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지일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지일파는 일본에 우호적인 인물이나 세력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국가와 시기에 걸쳐 존재해 왔다.

한국의 경우, 조선 시대에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적을 보인 인물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정치, 문화, 학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과 관계를 맺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중국, 대만, 미국 등 다른 국가에서도 지일파로 분류되는 인물들이 존재하며, 일본은 국가 이익을 위해 지일파를 육성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일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하며, 한일 관계에 대한 시사점과 미래 지향적인 관계 구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대외 관계 - 친일
    친일은 일본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나 일본 관련 동향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의미하며,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며, 국가 간 관계, 문화적 교류, 경제적 영향 등 다양한 요소가 친일 감정 형성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 일본의 대외 관계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는 1955년 결성된 재일 조선인 단체로, 북한을 지지하며 교육, 금융, 언론 기관을 산하에 두고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일본 정부의 감시 대상이자 사회 갈등, 북한 관계 변화, 재정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일파
지도
개요
명칭일파 (日派)
정의일본을 옹호하거나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 집단 또는 그러한 경향.
관련 개념친일파, 지일파
특징
일반적 인식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음.
역사적 맥락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연관되어 논란이 됨.
사용 맥락일본 문화, 정치, 경제 등에 대한 호감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비판 부족 또는 옹호
반일 감정에 대한 반발
비판적 시각
비판 내용역사 인식 부족 또는 왜곡
제국주의 미화
민족주의 배격
연관된 논쟁과거사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
식민지배 책임
현대 사회의 일파
유형일본 문화 및 제품 선호자
일본 정치 및 외교 옹호자
우익 성향의 일본 옹호자
논란점혐한 감정 확산 우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해 및 왜곡
사회적 갈등 유발 가능성
관련 용어
관련 용어친일파
지일파
반일
혐일

2. 역사적 인물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김옥균, 박철주 등이, 일제 강점기에는 박정희, 김종필 등이 대표적인 지일파 인물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김대중, 지명관, 전두환, 오선화, 선동열, 백진훈 등이 있다.


  • 김옥균: 조선 말기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었다.
  • 박철주: 한일문화연구협회를 설립하였다. 이 협회는 “일본 상대 문화 연구”, “귀화 문화 연구”, “일본의 신앙, 도덕 등 정신 문화 연구”를 연구 주제로 하는 싱크탱크 기관이었다.
  • 박정희: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제5~9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했다.[2] 일제 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반일적인 애국 교육을 추진하기도 했다.[2]
  • 김종필: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한일의원연맹 간부로 활동했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현대의 이완용이 되겠다"라며 반대 운동에 맞섰다.[2]
  • 김대중: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일본 문화의 자유화를 추진했고,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한국의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2]
  • 지명관: 일본 여자대학교에서 20년간 교편을 잡았고, 한일 문화 교류 회의 한국 측 회장을 역임했다.
  • 전두환: 대한민국의 제11, 12대 대통령이다. 광복절 연설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책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책임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2]
  • 오선화: 한국 출신의 일본 평론가로, 1991년 일본에 귀화했다. 저서로는 『「일제」만으로는 역사는 말할 수 없다』, 『「반일 한국」에 미래는 없다』 등이 있다.[2]
  • 선동열: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한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전 감독이다.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고,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한다.[2]
  • 백진훈: 전 일본 주재 언론인으로 2003년 귀화했다. 전 참의원 의원이다.[2]


중국의 경우 청나라 시대에는 캉유웨이(康有為),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중화민국 시대에는 장제스(蔣介石), 왕징웨이(汪兆銘) 등이, 중화인민공화국 시대에는 주은래(周恩来), 후야오방(胡耀邦) 등이 대표적인 지일파 인물이었다.

이름주요 활동 및 일본과의 관계
쑹자오런(宋教仁)
인루경(殷汝耕)
진비둥(金壁東)(아이신교로 헌규(愛新覚羅憲奎))
후치리(胡啓立)
쩡칭훙(曽慶紅)
리커창(李克強)베이징 대학(北京大学) 재학 시절 일본 방문 경험이 있다.
우다웨이(武大偉)
청융화(程永華)
류훙차이(劉洪才)
쑨핑화(孫平化)
왕샤오윈(王暁雲)
샤오셴창(蕭向前)
장샹산(張香山)
캉유웨이(康有為)[1]
량치차오(梁啓超)[1]
쑨원(孫文)[1]
뤄전위(羅振玉)[1]
아이신교로 선기(愛新覚羅善耆)[1]
아이신교로 푸제(愛新覚羅溥傑)[1]
카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아이신교로 현자(愛新覚羅顯㺭))[1]
장제스(蔣介石)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어에 능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 군 수뇌부 중 으뜸가는 친일파였으나, 중일전쟁 중반 이후에는 항전으로 전환했다.
왕징웨이(汪兆銘)중일전쟁 중 일본의 괴뢰 정부를 수립하였다.
주은래(周恩来)메이지 대학(明治大学)에 유학했다. 일중 국교 정상화(日中国交正常化)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등을 접대했다.[1]
후야오방(胡耀邦)개혁 개방(改革開放)의 일환으로 일본과의 관계 심화에 힘썼다.
조자양(趙紫陽)후야오방의 후계자로서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실각의 한 원인으로 여겨진다.[1]
덩샤오핑(鄧小平)1978년 일중 평화 우호 조약(日中平和友好条約) 체결 당시 일본을 방문했다.
탕쟈쉬안(唐家璇)[1]
왕이(王毅)[1]
궈모뤄(郭沫若)[1]
스핑(石平)천안문 사건(天安門事件)을 계기로 "반공, 친일"을 내세우는 평론가이다.[1]



