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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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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제국은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 서유럽을 지배했던 프랑크 왕국이다. 샤를 마르텔의 손자 샤를마뉴가 800년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국으로 발전했다. 샤를마뉴 치세에 로마 제국을 연상시키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으며,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경건왕 루이 시대에 제국은 분열의 조짐을 보였고, 그의 사후 베르됭 조약으로 세 아들 간에 분할되었다. 이후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888년 뚱보 카를의 사망으로 제국은 멸망했다. 카롤루스 제국은 강력한 중앙 정부, 효율적인 행정 체제, 그리고 문화 부흥을 이끌었으며,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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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814년의 프랑키아
814년 카롤링거 제국의 최대 영토
공식 명칭Universum Regnum, Romanorum sive Francorum Imperium, Imperium Christianum
통용되는 긴 명칭카롤링거 제국
시대중세
수도메츠, 아헨
공용어중세 라틴어
통용 언어프랑크어
고대 갈리아-로망스어
고대 프랑스어
고대 작센어
고대 고지 독일어
고대 네덜란드어
고대 프리슬란트어
갈로-이탈리아어
고대 오크어
슬라브어
종교기독교 (공식)
통화데나리우스
정치
정치 체제황제
초대 황제샤를마뉴
마지막 황제비만왕 카를
역사
주요 사건샤를마뉴의 대관식 (800년 12월 25일)
베르됭 조약 이후 분할 (843년 8월 10일)
비만왕 카를 폐위 (887년 11월 17일)
이전 국가프랑키아
아바르 카간국
랑고바르드 왕국
작센족
메로빙거 왕조
이후 국가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면적 및 인구
면적1,200,000 제곱킬로미터
인구10,000,000 – 20,000,000명

2. 역사

"카롤루스 제국"이라는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당대에는 라틴어로 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예를 들어 '전체 왕국'이라는 의미의 universum regnum|우니베르숨 레그눔lat, '로마인과 프랑크인의 제국'을 뜻하는 Romanorum sive Francorum imperium|로마노룸 시베 프랑코룸 임페리움lat, '로마 제국'이라는 뜻의 Romanum imperium|로마눔 임페리움lat, 또는 '기독교 제국'을 의미하는 imperium christianum|임페리움 크리스티아눔lat 등이 사용되었다.

제국의 기초는 카롤루스 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샤를 마르텔이 마련했다. 그는 왕이나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프랑크 왕국궁재로서 피레네 산맥 북쪽 서유럽 대륙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의 아들 피핀 3세는 751년 교황 자카리아의 지지 아래 메로빙거 왕조를 폐하고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공식적으로 열었다.

피핀 3세의 아들 샤를마뉴는 768년 왕위를 계승하여 카롤링거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롬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774년), 작센족을 복속시키는 등(772년-804년)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으며, 800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로 대관되어 옛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천명했다.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은 과거 로마 제국처럼 서유럽 대부분을 아우르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제국의 영토는 약 1112000km2에 달했으며, 인구는 1,000만에서 2,000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 제국은 남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 토후국 및 팜플로나 왕국과 접했고, 북동쪽으로는 덴마크, 서쪽으로는 브르타뉴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동쪽으로는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샤를마뉴 사후 제국은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유일한 후계자 경건왕 루이(루트비히 1세)는 제국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의 사후 아들들 간의 상속 분쟁과 내전이 격화되었다. 결국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은 로타르 1세, 루트비히 2세, 카를 2세 세 아들에게 각각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으로 삼분되었다.[16] 황제의 칭호는 중프랑크 왕이 계승했지만, 그 권위는 다른 왕국에 미치지 못했다.

이후 제국은 분열과 재통합 시도, 그리고 바이킹, 마자르족 등 외부 세력의 침입 속에서 점차 쇠퇴했다.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던 로타링기아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에 의해 분할되는 등 영토는 계속 재편되었다. 884년 카를 3세(뚱보 카를) 치하에서 잠시 재통합되었으나, 그의 통치력 부족과 귀족들의 반발로 887년 폐위되었고 이듬해 사망했다.

카를 3세 사후 제국은 최종적으로 해체되어 다시는 통일되지 못했다. 동프랑크 왕국(후의 독일 왕국), 서프랑크 왕국(후의 프랑스 왕국), 이탈리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등 여러 후계 국가로 나뉘었으며, 각 지역에서는 카롤링거 가문이 아닌 유력 귀족들이 왕으로 선출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동프랑크 왕국만이 911년까지 카롤링거 가문의 혈통을 유지했고,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893년 카롤링거 왕조가 복위하여 987년까지 명맥을 이었다. 이로써 샤를마뉴가 건설했던 거대한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17]

2. 1. 카롤링거 왕조의 부흥 (732년경–768년)

카롤루스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의 왕은 아니었지만, 왕국의 궁재로서 사실상 피레네산맥 이북 서유럽 대륙의 절대적인 권력자였다. 그는 이후 카롤루스 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이미 확보했으며, 그가 사망한 뒤 프랑크 왕국에 추가된 주요 영토는 작센 공국, 롬바르디아, 스페인 변경령 정도에 불과했다.[58]

카롤루스 마르텔은 732년 투르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의 침입을 격퇴하여 기독교 유럽을 방어한 인물로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사라센 군대는 베르베르인의 경기병과 아랍인의 중기병을 결합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럽의 기독교 군대는 아직 등자가 보급되지 않아 기병 전력에서 열세였다. 이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로 카롤루스는 '마르텔'(망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4] 로마사 연구로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카롤루스 마르텔을 "그 시대 최고의 군주"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카롤루스 마르텔은 중세 유럽의 중요한 특징인 봉건제와 실력주의 체제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도 평가받으며, 이러한 시스템은 그의 아들과 손자 대에 걸쳐 더욱 발전하게 된다.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 3세는 751년, 교황 자카리아의 승인을 받아 명목상으로만 유지되던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프랑크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카롤링거 왕조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피핀 3세가 768년에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샤를마뉴(카를 1세)와 카를로만 1세가 왕국을 공동으로 상속받아 통치를 시작했다. 이후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면서 샤를마뉴는 광대한 프랑크 왕국 전체를 단독으로 지배하게 된다.[43]

2. 2. 샤를마뉴 통치기 (768년–814년)

800년경 카롤링거 양식의 칠보 보석류인 도레스타드 브로치. 1969년 네덜란드에서 출토.


