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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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문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건설된 건축물로, 방어, 보안, 무역, 과세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고대부터 중세, 근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형태와 구조로 존재해 왔으며, 도시의 권위와 위상을 상징하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지녔다. 현재는 군사적 기능은 사라지고 역사적 상징물이나 관광 자원으로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2. 역사
성문은 전통적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사람, 차량, 물품, 동물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역사적으로 성문은 방어, 보안, 공중 보건, 무역, 과세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도시의 위상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능을 관리하기 위해 군대나 지방 행정 당국이 성문에 배치되었다. 또한 성문은 공고문, 세금 및 통행료 안내, 지역 도량형 기준, 법률 문서와 같은 공공 정보를 게시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때로는 견고하게 요새화되거나 문장 방패, 조각 등으로 장식되었고, 사형된 범죄자나 공적의 머리를 전시하여 경고나 위협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덴마크의 많은 시장 도시들은 도시 요새의 일부로 성문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절대주의 시대인 1660년 이후에는 시장 도시에 부과된 관세(옥트루아) 징수가 성문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덴마크에서 절대주의가 종식되면서 1852년에 성문을 통한 소비세 징수가 폐지되었고, 이후 많은 성문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1]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많은 성곽 도시들이 성문을 포함한 방어 시설을 철거했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성문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물론 교통 흐름 방해 등의 이유로 철거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처럼 성문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기능과 의미가 변화해왔다.
2. 1. 고대
thumb의 성문]]
고대 오리엔트에서는 민족 간의 흥망성쇠가 잦았기 때문에, 도시 방어를 목적으로 흙벽돌 등으로 성벽을 많이 건설했다. 성문은 이러한 도시 성벽에 설치되었으며, '시문(市門)'이라고도 불렸다. 히타이트의 왕도였던 하투샤는 둘레 약 6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동남쪽에는 왕의 문, 남쪽에는 스핑크스 문, 서남쪽에는 사자 문과 같은 아치형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문들은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오리엔트의 시문에는 사자나 스핑크스처럼 왕성을 수호하는 의미를 가진 성수의 조각상이 놓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실용성을 중시했던 중국의 성문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도성제가 발달하여 동서남북의 성벽에 성문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08년에 발굴된 한나라 시대 장안성의 직성문 유적은 황토를 다져 쌓는 판축 공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규모는 길이 20m, 폭 32m에 달했다.[7] 장형이 쓴 「서경부」에 따르면, 장안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각각 3개의 문이 설치되었고, 각 문에는 3개의 문도(門道, 문길)가 있어 총 36개의 문도가 있었다고 한다. 문도의 폭은 약 8m로, 당시 수레 4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문도 양옆에는 나무 기둥(문주)을 세우고 그 위에 량(보)을 얹어 상부의 판축 구조물과 문루를 지탱했다. 당나라 시대 장안성의 황성으로 이어지던 함광문의 유적은 길이 37m, 폭 19m, 높이 8m의 판축 구조였음이 밝혀졌다.[8] 판축 기법은 성벽이나 성문뿐만 아니라 건물의 기초나 토담 등에도 예로부터 사용되었는데, 표면을 벽돌(전, 磚)이나 햇볕에 말린 흙벽돌(토전), 석재로 덮는 공법도 한나라 시대에는 일반화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도시 국가 시절부터 총 길이 8km에 달하는 성벽이 일곱 언덕을 둘러싸며 주변 도시나 다른 민족의 침략에 대비했다. 제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서 볼 수 있듯이, 석조나 흙벽돌로 만든 아치형 성문이 발달했다. 이러한 성문의 유적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고대 일본에서는 중국의 도성제를 본떠 헤이조쿄, 헤이안쿄와 같은 도시에 성문을 건설했는데, 이를 라조몬(羅城門)이라고 불렀다. '라조(羅城)'는 도시 외곽을 의미하지만, 고대 일본 도시의 라조몬은 중국 대륙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성벽에 설치된 형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만 홀로 서 있고 양옆으로 수십 미터 정도의 축지담(築地塀, 흙으로 쌓은 담)이 이어져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다른 민족의 침입이 비교적 적었던 일본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라조몬 자체가 도시 방어 거점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없었고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고 여겨진다.
