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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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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장춘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계 농학자로, 한국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898년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했으며,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씨앗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주요 작물의 품종 개량에 힘썼다. 특히 '우의 삼각형' 이론 제시, 씨 없는 수박 개발 등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그는 '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부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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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기본 정보
40대 시절의 우장춘
우장춘 (40대 시절)
이름우장춘
한자禹長春
일본어 표기須永長春 (스나가 나가하루), 禹長春 (우 나가하루)
로마자 표기U Jangchun
출생일1898년 4월 8일
출생지일본 제국 도쿄
사망일1959년 8월 10일
사망지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분야농생물학, 식물학, 원예육종학
산남(山南), 불은(佛恩)
별명고무신 박사
종교불교
본관단양
부모우범선(부), 사카이 나카(모)
배우자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
친척우홍춘(아우), 이나모리 가즈오(넷째 사위)
학력도쿄제국대학 대학원 농학박사
직업농생물학자, 식물학자, 원예육종학자
교육부산대학교 초빙교수
경력한국독립당 농과학교육행정특보위원(1956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1957년)
수상제1회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문화상 과학부문상
대한민국 문화포장
웹사이트대한민국 학술원 홈페이지
대한민국 학술원 데이터 관련 자료
기타 정보
주요 참전 전투/전쟁한국 전쟁

2. 생애

1945년 8·15 광복 이후 우장춘은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건너왔다. 아버지 우범선을미사변 가담은 그에게 평생 짐이 되었지만,[29][30] 한국의 식물학과 농학을 종합과학으로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31][32]

우장춘은 1898년 4월 8일 도쿄에서 태어나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자랐다. 단양 우씨인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ナカ)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었다.[3] 우범선은 훈련대 대대장을 역임했으며, 개화파 운동에 참여했다.[4][5] 1895년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일본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순종은 우범선을 살인 공모 혐의로 고발했고,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피했다.[6][7][2][8][9]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은 고영근에게 암살당했고,[2] 다섯 살이었던 우장춘은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는 우장춘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존중하도록 가르쳤지만,[2] 생계를 위해 그를 고아원에 맡겼다. 3년 후 어머니는 그를 데려왔다.[2][10]

일본 제국동아시아에서 유럽 열강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우장춘은 학교 공부를 계속했다. 어머니는 모든 재산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고, 우범선의 유해는 친구의 도움으로 다른 묘지에 다시 매장되었다.

우장춘은 교토 제국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자 했지만, 박영효의 제안으로 조선총독부 장학금을 받고 1916년 도쿄 제국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다. 1919년 졸업했고, 1936년 "종의 합성" 논문으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장춘은 이웃의 아들들을 가르쳤고, 이웃의 소개로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와 결혼하여 네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그의 사위가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우장춘은 한국으로 갔지만, 아버지의 행적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일본 농림성에서 일하며 메꽃을 연구하여 "우의 삼각형" 이론을 제시했고, 페튜니아 연구를 통해 1930년 완전한 겹꽃 페튜니아를 만들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유전자형과 표현형 연구를 계속하던 중, 십자화과 식물의 성공적인 교잡을 이루어내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진화가 종 분화뿐만 아니라 유전자 교환을 통해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2][13]

일본 농업 연구 졸업생들이 우장춘 밑에서 배웠지만, 그는 한국 점령기 일본 정책 때문에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한국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고, 승진 제안을 받았을 때 고노스 시험장의 직책을 사임했다.[14]

그는 다키이 연구 농장에 고용되어 종자 생산 방법과 농산물을 개량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다키이 연구 농장은 무료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우장춘은 한국 학생들을 위한 강사였다. 1945년 대한민국이 독립하자 우장춘은 다키이 농장과 도쿄 대학의 직책에서 사임했다.

