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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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수전(五銖錢)은 기원전 118년 전한 무제 때부터 당나라가 개원통보를 발행하기 전까지 700년 이상 중국에서 사용된 엽전이다. 초기에는 군국오수전이 주조되었으며, 이후 시대와 왕조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오수전이 발행되었다. 오수전은 중국 화폐의 표준이 되었으며, 한반도, 일본, 쿠차 등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수전은 또한 부적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상징과 문양을 담고 있다. 오수전은 현대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다수 발견되고 있으며, 당시의 경제, 문화, 사회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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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통보는 621년 당나라 고조의 칙령으로 주조된 중국 동전으로, '통보' 명칭 사용의 효시이자 주변국 화폐 및 현대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친 화폐사적으로 중요한 동전이다.
| 오수전 | |
|---|---|
| 개요 | |
![]() | |
| 종류 | 화폐 |
| 사용 기간 | 기원전 118년 - 621년 |
| 국가 | 한나라 ~ 당나라 |
| 이전 | 반량전 |
| 이후 | 개원통보 |
| 명칭 | |
| 한자 | 五銖 |
| 병음 | wǔ zhū |
| 로마자 표기 | o ju |
| 한국어 | 오수전 |
| 역사 | |
| 주조 시작 | 기원전 118년 |
| 주조 중단 | 621년 |
| 사용 중단 이유 | 개원통보 발행 |
2. 전한


한나라 무제는 적극적인 대외 원정으로 재정 지출이 막대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반냥전보다 무겁고, 양면과 가장자리에 '곽(郭)'이라 불리는 테두리를 두른 오수전 주조를 시작했다.[5]
조정은 오수전의 치수, 중량, 금속 비율을 규정하여 지방 주조를 허가했다. 당시 군국에서 중앙으로 납부하는 조세를 오수전으로 정했기 때문에 지방에서도 대규모 주조가 이루어졌다. 오수전의 원료는 기존의 반냥전과 같은 구리였는데, 이를 녹여 오수전으로 다시 주조하면 가치가 4/5로 줄어 군국의 경제력을 약화시킬 목적이었다는 학설도 있으며, 실제로 오수전 주조 사양을 어겨 작위가 박탈된 제후도 있었다.
처음 주조된 화폐는 군국오수전(郡國五銖錢)이다. 원정 3년(기원전 114년), 조정은 단기간 세수 증가를 위해 군국오수전의 다섯 배 액면가를 지닌 적측오수전(赤側五銖錢)을 발행, 세금 징수와 지출에 모두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유통이 거듭될수록 실질 가치가 감소하고, 개인의 무단 주조가 성행하여 이듬해 폐지되었다. 이후 삼관오수전(三官五銖錢)이 발행되었다.
삼관오수전은 지방 주조를 금지하고, 상림원에 대규모 주조소를 설치하여 수형도위의 속관인 종관, 기교, 변동에게 주조를 맡긴 것에서 '삼관'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지방의 예전 화폐를 포함한 구리를 삼관에 집중시켜 사적 주조를 예방하고, 화폐 경제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2. 1. 오수전 주조 이전의 화폐
한나라 무제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해외 원정 등에 막대한 지출이 발생했다. 이러한 재정 지출을 타개하기 위해 오수전 주조가 시작되었다. 오수전은 이전에 유통되던 반냥전보다 무거웠으며, 양면과 가장자리에 곽(郭)이라고 불리는 테두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5]오(五)는 숫자 5를 의미하고, 주(銖)는 고대 중국의 무게 단위로 기장 100알에 해당하는 무게였다. 따라서 오수전은 약 4그램의 무게를 가졌다. 원래 반량전(半兩錢)은 1량(兩, 돈의 24배)이 24주였으므로 12주의 무게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반량전의 무게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무제 통치 기간에 이전의 삼주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표준 단위로 오수전이 도입되었다. 오수전의 도입으로 청동 화폐와 금의 표준 환율은 청동 오수전 1만 개가 금 1냥(斤)과 같도록 고정되었다.[6]
2. 2. 오수전의 등장 배경
한나라 무제는 적극적인 대외 원정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재정 지출이 막대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수전 주조가 시작되었다. 오수전은 이전에 유통되던 반냥전보다 무겁고, 양면과 가장자리에 '곽(郭)'이라 불리는 테를 두른 것이 특징이다.[5]조정에서는 오수전의 치수, 중량, 금속 비율을 규정하여 지방에서 주조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당시 군국에서 중앙으로 납부하는 조세를 오수전으로 정했기 때문에 지방에서도 대규모 주조가 이루어졌다. 오수전의 원료인 구리는 기존의 반냥전과 동일하였는데, 이를 녹여 오수전으로 다시 주조하면 가치가 4/5로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군국의 경제력을 약화시킬 목적이었다는 학설도 있으며, 실제로 오수전 주조 사양을 어겨 작위가 박탈된 제후도 있었다.[7]
처음 주조된 화폐는 군국오수전(郡國五銖錢)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단기간의 세수 증가를 목표로 원정 3년(기원전 114년)에 군국오수전의 다섯 배 액면가를 지닌 적측오수전(赤側五銖錢)을 발행하여 세금을 거둘 때와 지출할 때 모두 이것만 사용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세수가 증가하였으나 유통이 거듭될수록 실질적으로 감소하였고, 개인이 함부로 주조하는 일이 벌어져 이듬해에 폐지되었다. 그 후 삼관오수전(三官五銖錢)이 발행되었다.[8]
삼관오수전은 지방에서의 주조를 금지하고, 상림원에 대규모 주조소를 설치하여 수형도위의 속관인 종관, 기교, 변동에게 주조를 맡긴 것에서 '삼관'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지방의 예전 화폐를 포함한 구리를 삼관에 집중시켜 사적 주조를 예방하고, 화폐 경제의 안정화를 꾀하였다.[9]
2. 3. 초기 오수전 (군국오수전)
한나라 무제는 적극적인 대외 원정으로 재정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수전 주조를 시작했다. 오수전은 기존에 유통되던 반냥전보다 무겁고, 양면과 가장자리에 '곽(郭)'이라 불리는 테두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5]한나라 조정은 오수전의 크기, 무게, 금속 비율을 규정하여 지방에서 주조하는 것을 허가했다. 당시 군국에서 중앙으로 납부하는 세금을 오수전으로 정했기 때문에 지방에서도 대규모 주조가 이루어졌다. 오수전의 원료는 기존 반냥전과 같은 구리였는데, 이를 녹여 오수전으로 다시 만들면 가치가 4/5로 줄었다. 이 때문에 군국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는 학설도 있으며, 실제로 오수전 주조 규격을 어겨 작위가 박탈된 제후도 있었다.[7]
처음 주조된 화폐는 군국오수전(郡國五銖錢)이라 불렸다. 그러나 한나라 조정은 단기간의 세수 증가를 위해 원정 3년(기원전 114년)에 군국오수전보다 5배 액면가를 가진 적측오수전(赤側五銖錢), 즉 적측전을 발행하여 세금 징수와 지출에 모두 사용하게 했다. 처음에는 세수가 늘었지만, 유통이 계속되면서 실질 가치가 하락하고 개인의 무단 주조가 성행하여 이듬해 폐지되었다.
이후 삼관오수전(三官五銖錢)이 발행되었다. 삼관오수전은 지방 주조를 금지하고, 상림원에 대규모 주조소를 설치하여 수형도위의 속관인 종관, 기교, 변동에게 주조를 맡긴 것에서 '삼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방의 옛 화폐를 포함한 구리를 삼관에 집중시켜 사적 주조를 막고 화폐 경제 안정을 꾀했다.[8]
2. 4. 적측오수전
기원전 115년 무제는 모든 오수전을 5전의 가치로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이 화폐는 가장자리가 다듬어져 구리의 색깔이 보이기 때문에 “적측오수(赤仄五銖)” 또는 “종관적측(鍾官赤仄)”으로 알려져 있다.[7] “오(五)”자가 상당히 곧은 선으로 구성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적측오수전은 1개가 군국오수전 5개의 가치를 가졌으며, 조세 징수와 국가 세출에는 적측전의 사용을 의무화했다. 그러나 널리 유통되면서 실질적인 가치 감소와 사주전(私鑄錢)이 성행함에 따라 다음 해에 군국오수전, 적측오수전 모두 폐지되었다.[7]2. 5. 상림삼관오수전
무제는 적극적인 외교 정책으로 해외 원정에 따른 지출이 막대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오수전 주조를 시작했다. 원정 3년(기원전 114년)에 군국오수전의 다섯 배 액면가를 지닌 적측오수전(赤側五銖錢)을 발행했으나, 실질 가치 감소와 사주전(私鑄錢) 문제로 이듬해 폐지되었다. 이후 삼관오수전(三官五銖錢)이 발행되었는데, 지방 주조를 금지하고 상림원에 대규모 주조소를 설치하여 수형도위의 속관인 종관, 기교, 변동에게 주조를 맡겼다. '삼관'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 삼관오수전은 사적 주조를 예방하고 화폐 경제의 안정화를 꾀하였다.[8]기원전 113년부터 중앙 정부는 화폐 제조에 대한 독점 권한을 되찾았고, 이 시점부터 상림삼관(上林三官)에서 오수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오수전은 5전이라는 비현실적인 명목 가치를 가진 적측오수전과 달리 1전의 명목 가치를 가졌다. 대부분의 상림삼관 오수전에는 앞면의 정사각형 중앙 구멍 위에 볼록한 선이 있다.
