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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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로, 초기에는 유대교의 한 분파였으나 점차 독자적인 종교로 발전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 내에서 박해를 받았으나,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공인되었고,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에 의해 국교로 지정되었다. 이후 기독교는 동서 교회의 분열, 십자군 전쟁, 종교 개혁, 르네상스, 계몽주의, 식민주의, 세계 대전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여러 교파로 분화되고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현대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적 흐름과 사회적 변화에 직면해 있으며, 에큐메니컬 운동을 통해 교파 간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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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기독교

예수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도와 함께 설교를 하며 군중을 이끌던 때와 예수의 죽음 이후[35]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녔다. 따라서 일치된 신학도 없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다.[36]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한다.[37] 사도들이 부활한 예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대사명[38]을 받았다고 여겨졌고, 이들은 예수의 지시에 따라 성령을 받기까지 10일간 지속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도했다고 하며, 성령을 받은 사건 이후[39] 이들을 중심으로 신자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40] 이 사건을 기독교 교회들에서는 성령강림절(성령 강림 대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었고, 자신들이 유대교와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 쓰인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유대인의 선민사상에 부정적이었다.[41] 사도행전 15장에서는 훗날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불리게 된 회의에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결정하면서, 우상 숭배의 금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거나 짐승의 피를 마시지 말것 정도 만을 지키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42]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공생애()로 시작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의 사명을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의 예언적 전통의 관점에서 보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예수 안에서 육화(구체화)되었으며,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매장되었다가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믿었다. 기독교 교회는 성육신과 부활을 첫 번째 교리로 정립했으며, 세례와 성찬례 (예수의 최후의 만찬)를 두 가지 주요 의식으로 삼았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1세기에 로마 속주 유대에서 등장했다. 기독교는 처음 발전한 지리적, 문화적, 사회 경제적 맥락에 영향을 받았고, 또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지중해 주변의 로마 제국에서, 엘리트 (인구의 2~5%)가 경제 생산 수단을 통제했고, 문해력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권을 가졌으며, 대부분의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의 삶은 쉽지 않았고, 기아는 흔했다. 이 맥락에서 '종교'는 정치나 가족 가구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가정 교회'는 새로운 예수 운동의 초기 발전 단계이자 조직이었다. 집 주인은 후원자이자 주최자였다. ''콜레기아''으로 알려진 자발적 협회가 모델 역할을 했다. 예배의 전형적인 장소는 공동 식사였으며, 이는 아직 성찬식 식사와 공식적으로 구별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의 첫 번째 공동체는 주로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 회당을 방문하는 이방인인 하나님 경외자도 일부 끌어들였다. 유대 지역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는 매우 다양하고 혼란스러웠다. 유대교 자체에도 수많은 종교적, 정치적 운동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유대교 묵시 문학에 예수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둔 유대교 메시아주의였다.
열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임명되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교회의 신앙, 입장, 전승은 스스로의 시점 중 하나를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성령 강림"에 둔다. 이것이 기독교의 입장이다[2][3][4]。
비판적 학자의 입장을 취하면, "기독교"의 발생 시점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오늘날의 학문은, 예수 자신이 유대교와 분리하려는 의식은 없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예수는 기독교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며, 교회의 직접적인 기원은 예수의 죽음 후, 그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여겨지는 사도 아래 모인 공동체로 추정된다. 성경에 비판적인 입장의 학문에서는, 초기의 교단이 어느 시점에서 유대교와 독립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자각을 가졌는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 붕괴 이후라고 추정한다.
1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시기 기독교와 유대교는 점차 서로 다른 교리와 집단을 갖는 별개의 조직으로 분화되었으며, 마침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르렀다.[43][44]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는 전파와 함께 박해를 받았다. 사도행전 7장 59절에는 스테파노가 유대교를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돌을 던져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2장 2절에는 대 야고보 역시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 제국은 64년부터 기독교를 박해하였는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Annales)에서, 네로 황제가 로마에 일어난 화재를 기독교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45] 그러나, 네로의 박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그 후로도 3세기 무렵까지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특별히 엄단하지는 않았다. 3세기 무렵 기독교는 로마 제국 내의 민중들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받았는데, 기독교인들이 도시의 수호신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을 매우 무례한 행위로 여기거나, 도시에 재앙을 초래하는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팽창이 멈추고, 노예제, 빈부 격차 등 여러 사회적 문제가 심화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신 앞에 인간이 평등하다고 가르쳤고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불안한 삶을 살던 민중을 위로하였던 것이다.[46]
2. 1. 초대교회와 기독교의 기원
예수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도와 함께 설교를 하며 군중을 이끌던 때와 예수의 죽음 이후[35]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녔다. 따라서 일치된 신학도 없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다.[36]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한다.[37] 사도들이 부활한 예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대사명[38]을 받았다고 여겨졌고, 이들은 예수의 지시에 따라 성령을 받기까지 10일간 지속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도했다고 하며, 성령을 받은 사건 이후[39] 이들을 중심으로 신자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40] 이 사건을 기독교 교회들에서는 성령강림절(성령 강림 대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었고, 자신들이 유대교와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 쓰인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유대인의 선민사상에 부정적이었다.[41] 사도행전 15장에서는 훗날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불리게 된 회의에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결정하면서, 우상 숭배의 금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거나 짐승의 피를 마시지 말것 정도 만을 지키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42]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공생애()로 시작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의 사명을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의 예언적 전통의 관점에서 보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예수 안에서 육화(구체화)되었으며,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매장되었다가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믿었다. 기독교 교회는 성육신과 부활을 첫 번째 교리로 정립했으며, 세례와 성찬례 (예수의 최후의 만찬)를 두 가지 주요 의식으로 삼았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1세기에 로마 속주 유대에서 등장했다. 기독교는 처음 발전한 지리적, 문화적, 사회 경제적 맥락에 영향을 받았고, 또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지중해 주변의 로마 제국에서, 엘리트 (인구의 2~5%)가 경제 생산 수단을 통제했고, 문해력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권을 가졌으며, 대부분의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의 삶은 쉽지 않았고, 기아는 흔했다. 이 맥락에서 '종교'는 정치나 가족 가구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가정 교회'는 새로운 예수 운동의 초기 발전 단계이자 조직이었다. 집 주인은 후원자이자 주최자였다. ''콜레기아''으로 알려진 자발적 협회가 모델 역할을 했다. 예배의 전형적인 장소는 공동 식사였으며, 이는 아직 성찬식 식사와 공식적으로 구별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의 첫 번째 공동체는 주로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 회당을 방문하는 이방인인 하나님 경외자도 일부 끌어들였다. 유대 지역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는 매우 다양하고 혼란스러웠다. 유대교 자체에도 수많은 종교적, 정치적 운동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유대교 묵시 문학에 예수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둔 유대교 메시아주의였다.
열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임명되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교회의 신앙, 입장, 전승은 스스로의 시점 중 하나를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성령 강림"에 둔다. 이것이 기독교의 입장이다[2][3][4]。
비판적 학자의 입장을 취하면, "기독교"의 발생 시점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오늘날의 학문은, 예수 자신이 유대교와 분리하려는 의식은 없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예수는 기독교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며, 교회의 직접적인 기원은 예수의 죽음 후, 그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여겨지는 사도 아래 모인 공동체로 추정된다. 성경에 비판적인 입장의 학문에서는, 초기의 교단이 어느 시점에서 유대교와 독립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자각을 가졌는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 붕괴 이후라고 추정한다.
1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시기 기독교와 유대교는 점차 서로 다른 교리와 집단을 갖는 별개의 조직으로 분화되었으며, 마침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르렀다.[43][44]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는 전파와 함께 박해를 받았다. 사도행전 7장 59절에는 스테파노가 유대교를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돌을 던져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2장 2절에는 대 야고보 역시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 제국은 64년부터 기독교를 박해하였는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Annales)에서, 네로 황제가 로마에 일어난 화재를 기독교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45] 그러나, 네로의 박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그 후로도 3세기 무렵까지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특별히 엄단하지는 않았다. 3세기 무렵 기독교는 로마 제국 내의 민중들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받았는데, 기독교인들이 도시의 수호신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을 매우 무례한 행위로 여기거나, 도시에 재앙을 초래하는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팽창이 멈추고, 노예제, 빈부 격차 등 여러 사회적 문제가 심화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신 앞에 인간이 평등하다고 가르쳤고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불안한 삶을 살던 민중을 위로하였던 것이다.[46]
2. 2. 복음서와 신약성경의 형성
예수는 자신의 행적을 글로 남긴 적이 없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 전승되어 온 예수의 행적을 모아 다양한 복음서들이 제작되었다. 성서 연구자들은 기원후 70년 무렵 마르코 복음서가 제일 먼저 만들어지고, 이후에 이를 바탕으로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가 만들어졌다고 추측한다.[47] 이 때문에 이들 세 복음서는 요한 복음서와 달리 서로 비슷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어 공관 복음서라고 불린다.[48]
초기 기독교는 특별한 교단이나 교리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기록되었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도마 복음서는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았다.[49] 복음서들은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주로 살았던 근동 일대의 공용어였던 고대 그리스어의 방언인 코이네(koine, 공동)로 쓰였다. 2세기 중엽까지 비슷했으나 통일되지 않은 목록의 복음서와 다른 신약성서 문헌이 사용되었으나 마르키온의 구약제거와 일부 문헌의 사용 주장이 대두되어 전래되던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7개를 정경으로 인정한 목록을 만들었다. 이 목록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신구약 정경에 어떠한 문헌을 정경으로 수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구약 부문에서 마르키온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교파마다 의견이 다르다.[50]
헬레니즘화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을 만들었다. 이것은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히브리 성경의 번역본이었다.
예수의 사역에 대한 기록을 담은 복음서, 바울로의 서신, 그리고 다른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에게서 유래된 서신들을 포함한,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여진 기독교 저술들은 1세기에 쓰여졌으며, 형성기에도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보낸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1세기 말에 수집된 형태로 유통되었다. 3세기 초에는 현재의 신약 성경과 유사한 신약성경 정경의 발전의 초기 기독교 문서가 존재했다. 4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2세기와 3세기에 나타났지만, 교회 지도자들이 다른 문서에 대해 서로 다른 권위의 정도를 부여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 요한1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유대 전쟁 이전에도, 이미 기독교는 "헬레니스트"에 의해 유대와 인접한 사마리아를 시작으로 하는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방으로도 포교되었고, 각지에서 교회가 설치되었다. 이들 각지에서의 신앙은 예루살렘 교회 측에서 보면 일탈에 해당하는 것도 있었고, 일부는 바울로에 의해 궤도 수정이 이루어진 듯하다. 유대 전쟁 이후에는, 기독교 내의 유대교도는 대부분이 이탈하고,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는 가운데, 헬라어권의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새로운 담당자가 되었다. 그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4세기경에 보이는 고대 교회 조직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불분명하다. 현재의 교회 조직과 직책 및 칭호가 고정되는 것은 6세기이다. 신약성서학자 중 다수는 공관 복음서, 요한 복음서, 요한 묵시록, 공통 서신의 성립을 유대 전쟁 이후로 보고 있지만, 이에 대한 이견도 있다.
2. 3. 로마 제국 내에서의 박해와 성장
초기 3세기 동안,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를 위협으로 간주하여 폭도와 총독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를 일으켰다. 최초로 로마 황제에 의한 박해는 네로 황제 치세인 서기 64년, 로마에서 발생했다. 학자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이때 처형된 것으로 추정한다.
250년, 황제 데키우스는 로마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렸고, 이로 인해 기독교인에 대한 광범위한 박해가 발생했다. 발레리아누스는 그 해 말에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 마지막이자 가장 심각한 공식 박해인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303년에서 311년 사이에 일어났다. 페르시아 사산 왕조 당국의 기독교인에 대한 주기적인 박해도 있었고, 광범위한 그리스-로마 사회의 대중적인 반대도 있었다. 2세기와 3세기의 기독교 작가들은 방어적인 입장에 있었고, 이 기간 동안 '헬레네'라는 용어는 '이교도'와 동일시되었다.
세르디카 칙령은 311년에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에 의해 발표되었으며, 동방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313년에 공동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모든 종교를 합법화하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면서 로마 국가에 의한 기독교인 박해는 중단되었다.[1]
아르메니아 왕국은 전통적으로 301년에 계몽자 그레고리가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 3세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국가가 되었다.
기독교는 보편주의적 논리에 따라 시작부터 세계적 포부를 가진 선교 신앙이었다. 기독교는 먼저 상인, 군인, 이주 부족이 따르던 무역 및 여행 경로를 따라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해 확산되었다. 기독교는 150년에서 250년 사이에 5만 명 미만의 신도에서 백만 명이 넘는 신도로 발전하면서 임계 질량을 달성하여, 자체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신자를 확보했다.
1세기에는 소아시아(아테네, 고린토, 에페소스, 페르가뭄)로 퍼져나갔다. 이집트 기독교는 아마도 1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현대에도 남아있는 콥트 기독교가 발전했다. 안티오크의 기독교는 바울 서신에 언급되어 있다.
초기 기독교는 골, 북아프리카, 로마시에 존재했다. 3세기 후반에는 게르만 세계에서 아리우스파 형태로 확산되었고, 늦어도 3세기까지는 로마 브리튼에 도달했을 것이다.
