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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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Nostra aetate)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발표된 가톨릭교회와 비그리스도교의 관계에 대한 선언이다. 이 문서는 가톨릭교회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를 존중하며,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를 증진할 것을 천명한다. 특히 유대교와의 관계 개선을 강조하며, 예수의 재판과 십자가형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선언은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 설립에 영향을 미쳤으며, 반유대주의와 모든 형태의 차별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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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 |
---|---|
개요 | |
유형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 |
제목 |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
원제 | Nostra aetate (노스트라 아에타테) |
선포일 | 1965년 10월 28일 |
교황 | 교황 바오로 6세 |
내용 | |
주제 |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 특히 유대교와의 관계 개선 |
중요성 | 가톨릭교회의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함 |
목표 | 종교 간 이해와 협력 증진 모든 형태의 차별 반대 |
영향 | |
결과 | 가톨릭교회와 다른 종교 간의 대화 활성화 종교 간 관계 개선 노력의 촉진 |
논쟁 | 일부에서는 내용의 해석과 적용에 대한 논쟁이 있음 |
2. 문서의 역사
1963년 선종하기 전, 교황 요한 23세는 전 세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정해진 날짜에 낭독되기를 바라는 성명을 작성했다. 이 성명은 유대인에 대한 교회의 오랜 편견을 반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세월의 무지가 우리 눈을 가려 더 이상 주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고,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의 특권적인 형제들의 특징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카인의 표식이 우리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수세기 동안 우리의 형제 아벨은 우리가 흘린 피, 잊음으로써 야기된 눈물 속에 누워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 유대인이라는 그들의 이름에 우리가 잘못 붙인 저주를 용서하소서. 그들의 육신 속에서 당신을 두 번째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용서하소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노스트라 에타테''(Nostra aetate)는 가톨릭 교회와 유대교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구상되었다. 그러나 문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쟁이 발생했다. 특히 중동 지역의 주교들을 포함한 일부 주교와 추기경들은 당시 새로 건국된 이스라엘에 대한 비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우구스티누스 베아 추기경은 보다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택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와 모든 비기독교 신앙 사이의 에큐메니즘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문서의 범위를 확장하여 논쟁의 소지를 줄이고자 했다. 그 결과, 최종 문서에는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간략한 언급과 함께, 이슬람교와 유대교에 대한 내용이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최종 선언문이 채택되기까지 여러 차례의 초안 수정 과정이 있었다. 주요 초안들의 제목과 작성 시기, 작성 주체는 다음과 같다.
제목 | 날짜 | 작성자 |
---|---|---|
유대인에 관한 교령 (Decretum de Iudaeis) | 1961년 11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가톨릭 신자들의 비그리스도교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 1963년 11월 8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에큐메니즘에 관한 선언"에 대한 부록 '유대인에 관하여' | 1964년 3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유대인과 비그리스도교인에 관하여 | 1964년 9월 1일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조정 위원회 작성 |
교회의 비그리스도교 종교에 대한 관계에 관한 선언 | 1964년 11월 18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제4항에 대한 수정 | 1965년 3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2. 1. 공의회 이전: ''유대인에 관한 교령''(Decretum de Iudaeis), 1960-1962

''노스트라 에타테''의 구체적인 기원은 1960년 6월 13일 교황 요한 23세와 유대계 프랑스인 역사학자 쥘 아이작의 만남에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있다.[24][10] 아이작은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고려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의 관계를 특별히 다루는 문서가 마련되기를 희망했다. 아이작은 요한 23세와의 만남에서, 트렌토 공의회 교리서 제4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인류의 원죄와 역사 속 모든 악행에 돌리고 있음을 언급하며, 교황청이 유대인 신살해 개념(아이작은 이를 그리스도교 반유대주의의 주요 원인으로 보았다)과 거리를 두는 성명을 발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4]
요한 23세는 전임 교황들보다 이러한 제안에 훨씬 호의적이었다. 그는 이전에 터키 주재 교황 대사로 활동하며 유대인 공동체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1958년 교황 즉위 이후 '세상에 대한 개방'(이른바 ''giovanissimo'')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24] 그는 이미 1959년에 성금요일 유대인을 위한 기도에서 유대인을 '불신자'(perfidis|믿음이 없는la)로 지칭하는 표현을 삭제한 바 있다.[15]
프랑스 태생의 유대인인 아이작은 십 대 시절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며 유대 민족 및 종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좌익 성향의 CVIA에 참여했으며, 전쟁 후에는 야코브 카플란, 에드몽 플레그 등과 함께 1948년 ''프랑스 유대-그리스도교 우정''을 창설했다. 이는 1년 전 국제 그리스도교-유대인 협의회의 젤리세르크 회의에 이은 것으로, 아이작은 이 회의에서도 주요 연사로 참여했다. 그는 ''예수와 이스라엘''(1946), ''반유대주의의 기원''(1948), ''경멸의 가르침''(1962) 등의 저서를 통해 "가장 위험한 형태의 반유대주의는 그리스도교 반유대주의"이며, 이는 복음서의 그리스도의 수난 기록에서부터 교회 교부들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는 뿌리 깊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아이작은 그리스도교가 랍비 유대교를 열등하거나 거부하는 '경멸의 가르침'을 교리에서 제거하고 유대인과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1] 반면, 프랑스 귀족이자 가톨릭 비평가인 레옹 드 퐁생은 아이작의 주장이 할라카 문학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대나 탈무드 속 예수, 마라노스 문제, 반기독교 혁명 운동에 유대인이 연루되었다는 비난 등 역사적 논란을 외면한 편향된 시각이며, 가톨릭 교회를 부당하게 비방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12][13][14]

요한 23세는 아이작과의 만남 며칠 전인 1960년 6월 5일,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국 (SECU)을 창설했다.[31] 이 기구는 독일 예수회 사제인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이 의장을, 네덜란드 성직자인 요하네스 빌레브란트 주교가 비서를 맡았다.[31] SECU는 본래 가톨릭 교회와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 간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1960년 11월 첫 전체 회의에서 가톨릭-유대교 관계에 대한 검토라는 두 번째 공식 임무를 부여받았다.[31] 베아 추기경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의견을 구했으며, 세계 유대인 회의 (WJC) 회장 나훔 골드만과 접촉했다. 골드만은 WJC가 협력에 열려 있지만, 정통 유대교 내에서는 신학적 이유와 더불어 자신들의 핵심 교리("선택받은 백성" 주장 등) 변경 압력에 대한 우려로 반대 의견이 있음을 설명했다.[31]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교황청과 교리 위원회의 보수파(예: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 세바스티안 트롬프 신부)는 종교적 무관심주의가 가톨릭 교리에 위협이 된다며 SECU의 활동에 반대했다.[31]
로마 교황청 내 보수파가 신학적 이유로 반대한 반면, 아랍 세계(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인 모두)는 아랍-이스라엘 분쟁과 관련된 정치적 이유로 우려를 표명했다.[15] 특히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끌던 이집트는 바티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카이로에 본부를 둔 ''아랍의 목소리'' 방송은 이를 "팔레스타인 난민 억압을 심화시키려는 시온주의 음모"라고 비난했다.[15] 레바논과 이집트 대사관은 바티칸에 공식적으로 항의했다.[15] 그럼에도 요한 23세는 베아 추기경에게 문서 작업을 계속하도록 지시했다. 베아는 1961년 로마에서 미국 유대인 위원회 (AJC)의 랄프 프리드먼과 자카리아 슈스터를 만나 가톨릭 교과서와 전례의 반유대주의적 요소에 대한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AJC는 "가톨릭 가르침 속 유대인의 이미지"와 "가톨릭 전례 속 반유대주의적 요소"라는 두 문서를 제출하여 교회 가르침과 관행의 변화를 제안했다.[17][18][16] 베아는 또한 1961년 11월 미국 유대교 신학원의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 및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만나 새로운 교회 접근 방식을 논의했다.[16]
교황청 보수파와 아랍 기독교인들은 중동의 기독교인 안전 문제를 제기하며 다른 접근 방식을 주장했다.[15] 그들은 중동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되며, 유대교와의 접촉이 이스라엘 국가 승인으로 비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유대교만 다루는 대신 비기독교 종교 전반에 대한 성명을 준비하고 공의회를 1965년 이후로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 그러나 요한 23세는 오히려 계획을 앞당겨 다음 해에 공의회를 소집하고 유대교-가톨릭 관계 문서를 중앙 준비 위원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15] 미국 유대계 잡지 ''코멘터리 매거진''은 1965년 기사에서 요한 23세가 공의회 이후 유대인 관계를 위한 영구 사무국 설치를 계획했으며, SECU 자체도 영구 기구로 만들고 비기독교 자문 위원들의 공의회 참여를 허용할 의도였다고 주장했다.[15]

베아 추기경 아래에서 문서 초안 작업에는 존 M. 오스터라이셔, 그레고리 바움, 레오 루돌프, 조르주 타바르 등 4명의 성직자가 참여했다.[19] 특히 오스터라이셔는 독일 신학자 카를 티메와의 교류를 통해 지적인 영향을 받았다.[19] 이 그룹은 뉴저지의 세톤 홀 대학교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유대인에 관한 질문"(Questiones de Iudaeisla)이라는 연구 문서를 작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스터라이셔가 주도하여 "유대인에 관한 교령"(Decretum de Iudaeisla) 초안을 1961년 11월에 완성했다.[19]
이 초안은 4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었다.[21] 첫 문단은 예수 탄생 이전 족장들과 이스라엘 예언자들, 그리고 아브라함과 신의 고대 언약을 잇는 교회의 영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큰 논란은 없었다. 다만 보수파는 고대 언약 유대교와 현대 탈무드 중심의 랍비 유대교의 연관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논란의 핵심은 ''로마서 11장''에 대한 혁신적인 해석이었다. 초안은 이 구절을 근거로 "이 백성은 조상들과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에 매우 사랑받고 있으므로 이 백성을 저주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교부들과 교회 박사들이 강조해 온 마태복음 27장의 혈액 저주와는 대조적인 입장이었다. 또한 ''로마서 11장''을 인용하여 유대인과 교회의 최종적인 결합이라는 그리스도교 종말론적 주제를 다루었다.[22]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가톨릭-유대교 대화의 선구자이자 게르트루트 룩너의 ''프라이부르거 룬트브리프'' 기고자였던 카를 티메에 의해 발전된 것이었다.[22] 존 코넬리에 따르면, 오스터라이셔는 티메가 1954년 에큐메니컬 회의를 위해 제시했던 ''로마서 11장'' 해석(티메는 카를 바르트의 영향을, 바르트는 모세 마이모니데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함)을 초안에 직접 반영했다.[22] 초안의 마지막 문단은 "이 백성을 멸시하거나 박해하는 사람은 가톨릭 교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라고 명시했다.[21]
한편, 가톨릭 교회가 유대교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도록 하는 외부 압력도 거세졌다. 1961년 12월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 (WCC)는 "십자가형으로 이어진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20] 논쟁은 더욱 격화되어, 이집트 언론 ''알 곰후리아''는 베아 추기경의 조상 이름이 "베하르"이며 유대계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문서 작성에 참여한 오스터라이셔와 바움이 실제로 확인된 유대계 개종자라는 사실도 소위 "반시온주의 음모"의 증거로 부각되었다.
