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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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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509년, 왕정을 몰아내고 수립된 로마의 정치 체제이다. 원로원, 정무관, 민회로 구성된 과두정 성격을 띠었으며, 초기에는 귀족이 권력을 독점했으나 신분 투쟁을 거쳐 평민의 권리를 확대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를 장악하며 번영을 누렸지만, 포에니 전쟁, 지중해 세계 정복, 사회 불평등 심화로 인한 내전과 군벌의 등장으로 공화정은 위기를 맞았다. 결국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가 '프린키파투스'를 열면서 공화정은 종말을 고하고 제정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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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국
지도 정보
로마 공화국 지도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직전 로마 영토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Res Publika Romana
일반 명칭로마
시대고전 고대
정치 체제집정관 공화정
수도로마
공식 언어라틴어
종교로마 다신교
입법부민회
표어}} (라틴어: 로마 원로원과 시민)
건국과 멸망
건국 사건왕정 타도
건국 시기기원전 509년경
멸망 사건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음
멸망 시기기원전 27년 1월 16일
주요 사건라틴 동맹 해체 (기원전 338년)
술라의 독재관 임명 (기원전 8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종신 독재관 임명 (기원전 44년 2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기원전 44년 3월 15일)
악티움 해전 (기원전 31년 9월 2일)
통치자
초기 집정관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
마지막 집정관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그리파
집정관 임기기원전 509년 (첫 번째) ~ 기원전 27년 (마지막)
역사
선행 국가로마 왕국
후행 국가로마 제국
주요 변천왕정 폐지(기원전 509년)
라티움 전쟁(기원전 498년)
삼니움 전쟁(기원전 343년)
이탈리아 반도 통일 (기원전 272년)
카르타고 정복 (기원전 146년)
내란의 세기 시작 (기원전 133년)
제정으로 이행(기원전 27년)
인구 및 면적
면적 (기원전 326년)10,000 제곱킬로미터
면적 (기원전 50년)1,950,000 제곱킬로미터
기타
화폐데나리우스 외
데모님로마인

2. 역사

로마는 왕정 시대부터 왕들이 통치해 왔다. 로마 상원에 의해 종신직으로 선출된 마지막 로마 왕은 타르퀴니우스 프루두스였다. 기원전 509년, 그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귀족 여성 루크레티아를 강간한 죄로 로마에서 쫓겨났다.[23] 반신화적인 인물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었고, 왕의 권력은 1년 임기로 선출되는 두 명의 집정관에게 이전되었다. 각 집정관은 거부권la을 통해 자신의 동료를 견제할 수 있었다.[24]

로마의 마지막 왕에 대한 반란을 이끌고 공화정을 세운 인물로 여겨지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흉상인 "카피톨리누스 브루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베이이와 타르퀴니이와의 전쟁, 로마와 클루시움 간의 전쟁 등 여러 차례 왕위를 되찾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23]

로마 시민은 파트리키플레브스 두 계급으로 나뉘었는데,[50] 공화정 출범 당시 기득권층인 귀족 계급은 폐쇄적인 신분을 이루었으며,[51] 평민 계급은 이에 반발하며 사회 정의를 요구하게 된다.[52] 초기엔 모든 공직이 오직 귀족들에게만 열려있었고 또한 귀족과 평민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평민들이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로마가 주변국들과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중무장 보병을 구성하였던 로마 평민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므로 로마 평민들의 정치적인 발언권은 점점 높아졌다.

기원전 493년에 로마는 라티움 지역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카시우스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는다.[66]

로마는 기원전 343년부터 약 기원전 290년까지 삼니움과 세 차례의 전쟁을 치러 모두 승리했다.

전쟁명기간
제1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43년 ~ 기원전 341년
제2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26년 ~ 기원전 304년
제3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298년 ~ 기원전 290년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의 위협이 감소하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전쟁기간결과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5년 - 기원전 205년필리포스 5세한니발과 동맹하여 싸웠으나, 로마가 승리함.
로마-시리아 전쟁기원전 192년 - 기원전 188년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를 물리치고 소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음(아파메이아 조약).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00년 - 기원전 196년플라미니누스에 의해 로마가 승리함.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1년 - 기원전 168년안티고노스 왕조가 멸망함.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50년 - 기원전 148년마케도니아 속주가 성립됨.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 제정으로 평민회 입법이 원로원 승인 없이 법률로 제정되면서 평민들의 권익이 크게 신장되어, 사실상 신분 투쟁이 마무리되었다. 이후 귀족과 평민 출신 원로원 의원들로 구성된 신귀족 계층이 약 150여 년간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이끌었다.[71]

기원전 133년 젊은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lex agraria)을 제안하여 유력자들이 과도하게 점유한 공유지를 부분적으로 재분배하고자 했다.[97] 결국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지지자는 자신을 반대하는 원로원 세력에 살해당하여 공화정 사상 최초의 정치 폭력이 발생하였다.[98]

기원전 1세기 로마는 계속되는 내전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의 내전은 로마 공화정에 큰 상처를 남겼다.[104]

카이사르가 죽은 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 정치를 맺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갈등으로 다시 내전이 일어났고,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오랜 내전은 막을 내렸다.[109]

2. 1. 초기

로마는 왕정 시대부터 왕들이 통치해 왔다. 로마 상원에 의해 종신직으로 선출된 마지막 로마 왕은 타르퀴니우스 프루두스였다. 기원전 509년, 그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귀족 여성 루크레티아를 강간한 죄로 로마에서 쫓겨났다.[23] 반신화적인 인물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었고, 왕의 권력은 1년 임기로 선출되는 두 명의 집정관에게 이전되었다. 각 집정관은 거부권la을 통해 자신의 동료를 견제할 수 있었다.[24]

타르퀴니우스는 베이이와 타르퀴니이와의 전쟁, 로마와 클루시움 간의 전쟁 등 여러 차례 왕위를 되찾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23]

기원전 509년,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스페르부스를 몰아내고 로마 공화정을 수립했지만,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초대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자신의 아들 티투스를 포함한 왕정 복고 음모 가담자들을 처형했다. 왕정 추방으로 라틴 동맹 도시들과 에트루리아 도시들과의 동맹은 해소되고 대립 관계가 되었다.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왕은 친족인 에트루리아 도시들로부터 군대를 빌려 로마를 공격했으나, 로마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아 공격을 포기했다. 이후 로마는 에트루리아로부터 배운 기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며 점차 흡수해 나갔다.

2. 1. 1. 건국과 왕정 폐지

로마는 왕정 시대부터 건국 이후로 왕들이 통치해 왔다. 이 왕들은 로마 상원의 남성들에 의해 종신직으로 선출되었다. 마지막 로마 왕은 타르퀴니우스 프루두스였는데, 전통적인 역사에 따르면 그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귀족 여성 루크레티아를 강간한 죄로 기원전 509년 로마에서 쫓겨났다.[23] 전통적으로는 반신화적인 인물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었고, 왕의 권력은 1년 임기로 선출되는 두 명의 집정관에게 이전되었으며, 각 집정관은 거부권la을 통해 자신의 동료를 견제할 수 있었다.[24]

로마의 전통적인 역사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브루투스의 아들들까지 연루된 타르퀴니우스의 음모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 왕위를 되찾으려 시도했다. 여기에는 베이이와 타르퀴니이와의 전쟁과 마지막으로 로마와 클루시움 간의 전쟁이 포함된다. 군주제 복고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23]

기원전 509년,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스페르부스를 몰아내고 로마 공화정을 수립했지만,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우선, 왕을 대신한 집정관(콘술)이 원로원의 의향에 따라 결정되었고, 또한 그 피선거권이 40세 이상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젊은 시민들을 중심으로 타르퀴니우스를 왕위에 복귀시키려는 왕정 복고의 음모가 발생했다. 이는 실패했고, 초대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자신의 아들 티투스를 포함한 음모 가담자들을 처형했다. 라틴 동맹 도시들과 에트루리아 도시들과의 동맹은 이들 도시와 로마 왕과의 동맹이라는 형태였기 때문에, 왕의 추방으로 당연히 동맹은 해소되고, 대립 관계가 되었다.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왕과 그의 아들들은 왕정 복고 계획이 실패한 것을 알고, 친족인 에트루리아 도시들로부터 군대를 빌려 로마를 공격했다. 시내에 살던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를 떠났고, 국력은 저하되었다. 한때, 전임 왕 타르퀴니우스는 도시를 포위했지만, 로마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해 들어가도 희생이 많은 데 비해 얻는 것이 적다고 생각하여 떠나갔다. 그 후, 로마는 에트루리아로부터 배운 기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하여, 점차 그것을 흡수해 나갔다.