대만의 경우 일제 강점기에는 이등휘가, 중화민국 시대에는 셰창팅(謝長廷)이 대표적인 지일파 인물이었다.


  • 이등휘: 일제 강점기에 교육받은 세대(일본어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신을 "반(半)일본인"이라고 불렀다.[2]
  • 셰창팅(謝長廷): 교토대학 유학 경력이 있으며, 한일 관계사를 중시한다.[2][3]


유럽의 경우, 프랑스에는 자크 시라크, 앙드레 말로 등이, 독일에는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 브루노 타우트 등이, 영국에는 제러미 헌트 등이 대표적인 지일파 인물이었다.

북미의 경우, 에드윈 O. 라이쇼어, 조셉 그루 등이 대표적인 지일파 인물이었다.

  • 에드윈 O. 라이쇼어(Edwin O. Reischauer): 미국의 동양사 연구자.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주일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1]
  • 커트 캠벨(Kurt Campbell): 외교관. 미국 국방부미국 국무부에서 대일 문제를 다루었다.[2]
  • 조셉 그루(Joseph C. Grew): 미국의 외교관. 1932년부터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시까지 주일 대사를 역임했다.[3]
  • 조셉 나이(Joseph Nye):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이자 정치가이다.[4]
  • 폴 러시(Paul Rush): 릿쿄대학 교수. 종전 후 GHQ의 일원으로 일본 점령 정책에 관여했다.[5]
  •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 미국의 정치학자, 외교관. 미일 동맹 관계에 정통하다.[6]
  • 케빈 메어(Kevin Maher): 변호사, 외교관. 2010년 국무부에서 해임되고 사직했다.
  •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미국의 정치가이자 변호사. 공화당 소속이다.


남미의 경우, 둥가가 대표적인 지일파 인물이었다.

러시아의 경우,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이 대표적인 지일파 인물이었다.

2. 1. 한국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어온 인물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김옥균, 박철주 등이, 일제 강점기에는 박정희, 김종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김대중, 지명관, 전두환, 오선화, 선동열, 백진훈 등이 있다.

2. 1. 1. 일제 강점기 이전


  • 김옥균: 조선 말기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었다.
  • 박철주: 한일문화연구협회를 설립하였다. 이 협회는 “일본 상대 문화 연구”, “귀화 문화 연구”, “일본의 신앙, 도덕 등 정신 문화 연구”를 연구 주제로 하는 싱크탱크 기관이었다.

2. 1. 2. 일제 강점기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제5~9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군사 독재 정권을 이끌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당시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했다.[2] 한국이 "일본을 배우고 강국이 될 것"을 목표로 했다.[2]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반일적인 애국 교육을 추진하기도 했다.[2] 문세광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을 때는 "일본은 적화 공작의 기지가 되고 있다"며 분노를 표출했다.[2]

김종필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한일의원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한일 관계 개선에 힘썼다. 일본 유학을 희망했고, 기쿠치 칸 등 일본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친일파였다.[2]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에는 "현대의 이완용이 되겠다"라며 반대 운동에 맞섰다.[2]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일본 정부에 사과하기도 했다.[2] 은퇴 후에는 "일본을 좋아하는 나"라고 발언하기도 했으며,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다.[2]

2. 1. 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박정희의 정적이었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깊었다. 박정희 정권의 테러를 피해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하의 중앙정보부(KCIA)에 의해 일본 호텔에서 납치 감금되기도 했다(김대중 납치 사건). 대통령으로서 일본 문화의 자유화를 추진했고,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한국의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2]