2. 2. 중세
율령제가 무너지면서 고대 일본의 도시 성곽은 점차 사라지고, 군사적 거점으로서 중세 산성이 새롭게 등장했다.
일본의 성곽은 중국이나 서양처럼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성벽 대신, 수 미터 정도의 토루나 돌담 위에 흙담 등을 올리는 형태였다. 따라서 성문 역시 중국의 옹성이나 서양의 문루처럼 돌로 만든 견고한 구조물은 아니었다. 대신 일본 성곽은 산이 많은 지형이나 하천 등 자연 지형을 활용하고, 해자와 곡륜(성곽 내부 구획)을 복잡하게 배치하여 성 전체의 방어력을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성의 출입구는 虎口|코구치일본어(호구 또는 소구라고도 씀)라고 불렸다. 이름처럼 출입구를 좁게 만들거나 복잡하게 꺾어 놓아 적의 침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성문은 성 안에 여러 개 세워졌는데, 이는 단순히 구역을 나누는 역할뿐 아니라 적이 직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때로는 미로처럼 배치하여 성의 중심부인 혼마루까지 도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성곽의 군사적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방비가 엄중한 정문인 오테구치의 문은 특별히 '오테몬'(大手門)이라 불렀고, 그 반대편 후문의 문은 '카라메테몬'(搦手門)이라고 했다. 큰 문에는 번소(경비 초소)나 '와키몬'(脇門)이라 불리는 작은 옆문이 딸리기도 했고, 문짝 자체에 적을 공격하기 위한 狭間|사마일본어(숨구멍)가 설치되기도 한다.
이러한 일본식 성문의 구조는 메이지 유신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졌으나, 막부 말기에 능보식 성곽이나 근대 군제가 도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성곽의 정문이었던 오테몬의 이름은 현재도 여러 지역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
2. 3. 근세
율령제 붕괴 이후 일본에서는 고대 도성이 사라지고, 군사 거점으로서 중세 산성이 새롭게 등장했다.
일본의 성곽은 대륙에서 볼 수 있는 수십 미터 높이의 성벽과 달리, 수 미터 정도의 토루나 돌담 위에 흙담 등을 올리는 형태였다. 따라서 성문 역시 중국의 옹성이나 서양의 문루처럼 석조로 견고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대신 산이 많은 지형이나 자연 하천을 활용한 설계를 통해 해자와 곡륜을 복잡하게 배치하여 성곽 전체의 방어력을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성곽의 출입구는 "코구치"라고 불렸는데, 이름처럼 출입구를 좁게 만들거나 얽히게 배치하여 적의 침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성문은 성 안에 여러 개 세워졌으며, 단순히 곡륜과 곡륜을 나누는 역할뿐만 아니라 적이 직진하지 못하도록 미로처럼 배치하여 혼마루(주곽)에 도달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방비가 엄중한 성곽 정면 입구의 문은 '오테몬'이라 불렀고, 그 반대편 뒷문의 문은 '카라메테몬'이라고 했다. 규모가 큰 대문에는 번소(경비 초소)나 '와키몬(脇門)' 또는 '와키도(脇戸)'라 불리는 작은 문이 옆에 설치되기도 했으며, 문짝에는 숨구멍(사격 구멍)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중세 이후 성문은 경주(문 기둥), 관목(기둥 위 가로대), 곁기둥, 문짝 등을 조합하여 만들었으며, 이는 상부 구조나 세부 사항을 제외하면 근세 성곽의 성문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5] 특히 전국 시대에는 이전까지 중세 성곽에서 볼 수 있었던 간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초석 위에 영구적인 건물을 세우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중요한 문의 문짝은 판자나 각목을 여러 겹 붙여 두껍게 만들고 그 위에 금속판을 붙여(흑철문, 동문, 근철문 등) 견고함을 더했다.
