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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파이어아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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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울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1924-1994)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과학 철학자로, 과학적 방법론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인식론적 아나키즘'을 주장하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칼 포퍼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UC 버클리 등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과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했다. 대표 저서로는 《반방법론》, 《자유 사회에서의 과학》, 《이성이여 안녕》 등이 있으며, 과학주의와 과학의 특권적 지위에 반대하며 민주적 상대주의 사회를 옹호했다. 그의 주장은 급진적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과학철학, 사회 구성주의, 과학 기술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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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파이어아벤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파울 파이어아벤트 버클리
파이어아벤트, 버클리 대학교
이름파울 카를 파이어아벤트
원어 이름Paul Karl Feyerabend
로마자 표기Paul Karl Feyerabend
출생과 사망
출생일1924년 1월 13일
출생지오스트리아
사망일1994년 2월 11일
사망지스위스 보주 제놀리에
학력 및 경력
출신 대학빈 대학교 (PhD, 1951)
박사 지도교수빅토어 크라프트
학위 논문 제목기초 진술 이론 (Zur Theorie der Basissätze)
재직 기관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재직 기관ETH 취리히
지도 학생낸시 머피
지도 교수카를 포퍼
지도 교수아서 팝
사상
학파분석철학
주요 관심사과학철학
인식론
정치철학
고대 철학
심리철학
주요 사상인식론적 아나키즘
반증주의 비판
공약 불가능성
제거적 유물론
영향
프랑크
비트겐슈타인
포퍼
키르케고르
에렌하프트
아인슈타인
폰 바이츠제커
스넬
론키
아리스토텔레스
보어

카르납
노이라트
영향을 준 인물라카토슈
처칠랜드
매클로스키
머피
굴드
해킹
푸코
로티
네이더
매케나
쿨리아누
듀프레
로이드
카트라이트

해러웨이
파인
하딩
롱기노
반 프라센
라투르
너세시안
기타
소행성(22356) 파이어아벤트 = 1992 WS6

2. 생애

폴 파이어아벤트는 1924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에서 초등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1943년 그는 독일군에 입대하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군 복무 기간 중 그는 동부 전선에서 척추에 유탄을 맞았고, 남은 생애 동안 다리를 절어야 했다.

1947년에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학, 역사, 사회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을 공부하였으며 1951년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서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로 가서 칼 포퍼 아래에서 연구하였다. 처음에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과학관을 존경하였지만 뒤에 포퍼의 과학관을 철저히 비판하게 된다. 1955년 이후 1990년까지 UC 버클리, 오클랜드 대학교, 서섹스 대학교, 예일 대학교, 런던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ETH 취리히 등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마지막엔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의 두 군데에서 동시에 교수직을 가지고 있었다. 은퇴 이후 1990년에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에서 명예교수직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과학철학을 스스로 아나키즘적, 다다이즘적이라고 평가했다. 파이어아벤트는 런던 정치경제대학의 러커토시 임레와 함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을 주제로 책을 쓰려 했다. 이 계획은 1974년 러커토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파이어아벤트는 자신이 맡은 부분을 《반방법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1989년 UC 버클리를 떠난 파이어아벤트는 1991년 학계에서 은퇴한 후 1994년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만년의 파이어아벤트. 그라치아 보리니-파이어아벤트 촬영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에서 세미나 후 파이어아벤트, 쿤, 호이닝겐-후네 및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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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초기 생애 (1924-1945)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1924년 오스트리아 에서 태어났다.[17][18] 그의 부계 조부는 가정부 헬레나 파이어아벤트의 사생아였으며, 헬레나는 'Feyerabend'에 'y'를 추가했다. 그의 아버지는 케른텐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스트리아에서 상선 장교로 복무했으며, 빈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뇌졸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가족은 슈토케라우 출신으로 재봉사였으며 1943년 7월 29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파이어아벤트는 빈에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는 레알김나지움을 다녔으며, 특히 물리학과 수학에서 Vorzugsschülerde(수석 학생)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3세 때 그는 아버지와 함께 직접 망원경을 만들어 스위스 태양 연구소의 관측자가 되었다. 그는 그의 교사 오스왈드 토마스에게 영감을 받았고, 교사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으로 평판을 얻었다. 이 시기에 독서, 연극, 성악 등에 관심을 가졌다. 탐정 소설, 모험 소설, 연극을 즐겨 읽는 그는 우연히 철학에 입문했다. 플라톤, 데카르트, 뷔히너의 저서는 논쟁의 극적인 힘에 대한 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나중에 마흐, 에딩턴, 딩글러의 저서를 통해 과학 철학을 접하게 되었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고독한 인간"에 대한 묘사에 매료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파이어아벤트는 평생 동안 노래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레오 레너 아래 합창단에서 노래했고, 나중에 오페라를 접하게 되었으며 게오르그 엠글과 한스 호터의 공연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아돌프 포겔 등에게 정식으로 훈련을 받았다.