2. 1. 2. 신분 투쟁

로마 시민은 파트리키플레브스 두 계급으로 나뉘었는데,[50] 공화정 출범 당시 기득권층인 귀족 계급은 폐쇄적인 신분을 이루었으며,[51] 평민 계급은 이에 반발하며 사회 정의를 요구하게 된다.[52] 초기엔 모든 공직이 오직 귀족들에게만 열려있었고 또한 귀족과 평민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평민들이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로마가 주변국들과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중무장 보병을 구성하였던 로마 평민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므로 로마 평민들의 정치적인 발언권은 점점 높아졌다.

로마가 승리를 거듭하면서 귀족과 평민의 알력은 점점 커져갔는데 그 이유는 전리품의 배분에 있어서 귀족들이 평민들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평민들은 자영농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이 전쟁을 하는 동안 그들의 농지는 황폐화되었고 이를 다시 개간하기 위해서 평민들은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귀족들은 이를 이용해 고리로 돈을 빌려주었으며 이러한 고리와 원금을 갚을 능력이 없는 평민들은 귀족들의 노예가 되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역사서에 따르면 로마 포럼에 어느 노인이 나타났고 그 노인의 초라한 행색에 지나가던 로마 시민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질문하였고 그 노인은 대답하길 전쟁을 수행하며 황폐화 된 경작지를 개간하기 위해 빌린 돈 때문에 노예화되어 수난을 당했다고 설명하였다고 한다. 분노한 로마 시민들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에 집정관은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한 뒤 군단을 편성한 뒤 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다른 동료 집정관은 이 약속을 백지화하였으며 이에 대해 로마 시민들은 분개하여 기원전 471년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철수 투쟁(secessio)을 벌였다. 그들은 평민 자신들만의 민회인 트리부스 평민회를 조직하고 평민 권익의 옹호자 호민관을 선출하였다.[53] 그 밖에 호민관의 보조자인 평민 출신의 조영관 직책도 생겼다.[54]

그때까지 법은 구전으로 전해져서 귀족의 전유물이었는데, 평민이 법의 성문화를 요구하여 기원전 451년에 10인 입법 위원회가 구성되어 로마법의 모체가 된 12표법을 제정했다.[55] 12표법은 형식적으로나마 법의 평등성을 보장하게 되었다.[56]

이외 비슷한 시기에 귀족과 평민 모든 시민이 각자 등재된 트리부스에 따라 투표하는 민회인 트리부스 인민회가 창설되었다.[57] 트리부스 인민회에서 도시 트리부스보다 농촌 트리부스가 더 많아 지주가 더 유리했으나, 과거처럼 귀족들이 혈연적 유대를 통해 민회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57]

기원전 445년경 로마는 대외적으로 심각한 군사 위기에 직면하여, 군대의 주력을 이루는 평민의 지지가 중요해졌으며, 카눌레이우스 법이 통과되어 귀족과 평민이 통혼할 수 있게 되었다.[58] 이로써 유력한 평민은 혈통 귀족과 융합되어 로마의 지배 계층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58]

이후 평민이 최고 정무관직 진출도 요구했는데 타협의 결과로 기원전 445년에서 367년 사이에 집정관 대신 집정관에 준하는 콘슐러 트리뷴(consular tribune) 직책을 두어 평민도 최고 직위에 오를 기회를 주었다.[59] 이 타협안으로서 귀족들의 집정관직 장악을 여전히 보장하는 동시에, 평민들에게 정부의 한 자리를 내주어 군사적 통일을 확보할 수 있었다.[59] 또 그 직후 집정관 대신 인구 조사(census) 등의 업무를 맡는 감찰관직이 설치되었다.[60]

기원전 4세기 초 지난했던 베이(veii) 침공 전쟁과 켈트인(갈리아인)의 로마 점령으로 평민의 권익 신장 추세는 주춤했다.[61] 그러나 이후 귀족과 평민간의 오랜 정치적 투쟁 끝에 귀족들이 평민 지도자들과 타협하여 기원전 376년에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leges Liviniae Sextiae)를 통과시켜 콘슐러 트리뷴 대신 다시 집정관을 선출하며, 두 집정관 중 한 명은 평민 출신에 할당하도록 했다. 또 이탈리아 정복 과정에서 늘어난 공유지를 귀족들이 점유하는데 제약을 두었다.[62]

혈통 귀족들은 자신들의 모든 국정 통제권을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았다.[63] 원래 집정관이 담당하던 재판기능을 담당할 귀족 출신의 법무관직이 설치되었다.[63] 또 이 시기에 도시 로마의 팽창하는 행정 업무를 분담하기 위해 귀족 조영관직도 창설되었다. 그리하여 고대 로마의 정무관직 승진 경로(쿠르수스 호노룸)이 마련되었다.[63]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을 통해 상당한 권익을 확보한 유력한 평민들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귀족들이 독점하던 다른 정무관직에도 진출하게 되었다.[65] 기원전 356년에는 최초의 평민 출신 독재관이 나왔으며, 기원전 351년에는 감찰관직, 기원전 337년에는 법무관직, 기원전 300년에는 신관직도 평민에게 개방되었다.[65] 고위 정무관직을 역임한 평민들이 원로원에 진출하면서, 원로원은 더 이상 혈통 귀족의 배타적인 아성이 아니었다.[65][64] 그 후 기원전 326년에 포이텔리우스법(lex Poetelia Papiria)으로 부채노예제가 폐지되어 빈곤한 평민층이 유력자에 대해 독립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65]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 법(lex Hortensia)은 트리부스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의 재가 없이 전체 시민에 대해 법적 구속력을 가지도록 규정하여 공화정기 신분 투쟁의 종지부를 찍는다.[47]

잇따른 전쟁 속에서 전쟁의 주체가 된 중장보병의 정치적 발언력이 강해지면서, 중장보병 부대를 뒷받침한 플레브스(평민)가 당시 정치를 독점하고 있던 파트리키(귀족)에 대해 자신들의 정치 참여를 요구하게 되었다. 귀족은 점차 평민에게 양보하여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호민관을 설치하고, 십이표법으로 관습법을 명문화했다.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으로 집정관 1명을 플레브스(평민)에서 선출하는 것이 정해졌고,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 법에 의해 트리부스 민회의 결정이 원로원의 승인을 얻지 않고도 로마의 국법이 되는 것이 정해졌다. 이로써 신분 투쟁은 수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 1. 3. 이탈리아 반도 통일

로마는 내부적으로 신분 투쟁을 통해 공화정 체제를 형성하면서, 한편 대외적으로는 계속된 군사 정복을 통해 이탈리아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66]

기원전 493년에 로마는 라티움 지역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카시우스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는다.[66] 카시우스 조약은 로마와 라티움 동맹 간의 군사 협조를 명문화한 것이었는데, 이를 근거로 로마는 수많은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정도로 강한 정치적 입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로마와 라티움 동맹국은 인접 산지 민족들의 침입을 막아냈다.[66] 그 후 로마는 티베리스강 북쪽의 에트루리아의 강력한 도시 베이를 오랜 전쟁 끝에 승리하고 영토를 병합했다.[66]

그러나 기원전 387년 로마는 북쪽에서 내려온 켈트족의 침략으로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제외한 로마 시를 7개월간 점령당해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고, 대외 위신도 실추된다.[67] 그 후 40여 년간 로마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전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기원전 349년에 다시 쳐들어온 켈트인을 무찔렀다.[67]

피로스 왕의 진로.