지명관은 일본 여자대학교에서 20년간 교편을 잡았고, 한일 문화 교류 회의 한국 측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에서 군사 독재 정권 비판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T·K 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썼다고 고백했다.[2]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제11, 12대 대통령이다. 군사 독재 정권의 권력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에 한국 국민, 특히 좌파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광복절 연설에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책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책임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등 과도한 반일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1983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방일하여 쇼와 천황과 회담했다. 일본 정재계와의 관계도 깊었고, 특히 세지마 류조와는 젊은 장교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서울 올림픽 개최를 둘러싸고 지원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을 때는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아 국내에서 유약하다고 비판받았다.[2]

오선화는 한국 출신의 일본 평론가이다. 1983년 일본의 다이토 문화대학에 유학하여 이후 친일파가 되었다. 1991년 일본에 귀화했다. 저서로는 『「일제」만으로는 역사는 말할 수 없다』, 『「반일 한국」에 미래는 없다』 등이 있으며, 대립하는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해 주로 한국 측을 비판하고 있다.[2]

선동열은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한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전 감독이다.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에서 155km 전후의 직구와 두 가지 종류의 고속 슬라이더와 제구력으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하여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하여 좋은 성적을 남겼다. 전 삼성 라이온즈·KIA 타이거즈 감독이며,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도 역임했다. 한국의 에이스라고 불리면서도 현역 시절부터 거만한 구석이 없고, 인간 관계도 원만하며, 일본 프로 야구를 중심으로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다.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 고등학교 야구 팬이기도 하고,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에도 참가하는 등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2]

백진훈은 전 일본 주재 언론인으로 2003년 귀화했다. 전 참의원 의원이다.[2]

2. 2. 중국

중국은 역사적으로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인물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이름주요 활동 및 일본과의 관계
쑹자오런(宋教仁)
인루경(殷汝耕)
진비둥(金壁東)(아이신교로 헌규(愛新覚羅憲奎))
후치리(胡啓立)
쩡칭훙(曽慶紅)
리커창(李克強)베이징 대학(北京大学) 재학 시절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여러 정치인의 자택에서 홈스테이를 한 경험이 있다.
우다웨이(武大偉)
청융화(程永華)
류훙차이(劉洪才)
쑨핑화(孫平化)
왕샤오윈(王暁雲)
샤오셴창(蕭向前)
장샹산(張香山)


2. 2. 1. 청나라 시대

2. 2. 2. 중화민국 시대


  • 장제스(蔣介石):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어에도 능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 군 수뇌부 중 으뜸가는 친일파로 알려졌으나, 중일전쟁 중반 이후에는 전면 항전으로 전환하여 친일파를 숙청하는 등 강경 전략을 펼쳤다. 전후에는 "덕으로써 원한에 보답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복원을 원활하게 진행하여 일본 내 친중파·친대파 형성에 기여했다.
  • 왕징웨이(汪兆銘): 중일전쟁 중 일본의 괴뢰 정부를 수립하였다.

2. 2. 3. 중화인민공화국 시대


  • 주은래(周恩来)

: 메이지 대학(明治大学)에 유학했다. 일중 국교 정상화(日中国交正常化)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등을 접대하며, 이후 일본 정계에 영향력을 가진 친중파(親中派)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1]
: 개혁 개방(改革開放)의 일환으로 일본과의 관계 심화에 힘썼다.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저쪽 친일파(후야오방을 가리킴)가 실각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유로 이를 중단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오류 국가주의자이며 원자폭탄은 4발 투하해야 했다"고 발언하여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1]

  • 조자양(趙紫陽)

: 후야오방의 후계자로서 일본에서는 친일파 이미지가 있으며,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실각의 한 원인으로 여겨진다.[1]
: 1978년 일중 평화 우호 조약(日中平和友好条約) 체결 당시 일본을 방문하여 공업 지대 등을 시찰하면서 일본의 기술 수준과 생활 수준의 높이에 놀라 "일본은 세계사상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다"라고 말했고, 그것이 이후 개혁 개방 노선으로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실권을 잡았던 후기에는 난징 대학살 희생자 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遭難同胞紀念館)을 개관하는 등 점차 반일 노선으로 이동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대일 강경파인 장쩌민(江沢民)을 지명했다.[1]
: 천안문 사건(天安門事件)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깊은 절망을 품고 명확한 "반공, 친일"을 내세우는 평론가이다. 그 극단적인 태도 때문에 등장 당시 중국 언론계에서 "스핑은 중국인을 가장한 일본인이다"라며 한족임을 부정당했다.[1]

2. 3. 대만

일제 강점기에 교육받은 세대(일본어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등휘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서 고사포를 다루었다. 그는 일본어, 대만어(민남어), 영어, 국어(베이징어)에 능통했으며, 자신을 "반(半)일본인"이라고 불렀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를 연구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전면 지지했으며, 대만에서의 일본 식민지 정책을 높이 평가하는 등 일본 보수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한편, 전 총통이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지나치게 친일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대만과 중국에서 매국노로 비난받기도 했다.[2]