근세 일본 성곽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성문 형식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일본 특유의 성문 구조는 메이지 유신에 이르러 능보식 성곽이나 근대 군제가 도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성곽의 정문이었던 오테몬의 흔적은 현재에도 여러 지역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2. 4. 현대
안정성과 자유가 증가함에 따라 많은 성곽 도시들이 성문과 같은 요새 시설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많은 수가 남아 있다. 이는 과거와 같은 보안 목적보다는 주로 역사적 관심 때문이다. 현존하는 많은 성문들은 심하게 복원되거나 재건되었으며, 때로는 도시의 미관을 위해 모로코 페스의 Bab Bou Jeloud|바브 부 젤루드ara처럼 새로운 문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성문이 교통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도 생겨났는데, 예를 들어 영국 런던의 템플 바 게이트는 이러한 문제로 인해 19세기에 철거되었다. 이처럼 현대의 성문은 본래의 군사적, 통제적 기능은 대부분 상실했지만, 역사적 상징물이나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되거나 혹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철거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3. 구조 및 형태
성문(城門)은 전통적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사람, 차량, 물품, 동물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건설된 건축물이다. 역사적으로 성문은 단순히 출입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 방어, 보안, 공중 보건 관리, 무역 통제, 관세 및 통행료 징수, 도시의 위상 과시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이러한 기능을 위해 성문에는 군인이나 행정 관리가 배치되기도 했다.[1]
성문은 중요한 정보를 공고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세금 및 통행료 관련 규정, 지역의 도량형 기준, 법률 등을 성문에 게시하여 사람들에게 알렸다. 또한 성문의 형태는 매우 다양했는데, 견고한 요새처럼 지어지기도 했고, 문장이나 조각, 비문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했다. 때로는 사형당한 범죄자나 공공의 적의 머리를 내걸어 사람들에게 경고하거나 위협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문의 기능과 중요성은 변화했다. 예를 들어, 덴마크의 많은 시장 도시에는 성문이 있었는데, 절대주의 시대(1660년 이후)에는 도시로 들어오는 물품에 부과되던 옥트루아(소비세)를 징수하는 장소로 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덴마크에서 절대주의가 끝나고 1852년에 소비세가 폐지되면서, 성문은 점차 그 기능을 잃고 철거되기 시작했다.[1] 중세 덴마크 성문은 오늘날 파보르의 베스테르포트와 스테게의 묄레포르텐, 그리고 독일 플렌스부르크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현대에 들어 사회가 안정되고 이동의 자유가 중요해지면서 많은 도시에서 성벽과 성문을 철거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성문이 남아 있는데, 이는 방어 목적보다는 역사적 가치 때문이다. 남아있는 성문 중 상당수는 복원되거나 재건되었으며, 때로는 도시 미관을 위해 모로코 페스의 바브 부 잘루스(Bab Bou Jalous)처럼 새로운 성문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늘어난 교통량을 감당하지 못해 철거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런던의 템플 바 게이트가 대표적인 예이다.
3. 1. 동아시아
고대 중국에서는 도성제가 발달하여 성벽의 동서남북에 성문을 설치했다. 한나라 시대 장안의 직성문 유적 발굴 조사(2008년) 결과, 황토를 다져 쌓는 판축 공법으로 만들어진 길이 20m, 폭 32m 규모의 성문이었음이 밝혀졌다.[7] 장형의 「서경부」에 따르면, 장안성에는 동서남북 각 3개씩의 문이 있었고, 각 문은 3개의 통로(문도)를 가져 총 36개의 문도가 있었다. 문도 하나의 폭은 약 8m로, 당시 수레 4대가 지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문도 양옆에는 나무 기둥(문주)을 세우고 그 위에 보를 얹어 상부의 판축 구조물과 문루를 지탱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루 안쪽에는 중정을 중심으로 건물이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는 구조였다.
