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루이지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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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17세기 후반부터 1803년까지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 건설한 식민지이다. 오늘날 미국 중서부 대부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으며, 미시시피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리적 경계가 형성되었다. 로어 루이지애나는 플랜테이션 경제와 노예 노동에 기반했으며, 어퍼 루이지애나는 모피 무역과 곡물 농업이 주요 경제 활동이었다.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에 양도되었다가 1800년에 프랑스로 반환되었고,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미국에 매각되었다.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프랑스어, 크리올 문화, 케이준 문화 등 다양한 유산을 남겼으며, 지명, 축제, 건축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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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루이지애나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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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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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모빌 (1702년–1720년) 빌록시 (1720년–1722년) 라 누벨 오를레앙 (1722년 이후) |
역사 | |
존속 기간 | 1682년–1762년, 1801년–1803년 |
설립 | 1682년 |
주요 사건 | 1762년, 서쪽을 스페인에 할양 1763년, 동쪽을 영국에 할양 1801년 3월 21일, 스페인에 의해 양도 1803년 4월 30일, 루이지애나 매입 |
소멸 | 사건: 미국으로의 이양 날짜: 1803년 12월 20일 |
정치 | |
국가 | 누벨프랑스 |
하위 구역 | 지구 |
정치 체제 | 어퍼 루이지애나 로어 루이지애나 |
인구 통계 | |
1700년대 | 1,000,000명 이상의 원주민 (미시시피 강 동쪽과 서쪽) |
1702년 | 1,500명의 유럽인 (미시시피 강 동쪽과 서쪽) |
1763년 | 20,000명의 유럽인과 아프리카인 (미시시피 강 동쪽과 서쪽) |
1803년 | 500,000명 이상의 원주민 (미시시피 강 서쪽) |
1803년 | 70,000명의 유럽인과 아프리카인 (미시시피 강 서쪽) |
기타 | |
일반 명칭 | 뉴프랑스 |
고유 명칭 | }} |
통용되는 긴 명칭 | 루이지애나 식민지 |
현재 국가 | 캐나다 미국 |
관련 항목 | 미국 원주민 스페인령 루이지애나 |
깃발 종류 | 깃발}} |
2. 지리
18세기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현재 미국 중서부에서 멕시코만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미시시피강 유역 대부분을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이 넓은 영토 내에서 프랑스인들이 주로 정착하여 생활한 곳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하나는 현재의 미주리주, 일리노이주, 인디애나주 일부에 해당하는 상부 루이지애나( Haute-Louisiane프랑스어, 또는 일리노이 컨트리 Pays des Illinois프랑스어)였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루이지애나주, 아칸소주, 미시시피주, 앨라배마주 일부를 포함하는 하부 루이지애나였다.
그러나 두 지역 모두 실제로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720년대 중반, 루이지애나의 원주민 인구는 35,000명이 넘었던 반면, 미시시피강 양쪽에 배치된 프랑스 군인은 때때로 2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9] 이는 프랑스의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가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2. 1. 경계 및 지형

18세기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오늘날의 미국 중서부 대부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명확한 국경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경계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프랑스인들이 실제로 거주하며 방어선을 구축했던 곳은 주로 미시시피강 유역 주변이었다.
대략적인 경계는 다음과 같다.
- 북쪽: 오대호, 특히 미시간호와 이리호까지 이르렀다.
- 동쪽: 애팔래치아산맥을 경계로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와 접했다.
- 서쪽: 대평원과 로키산맥까지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그 너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영역이었다.
- 남쪽: 멕시코만에 접해 식민지의 항구를 제공했다.

식민지 영토의 대부분은 평탄하여 유럽인들이 이동하기에 편리했다. 평균 해발 고도는 1000m 미만이었다. 서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높아져 산지를 이루며, 중남부의 오자크 고원은 예외적으로 높은 지대이다.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저지대는 미시시피강 삼각주에서 볼 수 있듯이 호수와 많은 습지가 특징이다. 미시시피강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지류들은 느리게 흐르며 총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복잡한 수로망을 형성하여 배가 다닐 수 있었다. 저지대는 전반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보이지만, 늦여름부터 초가을 사이에는 멕시코만 연안에서 발생하는 허리케인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겨울에는 서리가 내리기도 했지만, 쌀, 담배, 인디고 등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기후였다.
루이지애나의 상류 지역은 대부분 광활하고 비옥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북극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의 영향을 받았다. 17세기에는 이 지역 대부분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이는 모피를 구하려는 유럽인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약 150년 동안 진행된 개발과 벌목으로 인해 숲은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2. 2. 로어 루이지애나 (Basse-Louisiane)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저지대는 온화한 기후를 보이지만, 늦여름부터 초가을에 걸쳐 발생하는 멕시코만 연안의 허리케인이 특징이다. 겨울에는 서리가 내리기도 하지만, 쌀, 담배, 인디고(쪽) 재배가 가능하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지형으로는 미시시피강 삼각주에서 볼 수 있는 호수와 많은 습지가 있다. 미시시피강에서 지류(Bayou)가 갈라져 나와 길고 완만한 흐름을 형성하며, 총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그물 모양의 항해 가능한 수로를 이룬다.

로어 루이지애나는 현재 미국의 아칸소,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포함하여, 하류 미시시피 강 유역의 땅으로 구성되었다. 프랑스는 1660년대에 이 지역을 처음 탐험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여러 무역 기지가 설립되었다. 본격적인 정착 시도는 1699년, 현재의 빌록시 근처에 포트 모레파스가 건설되면서 시작되었다. 곧 식민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수도는 처음에는 모빌에 있다가 나중에는 빌록시로, 최종적으로는 1722년(도시 설립 4년 후) 뉴올리언스로 이전되었다. 정부는 총독이 이끌었으며, 루이지애나는 18세기 초에 점차 중요한 식민지로 부상했다.
어퍼 루이지애나의 초기 정착민들은 대부분 프랑스령 캐나다 출신이었지만, 로어 루이지애나는 프랑스 식민 제국 전역에서 온 다양한 이주민들, 즉 캐나다, 프랑스 본토,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출신자들에 의해 식민화되었다.[10]
2. 3. 어퍼 루이지애나 (Haute-Louisiane)
어퍼 루이지애나(Haute-Louisiane프랑스어), 또는 일리노이 컨트리(Pays des Illinois프랑스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은 현재 미국 중서부의 미주리주, 일리노이주, 인디애나주에 해당하는 미시시피강 상류 계곡의 프랑스 영토였다.[11] 이 지역은 대부분 광대하고 비옥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후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북극 바람의 영향을 받는다. 17세기에는 대부분 숲으로 덮여 있어 동물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고, 이로 인해 모피를 얻으려는 유럽인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후 150년 동안 숲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탐사는 1673년 루이 졸리에와 자크 마르케트가 미시시피강 상류를 탐험하며 지도를 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어퍼 루이지애나에는 주로 프랑스령 캐나다에서 온 식민지 개척자들이 정착했으며,[10] 이들은 지역 일리노이족 원주민들과 상당한 교류 및 혼인을 통해 통합되었다.[12] 프랑스 정착민들은 경작에 적합한 농지와 사냥, 덫 놓기에 유리한 동물이 풍부한 숲 환경에 매력을 느꼈다.[13]
1699년부터 1760년 사이에 어퍼 루이지애나에는 6개의 주요 정착지가 설립되었다. 이들 중 카호키아, 카스카스키아, 포르 드 샤르트르, 생 필리프, 프레리 뒤 로셰는 현재 일리노이주 미시시피강 동쪽에 위치했고, 강 건너편 현재 미주리주에는 생트 제네비브가 세워졌다.[14]
정착지 | 위치 (현재 주) | 설립 시기 |
---|---|---|
카호키아 | 일리노이주 | 1699년 ~ 1760년 사이 |
