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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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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아 속주는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 공화국에 병합된 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으며, 현재의 시리아, 터키 남동부, 레바논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다. 동서 무역의 요충지이자 농업이 발달한 부유한 지역으로, 실크로드의 종착지로서 동서양의 다양한 물품이 유통되었다. 주요 도시로는 안티오키아, 다마스쿠스, 팔미라 등이 있었으며, 3세기의 위기와 팔미라 제국의 등장, 분할과 재통합을 거쳐 동로마 제국의 중요한 지방으로 존속하다 7세기에 정통 칼리프 군대에 정복되어 멸망했다. 시리아 속주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공존하는 지역이었으며, 유대교, 기독교, 다신교 등 다양한 종교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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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속주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프로빈키아 시리아 (Provincia Syria)
로마자 표기Probinikia Syria
그리스어ἐπαρχία Συρίας (eparchía Syrías)
위치현대의 터키, 시리아, 레바논 지역
역사
성립기원전 64년
소멸198년
주요 사건폼페이우스의 코엘레-시리아 정복
분할코엘레 시리아와 페니케로 분할
정치
정치 체제속주
소속 국가로마 제국
수도안티오크 (현대 튀르키예 하타이 주 안타키아)
이전
이전 국가셀레우코스 시리아
코엘레-시리아
헤롯 분봉왕국
이투레아
트라코니티스
이후
이후 국가코엘레 시리아
페니케

2. 영역과 경제

하드리아누스 시대(서기 117-138년) 로마 제국 지도. 시리아 속주의 위치를 보여준다.


시리아 속주의 영역은 현재의 시리아를 중심으로 터키 남동부와 레바논 지역에 걸쳐 있었다. 북쪽으로는 카파도키아킬리키아 속주와 접했고, 남쪽으로는 유다와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와 경계를 이루었다. 동쪽으로는 강력한 경쟁 세력이었던 파르티아, 이후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게 시리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리아에는 국경 방어를 위해 로마 군단이 3개나 주둔하기도 했다.

고대 도시 팔미라 유적. 팔미라는 시리아 속주의 중요한 무역 중심지 중 하나였다.


시리아는 동서 무역농업을 통해 크게 번성했으며, 로마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풍요로운 속주였다. 주요 생산물로는 곡물, 올리브와 올리브 오일, 와인 등이 있었으며, 레바논 삼나무와 같은 목재 자원도 풍부하여 이를 이용한 선박 건조와 가구 제작도 활발했다. 또한 염색 직물, 유리 제품, 도기, 양피지, 상아 세공품 등 다양한 공예품도 생산되었다. 특히 삼나무 목재, 자색 염료로 물들인 직물, 유리 제품은 고대 페니키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시리아 지역의 대표적인 특산품이었다.

시리아는 실크로드의 서쪽 종착지 중 하나로서, 중국에서 온 비단이나 인도에서 온 향신료와 같은 고가의 동방 물품들이 시리아를 거쳐 로마를 비롯한 제국 각지로 유통되는 중요한 교역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활발한 교역과 농업을 바탕으로 시리아 내륙에는 아파메아, 안티오키아, 베로에아(알레포), 에피파니아, 에메사, 다마스쿠스, 팔미라와 같은 교역 및 농업 중심 도시들이 발달했다. 지중해 연안에는 라오디게아, 시돈, 티루스 등의 항구 도시들이 무역의 관문 역할을 했다.

2. 1. 주요 도시

시리아 속주는 동서 무역과 농업으로 번성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속주였으며, 많은 대도시를 거느렸다. 속주의 총독은 규모와 중요성 면에서 제국 내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안티오키아'''에 본거지를 두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속주를 켈레 시리아와 시리아 페니키아로 나누었을 때, 안티오키아는 켈레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고, 티레는 시리아 페니키아의 수도가 되었다.

시리아 속주의 주요 도시들은 다음과 같다.

