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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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음악은 한국음악사학, 한국음악의 분류, 전통 음악, 현대 음악, 한국 음악사, 한국 전통 악기 및 한국현대음악으로 구성된다. 한국음악사학은 한국음악의 연구와 발전을 다루며, 한국음악의 분류는 음악의 유래, 사용 목적, 연주 형태 등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한국 음악사는 상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 음악의 특징을 보여준다. 전통 악기는 국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한국현대음악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음악을 포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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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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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음악사학
2. 1. 한국음악사학의 발전
이혜구(李惠求)는 1940년대 <양금신보의 사조(梁琴新譜 四調)>를 발표한 이래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논문집 <한국음악연구>와 <한국음악서설>, <한국음악논총>을 출간했다. 장사훈(張師勛)은 <보허자고(步虛子考)>를 비롯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논문집 <국악논고>·<한국전통음악의 연구>·<한국악기대관>·<국악총론>·<한국음악사>·<전통무용의 연구>를 출간했다. 그 밖에도 함화진(咸和鎭)의 <조선음악통론>, 성경린(成慶麟)의 <조선음악독본>·<조선의 아악>·<국악감상>·<한국음악논고>·<한국의 무용>, 김기수(金琪洙)의 <국악입문>, 박헌봉(朴憲鳳)의 <창악대강> 등의 저서가 있다.1959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 이론전공이 신설되어 한국음악사학 연구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국립국악원이 주축이 되어 양악 5선보에 옮긴 <한국음악>이 제14집까지 나왔고, 재래의 율자보(律字譜)에 의한 <한국음악선집>도 제5집까지 나왔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간행한 영인본(影印本) <속악원보>와 <대악후보>가 있고, 양악 5선보에 채보한 이재숙(李在淑)의 <가야금산조>가 있다. 권오성·한만영·이재숙·김정자·이성천·이병원·송방송·이보형·김길운·권도희 등이 활발한 연구활동을 했다.
한국음악학은 ‘한국’과 ‘음악학’이라는 두 낱말 사이에 어떤 조사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한국의 음악학(Korean Musicology, Musicology of Korean)’을 뜻하기도 하고, ‘한국에서의 음악학(Musicology in Korea)’을 의미할 수도 있다.
2. 2. 한국음악학의 정의
3. 한국음악의 분류
한국음악은 크게 한국음악, 한국현대음악, 한국대중음악으로 구분한다.
== 전통 음악 (국악) ==
한국음악은 음악사학에서 여러 방식으로 분류된다.[1] 음악의 유래에 따라 향악, 당악, 아악으로 나누거나, 사용 목적에 따라 제례악, 연례악, 민간음악으로 나누기도 한다.[1] 연주 형태에 따라 기악, 성악으로, 악기 편성에 따라 합악, 삼현육각, 세악, 병주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1] 서양음악의 분류 방법을 따라 관현악곡, 중주곡, 독주곡, 합창곡, 독창곡으로 나눌 수도 있고, 종교음악, 세속음악으로 나눌 수도 있다.[1]
한국음악의 역사적 분류는 악곡의 유래와 형식에 따른 것으로, 국악은 크게 아악, 당악, 향악으로 나뉜다.
== 현대 음악 ==
한국현대음악은 20세기 이후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음악을 통칭한다. 서양음악의 장르와 국악기를 사용하거나 국악의 음악적 요소를 결합한 창작 국악이 등장했다.
3. 1. 전통 음악 (국악)
한국음악은 음악사학에서 여러 방식으로 분류된다.[1] 음악의 유래에 따라 향악, 당악, 아악으로 나누거나, 사용 목적에 따라 제례악, 연례악, 민간음악으로 나누기도 한다.[1] 연주 형태에 따라 기악, 성악으로, 악기 편성에 따라 합악, 삼현육각, 세악, 병주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1] 서양음악의 분류 방법을 따라 관현악곡, 중주곡, 독주곡, 합창곡, 독창곡으로 나눌 수도 있고, 종교음악, 세속음악으로 나눌 수도 있다.[1]한국음악의 역사적 분류는 악곡의 유래와 형식에 따른 것으로, 국악은 크게 아악, 당악, 향악으로 나뉜다.
