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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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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14세기 롤라드 운동, 르네상스 인문주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사상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헨리 8세는 아들을 얻기 위해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추진하면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자신임을 선언하고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후 헨리 8세는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고 새로운 기도서를 편찬하는 등 종교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앤 불린을 비롯한 개신교도들이 종교 개혁을 지지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6세는 더욱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가톨릭이 복구되었고, 개신교도들은 다시 박해를 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성공회를 통해 종교적 안정을 추구했으며, 종교 개혁은 잉글랜드의 정치,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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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기본 정보
1406년부터 1603년까지의 잉글랜드 왕국의 문장
1406년부터 1603년까지 사용된 잉글랜드 왕국의 문장
발생 시기16세기
발생 장소잉글랜드 왕국
원인헨리 8세의 이혼 문제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갈등
주요 인물헨리 8세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크랜머
엘리자베스 1세
결과잉글랜드 교회의 독립
수도원 해산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
종교적 갈등과 변화
배경
헨리 8세의 결혼 문제헨리 8세는 캐서린 오브 아라곤과의 결혼 무효를 원했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를 허락하지 않음.
왕권 강화헨리 8세는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 함.
종교 개혁의 영향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잉글랜드 내에서도 종교 개혁에 대한 요구가 증가함.
주요 사건
수장령 (1534년)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임을 선언.
수도원 해산 (1536-1541년)헨리 8세가 수도원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
6개 조항 (1539년)잉글랜드 교회의 교리를 보수적으로 규정.
에드워드 6세의 종교 개혁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성공회 교리가 확립되고 예배 의식이 개정됨.
메리 1세의 반종교 개혁메리 1세 치하에서 로마 가톨릭이 복구되고 개신교도들이 박해받음.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정착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잉글랜드 교회가 최종적으로 확립됨.
영향
잉글랜드 교회의 확립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교회를 형성.
종교적 갈등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지속됨.
정치적 변화왕권이 강화되고 의회의 역할이 증대됨.
사회적 변화수도원 해산으로 인해 사회 및 경제 구조에 변화가 발생함.
같이 보기
관련 항목성공회
영국사
종교 개혁

2. 배경

틴들 성경은 후기 영어 번역의 기초가 되었다.


잉글랜드 종교 개혁은 16세기 헨리 8세의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중세 후기부터 이어진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중세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교황이 이끄는 가톨릭 교회의 일부였다. 당시 교회는 성사와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미사는 신앙 생활의 중심이었다. 또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1]

14세기 말, 존 위클리프를 따르는 롤라드 운동이 일어나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성경 우선을 믿었으며,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어 평신도에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롤라드파는 탄압을 받았지만, 이들의 사상은 이후 종교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1]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사상이 잉글랜드에 전해지면서 가톨릭 교리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루터는 오직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선행, 성사, 성인 숭배가 아닌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의미였다.[1]

1526년 윌리엄 틴들이 영어 신약성경을 출판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더욱 확산되었다. 틴들 성경은 대량 생산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었으며,[6] 틴들은 루터의 신학을 반영하여 '은총'을 '호의'로, '회개'를 '참회'로 번역하는 등 가톨릭 교리를 약화시켰다.[4]

이러한 종교적 변화는 특히 학자와 상인들 사이에서 환영받았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는 '리틀 게르마니'라고 불리는 그룹이 종교 개혁을 논의하기도 했다.[5]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여전히 소수였으며, 이단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6]

2. 1. 중세 후기 가톨릭교회

중세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교황이 이끄는 더 큰 가톨릭 교회의 일부였다. 늦은 중세 시대 교회의 구원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는 참회하는 사람들이 자선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는 천국에서 상을 받을 자격을 얻는 것이었다.[1] 하느님의 은총은 일반적으로 7개의 성사세례, 견진성사, 혼인, 서품, 병자성사, 고해성사 및 성찬례를 통해 주어졌다.[2] 성찬례는 가톨릭 예배의 중심 행위인 미사 중에 거행되었다. 이 의식에서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그리스도의 몸그리스도의 피가 되게 했는데, 이는 실체변화를 통해서였다. 교회는 신자들을 대표하여 사제가 인류의 죄에 대한 속죄를 제공하는 것과 동일한 십자가의 그리스도 희생을 하느님께 바친다고 가르쳤다.[3][4]

미사는 또한 산 자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는 기도 봉헌이기도 했다.[5] 진정한 참회가 죄에 부착된 죄책감을 없애는 반면, 가톨릭은 불완전한 통회의 경우 형벌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형벌이 충족되지 않은 채로 생을 마감하고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라고 믿어졌다. 연옥에서의 시간은 대사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통해 줄어들 수 있었는데, 이는 성인들의 통공에 의해 가능해졌다.[6] 종교 길드는 찬트리를 통해 그들의 구성원을 위한 중재 미사를 후원했다.[7] 수도원에 살았던 수도사수녀들도 영혼들을 위해 기도했다. 대중의 요구에 따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북유럽 대부분에서 가톨릭 신심을 지배했다."[8]

1500년대 초 잉글랜드 가톨릭은 강력하고 대중적이었다.[9] 대중의 참여를 측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금전적 기부이다. 의무적인 십일조 외에도 잉글랜드 사람들은 그들의 교구 교회에 자발적으로 많은 돈을 기부했다.[10]

2. 2. 롤라드 운동

롤라드는 몇몇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예견했다. 이 반성직자 운동은 신학자 존 위클리프 (1384년 사망)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를 이단으로 간주했다.[1] 롤라드는 성경 우선을 믿었으며,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어 평신도에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1] 그들은 설교성사보다 우선시했으며, 성변화를 믿지 않았다.[1] 또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도 비난했으며,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했다.[1] 롤라드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거짓 교회라고 믿었지만, 박해를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가톨릭에 순응했다.[1] 롤라드가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라틴어 불가타를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 성경을 읽었다.[1]

1401년, 잉글랜드 의회는 회개하지 않거나 재범하는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도록 허가하는 최초의 영국 법인 이단 처벌법을 통과시켰다.[1] 롤라드에 대한 반작용으로, 1409년 옥스퍼드 헌장은 주교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자국어 성경 번역을 금지했다.[1] 이는 주교가 공식적인 영어 번역을 결코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전면적인 금지가 되었다.[1] 동시에, 성경은 대부분의 다른 유럽 언어로 이용 가능했다.[1] 문맹률이 증가함에 따라, 영어를 읽을 수 있지만 라틴어는 읽을 수 없는 정통 평신도들이 위클리프 성경을 읽는 데 의존하게 되었다.[1]

롤라드는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고, 소수의 농민과 장인들의 작은 운동으로 생존했다.[1] 이는 "새롭게 수입된 루터교를 대중적으로 받아들이는 지역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1]

2. 3. 인문주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사상은 1520년대 초반 영국에 알려져 기존 가톨릭 교리와 논쟁을 일으켰다. 루터는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선행, 성사, 성인 숭배가 아닌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의미였다.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1]

윌리엄 틴들이 1526년에 출판한 영어 신약성경은 프로테스탄트 사상을 퍼뜨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틴들 성경은 대량 생산된 최초의 영어 성경으로, 1536년까지 약 16,000부가 영국에 있었다. 틴들은 루터의 신학을 반영하여 '은총'을 '호의'로, '회개'를 '참회'로 번역하는 등 가톨릭 교리를 약화시켰다.[4]

프로테스탄트 사상은 유럽 대륙과 교류가 잦았던 학자와 상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고, 특히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환영받았다. 1520년대 중반, '리틀 게르마니'라고 불린 케임브리지 학생들은 화이트 호스 선술집에서 모여 종교 개혁을 논의했다. 로버트 반스, 휴 라티머 등이 이 모임의 구성원이었다.[5]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정치적 사건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종교적 소수였으며, 교회와 국가로부터 이단으로 박해받았다. 1530년부터 1533년 사이에 많은 초기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당했다.[6]

2. 4. 루터교의 영향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사상은 1520년대 초부터 잉글랜드에 알려지기 시작했다.[2] 루터의 핵심 신학은 선행이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였다. 이는 믿음을 통해 받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3]

루터의 주장이 옳다면, 미사, 성사, 자선 행위,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순례, 유물 숭배는 신의 은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러한 믿음은 기껏해야 미신이며, 최악의 경우 우상 숭배로 간주될 수 있었다.[4] 초기 프로테스탄트들은 사제에게 하는 고해, 사제 독신, 금식, 서약 준수와 같은 가톨릭 관행을 부담스럽고 영적으로 억압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연옥이 성서적 근거가 없으며, 성직자들이 연옥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기도와 미사로 돈을 번다고 비난했다.[5]

1526년 윌리엄 틴들의 영어 신약성경 출판은 프로테스탄트 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외에서 인쇄되어 밀반입된 틴들 성경은 대량 생산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었으며, 1536년까지 영국에 약 16,000부가 존재했다.[6] 틴들의 번역은 이후 영어 번역의 기초가 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6] 틴들은 루터의 신학을 반영하여 전통적인 가톨릭 가르침을 약화시키는 번역을 선택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어 'charis'를 '은총' 대신 '호의'로 번역하여 성사의 역할을 축소하고, '아가페'를 '자비' 대신 '사랑'으로 번역하여 선행을 축소했다. 또한, '메타노에이테'를 '회개' 대신 '참회하다'로 번역하여 고해성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7]

프로테스탄트 사상은 잉글랜드 인구의 일부, 특히 유럽 대륙과 관계가 있는 학자와 상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8] 옥스퍼드 대학교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더 잘 받아들여졌으며,[9] 1520년대 중반부터는 "리틀 게르마니"라고 불리는 케임브리지 학생 그룹이 화이트 호스 선술집에서 모여 개혁을 논의했다. 이 그룹에는 로버트 반스, 휴 라티머, 존 프리스 등이 포함되었다.[10]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정치적 사건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종교적 소수였으며, 교회와 국가로부터 이단자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1530년부터 1533년 사이에 토머스 히튼, 토머스 빌니, 리처드 베이필드 등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다.[11] 윌리엄 트레이시는 사후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시신이 불태워지기도 했다.[12]

3.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잉글랜드의 헨리 8세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


헨리 8세의 두번째 부인 앤 불린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국왕 헨리 8세가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얻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잉글랜드 튜더 왕가는 전통적으로 교황을 지지했으며, 헨리 8세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12] 그러나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하고자 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혼인 무효를 요청했지만,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캐서린의 조카)의 압력으로 이를 거절했다. 결국 헨리 8세는 1533년 앤 불린과 결혼하고, 토머스 크랜머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했다. 이에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했지만,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자신임을 선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했다.