해방 후 한국 농민들은 씨앗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기술 지식을 얻는 것을 방해하고 비싼 값에 씨앗을 팔아 이익을 얻으려 했다.[16] 김종이의 제안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우장춘의 귀국을 촉구했고, 부산 근처에 "한국 농업 과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50년 3월, 우장춘은 한국으로 돌아와 "이제부터 저는 아버지의 나라, 제 고국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할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전국 농장의 열악한 상황을 본 우장춘은 씨앗 대량 생산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국 전쟁 발발에도 불구하고 부산 지역은 분쟁을 피할 수 있었고, 그는 연구에 집중하여 벌레에 덜 취약한 씨앗을 생산하고, 꽃 심기에도 힘썼다.

미국 대령이 연구소를 방문하여 겹꽃 페튜니아를 보고 감탄했다. 그는 직원을 통해 우장춘이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는 한국인임을 알게 되었고, 선물을 가지고 돌아와 우장춘을 만났다.

우장춘의 연구 결과, 배추, 얼갈이배추,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노란 참외 등 한국 주요 작물의 개량된 종자가 탄생했다. 병충해에 강한 종자 감자, 씨 없는 수박, 제주 감귤도 개발했다.

한국 농업 과학 연구소는 중앙 원예 기술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장춘은 어머니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듣고 일본 방문을 요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전국적으로 위로 편지와 기부금이 쏟아졌고, 우장춘은 어머니를 기리고 직원들을 위해 우물을 파고 "자유천"이라 이름 지었다.

1950년대 농업 정책은 대부분 우장춘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코스모스 꽃 심기, 위생 재배 등이 그 예이다. 우장춘은 병충해에 강한 감자 종자 생산에도 성공했다.

60세 전후 우장춘은 팔에 통증을 느꼈고, 약물 치료에도 증상이 악화되었다. 코르티손만이 통증을 완화시켰지만, 부작용 우려가 있었다. 위장과 장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했고, 연구원들이 부인 고하루 씨에게 연락했다.

고하루 씨는 한국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한국에 도착했다. 우장춘은 건강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며 2~3년 안에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한국 정부는 우장춘의 업적을 공식 인정하여 훈장을 수여했고, 우장춘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조국이 나를 인정해 주었으니"라고 말했다. 1959년 8월 10일 새벽, 우장춘은 한국에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전국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98년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아버지 우범선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 ナカ) 사이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 우범선은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4][5] 1903년 아버지 우범선이 고영근에게 암살당한 후,[2] 어머니는 우장춘을 보육원과 사찰에 맡겼다. 우장춘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일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사찰의 주지승과 동자승들과는 돈독하게 지냈다.[2][10]

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차별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다.[11]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우장춘은 교토 제국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박영효의 제안으로 조선총독부의 장학금을 받고 1916년 도쿄 제국 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했다.[22] 1919년 졸업 후, 1936년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2. 일본에서의 활동

1898년 일본 도쿄에서 을미사변에 적극 가담했던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에게 암살된 후, 어머니는 우장춘을 보육원과 사찰에 맡겼다. 1916년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했고, 1919년 졸업 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기수(技手)가 되었다.

1936년 5월 4일 모교에서 "종(種)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4] 이 논문은 "우의 삼각형"으로 알려졌으며, 십자화과 식물 연구를 통해 진화가 유전자 교환을 통해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밝혔다.[12][13] 1926년에는 유채 연구를 주로 수행하면서, 페튜니아(쓰쿠바 아사가오)의 완전 겹꽃 재배법(완전 겹꽃 이론)을 발견했다.[23]

일본 농림성에서 일하면서 페튜니아에 대한 연구를 통해 1930년에 완전한 겹꽃 페튜니아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한국인을 일본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에 따라 한국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아 승진에 어려움을 겪었다.[14] 1937년 농림성을 퇴사하고 다키이종묘 연구농장장으로 초빙되어 자가불화합성 현상과 잡종강세 메커니즘 해명에 힘썼다. 1945년 종전 후 다키이종묘를 퇴사했다.

1924년 일본인 여성 와타나베 고하루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지만, 자녀들에게는 일본 이름을 짓고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의 일본 이름은 스즈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였다.