3. 2. 현대 음악
한국현대음악은 20세기 이후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음악을 통칭한다. 서양음악의 장르와 국악기를 사용하거나 국악의 음악적 요소를 결합한 창작 국악이 등장했다.3. 3. 대중음악
4. 한국음악사
4. 1. 상고 시대
상고 시대의 국악에 관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 제천 행사에 관련된 중국 역사서에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한국의 상고 시대 음악은 각 부족의 제천의식에 쓰이는 의식이었던 것이 옛 중국 문헌에서 단편적으로 보인다. 부여ㆍ고구려ㆍ예ㆍ마한ㆍ변한 등 상고시대 부족 국가들은 추수가 끝나는 때, 혹은 씨를 뿌릴 때에 일정한 시기를 택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남녀노유가 함께 모여 연일 밤낮없이 춤과 노래로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4. 2. 삼한 시대
마한에서는 5월 하종(下種)과 10월 농공(農功)이 끝났을 때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이 모여 밤낮없이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연주된 음악은 오늘날의 별신굿이나 도당굿에서 굿중패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춤추는 요란한 음악과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세기 마한, 변한의 음악은 강렬하고 투박했을 것으로 보이며, 신라 유적에서 발굴된 흑색 토기에 비할 수 있다.중국 《삼국지》 동이전에는 변진에 중국의 축과 형상이 비슷한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국(伽倻國) 가실왕이 가얏고를 만들고 왕산악이 거문고를 만들기 전인 한국 최고(最古)의 이 악기는 '고'라고 불리는 가야고의 전신일 것이며, 아마 6세기에 가얏고(가야금)가 가야국에서 새로 생긴 후로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영화(永和) 13년(357년)에 만들어진 안악 제3호 분의 벽화는 여러 가지 중국 고대악(古代樂)을 보여준다. 전실(前室) 벽에는 입고(立鼓)와 소(簫)를 각각 연주하는 2인과 노래하는 사람 1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한(漢)의 전정(殿庭)의 고취(鼓吹)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회랑(廻廊) 벽의 대행렬도(大行列圖)에는 후부의 기마악대(騎馬樂隊, 4인)가 일렬 횡대로 고(鼓)·소(簫)·가(茄)(또는 소각(小角))·요를 연주하고 있는데, 이는 한 대(漢代)의 단소요가를 그린 것 같다. 후실(後室) 벽에는 세 사람의 악인(樂人)이 앉아서 각각 거문고(또는 쟁(箏))·완함·장적(長笛)으로 춤반주를 하는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후전(後殿)의 곡연(曲宴)을 그린 것 같다. 이 4세기의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입고(立鼓)·소(簫)·가(苛)·요 등의 한대(漢代) 악기는 한강 유역에서 발굴된 초두(醮斗)와 함께 한문화의 특색을 보여주며, 마한, 변한의 악(樂)과는 전혀 다르다.
4. 3. 삼국 시대
4. 3. 1. 고구려
고구려의 가요로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유리왕의 황조가가 있다.고구려의 국악사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 제1기는 외래 음악이 들어오기 이전의 시기이며, 거문고도 이 때에 만들어졌다.[4] 이 때의 음악은 거문고와 같은 향토 악기로 대표된다. 제2기는 고구려가 중국의 후위(後魏)와 교류를 하기 시작한 4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구분한다. 이 시기에는 공후와 같은 서역의 악기가 들어온 시기이다. 제3기는 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로 구분한다. 이 때의 고구려의 음악은 매우 융성하여, 수나라의 9부기(九部伎) 등에도 포함되었다. 고구려 음악에는 서역음악인 구자악(龜玆樂)이 들어와 고구려에 많은 악기가 쓰인 시기이다. 공후·비파(琵琶)·오현(五絃)·생(笙)·소·피리·요고(腰鼓) 등 많은 악기를 사용하여 당시 백제와 신라의 음악에 비해 매우 발전하였다.