3. 신나라
신나라를 건국한 왕망은 화폐를 수없이 많이 주조하여 국가 경제를 크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12] 후한 건국 초기에는 혼란으로 인해 화폐를 주조할 여유가 없었으나, 건무 16년(40년)에 오수전 주조가 결정되어 이듬해부터 주조가 시작되었다. 후한은 전한과 달리 주조 사양을 고치는 일은 없었으나, 시기에 따른 품질 차이가 있었다. 특히 동탁 집권기에는 동탁오수전(董卓五銖錢)이라고 불리는 매우 조악한 화폐가 발행되었는데, 단순히 각종 동전에 구멍을 뚫거나 바깥쪽을 갈아 작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사적 주조가 횡행하여 오수전은 화폐로서의 가치를 잃었고, 이후 백 개에서 천 개를 꿰어서 유통하기에 이르렀다.
3. 1. 왕망의 화폐 개혁
왕망은 신나라를 세우고 한나라를 멸망시킨 후, 서한의 오수(五銖) 화폐를 대체하고자 했다.[12] 이는 그가 오수(五銖)의 명칭에 들어있는 금(金, jīn) 자의 획(釒)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획은 한나라 황실의 성씨인 유(劉)에도 들어있는 글자였다. 왕망은 바로 그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 화폐 개혁을 단행했지만, 성공 여부는 제각각이었다. 기원후 7년 최초의 개혁에서는 오주화를 유지하면서 칼 모양의 돈 두 종류를 다시 도입했다. 그 후의 개혁에서 오수전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왕망은 오수전을 유통하는 자는 누구든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왕망이 도입한 새로운 화폐 제도는 백성들에게 혼란스럽고 복잡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은밀하게 오수전을 계속 유통했다.[13][14]4. 후한
신나라를 건국한 왕망은 화폐를 수없이 많이 주조하여 국가 경제가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건무 원년(25년)에 후한이 건국된 후, 처음에는 혼란으로 인해 화폐를 주조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건무 16년(40년)에 오수전 주조가 결정되었고, 이듬해부터 주조가 시작되었다. 후한은 전한과 달리 주조 사양을 고치는 일은 없었으나, 시기에 따른 품질 차이가 있었다.
특히 후한 말 동탁 집권기에는 동탁오수전(董卓五銖錢)이라고 불리는 매우 조악한 화폐가 발행되었는데, 각종 동전에 구멍을 뚫어 사용하거나 바깥쪽을 갈아 작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사적 주조가 횡행하여 오수전은 화폐로서의 가치를 잃었고, 이후 백 개에서 천 개를 꿰어서 유통하게 되었다.[15]
철 오주는 서한 시대의 오수 화폐와 유사하며, 기원후 25년에 사천에서 반란을 일으켜 철화폐를 발행한 공손술의 것으로 여겨진다. 두 개의 철 오주는 한 개의 '건무오주'(建武五銖)와 같았다. 오수(銖) 부분의 머리가 둥근 것이 동한(東漢) 오수(五銖)의 특징이다. 기원후 30년에는 사천의 젊은이들이 "누런 소! 흰 배! 오수(五銖) 현금이 돌아오게 하라!"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것은 왕망의 화폐와 공손술의 철화폐를 비웃는 것으로, 건무 16년(기원후 40년)에 동한 광무제에 의해 회수되었다. 광무제는 나라의 부의 기반은 훌륭한 정치 경제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옛날의 좋은 오수(五銖) 화폐에 있었다는 조언을 듣고 오수(五銖) 현금을 다시 발행하였다.[9]
4. 1. 오수전의 부활
왕망이 신을 건국한 후, 명목 가치가 재료 가치를 따르지 않는 화폐가 다량 주조되어 국내 경제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25년 후한이 건국되었으나, 건국 초기 혼란으로 인해 당초에는 화폐 주조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40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오수전 주조가 결정되었고, 이듬해부터 주조가 시작되었다. 후한은 왕조 전체를 통해 개주(改鋳)를 하지 않았으나, 시기에 따라 질이 좋고 나쁨이 있었다. 특히 후한 말 동탁이 상국이 되어 있던 시기에는 '''동탁 오수전''' 또는 '''동탁 무문 소전'''이라 불리는 질이 낮은 동전이 발행되었다. 이것은 소형이고 얇으며, 표면의 “五銖” 글자가 거의 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민간에서는 각종 동전을 뚫어 안과 밖으로 나누어 2개로 사용하는 일이 행해졌고(겉은 “획환(劃環)전”, 속은 “전륜(鋑輪)전”이라 부르는데, 전자는 주로 동탁 오수전의 원료로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겉을 깎아 소형화한 것도 사용되었으며(마변전), 사주전도 널리 유통되었다. 그 이후로는 오수전은 더 이상 1개 단위로 유통되지 않고, 100개나 1000개를 끈으로 묶어 유통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4. 2. 동탁오수전
왕망이 신을 건국하자 명목상 가치가 재료 가치를 따르지 않는 화폐가 다량 주조되었고, 국내 경제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9] 25년에 후한이 건국되었으나 건국 초기 혼란으로 인해 당초에는 화폐 주조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40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오수전 주조가 결정되었고, 이듬해부터 주조가 시작되었다. 후한은 왕조 전체를 통해 개주(改鋳)를 하지 않았으나, 시기에 따라 질이 좋고 나쁨이 있었다.[9] 특히 후한 말 동탁이 상국이 되어 있던 시기에는 '''동탁 오수전''' 또는 '''동탁 무문 소전'''이라 불리는 질이 낮은 동전이 발행되었다. 이것은 소형이고 얇으며, 표면의 “五銖” 글자가 거의 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민간에서는 각종 동전을 뚫어 안과 밖으로 나누어 2개로 사용하는 일이 행해졌고(겉은 “획환(획환)전”, 속은 “전륜(전륜)전”이라 부르는데, 전자는 주로 동탁 오수전의 원료로 사용되었다고도 한다),[9] 겉을 깎아 소형화한 것도 사용되었으며(마변전), 사주전도 널리 유통되어 그 이후로는 오수전은 더 이상 1개 단위로 유통되지 않고, 100개나 1000개를 끈으로 묶어 유통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15]군벌 동탁의 통치 기간 동안 한나라의 수도는 낙양에서 장안(현재의 시안)으로 옮겨졌고, 그는 진시황 시대의 대형 청동상들을 녹여 소형 현전을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오수(五銖) 현전들은 양이 매우 많았고 크기가 작아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거위 눈 전(鵝眼錢, é yǎn qián중국어)” 또는 “닭 눈 전(雞目錢, jī mù qián중국어)”이라고 불렀다. 이 현전들은 크기가 매우 작아서 오(五) 자의 왼쪽 절반과 주(銖) 자의 오른쪽 절반만 새겨져 있었다. 또한 이러한 현전이 일반 크기의 오주(五銖) 현전의 안쪽을 잘라내어 두 개의 현전을 만드는 “자른 가장자리 전(鑿邊錢, záo biān qián중국어)”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위 눈 오주 전” 또는 “닭 눈 오주 전”은 실제로 이처럼 작은 크기로 주조되었으며, 주조 과정에서 남은 금속 주자(혹은 잔여물)가 “거위 눈” 또는 “닭 눈 오주 전”의 5시 방향 가장자리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9]
5. 삼국시대

신(新)나라가 멸망한 후 오수(五銖) 현전의 생산이 재개되었다. 한나라 복국 후 오수(五銖) 현전의 생산은 광무제(재위 25~56년) 때 처음으로 재개되었다.[15] 군벌 동탁(董卓)의 통치 기간 동안 한나라의 수도는 낙양(洛陽)에서 장안(長安)(현재의 시안(西安))으로 옮겨졌고, 그는 진시황(秦始皇) 시대의 대형 청동상들을 녹여 소형 현전을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이 오수(五銖) 현전들은 양이 매우 많았고 크기가 작아서 “거위 눈 전(鵝眼錢, é yǎn qián)” 또는 “닭 눈 전(雞目錢, jī mù qián)”이라고 불렸다. 크기가 매우 작아서 오(五) 자의 왼쪽 절반과 주(銖) 자의 오른쪽 절반만 새겨져 있었다. 이 현전은 일반 크기의 오수(五銖) 현전의 안쪽을 잘라내어 두 개의 현전을 만드는 “자른 가장자리 전(鑿邊錢, záo biān qián)”과 다르다. “거위 눈 오주 전” 또는 “닭 눈 오주 전”은 실제로 이처럼 작은 크기로 주조되었으며, 주조 과정에서 남은 금속 주자(잔여물)가 5시 방향 가장자리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9]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220년부터 280년까지 지속된 시기로, 동한(東漢)의 멸망 이후 분열의 시대였다.[16]
왕망이 신을 건국하자 명목상 가치가 재료 가치를 따르지 않는 화폐가 다량 주조되었고, 국내 경제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25년에 후한이 건국되었으나 건국 초기 혼란으로 당초에는 화폐 주조를 할 여유가 없었다. 40년에 오수전 주조가 결정되었고, 이듬해부터 주조가 시작되었다. 후한은 왕조 전체를 통해 개주(改鋳)를 하지 않았으나, 시기에 따라 질이 좋고 나쁨이 있었다. 특히 후한 말 동탁이 상국이 되었을 때 '''동탁 오수전''' 또는 '''동탁 무문 소전'''이라 불리는 질이 낮은 동전이 발행되었다. 이것은 소형이고 얇으며, 표면의 “五銖” 글자가 거의 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동전을 뚫어 안과 밖으로 나누어 2개로 사용했고(겉은 “획환(획환)전”, 속은 “전륜(전륜)전”, 전자는 주로 동탁 오수전의 원료), 겉을 깎아 소형화한 것(마변전)도 사용되었으며, 사주전도 널리 유통되어 오수전은 더 이상 1개 단위로 유통되지 않고, 100개나 1000개를 끈으로 묶어 유통했다.
