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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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종교는 나치 시대에 기독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가 겪은 변화와 나치즘의 종교적 측면을 다룬다. 나치 정권은 기독교를 국가에 종속시키려 했으며, 일부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혐오하고 "긍정적 기독교"를 내세우려 했다. 이에 저항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고백교회를 통해 나치에 맞섰고, 가톨릭 교회는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을 비판했다. 나치즘은 준종교적인 성격을 띠며, 아돌프 히틀러 숭배, 종교적 의식 등을 통해 정치 종교로 간주되기도 했다. 전쟁 발발 후, 히틀러는 교회와의 갈등을 자제하려 했으나, 일부 나치 급진파는 교회 탄압을 지속했고, 특히 폴란드에서 가톨릭 교회가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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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종교 | |
---|---|
기본 정보 | |
제목 | 나치 독일의 종교 |
유형 | 정치적 종교 |
개요 | |
기간 | 1933년 ~ 1945년 |
국가 | 나치 독일 |
목표 | 독일 내 기독교 영향력 감소 게르만 민족주의 고취 |
주요 인물 | 아돌프 히틀러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하인리히 힘러 |
정책 및 운동 | |
주요 정책 | 교회 투쟁 긍정적 기독교 장려 이교주의 부활 시도 |
관련 운동 | 독일 기독교인 운동 독일 신앙 운동 |
종교 단체 | |
지지 단체 | 독일 복음주의 교회 (일부) 독일 기독교인 |
반대 단체 | 고백 교회 여호와의 증인 가톨릭 교회 (일부) |
이념적 기반 | |
주요 이념 | 민족사회주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반기독교주의 (일부) |
관련 개념 | 아리오소피 게르만 이교주의 혈통과 토양 |
결과 | |
영향 | 교회 투쟁 심화 종교적 저항 운동 발생 홀로코스트 전후 독일 사회의 종교적 지형 변화 |
2. 역사적 배경
6세기에서 8세기 사이 콜룸바누스와 성 보니파스의 선교 활동으로 게르만 민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이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독일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나뉘었다. 남부와 서부는 가톨릭, 북부와 동부는 개신교가 우세했다.[16] 가톨릭 교회는 바이에른, 라인란트 등 일부 지역에서 특권을 누렸지만, 개신교 지역에서는 차별받았다.[17][18]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71년부터 1878년까지 ''문화 투쟁''(Kulturkampf)을 통해 독일 민족주의를 강화하려 했다. 이는 가톨릭 인구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반성직주의를 결합한 시도였다. 1870년 결성된 중앙당은 초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대표했지만, ''문화 투쟁''으로 인해 "가톨릭의 정치적 목소리"로 변모했다.[19] 비스마르크의 "문화 투쟁"은 독일 내 가톨릭 기관, 특히 국제 선교와 로마를 비롯한 독일 외부와의 강력한 연계를 제거하려는 시도에서 실패했다.[20]
19세기에는 성서의 역사 비평 연구, 역사적 예수 연구, 진화 생물학 등의 발전과 카를 마르크스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 경제적 환경에 대한 비판으로 전통적 교리에 대한 비판이 증가했다. 많은 독일 시민들이 자유주의적 종교를 따르거나 종교를 버렸다. 1859년 독일 자유 종교 공동체 연합이 설립되었고, 1881년에는 독일 자유사상가 연맹, 1892년에는 ''Freidenker-Gesellschaft'', 1906년에는 Deutscher Monistenbund가 결성되었다.[21]
1933년, 오스트리아 병합 5년 전 독일 인구는 대략 67%가 개신교, 33%가 가톨릭이었으며, 유대인 인구는 1% 미만이었다.[22]
연도 | 총 인구 | 개신교 | 로마 가톨릭 | 기타 (유대인 포함) | 유대인 |
---|---|---|---|---|---|
1910a | 64,926,000 | 39,991,000 (61.6%) | 23,821,000 (36.7%) | 1,113,000 (1.7%) | 615,000 (1.0%) |
1925b | 62,411,000 | 40,015,000 (64.1%) | 20,193,000 (32.4%) | 2,203,000 (3.5%) | 564,000 (0.9%) |
1933b | 65,218,000 | 40,865,000 (62.7%) | 21,172,000 (32.5%) | 3,181,000 (4.8%) | 500,000 (0.8%) |
1933b | 65,218,000 | 43,696,060 (67.0%) | 21,521,940 (33.0%) | - (<1%) | – (<1%) |
1939b | 69,314,000 | 42,103,000 (60.8%) | 23,024,000 (33.2%) | 4,188,000 (6.0%) | 222,000 (0.3%) |
1939c | 79,375,281 | 42,862,652 (54.0%) | 31,750,112 (40.0%) | 4,762,517 (6.0%)d | - |
a. 독일 제국 국경. | |||||
b. 바이마르 공화국 국경, 즉 1937년 12월 31일의 독일 주 경계.[22] | |||||
c. 1939년 5월의 나치 독일 국경. 공식 인구 조사 데이터. | |||||
d. 3.5%의 고트글로이비히, 1.5%의 무종교인, 1.0%의 기타 종교 포함. |
2. 1. 종교 개혁과 독일의 종교 분열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 개혁을 시작하면서, 독일 인구는 개신교(약 3분의 2)와 로마 가톨릭(약 3분의 1)로 나뉘었다. 남부와 서부는 주로 가톨릭 지역으로, 북부와 동부는 주로 개신교 지역으로 분열되었다.[16] 가톨릭 교회는 바이에른,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그리고 독일 남서부 일부 지역에서 특권을 누렸지만, 개신교가 우세한 북부 지역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차별을 받았다.[17][18]19세기에는 성서의 역사 비평 연구가 활발해지고, 데이비드 슈트라우스, 어네스트 르낭 등이 역사적 예수를 연구했다. 또한 찰스 다윈, 에른스트 헤켈 등이 진화 생물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은 억압적인 사회 경제적 환경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고, 더욱 진보적인 교회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비판을 증가시켰고, 많은 독일 시민들이 전통적인 신학 개념을 거부하고 자유주의적인 종교 형태를 따르거나 종교를 완전히 버리게 만들었다. 1859년에는 독일 자유 종교 공동체 연합(분트 프라이렐리기외저 게마인데 도이칠란츠)이 설립되었는데, 이들은 제도화된 교회나 사제 숭배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를 종교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연합이었다. 1881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는 루드비히 뷔흐너가 무신론과 불가지론을 위한 독일 자유사상가 연맹(Deutscher Freidenkerbund)을 설립했다. 1892년에는 Freidenker-Gesellschaft가, 1906년에는 독일 모니스트 연맹(도이처 모니스텐분트)가 결성되었다.[21]
1933년, 오스트리아 병합 5년 전 독일 인구는 대략 67%가 개신교, 33%가 가톨릭이었으며, 유대인 인구는 1% 미만이었다.[22]