1962년 6월, 세계 유대인 회의는 이스라엘 종무부 고문인 차임 와르디 박사를 공의회의 "비공식 유대인 옵서버"로 자체 임명했고, 골다 메이어 내각의 이스라엘 외무부도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31] "와르디 사건"으로 알려진 이 일은 바티칸에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요한 23세는 문서가 정치적 함의 없이 우호적인 종교 관계 증진을 목표로 한다고 해명했지만,[23][24] 와르디 "임명" 5일 만에 중앙 준비 위원회 비서이자 외교 문제에 민감했던 국무원장 추기경 아멜레토 조반니 치코냐니는 ''Decretum de Iudaeis'' 스키마를 공의회 의제에서 삭제했다.[23]
유대인 관련 문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1차 회기 의제에서 제외되었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주교들은 아킬레 리에나르 추기경의 주도로 공의회 초반부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유대인 문서의 가능성은 여전히 논쟁거리였다. 1962년 10월 공의회가 시작되자, 모리스 피네이라는 가명으로 작성된 ''Il Complotto contro la Chiesa'' ("교회에 대한 음모")라는 문서가 참석자들에게 익명으로 배포되었다.[17][15] 이집트와 북부 이탈리아 일부 세력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고 알려진 이 문서의 정확한 저자는 불분명하며,[15] 일부에서는 멕시코 출신 사제 호아킨 사엔스 이 아리아가의 연루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문서는 8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유대교가 지난 1900년간 그리스도교와 가톨릭 교회를 전복시키려 했으며, 모든 주요 이단과 프리메이슨, 공산주의 같은 "적"들의 배후에 "사탄의 회당"이 있다고 주장하며 공의회 교부들에게 경계를 촉구했다.[25]
제목 | 날짜 | 작성자 |
---|---|---|
유대인에 관한 교령 (Decretum de Iudaeis) | 1961년 11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가톨릭 신자들의 비그리스도교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 1963년 11월 8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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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항에 대한 수정 | 1965년 3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2. 2. 공의회 제2차 회기, 1962-1963
1963년 선종하기 전, 교황 요한 23세는 전 세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정해진 날짜에 낭독되기를 바라는 성명을 작성했다.>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세월의 무지가 우리 눈을 가려 더 이상 주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고,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의 특권적인 형제들의 특징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카인의 표식이 우리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수세기 동안 우리의 형제 아벨은 우리가 흘린 피, 잊음으로써 야기된 눈물 속에 누워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 유대인이라는 그들의 이름에 우리가 잘못 붙인 저주를 용서하소서. 그들의 육신 속에서 당신을 두 번째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용서하소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Nostra aetate''는 가톨릭 교회와 유대교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되어 있었다. 최종 버전이 채택되기 전까지 이 문서에는 다섯 개의 다른 초안이 있었다. 중동의 주교들을 포함한 일부 주교와 추기경들은 새로 건국된 이스라엘에 대해 비우호적이었기에 반대했다. 아우구스티누스 베아 추기경은 가톨릭 교회와 모든 비기독교 신앙 사이의 에큐메니즘을 강조하는 덜 논쟁적인 문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내용은 간략하지만, 이 문서의 다섯 개 섹션 중 두 개는 이슬람교와 유대교에 할애되었다.
제목 | 날짜 | 작성자 |
---|---|---|
유대인에 관한 교령 (Decretum de Iudaeis) | 1961년 11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가톨릭 신자들의 비그리스도교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 1963년 11월 8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에큐메니즘에 관한 선언"에 대한 부록 '유대인에 관하여' | 1964년 3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유대인과 비그리스도교인에 관하여 | 1964년 9월 1일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조정 위원회 작성 |
교회의 비그리스도교 종교에 대한 관계에 관한 선언 | 1964년 11월 18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제4항에 대한 수정 | 1965년 3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1962년에 베아 추기경과 처음 만난 이후, 1963년 3월 31일 뉴욕의 미국 유대인 위원회(AJC) 본부에서 열린 회의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의 회의가 있었다. 랍비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동안 미국 유대인 위원회를 대표하여 바티칸에 종교적 유대교의 관점을 표명하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그의 제자이자 AJC 랍비인 마크 타넨바움을 통해 베아 추기경과 연락하게 되었다.[26] 보수 유대교와 관련된 헤셸은 또한 유대교 신비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헤셸은 미국 시민권 운동에 참여하여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다. "가톨릭-유대교 관계 개선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미국 유대인 위원회를 위한 그의 각서[27]는 베아 추기경 사무국의 절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26][28][29] 뉴욕 회의에는 베아 추기경의 비서인 요하네스 빌레브란츠 몬시뇰과 로마 프로 데오 대학교 총장인 펠릭스 몰리온 신부도 참석했다.[29] AJC 회의 다음 날 저녁,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베아 추기경을 기리는 만찬이 열렸다. 여기에는 400명 이상의 유대인, 개신교인 및 가톨릭 지도자들이 포함되었다. 헤셸과 베아 추기경 외에도,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 유엔 총회 의장 무하마드 자파룰라 칸, 미국 추기경 리처드 쿠싱과 프란시스 스펠만,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를 비롯한 많은 주요 인물들이 참석했다.[29] 라자르 란다우(Lazare Landau)는 "트리뷴 주이베(Tribune Juive)"에 글을 쓰면서, 비슷한 회의가 프랑스에서 이브 콩가르 신부와 스트라스부르의 "평화를 위한 공동체 센터"("Centre communautaire de le Paix")의 유대인 공동체 사이에서 더 조심스럽게 열렸다고 기록했다.[30]
헤셸과 유대인 측의 주요 목표는 예수 재판과 예수 십자가형과 관련하여 가톨릭이 유대인의 책임을 제시하는 방식을 변경하도록 장려하는 것이었다(때로는 유대인 신살해라고도 함).[29] 또한 유대인 측은 평화적이든 아니든, 유대교인의 기독교 개종을 위한 모든 노력을 중단하기를 원했다.[29] 베아 추기경은 이러한 요구에 매우 공감했으며, 이를 가톨릭 교리 정통성의 틀 안에서 제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공의회를 통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입증되었다.[15][31] 특히 마태복음은 피의 저주를 언급하고 요한복음은 많은 유사한 주제를 언급한다.[15] 게다가, 교도권은 전통적으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를 확언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이후 하느님과의 언약은 오직 기독교인과만 맺어져 있으며,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대체 신학적 관점(조상에 기반한 구약을 대체하며 유대교 의식을 무효화함)을 유지해왔다.[31] 이러한 가르침은 여러 세기에 걸쳐 복음서, 많은 교부, 교회 박사 및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통해 전해졌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아 추기경은 요한 23세의 지지를 받아 제2차 회기에서 이러한 제안된 변경 사항을 추진할 의도였다. 바르디 사건의 좌절 이후, 이제 "가톨릭 신자들이 비그리스도교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태도"라는 제목의 초안이 "일치 운동에 관하여"라는 문서의 네 번째 장으로 통합될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사소한 좌절이었지만, 그 초안의 작성도 베아 추기경 사무국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제안자들에게는 여전히 만족스러웠다.[15]