서진은 오나라의 화폐를 진나라에 항복한 후에도 사용했고, 동진에서는 오나라 화폐가 유통되어 위나라나 진나라 화폐와 혼용되었으며, 오수전 1장의 가치를 가지고 유통되었다[54][55]。“촉오수”가 실제로는 서진 이후의 주조로 생각되는 것처럼, 새로운 오수전을 만드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짧은 전국 통일 기간 안에 본격적인 화폐 주조나 통일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56]。
5. 1. 위나라
조위(曹魏)는 220년 조조(曹操)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오수전만 주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의 주형이 발견되었고, 태화(太和) 원년(227년)부터 함희(咸熙) 2년(265년)까지 오수전이 주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18]위에서는 조조가 후한의 승상이었던 208년에 동탁(董卓) 이전의 오수전으로 환원하는 정책을 시행했고, 뒤를 이은 조비도 위 왕조 성립 후 221년에 계속해서 오수전을 공식 통화로 삼았다. 그러나 질이 낮은 화폐가 유통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대량 발행과 회수를 할 수 없어, 같은 해 안에 곡백(穀帛)의 실물에 의한 대용화폐를 사용했다. 하지만 질이 낮은 곡백이 화폐로 사용되는 경우가 늘어남에 따라 227년에 오수전을 다시 시행했다.
『삼국지』에는 “오수전을 시행했다”(「위서」명제기)라고 되어 있고, 『진서』에는 “다시 오수전을 세웠다”(식화지)라고 되어 있어, 한나라의 오수전이었는지, 아니면 새로운 오수전을 만들었는지가 문제였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삼국시대 무덤에서 한나라의 것보다 소형이고 조잡한 “조위오수”라고 불리는 화폐가 발견되어 새로운 오수전을 주조했던 것이 밝혀졌다. 전(鐚)전을 회수하여 원활한 경제 활동을 모두 감당할 만큼의 대량의 오수전을 발행할 능력이 없었고, 전륜전(剪輪銭) 등 질이 나쁜 화폐의 유통으로 인해 그것들과 실질 가치가 다른 한나라와 같은 오수전의 주조가 불가능해진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위나라에서는 인두세인 정액전납(定額銭納)의 산부(算賦), 구부(口賦)에서 호마다의 세인 면(綿), 견(絹)납의 호조제로 바뀌었다. 이는 전한의 균수법(均輸法), 평준법(平準法)에서 이어지는 무민억상(撫民抑商) 정책이었다.
서위는 535년부터 556년까지 짧게 존재했던 왕조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대통(大統, 535~551) 시대에 무주(五銖) 화폐가 주조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영안 무주(永安五銖) 화폐나 수(隋)나라의 무주 화폐와 유사한 서체를 가지고 있었다.[9] 대통 무주(大統五銖錢, ''dà tǒng wǔ zhū qián'') 화폐의 특징적인 부분은 넓은 외곽 테두리와, 정사각형 중앙 구멍의 오른쪽 “오(五)” 자 부분에만 있는 내곽 테두리이다.

“조위오수”는 오수전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실질적인 가치는 액면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5. 2. 촉나라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220년부터 280년까지 지속된 시기로, 동한(東漢)의 멸망 이후 분열의 시대를 특징으로 한다.[16] 촉한(蜀漢)은 유비(劉備)가 성도(成都)를 장악한 후 건국되었다. 성도 함락 직후 유비는 국고가 완전히 텅 비어 군사 비용을 충당할 자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심각한 구리 부족과 맞물렸다. 구리 부족이 너무 심각하여 침구를 걸던 갈고리까지 녹여 화폐를 주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유비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직백오수(直百五銖)라는 화폐를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이 화폐는 일반 오수전 100개의 명목 가치를 가졌다. 신(新)나라 시대의 화폐처럼 명목 가치와 내재 가치의 엄청난 차이로 인해 실패한 것과 달리, 촉한의 화폐는 동탁(董卓)이 주조한 오수전의 무게가 겨우 1그램 정도였던 것과 달리 큰 반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전부터 중국 정부는 정부가 새로운 (신용) 화폐를 발행하고 가치를 설정하지만, 백성들이 이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아 유통되지 않고 인플레이션과 위조가 만연하는 악순환을 겪었다. 직백오수는 두께에 따라 “얇은” 유형과 “두꺼운” 유형으로 나뉜다.[17] 유비 치세의 촉한에서 지름 21.7mm, 무게 약 2.3g의 테두리가 있는 오수전 변종을 주조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후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를 “촉오수(蜀五銖)”라고 부른다.[9]
한 왕조의 부흥을 외친 촉한에서 오수전이 주조되었고, “촉오수”라고 불리는 오수전이 그것에 해당한다는 설이 있었지만, 실제 발굴에서 출토된 예는 모두 서진 이후의 무덤·유적에서 발굴된 예이며, 촉한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한 유비 이전에 촉을 지배했던 유장이 독자적인 오수전을 발행했고, 발행 주체는 불명확하지만 지역의 지방 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태평백전(太平百銭) 등의 독자적인 화폐도 확인되고 있다. 촉한 정부 발행의 통화 외에 그러한 화폐도 촉한에서는 병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조위의 “조위오수”, 촉의 “직백오수”, 오의 “대천오백”·“대천당천”은 모두 오수전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실질적인 가치가 액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촉한은 액면과 실질의 차액을 이용하여 발행 초기에는 일시적으로 “부고를 풍족하게 할 수 있었다”(“촉서” 유바전(劉巴傳)소인『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고 하지만, 실제로는 화폐 가치의 하락과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을 초래했을 뿐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오의 “대천당천”의 크기는 오수전과 같고, “대천당천”은 실질적으로는 오수전과 거의 같은 가치였다고 생각된다. 손권은 이 현실을 깨닫고 대전(大銭)을 폐지하는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북벌로 재정이 궁핍했던 촉한은 “직백오수”보다 더 가치가 낮은 “직일”·“직백”을 발행하여 일시적으로 버티려 했고, 더욱 국력을 쇠퇴시켰다고도 한다.
가장 백전(百錢)과 같이 액면이 높은 오수전은 이전부터 주조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삼국식화지(三国食貨志)에는 “전형오수(伝形五銖)는 반드시 유비가 주조한 것이 아니고, 직백전이 오래 유통되어 폐단이 많아졌기 때문에 촉에서 이를 주조하여 백성의 곤궁함을 구제한 것이다.”라고 있는 것처럼 『진서』식화지에 적히는 전의 빈명(空名)이 삼국 시대의 주조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기록도 존재한다.
5. 3. 오나라
삼국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220년부터 280년까지 지속된 시기로, 동한(후한)의 멸망 이후 분열의 시대를 특징으로 한다.[16] 촉한은 유비가 성도를 장악한 후 건국되었다. 성도 함락 직후 유비는 국고가 비어 군사 비용을 충당할 자금이 없었고, 구리 부족까지 겹쳤다. 구리 부족이 심각하여 침구를 걸던 갈고리까지 녹여 화폐를 주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비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직백오수(直百五銖, ''zhí bǎi wǔ zhū'')라는 화폐를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이 화폐는 일반 오수전 100개의 명목가치를 가졌다. 신(新)나라 시대의 화폐처럼 명목가치와 내재가치 사이의 큰 차이로 인해 실패한 것과 달리, 촉한의 화폐는 큰 반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전부터 중국 정부는 신용 화폐를 발행하고 가치를 설정했지만, 백성들이 이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아 유통되지 않고 인플레이션과 위조가 만연하는 악순환을 겪었다. 직백오수는 두께에 따라 “얇은” 유형과 “두꺼운” 유형으로 나뉜다.[17] 유비 치세의 촉한에서 지름 21.7mm, 무게 약 2.3g의 테두리가 있는 오수전 변종을 주조했다는 설도 있지만, 후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를 “촉오수(蜀五銖, ''shǔ wǔ zhū'')”라고 부른다.[9]오의 손권도 236년에 오수전 500장의 가치를 가진 “대천오백”, 이어 238년에는 오수전 1000장의 가치를 가진 “대천당천”이라고 불리는 화폐를 발행했다. 하지만 246년 손권은 신통화 도입 목적이 “화폐를 널리 하는 것”에 있었지만, “민심으로 편리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신화폐를 폐지했고, 민간의 화폐는 회수되어 오수전과 교환되었다. 오의 “대천당천”의 크기는 오수전과 같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오수전과 거의 같은 가치였다고 생각된다. 손권은 이 현실을 깨닫고 대전(大銭)을 폐지하는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된다.
