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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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귀족은 1910년 일본의 조선 병합 이후,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 황족, 종친, 문벌, 공로자 등을 후작, 백작, 자작, 남작에 봉작하여 부여한 작위 제도이다. 1910년 76명이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추가 수여와 세습을 통해 총 158명이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조선귀족은 일본 화족과 유사한 특권을 누렸으나, 조선총독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일부는 작위를 거부하거나 반납했으며, 친일 행위, 반일 활동, 범죄 등으로 인해 작위가 박탈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독립 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처벌 및 재산 환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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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 |
---|---|
개요 | |
유형 | 귀족 |
국가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
존속 기간 | 1910년 ~ 1947년 |
신분 | 양반 |
창설 | 1910년 |
폐지 | 1947년 5월 2일 |
역사 | |
배경 |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본 정부가 조선 왕족 및 척족, 고위 관료 등에게 일본 화족의 예에 따라 작위와 은사금을 지급 |
법적 근거 | 조선귀족령 (1910년 8월 29일 제령 제14호) |
폐지 | 황실령 및 부속 법령 폐지의 건 (1947년 5월 2일 칙령 제49호) |
구성 | |
작위 |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
인원 | 총 76명 (왕족 6명, 부(府) 2명, 공신 및 유력 가문 68명) |
특징 | |
세습 | 원칙적으로 1대만 세습 (특별한 공로가 있는 경우에 한해 세습 허용) |
특권 | 작위에 따른 예우 은사금 지급 귀족원 의원 피선거권 (일부) |
영향 | |
사회적 영향 | 조선귀족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며 사회적 지위를 유지 |
친일반민족행위 | 상당수 조선귀족이 친일반민족행위에 가담하여 해방 이후 비판을 받음 |
같이 보기 |
2. 형성
1910년 8월 29일,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이 공포되면서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 종친, 문지(門地), 훈공이라는 기준에 따라 선정된 고위급 인물들을 후작, 백작, 자작, 남작에 봉작하였다.[64] 한일 병합 당시에 작위를 받은 76명(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과[65] 1924년에 추가로 작위를 받은 이항구, 작위를 계승한 81명을 포함하여 총 158명이 조선귀족으로서 작위를 받았다.[66]
조선귀족은 조선귀족령에 근거하여 일본 화족과 동일한 예우를 받았다. 법규로서 구속력을 갖는 가범(家範)을 제정할 권리(제9조), 작위 세습의 권리(제10조)를 보장받았다.[64] 1897년 칙령 제10호 〈서위조례〉(敍位條例)와 1926년 칙령 제325호 〈위계령〉(位階令)에 의거하여 작위에 따라 위계를 하사받았다.[72] 공적인 의식에서의 좌석 순서를 뜻하는 궁중석차(宮中席次)를 작위와 위계에 따라 받았다.[73] 작위에 따른 대례복 착용이 허용되었으며,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가쿠슈인(学習院)에 입학할 수 있었고, 결원이 발생할 경우 무시험으로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74]
일본 화족이 궁내성의 감독을 받는 것과 다르게 조선귀족은 조선총독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었으며, 조선총독은 일본 황실령 제15호 〈조선에 재주하는 귀족에 관한 건〉을 통하여 감독권을 행사하였다.[67]
1910년에 작위를 받은 76명 가운데 김석진, 윤용구, 홍순형, 한규설, 민영달, 조경호, 조정구, 유길준은 작위를 거부하거나 반납하였다.[67] 이들을 제외한 68명은 같은 해 10월 7일 수작영식(授爵榮式),[68] 1911년 2월 22일 작기본서 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참석하였으며,[69] 1911년 1월 12일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공채본권 교부식(公債本券交付式)에 참석하여 작기와 은사공채권을 수령하였다.[70] 1911년 9월 9일에는 일본의 화족회를 모방하여 박영효를 초대 회장으로 하는 조선귀족회를 설립하였다.[71]
조선귀족의 당주는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으로 5단계의 작위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졌으며,[2] 조선귀족령 제정 당시인 1910년(메이지 44년) 10월 7일에 76명이 작위를 받았으나, 공작으로 서열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3]
화족과 같은 예우가 정해졌고,[4] 위계, 서위,[5] 세습 재산의 설정, 학습원 입학 및 대례복 등에 관해서는 화족과 같은 특권을 가졌지만, 귀족원 의원의 유작자 의원이 되는 특권은 없었다.
조선귀족의 족칭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당주와 그 배우자, 상속인과 그 장자, 당주의 아버지·조부·증조부, 또한 그들의 배우자와 전 당주의 미망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6]
조선귀족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집안이 많았다. 쇼와 시대에는 조선귀족의 빈궁함이 상당한 수준이 되었다.