이후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내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고, 기도서를 제정하는 등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잉글랜드 성공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1. 왕비와의 이혼 논쟁

헨리 8세는 튜더 왕조의 왕위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고자 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아들을 낳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임신이 불가능했다.[12]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결혼 무효를 요청했지만, 교황은 이를 거절했다.

당시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캐서린은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에 교황은 황제의 분노를 우려했다. 1533년 1월, 헨리 8세는 임신한 앤 불린과 결혼했고, 5월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토머스 크랜머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크랜머는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했고, 교황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이유로 헨리 8세를 파문했다.

결국 헨리 8세는 수장령을 선포하여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자신임을 선언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했다.

3. 2. 성직자들에 대한 조치

헨리 8세는 이혼에 반대한 성직자들을 압박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여러 조치를 취했다. 1529년, 토마스 울지를 국왕 대권 침해(교황청 권위를 왕실보다 우선시하는 행위) 혐의로 기소했다. 울지는 1530년 11월 반역죄 혐의로 런던으로 가던 중 사망했다.[2]

1532년 8월, 워햄 대주교 사망 후 헨리 8세는 토머스 크랜머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크랜머는 교황청에 반대하는 개신교 신자였다. 교황은 크랜머 임명을 승인했고, 1533년 3월 30일 서임되었다.

의회는 상소 제한법을 통과시켜 교회 문제에 대한 로마 상소를 금지, 잉글랜드를 독립 국가로 선언했다.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화했고, 교황은 1533년 7월 11일 헨리 8세를 파문했다.

1534년, 의회는 추가 조치를 통해 잉글랜드 내 교황 권한을 제한했다. 연부금 전면 금지법으로 로마로의 연부금 지급을 금지했고, 초산 및 십일조법으로 교회 소득세 징수 권한을 왕에게 이관했다. 베드로의 헌금 및 면제에 관한 법은 베드로의 헌금을 금지하고 면제, 면허 부여 권한을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넘겼다.

수장령은 헨리 8세를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선포했다. 반역죄법 1534년은 왕의 수위권을 부인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1536년, 의회는 교황 권한에 반대하는 법을 통과시켜 교황 권한의 마지막 부분까지 제거했다.

3. 3. 로마와의 결별



헨리 8세는 1509년 17세의 나이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 즉위 직전 형 웨일스 공 아서의 미망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정략 결혼했다. 헨리 8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 칭호를 받기도 했다.[2] 그러나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하고자 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혼인 무효를 요청했으나, 교황은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압력으로 이를 거절했다. 헨리 8세는 1533년 앤 불린과 결혼하고, 토머스 크랜머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했다.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했지만,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자신임을 선언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후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내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고, 기도서를 제정하는 등 로마 교황청과의 분리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으로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를 관리하고, 과세하며, 고위 관리를 임명하고, 법률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며, 교회의 교리와 의례에 대한 통제권도 얻었다.[12]

3. 4. 종교 개혁의 완화



토마스 크롬웰 (c. 1485-1540), 헨리 8세의 수석 장관 (1532-40)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국왕 헨리 8세가 왕위를 물려줄 아들(왕세자)을 얻고자 노력한 결과였다. 잉글랜드 튜더 왕가는 본래 교황의 충실한 지지 세력이었다. 1520년에는 마르틴 루터를 공격하는 소책자 표지에 헨리 8세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을 정도로 잉글랜드는 종교 개혁에 큰 관심이 없었다. 교황은 이런 헨리 8세에게 '교회의 수호자'(FD, Def) 칭호를 수여하기도 했다.[12] 헨리 8세는 형수였지만 에스파냐와의 동맹을 유지할 목적으로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다.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자 헨리 8세는 이혼을 강요하며 앤 불린(Anne Boleyn)과 결혼을 추진했다.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혼인 무효를 요청했으나, 교황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캐서린은 카를 5세의 조카였기 때문에 요청을 거절했다.

헨리 8세는 1533년 1월에 임신한 앤 불린과 결혼하고, 5월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토머스 크랜머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크랜머는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했고,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했다. 결국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자신이라고 선언하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수도원 재산 몰수, 기도서 제정 등을 통해 로마 교황청과 결별했다.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으로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를 관리하고, 과세하며, 고위 관리를 임명하고, 법률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교회의 교리와 의례에 대한 통제권도 얻었다. 헨리 8세는 전통적인 가톨릭 신자였지만, 로마와의 결별을 지지한 주요 인물들은 개신교도들이었다. 그러나 스티븐 가디너와 같이 새로운 신학에 반대했지만 교황 수위권이 잉글랜드 교회의 정체성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전통주의자들도 있었다. 국왕은 종교 개혁을 위해 토머스 크롬웰과 토머스 크랜머와 같은 개신교도들에게 의존했고, 종교적 극단주의 사이에서 중도를 유지하면서 대륙 개혁의 언어를 수용했다. 그 결과 보수주의자와 개혁가 모두 교회의 미래 방향을 형성하려 하면서 교리적 혼란의 시기가 이어졌다.

개혁가들은 1535년 1월 영적 문제에 대한 부왕으로 임명된 크롬웰의 도움을 받았다. 크롬웰의 권한은 대주교는 물론 주교들보다도 더 컸다. 앤 불린의 영향으로 1534년부터 1536년 사이에 휴 라티머, 토마스 굿리치, 존 샐코트, 니콜라스 섁스턴, 윌리엄 바로우, 존 힐지, 에드워드 폭스 등 많은 개신교도들이 주교로 임명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적인 주교인 스티븐 가디너는 외교 임무를 위해 프랑스로 보내졌고, 이로 인해 3년 동안 잉글랜드 정치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크롬웰은 헨리 8세에게 로마가 결성하려 할 수 있는 정치적 동맹으로부터의 안전은 슈말칼덴 동맹의 독일 루터교 군주들과의 협상에 달려 있다고 설득했다. 또한 황제 카를 5세가 거부당한 고모(캐서린 여왕)의 복수를 위해 교황의 파문을 집행할 가능성도 있었다. 협상은 동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잉글랜드에 루터교 사상을 가져왔다.

세인트 폴의 십자가(그림의 왼쪽 하단 모서리)는 올드 세인트 폴 대성당 부지에 있는 저명한 설교 십자가였다.

3. 4. 1. 수도원 해산

1535년에 폐쇄된 더럼 근처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인 핀치얼 수도원 유적


토머스 크롬웰과 토머스 크랜머에게 개신교 의제의 한 단계는 연옥 교리와 관련된 수도원주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수도원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은인과 모든 기독교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국왕은 신학적 근거로 수도원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국제적 성격을 띠고 왕권에 저항했던 수도회의 충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12] 프란치스코 관상회 수도원은 교황 권위를 부인하기를 거부한 후 1534년 8월에 폐쇄되었고, 1535년부터 1537년 사이에 18명의 카르투시오회 수도사들이 같은 이유로 살해되었다.

왕실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교회의 재산은 정치적 약점과 대조적으로 교회의 재산 몰수를 유혹적이고 실행 가능하게 만들었다. 수도원 재산 몰수는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니었다. 1295년, 1337년, 1369년에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 교회는 잉글랜드 전체 토지의 5분의 1에서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다. 크롬웰은 막대한 양의 교회 토지를 젠트리와 귀족에게 판매함으로써 그들을 왕권에 묶을 수 있으며, 왕권 이전으로의 복귀는 왕국 내의 많은 유력자들을 뒤집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1534년, 크롬웰은 표면적으로는 수도원의 특성을 조사하기 위해, 실제로는 몰수를 목적으로 자산을 평가하기 위한 수도원 방문을 시작했다. 방문 위원들은 수도사수녀들 사이에서 성적 부도덕함과 재정적 부적절함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수도원 억압에 대한 표면적인 정당성이 되었다. 또한 하일스 수도원의 성혈 병이 조사 결과 "사프란으로 착색되고 정제된 꿀"로 밝혀지는 등 가짜 유물을 소유하고 전시한다는 보고도 있었다. 방문자들이 편집한 ''Compendium Competorum''에는 진짜 십자가 조각 10개, 성모 마리아의 젖 조각 7개, 수많은 성인의 허리띠가 기록되어 있었다.

앤 불린이 이끄는 주요 개혁가들은 수도원을 "연구와 훌륭한 서한의 장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지속적인 구제"로 전환하고 싶어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536년, 소규모 수도원 폐지법은 연간 200GBP 미만의 가치가 있는 소규모 수도원을 폐쇄했다. 헨리 8세는 예상되는 침략에 대비하여 해안 방어를 건설하는 데 (''장치 요새 참조'') 수입을 사용했으며, 모든 토지는 왕실에 주어지거나 귀족에게 팔렸다. 34개의 수도원이 면제 대가를 지불하여 구제되었다. 폐쇄의 영향을 받은 수도사와 수녀들은 더 큰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수도사들은 세속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졌다.

챕터 하우스는 1539년에 폐쇄되어 컨트리 하우스로 개조된 시토 수도원인 포드 수도원의 일부이다.