4. 3. 2. 백제
지금까지 전해 오는 백제의 가요로는 〈정읍사〉가 있다. 현재 연주되는 악곡 중 〈정읍〉과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백제음악의 자료는 고구려에서 보이는 고분(古墳)의 고구려악벽화(高句麗樂壁畵) 같은 것이 없고 기록이 영세(零細)하다. 고이왕(古爾王) 원년(238년)에 제천지(祭天地) 용고취(用鼓吹)라 하여 고취악(鼓吹樂)이 쓰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것이 대방(帶方)에서 사용된 중국계 고취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본후기》에 의하면 백제음악도 고구려와 같이 횡적·군후·막목으로 춤을 반주하였다. 백제음악이 고구려의 거문고를 차용한 것이 주목되는데 이 점은 백제음악이 고구려와 같고 신라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음악은 5~6세기에 중국 남송(南宋)과 북위(北魏)에 소개되었고 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악사(百濟樂師)들이 교대로 일본에 건너가서 음악을 전습(傳習)시켰는데 문헌에 보이는 악인(樂人) 시덕(施德)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 진노(進奴), 대덕(對德) 진시 등 4인은 횡적·군후·막목·무(舞)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의 백제에는 남조(南朝)음악의 영향이 보인다. 중국 문헌 《수서》의 〈동이전(東夷傳)〉에 고(鼓)·각(角)·공후·쟁(箏)·우·지·적(笛)과 같은 악기를 쓴 기록이 보인다. 이 악기들을 수의 구부기(九部伎)와 비교하면 강남(江南)의 청악(淸樂-淸商伎)에서 쓰이는 악기편성(樂器編成)과 비슷하다. 백제 사람 미마지(味摩之)는 중국 남부 오나라에서 기악(伎樂)을 배워 일본에 전했다.4. 3. 3. 신라
통일 이전의 신라 음악은 가야금으로 대표될 수 있다. 진흥왕 때에 가야의 우륵이 가야금을 신라에 전했다고 한다.[4] 이 시기의 음악으로는 《삼국사기》에 이름만 전하는 가야금 12곡이 있다. 진흥왕 13년에는 계고, 법지, 만덕이 우륵에게서 각기 가야금, 노래, 춤을 배웠다고 한다. 우륵이 가얏고를 신라에 가져오기 전 내해왕(奈解王, 196-229) 때 물계자(勿稽子)가 '고'를 쳤고 자비왕(慈悲王, 458-479) 때 백결 선생이 '고'로 방아소리를 내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신라음악은 일찍부터 '고'(가야금)가 대표적인 악기이다. 삼국사기에 신라음악은 '고(琴)'와 춤(舞)과 노래(歌)로 편성되었다 하였고, 일본후기에도 신라음악에는 '고'와 춤만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신라음악은 관악기와 타악기가 보이지 않고 오직 현악기 한 가지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데, 이 점은 횡적(橫笛)·거문고·막목(莫目)으로 편성된 고구려 및 백제음악과는 다르게 단순한 편성으로 되었다. 이것은 마치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古墳)의 구조가 같은데 신라의 그것만이 양자와 판이하게 다른 것과 상통한다. 진흥왕(眞興王, 540-576) 때는 우륵이 가야국으로부터 '가얏고'를 가지고 와서 신라에 퍼뜨렸는데 이 뒤부터 신라의 '고'는 가야국의 '고' 즉 '가얏고'로 대치된 것 같다. 우륵은 대내마(大奈麻)인 주지(注知·法知)·계고(階古)·대사(大舍)인 만덕(萬德)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가야국에서 만든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 등 12곡을 전수했다. 세 사람은 이 12곡이 아정(雅正)치 못하다 하여 5곡으로 줄이고 바로잡아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우륵의 12곡은 일부가 잡희(雜戱)이고 나머지는 각군(各郡)의 음악으로 산신제(山神祭)와 같은, 군(郡)마다 베푸는 의식음악(儀式音樂)으로 보인다. 이러한 군악(郡樂)은 삼국사기 악지에 보이는 신라의 음악 20여곡 속에도 보이고 있다. 신라의 종교의식 음악의 하나인 팔관회(八關會)는 고려를 거쳐 이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통일 이후의 신라에서는 향악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특히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의 3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3죽으로 대표된다.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가 지리산에 들어가 지은 30여 곡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비파음악은 212곡, 대금곡은 324곡, 중금곡은 245곡, 소금곡은 298곡의 이름이 전한다.
