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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슈모나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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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슈모나이 왕국은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 시몬 마카베오가 마카베오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물리친 후 기원전 142년에 건국한 유대 왕국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헬레니즘 문화 탄압에 대한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며,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의 군사적 승리를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 치세에 영토를 확장했으나, 내부 분열과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기원전 63년 멸망했다. 하스몬 왕조는 대제사장과 왕의 지위를 겸하며 유대교의 종교적,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유대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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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슈모나이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반 명칭유대
시대헬레니즘 시대
지위셀레우코스 제국 속국 (기원전 140년–110년)
독립 왕국 (기원전 110년–63년)
로마 공화정의 클라이언트 국가 (기원전 63년–40년)
파르티아 제국의 클라이언트 국가 (기원전 40년–37년)
정부 형태반-입헌 신정 군주제
존속 기간기원전 140년–37년
건국왕조 설립
멸망헤로데 대왕이 하스몬 왕조를 전복시킴
이전마카베오 반란
이후헤로데 왕조
완전 독립기원전 110년
폼페이우스의 개입폼페이우스가 하스몬 왕조 내전에 개입 (기원전 63년)
파르티아 침공로마-파르티아 전쟁 (기원전 40년)
현재 국가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하스몬 왕국
하스몬 왕국 지도
수도예루살렘
공용어제국 아람어 (공식)
코이네 그리스어 (공식)
성경 히브리어 (전례)
종교제2성전 유대교
통화하스몬 주화
정치
군주시몬 타시 (기원전 140–134년)
요한 히르카누스 (기원전 134 (110)–104년)
아리스토불루스 1세 (기원전 104–103년)
알렉산더 얀나이오스 (기원전 103–76년)
살로메 알렉산드라 (기원전 76–67년)
히르카누스 2세 (기원전 67–66년)
아리스토불루스 2세 (기원전 66–63년)
히르카누스 2세 (기원전 63–40년)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 (기원전 40–37년)
입법부초기 산헤드린
기타
로마자 표기Hasmonean
언어별 명칭그리스어: Ἀσαμωναῖοι
히브리어: חשמונאים
현대 그리스어: Ασμοναϊκή δυναστεία

2. 역사

유다 마카베오셀레우코스 제국 군대를 격파한 지 20년 후, 그의 동생 시몬 마카베오의 주도로 하슈모나이 왕국이 성립되었다.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 제1권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공격 이후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방을 엄격하게 통치하면서 예루살렘과 그 사원을 파괴하고, 유대인사마리아인의 종교 및 문화적 관습을 탄압하고, 헬레니즘 관행을 강제했다.[11] 뒤이어 일어난 유대인들의 반란(기원전 167년)은 로마 공화국파르티아 제국 등 신흥 강대국들의 공격을 받아 크게 약화된 셀레우코스 제국의 붕괴와 맞물려, 유대인들이 독립 국가 시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63년, 왕국은 로마 공화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분열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시몬의 증손인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대왕의 대리전에서 볼모가 되었다. 폼페이우스(기원전 48년 사망)와 카이사르(기원전 44년 사망)의 죽음과 관련된 로마 내전으로 로마의 하슈모나이 왕국 지배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어, 파르티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자치권을 잠시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짧은 독립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로마군에 의해 곧 무너졌다.

기원전 37년 헤로데 왕국에 항복하기 전까지 하슈모나이 왕국은 103년 동안 존속했다. 헤로데 대왕(이두메안)을 왕으로 세움으로써 유다는 로마의 분봉왕령이 되었고 하슈모나이 왕국은 멸망하였다.

2. 1. 어원

하스몬 왕조의 가문 이름은 요세푸스가 아스모네우스 또는 아사모네우스(Ἀσαμωναῖοςel)라는 헬라어식 형태로 부른 가문의 조상에서 유래되었으며,[7] 그는 마타티아스의 증조부였다고 전해지지만, 그에 대해 더 알려진 바는 없다.[8] 이 이름은 히브리어 이름 ''하슈모나이'' (חַשְׁמוֹנַאי|Ḥašmonayhe)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9] 또 다른 견해로는 히브리어 이름 ''하슈모나'이''가 에 언급된 헤쉬몬 마을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8] P.J. 고트와 로건 리히트는 이 이름을 "하 시메온"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시므온 지파를 은밀하게 언급한 것이다.[10]