로마는 기원전 343년부터 약 기원전 290년까지 삼니움과 세 차례의 전쟁을 치러 모두 승리했다.

전쟁명기간
1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43년 ~ 기원전 341년
2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26년 ~ 기원전 304년
3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298년 ~ 기원전 290년



3차 삼니움 전쟁은 삼니움족,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켈트족이 연합하여 로마와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기원전 295년에 벌어진 센티눔 전투는 양측이 통합 10만의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회전이었고, 로마가 이 회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삼니움 전쟁에서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291년까지 삼니움족은 지속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다음 해인 290년에 로마에 굴복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제패하게 된다.

그 사이에 기원전 340년, 로마의 동맹 주도에 불만을 품은 라티움 동맹국이 로마에 대항하여 라티움 전쟁이 일어났으나,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으며 라티움 동맹도 해체되었다.[68] 로마는 동맹을 해체하는 대신 라티움 도시들을 자치 도시로 삼아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주는 동시에 로마에 정치적으로 흡수했다.[69]

로마가 중부 이탈리아반도를 평정하고 마그나 그라이키아(이탈리아 남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자, 이를 우려한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그리스 도시 타렌툼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에게 원조를 요청했다.[70](피로스 전쟁)

기원전 280년에 이탈리아에 상륙한 피로스는 로마군에 상당한 승리를 거두지만, 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피로스의 전사자는 로마군 전사자의 7할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피로스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한다.[70] 로마는 피로스가 없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그들의 패권하에 넣었고, 그리하여 로마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부상했다.[70] 이후 로마는 각지로 향하는 교통망을 정비하여 광역에 걸친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기원전 272년, 남이탈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있던 그리스의 식민 도시 타렌툼을 함락시키고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2. 2. 중기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 제정 이후 평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귀족과 평민 출신의 원로원 신귀족들이 약 150여 년간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이끌었다.[71] 이 시기 로마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시켈리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히스파니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등 광활한 지역을 정복했다. 정복을 통해 얻은 전리품과 영토는 가난한 평민들의 곤궁을 덜어주었고, 귀족 지도자들은 군사적 명예와 정치적 이득을 얻었다.[72]

포에니 전쟁은 로마가 서지중해의 상업 패권을 놓고 기원전 264년부터 카르타고와 100년 이상 벌인 전쟁이다.[73]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의 위협이 감소하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전쟁기간결과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5년 - 기원전 205년필리포스 5세한니발과 동맹하여 싸웠으나, 로마가 승리함.
로마-시리아 전쟁기원전 192년 - 기원전 188년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를 물리치고 소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음(아파메이아 조약).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00년 - 기원전 196년플라미니누스에 의해 로마가 승리함.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1년 - 기원전 168년안티고노스 왕조가 멸망함.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50년 - 기원전 148년마케도니아 속주가 성립됨.


2. 2. 1. 포에니 전쟁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서지중해의 상업 패권을 놓고 기원전 264년부터 카르타고와 100년 이상 전쟁을 벌였다. (\[\[포에니 전쟁]])[73]

포에니 전쟁.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이탈리아반도 사이의 소도시 메시나에서 일어난 용병 소요를 계기로 시작되었다.[73] 로마는 시칠리아를 획득하여 이 땅을 첫 번째 속주로 삼았다.[75] 로마는 해군을 창설하고,[74] 시칠리아, 카르타고와 인근 해역에서 해전과 육전을 거듭했다. 로마군은 '까마귀'라는 가교를 활용해 해전에서 승리했고, 육지에서도 승리하며 아프리카로 진출했지만, 집정관 레굴루스의 경솔함으로 참패했다. 이후 폭풍우로 함선이 파괴되어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카르타고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는 로마 육군 보급선을 약탈하며 성과를 거뒀지만, 로마는 귀족 기부금으로 새 함대를 편성, 기원전 241년 애가테스 섬 해전에서 승리하여 하밀카르를 고립시키고 카르타고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이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며 시작되었다.[79] 한니발은 뛰어난 전략으로 칸나이 전투 등에서 승리했지만, 로마는 지구전법으로 맞섰다.[78] 한니발이 이탈리아반도 남부로 몰린 사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아프리카 원정을 통해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79] 카르타고에 엄격한 강화 내용을 강요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9년 로마 내부의 카르타고 강경파 주도로 시작되어,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파괴되며 끝났다.[80]

2. 2. 2. 지중해 세계 정복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의 위협이 감소하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전쟁기간결과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5년 - 기원전 205년필리포스 5세한니발과 동맹하여 싸웠으나, 로마가 승리함.
로마-시리아 전쟁기원전 192년 - 기원전 188년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를 물리치고 소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음(아파메이아 조약).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00년 - 기원전 196년플라미니누스에 의해 로마가 승리함.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1년 - 기원전 168년안티고노스 왕조가 멸망함.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50년 - 기원전 148년마케도니아 속주가 성립됨.


2. 3. 말기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법으로 평민회 입법이 원로원 승인 없이 법률로 제정되면서 평민들의 권익이 크게 신장되어, 사실상 신분 투쟁이 마무리되었다. 이후 귀족과 평민 출신 원로원 의원들로 구성된 신귀족 계층이 약 150여 년간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이끌었다.[71] 이 시기 로마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시켈리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히스파니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등 광활한 지역을 정복했다. 정복 전쟁의 전리품과 영토는 가난한 평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었고, 귀족 지도자들은 군사적 명성과 정치적 이득을 얻었다.[72]

2. 3. 1. 공화정의 위기

잦은 전쟁과 정복은 로마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탈리아는 14년 동안 전란으로 황폐화되고 전염병이 창궐하여 인구가 격감하였다.[89] 해외 주둔군으로 차출된 장정들은 고향에 다시 정착하기보다는 로마로 흘러들었고, 일부는 재입대하거나 돈벌이를 위해 속주로 가면서 농민의 수는 심각하게 줄었다.[90] 로마의 해외 팽창으로 풍부한 자본과 토지, 노예 노동력이 유입되고 해외 시장이 확대되면서 로마와 이탈리아 귀족의 사유지에서 라티푼디움(대농장)이라는 대규모 자본 집약적 영농이 발달하게 되었다.[91] 한편 도시의 경제 활동이 왕성해지고 농장에서 직업을 잃은 실업자들이 모여 인구가 도시로 급속히 유입되었지만, 일자리는 충분하지 않았고 거주 환경은 열악했으며 범죄율은 높아 도시 빈민들의 불만이 쌓여 공공 질서와 정치 안정에 위협이 되었다.[92]

기원전 133년 젊은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lex agraria)을 제안하여 유력자들이 과도하게 점유한 공유지를 부분적으로 재분배하고자 했다.[97] 이때 그라쿠스는 관례를 무시하고 평민회에 법안을 제출하기에 앞서 원로원의 자문을 구하지 않았으며, 대신 가난한 시민(주로 농촌 출신 빈민)에게 호소하여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엎고 농지법을 강행했다.[98] 결국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지지자는 자신을 반대하는 원로원 세력에 살해당하여 공화정 사상 최초의 정치 폭력이 발생하였다.[98]

기원전 12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선출되어 형의 농지법을 부활시키고 대규모 식민도시를 건설하여 이탈리아의 토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99] 그러나 정적들의 사주를 받은 호민관 드루수스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그라쿠스에 대항했으며,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 선거에서 떨어지고 추종자와 함께 정적들이 동원한 정치 폭력으로 희생되었다.[101]

그라쿠스 형제를 제거했지만, 원로원 귀족의 지위는 독립적인 성향의 정치가들 때문에 더욱 약화되었으며, 원로원 내부도 원로원의 전통적인 역할을 지지하는 벌족파와 민중의 의지를 내세우는 민중파로 분열되었다.[102]

기사 계급 출신의 장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에 군대 복무를 위한 시민의 재산 자격을 철폐하고 무산자들이 군대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102]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들은 국가보다는 자신의 군사령관에게 의지하고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103] 그 이유는 마리우스 때 증명되었듯이 퇴역병이 토지를 지급받기 위해선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써야 했고, 이를 위해서 그들의 군사령관의 정치력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모두 무산자였으므로 토지 배급 문제는 그들의 생존권과 직결된 상황이었다.