2. 3. 한국으로의 귀환

1945년 8·15 광복 이후, 우장춘은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건너왔다. 아버지 우범선을미사변에 가담한 과거는 평생 짐이 되었지만,[29][30] 한국의 식물학과 농학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31][32]

해방 후, 한국은 일본과의 무역 중단으로 씨앗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 일본은 의도적으로 한국의 기술 지식 습득을 방해하고, 비싼 값에 씨앗을 판매하여 이익을 얻으려 했다.[16] 이 때문에 배추 같은 채소 씨앗을 생산할 수 있는 사람이나 회사가 없었고, 일본에서 씨앗을 수입할 수도 없었다.[2]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종이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우장춘 박사 귀국을 요청했고, 이는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이어졌다. 우장춘은 이 요청에 응하여 부산 근처에 "한국 농업 과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를 시작했다.[26]

1950년 3월, 우장춘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환영합니다! 우장춘 박사님의 귀향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과 함께 환영식이 열렸고, 우장춘은 "이제부터 저는 아버지의 나라, 제 고국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고국에 뼈를 묻을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전국 농장의 열악한 상황을 본 우장춘은 씨앗 대량 생산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한국 전쟁 발발에도 불구하고 부산 지역은 비교적 안전했고, 우장춘은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벌레에 덜 취약한 씨앗을 생산하고, 꽃 심기에도 힘썼다.

어느 날 미국 대령이 연구소를 방문하여 겹꽃 페튜니아를 보고 감탄했다. 그는 직원에게 꽃의 발명가를 물었고, 직원은 모른 척했지만, 대령은 일본 과학자 우장춘이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우장춘은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는 한국인이었고, 대령은 선물을 가지고 돌아와 우장춘을 만났다.

우장춘의 연구 결과, 배추, 얼갈이배추,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노란 참외 등 주요 작물의 개량된 종자가 탄생했다. 또한, 병충해에 강한 종자 감자, 씨 없는 수박, 제주 감귤 등도 개발했다.

이후 한국 농업 과학 연구소는 중앙 원예 기술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장춘은 어머니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듣고 일본 방문을 요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장춘은 슬픔에 잠겼다. 이 소식에 전국적으로 위로 편지와 기부금이 쏟아졌고, 우장춘은 어머니를 기리고 직원들을 위해 우물을 파고 "자유천"이라 이름 지었다.

1950년대 농업 정책은 대부분 우장춘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와 철도변에 코스모스 꽃 심기가 있었는데, 코스모스는 쉽게 퍼지고 독성이 있어 가축이 먹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경 재배 도입 문제에서는 우장춘이 더 저렴한 위생 재배를 제안했다. 수원에 수경 재배 시설이 설치되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고, 우장춘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의 팀은 서울에 위생 재배 시설을 설립했고, 미군이 시설의 위생적인 제품을 선택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우장춘은 병충해에 강한 감자 종자 생산에도 성공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우장춘 초청 운동이 일어났다.[26] 당시 한국은 식량 부족과 종자, 비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중요하지 않은 채소는 방치되어 김치 재료 생산이 어려웠다.[27] 한국은 주요 채소 종자를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24]

이런 상황에서 김종이는 "지금의 한국에 와서 종자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우장춘밖에 없다"라고 말했고, 한국 정부와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큰 운동이 되었다. 우장춘은 을미사변으로 역적의 낙인이 찍힌 아버지를 둔 일본 출생으로, 한국어를 몰랐지만 1950년 한국행을 결심하고 가족을 일본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건너왔다.[26][28] 그의 나이 52세였다. 그는 연구에 매달릴 수 있고, 아버지의 조국을 위한 일이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26] 한국행에 앞서 우장춘은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모교에서 강연했다.[24]

2. 4. 한국 농업 발전에 기여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우장춘을 한국으로 초청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26] 당시 한국은 정치적 혼란과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 등으로 식량이 부족했고, 농가는 종자와 비료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한국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쌀과 보리 등 일본인의 주식 증산에 중점을 두었고, 일본에 중요하지 않은 무나 배추와 같은 채소는 방치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필수적인 김치 재료를 제대로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27] 따라서 당시 한국은 배추, 무와 같은 주요 채소 종자를 막대한 외화를 들여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다.[24]