왕실 지상권과 교황 권위 폐지는 광범위한 사회 불안을 야기하지 않았지만, 수도원 공격과 성인의 날, 순례의 폐지는 폭력을 유발했다. 폭도들은 수도원 건물을 해체하러 온 사람들을 공격했고, 진압 위원들은 여러 곳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공격을 받았다.[12]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1536년 말과 1537년 초에 수도원 해산에 반대하는 일련의 봉기가 일어났다. 링컨셔 봉기는 1536년 10월에 발생하여 4만 명의 반군이 링컨에 집결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평시 과세 중단, 사용법 법령 폐지, 수도원 해산 중단, 이단 척결과 이단자 처벌을 요구했다. 헨리 8세는 협상을 거부했고, 신경이 예민해진 지주들이 평민들을 설득하여 해산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12]

은총의 순례는 더 심각한 문제였다. 친가톨릭적이고 토지세 반대 봉기는 10월에 요크셔에서 시작되어 다른 북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약 5만 명으로 구성된 반군은 로버트 아스크의 지휘 아래 해산된 북부의 수도원 26곳 중 16곳을 복원했다. 반란의 규모가 커지자 국왕은 협상에 동의했다. 12월에 토마스 하워드, 노퍽 제3대 공작은 반군에게 사면과 그들의 불만을 고려할 의회를 제안했다. 아스크는 그 후 반군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약속은 국왕에 의해 무시되었고, 노퍽은 반란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링컨셔 반군 47명이 처형되었고, 은총의 순례에 참여한 132명이 처형되었다. 잉글랜드 남부에서는 1537년에 콘월과 월싱엄에서 작은 소요가 발생했다.[12]

3. 4. 2. 개혁의 반전

1536년, 총회는 잉글랜드 교회의 첫 번째 교리 선언인 10개 조항을 채택했고, 1537년에는 ''주교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교회를 위한 준 루터교 교리를 확립했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칭의 이후 선행을 강조함으로써 제한되었으며 핵심 가르침이었다. 전통적인 7성사는 세례, 성찬, 참회 3개로 축소되었다. 성도에게 기도하고, 연옥을 믿으며, 예배에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가톨릭 가르침은 훼손되었다.[2]

1536년 8월, 10개 조항이 발표된 같은 달에 크롬웰은 성직자들에게 일련의 왕실 칙령을 발부했다. 축일이 정상적인 작업일로 변경되었으며, 여기에는 교회의 수호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과 수확기(7월부터 9월) 동안의 대부분 축일이 포함되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경제적이었는데, 너무 많은 휴일은 생산성 손실로 이어졌고 "악과 나태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3] 또한 개신교도들은 축일을 미신의 예로 여겼다.[4] 성직자들은 순례를 단념시키고 사람들에게 이미지에 헌금을 하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도록 지시해야 했다. 성직자들은 또한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모든 교회에 영어와 라틴어로 된 성경을 비치하도록 명령받았다.[5] 이 마지막 요구 사항은 공식적인 영어 번역본이 없었기 때문에 주교들이 1년 이상 무시했다. 유일하게 완전한 자국어 버전은 1535년에 완성된 커버데일 성경으로, 틴들의 이전 작업을 기반으로 했다. 그러나 왕실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6]

역사가 디아미드 맥컬록은 그의 연구서 ''1547–1603년 잉글랜드의 후기 종교 개혁''에서 1537년 이후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이미지를 싫어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졌으며, 마가렛 애스턴의 성상 파괴와 성상 혐오에 대한 연구가 여러 번 웅변적으로 입증했다."[7]고 주장한다. 1538년 2월, 유명한 그레이스 십자가는 기계적인 사기극으로 비난받고 세인트 폴 십자가에서 파괴되었다. 7월에는 월싱엄의 성모와 입스위치의 성모와 다른 마리아 이미지가 크롬웰의 명령에 따라 첼시에서 불태워졌다. 9월에는 크롬웰은 순례 헌금이 이루어진 이미지 파괴, 성상 앞에서 서원 초에 불을 켜는 것 금지, 이미지와 유물 숭배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는 것을 명령하는 두 번째 왕실 칙령을 발표했다.[8] 그 후, 교회의 자유를 옹호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여겨지는 토마스 베켓의 신사와 유골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파괴되었다.[9]

은총의 순례 실패는 해산 과정을 가속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헨리 8세가 모든 종교 시설을 폐쇄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1540년 마지막 수도원이 해산되면서 전통적인 종교의 중요한 요소가 사라졌다.[10] 전직 수도사들은 증액법원으로부터 소액의 연금을 받았고, 가능했던 사람들은 교구 사제로 일자리를 찾았다. 전직 수녀들은 더 적은 연금을 받았고, 정조 서약을 지켜야 했기에 결혼이 금지되었다.[11] 헨리는 최소 13개의 새로운 교구를 형성하여 대부분의 카운티가 이전 수도원(또는 그 이상)을 기반으로 하나를 갖도록 하는 계획을 직접 고안했지만, 이 계획은 부분적으로만 실행되었다. 브리스톨, 글로스터, 옥스퍼드, 피터버러, 웨스트민스터, 체스터에 새로운 교구가 설립되었지만, 슈루즈베리, 레스터 또는 월섬에는 설립되지 않았다.[12]

4. 에드워드 6세의 종교 개혁

에드워드 6세


헨리 8세가 1547년에 사망하고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면서,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헨리 8세의 종교 정책은 "통일, 복종, 고대 진리의 복원"을 목표로 했지만,[1] 실제로는 분열과 불복종을 초래했다. 개신교도들은 자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했고, 사제들은 영어로 미사를 집전하고 사제 독신주의를 어기며 결혼했다. 이는 전통주의자와 개혁자, 그리고 개신교도 내부의 분열을 야기했다.

1538년, 스티븐 가디너가 잉글랜드로 돌아오면서 종교 정책은 보수화되었다. 작센 선제후와 헤세 방백은 잉글랜드의 재세례파 활동을 경고했고, 재세례파를 색출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헨리 8세는 존 램버트 재판을 직접 주재하며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 임재를 부인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실재 임재에 대한 논의는 금지되었고, 결혼한 사제는 해고되었다.

헨리 8세는 1539년 부활 삼일 동안 성 금요일에 십자가에 기어가는 의식을 거행하며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했다. 의회는 6개 조항을 통과시켜 화체설, 사제 독신주의 등 가톨릭 신념과 관행을 재확인했다. 1540년, 헨리 8세의 오랜 조언자였던 크롬웰이 처형되고, 6개 조항에 따라 많은 체포가 이루어졌다. 개혁자들은 화형에 처해졌고, 가톨릭 신자들은 목을 매고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1541년, 개신교도들은 대영 성경을 모든 교회에 비치하라는 왕명을 통해 자국어 성경 접근성을 높였다. 1538년의 성상 파괴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에게 잉글랜드 내 모든 성지를 파괴하라는 명령으로 이어졌다. 1543년, 크랜머는 성직자 음모에서 이단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살아남았다. 같은 해, ''주교서''를 대체하는 ''왕의 서''가 출판되어 전통 의식과 이미지 사용을 옹호했고, 참된 종교의 진흥에 관한 법은 성경 읽기를 귀족으로 제한했다.

1544년, 크랜머의 ''권면과 연도''가 최초의 공식 자국어 예배로 출판되었고, ''왕의 초도서''는 유일하게 승인된 영어 기도서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개혁적인 관점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 보수적인 에드워드 리 사후 개신교도 로버트 홀게이트가 요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545년, 왕은 챈트리 재산 몰수 권한을 받았다.

1546년, 개신교 박해가 촉발되어 앤 아스큐가 화형에 처해졌다. 헨리의 마지막 부인 캐서린 파조차 이단 혐의를 받았지만 왕에게 자비를 구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나 캐서린 여왕 박해는 역효과를 낳았고, 1546년 종교 정책은 다시 개신교 쪽으로 기울었다. 왕의 유언은 섭정 평의회를 규정했는데, 전통주의자들이 지배적이었다. 헨리와의 분쟁 이후 가디너 주교는 평의원에서 해임되었고, 노퍽 공작은 체포되었다.

에드워드 6세의 어린 나이 때문에, 그의 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가 호국경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시모어는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잉글랜드 교회를 개신교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4. 1. 성상 파괴 운동과 성가대 폐지



에드워드 6세 시대에는 종교 개혁이 더욱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헨리 8세 시대에 금지되었던 성상 파괴가 다시 시작되었고, 이는 잉글랜드 교회의 전통적인 모습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547년 7월에 출판된 설교집은 유물, 형상, 묵주, 성수, 종려나무 가지 등 가톨릭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교황주의적 미신"이라고 비난하며,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개신교 교리를 강조했다.[1] 이는 헨리 8세가 1543년에 출판한 ''왕의 서''와 상반되는 내용이었다.[1]

이러한 변화는 잉글랜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챈트리 (사제들이 위령 미사를 드리도록 기부된 신탁 기금)의 해산은 연옥 교리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2]

4. 2. 1549년 기도서

웨스트 요크셔주 웨이크필드에 있는 14세기 성 마리아 채플. 챈트리는 연옥에서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사제들이 위령 미사를 드리도록 지불하는 기부금이었다.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은 "통일, 복종, 고대 진리의 복원"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분열과 불복종을 낳았다. 개신교도들은 자체적으로 개혁을 추진했고, 사제들은 영어로 미사를 집전하고 사제 독신주의를 어기며 결혼했다. 이는 전통주의자와 개혁자, 그리고 개신교도 내부의 분열을 야기했다.

1538년, 스티븐 가디너가 잉글랜드로 돌아오면서 종교 정책은 보수화되었다. 작센 선제후와 헤세 방백은 잉글랜드의 재세례파 활동을 경고했고, 재세례파를 색출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헨리 8세는 존 램버트 재판을 직접 주재하며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 임재를 부인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실재 임재에 대한 논의는 금지되었고, 결혼한 사제는 해고되었다.

헨리 8세는 1539년 부활 삼일 동안 성 금요일에 십자가에 기어가는 의식을 거행하며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했다. 의회는 6개 조항을 통과시켜 화체설, 사제 독신주의 등 가톨릭 신념과 관행을 재확인했다. 1540년, 헨리 8세의 오랜 조언자였던 크롬웰이 처형되고, 6개 조항에 따라 많은 체포가 이루어졌다. 개혁자들은 화형에 처해졌고, 가톨릭 신자들은 목을 매고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프랑스 외교관 샤를 드 마리약은 헨리의 종교 정책을 비판했다.