초창기부터 에데사(현대 터키)에는 기독교인이 존재했다. 파르티아 제국의 아디아베네 (현대 이란)에서 발전했으며, 그루지야, 에티오피아, 인도, 누비아, 남아라비아, 소코트라, 중앙아시아 및 중국에서도 발전했다. 6세기까지 스리랑카와 티베트에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다.
로마 제국은 원래 다신교 국가였으며, 동방의 영향으로 발생한 황제 숭배에 기독교도들이 따르지 않았던 것 등 몇 가지 이유로 인해 로마 제국 정부 당국에 의해 박해를 받아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특히 네로, 도미티아누스, 데키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은 황제 치하에서 박해가 이루어졌다고 여겨지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제외하면 그다지 대규모는 아니었으며, 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조차도 그렇게 대규모였는지는 의문으로 여겨진다. 박해 사례의 지리적 확산으로 미루어 볼 때, 2세기 말에는 로마 제국 전역에 교회가 조직을 확장했다고 추측된다. 또한 3세기에는 이집트에서 사막에서의 은둔 수도 생활이 퍼져, 독거 또는 집단으로 황야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자(수도자)가 다수 나왔다.
1세기 후반부터 2세기까지의 교회 내 문헌(사도 교부 문서) 등으로부터의 추측에 따르면, 이 시기, 예루살렘의 헤브라이스트(유대계) 교회와, 시리아나 이집트의 헬레니스트(그리스계) 교회 간에 다른 문화권의 교회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사도들이 각 문화권을 인정했다. 가톨릭 교회에 따르면, 헤브라이스트 교회는 사도 (주교)와 장로 (사제), 헬레니스트 교회는 감독 (주교)과 집사 (부제)와 같이, 조직 체계(히에라르키)가 달랐으며, 이윽고 전 지역의 교회에서 주교, 사제, 부제라는 히에라르키가 널리 퍼지게 된다.
3. 고대 후기의 기독교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51]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지원하고 보호했다. 그는 주교들에게 사법권을 부여하고,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다신교 사제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것과 동일한 면제를 부여하여 동등한 지위를 확립했다. 그는 교회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교회 회의의 선례를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단성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54]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통하여 정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55]
콘스탄티누스는 여러 교회를 짓는 데 개인 및 공공 기금을 쏟았고, 교회에 재산과 토지를 기증했으며, 성직자들의 수입과 유지를 제공했다.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 교회 건축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기독교 예술과 문학이 번성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공인 후 321년에 일요일 휴업령을 내렸다.[12][13] 이것에 의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축하하는 일요일이 로마 제국이 정하는 휴일이 되었다.[14]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57] 392년에는 제국 내에서의 기독교 이외의 종교 및 기독교의 이단 신앙이 금지되어, 로마 제국 유일의 국교로서의 기독교의 지위가 확립되었다.[10][11]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신학을 집대성하였다.
비공인 종교로서 로마 제국과 민중으로부터 간헐적으로 박해를 받아온 기독교는, 이렇게 그 입장이 역전되어 국가에 보호받는 측이 되었다.
3. 1.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과 국교화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51]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지원하고 보호했다. 그는 주교들에게 사법권을 부여하고,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다신교 사제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것과 동일한 면제를 부여하여 동등한 지위를 확립했다. 그는 교회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교회 회의의 선례를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단성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54]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통하여 정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55]
콘스탄티누스는 여러 교회를 짓는 데 개인 및 공공 기금을 쏟았고, 교회에 재산과 토지를 기증했으며, 성직자들의 수입과 유지를 제공했다.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 교회 건축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기독교 예술과 문학이 번성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공인 후 321년에 일요일 휴업령을 내렸다.[12][13] 이것에 의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축하하는 일요일이 로마 제국이 정하는 휴일이 되었다.[14]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57] 392년에는 제국 내에서의 기독교 이외의 종교 및 기독교의 이단 신앙이 금지되어, 로마 제국 유일의 국교로서의 기독교의 지위가 확립되었다.[10][11]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신학을 집대성하였다.
비공인 종교로서 로마 제국과 민중으로부터 간헐적으로 박해를 받아온 기독교는, 이렇게 그 입장이 역전되어 국가에 보호받는 측이 되었다.
3. 2. 니케아 공의회와 기독교 교리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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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51]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는 기독교 신자였으며[52],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꾼 꿈의 지시대로 병사의 방패에 카이 로(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그 동안 다양한 사상으로 분화되어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단성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54]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통하여 정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55] 324년에서 330년 사이 로마 제국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새롭게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칭하였다. 새로 지어진 건물 가운데에는 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56]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신학을 집대성하였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25년)부터 제2차 니케아 공의회 (787년)까지의 첫 일곱 공의회에서 기독교의 중요 신학적인 문제가 논의되었다.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교였는데, 이것은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교회 조직과 전례 등을 정비하였음을 보여준다.[58] 한편, 초기의 일곱 공의회 이후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 동방 정교회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최한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는다.[59][60]
콘스탄티누스 치하 북아프리카에서 도나투스주의가 분열로 형성되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때때로 폭력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동안 성서를 넘겨준 사람들을 교회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많은 호소 끝에 제국은 무력으로 대응했다.[61]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아리우스주의를 이 시기의 가장 큰 이단으로 여겨왔다.[61] 320년경 아리우스는 그의 주교 알렉산더에게 편지를 써서,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고 시작이 없는 것으로, 세 가지 뚜렷한 하나님의 "본질"을 구별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와는 달리, 이 형이상학에서 성자는 성부와 같은 본질이 아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우스를 상대로 공식적인 조치를 취하고, 더 넓은 교회에 같은 행동을 취하도록 권고함으로써 대응했다.[61]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지속적인 신학적 논쟁은 제3차 (431년), 제4차 (451년), 제5차 (583년) 및 제6차 에큐메니컬 공의회 (680년)로 이어졌다.[61] 칼케돈 공의회(제4차 공의회)가 그리스도의 두 개의 별개의 본성이 하나의 존재론적 실체를 형성한다는 칼케돈 정의를 작성한 후 분열이 일어났다.[61]
4세기까지 신약성경 정경이 확정되어 기독교 성경이 공식화되었다.[61] 이 과정은 기독교 텍스트를 구약으로 알려진 히브리 성경과 구별했다. 그러나 교회 간의 협력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61]
고대 신학의 중심은 주로 동방의 그리스 교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카파도키아 교부 삼인방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그 예이다. 이윽고 서방의 라틴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 등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의 발전에 따라 교리 논쟁이 격화되었다. 그 때문에, 종종 지방 교회 회의나 보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2세기 이후, 마니교의 유입과 몬타누스파나 아리우스파가 일어나 교회 내에서의 의견 통일이 어려워졌다. 특히 4세기 이후, 그리스도의 위상을 둘러싼 일련의 신학 논쟁이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위상을 둘러싼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논쟁은 폭력을 동반한 싸움으로까지 격화되었다.
기독교 교파 간의 폭력 항쟁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 (325년)를 열었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에 개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공의회 시점에서는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세례를 받은 것은 죽기 직전). 어디까지나 로마 제국의 구심력 저하 과제 해결을 위해 기독교 세력을 이용하려는 것이 콘스탄티누스의 의도였다.
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추방되었다. 또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열린 에페소스 공의회 (431년)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도 이단으로 규정되어 추방되었다.
또한, 단성설과 양성설의 다툼에서는, 한때 단성설이 유리한 양상을 보였지만, 최종적으로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연 칼케돈 공의회 (451년)에서 단성설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시리아 및 이집트를 중심으로 합성론 (단성설의 일종으로 간주되었지만, 스스로는 단성설이 아니라고 주장)을 지지하는 교회 (비칼케돈 정교회)가 많았기 때문에, 각 교회에서 대립 주교가 설 정도로 분열이 생겼다.
이처럼 이단 설을 배제함으로써 정통파 기독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세련되게 확립해갔다. 다시 말해 배제해야 할 이단과의 대비로서, 이 시대에 '정통' 신앙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3. 3. 기독교의 분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
초기 일곱 번의 공의회 과정을 통해 보편교회주의가 만들어졌지만, 이와 다른 신학을 가진 교파들은 이단으로 배척되어 독자적인 발전 과정을 거쳤다.[62]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되었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의 양성설이 공인되자 단성설을 주장한 콥트 교회, 아비시니아 교회, 야고보 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가톨릭주의와 결별했다.[62] 68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되자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분리되었고, 이들은 당나라까지 기독교를 전파하여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62]
후기 고대 시대에 동서 교회 간 분열 경향이 나타났다. 서방 교회는 라틴어를, 동방 교회는 그리스어, 시리아어 등을 사용했다. 로마 서방 교회는 로마 문화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국가 통제에 저항하려 했으나, 동방 기독교는 그리스 문화와의 조화를 찬양하고 교회와 국가 간의 만장일치를 옹호했다.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와 동등한 우선권을 주장하면서 오대 교구를 옹호했지만, 서방은 교황 수위권을 옹호하며 반대했다. 칼케돈 공의회의 결론에 대한 이견으로 아르메니아, 아시리아, 이집트 교회는 가톨릭에서 탈퇴하여 동방 정교회로 통합되었다.
공의회에 의한 교리 확정은 정통 교리의 확립을 촉진했지만, 이단으로 여겨진 교설을 가진 자들이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리우스파는 소멸했지만, 게르마니아를 중심으로 포교하여 상당 기간 세력을 유지했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된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넓혔고, 당나라에 경교로 전래되어 번성했다.[62]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된 단성론(합성론)은 시리아, 이집트, 아르메니아에서 다수파로 남아, 이슬람교화 이전의 동방에서 다른 종교를 압도했다. 합성론 교회는 현재도 시리아, 이집트, 아르메니아에 상당수의 신자를 가지고 있으며,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교설이 단성론으로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며, 비칼케돈파 정교회라는 중립적인 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으로 진격했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이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교도 군대를 격퇴하면서(732년) 서유럽 기독교 세계라는 공통 인식이 강화되었다.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카롤루스 1세를 "로마 황제"로 즉위시켰고, 오토 1세의 즉위로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면서, 로마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행정 대리인으로서의 입장에서 해방되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에 의한 성속 양쪽의 지배가 완성되었고,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충실한 지배자"로서 통치하는 황제 아래에서 국가 종교로서 발전했다. 하지만 황제와 총대주교는 법률상 병립하여 일치 협력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총대주교가 황제 권력에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9세기 이후 키릴로스, 메토디오스 형제에 의해 동유럽 슬라브족에 대한 포교가 진행되었고, 10세기에는 아토스 산의 수도원 공동체가 성립했다.
로마 주교는 자신의 권위를 베드로와 바울에 기인하는 것으로 하여 전 교회에서의 수위성을 주장했고,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하면서 로마의 지위도 높아졌다. 서방에서는 라틴 교부들이 나타나 라틴어로 신학을 전개했지만, 후대에 갈수록 그리스어를 해독하지 못하는 서방 신학자도 늘어갔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과의 차이는 정치, 종교 양면에서 깊어졌고, 로마 교황의 교황 수위권을 둘러싼 해석에도 동서 교회의 견해 차이는 커졌다. 1054년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서로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대분열).[17]
이 상호 파문으로 "거룩한 하나의 공의 사도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로 분열되었다고 여겨지지만, 제4차 십자군까지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교회 측의 해석이다. 1054년의 상호 파문은 1965년에 해제되었지만,[18] 동서 교회의 합동은 아직 성립되지 않고 있다.
4. 중세의 기독교

600년에서 750년 사이, 서쪽에서는 게르만 유럽이 시작되었고, 동쪽에서는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문명이 탄생하면서 기독교는 세 개의 뚜렷한 문화로 나타났다. 이 시대에는 매우 다양한 양상이 존재했지만, ''크리스텐덤''이라는 개념은 널리 퍼져 통합적인 역할을 했다. 중세 시대 작가들과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 그들의 종교 문화, 문명을 식별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기독교 세계 내, 그리고 그 주변부에서 야만족의 침략, 추방, 방치는 대규모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인구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지역에서 기독교는 종종 많은 종교 중 하나였으며, 지역 이교주의와 결합될 수 있었다. 초기 중세 종교 문화는 "세속성과 헌신, 기도와 미신"을 포함했지만, 그 내적 역동성은 보편적인 크리스텐덤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중세 시대는 유럽의 경제 및 정치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고, 기독교의 근본이 된 제도들이 탄생했다. 이단은 새로운 정밀함으로 정의되었다. 연옥이 공식 교리가 되었고, 1215년에는 고해성사가 모든 사람에게 의무가 되었다. 성모 마리아 공경이 높아져 이 시대의 중심적 측면이 되었고, 이 시기 말 무렵 묵주 기도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크리스트교의 구성원은 출생 시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구성원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춰야 했다. 농민부터 교황까지 모든 사람은 일요일과 축일에 쉬고, 미사에 참석하고, 정해진 시간에 금식하고, 부활절에 성찬례를 받고, 다양한 수수료, 십일조, 그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을 지불해야 했으며, 죽을 때 종부성사를 받아야 했다.