우량한 채소를 대량 생산하려면 우량 종자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키이 종묘의 동료였던 김종이는 "지금의 한국에 와서 종자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우장춘밖에 없다"라고 말했고, 한국 정부와 국민 모두가 나서는 큰 운동이 되었다. 국모 민비 시해 사건으로 역적의 낙인이 찍힌 우범선을 아버지로 둔, 일본 출생의 우장춘은 한국어를 할 줄 몰랐지만 1950년, 한국행을 결심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한국으로 건너갔다.[26][28] 그의 나이 52세였다. 태어나고 자란 일본이 편안했지만, 하고 싶은 연구에 마음껏 매달릴 수 있고, 그것이 아버지 우범선의 조국을 위한 일이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진다.[26]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부산에 설립된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전국의 농촌을 시찰하였다.[26]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무와 배추의 종자 생산을 시작하였다.[24] 먼저 직원들에게 육종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량한 고정 품종을 만들려면 우량한 개체를 선발하고 인공 교배를 거듭하여 우수한 조합을 선발하여 원원종을 만들고, 이 원원종을 원종으로 증식한 후 일반 보급종으로 대량 생산해야 한다. 일본과 한국의 많은 재래종을 교배하면서 이 작업을 계속하였으나,[26] 여기까지 5년이 걸렸고, 여기서 몇 년 더 걸쳐 품종 간 교잡을 실시하여 잡종 제1대(F1) 품종을 육성해야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국립시험장) 원장에 취임한 우장춘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부고를 접하고 일본 귀국을 대통령에게까지 간청하였으나, 귀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장춘이 귀국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우려하여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본어밖에 할 줄 몰라 상황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동시에,[24] 1955년경에는 무와 배추의 자급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24] 또한 고랭지에서의 감자, 수량이 많은 재배에도 힘썼으며,[26] 제주도 일대를 귤의 대량 생산지로 만들었다.[26] 무와 배추, 귤의 원종에는 일본 품종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26]

우장춘은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벼의 수도이기작(水稻二期作)을 연구하였다. 그는 씨 없는 수박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시연하였는데, 이는 농업과학협회에서 개발된 여러 작물 종자들을 보급하기 위해 홍보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은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木原 仁)였다.

1957년 부산시 제1회 문화상 과학부문상을 받았고, 1959년 안익태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의 연구소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견학코스가 되기도 하였고, 연구소에서는 늘 고무신 차림이었기에 '고무신 박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2. 5. 사망과 유산

1959년 8월 10일, 우장춘은 향년 62세(만 61세)의 나이로 만성 위 및 십이지장 궤양으로 인해 국립의료원에서 사망했다.[27] 그는 한국에 온 지 9년 만에, 배우자 와타나베 고하루(한국명 우소춘)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수원 농촌진흥청 내 여기산에 안장되었으며, 2003년 4월 21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우장춘은 60세 전후부터 팔에 통증을 느꼈고, 약물 치료에도 증상이 악화되었다. 코르티손만이 통증을 완화시켰지만, 부작용 우려가 있었다. 위장과 장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했으나, 한 달 안에 퇴원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증상이 악화되어 연구원들이 부인 고하루 씨에게 연락했고, 고하루 씨는 한국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한국에 도착했다.

고하루 씨가 도착하자 우장춘은 건강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며 2~3년 안에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무렵 한국 정부는 우장춘의 업적을 공식 인정하여 농림부 장관이 직접 병원을 방문해 훈장을 수여했다. 우장춘은 부인과 연구원들에게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조국이 나를 인정해 주었으니"라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장례는 국장에 준하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우장춘의 한국 체류 기간은 9년이었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해 한국 농업은 발전했다. 그는 배추 등 종자의 자급 체제를 확립하여 "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 또는 "김치의 은인"으로 불린다.[27] 씨 없는 수박은 일본의 유전학기하라 킨토모(木原均)가 발명했지만, 우장춘이 육종학을 알리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시연하면서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발명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한국방송공사(KBS)와 NHK는 공동 제작으로 그의 일생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양국에서 방송했다. 일본에서는 1991년 2월 NHK 스페셜 "어떤 일본인·우장춘"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고, 최근에는 무대화되기도 하였다.