개신교도들은 1541년 대영 성경 사본을 모든 교회에 비치하라는 왕명을 통해 자국어 성경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1538년의 성상 파괴 정책은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에게 잉글랜드 내 모든 성지를 파괴하라는 명령으로 이어졌다. 1543년, 크랜머는 성직자 음모에서 이단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살아남았다. 같은 해, ''주교서''를 대체하는 ''왕의 서''가 출판되어 전통적인 의식과 이미지 사용을 옹호했고, 참된 종교의 진흥에 관한 법은 성경 읽기를 귀족으로 제한했다.

1544년, 크랜머의 ''권면과 연도''가 최초의 공식 자국어 예배로 출판되었고, ''왕의 초도서''는 유일하게 승인된 영어 기도서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개혁적인 관점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 보수적인 에드워드 리 사후 개신교도 로버트 홀게이트가 요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545년, 왕은 챈트리 재산 몰수 권한을 부여받았다.

1546년, 개신교 박해가 촉발되어 앤 아스큐가 화형에 처해졌다. 헨리의 마지막 부인 캐서린 파조차 이단 혐의를 받았지만 왕에게 자비를 구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나 캐서린 여왕 박해는 역효과를 낳았고, 1546년 종교 정책은 다시 개신교 쪽으로 기울었다. 왕의 유언은 섭정 평의회를 규정했는데, 전통주의자들이 지배적이었다. 헨리와의 분쟁 이후 가디너 주교는 평의원에서 해임되었고, 노퍽 공작은 체포되었다. 1547년 헨리 8세 사후, 에드워드 시모어가 추밀원을 장악했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그가 종교 개혁을 이끌 것이라 기대했다. 에드워드 통치 기간 동안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종교 개혁을 추진했다. 초기 에드워드는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했고, 에드워드 시모어, 서머셋 공작이 호국경으로 선출되었다. 서머셋은 처음에는 개혁을 주저했지만, 5월에 "종교의 혁신과 변화"에 대한 우려를 잠재우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서머셋과 크랜머는 종교 개혁을 추진했다. 7월에는 설교집이 출판되어 모든 성직자가 일요일에 설교해야 했다. 이 설교집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공짜로, 그리고 행위 없이 의롭게 된다"고 가르쳐 ''왕의 책''과 상반되었다. 가디너는 이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믿음에 의한 칭의는 잉글랜드 교회의 핵심 가르침이 되었다.

1547년 8월, 잉글랜드 교회의 왕립 교회 방문을 위해 30명의 위원들이 임명되었다. ''1547년 왕립 칙령''은 크롬웰의 1538년 칙령을 차용했지만 더 급진적으로 수정되었다. 교회 행렬이 금지되었고, 성수는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는 역할만 한다고 강조했다. 십자고상에 놓인 초가 금지되었고, 묵주를 외우는 것도 비난받았다. 이 칙령은 1547년 가을 우상 파괴를 야기했다. 모든 형상과 유물 파괴를 정당화하기 위해 남용의 정의가 확대되었다. 스테인드 글라스, 신사, 조각상, 십자고상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고, 교회 벽은 백색 도장되었으며 우상 숭배를 비난하는 성경 구절로 덮였다.

종교 개혁 동안 엘리 대성당의 레이디 예배당에 있는 이 조각상이 훼손되었다.


에드먼드 보너와 가디너는 교회 방문에 항의하여 체포되었다. 보너는 플리트 감옥에, 가디너는 플리트 감옥을 거쳐 런던 타워에 수감되었다. 1547년 11월, 새 의회는 헨리 8세 시대의 전통 종교 보호 법률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6개 조항법이 폐지되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현존을 부인하는 것이 범죄화되지 않았다. 이전 이단 법도 폐지되어 종교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었다. 성사법은 평신도가 두 종류 모두의 성찬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채플법 1547년은 남아 있는 채플을 폐지하고 그 자산을 몰수했다.

역사가들은 채플 폐지와 형상 제거가 얼마나 잘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A. G. 디킨스는 사람들이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한 중보 미사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먼 더피는 왕실 방문객의 활동과 일치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채플 사제들이 계속 기도를 드렸고, 토지 소유주들이 그들에게 돈을 지불했다. 일부 교구는 형상과 유물을 숨기기도 했다. 잉글랜드 연방 기간 동안 윌리엄 다우싱은 서퍽에서 형상 파괴 임무를 맡았다.

4. 2. 1. 전례 변화의 강요

1549년 1549년 통일법으로 승인된 《공동 기도서》는 솔즈베리 사용례, 요크 사용례, 헤리퍼드 사용례 등 여러 지역 라틴 전례를 영어 전례로 대체하였다.[1] 토머스 크랜머가 저술한 이 첫 번째 기도서는 보수주의자들과의 일시적인 타협으로,[2] 개신교도들에게 미신적인 요소 없이 예배를 제공하면서도 미사의 전통적인 구조는 유지하였다.[3]

교회력의 주기와 절기는 계속 지켜졌고, 매일 아침 기도인 마틴, 미사, 저녁 기도인 저녁 기도에 대한 본문이 있었다. 날짜에 맞는 기도문과 성경 구절이 있는 성인력도 포함되었다. 사제들은 여전히 예복을 입었으며, 기도서는 카파를 성직 수단보다 권장했다. 예배의 많은 부분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세례는 세례반에서 물을 축복하고, 대부모가 약속을 하며, 아이의 이마에 십자가를 긋고, 흰색 성유 천으로 감싸는 등 성례전적 성격을 유지했다. 견진 성사와 혼인 예식은 솔즈베리 전례를 따랐다.[4] 장례식에서 성찬을 거행하는 조항과 같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진혼 미사의 흔적도 있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공동 기도서》는 "그때까지 평신도의 성찬적 경건에 중심이 되었던 거의 모든 것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예배에서 "급진적인" 이탈이었다.[6] 성찬은 성체 승거 없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실제 현존에 대한 생각과 연결되어 있던 이전 전례의 중심적인 순간이었다. 봉헌 기도는 개신교 신학을 반영하도록 변경되었다.[7] 세 가지 희생, 즉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그리스도의 희생, 회중의 찬양과 감사의 희생, 하나님께 "우리 자신,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합리적이고 거룩하며 생생한 희생"으로 바치는 것이 언급되었다.[8] 중세 미사 경문이 "제단에서 사제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희생과 명시적으로 동일시"했지만, 기도서는 성찬에서 교회의 감사의 봉헌이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그리스도의 희생과 같지 않다고 명시함으로써 이 연결을 끊었다.[9] 사제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성부 하느님께 드리는 대신, 모인 사람들은 찬양과 감사를 드렸다. 성찬은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받는 수단으로만 이해되었다.[10][11]

교회 라틴 음악을 대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12] 대부분의 전례 연도는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 강림절과 몇몇 성경적 성인 기념일(사도, 복음사가, 세례자 요한, 마리아 막달레나)과 두 개의 마리아 축일(예수 봉헌 및 주님 탄생 예고)을 제외하고는 사라졌다. 성모 승천, 예수의 성체 축일 및 기타 축제는 없어졌다.

1549년, 의회는 성직자 결혼을 합법화했다. 이는 일부 개신교도(크랜머 포함)가 이미 실천했지만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4. 3. 반란

새로운 전례 시행은 항상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서부 지방(West Country)에서는,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도입이 1549년 여름에 일어난 일련의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웨스트 미들랜즈(West Midlands)에서 요크셔(Yorkshire)에 이르기까지 다른 지역에서도 소규모 동요가 있었다. 기도서 반란(Prayer Book Rebellion)은 단순히 기도서에 대한 반발뿐만 아니라, 반란군들은 종교 개혁 이전의 가톨릭교의 완전한 복원을 요구했다.[3] 이들은 또한 울타리 치기(enclosure)와 같은 경제적 문제에 의해 자극을 받았다.[4] 그러나 동앵글리아에서는 봉기가 가톨릭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다. 케트의 반란(Kett's Rebellion)은 노리치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함과 경제 개혁 및 사회 정의에 대한 요구가 결합된 것이었다.[5]

이 반란은 상당한 인명 손실 후에야 진압되었다.[6] 기도서 반란에서 최대 5,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사망했고,[3] 그 중 900명의 포로가 클리스트 히스에서 학살되었다.

4. 4. 추가 개혁



1530년대부터 개신교 개혁의 걸림돌 중 하나는 전통주의 다수와 개신교 소수로 심하게 분열된 주교들이었으나, 1550~1551년에 보수주의자들이 주교직에서 숙청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런던의 에드먼드 보너, 노리치의 윌리엄 러그, 우스터의 니콜라스 히스, 엑서터의 존 베시, 더럼의 커스버트 턴스톨, 치체스터의 조지 데이, 윈체스터의 스테판 가디너는 주교직을 박탈당하거나 사임을 강요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주교인 토머스 써비는 교구 이동을 통해 겨우 주교직을 유지했는데, "그의 주교 재임 기간 동안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전통주의 주교들은 니콜라스 리들리, 존 포넷, 존 후퍼, 마일즈 커버데일과 같은 개신교도들로 대체되었다.

새롭게 힘을 얻은 개신교 주교단은 보수 성직자들이 1549년 기도서의 허점을 이용해 "교황 미사 모조"를 시도하는 것을 막는 데 집중했다. ''공동 기도서''는 전통주의자들에게 타협과 양보를 허용해야 할 때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전례를 가능한 한 옛 전례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이는 성찬을 높이는 것을 포함하여 보수적인 사제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보수적인 주교 가디너는 감옥에 있는 동안 기도서를 지지했고, 역사학자 이몬 더피는 많은 평신도들이 기도서를 "영국의 미사 경본"으로 취급했다고 언급한다.