1963년, 독일 작가 롤프 후흐후트가 쓴 논란이 많은 희곡 ''대리인''(The Deputy)이 발표되었는데, 이는 교황 비오 12세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량 학살에 "무관심"했다는 주장을 대중화했다. 가톨릭 신자들의 감성을 건드린 이 희곡은 비오 12세의 전 고문이었던 조반니 몬티니 밀라노 대주교(훗날 교황 바오로 6세)의 반박을 받았다.[15] 또한, 오스터라이셔는 ''아메리카''에 글을 쓰면서, AJC와 브나이 브리스에 직접 호소하여 이 희곡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도록 촉구했다.[32]
제2차 회기가 시작되기 전인 1963년 6월, 교황 요한 23세가 사망하여 공의회 중간에 1963년 교황 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요한 23세가 사망한 지 수년 후, 그의 이름으로 "유대인을 위한 기도"가 AJC와 관련된 ''코멘터리 매거진''에 게재되면서, 요한 23세가 사망 전에 이 기도를 읽으려고 했지만 교회가 이를 막았다는 소문이 돌았다.[34] 저자 "F. E. 카르투스"는 이 기도에 "우리는 카인의 표식이 우리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우리의 형제 아벨은 우리가 흘린 피에 놓여 있었고, 당신의 사랑을 잊음으로써 흘린 눈물을 흘렸습니다"와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잘못 부착한 저주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을 육신으로 두 번째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34] 언론인 조셉 로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동안 유대인에 대한 논쟁에 관한 1966년 ''룩 매거진'' 기사에서[33] 이 기도가 말라키 마틴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라키 마틴은 베아 추기경 밑에서 일하는 ''페리티''(periti,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가톨릭 계층을 비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수많은 가명으로 자신의 비판을 발표했다.[34] 로디는 "F.E. 카르투스"라는 가명으로 쓰여진 시의적절하고 보수를 받은 1965년 기사 두 개를 지적했는데, 하나는 ''하퍼스 매거진''[35]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유대인 위원회의 잡지 ''코멘터리''였다.[36]
로디는 "푸쉬킨"이라는 가명으로 유대인에 관한 공의회의 실패를 자세히 설명하는 정보가 뉴욕 언론에 유출되었다고 주장했다. 로디는 이 정보 유출의 배후 인물과 "F.E. 카르투스"가 동일인, 즉 "젊은 성직자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베아 추기경을 위해 일하는 아일랜드 출신 예수회 사제...성서 연구소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로디는 정보원의 실제 신원을 밝히지 않기 위해 그를 비유적으로 "티모시 오보일-피츠해리스 신부(Timothy O'Boyle-Fitzharris, S.J.)"라고 지칭했다. 2007년 그의 저서 ''영적 급진주의자: 미국에서의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에서 에드워드 K. 캐플런은 마틴이 공의회 기간 동안 미국 유대인 위원회와 "고귀하고 비천한 동기들을 혼합하여 협력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 [그는] 주로 신학적 문제에 대해 위원회에 조언했지만, 그는 또한 물류적 정보와 제한된 문서의 사본을 제공했다." 이 책에서 마틴이 "포레스트"와 "푸쉬킨"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캐플런은 마이클 세라피안의 ''순례자''(The Pilgrim)가 아브라함 J. 헤셸에 의해 마틴에게 요청되었고, 헤셸은 로저 W. 스트라우스 주니어의 파라, 스트라우스 앤 지루 출판사를 통해 이 책을 출판하도록 주선했다고 인정한다. 이는 공의회에서의 논의에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판되었다. 마틴이 저자임이 밝혀지자, 항의가 발생했고 "책은 출판사에게 상당한 재정적 손실을 입히면서 유통에서 제거되어야 했다." 캐플런은 마지막으로 마틴이 1966년 ''룩 매거진''에 기사를 쓴 조셉 로디의 주요 정보원이었으며, ''오보일-피츠해리스''는 사실 마틴이었다고 말한다. 캐플런은 로디의 기사가 "조직적인 유대교의 압력 없이는 유대인에 관한 공의회 선언이 수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위험할 정도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평가한다.
조반니 몬티니(그는 교황 이름 바오로 6세를 사용)는 1963년 콘클라베에서 공의회를 위한 요한 23세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후보로 등장했다. 교황청의 보수적인 요소는 일데브란도 안토누티 추기경을 지지했고,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적인 요소는 자코모 레르카로 추기경을 제안했지만, 프링스 및 리에나르 추기경의 제안에 따라 몬티니를 선택했다. 몬티니는 유대교를 다루는 베아 추기경의 임무가 갱신되었음을 확인했다.[31]
공의회의 제2차 회기는 1963년 가을에 시작되었다. 1963년 11월 8일까지 "일치 운동" 문서가 "가톨릭 신자들이 비그리스도교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태도"를 포함한 네 번째 장과 "종교 자유에 관하여"라는 다섯 번째 장과 함께 공의회 교부들에게 배포되었을 때, 자유주의자들은 제2차 회기의 다른 분야에서 승리하여 자신감을 얻었다.[15] 그러나 이 장들이 이단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우려한 로마 교황청의 보수적인 요소들은 바오로 6세에게 사적으로 접근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으며, 집단주의자들이 베아 추기경을 사실상의 "제2의 교황"으로 임명했다고 비난했다.[15] 또한 "성경과 전통의 빛에서 본 유대인과 공의회"라는 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는 이 장들이 이단적이라고 주장했다.[32] 게다가, 바오로 6세는 1964년 1월 4일 동예루살렘의 성지 목록 (당시 요르단 왕국이 점령)을 방문하여,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의 분열을 해결하려는 에큐메니컬 목표를 가지고 정교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를 만날 예정이었다.[15] 따라서 교황청의 구성원들은 유대인에 관한 논란이 많은 장을 승인하면 이 노력을 위험에 빠뜨리고, 아랍 세계에 있는 40만 명의 정교회 기독교인(많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 포함)이 로마와의 재통일에 반대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첫 번째에서 세 번째 초안만 고려되었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초안의 검토는 제2차 회기 종료가 임박함에 따라 미뤄졌다.[15] 이 지연 전술이 효과를 발휘했고, 제2차 회기가 문제에 대한 투표 없이 종료되었을 때, 의장이자 추기경인 그레고리오 피에트로 아가자니안은 해당 장들의 미래 검토에 대해 확답을 피했다.[15]
2. 3. 공의회 제3차 회기, 1963-1964
원래 ''Nostra aetate''는 가톨릭 교회와 유대교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출 예정이었다. 1963년 선종하기 전, 교황 요한 23세는 다음과 같은 유대인에 대한 반성의 메시지를 작성했으며, 이는 이후 공의회 논의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세월의 무지가 우리 눈을 가려 더 이상 주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고,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의 특권적인 형제들의 특징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카인의 표식이 우리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수세기 동안 우리의 형제 아벨은 우리가 흘린 피 속에,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잊음으로써 야기된 눈물 속에 누워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그들의 이름에 우리가 잘못 붙인 저주를 용서하소서. 그들의 육신 속에서 당신을 두 번째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용서하소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차 회기(1963-1964년)가 진행되면서 논의의 범위는 확장되었다. 특히 중동 지역 주교들은 새로 건국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우려하여 유대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 반대했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 베아 추기경은 문서를 모든 비기독교 신앙과의 관계로 확장하여 논쟁을 완화하고 에큐메니즘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 결과, 최종 문서 초안들에는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간략한 언급과 함께 이슬람교와 유대교에 대한 내용이 비중 있게 포함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초안이 수정되었다.