연도 | 총 인구 | 개신교 | 로마 가톨릭 | 기타 (유대인 포함) | 유대인 |
---|---|---|---|---|---|
1910a | 64,926,000 | 39,991,000 (61.6%) | 23,821,000 (36.7%) | 1,113,000 (1.7%) | 615,000 (1.0%) |
1925b | 62,411,000 | 40,015,000 (64.1%) | 20,193,000 (32.4%) | 2,203,000 (3.5%) | 564,000 (0.9%) |
1933b | 65,218,000 | 40,865,000 (62.7%) | 21,172,000 (32.5%) | 3,181,000 (4.8%) | 500,000 (0.8%) |
1933b | 65,218,000 | 43,696,060 (67.0%) | 21,521,940 (33.0%) | - (<1%) | – (<1%) |
1939b | 69,314,000 | 42,103,000 (60.8%) | 23,024,000 (33.2%) | 4,188,000 (6.0%) | 222,000 (0.3%) |
1939c | 79,375,281 | 42,862,652 (54.0%) | 31,750,112 (40.0%) | 4,762,517 (6.0%)d | - |
a. 독일 제국 국경. | |||||
b. 바이마르 공화국 국경, 즉 1937년 12월 31일의 독일 주 경계.[22] | |||||
c. 1939년 5월의 나치 독일 국경. 공식 인구 조사 데이터. | |||||
d. 3.5%의 고트글로이비히, 1.5%의 무종교인, 1.0%의 기타 종교 포함. |
2. 2.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종교
6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콜룸바누스와 성 보니파스의 선교 활동으로 게르만 민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독일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나뉘었다. 남부와 서부는 가톨릭, 북부와 동부는 개신교가 우세했다.[16] 가톨릭 교회는 바이에른, 라인란트 등 일부 지역에서 특권을 누렸지만, 개신교 지역에서는 차별받았다.[17][18]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71년부터 1878년까지 ''문화 투쟁''(Kulturkampf)을 통해 독일 민족주의를 강화하려 했다. 이는 가톨릭 인구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반성직주의를 결합한 시도였다. 1870년 결성된 중앙당은 초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대표했지만, ''문화 투쟁''으로 인해 "가톨릭의 정치적 목소리"로 변모했다.[19] 비스마르크의 "문화 투쟁"은 독일 내 가톨릭 기관, 특히 국제 선교와 로마를 비롯한 독일 외부와의 강력한 연계를 제거하려는 시도에서 실패했다.[20]
19세기에는 성서의 역사 비평 연구, 역사적 예수 연구, 진화 생물학 등의 발전과 카를 마르크스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 경제적 환경에 대한 비판으로 전통적 교리에 대한 비판이 증가했다. 많은 독일 시민들이 자유주의적 종교를 따르거나 종교를 버렸다. 1859년 독일 자유 종교 공동체 연합이 설립되었고, 1881년에는 독일 자유사상가 연맹, 1892년에는 ''Freidenker-Gesellschaft'', 1906년에는 ''Deutscher Monistenbund''가 결성되었다.[21]
1933년, 오스트리아 병합 5년 전 독일 인구는 대략 67%가 개신교, 33%가 가톨릭이었으며, 유대인 인구는 1% 미만이었다.[22]
연도 | 총 인구 | 개신교 | 로마 가톨릭 | 기타 (유대인 포함) | 유대인 |
---|---|---|---|---|---|
1910a | 64,926,000 | 39,991,000 (61.6%) | 23,821,000 (36.7%) | 1,113,000 (1.7%) | 615,000 (1.0%) |
1925b | 62,411,000 | 40,015,000 (64.1%) | 20,193,000 (32.4%) | 2,203,000 (3.5%) | 564,000 (0.9%) |
1933b | 65,218,000 | 40,865,000 (62.7%) | 21,172,000 (32.5%) | 3,181,000 (4.8%) | 500,000 (0.8%) |
1933b | 65,218,000 | 43,696,060 (67.0%) | 21,521,940 (33.0%) | - (<1%) | – (<1%) |
1939b | 69,314,000 | 42,103,000 (60.8%) | 23,024,000 (33.2%) | 4,188,000 (6.0%) | 222,000 (0.3%) |
1939c | 79,375,281 | 42,862,652 (54.0%) | 31,750,112 (40.0%) | 4,762,517 (6.0%)d | - |
a. 독일 제국 국경. | |||||
b. 바이마르 공화국 국경, 즉 1937년 12월 31일의 독일 주 경계.[22] | |||||
c. 1939년 5월의 나치 독일 국경. 공식 인구 조사 데이터. | |||||
d. 3.5%의 고트글로이비히, 1.5%의 무종교인, 1.0%의 기타 종교 포함. |
나치 독일 시대에 대다수의 교회들은 교파를 떠나 나치에 대해 지지하거나 침묵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칼 라너 등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이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기도 했다.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 영적인 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셨듯이,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히틀러를 보내셨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나치에 대해 우호적이었다.[197]
3. 나치 시대의 종교
개신교 나치 반대파들은 고백교회를 통해 나치에 저항했다. 이들은 바르멘 선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에게도 굴복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독일 개신교 통합을 시도하려는 히틀러의 종교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치에 반대한 성직자들은 죽거나 투옥되고 자격을 상실당했다. 고백교회의 프리드리히 바이슬러는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처형당했고, 가톨릭 주교는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거나, 개신교 신학자들은 신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되어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루터교회 신학자 폴 틸리히도 미국으로 망명했다.[197]
독일의 기독교는 1517년 종교 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교와 개신교로 나뉘었다. 종교 개혁의 결과, 대규모 개신교 교단들은 ''란데스교회''(지방 교회)로 조직되었다. 독일의 주요 교회(가톨릭과 개신교)는 정부가 교회세를 징수하여 지급한다. 이러한 이유로 가톨릭이나 개신교 신자들은 공식적으로 등록된다.[25] 역사가 리처드 슈타이그만-갈은 "명목상의 교회 구성원 자격은 실제 신앙의 신뢰할 수 없는 척도"라고 주장하며, 실제 종교적 신념을 결정하는 것은 다른 기준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6]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독일에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수는 상당했다. 1933년과 1939년 사이에는 종교적 실천과 교회 구성원 자격에 실질적인 감소는 없었다.[27] 교회 명부에서 삭제될 수 있는 옵션(''키르헤나우스트리트'')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가톨릭에 반대하는 ''문화 투쟁''의 일환으로 도입한 1873년부터 독일에서 존재했다. 개신교도에게도 이가 가능해졌으며, 이후 40년 동안 대부분 그들이 이를 활용했다.