교토대학 유학 경력이 있는 셰창팅(謝長廷)은 한일 관계사를 중시하여 지일파로 불린다.[2][3]

2. 3. 1. 일제 강점기

이등휘는 일제 강점기에 교육받은 세대(일본어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에서 고사포를 다루었다. 그는 일본어, 대만어(민남어), 영어, 국어(베이징어) 순으로 네 가지 언어에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을 "반(半)일본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 연구,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전면 지지, 그리고 대만에서의 일본 식민지 정책을 높이 평가하는 등 일본 보수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한편, 전 총통이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지나치게 친일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대만과 중국에서 매국노로 비난받기도 했다.[2]

2. 3. 2. 중화민국 시대

셰창팅(謝長廷)은 교토대학 유학 경력이 있으며, 한일 관계사, 즉 대일 관계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지일파로 불린다.[2][3]

2. 4. 유럽

유럽의 지일파 인물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
  •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제5공화국의 제5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일본 문화, 특히 스모의 팬으로 알려져 있으며, 애견의 이름을 "스모"라고 지을 정도였다. 주일 프랑스 대사관으로부터 매일 대相撲 결과를 보고받았으며,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관전하기도 했다. 토우와 하니와의 차이점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설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1]
  • 앙드레 말로: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이다.[2]
  • 에드몽 드 곤쿠르: 프랑스의 연구가로, 일본 미술 연구에 기여했으며, 프랑스의 아쿠타가와상에 해당하는 곤쿠르상을 창설했다. 스스로 자포니즘의 선구자를 자처했다.[3]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로, 일본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을 "일본 문명"으로 칭하며, 일본의 불교 수용 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고, 1993년 훈이등욱일중광장을 수여받았다.[4]
  • 독일
  •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 독일의사이자 자연과학자로, 나가사키에 사숙인 명담서당을 설립했다. 네덜란드 상관 의사 신분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인인 체 했다.[1]
  • 브루노 타우트: 독일의 건축가이다.[2]
  • 영국
  • 제러미 헌트: 영국정치인으로, 일본에서 2년간 영어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일본어에 능숙하다. 현대 일본 문화 애호가이기도 하다.[1]
  • 스위스
  • 샤를 뒤투아: 스위스의 지휘자이다.
  • 핀란드
  • 마르티 투루넨: 핀란드 출신의 일본 정치인이다. 선교사로 일본에 온 후, 영어 회화 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1979년 일본으로 귀화하였다. 이후 유가와라정 의원을 거쳐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참의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 세르비아
  •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전 축구 선수이자 전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 감독이다.

2. 4. 1. 프랑스


: 프랑스 제5공화국의 제5대 대통령이다. 일본 팬으로, 공무 외에도 사적으로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스모 팬이기도 하며, 애견의 이름을 "스모"라고 지었다. 엘리제궁에 주일 프랑스 대사관으로부터 매일 대相撲 결과를 자세히 보고받았으며, 때로는 직접 일본에 와서 마스석에서 관전하기도 했다. 대통령 취임 전 파리 시장 시절 일본TV 계열 퀴즈 프로그램 『제9회 미국횡단 울트라 퀴즈』의 결승지로 파리시 유치를 적극 추진했으며, 1986년 대相撲의 파리 공연과 1995년 파리 공연을 주최했다.[1] 토우와 하니와의 차이점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설명을 할 수 있다.[1]
: 프랑스의 작가, 정치가이다.[2]

  • 에드몽 드 곤쿠르(Edmond de Goncourt)

: 프랑스의 연구가이다. 일본 미술 연구가로, 프랑스의 아쿠타가와상에 해당하는 곤쿠르상을 창설했다. 스스로 자포니즘의 선구자를 자처했다.[3]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이다. 유년 시절 자포니즘에 접한 이후 말년까지 일본의 공예품과 미술품을 애호했다. 일본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본을 세계에서 강한 독자성을 가진 문화권으로서 "일본 문명"으로 칭했다. 일본의 불교의 수용 방식(신도와의 공존)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도 불교를 받아들였다.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고, 1993년 훈이등욱일중광장을 수여받았다.[4]

2. 4. 2. 독일


  •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 독일의사, 자연과학자. 나가사키에 사숙인 명담서당을 설립하였다. 네덜란드 상관 의사 신분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인인 체 했다.[1]

  •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 독일의 건축가.[2]

2. 4. 3. 영국

제러미 헌트는 영국정치인이다. 일본에서 2년간 영어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일본어에 능숙하다. 현대 일본 문화 애호가이기도 하다.[1]

2. 4. 4. 스위스

샤를 뒤투아는 스위스의 지휘자이다.