2. 2. 배경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공격 이후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방에 대한 엄격한 통치를 실시하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CE–c 100)의 유대 전쟁사 제1권과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과 그 사원을 파괴하고, 유대인사마리아인의 종교 및 문화적 관습을 탄압하고, 헬레니즘 관행을 강제했다.[11] 뒤이어 일어난 유대인들의 반란(167 BCE)은 로마 공화국파르티아 제국 등 신흥 강대국들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붕괴로, 힘을 얻은 유대인들이 독립국가 시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2세기 초, 셀레우코스 제국(노란색)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파란색)을 희생시키며 유대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기원전 722년~586년경)의 옛 땅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제국,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마케도니아 제국(기원전 330년경)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었지만, 유대교 종교 관습과 문화는 특정 기간 동안 지속되고 심지어 번성하기도 했다. 이 지역 전체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계 국가인 셀레우코스 제국과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사이에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이로 인해 기원전 3~1세기의 6번의 시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페르시아 통치 하에서 2세기 동안 평화를 누린 후, 히브리 국가는 다시 두 강대국, 즉 북쪽의 시리아의 수도를 둔 셀레우코스 국가와 남쪽의 이집트의 수도를 둔 프톨레마이오스 국가 사이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 기원전 319년에서 302년 사이에 예루살렘은 일곱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12]

안티오코스 3세 대왕 치하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유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빼앗아, 기원전 200년 파니움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를 격파했다. 그 후, 이 지역의 유대인 지역에 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는 헬레니즘 문화 및 종교 관습의 부상을 초래했다. "전쟁의 혼란 외에도, 유대 민족 내에서는 친 셀레우코스 파와 친 프톨레마이오스 파가 생겨났고, 이러한 분열은 당시의 유대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은 안티오크에서 처음으로 헬레니즘과 그리스 문화의 더 타락한 면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유대는 안티오크에서 통치되었다."[94]

유다 마카베오의 승리, 귀스타브 도레 그림


마카베오기의 기술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예루살렘 성전에서 이교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거행하여 이를 모독했기 때문에, 기원전 167년에 모딘이라는 마을의 제사장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자르, 요나탄)이 시리아의 관리들을 살해하고 황야로 도망쳐 항전을 호소했다.[95]

기원전 166년에 마타티아스가 죽자 아들이자 마카베오라고 불린 유다 (유다 마카베우스)가 그 뒤를 이어 군사 봉기를 일으켜 시리아 군을 제거하고 기원전 164년 키슬레우 달(12월) 25일에 성소를 정화했다. 지금도 행해지는 유대인의 축제인 '''하누카'''는 이 유다가 성소를 정화한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시리아 군은 여전히 예루살렘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다. 시리아에서 장군 뤼시아스가 실권을 잡자 예루살렘에 대공세를 펼쳤고, 유다는 궁지에 몰렸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 내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 뤼시아스는 유다와 화해하여 유대교에 대한 시리아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유대인의 종교자유를 완전히 인정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후, 시리아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 알키모스에게 유다가 반기를 들면서 다시 시리아와의 군사 충돌을 일으켰다. 유다는 그 싸움에서 기원전 160년에 전사했다. 유다의 전사 후, 지도자가 된 형제 요나탄은 시리아 왕과의 전투 끝에 강화 조약을 맺고 대제사장으로서의 지위를 승인받았다. 정통 제사장 가문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 대제사장이 된 것에 충격을 받은 경건파 사람들은 하스몬 가문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2. 3. 역사적 사료

하스몬 왕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사료는 다음과 같다.

  • '''마카베오기 상'''과 '''마카베오기 하''':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그리고 대부분의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는 정경으로, 개신교 교단에서는 외경으로 간주된다. 이 책들은 기원전 175년부터 기원전 134년까지의 기간을 다루며, 하스몬 왕조가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반독립 상태가 되었지만 아직 유대 밖으로 확장하지 않았던 시기를 다룬다. 칠십인역의 역사적, 종교적 자료를 포함한다.[13]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작''': ''유대 전쟁사'' 1권과 ''유대 고대사''는 하스몬 왕조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다.[2] 특히 ''유대 고대사''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기원전 110년부터 63년까지 하스몬 왕조가 확장하고 독립했던 기간에 대한 유일한 1차 사료이다.