카스카스키아 | 일리노이주 | 1699년 ~ 1760년 사이 |
포르 드 샤르트르 | 일리노이주 | 1699년 ~ 1760년 사이 |
생 필리프 | 일리노이주 | 1699년 ~ 1760년 사이 |
프레리 뒤 로셰 | 일리노이주 | 1699년 ~ 1760년 사이 |
생트 제네비브 | 미주리주 | 1699년 ~ 1760년 사이 |
이 지역은 처음에는 캐나다의 일부로 관리되었으나, 1712년 앙투안 크로자에게 루이지애나 지역이 할양되면서 루이지애나의 일부로 선포되었다.[15] 1720년대에는 공식적인 정부 체계가 갖추어졌는데, 각 도시의 지도자들은 포르 드 샤르트르의 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사령관은 다시 뉴올리언스에 있는 루이지애나 총독에게 보고하는 방식이었다.[16]
어퍼 루이지애나의 지리적 경계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지만, 점차 오대호 남서쪽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1722년의 왕실 칙령은 오대호 이남, 오하이오강 어귀 이북, 미시시피강 양쪽과 하류 미주리 계곡을 포함하는 가장 넓은 범위의 정의를 내렸을 수 있다.[17]
이후 캐나다와 루이지애나 간의 무역 분쟁으로 인해 경계 설정이 필요해졌다. 1745년 루이지애나 총독 보드뢰유는 자신의 영토 북동쪽 경계를 와바시 계곡에서 버밀리온강 어귀(현재의 댄빌, 일리노이 근처)까지로 정했다. 거기서 북서쪽으로 '르 로셰'까지 이동하여 일리노이강을 따라갔고, 다시 서쪽으로 록강 어귀(현재의 록 아일랜드, 일리노이)까지 경계를 설정했다.[17] 이에 따라 빈센과 피오리아는 루이지애나의 경계가 되었고, 위아테논 (현재 라파예트, 인디애나 근처), 포트 마이애미 (현재 포트웨인, 인디애나 근처), 프레리 뒤 시엔의 전초 기지는 캐나다의 속령으로 운영되었다.[17]
이 경계는 1760년 캐나다의 프랑스군 항복부터 1763년 파리 조약 체결까지 유지되었으며,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동쪽의 영토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영국군은 1761년에 일리노이와 와바시 지역의 '캐나다' 전초 기지를 점령했지만, 빈센이나 미시시피강의 카호키아, 카스카스키아 정착지는 평화 조약 비준 후인 1764년에 점령했다.[18] 당시 몬트리올 사령관이었던 토마스 게이지 장군은 1762년 보고서에서 루이지애나와 캐나다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미시시피강 상류(일리노이강 어귀 위)가 캐나다의 무역 지역으로 이해되었다고 설명했다.[19]
영토 이양 후, 미시시피강 동쪽의 프랑스 정착민 중 다수는 강을 건너 스페인령 루이지애나로 이주했다. 동부 일리노이 컨트리는 영국의 퀘벡 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미국의 노스웨스트 준주가 되었다.[20] 뉴프랑스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후 이주한 프랑스 식민지인들은 세인트루이스(1764년 설립)와 같은 중요한 정착지를 건설했다. 세인트루이스는 프랑스 모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미주리강과 미시시피강 상류의 무역 기지와 연결되어 이후 이 지역에 프랑스인들이 정착하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1762년 퐁텐블로 조약에서 프랑스는 전쟁 동맹국이었던 스페인에게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할양했다. 이는 영국에 스페인령 플로리다를 빼앗긴 것에 대한 보상 차원이었다.[21] 프랑스가 루이지애나에 대한 주권을 잃은 후에도 어퍼 루이지애나의 프랑스어 사용 인구 정착은 40년 동안 계속되었다. 페드로 비알과 같은 프랑스 탐험가와 개척자들은 종종 스페인과 이후 미국인들의 안내자 및 통역가로 활동했다. 세인트루이스의 스페인 부총독은 전통적인 '일리노이 컨트리' 명칭을 유지하며 "일리노이 서부 및 지구 사령관"과 같은 칭호를 사용했고, 행정관들은 자신들의 수도를 "일리너시스의 세인트루이스"라고 부르기도 했다.[17]
1800년, 스페인은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루이지애나의 일부를 프랑스에 반환했지만, 프랑스는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이 영토를 미국에 매각했다.[22] 이 시기, 특히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스스로를 크리올이라고 칭하던 프랑스인들은 미주리 오자크 지역으로 더 깊숙이 이동하여 채광 공동체인 브레통 광산과 라 비에유 광산(올드 마인즈) 등을 형성했다.[14]
어퍼 루이지애나에서는 미주리 프랑스어로 알려진 독특한 방언이 발달했다. 이 방언은 루이지애나 프랑스어나 아카디아 프랑스어 등 다른 캐나다 프랑스어 변종들과 구별된다. 이 방언은 20세기까지 미주리주를 중심으로 중서부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거의 사라져 소수의 노령층 화자만이 구사할 수 있다.[10]
3. 역사
17세기 중반, 1660년경부터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내륙으로의 팽창을 시작했다. 모피 무역과 북서항로 개척 등을 목표로 한 탐험은 루이 졸리에, 자크 마르케트, 라 살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라 살은 1682년 미시시피강 유역을 프랑스 영토로 선언하고 '루이지애나'라 명명했다. 이후 빌록시, 모빌[24], 뉴올리언스 등 주요 정착지가 건설되며 식민지 경영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7년 전쟁 이후 1762년 퐁텐블로 조약과 1763년 파리 조약을 통해 루이지애나 영토는 각각 스페인과 영국에게 분할되었다. 1800년 잠시 프랑스 소유로 돌아왔으나,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이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매각하며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통치는 막을 내렸다.
3. 1. 탐험과 정착
17세기 중반,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내륙으로의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중국으로 가는 북서항로를 찾고, 모피와 같은 천연자원을 확보하며, 아메리카 원주민을 가톨릭교로 개종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다. 1673년 루이 졸리에와 자크 마르케트는 미시시피강 상류를 탐험하며 프랑스의 내륙 진출 가능성을 열었다. 이후 1682년, 라 살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멕시코만까지 내려가 강 유역 전체를 프랑스 영토로 선언하고, 당시 국왕 루이 14세를 기려 '루이지애나'라고 명명했다.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은 17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1699년 피에르 르 모안 디베르빌이 멕시코만 연안에 빌록시 요새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702년에는 모빌이[34], 1714년에는 루이지애나에서 가장 오래된 영구 정착지인 나키토시가 건설되었다. 1718년에는 장바티스트 르 모인 드 비앵빌의 주도로 뉴올리언스가 건설되어 이후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
미시시피강 상류 지역, 즉 '어퍼 루이지애나' 또는 '일리노이 컨트리'로 불리는 지역의 개척도 이루어졌다.[11] 주로 프랑스령 캐나다에서 온 이주민들이 정착했으며[10], 이들은 비옥한 농지와 사냥 자원에 이끌렸다.[13] 카호키아, 카스카스키아, 생트 제네비브 등 주요 정착지가 형성되었고[14], 지역 일리노이족과의 교류도 있었다.[12] 이 지역은 처음에는 캐나다의 일부로 관리되다가 1712년부터 루이지애나에 속하게 되었으며[15], 점차 뉴올리언스의 총독 아래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16]
프랑스가 확보했던 광대한 루이지애나 영토는 18세기 중반 이후 큰 변화를 맞았다. 7년 전쟁의 결과, 1763년 파리 조약에 따라 미시시피강 동쪽 지역은 영국에 할양되었고, 미시시피강 서쪽 지역은 이미 1762년 비밀 조약(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스페인에게 넘어간 상태였다.[21] 스페인 통치 시기에도 프랑스계 주민들의 활동은 계속되었고, 세인트루이스와 같은 새로운 거점이 마련되었다. 1800년 산 일데폰소 조약으로 루이지애나는 잠시 프랑스 소유로 돌아왔으나,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이 영토 전체를 미국에 매각하였다.[22]
이러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탐험과 정착, 그리고 영토 변화의 구체적인 과정은 이어지는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3. 1. 1. 17세기
1660년, 프랑스는 당시 프랑스령 캐나다 동부 지역을 거점으로 북아메리카 내륙으로의 팽창 정책을 시작했다. 이 정책의 목표는 중국으로 가는 북서항로를 찾는 것, 모피와 광물 같은 지역의 천연 자원을 개발하는 것, 그리고 원주민들을 가톨릭교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모피 상인들은 '상부 지방'(pays d'en haut|페이 당 오프랑스어, 오대호 주변 지역)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1659년, 피에르 에스프리 라디송과 메다르 쇼아르 데 그로세이예는 슈피리어호 서쪽 끝까지 도달했다. 성직자들은 1668년 미시간주 수세인트마리 등에 선교부를 설립했다.
1673년 5월 17일, 프랑스인 루이 졸리에와 예수회 사제 자크 마르케트는 미시시피강 탐험에 나섰다. 그들은 이 강을 원주민의 말을 빌려 '큰 강'이라는 의미의 ''미시시피''(오지브웨어)라고 불렀다. 이들은 미시시피강이 태평양으로 흐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멕시코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아칸소강 어귀까지 탐험한 후 확인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1675년, 마르케트는 일리노이강 유역의 일리노이족 마을인 카스카스키아스에 선교부를 세웠으며, 이는 1690년경 영구적인 정착지로 발전했다.
1682년, 르네 로베르 카발리에(라 살)와 이탈리아 출신 앙리 드 톤티는 미시시피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 미시시피강 삼각주에 도달했다. 이들은 프랑스인 23명, 아메리카 원주민 18명과 함께 일리노이강의 크레베쾨르 요새를 출발했다. 탐험 도중, 현재의 테네시주 멤피스 위치에 프루돔 요새를 건설했다. 라 살은 미시시피강 유역 전체를 프랑스 영토로 선언하고,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 '루이지애나'라고 명명했다. 또한, 쿼포족 원주민과 동맹을 맺었다. 1682년 4월 미시시피강 하구에 도착한 라 살은 이후 베르사유로 돌아가 해양부 장관을 설득하여 루이지애나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미시시피강을 실제보다 서쪽에 위치한 것처럼 묘사한 지도를 제시하며 루이지애나가 누에바에스파냐와 가깝다고 주장했다.