미사를 공격하기 위해 개신교는 석조 제단을 없앨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리들리 주교는 1550년 5월 그의 런던 교구에서 모든 제단을 나무 성찬상으로 바꾸라고 명령하면서 이 운동을 시작했다. 다른 지역 주교들도 그의 모범을 따랐지만, 저항도 있었다. 1550년 11월, 추밀원은 모든 논쟁을 끝내기 위해 모든 제단을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기도서는 "제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개신교는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가 식탁에서 성찬을 제정했기 때문에 테이블을 선호했다. 제단을 없앤 것은 성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생각을 깨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1550년 사순절 동안 존 후퍼는 "제단이 남아 있는 한 무지한 백성과 무지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제는 항상 희생에 대해 꿈꿀 것"이라고 설교했다.

1550년 3월, 마틴 부처의 서품 형식에 대한 논문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에드워드 시대 서품식이 출판되었다. 부처는 세 가지 성직자 계급 모두에 대해 하나의 예배만 제공했지만, 영국의 서품식은 더 보수적이었고 부제, 사제 및 주교에 대한 별도의 예배가 있었다. 글로스터 주교로 서임될 때 존 후퍼는 수위권 선서에서 "모든 성인과 거룩한 복음 전도자"에 대한 언급과 흰색 로켓 위에 검은색 케미즈를 착용해야 하는 요구 사항에 반대했다. 후퍼는 그의 선서에서 성인을 언급하는 것을 면제받았지만, 결국 불쾌한 서임 복장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예복 논쟁의 첫 번째 싸움이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에 필요하지도 않고 성경에 의해 금지되지도 않은 의식을 준수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갈등이었다.

4. 5. 1552년 기도서와 교구 재산 몰수



1549년 공동 기도서는 전통주의자들에게 타협과 양보를 허용해야 할 때 만들어졌다. 이는 새로운 전례를 가능한 한 옛 전례와 비슷하게 만들었고, 제단에서 성찬을 높이는 것을 포함하여 보수적인 사제들에 의해 악용되었다.[4] 보수적인 주교 가디너는 감옥에 있는 동안 기도서를 지지했고,[4] 역사가 이몬 더피는 많은 평신도들이 기도서를 "영국의 미사 경본"으로 취급했다고 언급한다.[4]

미사를 공격하기 위해 개신교는 석조 제단의 철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리들리 주교는 1550년 5월 그의 런던 교구에서 모든 제단을 나무 성찬상으로 교체하라고 명령하면서 이 캠페인을 시작했다.[4] 전국 다른 주교들도 그의 예를 따랐지만, 저항도 있었다. 1550년 11월, 추밀원은 모든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모든 제단을 철거하라고 명령했다.[4] 기도서는 "제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개신교는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가 식탁에서 성찬을 제정했기 때문에 테이블을 선호했다. 제단의 철거는 또한 성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생각을 파괴하려는 시도였다. 1550년 사순절 동안 존 후퍼는 "제단이 남아 있는 한 무지한 백성과 무지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제는 항상 희생에 대해 꿈꿀 것"이라고 설교했다.[4]

4. 6.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

에드워드 6세는 사망 직전, 자신의 이복 누나인 메리 튜더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메리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면 잉글랜드 교회가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메리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런던에 입성했고, 제인은 왕위에 오른 지 9일 만에 폐위되었다. 결국 메리가 메리 1세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는 잠시 가톨릭 국가로 돌아갔다.

5.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구

헨리 8세에 의해 강제로 이혼당한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혈육인 메리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 시도했고, 이는 성공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

메리 1세는 종교 문제에 있어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종교적 동조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포했지만, 이는 프로테스탄트의 반발을 피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는 소수였지만, 에드워드 6세 통치 기간 동안 그 수가 증가하여 런던과 일부 도시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1]

메리 1세 즉위 이후, 가톨릭 주교들이 복권되었고, 존 후퍼와 토머스 크랜머 등이 투옥되었다. 의회는 에드워드 시대의 종교 법률을 폐지하고 미사를 부활시켰지만, 몰수된 교회 재산 반환과 교황 수위권 문제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1]

메리 1세는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하기 위해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이는 토머스 와이어트가 이끈 반란을 야기했다. 1554년 말, 헨리 8세의 종교적 합의가 재개되었지만, 잉글랜드는 여전히 로마와 재결합하지 못했다. 몰수된 교회 토지를 구매한 귀족과 젠트리의 반발 때문이었다.[1]

레지널드 폴 추기경이 교황 특사로 도착하여 가톨릭 교회와의 분열을 종식시키려 노력했다. 의회는 폴 추기경의 요청에 따라 여왕에게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청원했고, 폴 추기경은 의회와 온 왕국을 이단과 분열에서 사면했다. 1556년, 헨리 8세 시대의 종교 법률이 폐지되고 로마와의 재결합이 시행되었다.[1]

메리 1세 시대의 종교 정책은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개혁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흡수하여 1520년대 가톨릭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내면의 참회를 강조하고, 성인, 이미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대한 강조는 줄었다. 토머스 크랜머는 이단 혐의로 재판받고 화형당했지만, 화형 직전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여 정부의 선전 효과를 반감시켰다.[1]

폴 추기경은 반종교개혁을 감독하며 교회에 이미지, 예복, 식기를 다시 설치하고, 결혼한 성직자들을 분리시켰다. 또한, 성직자들에게 매주 설교를 읽도록 명령하고, 어린이용 교리 문답과 설교집을 제작했다. 1555년부터 1556년까지 전국 레가틴 시노드를 통해 성직자 부재, 복수 봉직, 성직 매매를 비난하고, 각 교구에 신학교 설립을 명령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1]

메리 1세는 몰수된 교회 재정과 토지를 복원하려 노력했고, 초봉과 십일조 수입을 교회에 돌려주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시온 수도원을 포함한 여러 수도원을 복원했다. 그러나 복원 작업은 자선 기부의 변화와 크라이스트 병원 설립 등으로 인해 한계에 직면했다.[1]

메리 1세 시대의 종교 복원은 흉작으로 인한 빈곤과 궁핍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모집 증가, 교회 수리, 교회 축제 복원 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통적인 종교 의식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1]

메리 1세는 자신과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개신교인 300명 이상을 화형에 처해 '블러드 메리'(피의 여왕 메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다.[1] 그녀에 의해 순교당한 사람 중에는 헨리 8세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도 포함되어 있었다.[1] 그러나 메리 1세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왕위는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에게 넘어갔다.[1]

5. 1. 로마와의 화해

메리 1세는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종교 개혁은 의회의 법률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되돌리는 것 역시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1553년, 의회는 에드워드 시대의 종교 법률을 폐지하는 첫 번째 폐지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의회는 미사 불참 처벌, 몰수된 교회 재산 반환, 교황 수위권 문제에는 소극적이었다.[4]

메리 1세는 가톨릭 국가를 확고히 하기 위해 후계자가 필요했고,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를 잇는 것을 막고자 했다. 1554년, 그녀는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와이어트 반란과 같은 반발이 있었다.[5]

1554년 말, 헨리 8세의 종교 정책이 복구되었지만, 잉글랜드는 아직 로마와 완전히 재결합하지 못했다. 교회 재산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고, 이는 귀족과 젠트리가 구매한 토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레지널드 폴 추기경이 교황 특사로 도착하여 잉글랜드와 가톨릭 교회의 재결합을 추진했다.[5] 1554년 11월, 폴 추기경은 의회에서 화해를 촉구했고, 의회는 메리 1세에게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했다.[6]

11월 30일, 폴 추기경은 의회 양원에 연설하여 이단과 분열을 사면했다.[7] 이후 주교, 성직자, 신자들에게 순차적으로 사면이 이루어졌다. 12월, 추밀원은 헨리 8세 시대의 종교 법률 폐지와 로마와의 재결합을 시행하는 법률을 도입했고, 이는 두 번째 폐지 법령으로 통과되었다.[8]

메리 1세 시대의 종교는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시대 개혁의 긍정적인 요소를 흡수한 창조적인 재건이었다.[9] 내면의 참회, 믿음을 통한 은총,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 구원관 등이 강조되었다.[10][11] 폴 추기경은 캔터베리 관구와 요크 관구 모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반종교개혁을 감독했으며,[12] 교회에 이미지, 예복, 식기를 복원하고, 결혼한 성직자 문제를 해결했다.

1556년, 폴 추기경은 성직자들에게 보너 주교의 ''A Profitable and Necessary Doctrine''을 매주 읽도록 명령했다. 이 책은 기본적인 가톨릭 교리를 담고 있었다. 또한, 폴 추기경은 전국 레가틴 시노드를 통해 성직자 교육, 설교 강화, 신학교 설립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메리 1세는 몰수된 교회 재정을 복원하고 수도원을 재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재정 문제와 변화된 기부 성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복원 노력은 지역에 따라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흉작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성직자 모집이 증가하고, 교회 수리가 시작되었으며, 교회 축제가 복원되었다.