2. 4. 5. 핀란드

마르티 투루넨은 핀란드 출신의 일본 정치인이다. 선교사로 일본에 온 후, 영어 회화 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1979년 일본으로 귀화하였다. 이후 유가와라정 의원을 거쳐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참의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2. 4. 6. 세르비아

2. 5. 북미


  • 에드윈 O. 라이쇼어(Edwin O. Reischauer): 미국의 동양사 연구자. 도쿄도 출생으로,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주일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 퇴임 후에도 일본 및 아시아 연구자로 활동했다. 공식 석상에서는 영어를 사용했지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기도 했다.[1] 아버지 오거스트 카를 라이쇼어도 일본 연구자로, 메이지가쿠인대학 등에서 강의했다.[1]
  • 커트 캠벨(Kurt Campbell): 외교관.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미국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역임하며 대일 문제를 다루었다.[2]
  • 조셉 그루(Joseph C. Grew): 미국의 외교관. 1932년부터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시까지 주일 대사를 역임했다. 종전 시 국무차관으로서 일본 본토 결전 회피, 천황제 유지에 힘썼다. 점령기에도 미국 대일 평의회(American Council on Japan, ACJ) 등의 활동을 통해 일본의 복구 노선을 지지했다. 지일파 외교관의 대부와 같은 존재로 알려졌다.[3]
  • 조셉 나이(Joseph Nye):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이자 정치가. 민주당 계열이지만 공화당 계열의 아미티지와 함께 “아미티지 보고서”를 작성했다. 한때 신임 주일 미국 대사로 거론되었다.[4]
  • 폴 러시(Paul Rush): 릿쿄대학 교수.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도 일본 잔류를 희망했지만, 이듬해 교환선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종전 후 GHQ의 일원으로 재입국하여 일본 점령 정책에 관여했다.[5]
  •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 미국의 정치학자, 외교관. 미일 동맹 관계에 정통한 연구자이자 실무자로서 1990년대부터 활동하고 있다.[6]
  • 케빈 메어(Kevin Maher): 변호사, 외교관. 아내는 일본인. 직설적인 발언으로 여러 번 문제를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영사 재임 당시부터 언행으로 인한 사건을 일으켰고, 2010년에는 국무부 내 강의에서 발언이 문제가 되어 일본 담당 부장에서 해임되고 국무부를 사직했다.
  •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미국의 정치가이자 플로리다 주 변호사. 공화당 소속.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안보 정책, 홍콩 문제와 대만 문제에도 정통하다.

2. 5. 1. 미국


  • 에드윈 O. 라이쇼어(Edwin O. Reischauer)

: 미국의 동양사 연구자이다. 도쿄도 출생이며, 후에 일본인과 결혼하였다.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주일 미국 대사를 역임하였고, 퇴임 후에도 일본 및 아시아 연구자로서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다. 공식 석상에서는 영어를 사용했지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기도 했다.[1] 아버지 오거스트 카를 라이쇼어도 일본 연구자로, 메이지가쿠인대학 등에서 강의했다.[1]
: 외교관.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미국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역임하며 대일 문제를 다루었다.[2]

  • 조셉 그루(Joseph C. Grew)

: 미국의 외교관. 1932년부터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시까지 주일 대사를 역임했다. 종전 시 국무차관으로서 일본 본토 결전 회피, 천황제 유지에 힘썼다. 점령기에도 미국 대일 평의회(American Council on Japan, ACJ) 등의 활동을 통해 일본의 복구 노선을 지지했다. 지일파 외교관의 대부와 같은 존재로 알려졌다.[3]

  • 조셉 나이(Joseph Nye)

: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이자 정치가. 민주당 계열이지만 공화당 계열의 아미티지와 함께 “아미티지 보고서”를 작성했다. 한때 신임 주일 미국 대사로 거론되었다.[4]

  • 폴 러시(Paul Rush)

: 릿쿄대학 교수.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도 일본 잔류를 희망했지만, 이듬해 교환선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종전 후 GHQ의 일원으로 재입국하여 일본 점령 정책에 관여했다.[5]

  •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

: 미국의 정치학자, 외교관. 미일 동맹 관계에 정통한 연구자이자 실무자로서 1990년대부터 활동하고 있다.[6]

  • 케빈 메어(Kevin Maher)

: 변호사, 외교관. 아내는 일본인. 직설적인 발언으로 여러 번 문제를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영사 재임 당시부터 언행으로 인한 사건을 일으켰고, 2010년에는 국무부 내 강의에서 발언이 문제가 되어 일본 담당 부장에서 해임되고 국무부를 사직했다.

  •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 미국의 정치가이자 플로리다 주 변호사. 공화당 소속.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안보 정책, 홍콩 문제와 대만 문제에도 정통하다.

2. 6. 남미

남미 지역의 지일파는 다음과 같다.