나치 통치 시대에 대한 분석에서, 전체적으로 가톨릭 신자보다 개신교 신자가 더 많이 교회를 떠났지만, 개신교와 가톨릭은 전반적으로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의 수치 급증은 1938년 오스트리아와 기타 영토의 합병 결과이다. 1939년에 ''키르헤나우스트리테''의 수는 "역사적인 최고치"를 기록하며 480,000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 숫자는 교회에 대한 나치의 정책 변화와 ''퓌러''와 나치 지도부에 대한 신뢰의 지표로 볼 수 있다. 1942년 이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감소한 것은 나치 독일의 미래에 대한 불신이 생긴 결과로,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1930년대 중반부터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노력해 온 나치의 명령에 따라 교회를 떠난 나치였다.[32] 하인리히 힘러는 ''신을 믿는 사람들'' 운동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무신론자를 SS에 허용하지 않았다.[33] 300만 명의 나치당 구성원 대다수는 계속해서 교회세를 납부하고 로마 가톨릭교 또는 개신교로 등록했다.[34] 구세군, 기독교 성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는 나치 시대 동안 독일에서 모두 사라졌다.[9] 국가보안본부 구성원은 기독교 교파에서 탈퇴하여 종교적 소속을 ''신을 믿는 사람들''로 변경했으며, 친위대 장교의 거의 70%가 동일한 행동을 했다.[35]
나치당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태도는 관용에서 거의 완전한 포기, 노골적인 공격까지 다양했다.[103] 앨런 불록은 히틀러가 가톨릭의 조직력에는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가졌지만, 가톨릭의 핵심 가르침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느꼈다고 썼다.[44] 많은 나치들은 사생활과 공적인 삶에서 모두 반교권주의적이었다.[104] 나치당은 분명히 이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105]
아돌프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반교권주의자였지만, 가톨릭에 대한 문화 투쟁을 너무 성급하게 시작하는 것은 경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09]
교황청 소유의 바티칸 일간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아돌프 히틀러, 나치즘, 인종차별, 반유대주의를 명시적으로 비난했으며, 1930년에는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당에 속하는 것은 가톨릭 양심과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111] 1931년 초, 독일 주교들은 나치당의 모든 지도자들을 파문하고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당원 가입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112] 이 금지령은 1933년 주법이 모든 노동조합 노동자와 공무원이 나치당의 당원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면서 조건부로 수정되었다. 1933년 7월, 독일 내 교회는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제국 정교 협약을 바티칸과 체결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신앙과 도덕 문제에 대해 계속 발언했으며 나치 철학에 반대했다.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나치 이데올로기를 규탄하는 회칙 ''불타는 근심으로''를 발표했다. 그의 죽음으로 계획되었던 회칙 ''인간 종족의 단일성''의 발표는 무산되었지만, 이와 유사한 ''교황의 지위''는 1939년 10월 그의 후임자(비오 12세)가 발표한 첫 번째 회칙이었다. 나치의 안락사 프로그램에 대한 대규모 가톨릭의 반대로 인해 1941년 8월 28일 잠잠해졌다.[113] 가톨릭 신자들은 때때로 뮌스터의 클레멘스 폰 갈렌 주교와 같은 여러 주교와 사제를 통해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적극적으로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나치 독일에서는 정치적 반대자들이 투옥되었고, 베른하르트 리히텐베르크와 카를 라이스너를 포함하여 일부 독일 사제들이 반대로 인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114]
1941년 나치 당국은 독일 제국 내의 모든 수도원과 수도원의 해산을 명령했으나, 1941년 7월 30일 히틀러의 칙령에 의해 ''Aktion Klostersturm''(수도원 폭풍 작전)이 중단되었다.[115]
3. 1. 나치의 종교관
나치 독일에서 대다수의 교회들은 나치에 대해 지지하거나 침묵했다.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히틀러를 보내셨다"라고 할 정도로 나치에 우호적이었다.[197] 나치 이데올로기는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기를 원했다.[36] 요제프 괴벨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마르틴 보어만, 하인리히 힘러와 같은 인물들은 반교회적 입장을 가지고 ''교회 투쟁''을 주도했다.[37]
괴벨스는 기독교와 나치 세계관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대립"이 있다고 보았다.[37] 히틀러는 1934년 로젠베르크를 공식 나치 이데올로그로 임명했다.[38] 힘러는 친위대의 주요 임무가 기독교를 극복하고 "게르만"적 삶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39] 보어만은 1941년 "국가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38]
히틀러는 때때로 교회와의 갈등을 늦추려 했지만, 그의 발언은 부하들에게 교회 투쟁을 계속할 명분을 주었다.[37] 히틀러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묘사했지만,[40][41] 괴벨스 일기에 따르면 히틀러는 기독교를 증오했다.[43] 히틀러는 기독교 윤리가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44]
나치는 교회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긍정적 기독교라는 종파를 만들려 했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히틀러를 메시아로 숭배하려는 시도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괴벨스는 1939년 일기에 "총통은 종교를 창시할 생각이 없다"고 썼다.[46]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는 전략을 채택했다.[47]
한스 케를은 히틀러를 "새로운 계시의 전령"으로 묘사하고, 나치의 "긍정적 기독교"는 사도신경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48]