5. 2. 가톨릭 재건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


레지날드 폴 추기경


메리 1세 즉위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신자 모두에게 전통적인 종교의 부활을 의미했다.[1] 1552년 《공동 기도문》이 유일한 합법적 전례였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전역에서 라틴 미사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2] 메리는 종교 문제에서 관용을 강조하고 당분간 종교적 동조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며 신중하게 통치를 시작했다. 이는 권력 공고화 전 프로테스탄트 반대를 피하려는 시도였다.[3] 프로테스탄트는 소수였지만, 에드워드 통치 기간 동안 그 수가 증가했다. 역사학자 이먼 더피는 "프로테스탄트는 런던, 브리스톨, 라이, 콜체스터 등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고, 헤슬, 헐, 핼리팩스 등 북부 도시에서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라고 썼다.[4]

메리 즉위 후, 노퍽 공작, 보너, 가디너, 턴스톨, 데이, 히스 등 보수적인 주교들이 감옥에서 풀려나 이전 교구로 복귀했다. 1553년 9월, 후퍼와 크랜머는 투옥되었다. 노섬벌랜드는 처형되었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였다.[5]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종교 개혁은 의회 입법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의회를 통해서만 되돌릴 수 있었다. 10월 의회 소집 당시 추밀원 의장 가디너 주교는 1529년 이후 모든 종교 법률 폐지를 제안했다. 하원은 거부했고, 격렬한 논쟁 끝에[6] 의회는 첫 번째 폐지 법령에서 성직자 결혼과 기도서를 포함한 모든 에드워드 시대 종교 법률을 폐지했다.[7] 12월 20일까지 미사는 법으로 부활되었다.[8] 그러나 의회는 미사 불참 처벌, 몰수된 교회 재산 반환, 교황 수위권 문제에 대해 열린 태도를 유지하여 메리를 실망시켰다.[9]

메리는 가톨릭 잉글랜드를 확보하려면 후계자가 필요했고, 프로테스탄트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 계승을 막아야 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조언에 따라, 1554년 그의 아들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 결혼했다. 토머스 와이어트 경이 이끈 켄트 반란 등 반대가 있었지만, 필리페는 후계자 없을 시 왕국 상속 불가, 영지 획득 불가, 대관식 불가 조건이었다.[10]

1554년 말, 헨리 8세의 종교적 합의가 재개되었지만, 잉글랜드는 로마와 재결합하지 못했다. 재결합 전, 교회 재산 분쟁 해결이 필요했고, 이는 몰수된 교회 토지를 구매한 귀족과 젠트리에게 그대로 두는 것을 의미했다. 레지널드 폴 추기경은 1554년 11월 교황 특사로 도착해 잉글랜드와 가톨릭 교회 간 분열 종식을 이끌었다.[11] 11월 28일, 폴은 의회 연설에서 "나는 파괴가 아닌 건설, 정죄가 아닌 화해, 강요가 아닌 부름을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12] 다음 날 의회는 여왕에게 "이 왕국과 지배령이 폴 추기경을 통해 로마 교회에 통합될 수 있도록" 청원했다.

11월 30일, 폴은 의회 양원에 연설하여 의원들과 "온 왕국과 지배령을 모든 이단과 분열로부터" 사면했다. 주교들은 교구 성직자들을, 성직자들은 교구 신자들을 사면했다. 12월 26일, 추밀원은 헨리 8세 시대 종교 법률 폐지 및 로마 재결합 시행 법률을 도입했고, 이는 두 번째 폐지 법령으로 통과되었다.

보수적인 주교 에드먼드 보너


역사학자 에이먼 더피는 메리 시대 종교 프로그램이 "반동이 아닌 창조적 재건"으로,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개혁의 긍정적 요소를 흡수했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는 "1520년대 가톨릭교와 미묘하지만 뚜렷하게 달랐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헤이그는 메리 시대 가톨릭교가 1520~30년대 교육받은 지도적 성직자들의 "성숙한 에라스무스주의 가톨릭교"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메리 시대 교회 문헌, 기부, 교회 위원 계정은 성인, 이미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강조 감소를 시사하며, 외부 참회 행위 외 내면 참회 필요성에 중점을 두었다. 스피리투알리 일원이었던 폴 추기경은 인간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 구원관을 강조했다.

폴 추기경은 1556년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교체할 예정이었으나, 잉글랜드-로마 관할권 문제로 해임이 지연되었다. 메리는 크랜머가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지지했기에 반역죄로 재판, 처형할 수 있었지만, 이단 혐의 재판을 결정했다. 그의 개신교 철회는 큰 성공이었을 것이나, 화형 직전 철회를 취소하여 정부의 선전 승리를 망쳤다.

교황 사절 폴은 캔터베리 관구, 요크 관구 권한으로 잉글랜드 반종교개혁을 감독했다. 그는 교회에 이미지, 예복, 식기를 재설치했다. 약 2,000명 결혼 성직자가 아내와 분리되었지만, 대다수는 사제직을 계속 수행했다. 폴은 도미니크회 스페인 출신 페드로 데 소토, 후안 데 비야가르시아, 바르톨로메 카란자 등 주요 가톨릭 지식인 도움을 받았다.

1556년, 폴은 성직자들에게 매주 일요일 보너 주교의 ''A Profitable and Necessary Doctrine'' 한 장을 교구민에게 읽도록 명령했다. 1543년 ''왕의 책''을 모델로 한 보너의 작품은 사도신경, 십계명, 7가지 대죄, 성사, 주기도문, 성모송 중심 기본 가톨릭 가르침 조사였다. 보너는 어린이 교리 문답, 설교집도 제작했다.

1555년 12월~1556년 2월, 폴 추기경은 ''Reformatio Angliae''(잉글랜드 개혁) 법령 발표 전국 레가틴 시노드를 주재했다. 시노드 조치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 전체 제정 개혁 다수를 예고했다. 폴은 성직자 무지, 훈련 부족이 잉글랜드 종교 혼란 원인이라 믿고, 시노드 개혁으로 해결하려 했다. 성직자 부재(교구 미거주), 복수 봉직, 성직 매매를 비난했다. 설교는 목회 중심이었고, 모든 성직자는 설교해야 했다(미이행 교구 사제, 목사는 벌금).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질서한 사제 훈련 방식 대체, 각 교구 신학교 설립 명령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후 신학교 제도를 가톨릭 교회 전체에 강요했다. 성체 빵 보존 제단 감실도 처음 도입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메리 여왕 복원 시대 재건된 7개 수도원 중 하나


메리는 아버지, 오빠 통치 시대 몰수 교회 재정, 토지 복원에 힘썼다. 1555년 초봉과 십일조 수입을 교회에 돌려줬지만, 전직 수도자 연금 지급 책임이 따랐다. 베네딕토회 웨스트민스터 사원, 브리지틴회 시온 수도원 등 6개 수도원을 자비로 복원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1555~1558년 7개 수도원만 재건되었고, 추가 계획이 있었다. 생존 전직 수도자 1,500명 중 약 100명만 수도 생활 복귀, 소수 참회소만 재건되었다. 자선 기부 변화로 재건이 방해받았다. 런던 그레이프라이어스 재건 계획은 크라이스트 병원 입주로 무산되었다.

복원 활발 정도는 역사학자 간 논쟁거리다. A. G. 디킨스는 "종교적, 문화적 불모 시대"라 했지만, 크리스토퍼 헤이그는 흉작만 아니었다면 열정적이었다고 보았다. 잉글랜드 성직자 모집은 10년 감소 후 서품 증가 시작, 방치 교회 수리 시작, 교구 "복원, 수리 지속, 새 종 구매, 교회 에일 이익 창출" 등 변화가 있었다. 큰 교회 축제 복원, 연극, 퍼레이드, 행렬 기념이 있었지만, 1556년 보너 주교 주간 행렬 설립 시도는 실패했다. 헤이그는 "사람들이 이미지 촛불보다 더 나은 시간, 돈 사용법 발견"이라 썼다. 초점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미사, 십자가, 성체 숭배"였다.

5. 3. 장애물

헨리 8세에 의해 강제로 이혼당한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혈육인 메리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 시도했고, 이는 성공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

메리 1세는 종교 문제에 있어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종교적 동조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포했지만, 이는 프로테스탄트의 반발을 피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는 소수였지만, 에드워드 6세 통치 기간 동안 그 수가 증가하여 런던과 일부 도시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1]

메리 1세의 즉위 이후, 가톨릭 주교들이 복권되었고, 1553년 9월까지 존 후퍼와 토머스 크랜머 등이 투옥되었다. 의회는 에드워드 시대의 종교 법률을 폐지하고 미사를 부활시켰지만, 몰수된 교회 재산 반환과 교황 수위권 문제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1]

메리 1세는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하기 위해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이는 토머스 와이어트가 이끈 반란을 야기했다. 1554년 말, 헨리 8세의 종교적 합의가 재개되었지만, 잉글랜드는 여전히 로마와 재결합하지 못했다. 몰수된 교회 토지를 구매한 귀족과 젠트리의 반발 때문이었다.[1]

레지널드 폴 추기경이 교황 특사로 도착하여 가톨릭 교회와의 분열을 종식시키려 노력했다. 의회는 폴 추기경의 요청에 따라 여왕에게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청원했고, 폴 추기경은 의회 의원들과 온 왕국을 이단과 분열에서 사면했다. 1556년, 헨리 8세 시대의 종교 법률이 폐지되고 로마와의 재결합이 시행되었다.[1]

메리 1세 시대의 종교 정책은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개혁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흡수하여 1520년대 가톨릭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내면의 참회를 강조하고, 성인, 이미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대한 강조는 줄었다. 토머스 크랜머는 이단 혐의로 재판받고 화형당했지만, 화형 직전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여 정부의 선전 효과를 반감시켰다.[1]

폴 추기경은 반종교개혁을 감독하며 교회에 이미지, 예복, 식기를 다시 설치하고, 결혼한 성직자들을 분리시켰다. 또한, 성직자들에게 매주 설교를 읽도록 명령하고, 어린이용 교리 문답과 설교집을 제작했다. 1555년부터 1556년까지 전국 레가틴 시노드를 통해 성직자 부재, 복수 봉직, 성직 매매를 비난하고, 각 교구에 신학교 설립을 명령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1]

메리 1세는 몰수된 교회 재정과 토지를 복원하려 노력했고, 초봉과 십일조 수입을 교회에 돌려주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시온 수도원을 포함한 여러 수도원을 복원했다. 그러나 복원 작업은 자선 기부의 변화와 크라이스트 병원 설립 등으로 인해 한계에 직면했다.[1]

메리 1세 시대의 종교 복원은 흉작으로 인한 빈곤과 궁핍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모집 증가, 교회 수리, 교회 축제 복원 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통적인 종교 의식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1]

메리 1세는 자신과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개신교인 300명 이상을 화형에 처해 '블러드 메리'(피의 여왕 메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다.[1] 그녀에 의해 순교당한 사람 중에는 헨리 8세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도 포함되어 있었다.[1] 그러나 메리 1세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왕위는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에게 넘어갔다.[1]