3. 특권
1932년 박영효가 칙선의원으로 귀족원에 참여하기 전까지 조선귀족은 귀족원 구성에서 배제되었다.[75]
일본 정부는 조선귀족의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고자 은사공채증권을 교부하였다.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되는 것이며, 연리 5%의 이자는 매년 3월과 9월에 조선은행 또는 우체국에서 지불되었다.[76]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 및 삼림 불하(매각) 과정에서 무상 대부 및 불하를 받았다.[77] 1927년에는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을 제정·공포하여 세습재산을 설정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928년에는 〈조선귀족보호자금령〉을 공포하고 재단을 설립하여 궁핍한 귀족들에 대한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다.[78]
조선귀족의 당주는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으로 5단계의 작위를 가졌으며,[2] 화족과 같은 예우,[4] 위계 서위,[5] 세습 재산 설정, 학습원 입학 및 대례복 등에 관한 특권을 가졌지만, 귀족원 의원 유작자 의원이 되는 특권은 없었다.
조선귀족의 족칭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당주와 그 배우자, 상속인과 그 장자, 당주의 아버지·조부·증조부, 또한 그들의 배우자와 전 당주의 미망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6]
조선귀족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집안이 많았다. 쇼와 시대에는 조선귀족의 빈궁함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4. 통제
4. 1. 승작 및 신 수작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 작위를 받은 이완용은 1920년 후작으로 승작되었다.[7] 같은 해, 송병준과 고희경도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되었다.[10]
1924년에는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가 남작 작위를 새로 받았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유일한 신 수작 사례였다.[29]
4. 2. 작위 박탈 및 실작
수작자 중 일부는 반일적인 활동이나 충성을 다하지 않은 행위를 이유로 작위가 박탈되거나 습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약, 도박 등으로 인한 형사범은 조선귀족으로서의 결격사유에 해당되어 작위가 박탈되었다.
5. 평가
1920년대 이후 일본이 문화 통치로 식민정책을 전환하고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 집단이 성장하면서, 정체되고 무능력한 조선귀족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게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91] 1929년 조선총독부는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조선귀족들을 지원하기 위해 창복회(昌福會)를 설립하기도 했으나,[92] 조선귀족들은 일본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각종 통치기구, 사회단체, 수탈기구에 참여하고 집필 활동을 통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다.[91]
5. 1. 대한민국 독립 이후의 평가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와 제4조 제1항에 의하여 조선귀족 수작자와 습작자는 당연범으로 처벌대상이 되었다.[93] 2004년 3월,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정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는 수작 및 습작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였다.[94] 이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41명을 귀족 분야의 조사대상자로 심의하여 총 139명(이재면, 수작자 64명, 습작자 74명)을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였다.[95]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작위 거부·반납자 및 상실자, 민족운동 참여자를 제외한 조선귀족 137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여 수록하였다.[96]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도운 것으로 알려진 5명의 대신들을 대한민국에서는 "을사오적"이라고 부르며, 현대에도 친일파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을사오적은 이완용 (학부대신), 이지용 (내부대신), 이하영 (법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이근택 (군부대신)이다. 이하영 대신 박제순 (외부대신)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1907년 제3차 한일 협약 체결 당시의 각료 7명은 한국에서 "정미칠적"이라고 불리며, 현대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미칠적은 이완용 (내각총리대신), 임선준 (내부대신), 고영희 (탁지부대신), 이병무 (군부대신), 이재곤 (학부대신), 송병준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법부대신)이다.