Wojciech Stattler의 ''마카베우스''(마카베오), 1844


''시몬 마카베오, 대제사장으로 임명됨'' (''Die Bibel in Bildern''에서)


마카베오기는 70인역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에서 구약성서의 한 권으로 받아들였지만, 얌니아 회의 이후의 유대교개신교 여러 종파는 이를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2. 4. 셀레우코스 제국의 유대 지배

안티오코스 3세 대왕 치하의 셀레우코스 제국은 기원전 200년 파니움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를 격파하고 유대 지역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다.[11] 이로써 유대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와 종교 관습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는 유대 민족 내부에 친(親)셀레우코스 파와 친프톨레마이오스 파의 분열을 야기했고, 이는 유대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이후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공격한 후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방에 대한 엄격한 통치를 실시했다. 그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사마리아인의 종교 및 문화적 관습을 탄압하고, 헬레니즘 관행을 강제했다.[14]

2. 4. 1. 헬레니즘화

유다 마카베오셀레우코스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20년 후, 그의 동생 시몬 마카베오의 주도로 하슈모나이 왕국이 성립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공격한 후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방을 엄격하게 통치했다. 그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사마리아인의 종교 및 문화적 관습을 탄압했으며, 헬레니즘 관행을 강제했다.[14]

유대 지역의 헬레니즘화는 계속 진행되었고, 이는 전통적인 유대인과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다.[14] 헬레니즘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통 유대교의 정통성이 자신들을 억압한다고 느꼈다.[15] 유대인들은 헬레니즘화에 대한 찬반,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중 어느 쪽에 충성할 것인지를 두고 분열되었다.

기원전 175년,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헬레니즘화 반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지지)와 그의 형제 야손(헬레니즘화 지지, 셀레우코스 왕조 지지)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야손과 메넬라오스는 대제사장직을 얻기 위해 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경쟁자 살해 혐의를 받는 등 정치적 음모를 벌였다. 그 결과 짧은 내전이 일어났다. 친헬레니즘 정당인 토비아드는 야손을 대제사장이라는 강력한 지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성전 근처에 공개 경기를 위한 경기장을 세웠다.[16]

작가 리 I. 레빈은 "유대 헬레니즘화의 '주요 사건'이자 이 모든 전개 과정 중 가장 극적인 사건은 기원전 175년에 일어났는데, 대제사장 야손이 예루살렘을 헬라 폴리스로 바꾸어 체육관과 에페이온(2 마카베오 4장)을 갖추게 된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 단계가 예루살렘에서 150년 동안 진행된 헬레니즘화 과정의 정점인지, 아니면 소수 사제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7]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체육관에서 나체로 사교하는 헬레니즘 문화 관습에 참여하기 위해 비수술적 포피 복원술(에피스파즘)을 행하기도 했다.[18][19][20] 당시 할례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받았기 때문이다.[18][19][20] 고전, 헬레니즘, 로마 문화에서는 할례를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혐오스러운 관습으로 여겼다.[18][19][20]

2. 4. 2. 안티오코스 4세의 탄압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공격한 후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방에 대한 엄격한 통치를 실시했다.[14] 그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사마리아인의 종교 및 문화적 관습을 탄압하고, 헬레니즘 관행을 강제했다.[14]

유대 지역의 지속적인 헬레니즘화는 전통적인 유대인과 헬레니즘화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야기했다.[14] 유대인들은 헬레니즘화를 지지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나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두고 분열되었다.

기원전 175년,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헬레니즘화를 반대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지지)와 그의 형제 야손(헬레니즘화와 셀레우코스 왕조를 지지)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이후 야손과 메넬라오스가 대제사장직을 얻기 위해 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경쟁자 살해 혐의를 받는 등 정치적 음모가 이어졌다. 그 결과 짧은 내전이 발생했다. 친헬레니즘 정당인 토비아드는 야손을 대제사장이라는 강력한 지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성전 근처에 공개 경기를 위한 경기장을 세웠다.[16]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체육관에서 나체로 사교하는 지배적인 헬레니즘 문화 관습에 참여하기 위해 비수술적 포피 복원술(에피스파즘)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8][19][20] 고전, 헬레니즘, 로마 문화는 할례를 잔혹하고 야만적이며 혐오스러운 관습으로 여겼다.[18][19][20]

안티오코스 4세의 초상이 새겨진 테트라드라크마. 뒷면에는 제우스가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어 비문은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 ΘΕΟΥ ΕΠΙΦΑΝΟΥΣ ΝΙΚΗΦΟΡΟΥ (승리를 가져오는, 드러난 신인 안티오코스 왕)라고 적혀 있다.