2. 3. 2. 내전의 시대

기원전 1세기 로마는 계속되는 내전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의 내전은 로마 공화정에 큰 상처를 남겼다.[104]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술라는 로마로 진격하여 독재관이 되었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104] 그는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하여 공화정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105] 그가 죽은 후 로마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105]

이후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가 제1차 삼두 정치를 맺어 원로원에 맞섰다.[107] 그러나 크라수스가 죽은 후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107]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장악한 카이사르는[107] 종신 독재관이 되었지만, 기원전 44년 공화정을 지지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당했다.[108]

카이사르가 죽은 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 정치를 맺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갈등으로 다시 내전이 일어났고,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오랜 내전은 막을 내렸다.[109]

2. 3. 3. 공화정의 종말

로마의 세계 정복과 확장은 로마의 경제, 사회, 정치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결국 공화정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88]

3. 정치 체제

로마 공화정의 정치 체제는 원로원, 정무관, 민회의 세 기관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28] 시민 전체로 구성된 민회는 정무관을 선출하고, 그 정무관들이 실제 정무를 담당했다. 정무관 출신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막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어, 그 결의나 자문에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정무관 선출에도 원로원의 의향이 일정 부분 반영되었고, 그렇게 선출된 정무관들에 의해 원로원이 구성되었기에 양자는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집정관이며, 그 명령권(임페리움)은 왕의 권력에서 계승된 것이라고도 한다. 임기는 1년이며 2명이 선출되었다. 집정관에 결원이 생기면 보충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새로운 집정관의 임기는 전임자의 것을 승계했다.

원로원은 왕정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여겨지며, 초기에는 귀족(파트리키)뿐이었다. 후에 원로원 의원의 자격은 정무관 경험자로 바뀌었고, 평민(플레브스)에게도 개방되어, 후세에 그러한 평민들은 평민 귀족이라 불렸다. 노빌레스는 그러한 평민 귀족과 파트리키의 총칭이다.

민회에는 쿠리아 민회, 켄투리아 민회, 트리부스 민회(평민회)등 여러 형태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신분 투쟁”이 있었다. 전술의 변화 등에 따라 중요성이 증가하면서도 정치적 발언권이 작았던 플레브스 사이에서는 파트리키에 대한 반발이 축적되었다. 이러한 하층 플레브스의 불만을 배경으로 상층 플레브스는 파트리키로부터 정치 참여에 대한 타협을 얻어내어 파트리키와 일체화하여 노빌레스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494년에 플레브스의 권리 보호를 목적으로 호민관이 만들어져 로마의 정무관의 하나가 되었다. 호민관은 플레브스만이 참여하는 평민회에서 선출되었고, 다른 정무관의 결정이나 결의를 취소할 권리(거부권)를 가졌다. 또한, 호민관의 신체는 불가침으로 여겨졌다.

그 외 특징적인 정무관으로는 비상시에만 선출되는 독재관이 있다. 집정관 2명의 합의에 의해 선출되며, 다른 정무관과 달리 동료 제도를 두지 않고 1명만 임명된다. 다른 정무관의 임기가 1년인 것에 비해 독재관의 임기는 6개월로 짧았고, 비상 사태를 수습한 후 임기 중에 사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재관은 다른 모든 정무관보다 우위에 있었고, 호민관의 거부권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부관으로 마기스터 에퀴툼(기병대장)이 임명되었다.

3. 1. 개요

로마 공화정은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에게 우수한 정치 체제로 칭송받았다. '공화정'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를 번역한 것으로, "공공의 것" 또는 "공동의 부"를 의미한다. 이는 사적인 문제나 재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공적인 문제와 공동 재산을 가리킨다.[23] 이 용어는 로마의 통치 형태를 지칭하게 되었고, 역사적으로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 발전한 로마 공화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은 과두정의 성격을 띠었다. 로마의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귀족들이 통치 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면서도 귀족 계층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갖춘 형태였다.[24]

로마 공화정의 정치 체제는 일반적으로 원로원, 정무관, 민회의 세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진다. 시민 전체로 구성된 민회는 정무관(magistratus)을 선출했고, 선출된 정무관들이 실제 정무를 담당했다. 정무관 출신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막대한 권위를 지녔으며, 원로원의 결의나 자문에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정무관 선출에도 원로원의 의향이 반영되었고, 그렇게 선출된 정무관들에 의해 원로원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양자는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집정관이었으며, 집정관의 명령권(임페리움)은 왕의 권력에서 계승된 것으로 여겨진다. 임기는 1년이었고, 2명이 선출되었다. 집정관에 결원이 생기면 보충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새로운 집정관의 임기는 전임자의 임기를 승계했다.

원로원은 왕정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여겨지며, 초기에는 귀족(파트리키)만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이후 원로원 의원의 자격은 정무관 경험자로 변경되어 평민(플레브스)에게도 개방되었고, 후대에 이러한 평민들은 평민 귀족이라 불렸다. 노빌레스는 그러한 평민 귀족과 파트리키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민회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다. 초기에는 “쿠리아”(curia)라는 단위로 구성된 쿠리아 민회가 있었다. 점차 병제를 기반으로 한 “켄투리아”(centuria)를 단위로 하는 켄투리아 민회가 중심이 되었고, 이후 가장 권위 있는 민회로서 기능을 유지했다. 이 외에도 거주지인 “트리부스”(tribus)를 단위로 하는 트리부스 민회(평민회)도 개최되었으며, 켄투리아 민회에도 일정한 트리부스가 도입되었다.

초기 파트리키의 지배에서 노빌레스의 지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로마에서는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간의 “신분 투쟁”이 있었다고 한다. 전술 변화 등에 따라 중요성이 커졌지만 정치적 발언권이 작았던 플레브스 사이에서는 파트리키에 대한 반발이 쌓였다. 이러한 하층 플레브스의 불만을 배경으로 상층 플레브스는 파트리키로부터 정치 참여에 대한 타협을 얻어내어 파트리키와 일체화되어 노빌레스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494년에 플레브스의 권리 보호를 위해 호민관이 만들어져 로마 정무관 중 하나가 되었다. 호민관은 플레브스만 참여하는 평민회에서 선출되었고, 다른 정무관의 결정이나 결의를 취소할 수 있는 권리(거부권)를 가졌다. 또한 호민관의 신체는 불가침으로 여겨졌다.

그 외 특징적인 정무관으로는 비상시에만 선출되는 독재관이 있다. 독재관은 집정관 2명의 합의로 선출되었으며, 다른 정무관과 달리 동료 제도를 두지 않고 1명만 임명되었다. 다른 정무관의 임기가 1년인 데 비해 독재관의 임기는 6개월로 짧았고, 비상 사태를 해결한 후 임기 중에 사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재관은 다른 모든 정무관보다 우위에 있었고, 호민관의 거부권 대상이 되지 않았다. 부관으로는 마기스터 에퀴툼(기병대장)이 임명되었다.