샤를마뉴 통치기 카롤링거 제국은 과거 로마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서유럽 대부분을 차지했다. 로마 제국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서기 9년)의 패배 이후 라인강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달리, 샤를마뉴는 게르만족의 저항을 제압하고 제국의 영토를 엘베강까지 넓혔으며, 그 영향력은 동유럽 평원(러시아 스텝 지역)에까지 미쳤다.

샤를마뉴의 통치는 거의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으며, 그는 매년 군사 원정에 참여했고 상당수를 직접 이끌었다. 774년에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스스로 '랑고바르드의 왕'이라 칭하며 자신의 왕국에 병합시켰다. 이후 778년 스페인 원정을 이끌었으나 론스보 전투에서 패배하며 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샤를마뉴의 가장 큰 패배로 여겨진다. 794년에는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를 압박하여 바이에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고 영토를 확장했다. 그의 아들 피핀은 샤를마뉴가 작센족 반란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795년에 아바르족에 대한 원정을 지휘했다. 결국 아바르족 연합은 803년 샤를마뉴가 바이에른 군대를 판노니아로 파견한 후 해체되었다. 또한 샤를마뉴는 772년부터 804년까지 이어진 작센 전쟁을 통해 작센족 영토를 정복했으며, 이 과정에서 782년의 베르덴 대학살과 802년의 색슨법(Lex Saxonum) 제정과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4][5]

'카롤루스 제국'이라는 용어는 현대의 관례이며,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제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고, 제국은 universum regnum|우니베르숨 레그눔lat("전체 왕국"), Romanorum sive Francorum imperium|로마노룸 시베 프랑코룸 임페리움lat("로마인과 프랑크인의 제국"), Romanum imperium|로마눔 임페리움lat("로마 제국"), imperium christianum|임페리움 크리스티아눔lat("기독교 제국") 등 다양하게 불렸다.

샤를마뉴가 사망하기 전에 제국은 카롤링거 왕조의 여러 아들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다. 네우스트리아는 아들 소 샤를에게, 아키텐은 경건왕 루이에게, 이탈리아는 피핀에게 주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피핀은 810년에 서자 베르나르도를 남기고 사망했고, 샤를 역시 811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베르나르도가 피핀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왕이 되었지만, 샤를마뉴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루이가 813년에 공동 황제가 되었다. 결국 814년 겨울 샤를마뉴가 사망하자 제국 전체가 그에게 넘어갔다.[6]

2. 3. 경건왕 루이의 재위와 내전 (814년–843년)

카롤루스 제국의 최대 영토(814년)와 베르됭 조약(843년)에 따른 분할 지도.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이었던 경건왕 루이는 원래 세 살 때 아키텐의 왕으로 즉위했으나, 형들의 죽음으로 예상치 못하게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7][61] 그의 치세는 왕조 내부의 분쟁과 끊이지 않는 내전으로 점철되었지만, 그의 별칭처럼 종교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즉위 초 그는 교회들을 복구하고 '법과 독실한 신앙심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힘썼다.[62][8] 익명의 역사가에 따르면, 루이는 아키텐 왕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 세속 및 종교 문서를 빠르게 이해했다고 한다.[63][9] 그는 또한 폐쇄된 수도원들을 복구하고 새로운 수도원 건립을 후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61][7]

그러나 경건왕 루이의 재위 기간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제국의 통치권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샤를마뉴 사망 직후 아헨으로 가 왈라 등 부왕의 신뢰받던 조언자들을 추방했는데, 이는 샤를 마르텔의 후손인 이들이 잠재적 왕위 계승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64][10] 이러한 추방은 그의 재위 초기에 지위를 강화하고 경쟁자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64][10] 817년, 조카인 이탈리아의 베르나르도 국왕이 루이의 장남 로타르 1세의 봉신이 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65][11] 반란은 신속하게 진압되었고, 818년 베르나르도는 체포되어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을 받았으나 그 후유증으로 이틀 만에 사망했다.[66][12] 이 사건 이후 이탈리아는 다시 제국의 통제하에 들어왔다. 822년, 루이가 베르나르도의 죽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참회한 일은 귀족들 사이에서 황제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67][13]

루이는 817년,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세 아들에게 새로운 왕위를 분배했다. 장남 로타르 1세는 이탈리아의 왕이자 공동 황제, 피핀 1세는 아키텐의 왕,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의 왕이 되었다.[46][45][48] 그러나 823년, 두 번째 부인 유디트에게서 얻은 넷째 아들 카를 2세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려 하자 이복형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이는 아들들 간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또한 일부에서는 루이가 829년 로타르 1세의 공동 황제직을 박탈하고 이탈리아로 보낸 것[14](정확한 이유는 불명확하다[68])과 베르나르 드 세프티마니아를 중용한 것이 로타르의 불만을 샀다고 보기도 한다.[64][10] 베르나르가 황후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자 귀족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둘째 아들 피핀 1세 역시 827년 군사 원정 실패와 아키텐 통치에 대한 아버지의 간섭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64][10]