또한 당악이 유입된 것도 통일 이후이다. 문무왕 4년에 사람을 보내 당악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각종 유물에서 당악기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음악의 비중이 큼에 따라 재래음악, 즉 향악에 대조되는 당악·당비파(唐琵琶)·당(唐)피리·당풍(唐風)의 범패(梵唄) 등 당나라에서 새로 수입된 음악 양식이 생기고 황종조(黃鍾調)·월조(越調)·평조(平調)·반섭조(般涉調)와 같은 당음악에서 쓰던 조들이 쓰이게 되었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들어와 융성해지자 범패가 성히 불리고 또 당에서 새로운 범패가 들어오자 신라풍·당풍·당 이전의 고풍(古風) 이렇게 세 가지 범패가 불렸다. 신라의 재래음악은 가야금·춤·노래로 편성되어 악기는 가야금만이 쓰이던 것이 고구려의 거문고와 서역에 기원을 둔 비파가 쓰이고 대금 등 관악기가 도입되어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거문고·비파·대금·중금·소금, 즉 삼현삼죽이 쓰이게 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 보이는 금환(金丸)·월전(月顚) 같은 것들이 모두 서역계 잡희(雜戱)인 것과 같이 서역계 음악의 영향도 받았다. 통일신라시대의 당악과 향악은 후세의 당악과 향악의 기초가 되었다.
신라에서는 음악을 관장하는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진흥왕때는 '음성서'로 불리다 경덕왕때 '대악감'으로 고쳤다. 후 혜공왕때 다시 음성서로 바뀌었다.
4. 4. 남북국 시대
4. 4. 1. 통일신라
통일 이후의 신라에서는 향악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특히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의 3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3죽으로 대표된다.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가 지리산에 들어가 지은 30여 곡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비파음악은 212곡, 대금곡은 324곡, 중금곡은 245곡, 소금곡은 298곡의 이름이 전한다.또한 당악이 유입된 것도 통일 이후이다. 문무왕 4년에 사람을 보내 당악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각종 유물에서 당악기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음악의 비중이 큼에 따라 재래음악, 즉 향악(鄕樂)에 대조되는 당악(唐樂)·당비파(唐琵琶)·당(唐)피리·당풍(唐風)의 범패(梵唄) 등 당나라에서 새로 수입된 음악 양식이 생기고 황종조(黃鍾調)·월조(越調)·평조(平調)·반섭조(般涉調)와 같은 당음악에서 쓰던 조들이 쓰이게 되었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들어와 융성해지자 범패가 성히 불리고 또 당에서 새로운 범패가 들어오자 신라풍·당풍·당 이전의 고풍(古風) 이렇게 세 가지 범패가 불렸다. 신라의 재래음악은 가야금·춤·노래로 편성되어 악기는 가야금만이 쓰이던 것이 고구려의 거문고와 서역에 기원을 둔 비파가 쓰이고 대금 등 관악기가 도입되어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거문고·비파·대금·중금·소금, 즉 삼현삼죽(三絃三竹)이 쓰이게 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 보이는 금환(金丸)·월전(月顚) 같은 것들이 모두 서역계 잡희(雜戱)인 것과 같이 서역계 음악의 영향도 받았다. 통일신라시대의 당악과 향악은 후세의 당악과 향악의 기초가 되었다.