히틀러는 1933년 수권법 통과 전에는 교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권력을 잡은 후 이 약속을 어겼다.[55][56] 나치의 ''교회 투쟁''은 교회의 근절을 목표로 했다는 견해가 있다.[15][57]
윌리엄 시러는 나치가 기독교를 파괴하고 게르만 신들과 나치 극단주의자들의 이교주의로 대체하려 했다고 썼다.[38]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연설에서 히틀러의 종교 폐지 계획을 폭로했다.[58]
그러나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발터 부흐 같은 일부 나치는 나치즘과 기독교를 같은 운동의 일부로 보았다.[59] 괴벨스와 보어만 같은 인물들은 교회와의 갈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60]
야드 바셈의 마이클 파이어는 1930년대 후반 교회 관계자들이 히틀러의 장기 목표가 "가톨릭과 기독교의 완전한 제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썼다.[61] 히틀러는 전쟁 후 기독교 교회의 영향력을 파괴할 의도였다.[62] 알베르트 슈페어는 "새로운 베를린" 계획에서 교회 부지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회상했다.[63]
제프리 블레이니는 히틀러가 무신론자였지만, 독일 기독교인들의 공산주의 무신론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했다고 썼다.[65] 히틀러는 기독교를 임시 동맹으로 보았고, "기독교인이거나 독일인"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치즘은 이교 종교였고, 히틀러는 그 최고 사제였다.[65] 오토 슈트라서는 1940년 저서에서 히틀러가 무신론자라고 밝혔다.[66]
나치의 인종 정책과 교회 투쟁은 중요한 이념적 영역이었다.[67] 나치 이데올로기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다.[69] 나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수백 개의 수도원을 압수하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제거했다.[70] 종교 간행물과 신문이 검열되거나 금지되었다.[71] 1935년부터 게슈타포는 2,720명이 넘는 성직자를 체포하여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투옥했다.[72] 나치즘은 기독교적 이상을 폭력적 본능에 대한 장애물로 보았다.[69] 1930년대 중반부터 나치당 내 반기독교적 요소가 두드러졌지만, 히틀러에 의해 억제되었다.[83]
로젠베르크는 긍정적 기독교의 지지자였으며, "독일로 수입된 외국 기독교 신앙의 절멸"을 계획하고, 성경과 기독교 십자가를 ''나의 투쟁''과 만자기로 대체할 계획을 세웠다.[48] 그의 ''20세기의 신화''(1930)에서 독일인의 주요 적은 "러시아 타타르족"과 "셈족"(기독교인, 특히 가톨릭 교회 포함)이라고 썼다.[73] 괴벨스는 독일 성직자에 대한 나치의 박해를 주도했다.[60] 마르틴 보어만은 ''교회 투쟁''의 주요 지지자였다.[74] 그는 기독교와 나치즘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75] 1941년 공개적으로 "국가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38] 1941년 6월 9일 가울라이터에게 보낸 기밀 메시지에서도 같은 내용을 선언했다.[76] 보어만은 나치즘이 "과학적"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기독교와 완전히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76]
> 우리가 국가 사회주의자가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자연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힘... 을 전능 또는 신이라고 부릅니다. 이... 힘이... 기도나 다른... 것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순진함 또는... 사리사욕에 달려 있습니다.[77]
3. 2.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기독교
나치 독일 당시 대다수의 교회들은 교파를 떠나 나치에 대해 지지하거나 침묵했다. 가톨릭 교회는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칼 라너 등의 일부 신학자들이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기도 했다.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 영적인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보내셨듯이,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서 히틀러를 보내셨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나치에 대해 우호적이었다.[197]
히틀러는 종교적 반유대주의 대신, 인종적 반유대주의를 인정하는 "이성적 반유대주의"를 옹호했다.[78]
제프리 블레인은 자신의 책 기독교의 역사에서 "기독교는 끔찍한 홀로코스트에 대해 어느 정도 간접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오랫동안 경쟁자이자 때로는 적이었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으로 유대 지도자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대해 비난했지만, 블레인은 "동시에 기독교인들은 헌신과 존경을 보였다. 그들은 유대인에 대한 빚을 의식했다. 예수와 모든 제자들, 그리고 그의 복음서 저술가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를 유대교 회당의 성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성서로 여겼다..."라고 적었다.[79]
로렌스 리스는 "기독교에 대한 강조"는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표현한 비전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암울하고 폭력적인 비전"과 유대인에 대한 본능적인 증오는 다음과 같은 매우 다른 출처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사회 진화론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개념을, 아르튀르 드 고비노의 ''인류 불평등론''에서 "아리아인"의 우월성에 대한 개념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로부터 유대교와 볼셰비즘의 연관성에 대한 개념을 얻었다.[80] 히틀러는 세계 역사가 인종 간의 생존 경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대인들이 독일인을 약화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슬라브족과 같은 열등한 집단과 독일 유전자 풀의 결함이 있는 개인들이 아리아인 "우월 인종"을 위협한다고 믿으며, 가혹한 "선택적 열등 배제" 정책을 옹호했다. 리처드 J. 에반스는 이러한 주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종종 "사회 진화론자"라고 불리지만, 이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가 거의 없다고 썼다.[81] 에반스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신의 사회 진화론적 언어를 대량 학살의 담론적 실행의 핵심 요소로 사용"했으며, 나치 변형의 사회 진화론적 언어는 "그들이 하는 일이 역사, 과학, 자연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설득함으로써" 정권의 "테러적이고 대량 학살적인" 정책의 책임자들로부터 모든 제약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2]