우장춘에게는 6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중 넷째 딸 아사코(朝子)는 교세라 창업주 이나모리 가즈오와 결혼하였다.[23] 아버지 우범선의 행동 때문에 처음에는 냉담한 시선도 있었지만, 현재는 그 공적에 따라 이방자와 함께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부산광역시 동래구에는 우장춘 박사 기념관이 있으며, 그의 묘소는 수원시 여기산(麗妓山)에 있다. 2010년, 한국 정부는 농업 분야 과학자 육성을 위해 "우장춘 프로젝트"를 실시하였다.[17]

3. 연구 성과 및 업적

우장춘은 일본 농림성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23세에 메꽃 연구를 통해 배추속 식물의 진화와 관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제시한 "우의 삼각형" 이론은 훗날 DNA 연구로 확인되었다.[33][34]

테라오 박사와 함께 페튜니아 꽃을 연구하여 완전 겹꽃 페튜니아를 개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유전자형과 표현형 연구를 계속, 십자화과 식물 교잡에 성공하여 또 다른 유명 논문을 발표했다. 도쿄대학교는 그의 업적을 인정,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의 연구는 종 분화가 유익한 돌연변이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간의 유전자 교환을 통해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2][13]

일본 농업 연구 졸업생들이 우장춘 밑에서 배우러 왔으나, 그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다. 한국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아 승진 제안을 받았을 때 직책을 사임했다.[14] 다키이(Takiyi) 연구 농장에 고용된 후에는 인공선발을 통한 종자 생산 방법과 농산물 개량에 힘썼다. 배우자체의 인공 결합에 대한 논문을 발표, 식물 품질 향상에 기여했다.

사이타마현 코누스 시험지로 전근하여 유채 연구를 수행했고, 페튜니아의 완전 겹꽃 재배법을 바탕으로 사카타종묘가 사업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23] 중국 농장장 제안이 무산되고 고등관 기술자의 길이 멀어지자, 일본 국적을 유지하면서도 성을 바꾸지 않아 승진이 어려웠다.[26] 1937년 농림성을 퇴사하고 다키이종묘 연구농장장으로 초빙되어 십자화과 식물 재배, 화훼류, 채소 육종, 식물호르몬 연구를 통해 자가불화합성 현상과 잡종강세 메커니즘 해명에 힘썼다. 1945년 종전 후 다키이종묘를 퇴사했다.

3. 1. 종의 합성이론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최초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4] "종의 합성"은 "우장춘의 트라이앵글"이라고도 불리며,[24] 1960년대에는 세포유전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논문이었고,[24] 우장춘의 이론은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었다.[24] 우장춘이 연구에 사용한 십자화과 식물은 유럽미국에서 인기가 높아 수많은 신품종 개발에 응용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4] 오늘날 일본인이 섭취하는 양배추배추 등 십자화과 채소는 우장춘이 구축한 토대를 바탕으로 품종개량이 진행되었다.[24]

박사 학위 논문 서지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논문 제목은 "아브라나속에 있어서의 「게놈」 분석, 부 「납스」의 합성과 특수 수정 현상"이다.[25]

3. 2. 한국 농업에 대한 기여

우장춘 박사는 한국 농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바이러스에 취약했던 강원도 감자를 개량하고, 일본 배추양배추를 교배하여 한국 환경에 맞는 결구배추를 개발했다.[33][34] 제주도 환경에 적합한 감귤 재배를 권장했으며, 페튜니아 겹꽃 개량종을 개발하여 화초 재배에도 기여했다. 또한, 유채를 일본에서 도입하여 제주도에서 재배할 수 있도록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은 일본과의 무역 중단으로 씨앗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한국의 기술 지식 획득을 막고 씨앗을 비싸게 팔아 이익을 얻으려 했다.[16] 이 때문에 해방 후 한국에는 , 배추와 같은 채소 씨앗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고, 일본으로부터 씨앗 수입도 불가능했다.[2]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종이의 제안과 이승만 대통령의 후원으로 우장춘 박사 귀국 운동이 추진되었다. 우 박사는 귀국 후 한국 농업 과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씨앗 대량 생산과 품종 개량에 힘썼다.