3. 2. 원로원

왕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초기에도 원로원(senatus)은 순수한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25] 그러나 고위 정무관 역임자들이며 종신직인 원로원 집단은 집단적 권위(auctoritas)를 지녔으며, 재정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26] 원로원은 정무관들이 민회에 상정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충고할 수 있었으며, 정무관의 자문에 대해 '''원로원 결의'''(senatus consultum)를 내렸다.[27] 정체가 발달하고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들이 법률로 규정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 중대한 대내외 정책에 대해 원로원에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영향력은 점차 커졌다.[27]

로마 원로원을 재현한 19세기 프레스코화. 여기서는 공화정 말기의 키케로와 카틸리나를 묘사하고 있다.


원로원의 권위는 원로원 의원들의 존경과 명성에서 비롯되었다.[42] 이러한 존경과 명성은 관례와 풍습뿐만 아니라 원로원 의원들의 능력과 명성에도 기반을 두었다. 원로원은 senatus consultala라고 불리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원로원에서 고위 관리에게 보낸 "자문"이었지만, 실제로 고위 관리들은 대개 이를 따랐다.[43] 중공화기와 로마의 확장 과정을 통해 원로원은 국가 내에서 더욱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전문 지식을 가진 유일한 기관으로서 국가 재정, 고위 관리 임명, 대외 관계 및 군대 배치를 통제하였다. 또한 강력한 종교 기관으로서 징조에 대한 보고를 받고 로마의 대응을 지시했다.[44]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에 착공하여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29년에 완공한 원로원 의사당인 율리아 쿠리아. 코르넬리아 쿠리아를 대체하여 원로원의 회합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본질적으로 강력한 과두정(oligarchy) 지배 체제였다. 원로원의 경우 엄격한 서열 원칙이 있어 토론시 원로원 제1인자(princeps senatus)가 먼저 정견을 밝힌 후에 감찰관, 집정관, 법무관 순으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도록 되어있었다.[45] 때문에 뒤로 갈수록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줄어들어, 서열이 낮은 의원은 투표권 외에는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없었다.[46] 이런 체제에서는 먼저 발언한 서열높은 발언자의 노선에 따라 결론이 내려질 게 분명하였다. 또 서열이 낮은 의원들은 대개 전임 집정관의 후원을 받아 정무관에 올랐기에 이들에 동조해야 했을 가능성이 짙다.[47]

2세기부터 그 특권이 도전받기 시작하면서 원로원은 입법에 대한 관례적인 사전 승인권을 상실했다. 게다가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 살해 사건에서 설정된 선례 이후, 원로원은 senatus consultum ultimumla을 발표할 권한을 주장했다. 이러한 법령은 고위 관리에게 법률에 관계없이 국가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으며, 나중에 법정에서 그러한 조치에 대해 이의가 제기될 경우 원로원이 그 고위 관리를 지지할 의향이 있음을 나타냈다.[48]

원로원 의원들은 대개 검열관에 의해 임명되었는데, 검열관들은 일반적으로 새로 선출된 고위 관리들을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하여 원로원을 부분적으로 선출된 기관으로 만들었다. 지위는 세습되지 않았고 항상 몇몇 새로운 인물들이 있었지만, 전직 고위 관리의 아들들은 자격을 갖춘 고위 관리직에 선출되기가 더 쉬웠다. 비상시에는 원로원 의원을 임명할 목적으로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으며 (칸나이 전투 이후에 그렇게 했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는 카이사르와 제2차 삼두정치의 구성원과 같은 인물들이 이러한 권력을 스스로 장악했다.[22]

3. 3. 민회

로마 시민들은 정무관 선출, 법률 제정, 재판, 전쟁, 외교 등 주요 국사를 직접 결정하기 위해 민회에서 투표를 하였다.[28] 로마의 민회에는 원래 세 가지가 있었다. 씨족과 부족의 중간 단위인 쿠리아 30개로 구성된 쿠리아 민회, 최소 군대 단위인 켄투리아(백인대) 193개로 이루어진 켄투리아 민회, 부족 지역구(트리부스) 35개로 구성된 트리부스 민회가 그것이다.[28] 그러나 신분 투쟁의 결과로 기원전 471년에 평민들만 참여할 수 있는 평민회가 생겨 하나가 더 늘었다.[28]

로마 공화정의 정치 체제는 원로원, 정무관, 민회의 삼두정치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민 전체로 구성된 민회는 정무관을 선출하고, 그 정무관들이 실제 정무를 담당했다.

민회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다. 초기에는 쿠리아 단위로 이루어지는 쿠리아 민회가 있었다. 점차 병제에 기반한 켄투리아를 단위로 하는 켄투리아 민회가 중심이 되어 이후 가장 권위 있는 민회로서 기능을 계속했다. 이 외에도 거주지인 트리부스를 단위로 하는 트리부스 민회(평민회)도 열렸고, 켄투리아 민회에도 일정한 트리부스가 도입되었다.

초기 파트리키의 지배에서 노빌레스의 지배로 바뀌는 과정에서 로마에서는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신분 투쟁이 있었다. 전술 변화 등에 따라 중요성이 증가하면서도 정치적 발언권이 작았던 플레브스 사이에서는 파트리키에 대한 반발이 축적되었다. 이러한 하층 플레브스의 불만을 배경으로 상층 플레브스는 파트리키로부터 정치 참여에 대한 타협을 얻어내어 파트리키와 일체화하여 노빌레스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494년에 플레브스의 권리 보호를 목적으로 호민관이 만들어져 로마의 정무관의 하나가 되었다. 호민관은 플레브스만이 참여하는 평민회에서 선출되었고, 다른 정무관의 결정이나 결의를 취소할 권리(거부권)를 가졌다.

켄투리아 민회는 다른 민회와 마찬가지로 1인 1표제가 아닌 단위 투표제를 시행하였으며, 과반수에 이를 때까지 상류층 켄투리아부터 투표를 하였으므로, 주로 이들이 투표 진로를 결정하다시피 하였다.[46]

또한 민회도 원로원의 귀족에 의해 좌우되었다.[45] 쿠리아 민회는 왕정 시대 이후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하였다.[45]

3. 4. 정무관

Magistratusla인 정무관은 민회에서 선출되어 실제 행정을 담당하는 공직자였다. 정무관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maior potestas'')을 보유하였다.[29] 이들은 자신과 동급이거나 낮은 서열의 정무관이 내린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민관평민 조영관은 예외였다.[23]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집정관이며, 그 명령권(임페리움)은 왕의 권력에서 계승된 것이라고도 한다. 임기는 1년이며 2명이 선출되었다. 집정관에 결원이 생기면 보충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새로운 집정관의 임기는 전임자의 것을 승계했다. 집정관은 민사 및 군사 문제 모두에서 최고 권한을 가졌으며, 로마 시에 있을 때는 로마 정부의 수장이었다. 그들은 상원과 집회를 주재했고, 해외에 있을 때는 각자 군대를 지휘했다. 집정관의 해외 권한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법무관은 민법을 집행했고 속주 군대를 지휘했다. quaestorla은 주로 로마에서는 집정관을, 속주에서는 총독을 보좌했으며, 재정 관련 임무를 맡았다. aedilesla은 로마에서 공공 게임과 공연 관리와 같은 국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선출된 관리였다.

호민관은 평민(플레브스)의 대표로 여겨졌기 때문에 신성불가침이었다. 이들의 신성불가침성은 평민들이 임기 중 호민관을 해치거나 간섭하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서약으로 강화되었다. 호민관을 해치거나, 그의 거부권을 무시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중죄였다. 호민관은 평민회에서 선출되었고, 다른 정무관의 결정이나 결의를 취소할 권리(거부권)를 가졌다.

군사적 비상시에는 독재관이 6개월 임기로 임명되었다. 헌법 정부는 해체되었고 독재관은 국가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임기가 끝나면 헌법 정부가 복원되었다. 독재관은 다른 모든 정무관보다 우위에 있었고, 호민관의 거부권 대상이 되지 않았다. 부관으로 마기스터 에퀴툼(기병대장)이 임명되었다.