신라에서는 음악을 관장하는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진흥왕때는 '음성서'로 불리다 경덕왕때 '대악감'으로 고쳤다. 후 혜공왕때 다시 음성서로 바뀌었다.
4. 4. 2. 발해
발해는 민간 음악과 궁중 음악이 발전함에 따라 태상시를 설치했다. 발해의 음악, 무용, 제사에 관한 것은 본래 의부에서 맡아 보는 업무였으나, 발해 음악과 무용이 발전하는 수요에 따라 새로 독립적인 기구인 태상시를 설치하고 예악과 제사를 관리하였다. 발해교방은 발해악과 발해무를 직접 관리하는 전업기구이다.4. 5. 고려 시대
고려는 신라의 음악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아악과 사악(詞樂)을 수용했다. 국가 의식인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팔관회는 명산대천·용신을 가무로 희열시켜 복을 비는 제도로, 신라 국선의 유풍(遺風)을 따랐다. 연등회와 더불어 고려의 큰 국가 의식 중 하나였으며, 궁중에서 다양한 형태의 춤과 가무백희가 행해졌다.고려 시대에는 향악, 당악, 아악이 공존했다. 당악은 실제로는 송나라의 사악(詞樂)으로, 시의 매 행이 불규칙한 길이로 구성되었으나 음악은 규칙적이었다. 향악은 고려에서 계승되었고, 많은 향악곡이 새로 생겨 일부는 조선 시대까지 전승되었다. 향악곡 중 일부는 조선 때까지 전승되어 악보와 사설이 남아있으며, 동동·서경별곡·정과정 등이 대표적이다.
정재(呈才)는 궁중 무용을 가리키는 용어로, 고려 시대에는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향악정재와 중국에서 들어온 당악정재가 있었다. 당악정재는 죽간자의 역할과 구호, 무반주 창사가 특징이며, 향악정재는 무기, 관현 반주, 여성 합창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 특징을 가졌다.
4. 6. 조선 시대
세종, 세조 때에는 박연에 의해서 아악이 정리되고,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악기를 직접 만들어 썼으며, 정간보, 오음악보등에 의한 기보법이 창안되고, 아악보가 편찬되었다. 세종대왕은 정대업, 보태평 등을 직접 작곡하였다.인조 21년에는 사직과 문묘제례악이 정해지고, 인조 25년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으며, 광해군, 효종, 영조 때, 악학궤범을 복간하고 악기를 다시 만들었다. 종묘제례악과 삼현 육각에 의한 음악이 사용되었다. 또한 가곡, 가사, 시조 등의 성악곡이 널리 불렸다. 특히 영조 이후, 일반 백성들에게서 판소리, 산조, 잡가 등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숙종 때의 판소리 체계화는 큰 발전이라 할 수 있다.