제목 | 날짜 | 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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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 관한 교령 (Decretum de Iudaeis) | 1961년 11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가톨릭 신자들의 비그리스도교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 1963년 11월 8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에큐메니즘에 관한 선언"에 대한 부록 '유대인에 관하여' | 1964년 3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유대인과 비그리스도교인에 관하여 | 1964년 9월 1일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조정 위원회 작성 |
교회의 비그리스도교 종교에 대한 관계에 관한 선언 | 1964년 11월 18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제4항에 대한 수정 | 1965년 3월 1일 |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작성 |
회기 초반, 교황 바오로 6세는 동예루살렘 방문 중 유대인의 개종을 희망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32],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막시모스 5세 하킴 대주교로부터 이스라엘 정부의 기독교 정책에 대한 우려를 전달받았다.[32] 이러한 상황 속에서, 특히 미국 주교들과 유대인 단체들은 문서의 핵심 쟁점이었던 '신성모독'(Deicide, 유대인의 예수 살해 책임) 문제의 처리 방향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32][37][38][39][40] 이는 이후 공의회 내에서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2. 3. 1. 치코냐니 추기경의 "중도 노선" 수정

1964년 1월부터 9월 사이, 새로운 초안 문서가 준비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아랍 세계의 정치적 민감성을 고려하여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SECU)에 이슬람교 및 다른 비기독교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을 추가하도록 지시했다.[32] 동시에 보수파의 반발을 의식해 논란이 된 신성모독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삭제하도록 했다. 이는 문서를 주도하던 베아 추기경과 그의 전문가 그룹(''페리티'')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문서의 범위가 비기독교 종교 전반으로 확장될 경우, 보수 성향의 파올로 마렐라 추기경이 이끄는 신설 비기독교인 사무국에서 초안을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32] 결국 베아 추기경은 "신성모독" 용어 삭제에는 동의했으나, 다른 종교 관련 내용 추가 문제는 교황청 내 조정 위원회에 넘기게 되었다.[32]
이에 따라 문서는 교황의 의중을 반영하는 치코냐니 추기경의 조정 위원회로 이관되어 일부 수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추기경들에게는 세부 내용이 잘 공유되지 않았다. 새로운 버전은 초기 초안처럼 기독교가 구약 성경의 예언자, 족장, 언약의 계승자임을 강조하고, 유대인의 궁극적인 가톨릭 개종에 대한 기대를 담았다. 또한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박해를 비난했지만, 신성모독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은 회피했다.[32]
1964년 6월, 신성모독 문제 삭제 사실이 ''뉴욕 타임스'' 등을 통해 외부로 유출되었다.[32] 에드워드 카플란에 따르면, 미국 유대인 위원회(AJC)는 베아 추기경 사무국 내 예수회 사제 말라키 마틴을 통해 내부 정보를 얻고 있었으며, 마틴은 "푸시킨"이라는 가명으로 뉴욕 언론에 정보를 흘렸다.[41][32] 마틴은 "마이클 세라피안"이라는 필명으로 공의회 내부 상황을 비판적으로 다룬 책 ''순례자''를 출판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태도가 홀로코스트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42][43]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지 G. 히긴스 몬시뇰과 쿠싱 추기경의 주선으로 아서 골드버그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 등이 교황 바오로 6세를 면담했다. 헤셸은 신성모독 혐의 거부와 유대인 개종 시도 금지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교황은 동의하지 않았고, 헤셸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상기시키며 타협 불가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32][29]

바오로 6세는 1964년 8월 회칙 ''교회''(Ecclesiam suam)를 통해 상대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비가톨릭 신자들과의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신중한 개혁 노선을 제시했다.[44][32] 그러나 1964년 9월 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차 회기에서 토론된 치코냐니 추기경의 "중간 노선" 개정안은 양측의 불만을 모두 샀다.
보수파를 대변한 팔레르모 대주교 에르네스토 루피니 추기경은 가톨릭 교리의 순수성을 내세우며 문서를 거부했고, 심지어 "탈무드 가르침"[45][46][47]을 언급하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을 "혐오스러운 동물"로 여긴다는 편견 섞인 발언까지 했다.[32][48] 아랍 세계의 가톨릭 지도자들, 예를 들어 이그나티우스 가브리엘 1세 타푸니 추기경, 막시모스 4세 사이그 총대주교, 나스랄라 부트로스 스페르 대주교 등은 문서 자체가 가져올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며 강력히 반대했다. 스페르 대주교는 이 선언이 "아랍 땅에 사는 주교들에게 아랍의 적대감과 어려움만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비판했다.[32]
반면, 라인란트 동맹과 미국 추기경 중심의 개혁 성향 주교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조셉 리터, 앨버트 그레고리 메이어, 프란츠 쾨니히, 아실 리에나르 추기경 등은 치코냐니의 수정안을 거부하고 신성모독 문제에 대한 명확한 거부를 포함한 베아 추기경의 원래 초안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32] 리처드 쿠싱, 자코모 레르카로, 폴-에밀 레제 추기경 등 다른 그룹은 수정안을 받아들이되, 신성모독 문제와 유대인 박해에 대한 명시적 비난을 추가하여 내용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32] 스티븐 알로이시우스 레벤 주교와 패트릭 오보일 대주교는 더 나아가 유대인의 개종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보편적 구원이나 이중 언약 신학과 같은 진보적인 입장을 제시하기도 했다.[32] 영국 존 히넌 추기경 역시 유대 민족 전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강조하며 개혁파를 지지했다.[32] 결국 문서는 70개 이상의 수정 제안과 함께 1964년 9월 29일 SECU로 다시 회부되었다.
이러한 공의회 내 논쟁은 즉각적인 국제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다. 사라 알딘 알비타르 시리아 총리는 이를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이 아랍인에 대항하여 가톨릭 신자를 동원하려는 시도"라고 비난했다.[32] 샤를 아일루 레바논 대통령의 영향력 아래 일부 중동 주교들은 교황에게 "복음서는 유대인의 신살(神殺)을 명확하게 가르친다"며 시오니스트의 개입을 경고하는 전보를 보냈다.[32]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 역시 이집트 정부의 입장을 따라 유사한 우려를 표명했다.[32] 이 문제는 비동맹운동 카이로 회의에서 아랍 국가들 간의 비공개 논의 주제가 되었고,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바오로 6세에게 문서 채택 시 아랍 국가들의 외교적 보복 가능성을 직접 전달했다. 팔레스타인 대표단 또한 이 문서가 시오니즘을 간접적으로 지지한다며 바티칸에 공식 항의했다.[32]
2. 3. 2. 펠리치 추기경의 서한, SECU로의 복귀
1964년 10월 9일, 위기 상황 속에서 추기경 페리클레 펠리치는 베아 추기경에게 두 통의 편지를 전달했다.[48] 이 편지들은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SECU)이 주관하던 핵심 문서인 "종교 자유에 관하여"와 "유대인과 비그리스도교인에 관하여"를 다루고 있었다.[48] 편지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종교 자유에 관한 새로운 텍스트 초안 작성을 원하며, 이 작업에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들을 포함한 혼합된 위원회를 참여시키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기에는 문서에 명백히 반대 입장이었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마이클 브라운 추기경, 도미니코 수도회 총장 아니체토 페르난데스 알론소 신부와 교황이 개인적으로 선호했던 조반니 콜롬보 추기경이 포함되었다.[48] 또한, 유대인 문제는 독립 문서가 아닌, ''스케마 13''의 일부로 편입될 것이며, 이 역시 베아의 사무국과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의 교리 위원회에서 선발된 위원들이 포함된 혼합 위원회에 의해 재작성될 예정이었다.[48] 펠리치 추기경의 이 두 편지는 말라키 마틴에 의해 언론에 유출되어 ''뉴욕 타임스'' 등에 보도되었다.[48][49]라인란트 동맹과 미국 추기경들로 구성된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강력히 반발하여 교황에게 항의 서한을 준비했다. 쾰른의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 주도로 모임이 열렸고, 여러 추기경들이 동참했다. 여기에는 리터, 마이어, 쾨니히, 리에나르, 레르카로 추기경 외에도 칠레의 라울 실바 엔리케스 추기경, 뮌헨의 율리우스 됩프너 추기경, 부르주의 조제프-샤를 레페브르 추기경, 위트레흐트의 베르나르두스 요하네스 알프링크 추기경, 브뤼셀의 레오 요제프 쉬넨스 추기경 등이 포함되었다.[49][50]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조정자 4명 중 3명(그레고리오 피에트로 아가자니안 추기경 제외)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들은 유대인 문서와 종교 자유 문서가 SECU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보수 소수가 이미 투표가 끝난 문서의 내용을 약화시키려 한다는 점에 불만을 표했다. 또한, 교황이 공의회를 3년 연기할 것이라는 소문에 반대하며 추가적인 연기를 원치 않았다. 1964년 11월 13일, 프링스 추기경은 이 서한을 가지고 바오로 6세를 만나 자유주의 공의회 신부들의 우려를 전달했다.[32] 프링스는 교황에게 일방적으로 개입하지 말고 공의회가 정한 절차를 따를 것을 요구했다. 바오로 6세는 우려를 고려하겠다고 답했지만, 급진적인 조치가 일부 지역 가톨릭 신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32]