한국 전쟁 중에도 우장춘 박사는 연구를 지속하여 배추, 얼갈이배추,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 주요 작물의 개량된 종자를 개발했다.[26] 병충해에 강한 종자 감자, 씨 없는 수박, 제주 감귤 등도 그의 연구 성과였다.

1950년대 많은 농업 정책은 우장춘 박사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고속도로와 철도변에 코스모스 심기, 수경 재배 대신 위생 재배 도입 등이 그 예이다. 우 박사는 서울에 위생 재배 시설을 설립하여 미군에 과일과 채소를 공급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우장춘 박사의 노력으로 한국은 무와 배추 종자의 자급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24] 그의 제자들을 통해 한국 농업은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그는 "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 또는 "김치의 은인"으로 불리며, 한국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27]

4. 평가 및 논란

우장춘은 한국 농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아버지 우범선의 친일 행적과 관련된 논란도 존재한다.


  • 씨 없는 수박: 씨 없는 수박은 일본의 유전학자 기하라 킨토모(木原均)가 발명했지만, 우장춘이 육종학을 알리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선보인 일화가 와전되어 우장춘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27]
  • 묘소: 우장춘의 묘소는 한국 농업의 본거지인 수원시 여기산에 있으며, 부산광역시 동래구에는 우장춘 박사 기념관이 있다. 아버지 우범선의 묘소는 일본 히로시마현 쿠레시(呉市)의 신응원(神應院)과 도치기현 사노시(佐野市)의 묘켄지에 있다.

4. 1. 긍정적 평가

우장춘은 한국에서 9년간 체류했지만, 그의 제자들이 한국 농업을 발전시켰다. 현재 재일 한국인 중 학자를 제외하고는 우장춘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한국에서는 윤리 교과서에 실려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배추 등 종자의 자급 체제를 확립하여 "'''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 또는 "'''김치의 은인'''"으로 불린다.[27] 씨 없는 수박 발명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기하라 킨토모(木原均)의 발명이지만, 우장춘이 육종학을 알리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보인 것이 와전된 일화이다.

한국방송공사(KBS)와 NHK가 공동 제작하여 그의 일생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양국에서 방송하였다. 일본에서는 1991년 2월 NHK 스페셜 "어떤 일본인·우장춘"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고, 최근에는 무대화되기도 하였다.

우장춘에게는 6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중 넷째 딸 아사코(朝子)는 교세라 창업주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와 결혼하였다.[23]

아버지 우범선(禹範善)의 행동 때문에 처음에는 냉담한 시선도 있었지만, 현재는 그 공적에 따라 이방자와 함께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2010년, 한국 정부는 농업 분야 과학자 육성을 위해 "우장춘 프로젝트"를 실시하였다.[17]

5. 가족 관계

항목내용
아버지우범선[3]
어머니사카이 나카(酒井 ナカ)[3]
배우자우소춘(禹小春, 와타나베 고하루(渡辺小春))[3]
자녀4녀 2남[3]
사위이나모리 가즈오


6. 기타

아버지는 을미사변(조선 국왕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참여했던 군인 우범선(禹範善)이다.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인 여성 사카이 나카(酒井ナカ)와 결혼했고, 일본에서 우장춘(禹長春)이 태어났다. 출생지는 도쿄 아카사카설[17]히로시마설이 있다. 자란 곳은 히로시마현구레이다. 아버지 우범선은 명성황후를 시해했기 때문에[18], 1903년 11월 24일[19], 우장춘이 6세였을 때, 과거 명성황후를 섬겼던 고영근(高永根)에게 구레에서 암살당했다.[20]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친일파로 여겨져 일본으로 도망쳐 온 구용서(具鎔書)(이후 초대 한국은행 총재, 제10대 대한민국 상공부 장관 등을 역임) 등, 사카이 나카 밑으로 보내진 친일파 자녀 6명과 함께 일본에서 자랐다.[21] 우장춘은 히로시마 현립 구레 중학교(현 히로시마 현립 구레 미쓰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수학에 능숙하여 교토제국대학 공과대학(공학부)를 목표로 구제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박영효의 지원으로 학비를 지급하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농학부) 실과[22] 진학을 지시받고 이에 따랐다. 1919년에 동 대학을 졸업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우장춘을 한국으로 초청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26] 당시 한국은 정치적 혼란과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 등의 문제로 식량이 부족했고, 농가는 종자와 비료 부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때 한국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쌀과 보리 등 일본인의 주식 증산에 중점을 두었고, 일본에 중요하지 않은 무나 배추와 같은 채소는 방치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필수적인 김치 재료를 제대로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27] 따라서 당시 한국은 배추, 무와 같은 주요 채소 종자를 막대한 외화를 들여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다.[24]