파이어아벤트의 부모는 둘 다 안슐루스를 환영했다. 그의 어머니는 히틀러의 목소리와 태도에 매료되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감명받아 나중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파이어아벤트 자신은 안슐루스나 제2차 세계 대전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그는 이를 독서와 천문학을 방해하는 불편한 일로 여겼다. 파이어아벤트는 의무적인 정책의 일환으로 히틀러 유겐트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때로는 반항하며 영국을 칭찬하거나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임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때로는 순응하며 모임에 결석한 회원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1942년 4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파이어아벤트는 독일 노동 봉사대에 징집되어 Pirmasens에서 기초 훈련을 받고 브레스트 근처의 Quelerne en Bas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이 했던 일을 단조롭다고 묘사했다. "우리는 시골을 돌아다니며, 참호를 파고 다시 메웠다." 짧은 휴가를 받은 후 그는 장교 학교에 자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장교 교육을 마칠 즈음에는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희망했다고 썼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943년 12월부터 그는 동부 전선 북부에서 장교로 복무했으며,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중위 계급을 받았다. 독일군이 진격하는 붉은 군대로부터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파이어아벤트는 교통 정리를 하다가 세 발의 총알을 맞았다. 그 중 하나는 그의 척추에 명중하여 그는 1년 동안 휠체어를 타야 했고, 평생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는 나중에 목발을 짚고 걷는 법을 배웠지만, 발기 부전에 시달렸고, 평생 동안 간헐적인 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2. 2. 전후 학문 활동 (1945-1955)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종전 후 바이마르 인근 병원에서 회복 기간을 보내며, 아폴다에서 교육 분야 임시직을 맡아 대중을 위한 오락 활동에 참여했다. 바이마르 음악 아카데미에서 여러 수업을 들었으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초대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1947년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학, 역사, 사회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다. 역사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곧 불만을 느껴 물리학으로 전과했고, 특히 관측 천문학과 섭동 이론, 미분 방정식, 핵물리학, 대수학, 텐서 해석을 공부했다. 한스 티링, 한스 레오 프르지브람, 펠릭스 에렌하프트의 수업을 들었으며, 에렌하프트의 실험은 이후 파이어아벤트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주었다.

1948년 알프바흐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칼리지 협회 주최 국제 하계 학교에 참가하여 칼 포퍼를 처음 만났고, 포퍼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 이후 연구 분야를 철학으로 바꾸고, 1951년 관찰 명제에 관한 논문(Zur Theorie der Basissätzede)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9] 자서전에서 당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고집스러운 경험주의자"라고 표현했다.

1951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아래에서 연구하기 위해 브리티시 카운슬의 장학금을 받았으나, 비트겐슈타인의 사망으로 1952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칼 포퍼를 지도 교수로 선택했다. 파이어아벤트는 포퍼의 생각에 "정신이 팔렸다"고 설명할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

이후 비엔나로 돌아와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 독일어 번역 작업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 3. 교수 활동과 사상의 발전 (1955-1994)

1955년,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과학 철학 강의를 시작으로 교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UC 버클리, 오클랜드 대학교, 서섹스 대학교, 예일 대학교, 런던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ETH 취리히 등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과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발전시켰는데, 스스로 자신의 과학철학을 아나키즘적, 다다이즘적이라고 평가했다.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적 실천 과정에서 직면하는 상세하고 특이한 문제에 비해 이론이 아무리 잘 구상되었더라도 한계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21] 그는 임레 라카토스와 함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을 주제로 책을 쓸 계획이었으나, 1974년 라카토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파이어아벤트는 자신이 맡은 부분을 《반방법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1958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로 옮긴 파이어아벤트는 루돌프 카르납을 만나 친구가 되었으며, 학생 혁명 동안에는 혁명가들에 대한 강의도 진행했다. 존 설은 파이어아벤트가 교외에서 강연을 주최하는 것을 이유로 그를 해고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와 버클리를 오가며 강의를 진행했다. 1989년 버클리를 떠난 후, 1991년 학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이탈리아에서 강의를 계속하고, 논문과 서평을 발표하며 자서전 집필에 힘썼다. 1994년 스위스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3. 사상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20세기 중반의 여러 철학자들(윌프리드 셀라스, 윌러드 밴 오먼 콰인, 리처드 로티)과 더불어, 마음의 철학에서 급진적인 입장인 제거적 유물론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제거적 유물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 과정뿐이며, 우리의 평범하고 상식적인 마음 이해("민속 심리학")는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옹호자인 폴 처칠랜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56]

> "제거적 유물론은 심리학적 현상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개념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론, 즉 원리와 존재론 모두가 완성된 신경과학에 의해 부드럽게 축소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대체될 정도로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이론이라는 테제이다."