주요 도시
구분도시명 (로마 시대)현재 도시명비고
내륙 도시안티오키아안타키아속주 총독 거점, 켈레 시리아 수도, 주요 교역 중심지
아파메아아파메아 (유적)교역 및 농업 도시
베로에아알레포교역 및 농업 도시
에피파니아하마교역 및 농업 도시
에메사호므스교역 및 농업 도시
다마스쿠스다마스쿠스교역 및 농업 도시, 고대부터 이어진 주요 도시
팔미라타드무르 인근 (유적)교역 도시, 실크로드 중요 거점
해안 도시라오디게아라타키아항만 도시
시돈사이다항만 도시, 페니키아 시대부터 주요 도시, 염직물/유리 생산
티레티레항만 도시, 시리아 페니키아 수도, 페니키아 시대부터 주요 도시, 자색 염료, 유리 특산



이 도시들은 시리아 속주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동서 교역로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내륙 도시들은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과 풍부한 농업 생산의 중심지였으며, 해안 도시들은 지중해 무역의 관문으로서 페니키아 시대부터 이어져 온 목재, 염직물, 유리 제품 등의 특산품 교역을 이끌었다. 특히 안티오키아, 티레, 시돈, 팔미라, 다마스쿠스 등은 고대부터 중요한 도시로 기능해왔다.

3. 역사

시리아는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 공화국에 병합되어 속주가 되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마지막 왕들을 폐위시키고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시리아는 동방의 중요한 황제 속주로서, 파르티아 및 이후 사산 왕조와의 국경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여러 로마 군단이 주둔했으며, 게르마니쿠스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와 같은 로마의 중요 인물들이 총독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초기 제국 시기에는 유대 속주가 시리아 총독의 관할 하에 놓이기도 했으며, 시리아 주둔군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베트 호론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기도 했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는 시리아 군단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시리아 속주는 로마 역사에서 여러 차례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세기 말부터 시리아 출신 인물들이 로마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3세기에는 세베루스 왕조에서 시리아 출신 황제들이 나오기도 했다. 193년 내전 이후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반란을 막기 위해 시리아 속주를 시리아 포에니케(Syria Phoenicela)와 시리아 코일레(Syria Coelela)로 분할했다.

3세기의 위기 동안 시리아는 사산 왕조의 침입과 팔미라 제국의 발흥 같은 혼란을 겪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왕조에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있었고, 이후 팔미라제노비아가 잠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으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게 진압되었다.

후기 로마 제국 시대에 시리아 속주는 디오클레티아누스테오도시우스 1세의 행정 개혁을 거치며 더욱 세분화되었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도 중요한 속주로 남아 있었으나, 사산 왕조와의 계속된 전쟁과 7세기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인해 결국 637년 정통 칼리프 군대에 의해 정복되면서 로마-비잔틴 시대의 시리아 속주 역사는 막을 내렸다.

3. 1. 로마 공화정 시대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쿠스를 처형하고 그의 후계자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를 폐위시키면서 시리아를 로마 공화정에 병합했다.

기원전 54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시리아 속주 총독에 취임했다. 그는 파르티아로 공격해 들어갔지만, 기원전 53년에 카르해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 당시 로마의 최고 실력자 중 한 명이었던 크라수스의 죽음은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폼페이우스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간의 내전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49년에는 퀸투스 카에키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가 시리아 속주 총독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했다. 기원전 47년, 폰토스파르나케스 2세가 시리아 속주를 노리는 움직임을 보이자, 카이사르는 시리아 속주를 장악한 후 소아시아의 젤라에서 파르나케스의 군대를 격파했다(젤라 전투).

3. 2. 로마 제정 시대



로마 공화국의 멸망과 로마 제국으로의 전환 이후 시리아는 황제 속주가 되었고, 황제가 임명하는 레가투스(Legatus, 총독)가 통치했다. 초기 제국 시대 동안 시리아에는 3개의 로마 군단과 보조병이 주둔하며 동쪽의 파르티아와의 국경을 방어했다. 시리아 속주는 로마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 티베리우스 황제 시기에는 게르마니쿠스가, 네로 황제 시기에는 명장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총독으로 부임하는 등 로마의 최고 인재들이 파견되는 자리였다.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대의 민족장(ethnarch) 헤로데 아르켈라우스를 폐위시키고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아를 통합하여 유대 속주를 신설했다. 이 새로운 속주는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의 직접적인 감독 하에 놓였으며, 퀴리니우스는 코포니우스를 초대 유대 집정관(Prefect)으로 임명했다. 이후 헤로데 필리포스 2세(서기 34년 사망)와 헤로데 안티파스(서기 39년 폐위)의 영토였던 이투레아, 트라코니티스, 갈릴리, 페레아 역시 시리아 속주의 관할로 편입되었다.