가장 백전(百錢)과 같이 액면이 높은 오수전은 이전부터 주조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삼국식화지(三国食貨志)에는 “전형오수(伝形五銖)는 유비가 주조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직백전(直百銭)이 오래 유통되면서 폐단이 많아지자 촉에서 백성들의 곤궁함을 구제하기 위해 주조한 것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서』 식화지에 적힌 전의 빈명(空名)이 삼국 시대의 주조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기록도 존재한다.
동진에서는 오의 화폐가 유통되어 위나 진의 화폐와 혼용되었으며, 오수전 1장의 가치를 가지고 유통되었다.[54][55]
6. 서진 및 남북조 시대
사마염 통치 아래 중국은 서진의 지배 아래 짧은 기간 동안 통일되었다. 서진 시대 촉 지역(현재 쓰촨성) 成都에서 오주전이 주조되었다.[19] 이후, 중국은 극도로 약화되어 북방의 오호가 중국 영토를 정복하여 십육국 시대를 열었다.
전량은 "촉오주(Shu Wu Zhu)"를 주조했는데, 일부는 현재 감숙성에서 발견되었다.[9] 동진 멸망 후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고, 남조에서는 오수전의 중앙 부분을 제거하여 두 개의 화폐를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 바깥쪽 고리는 "실고리 오주", 안쪽은 "끌로 다듬은 가장자리 오주" 또는 "잘라낸 가장자리 오주"라고 불렸다. 사설 주조로 인해 "거위 눈" 또는 "닭 눈" 화폐가 생겨났다.[9][20]
구차는 불교 국가로, 실크로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세기 또는 4세기경부터 한나라 이후 시대의 오주전에서 영감을 받은 오주전을 주조했다.[28] 구차 오주전은 다섯 가지 유형이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작고 얇으며 글씨가 약하거나 없는 것이 특징이다. "한구이 이중언어 오주전"은 앞면에 중국 오주전과 유사하고 뒷면에 구차 문자가 새겨져 있다.[29][30] 현장은 630년 구차 방문 시 "작은 청동 동전"을 언급했는데, 이는 "한구이 이중언어 오주전"일 가능성이 높다.[9]
서진에서는 '''진오수전(晋五銖銭)''', 동진에서는 '''심랑(沈郎)오수전(沈郎五銖銭)'''이라는 소형 오수전이 발행되었다. 심랑오수전은 "五銖"의 금변(金偏)이 없고 "五朱"로 표기된 것이 특징이다. 육조 시대에는 발행 왕조를 확정할 수 없는 '''육조오수전(六朝五銖銭)'''이 있는데, 제작이 조악하고 무게가 일정하지 않으며 글자도 다양하게 변형되었다.
6. 1. 서진
사마염 통치 아래 중국은 서진의 지배를 받으며 짧은 기간 동안 통일되었다. 서진은 낙양에서 통치하였다. 진의 통치 아래 중국 경제는 호전되었고, 비록 진 시대의 주화 생산을 언급하는 역사 기록은 없지만, 유통되던 한나라 시대 오수(五朱) 전(錢)의 양이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정부는 시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다량의 전(錢)을 주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주화 대사전』(The Great Dictionary of Chinese Numismatics)은 서진 시대 촉 지역(현재 쓰촨성) 成都에서 오수전이 주조되었다고 주장한다.[19] 사마씨 가문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파괴적인 내전이 발생한 후, 중국은 극도로 약화되어 북방의 “오호 십육국”이 중국 영토를 정복하기 시작하여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고 십육국 시대를 열었다.서진에서는 '''진오수전(晋五銖銭)'''이라 불리는 소형의 오수전이 발행되었고, 동진에서는 '''심랑(沈郎)오수전(沈郎五銖銭)'''이라 불리는 소형의 오수전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주조가 조악하여 오나 북조의 동전이 유통되는 상황이었다. 심랑오수전은 화폐 문자의 "五銖"의 금변(金偏)이 없고 "五朱"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6. 2. 남조
사마염 통치 아래 중국은 서진의 지배를 받으며 짧은 기간 동안 통일되었다. 서진은 낙양에서 통치하였으며, 이 시기 중국 경제는 호전되었다. 비록 진 시대의 주화 생산을 언급하는 역사 기록은 없지만, 유통되던 한나라 시대 오수(五朱) 현전의 양이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정부는 시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다량의 현전을 주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주화 대사전』은 서진 시대 촉 지역(현재 쓰촨성) 成都에서 오주 현전이 주조되었다고 주장한다.[19] 사마씨 가문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파괴적인 내전이 발생한 후, 중국은 극도로 약화되어 북방의 오호가 중국 영토를 정복하기 시작하여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고 십육국 시대를 열었다.전량(Former Liang)은 전통적으로 촉(Shu) 왕국의 것으로 여겨져 온 "촉오주(Shu Wu Zhu)" 현(Cash coin)을 주조하기 시작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육로(Hexi corridor)(현재 감숙성)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고고학자들이 이 현이 장귀의 통치 기간 동안 주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9]
동진이 멸망한 후 420년에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조 시대에는 오수(五銖) 화폐의 중앙 부분을 제거하여 두 개의 별개 화폐를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 오주 화폐의 바깥쪽 고리에서 잘라낸 부분은 일반적으로 "실고리 오주"(綖環五銖, xiàn huán wǔ zhū)라고 불렸으며, 안쪽 부분에서 잘라낸 화폐는 "끌로 다듬은 가장자리 오주"(鑿邊五銖, záo biān wǔ zhū) 또는 "잘라낸 가장자리 오주"(剪輪五銖, jiǎn lún wǔ zhū)라고 불렸다. 남북조 시대에는 사설 주조도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이로 인해 사설 주조소에서 주조한 매우 작고 얇으며 매우 부서지기 쉬운 많은 청동 화폐가 생겨났다. 이러한 화폐는 "거위 눈"(鵝眼, é yǎn) 또는 "닭 눈"(雞目, jī mù) 화폐로 알려져 있다.[9][20] 팽신위는 중국 화폐학에 대해 처음으로 저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양나라의 구훤을 언급한다.[21] 구훤은 당시 유통되던 화폐에 대해 저술했지만, 기나라(齊) 화폐는 언급하지 않았다.[22] 팽신위는 이것을 기나라가 자체 화폐를 주조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본다.[21] 이 시대의 화폐는 특히 진(陳)나라와 주(周)나라에서 생산된 화폐가 높은 예술적 수준을 자랑했다.[21]
이 시대의 모든 화폐는 일반적으로 좁은 테두리를 가지고 있었다.[21] 그러나 이 시대에는 사설 주조가 남조에서 북조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었는데, 이것이 남조의 오수 화폐와 다른 화폐가 북조의 화폐보다 더 불규칙한 이유이다.[21] 이 시대의 모든 화폐는 같은 종류의 전서(篆書) 서예를 사용했다.[21]
서진에서는 '''진오수전(晋五銖銭)'''이라 불리는 소형 오수전이 발행되었고, 동진에서는 '''심충오수전(沈郎五銖銭)'''이라 불리는 소형 오수전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주조가 조악하여 오나 북조의 동전이 유통되는 상황이었다. 심충오수전은 화폐 문자의 "五銖"의 금변(金偏)이 없고 "五朱"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육조 시대에 발행되었다고 여겨지지만, 발행 왕조를 확정할 수 없는 오수전 무리로 '''육조오수전(六朝五銖銭)'''이 있다. 이것은 후한오수전이나 수오수전에 비해 제작이 조악하고 무게도 제각각이며, 원래의 오수전보다 가볍고 지름도 작으며, 글자도 오수(五銖)·오주(五朱)·오금(五金)·오오(五五)·주주(朱朱) 등 다양한 변형이 있다.
남조 송이 성립하자 기존 오수전보다 큰 사주전을 발행하여 경제 재건을 도모했으나, 구리 부족과 화폐 수요 증가로 인해 단기간에 소형 동전 주조가 이루어지면서 이 화폐 개혁은 실패했다. 남조 제에서는 다시 소형의 '''제오주전'''을 발행했다. 남조 량에서는 오수전을 발행했으나, 구리 부족으로 인해 532년부터 철을 재료로 한 '''철오주전''' 주조를 시작했다. 그러나 철전 도입으로 화폐 발행량이 급증하여 국내 경제 혼란을 초래했다. 남조 진에서도 562년부터 오수전을 발행하여 경제 안정화를 도모했다. 그리고 579년에는 오수전 10枚의 가치를 가진 '''태화육주''' 발행이 시작되었으나, 민간에서는 오수전과 동등하게 거래되어 단기간에 폐지되었다.
6. 3. 북조
439년 북위에서 오수전이 유통되었지만, 이전 시대의 옛 돈(구전, 舊錢)과 사사로이 주조된 돈(사주전, 私鋳錢)이 널리 유통되었다. 북위에서 오수전 유통이 시작된 것은 493년 낙양 천도 이후이다. 495년 태화오수전, 529년 영안오수전 등 연호를 넣은 새로운 오수전이 발행되었지만, 옛 돈과의 교환 비율을 높게 설정하여 유통이 제한적이었고, 옛 돈과 사주전이 널리 사용되었다.[21]서위에서는 540년과 546년에 대통오수전 주조를 시작했다.[21]
북제에서는 553년에 상평오수전 주조를 시작했다. 이 오수전은 정교하게 주조되어 널리 유통되었지만, 점차 사주전이 증가했다.[21]
북주는 561년에 오수전 5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포권을 발행하고, 574년에는 포권 10개분의 가치를 지닌 오행대포, 579년에는 오행대포 10개분의 가치를 지닌 영통만국을 발행했다.[21] 북주는 이러한 화폐의 해외 수출과 해외에서 사주된 것의 수입을 금지하여 국내 경제를 비교적 안정시켰다.