결국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피핀 1세를 지지하면서 830년 사순절 기간에 내전이 발발했고, 루이의 재위 말년은 내전으로 얼룩졌다. 부활절 직후, 아들들은 로타르 1세를 앞세워 아버지를 공격하고 폐위시켰다. 루이는 '이름뿐인 황제'로 아들에게 구금된 채 여름을 보내야 했다.[64][10] 이듬해 루이는 복위하여 상속 계획을 변경, 피핀 1세에게 네우스트리아를 주고 로타르 1세의 지위를 박탈했으며 이탈리아 왕국을 카를 2세에게 넘겼다. 832년의 또 다른 영토 분할은 피핀 1세와 루트비히 2세를 완전히 배제하고 로타르 1세와 카를 2세에게만 영토를 주려 했고, 이는 피핀 1세와 루트비히 2세의 즉각적인 반란을 촉발했다.[64][10] 833년에는 로타르 1세까지 합세하여 루이 1세와 카를 2세를 다시 감금했다. 로타르 1세는 중재를 명분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4세를 로마에서 데려왔으나, 실제 목적은 루이를 폐위시키고 파문하여 자신과 형제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64][10] 835년경 가족 간의 평화 조약이 맺어져 루이는 메츠의 성 스테판 교회에서 황제 자리에 복위했다.

838년 피핀 1세가 사망하자 루이는 카를 2세를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했지만, 아키텐 귀족들은 피핀 1세의 아들인 피핀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 분쟁은 피핀 2세가 사망하는 860년(또는 864년의 피에르의 칙령)까지 계속되었다. 경건왕 루이는 840년에 사망했고, 로타르 1세는 기존의 분할 약속과 관계없이 제국 전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이에 카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로타르 1세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841년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한 로타르 1세는 수도 아헨으로 도망쳐 군대를 다시 모았으나 동생들의 연합군에 비해 열세였다. 842년, 카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스트라스부르 서약을 맺고 로타르 1세가 황제의 자리에 부적합하다고 선언했다. 이 서약은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는 것을 명확히 했으며, 프랑스독일의 기원을 상징하는 유럽 역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69][15][49] 마침내 843년, 경건왕 루이의 세 아들은 베르됭 조약을 체결하여 제국을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으로 분할하고 오랜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70][16][50]

2. 4. 베르됭 조약 이후 (843년–877년)

843년 베르됭 조약에 따라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세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로타르 1세는 황제의 칭호와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라인강론강 사이의 영토인 중프랑크 왕국을 받았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라인강 동쪽과 이탈리아 북동쪽의 모든 영토(동프랑크 왕국)를 확보했으며, 이는 현대 독일의 전신이 되었다. 대머리왕 카를은 론강 서쪽의 모든 영토(서프랑크 왕국)를 차지했다.

로타르 1세는 844년 장남 루도비코 2세 이우니오르에게 이탈리아 왕위를 넘겨주었고, 850년에는 그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855년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중프랑크 왕국은 다시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루도비코 2세는 기존에 다스리던 이탈리아와 황제 칭호를 유지했고, 옛 부르군트 왕국의 영토는 셋째 아들 카롤루스 (프로방스)에게 주어졌으며, 전통적인 이름이 없던 나머지 영토는 둘째 아들 로타르 2세가 상속받아 로타링기아로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추가 영토를 얻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루도비코 2세는 858년, 동생 로타르 2세와 숙부 대머리왕 카를에 맞서 숙부인 동프랑크 왕 독일인 루트비히와 동맹을 맺었다. 로타르 2세는 곧 형 및 숙부들과 화해했다. 반면 대머리왕 카를은 인기가 없어 침공에 맞설 군대를 모으지 못하고 부르군트로 도망쳐야 했다. 그는 주교들이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왕관을 씌우기를 거부한 덕분에 간신히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860년, 대머리왕 카를은 카롤루스 (프로방스)의 왕국을 침공했으나 격퇴당했다. 로타르 2세는 862년, 자신의 이혼 문제에 대한 형의 지지를 얻기 위해 루도비코 2세에게 영토 일부를 할양했는데, 이는 교황 및 숙부들과의 반복적인 갈등을 유발했다. 863년 카롤루스 (프로방스)가 사망하자 그의 왕국은 루도비코 2세가 상속받았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왕국인 로타링기아는 870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분할되었다. 한편, 독일인 루트비히는 자신의 세 아들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875년, 아들이 없던 황제 루도비코 2세가 사망하면서 독일인 루트비히의 장남인 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은 서프랑크 왕 대머리왕 카를이 이탈리아 왕위와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이듬해인 876년, 동프랑크 왕 독일인 루트비히가 사망했다. 대머리왕 카를은 이 기회를 틈타 동프랑크 왕국마저 병합하려 했으나, 안더나흐 전투에서 독일인 루트비히의 아들들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결국 동프랑크 왕국은 소 루트비히, 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 카를 3세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2. 5. 쇠퇴 (877년–888년)

서프랑크 왕국의 루이 3세가 바이킹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서사시인 ''루트비히의 노래(Ludwigslied)''의 사본


대머리왕 카를이 877년 몽스니 고개를 넘던 중 사망한 후, 카롤루스 제국은 북쪽과 서쪽에서 바이킹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이탈리아에서 발트해, 동쪽의 헝가리 지역에서 서쪽의 아키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내부 분열과 갈등에 직면했다. 카를 2세의 아들 말더듬이 루이(루이 2세)가 서프랑크 왕위를 계승했으나, 황제의 칭호는 얻지 못했다. 그는 신체적으로 허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인 879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왕국은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루이 3세는 네우스트리아와 프랑키아 지역을, 카를로만 2세는 아키텐부르고뉴 지역을 차지했다.