서기 37년부터 41년까지 남부 지역의 상당 부분은 시리아에서 분리되어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통치하는 속국 왕국으로 잠시 전환되었다. 그러나 아그리파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왕국은 점진적으로 로마 제국에 다시 흡수되었고, 그의 아들 헤로데 아그리파 2세의 사망 이후 완전히 로마 속주 체제로 편입되었다.

시리아 속주의 군대는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이어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66년,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제12군단 풀미나타를 주축으로 한 시리아 주둔군을 이끌고 유대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베트 호론 전투에서 유대 반군에게 참패하여 군단이 거의 전멸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패배는 로마 지도부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반란 진압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맡겨졌다. 서기 69년 여름, "네 황제의 해"로 알려진 혼란기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가 이끄는 시리아 군단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황제 자리에 도전했다. 그는 경쟁자 비텔리우스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었으며, 이후 10년간 로마를 통치했고 그의 아들 티투스가 제위를 계승했다.

2세기에는 시리아 속주의 중요성이 여전히 높았으나 변화도 있었다. 테오도르 몸젠에 따르면, 시리아 총독은 오랫동안 아시아 전체에서 최고 지휘권을 가졌지만, 2세기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제3군단 갈리카를 시리아 총독의 지휘에서 빼내 팔레스타인 시리아 총독에게 넘겨주면서 그 권한이 다소 축소되었다.[4] 한편, 1948년 텔 도르에서 발견된 비문과 2016년 하이파 대학교 수중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그리스어 비문은 퀸투스 코레디우스 갈루스 가르길리우스 안티쿠스가 서기 120년에서 130년 사이, 즉 바르 코흐바 반란 이전에 유대 속주의 총독이었음을 증명한다.[2][3]

2세기 말부터는 시리아 속주 출신 인물들이 로마 원로원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73년 집정관을 지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가 시리아 출신이었고,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시리아 도시 키루스 출신이었다. 3세기에 들어서는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같은 시리아 출신 황제들이 세베루스 왕조에서 배출되기도 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로 알려진 내전 시기에 시리아 총독 페스케니우스 니게르는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패배하고 살해당했다. 황제가 된 세베루스는 니게르의 반란에 대한 대응이자, 이전부터 잦았던 시리아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194년 시리아 속주를 북쪽의 시리아 포에니케(Syria Phoenicela)와 남쪽의 시리아 코일레(Syria Coelela)로 분할했다.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혼란기에 시리아 지역은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동쪽에서는 파르티아를 대체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강력한 위협으로 부상하여 로마의 동방 국경을 위협했고, 교역로가 자주 끊겼다. 260년,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사산 왕조와 싸우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왔으나, 에데사 전투에서 참패하고 사산 왕조의 샤 샤푸르 1세에게 포로로 잡혀 페르시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 이후, 팔미라의 실력자였던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가 사산 왕조에 반격하여 로마의 위신을 일부 회복했다. 오다에나투스는 황제 갈리에누스로부터 로마 동방 지역의 방위를 위임받아 사실상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렸다.

267년 오다에나투스가 암살되자, 그의 아내 제노비아가 실권을 장악하고 아들 와발라투스를 내세워 시리아 속주 전체와 아라비아 페트라에아, 이집트 속주까지 지배하는 팔미라 제국을 건설했다. 팔미라 제국은 잠시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옛 시리아 속주 전역을 장악했지만, 272년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서 팔미라를 격파하고 제노비아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팔미라 제국은 붕괴되었고, 시리아 속주는 다시 로마 제국의 직접 통치 하로 돌아왔다.

3. 3. 시리아의 분할과 3세기의 위기

193년은 '다섯 황제의 해'로 불리는 내전 시기였다. 당시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던 페스케니우스 니게르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패배하고 살해되었다. 황제가 된 세베루스는 니게르의 반란을 계기로 삼아, 이전부터 잦은 반란이 있었던 시리아 속주를 남북으로 나누었다. 북부는 시리아 코일레(Syria Coele), 남부는 시리아 포에니케(Syria Phoenice)로 분할되었다.