3. 3. 교회 투쟁 (Kirchenkampf)
나치 독일 시대에 대부분의 교회는 나치를 지지하거나 침묵했다. 개신교에서는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히틀러를 보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197] 이에 반대한 개신교인들은 고백교회를 통해 저항했지만, 이들 역시 일치된 저항은 아니었다. 바르멘 선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에게도 굴복할 수 없다고 밝혔으나, 나치에 반대한 성직자들은 죽거나 투옥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197] 폴 틸리히 같은 신학자는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자율적인 기구를 용납하지 않았고,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려 했다.[36] 요제프 괴벨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마르틴 보어만, 하인리히 힘러 같은 이들은 교회 투쟁을 중요하게 여겼고, 반교회적 정서가 강했다.[37]
괴벨스는 기독교와 나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37] 히틀러는 로젠베르크를 공식 이데올로그로 임명하여 교회를 분노하게 했다.[38] 힘러는 친위대의 주요 임무가 기독교를 극복하고 "게르만"적 삶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39] 보어만은 나치즘과 기독교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38]
히틀러는 교회와의 갈등에서 급진적이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자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부하들에게 교회 투쟁을 부추기는 자유를 주었다.[37]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묘사했지만,[40][41] 괴벨스 일기에 따르면 기독교를 증오했다.[43] 히틀러는 가톨릭의 조직력은 존경했지만, 그 가르침은 경멸했다.[44][45]
나치는 긍정적 기독교라는 종파를 세워 교회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 이는 히틀러를 숭배하는 컬트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괴벨스는 히틀러가 종교 창시 의향이 없다고 기록했다.[46]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는 전략을 채택했다.[47]
한스 케를이 이끄는 교회 문제 제국부는 나치 이데올로그들에게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53] 케를은 나치의 "긍정적 기독교"를 설명하며, 사도신경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총통이 새로운 계시의 전령이라고 말했다.[48]
1933년 수권법 통과 전, 히틀러는 교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권력을 잡은 후 이 약속을 어겼다.[55][56] 나치의 ''교회 투쟁'' 목표는 궁극적으로 교회를 근절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다.[15][57]
윌리엄 시러는 나치가 기독교를 파괴하고 게르만 신들의 이교주의로 대체하려 했다고 썼다.[38]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히틀러의 종교 폐지 계획을 폭로했다.[58] 그러나 일부 나치는 나치즘과 기독교를 같은 운동으로 보았다.[59] 괴벨스, 보어만 등은 교회와의 갈등을 중요하게 여겼다.[60]
야드 바셈은 히틀러의 장기 목표가 가톨릭과 기독교의 완전한 제거였다고 썼다.[61] 히틀러는 전쟁 후 기독교의 영향력을 파괴할 의도였다.[62] 알베르트 슈페어는 교회에 부지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회상했다.[63] 히틀러는 동유럽 독일화 계획에서 기독교 교회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64]
제프리 블레이니는 히틀러가 기독교인들의 공산주의 무신론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했다고 썼다.[65] 히틀러는 기독교를 임시 동맹으로 보았고, 나치즘은 이교 종교였다.[65] 오토 슈트라서는 히틀러가 무신론자라고 말했다.[66]
나치의 인종 정책과 교회 투쟁은 중요한 이념적 영역이었다.[67] 시간이 지나면서 반교회 정서가 강해졌고,[68] 나치 이데올로기는 기독교와 충돌했다.[69] 나치는 수백 개의 수도원을 압수하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제거했다.[70] 종교 간행물은 검열되거나 금지되었다.[71]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는 2,720명이 넘는 성직자가 투옥되었고,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72]
로젠베르크는 독일인의 주요 적이 셈족이며, 기독교인을 포함한다고 썼다.[73] 괴벨스는 성직자 박해를 주도했고, 기독교와 나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다고 썼다.[60] 마르틴 보어만은 ''교회 투쟁''의 주요 지지자였고,[74] 기독교와 나치즘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75] 그는 교회의 영향력을 파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76]
> 우리가 국가 사회주의자가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해 말할 때, ... 자연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힘 ... 우리는 그것을 전능 또는 신이라고 부릅니다. ...[77]
1933년, 프란츠 폰 파펜을 통해 교황청과 제국 정교 협약 체결 회담이 시작되어, 가톨릭 교회의 자유를 보호하고 성직자의 정치 활동을 제한했다.[83] 프로테스탄트 제국 교회 통합도 고려되었고, 히틀러는 루드비히 뮐러와 논의했다.[84]
기독교는 독일에서 지배적인 종교였지만, 나치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불쾌하게 여겼다. 에반스는 히틀러가 나치즘과 종교가 공존할 수 없다고 믿었고, 과학이 미신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외세의 개입을 용납할 수 없었고, 사제들은 "검은 벌레"와 같다고 했다.