기원전 168년 봄,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를 성공적으로 침공한 후, 로마인들에게 굴욕적으로 철수를 강요받았다. 안티오코스가 이집트에서 원정을 벌이는 동안,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유대 지역에 퍼졌다. 폐위된 대제사장 야손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메넬라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몰아냈다. 메넬라우스는 예루살렘에 있는 셀레우코스 요새인 아크라로 피신했다. 안티오코스는 이 소식을 듣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야손과 그의 추종자들은 쫓겨났으며, 메넬라우스는 대제사장으로 복귀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4세는 세금을 부과하고 예루살렘에 요새를 건설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유대교 율법의 공개적인 준수를 억압하려 했다. 그의 정부는 제우스[21]우상성전산에 세웠는데, 유대인들은 이를 산의 모독으로 간주했다. 또한 할례와 유대교 성경 소지를 금지하고 위반 시 사형에 처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는 도시를 예상치 못하게 점령한 것, 약탈,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엄청난 살육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포위 공격 동안 겪었던 일을 기억하고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나라의 율법을 폐지하고, 아기들에게 할례를 하지 않으며, 제단에 돼지고기를 희생하도록 강요했다."[22]

그는 또한 안식일 준수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희생 제물을 금지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우상에게 희생을 바치도록 요구했으며, 징벌적인 처형도 시행했다. 유대교 성경 소지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되었다. 안티오코스의 동기는 불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임명한 메넬라우스의 전복에 분노했을 수도 있고,[23] 성전과 토라를 기반으로 한 유대교 반란에 대응했을 수도 있으며, 유대인들 중 급진적인 헬레니즘 추종자들의 부추김을 받았을 수도 있다.[24]

2. 5. 마카베오 반란

마타티아스가 유대교 배교자를 죽이는 모습, 구스타브 도레의 판화


마카베오 1서는 마카비 반란을 종교를 근절하려 했던 셀레우코스 왕과 그를 지지했던 유대인들에 대항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봉기로 묘사한다. 마카베오 2서는 이 갈등을 "유대교"와 "헬레니즘" 사이의 투쟁으로 제시하며,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24] 현대 학문은 주로 두 번째 견해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안티오코스 4세가 시골의 전통적인 유대인과 예루살렘의 헬레니즘화된 유대인 사이의 내전에 개입했다고 주장한다.[25][26][27] 조셉 P. 슐츠는 현대 학문이 "마카비 반란을 외세의 억압에 대한 봉기라기보다는 유대 진영 내 정통파와 개혁파 간의 내전으로 간주한다"고 말한다.[28] 대제사장직을 놓고 벌어진 갈등에서 오니아스와 같은 히브리어/아람어 이름을 가진 전통주의자들이 야손이나 메넬라오스와 같은 그리스 이름을 가진 헬레니스트에 대항했다.[29] 다른 학자들은 갈등의 사회적, 경제적 요인을 지적한다.[30][31] 내전으로 시작된 이 갈등은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이 전통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헬레니즘 유대교를 지지하면서 침략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32] 갈등이 격화되면서 안티오쿠스 4세는 전통주의자들의 관습을 금지했는데, 이는 일반적인 셀레우코스 관행에서 벗어나 한 민족 전체의 종교를 금지하는 것이었다.[31] 다른 학자들은 이 봉기가 종교적 반란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민족 해방 전쟁으로 변모했다고 주장한다.[33]

마카베오 1서와 2서에 따르면, ''마카비''로 알려지게 된 마타티아스(히브리어로 Mattitiyahu)의 제사장 가문[35]은 셀레우코스에 대항하는 성전(holy war)을 위해 백성을 불러모았다. 마타티아스의 아들인 유다(예후다), 요나단(요노손/요나탄), 시몬은 군사 작전을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유대인 남자, 여자, 아이 천 명이 셀레우코스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그들이 안식일에도 자기 방어조차 하지 않고 싸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른 유대인들은 공격을 받으면 안식일에도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다가 수년 동안 게릴라전을 펼친 결과, 셀레우코스에 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162년 벳 제카리아 전투, 마카비 반군이 일시적으로 좌절을 겪었다. 구스타브 도레의 1866년 그림


기원전 164년 말, 유다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야훼의 공식적인 종교 의식을 재건할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고 느꼈다. 하누카 축제는 성전 회복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파르티아인에 대항하는 원정 중에 페르시스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사망했다.