  • 둥가: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J리그의 주빌로 이와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2. 6. 1. 브라질

둥가: 전 축구 선수이자, 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J리그주빌로 이와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일본과 일본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2. 7. 러시아


  •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 소련 대통령. 소련 붕괴 후에도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 스타니슬라프 부닌: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후에 구 서독으로 망명·귀화했다.
  • 이고리 코발리: 사할린주 남쿠릴 행정구(北方영토) 전 구청장(전 지역 의회 의장). 2009년 10월 12일, 여당계 정당인 “정의로운 러시아”에서 출마하여 재선에 도전했으나, 여당인 “통합 러시아”의 바실리 솔롬코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 그리골리 세묘노프: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 수뇌부 중 한 명.

3. 현대의 지일파

현대 사회에서 '지일파'는 정치, 경제, 학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일본과의 교류 및 협력을 추구하거나, 일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한다.

하위 섹션에서 이미 다루고 있는 내용 외에 경제 분야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경제: 경제 분야의 지일파는 주로 기업 경영인이나 경제 전문가들로, 한일 경제 협력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구체적인 인물 정보는 원본 소스에 명시되지 않았다.

3. 1. 정치 및 외교 분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제5~9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군사 독재 정권을 이끌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대통령 재임 시절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는 한국이 "일본을 배우고 강국이 될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2]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으로, 박정희의 정적이었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깊었다.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박정희 정권 시절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일본 호텔에서 납치되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일본 문화 개방을 추진했다.[2]

김종필은 대한민국의 전 국무총리로, 오랫동안 한일의원연맹 간부를 역임하며 한일 로비의 한국 측 창구 역할을 하는 등 대일 융화 정책을 펼쳤다.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기본 조약) 체결 당시 "현대의 이완용이 되겠다"라며 반대 운동에 맞섰다.[2]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제11, 12대 대통령으로, 군사 독재 정권의 권력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여 한국 국민, 특히 좌파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광복절 연설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책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책임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등 과도한 반일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1983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방일하여 쇼와 천황과 회담했다.[2]

오선화는 한국 출신의 일본 평론가로, 1983년 일본 다이토 문화대학에 유학한 후 친일파가 되었다. 1991년 일본에 귀화했으며, 저서로는 『「일제」만으로는 역사는 말할 수 없다』, 『「반일 한국」에 미래는 없다』 등이 있다. 한일 간 역사 문제에 대해 주로 한국 측을 비판하고 있다.[2]

백진훈은 전 일본 주재 언론인으로 2003년 귀화했다. 전 참의원 의원이다.[2]

셰창팅은 교토대학 유학 경력이 있으며, 한일 관계사 등 대일 관계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친일파로 불린다.[2][3]

중국의 경우, 리커창(李克強)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는 베이징 대학 재학 시절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여러 정치인의 자택에서 홈스테이를 한 경험이 있다.[1] 청용화(程永華)는 주일 중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우다웨이(武大偉)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관, 한반도 사무 특별대표를 역임했다.[1]

3. 1. 1. 한국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제5~9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군사 독재 정권을 이끌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군인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 대통령 재임 시절,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는 한국이 "일본을 배우고 강국이 될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세광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자 "일본은 적화 공작의 기지가 되고 있다"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2]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으로, 박정희의 정적이었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깊었다.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KCIA)에 의해 일본 호텔에서 납치되기도 했다(김대중 납치 사건). 대통령 재임 중에는 일본 문화 개방을 추진하고,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한국의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2]

김종필은 대한민국의 전 국무총리로, 오랫동안 한일의원연맹 간부를 역임하며 한일 로비의 한국 측 창구 역할을 담당하는 등 대일 융화 정책을 펼쳤다. 학창 시절 일본 유학을 희망했고, 기쿠치 칸 등 일본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한국 정치인으로서는 드문 친일파였다.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기본 조약) 체결 당시 "현대의 이완용이 되겠다"라며 반대 운동에 맞섰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일본 정부에 사과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일본을 좋아하는 나"라고 발언하기도 했으며, 비공식적인 일본 관계자와의 만남에서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2]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제11, 12대 대통령으로, 군사 독재 정권의 권력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여 한국 국민, 특히 좌파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광복절 연설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책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책임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등 과도한 반일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1983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방일하여 쇼와 천황과 회담했다. 일본 정재계와의 관계도 깊었고, 특히 세지마 류조와는 젊은 장교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서울 올림픽 개최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을 때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아 국내에서 유약하다고 비판받았다.[2]

오선화는 한국 출신의 일본 평론가로, 1983년 일본 다이토 문화대학에 유학한 후 친일파가 되었다. 1991년 일본에 귀화했다. 저서로는 『「일제」만으로는 역사는 말할 수 없다』, 『「반일 한국」에 미래는 없다』 등이 있으며, 한일 간 역사 문제에 대해 주로 한국 측을 비판하고 있다.[2]