당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차 회기는 보수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32] 인류의 빛(Lumen gentium)이 통과되어 주교단 단체성과 기혼 부제를 지지했고, 일치 운동(Unitatis redintegratio)은 비가톨릭 신자와의 에큐메니컬 관계 증진과 공동 예배 가능성을 열었다.[32]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모든 은총의 중재자로 선언하려던 독립적인 마리아론 문서는 폐기되고 ''인류의 빛''에 통합되었다. 유대인 문서와 종교 자유 문서 외에도 피임, 산아 제한, 양심적 병역 거부, 군축 등을 다루는 스케마 13이 남아 있어 보수 소수는 여러 전선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32] 같은 날, 제랄도 드 프로엔사 시가우드 대주교가 이끄는 보수 그룹 ''Coetus Internationalis Patrum''은 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들은 아랍권의 정치적 압력 때문에 교황이 유대인 독립 문서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유대인 문제를 ''스케마 13''에 포함시키는 것에도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유대인 문제가 ''스케마 13'' 안에서 통과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였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전술적 실수로 판명되었다.[32]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베아가 이끄는 SECU는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상당히 반영한 새로운 초안을 마련했다. 이 초안에서는 유대인의 개종에 대한 언급이 삭제되었고, "신 살해"(Deicide) 혐의를 비난하는 내용이 다시 포함되었다. 제목은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으로 변경되어 유대인에 대한 직접적인 강조는 줄었지만, 내용은 유지되었다.[32] 베아는 교황의 인도 방문을 앞두고 힌두교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과 '차별' 반대 내용을 추가하여 교황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자 했다. 이 문서는 오타비아니 추기경의 신학 위원회로 보내졌으나, 위원회는 이를 ''스케마 13''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별다른 수정 제안 없이 SECU로 돌려보냈다. 이후 문서는 치코냐니 추기경의 조정 위원회로 넘어갔다.[32] 한편, 이집트 정부는 로마의 보수파를 통해 새 초안 내용을 입수하고 1964년 10월 28일 아랍 기독교 지도자들의 명의로 항의 메모를 준비했다. 문서를 지연시키려던 치코냐니는 이 메모가 먼저 교황에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메모는 로마가 왜 "1억 아랍인보다 천만 유대인" 편을 드냐고 물으며 신 살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동시에 미국의 추기경들( 맥킨타이어 제외)과 라인란트 동맹 출신 공의회 의장들도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32]
미국 추기경들과 미국 언론의 압력, 대다수 공의회 교부들의 지지, 그리고 이집트 측의 점증하는 노골적인 압박은 교황이 새 버전의 문서 인쇄를 지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치코냐니는 제3차 회기 막바지에 8일간 인쇄를 지연시키고, 문서의 세 부분을 분리하여 투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는 가장 논란이 큰 유대교 부분을 따로 다루려는 의도였다.[15] 결국, 가장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두 문서, 즉 ''종교 자유에 관하여''와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에 대한 표결이 연이어 진행되기로 결정되었다. ''종교 자유에 관하여'' 문서는 11월 17일 발표 후 19일 투표,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는 11월 18일 발표 후 20일 투표가 예정되었다.[15]

주요 쟁점은 ''종교 자유에 관하여'' 문서였고,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는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두 문서를 둘러싼 자유주의와 보수 세력의 대립은 격렬했으며, 특히 미국 신학자 존 코트니 머레이가 제시한 원칙에 기반한 ''종교 자유에 관하여'' 텍스트는 미국 추기경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대립은 "검은 목요일" 또는 "폭탄의 날"(la bomba oggiita)로 알려진 사건에서 절정에 달했다.[15] 목요일, 외젠 티세랑 추기경이 ''종교 자유에 관하여'' 문서의 투표가 250명에서 300명이 지연을 원하기 때문에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자 제3차 회기 현장에서 격렬한 소동이 일어났다. 메이어 추기경과 리터 추기경은 공의회 의장석에서 시리 추기경과 루피니 추기경과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였고, 교황청 북미 대학의 학장인 미국 주교 프랜시스 프레데릭 레는 종이를 들고 분노한 주교들 사이에서 탄원서를 돌리기 시작하여 1,500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 미국인들—리터, 메이어, 레제 추기경—은 교황에게 달려가 항의했다. 바오로 6세는 폐쇄 회로 텔레비전을 통해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고, 펠리치 추기경을 불러 질서를 회복하도록 했다. 유능한 웅변가이자 저명한 자유주의 성직자인 에밀 조제프 드 스메트 주교는 연단에 올라 문서 투표가 지연된 이유와 그 책임자를 사실적으로 설명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15]
교황은 ''종교 자유에 관하여'' 문서에 대한 투표를 제4차 회기까지 보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물러설 수 없었다.[15] 그리하여 제3차 회기는 깊은 분열 양상 속에 마지막 투표일로 접어들었고, 자유주의 세력은 깊이 좌절했으며, 냉전 시대 동서 양 진영의 정치적, 외교적, 언론적 공세가 정교일치 국가에 대한 구상과 관련하여 성좌를 겨냥하고 있었다. 참석자들에게 금메달을 수여하고, 총대주교들에게 새로운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발표로 주교들을 달래려는 시도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15] 심지어 유대교 문서에 가장 열렬히 반대했던 로마 교황청 구성원인 루피니 추기경조차 종교 자유 문제에 대해 성좌를 겨냥한 국제적 비난 여론 때문에 마침내 입장을 바꿔, 베아 추기경의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에 대한 투표 진행을 허용했으며, 대신 '더 큰 물고기'였던 ''종교 자유에 관하여'' 문서에 대한 싸움은 성공적으로 다음 회기로 연기시켰다. 결국 여러 종교에 대한 분리 투표 없이 문서 전체가 단일 항목으로 투표에 부쳐졌다. 공의회 아버지들의 압도적인 다수(89%)가 이 문서에 찬성표를 던졌고,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는 제3차 회기 종료 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 문서가 되었다. 문서 자체는 아직 교황에 의해 공포되지 않았으므로 수정의 여지는 남아 있었지만, 이제 공의회에서 제거될 수는 없었다.[15]
2. 3. 3. "검은 목요일", 공의회 교부들의 투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차 회기(1964년) 막바지에 이르러, 공의회 내 보수파와 자유주의파 사이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과 유대인 및 비그리스도교인과의 관계를 다루는 문서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었다.[32] 보수파는 이들 문서의 진보적인 내용을 약화시키거나 통과를 저지하려 시도했다.
1964년 10월 9일, 공의회 사무총장 페리클레 펠리치 추기경은 아우구스티누스 베아 추기경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내, 교황 바오로 6세가 '종교 자유' 문서의 새로운 초안 작성을 원하며, 여기에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같은 보수적인 인사들을 포함한 혼합 위원회를 구성할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48] 또한 유대인 문제는 독립 문서가 아닌, ''스케마 13''(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의 일부로 편입될 것이며, 이 역시 혼합 위원회에서 재작성될 것이라고 전했다.[48] 이 소식은 말라키 마틴에 의해 언론에 유출되어 논란을 증폭시켰다.[48][49]
이에 라인란트 동맹과 미국 추기경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파는 강력히 반발했다.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의 주도로 교황에게 보내는 항의 서한이 준비되었으며, 여기에는 리터, 마이어, 쾨니히, 리에나르, 레르카로 추기경 등과 함께 라울 실바 엔리케스, 율리우스 됩프너, 조제프-샤를 레페브르, 베르나르두스 요하네스 알프링크, 레오 요제프 쉬넨스 추기경 등이 동참했다.[49][50] 이들은 이미 논의가 진행된 문서들을 보수 소수가 약화시키려는 시도에 불만을 표하며, 공의회 절차 존중과 추가적인 연기 반대를 요구했다. 프링스 추기경은 1964년 11월 13일 교황 바오로 6세를 직접 만나 이러한 우려를 전달했다.[32]
한편, 보수 그룹인 ''Coetus Internationalis Patrum''은 유대인 문제를 ''스케마 13''에 포함시키는 것조차 반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오히려 독립 문서로 남겨두는 것보다 통과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를 낳는 전술적 실수가 되었다.[32] 이러한 갈등 속에서 베아 추기경이 이끄는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SECU)은 유대인의 개종 요구를 삭제하고 '신 살해' 혐의 비난을 다시 포함시킨 새 초안을 마련했다.[32] 그러나 암레토 조반니 치코냐니 추기경 등 보수파는 아랍 국가들의 정치적 압력을 이용하며 문서 통과를 지연시키려 했다.[32]
결정적인 대립은 1964년 11월 말에 예정된 두 문서의 투표를 앞두고 벌어졌다. '종교 자유' 문서는 11월 19일,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 문서는 11월 20일에 투표가 예정되었다.[15] 그러나 11월 19일 목요일, 공의회 의장단 소속 외젠 티세랑 추기경이 '종교 자유' 문서에 대한 투표가 연기될 것이라고 발표하자 공의회 회의장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 날은 "검은 목요일"로 불리게 되었다.[15] 메이어 추기경과 리터 추기경은 의장석에서 시리, 루피니 추기경과 공개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미국 주교 프랜시스 프레데릭 레는 분노한 주교들 사이에서 투표 강행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돌려 1,5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미국 추기경들은 즉시 교황에게 달려가 항의했다. 에밀 조제프 드 스메트 주교는 연단에 올라 투표 지연의 부당함을 역설하며 큰 박수를 받았다.[15]
교황 바오로 6세는 '종교 자유' 문서 투표를 다음 회기로 연기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지만,[15] 극심한 반발에 직면하여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 문서에 대한 투표는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허용했다. 보수파의 거두였던 루피니 추기경조차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의식하여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1964년 11월 20일,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 문서는 분리 투표 없이 단일 안건으로 표결에 부쳐졌고, 참석한 공의회 교부들의 압도적인 다수(약 89%)의 지지로 통과되었다.[15] 이로써 문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 문서가 되었으며, 비록 최종 반포 전 수정의 여지는 남았지만 공의회에서 폐기될 가능성은 사라졌다.[15]
2. 4. 공의회 제4차 회기, 1964-1965