7. 수나라
581년 중국 통일을 이룩한 수나라는 오수전(五銖錢) 주조를 시작하면서 화폐 통일을 추진했다. 수나라 시대의 오수전에는 치양오주(置樣五銖), 수오주(隋五銖), 백전오주(白錢五銖) 등이 있었다. 치양오주는 일반적인 오수전보다 약 2배 무거웠고, 백전오주는 구리에 주석을 섞어 만들어 흰색을 띠었으며 오수전 중 마지막으로 발행되었다.[1]
7. 1. 화폐 통일 정책
중국 수나라는 581년에 오수전(五銖錢) 주조를 시작하여 화폐 통일을 계획했다. 당시 북주를 비롯한 전대 왕조의 화폐와 사주전(私鑄錢)이 혼재하여 유통되고 있었지만, '''수오주전(隋五銖錢)'''과 동등한 것 이외에는 몰수하여 수오주전의 원료로 사용함으로써 점차 화폐 통일이 진행되었다.[1] 구리 생산지를 확보한 수나라는 적극적인 주조 사업에도 착수했다.[1] 수나라 시대의 오주전에는 치양오주(置樣五銖), 수오주(隋五銖), 백전오주(白錢五銖)라고 불리는 유형이 있다.[1] 치양오주는 일반적인 오주전의 약 2배의 무게를 가진다.[1] 백전오주는 구리에 주석을 섞어 주조하여 흰색을 띠고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으며, 오주전으로서 마지막으로 발행된 유형이 되었다.[1]7. 2. 수나라 오수전의 종류
581년 수나라는 오수전(五銖錢) 주조를 시작하여 화폐 통일을 계획했다. 당시 북주를 비롯한 전대 왕조의 화폐와 사주전(私鑄錢)이 혼재하여 유통되고 있었지만, '''수오주전(隋五銖錢)'''과 동등한 것 이외에는 몰수하여 수오주전의 원료로 사용함으로써 점차 화폐 통일이 진행되었다.[1] 구리 생산지를 확보한 수나라는 적극적인 주조 사업에도 착수했다.[1] 수나라 시대의 오주전에는 치양오주(置樣五銖), 수오주(隋五銖), 백전오주(白錢五銖)라고 불리는 유형이 있다.[1] 치양오주는 일반적인 오주전의 약 2배의 무게를 가진다.[1] 백전오주는 구리에 주석을 섞어 주조하여 흰색을 띠고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으며, 오주전으로서 마지막으로 발행된 유형이 되었다.[1]8. 당나라 이후
당나라 건국 후 621년 개원통보가 발행되면서 700년 이상 주조 및 유통된 오수전(五銖錢)은 폐지되었다. 이후 오수전(또는 고문전(古文錢)) 형식을 취하는 화폐는 기본적으로 주조되지 않았다. 다만 예외적으로 오대십국 시대의 화폐 중 일부는 오수전 형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걸연(桀燕)의 "오수(五銖)"(수나라 오수전을 그대로 모전(母錢)으로 이용하여 주조한 철전)와 남한(南漢)의 "오오(五五)"(육조 오수전의 전명(錢銘)의 변형 중 하나를 이용하여 주조한 납전)가 이에 해당한다.
9. 오수전의 형태와 종류



"오(五)"는 5를 의미하며, 주(銖)는 고대 중국의 무게 단위로, 기장 100알에 해당한다. 따라서 "오주" 현전은 약 4그램의 무게를 가졌다. 원래 반냥전은 량(냥: 돈)이 24주이므로 12주 무게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반냥전의 무게가 점차 감소하였다. 그리하여 무제의 통치 기간 중에 이전의 삼주 현전 이후 새로운 표준 단위로 오주 현전이 도입되었다.[5] 오주의 도입은 청동화폐와 금의 표준 환율을 1만 개의 청동 오주 현전이 금 1냥(斤)과 같도록 고정했다.[6]
최초의 오주 현전은 가장자리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무제의 통치 기간 중에 발행된 두 번째 시리즈는 가장자리가 다듬어졌다. 기원전 118년에 한나라 중앙 정부는 군(郡)과 국(國)에 오주 현전을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오주 현전은 "군국오주(郡國五銖)" 현전이라고 불리며, 지름이 최대 33.3밀리미터이고 무게는 5.8그램이다. 군국오주 현전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뒷면의 정사각형 중앙 구멍 주위에 테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테두리는 사람들이 현전에서 금속을 긁어내어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추가되었다. 이 초기 오주들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특징은 가장자리가 다듬어지지 않아 둘레가 거칠고 후대에 주조된 오주보다 무게가 무겁다는 것이다.[7] 기원전 115년 무제는 모든 오주 현전을 5전의 가치로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이 현전은 가장자리가 다듬어져 구리의 색깔이 보이기 때문에 "적측오주(赤仄五銖)" 또는 "종관적측(鍾官赤仄)"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현전의 또 다른 특징은 "오(五)"자가 상당히 곧은 선으로 구성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원전 113년부터 중앙 정부는 화폐 제조에 대한 독점 권한을 되찾았고, 이 시점부터 상림원삼관에서 오주 현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오주 현전은 5전이라는 비현실적인 명목가치를 가진 적측오주와 달리 1전의 명목가치를 가졌다. 대부분의 상림삼관 오주 현전에는 앞면의 정사각형 중앙 구멍 위에 볼록한 선이 있다.[8]
기원전 73년부터 기원전 49년까지 지속된 선제의 통치 기간 동안, 오(五)자의 크기는 작아졌고, 특히 위아래 가로선까지 뻗어나가지 않는 약간 구부러진 획으로 쓰였다. 서한 시대의 오주 현전 중 상당수는 현전의 내부 테두리에 "별"을 나타내는 점과 달을 나타내는 초승달, 그리고 길조로 여겨지는 다른 기호들을 보여주는데, 이는 부적으로 사용된 현전의 초기 사례 중 일부이다.[9]
오주 현전이 처음 도입된 기원전 118년 이후 123년 동안 280억 개가 넘는 현전이 유통을 위해 주조되었다.[10][11]
철 오주는 서한 시대의 오주 화폐와 유사하며, 기원후 25년에 사천에서 반란을 일으켜 철화폐를 발행한 공손술의 것으로 여겨진다. 두 개의 철 오주는 한 개의 '건무오주'(建武五銖)와 같았다. 오주(銖) 부분의 머리가 둥근 것이 동한 오주의 특징이다. 기원후 30년에는 사천의 젊은이들이 "누런 소! 흰 배! 오주 현금이 돌아오게 하라!"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것은 왕망의 화폐와 공손술의 철화폐를 비웃는 것으로, 건무 16년(기원후 40년)에 동한 광무제에 의해 회수되었다. 광무제는 나라의 부의 기반은 훌륭한 정치 경제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옛날의 좋은 오주 화폐에 있었다는 조언을 듣고 오주 현금을 다시 발행하였다.
신나라가 멸망한 후 오주 현전의 생산이 재개되었다. 한나라가 복국된 후 오주 현전의 생산은 광무제(재위 25~56년) 때 처음으로 재개되었다.[15] 군벌 동탁의 통치 기간 동안 한나라의 수도는 낙양에서 장안(현재의 시안)으로 옮겨졌고, 그는 진시황 시대의 대형 청동상들을 녹여 소형 현전을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오주 현전들은 양이 매우 많았고 크기가 작아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를 "거위 눈 전" 또는 "닭 눈 전"이라고 불렀다. 이 현전들은 크기가 매우 작아서 오(五) 자의 왼쪽 절반과 주(銖) 자의 오른쪽 절반만 새겨져 있었다. 또한 이러한 현전이 일반 크기의 오주 현전의 안쪽을 잘라내어 두 개의 현전을 만드는 "자른 가장자리 전"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위 눈 오주 전" 또는 "닭 눈 오주 전"은 실제로 이처럼 작은 크기로 주조되었으며, 주조 과정에서 남은 금속 주자(혹은 잔여물)가 "거위 눈" 또는 "닭 눈 오주 전"의 5시 방향 가장자리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9]
삼국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220년부터 280년까지 지속된 시기로, 동한의 멸망 이후 분열의 시대를 특징으로 한다.[16] 촉한은 유비가 성도를 장악한 후 건국되었다. 성도 함락 직후 유비는 국고가 완전히 텅 비어 군사비용을 충당할 자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심각한 구리 부족과 맞물렸다. 구리 부족이 너무 심각하여 침구를 걸던 갈고리까지 녹여 화폐를 주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유비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직백오수(直百五銖)라는 화폐를 주조하도록 명령했다. 이 화폐는 일반 오수전 100개의 명목가치를 가졌다. 신나라 시대의 화폐처럼 명목가치와 내재가치 사이의 엄청난 차이로 인해 실패한 것과 달리, 촉한의 화폐는 동탁이 주조한 오수전의 무게가 겨우 1그램 정도였던 것과 달리 큰 반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전부터 중국 정부는 정부가 새로운(신용) 화폐를 발행하고 가치를 설정하지만, 백성들이 이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아 유통되지 않고 인플레이션과 위조가 만연하는 악순환을 겪었다. 직백오수는 두께에 따라 "얇은" 유형과 "두꺼운" 유형으로 나뉜다.[17] 유비 치세의 촉한에서 지름 21.7mm, 무게 약 2.3g의 테두리가 있는 오수전 변종을 주조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후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를 "촉오수"라고 부른다.[9]
조위는 220년 조조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오수전만 주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의 주형이 발견되었고, 태화 원년(227년)부터 함희 2년(265년)까지 오수전이 주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18]
사마염 통치하에 중국은 서진의 지배 아래 짧은 기간 동안 통일되었다. 서진은 낙양에서 통치하였다. 진의 통치하에 중국 경제는 호전되었고, 비록 진 시대의 주화 생산을 언급하는 역사 기록은 없지만, 유통되던 한나라 시대 오주 현전의 양이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정부는 시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다량의 현전을 주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주화 대사전』은 서진 시대 촉 지역(현재 쓰촨성) 성도에서 오주 현전이 주조되었다고 주장한다.[19] 사마씨 가문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파괴적인 내전이 발생한 후, 중국은 극도로 약화되어 북방의 "오호"가 중국 영토를 정복하기 시작하여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고 십육국 시대를 열었다.