한편,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는 바이에른의 카를만에게 돌아갔으나,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이탈리아는 그의 동생인 뚱보 카를(카를 3세)에게, 바이에른은 작센의 루트비히(루트비히 3세)에게 넘어갔다. 또한 879년, 프로방스에서는 빈의 보소가 부르군트 왕국(키스유라부르군트 왕국)을 세우며 독립을 선언했다.

881년, 뚱보 카를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882년에는 작센의 루트비히 3세와 서프랑크의 루이 3세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작센과 바이에른은 뚱보 카를의 통치 아래 통합되었다. 프랑키아와 네우스트리아는 아키텐의 카를로만 2세에게 귀속되었고, 그는 저지 부르군트의 일부를 정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를로만 2세 역시 불안정한 통치를 이어가다 884년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고, 그의 영토마저 뚱보 카를이 상속하게 되면서 샤를마뉴 시대의 제국 판도가 일시적으로 재건되었다.

하지만 간질로 추정되는 병을 앓고 있던 뚱보 카를은 바이킹 약탈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제국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특히 886년에는 파리를 포위한 바이킹에게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철수시키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궁정 내에서 비겁하고 무능력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결국 이듬해인 887년, 바이에른의 카를만의 서자이자 그의 조카인 케른텐의 아르눌프가 반란을 일으켰다. 뚱보 카를은 반란에 맞서 싸우는 대신 나이딩겐으로 도피하여 사실상 퇴위하였고, 다음 해인 888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카롤루스 제국은 다시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이후 다시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각 지역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2. 6. 제국의 분할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루트비히 1세가 840년에 사망하자 제국 내에서 내란이 발생했다. 이 내란은 843년 베르됭 조약 체결로 이어졌고, 카롤루스 대제 시대의 제국 영토는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세 나라로 분할되었다. 황제의 지위는 중프랑크 왕이 계승했지만, 그 권위는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명목상으로는 제국 전체의 통일성이 계속 인정되었다.

중프랑크 왕국은 이후 여러 차례 분할을 겪었다. 855년에는 세 왕국으로 나뉘었고, 863년 프로방스의 샤를이 사망하자 그의 왕국은 로타링기아와 루트비히 2세의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870년 메르센 조약을 통해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크 왕국과 서프랑크 왕국에 의해 다시 분할되었다.

샤를 2세가 877년 몽스니 고개를 넘던 중 사망한 이후, 제국은 북방과 서방에서 오는 바이킹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인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의 아들 루이 2세는 서프랑크 왕위를 계승했으나 병약하여 황제위를 잇지 못하고 2년 만에 사망했다. 그의 왕국은 두 아들,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에게 분할되었다. 루이 3세는 네우스트리아와 프랑키아를, 카를로만 2세는 아키텐과 부르군디를 상속받았다. 한편, 서프랑크 왕을 따르던 프로방스의 보소는 이들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프로방스 왕국을 세워 독립했다. 이탈리아 왕위는 바이에른 왕 카를만이 계승했으나, 879년에 이탈리아 왕위를 동생 카를 3세에게, 바이에른을 루트비히 3세에게 넘겨주었다.

881년, 카를 3세는 황제로 즉위했으며, 이듬해 사망한 루트비히 3세와 루이 3세의 영토를 통합했다. 아키텐과 부르군디의 왕 카를로만 2세는 보소로부터 프로방스의 대부분을 되찾던 중 884년 사냥 사고로 사망했고, 그의 영토 역시 카를 3세에게 통합되었다. 이로써 카롤루스 제국은 카를 3세 치하에서 일시적으로 재통일되었다.

하지만 간질을 앓고 있던 카를 3세는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제국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886년에는 파리를 포위한 바이킹에게 철수 비용을 지불하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으며 무능함을 드러냈다. 결국 887년, 바이에른 공작 카를만의 서자인 아르눌프가 반란을 일으키자, 카를 3세는 저항하지 않고 나이딩겐으로 도망쳐 퇴위했고, 888년에 사망했다. 이로써 카롤링거 가문의 제위 계승은 일단 중단되었고, 카롤루스 대제 이후 유지되던 제국의 판도는 영구적으로 분열되었다.

카를 3세 사후, 제국은 다음과 같이 여러 세력으로 나뉘었다. 아르눌프는 케른텐, 바이에른, 로타링기아, 현재의 독일 지역을 차지했다. 파리 백작 오도는 서프랑크(프랑스)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라눌프 2세는 아키텐의 왕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베렌가리오 백작에게 돌아갔으며, 상부 부르군디는 루돌프 1세에게, 하부 부르군디(프로방스 왕국)는 아를의 보소의 아들이자 황제 루트비히 2세의 외손자인 눈먼 루이에게 넘어갔다. 로타링기아의 다른 일부는 부르고뉴 공국이 되었다.[71][17]

이후 옛 제국의 후계 국가들 대부분에서는 지역 귀족들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유일하게 동프랑크 왕국만이 911년까지 카롤링거 가문의 혈통을 유지했다.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893년에 카롤링거 왕조가 잠시 복귀하여 987년까지 지속되었다.