마카베오기의 기술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예루살렘 성전에서 이교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거행하여 이를 모독했기 때문에, 기원전 167년에 모딘이라는 마을의 제사장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자르, 요나탄)이 시리아의 관리들을 살해하고 황야로 도망쳐 항전을 호소했다.[94]

기원전 166년에 마타티아스가 죽자 아들 유다(유다 마카베우스)가 그 뒤를 이어 군사 봉기를 일으켜 시리아 군을 제거하고 기원전 164년 키슬레우 달(12월) 25일에 성소를 정화했다.[95] 지금도 행해지는 유대인의 축제인 '''하누카'''는 이 유다가 성소를 정화한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2. 6. 반란에서 독립으로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공격 이후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방에 대한 엄격한 통치를 실시하였다. 그는 예루살렘과 그 사원을 파괴하고, 유대인사마리아인의 종교 및 문화적 관습을 탄압하고, 헬레니즘 관행을 강제했다.[11] 이러한 억압에 맞서 기원전 167년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로마 공화국파르티아 제국의 공격으로 약화된 셀레우코스 제국의 붕괴와 맞물려 유대인들이 독립을 쟁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교 율법을 금지하고, 성전산제우스 우상을 세웠으며, 할례와 유대교 성경 소지를 금지하고 위반 시 사형에 처했다.[21][22] 안식일 준수와 성전 제사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마카베오 1서는 이 반란을 셀레우코스 왕조와 그 지지자들에 대항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봉기로 묘사한다. 마카베오 2서는 이 갈등을 "유대교"와 "헬레니즘" 간의 투쟁으로 제시한다.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며, 이 반란이 종교적, 문화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마카베오기의 기술에 따르면, 모딘이라는 마을의 제사장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이 시리아 관리들을 살해하고 항전을 호소했다.[94] 기원전 166년 마타티아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유다가 반란을 이끌었다.

2. 6. 1. 유다와 요나단

기원전 166년 마타티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마카베오라고 불린 유다)가 그 뒤를 이어 군사 봉기를 일으켜 시리아 군을 제거하고 기원전 164년 키슬레우 달(12월) 25일에 성소를 정화했다.[95] 유대교의 축제인 '''하누카'''는 이 유다가 성소를 정화한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시리아 군은 여전히 예루살렘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다. 시리아에서 장군 뤼시아스가 실권을 잡자 예루살렘에 대공세를 펼쳤고, 유다는 궁지에 몰렸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 내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 뤼시아스는 유다와 화해하여 유대교에 대한 시리아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유대인의 종교자유를 완전히 인정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후, 시리아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 알키모스에게 유다가 반기를 들면서 다시 시리아와의 군사 충돌을 일으켰다. 유다는 그 싸움에서 기원전 160년에 전사했다.

5년간의 전쟁과 약탈 이후, 유다는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로마 공화국과의 동맹을 모색했다. "기원전 161년에 그는 요하난의 아들 에우폴레모스와 엘르아자르의 아들 야손을 '로마인들과 우호 및 동맹을 맺도록' 보냈다."[37]

니카노르 장군 휘하의 셀레우코스 군대는 유다에 의해 아다사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니카노르 자신도 전투에서 사망했다. 다음으로, 바키데스는 알키모스와 보병 2만 명, 기병 2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파견되어 엘라사 전투에서 유다와 만났는데, 이번에는 하스몬 왕가의 지휘관이 사망했다(기원전 161/160년). 바키데스는 이제 헬레네스인들을 이스라엘의 지배자로 세웠고, 유다가 죽자 유다의 동생인 요나단 휘하의 박해받는 애국자들은 요르단 강 너머로 도망쳤다. 그들은 아스파르라는 이름의 늪 근처에 진을 치고 셀레우코스인들과의 몇 차례의 교전 끝에 요르단 강 동쪽의 나라에 있는 에 머물렀다.

꼭두각시 총독 알키모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의 죽음 이후, 바키데스는 이 나라를 떠날 만큼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꼈지만, 바키데스가 이스라엘을 떠난 지 2년 후, 아크 시는 마카비의 침략으로 인해 충분히 위협을 느껴 데메트리우스에게 연락하여 바키데스의 영토로의 귀환을 요청했다. 이제 게릴라전에 더 경험이 풍부해진 요나단과 시몬은 더 멀리 후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이에 따라 베트호글라라는 사막 지역을 요새화했다.[38] 그곳에서 그들은 바키데스에 의해 며칠 동안 포위되었다. 요나단은 상대 장군에게 평화 조약과 포로 교환을 제안했다. 바키데스는 기꺼이 동의했고, 다시는 요나단과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했다. 그는 그의 군대와 함께 이스라엘을 떠났다. 승리한 요나단은 이제 미크마스의 옛 도시에 거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무신론자와 배교자"를 땅에서 몰아내려고 노력했다.[39] 주요 출처인 마카베오기 1서는 이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칼이 멈추었다"고 말하며, 실제로 이후 5년(기원전 158–153년) 동안 아무런 보고도 없었다.