라 살은 루이지애나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4척의 배와 320명의 이민자를 이끌고 다시 항해에 나섰으나, 미시시피강 삼각주를 찾지 못하고 텍사스 해안에 상륙하여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다. 1687년, 라 살은 현재의 텍사스주 나바소타 근처에서 자신의 탐험대원들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1699년, 피에르 르 모안 디베르빌이 루이지애나 해안을 탐험하고 멕시코만 연안에 빌록시 요새를 건설하며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식민지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1. 2. 18세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1701년, 프랑스인 앙투안 드 라 모트 카디야크는 현재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디트로이트 요새를 건설했다. 이는 모피 거래를 이로쿼이족과 영국 상인으로부터 보호하고, 원주민과의 동맹 및 동화를 추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702년에는 장바티스트 르 모인 드 비앵빌 총독이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수도로 모빌을 건설했다.[34] 비앵빌은 그의 형 피에르 르 모인 디베르빌의 뒤를 이어 여러 차례 루이지애나 총독을 역임했다(1702년~1713년, 1716년~1724년, 1733년~1743년).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 일부 영토를 잃었지만, 루이지애나는 프랑스령으로 남았다. 프랑스는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으로 영국 식민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고, 서쪽의 누에바에스파냐와의 관계 강화를 시도했다. 이는 스페인 식민지의 자원 확보 및 무역 증진을 위한 목적도 있었다. 1714년, 루이 주슈리 드 상 데니는 레드강을 탐험하여 리오그란데강까지 도달했고, 같은 해 에티엔 드 베니아르, 시외르 드 부르몽은 미주리강을 탐험했다. 또한 1714년, 루이지애나에서 가장 오래된 영구 정착지인 나키토시가 루이 주슈리 드 상 데니에 의해 건설되었다.
1717년에는 루이지애나에서 흑인 노예의 공식적인 징병이 시작되었고, 1718년에는 Jean-Baptiste Le Moyne de Bienville|장바티스트 르 모인 드 비앵빌영어의 지휘 아래 뉴올리언스(프랑스어: La Nouvelle-Orléans)가 건설되었다. 뉴올리언스는 당시 프랑스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건축가 아드리안 드 포제가 도시 계획을 담당했다. 1719년에는 모빌에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선이 도착했다.[34] 1720년에는 빌록시가 잠시 루이지애나의 수도가 되었으나, 1723년 뉴올리언스가 공식 수도가 되었다.
어퍼 루이지애나 (일리노이 컨트리)어퍼 루이지애나(Upper Louisiana)는 '일리노이 컨트리(Illinois Country)'라고도 불렸으며, 미시시피강 상류 계곡 지역을 포함했다. 이 지역은 현재의 미주리주, 일리노이주, 인디애나주 일부에 해당한다.[11] 프랑스의 탐사는 1673년 루이 졸리에와 자크 마르케트가 미시시피강 상류를 탐험하면서 시작되었다. 어퍼 루이지애나는 주로 프랑스령 캐나다에서 온 이주민들에 의해 개척되었으며[10], 지역 일리노이족과의 혼인 및 문화적 통합도 활발히 이루어졌다.[12] 프랑스 정착민들은 비옥한 농지와 사냥, 덫 놓기에 적합한 풍부한 산림 자원에 매력을 느꼈다.[13]
1699년부터 1760년 사이에 어퍼 루이지애나에는 6개의 주요 정착지가 설립되었다. 카호키아, 카스카스키아, 포르 드 샤르트르, 생 필리프, 프레리 뒤 로셰는 현재 일리노이주 미시시피강 동쪽에 위치했고, 강 건너편에는 현재 미주리주에 속하는 생트 제네비브가 있었다.[14] 이 지역은 처음에는 캐나다의 일부로 관리되었으나, 1712년 앙투안 크로자에게 루이지애나 지역이 할양되면서 루이지애나의 일부가 되었다.[15] 1720년대에는 공식적인 행정 체계가 갖추어져, 각 정착지의 지도자들은 포르 드 샤르트르의 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사령관은 다시 뉴올리언스의 루이지애나 총독에게 보고하는 방식이었다.[16]
어퍼 루이지애나의 정확한 지리적 경계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지만, 점차 오대호 남서쪽 지역을 지칭하게 되었다. 1722년의 왕실 칙령은 오대호 이남, 오하이오강 어귀 이북, 미시시피강 양안과 하류 미주리 계곡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프랑스령으로 규정했다.[17]
이후 캐나다와 루이지애나 간의 무역 분쟁으로 인해 경계 조정이 이루어졌다. 1745년, 루이지애나 총독 보드뢰유는 자신의 영토 북동쪽 경계를 와바시 계곡의 버밀리온강 어귀(현재의 댄빌, 일리노이 근처)까지로 설정했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르 로셰(Le Rocher)를 거쳐 일리노이강을 따라간 뒤, 서쪽으로 록강 어귀(현재의 록 아일랜드, 일리노이)까지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삼았다.[17] 이에 따라 빈센과 피오리아는 루이지애나에 속하게 되었고, 위아테논(현재 라파예트, 인디애나 근처), 포트 마이애미(현재 포트웨인, 인디애나 근처), 프레리 뒤 시엔 등은 캐나다의 관할 하에 운영되었다.[17]
이 경계는 7년 전쟁의 결과로 176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동쪽의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다. 영국군은 1761년에 이미 캐나다 관할의 전초 기지들을 점령했지만, 빈센이나 카호키아, 카스카스키아 등 루이지애나 소속 정착지는 조약 비준 후인 1764년에 점령했다.[18] 영국군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1762년 보고서에서 루이지애나와 캐나다의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미시시피강 상류(일리노이강 어귀 북쪽)가 캐나다의 무역 지역으로 인식되었다고 기록했다.[19]
스페인 통치와 프랑스로의 반환7년 전쟁 중인 1762년, 프랑스는 비밀 조약인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동맹국인 스페인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스페인이 영국에게 플로리다를 할양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21] 미시시피강 동쪽 영토가 영국령이 되자, 많은 프랑스 정착민들이 강을 건너 스페인령 루이지애나로 이주했다. 이들은 1764년 세인트루이스와 같은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세인트루이스는 프랑스 모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동부 일리노이 컨트리는 영국의 퀘벡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미국의 노스웨스트 준주가 되었다.[20]
스페인 통치 하에서도 프랑스계 주민들의 정착은 계속되었고, 페드로 비알과 같은 프랑스 탐험가들은 스페인과 이후 미국 정부의 안내자나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세인트루이스의 스페인 부총독은 '일리노이 서부 및 지구 사령관'과 같은 칭호를 사용하며 이 지역을 계속 '일리노이 컨트리'로 지칭했다.[17]
1768년에는 프랑스계 크리올과 독일인 정착민들이 스페인 통치에 반발하여 1768년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스페인 총독을 축출하기도 했으나, 1769년 스페인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처형하면서 스페인 법제가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1788년에는 1788년 뉴올리언스 대화재로 뉴올리언스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고, 이후 스페인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800년, 스페인은 비밀 조약인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루이지애나를 다시 프랑스에 반환했다.[22]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이 영토 전체를 미국에 매각했다. 이 시기, 특히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프랑스계 주민들은 미주리 오자크 지역으로 이주하여 브레통 광산과 라 비에유 광산(올드 마인즈) 같은 채광 공동체를 형성했다.[14]
어퍼 루이지애나에서는 미주리 프랑스어라는 독특한 방언이 발달했다. 이는 루이지애나 프랑스어나 아카디아 프랑스어 등 다른 캐나다 프랑스어 방언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가졌다. 이 방언은 20세기까지 미주리주를 중심으로 중서부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거의 사라져 소수의 고령 화자들만이 사용하고 있다.[10]
18세기 주요 연표
연도 | 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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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 | 앙투안 드 라 모트 카디야크가 디트로이트 건설. |
1702 | 장바티스트 르 모인 드 비앵빌 총독이 모빌을 루이지애나 수도로 건설.[34] |
1712 | 앙투안 크로자에게 루이지애나 지역 할양. 일리노이 컨트리가 루이지애나의 일부가 됨.[15] |
1713 | 에티엔 드 베니아르, 시외르 드 부르몽이 미시시피강 탐험 보고서 출판. |
1714 | 루이 주슈리 드 상 데니가 루이지애나 최고(最古) 영구 정착지 나키토시 건설. |
1717 | 루이지애나에서 흑인 노예 공식 징병 시작. |
1718 | 뉴올리언스 건설. |
1719 | 모빌에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선 도착.[34] |
1720 | 빌록시가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수도가 됨. |
1720 | 스페인 비야수르 원정대가 포니족에게 패배. 스페인의 평원 지역 진출 시도 중단. |
1723 | 뉴올리언스가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공식 수도가 됨. |
1723 | 오를레앙 요새 건설 (현재 브런즈윅 근처). |
1745 | 루이지애나와 캐나다 간의 경계 설정. |
1762 | 비밀 조약인 퐁텐블로 조약 체결, 프랑스가 루이지애나 서부를 스페인에 할양. |
1763 | 파리 조약 체결, 프랑스가 미시시피강 동쪽과 캐나다를 영국에 할양. 케이준의 뉴올리언스 및 미시시피 서부 이주 시작. |
1764 | 피에르 라클레드가 세인트루이스 건설. |
1764 | 퐁텐블로 조약 내용 공개. |
1768 | 크리올과 독일인 정착민들이 1768년 반란 일으켜 스페인 총독 축출. |
1769 | 스페인이 반란 진압, 주모자 처형. 스페인 법제 공식 도입. |