3. 인구

중세 초기 인구 통계는 자료 부족으로 인해 연구가 어려운 분야이다. 역사가 크리스 위컴은 저서 'Framing the Early Middle Ages'에서 해당 시기 인구에 대한 신뢰할 만한 통계 자료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7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롤루스 제국 내 대부분 도시의 인구는 당시 로마의 추정 인구인 20,000명에서 25,000명 수준을 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2][18]

제국 전체적으로는 서기 750년부터 850년까지 인구가 점진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73][19] 제국의 총인구는 그 규모와 이론적인 인구 밀도를 바탕으로 1,000만 명에서 2,000만 명 사이로 추산되기도 한다.[74][20] 그러나 최근 역사가 티모시 뉴필드는 이러한 인구 증가 추세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전 시대(서기 541년-750년)의 반복적인 전염병과 카롤루스 시대 유럽에서 빈번했던 기근의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75][21]

그린란드 빙하 코어 샘플(GISP2)과 같은 기후 변화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카롤루스 제국 초기에는 비교적 온화한 기후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후 몇 차례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을 수도 있다.[76][22] 이러한 기후 변화가 제국 인구에 미친 정확한 영향은 파악하기 어렵다.

800년경 카롤루스 제국 내 주요 도시의 추정 인구는 다음과 같다.[52][53][54]

도시추정 인구
로마50,000명
파리25,000명
레겐스부르크25,000명
메스25,000명
마인츠20,000명
슈파이어20,000명
투르20,000명
트리어15,000명
쾰른15,000명
리옹12,000명
보름스10,000명
푸아티에10,000명
프로뱅10,000명
10,000명
루앙10,000명


3. 1. 민족성

카롤루스 제국의 민족성에 대한 연구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제국 내에는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바이에른족, 튀링겐족, 프리지아족, 롬바르드족, 고트족, 로마인, 켈트족, 바스크족, 슬라브족과 같은 주요 민족 집단들이 거주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민족성은 여러 신원 확인 방식 중 하나였으며,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힘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했다. 여러 지역 및 민족적 정체성들은 유지되었고 이후 정치적 역할에서 중요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법률 적용에 있어서 민족적 정체성은 어느 법률을 어느 민족에게 적용할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이런 방식들은 다소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민족성에 대한 명확한 표현은 아니었다.[77][23]

3. 2. 성별

카롤루스 시대의 재산 조사나 폴리프티카(다엽집) 같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여성의 기대 수명은 남성보다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78][24] 이러한 기록 분석에서는 남성의 비율이 여성보다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24] 하지만 이것이 실제 성비 불균형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록 과정에서의 편향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78][24]

4. 정부

카롤루스 제국의 정부, 행정, 조직은 800년경 샤를마뉴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개선되었다. 샤를마뉴는 새로운 지위에 걸맞게 기존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 체제를 개편하고자 했으며, 아헨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정치 개혁은 이후 중세 서유럽의 정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들은 카롤링거 왕조가 이전 통치 방식을 개선하여 중앙 통제를 강화하고, 효율적인 관료 제도를 도입했으며, 정부의 책임성을 높이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알려진 문화 부흥을 이끌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카롤루스 제국은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지만, 황제의 영향력과 통제가 실제로 제국 전역에 얼마나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의가 있다. 법적으로 카롤루스 황제는 제국의 모든 영토에 대한 통치권과 명령권인 ''반눔''(bannum)을 행사했다. 또한 황제는 사법 문제에 대한 최고 결정권을 가졌으며, 법률을 제정하고 군대를 지휘하며 교회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의무를 지녔다. 황제 중심의 행정 체계를 구축하려 했으나, 실제 통치의 효과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의 능력과 협조에 크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4. 1. 군사

샤를 마르텔의 집권부터 작센족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랑크 군대는 거의 매년 원정을 떠났으며 종종 적의 영토 깊숙이 들어갔다. 샤를마뉴는 여러 해 동안 부활절 무렵에 군대를 소집하여 보통 여름에 군사 작전을 개시했는데, 이는 야전군을 위한 충분한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는 모든 징집 병사들이 자신의 무기를 소지하고 가져올 것을 법으로 규정했다. 부유한 기병갑옷을 갖춰야 했고, 가난한 병사들은 방패을, 수레를 모는 병사들은 화살을 준비해야 했다. 병사들은 특정 집결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배급된 식량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도록 지시받았으며, 수레에는 3개월 치의 식량과 6개월 치의 장비, 무기, 의복 등을 실어야 했다. 카롤루스 군대는 종심방어 체계보다는 기동성을 우선시했으며, 점령한 요새 시설은 장래에 카롤링거 왕조에 대항하는 데 사용될 수 없도록 파괴하는 경우가 많았다. 800년 이후 경건왕 루이 치세에는 제국 확장 노력이 줄어들었다. 역사가 팀 로이터(Tim Reuter)는 루이 1세 시대의 많은 군사 활동이 대부분 방어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외부 위협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분석했다.

군마를 탄 카롤링거 전사(8~10세기). , 방패, 사슬 갑옷과 스팡겐헬름을 착용했으며, 2014년 6월 아헨 시청 대관식 홀 전시회에서 촬영되었다.