당나라 시대 장안성의 황성으로 통하던 함광문 유적에서는 길이 37m, 폭 19m, 높이 8m의 판축 구조가 확인되었다.[8] 판축은 성벽, 성문뿐 아니라 건물의 기초나 토담 등에도 예로부터 사용된 공법이다. 표면을 벽돌(전, 磚)이나 햇볕에 말린 벽돌(토전), 석재로 덮는 방식은 한나라 시대에 이미 일반화되었으며, 명대에는 벽돌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성문이나 성벽에 널리 사용되었다. 판축 구조물을 벽돌이나 석재로 덮는 공법은 중국의 지배 영역이 강수량이 많고 습한 남쪽 지역까지 확대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명대의 시안 성벽은 규모는 당나라 시대의 9분의 1로 축소되었지만, 높이는 12m, 두께는 20m에 달하며 전체가 돌과 벽돌로 덮여 있다. 성문은 반원형의 작은 성곽인 옹성을 갖추고, 궐루·전루·정루로 이루어진 삼중의 문루를 설치했으며, 문도는 아치 공법을 이용한 터널 형태로 만들어졌다.
성문은 도시 성벽의 취약 지점이었기 때문에, 특히 벽을 두껍고 높게 쌓고 전루와 옹성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성을 공격하는 측에서는 파성추나 공성탑 등을 사용하여 문루와 성문을 공략했다(공성전 참조). 근대에 이르러 중국이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에도 성벽과 성문의 중요성은 여전하여, 베이징성에는 외성에 7개, 내성에 9개, 황성에 4개의 문이 설치되었다. 내성의 정문인 정양문은 황제 전용 문으로 그 위용을 자랑했으며, 황성에는 천안문, 지안문, 동안문, 서안문 4개의 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천안문만 남아 있다.
고대 일본에서는 중국의 도성제를 본떠 헤이조쿄, 헤이안쿄와 같은 도시에 성문을 건설했는데, 이를 라조몬이라 한다. '라조'는 도시 외곽을 의미하지만, 고대 도시의 라조몬은 중국 대륙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성벽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문만 홀로 서 있고 양옆으로 수십 미터 정도의 판축 담장이 연결된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외부 민족의 침입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일본의 특수성을 반영하며, 라조몬 자체가 도시 방어 거점으로서 큰 의미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조몬)
율령제가 무너지면서 고대 도시는 사라지고, 새로운 군사 거점으로서 중세 산성이 등장했다. 일본의 성곽은 중국 대륙의 성벽처럼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지는 않았고, 보통 높이 수 미터 정도의 토루나 돌담 위에 판축 기법으로 만든 담이나 토담을 올리는 형태였다. 따라서 성문 역시 중국의 옹성이나 서양의 문루처럼 석조로 된 견고한 구조물은 아니었다. 대신 산이 많은 지형이나 자연 하천을 이용한 설계를 통해 해자와 곡륜을 복잡하게 배치하여 성곽 전체의 방어력을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성곽의 출입구는 '코구치'(虎口 또는 小口)라 불렸는데, 이름 그대로 입구를 좁히거나 꺾어서 적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성문은 성 안에 여러 개 세워졌는데, 단순히 곡륜과 곡륜을 나누는 역할뿐 아니라 적이 직선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때로는 미로처럼 배치하여 성의 중심부인 혼마루에 도달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성곽의 군사적 가치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방비가 견고한 정문(오테구치, 大手口)의 문을 특히 '오테몬(大手門)'이라 하고, 그 반대편의 후문(가라메테구치, 搦手口)의 문을 '카라메테몬(搦手門)'이라 불렀다. 규모가 큰 성문에는 파수를 위한 번소(番所)나 옆에 작은 문(와키몬, 脇門 또는 와키도, 脇戸)이 딸리기도 했으며, 문짝에는 총안(銃眼)과 같은 구멍을 내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성문의 기본적인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막부 말기에 능보식 성곽이나 근대 군제가 도입되면서 일본 고유의 성문 양식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성곽의 정문이었던 오테몬의 이름은 현재에도 여러 지역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
중세 이후 성문은 두 개의 기둥(경주, 鏡柱)과 이를 가로지르는 들보(관목, 冠木), 뒤쪽의 보조 기둥(곁기둥, 控柱), 그리고 문짝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상부 구조나 세부 장식을 제외하면 근세 성곽의 성문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본 구조이다.[5] 전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전 중세 성곽의 임시적인 구조물 대신 초석 위에 영구적인 건물을 세우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또한 중요한 문의 문짝은 판자나 각목을 여러 겹 덧대 두껍게 만들고, 그 위에 철판 등을 붙여(흑철문, 동문, 근철문 등) 방어력을 강화했다.