유다의 전사 후, 지도자가 된 형제 요나탄은 시리아 왕과의 전투 끝에 강화 조약을 맺고 대제사장으로서의 지위를 승인받았다. 정통 제사장 가문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 대제사장이 된 것에 충격을 받은 경건파 사람들은 하스몬 가문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2. 6. 2. 셀레우코스 제국의 내분

조지 아담 스미스가 그린 마카비 시대의 팔레스타인


기원전 166년 마타티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가 뒤를 이어 군사 봉기를 일으켰다. 기원전 164년 키슬레우 달(12월) 25일에 성소를 정화했는데,[95] 이 사건은 현재 유대인의 축제인 '''하누카'''로 기념되고 있다. 시리아 군은 여전히 예루살렘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다. 시리아에서 장군 뤼시아스가 실권을 잡자 예루살렘에 대공세를 펼쳤고, 유다는 궁지에 몰렸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 내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 뤼시아스는 유다와 화해하여 유대교에 대한 시리아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유대인의 종교자유를 완전히 인정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 후, 시리아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 알키모스에게 유다가 반기를 들면서 다시 시리아와의 군사 충돌이 일어났다. 유다는 그 싸움에서 기원전 160년에 전사했다. 유다의 전사 후, 지도자가 된 형제 요나탄은 시리아 왕과의 전투 끝에 강화 조약을 맺고 대제사장으로서의 지위를 승인받았다. 정통 제사장 가문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 대제사장이 된 것에 충격을 받은 경건파 사람들은 하스몬 가문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5년간의 전쟁과 약탈 이후, 유다는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로마 공화국과의 동맹을 모색했다. "기원전 161년에 그는 요하난의 아들 에우폴레모스와 엘르아자르의 아들 야손을 '로마인들과 우호 및 동맹을 맺도록' 보냈다."[37]

니카노르 장군 휘하의 셀레우코스 군대는 유다에 의해 아다사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니카노르 자신도 전투에서 사망했다. 다음으로, 바키데스는 알키모스와 보병 2만 명, 기병 2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파견되어 엘라사 전투에서 유다와 만났는데, 이번에는 하스몬 왕가의 지휘관이 사망했다(기원전 161/160년). 바키데스는 이제 헬레네스인들을 이스라엘의 지배자로 세웠고, 유다가 죽자 유다의 동생인 요나단 휘하의 박해받는 애국자들은 요르단 강 너머로 도망쳤다. 그들은 아스파르라는 이름의 늪 근처에 진을 치고 셀레우코스인들과의 몇 차례의 교전 끝에 요르단 강 동쪽의 나라에 있는 에 머물렀다.

꼭두각시 총독 알키무스의 죽음 이후, 바키데스는 이스라엘을 떠날 만큼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꼈지만, 바키데스가 이스라엘을 떠난 지 2년 후, 아크 시는 마카비의 침략으로 인해 충분히 위협을 느껴 데메트리우스에게 연락하여 바키데스의 영토로의 귀환을 요청했다. 이제 게릴라전에 더 경험이 풍부해진 요나단과 시몬은 더 멀리 후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이에 따라 베트호글라라는 사막 지역을 요새화했다.[38] 그곳에서 그들은 바키데스에 의해 며칠 동안 포위되었다. 요나단은 상대 장군에게 평화 조약과 포로 교환을 제안했다. 바키데스는 기꺼이 동의했고, 다시는 요나단과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했다. 그는 그의 군대와 함께 이스라엘을 떠났다. 승리한 요나단은 이제 미크마스의 옛 도시에 거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무신론자와 배교자"를 땅에서 몰아내려고 노력했다.[39] 주요 출처인 마카베오기 1서는 이로 인해 "이스라엘에서 칼이 멈추었다"고 말하며, 실제로 이후 5년(기원전 158–153년) 동안 아무런 보고도 없었다.