파이어아벤트는 1960년대 초에 출판된 세 편의 짧은 논문에서 제거적 유물론에 대해 글을 썼다.[35][57] 이 논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그가 제거적 유물론의 초기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패트리샤 처칠랜드와 폴 처칠랜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키리가 관찰했듯이,[58] "[폴 처칠랜드]는 자신의 경력의 많은 부분을 파이어아벤트의 역할을 수행하며 보냈다." 보다 최근의 학문적 연구는 파이어아벤트가 제거적 유물론자가 아니었고 단지 제거적 유물론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이 방법론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이 해석에 따르면 파이어아벤트는 친숙함과 마음의 직관적 이해로부터의 주장에 대해 제거적 유물론을 옹호했지만, 제거적 유물론이 사실이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파이어아벤트는 심신 이원론이 사실일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이것은 철학적 규정이 아닌 과학적 논증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59] 어쨌든, 파이어아벤트는 그의 후기 철학 저작에서 유물론을 명시적으로 부인한다.

파이어아벤트는 인간의 뇌에 부과되는 타고난 인지적 제한이 없다는 가설에 대해 잠시나마 관심을 보이며 공감했다. 그는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제한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파이어아벤트의 저작물 곳곳에는 당시의 뇌과학 연구를 통해 이러한 가설이 뒷받침된다는 증거가 제시되어 있다. 특히 그는 "지금까지 뇌의 내장 회로 중 2~3%만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뇌는 광범위하게 가소성을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적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고전 그리스에서 헬레니즘 그리스로의 인식 변화에 대한 어원학적 연구에 대한 니체의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또한 그는 E.O. 윌슨의 유전자가 "인간의 독창성"을 제한한다는 주장을 비판하며,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종류에 제한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만 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이어아벤트의 이러한 언급은 모호하고 암시적인 수준이지만, 최근 연구에서 이를 수용하고 뒷받침하는 결과가 나타났다.[60]

파이어아벤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매우 칭찬했는데, 이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생산성 때문이었다.[72]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주의 철학의 초기 전형이었으며, 그의 과학 연구는 인식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73] 그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사상 가장 경험주의적인 과학자 중 한 명이며, 그의 물리학 및 수학 연구는 과학 혁명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주장한다.[74][75]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그의 저서 ''이성에 작별을 고하며''에서, 파이어아벤트가 "거만하고 입이 거칠지만 상당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한 크세노파네스가 인신 동형론적인 신들에 대한 반박을 통해 최초로 합리적인 비판을 했다는 칼 포퍼의 주장을 비판한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크세노파네스의 신학적 저술은 그의 주장이 그의 반대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경우에만 비판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크세노파네스는 단순히 호메로스의 신들을 거부하는 것에 불과하다. 파이어아벤트는 ''일리아스'' 등에서 호메로스가 우주가 통일된 전체로 합쳐지지 않는 서로 다른 법칙과 질적 특징을 가진 부분들로 세분화되어 있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다고 해석한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신학에 영향을 미쳤는데, 우주 전체에 대한 일관된 지식은 존재할 수 없고, 우주의 고립된 부분들에 대한 상세한 이해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파이어아벤트는 또한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와 같이 크세노파네스 이후의 일부 사상가들 역시 신들이 인신 동형적일 수 없다는 크세노파네스의 주장을 거부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크세노파네스는 마치 단일한 세계관으로 포착될 수 있는 단일한 우주가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진리'와 '도덕'을 강요하는 폭압적인 이데올로기의 시작을 나타낸다.

파이어아벤트는 또한 인간적인 특징이 없는 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크세노파네스의 주장을 비판하며, 크세노파네스의 신은 여전히 생각하거나 듣는 것과 같은 인간적인 활동을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는 크세노파네스의 신은 인간의 일에서 점점 더 멀어지면서 괴물과 비슷해지며, 따라서 호메로스의 신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3. 1. 과학철학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자들이 실제로 따르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2] 그는 정해진 방법론이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고 과학적 진보를 억압한다고 생각했다. 토머스 쿤패러다임 이론을 일부 수용하면서, 과학 이론의 변화는 이성적 요소뿐만 아니라 미적 요소에 의해서도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 혁명갈릴레오 등 과학사의 사례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했다.