한국의 성문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 성곽 건축의 영향을 받으며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한양도성의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조선 시대 성문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수원 화성에서 볼 수 있는 옹성과 같이 성문 자체의 방어력을 높이는 구조도 발달했다.
3. 2. 서아시아 및 유럽
고대 오리엔트(서아시아)에서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도시 방어를 목적으로 흙벽돌 등으로 성벽을 많이 만들었다. 성문은 이러한 도시 성벽에 설치되었기에 "시문(市門)"이라고도 불린다.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하투샤는 둘레 약 6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동남쪽에는 왕의 문, 남쪽에는 스핑크스 문, 서남쪽에는 사자 문과 같은 아치형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문은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오리엔트의 시문에는 사자나 스핑크스 등 왕성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성수(聖獸) 조각상을 놓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로마에서는 도시 국가 시대부터 총 길이 8km에 달하는 성벽이 로마의 7개 언덕을 둘러싸며 주변 민족의 침략에 대비했다. 제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서 볼 수 있듯이 석조나 흙벽돌로 만든 아치형 문이 발달했다. 이러한 유적은 현재에도 남아있다. 이후 성문에는 탑이 증축되는 등 더욱 견고한 구조로 발전했다.
로마 도시의 영향을 받은 서유럽 사회에서는 로마 시대의 성벽과 성문이 계속 사용되었다. 10세기 이후 봉건제가 발달하면서 중소 규모의 봉건 영주들이 각자 자신의 거주지로 성채(城砦)를 짓기 시작했는데, 이 성채의 문 역시 도시 성벽의 성문을 본뜬 것이었다. 서유럽에서는 제후들 간의 전쟁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의 침입 위협이 항상 존재했기 때문에, 도시의 성문은 벽을 더욱 두껍고 높게 만들었다.
성문은 주로 돌이나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입구는 아치형 구조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에는 원통형 탑(en: turret)이 부속되어 성문에 접근하는 적에게 활이나 화기로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문 외에도 철제 또는 나무로 만든 포트컬리스(en: Portcullis)라고 불리는 쇠창살이 설치되었으며, 문 밖에는 해자를 파고 도개교 등을 설치하여 외부 침입을 막기 용이하게 했다. 성문 바깥쪽에 이중으로 성문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러한 성 밖의 작은 방어 구역이나 문루를 바비칸(en: barbican)이라고 한다.
이러한 견고한 성문을 부수기 위해 파성퇴, 공성탑 등이 활용되었지만, 중세가 끝나고 근대 사회가 도래하면서 화포가 크게 발달했다. 봉건 제후 시대가 끝나고 정치적으로는 절대주의, 군사적으로는 별 모양 요새 등 근대적인 성곽이 서유럽 사회에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성문의 역할은 점차 변화하게 되었다.
다음은 서아시아 및 유럽 각지의 대표적인 성문 목록이다.