6. 엘리자베스 시대의 종교 안정

메리 1세 사후,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는 다시 한번 종교적 변화를 맞이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성공회를 부활시켜 가톨릭개신교의 중도적인 교리를 확립하고, 이를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이끌었다. 이는 잉글랜드가 영원히 가톨릭 국가로 남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반전시킨 중요한 결정이었다.[1]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정책은 가톨릭에 반대하는 개신교도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노력을 포함했다. 많은 개신교도들이 마리아 망명자로서 해외로 피신하거나,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해야 했다.[2] 이단 혐의 부활법으로 인해 많은 개신교도들이 화형에 처해졌지만, 이러한 박해는 오히려 개신교도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3]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은 이러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널리 알려지게 했다.[4]

메리 1세의 가톨릭 복원 노력은 교황 바오로 4세와의 갈등으로 인해 좌절되기도 했다.[5] 그러나 메리 1세의 사망과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6. 1. 엘리자베스 종교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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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왕국을 물려받았다. 주요 동맹국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었다.[1] 이러한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 포고령에서 "현재 우리 왕국 내에 확립된 모든 질서나 관습의 파기, 변경 또는 변화"를 금지했다.[2] 이는 일시적인 조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보수적인 성향의 개신교도였다.[3]

엘리자베스 1세는 국무장관에 온건 개신교도인 윌리엄 세실 경을 임명하는 등[4] 새 정부를 개신교도로 채웠다.[5] 추밀원은 이전 에드워드 시대의 정치인들로 채워졌고, 오직 개신교도들만이 법정에서 설교했다.[6][7]

1558년, 의회는 수위법을 통과시켜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성을 재확립하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통치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559년 통일령은 1559년 ''공동 기도서''를 승인했다. 이 기도서는 가톨릭과 루터교 신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일부 수정되었는데, 개인이 실제 임재에 대한 믿음과 전통적인 사제 예복 사용에 대한 더 큰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1571년에는 39개 신조가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 채택되었고, 개혁 신학을 더 자세히 설명하는 설교집이 발행되었다.

엘리자베스 종교 정착은 교리가 개혁되었지만 대성당, 교회 합창단, 기도서에 담긴 공식적인 전례, 전통적인 예복 및 주교 제도와 같은 중세 가톨릭의 특정 특징을 보존하는 교회를 설립했다.[8] 역사가 디어미드 맥컬로흐는 엘리자베스 정착에 대한 갈등이 "가톨릭 구조와 개신교 신학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9]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교회 내에는 여러 파벌이 생겨났다. "교회 교황주의자"는 가톨릭 신앙을 비밀리에 유지하면서 표면적으로는 국교에 순응하는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가톨릭 당국은 이러한 외부적 순응을 승인하지 않았다. 불복종자는 법에 따라 요구되는 잉글랜드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가톨릭 신자였다.[10] 불복종은 한 달에 20파운드의 벌금으로 처벌받았다.[11] 1574년까지, 가톨릭 불복종자들은 잉글랜드 교회와는 별개의 지하 가톨릭 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회원 감소와 사제 부족이라는 두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1574년과 1603년 사이에 600명의 가톨릭 사제가 잉글랜드로 파견되었다.[12]

외국에서 훈련된 가톨릭 사제의 유입, 북부 백작의 반란 실패, 엘리자베스의 파문, 리돌피 음모의 발견은 모두 가톨릭이 반역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데 기여했다. 가톨릭 사제 처형이 더 흔해졌고, 1585년에는 가톨릭 사제를 돕거나 보호하는 사람도 반역죄가 되었다. 불복종 사제들의 구세대가 죽어감에 따라 가톨릭은 북부, 서부, 웨일스에서 하층 계급 사이에서 붕괴되었다. 사제가 없으면 이러한 사회 계급은 잉글랜드 교회로 흘러 들어갔고 가톨릭은 잊혀졌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으로 가톨릭은 "작은 종파의 신앙"이 되어 주로 젠트리 가구에 국한되었다.

점차 잉글랜드는 기도서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종교 생활을 형성함에 따라 개신교 국가로 변모했다. 1580년대까지 순응주의 개신교도(종교적 정착에 따라 종교적 관습을 순응한 사람들)가 다수가 되었다. 칼뱅주의는 많은 순응주의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칼뱅주의 성직자들은 엘리자베스 시대에 최고의 주교직과 교구장직을 유지했다.

다른 칼뱅주의자들은 엘리자베스 정착의 요소에 만족하지 않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대륙 개혁 교회와 더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개혁을 원했다. 이러한 비순응주의 칼뱅주의자들은 청교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청교도들은 예수의 이름에 하는 것을 거부했고, 세례 시 십자 성호를 긋거나 결혼 반지를 사용하거나 교회에서 오르간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특히 성직자들이 흰색 수단과 성직자 모자를 착용해야 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청교도 성직자들은 검은색 학문 복장을 착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예복 논쟁 참조). 많은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교회가 유럽의 다른 지역의 개혁 교회의 예를 따라 장로교 정치를 채택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의회를 통한 추가 개혁을 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여왕에 의해 차단되었다.

7. 결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과 주요 동맹 관계에 있는 왕국을 물려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 포고령을 통해 "현재 우리 왕국 내에 확립된 모든 질서나 관습의 파기, 변경 또는 변화"를 금지했다.[1] 이는 일시적인 조치였으며, 여왕은 새로운 정부를 개신교도로 채웠다. 여왕의 국무장관은 온건한 개신교도인 윌리엄 세실 경이었다.[2] 추밀원은 이전 에드워드 시대의 정치인들로 채워졌고, 오직 개신교도들만이 법정에서 설교했다.[3]

1558년, 의회는 수위법을 통과시켜 잉글랜드 교회의 로마로부터의 독립성을 재확립하고 엘리자베스에게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통치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559년 통일령은 에드워드 시대의 1552년 기도서를 개정한 1559년 ''공동 기도서''를 승인했다. 가톨릭과 루터교 신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일부 수정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개인이 실제 임재에 대한 믿음과 전통적인 사제 예복 사용에 대한 더 큰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1571년에는 39개 신조가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 채택되었고, 개혁 신학을 더 자세히 설명하는 설교집이 발행되었다.

엘리자베스 종교 정착은 교리가 개혁되었지만 대성당, 교회 합창단, 기도서에 담긴 공식적인 전례, 전통적인 예복 및 주교 제도와 같은 중세 가톨릭의 특정 특징을 보존하는 교회를 설립했다.[4]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교회 내에서 여러 파벌이 생겨났다.

"교회 교황주의자"는 가톨릭 신앙을 비밀리에 유지하면서 표면적으로는 국교에 순응하는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가톨릭 당국은 이러한 외부적 순응을 승인하지 않았다. 불복종자는 법에 따라 요구되는 잉글랜드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가톨릭 신자였다.[5] 불복종은 한 달에 20GBP의 벌금으로 처벌받았다(장인의 임금의 50배).[6] 1574년까지, 가톨릭 불복종자들은 잉글랜드 교회와는 별개의 지하 가톨릭 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회원 감소와 사제 부족이라는 두 가지 주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1574년과 1603년 사이에 600명의 가톨릭 사제가 잉글랜드로 파견되었다.[7] 외국에서 훈련된 가톨릭 사제의 유입, 북부 백작의 반란 실패, 엘리자베스의 파문, 리돌피 음모의 발견은 모두 가톨릭이 반역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데 기여했다.[8] 가톨릭 사제 처형이 더 흔해졌는데, 1577년에 처음, 1581년에 4명, 1582년에 11명, 1583년에 2명, 1584년에 6명, 1590년까지 53명, 1601년과 1608년 사이에는 70명이 더 처형되었다.[9] 1585년에는 가톨릭 사제가 이 나라에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돕거나 보호하는 사람도 반역죄가 되었다.[10] 불복종 사제들의 구세대가 죽어감에 따라 가톨릭은 북부, 서부, 웨일스에서 하층 계급 사이에서 붕괴되었다. 사제가 없으면 이러한 사회 계급은 잉글랜드 교회로 흘러 들어갔고 가톨릭은 잊혀졌다. 1603년 엘리자베스의 죽음으로 가톨릭은 "작은 종파의 신앙"이 되어 주로 젠트리 가구에 국한되었다.[11]

점차 잉글랜드는 기도서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종교 생활을 형성함에 따라 개신교 국가로 변모했다. 1580년대까지 순응주의 개신교도(종교적 정착에 따라 종교적 관습을 순응한 사람들)가 다수가 되었다.[12] 칼뱅주의는 많은 순응주의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칼뱅주의 성직자들은 엘리자베스 시대에 최고의 주교직과 교구장직을 유지했다. 다른 칼뱅주의자들은 엘리자베스 정착의 요소에 만족하지 않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대륙 개혁 교회와 더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은 개혁을 원했다. 이러한 비순응주의 칼뱅주의자들은 청교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청교도들은 예수의 이름에 하는 것을 거부했고, 세례 시 십자 성호를 긋거나 결혼 반지를 사용하거나 교회에서 오르간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특히 성직자들이 흰색 수단과 성직자 모자를 착용해야 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청교도 성직자들은 검은색 학문 복장을 착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예복 논쟁 참조). 많은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교회가 유럽의 다른 지역의 개혁 교회의 예를 따라 장로교 정치를 채택해야 한다고 믿었고, 여기서 주교에 의한 통치는 장로에 의한 통치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나 의회를 통한 추가 개혁을 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여왕에 의해 차단되었다.

1647년의 풍자적인 대중 판화로 "분파 목록"이 있다.