선동열은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한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전 감독이다.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후, 일본 프로 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좋은 성적을 남겼다. 전 삼성 라이온즈·기아 타이거즈 감독이며,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 대표팀 감독도 역임했다. 그는 현역 시절부터 거만한 구석이 없고 인간 관계가 원만하며, 일본 프로 야구를 중심으로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다.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 고등학교 야구 팬이기도 하고,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에도 참가하는 등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2]

백진훈은 전 일본 주재 언론인으로 2003년 귀화했다. 전 참의원 의원이다.[2]

셰창팅은 교토대학 유학 경력이 있으며, 한일 관계사 즉 대일 관계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친일파로 불린다.[2][3]

3. 1. 2. 중국

3. 2. 학술 및 문화 분야

학술 및 문화 분야에서 활동하는 지일파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다.

  • 박철주: 한일문화연구협회를 설립하여 "일본 상대 문화 연구", "귀화 문화 연구", "일본의 신앙, 도덕 등 정신 문화 연구"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3]
  • 지명관: 일본 여자대학교에서 20년간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일 문화 교류 회의 한국 측 회장을 역임했다. "T·K 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썼다고 고백하며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기도 했다.[4]
  • 오선화: 한국 출신의 일본 평론가로, 1983년 일본 다이토 문화대학에 유학 후 친일파가 되었다. 1991년 일본에 귀화했으며, 『「일제」만으로는 역사는 말할 수 없다』, 『「반일 한국」에 미래는 없다』 등의 저서를 통해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해 한국 측을 비판하고 있다.
  • 선동열: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한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후 일본 프로 야구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하여 좋은 성적을 남겼다. 삼성 라이온즈와 기아 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했으며,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일본 프로 야구를 중심으로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으며,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 고등학교 야구 팬이기도 하는 등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
  • 백진훈: 전 일본 주재 언론인으로 2003년 귀화하여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3. 2. 1. 한국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제5~9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군사 독재 정권을 이끌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군인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당시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대통령 재임 중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시켰다. 그는 한국이 "일본을 배우고 강국이 될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세광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자 "일본은 적화 공작의 기지가 되고 있다"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1]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으로, 박정희의 정적이었지만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김대중 납치 사건을 겪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일본 문화 개방을 추진하고,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한국의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2]

박철주는 "일본 상대 문화 연구", "귀화 문화 연구", "일본의 신앙, 도덕 등 정신 문화 연구"를 연구 주제로 하는 한일문화연구협회를 설립했다.[3]

지명관은 일본 여자대학교에서 20년간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일 문화 교류 회의 한국 측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T·K 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썼다고 고백하며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기도 했다.[4]

김종필은 대한민국 전 국무총리로, 오랫동안 한일 의원 연맹 간부를 지내며 한일 관계 개선에 힘썼다. 그는 기쿠치 칸 등 일본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한일 기본 조약 체결 당시 "현대의 이완용이 되겠다"라고 말하며 반대 운동에 맞섰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에는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일본 정부에 사과하기도 했다.[5]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제11, 12대 대통령으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여 비판을 받았지만, 광복절 연설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책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책임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며 과도한 반일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1983년에는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방일하여 쇼와 천황과 회담했다. 세지마 류조와는 젊은 장교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서울 올림픽 개최에 지원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아 국내에서 비판받기도 했다.[6]

오선화는 한국 출신의 일본 평론가로, 1983년 일본 다이토 문화대학에 유학 후 친일파가 되었다. 1991년 일본에 귀화했으며, 『「일제」만으로는 역사는 말할 수 없다』, 『「반일 한국」에 미래는 없다』 등의 저서를 통해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해 한국 측을 비판하고 있다.

선동열은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한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후 일본 프로 야구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하여 좋은 성적을 남겼다. 삼성 라이온즈와 기아 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했으며,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그는 일본 프로 야구를 중심으로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으며,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 고등학교 야구 팬이기도 하는 등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

백진훈은 전 일본 주재 언론인으로 2003년 귀화하여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4. 일본의 지일파 육성 노력

2015년 아베 신조 총리는 미국 방문 중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컬럼비아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에 각각 500만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의 정치·외교 연구를 지원함으로써 지일파 육성으로 연결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여겨진다.[4][5]

같은 해 9월, 일본 정부는 "지일파·친일파 리스트"를 작성하여 부처 간 공유하기로 결정했다.[6]