3세기의 위기로 알려진 혼란기에 시리아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해졌다. 파르티아를 대신해 등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을 계속 위협했고, 이로 인해 교역로가 자주 끊겼다. 260년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사산 왕조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 속주로 직접 출정했으나, 에데사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사산 왕조의 포로가 되어 페르시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에 팔미라 지역의 유력자였던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가 사산 왕조에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황제 갈리에누스로부터 로마 동방 지역의 방어를 위임받아 사실상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267년 오다에나투스가 암살된 후, 그의 아내 제노비아가 실권을 장악하고 팔미라 제국을 선포했다. 이 제국은 시리아 속주 전체와 아라비아 페트라에아, 이집트까지 지배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팔미라 제국은 옛 시리아 속주 전역을 장악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를 공격하여 제국을 멸망시켰고, 시리아 속주는 다시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로 돌아왔다.

3. 4. 후기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 시리아 켈레는 동방 관구에 속하게 되었다.[8] 330년에서 350년 사이(대략 341년경)에, 유프라테스 서쪽 강둑과 과거 코마게네 왕국 지역에서 ''유프라텐시스'' 속주가 ''시리아 켈레''에서 분리되어 만들어졌으며, 수도는 히에라폴리스였다.[9]

4세기 후반,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치세에 속주는 더욱 세분화되었다. 시리아 포에니케는 포에니케(la)와 포에니키아 리바네시아(la)로, 시리아 코일레는 시리아(la), 시리아 살루타리스(la), 시리아 유프라텐시스(la)로 분할되었다.

20제곱미터의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로, 시리아, 홈스, 마리아민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 하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15년경 이후, ''시리아 쾨레''는 수도가 안티오크로 남아있는 ''시리아 I'' (또는 ''시리아 프리마'')와 수도가 오론테스강의 아파메아에 있는 ''시리아 II'' (''시리아 세쿤다'') 또는 ''시리아 살루타리스''로 더 세분화되었다. 528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두 지방의 영토에서 작은 해안 지방인 ''테오도리아스''를 떼어냈다.[8]

성 시메온 스타일리테스 교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


이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가장 중요한 지방 중 하나로 남아있었다. 이 지역은 609년에서 628년 사이에 사산 왕조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황제 헤라클리우스에 의해 재정복되었지만, 야르무크 전투와 안티오크의 몰락 이후 레반트의 무슬림 정복으로 다시 잃었다.[8][10][11] 637년, 안티오키아는 정통 칼리프 군대에 의해 정복되었고, 로마 속주로서의 시리아는 소멸되었다.

안티오크시는 963년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에 의해 재정복되었으며, 당시 함단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국가의 다른 지역과 함께 압바스 왕조 칼리프의 공식적인 종주권 하에 있었고 파티마 왕조 칼리프에게도 주장되었다. 황제 요한 1세 치미스케스가 예루살렘까지 시리아를 정복하는 데 실패한 후, 970년대 후반 파티마 칼리프 왕조가 시리아를 재정복하여 비잔틴 제국을 시리아 대부분 지역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안티오크와 시리아 북부 지역은 제국에 남아 있었고, 다른 지역은 황제가 함단 왕조, 미르다시드 왕조, 마르와니드 왕조 대리인을 통해 보호했으며, 셀주크 왕조가 침략하여 1084년 안티오크를 정복하기 전까지 보호했다. 안티오크는 12세기에 콤네노스의 부활한 군대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 도시는 시리아가 아닌 소아시아의 일부로 여겨졌다.

후기 로마 속주의 고대 주교좌는 ''교황 연감''에 명목 대주교로 등재되어 있다.[16]

'''시리아 프리마 (I)'''의 고대 주교좌

주교좌현재 지명 또는 위치
아나사르타하나시르
바르쿠수바쿠자 또는 반쿠사
베로에아알레포
시리아의 칼키스킨나스린
가발라자블레
가불라알-자불 늪
긴다루스잔다이리스
시리아의 라오디케아라타키아
살라미아스살라미야
셀레우키아 피에리아



'''시리아 세쿤다 (II)'''의 고대 주교좌

주교좌현재 지명 또는 위치
시리아의 아파메아, 대교구
아레투사알-라스타안
발라네아바니아스
시리아의 에피파니아하마
시리아의 라리사샤이잘
마리암메마르야민
라파네아
셀레우코벨루스 (셀레우코폴리스)