6. 수작 및 습작자 목록
작위 | 수작자 | 습작자 | 변동 사항 |
---|---|---|---|
후작 | 이재완 | 이달용 | |
이재각 | 이덕용 | ||
이해창 | 이덕주 | ||
이해승 | |||
윤택영 | 윤의섭 | ||
박영효 | 박찬범 | ||
백작 | 이완용 | 이병길 | 1920년에 이완용이 후작으로 승작됨 |
이지용 | 이영주 | 1912년에 이지용이 도박죄로 구속됨에 따라 예우가 일시 정지됨 | |
민영린 | bgcolor="#BCD2EE"| | 1919년에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가 박탈됨 | |
자작 | 송병준 | 송종헌 | 1920년에 송병준이 백작으로 승작됨 |
고영희 | 고희경 - 고흥겸 - 고중덕 | 1920년에 고희경이 백작으로 승작됨 | |
이완용 | 이택주 | ||
이기용 | |||
박제순 | 박부양 | ||
조중응 | 조대호 - 조원흥 | ||
민병석 | 민홍기 | ||
이용직 | bgcolor="#BCD2EE"| | 1919년에 조선총독부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인해 작위가 박탈됨 | |
김윤식 | bgcolor="#BCD2EE"| | 1919년에 조선총독부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인해 작위가 박탈됨 | |
권중현 | 권태환 | ||
이하영 | 이규원 | ||
이근택 | 이창훈 | ||
임선준 | 임낙호 - 임선재 | ||
이재곤 | 이해국 | ||
윤덕영 | 윤강로 | ||
조민희 | 조중수 - 조용호 | ||
이병무 | 이홍묵 | ||
이근명 | 이충세 - 이종승 | ||
민영규 | 민병삼 | ||
민영소 | 민충식 | ||
민영휘 | 민형식 | ||
김성근 | 김호규 | ||
남작 | 윤용구 | bgcolor="#FFC1C1"| | 1910년에 수작 거부 |
홍순형 | bgcolor="#FFC1C1"| | 1910년에 수작 거부 | |
김석진 | bgcolor="#FFC1C1"| | 1910년에 수작 거부 | |
한창수 | 한상기 - 한상억 | ||
이근상 | 이장훈 | ||
조희연 | bgcolor="#BCD2EE"| | 1915년에 파산으로 인하여 작위를 반납함 | |
박제빈 | 박서양 | ||
성기운 | 성주경 - 성일용 | ||
김춘희 | 김교신 - 김정록 | ||
조동희 | 조중헌 - 조원세 | 재산 분쟁으로 인하여 예우 정지와 해제를 두 차례 반복함 | |
박기양 | 박승원 - 박정서 | ||
김사준 | bgcolor="#BCD2EE"| | 1915년에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가 박탈됨 | |
장석주 | 장인원 | ||
민상호 | 민영욱 | ||
조동윤 | 조중구 | ||
최석민 | 최정원 | ||
한규설 | bgcolor="#FFC1C1"| | 1910년에 수작 거부 | |
유길준 | bgcolor="#FFC1C1"| | 1910년에 수작 거부 | |
남정철 | 남장희 | ||
이건하 | 이범팔 - 이완종 | ||
이용태 | 이중환 | ||
김병익 | bgcolor="#BCD2EE"| | 1919년에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가 박탈됨 | |
민영달 | bgcolor="#FFC1C1"| | 1910년에 수작 거부 | |
민영기 | 민건식 - 민병억 | ||
이종건 | 이풍한 | 이종건은 작위 반납을 표명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불허 결정에 따라 작위가 유지됨 | |
이봉의 | 이기원 - 이강식 - 이홍재 | ||
윤웅렬 | 윤치호 | 1913년에 윤치호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가 박탈됨 | |
이근호 | 이동훈 | ||
김가진 | 1919년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참가함에 따라 습작 불능 처리됨 | ||
정낙용 | 정주영 - 정두화 | ||
민종묵 | 민철훈 - 민규현 - 민태곤 - 민태윤 | ||
이재극 | 이인용 | ||
이윤용 | 이병옥 | ||
이정로 | 이능세 | ||
김영철 | 김영수 - 김용국 | ||
이용원 | 이원호 - 이창수 | ||
김종한 | 김세현 | ||
조정구 | bgcolor="#FFC1C1"| | 1910년에 수작 거부 | |
김학진 | 김덕한 | ||
박용대 | 박경원 | ||
조경호 | bgcolor="#FFC1C1"| | 1910년에 수작 거부 | |
김사철 | 김석기 | ||
정한조 | 정천모 | ||
이주영 | 이규환 - 이경우 | ||
민형식 | 민형식의 아들들이 아편 중독자, 전과범으로 분류되어 습작 불능 처리됨 | ||
이항구 | 이병주 | 1924년에 이항구가 추가로 작위를 수작함 | |
특기 사항이 없는 자는 1910년(메이지 44년) 10월 7일에 서작되었다.
참조
[1]
법률
조선귀족령 제2조
[2]
법률
조선귀족령 제3조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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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률
조선귀족령 제5조
[5]
법률
메이지 43년 황실령 제15호 조선귀족의 서위에 관한 건
[6]
법률
조선귀족령 제7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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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思濬씨 失爵
http://gonews.kinds.[...]
매일신보
2012-09-03
[83]
뉴스
金嘉鎭氏 長逝 사일 오후 열시 상해에서
http://db.history.go[...]
동아일보
1922-07-07
[84]
뉴스
朝鮮貴族現狀 併合當時보다 十五名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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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2012-09-03
[85]
뉴스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귀족을 포박
http://db.history.go[...]
신한민보
1919-06-26
[86]
뉴스
동경特電: 尹致昊의 失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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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2012-09-03
[87]
서적
(Unspecified)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88]
뉴스
동경전보: 李址鎔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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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2-04-09
[89]
뉴스
백작 이지용씨의 예우정지를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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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2012-09-03
[90]
서적
(Unspecified)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91]
서적
(Unspecified)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92]
서적
(Unspecified)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93]
서적
친일인명사전 1
민족문제연구소
2009-11-06
[94]
서적
(Unspecified)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95]
서적
(Unspecified)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96]
서적
(Unspecified)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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