5. 비판적 시각

지일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주로 한국과 중국에서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김대중, 김종필, 전두환 등 역대 대통령들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보를 보였다는 비판이 있다.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하고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2] 김대중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피해 일본에서 활동했고, 대통령 재임 중 일본 문화 개방을 추진했다.[2] 김종필은 한일 기본 조약 체결 당시 "현대의 이완용이 되겠다"라고 발언하며 대일 융화에 힘썼다.[2] 전두환은 한국 대통령 최초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으나, 나카소네 야스히로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2]

오선화는 일본에 귀화한 후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해 한국을 비판하는 저서를 펴내 논란이 되었다.[2] 선동열은 뛰어난 야구 실력으로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었지만, 친일적인 성향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한다.[2] 백진훈은 일본으로 귀화하여 참의원 의원을 역임했다.[2]

중국에서는 후야오방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지만, "일본은 오류 국가주의자"라는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1] 스핑은 천안문 사건 이후 "반공, 친일"을 주장하며 중국인임을 부정당하기도 했다.[2]

5. 1. 한국의 시각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제5~9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군사 독재 정권을 이끌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군인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는 한국이 "일본을 배우고 강국이 될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세광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을 때는 "일본은 적화 공작의 기지가 되고 있다"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2]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으로, 박정희의 정적이었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깊었다. 박정희 정권의 테러를 피해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김대중 납치 사건을 겪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일본 문화 개방을 추진했고,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한국의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2]

김종필은 대한민국의 전 국무총리로, 오랫동안 한일의원연맹 간부를 역임하며 한일 로비의 한국 측 로비를 담당하는 등 대일 융화에 힘썼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에는 스스로 "현대의 이완용이 되겠다"라고 말하며 반대 운동에 맞섰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에는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일본 정부에 사과하기도 했다.[2]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제11, 12대 대통령으로, 군사 독재 정권의 권력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에 한국 국민, 특히 좌파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광복절 연설에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책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책임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며 과도한 반일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1983년에는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방일하여 쇼와 천황과 회담했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을 때는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아 국내에서 유약하다고 비판받았다.[2]

오선화는 한국 출신의 일본 평론가로, 1983년 일본에 유학한 후 친일파가 되었다. 1991년 일본에 귀화했으며, 저서를 통해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해 주로 한국 측을 비판하고 있다.[2]

선동열은 한국과 일본에서 활약한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뛰어난 실력과 원만한 인간관계로 일본 프로 야구를 중심으로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다.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 고등학교 야구 팬이기도 하는 등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2]

백진훈은 전 일본 주재 언론인으로 2003년 귀화하여 참의원 의원을 역임했다.[2]

5. 2. 중국의 시각

후야오방은 개혁 개방의 일환으로 일본과의 관계 심화에 힘썼으나, "일본은 오류 국가주의자이며 원자폭탄은 4발 투하해야 했다"는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1]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깊은 절망을 품고 "반공, 친일"을 내세운 스핑(評論家)은 극단적인 태도 때문에 등장 당시 중국 언론계에서 "스핑은 중국인을 가장한 일본인이다"라며 한족임을 부정당했다.[2]

6. 결론

지일파는 일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며, 이들은 한일 양국 간의 상호 이해와 협력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지일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때로는 일본 내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때로는 한국 사회에 일본의 선진적인 문물을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지일파에 대한 인식은 복합적이다. 일부에서는 이들을 한일 관계 개선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존재로 평가하는 반면, 다른 일부에서는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친일파와 혼동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지일파의 활동이 때로는 한국 사회의 기대와 어긋나거나,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을 야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일파는 한일 양국 간의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이다. 이들은 일본 사회의 특성과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일본 내 다양한 인맥을 활용하여 양국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협력을 증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특히, 독도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 위안부 문제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일본 사회 내부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이해를 구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앞으로 지일파는 한일 관계의 발전을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일본 사회 내에서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고, 양국 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양국 간의 화해와 협력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독도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일본 사회 내부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지일파는 한일 관계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자신의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양국 간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위에서 제시된 과제들을 해결해 나간다면, 한일 관계는 더욱 발전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참조

[1] 문서 일파
[2] 뉴스 台湾の駐日代表に謝長廷・元行政院長 知日派の重鎮 https://www.nikkei.c[...] 2016-06-11
[3] 뉴스 蔡英文総統、「知日派」の謝長廷氏を駐日代表に任命/台湾 http://japan.cna.com[...] 2016-06-11
[4] 뉴스 首相、知日派育成へ研究支援表明へ 米3大学に各500万ドル拠出(1/2ページ) https://www.sankei.c[...] 2016-06-19
[5] 뉴스 首相、知日派育成へ研究支援表明へ 米3大学に各500万ドル拠出(2/2ページ) https://www.sankei.c[...] 2016-06-19
[6] 뉴스 「知日派リスト」政府で共有 外交強化へ人脈フル活用 https://www.nikkei.c[...] 2016-06-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