히틀러 독재 기간 동안 6,000명 이상의 성직자가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49] 점령지에서도 종교 청년 운동, 교구 회의 등이 금지되고, 교회 자산이 압수되었다. 주교 신학교가 폐쇄되고, 교회와 종교 조각상이 훼손되었다. 300명의 성직자가 추방되고, 수도자와 수녀는 추방되거나 서약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86]
가톨릭 교회는 폴란드에서 특히 탄압받았다. 1939년부터 1945년 사이 폴란드 성직자의 약 3,000명(18%)이 살해되었고, 그중 1,992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87] 제국 가우 바르테란트에서는 더욱 가혹해, 교회가 폐쇄되고 대부분의 사제가 살해, 투옥 또는 추방되었다. 바르테가우 가톨릭 성직자의 80%와 5명의 주교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중 108명은 순교자로 여겨진다.[87]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만 2,600명의 가톨릭 사제가 살해되었다.[87]
많은 역사가들은 나치가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88] 어떤 이들은 나치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한다.[88] 그러나 소수의 역사가들은 그러한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89][90][91][92][93][94] 뉴욕 타임스는 나치가 교회를 통제하고 전복하여 기독교를 파괴하려 했다고 보도했다.[95][96][97] 그러나 이 목표는 로젠베르크와 발두어 폰 쉬라흐 등 일부에게만 국한되었다.[98] 로저 그리핀은 히틀러 등이 장기적으로 기독교를 근절하려 했다고 주장한다.[96] 리처드 슈타이그만-갈은 히틀러나 나치가 교회를 파괴할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나치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간주했다고 주장한다.[89][99][100]
사망한 기독교인 중 가장 많은 수는 인종 때문에 죽은 유대계 기독교인 또는 ''혼혈''이었다. 카한(1999)은 유대인 혈통의 기독교인이 약 20만 명 있었다고 추정한다.[101] 비유대인 기독교인 중 11,300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약 1,490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270명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처형되었다.[102] 다하우에는 특별한 "사제 구역"이 있었다. 다하우에 수용된 2,720명의 사제 중 1,034명이 살아남지 못했다. 이 사제의 대다수는 폴란드인이었고, 그 중 868명이 다하우에서 사망했다.
3. 4.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나치 독일과 가톨릭 교회의 관계는 복잡했다. 1933년 교황청과 제국 정교 협약(Reichskonkordat)을 체결하여 교회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가톨릭 교회의 권리를 보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치는 이 협약을 어기고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55][56]
나치 이데올로기는 교회의 국가 종속을 원했기에, 가톨릭 교회는 나치에 의해 탄압받았다. 요제프 괴벨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마르틴 보어만, 하인리히 힘러와 같은 많은 나치 지도자들은 반(反)가톨릭적 성향을 보였으며, 교회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37]
아돌프 히틀러는 가톨릭 교회의 조직력은 존중했지만, 그 가르침은 경멸했다.[44] 그는 가톨릭 교리를 '인간 실패의 체계적인 배양'이라고 비판했다.[44][45]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회칙 '불타는 근심으로'(Mit brennender Sorge)를 발표하여 나치의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 교육에 대한 종교적 영향력 배제를 비판했다.[113]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은 나치에 저항했다. 클레멘스 폰 갈렌 주교는 나치의 안락사 프로그램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여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얻었고, 이는 나치가 안락사 프로그램을 일시 중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113] 베른하르트 리히텐베르크 신부와 카를 라이스너 신학생은 나치에 저항하다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114]
나치는 1941년 독일 내 모든 수도원과 수도회를 해산하려 했으나, 가톨릭 신자들의 저항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인력 부족으로 인해 중단되었다.[115]
3. 5. 개신교 교회와의 관계
나치 독일 시대에 대다수의 교회들은 나치에 대해 지지하거나 침묵했다. 개신교의 경우 "하나님이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히틀러를 보내셨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나치에 우호적이었다.[197]
개신교 내 나치 반대파들은 고백교회를 통해 나치에 저항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에게도 굴복할 수 없다는 바르멘 선언을 통해 독일 개신교를 통합하려는 히틀러의 종교정책에 반대했다. 그러나 나치에 반대한 성직자들은 죽거나 투옥되었고,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는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197]
독일의 각 주(州)는 종교적 교파에 따라 지역별 사회적 차이를 보였다.[133] 독일 기독교인(''Deutsche Christen'')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나치즘의 이념과 반유대주의 정책에 맞추려는 독일 개신교 교회 내의 운동이었다.[135] 이들은 나치 개신교를 설립하고[136] 기독교 내에서 유대교 전통을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33년 11월, 'Deutsche Christen'의 개신교 대중 집회는 다음 세 가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37]
독일 기독교인들은 1933년 후보로 루트비히 뮐러를 선택했다.[138] 히틀러의 지원으로 독일 복음주의 교회가 설립되어 1933년 7월 14일 국가에 의해 인정되었으며, 이는 국가, 국민, 교회를 하나로 융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44]
교회 내의 독일 기독교 운동에 대한 지지는 고백 교회 구성원들의 반대를 받았다. 마르틴 니묄러는 복음주의 목사의 거의 40%가 지지하는 ''Pfarrernotbund''(목사 비상 연맹)를 조직했다.[149][150] 그러나 1933년, 라인홀트 크라우스가 유대교 미신으로 구약 성경을 거부할 것을 촉구한 후 다수의 ''Deutsche Christen''이 운동을 떠났다.[151] 루트비히 뮐러가 모든 기독교인을 나치즘에 순응시키지 못하자, 히틀러는 개신교 교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139]
나치는 교회 내부에서 저항을 약화시켰지만, 교회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152]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1937년 투옥되었다.[153] 1943년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154] 히틀러는 개신교 성직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고백 교회"조차도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자주 선언했다".[155]
3. 6. 소수 종교 단체
나치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 박해