카롤루스 왕조의 군사적 성공이 730년대 샤를 마르텔이 조직한 중기병 전력 덕분이라는 평가가 오랫동안 있어왔다. 그러나 등자가 8세기 말까지 프랑크족에게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말을 탄 병사들이 랜스를 이용한 돌격 전술보다는 칼과 창을 사용하여 싸웠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기병 혁명'이 카롤루스 시대 초기에 군사력의 핵심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오히려 카롤루스 제국의 군사적 성공은 뛰어난 공성 기술과 효율적인 병참 시스템에 크게 의존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카롤루스 군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말은 병사들을 먼 거리까지 빠르게 이동시키는 기마보병 운용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말의 중요성은 《프랑크 왕가의 연감》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791년 샤를마뉴의 원정 중 말들 사이에 역병이 돌아 수만 마리 중 10분의 1만이 살아남았다고 전한다.[79] 이 사건은 말 부족이 판노니아의 아바르족과의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초래했음을 보여준다.

카롤링거 왕조의 시조 격인 샤를 마르텔은 투르 전투(732년)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며 기독교 유럽을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마르텔'(망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4]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사라센 군대는 베르베르 경기병과 아랍 중기병을 결합한 강력한 군대였으나, 샤를 마르텔은 등자가 없던 프랑크 군대를 이끌고 승리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그를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군주"라고 평가했다.

샤를마뉴의 통치는 거의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는 774년 롬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스스로 '롬바르드의 왕'을 칭했으며, 778년에는 스페인 원정에 나섰으나 론세보 계곡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이후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를 굴복시켜 바이에른을 병합(794년)하고, 아들 피핀을 시켜 파노니아 아바르족을 공격하게 하여 결국 803년 아바르 연맹을 멸망시켰다. 그는 또한 772년부터 804년까지 이어진 작센 전쟁을 통해 작센 영토를 정복했는데, 이 과정에서 782년 베르덴 학살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4][5]

프랑크 왕실 근위대는 메로빙거 왕조의 안트루스티온을 계승한 조직으로, 후기 로마 제국의 제도를 의식적으로 모방했다. 이들은 ''스콜라''(scholae)라는 부대로 편성되었고 ''스콜라레스''(scholares)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후기 로마 및 초기 비잔틴 모델을 기반으로 한 갑옷을 사용했다. 이러한 근위대에 대한 프랑크 예술적 묘사 또한 후기 로마 전통을 반영했다.[25]

4. 2. 궁전

독일 아헨의 팔라틴 예배당 내부


당시 서유럽 왕국들의 일반적인 특징처럼 카롤루스 제국 역시 순회 궁전(이동식 궁정) 체제를 운영했기 때문에 영구적인 수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궁전들은 중앙 행정의 거점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궁전들과 구분되었다. 샤를마뉴는 재위 초기에 아헨(Aix-la-Chapelle|엑스라샤펠프랑스어; Aquisgrana|아퀴스그라나it)으로 향했으며, 780년대부터 그곳에 궁전 건설을 시작했다.[26] 최초 계획은 768년경 구상된 것으로 보인다.[26] 796년에 완공된 궁전의 예배당은 훗날 아헨 대성당의 기초가 되었다. 790년대 아헨에서의 건설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샤를마뉴의 궁정은 이전 시기(770년대)보다 더욱 중앙 집중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전에는 전쟁 중 임시 막사 형태의 궁정이 운영되기도 했다.[27] 아헨이 영구적인 수도로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샤를마뉴 왕국의 정치적 심장부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은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후원을 분배하며, 법률을 제정하는 장소였으며, 학식 있는 성직자들이 연구를 위해 모이는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28] 또한 아헨은 제국 전역에서 수집된 정보와 소문이 모이는 정보의 집결지 역할도 했다.[27] 물론 샤를마뉴는 말년까지 아헨을 정부의 중심지로 삼았지만, 그의 궁정은 여전히 자주 이동했으며 프랑크푸르트, 잉겔하임, 네이메헌 등 다른 궁전들도 활용했다. 이러한 궁전 운영 방식은 이후 카롤루스 왕조 통치자들에게 이어진 궁전 중심 정부 체제의 시작을 알렸다. 스튜어트 에어리(Stuart Airlie)는 카롤루스 왕조 영토 전역에 궁정 활동을 위한 장소를 제공하는 150개 이상의 궁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27]

궁전은 단순히 행정적인 중심지를 넘어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샤를마뉴 시대 궁전의 중요성은 정복을 통해 얻은 부를 통해 왕조의 권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상징적인 영속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27] 아인하르트는 이러한 '공공 시설물' 건설이 샤를마뉴의 위대함과 고대 로마 황제들과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으며, 궁전 장식의 도상학 역시 이러한 연관성을 분명히 활용했다. 잉겔하임 궁전은 이러한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 예시다. 궁전 예배당은 '성경의 장면들로 장식'되었고, 궁전 홀에는 '고대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샤를 마르텔, 피핀 3세 등 카롤루스 왕조 통치자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그림 연대기'가 그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27]

경건왕 루이 역시 아키텐의 왕으로 있을 때 샤를마뉴와 유사하게 궁전 시스템을 활용하여, 아키텐 지역 내 4개의 겨울 궁전을 순회하며 사용했다. 황제가 된 후에는 아헨, 잉겔하임,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등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으며, 이곳들에서는 거의 매년 두세 차례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의 통치는 샤를마뉴보다 더 정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여전히 궁전 시스템은 유지되었다. 이처럼 궁전 시스템은 통치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도구로도 기능했다.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도 후대의 카롤루스 왕조 통치자들도 궁전 시스템을 계속 사용했다. 대머리 카를은 콩피에뉴를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했으며[22], 877년 콩피에뉴 궁전 예배당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했는데, 이는 아헨 대성당의 성모 예배당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독일인 루트비히에게는 프랑크푸르트가 '새로운 아헨'으로 여겨졌고, 알자스 셀레스타에 있는 비만왕 샤를의 궁전은 아헨 궁전을 모방하여 설계되었다.