원래 ''우리 시대에''(Nostra aetate)는 가톨릭 교회와 유대교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계획되었으나, 이스라엘 건국에 비판적인 중동 주교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아우구스티누스 베아 추기경은 가톨릭 교회와 모든 비기독교 신앙 간의 에큐메니즘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최종 문서에는 다섯 개의 다른 초안이 있었으며,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언급은 간략하지만, 다섯 개 섹션 중 두 개는 이슬람교와 유대교에 할애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차 회기(1964년 11월 21일 종료) 이후, 미국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은 초안 내용에 기뻐했지만, 최종 텍스트는 확정되지 않아 수정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1965년 9월 14일 제4차 회기가 개막되기 전까지 여러 논란이 발생했다. 1965년 2월, 루이지 마리아 카를리 세니 주교이자 보수적인 ''Coetus Internationalis Patrum'' 회원은 자신의 교구 잡지에 기사를 기고하여,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재판과 십자가 처형에 대한 집단적 죄를 지니며 "하느님의 단죄의 심판"을 받았다는 전통적 가르침을 옹호했다.[32] 미국 유대인 위원회(AJC) 회장은 이를 "반유대주의 공격"으로 비난했다.[51][52] 몇 주 후 수난 주일에는 바오로 6세 교황이 로마 미사 설교에서 예수 십자가형 당시 유대인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여 로마의 수석 랍비 엘리오 토아프를 실망시켰다.[32]
또한, 로마 특파원 로버트 C. 도티는 ''뉴욕 타임스''에 교황이 문서를 4명의 교리 "자문관"에게 넘겼다고 보도했으나, 베아 추기경은 이를 부인하며 문서가 여전히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SECU) 소관임을 확인하고 미국 유대인 위원회의 모리스 B. 에이브럼 회장을 만나 오해를 풀려 했다.[32] 그럼에도 1965년 5월 로마에서는 제4항 수정 논의가 진행되어, '예수 살해'(deicide)라는 단어가 영구히 삭제되었고, 교황은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박해를 슬퍼하고, 실제로 규탄한다"는 문구에서 "실제로 규탄한다"는 표현을 제외하도록 제안했다. 이 변경안은 베아 추기경 측근들의 투표를 거쳐 받아들여져 문서의 최종 형태에 반영되었다.[32] 이 과정에서 레바논의 마론파 대통령 샤를 아일루가 교황과 회동했으며, 문서 변경에 대한 소문이 확산되자 바티칸 언론 사무소는 선언문이 변경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는 문서가 폐기될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이로 인해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빌렘 비서 '트 후프트는 유대인 관련 내용이 삭제될 경우 에큐메니즘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유대인 위원회 역시 조지 G. 히긴스 몬시뇰을 통해 우려를 전달했고, 독일 기독교-유대교 협력 사회 조정 위원회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신뢰의 위기"를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32]
이전까지 AJC의 스파이였던 말라치 마틴을 통해 ''뉴욕 타임스'' 등에 정보를 유출하여 문서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던 전략은 더 이상 효과를 보지 못했고, 마틴은 1965년 5-6월경 예수회 사제 서약을 해제받았다. 문서의 최종 형태가 공개되자 유대교 관련 내용이 약화된 것이 드러났다.[32] 1965년 10월, 바오로 6세는 교황 최초로 국제 연합(UN)에서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고 연설했으며, 미국 뉴욕 시 양키 스타디움 미사에서는 요한 복음 20:19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이는 우호적 메시지 전달 의도였으나, 많은 유대인과 진보 가톨릭 신자들에게 오해를 사며 "생각 없는" 설교라는 비판을 받았다.[32][53]
1965년 10월 14일 최종 투표를 앞두고 유대인 및 아랍 로비 단체들은 각자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다. AJC는 문서의 "약화"를 되돌리려 했고, 아랍 측은 가톨릭 주교들에게 "공산주의와 무신론, 그리고 유대-공산주의 동맹"으로부터 신앙을 지켜달라고 촉구했다.[32] 최종안은 AJC와 B'nai B'rith에게 실망스러웠지만, 히긴스 몬시뇰은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편이 낫다고 설득했다.[32] 스티븐 알로이시우스 레벤 주교는 미국 주교들이 새 버전에 반대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었으나, 이는 문서를 완전히 반대하는 아랍 및 보수 측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될 수 있어 포기했다. 베아 추기경조차 문서가 공포될 수만 있다면 '예수 살해' 문제 삭제에 만족하는 입장이었다. 르네 로랑탱 신부의 뒤늦은 탄원도 더 이상의 수정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최종 투표 결과, 찬성 1,763표, 반대 250표로 문서는 통과되었고, 1965년 10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우리 시대에''(Nostra aetate)로 공포되었다.[32]
선언 공포 후, 미국과 유럽 언론은 "바티칸, 유대인을 사면하다"와 같은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내보냈지만, 실제로는 '예수 살해' 문제가 명시적으로 다뤄지지 않고 삭제된 것이었다.[32] 한편, 미국 유대인 위원회와 B'nai B'rith는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도 주요 쟁점들이 삭제되고 문서가 이전보다 약화된 것에 대한 실망감을 표하는 외교적 성명을 발표했다. 랍비 에이브러햄 조슈아 헤셸은 '예수 살해' 문제를 회피한 것을 "사탄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32]
3. 문서의 주요 내용
이 문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선언 중 하나로, 가톨릭교회와 비그리스도교 종교들 간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선언은 인류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 역시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고 인류 공동의 가치와 유대를 증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시작한다.[4]
선언은 힌두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 전통이 인류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을 인정하며,[1][57] 가톨릭 교회가 이러한 종교들 안에 존재하는 "참되고 거룩한 것"을 거부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가르침과 생활 방식을 존중한다고 밝힌다.[54][55] 이는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고, 종교 간 대화를 통해 편견을 극복하려는 교회의 새로운 입장을 보여준다.[59]
특히 이슬람교와 유대교와의 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상호 이해와 협력을 촉구했으며, 유대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유대교적 뿌리를 확인하고 예수의 죽음에 대한 유대인 전체의 책임론을 부정하며 반유대주의를 비난하는 등 관계 개선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59] 또한 성서 연구와 형제적 대화를 통한 상호 존중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선언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며, 인종, 피부색, 생활 조건, 종교 등을 이유로 한 모든 형태의 차별과 박해를 그리스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 명백히 반대한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과의 "대화와 협력"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촉구하며 마무리된다.[56] 이 선언의 정신은 이후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3. 1.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
이 문서는 우선 종교의 심오한 세계를 힌두교, 불교 등의 예를 들면서 언급하고, 이어 로마 가톨릭교회가 다른 종교의 관행을 존중하고 인정한다고 밝히고 있다.[32] 가톨릭 교회는 다른 종교들이 가진 영적, 도덕적, 사회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하며 증진하도록 권고한다.특히 이슬람교와의 관계 개선을 천명하고 있다. 1964년 문서 초안 논의 과정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기독교 일치 촉진 사무국(SECU)에 이슬람교와 다른 비기독교 종교들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을 포함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아랍 세계의 우려를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다.[32]
이러한 선언의 정신은 이후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 설립으로 이어져, 다른 종교와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력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3. 2. 유대교와의 관계
이 선언은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의 관계 개선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동안, 베아 추기경은 유대교와의 관계 개선 논의를 주도했으며, 랍비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미국 유대인 위원회(AJC)를 대표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62년 베아 추기경과 헤셸 랍비의 첫 만남 이후 여러 차례 회의가 이어졌고, 헤셸은 유대교의 입장을 바티칸에 전달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26] 헤셸은 보수 유대교 신학자이자 유대 신비주의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미국 시민권 운동 참여와 베트남 전쟁 반대 등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 그가 AJC를 위해 작성한 "가톨릭-유대교 관계 개선에 관하여"라는 각서는 베아 추기경 사무국의 논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26][28][29]
헤셸과 유대인 측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예수 재판 및 십자가형과 관련하여 가톨릭교회가 유대인 전체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 즉 유대인 신살해 혐의를 수정하는 것이었다.[29] 또한, 유대인에 대한 개종 시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29] 베아 추기경은 이러한 요구에 공감하며 가톨릭 교리의 틀 안에서 이를 수용하려 노력했으나, 마태복음의 피의 저주나 요한복음의 관련 내용, 그리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전통적인 교리 및 대체 신학적 관점 때문에 공의회 내에서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다.[15][31] 이러한 가르침은 오랜 세월 동안 복음서, 교부, 교회 박사,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통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15] 그럼에도 베아 추기경은 요한 23세의 지지 아래 제2차 회기에서 관련 내용을 추진하고자 했다. 초기에는 독립된 문서로 다루려 했으나, 이후 "일치 운동에 관하여" 문서의 네 번째 장으로 통합되었다.[15]