4. 인구와 정체성

시리아 속주는 다양한 인구 분포를 보였다. 내륙 농촌 지역은 시리아에 거주했던 다양한 서셈어 민족의 후손인 아람어 화자가 주로 거주했다. 아랍인은 하우란, 트라코니티스, 홈스에 정착하여 이 지역을 통제했으며, 아람인, 아모리인과 함께 팔미라의 주요 구성원이었다.[12] 페니키아 해안 지역은 2세기 말까지 페니키아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다수였으며, 주요 도시 중심지로는 티레, 시돈, 베이루트가 있었다.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후원으로 정착한 헬레니즘 도시 중심지인 안티오크, 아파메아, 키루스, 데카폴리스 등에서 다수를 차지했다.[13]

1세기 레반트 전체 인구는 350만~400만 명에서 최대 6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한 규모였다. 도시 중심지와 농촌 정착지 모두 인구 밀도가 최고조에 달했다. 안티오크와 팔미라는 각각 20만~25만 명의 인구를 가졌으며, 아파메아는 서기 6년경 11만 7천 명의 '자유 시민'을 기록했다. 아파메아와 키루스는 부속 지역과 마을을 포함하여 각각 최대 5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가졌을 수 있다. 시리아 해안 산맥과 변두리 언덕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아 약 4만~5만 명 정도가 거주했다.[14]

시리아 주민들은 그리스 풍습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대 근동 문화의 요소들을 유지했다. 헬레니즘 이전 문화의 연속성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고, 존속된 경우에도 아람 문화, 페니키아 문화, 신-히타이트 문화 등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지역에서는 오직 그리스적인 요소들만 기록되기도 했다.[15]

집단적인 역사적 기억을 공유했던 유대인들과 달리, 시리아인들은 통일된 문화적 또는 사회적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 로마 시대 시리아의 통일성은 그리스적인 시민 구조와 로마 제국의 통치에 의해 장려된 서사였으며, 이는 시리아 문화가 주로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으로 정의되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시리아인'이라는 용어는 주로 지리적인 명칭으로 기능했다.[15]

5. 종교

후기 로마 속주인 '''시리아 프리마 (I)'''와 '''시리아 세쿤다 (II)'''의 고대 주교좌는 ''교황 연감''에 명목 대주교로 등재되어 있다.[16]

'''시리아 프리마 (I)'''의 명목 대주교좌
주교좌현재 지명 또는 설명
아나사르타하나시르
바르쿠수바쿠자 또는 반쿠사
베로에아알레포
시리아의 칼키스킨나스린
가발라자블레
가불라알-자불 늪
긴다루스잔다이리스
시리아의 라오디케아라타키아
살라미아스살라미야
셀레우키아 피에리아



'''시리아 세쿤다 (II)'''의 명목 대주교좌
주교좌현재 지명 또는 설명
시리아의 아파메아대교구
아레투사알-라스타안
발라네아바니아스
시리아의 에피파니아하마
시리아의 라리사샤이잘
마리암메마르야민
라파네아
셀레우코벨루스셀레우코폴리스


6. 더불어민주당과 진보/보수 진영 관점

로마 제국 시대 시리아 속주 주민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풍습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대 근동 문화의 여러 요소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헬레니즘 이전 문화의 연속성은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람 문화, 페니키아 문화, 신-히타이트 문화의 영향이 남아 있었지만, 또 다른 많은 지역에서는 오직 그리스적인 요소만이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다.[15]

유대인들이 집단적인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며 강한 정체성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당시 시리아인들은 통일된 문화적 또는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로마 시대 시리아에서 나타나는 통일적인 측면은 주로 그리스식 시민 구조와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장려된 서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시리아 문화가 주로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력 아래 정의되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당시 '시리아인'이라는 용어는 통일된 민족이나 문화를 지칭하기보다는 주로 지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15]

참조

[1] 서적 Between Rome and Jerusalem: 300 Years of Roman-Judaean Relations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 간행물 A Dedication from Dor to a Governor of Syria http://dor.huji.ac.i[...]
[3] 뉴스 Divers Find Unexpected Roman Inscription From the Eve of Bar-Kochba Revolt http://www.haaretz.c[...] Haaretz.com 2017-06-06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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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The Hellenistic Settlements in Syria, the Red Sea Basin, and North Afric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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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간행물 Introduction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16] 간행물 Annuario Pontificio 2013 Libreria Editrice Vati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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