1778 |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 미국 독립 전쟁 참전. |
1779 | 스페인이 영국에 선전포고. |
1788 | 1788년 뉴올리언스 대화재 발생. 이후 스페인 양식으로 재건. |
1800 | 비밀 조약인 산 일데폰소 조약 체결, 스페인이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에 반환. |
1803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미국에 루이지애나 양도 (루이지애나 매입). |
1804 | 삼국기 게양식. 스페인이 공식적으로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에 반환하고, 프랑스는 다시 미국에 양도. |
3. 2. 정치 및 행정 조직
프랑스의 절대 군주제는 본국보다 훨씬 넓은 루이지애나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루이 14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식민지에도 절대주의 원칙을 적용하려 했으나, 광대한 영토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재정적 지원이나 행정적 역량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루이지애나의 정치 및 행정 체계는 프랑스 본국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며 발전했다.루이지애나는 기본적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식민지 전체를 아우르는 누벨 프랑스의 일부로 관리되었다. 이론상으로는 캐나다에 중심을 둔 누벨 프랑스 총독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프랑스 본토는 물론 누벨 프랑스의 중심지인 퀘벡과의 엄청난 지리적 거리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이러한 환경은 루이지애나만의 독자적인 행정 구조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의 주요 행정은 군사 및 외교를 담당하는 총독(Gouverneur)과 재정, 사법, 경찰 등 민간 행정 전반을 책임지는 Commissaire-ordonnateur|코미사르 오르도나퇴르fra라는 두 핵심 직책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총독은 식민지의 최고위직이었으나, 실제 행정 권한은 왕의 대리인으로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는 코미사르 오르도나퇴르와 분점하거나 때로는 그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본토의 복잡한 법률 체계와 달리, 루이지애나에는 누벨 프랑스의 파리 관습법을 기반으로 한 비교적 통일된 법률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지리적 한계로 인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식민지 주민들이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고 생활하거나 심지어 밀수와 같은 비공식적인 경제 활동에 관여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3. 2. 1. 절대주의
절대 군주제가 유럽 프랑스보다 몇 배나 큰 루이지애나를 통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루이 14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식민지 행정에 충분한 재정적 수단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식민지에 자신들의 절대주의 야심을 강요하려 했다.
''앙시앵 레짐''의 지도자들이 누벨 프랑스의 식민지화를 통제하고 때로는 장려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부르봉 왕조의 첫 왕인 앙리 4세는 개인적으로 해외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통치 아래 누벨 프랑스 식민지화는 중요한 추진력을 얻었다. 17세기에는 리슐리외 추기경과 이후 콜베르가 식민지 정책을 발전시켰다. 루이 14세와 그의 각료들은 끊임없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경쟁하는 왕국의 규모에 대해 우려했으며, 유럽의 경쟁과 정치적 동맹 관계는 루이지애나의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영국령 북아메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욕망은 왕실 정치에서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였다.
루이 14세는 북아메리카에서 중개 단체나 반대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유력자 회의나 의회와 같은 기구가 식민지에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660년대에 식민지는 왕실의 직접적인 재산이 되었고, 1685년에는 누벨 프랑스 내 모든 출판 활동을 금지했다. 1712년부터 1731년까지 루이지애나는 부유한 사업가 앙투안 크로자에게 넘어갔다가, 이후 존 로가 설립한 미시시피 회사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 회사는 식민지 정착을 위해 이민자를 모집하는 역할을 했다. 1731년, 루이지애나는 다시 프랑스 왕실의 직접 통치하에 놓였다.
본국 프랑스와는 달리, 루이지애나 식민지에는 단일하고 통일된 법률 체계가 적용되었다. 민법에 해당하는 누벨 프랑스의 파리 관습법(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평등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1667년의 민사 절차 조례[26]와 1670년 형사 절차 조례로 구성된 "루이 법전", 상업 관련 규정인 1673년의 "사바리 법전", 그리고 노예제를 규율하는 1685년의 ''노아르 법전''[27]이 그것이다. 이러한 통일된 법 적용은 한동안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여 권위에 대한 폭동이나 반란은 드물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루이지애나 사이의 먼 거리 때문에 중앙 정부가 효과적인 통치를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멕시코만 연안의 식민지 주민들은 프랑스 본국의 지원보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움에 더 크게 의존하며 거의 자력으로 생존해야 했다. 한편, 이러한 거리는 식민지 주민들이 본국의 제재 없이 상품을 밀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루이 14세의 해군 및 무역 장관이었던 콜베르는 왕실 재정을 확충하는 데 힘썼다. 그는 기존의 무역 회사들을 해산시키고 국가와 식민지의 생산량을 늘리려 노력했다. 중상주의 신봉자였던 콜베르는 수출을 최대한 늘리고 수입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으며, 프랑스의 무역 독점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군주의 지출을 줄이려 했지만, 아메리카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 투자와 인력 동원이 필요했다. 프랑스 본국에서는 공장이나 항구 같은 경제 기반 시설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지만, 루이지애나에 대한 투자는 충분하지 않았고, 상품이나 인력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프랑스 재정은 유럽에서의 계속된 전쟁으로 고갈되었지만, 루이지애나의 식민지 주민들은 본국에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없었으며, 악명 높은 소금세(''가벨'')에서도 자유로웠다.
3. 2. 2. 식민지 행정
앙시앵 레짐 하에서 루이지애나는 더 큰 식민지 단위인 프랑스령 아메리카 영토, 즉 누벨 프랑스(Nouvelle France)의 일부를 형성했다. 누벨 프랑스는 오늘날 캐나다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처음에는 1625년 방타두르 공작과 같은 부왕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이후 부르봉 왕가의 다른 해외 영토와 유사한 정부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누벨 프랑스의 수도는 1759년 영국에 함락되기 전까지 퀘벡 시였다. 이론적으로 루이지애나는 캐나다에 종속된 식민지로 간주되었으며, 프랑스 본토에서 직접 온 이주민보다는 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 의해 탐험되고 정착되었다.그러나 절대 군주제가 프랑스 본토보다 몇 배나 더 넓은 루이지애나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루이 14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식민지에 충분한 재정적 지원 없이 절대주의 통치를 강요하려 했기 때문에 행정력은 늘 부족했다.[17] 뉴올리언스와 퀘벡 사이의 엄청난 거리 때문에 도시와 요새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통신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광범위하게 분산된 프랑스 정착촌들은 사실상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광대하고 다양한 누벨 프랑스 식민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루이지애나를 포함한 5개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다. 오대호 남쪽의 일리노이 컨트리는 1717년 루이지애나에 편입되어 어퍼 루이지애나(Upper Louisiana)로 불리게 되었다.[17]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행정 중심지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처음에는 모빌이 수도 역할을 했으나, 1720년에는 빌록시로, 그리고 1722년에는 최종적으로 뉴올리언스로 이전되어 총독이 상주하게 되었다.
루이지애나의 행정 체계는 총독(Gouverneur)과 Commissaire-ordonnateur|코미사르 오르도나퇴르fra라는 두 주요 직책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 총독: 군대를 지휘하고 외교 관계를 담당하는 군사적 성격의 최고위 직책이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제한적일 수 있었다.
- Commissaire-ordonnateur|코미사르 오르도나퇴르fra: 프랑스 본국의 인텐던트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는 민간 행정관이었다. 국왕의 대리인으로서 사법, 경찰, 재정을 총괄했으며, 예산 관리, 물가 설정, 최고 위원회(Conseil supérieur, 사법 기관) 주재, 인구 조사 실시 등의 책임을 졌다. 국왕이 직접 임명했으며, 때때로 총독과 권한 충돌을 빚기도 할 만큼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내륙의 군사 전초 기지들은 각 지역 사령관(Commandant)들이 통솔했다.