thumb 성문 (예멘)]]
3. 3. 기타 지역
4. 한국의 성문
한국의 성문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로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나 군사 요충지의 출입을 통제하고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수도였던 한양의 한양도성에 세워진 숭례문이나 흥인지문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원 화성의 장안문, 팔달문과 같이 다른 여러 지역에도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닌 성문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성문들은 각 시대의 건축 기술과 사회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4. 1. 서울의 성문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도 여러 성문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들 수 있다.4. 2. 기타 지역의 성문
- '''아시아'''
- * 방글라데시
- ** 다카 문 (다카)
- ** 치타공 시 문
- * 중국
- ** 전명문과 덕승문 (베이징)
- ** 중화문 (난징)
- ** 젠수이현의 성문
- * 키프로스: 파마구스타 문 (니코시아)
- * 인도
- ** 인도 문 (뭄바이, 마하라슈트라)
- ** 자이푸르의 성벽 도시 (자이푸르, 라자스탄)
- ** 아우랑가바드의 성벽 도시와 문 (아우랑가바드, 마하라슈트라)
- ** 코타의 성벽 도시 (코타, 라자스탄)
- ** 틴 다르와자 (바드라 요새, 아흐메다바드)
- * 이라크: 이슈타르 문, 힐라
- * 이란
- ** 쿠란 문 (쉬라즈)
- ** 노우바르 문 (타브리즈)
- * 이스라엘: 예루살렘 구시가지 성벽의 문
- * 일본: 라쇼몬, 교토
- * 마카오: 관문 - 인접한 주하이와의 마카오 국경 문
- * 파키스탄: 라호르의 성벽 도시
- * 필리핀: 인트라무로스의 문
- * 대한민국: 서울의 성문, 숭례문과 흥인지문 포함
- * 대만: 타이베이 북문
- * 예멘: 사나의 바브 알 예멘
- '''유럽'''
- *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금문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동쪽 입구인 브라트니크의 비셰그라드 문
5. 사회문화적 의미
성문은 전통적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사람, 차량, 물품, 동물의 출입을 통제하는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했지만, 그 역할은 단순한 출입 관리에 그치지 않았다.[1] 성문은 도시의 권위와 위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었으며, 역사적 맥락에 따라 방어, 보안 유지, 공중 보건 관리, 무역 활동 감독, 과세 등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했다. 이러한 기능을 관리하기 위해 군대나 지방 행정 당국 인력이 성문에 배치되기도 했다.
또한 성문은 중요한 공공 정보를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게시판 역할을 했다. 각종 공고문, 세금 및 통행료 징수 관련 정보, 지역에서 사용되는 도량형 기준, 새로 시행되는 법률 등이 성벽에 부착되어 공지되었다.[1] 때로는 도시의 정체성이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방패, 정교한 조각 작품, 기념비적인 비문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했다.
한편, 성문은 사회 통제의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사형당한 범죄자나 국가의 적의 머리를 성문에 매달아 전시함으로써, 주민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잠재적 반대 세력에게 강력한 경고와 위협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1]
덴마크의 사례처럼, 특정 시대와 지역에서는 성문이 국가 재정 확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절대주의 시대 덴마크의 여러 시장 도시에서는 1660년부터 '옥트루아'라고 불리는 일종의 관세(소비세)를 도시로 들어오는 물품에 부과하여 성문에서 징수했다. 이는 당시 시장 도시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의 영향으로 덴마크에서 절대주의 체제가 종식되면서 1852년 성문에서의 소비세 징수가 폐지되었고, 이후 많은 성문이 그 기능을 잃고 철거되기 시작했다.[1]
현대에 들어 많은 도시에서 성벽과 성문이 철거되었지만, 상당수의 성문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거나 재건되었으며, 모로코 페스의 바브 부 젤루드(Bab Bou Jeloud)처럼 도시의 미관을 향상시키기 위해 새롭게 건설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도시화와 교통량 증가로 인해 성문이 현대적인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는데, 19세기 런던의 템플 바 게이트가 대표적인 예이다.[1]
참조
[1]
웹사이트
Byporte under enevælden
http://www.byhistori[...]
2016-03-10
[2]
웹사이트
Porta Montanara
https://www.comune.r[...]
2024-01-26
[3]
서적
Encyclopedia of the History of Classical Archaeology
Routledge
2015-05-11
[4]
웹사이트
Colonial City of Santo Domingo
https://whc.unesco.o[...]
[5]
서적
城のつくり方図典
小学館
2005
[6]
서적
城の見方・歩き方
新人物往来社
2002
[7]
뉴스
http://www.china-new[...]
[8]
뉴스
http://j.peopl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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