검열관은 고대 로마에서 인구 조사를 유지하고, 공공 도덕을 감독하며, 정부 재정의 특정 측면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은 관직자였다.[8] 검열관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어떤 관직자도 그의 결정에 반대할 수 없었고, 그를 계승한 다른 검열관만이 결정을 취소할 수 있었다. 검열관의 공공 도덕 규제는 현대 "검열관"과 "검열"이라는 단어의 기원이다.[9] 인구 조사 중에 그들은 시민을 상원에 등록하거나 상원에서 제명할 수 있었다.

각 공화정 관직은 특정한 헌법상 권한을 가졌다. 각 관직에는 상원에 의해 provinciala(권한 범위)가 할당되었는데, 이는 지리적 영역이나 특정 책임 또는 임무에 적용될 수 있었다. 관직의 권한은 로마 시민(플레브스와 파트리키 모두)에게서 나왔다. 임페리움은 집정관과 법무관 모두에게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군대를 지휘할 권한이었지만, 실제로는 외교와 사법 제도 등 다른 공적 영역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지녔다. 극단적인 경우, 임페리움 권한을 가진 자는 로마 시민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모든 관직은 또한 coercitiola(강제력) 권한을 가졌다. 관직자들은 범죄에 대한 처벌을 부과하여 공공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 권한을 사용했다. 또한 징조를 찾을 권한과 의무를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이 권한은 정치적 반대자를 방해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었다.

관직자 권한에 대한 견제로는 collegala(직무 공동 수행)가 있었다. 각 관직은 적어도 두 명이 동시에 수행했다. 또 다른 견제는 provocatiola였다. 로마에 있는 동안 모든 시민은 provocatiola(초기 형태의 적법 절차)에 의해 강제력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이는 habeas corpusla의 전신이었다. 어떤 관직자가 국가 권한을 시민에게 사용하려 하면, 시민은 호민관에게 관직자의 결정에 대해 항소할 수 있었다. 또한 관직자의 1년 임기가 만료되면, 10년 후에야 다시 그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이는 일부 집정관과 법무관에게 문제를 야기했고, 이들은 때때로 imperiumla을 연장받았다. 사실상 공식적으로 직책을 맡지 않고도 (프로마기스트라테로서) 권한을 유지했다.

4. 사회와 문화

로마 공화정 시대 사람들은 유명한 일곱 언덕이 있는 로마 시를 중심으로 생활했다. 도시에는 극장, 체육관, 술집, 목욕탕, 유곽 등이 있었다.[110] 로마 영토 내 주거 가옥은 소박한 집에서 팔라티누스 언덕의 우아한 궁궐까지 다양했으며, 인구 대다수는 도심의 아파트에 살았다.

로마의 도시에는 포룸과 신전이 있었고, 수도관을 통해 물을 공급받았으며,[111] 포도주올리브유는 해외에서 수입되었다. 지주들은 도시에 거주하며 마름을 통해 농장을 관리했고,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예를 해방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 문화가 유행했지만,[23] 로마의 정신을 약화시킨다는 비판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그리스인 노예 가정 교사가 로마 젊은이들을 가르쳤고, 그리스 조각으로 정원을 꾸몄으며, 로마 요리도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4. 1. 사회 구조

로마의 사회 구조는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12] 초기 로마 사회는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113] 혈연 관계뿐만 아니라 가부장권(patria potestas)이라는 법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114] 가부장(pater familias)은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아내, 자녀, 손자, 노예 등 모든 가족 구성원에 대한 지배권을 가졌다.[115]

노예는 로마 사회의 한 계층으로,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는 존재였다. 노예는 주인의 허락 하에 해방될 수도 있었고, 일부는 스스로 돈을 모아 자유를 얻기도 했다. 노예를 학대하거나 죽이는 행위는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로마 인구의 25% 이상이 노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16][117]

로마 사회는 귀족(파트리키), 평민(플레브스), 노예로 구분되는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평민 중 부유층은 귀족과 함께 신귀족(노빌레스) 계층을 형성하여 상원 의원직을 독점하고 로마 정치를 주도했다.

또한 로마 사회에는 후원자(파트로누스)와 피후원자(클리엔테스) 간의 후원 제도가 존재했다. 후원자는 피후원자에게 경제적, 법적 지원을 제공하고, 피후원자는 후원자에게 정치적 지지와 봉사를 제공하여 사회적 결속과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다.

4. 1. 1. 계층

로마 사회는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크게 귀족(파트리키), 평민(플레브스), 노예로 구분되었다.[116][117]

  • 귀족(파트리키): 초기 로마 공화정에서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를 지배했던 최상위 계층이다. 이들은 '''겐테스(gentes)'''라고 불리는 약 50개의 대가족으로 구성되어, 고위 관직과 사제직을 독점했다. 코르넬리우스 가문, 아에밀리우스 가문, 클라우디우스 가문, 파비우스 가문, 발레리우스 가문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의 권력은 토지 소유와 후원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 평민(플레브스): 로마 시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계층으로, 소작농, 장인, 상인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로마 경제의 중심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권리가 제한되었으나, '세세시오 플레비스(secessio plebis)'라는 파업 투쟁을 통해 점차 권리를 획득했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호민관을 선출했다.

  • 노예: 로마 사회의 최하층으로, 법적으로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 대상이었다. 노예는 전쟁 포로나 노예 시장에서 구매되었으며, 주인은 노예의 생사 여탈권을 가졌다. 일부 노예는 주인에게 봉사하거나 돈을 모아 자유를 얻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평민 중에서도 부유한 이들이 등장하여 귀족과 함께 신귀족(노빌레스) 계층을 형성했다. 이들은 상원 의원직을 독점하며 로마 정치를 주도했다.

4. 1. 2. 가족

초기 로마 사회의 핵심은 가족이었다.[113] 로마의 가족은 혈연 뿐만 아니라 가부장권(patria potestasla)에 따른 법적인 관계이기도 했다.[114] 시민 가족은 가족 중 가장 나이 많은 남성인 pater familiasla(가족의 가장)이 이끌었으며, 그는 법적으로 가족 재산과 모든 가족 구성원에 대한 완전한 권한(patria potestasla)을 행사할 권리가 있었다.[115]

시민권은 법적 보호와 권리를 제공했지만, 로마의 전통적인 도덕 규범을 위반한 시민은 불명예로 선언되어 특정 법적 및 사회적 특권을 박탈당할 수 있었다.[115]

시민 남성과 시민 여성은 결혼하여 가능한 한 많은 자녀를 낳고 가족의 재산과 공적인 지위를 개선하거나 유지해야 했다. 결혼은 정치적 동맹과 사회적 발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파트리키들은 보통 confarreatiola로 알려진 형태로 결혼했는데, 이는 신부를 아버지의 법적 통제(manusla)에서 남편의 통제로 넘기는 것이었다.[115] 파트리키 신분은 출생을 통해서만 상속될 수 있었는데, 데켐비리가 도입했지만 기원전 445년에 폐지된 초기 법은 파트리키와 플레베이 사이의 결혼을 막으려고 했다. 일반 플레베이들 사이에서는, manusla 결혼이 아내가 남편의 법적 권한이 아닌, 부재중인 아버지의 법적 권한 아래에 남는 "자유 결혼"으로 대체될 때까지, 다른 결혼 형태는 유부녀에게 파트리키 여성보다 훨씬 더 큰 자유를 제공했다. 다른 결혼 형태로는 coemptiola("매입에 의한 결혼")과 ususla(부부의 "습관적인 동거"를 통해 인정되는 결혼)이 있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다. 공화정 말기에는 엘리트 계층의 출산율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일부 부유하고 자녀가 없는 시민들은 재산에 대한 남성 상속인을 제공하고 정치적 동맹을 맺기 위해 입양에 의존했다. 입양은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4. 1. 3. 후원 제도

로마 사회는 후원자(파트로누스)와 피후원자(클리엔테스)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관계는 사회적 결속을 다지고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요 가문들의 권력, 특권, 영향력은 그들의 부, 특히 토지 소유, 후원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수많은 의뢰인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후원자는 피후원자에게 경제적, 법적 지원을 제공했고, 피후원자는 후원자에게 정치적 지지와 봉사를 제공했다.