1934년,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사실 선언"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발간했다.[157] 당시 제국 총리였던 히틀러에게 보낸 이 개인적인 편지에서 J. F. 러더퍼드는 "독일의 성서 연구자들은 인간과 신의 관계에 관해 독일 제국 국가 정부가 선포한 것과 똑같은 고귀한 윤리적 목표와 이상, 즉 창조된 존재가 창조주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진술했다.[158][159]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 정부에게 그들의 목표가 순전히 종교적이며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심시키려 했고, 정부가 그들의 설교를 계속 허용해주기를 바랐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나치 독일에서 그들의 활동을 제한했다. 이후 러더퍼드는 자신의 출판물을 통해 기사에서 히틀러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이는 나치 독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겪는 어려움을 더욱 악화시켰을 수 있다.[160]
여호와의 증인(독일에서는 "성서 연구자"(Bibelforschersde)로 알려짐)은 25,000명의 신도로 구성되었으며, 나치 정부에 의해 박해받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수감된 모든 신자는 독특한 보라색 삼각 표시로 식별되었다. 이 종교 단체의 일부 신자는 독일군 복무나 나치 정부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250명이 처형되었다.[161] 약 10,000명이 다양한 범죄로 체포되었으며, 2,000명이 나치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약 1,200명이 사망했다.[161] 유대인, 로마니와 달리 종족적 배경 때문에 박해받았던 여호와의 증인은 신앙을 포기하고 국가 권위에 복종하며 독일 군대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류에 서명함으로써 종교적 신념을 부인하여 박해와 개인적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162]
3. 7. 무신론과 자유사상
1933년 10월 13일, 부총통 루돌프 헤스는 "어떤 국가 사회주의자도 특정한 신앙이나 고백을 하지 않거나, 종교적 고백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163] 그러나 정권은 "무신론적 공산주의"[164][165]에 강하게 반대했고, 독일의 모든 자유사상 (''freigeist''), 무신론자, 그리고 주로 좌익 단체들은 같은 해에 금지되었다.[166][167]
1933년 나치-바티칸 협약 협상 중 한 연설에서 히틀러는 세속 학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속 학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학교는 종교 교육이 없고, 종교적 토대 없는 일반적인 도덕 교육은 공중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성 교육과 종교는 신앙에서 파생되어야 한다."[168] 나치 정권에 의해 폐쇄된 단체 중 하나는 독일 자유사상가 연맹이었다. 기독교인들은 히틀러에게 자유사상가들이 선전하는 반종교적이고 반교회적인 선전을 종식해 줄 것을 호소했고,[169] 히틀러의 나치당 내에서 무신론자 마르틴 보어만은 그의 반기독교적 견해를 매우 적극적으로 표명했다.[170]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스스로 게르만 이교주의에 매료되었으며,[171] ''고트글로이비히'' 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했고, "상위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기강 문란의 잠재적 원천"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무신론자의 SS 입대를 허용하지 않았다.[33]
힘러는 SS에서 "우리는 우리 위에 계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지구, 조국, 그리고 민족을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총통을 보내셨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오만하고, 과대망상적이며, 어리석은 자로 간주해야 하며, 따라서 SS에 적합하지 않다."고 선언했다.[27] 그는 또한 "국가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신적인 세계관을 믿는다."고 선언했다.[27]
3. 8. 밀교와 신이교주의
1930년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는 이미 밀교계가 존재했다. 이들 단체는 탄압을 받았지만, 나치 독일의 프리메이슨처럼 박해받지는 않았다. 알려진 유일한 사례는 신념 때문에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밀교주의자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마르비였다.
루돌프 헤스는 인智學, 안트로포소피에 관심을 가졌고, 하인리히 힘mler는 밀교 문제에 강한 관심을 보이는 등 일부 나치 지도자들은 밀교에 관심을 보였다.
툴레 협회는 1920년 결국 나치당으로 변모한 독일 노동자당을 지원한 밀교 단체였다. 툴레 협회와 연관된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실제로 히틀러의 연설 기술을 지도했고, 히틀러는 툴레 협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이 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히틀러는 나중에 《나의 투쟁》 제2권을 에카르트에게 헌정했다. 아리오소피의 인종주의적 밀교 교리는 결국 나치즘의 부상으로 이어진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족주의 운동, 폴키쉬 운동 분위기에 기여했다.
게슈타포는 1938년 12월까지 "국제 여호와의 증인", "심령 연구를 위한 연구 그룹", "바하이 종파" 등을 금지했다.[172]
점성가, 치유사, 점술가는 나치 치하에서 금지되었으며, 태양과 계절을 숭배하는 작은 이교도 단체인 "독일 신앙 운동"은 나치를 지지했다.[9]
4. 나치즘의 종교적 측면
히틀러를 '퓌러'로 숭배하는 인격 숭배는 나치즘의 준종교적 요소였다. 니콜라스 굿릭-클라크와 같은 비밀주의 역사가들은 "거대한 회중, 현수막, 성스러운 불꽃, 행렬, 대중적이고 급진적인 설교 방식, 기도와 응답, 기념관과 장례 행진" 등을 "아리아인 독일의 사명과 적에 대한 승리, 인종과 국가 숭배의 필수적인 소품"으로 묘사했다.[183] 이러한 나치즘의 다양한 종교적 측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나치즘을 일종의 정치 종교로 간주했다.[184]
일례로 히틀러가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려 한 계획은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려는 시도로 묘사되었다.[185] 프리츠 스턴의 ''문화적 절망의 정치'' 이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나치즘과 종교의 관계를 이러한 방식으로 보았다. 일부 역사가들은 나치 운동과 히틀러가 근본적으로 기독교에 적대적이지만, 무종교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존 S. 콘웨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독일에서 기독교 교회가 매력을 잃었고, 히틀러는 "신뢰를 잃은 기독교 신조 대신 필수적인 세속적 신앙으로 보이는 것"을 제공했다고 설명한다.[186]
히틀러의 수석 건축가인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고록에서 히틀러 자신이 힘러와 로젠베르크가 밀어붙인 신비주의적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썼다. 슈페어는 SS를 신화화하려는 힘러의 시도에 대해 히틀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인용했다.[187]
파시즘 연구 학자인 스탠리 페인(Stanley Payne)은 파시즘의 근본은 순전히 물질적인 "시민 종교"의 토대였다고 언급한다. 이는 "이전의 신념 체계를 대체하고 초자연적 종교를 부차적인 역할로 격하시키거나 아예 배제"하는 것이며, "종교적이거나, '기독교 파시스트'로 여겨지는 구체적인 사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탈기독교적, 탈종교적, 세속적이고 내재적인 프레임의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188] 한 이론은 종교와 파시즘은 둘 다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전체론적 ''세계관''"을 주장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189] 예일 대학교(Yale)의 정치학자 후안 린츠(Juan Linz) 등은 세속화가 또 다른 전체주의 이념으로 채워질 수 있는 공백을 만들어 세속적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했다고 언급했으며,[190][191] 로저 그리핀(Roger Griffin)은 파시즘을 일종의 반종교적 정치 종교로 특징지었다.[192]