중요한 외부 사건으로 인해 마카베오인들의 계획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데메트리우스 1세 소테르는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2세 필라델푸스(기원전 159–138년 재위),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기원전 163–145년 재위),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의 공동 통치자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들은 셀레우코스 왕위의 경쟁자인 알렉산더 발라스를 지원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아들이자 데메트리우스의 사촌이라고 주장했다. 데메트리우스는 유대 지역의 수비대를 철수시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해야 했다. 아코 시와 벧추르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였다. 게다가 그는 요나단에게 군대를 모집하고 아코 시에 억류된 인질을 되찾도록 허용하면서 그의 충성을 얻으려 했다. 요나단은 이러한 조건에 기꺼이 동의하여 기원전 153년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도시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요나단에게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대제사장으로 공식 임명하는 것이 포함되었고, 데메트리우스가 거의 보장할 수 없는 특권을 약속하는 두 번째 서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40] 요나단은 발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요나단은 백성의 공식적인 종교 지도자가 되었고, 기원전 153년 장막절에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집전했다. 헬레니즘 세력은 더 이상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고 그를 공격할 수 없었다. 하스몬 왕가는 기원전 37년까지 대제사장 직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곧 데메트리우스는 기원전 150년에 왕위와 생명을 모두 잃었다. 승리한 알렉산더 발라스는 동맹군인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결혼하는 영예를 얻었다. 요나단은 이 행사에 프톨레마이오스로 초청받아 두 왕에게 선물을 가지고 나타났으며, 그들 사이에 동등하게 앉는 것이 허락되었다. 발라스는 심지어 요나단에게 자신의 왕실 의복을 입히고 그에게 높은 명예를 부여했다. 발라스는 요나단을 스트라테고스와 "메리다르크"(즉, 지방의 민간 총독; 요세푸스에는 세부 사항이 없음)로 임명하고, 명예를 안겨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으며,[41] 요나단에 대한 헬레니즘 세력의 불만을 들어주지 않았다.

2. 6. 3. 하스몬 가문의 발라스 및 데메트리우스 2세와의 관계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는 데메트리우스 1세 소테르(Demetrius I Soter)에게 셀레우코스 왕위를 주장하며 나타났다. 그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의 아들이자 데메트리우스의 사촌이라고 주장했다.[40] 데메트리우스는 유대 지역의 수비대를 철수시켜야 했고, 요나단에게 군대를 모집하고 인질을 되찾도록 허용하며 그의 충성을 얻으려 했다. 요나단은 이 조건에 동의하여 예루살렘에서 도시를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요나단에게 이스라엘 대제사장(High Priest)으로 공식 임명하는 등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다.[40] 요나단은 발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기원전 153년 장막절(Sukkot)에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집전했다.

기원전 150년, 데메트리우스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왕위와 생명을 잃었다. 승리한 알렉산더 발라스는 클레오파트라 테아(Cleopatra Thea)와 결혼했고, 요나단은 이 행사에 초청받아 왕들과 동등하게 앉는 영예를 얻었다. 발라스는 요나단을 스트라테고스(strategos)와 "메리다르크"(지방의 민간 총독)로 임명했다.[41]

147년, 데메트리우스 2세 니카토르는 데메트리우스 1세 소테르의 아들로서 발라스의 왕위를 주장했다. 셀레 시리아의 총독 아폴로니우스 타오스는 요나탄에게 전투를 걸었고, 요나탄과 시몬은 야파에서 아폴로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요나탄은 아소토스를 점령하고 다곤 신전을 불태웠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요나단에게 에크론을 하사했다. 요나탄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평화롭게 만나 엘레우테루스 강까지 동행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43]

2. 6. 4. 데메트리우스 및 디오도토스와의 관계

데메트리우스 1세 소테르는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2세 필라델푸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 클레오파트라 2세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셀레우코스 왕위 경쟁자인 알렉산더 발라스를 지원받았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데메트리우스는 유대 지역 수비대를 철수해야 했고, 요나단에게 군대 모집과 인질 반환을 허용하며 충성을 얻으려 했다. 요나단은 이 조건에 동의하고 기원전 153년 예루살렘에서 도시를 요새화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요나단에게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 등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고, 요나단은 발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요나단은 기원전 153년 장막절에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집전하며 백성의 공식적인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40]

기원전 150년, 데메트리우스는 왕위와 생명을 잃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결혼했다. 요나단은 프톨레마이오스에서 열린 이 행사에 초청받아 두 왕과 동등하게 앉는 영예를 얻었다. 발라스는 요나단을 스트라테고스와 "메리다르크"(지방 민간 총독)로 임명했다.[41]

145년, 안티오크 전투에서 알렉산더 발라스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패배했다. 데메트리우스 2세 니카토르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고, 클레오파트라 테아의 두 번째 남편이 되었다.

요나단은 데메트리우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예루살렘의 셀레우코스 요새 아크라를 포위했다. 데메트리우스는 요나단에게 자신 앞에 나오라고 명령했고, 요나단은 장로들과 사제들을 동반하여 왕에게 선물을 바쳐 진정시켰다. 왕은 요나단을 대제사장 직위에 재확인하고, 사마리아의 세 토파르키인 에프라임 산, 로드, 라마트하임-소핌을 주었다. 300 탈렌트의 선물을 받고 전체 국가는 세금을 면제받았다.