전량 왕국은 전통적으로 촉 왕국의 것으로 여겨져 온 "촉오주" 현을 주조하기 시작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육로(현재 감숙성성)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이 현이 장궤의 통치 기간 동안 주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9]
동진이 멸망한 후 420년에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조에서는 오주 화폐의 중앙 부분을 제거하여 두 개의 별개의 화폐를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 오주 화폐의 바깥쪽 고리에서 잘라낸 부분은 일반적으로 "실고리 오주"라고 불리는 반면, 안쪽 부분에서 잘라낸 화폐는 일반적으로 "끌로 다듬은 가장자리 오주" 또는 "잘라낸 가장자리 오주"라고 불린다. 남북조 시대에는 사설 주조도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사설 주조소에서 주조한 매우 작고 얇으며 매우 부서지기 쉬운 많은 청동 화폐가 생겨났다. 이러한 화폐는 "거위 눈" 또는 "닭 눈" 화폐로 알려져 있다.[9][20] 팽신위는 중국 화폐학에 대해 처음으로 저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양나라의 구훤을 언급한다.[21] 구훤은 당시 유통되던 화폐에 대해 저술했지만, 기나라 화폐는 언급하지 않았다.[22] 팽신위는 이것을 기나라가 자체 화폐를 주조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본다.[21] 이 시대의 화폐는 특히 진(陳)나라와 북주에서 생산된 화폐는 높은 예술적 수준을 자랑했다.[21]
이 시대의 모든 화폐는 일반적으로 좁은 테두리를 가지고 있다.[21] 그러나 이 시대에는 사설 주조가 남조에서 북조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었는데, 이것이 남조의 오주 화폐와 다른 화폐가 북조의 화폐보다 더 불규칙한 이유이다.[21]
이 시대의 모든 화폐는 같은 종류의 전서(篆書) 서예를 사용했다.[21]
양나라 무제의 통치 기간 동안 두 종류의 오주 현이 주조되었다. 하나는 외곽 테두리가 있고, 다른 하나는 외곽 테두리가 없는 것이었는데, 외곽 테두리가 없는 오주 현은 "여전"이라고 불렸다.[9]
523년부터 양나라 정부는 오늘날 쓰촨성에서 철이 비교적 구하기 쉽고 값이 싸다는 이유로 철로 만든 오주 현을 주조하기로 결정했다.[9] 양나라가 발행한 철전은 다른 철전과는 상당히 구별되는데, 네모난 중앙 구멍의 각 모서리에서 바깥쪽으로 뻗어 나가는 네 개의 선이 있기 때문에 "사출전"이라고 불린다.[9] 이러한 정부 발행품을 기반으로 민간에서 철전을 주조하는 것이 매우 일반화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철 오주 현의 양이 급격히 증가하여 어떤 물건을 사는 데에도 수레로 실어 나를 만큼 많은 철 오주 현이 필요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오주 현은 널리 퍼진 민간 생산으로 인해 상당히 흔하다.[9] 그 후 무제의 통치 기간 동안 태청풍락(太清豐樂) 현이 주조되었는데, 이 현은 최근까지 중국 화폐 부적으로 여겨졌으며 태청(547~549) 연호를 따서 명명되었다.[9]
552년 원제의 통치 기간 동안 수도가 강릉으로 옮겨졌고, 강릉 조폐소에서는 오주 현의 앞면에 두 개의 "별"(현의 점을 가리키는 용어)이 있는 오주 현을 발행했다. 하나의 "별"은 네모난 중앙 구멍 위에, 다른 하나는 아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주오주전"으로 알려져 있다.[9] 이 오주는 명목상 일반 오주 10개에 해당했으며 오늘날에는 비교적 드물다.[9]
557년 경제의 통치 기간부터는 네모난 구멍 위아래에 각각 하나의 "별"이 있는 오주 현이 양쪽에 생산되었는데, 이 때문에 "사주오주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목 가치는 일반 오주 현 20개였지만, 발행된 지 불과 10일 만에 일반 오주 현과 동일한 가격으로 거래되었다.[9] 이 "사주오주전"의 또 다른 변종은 네모난 중앙 구멍의 좌우에 "별"이 있는 것이었다.[9] 오늘날 "사주오주전"은 극히 드물며, 네모난 중앙 구멍의 위아래에 "별"이 있는 것이 가장 드물다.[9]
"삼주오주전"으로 알려진 또 다른 양나라 시대 오주 현이 생산되었지만, 역사 기록에 언급되지 않아 언제 생산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부 중국 화폐학자들과 게리 애슈케나지(Gary Ashkenazy)는 이것이 "사주오주전" 생산 직후 557년 5일 동안만 생산되어 일반 오주 현 10개의 가치로 유통되었으며, 이전의 "이주오주전"과 같은 과장된 명목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 구별하기 위해 세 개의 "별"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한다.[9] "삼주오주전"은 앞면의 네모난 구멍 위아래에 각각 하나의 "별"이 있고, 뒷면에는 네모난 중앙 구멍을 둘러싼 테두리에 닿아 있는 왼쪽에 하나의 "별"이 있다.[9] 이 현은 생산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오늘날 극히 드물다.[9]
높은 명목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주", "삼주", "사주" 오주 현은 일반적으로 2~3그램 미만이었다. 명목 가치와 내재 가치 간의 이러한 차이는 양나라 경제 쇠퇴의 한 요인이 되었다.[9]
진(陳)나라에서는 명목 가치가 10개의 "거위 눈 오주" 또는 "닭 눈 오주"와 같은 오주 화폐를 생산했는데, 원제의 천가 연간에 주조되었기 때문에 "천가 오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 단 하나의 표본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천가 시대 오주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천가 시대 오주는 비교적 크고 앞면의 네모난 중앙 구멍 주위에 테두리가 있는 등 태화 육주 화폐와 전반적으로 유사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러한 설명에 맞는 오주 화폐는 역사적으로 양(梁)나라 무제 치세 동안 천검 연간(502~519)에 주조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설명에 맞는 오주 화폐가 관중(關中), 섬서성(陝西省)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북주(北周)에서 주조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선제의 치세인 579년에는 태화 육주 화폐가 주조되었는데, 원래는 10개의 오주와 같은 가치를 지녔으나, 백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오주와 같은 가치로 낮춰졌다. 태화 육주 화폐는 그 질 높은 서예 때문에 남조 화폐의 "왕관 보석"으로 여겨진다. "여섯"이라는 한자의 전서체가 마치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이는 당시 황제 앞에 서서 태화 육주의 명목 가치가 너무 높다고 외치는 백성들을 상징한다는 속설이 생겨났다. "육주"라는 명문만 있는 매우 희귀한 버전의 화폐가 존재하는데, 이는 실제로 매우 드물어 단 한 개의 표본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9]
북위(北魏)는 선비족의 탁발씨가 지배한 국가로, 한족의 행정 제도를 채택하고 심지어 수도를 여러 중국 왕조의 수도였던 낙양에 세웠으며, 백성들에게 중국식 의복과 중국어를 채택하도록 명령했다.[9] 이 시기에 문성제는 이러한 한화 과정의 일환으로 태화오주를 발행하도록 명령했다.[9] 태화오주 중에는 진(陳)나라에서 발행한 태화육주의 "태(太)"와 비슷한 서체로 "태(太)"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버전이 하나 있다.[9] 그러나 이 화폐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오래된 화폐 목록의 탁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는 의문이다.[9] 태화오주는 제작이 다소 조잡하고 크기와 무게가 다양하다.[23] 큰 것은 일반적으로 지름이 약 2.5cm이고 무게는 약 3g이다.[23] 작은 태화오주는 일반적으로 지름이 약 2cm이고 무게는 2.3g이다.[23] 그 명문에 사용된 서예는 중국 전서와 해서가 혼합된 것으로, 고전적인 위비체를 구성한다.[23] 태화오주는 낙양 주변 지역에서만 유통되었고 북위 전역의 통용 화폐가 되지 못하여 비교적 희귀해졌다.[23]
북위는 510년부터 정규 오주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지만, 다른 오주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이었는지는 현재 알려지지 않았다.[9]
효장제는 영안 시대(528~530년)인 529년에 영안오주의 제작을 명령했다. 이는 북위의 권력이 육진(六鎭)의 반란이 10년 동안 지속되면서 위기에 처했던 시기였다. 효문제가 534년 낙양에서 도망치도록 강요당한 후, 국가는 서위와 동위로 분열되었고, 두 나라 모두 오랜 기간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안오주 화폐를 계속 발행하여 대량의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며, 오늘날에도 영안오주 화폐가 매우 흔하다.[9]
이 시대에는 "길전"과 "천주" 화폐와 같이 화폐에 대한 여러 별명이 있었다. 이 화폐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게리 애쉬케나지(Gary Ashkenazy)는 이것들이 영안오주 화폐의 변형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게리 애쉬케나지에 따르면 "길전"은 동전 뒷면의 정방형 구멍 위에 ""자가 있는 영안오주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9] 그 별명은 정방형 구멍이 한자 ""와 비슷하고, "土"가 위에 있기 때문에 함께 ""("길하다"는 뜻)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리 애쉬케나지에 따르면 "천주" 화폐는 동전 앞면의 오른쪽 아래에 "점" (중국 동전에서 점은 "별"을 나타냄)이 있는 영안오주의 변형일 수도 있다.[9] "천주" 화폐를 세워 놓으면 하늘 또는 "천"을 가리킨다.[9] 이 경우 "별"은 원통형으로 표면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주"라고도 할 수 있다.[9] 영안오주의 또 다른 변형은 정방형 구멍의 모서리에서 동전 뒷면 가장자리까지 바깥쪽으로 뻗어 나가는 4개의 대각선이 있기 때문에 "사출" 화폐로 알려져 있다.[9]
이 시대에는 "옹주청적", "량주생후", "긴전", "적견"과 같이 설명적인 별명이 붙은 다른 화폐도 있었다.[9] 이러한 화폐는 역사 기록에 언급되어 있으며, 현재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특정 종류의 영안오주 화폐를 가리킬 수도 있다.[9]
서위는 535년부터 556년까지 짧게 존재했던 왕조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대통(535~551) 시대에 무주 화폐가 주조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영안 무주 화폐나 수나라의 무주 화폐와 유사한 서체를 가지고 있었다.[9] 대통 무주 화폐의 특징적인 부분은 넓은 외곽 테두리와, 정사각형 중앙 구멍의 오른쪽 "오(五)" 자 부분에만 있는 내곽 테두리이다.