4. 2. 의복

로마인의 기본적인 의복은 튜닉이었다. 남성과 소년은 무릎 길이의 짧은 소매나 민소매 튜닉을 입었고, 여성과 소녀는 발목 길이의 긴 소매 튜닉을 입었다. 옷을 통해 사람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평민이나 노예는 조잡하고 어두운 색 직물로 된 튜닉을 입었으며, 귀족은 리넨이나 흰 양털로 된 투니카를 입었다.[118] 기사 계급이나 정무관은 작은 자주색 장식이 있는 투니카(''angusticlavus'')를, 원로원 의원은 넓고 붉은 줄이 있는 투니카(''tunica laticlavia'')를 입었다.[119][120] 군용 투니카는 민간인 옷보다 더 짧았다.

토가는 로마를 대표하는 의복으로, 남성 시민권의 상징이자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118] 남성 시민은 관습에 따라 등급에 맞는 ''칼케이''(발목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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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흰색이고 부피가 큰 토가는 상원 의원 계급이 착용했다. 고위 관리, 사제, 시민의 자녀는 자주색 테두리가 있는 ''토가 프래텍스타''를 착용할 자격이 있었다. 개선 장군들은 자주색에 금박을 수놓은 토가 픽타를 입었는데, 이는 주피터와 로마의 이전 왕들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었지만, 하루만 착용할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의 관습은 경쟁적인 과시와 억제 시도를 통해, 적어도 동료들 사이의 명목상의 평등을 유지하고 계급적 질투의 잠재적 위협을 줄이려고 했다.[118]

신발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 귀족은 붉은색 혹은 주황색 샌들을 신었으며, 원로원 의원은 갈색 신발, 집정관은 하얀 구두, 병사는 무거운 장화를 신었다. 여성의 스톨라(stola)는 토가와 차이가 있으며, 보통 밝은 색이었다. 로마인들은 병사들이 북방 국경에서 쓸 수 있도록 양말을 만들었으며, 때론 샌들에 양말을 신기도 했다.[121]

대부분의 로마 시민, 특히 하층민인 플레브스들은 튜닉과 망토와 같은 더 편안하고 실용적인 의복을 선택했다. 사치스럽고 색깔이 화려한 의복은 항상 여유 있는 계층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7세기 초부터 금실(라메)에 대한 물질적 증거가 있다.[119] 3세기가 되자 상당량의 생사가 중국에서 수입되었다.[120] 준성스러운 색깔인 티레의 자주색은 공식적으로 ''토가 프래텍스타''의 테두리와 진한 자주색 ''토가 픽타''에만 사용되었다.[121]

대부분의 로마인들에게 있어, 가장 싼 아마나 모직 의류조차도 큰 지출을 의미했다. 낡은 옷은 사회적 계층을 따라 내려가 넝마가 될 때까지 전해졌고, 이것들은 누비옷으로 사용되었다. 모직과 아마는 로마 의복의 주류였으며, 도덕가들에 의해 단순하고 검소한 것으로 이상화되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모직의 준비와 직조는 가족 사용 또는 판매를 위한 일상적인 집안일의 일부였다. 전통적인 부유한 가정에서는 가족의 방추와 베틀이 반공공적인 접견실(''아트리움'')에 놓여 있어, 가장(家長)과 그의 가족이 자신의 근면성과 검소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는 실제적 필요성보다는 그들의 계층에게 상징적이고 도덕적인 활동이었다.

공화정이 계속됨에 따라 무역, 영토, 부가 증가했다. 로마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계급 기반의 의복 구별의 침식과 모든 계층에서 사치스러운 직물과 이국적인 "외국" 스타일을 향한 로마인들의 갈증을 비난했다. 공화정 말기에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인 카토 소는 튜닉이나 신발 없이 "짧은" 어두운 모직 토가를 입음으로써 동료들의 방종과 공화정의 "남성적인 미덕"의 상실을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4. 3. 음식

로마의 음식은 단순했다. 주식은 밀가루죽, 빵, 샐러드, 치즈, 과일, 땅콩 등으로 간소했으며 대개 오전 11시쯤에 아침을 먹었고, 밤이 되기 전에 저녁을 먹었다.[122] 로마인들은 고기를 즐겨먹지 않았고, 생선이나 치즈, 우유로 단백질을 보충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로마인이 좋아한 음식인 올리브를 자신의 식사로 언급하며 "나는 올리브, 상추(endive), 부드러운 맬로(mallow)로 먹고 산다."라고 하였다.[122] 가족은 함께 식탁에 모여 식사를 했다. 딱딱한 음식은 손가락으로 집어 먹고, 숟가락은 수프를 먹는데 썼다.

포도주는 일상적인 음료였으며,[123] 계층을 막론하고 매끼마다 또 때때로 마셨으며, 값도 쌌다. 대 카토는 일꾼들이 마실 포도주를 비축하기 위해 식량을 절반으로 줄이도록 권하기도 했다.[124] 포도와 꿀로 만든 여러 가지 술도 있었다. 빈속에 술을 마시는 일은 촌스러우며, 알코올 중독의 확실한 징후로 여겨졌다. 로마인들은 알코올 중독이 심신을 쇠약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판에서 알코올 중독은 정적에게 망신을 주는 좋은 비난거리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125], 키케로의 아들 마르쿠스는 알코올 중독이었으며, 소 카토도 대주가였다고 한다.

초기 공화정 시대에는 주식(케나)이 기본적으로 ''풀스''라는 일종의 이었다.[122] 가장 간단한 종류는 엠머 밀, 물, 소금, 기름으로 만들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보통 ''풀스''에 달걀, 치즈, 꿀을 넣어 먹었고, 때때로 고기생선과 함께 먹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가 진행됨에 따라 ''케나''는 두 가지 코스로 발전했는데, 주요 코스와 과일과 해산물(예: 연체동물, 새우)이 포함된 디저트였다. 후기 공화정 시대에는 식사가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채 요리(''구스타티오''), 주요 코스(''프리메 멘사에''), 디저트(''세쿤데 멘사에'')였다.

중후기 공화정 시대에는 포도주가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점점 늘었다. 고대 로마에서 포도주는 일반적으로 마시기 직전에 물과 섞어 마셨는데, 발효 과정이 제어되지 않았고 알코올 도수가 높았기 때문이다. 신 포도주에 물과 허브(''포스카'')를 섞은 음료는 하층민에게 인기 있는 음료였고, 로마 군인의 식량 배급의 주요 부분이었다.[122] 맥주(''세레비시아'')는 알려져 있었지만 저속한 것으로 여겨졌고, 야만인과 관련이 있었다.

기원전 123년부터 ''프루멘타티오''로 알려진 곡물(최대 33kg)이 로마 국가에 의해 매달 최대 20만 명에게 배포되었다.