3. 3. 종교 활동


북아메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는 모두 퀘벡에 본부를 둔 하나의 가톨릭 교구에 속했다. 프랑스 국왕이 직접 임명하고 봉급을 지급하는 대주교가 누벨프랑스 전체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루이지애나에서는 종교적인 제약이 비교적 느슨하여 주민들의 신앙심은 프랑스 본토나 캐나다 지역보다 약한 편이었다. 신앙의 증거로 성직자에게 내는 세금인 십일조 수입 역시 프랑스보다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탐험과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예수회를 중심으로 선교단을 파견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노력했으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적 기능도 담당했다. 예를 들어, 1720년에는 우르술라 수녀회가 뉴올리언스에서 병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교회와 선교사들은 다양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접촉했다. 17세기의 마르케트 신부처럼 일부 성직자들은 직접 탐험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예수회는 원주민의 개종을 돕기 위해 기도문을 여러 원주민 언어로 번역했으며, 원주민의 전통적인 관습과 기독교 의례를 연결하려는 시도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기존 신앙과 가톨릭 신앙이 혼합된 혼합주의적 종교 형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항구적인 개종을 이룬 원주민의 수는 제한적이었으며,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원주민 중 일부는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 교리를 자신들의 전통적인 '영'에 대한 믿음과 비슷하게 이해하거나, 혹은 완전히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다.
3. 4. 식민 사회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전체 인구를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다. 식민지 개척자와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인에 대한 자료는 비교적 정확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 추정은 불확실하다. 18세기 동안 루이지애나 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이는 혼성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초기 북아메리카에는 수백만 명의 원주민이 거주했지만,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 등으로 인해 16세기 이후 인구가 급감했다. 17세기 말 로어 루이지애나에는 10만에서 20만 명 정도의 원주민이 남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삼기도 했으며, 이들은 주로 부족 간 전쟁 포로였다. 프랑스는 원주민과의 관계에서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으며, 원주민들은 프랑스인들의 생존과 모피 무역, 탐험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1717년, 존 로의 결정으로 아프리카 노예 수입이 시작되었고, 이는 로어 루이지애나의 플랜테이션 경제 발전을 목표로 했다. 인도 회사가 노예 무역을 독점하여 1719년부터 1743년까지 약 6,000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했다. 노예의 처우는 ''Code Noir''(흑인법)에 의해 규제되었으나, 실제로는 법이 규정한 것 이상의 자율성을 갖기도 했다. 노예들은 루이지애나 사회의 크리올화에 기여했으며,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오크라는 검보의 주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노예의 삶은 고되고 자유를 얻기 어려웠으며, 도망 노예들이 만든 마룬 사회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8세기 동안 약 7,000명의 유럽 이민자들이 루이지애나에 정착했는데, 이는 13개 식민지 인구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였다. 이주 과정과 정착 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긴 항해, 낯선 환경, 허리케인, 황열병과 같은 질병, 원주민과의 충돌 등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식민지 인구를 늘리기 위해 프랑스 왕실은 젊은 프랑스 여성인 filles à la cassette|필 아 라 카세트프랑스어('카세트 소녀')를 보내 군인과 결혼시키고 지참금을 지원했다. 반면, 범죄자나 부랑자, 가족 없는 여성들이 lettre de cachet|레트르 드 카셰프랑스어('봉인 편지')를 받고 강제로 이주당하기도 했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 ''마농 레스코''의 소재가 되었다. 스위스인, 독일인 공동체도 정착했으며, 7년 전쟁 이후에는 스페인인, 생도맹그 난민, 프랑스 혁명 반대자, 아카디아에서 추방된 케이준의 조상 등 더 다양한 집단이 유입되었다.
루이지애나 사회는 당시 프랑스 본토보다 사회적 이동성이 비교적 높았으며, 봉건 영주제가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일부 상인들은 빠르게 부를 축적했고, 대규모 농장주들은 파리 유행을 따르는 등 프랑스식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 했다. 프랑스 군대는 영토 통제와 요새 건설, 원주민과의 협상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탈영 문제도 겪었다. Coureurs des bois|쿠뢰르 드 부아프랑스어('숲의 주자')들은 모피 무역과 탐험을 통해 프랑스 영향력 확장에 기여했으며, 일부는 원주민 사회에 동화되기도 했다.
3. 4. 1.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통계학자 러셀 손턴에 따르면, 1500년경 북아메리카에는 약 700만 명의 원주민이 거주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옮긴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에 원주민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17세기 말,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하류 지역에는 약 10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앙시앵 레짐 하의 프랑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프랑스 국왕의 신하이자 기독교도로 만들고자 했으나, 본국과의 거리와 프랑스 정착민의 부족으로 인해 실현되기 어려웠다. 공식적으로는 원주민을 국왕의 신하로 여겼지만, 실제로는 수적으로 우세했던 원주민들이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지방 총독이나 장교들은 원주민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강요할 수단이 부족하여 종종 타협해야 했다. 원주민 부족들은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의 생존을 돕고, 모피 무역에 참여했으며, 탐험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등 루이지애나의 프랑스인들에게 필수적인 존재였다. 또한, 다른 부족이나 다른 유럽 식민 세력과의 전쟁에서 원주민과의 동맹은 매우 중요했다.
프랑스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은 여러 분야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인들은 원주민의 언어를 배웠고, 쿠뢰르 드 부아와 군인들은 카누와 모카신 같은 원주민의 도구를 사용했다. 그들은 야생 쌀, 곰고기, 개고기 등 원주민의 음식을 먹었으며, 식량 공급을 원주민에게 의존하는 경우도 많았다. 크리올 요리는 이러한 상호 영향의 산물인데, 예를 들어 '사가미테'(sagamité)는 옥수수 펄프에 곰 지방과 베이컨을 섞어 만든 음식이다. 오늘날 잠발라야라는 이름은 세미놀족 언어에서 유래했으며, 고기와 쌀을 넣어 만든 매운 요리를 가리킨다. 반대로 원주민들은 유럽 상품(천, 술, 총기 등)을 받아들였고, 일부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때로는 샤먼이 상처에 전나무 수지를 바르거나 뱀에 물린 상처에 로열 펀을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치료법으로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많은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군사력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으며, 일부는 그들의 문화를 경멸하고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1735년에는 루이지애나에서 당국의 승인 없이 프랑스인과 원주민 간의 결혼이 금지되었다. 예수회 사제들은 원주민의 생활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기도 했다.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노예로 삼아졌다. 이들은 주로 부족 간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게 팔린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서인도 제도의 생도맹그나 캐나다로 보내져 팔려나갔다. 루이지애나의 농장주들은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출신 노예를 선호했지만, 일부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하인으로 두기도 했다.
원주민들이 프랑스인의 돼지가 옥수수밭을 망친 것에 대해 돼지를 죽이는 등의 사소한 충돌 외에도, 폭스 전쟁, 나체스족 반란, 치카소족에 대한 원정 등 폭력적인 대립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지애나에서 프랑스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계는 대체로 대화와 협상을 기반으로 유지되었다. 이는 프랑스인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랑스 제국주의는 몇몇 전쟁과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예화를 통해 폭력적인 측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3. 4. 2. 아프리카 노예

1717년, 프랑스 재무부 장관 존 로는 루이지애나에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목표는 로어 루이지애나의 플랜테이션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인도 회사는 이 지역의 노예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가졌다. 이 회사는 1719년부터 1743년까지 약 6,000명의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수입했다. 이들 중 일부는 밭을 경작하거나 납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일리노이 지역으로 보내졌다. 결과적으로 로어 루이지애나의 경제는 노예 노동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다른 프랑스 식민지처럼, 노예의 지위와 대우는 ''Code Noir''(흑인법)에 의해 규제되었다. 그러나 이 법이 항상 엄격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노예들은 법전이 명시하는 것 이상의 자율성을 가지기도 했다. 초기에는 공휴일에 노예들이 직접 경작한 작물의 일부를 판매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일부 노예들은 사냥을 하거나, 나무를 베거나, 플랜테이션에서 떨어진 곳에서 가축을 기르기도 했다. 인종 간 결혼과 노예들의 집단 형성은 금지되었지만, 농장주들이 노예 여성을 첩으로 삼는 경우는 흔했다.
노예들의 삶과 노동은 매우 고되었으며, 특히 사탕수수 수확철과 설탕 가공 시기에는 더욱 힘들었다. 쌀 재배를 위한 관개 시설과 운하를 유지하는 데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농장주가 제공한 노예 거주지와 가구는 매우 소박했다. 노예들은 간단한 짚 매트리스를 침대로 사용했고, 일반적으로 몇 개의 트렁크와 주방 용품 정도만 소유할 수 있었다. 노예의 생활 조건은 주인의 대우에 크게 좌우되었다. 주인의 대우가 지나치게 잔인할 경우, 노예들은 종종 도망쳐 늪지나 뉴올리언스 시내에 숨어들었다. 도망 노예들이 형성한 마룬 사회는 존재했지만, 서인도 제도에서 발전했던 크고 반영구적인 마룬 정착촌과는 달리 대부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편, 루이지애나 지역에서는 카리브해 지역만큼 노예 반란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다.