카롤루스 제국의 중앙 행정 및 통치 방식으로서 궁전 시스템의 중요성에 대해 역사가 F. L. 간쇼프(F. L. Ganshof)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카롤루스 제국의 궁전들이 동시대 비잔티움 황제나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이 가졌던 전문화된 행정 부서나 관료 조직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했다.[29] 그러나 매튜 인네스(Matthew Innes), 로자먼드 맥키터릭(Rosamond McKitterick), 스튜어트 에어리 등 다른 카롤루스 왕조 연구자들은 궁전의 활용이 카롤루스 왕조 통치 방식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재닛 넬슨(Janet Nelson)은 "궁전은 권력이 발산되고 행사되는 장소"라고 주장했으며, 카롤루스 왕조의 행정, 학문, 정통성 확립에 있어 궁전이 지닌 중요성은 학계에서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26]

4. 3. 왕실

왕실은 서기 802년경까지 특정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왕국 곳곳을 이동하며 지방 통치를 관리하는 유동적인 조직이었다. 왕실의 가장 중요한 직책으로는 왕국 내 모든 교회 문제를 담당하는 사제와 왕실 전체를 총괄하는 궁정백 (팔라틴 백작)이 있었다. 그 외에도 시종, 청지기, 마굿간지기 (원수)와 같은 관리들이 있었다. 왕실 관리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786년에는 청지기 안도르프가 브르타뉴인들에 대한 원정을 이끌었다.

사제 및 왕실 예배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재상(Chancellor)은 비정기적인 필사 사무소인 서기단의 수장이었다. 이곳에서 작성된 헌장들은 주로 토지 계약에 관한 기본적인 문서였다. 현재까지 샤를마뉴 시대의 헌장 262개, 단신왕 피핀 시대의 헌장 40개, 경건왕 루이 시대의 헌장 350개가 남아 있다.

4. 4. 관료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를 지방에서 집행하는 주요 관직은 세 가지가 있었다.

  • '''백작'''(comesla): 샤를마뉴가 백국을 관리하기 위해 임명한 관료이다. 카롤링거 제국(바이에른 제외)은 110개에서 600개 사이의 백국으로 나뉘었으며, 각 백국은 백작의 대리인이 관리하는 '켄테나이'(centenaela)라는 하위 단위로 다시 나뉘었다. 처음에는 샤를마뉴가 파견한 왕실 요원들이 백작을 맡았으나, 기원 802년경부터는 해당 지역의 유력자들이 임명되기 시작했다. 백작은 사법권 행사, 칙령 집행, 병사 징집, 통행세 및 부과금 징수, 도로 및 교량 유지 관리 등 광범위한 책임을 졌다. 이론적으로는 국왕이 백작을 해임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많은 관직이 세습되었다. 때때로 부패한 백작도 있었으나, 프리울리의 에리크 백작처럼 모범적인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백작을 감독하는 지방 총독이 등장하기도 했다.

  • '''미수스 도미니쿠스'''(Missi Dominicila): 본래 임시직이었으나, 802년 개혁을 통해 상설 관직이 되었다. 왕의 사절은 보통 2인 1조로 파견되었는데, 한 명은 성직자였고 다른 한 명은 세속인이었다. 이들은 고위 관리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뇌물을 받는 등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왕의 사절은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 사절구역(missaticum)을 1년에 네 번, 한 번에 한 달씩 순회하며 왕의 뜻과 칙령을 전달하고, 재판을 열어 사건을 판결하며, 때로는 군대를 소집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왕의 봉신'''(Vassi Dominicila): 국왕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한 봉신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주로 유력자들의 아들들로 구성되었으며, 봉토를 보유하고 왕실 군대에 병력을 제공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왕의 봉신들은 정규적인 임무 외에도 왕의 명령에 따라 임시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4. 5. 법률 체계

780년경, 샤를마뉴는 지역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법률 전문가인 scabini|스카비니lat 제도를 만들었다. 각 백작은 7명의 스카비니의 도움을 받아 모든 국가 법률을 파악하고, 모든 사람이 그 법에 따라 재판받도록 해야 했다. 스카비니는 해당 지역의 법률에 정통한 전문가들이었다.

또한,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선서에 기반한 심문 방식을 사용해야만 했다.

802년에는 제국의 모든 법률이 성문화되고 수정되었다. 대표적으로 살리카법은 798년과 802년에 개정되었는데, 샤를마뉴의 전기 작가인 아인하르트는 이것이 여전히 불완전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재판관들은 살리카법 법전과 리푸아리아법 법전의 사본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했다.

카롤링거 제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법을 상당 부분 반영하여 만들어진 법전에 따라 생활했다.[30]

4. 6. 주화

황제 루도비코 2세와 황후 엥겔베르가의 이름으로 베네벤토의 아델키스 공이 주조한 ''데나리우스''. 루도비코가 이룩한 카롤링거 왕조의 남부 이탈리아 세력 확장을 보여준다.


주화는 로마 제국과 강한 연관성을 지녔으며, 샤를마뉴는 다른 제국의 의무와 함께 주화 규제를 시작했다. 카롤링거 왕조는 왕국의 은화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여 그 성분과 가치를 통제했다. 주화에는 주조자의 이름이 아닌 황제의 이름이 나타났다. 샤를마뉴는 발트 해의 북부 독일 지역의 조폐국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4. 7. 구획

프랑크 왕국은 샤를마뉴에 의해 행정 편의를 위해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왕국의 핵심 지역(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은 미사티카(missatica) 체제와 순회 가신단을 통해 샤를마뉴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았다. 핵심 지역 바깥에는 프랑크 행정이 백작들에게 의존하는 '레그나'(regnala)가 있었고, 그보다 더 바깥에는 강력한 총독이 통치하는 변경 지역이 있었다. 이러한 변경 지역은 브르타뉴, 스페인 변경주, 바이에른 등에 존재했다.