초기 스튜어트 시대 동안, 잉글랜드 국교회의 지배적인 신학은 여전히 칼뱅주의였지만, 주교 랜슬롯 앤드루스와 연관된 일단의 신학자들은 개혁 전통, 특히 예정설에 대한 가르침의 많은 측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개혁가보다는 교부들을 바라보았고 더 전통적인 1549년 기도서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들의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새로운 분파는 아르미니우스 파로 알려졌지만, 그들의 고교회 지향은 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제임스 1세는 그의 교회 내의 청교도 세력과 앤드루스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했고, 그의 통치 말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승진시켰다.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르미니우스 파가 우세했고,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1633–1645)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로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종교 개혁이 너무 멀리 진행되었다고 믿었고, 그들이 예배에서 잃어버린 위엄과 사제 계급의 잃어버린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성결의 아름다움" 반혁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로드주의는 청교도와 기도서 순응주의자 모두에게 인기가 없었는데, 그들은 고교회 혁신이 그들이 익숙해진 예배 형식을 훼손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내전은 찰스 1세의 전복을 초래했고, 청교도 지배적인 의회는 엘리자베스 해결책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스스로 분열되었고 대안적인 종교적 해결책에 동의하지 못했다. 침례교, 퀘이커, 랜터, 탐구자, 파는 사람들, 머글턴주의자, 제5군주파를 포함한 다양한 새로운 종교 운동이 나타났다.

1660년의 군주제 왕정복고는 엘리자베스 해결책의 복원도 허용했지만, 잉글랜드 국교회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제이콥 시대의 합의"는 깨졌다. 많은 청교도들이 순응하려 하지 않았고 비국교도가 되었다. 이제 국교회 밖에 있던 청교도 운동의 다양한 흐름은 회중 교회, 잉글랜드 장로교, 침례교와 같은 별도의 종파로 발전했다.

왕정복고 이후, 성공회는 인식 가능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리처드 후커로부터 성공회는 "의식과 의례에 긍정적인 영적 가치가 있으며, 중세 교회에서 후기 잉글랜드 국교회에 이르는 끊임없는 계승"에 대한 믿음을 물려받았다. 아르미니우스파로부터 그것은 주교 제도에 대한 신학과 전례에 대한 인식을 얻었다. 청교도와 칼뱅주의자로부터 그것은 "성경과 설교의 우위를 주장하려는 모순된 충동을 물려받았다".

종교 개혁에 의해 촉발된 종교적 세력은 궁극적으로 종교적 통일성의 가능성을 파괴했다.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는 관용법 1688으로 예배의 자유를 허용받았다. 가톨릭교도가 관용을 얻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상생활에서 가톨릭교도를 배제하는 영국 형벌법은 1770년대에 폐지되기 시작했다. 가톨릭교도는 1829년에 투표하고 의회 의원으로 앉는 것이 허용되었다(가톨릭 해방 참조).

8. 역사 해석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적 해결책으로 잉글랜드 종교 개혁이 끝났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17세기와 18세기까지 이어진 "장기 종교 개혁"을 주장하기도 한다.[1]

스튜어트 시대 초기, 잉글랜드 국교회의 지배적인 신학은 칼뱅주의였지만, 주교 랜슬롯 앤드루스와 관련된 신학자들은 예정설을 비롯한 개혁 전통의 여러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들은 개혁가들보다는 교부들을 따랐고, 더 전통적인 1549년 기도서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2]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들은 아르미니우스 파로 알려졌지만, 고교회 지향은 더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제임스 1세는 교회 내 청교도 세력과 앤드루스 추종자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3]

잉글랜드의 찰스 1세 통치 기간 동안, 아르미니우스 파가 우세했고,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1633–1645)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로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종교 개혁이 너무 멀리 나아갔다고 믿었고, 예배의 위엄과 사제 계급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성결의 아름다움" 반혁명을 시작했다.[4] 그러나 로드주의는 청교도와 기도서 순응주의자 모두에게 인기가 없었는데, 그들은 고교회 혁신이 익숙한 예배 형식을 훼손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5] 잉글랜드 내전은 찰스 1세의 전복을 초래했고, 청교도가 지배적인 의회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종교적 해결책을 해체하기 시작했다.[6] 그러나 청교도들은 스스로 분열되어 대안적인 종교적 해결책에 동의하지 못했다. 침례교, 퀘이커, 랜터, 탐구자, 파는 사람들, 머글턴주의자, 제5군주파 등 다양한 새로운 종교 운동이 나타났다.[7]

1660년 왕정복고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종교적 해결책을 복원했지만, 잉글랜드 국교회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제이콥 시대의 합의"는 깨졌다.[8] 많은 청교도들이 순응하지 않아 비국교도가 되었다. 이제 국교회 밖에 있던 청교도 운동의 다양한 흐름은 회중 교회, 잉글랜드 장로교, 침례교와 같은 별도의 종파로 발전했다.[9]

왕정복고 이후, 성공회는 인식 가능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10] 리처드 후커로부터 성공회는 "의식과 의례에 긍정적인 영적 가치가 있으며, 중세 교회에서 후기 잉글랜드 국교회에 이르는 끊임없는 계승"에 대한 믿음을 물려받았다.[11] 아르미니우스파로부터 주교 제도에 대한 신학과 전례에 대한 인식을 얻었다. 청교도와 칼뱅주의자로부터 "성경과 설교의 우위를 주장하려는 모순된 충동을 물려받았다".[12]

종교 개혁으로 촉발된 종교적 세력은 결국 종교적 통일성의 가능성을 파괴했다.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도는 관용법 1688으로 예배의 자유를 얻었지만, 가톨릭교도가 관용을 얻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상생활에서 가톨릭교도를 배제하는 영국 형벌법은 1770년대에 폐지되기 시작했고, 1829년에 가톨릭교도는 투표하고 의회 의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가톨릭 해방 참조).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역사 서술은 5세기 동안 헌신적인 주창자들과 학자들 간의 격렬한 충돌을 겪어왔다. 전국적 수준의 주요 사실적 세부 사항은 1900년 이후 제임스 앤서니 프로드와 앨버트 폴라드가 제시한 바와 같이 명확해졌다.

종교 개혁 역사 서술은 가톨릭교회, 성공회, 비국교도 역사가들이 각자의 종교적 관점을 사용하는 등 많은 해석 학파를 보였다. 또한, 이안 해즐렛의 말처럼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암흑 시대에서 근대성의 문턱으로 잉글랜드를 인도하고, 진보의 전환점"으로 묘사한 자유주의적 세속화된 개신교에 기반한 매우 영향력 있는 휘그 해석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구 학파 중에는 지주와 중산층의 부상에서 구 엘리트의 경제적 쇠퇴를 강조하는 신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있었다.

1970년대 이후 학술적 역사 서술의 주된 흐름은 네 가지 그룹 또는 학파로 나뉜다.


  • 제프리 엘튼은 정치적 역사 서술에 뿌리를 둔 의제를 가진 첫 번째 파벌을 이끌었다. 엘튼에게 핵심 인물은 헨리 8세가 아니라 그의 국무장관 토마스 크롬웰이었다. 엘튼은 확고한 신념의 신학에서 종교 개혁가들의 예언적 정신을 과소평가하고, 그들을 광신자들과 편협한 자들의 주제넘은 침입으로 치부했다.

  • A. G. 디킨스 등은 주로 종교적 관점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운동의 종교적, 주관적 측면을 우선시한다. 종교 개혁이 다른 유럽 지역과 마찬가지로 위에서부터 강요되었음을 인식하면서도, 아래로부터의 열망에 부응하기도 했다. 디킨스는 잔존하는 부활한 가톨릭교의 강점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유럽의 영향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입증한 점은 칭찬을 받았다.

  • 크리스토퍼 헤이그, 잭 스카리스브릭, 이먼 더피 및 수많은 다른 학자들이 이끄는 수정주의자들은 지역 수준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1차 자료를 발견했다. 그들은 위로부터의 통제를 덜 강조하면서 종교 개혁이 매일 지역적으로 전개되는 데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자료에서 벗어나 지역 교구 기록, 교구 파일, 길드 기록, 자치구 데이터, 법원, 특히 개별 유언에 의존하는 것을 강조한다. 수정주의자들은 종교 개혁 이전의 교구 가톨릭교를 "영국 국민에게 영적 도움을 제공하는 활기찬 교회"로 묘사한다.

  • 패트릭 콜린슨 등은 성공회의 신중함과 타협에 불만을 품은 칼뱅주의 청교도와 함께 신학적 지형에 훨씬 더 많은 정확성을 가져왔다. 실제로 청교도는 모든 칼뱅주의를 포함하지 않는 별개의 하위 집단이었다. 따라서 잉글랜드 교회는 모든 개신교적 영감의 파벌들의 연합으로 나타났다.


더 최근의 학파들은 헨리 8세를 탈중심화하고 성인전을 최소화했다. 그들은 지역, 가톨릭교, 급진주의자 및 신학적 세부 사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참조

[1] 서적 The Oxford Reformers. John Colet, Erasmus and Thomas More https://reformationc[...] Longmans, Green and Co 1869
[2] 서적 The Defence of the Seven Sacraments https://books.google[...] Dalcassian Publishing Company 2019-11-05
[3] 웹사이트 Bodmin Prayer Book Rebellion Service 2023 https://propercornwa[...] 2022-08-03
[4] 문서
[5] 간행물 Queen Mary's responsibility for parish church goods seized by King Edward's commissioners https://archive.org/[...] Archaeologia Cantiana 1882
[6] 서적 History of England from the Fall of Wolsey to the Defeat of the Spanish Armada https://archive.org/[...] 1893
[7] 서적 Henry VIII https://archive.org/[...] 1905
[7] 서적 The History of England from the Accession of Edward VI to the Death of Elizabeth, 1547–1603 https://archive.org/[...] 1910
[8] 문서
[9] 서적 The Reformation in historical thought 1985
[10] 논문 Review: Duffy, Eamon. Fires of Faith: Catholic England under Mary Tudor .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9. xiv+249 pp. $28.50 (cloth); $18.00 (paper). 2011-10
[11] 서적 Conflict in early Stuart England: studies in religion and politics 1603–1642 Routledge 2014
[12] 서적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브니엘 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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