1054년 동서 분열 이후, 크리스트교라는 용어는 동방 교회를 포함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영역에서 기독교는 각각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과 로마 교황청은 대립했고, 1054년에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로 분열되었다. 고대 말에 성립된 동방 교회들은 이슬람교 세력 확장에 따라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에서 세력을 잃고, 이 지역에서 기독교는 소수파가 되었다.
4. 1. 중세 초기의 기독교 전파

중세 초기인 5세기에서 10세기까지 기독교는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계속 전파되었다.[63] 성 파트리치오가 423년 아일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3] 5세기 후반,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1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다른 게르만족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기독교가 함께 전파되었다.[64] 앵글로색슨 칠왕국[65]에는 600년경 켈트족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며, 로마 가톨릭은 598년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파견하였다.[66]
820년대에서 830년대 초,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대주교였던 안스가르의 선교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북유럽의 기독교 전파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1000년경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67]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는 9세기경 동방정교회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대모라바 왕국 등 동유럽 국가를 개종시키면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 미카엘 3세의 후원으로 옛 교회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성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이 문자가 키릴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68]
훈족은 기후 변화와 경제적 요인으로 중앙 아시아를 벗어나 페르시아 제국과 동·서 로마 제국에 압력을 가했다. 동고트족은 훈족을 피해 이탈리아로 이주했고, 서고트족은 410년에 로마를 약탈한 후 스페인에 정착했다. 반달족은 라인 강과 남부 갈리아를 건너 스페인으로 이동한 다음 아프리카로 이동하여 5세기에 주요 역할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우스파 기독교인이 되었다.
397년, 성 니니안이 스코틀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아일랜드인의 개종은 5세기 초 선교 활동을 통해 강요 없이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2세기경 영국 일부 지역에서 소수 종교로 자리를 잡았다. 5세기, 앵글로색슨족의 이주는 앵글로색슨 형태의 게르만 신화가 영국 남동부에서 기독교를 대체하게 만들었다. 597년의 그레고리 선교는 600년경 애설버트를 시작으로 첫 번째 앵글로색슨 왕의 개종을 이끌었다. 아일랜드 선교사들은 아이오나(563년)로 가서 많은 픽트족을 개종시켰다.
5세기 후반에 서 로마 제국의 도시들은 쇠퇴하고 있었다. 게르만족 왕 오도아케르는 476년에 이탈리아에서 서 로마 제국의 마지막 로마 황제를 폐위시켰다. 476년 이후, 제국의 분열과 황제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고 독립적인 로마 원로원은 강력하고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심지어 야만인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5세기 말까지 교회 정치에서 점점 더 큰 역할을 했다.
496년 갈리아에서 클로비스 1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광범위한 개종으로 프랑크 왕국은 기독교 왕국이 되었고, 서유럽의 많은 지역은 여전히 빈곤하고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507년 이후 갈리아의 프랑크족은 서부에서 지배적인 정체였다.
프랑크족은 732년에 아랍의 남부 프랑스 침략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샤를마뉴는 8세기에 최초의 중세 르네상스인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시작했는데, 이는 지적 및 문화적 부흥기였다. 르네상스는 그의 후손들을 거쳐 9세기로 이어졌다.
기독교는 7세기 동안 잉글랜드에서 지배적이 되었고, 그 기간 동안 게르만 이교의 억압이 시작되었다. 954년 이후 기록된 이교도 왕은 없다.
동로마 제국에서 종교상의 최고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는데, 이는 "황제교황주의"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법적으로 황제와 교회의 입장은 동등했으며, 교리는 제2 니케아 공의회까지의 공의회를 존중해야 했다. 동서 교회가 교리 문제로 분열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전 지구 총대주교"로서 다른 동방 3개 관구를 지도하게 되었다.
서방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토지를 기증한 후, 로마 교황청이 북이탈리아에 자체 영토와 교황령을 갖게 되었다. 11세기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등은 교회의 규율을 바로잡고 성직 서임권을 되찾아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는 서임권 투쟁으로 이어졌다.
4. 2. 수도원 운동의 발전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세속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노동하며 묵상하는 수도원들이 유럽 곳곳에 들어섰다. 동방 교회에서는 305년에 안토니우스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서유럽에서도 누르시아의 베네딕토가 530년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만든 이후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다.[69]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원은 봉건제에 편입되어 그 자체로 영지를 가진 권력 기구로 변해갔다. 각국의 국왕들은 수도원에 봉지를 하사하는 대신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행사하여 교회를 자신의 영향 아래 두고자 하였다. 910년 아퀴텐 공 기욤은 클뤼니 수도원을 만들고 이를 베네딕도회의 엄한 계율을 따르는 교황 직속의 수도원으로 삼았다. 클뤼니 수도원은 수도원장을 자율 선거에 의해 추대하였고, 교구 주교로부터도 독립적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성공 이후 이를 본딴 수도원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70]
6세기 동안 수도원주의는 기독교가 존재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번성했다. 각 지역에서 다소 다르게 발전했으며, 600년경에는 수도원이 기본적인 요소를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다양성이 존재했다. 수도자들은 일반적으로 정형화된 기도, 성경 암송, 독신, 금식, 수작업 및 자선 행위를 포함하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기르는 데 목표를 둔 경건한 실천 규율을 따랐다.

600년부터 1100년까지 수도원은 점점 더 조직화되었다. 이러한 조직화된 신자들의 형성은 점차 정치적 권위와 가족적 권위와 분리된 사회적 공간을 개척하여 사회사를 혁신했다. 중세 수도원은 고아원, 여행자를 위한 숙소 (여관)를 제공했으며, 기근 동안 음식을 배급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음식을 제공했다. 그들은 문해력을 지원하고 학교를 운영했으며, 필사실과 도서관에서 고대 텍스트를 복사하고 보존했다. 그들은 고전적인 공예와 예술적 기술을 실천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술과 기술을 개발하고 가르치는 지적 및 영적 문화를 유지했다. 6세기 초에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성 베네딕토 규칙을 저술했는데, 이는 가장 일반적인 수도원 규칙이 되었고, 다른 규칙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중세 시대 전체에 걸쳐 정치와 법에 영향을 미쳤다.
14, 15세기 동로마 제국은 세속적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교회에는 새로운 수도 정신의 융성이 일어났다. 동로마 제국의 아토스 산의 수도원에서는 '''고요주의'''라고도 번역되는 헤시카즘이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에 의해 14세기에 체계화되었다. 루스에도 이전부터 적지 않은 수의 수도원이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고요주의의 영향과 수도 열의 고조를 받아 14, 15세기에는 특히 수도 운동이 활발해져 황야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후에 러시아 정교회 최대의 수도원인 성 삼위일체 성 세르기우스 대수도원으로 발전하는 수도원이 라도네시의 성 세르기에 의해 1345년에 창시되었다.
4. 3. 동서 교회의 분열
로마 제국 말기, 서방교회인 로마 교회와 동방교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이스라엘 교회, 안디옥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71] 로마 교회 교황은 본래 로마지역 교회의 대주교에 대한 존칭이었으나, 이를 절대적 의미로 변화시켰다.[71] 로마 교회 대주교는 자신이 베드로의 후임이자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의 주교이며, 모든 주교들에 대해 수좌(首座)로서의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71]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는 모든 지역 주교들의 대표를 겸하고 있었기에 로마 대주교의 주장에 반대했다.[71] 그러나 교황 레오 1세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대표이기 때문에 교황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로서 모든 사도들의 머리라고 선언하고, 서유럽과 북유럽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직접 주교를 임명했다.[72] 이로써 동서 교회는 사실상 별개의 교회로 분할되었고, 레오 1세는 서방교회의 실질적인 국가 통치자이자 봉건제 황제 자격의 교황이 되었다.[72]
레오 1세는 아틸라와 담판을 지어 로마를 지켰고, 반달족의 침입으로부터도 시민의 안전을 지켜 로마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73] 서로마 제국 멸망 후,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은 서유럽의 여러 국가와 민족을 아우르는 단일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교황령을 기증한 후, 교황청은 실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74]
동서 교회는 서로 다른 교회 조직과 지역으로 나뉘면서 점차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신학적으로는 성령에 대한 해석 차이가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동방정교회는 381년 독자적인 공의회를 열어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왔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내용을 니케아 신경에 삽입했다.[75]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따르던 로마 가톨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왔다고 보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75] 필리오케 문제라 불린 이 문제는 동서 교회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75] 캐런 암스트롱은 필리오케 문제가 근본적인 신학적 차이라기보다는 십자군 전쟁 등으로 인한 갈등 증폭 때문에 해결이 불가능했다고 설명한다.[76]
867년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의 섭정 바르다스가 포티우스를 콘스탄티노블의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로마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77] 포티우스 분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동서 교회 분열이 공식적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77] 이후 동서 교회는 사실상 별개의 교회로 존재하며 서로를 마지못해 인정했다. 1054년 동서 교회는 상호 파문을 선언했다.[17]
크리스트교의 구성원은 출생 시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구성원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춰야 했다.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으로 진격했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퇴했다 (732년).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카롤루스 1세를 "로마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후 오토 1세의 즉위로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면서, 로마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행정 대리인 지위에서 벗어나 서유럽 특유의 정치 종교 체제를 구축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교회에 대해 상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법률상으로는 황제와 총대주교가 병립하여 협력하는 '''비잔틴 조화'''를 이루었다. 총대주교가 황제 권력에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고, 교리 결정은 공의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9세기 이후 키릴로스, 메토디오스 형제 등에 의해 동유럽 슬라브족에 대한 포교가 진행되었고, 10세기에는 황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후원으로 아토스 산의 수도원 공동체가 성립했다.
베드로와 바울에 권위를 둔 로마 주교는 전 교회에서의 수위성을 주장했고,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로마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서방에서는 라틴 교부들이 그리스어 신학을 라틴어로 발전시켰지만, 후대에는 그리스어를 해독하지 못하는 서방 신학자들도 늘어났다.
교황 수위권을 둘러싼 해석 차이와 필리오케 문제, 포티오스 문제 등은 동서 교회 간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1054년의 상호 파문으로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의 분열이 일어났다고 여겨지지만, 제4차 십자군 이전까지는 분열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교회 측의 해석이다. 동서 교회는 1965년에 상호 파문을 해제했지만, [18] 여전히 합동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4. 4. 서임권 투쟁과 교황권 강화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서임권 투쟁을 벌였다.[78] 성직 임명권은 본래 교황에게 있었으나, 중세 초기부터 서유럽 국왕들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이 주교나 수도원장을 임명해왔다. 이들은 봉토를 소유하여 군주의 봉신 역할을 겸했기 때문이다.[78]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그레고리오 개혁을 통해 세속인의 고위 성직 임명을 규제하고, 세속 군주로부터 교구에 대한 권한을 회복하려 했다.[79]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하여 자신의 가신을 밀라노 주교로 임명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80]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선제후가 추대한 독일의 군주를 교황이 축성하는 방식이었기에, 파문은 황제 지위의 부정과 같았다. 선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 취소를 간청하라며 반기를 들었고,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을 통해 파문을 철회받았다. 이 사건으로 성직 서임권은 교황에게 있음이 확고해졌고, 신성 로마 제국은 내전에 돌입했다.

1084년, 하인리히 4세는 내전에서 승리 후 대립교황을 세워 황제권을 인정받고 로마를 점령,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켰다.[81] 그러나 카노사의 굴욕 이후 약 200년간 교황은 서유럽에서 강력한 권위로 군림하며,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82]
1122년, 교황 갈리스토 2세와 하인리히 5세는 보름스 협약을 통해 서임권 문제에 타협했다. 국왕은 종교적 의식(지팡이와 반지 수여)을 포기하는 대신, 주교 통치 지역에 대한 정치적 권리(홀 하사)를 부여받았다. 이는 교황의 승리로 평가된다.[81]
6세기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시기, 로마의 수위권은 베드로로부터 유래한다는 주장이 확립되었으나, 서방 및 동방 교회 많은 지역에서 로마 교구에 대한 복종은 확신을 얻지 못했다. 9-11세기 교황은 일반적인 지침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교회 내부 경쟁으로 많은 이들이 로마로 와 분쟁 해결을 요청하면서 교황 권력이 상승했다. 귀족의 교황청 관료 기구 참여 증가, 교황 영토 증가, 행정 변화 등은 교황을 후원 대상에서 후원자로 전환시켰다. 10세기 아키텐 공작 기욤 9세 등 평신도 수도원 설립자들이 그들의 기관을 교황청 보호 아래 두면서 교황 권력은 다시 상승했다.
그레고리오 개혁(1050–1080)은 교황 권력을 강화하고, 교회의 권위를 중앙 집권화하고, 성직자 독신제를 강화했다. 클뤼니 수도원은 11-12세기 초 서방 수도원주의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고, 시토회 운동은 중세 기술 발전과 확산에 기여하여 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세기부터 탁발 수도회(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수도사의 소명을 세상에 나가 적극적으로 개혁하라는 책무로 이해했다. 교황은 이들을 모집하고 허가했는데, 이들의 청중은 교구나 도시를 넘어 지역 전체였다.