샤를마뉴는 또한 아키텐과 이탈리아에 두 개의 부왕국을 만들어 각각 아들인 루트비히와 피핀에게 맡겼다. 바이에른은 796년 게롤트가 사망할 때까지 자치적인 총독의 지배하에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 지역들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을 유지했지만, 부왕국과 바이에른 등은 자체적인 재상청과 주화 주조 시설을 갖추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4. 8. 플라티쿰 제네랄리스

플라티쿰 제네랄리스(Placitum Generalisla) 또는 마르츠펠트(Marzfeld)라고도 불리는 연례 회의는 매년 3월과 5월 사이에 이 지정한 장소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세 가지 주요 목적으로 소집되었다. 첫째는 군사 원정을 위해 프랑크 군대를 모으는 것이었고, 둘째는 왕국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교회적 문제를 논의하고 관련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중요한 인물들은 이 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으며, 이는 카롤루스 대제가 자신의 의지를 널리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처음에는 회의가 효율적으로 운영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귀족들이 토론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장소로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

4. 9. 맹세

충성 맹세는 카롤루스 대제가 모든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었다. 그는 이르면 779년부터 신하들이 서로 맹세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였다. 789년에는 (786년의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모든 사람이 왕으로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기 시작했으며, 802년에는 맹세의 대상을 크게 확대하여 12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였다.

4. 10. 법령집

법령집은 8세기와 9세기 동안 카롤링거 왕조 왕들이 자문회들과의 협의 중에 내린 결정들에 대한 기록물이다.[84] 법령집의 명칭인 capitularelat는 '장'(章)을 의미하는 라틴어 'Capitula'에서 유래했고, 장(章)의 형식으로 쓰인 기록들을 나타낸다. 이 기록물들은 쇠렌 카쉬케(Sören Kaschke)가 언급했듯이 8세기와 9세기 프랑크 제국 통치 방식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로 여겨진다.[85] 법령집의 사용은 카롤링거 시대 왕들과 속주들 간의 소통 방식 변화를 보여준다. 법령집의 내용들은 왕실 예법, 특정 관료들에 대한 지시 사항, 세속 및 교회 문제 등에 대한 자문회의 전달 사항, 법령에 대한 추가 및 개정 등을 포함하여 방대한 주제를 다루었다.

주요 증거들은 법령집이 필사되어 샤를마뉴 제국 전역에 배포되었음을 보여주지만, 그 효과성이나 실제 시행 여부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지 않다. 샤를마뉴가 점차 정주 생활을 하게 되면서 법령집 발행은 크게 늘었는데, 이는 789년의 대권고문 이후 특히 두드러졌다.

법령집의 실제 목적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일부는 법령집이 단순히 '왕가의 희망 사항 목록'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한다.[84] 법령집은 보통 세속 순찰사와 교회 순찰사로 짝을 이룬 왕의 대리인, 즉 미시 도미니치(순찰사)를 통해 시행되었다. 이들은 카롤링거 왕국을 순회하며 민중들이 모인 집회에서 최신 법령집 사본을 발표하고 복잡한 지역 문제를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순찰사들은 법령집과 샤를마뉴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샤를마뉴 치세의 주요 법령집은 다음과 같다.

연도법령집 명칭주요 내용
779년허스탈 법령집교회 및 세속 문제: 십일조 납부 중요성, 주교 역할 강조, 제국 내 사적인 군대 조직 금지 등.
789년대권고문샤를마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법령집 중 하나. 80개 이상의 장으로 구성, 종교 관련 법규 다수 포함.
794년프랑크푸르트 법령집양자설성상 파괴 운동 반대.
802년계획 법령집사회에 대한 통합적 시각 제시.
814년유대인 관련 법령집유대인의 상업 및 대부업 종사 제한.


5. 종교와 교회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 내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자신의 제국 확장과 기독교 전파를 목표로 삼았다. 789년에 발표된 대권고문(Admonitio Generalis)은 샤를마뉴가 신민들의 구원에 책임을 지며, 이전까지 대부분 문맹이었던 성직자들을 위한 교육 기준을 마련해야 함을 명시했다.[86]

당시 지식인들은 종말론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유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의 계산에 따라 서기 800년을 세계 기원(Anno Mundi) 6000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앨퀸과 같은 학자들은 800년 성탄절에 이루어진 샤를마뉴의 황제 즉위가 세계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시대, 즉 종말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87]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샤를마뉴가 모든 백성에게 참회와 속죄 행위를 강조했던 배경을 설명해 준다.

샤를마뉴의 아들 경건왕 루이 역시 종교 문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즉위 초기에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그의 경건함으로 부유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교회를 복원하는 데 힘썼다.[8] 아키텐의 왕으로 있던 시절부터 종교 관련 학문과 활동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9] 재위 기간 동안 방치되었던 많은 수도원을 복원하고 새로운 수도원을 후원하기도 했다.[7]

하지만 822년, 조카인 베른하르트의 죽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참회한 사건은 황제로서 그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귀족들은 이를 두고 황제가 '성직자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13] 또한 그의 치세 후반기 내전 중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4세가 중재를 명분으로 로마에서 왔지만, 실제로는 로타르 측의 요청에 따라 루이를 폐위시키고 로타르와 형제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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