북제는 문선제가 건국한 나라로, 550년부터 577년까지 존속했다. 553년부터는 상평오주라는 화폐가 주조되었다.[9]
중국은 수나라(581~618)에 통일되었다. 이 단명한 왕조 아래, 많은 개혁이 시작되어 이후 당나라의 성공으로 이어졌다.[9] 수나라와 관련된 유일한 화폐는 오주 화폐이다.[9] 수나라는 넓은 테두리를 가진 오주 한 종류만 주조했는데, 발굴 조사에서 수나라 시대에 속한 것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24] 중국 화폐 연구가 팽신위는 수나라 시대 오주가 서위에서 채택된 것이라고 믿었다. 수나라 역사에 따르면, 수나라 원년에 이미 오주가 유통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화폐가 주조되었기 때문이다.[24]
문제는 개황 원년(그레고리력 581년)에 오주 화폐를 주조하도록 명령했고, 이 새로운 오주 화폐의 도입과 함께 기존 통화는 점차 가치가 떨어졌으며, 진나라(陳朝) 정복으로 "수오주"(隋五銖)로 알려진 화폐가 중국 전역에서 유일한 통화가 되었다.[9] 문제가 새로운 오주를 도입한 이유는 북주와 진나라(陳朝)의 신용 화폐가 경제를 악화시켰고, 수오주는 원래 무게인 2그램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9] 최초의 오주는 도입 연도 때문에 "개황오주"로 알려져 있으며, 후에 문제는 수나라의 여러 제후국이 자체적으로 오주를 주조하도록 허용했다.[9] 각각 5개의 용광로를 갖춘 여러 현(縣)에 추가 주조소가 설립되었다. 관리들은 화폐의 품질을 자주 점검했다. 그러나 605년 이후 사설 주조가 다시 화폐의 질 저하를 초래했다. 오늘날 이 오주 화폐는 여전히 매우 흔하며, 엄청난 수량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수나라 오주의 재질은 이전 중국 화폐와 달랐지만, 후대에 생산된 대부분의 중국 화폐와 유사하다. 이 오주의 테두리는 넓고 평평한 경향이 있는 반면, 이전 중국 화폐는 일반적으로 얇고 둥근 테두리를 가지고 있다. 화폐의 기본 재질은 생산에 사용된 주조 기술에 따라 결정되며, 수나라 오주는 완전히 새로운 주조 기술로 생산되었다.[25]
수나라 시대 오주의 여러 종류 중 하나는 특히 잘 만들어졌으며, 중국어로 "백동"이라고 불리는 재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백전오주" 화폐로 알려져 있으며, 강남(江南) 지역에서 제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화폐의 "오(五)"자는 선이 교차하는 부분에서 약간 더 곡선을 이룬다. 수나라의 오주 화폐는 크고 작은 크기로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고 가벼운 오주는 국가가 더 높은 지출에 직면하고 화폐를 저하시켰을 때 나중에 생산되었으며, 수나라의 마지막 오주 화폐는 철, 종이, 가죽 조각과 같은 임시 통화와 함께 유통되었다.[9]
900가지가 넘는 종류와 1800가지가 넘는 변종의 오주 현전과 오주 유래품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주 현전 변종 목록:
| 오주(五銖) 현전(현) 변종 | |
| 변종 | 이미지 |
|---|---|
| 군국오주는 크고 무거운 동전이며, 가장자리가 다듬어지지 않았다. 때때로 테두리가 없는 뒷면을 가지고 있다. 가장 초기의 오주로 여겨진다. | |
| 적측오주는 위의 동전보다 가볍고, 가장자리가 다듬어져 있다. | |
| 상림삼관오주는 상림원의 세 관청을 가리킨다.[27] 주조는 이제 중앙 당국에 국한되었다. 이 동전들은 보통 앞면의 구멍 윗부분에 융기된 테두리가 있다. 그 질이 매우 높아서 진정한 장인, 극악무도한 악당, 도둑을 제외하고는 위조가 불가능해졌다. 이전의 모든 동전들은 녹여서 구리를 상림원으로 가져가야 했다. | ]] |
| 오주 현전 (서기 25년). 왕망 정권이 끝난 후에도 화폐 제도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현전이 부의 일반적인 척도였고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오주 현전은 6세기 말까지 다른 동전들과 함께 계속 발행 |
10. 오수전과 부적
오수전은 중국 주화 부적의 출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부적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한(東漢) 이후 오수전에 나타나기 시작한 별, 해, 달 등의 상징들은 후대 중국 부적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북위(北魏) 시대 태화오주(太和五銖)를 들고 있는 보리달마를 특징으로 하는 다루마 인형처럼, 오수전은 때때로 다른 유형의 부적과 통합되기도 했다.[23]
10. 1. 중국 주화 부적의 출현

오주(五銖) 현은 중국 주화 부적의 출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32][33] 서한(西漢) 시대와 그 이후 700년 동안 오주 현이 엄청난 양으로 주조되었지만,[34][35][36] 모든 변종이 모든 통치자에게 직접 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별(점), 해(원), 달(초승달), 숫자, 막대 숫자, 한자, 선 등의 "상서로운" 기호들은 후한(東漢)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균일성은 오랫동안 사용되는 청동 주형 때문이었고, 이러한 주형은 후대 왕조에서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모주(母錢)와 같은 다른 기술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주조소에서는 이러한 "상서로운" 기호들을 추가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후대 중국 부적의 영감이 되었다.