1078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 시작된 서임권 투쟁은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사이의 주교 또는 수도원장 임명 권한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교회는 이를 통해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고, 개혁을 돕고, 더 나은 목회를 제공하려 했다. 평신도 서임 관행을 끝내는 것은 신성 로마 황제와 유럽 귀족의 권력 감소를 의미했다.
그레고리오는 교회가 국가보다 높아야 하며, 교회가 국가의 종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075년 ''교황 칙서''(Dictatus Papae)는 교황만이 주교를 서임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하인리히 4세는 이를 거부하여 파문되었고, 이는 대 작센 반란으로 이어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치하에서 교회법의 범위가 확대되었고, 교회는 영토를 통합하고 관료제를 구축하면서 강력한 기관이 되었다. 교회법은 기독교의 초기 포용적 원칙을 배제한 복잡한 법률 체계가 되었다. 1159년부터 1303년까지의 교황들은 주로 법학자들이었다. 교황청의 권력과 영향력은 점차 군주들의 그것과 유사해졌다.

동로마 제국에서 종교상의 최고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는데, 이는 "황제교황주의"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황제와 교회의 입장은 동등했으며, 교리는 제2 니케아 공의회까지의 공의회를 존중해야 했다.
서방에서는 프랑크 왕국 피핀 3세의 토지 기증 이후 교황령이 성립되었다.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등 유능한 교황들이 나타나 교회의 규율을 바로잡고 성직 서임권을 되찾아,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4. 5. 십자군 전쟁
이슬람의 등장 이후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등이 아랍 세계의 맹주로 자리잡았다.[83]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로마 가톨릭은 동방정교회를 흡수하고자 하였고, 성지 탈환을 명목으로 십자군을 일으켰다.[84] 그러나, 실재 십자군 전쟁은 참여 세력간의 주도권 확보, 동방 교회에 대한 정복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다.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85]
중세 시기 제작된 작가 미상의 그림
로마 가톨릭은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가 파티마 왕조와의 전쟁에 도움을 청하자 이를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을 시작하였다.[86] 11세기에 튀르크계 이슬람 왕조인 셀주크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소아시아의 영토 회복을 바라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는 1095년 로마 교황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답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같은 해 이슬람교도 손에서 "성지 탈환"을 호소했다. 이것이 일련의 십자군 운동의 시작이다.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 전쟁 이외에도 알비 십자군이나 북방 십자군과 같이 유럽 내에서 진행된 것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무력을 사용하여 교회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군은 성지를 회복한자는 교회의 요청에 서유럽의 많은 세력들이 동참한 것이었으나, 참여한 사람들의 실제 동기는 다양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부유한 동방에 가서 한 몫 잡기를 위해 십자군에 참가하였고, 실제 1096년 기층 민중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제일 먼저 출발한 군중 십자군은 “거지 십자군”으로 불렸다.[87]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점령에 성공(예루살렘 공방전).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을 침략하여 예루살렘 왕국 등 십자군 국가라고 불리는 기독교 국가군을 건설했다. 이때 정교회의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추방되었고, 가톨릭교회의 예루살렘 대주교가 세워졌다. 십자군은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 안티오크 등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살라딘과 같은 이슬람 군주들에 의해 결국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축출되었다.[88]
십자군 장병의 참전 이유는 종종 영지나 포상 목적뿐이었던 것처럼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종교적 열정도 중요한 동기 중 하나였다. 다만 일부 십자군 장병에 의해 약탈과 폭력, 학살 행위가 행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폭력의 대상은 이슬람교도뿐만 아니라 중동의 그리스 정교도, 시리아 정교회,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포함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성당 기사단, 몰타 기사단과 같은 기사 집단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87] 기사 계급은 피폐해지고 몰락했고, 서유럽에서 봉건 영주의 힘이 약해지고 농노에 대해 화폐 지대의 납부를 인정하게 된 결과, 부농, 더 나아가 독립 자영 농민의 출현을 촉진하여 경제 구조가 변화했다. 또한 봉건 영주의 상대적 지위 저하로 인해 국왕은 중앙 집권화를 유리하게 진행하여 유럽 절대 왕정 출현의 단초가 되었다.
제4차 십자군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1203년 - 1261년)되어 버린 동로마 제국은 그 후에도 이슬람교도의 서방 진출에 따라 쇠퇴하여 1453년 최종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멸망했다(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참조).
4. 6.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동방 교회의 변화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었고,[92]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93] 메흐메트 2세는 쿠란의 가르침에 따라[94]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 이스탄불에 동방정교회 신자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 신자도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95]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동방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동방 교회와 모스크바 대공국에 의해 분리된 러시아 정교회로 분화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하였는데,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를 근거로 로마 제국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선포하고[96] 모스크바의 정교회 또한 동방정교회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동방정교회의 여러 교구들은 서로 독자적인 교회로서 남게 되었다.[97]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지만, 그 대가로 공납과 예니체리에 아이들을 바치는 것을 요구했으며, 제국 영내에서의 신학 교육이나 포교 등의 교회 활동은 현저하게 제약되었다. 제국의 멸망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전 정교회에 미치던 권위는 흔들렸다.[16]
5. 르네상스 시기의 기독교
서유럽의 근세 기독교 역사는 격동의 시대였다. 동로마 제국 멸망 후 망명한 그리스 학자들이 가져온 그리스어 고대 사본과 십자군에 의해 전해진 그리스어 고대 사본은 서방 세계에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 사상을 전파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그리스어 고전 연구가 활발해졌고, 그 연구자들은 인문주의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로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와 기타 여러 종교 및 철학과의 융합을 시도하여 새로운 사상이 태어나는 토대가 되었다.
초기 르네상스 시기 교황청은 독자적인 영토를 지닌 세속 국가이면서 다른 군주들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위였다. 게다가 실제 교회의 운영은 성직매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교황이 자신의 사생아를 조카라 부르며 요직에 앉히는 네포티즘이 횡횡하는 등 부패가 만연하였다.[105]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기의 학자들은 교회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106]과 같은 저술을 통해 당시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오만과 어리석음을 질타하였고,[107] 존 위클리프는 성서의 참 뜻을 대중이 알아야 한다고 여겨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108] 보헤미아 왕국의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서를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다. 후스는 지기스문트의 신변 보장 약속을 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109][110] 로마 가톨릭은 인문주의 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고 탄압했지만, 이들의 사상은 큰 호응을 얻어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15세기와 16세기의 유럽 르네상스 시대 동안, 교회는 예술과 건축의 선도적인 후원자였으며,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브라만테, 라파엘로, 프라 안젤리코, 도나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많은 예술가들을 직접 후원하고 지원했다.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조된 문서임을 밝혀냈다.
16세기에 기독교 인문주의의 뛰어난 인물이었던 네덜란드 학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1536)는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도로, 인문주의자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 모든 기독교인이 접근할 수 있는 단순화된 신앙을 가르쳤다.
기사도 정신은 13세기 초에 발전하여 15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예술, 문학, 철학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한 문화적 힘이 되었다.
5. 1. 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의 분열
교황청은 세속의 군주에 대해 교권이 우위를 갖는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고, 교회의 칙령을 통해 서유럽 각국의 정치에 개입하였다.[98] 107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로부터 성직자의 임명권이 교황에게 있음을 확인받은 일은 교황의 위상을 확인한 사건이었다.[99] 십자군 전쟁 기간 중에 교황청은 점차 서유럽의 정치·외교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고, 특히 알비 십자군을 통해 교황의 권위는 크게 강화되었다.[100]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교황의 권위 역시 실추되기 시작하였다.[99]1294년,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1세가 전쟁을 하면서 성직자들에게 과세하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이를 금지시키는 칙령을 발표하였고, 필리프 4세는 1302년 프랑스 최초의 삼부회를 열고 교황의 주장에 반대하여 자국의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도록 하였다.[101]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사이의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다. 필리프 4세는 1303년 자신의 부하들과 일부 신학자를 교황에게 보내 교황의 이단 혐의와 성직 매매에 대한 공의회에 출석할 것을 요구하였고, 보니파시오 8세가 이를 거절하자 구금하고 폭행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이 일로 사망하였고, 보르도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클레멘스 5세는 아비뇽에 머무르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은 이후 1377년까지 아비뇽 유수라 불리는 아비뇽 교황청 시기를 맞게 된다.[102]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로마의 파벌 정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겼으며,이는 "베드로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은 교회 전체에 큰 분노를 일으켰고,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잃게 했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아비뇽 유수기가 종료되었다.[103] 1378년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하자 로마에서는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지만, 프랑스 추기경들은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여 서방 교회의 분열이 1418년까지 이어지게 된다.[103]
교회의 분열을 우려한 지식인들은 1409년 피사 공의회를 열었으나, 아비뇽과 로마 양측이 모두 피사 공의회를 부정하여 오히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사태를 빚기도 하였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콘스탄츠 공의회를 열어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추대하여 서방 교회의 분열은 끝나게 되었지만, 교황의 권위는 전보다 크게 실추되고 말았다.[104]
5. 2.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종교 개혁 운동
존 위클리프(1320년경 ~ 1384년)는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 참석하여 교회 재산 포기, 가난과 단순함의 회복, 국가와 정치에 대한 종속 중단, 교황 권위 부인을 촉구했다. 그는 이단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집행 전에 사망했다. 위클리프는 롤라드를 통해 자신의 교설을 퍼뜨렸으며, 라틴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1382년에 완성하였다. 이는 윌리엄 틴들의 영어 성경 번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화체설, 수도원제도를 비판하고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였으며,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얀 후스(1372년? ~ 1415년 7월 6일)는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이다. 존 위클리프의 영향으로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그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교회 내의 폐단과 부패로 보이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이단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지만,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보헤미안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의 주장은 마르틴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후스는 체코 민족주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고, 보헤미안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 그의 신앙은 18세기 이후에 설립된 모라비아 형제회 또는 체코 개신교라는 명칭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후기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교회는 강력한 도전과 격렬한 정치적 대립에 직면했고, 성직자들은 1100년부터 1520년 사이에 제기된 비판의 많은 부분을 표명하며, 폐단을 비난하고, 더 영적이고 덜 세속적인 성직자를 추구했다. 그러나 13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있었던 대부분의 개혁 시도가 실패했음을 나타내는 불만이 역사 기록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후기 중세 시대 동안, 평신도와 서품받지 않은 세속 성직자들은 더 진실한 영적 삶을 추구했다. 평신도를 위한 토착 종교 문화가 생겨났으며, 경건한 신앙은 평범한 서품받지 않은 사람들의 경건한 사회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갔다.
5. 3.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기독교 비판
초기 르네상스 시기 교황청은 독자적인 영토를 지닌 세속 국가이면서 다른 군주들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위였다. 게다가 실제 교회의 운영은 성직매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교황이 자신의 사생아를 조카라 부르며 요직에 앉히는 네포티즘이 횡횡하는 등 부패가 만연하였다.[105]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기의 학자들은 교회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106]과 같은 저술을 통해 당시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오만과 어리석음을 질타하였고,[107] 존 위클리프는 성서의 참 뜻을 대중이 알아야 한다고 여겨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108] 보헤미아 왕국의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서를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다. 후스는 지기스문트의 신변 보장 약속을 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109][110] 로마 가톨릭은 인문주의 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고 탄압했지만, 이들의 사상은 큰 호응을 얻어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15세기와 16세기의 유럽 르네상스 시대 동안, 교회는 예술과 건축의 선도적인 후원자였으며,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브라만테, 라파엘로, 프라 안젤리코, 도나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많은 예술가들을 직접 후원하고 지원했다.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조된 문서임을 밝혀냈다.
16세기에 기독교 인문주의의 뛰어난 인물이었던 네덜란드 학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1536)는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도로, 인문주의자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는 모든 기독교인이 접근할 수 있는 단순화된 신앙을 가르쳤다.
기사도 정신은 13세기 초에 발전하여 15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예술, 문학, 철학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한 문화적 힘이 되었다.
서유럽의 근세 기독교 역사는 격동의 시대였다. 동로마 제국 멸망 후 망명한 그리스 학자들이 가져온 그리스어 고대 사본과 십자군에 의해 전해진 그리스어 고대 사본은 서방 세계에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 사상을 전파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그리스어 고전 연구가 활발해졌고, 그 연구자들은 인문주의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로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와 기타 여러 종교 및 철학과의 융합을 시도하여 새로운 사상이 태어나는 토대가 되었다.