노예가 자유를 얻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으며, 스스로의 자유를 돈으로 살 수도 없었다. 자유를 얻은 첫 노예 중 한 명은 루이 콩고로, 그는 1725년 자유, 토지, 그리고 뉴올리언스의 공공 처형인 자리를 대가로 받았다.[28] 자유를 얻은 노예들(특히 여성과 전직 군인 출신)은 작은 공동체를 형성했지만, 여전히 인종 차별로 고통받았다. 법정에서는 그들에게 더 엄격한 판결이 내려졌고, 무기 소유권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은 루이지애나 사회의 크리올화(언어, 문화 등 다양한 사회적 요소의 혼합 현상)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오크라를 가져왔는데, 이는 검보를 만드는 데 흔히 사용되는 중요한 식재료가 되었다. ''Code Noir''는 노예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받을 것을 요구했지만, 많은 노예들은 비밀리에 아프리카 전통 신앙인 애니미즘을 실천하거나 기독교와 전통 신앙의 요소를 결합하기도 했다.
3. 4. 3. 식민지인 (크리올)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전체 인구를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다. 식민지 개척자와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인에 대한 자료는 비교적 정확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 추정은 불확실하다. 18세기 동안 루이지애나 사회는 다양한 문화가 섞이는 혼성화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루이지애나 크리올의 정의는 루이지애나의 "토착 출생" 개인들의 후손인 커뮤니티를 말한다. 이들은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질 수 있다. 18세기 동안 약 7,000명의 유럽 이민자들이 루이지애나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대서양 연안의 13개 식민지 인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한 매우 적은 숫자였다. 초기에 '크리올'이라는 용어는 루이지애나에서 태어난 유럽인(때로는 아프리카인 포함)을 가리키는 말로, 외부 이주민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루이지애나는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 식민지들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을 유치했다. 수개월에 걸친 대서양 횡단 이후에도 개척자들은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낯설고 종종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생활 조건은 매우 열악했으며, 많은 이민자들이 항해 중이나 도착 직후 목숨을 잃었다. 혹독한 자연환경과 열대 기후는 큰 고난이었고, 프랑스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허리케인이 주기적으로 해안을 강타하여 마을 전체를 파괴하기도 했다. 미시시피강 삼각주 지역은 주기적인 홍수와 황열병 유행에 시달렸으며, 유럽인과 함께 유입된 말라리아, 콜레라 등 유라시아 질병도 식민지 개척을 방해했다.
프랑스인들의 정착지와 요새는 항상 안전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공격은 고립된 개척자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었으며, 1729년에는 나체즈족이 포트 로잘리(현재 미시시피주 내체즈)를 기습 공격하여 임산부를 포함한 약 250명의 개척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프랑스는 2년간 전쟁으로 대응했고, 일부 나체즈족은 포로로 잡혀 생도맹그(현재의 아이티)로 노예로 보내지거나 다른 지역으로 쫓겨났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주로 프랑스 항구나 파리에서 모집된 젊은 남성 자원자들이었다. 상당수는 고용 계약자로서, 루이지애나로 오는 여비를 갚기 위해 계약 기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사실상 "임시 반노예" 상태였다. 식민지 인구를 늘리기 위해 프랑스 왕실은 젊은 프랑스 여성들을 보내 군인들과 결혼시키기도 했다. 이 여성들은 'filles à la cassette'(filles à la cassette|필 아 라 카세트프랑스어, '작은 상자를 든 소녀들'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가져온 작은 트렁크에서 유래)라 불렸으며, 국왕이 마련한 지참금을 받았다. 이는 루이 14세가 뉴 프랑스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약 800명의 'filles du roi'(filles du roi|피유 뒤 루아프랑스어, '왕의 딸들')에게 이주 비용과 지참금을 지원했던 17세기 정책의 연장선이었다.
반면, 일부 여성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루이지애나로 보내졌다. 이들은 종종 "유혹적인" 여성, 부랑자, 범법자, 또는 가족이 없는 이들로 묘사되었으며, 'lettre de cachet'(lettre de cachet|레트르 드 카셰프랑스어, 국왕의 봉인 편지, 즉 체포나 추방 명령서)를 받고 강제로 이주당했다. 이러한 강제 이주는 특히 루이 15세 통치 초기 섭정 기간 동안 빈번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1731년 아베 프레보가 쓴 소설 ''기사 데 그리외와 마농 레스코 이야기''에 영감을 주었다. 1721년에는 '라 발렌(La Baleine)' 호가 파리의 라 살페트리에르 감옥에서 모집된 약 90명의 가임기 여성을 루이지애나로 실어 날랐다. 이 여성들 중 상당수는 매춘부나 범죄자로 추정되며, '라 발렌의 신부들'로 불렸다. 대부분은 도착 후 곧 식민지 남성들과 결혼했다.[29]
스위스인과 독일인 공동체도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에 정착했지만, 프랑스 왕실 당국은 이들을 공식적으로 "프랑스인"으로 분류했다.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패배한 이후, 루이지애나에는 더욱 다양한 집단이 유입되었다. 스페인 정착민, 생도맹그에서 온 난민(특히 1791년 노예 봉기 이후), 프랑스 혁명 반대자, 그리고 아카디아인들이 대표적이다. 1785년에는 영국에 의해 아카디아에서 추방된 지 30년 만에 1,633명의 아카디아인들이 프랑스를 거쳐 뉴올리언스로 이주했다. 다른 경로를 통해 루이지애나에 도착한 아카디아인들을 포함하여 약 4,000명이 정착하여 점차 케이준 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3. 4. 4. 소작인, 장인, 상인
당시 미국에서는 프랑스보다 사회적 이동이 더 용이했다. 미시시피강 유역에는 봉건 영주제가 직접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강의 구불구불한 형태를 따라 토지를 나누는 장방형 토지 분할 방식은 사용되었다. 계층적으로 엄격하게 규제되는 기업은 거의 없었으며, 일부 상인들은 비교적 빠르게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이들 대규모 상인들은 주로 뉴올리언스에 자리를 잡았다.루이지애나의 대규모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프랑스식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 했으며, 파리에서 유행하는 가발이나 의류 등을 수입하기도 했다. 일리노이 지방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석조로 집을 짓고 여러 명의 노예를 소유하기도 했다.
3. 4. 5. 프랑스 군인
프랑스 왕은 다른 식민 열강과의 분쟁에 대비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1717년 미시시피 식민지에는 전체 인구 550명 중 300명이 군인이었다.[35] 그러나 프랑스 본토 군대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군대에서도 탈영 문제가 심각했다. 일부 탈영병들은 쿠뢰르 드 부아(프랑스계 모피 교역 탐험가)가 되기도 했다. 진압이 가혹했기 때문에 반란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군대는 영토를 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군인들은 요새를 건설하고, 종종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협상을 진행했다.3. 4. 6. 숲의 주자 (Coureurs des bois)

''쿠레르 드 부아''(Coureurs des bois, 직역: 숲의 주자)는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17세기 말까지 이 모험가들은 미시시피 강 전역을 여행했다.[1] 그들은 금을 찾거나 원주민들과 수익성 있는 모피 무역을 할 희망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1][2] 종종 허가 없이 이루어진 모피 무역은 어려운 활동이었으며, 대부분 미혼의 젊은 남성들이 수행했다.[1][2] 많은 이들은 궁극적으로 더 정착된 농업 활동으로 전환되기를 원했다.[1] 한편, 상당수가 원주민 사회에 통합되어 언어를 배우고 원주민 아내를 맞이했다.[1][2] 잘 알려진 예로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투생 샤르보노가 있으며, 그는 사카가위아의 남편으로, 장-바티스트를 낳았다. 그들은 1804년부터 1806년까지 루이스 앤드 클라크 탐험대에 참여했다.[1][2]
4. 경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경제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발전했다.
북부의 일리노이 컨트리 지역은 미시시피강과 그 지류를 따라 모피 무역과 곡물 농업이 주를 이루었다. 프랑스 농부들은 샤르트르 요새, 카스카스키아, 프레리 뒤 로셰, 세인트 제네비에브와 같은 마을에 거주하며 유급 노동자나 노예를 이용해 주로 옥수수와 밀을 경작했다. 말, 소, 돼지 등 가축 사육과 함께 소량의 담배, 대마, 아마, 포도도 재배되었으나, 와인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수입했다. 농업은 계절 변화와 주기적인 미시시피강의 홍수에 영향을 받았다. 모피 무역은 교역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쿠레르 드 부아''라 불리는 모피상들은 원주민들과 물물 교환 방식으로 비버나 사슴 가죽을 무기, 천 등과 교환했다. 이 가죽들은 뉴 프랑스의 다른 지역으로 판매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소금과 납도 생산하여 뉴올리언스 등지로 공급했다.