이러한 기호들 중 일부는 이미 초기 반량(半兩) 현에서 사용되었지만, 오주에서 더욱 흔해졌다. 후한(東漢) 시대 이후 이러한 기호들이 대량으로 추가되기 시작한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최초의 중국 부적들은 그 디자인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오주 현 중 일부에는 후대 현에서 발견되는 "꽃" 또는 "로제트" 구멍의 전신도 있었다. 이러한 현들은 1987년(7호) 중국 정기 간행물 "섬서금융"(陝西金融, ''shǎn xī jīn róng'')의 한 기사에서 논의되었는데, 이 기사에는 매장지에서 발견된 특이한 중앙 구멍이 있는 여러 오주 현의 사진이 실려 있다.[37][38][39]
오주 현을 기반으로 한 중국 주화 부적은 현대 오주 현과 동일한 "상서로운 상징"을 특징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달을 나타내는 초승달, 태양을 나타내는 원, 별을 나타내는 점 등이 포함된다.[40] 훈련받지 않은 눈에는 오주 부적과 일반 오주 현을 구분하기 어렵다. 이러한 특징 외에도, 오주 부적에는 중국 문화의 다양한 측면에서 나온 독창적인 상징물, 예를 들어 용과 어부가 새겨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41] 단순히 "오주(五銖)"라는 명문이 새겨진 것 외에도, 일부 오주 부적은 "오주(五銖)"라는 글귀를 포함하는 네 글자 명문이 새겨진 오주 현의 다른 변형을 기반으로 하기도 한다.[42][43]
오주 현은 때때로 다른 유형의 부적과 부적으로 통합되기도 하는데, 북위(北魏) 시대 태화오주(太和五銖) 현을 들고 있는 선종의 창시자 보리달마를 특징으로 하는 다루마 인형 변형이 있다.[23]
10. 2. 오수전 부적
오수(五銖)전은 중국 주화 부적 출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2][33] 서한(西漢) 시대와 그 이후 700년 동안 오수전이 대량으로 주조되었지만,[34][35][36] 모든 종류가 모든 통치자에게 직접적으로 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별(점), 해(원), 달(초승달), 숫자, 막대 숫자, 한자, 선 등의 "상서로운" 기호들은 후한(東漢)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균일성은 오랫동안 사용되는 청동 주형 때문이었고, 이러한 주형은 후대 왕조에서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모주(母錢)와 같은 다른 기술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주조소에서는 이러한 "상서로운" 기호들을 추가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후대 중국 부적의 영감이 되었다.오수전을 기반으로 한 중국 주화 부적은 현대 오수전과 동일한 "상서로운 상징"을 가지는 경향이 있는데, 달을 나타내는 초승달, 태양을 나타내는 원, 별을 나타내는 점 등이 포함된다.[40] 훈련받지 않은 눈에는 오수 부적과 일반 오수전을 구분하기 어렵다. 이러한 특징 외에도, 오수 부적에는 중국 문화의 다양한 측면에서 나온 상징물, 예를 들어 용과 어부가 새겨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41] 단순히 "오수(五銖)"라는 명문이 새겨진 것 외에도, 일부 오수 부적은 "오수(五銖)"라는 글귀를 포함하는 네 글자 명문이 새겨진 오수전의 다른 종류를 기반으로 하기도 한다.[42][43]
오수전은 때때로 다른 유형의 부적과 부적으로 통합되기도 하는데, 북위(北魏) 시대 태화오주(太和五銖)전을 들고 있는 선종의 창시자 보리달마를 특징으로 하는 다루마 인형 종류가 있다.[23]
11. 오수전의 영향
한나라 때 중국에서 만들어진 오수전은 반냥전에 비해 무겁고 테가 둘러져 있어 위조가 어려웠다. 이는 화폐 경제 안정화에 기여했으며, 왕망이 신을 건국하면서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후한 건국 후 다시 주조되며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특히 동탁 집권기에는 조악한 동탁오수전이 발행되어 화폐 가치가 하락하기도 했다.[1]
오수전은 중국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도 영향을 주었다.
11. 1. 한반도
한나라 때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오수전은 한반도에도 전래되었다. 위만조선에서는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오수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평양 정백동 365호 무덤에서 발견된 오수전이 대표적이다. 이 오수전은 전한 초기의 것으로, 반냥전과 함께 출토되었다.[1]낙랑군 지역에서는 왕망의 신 시기에 주조된 화천(貨泉)과 함께 오수전이 다수 발견된다. 이는 낙랑군이 후한 건국 이후에도 오수전을 계속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동탁 집권기에 발행된 조악한 동탁오수전도 낙랑군 유적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당시 화폐 유통의 혼란상을 반영한다.[1]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자체적인 화폐를 주조하지 않고 오수전을 계속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에서 오수전이 발견되었으며, 백제는 무령왕릉에서 오수전과 함께 중국 남조의 화폐인 공전(孔錢)이 출토되었다. 신라에서는 경주 황남대총에서 오수전이 발견된 바 있다.[1]
남북국시대에 발해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오수전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 발해 지역에서 오수전이 발견된 사례는 없다. 통일신라에서는 경덕왕대에 오수전 사용을 금지하고 자체적인 화폐를 주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끝났다.[1]
고려는 성종대에 건원중보를 시작으로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지만, 오수전은 여전히 보조 화폐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통보와 상평통보가 발행되면서 오수전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었다.[1]
11. 2. 일본
기타큐슈시 수코우 유적에서 출토된 전한 시대의 오수전(기원전 118년 초주)은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빠른 시기의 오수전으로, 야요이 시대 중기(기원전 1세기) 유물이다. 이를 통해 오수전이 통화로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귀중한 유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11. 3. 쿠차국
구차 왕국은 현재 쿠차 현,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불교 국가였다. 한나라 시대에 처음 기록되었으며, 이후 당나라에 병합되었다. 당시 실크로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세기 또는 4세기경부터 구차 왕국은 중국 역사의 한나라 이후 시대의 축소되고 가치가 떨어진 오수전에서 영감을 받은 오주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다.[28]중국 오주전을 기반으로 한 구차 오주전은 다섯 가지 유형이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고 매우 얇으며, 글씨가 약하고 불규칙한 경향이 있는 반면, 네 가지 유형은 아예 글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구차 오주전 중 한 가지 유형은 "한구이 이중언어 오주전"(漢龜二體五銖錢, ''hàn guī èr tǐ wǔ zhū qián'')인데, 앞면은 중국 오주전과 유사하고, 뒷면에는 정사각형 중앙 구멍 위아래로 현지 구차 문자가 새겨져 있다.[29][30] 구차 왕국의 언어가 현대에 잘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에 대해 "오주"의 번역이거나 쿠션어로 구차 왕국의 이름을 표기한 것이라는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31] 이 지역에서 주조된 글씨가 없는 오주전은 일반적으로 265년에서 589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오주전의 변형은 다음과 같다.
| 유형 | 형태 | 테두리 | 무게 | 지름 | |
|---|---|---|---|---|---|
| 첫 번째 변형 | 둥근 모양 | 한쪽은 정사각형 중앙 구멍 주위에 테두리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없음. 바깥쪽은 얇고 안쪽은 두꺼움 | 0.4g~1.7g | 9mm~18mm | |
| 두 번째 유형 | 첫 번째 유형과 유사 | 안쪽 테두리 없음 | 0.2g~0.4g | 8mm~13mm | |
| 세 번째 유형 | 정사각형 모양 | 테두리 없음, 정사각형 중앙 구멍 | 매우 얇음 | 0.2g~0.5g | 8mm~11mm |
| 마지막 변형 | 불규칙한 모양 | 없음 | 작고 얇으며 제작이 조잡함. 일부는 지름이 5mm에 불과하고 무게가 0.2g에 불과함 |
불교 승려 현장은 630년 구차를 방문했을 때 그의 저서 "대당서역기"에서 구차 도시에 "작은 청동 동전"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오주전은 아마도 "한구이 이중언어 오주전"일 가능성이 높다.[9]
12. 오수전 유물 발굴
현대에 들어 중국에서는 오수전 매장이 매우 흔하게 발견되는데, 이는 이 주화가 대량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 1980년, 산시성(陝西省) 시안양시(咸陽市)에서 금으로 만들어진 오수전이 출토되었다.[44] 이 금화는 지름이 2.6cm이며, 서한(西漢) 시대에 주조된 것이다.[44]
- 2000년, 홍콩 툰문(屯門) 소권왓(So Kwun Wat) 유적지에서 60개가 넘는 한나라 시대 청동 동전이 출토되었는데, 반냥전(半兩)과 오수전이 포함되었고, 삼베와 대나무 매트 조각도 함께 발견되었다.[45]
- 2006년 1월, 산시성(陝西省) 평리현 광장 건설 현장에서 한나라 시대 무덤이 발굴되었고, 오수전 259개, 철제 삼족솥 1개, 도기 부엌난로, 도기 항아리 3개가 발견되었다.[46]
- 2012년 7월 16일, 신장 쿠차현(庫車縣)에서 14,000개에 달하는 고대 중국 주화가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한나라 시대 오수전과 착변오수(鑿邊五銖) 현, 신나라(新) 시대 화전(貨泉)과 대전오십(大泉五十) 현, 삼국시대 태평백전(太平百錢) 현, 쿠차 지역 토착 주화가 포함되었다. 주화와 함께 도기 파편과 인골 조각도 발견되어, 고고학자들은 이곳이 옛 묘지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47]
- 2012년 8월, 내몽골 후루오차이덩시에서 오수전과 신나라 시대 동전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이 매장에는 3500kg의 중국 동전과 신나라 시대에 사용된 약 150개의 점토 주조틀이 포함되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은 한무제(漢武帝)부터 왕망(王莽) 시대까지 운영되었던 주조소였을 가능성이 있다.[48][49][50]
- 2015년, 중국 고고학자들은 장시성(江西省) 난창시(南昌市) 인근 해혼후 묘지에서 서한(西漢) 시대 청동 오수전 10ton(약 200만 개)과 철, 청동, 금 제품 1만 개 이상을 발굴했다. 발견된 물품에는 죽간, 목간, 옥기도 있었다. 오수전은 1,000개씩 꿰어져 있었는데, 이는 1,000개씩 꿰는 관행이 당나라 시대가 아니라 600년 전부터 있었음을 증명한다.[51][52]
- 2018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산시의 한 무덤에서 오수전 26개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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