6. 프로테스탄트의 대두
16세기에 들어 로마 가톨릭이 신봉되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여러 개신교들이 세워지는 종교 개혁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여 새로운 기독교를 세운 이유는 각 지역과 교회마다 달랐지만, 로마 가톨릭이 부정 부패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여 자정 능력을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각 국 군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111]
1517년, 마르틴 루터는 그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
6. 1. 종교 개혁
16세기에 들어 로마 가톨릭이 신봉되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여러 개신교들이 세워지는 종교 개혁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여 새로운 기독교를 세운 이유는 각 지역과 교회마다 달랐지만, 로마 가톨릭이 부정 부패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여 자정 능력을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각 국 군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111]강력하고 광범위한 교회 개혁은 중세 시대의 교회 비판에서 시작되었지만, 교회의 제도적 통일성은 무너졌다. 1521년까지 실제로 분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1517–1648)은 19세기 이후,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가톨릭 수도사인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그의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되었다고 묘사되어 왔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사 신부였다.[112] 그는 다섯 솔라에 의지하여 오직 성경과 믿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113]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 수사들을 유럽 전역에 보냈는데, 이들은 기금의 대가로 면죄부를 발부하였다. 사실상 준조세였던 건축 기금에 대해 유럽의 군주들은 불쾌해 하고 있었고, 국왕의 통치력이 강하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면죄부 발부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탁발 수사들의 활동은 주로 독일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114]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지역에서도 면죄부 발급에 따른 부작용이 심해지자 작센 공국의 프리드리히는 자국에서 면죄부 발부를 금지시켰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탁발 수사 테첼은 작센의 국경인 비텐베르크에서 “동전통이 딸랑 거리는 순간 당신의 영혼은 천국으로 직행한다”며 면죄부를 팔았고[115], 주민들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에게 면죄부의 가치를 검증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고, 이후 종교 개혁 운동을 하게 되었다.[116]

1520년 6월 15일 레오 10세는 교황 칙서 《주님, 일어나소서》를 통해 루터의 주장을 41개 항목으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117] 또한 신학자 요한 에크를 교황 대사로 임명하여 이 회칙을 독일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는 칙서 《로마 교황의 선언》을 뒤이어 반포하여 루터를 공식적으로 파문하였다.[118] 아울러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에게 이단에 대해서 강력하게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였다.[119]
파문을 당한 마르틴 루터는 목숨을 위협받았지만, 당시 이미 정치, 경제적으로 로마 교황청에 불만이 가득했던 독일의 선제후들은 루터를 보호하였다.[119][120] 특히, 작센 선제후인 프리드리히는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비밀리에 루터를 납치하여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에 안전하게 머물도록 조치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융커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숨기고 1521년부터 2년 동안 저술에 정진하여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일반신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하여 발간함으로써, 신도들이 성서를 통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신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되었고, 지금 만연한 면죄부 매매는 결국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부패와 위선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80여년전인 1440년 독일 중부 마인쯔에서 구텐베르그가 개발한 금속활자가 그 동안 필사에 의존하던 성경책을 저가로 대량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새로운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다.
봉건제 아래에 피지배 계급인 독일의 농민들은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억압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는 이념적 기반으로 여겼고, 토마스 뮌처와 같은 신학자들은 독일 농민 전쟁에 앞장 섰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현재 카톨릭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함이지 폭력혁명을 통한 기존교회의 전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농민 전쟁에 반대하였고, 오히려 영주들에게 농민들을 진압하라고 요구하였다.[121]
루터의 이러한 행적은 자신의 주장이 당시 카톨릭과 교황청의 모순을 개선하려 하였던 성직자로서 활동이지, 새로운 종파를 만들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루터 사후에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들은 루터교라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티즘 종교의 탄생을 알리게 되었다.[122]
울리히 츠빙글리는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the inspired word of God)으로 받아들여, 성경의 권위를 높게 평가했다.[123][124] 츠빙글리주의(Zwinglianism)는 하인리히 불링어 등이 작성한 제 1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First Helvetic Confession)에 잘 나타나 있다.[125] 1549년 장 칼뱅이 참여한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를 통해 개혁주의 신학이 형성되었고, 츠빙글리파는 칼뱅주의 정통신학으로 이어졌다.[126]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장 칼뱅은 1533년 로마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127] 1536년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여 이중예정설 등 칼뱅주의 신학을 정리하였다.[128] 칼뱅은 제네바에서 목사로 활동하며 개혁 교회를 이끌고자 했으나, 1538년 시의회와의 갈등으로 추방되었다.[129][130] 1541년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을 다시 초빙하였고,[131] 이후 칼뱅은 제네바에서 개혁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제네바는 신정일치 사회였으며, 교회법 위반자는 처벌받았다.[132] 미카엘 세르베투스 화형은 칼뱅의 오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133]
칼뱅주의는 위그노, 청교도, 장로교 등에 영향을 주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루터파 외에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혁교회 (칼뱅주의)가 발전했고, 존 녹스의 스코틀랜드를 거친 장로교회는 영국과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1534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는 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포하였다.[134] 헨리 8세의 수장령은 같은 해 잉글랜드 교회 내의 주교에 대한 임명권이 국왕에게 있다고 선포한 주교서임법과 함께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공식화 한 것이었다.[135]

헨리 8세의 수장령은 잉글랜드 왕국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헨리 8세는 형수가 되어야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아내가 된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혼을 원했고, 교황청과 오랫동안 이에 대해 협상을 벌였다.[136] 골육상잔이었던 장미 전쟁 끝에 세워진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아들을 원했고, 로마 가톨릭은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했기에 당시의 파혼 관례대로 로마 교황청에 결혼 무효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하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혼 불가를 결정하고 만다.[137] 이에 격분한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결심하게 된다.
수장령 이후 잉글랜드 왕국과 그 뒤를 이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고, 국교도가 아닌 사람은 공직에 진출할 수 없도록 차별하였다. 페널 법이라 불린 이 차별 제도는 1661년 협력법이 통과된 이후 영국 내의 로마 가톨릭과 청교도를 비롯한 기타 개신교 교파를 억압하는 바탕이 되었다.[138]
한편, 평소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인문학자 토머스 모어는 “나는 국왕의 충신이지만 그 전에 하느님의 종”이라며 헨리 8세의 수장령에 반대하여[139] 대법관 직을 사퇴하였고, 결국 처형되었다.[140]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를 계기로, 가톨릭 교회에서 국내의 교회를 독립시켜 잉글랜드 국교회로 만들었다(1534년). 이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의 교체 때마다 종교 정책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를 오갔지만,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 "중도 정책"(via media)이 채택되어 엘리자베스 시대 르네상스가 꽃피었다.
이에 대해,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혁파는 끝까지 철저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요구했다. 청교도라고 불린 그들은 정치적 탄압을 받아, 그 일부는 종교적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북아메리카로 이민을 갔고, 나머지는 국내에서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비국교도 (장로교, 개혁파, 침례교, 회중교회, 퀘이커교)를 형성했다.
청교도는 다음 스튜어트 왕조에서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왕권을 타도하고, 일시적으로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결국 왕정복고한다. 그러나 왕권에 대한 의회의 우위는 결정적이 되었고, 명예 혁명을 거쳐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국왕 아래에서의 의회 정치라는 입헌 군주제가 확립되어, 그 후의 의회적 중상주의, 자유주의, 산업 혁명, 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을 마련하게 된다.
과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선언된 가톨릭 교회의 "머리와 몸의 개혁"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교회의 여러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6세기 초,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문제를 제기하자, 신학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다. 종교 개혁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가 유일한 기독교였던 서유럽은 다양한 교파로 나뉘어지게 된다. 루터가 호소한 교회 개혁은 곧 독일 제후들의 다툼과 얽혀 정치 문제화되었고, 루터는 뜻하지 않게 새로운 교파를 창시하게 된다. 이렇게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여러 교회가 생겨났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장 칼뱅도 이중 예정설을 주장하며, 장로교에 기초한 교회를 세워 제네바를 거점으로 종교 개혁을 지도했다.
가톨릭 교회도 결코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종교 개혁에 대해, 가톨릭 교회는 반종교 개혁을 행했다"고 여겨졌지만, 가톨릭 교회에서의 개혁 움직임은 루터 이전부터 보이기 때문에 "반종교 개혁"을 더 넓은 의미로 "가톨릭 개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이완된 규율의 교정과 신앙 교리의 재확인의 움직임이 강해졌다. 1545년에 시작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프로테스탄트와의 화해와 가톨릭 교회의 강기 숙정을 노렸지만, 전자는 달성되지 못했다. 일련의 개혁 속에서 기존 수도회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단체가 여러 개 생겨났다. 특히 유명한 것은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이끈 예수회이며, 유럽 각지의 재선교와 병행하여, 대항해 시대와 연동되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많은 선교사를 보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549년에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기독교가 일본에도 전해지게 되었다. 예수회는 일본과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그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많은 신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은 17세기 초 독일 30년 전쟁으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서유럽은 황폐해지고, 그 반성에서, 인격신, 그리스도의 신성, 기적을 부정하고, 성경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이신론"이 지식 계급에 널리 퍼졌다. 이성적인 신이 기계론적 우주를 창조했다고 하는 이신론은, 근대 과학의 발전에 세계관적 전제를 부여했다. 이신론의 다음 단계로서, 이성 그 자체를 최고 원리로 한 계몽주의는, 보편 언어, 보편 도덕, 보편 원리를 추구하며, 역사를 이성의 발전 또는 체현으로 파악하는 진보주의와 헤겔 철학으로 결실을 맺었다.
북독일의 루터교 지역에서는, 30년 전쟁 후에 형해화된 종교 개혁에 대해, 독일 경건주의가 교회 쇄신을 했다. 회심 운동이었던 독일 경건주의는, 성경의 텍스트보다, 살아있는 종교 체험을 최우선시했다. 이 시기 성경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할레 대학교가 고등 비평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종교 체험의 분석 연구는, 자유주의 신학과 칸트 철학의 발전의 전제가 되었다. 또한 종파 대립과, 교회에 대한 권력의 집중, 그리고 왕권과 교회 권력의 유착 등에 따른 폐해에 대한 역사적 반성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정교 분리 원칙이 일어난 것도 이 시대이다.
반종교 개혁은, 동유럽과 동지중해 지방에도 영향을 미쳤다. 로마 교황청은 동방 교회에 통합을 시도하여, 일부 교회로부터 합의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전례를 유지하면서도 로마 교황의 권위를 존중하게 되었고, 동방 가톨릭 교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 고대 5대 총대주교좌 중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에는, 새롭게 가톨릭 교회의 대주교좌가 설치되었지만, 이들은 로마 교황의 산하에 들어가는 형태로 서방 교회와의 합동에 반대하는 정교회·동방 제 교회의 총대주교좌와 병립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브레스트 연합이 있지만, 이러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존재와 성립 경위는, 정교회 측으로부터 가톨릭 교회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6. 1. 1. 마르틴 루터와 루터교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사 신부였다.[112] 그는 다섯 솔라에 의지하여 오직 성경과 믿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113]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 수사들을 유럽 전역에 보냈는데, 이들은 기금의 대가로 면죄부를 발부하였다. 사실상 준조세였던 건축 기금에 대해 유럽의 군주들은 불쾌해 하고 있었고, 국왕의 통치력이 강하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면죄부 발부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탁발 수사들의 활동은 주로 독일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114]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지역에서도 면죄부 발급에 따른 부작용이 심해지자 작센 공국의 프리드리히는 자국에서 면죄부 발부를 금지시켰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탁발 수사 테첼은 작센의 국경인 비텐베르크에서 “동전통이 딸랑 거리는 순간 당신의 영혼은 천국으로 직행한다”며 면죄부를 팔았고[115], 주민들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에게 면죄부의 가치를 검증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고, 이후 종교 개혁 운동을 하게 되었다.[116]1520년 6월 15일 레오 10세는 교황 칙서 《주님, 일어나소서》를 통해 루터의 주장을 41개 항목으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117] 또한 신학자 요한 에크를 교황 대사로 임명하여 이 회칙을 독일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는 칙서 《로마 교황의 선언》을 뒤이어 반포하여 루터를 공식적으로 파문하였다.[118] 아울러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에게 이단에 대해서 강력하게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였다.[119]
파문을 당한 마르틴 루터는 목숨을 위협받았지만, 당시 이미 정치, 경제적으로 로마 교황청에 불만이 가득했던 독일의 선제후들은 루터를 보호하였다.[119][120] 특히, 작센 선제후인 프리드리히는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비밀리에 루터를 납치하여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에 안전하게 머물도록 조치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융커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숨기고 1521년부터 2년 동안 저술에 정진하여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일반신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하여 발간함으로써, 신도들이 성서를 통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신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되었고, 지금 만연한 면죄부 매매는 결국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부패와 위선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80여년전인 1440년 독일 중부 마인쯔에서 구텐베르그가 개발한 금속활자가 그 동안 필사에 의존하던 성경책을 저가로 대량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새로운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다.