파이어아벤트는 귀납을 강조하는 논리실증주의칼 포퍼반증주의 양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관찰이나 반증주의적 논박 모두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았다. 라카토쉬 임레의 연구 프로그램 이론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자신의 아나키즘적 과학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파이어아벤트는 1948년 슈뢰딩거의 논문 "과학적 세계관의 특이성에 대하여"에 대한 짧은 논문을 작성했다. 여기서 파이어아벤트는 슈뢰딩거가 과학 이론이 ''Anschaulich'' (즉, 직관적으로 시각화 가능) 해야 한다는 요구는 너무 제한적이라고 주장했다.[23] 원자 모형의 발달 사례를 사용하여, 그는 원래 시각화할 수 없는 이론이 현상을 시각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한다고 주장한다.[23]

파이어아벤트는 또한 1957년에 자신의 측정 문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곧 이 해결책을 포기하게 되었다.[26] 그는 폰 노이만의 측정 방식을 붕괴 가정 없이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그의 해결책은 이후 데코히어런스 이론의 발전을 예견한다.[26]

파이어아벤트는 경험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과학적 진보의 방법론적 규칙으로서 이론적 다원주의를 제시한다.[29] 이 관점에 따르면 새로운 이론을 확산시키면 관찰로 잘 정립된 이전 이론의 시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는 어떤 시험은 대안 이론의 발명 없이는 발굴할 수 없기 때문이다.[29]

파이어아벤트의 다원주의는 그가 "끈기의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합한다.[31] 끈기의 원칙은 과학자들이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문제점과 상관없이 이론을 추구하도록 허용한다. 파이어아벤트는 이 아이디어를 쿤으로부터 배웠는데, 쿤은 끈기가 없었다면 모든 이론이 조기에 포기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2] 이 원칙은 "증식의 원칙"을 보완하는데, 이는 가능한 한 많은 이론을 발명하도록 권고하여 발명된 이론이 그럴듯한 경쟁자가 될 수 있도록 한다.[33]

"어떻게 해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그의 주장은 기존 과학철학자들로부터 급진적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파이어아벤트의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원천이 되어 왔다. 어떤 이들은 인식론적 무정부주의가 과학적 방법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이 아니라 '합리주의' (과학적 추론에 대한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합리적 규칙이 있다는 견해)에 대한 귀류법의 결론이라고 주장한다.[44]

파이어아벤트는 우리 주변의 우주가 동시에 많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풍요롭다'는 형이상학적 이론을 명확히 설명한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세상, 또는 그가 말하는 '존재'는 우리가 세상과 인과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다.[51]

3. 2. 민주적 상대주의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과학 지식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이라는 과학주의에 반대하며, 과학주의가 권력과 결탁하여 사회 전반을 규제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했다.[61] 그는 과학이 종교나 신화와 같은 다른 지적 전통에 비해 지적인 권위를 가질 만한 본질적인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다.[62]

파이어아벤트는 다양성이 존중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보장되는 '민주적 상대주의' 사회를 옹호했다.[61] 그는 '자유를 증대하고 풍요로운 삶과 보람된 삶을 살려고 하는 노력’을 옹호하고 ‘전인적으로 발전된 인간을 길러내고 또 길러낼 수 있는 개성의 함양’을 지지하며, 모든 지식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았다.[61]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현대 세속 사회에서 종교와 국가가 분리된 방식과 마찬가지로 과학이 국가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63] 그는 "모든 전통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권력의 중심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를 구상했다.[62]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과학은 민주주의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대상은 대중 투표로 결정될 뿐만 아니라, 과학적 가정과 결론 역시 일반인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의해 감독되어야 한다.[64] 그는 시민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자신의 원칙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학이 특별히 "합리적"이라는 견해를 거부했는데, 이는 모든 과학을 통합하고 다른 사고 방식을 배제하는 단일 공통의 "합리적인" 요소가 없다는 근거에서였다.[65]