1963년 독일 작가 롤프 후흐후트의 희곡 ''대리인''(The Deputy) 발표는 논란을 더욱 키웠다. 이 희곡은 교황 비오 12세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무관심했다는 주장을 담아 가톨릭계의 반발을 샀다.[15] 당시 밀라노 대주교였던 조반니 몬티니(훗날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를 반박했으며, 오스터라이셔 몬시뇰은 AJC와 브나이 브리스에 희곡 반대 성명을 촉구했다.[32] 1963년 6월 요한 23세의 선종으로 공의회는 잠시 중단되었고, 이후 1963년 교황 선거를 통해 몬티니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 6세로 선출되었다. 그는 요한 23세의 노선을 이어받아 베아 추기경의 임무를 재확인했다.[31] 한편, 요한 23세 사후 그가 유대인을 위한 기도를 하려 했으나 교회가 막았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는 AJC와 관련된 ''코멘터리 매거진''에 실린 기사에서 비롯되었다.[34] 그러나 언론인 조셉 로디는 이 기도가 베아 추기경 밑에서 일했던 말라키 마틴 신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틴은 여러 가명으로 활동하며 가톨릭 교회를 비판했고, 공의회 정보 유출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33][34] 에드워드 K. 캐플런은 그의 저서에서 마틴이 공의회 기간 동안 AJC와 협력하며 정보를 제공했으며, "포레스트", "푸시킨" 등의 가명을 사용했다고 확인했다. 마틴은 헤셸의 요청으로 "마이클 세라피안"이라는 필명으로 ''순례자''(The Pilgrim)라는 책을 출판하여 공의회 논의에 영향을 미치려 했으나, 저자가 밝혀지면서 논란 끝에 회수되었다. 캐플런은 로디의 기사가 마틴의 정보에 기반했으며, 유대인 단체의 압력만으로 선언이 통과되었다는 인상을 주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1963년 가을 공의회 제2차 회기가 시작되자, 유대교 관련 내용을 담은 "일치 운동" 문서의 네 번째 장("가톨릭 신자들이 비그리스도교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태도")과 다섯 번째 장("종교 자유에 관하여")이 배포되었다.[15] 그러나 로마 교황청 내 보수파는 이 내용이 이단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고, 바오로 6세에게 우려를 표명했다.[15] 또한, 교황의 성지 순례 계획과 맞물려, 유대인 관련 선언이 동방 정교회와의 관계 개선 노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아랍 세계의 반발을 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5] 결국 이 문제는 제2차 회기에서 투표 없이 연기되었고, 의장 그레고리오 피에트로 아가자니안 추기경은 향후 논의에 대해 확답을 피했다.[15]
이러한 지연에 대해 미국 주교들(제임스 프란시스 맥킨타이어 추기경 제외)과 AJC, 반명예훼손연맹(ADL) 등 유대인 단체들은 깊은 우려를 표했다.[32] 특히 신성모독 문제에 대해 조셉 리터[37], 앨버트 그레고리 메이어, 리처드 쿠싱[38], 프란시스 스펠만 추기경 등 다수 미국 고위 성직자들이 유대인 입장을 강력히 지지했다.[39][40] 바오로 6세는 성지 순례 중 비오 12세의 기록을 옹호하고 유대인의 개종을 희망하는 발언을 했으며,[32]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막시모스 5세 하킴 대주교로부터 이스라엘 정부의 "탈기독교화 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기도 했다.[32] 이후 AJC 대표단과의 면담에서 바오로 6세는 신성모독 문제에 대한 스펠만 추기경의 입장에 동의 의사를 표하며 희망을 주었다.[32]
1964년 새로운 초안 문서가 준비되면서, 바오로 6세는 아랍권의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이슬람교 등 다른 비기독교 종교에 대한 언급을 추가하고, 논란이 된 "신성모독"(Deicide) 용어를 삭제하도록 지시했다.[32] 이는 베아 추기경 측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만약 비기독교 종교 전반을 다루게 되면, 문서 작성 주도권이 베아의 반대파인 파올로 마렐라 추기경 산하의 비기독교인 사무국으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32] 결국 베아는 "신성모독" 용어 삭제에는 동의했으나, 다른 종교 추가 문제는 아멜레토 조반니 치코냐니 추기경의 조정 위원회에 맡겼다. 조정 위원회는 문서를 재구성하여, 기독교가 구약 성경의 계승자임을 강조하고 유대인의 궁극적인 개종 희망을 유지하면서도,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박해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았다.[32]
그러나 1964년 6월, "신성모독" 문제가 삭제되었다는 내용이 말라키 마틴에 의해 ''뉴욕 타임스'' 등에 유출되면서[41][32] 다시 논란이 불거졌다. AJC는 마틴을 통해 내부 정보를 얻고 있었으며,[41] 마틴은 "마이클 세라피안"이라는 필명으로 공의회를 비판하는 책 ''순례자''를 출판하기도 했다.[42][43] 아서 골드버그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쿠싱 추기경, 헤셸 랍비 등이 바오로 6세를 만나 유대인 측 입장을 전달했으나, 특히 개종 문제와 신성모독 문제 재삽입 요구에 대해 교황과 헤셸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다.[32] 헤셸은 홀로코스트를 언급하며 "개종 아니면 죽음이라면 아우슈비츠를 택하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29]
1964년 9월 제3차 회기에서 바오로 6세-치코냐니 수정안("유대인과 비기독교인에 관하여")이 토론에 부쳐졌다. 이 "중간 노선"은 신성모독 단어를 삭제하고 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을 언급했지만,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보수파를 대표하는 에르네스토 루피니 추기경은 가톨릭 교리의 훼손을 우려하며 문서를 거부하고 "탈무드 가르침"을 경고했으며,[32][45][46][47][48] 아랍권 가톨릭 지도자들(이그나티우스 가브리엘 1세 타푸니 추기경, 막시모스 4세 사이그 총대주교 등)은 선언이 아랍 세계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반대했다.[32] 반면, 라인란트 동맹과 미국 추기경들이 이끄는 자유주의 진영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리터, 메이어, 프란츠 쾨니히, 아킬 리에나르 추기경 등은 바오로 6세-치코냐니 수정안을 거부하고 신성모독 문제 거부를 명시한 베아 추기경의 이전 초안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32] 쿠싱, 자코모 레르카로, 폴-에밀 레제 추기경 등 다른 그룹은 새로운 초안을 수용하되, 신성모독 문제와 유대인 박해에 대한 명시적인 비난을 포함하도록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32] 특히 미국 주교 레벤과 오보일 대주교는 유대인의 개종 희망을 거부하고 보편적 구원과 이중 언약 신학을 옹호하는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보였다.[32] 영국 존 히넌 추기경도 유대 민족 전체에게 그리스도 죽음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밝히며 자유주의 진영을 지지했다.[32] 결국 문서는 70개 이상의 수정 제안과 함께 다시 베아 추기경의 사무국(SECU)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논의는 즉각적인 정치적 반발을 불러왔다. 시리아 총리는 "세계 시오니즘이 아랍인에 대항하여 가톨릭을 동원하려 한다"고 비난했으며,[32] 레바논 대통령은 레반트 주교 10명의 명의로 "복음서는 유대인의 신살을 명확히 가르친다"는 전보를 교황에게 보내도록 했다.[32]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도 유사한 성명을 발표했다.[32] 비동맹운동 카이로 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되었고,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바오로 6세에게 문서 채택 시 아랍 국가의 바티칸 외교 공관 폐쇄 가능성을 경고했다. 팔레스타인 대표단 역시 바티칸에 항의했다.[32]
위기 상황 속에서 1964년 10월, 교황청 내 보수 세력은 유대인 및 종교 자유 관련 문서의 초안 작성 과정을 변경하려 시도했다. 교황청 사무총장 페리클레 펠리치 추기경은 베아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내, 바오로 6세가 이 문서들의 초안 작성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등 보수 성향 인사들이 포함된 혼합 위원회에 맡기려 한다고 통보했다.[48] 이 내용은 말라키 마틴에 의해 다시 언론에 유출되었고,[48][49] 자유주의 진영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을 중심으로 한 라인란트 동맹과 미국 추기경들은 교황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프링스 추기경이 직접 바오로 6세를 만나 공의회 절차 존중을 요구했다.[32][49][50] 바오로 6세는 우려를 고려하겠다고 답했지만, 급진적 조치에 대한 신중론을 폈다.[32]
이러한 갈등 속에서 베아 추기경의 사무국은 유대인의 개종 언급을 삭제하고 "신 살해" 혐의 비난을 다시 포함시킨 새로운 초안을 준비했다. 제목은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으로 변경되었다.[32] 이 초안은 보수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치코냐니 추기경의 조정 위원회를 거쳐 인쇄될 예정이었으나, 이집트 측의 압력과 로비로 인해 지연되었다.[32] 결국 미국 추기경들과 공의회 다수의 압력으로 투표가 결정되었다. 가장 논쟁적인 두 문서, ''종교 자유에 관하여''와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에 대한 투표가 연이어 예정되었다.[15] 그러나 "검은 목요일"로 불리는 11월 19일, ''종교 자유에 관하여'' 문서 투표가 돌연 연기되면서 공의회장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미국 주교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항의가 있었지만, 바오로 6세는 투표 연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15] 다음 날인 11월 20일,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 문서에 대한 투표가 진행되었다. 국제적 압력과 자유주의 진영의 좌절 속에서도, 공의회 교부들의 압도적인 다수(89%) 찬성으로 문서는 통과되었다. 아직 교황의 최종 반포가 남았지만, 이 문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 문서가 되었다.[15]
제3차 회기 종료 후에도 논란은 계속되었다. 보수파인 루이지 마리아 카를리 주교는 유대인의 집단적 책임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했고,[32][51][52] 바오로 6세 역시 수난 주일 설교에서 예수 십자가형 당시 유대인의 역할을 언급하여 엘리오 토아프 로마 수석 랍비 등에게 실망감을 안겼다.[32] 또한 ''뉴욕 타임스''는 교황이 문서를 수정하기 위해 교리 "자문관"에게 넘겼다고 보도했으나, 베아 추기경은 이를 부인하며 미국 유대인 위원회 회장 모리스 B. 에이브럼을 만나 오해를 풀려 노력했다.[32] 1965년 5월, 최종 텍스트 수정 논의 과정에서 "예수 살해"(Deicide)라는 단어가 영구히 삭제되었고,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박해를 "정죄한다"(condemns)는 표현 대신 "비난한다(decries)"로 최종 결정되었다.[32][59] 이러한 변경 소식은 다시 언론에 유출되어 세계 교회 협의회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2] 말라치 마틴은 이 시기 예수회 사제 서약을 해제받았다.[32]
1965년 10월 최종 투표를 앞두고 유대인 및 아랍 로비 단체는 막판 공세를 펼쳤다.[32] 최종 문서는 이전 초안보다 유대교 관련 내용이 다소 약화되었지만, 미국 주교들은 더 이상의 반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32] 1965년 10월 28일,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n the Relation of the Church to Non-Christian Religions), 즉 ''우리 시대에''(Nostra aetate)는 찬성 1,763표, 반대 250표로 최종 가결되어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공포되었다.[32]
선언문의 네 번째 부분은 유대교와의 관계를 다룬다. 교회는 자신의 신앙의 뿌리가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과 예언자들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사도들과 예수의 초기 제자들 다수가 유대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성서적 및 신학적 연구와 형제적 대화의 열매인 상호 이해와 존경을 증진하고 권장하고자 한다"는 의지를 표명한 점이다. 이는 공의회 이후 수십 년간 활발해진 가톨릭-유대교 종교 간 대화의 길을 열었다.