남부의 로어 루이지애나는 노예제에 기반한 플랜테이션 경제가 특징이었다. 농장주들은 주로 뉴올리언스에 거주하며 농장 관리는 대리인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기후와 지형에 맞춰 담배와 인디고 같은 수출용 환금 작물과 함께, 루이지애나 내에서 소비하기 위한 옥수수, 채소, 쌀, 가축 등을 생산했다.
뉴올리언스는 식민지 전체의 경제 수도 역할을 했다. 1723년 운하가 건설되는 등 무역을 위한 기반 시설이 마련되었고, 미시시피 강변의 상점들은 창고 기능을 겸했다. 뉴올리언스는 내륙에서 수집된 모피와 플랜테이션 농산물을 프랑스 본토나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등지로 수출하고, 프랑스에서 오는 식료품, 술, 무기, 도구, 의류 등 필수품을 수입하는 중심지였다. 하지만 프랑스 본토와의 교역은 선박 도착이 드물어 제한적이었고, 전반적인 수출입 규모는 크지 않았다. 뉴올리언스는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로 목재, 쌀, 옥수수 등을 판매하기도 했다.
4. 1. 일리노이 컨트리
어퍼 루이지애나(Upper Louisiana)는 일리노이 컨트리(Illinois Country)라고도 불렸으며, 현재 미국의 미주리주, 일리노이주, 인디애나주에 해당하는 지역의 정착지와 요새를 포함하는 미시시피강 상류 계곡의 프랑스 영토였다.[11]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탐사는 1673년, 루이 졸리에와 자크 마르케트가 미시시피강 상류를 탐험하고 지도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어퍼 루이지애나에는 주로 프랑스령 캐나다에서 온 식민지 개척자들이 정착했다.[10] 또한, 이 지역의 원주민인 일리노이족과의 상당한 혼인과 통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12] 프랑스 정착민들은 경작하기 좋은 농지와 사냥 및 덫 놓기에 적합한 동물이 풍부한 숲 환경에 매력을 느꼈다.[13]
1699년부터 1760년 사이에 어퍼 루이지애나에는 여섯 개의 주요 정착지가 설립되었다. 이들 중 다섯 곳(카호키아, 카스카스키아, 포르 드 샤르트르, 생 필리프, 프레리 뒤 로셰)은 현재 일리노이주의 미시시피강 동쪽에 위치했으며, 강 건너편 현재 미주리주에는 생트 제네비브가 있었다.[14]
정착지 | 위치 (현재 주) | 비고 |
---|---|---|
카호키아 | 일리노이주 | 미시시피강 동쪽 |
카스카스키아 | 일리노이주 | 미시시피강 동쪽 |
포르 드 샤르트르 | 일리노이주 | 미시시피강 동쪽, 행정 중심지 |
생 필리프 | 일리노이주 | 미시시피강 동쪽 |
프레리 뒤 로셰 | 일리노이주 | 미시시피강 동쪽 |
생트 제네비브 | 미주리주 | 미시시피강 서쪽 |
이 지역은 처음에는 캐나다의 일부로 관리되었으나, 1712년 앙투안 크로자에게 루이지애나 지역이 할양되면서 루이지애나의 일부로 선포되었다.[15] 1720년대에는 공식적인 정부 기반 시설이 형성되어, 각 도시의 지도자들은 포르 드 샤르트르의 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사령관은 다시 뉴올리언스에 있는 루이지애나 총독에게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었다.[16]
어퍼 루이지애나의 지리적 경계는 명확하게 정의된 적이 없었지만, 점차 오대호 남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1722년의 왕실 칙령은 이 지역을 가장 넓게 정의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오대호 이남과 오하이오강 어귀 이북, 미시시피강 양쪽과 하류 미주리 계곡을 포함하는 프랑스가 주장하는 모든 땅을 의미했다.[17]
약 한 세대 후, 캐나다와 루이지애나 간의 무역 분쟁으로 인해 두 프랑스 식민지 사이의 경계가 설정되었다. 1745년, 루이지애나 총독 보드뢰유는 자신의 영토 북동쪽 경계를 와바시 계곡에서 버밀리온강 어귀(현재의 댄빌, 일리노이 근처)까지로 정했다. 거기서부터 '르 로셰'까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일리노이강을 따라갔고, 다시 록강 어귀(현재의 록 아일랜드, 일리노이)까지 서쪽으로 이동하는 선으로 경계를 삼았다.[17] 이에 따라 빈센과 피오리아는 루이지애나의 경계 지점이 되었다. 반면, 위아테논 (현재 라파예트, 인디애나 근처 와바시강 상류), 포트 마이애미 (현재 포트웨인, 인디애나 근처), 프레리 뒤 시엔의 전초 기지는 캐나다의 속령으로 운영되었다.[17]
이 경계는 1760년 캐나다의 프랑스군이 항복할 때부터 176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파리 조약 이후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동쪽에 남아 있던 영토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영국군은 1761년에 일리노이와 와바시 지역의 "캐나다" 전초 기지를 점령했지만, 빈센이나 미시시피강가의 카호키아, 카스카스키아 정착지는 평화 조약이 비준된 후인 1764년에 점령했다.[18]) 1762년, 당시 몬트리올 사령관이었던 토마스 게이지 장군은 새로 정복된 캐나다 지역 상황 보고서에서 루이지애나와 캐나다 사이의 경계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시시피강 상류(일리노이강 어귀 위쪽)가 캐나다의 무역 지역으로 이해되었다고 설명했다.[19]
권력 이양 후, 미시시피강 동쪽의 프랑스 정착민 중 다수는 강을 건너 스페인령 루이지애나로 이주했다. 동부 일리노이 컨트리는 영국의 퀘벡 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미국의 노스웨스트 준주가 되었다.[20] 뉴프랑스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후 이주한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은 세인트루이스(1764년 설립)와 같은 중요한 정착지를 건설했다. 세인트루이스는 프랑스 모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미주리강과 미시시피강 상류의 무역 기지들과 연결되어 이후 이 지역에 프랑스인들이 정착하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1762년 퐁텐블로 조약에서 프랑스는 전쟁 동맹국이었던 스페인에게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할양했다. 이는 스페인이 영국에게 스페인령 플로리다를 잃은 것에 대한 보상 성격이었다.[21] 프랑스가 루이지애나에 대한 주권을 잃은 후에도, 어퍼 루이지애나의 프랑스어 사용 인구 정착은 그 후 40년 동안 계속되었다. 페드로 비알과 같은 프랑스 탐험가와 변경 개척자들은 종종 스페인과 이후 미국인들의 안내자 및 통역가로 고용되었다. 세인트루이스의 스페인 부총독은 전통적인 "일리노이 컨트리"라는 명칭을 유지하며 "일리노이 서부 및 지구 사령관"과 같은 칭호를 사용했고, 행정관들은 흔히 자신들의 수도를 "일리노이 지역의 세인트루이스"라고 불렀다.[17]
1800년, 스페인은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루이지애나의 일부를 다시 프랑스에 반환했지만, 프랑스는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이 지역을 미국에 매각했다.[22] 이 기간 동안, 특히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스스로를 크리올이라고 부르던 프랑스인들은 미주리 오자크 지역으로 더 깊숙이 이동하여 채광 공동체인 브레통 광산과 라 비에유 광산(올드 마인즈)을 형성했다.[14]
어퍼 루이지애나에서는 미주리 프랑스어로 알려진 독특한 방언이 발달했다. 이 방언은 루이지애나 프랑스어나 아카디아 프랑스어를 포함한 다른 형태의 캐나다 프랑스어와는 구별된다. 이 방언은 20세기까지 중서부 지역, 특히 미주리주에서 계속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거의 사라져 몇몇 노령층 화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10]
일리노이 컨트리의 경제는 주로 농업과 모피 무역에 기반했다. 샤르트르 요새(행정 중심지), 카스카스키아, 프레리 뒤 로셰, 생트 제네비브와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프랑스 농부들은 유급 노동자와 노예 노동자를 이용하여 토지를 경작했으며, 주로 옥수수와 밀을 생산했다. 밭은 쟁기로 갈았고, 말, 소, 돼지를 키웠으며, 소량의 담배, 대마, 아마, 포도도 재배했다(단, 와인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수입했다). 농업은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주기적인 미시시피강의 홍수는 지역 사회에 피해를 주기도 했다. 교역소들은 주로 모피 무역에 집중했으며, 전략적 요충지에 소규모로 요새화되어 있었다(샤르트르 요새는 석조 건물 예외). 미국의 "산 사나이"와 유사한 역할을 했던 ''쿠레르 드 부아''(Coureurs des bois, 숲의 주자)들은 지역 원주민들과 물물 교환을 통해 비버 가죽이나 사슴 가죽을 얻고, 대신 무기, 천 등을 제공했다. 이 가죽과 모피는 이후 뉴 프랑스의 요새와 도시에서 판매되었다. 일리노이 컨트리는 또한 소금과 납을 생산하여 뉴올리언스에 공급하는 역할도 했다.