4. 6. 1. 조선 전기
정도전 등은 건국과 더불어 많은 조선의 창업송가(創業頌歌)를 지었으나, 악곡은 고려조의 음악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차츰 제도가 정비되고 유교가 대흥한 세종 때에 이르러 전조(前朝)의 음악을 많이 개산(改刪)하였다. 세종은 박연을 시켜 아악을 정비하고 율관과 악기를 제작하였고, 향악과 고취악(鼓吹樂)에 기하여 〈보태평〉, 〈정대업〉을 만들고 〈여민락〉, 〈치화평〉 등을 제정하였으며,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를 만들어 《세종실록》에 실었다. 세조는 부왕(父王)의 음악사업을 이어받아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악에 쓰게 하여 오늘날까지 전하게 하였으며, 정간보를 개량하였고, 오음약보(五音略譜)를 내어 《세조실록》 악보에 실었다. 조선 전기의 음악정비 제작사업은 성종 때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성현이 찬술한 《악학궤범》이 출간되어 한국 최초로 독립한 종합 악서(樂書)가 나왔다.4. 6. 2.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한국의 문화는 큰 시련을 당하여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의 음악도 이 때를 계기로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전기에 힘써 갖추어 놓았던 아악은 난리통에 흩어졌다. 후에 문물이 바로잡히자 아악을 재건하였으나, 규모는 훨씬 줄어들고 말았다. 조선 전기 음악에 많이 전하던 고려조의 향악과 송의 사악은 대부분 상실되었거나 변질되었다. 당악은 향악화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명맥을 유지한 <영산회상>, <보허자> 가곡(<만대엽>) 같은 악곡은 많은 변주곡을 낳아서 조선 후기의 향악곡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영산회상>은 방대한 기악 모음곡으로 되었고, 가곡·가사·시조는 많은 종류가 생겼다. 한편 영조 이후에는 서민문화의 대두에 따라 판소리·산조·잡가와 같은 민속음악이 생겨 민간에 유포되었다.4. 7. 근대 (개항기~일제강점기)
신재효에 의해 판소리가 현재의 형태로 정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양 음악이 들어오는 등 국악이 많이 쇠퇴한 시기이나 명맥만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갑오개혁(甲午更張)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한국인의 음악활동도 변화하였다.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조선 왕조가 무너지면서 왕실 의식에 사용되던 수천 년 전통 음악이 설 자리를 잃었다. 왕의 거동이나 군대 행진에 쓰이던 취타(吹打)는 서양 음악 밴드(Band)의 행진곡으로 대체되었다. 사랑(舍廊)마다 울려나오던 풍류소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심신을 닦는 도로서 음악을 연주하던 풍류인들이 베토벤이나 브람스에 열중하게 되었다. 광장에서 판소리와 잡희(雜戱)를 즐기던 대중들은 유행가와 신파극(新派劇)에 귀를 기울였다.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정책으로 한국음악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한국 전통음악은 이왕직(李王職) 아악부(雅樂部)·원각사(圓覺社)와 협률사(協律社)에 이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 이은 조선정악원(朝鮮正樂院)·기타 사설전수소(私設傳授所)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나갔다.
4. 8. 현대 (광복 이후)
광복 이후 한국에서는 전통음악을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에 힘입어 전통음악이 새롭게 정립되었고,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6] 휴전 이후, 한국 국민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점차 높아지고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국립국악원, 국악사 양성소,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국악예술학교,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등 정규 국악 교육 기관이 차례로 설립되어 신인들을 배출하고 있다.[6] 새로운 학문을 익힌 신인들이 연주, 창작, 연구,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한국 음악은 어느 면에서는 밝은 전망을 보이고 있다.[6] 그러나 판소리, 십이가사, 십이잡가와 같은 특수 분야는 신인들의 진출이 많지 않아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다.[6] 한국 음악을 연구하는 학술 단체로는 한국국악학회가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6] 오늘날에는 국악 연주에 서양 악기를 더하는 등 현대적인 느낌을 살린 (크로스 오버) 국악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국악기 개량 등 창조적인 시도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6]5. 한국 전통 악기
한국 전통 악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 전통 악기 문서를 참고하라.
6. 한국현대음악
한국현대음악은 일반적으로 1900년대부터 서양음악교육을 받고 서양음악의 악기, 양식, 음악어법 등을 사용한 한국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과, 1900년대부터의 현대적인 국악 작곡으로 나뉜다. 서양음악은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들과 궁중 서양인 작곡가들 및 군악대를 통해 수용되었다.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로는 김성태, 윤이상, 강석희, 박영희, 진은숙 등이 있다.
참조
[1]
간행물
한국음악의 분류
글로벌 세계 대백과
[2]
서적
국악통론
태림출판사
[3]
서적
국악감상
삼호뮤직
[4]
서적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제 1
[5]
간행물
보태평과 정대업
글로벌 세계 대백과
[6]
웹사이트
실내악으로 작곡된 소나기, 퓨전 국악그룹 소리아
http://www.soreagrou[...]
2017-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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