봉건제 아래에 피지배 계급인 독일의 농민들은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억압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는 이념적 기반으로 여겼고, 토마스 뮌처와 같은 신학자들은 독일 농민 전쟁에 앞장 섰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현재 카톨릭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함이지 폭력혁명을 통한 기존교회의 전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농민 전쟁에 반대하였고, 오히려 영주들에게 농민들을 진압하라고 요구하였다.[121]
루터의 이러한 행적은 자신의 주장이 당시 카톨릭과 교황청의 모순을 개선하려 하였던 성직자로서 활동이지, 새로운 종파를 만들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루터 사후에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들은 루터교라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티즘 종교의 탄생을 알리게 되었다.[122]
6. 1. 2. 츠빙글리와 칼뱅, 그리고 개혁 교회
울리히 츠빙글리는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the inspired word of God)으로 받아들여, 성경의 권위를 높게 평가했다.[123][124] 츠빙글리주의(Zwinglianism)는 하인리히 불링어 등이 작성한 제 1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First Helvetic Confession)에 잘 나타나 있다.[125] 1549년 장 칼뱅이 참여한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를 통해 개혁주의 신학이 형성되었고, 츠빙글리파는 칼뱅주의 정통신학으로 이어졌다.[126]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장 칼뱅은 1533년 로마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127] 1536년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여 이중예정설 등 칼뱅주의 신학을 정리하였다.[128] 칼뱅은 제네바에서 목사로 활동하며 개혁 교회를 이끌고자 했으나, 1538년 시의회와의 갈등으로 추방되었다.[129][130] 1541년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을 다시 초빙하였고,[131] 이후 칼뱅은 제네바에서 개혁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제네바는 신정일치 사회였으며, 교회법 위반자는 처벌받았다.[132] 미카엘 세르베투스 화형은 칼뱅의 오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133]
칼뱅주의는 위그노, 청교도, 장로교 등에 영향을 주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루터파 외에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혁교회 (칼뱅주의)가 발전했고, 존 녹스의 스코틀랜드를 거친 장로교회는 영국과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6. 1. 3. 잉글랜드의 수장령과 성공회
1534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는 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포하였다.[134] 헨리 8세의 수장령은 같은 해 잉글랜드 교회 내의 주교에 대한 임명권이 국왕에게 있다고 선포한 주교서임법과 함께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공식화 한 것이었다.[135]헨리 8세의 수장령은 잉글랜드 왕국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헨리 8세는 형수가 되어야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아내가 된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혼을 원했고, 교황청과 오랫동안 이에 대해 협상을 벌였다.[136] 골육상잔이었던 장미 전쟁 끝에 세워진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아들을 원했고, 로마 가톨릭은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했기에 당시의 파혼 관례대로 로마 교황청에 결혼 무효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하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혼 불가를 결정하고 만다.[137] 이에 격분한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결심하게 된다.
수장령 이후 잉글랜드 왕국과 그 뒤를 이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고, 국교도가 아닌 사람은 공직에 진출할 수 없도록 차별하였다. 페널 법이라 불린 이 차별 제도는 1661년 협력법이 통과된 이후 영국 내의 로마 가톨릭과 청교도를 비롯한 기타 개신교 교파를 억압하는 바탕이 되었다.[138]
한편, 평소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인문학자 토머스 모어는 “나는 국왕의 충신이지만 그 전에 하느님의 종”이라며 헨리 8세의 수장령에 반대하여[139] 대법관 직을 사퇴하였고, 결국 처형되었다.[140]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를 계기로, 가톨릭 교회에서 국내의 교회를 독립시켜 잉글랜드 국교회로 만들었다(1534년). 이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의 교체 때마다 종교 정책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를 오갔지만,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 "중도 정책"(via media)이 채택되어 엘리자베스 시대 르네상스가 꽃피었다.
이에 대해,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혁파는 끝까지 철저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요구했다. 청교도라고 불린 그들은 정치적 탄압을 받아, 그 일부는 종교적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북아메리카로 이민을 갔고, 나머지는 국내에서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비국교도 (장로교, 개혁파, 침례교, 회중교회, 퀘이커교)를 형성했다.
청교도는 다음 스튜어트 왕조에서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왕권을 타도하고, 일시적으로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결국 왕정복고한다. 그러나 왕권에 대한 의회의 우위는 결정적이 되었고, 명예 혁명을 거쳐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국왕 아래에서의 의회 정치라는 입헌 군주제가 확립되어, 그 후의 의회적 중상주의, 자유주의, 산업 혁명, 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을 마련하게 된다.
6. 2. 반종교 개혁

종교 개혁의 열풍이 거세지자 로마 가톨릭 내에서도 이에 대항하여 그 간의 타락에 대한 자성과 교회 혁신을 주장하는 요청이 커졌다. 반종교 개혁으로 불리는 종교 개혁에 맞선 로마 가톨릭의 대응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 개혁과 여러 청렴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트리엔트(오늘날 이탈리아의 트렌토)에서 교황 바오로 3세 주관으로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로마 교회의 교의적·도덕적·행정적 개혁을 논의하여,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로마 가톨릭 신앙의 기초로 재확인하고,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선언하여 성서만을 따른다는 개신교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교회가 성서 해석의 유일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 행위에서 생겨난다는 것과, 개신교가 부정하는 고해 성사를 포함한 7개의 성사의 당위성, 성찬의 성변화(transubstantiation) 교리를 고수하였으며, 교회를 개혁하여 교직과 세속 직위의 겸임을 금지하였다.[141]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와의 차이가 분명한 현재의 성서 목록을 확정하였으며[142], 마르틴 루터가 구약성경 가운데 15편을 외경으로 구분하여 정경에서 제외한 것에 대해 로마 가톨릭은 루터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표방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고대 카르타고 공의회의 전통에 따라 동방정교에서 인정하는 에스드라스 상·하권과 므낫세의 기도를 정경에서 제외하였다.[143]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 개혁에 대한 반격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기존의 교회법을 옹호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파문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 내부의 문제점들에 대한 개선을 강구하여 그동안 비난의 원인이 되었던 대사의 남용을 금하고 타락한 성직자를 징계하기로 하는 조치도 함께 취하였다.[144]
한편, 로마 가톨릭 내에서는 교회의 세속화를 반성하고 청렴과 영성을 강조하는 한편, 개신교도를 상대로 회심시키는 선교 움직임이 생겨났다. 스페인의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예수회를 설립하였고[145],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칼뱅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제네바 인근 지역에서 개신교도를 상대로 선교하였다.[146] 예수회는 "교황청의 충격 부대"라고 불릴정도로 군사적 규율과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곧 개신교에 대항하는 교회의 주요 무기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반종교개혁 또는 가톨릭 개혁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개신교의 도전에 대응했는데, 이는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를 시작으로 1534년부터 1605년까지 이어진 10명의 개혁 교황들이 주도했다. 신앙이나 도덕에 해로운 책들의 목록인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la''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개신교 저술과 외설적인 것으로 비난받은 저술들이 포함되었다. 반종교개혁은 또한 동방 전례를 사용하지만 로마를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를 창설했다.
6. 3. 종교 전쟁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극심한 대립은 결국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 유럽 내에서는 종교 갈등에 따른 크고 작은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내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147][148][149]
칼뱅주의는 소명설로 현세의 직업이 하느님이 주신 것이며 그를 통해 얻는 재화가 하느님의 은총이라 하였고, 이는 프랑스 내에서 신장하고 있던 상공인 등 부르주아에게 그야말로 “복음” 이었다. 종교개혁과 함께 위그노라 불렸던 프랑스 내 칼뱅주의 개신교도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로마 가톨릭 이외의 믿음을 갖는 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고, 로마 가톨릭 측은 공공연히 위그노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가톨릭에 의해 벌어진 바시 학살과 같은 몇 차례의 학살이 있고나서 양측은 결국 위그노 전쟁에 돌입하였다.
1562년부터 1563까지 벌어진 전쟁은 프랑스 왕가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당시 위그노 신도이자 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된 나바라 왕국의 군주 앙리가 결혼하기로 하여 휴전하였으나, 결혼식 전날 로마 가톨릭 측이 결혼 축하를 위해 파리에 모여든 위그노를 학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벌어지면서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앙리 4세는 휴전과 평화로운 왕위 계승을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위그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전쟁을 끝냈다.[150]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있었던 30년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간의 종교 전쟁이자, 신성 로마 제국을 이루는 여러 선제후들과 영국,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교황청 등의 이해 관계가 얽힌 복잡한 성격의 국제 전이기도 하였다. 30년 전쟁의 결과 독일 지역은 초토화되었다.[151]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끝나고 각 제후와 국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 내에서 로마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개혁교회 가운데 하나를 국가의 종교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152] 이는 로마 가톨릭이 더 이상 국가 내의 종교에 대해 참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였다. 기독교내에서 발생한 30년 전쟁은 유럽의 전쟁 뿐만 아니라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가장 많은 전쟁이었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이었다. 신을 믿는 형식과 내용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전쟁과 죽음이라는 비극을 불렀다.
종교는 지역 정치와 얽히게 되었다. 이미 왕조 간의 불화에 연루된 다투는 왕가는 두 종교 진영으로 양극화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1522년 기사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발발한 후, 제1차 슈말칼덴 전쟁 (1546–1547)과 제2차 슈말칼덴 전쟁 (1552–1555)에서 격화되었다. 1562년, 프랑스는 종교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전쟁들 중 가장 크고 참혹했던 것은 30년 전쟁 (1618–1648)이었다.
존 켈세이(John Kelsay)와 제임스 터너 존슨(James Turner Johnson)과 같은 이론가들은 이 전쟁들이 자유를 위한 정당한 전쟁 전통의 변형이라고 주장한다. 윌리엄 T. 캐버노는 많은 역사가들이 공유하는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 전쟁들은 주로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 건설, 민족주의,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고 본다. 역사학자 바바라 디펜도르프(Barbara Diefendorf)는 종교적 동기가 항상 다른 동기와 섞여 있었지만, 가톨릭교도가 가톨릭교도와 싸우고 개신교도가 개신교도와 싸웠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종교적 동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헨리 헬러(Henry Heller)에 따르면, "귀족의 압제에 대한 평민들의 적대감이 고조되고, 개신교 귀족과 가톨릭 귀족 사이의 공모에 대한 인식이 커지고 있었다."
6. 4. 제국주의와 기독교 선교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유럽인들이 선박을 이용하여 세계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하였다. 흔히 대항해 시대[153]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이미 다른 민족들이 오랜 시간 동안 바다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고 있었고, 아메리카 대륙은 결코 신대륙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가 있었다는 점에서 순전히 유럽인의 관점일 뿐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을 탐험하고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세계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154] 대항해 시대를 주도하였던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어 막대한 은을 자국으로 가져왔고[155],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국가가 제국주의 정책으로 해외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에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영토 분쟁 조짐이 보이자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중재하였다.[156]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하고 있었고 종교 개혁이후에도 계속하여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였다. 로마 가톨릭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아메리카 식민지 지역에 보내 유럽에서 열세에 놓인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예수회는 선교와 교육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둘러싼 각종 외교 문제에도 깊숙히 관여하였다.[157] 예수회는 부르봉 왕가와의 갈등으로 인해 1773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명령으로 해산되기도 하였으나 지속적인 재건 요구와 정치적 상황의 변동에 의해 1814년에 해산 조치가 철회되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당시 해외 선교에 적극적이었던 가톨릭 선교 조직으로는 예수회 이외에도 파리 외방전교회 등이 있으며[158], 베네딕도회, 도미니코회 등 기존의 수도회에서도 선교지에 수도사를 파견하였다.
한편, 대항해 시대가 끝난 뒤 유럽의 각국은 전 세계를 자국의 식민지로 삼는 식민지 경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 뿐만 아니라 개신교 역시 교파를 막론하고 국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노예 매매와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정책이 벌어지는 동안 기독교 내에서 이것을 반성한 교파는 매우 소수에 불과하였다.[159]
경제와 정치에 의해 추진된 식민주의는 또한 많은 새로운 지역에서 기독교 선교의 문을 열었다. 셰리던 길리에 따르면 "가톨릭 기독교는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 제국을 통해, 17세기와 18세기에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와 식민 제국은 서로 직접적으로 상반되는 별개의 의제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정치를 피했지만, 지난 500년 동안의 선교 활동에서 많은 목소리가 높은 선교사들은 식민 억압에 도전하고, 인권을 옹호하며, 사회 정의 문제에 대해 자국 정부에 반대했습니다. 반면에, 식민 정부와 협력한 선교사의 사례도 그만큼 많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기독교 선교사들은 많은 식민지 사회에서 탈식민주의를 통해 독립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여러 출처에서 전 세계적으로 탈식민 신학이 등장했다. 이는 식민주의가 원주민 문화에서 지우거나 억압한 것을 복구하기 위해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분석한다.
21세기의 선교 운동은 '문명화'가 아닌 복음 전파와 지역 개발에 중점을 둔 다문화, 다면적인 글로벌 비정부 기구(NGO), 단기 아마추어 자원봉사자, 그리고 전통적인 장기 이중 언어, 이중 문화 전문 인력의 네트워크로 변모했다.
6. 4. 1. 기독교의 아시아 선교
예수회 소속의 사제 마테오 리치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명나라에 대한 포교를 시작하였다. 1601년 베이징에 도착하여 만력제를 만나 선무문(宣武門) 안에 천주당을 세워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 1605년 완공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등을 저술하여 기독교를 중국 대륙에 전파하였고,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조선, 일본 등지에도 소개되었다.[160]
조선 후기에도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가 소개되었다. 최초로 알려지게 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연대가 가장 명확한 가톨릭교회 전래에 관한 기사는 1631년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서양의 문물과 함께 종교 서적을 가져왔다는 내용이다.[161] 실학자 홍대용(1731년-1783년)이 쓴 《담헌연기》(湛軒戀記)에도 중국을 오가던 조선 사신일행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소개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162]
16세기 일본에서의 기독교 성공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박해 중 하나로 이어졌다. 16세기 중국 선교는 주로 예수회에 의해 수행되었다. 셔리단 길리(Sheridan Gilley)는 "중국, 인도차이나, 일본, 한국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잔혹한 순교는 유럽의 침략과 정복에 대한 지역적 두려움과 관련이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두려움이 정당했다."라고 기록했다.