우량한 채소를 대량 생산하려면 우량 종자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키이 종묘의 동료였던 김종이 "지금의 한국에 와서 종자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우장춘밖에 없다"라고 말하자, 한국 정부와 국민 모두가 나서는 큰 운동이 되었다. 국모 민비 시해 사건으로 역적의 낙인이 찍힌 우범선을 아버지로 둔, 일본 출생의 우장춘은 한국어를 할 줄 몰랐지만 1950년, 한국행을 결심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한국으로 건너갔다.[26][28] 그때 그의 나이 52세였다. 태어나고 자란 일본이 편안했지만, 하고 싶은 연구에 마음껏 매달릴 수 있고, 그것이 아버지 우범선의 조국을 위한 일이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진다.[26] 한국행에 앞서 우장춘은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10여 년 만에 고향인 구레를 방문했고,[24] 모교인 미쓰다(三津田)에서 강연도 했다.[24]

한국에 온 다음 해인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중앙원예기술원(국립시험장) 원장에 취임한 1953년에는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부고를 접하고 일본 귀국을 대통령에게까지 간청하였으나, 귀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장춘이 귀국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우려하여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본어밖에 할 줄 몰라 상황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동시에,[24] 1955년경에는 무와 배추의 자급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24] 또한 고랭지에서의 감자, 수량이 많은 재배에도 힘썼으며,[26] 제주도 일대를 귤의 대량 생산지로 만들었다.[26] 무와 배추, 귤의 원종에는 일본 품종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26]

1959년 서울의 메디컬 센터에 입원했다. 십이지장 궤양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10일 사망했다. 향년 61세였다. 한국에 온 지 9년 만이었다. 사망 직전 한국 정부는 우장춘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27] 대한민국 문화포장은 한국 국민에게 최고의 영예였다. 장례는 국장에 준하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우장춘의 한국 체류 기간은 9년이었지만, 한국 농업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그 후 발전하였다. 현재 재일 한국인 중에서도 학자를 제외하고는 우장춘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한국에서는 윤리 교과서에 실려 있어 한국 국민 중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배추 등 종자의 자급 체제를 확립하여 "'''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 또는 "'''김치의 은인'''"으로 유명하지만,[27] 씨 없는 수박의 발명가라고도 불린다. 씨 없는 수박은 일본의 유전학기하라 히토시의 발명이지만, 우장춘이 육종학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사람들 앞에서 수박을 잘랐는데, 씨가 없는 수박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우장춘 선생님이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발명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져 오늘날까지 이르는 일화가 남아 있다.

한국방송공사(KBS)와 NHK의 공동 제작으로 그의 일생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화되어 양국에서 방송되었다. 일본에서는 1991년 2월 NHK 스페셜 "어떤 일본인·우장춘"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다. 최근에는 무대화되기도 하였다.

우장춘에게는 6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중 넷째 딸 아사코(朝子)는 교세라 창업주 이나모리 가즈오와 결혼하였다.[23]

아버지 우범선의 행동 때문에 처음에는 냉담한 시선도 있었지만, 현재는 그 공적에 따라 이방자와 함께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한국에서 시험 농장을 두었던 부산 교외의 동래(현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우장춘 박사 기념관이 있으며, 그의 묘소는 한국 농업의 본거지인 수원시의 여기산(麗妓山)에 있다. 또한, 우범선의 묘소는 히로시마현 쿠레시의 신응원(神應院)과 도치기현 사노시의 묘켄지에 있다.