4. 2. 로어 루이지애나
로어 루이지애나는 현재 미국의 아칸소,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주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미시시피 강 하류 유역의 땅으로 구성되었다. 프랑스는 1660년대에 이 지역을 처음 탐험했으며, 이후 몇 년간 여러 무역 기지를 세웠다. 본격적인 정착은 1699년 오늘날의 빌록시 근처에 포트 모레파스가 건설되면서 시작되었다. 곧 식민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수도는 처음에는 모빌에 있다가 나중에는 빌록시로, 최종적으로는 1722년 뉴올리언스로 이전되었다. 정부는 총독이 이끌었으며, 루이지애나는 18세기 초에 점차 중요한 식민지로 부상했다.
로어 루이지애나 저지대는 온화한 기후를 가졌지만, 늦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멕시코만 연안에서 발생하는 허리케인이 특징이다. 겨울에는 서리가 내리기도 하지만, 쌀, 담배, 인디고 재배가 가능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지형은 미시시피강 삼각주 주변의 호수와 많은 습지이다. 미시시피강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물줄기는 오랫동안 완만한 흐름을 이루며, 총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그물망 같은 항해 가능한 수로를 형성했다.
어퍼 루이지애나의 초기 정착민 대부분이 프랑스령 캐나다 출신이었던 반면, 로어 루이지애나는 프랑스 식민 제국 전역에서 온 다양한 이주민들에 의해 식민화되었다. 이들은 캐나다, 프랑스 본토,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등지에서 왔다.[10]
로어 루이지애나의 경제는 노예 노동에 기반한 플랜테이션 농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농장주들은 주로 뉴올리언스에 거주하며 재무 담당자에게 농장 관리를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작물은 기후와 지형에 맞춰 다양하게 재배되었는데, 일부는 루이지애나 내에서 소비되었고(옥수수, 채소, 쌀, 가축 등), 일부는 프랑스로 수출되었다(특히 담배와 인디고).
4. 2. 1. 뉴올리언스의 경제적 역할
뉴올리언스는 수십 년 동안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루이지애나의 경제 수도 역할을 했다. 식민지 주민들은 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기반 시설을 건설했으며, 1723년에는 운하가 건설되었다. 미시시피 강변의 상점들은 창고 역할도 했다. 이 도시는 내륙 지역에서 수집한 모피(생가죽)와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농산물, 담배, 인디고 등을 수출했다. 물론 지역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가게와 시장에서는 플랜테이션 생산품이 거래되었다.프랑스에서 드물게 도착하는 선적물에는 식료품(라드, 밀), 술, 그리고 다양한 필수 완제품(무기, 도구, 천, 의류)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반적으로 수출량은 비교적 적었다. 뉴올리언스는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로 목재, 쌀, 옥수수를 계속 판매했다.
5. 종말
7년 전쟁에서의 패배는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에 종말을 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의 도움으로 일부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캐나다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전세가 기울었다. 결국 1763년 체결된 파리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동쪽 영토를 영국에, 강 서쪽과 뉴올리언스를 스페인에 할양하며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사실상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의 여파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다시 프랑스의 손에 잠시 돌아오게 된다. 1800년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비밀리에 반환받았으나, 아이티 혁명 진압 실패와 영국과의 전쟁 재개 가능성 등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나폴레옹은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1803년, 프랑스는 미국에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를 매각(루이지애나 매입)하였고, 이로써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역사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1. 7년 전쟁과 그 결과
유럽에서 7년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부터 북아메리카에서는 프랑스와 영국 간의 적대 행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북미에서 프랑스-인디언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는 전쟁 초기(1754년-1757년)에 아메리카 원주민 동맹의 도움을 받아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1758년부터 1760년까지 캐나다에서 연속적인 패배를 겪었다. 특히 수도 퀘벡과 몬트리올의 항복은 결정적이었으며, 캐나다를 잃게 되면서 루이지애나의 방어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1763년 2월 10일에 체결된 파리 조약은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서 철수하는 것을 공식화했다. 이 조약에 따라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지역은 영국에 할양되었다. 뉴올리언스와 미시시피 강 서쪽 지역은 이미 전년도(1762년)에 비밀 조약을 통해 스페인에 넘겨진 상태였다.
이 결정으로 일부 프랑스인 정착민들이 루이지애나를 떠나기도 했지만, 스페인은 비교적 늦은 1769년에야 새로운 영토를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루이지아나로 명명했다. 스페인인의 이주는 많지 않았다. 한편, 동쪽에서는 신생 미국이 서부로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1795년에는 미국인들에게 미시시피 강에서의 상업적 항해가 허용되었다.
5. 2.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일시적 부활

프랑스 혁명 시기,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던 루이지애나는 혼란을 겪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일부 주민들은 프랑스 본국에 복속을 청원했으며, 노예들은 1791년과 1795년에 반란을 시도하기도 했다.
1800년 10월 1일 비밀리에 체결된 산 일데폰소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파르마 공국을 받는 대가로 루이지애나 서부와 뉴올리언스를 프랑스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이 양도는 1801년 3월 21일에 서명된 아란후에스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군대는 먼저 아이티 혁명(현재의 아이티)을 진압해야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영국과의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1803년 4월 30일, 새로 건국된 미국에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매각 금액은 1500만달러 (8천만 프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루이지애나 매입 참조) 미국의 루이지애나에 대한 주권은 1803년 12월 20일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6. 프랑스 유산
루이지애나의 프랑스 식민지화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으며, 이는 최근 수십 년간 활발히 기념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어, 루이지애나 크리올 프랑스어, 케이준 프랑스어의 유산은 계승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언어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1968년 CODOFIL(루이지애나 프랑스어 개발 위원회)이 설립되었다. 어떤 형태의 프랑스어(프랑스 본토 프랑스어, 캐나다 프랑스어, 표준 루이지애나 프랑스어, 케이준 프랑스어)를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루이지애나의 케이준 문화가 우세한 지역에서는 캐나다의 아카디아 커뮤니티와 협력하여 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육을 위한 교수를 파견받고 있다. 2003년 기준으로 루이지애나 주민의 약 7%가 프랑스어를 사용했으며, 대부분은 영어도 함께 사용한다. 주 인구의 약 25%는 프랑스계 조상을 두고 있으며, 르블랑(LeBlanc|르블랑프랑스어), 코르디에(Cordier|코르디에프랑스어), 도티에(Dauthier|도티에프랑스어), 디옹(Dion|디옹프랑스어), 메나르(Menard|메나르프랑스어), 피노(Pineaux|피노프랑스어), 에베르(Hébert|에베르프랑스어), 아르두앵(Ardoin|아르두앵프랑스어), 루비두(Roubideaux|루비두프랑스어) 등 프랑스 기원의 성씨를 가진 경우가 많다.
많은 도시와 마을 이름 역시 프랑스 기원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세인트루이스, 디트로이트, 배턴루지, 뉴올리언스, 라피엣, 모빌, 디모인, 세인트클라우드, 덜루스 등이 있다. (단, 현재의 덜루스는 옛 노스웨스트 준주에 위치하며, 이전 루이지애나 영토는 아니다). 미네소타주의 옛 주기와 문장(2024년 변경 전)은 프랑스어 문구를 담고 있었으며, 아이오와주의 주기는 프랑스 국기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다. 미주리주 기와 뉴올리언스 기의 색상 역시 프랑스 국기에서 유래했다. 세인트루이스의 기에는 프랑스 왕실을 상징하는 백합 문양(플뢰르 드 리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역사적인 축제와 기념 행사들은 프랑스의 영향을 보여준다. 1999년 루이지애나는 설립 300주년을 기념했고, 2001년에는 디트로이트가 같은 행사를 열었다. 2003년에는 루이지애나 매입 2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 행사와 역사 회고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특정 장소들은 프랑스가 남긴 문화 유산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뉴올리언스의 프렌치 쿼터가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며, 프랑스인들이 건설했던 많은 요새가 복원되어 방문객에게 공개되고 있다. 2015년에는 세인트루이스가 프랑스에 의해 도시가 세워진 지 250주년을 기념했다.
루이지애나주의 민사법 체계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관습법(영미법)이 아닌 대륙법 체계를 따르고 있으며, 이는 특히 프랑스 민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루이지애나 문화의 중요한 부분 역시 프랑스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크리올 노래는 블루스와 재즈 음악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종종 프랑스어로 불리는 케이준 음악은 오늘날에도 활발히 연주되고 있다. 뉴올리언스의 카니발 시즌은 마디 그라 날에 절정을 이루는데, 이는 지역의 오랜 로마 가톨릭 유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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