논란의 핵심이었던 유대인 신살해 문제에 대해, 최종 텍스트는 "그의 수난에서 일어난 일은 그 당시의 모든 유대인, 차별 없이, 그리고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명시했다. "신살해"(Deicide)라는 특정 단어는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 모호함은 이후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32][58] 공포 당시 진보 진영과 유대인 단체들은 이 결과에 실망감을 표했다.[32]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는 교회가 "어떤 때에도 누구에 의해서든 유대인을 향한 증오, 박해, 반유대주의적 행위를 비난한다(decries)"고 선언했다.[59] 이전 초안의 "정죄한다"(condemns)는 표현은 최종본에서 수정되었다.[32]
선언 공포 후 미국과 유럽 언론은 "바티칸, 유대인을 사면하다"와 같은 헤드라인을 내걸었지만, 이는 신살해 문제가 명시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32] 미국 유대인 위원회와 B'nai B'rith는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주요 쟁점이 삭제되고 내용이 약화된 것에 대한 실망감을 표명했다. 특히 랍비 헤셸은 신살해 문제를 회피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32]
3. 3. 이슬람교와의 관계
선언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무슬림을 존경한다고 밝히며,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유하는 점들을 설명한다. 여기에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자비롭고 전능하며 인간에게 말씀하신 한 분 하느님을 숭배한다는 점, 무슬림들이 아브라함과 마리아를 존경한다는 점, 그리고 예수를 하느님이 아닌 예언자로서 크게 존경한다는 점 등이 포함된다. 선언문 작성 과정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아랍 세계의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이슬람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32]선언은 모든 가톨릭 신자와 무슬림에게 과거의 적대감과 차이점을 잊고, 상호 이해와 공동선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내용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제2장에서도 일부 다루어진다.
3. 4. 모든 형태의 차별 반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확인하며, 교회는 인종, 피부색, 삶의 조건 또는 종교를 이유로 인간을 차별하거나 괴롭히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난한다고 분명히 밝힌다.4. 문서에 대한 비판
''노스트라 아에타테''(비그리스도교에 대한 선언)는 인접 문서인 ''인간 존엄성''(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에큐메니즘에 관한 선언), ''교회에 관한 교의''(교회)와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 중 전통 가톨릭교도들에게 가장 심한 비판을 받는 문서 중 하나이다. 전통 가톨릭교도들은 이 문서들이 종교적 무관심주의 정신을 드러내고 조장한다고 주로 비판한다. 이들은 해당 문서들이 비가톨릭 신자들의 개종을 막고(이는 가톨릭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에 어긋나며, 영원한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한다고 본다), 다른 종교도 타당할 수 있음을 시사하여 기존 가톨릭 신자들을 낙담시키거나 혼란스럽게 하며, 가톨릭 교회가 이미 비기독교 종교에 대해 교도권으로 선포했던 내용과 근본적으로 단절된다고 주장한다.[60]
특히 이슬람교에 관한 내용 중 "그들은 살아있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하느님,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경배합니다"라는 구절은 사제회(SSPX) 등으로부터 가톨릭 가르침에 비추어 명백한 오류라는 비판을 받았다. 가톨릭 교회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에서 유일한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정의하는데, 이슬람교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백히 부정하고 성령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63][61] 또한 성경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해, 만약 무슬림이 참 하느님을 숭배하지 않는다면, 삼위일체를 알지 못했던 노아, 아브라함, 이삭, 모세와 같은 고대의 족장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브라이언 해리슨 신부는 "요컨대,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백히 부인하는 무슬림의 예배는 그 자체로 적절하거나, 하느님을 기쁘게 하거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 결함 있는 예배의 대상, 즉 예배가 지향하는 존재는, 숨겨진 악마나 신화나 전설 속의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는 달리, 불완전하게 이해된 참 하느님이다"라고 설명하며 공의회의 입장을 뒷받침했다.[62]
또한 이 문서가 "교회는 또한 무슬림을 존경한다"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도 전통주의자들은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들은 모든 주요 이슬람 ''피크''(법학파) 내에서 무슬림 남성이 가톨릭으로 개종할 경우 사형에 처해질 수 있으며, 이슬람 율법이 기독교 비무슬림 국가를 ''다르 알 하르브''(전쟁의 집)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표현이 교회 문서에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63]
5. 공의회 이후의 발전
《노스트라 아에타테》 선언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힌두교, 불교 등 다른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특히 이슬람, 유대교와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힌 중요한 문서이다. 이 선언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교회와 다른 종교 공동체 간의 공식적인 대화와 상호 이해 증진을 목표로 하는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유대교 및 이슬람교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들이 이어졌다.
5. 1. 유대교와의 관계 발전
유대교와의 종교 관계를 위한 교황청 위원회는 《노스트라 아에타테》 선언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1974년 말 ''교황 선언 《노스트라 아에타테》의 시행을 위한 지침 및 제안''을 발표했다.[64] 이후 1985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육 및 교리 교육에서 유대인과 유대교를 올바르게 제시하는 방법에 대한 노트''를 발표하며 가톨릭교회 내에서 유대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노력했다.[65]한편, 미국 의회는 《노스트라 아에타테》 발표 40주년을 기념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66]
선언 발표 50주년이 되던 해에는, 바티칸의 유대교와의 종교 관계 위원회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부르심은 철회될 수 없다''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대화에서 중요한 신학적 쟁점들을 다루며, 《노스트라 아에타테》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67]
5. 2. 이슬람교와의 관계 발전
《노스트라 아에타테》는 이슬람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 선언의 영향 중 하나로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가 설립되어, 가톨릭 교회와 다른 종교들 간의 공식적인 대화 창구가 마련되었다.선언 발표 50주년을 기념하여, 북미 이슬람 협회(Islamic Society of North America)의 사이드 시이드 전국 이사(종교 간 및 지역 사회 연합 사무소 소속)는 이 선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노스트라 아에타테》가 발표된 1960년대는 미국 내에서 이슬람 센터와 학생 단체가 막 생겨나던 시기였음을 언급하며, 당시 가톨릭 교회가 소수 종교인 무슬림 공동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형님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러한 포용적인 태도는 9.11 테러 이후 이슬람 혐오가 확산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 교회가 이슬람 공동체에 문을 열어주는 모습으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68] 이는 《노스트라 아에타테》 선언이 가톨릭과 이슬람 간의 상호 이해 증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작성할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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