기독교는 중국과 나머지 동남아시아, 특히 대한민국에서 빠르게 성장했으며, 식민주의 시대 이후 그 이전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1980년대에 은사주의 기독교의 급격한 확장이 시작되어 아시아는 은사주의 및 오순절 기독교인의 수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경쟁하게 되었다. 외교 협의회의 데이터에 따르면 1979년 이후 중국 기독교 인구는 연간 10%씩 증가했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어떤 그룹보다 더 많이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7. 계몽주의 시기
종교 개혁과 맞물린 오랜 전쟁 끝에 유럽의 각국은 민족 국가의 성격이 강한 중앙집권제 국가로 변화하였다. 한편, 사회 역시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부르주아가 주요한 계급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과 과학, 경제학과 같은 학문 역시 근대적인 체계를 갖추어 이성과 과학적 방법과 같은 합리적 과정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계몽주의라 불리는 이 시기의 이러한 움직임은 기독교의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절대주의 국가 시대는 기독교 보편주의의 붕괴 이후에 나타났다.[141] 가톨릭교회가 지원하는 왕들이 행한 정치적 절대주의의 폐해는 1680년대에 나타난 맹렬한 반성직자적, 반가톨릭적, 반기독교적 정서를 낳았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공포, 폭정, 박해에 격분한 더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세속화는 유럽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확산되었다.
7. 1. 과학 혁명과 기독교의 갈등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유럽에서는 학문의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앞세운 과학 혁명이 있었다. 과학 혁명은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을 학문의 대상에서 제외하였으나, 교회와 언제나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163][164] 중세 유럽에서 수도원과 대학은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전수되는 중요한 장소였으며, 그레고어 멘델 역시 로마 가톨릭의 수사였다.[165]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을 부정하고 태양 중심설을 주장하여 교회로부터 직접적인 탄압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과장된 것이다.[166]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하였다.[167]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이후 진화에 대한 논쟁은 과학과 기독교의 가장 격렬한 충돌 사례였다.[168] 기독교 내에서는 유신진화론과 같이 진화 이론을 수용하려는 입장과 창세기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는 입장이 대립하고있다.[169][170][171]
과학 혁명 이후, 회의주의의 급증은 종교적 믿음을 포함한 서구 문화의 모든 측면을 체계적인 의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성서 비평은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역사주의와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성경 연구를 더 학문적이고, 세속적이며, 민주적으로 만들었다. 18세기의 계몽주의 이전에는 자유주의는 기독교 관념론과 동의어였다. 이후, 자유주의는 17세기의 합리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이는 기독교를 "비합리적인 숭배" 뿌리에서 "떼어내려" 시도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기독교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신앙과 의례의 필요성과 단절되었고, 이는 자유주의의 쇠퇴와 근본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근본주의 기독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현대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점점 더 중앙 집권화되고, 보수적으로 변했으며, 교황에 대한 충성에 집중했다. 20세기 초, 교황은 성서 비평을 사용하는 가톨릭 성경 학자들에게 반현대주의 서약을 요구했다. 1930년대 후반에,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재평가하면서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신학인 신정통주의가 양측의 온건파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7. 2. 정치 혁명과 기독교의 관계
근대에 있었던 여러 정치 혁명들과 기독교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잉글랜드 내전은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갈등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172] 미국 독립 전쟁의 과정에서 독립선언서를 채택한 미국인들은 대부분 청교도와 같은 개신교 신자였으며,[173] 미국 독립 선언서에서 말하는 천부인권은 개개인이 신에게서 받은 것이란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174] 그러나, 존 로크와 같은 영국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은 종교와 정치가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것은 미국 헌법 제1조에 “의회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삼을 수 없다”고 명문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정치는 쉽게 분리되지 않았고, 미국 독립 이후 흔히 WASP라 불리는 백인·엥글로섹슨계·개신교도는 미국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175]프랑스 혁명(사진)의 과정에서 혁명의 이념을 제공한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영국과 미국보다 더욱 급진적이었다. 이들은 혁명을 통해 “기독교”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이성과 자유, 진보”로 대체하고자 하였고, 무신론과 유물론을 부각시켰다.[176]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까닭은 앙시앵 레짐 안에서 로마 가톨릭 자체가 거대한 지배 계급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가톨릭과 무엇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를 놓고 대립하였다. 한편에서는 “시뻘건 놈들”(roughes프랑스어)인 공립학교 교사들이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동안, 다른 편에서는 “희멀건 놈들”(blancs프랑스어)인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가톨릭 사립 학교에서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다.[177] 이때문에, 미국의 계몽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없이 자유주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프랑스의 자유주의는 구 체제 일체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요구하였던 것이다.[178] 1794년까지 급진적인 혁명가들은 반(反)기독교화를 시도하면서, 일부 학자들은 이를 방데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계획적인 대량 학살 정책"이라고 칭했다.
스페인에게서 독립한 멕시코의 경우 멕시코 독립 전쟁을 이끌었던 초기 지도자 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스스로가 로마 가톨릭 성직자였다.[179] 멕시코의 역사에서 가톨릭은 많은 영향을 남겼고, 근대 이후 정치 개혁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국민의 대다수는 여전히 로마 가톨릭 신자이다.
역사학자들은 1760년부터 1830년까지의 시기를 산업 혁명,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포괄하기 때문에 "역사적 분수령"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 기간 동안 많은 경우에서 기독교는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의해 약화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반성직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영향은 많은 지역에서 분열과 혼란을 야기했다.
7. 3. 개신교의 분화: 다양한 교파의 등장
종교 혁명과 종교 개혁을 거친 후, 유럽에서는 새로운 신학을 내세운 교파들이 출현하였다.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 개혁을 따른 개신교 종파를 가리킨다.[180] 이들은 유아 세례는 효력이 없으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80] 침례교는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완전한 성인이 침례를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181] 17세기에 조지 폭스로부터 시작된 퀘이커는 악에 대한 무저항이 참된 평화라고 보았고[182], 특정한 교단과 전례, 성직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183] 감리교는 18세기 영국의 성공회 성직자였고 신학자 존 웨슬리가 세운 개신교 교파이다.[186]
루터파가 독일 북부와 북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칼뱅의 영향을 받아 개혁교회 (칼뱅주의)가 대륙에서 전개되었다. 존 녹스의 스코틀랜드를 거친 장로교회는 영국과 미국으로도 확산되었다. 영국에서는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가 1534년에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프로테스탄트로 분류되었다.
미국에서는 건국 이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민을 널리 받아들였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여러 교파가 경쟁적으로, 다양한 기독교 신앙이 전개되고 있다. 교파를 초월한 형태로 대각성 운동, 부흥 운동,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 운동 등이 일어났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지적했듯이, 청교도 (주로 장로교 신자)의 영향이 강한 영국과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놀랍게 발전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유한 국력과 미국에서 발흥한 부흥 운동을 배경으로 프로테스탄트도 19세기부터 해외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독일에서 발원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영국의 복음주의 연맹은 1846년, 9개 조항으로 구성된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 신앙의 기준을 고백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의 시비를 둘러싸고 프로테스탄트 교파 간에 교리 논쟁이 벌어졌고, 자유주의 신학을 채택하는 주류 각 교파(메인라인)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한 복음주의 (근본주의 = 근본주의 등)로 교파가 양분되었다.
1974년에는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전 세계에서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가 모여 로잔 언약이 체결되었고, 복음주의 신앙이 확인되었다.
미국에서 1980년대 이후는 보수 기독교나 기독교 우파라고 불리는 세력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2009년, 미국에서 정교회, 가톨릭교회, 복음주의의 지도자가 공동으로 맨해튼 선언을 발표하여, 생명의 신성, 결혼의 존엄, 신교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임을 나타내고, 중절, 동성애 등 성적 죄를 강요하는 세력에 대항하겠다고 표명했다.
8. 현대의 기독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주요 과제에 직면하고, 교파적 경계를 허물었으며, 전쟁의 영향을 받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종교 개혁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에 의한 계시를 기초로 한 기존의 기독교 방식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인격신을 부정하는 이신론을 시작으로, 계몽기 이후에는 신을 논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설파한 불가지론, 범신론, 또는 무신론 등, 이전의 기독교 신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등 시민 혁명으로 서유럽 사회가 크게 탈교회화되면서 민중의 기독교 이탈이 진행되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역경에 놓인 자의 한숨이며 (중략),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다"라고 하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원시 기독교와 같은 공유를 이상으로 내걸고 기독교와 경쟁하는 사회 운동으로 나타났다. 기독교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줄여가는 가운데, 각 교파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아래에서 개관한다.
=== 세계 대전과 기독교의 역할 ===
현대의 시작은 관점마다 다를 수 있으나, 오늘날 세계의 역사와 특히 기독교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를 현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7]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이나[188], 제 1차 세계 대전 동안 서로가 기독교 국가임을 자부하였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 기간 동안 역사상 유래 없는 대량 학살을 벌였고, 각국의 교회는 자국의 승리를 신에게 갈구하였다.[189] 훗날 장로교 신학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도무지 기독교 답지 않은 메시지를 전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교회가 일종의 징병사무소 노릇을 한 것은 죄악이었노라고 하였다.[190]
20세기 초, 유럽 국가들은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옹호하는 동시에 권위주의 정부와 국가 지원 교회를 수립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Mit brennender Sorge''(한국어: "타오르는 근심으로")에서 파시스트 정부가 "이교도적 의도"를 숨기고 있으며, 가톨릭의 입장이 국가를 하느님, 근본적인 인권, 존엄성보다 우선시하는 전체주의적 파시스트 국가 숭배와 양립할 수 없음을 밝혔다.
폴란드에서는 가톨릭 사제들이 체포되었고, 폴란드 사제와 수녀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독일 최대의 개신교 교회인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오랜 민족주의 전통과 국가 지지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나치가 집권했을 때 그들을 지지했다. 독일 개신교도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소수의 세력이 고백교회를 결성하여 나치즘에 반대했다. 나치는 고백교회의 일에 간섭하고, 구성원들을 괴롭히고, 대량 체포를 자행했으며, 마르틴 니묄러,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은 유명한 목사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평화주의자였던 본회퍼는 체포되어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20세기의 여러 전쟁은 신정론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전쟁은 교회에 모순된 영향을 미쳐 때로는 인간적인 해결책에 대한 믿음의 상실, 종교심과 애국심의 급증, 또는 기독교로부터의 소외를 초래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 이후 처음으로 20세기에 기독교 평화주의가 전쟁에 대한 기독교적 선택 사항으로 옹호되었다.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국가에 정교회를 수립한 19세기의 혁명은 20세기에 보편적인 교회에서 일련의 국가 교회로 바뀌어 민족주의와 국가에 종속되었다.
=== 현대의 동방 정교회 ===
표트르 1세가 총대교구좌를 폐지하고 종무원을 통해 교회를 장악한 이래 러시아 제국 시기 차르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이기도 하였다.[191] 그러나, “자비로운 아버지 짜르” 니콜라이 2세에게 사회 체제 개선을 탄원하기 위해 황궁으로 향하던 이들이 유혈 진압된 피의 일요일 이후 로마노프 왕가는 몰락하였고[192],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총대교구좌를 부활시켰다.[191]
혁명 이후, 레닌은 민족자결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스탈린 집권 초기인 1920년대에서 1930년대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구체제의 악습으로 취급되어 탄압받았다.[193]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파괴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침공에 맞서 애국주의를 호소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권은 러시아정교회를 “정권의 동료”로 삼았다.[193]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억압의 대상이 되었으나, 미하일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총대교구좌를 다시 복원하고 러시아 내에서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보장받았다.[194]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이스탄불로 개명하여 수도로 삼은 뒤에도 동방정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리스 지역 대부분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관할아래 종교와 정치에서 자치를 누렸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외교 분야에서 그리스인을 중용하였다.[195] 그러나, 러시아가 동방정교회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러시아 정교회가 분리되었고,[97] 오스만 제국은 무슬림이 아닌 딤미들에게 무거운 조세를 부과하였다.[195]
1830년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하면서, 그리스 정교회는 1850년 콘스탄티노폴 총대주교청으로부터 아테네 대주교를 수장으로 하는 독립 정교회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19] 1832년 12년간의 그리스 독립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가 독립한 후, 그리스 정교회는 독립이후에도 그 영향력을 유지하였다.[196] 20세기까지도 그리스 내에서는 정교회의 교회 법에 따르지 않고는 결혼할 수 없었고, 이혼은 원칙적으로 불허되었다.[197]
동방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포함한 14개의 자치적인 정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의 다른 자치 정교회는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정교회의 대표로 인정하나 러시아 정교회는 독자적인 총대교구주교가 있다.[198]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유지되어온 역사 때문에 한 동안 부활절과 같은 전례일을 서로 다른 날에 기념하기도 하였으나, 21세기가 되면서 서로 간의 협의를 통해 부활절을 4월 15일로 통일하였다.[199] 2010년 5월 10일 한국 정교회 전파 110주년을 맞아 세계 각지의 정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 심포지엄을 열기도 하였다.[200]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가톨릭 교회의 변화 ===
교황 요한 23세가 교회의 현대화를 위해 요청하여[202]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로마 가톨릭의 제반 사항을 결정한 공의회로,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敎令) 그리고 3개의 선언을 채택하였다.[201]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지 100년 만에[202] 열린 이 공의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과, 이전까지 라틴어로 진행되던 미사를 각 지역 언어로 진행하도록 하여 로마 가톨릭을 현지화하고, 신자의 사도직을 확인하고, 신앙의 자유를 확인하는 등 가톨릭 현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20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대규모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60년대에 요한 23세 아래에서 개회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현대에 맞는 가톨릭 교회의 방향성이 정해졌다.[202] 그 안에서 개신교 및 동방 교회와의 대화인 에큐메니즘과 더불어, 타 종교와의 대화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또한 과학과 성서학 존중, 각국어에 의한 전례 실시 추진, 현대 사회와의 연대라는 방향성을 확인했다. 이 개혁이 규모와 내용에서 16세기의 종교 개혁에도 필적하기 때문에 "제2의 종교 개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 재검토 및 철회(1992년) 등에서,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스스로 바로잡는 자세를 볼 수 있다.
