철도 노선은 1836년 개통된 런던 브리지-그리니치 구간이었다. 이후 유스턴 역(1837), 패딩턴 역(1838), 펜처치 스트리트 역(1841), 워털루 역(1848), 킹스 크로스 역(1850), 세인트 팬크라스 역(1863) 등 영국 각지와 연결되는 대규모 철도 터미널역이 런던 곳곳에 들어섰다. 1863년에는 런던 지하철의 첫 노선이 개통되어 지하철 시대가 열렸다.
런던의 도시권역은 이즐링턴, 패딩턴, 벨그라비아, 홀본, 핀스베리, 쇼디치, 서더크, 램버스 등으로 빠르게 확장되었다. 19세기 중반, 런던의 낡은 지방 행정체계는 중세시대 교구 체계만으로는 급속한 도시 인구 성장에 대응하기 어려워졌다. 1855년, 도시 인프라 구축을 위한 광역권사업위원회(MBW)가 설치되었다.
광역사업위의 첫 번째 임무는 런던의 위생 문제 해결이었다. 당시 런던의 오수는 정화 없이 템스강으로 흘러들어갔고, 이는 1858년 대악취 사건을 일으켰다.[36] 영국 의회는 광역사업위 주도로 런던의 대규모 오수거 체계 구축을 승인했다. 조셉 베절제트는 오수 처리와 깨끗한 식수 공급을 위한 배수로와 파이프를 런던 지하에 부설하는 작업을 감독했다. 19세기의 대규모 토목 사업이었던 이 하수도의 길이는 2,100km가 넘었으며, 런던의 사망자 수를 급감시키고 콜레라 등의 전염병 발생을 줄였다. 이 하수도는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37]
19세기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수정궁에서 개최된 1851년 만국 박람회였다. 전 세계 약 600만 명이 관람한 이 박람회는 대영 제국 번영의 절정을 보여주었다.[38] 런던은 영국령 식민지와 가난한 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들을 끌어모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아일랜드 대기근 난민을 포함한 많은 아일랜드인이 런던에 정착했다. 한때 런던 인구의 약 20%가 가톨릭계 아일랜드인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빈민가에 몰려 살았다.[39]
1888년, 런던 광역권을 묶는 런던 군이 설치되었다. 런던 군의회는 런던 최초의 직선제 행정청으로, 임명제였던 광역권사업위원회를 대체했다. 1900년, 런던 군은 28개의 광역구로 분할되어 각 광역구별 행정부를 구성했다.
19세기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 빅 벤, 국회의사당, 로열 앨버트 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타워 브리지 등 많은 유명 건축물이 세워졌다.
4. 5. 20세기
20세기 초, 런던은 빠른 성장을 이어갔다. 트램과 버스 노선이 확장되었고, 지하철 전력화 사업도 진행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런던은 독일군 비행선의 공습을 받아 약 700명이 사망하고 1,800명이 부상당하는 등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118]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사이 시기 런던 교외 지역은 더욱 확장되었으나, 대공황으로 실업 문제가 심각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의 런던 대공습으로 3만 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하고 수많은 건물이 파괴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종전 후 런던은 재건 사업을 추진, 1948년 런던 올림픽을 개최했다. 1950년대부터 자메이카,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 영연방 국가 출신 이민자들이 런던에 정착하면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도시로 변화했다. 1960년대에는 스윙잉 런던이라는 청년 문화가 유행했고,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등 런던 출신 뮤지션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1980년대 초 브릭스턴 폭동 등으로 민족 간 갈등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1986년 그레이터런던 의회(GLC)가 폐지되었다가, 2000년 그레이터런던 당국(GLA)이 설치되면서 런던 중앙 행정부가 부활했다.
4. 6. 21세기
21세기 초, 런던은 새천년을 기념하여 밀레니엄 돔과 런던 아이를 선보였다. 밀레니엄 돔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런던 아이는 연간 4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하며 런던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52] 대영박물관 중앙광장 증축과 같이 기존 관광 시설을 개선하는 사업도 진행되었다.[53]
2005년 7월 6일, 런던은 2012년 런던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어 근대 올림픽을 세 번 개최하는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55] 그러나 바로 다음 날, 2005년 런던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50명 이상이 사망하고 750여 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56]
2011년에는 2011년 영국 폭동이 런던에서 시작되어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57] 같은 해, 런던 인구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800만 명을 넘어섰고, 백인 영국인은 런던 인구의 절반 이하를 차지하게 되었다.[58]
2012년 런던 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런던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60]
2022년에는 엘리자베스 라인 철도가 개통되어 런던의 교통 시스템을 혁신했다.[67]
5. 런던의 대표적인 역사 명소
- 알렉산드라 팰리스
- 배터시 발전소
- 버킹엄 궁전
- 크로이던 공항
- 하이드 파크
- 런던 대화재 기념비
- 웨스트민스터 궁전
- 국회의사당 언덕
- 그리니치 천문대
- 세인트 폴 대성당
- 타워 브리지
- 런던 탑
- 타이번
- 복스홀역
- 워털루 국제역
- 웨스트민스터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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