그러나 로버트 팩스턴(Robert Paxton)은 "파시스트들은 흔히 ... 물질주의적 세속주의를 비난했다"고 말하며, 과거 파시즘의 상황이 미래의 파시즘이 "국가 대신 종교를 기반으로 하거나 국가 정체성의 표현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유럽에서도, 종교 기반 파시즘은 드물지 않았다. 팔랑헤 에스파뇰라(Falange Española), 벨기에의 렉스](Rexism)], 핀란드의
5. 제2차 세계 대전과 종교
히틀러는 전쟁 발발과 함께 교회와의 갈등을 중단하고, 독일 내부의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정책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그는 전쟁 시작과 함께 "전쟁 기간 동안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에 대해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포고했다.[173] 존 콘웨이에 따르면, "나치는 로젠베르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0년 인구 조사에서 단 5%만이 기독교 교회와 더 이상 관련이 없다고 등록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했다."[173] 히틀러의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수백만 명의 독일 기독교인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300만 명의 나치 당원 대부분은 "여전히 교회세를 납부"했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17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 내의 일부 나치 급진파는 교회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결정했다.[175] 폴란드에서 나치가 승리한 후, 교회의 초기 충성심 호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탄압이 확대되었다.[176]
선전부는 전쟁 지지를 표명하라고 교회에 위협을 가하고 강한 압력을 가했으며, 게슈타포는 몇 주 동안 교회 회의를 금지했다.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독일 교회는 이에 따랐다.[177] 폴란드 침공이나 전격전에 대한 비난은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마라렌스 주교는 폴란드 분쟁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우리 군대에 빠른 승리를 안겨주셨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교회부 장관은 독일 전역의 교회 종들이 일주일 동안 축하하기 위해 울리고, 목사와 사제들이 독일군을 위한 "군목으로 자원하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제안했다.[178] 가톨릭 주교들은 추종자들에게 전쟁 노력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조국과 국민을 위한 이 전쟁을 축복된 성공으로 이끌어 주시도록 열렬히 기도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다."[179] 마찬가지로, 개신교인들은 선언했다: "우리는 이 순간에 우리의 총통과 제국, 모든 군대, 그리고 조국을 위해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로 우리의 국민과 하나가 됩니다."[179]
바티칸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폴란드에서 가톨릭 사제와 평신도에 대한 나치의 잔혹 행위에 대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독일 가톨릭 종교 지도자들은 나치의 전쟁 노력을 계속 지지했다. 그들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총통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하라"고 촉구했다.[179] 1940년과 1941년의 나치 전쟁 행위는 이와 유사하게 교회가 지지를 표명하도록 촉구했다. 주교들은 교회가 "특히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정당한 전쟁에 동의한다"고 선언하고 "독일과 유럽에 유익한 평화"를 원하며 신자들에게 "그들의 시민적, 군사적 덕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178] 그러나 나치는 교황 비오 12세의 첫 번째 회칙인 ''Summi Pontificatus''과 1939년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통해 교황이 표명한 반전 감정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폴란드에 대한 그의 지지와 폴란드 힐론 추기경의 바티칸 라디오 "도발적인" 사용에 분노했다. 회칙 배포가 금지되었다.[180]
반 교회 급진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1939년 10월 히틀러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교회 사람들의 대다수가 전쟁 노력을 지지하고 있지만, 몇몇 "잘 알려진 목사들 중 선동가들은 처리할 필요가 있다"고 추정했다.[175] 하이드리히는 교리적 특성과 국제주의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배급을 근거로 교회 인쇄소에 제공되는 자원을 줄이고, 교통 문제로 인해 순례와 대규모 교회 모임을 금지하는 등 전쟁 기간의 긴급 상황을 틈타 교회의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고안했다. 교회는 "방공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종이 녹아내렸다. 인쇄소가 폐쇄되었다.[176]
1941년부터 전쟁이 동부로 확대되면서, 정권의 교회 공격도 확대되었다. 수도원과 수녀원이 표적이 되었고 교회 재산 몰수가 급증했다. 나치 당국은 병원, 난민 또는 어린이 수용과 같은 전시 필요를 위해 재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대신 자체 목적으로 사용했다. "국가에 대한 적대감"은 압수 이유로 흔히 제시되었으며, 수도원 한 구성원의 행동은 전체 몰수로 이어질 수 있었다. 예수회가 특히 표적이 되었다.[181] 교황 대사 체사레 오르세니고와 베르트람 추기경은 당국에 끊임없이 불만을 제기했지만, 전시 필요로 인해 더 많은 징발을 예상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182]
6. 한국의 관점
나치 독일의 종교 정책은 한국 사회에 다음과 같은 교훈과 시사점을 준다.
첫째, 종교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권 중 하나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치 독일은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종교를 탄압하고,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억압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경종을 울리는 사례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다양한 신념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함을 시사한다.
둘째, 정치 권력이 종교를 통제하거나 특정 종교를 옹호하는 행위는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치 독일은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반대하는 종교를 탄압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며, 국가는 종교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셋째, 종교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일부 종교인들은 박해받는 사람들을 돕고, 나치의 만행을 비판하며 양심의 목소리를 냈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며, 종교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야 함을 보여준다.
넷째,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은 사회 통합과 평화를 증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치 독일은 종교 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특정 종교를 우대하며 다른 종교를 차별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종교 간의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며, 서로 다른 종교가 대화와 협력을 통해 사회 통합과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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