파이어아벤트는 과학 기금 기관이 민주적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70] 연구 자금 할당은 동료 심사에서처럼 과학자들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서는 안 되며, 연구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납세자들의 감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이어아벤트는 의회의 거부권을 국립 과학 재단의 예산 제안에 부여하는 것을 제안하는 바우만 수정안을 옹호했다.[71]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적 전문성이 불필요한 전문 용어와 기술적 언어의 사용으로 부분적으로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으며,[66] 많은 과학적 기여가 일반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67] 파이어아벤트는 "괴짜"와 "존경받는 연구자"를 구분했는데, 이는 자격보다는 탐구자의 덕목에 따라 정의된다.[68]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괴짜'는 자신의 관점을 미개발된 형이상학적 형태로 옹호하는 것에 만족하는 반면, '존경받는 사상가'는 자신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론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진다.[68] 지구 평면설, 기후 변화 부정, 또는 점성술을 믿는 사람도 그러한 신념을 비판으로부터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괴짜가 아닐 수 있다.[69]

3. 3. 사회와 과학

파이어아벤트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지위가 중세 기독교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교조라고 비판했다. 그는 과학지식만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며, 이러한 지식의 확보는 과학의 방법에 의해 가능하다는 과학주의에 반대한다. 즉, 과학주의가 권력과 손을 잡고 행정과 교육과 정치 등 인간 생활 전반을 규제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사회는 다양성이 허용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존중받는 ‘민주적 상대주의’이다. 그는 ‘자유를 증대하고 풍요로운 삶과 보람된 삶을 살려고 하는 노력’을 옹호하고 ‘전인적으로 발전된 인간을 길러내고 또 길러낼 수 있는 개성의 함양’을 지지한다. 그리고 조상들이 유일하게 참되다고 생각 한 종교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듯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된 과학의 속박에서 이 사회를 해방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이어아벤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는 '모든 지식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사회'이다. 그의 사상은 과학의 발전을 인문사회적 결과로 해석하는 스트롱 프로그램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4. 주요 저작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 반방법론(Against Method : Outline of an Anarchistic Theory of Knowledge)》(1975):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책이다. 파이어아벤트는 이 책에서 과학적 방법의 유일성이나 보편성을 부정하고, 모든 지식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인식론적 아나키즘'을 주장한다. 1970년 초판은 미네소타 과학철학 센터에서 PDF 형태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1993년에 출판된 세 번째 판이 가장 널리 사용된다.
  • 《자유 사회에서의 과학》(Science in a Free Society)(1978): 《반방법론》의 후속편으로,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다룬다.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려서는 안 되며, 다른 전통과 동등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성이여 안녕》(Farewell to Reason)(1987):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파이어아벤트는 이 책에서 이성 중심, 과학 중심의 서구 세계관을 비판하고, 과학이 신화, 미신, 점성술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과학이 역사적 성격을 지닌 지식이므로, 유일한 과학적 방법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 외에도 파이어아벤트는 《지식에 관한 세 개의 대화》, 《킬링 타임》, 《풍요의 정복》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전체 저서 목록은 [http://www.collodel.org/feyerabend/# The Works of P. K. Feyerabend]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비판

그의 주장은 포퍼 등 기존의 과학철학자들로부터 급진적인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만약 과학에 어떤 보편적인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것이라는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은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역사적 사례 분석이 선택적이고 편향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6. 영향

6. 1. 과학철학

파이어아벤트의 저서 『방법에 반대한다』는 학계의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지만,[76] 오늘날 그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보편적인 방법에 대한 그의 주장은 널리 수용되었으며, 21세기 많은 과학 철학자들이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77] 그의 다원주의 옹호는 이 주제를 주류로 이끌었고,[78] 역사적 사례 연구의 활용은 역사 및 과학 철학(HPS)을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10] 그는 환원주의에 반대했으며, 이는 존 뒤프레, 클리프 후커, 앨런 찰머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10] 그는 또한 사회 구성주의와 과학 기술학의 지적 선구자 중 한 명이었지만, 생전에 이 두 분야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10]

6. 2. 사회적 영향

파울 파이어아벤트의 과학 비판은 과학기술 시대에 과학의 역할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79][80][81][82][83] 특히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그의 분석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연설에서 긍정적으로 인용되기도 했다.[80][81][82][83] 그의 민주적 상대주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지식의 다양성과 가치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 파이어아벤트는 자서전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가 자신의 저서 《방법에 반하여》의 다원주의에 대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단속평형설 연구를 시작했다고 회고했다.[84] 그의 인식론은 이소룡의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85]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비평적 접근에도 영향을 미쳤다.[86] 그의 연구는 여러 물리학자와 사회 과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84] 2024년에는 파이어아벤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계획되었다.[87]

7.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7. 1. 학술적 영향

7. 2. 사회적 영향

8. 평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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