4. 4. 교육

로마의 교육은 그리스 동방 정복 이후 그리스 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26] 초기에는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교육했다. 남자아이들은 시민과 군인으로서의 삶을 위해 체력 훈련을 받았고, 여자아이들은 어머니에게서 뜨개질, 베틀질, 바느질을 배웠다.[23]

기원전 200년경부터 공식적인 학교 교육이 시작되었다. 6세부터 6~7년간 읽기, 쓰기, 셈하기를 배웠고, 12세가 되면 라틴어, 그리스어, 문법, 문학을 배우고 연설 훈련을 받았다. 웅변과 훌륭한 라틴어 구사는 법률이나 정치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술로 여겨져 엘리트 계층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127]

4. 5. 종교

로마의 신앙은 기원전 800년경 로마 건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화정기와 제정 초기 로마에서 널리 숭배되던 신앙은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접하여 여러 그리스의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개인 신앙도 중요했는데, 어떤 점에서는 가정이 제각각 하나의 신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각 가정에는 제단(lararium)이 있었고, 여기서 가족들이 기도를 하고 의식을 치르며, 가정의 신과 교감했다.[132] 로마인이 숭배한 상당수의 신은 원시 인도-유럽 신에서 나온 것이며, 나머지는 그리스 신에 기반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두 신으로는 유피테르(신들의 왕)와 마르스(군신)가 있다. 로마의 문화적 영향력이 지중해 전역으로 퍼지면서 로마인들은 견유학파나 스토아 학파와 같은 철학 사상과 더불어 외국의 신들도 받아들이게 된다.[132]

로마인들은 자연 세계와 인간의 일을 지배하는 무수한 신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로마 국가의 안녕은 조짐, 점복술, 신탁, 조짐의 해석에 능숙한 사제와 마법사들이 분별할 수 있는 의견과 의지를 가진 국가 신들에 달려 있었다. 신들은 조짐(비정상적이거나 변칙적인 현상)을 통해 분노(''신들의 분노'')를 전달한다고 생각되었다.

개인, 직업, 장소마다 자신을 보호하는 수호신이 있거나 여러 개가 있었다. 각각은 특정하고 매우 규범적인 형태의 기도와 희생과 관련이 있었다. 경건(pietas|피에타스la)은 그러한 행위를 정확하고 성실하며 시의 적절하게 수행하는 것이었다. 각 로마 가정의 안녕은 그들의 라레스와 페나테스(수호신 또는 영혼), 조상, 그리고 그 ''파테르 파밀리아스''에 구현된 신성한 생식 본질에 대한 매일의 숭배에 달려 있다고 생각되었다. 종교적 책임을 소홀히 한 가족은 번영을 기대할 수 없었다.[132]

로마 종교 당국은 자연법이나 신법을 위반하거나 ''모스 마이오룸''(대략 "조상의 방식")을 훼손하지 않는 한 개인적인 신념이나 사적으로 후원되는 종교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았다. 신들과 필멸자들 사이의 관계는 냉정하고 계약적이며 상호 이익이 되어야 했다. 초라한 아첨, 과도한 열정(''슈퍼스티시오'') 및 비밀스러운 관행은 "약한 마음"이고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웠다.[132] 마법 행위는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신들의 의지를 훼손하려는 시도로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모든 계급에서 흔했을 것이다. 로마의 정치적, 사제적 계급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적 종교 조직은 상원의 조사를 받았고 사제단의 자문을 받았다. 공화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종교적 탄압은 그리스 포도주 신인 바쿠스에 대한 광범위하고 비공식적이며 열정적인 종교인 바카날리아였다. 종교 조직은 맹렬하게 탄압되었고, 그 신은 로마의 포도주 신인 리베르에 대한 공식 종교에 흡수되었다.[132] 외국 신들과 관습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 채택, 감독은 왕조 시대 이후 로마의 영토 확장과 지배에서 중요한 통일적 특징이었다.[132]

4. 6. 예술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미술이 로마로 들어와 인기를 얻었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로마의 여러 가정을 장식했다.[129] 이 시기 사람 흉상[129]은 젊고 고전적인 비례를 따랐으며, 이후 사실주의와 이상주의가 섞이게 된다. 로마의 승리를 묘사하는 부조에서도 발전이 있었다.

3세기에 전리품으로 얻은 그리스 미술이 유행하면서 많은 로마 가정이 그리스 예술가들이 그린 풍경화로 장식되었다.

4. 6. 1. 문학

로마의 문학은 초기부터 그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초기의 작품들은 초기 로마의 전쟁사를 다룬 서사시였다. 로마가 팽창하면서 작가들은 시, 희극, 역사,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서사시의 절정을 보여주는데, 그의 작품 '아이네이스'는 트로이아에서 아이네이아스가 도주하여 로마 건국의 기원을 이루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시를 통해 과학을 설명하고자 했다. 로마에서는 풍자시가 일반적이었는데, 유베날리스나 페르시우스같은 작가들이 풍자시를 썼다. 키케로의 수사학 작품은 고대의 훌륭한 서간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비극과 희극을 썼는데, 공화정 중반부터 로마 작가들은 그리스 모델을 따라 자유시와 운문 형식의 희곡 및 기타 라틴어 작품을 제작했다. 온전히 남아 있는 가장 초기 라틴 작품은 공화정 중반에 쓰인 플라우투스의 희극이다. 잘 알려진 인기 극작가의 작품은 종교 축제에서 공연을 위해 의뢰되었는데, 이들 중 많은 작품은 그리스 모델과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사티로스극이었다. 시인 나에비우스는 최초의 로마 서사시를 쓴 것으로 여겨지지만, 엔니우스는 각색된 라틴 육보로 서사시를 쓴 최초의 로마 시인이었다. 그러나 엔니우스의 서사시 ''안날레스''는 단편만 남아 있지만, 나에비우스와 엔니우스 모두 후대 라틴 서사시,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영향을 미쳤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의 원리를 설명했다.

정치가, 시인, 철학자인 키케로의 문학적 업적은 매우 많았고, 당대와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쳐 기원전 83년부터 기원전 43년까지의 시대를 "키케로 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의 웅변술은 현대 연설가들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의 철학적 저술, 특히 키케로가 그리스 플라톤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 작품을 라틴어로 각색한 작품은 후대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 이 시대의 다른 저명한 작가로는 문법학자이자 종교사가인 바로, 정치가이자 장군이자 군사 평론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사가 살루스투스, 연애 시인 카툴루스가 있다.

4. 6. 2. 미술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미술이 로마로 들어와 인기를 얻었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로마의 여러 가정을 장식했다.[129] 이 시기의 사람 흉상[129]은 젊고 고전적인 비례를 따랐으며, 나중에는 사실주의와 이상주의가 섞이게 된다. 로마의 승리를 묘사하는 부조에서도 발전을 보인다.

3세기에 전리품으로 얻은 그리스 미술이 유행하면서 많은 로마 가정이 그리스 예술가들이 그린 풍경화로 장식되었다.

4. 6. 3. 건축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시의 요구 사항이 변화함에 따라 로마 건축은 변형되었고, 토목 공학과 건축 기술은 발전하고 정교해졌다. 도시의 부와 높은 인구 밀도와 같은 요인으로 고대 로마인들은 독자적인 새로운 건축 솔루션을 발견해야 했다. 둥근 천장과 아치를 사용하고 건축 자재에 대한 뛰어난 지식을 바탕으로 공공 사용을 위한 인상적인 인프라 건설에서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로마 공화정의 가장 중요한 도시들에서 더 작은 규모로 재현되었다. 제국의 행정 구조와 부는 주요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매우 큰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했다.[16]

4. 7. 오락

로마 시에는 마르스 광장이라는 벌판이 있었는데, 젊은이들이 모여 뛰기, 레슬링, 권투, 달리기 등을 하며 놀거나 운동을 했다.[131] 승마, 던지기, 수영도 인기 있는 체육이었다.[131] 시골에서는 낚시사냥도 즐겼다.[131] 보드 게임으로는 로마식 체스인 라트룬쿨리, 로마식 체커인 Calculi, 틱택토와 유사한 Terni Lapilli, 그리고 주사위 놀이로는 백개먼의 조상인 12표 놀이와 타불라(Tabula), 그리고 Tesserae 혹은 Tali라는 게임이 있었다.[131] 그밖에도 전차 경주나 악극 공연 등이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다.[1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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