2010년, 한국 정부는 농업 분야의 과학자 육성을 위해 "우장춘 프로젝트"를 실시하였다.[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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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In search of traces of historical figures: Woo Jang-choon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우장춘 박사 http://kids.hankooki[...] 2008-12-04
[3] 웹사이트 우장춘(禹長春) http://seer.snu.ac.k[...] Science Culture Education Research Institute; SCERI 2019-07-25
[4] 서적 The Abacus and the Sword: The Japanese Penetration of Korea, 1895-191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9-01-24
[5] 웹사이트 1898 일본 도쿄 (東京)~1959. 8. 10 http://100.empas.com[...] Empas / Britannica 2008-10-27
[6] 웹사이트 The background of Chuncheon Loyal Troops> 1. Political background (춘천의병의 배경 >1. 정치적 배경) http://www.loyaltroo[...] Chuncheon Loyal Troops Village 2008-10-27
[7] 저널 History review > Continued falsification on history by Japan (역사 재조명 > 일본의 계속되는 역사 왜곡) http://www.sisamagaz[...] Sisa Magazine 2004-04-19
[8] 뉴스 (박노자) 민족의 경계를 불사른 연애 http://h21.hani.co.k[...] 2005-11-23
[9] 문서 Baek Sukgi, p. 6-7
[10] 문서 Baek Sukgi, p. 11-12
[11] 문서 Baek Sukgi, p. 16
[12] 저널 Genome analysis in Brassic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experimental formation of B. napus and peculiar mode of fertilization
[13] 서적 Plant Breeding Reviews http://as.wiley.com/[...] Wiley
[14] 문서 Baek Sukgi, pp. 36-38
[15] 문서 Baek Sukgi, pp. 41–42.
[16] 문서 Baek Sukgi, p. 43.
[17] 뉴스 忘れ得ぬ人々:日韓併合100年1:農業の偉人 父は国賊 毎日新聞 2010-02-12
[18] 문서 姜 2006 p.255
[19] 문서 姜 2006 p.256
[20] 문서 禹父子 連載(2)
[21] 웹사이트 중앙은행 오디세이 <23> 선망과 좌절의 일터 식민지 조선은행 직원들-‘조센징’ 차별 딛고 대한민국 기둥으로 https://www.bok.or.k[...] 한국은행
[22] 문서 東京帝国大学農科大学実科は旧制専門学校相当の課程で、東京大学|東京帝国大学農科大学(農学部)本科ではない。東京帝大農学部実科は、1935年に東京高等農林学校(新制東京農工大学農学部の前身)として独立した。
[23] 문서 禹父子 連載(3)
[24] 문서 禹父子 連載(1)
[25] 문서 博士論文書誌データベース
[26] 문서 禹父子 連載(4)
[27] 뉴스 忘れ得ぬ人々:日韓併合100年3:土に生き 根を張る 毎日新聞 2010-02-14
[28] 뉴스 忘れ得ぬ人々:日韓併合100年2:罪滅ぼしと使命感 毎日新聞 2010-02-13
[29] 웹인용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역사의 아이러니 우장춘 박사 http://se-cu.com/nds[...] 2024-08-22
[30] 웹인용 우장춘을 소환하며 http://www.jsnews.co[...] 2024-08-22
[31] 웹인용 우장춘 기념관(禹長春記念館) - 부산역사문화대전 https://busan.grandc[...] 2024-08-22
[32] 웹인용 우장춘기념관 소개 {{!}} 우장춘기념관 {{!}} 과학관에서 과학을 즐겨봐 (fun&FUN과학관) {{!}} 교육프로그램 {{!}} 부산과학기술협의회 http://www.fobst.org[...] 2024-08-22
[33] 저널인용 Genome analysis in Brassic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experimental formation of B. napus and peculiar mode of fertilization
[34] 서적인용 Plant Breeding Reviews Vol.31 http://as.wiley.com/[...] Wiley 200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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