=== 개신교의 부흥 운동과 새로운 교파의 등장 ===
19세기 동안 미국의 개신교를 중심으로 D.L. 무디, R.A. 토레이, J.W. 체프만 등의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대각성운동이라고도 불리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204] 이들은 초교파적 부흥운동을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205][206]
칼뱅주의와 웨슬리안의 부흥 운동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불리며, 북미에서 복음주의적인 조합 교회,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새로운 감리교의 발전을 보였다.[22] 1800년대부터 2차 대각성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감리교회에서 성결 운동과 자유 감리교회가 탄생했다. 장로교에서는 컴벌랜드 장로교회가 형성되거나, 장로교에서 분리되는 형태로 제자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2차 대각성(1800년 - 1830년대)은 1차 대각성보다 교회의 밖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개인적인 깊은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고 부흥 집회가 열렸다. 1857년부터 시작된 3차 대각성은 영어권을 중심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24]
근대 이후 초기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진 새로운 교파들이 생겨났다. 1870년 찰스 테이즈 러셀에 의해 미국에서 성서 연구 모임으로 시작된 여호와의 증인[207], 1830년 뉴욕주에서 조지프 스미스 2세와 6명의 설립등기인이 설립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212], 1914년 미국 아칸소 주에서 시작된 오순절교회[214] 등이 그 예이다.
=== 현대 기독교의 동향 ===

현대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적 흐름과 사회적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19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이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형성되었으며, 알버츠 슈바이쩌와 같은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고 기적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였다.[21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해방신학이 등장하여 군부 독재와 빈부 격차 등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217] 기독교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진화 이론이나 여성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신학 사조이다.[218]
에큐메니컬 운동은 기독교 교파 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일치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운동으로, 세계 교회 협의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219] 1910년 에든버러에서 세계 기독교 선교 협의회를 개최하여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대표는 물론 비기독교 종교 대표도 초청하여 교회의 대화와 일치를 협의했다. 그 결과, 1948년에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가 탄생하여 에큐메니컬 운동(교회 일치 운동)이 추진되었다[30]
18세기부터 기독교는 세계 최대 종교가 되었으며, 21세기 초에는 전 세계 인구의 약 31.2%인 24억 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에큐메니즘에 대한 노력을 본격화했다.[31] 프로테스탄트 교파들과 상호 성찬 관계 수립을 목표로 신학적 작업이 진행 중이며, 1990년대에는 루터교와 칭의 교리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회와의 관계에서는 성사론의 차이와 동성애 및 여성 사제 서품 문제 등으로 완전한 일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방 교회와 가톨릭 교회,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간의 대화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정교회와 비칼케돈파 정교회 교회는 20세기 말 그리스도론 등의 교리 차이가 표현상의 차이일 뿐 근본적으로 교리를 공유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콥트 정교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에서 활동하며 다른 교회와의 교류에 힘쓰고 있다.
20세기 기독교는 세속주의, 변화하는 도덕적 풍토, 정치적 반대 등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정부는 많은 지역에서 교회의 위축을 초래했다. 이러한 가운데 성 윤리, 젠더, 배타성 등에 대한 교회 내 논쟁이 발생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뉴에이지 영성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속화라는 공통의 위협과 종교적 증오의 파괴적 잠재력에 대한 인식은 교회 간의 협력을 장려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8. 1. 세계 대전과 기독교의 역할
현대의 시작은 관점마다 다를 수 있으나, 오늘날 세계의 역사와 특히 기독교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를 현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7]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이나[188], 제 1차 세계 대전 동안 서로가 기독교 국가임을 자부하였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 기간 동안 역사상 유래 없는 대량 학살을 벌였고, 각국의 교회는 자국의 승리를 신에게 갈구하였다.[189] 훗날 장로교 신학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도무지 기독교 답지 않은 메시지를 전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교회가 일종의 징병사무소 노릇을 한 것은 죄악이었노라고 하였다.[190]20세기 초, 유럽 국가들은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옹호하는 동시에 권위주의 정부와 국가 지원 교회를 수립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Mit brennender Sorge''(한국어: "타오르는 근심으로")에서 파시스트 정부가 "이교도적 의도"를 숨기고 있으며, 가톨릭의 입장이 국가를 하느님, 근본적인 인권, 존엄성보다 우선시하는 전체주의적 파시스트 국가 숭배와 양립할 수 없음을 밝혔다.
폴란드에서는 가톨릭 사제들이 체포되었고, 폴란드 사제와 수녀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독일 최대의 개신교 교회인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오랜 민족주의 전통과 국가 지지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나치가 집권했을 때 그들을 지지했다. 독일 개신교도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소수의 세력이 고백교회를 결성하여 나치즘에 반대했다. 나치는 고백교회의 일에 간섭하고, 구성원들을 괴롭히고, 대량 체포를 자행했으며, 마르틴 니묄러,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은 유명한 목사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평화주의자였던 본회퍼는 체포되어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20세기의 여러 전쟁은 신정론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전쟁은 교회에 모순된 영향을 미쳐 때로는 인간적인 해결책에 대한 믿음의 상실, 종교심과 애국심의 급증, 또는 기독교로부터의 소외를 초래했다. 콘스탄티누스 이전 시대 이후 처음으로 20세기에 기독교 평화주의가 전쟁에 대한 기독교적 선택 사항으로 옹호되었다.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국가에 정교회를 수립한 19세기의 혁명은 20세기에 보편적인 교회에서 일련의 국가 교회로 바뀌어 민족주의와 국가에 종속되었다.
8. 2. 현대의 동방 정교회
표트르 1세가 총대교구좌를 폐지하고 종무원을 통해 교회를 장악한 이래 러시아 제국 시기 차르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이기도 하였다.[191] 그러나, “자비로운 아버지 짜르” 니콜라이 2세에게 사회 체제 개선을 탄원하기 위해 황궁으로 향하던 이들이 유혈 진압된 피의 일요일 이후 로마노프 왕가는 몰락하였고[192],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총대교구좌를 부활시켰다.[191]혁명 이후, 레닌은 민족자결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스탈린 집권 초기인 1920년대에서 1930년대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구체제의 악습으로 취급되어 탄압받았다.[193]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파괴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침공에 맞서 애국주의를 호소하기 위해 소비에트 정권은 러시아정교회를 “정권의 동료”로 삼았다.[193]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억압의 대상이 되었으나, 미하일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총대교구좌를 다시 복원하고 러시아 내에서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보장받았다.[194]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이스탄불로 개명하여 수도로 삼은 뒤에도 동방정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리스 지역 대부분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관할아래 종교와 정치에서 자치를 누렸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외교 분야에서 그리스인을 중용하였다.[195] 그러나, 러시아가 동방정교회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러시아 정교회가 분리되었고,[97] 오스만 제국은 무슬림이 아닌 딤미들에게 무거운 조세를 부과하였다.[195]
1830년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하면서, 그리스 정교회는 1850년 콘스탄티노폴 총대주교청으로부터 아테네 대주교를 수장으로 하는 독립 정교회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19] 1832년 12년간의 그리스 독립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가 독립한 후, 그리스 정교회는 독립이후에도 그 영향력을 유지하였다.[196] 20세기까지도 그리스 내에서는 정교회의 교회 법에 따르지 않고는 결혼할 수 없었고, 이혼은 원칙적으로 불허되었다.[197]
동방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를 포함한 14개의 자치적인 정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의 다른 자치 정교회는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정교회의 대표로 인정하나 러시아 정교회는 독자적인 총대교구주교가 있다.[198]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유지되어온 역사 때문에 한 동안 부활절과 같은 전례일을 서로 다른 날에 기념하기도 하였으나, 21세기가 되면서 서로 간의 협의를 통해 부활절을 4월 15일로 통일하였다.[199] 2010년 5월 10일 한국 정교회 전파 110주년을 맞아 세계 각지의 정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 심포지엄을 열기도 하였다.[200]
8.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가톨릭 교회의 변화
교황 요한 23세가 교회의 현대화를 위해 요청하여[202]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로마 가톨릭의 제반 사항을 결정한 공의회로,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敎令) 그리고 3개의 선언을 채택하였다.[201]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지 100년 만에[202] 열린 이 공의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과, 이전까지 라틴어로 진행되던 미사를 각 지역 언어로 진행하도록 하여 로마 가톨릭을 현지화하고, 신자의 사도직을 확인하고, 신앙의 자유를 확인하는 등 가톨릭 현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203]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대규모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60년대에 요한 23세 아래에서 개회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현대에 맞는 가톨릭 교회의 방향성이 정해졌다.[202] 그 안에서 개신교 및 동방 교회와의 대화인 에큐메니즘과 더불어, 타 종교와의 대화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또한 과학과 성서학 존중, 각국어에 의한 전례 실시 추진, 현대 사회와의 연대라는 방향성을 확인했다. 이 개혁이 규모와 내용에서 16세기의 종교 개혁에도 필적하기 때문에 "제2의 종교 개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 재검토 및 철회(1992년) 등에서,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스스로 바로잡는 자세를 볼 수 있다.
8. 4. 개신교의 부흥 운동과 새로운 교파의 등장
19세기 동안 미국의 개신교를 중심으로 D.L. 무디, R.A. 토레이, J.W. 체프만 등의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대각성운동이라고도 불리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204] 이들은 초교파적 부흥운동을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205][206]칼뱅주의와 웨슬리안의 부흥 운동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불리며, 북미에서 복음주의적인 조합 교회,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새로운 감리교의 발전을 보였다.[22] 1800년대부터 2차 대각성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감리교회에서 성결 운동과 자유 감리교회가 탄생했다. 장로교에서는 컴벌랜드 장로교회가 형성되거나, 장로교에서 분리되는 형태로 제자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2차 대각성(1800년 - 1830년대)은 1차 대각성보다 교회의 밖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개인적인 깊은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고 부흥 집회가 열렸다. 1857년부터 시작된 3차 대각성은 영어권을 중심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24]
근대 이후 초기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진 새로운 교파들이 생겨났다. 1870년 찰스 테이즈 러셀에 의해 미국에서 성서 연구 모임으로 시작된 여호와의 증인[207], 1830년 뉴욕주에서 조지프 스미스 2세와 6명의 설립등기인이 설립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212], 1914년 미국 아칸소 주에서 시작된 오순절교회[214] 등이 그 예이다.
8. 5. 현대 기독교의 동향
현대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적 흐름과 사회적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19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이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형성되었으며, 알버츠 슈바이쩌와 같은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강조하고 기적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였다.[21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해방신학이 등장하여 군부 독재와 빈부 격차 등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217] 기독교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진화 이론이나 여성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신학 사조이다.[218]
에큐메니컬 운동은 기독교 교파 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일치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운동으로, 세계 교회 협의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219] 1910년 에든버러에서 세계 기독교 선교 협의회를 개최하여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대표는 물론 비기독교 종교 대표도 초청하여 교회의 대화와 일치를 협의했다. 그 결과, 1948년에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가 탄생하여 에큐메니컬 운동(교회 일치 운동)이 추진되었다[30]
18세기부터 기독교는 세계 최대 종교가 되었으며, 21세기 초에는 전 세계 인구의 약 31.2%인 24억 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에큐메니즘에 대한 노력을 본격화했다.[31] 프로테스탄트 교파들과 상호 성찬 관계 수립을 목표로 신학적 작업이 진행 중이며, 1990년대에는 루터교와 칭의 교리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회와의 관계에서는 성사론의 차이와 동성애 및 여성 사제 서품 문제 등으로 완전한 일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방 교회와 가톨릭 교회,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간의 대화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정교회와 비칼케돈파 정교회 교회는 20세기 말 그리스도론 등의 교리 차이가 표현상의 차이일 뿐 근본적으로 교리를 공유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콥트 정교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에서 활동하며 다른 교회와의 교류에 힘쓰고 있다.
20세기 기독교는 세속주의, 변화하는 도덕적 풍토, 정치적 반대 등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정부는 많은 지역에서 교회의 위축을 초래했다. 이러한 가운데 성 윤리, 젠더, 배타성 등에 대한 교회 내 논쟁이 발생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뉴에이지 영성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속화라는 공통의 위협과 종교적 증오의 파괴적 잠재력에 대한 인식은 교회 간의 협력을 장려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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