알렉산더 발라스와 클레오파트라 테아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6세 디오니소스가 새로운 왕위 주장자로 나타났다. 장군 디오도투스 트리폰은 안티오코스 6세를 이용하여 왕위에 대한 야망을 실현하려 했다. 데메트리우스 2세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요나단은 디오도투스 트리폰과 안티오코스 6세가 수도를 장악했을 때 새 왕을 지원했다. 안티오코스 6세는 요나단의 모든 권리를 확인하고 그의 형제 시몬을 파랄리아(해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했다.[46]

요나단과 시몬은 정복할 권리를 얻었다. 아스켈론은 자발적으로 항복했고, 가자는 강제로 점령되었다. 요나단은 하자르 평원에서 데메트리우스 2세의 스트라테고이를 물리쳤고, 시몬은 베스-주르 요새를 점령했다.[47]

디오도투스 트리폰은 요나단을 스키토폴리스로 초청하여 우호적인 회담을 가졌으나, 요나단을 함정에 빠뜨려 프톨레마이스에서 포로로 잡았다.[48]

2. 6. 5. 시몬의 지도권 승계

기원전 142년, 요나단이 적장 트리폰에게 붙잡혀 살해되자,[96] 그의 형제 시몬이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자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시몬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주둔하던 시리아 군을 격퇴하고 철수시킴으로써 시리아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인정받았다.[97] 하스몬 가문의 제사장 정통성에 의문을 품는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하스몬 가문의 정치적 업적을 본 많은 사람들은 "충실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몬을 그들(유대인)의 지도자, 대제사장으로 하는 것"에 동의했다(마카비 1서 14:41).

기원전 142년부터 기원전 135년까지 시몬의 통치 기간 동안 유대는 시리아로부터 사실상 독립을 이루었다. 시몬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고, 원로원은 이를 승인했다(마카비 1서 15:19). 그러나 기원전 135년 2월, 시몬은 그의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암살당했다.

2. 7. 하스몬 왕조의 확장과 내전

유다 마카베오셀레우코스 제국 군대를 격파한 지 20년 후, 그의 동생 시몬에 의해 하슈모나이 왕국이 성립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로마 공화국파르티아 제국 등 신흥 강대국들의 공격으로 쇠퇴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독립을 쟁취할 기회를 얻었다.[11]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반독립을 달성한 후, 하스몬 왕조는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요나단 압푸스는 페레아를 정복했고, 요한 히르카누스는 사마리아이두매를 정복하고 이두매인들에게 유대교 개종을 강요했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갈릴리를, 알렉산더 얀나이우스는 이투레아를 정복하고 이투레아인들에게 유대교 개종을 강요했다.[60][61][62][63][64]

하스몬 왕조 통치자들은 처음에는 반군 지도자로 통치했지만, 점차 대제사장(기원전 152년, 요나단 압푸스), 에트나르크(기원전 142년, 시몬 타시)를 거쳐 마침내 왕 (바실레우스)(기원전 104년, 아리스토불루스 1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얀나이우스가 건설한 사르타바 요새의 잔해


기원전 135년경,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대제사장과 에트나르크 직을 맡으며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고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봉신으로 총독을 지냈지만,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이 쇠퇴하면서 반자치적으로 통치했다. 기원전 110년, 히르카누스 1세는 마다바세겜을 점령하며 하스몬 왕국의 첫 군사 정복을 수행했다.[58][59]

하스몬 왕조의 확장과 함께 내부 갈등도 심화되었다. 알렉산더 얀나이우스 통치 시기에는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갈등, 유대인 반군 진압, 나바테아인과의 전쟁 등 여러 사건이 있었다. 기원전 87년경, 얀나이우스는 유대인 반군 800명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했으며, 가다라 전투에서 나바테아인에게 패배한 후에는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65]

2. 7. 1. 파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분파

바리새파가 언제 정당으로 등장했는지는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요세푸스는 유다 마카베우스의 후계자 요나단 압푸스와 관련하여 처음 언급했다.[54] 성전 파괴 이전 바리새파가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요인 중 하나는 모든 유대인이 성전 밖에서도 (성전 의례에 적용되는) 정결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동화에 직면하여 유대 민족의 율법과 전통을 지속적으로 고수했다는 점이다. 요세푸스가 언급했듯이, 바리새파는 유대 율법의 가장 전문적이고 정확한 해설가로 여겨졌다.

하스몬 왕조 시대 동안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주로 정치 세력으로 활동했다. 바리새파는 하스몬 왕조의 팽창 전쟁과 이두메아인들의 강제 개종에 반대했지만, 바리새파가 하스몬 왕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오스에게 왕과 대제사장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왕은 성전에서 사두개파의 의식을 채택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사두개파 편을 들었다. 그의 행동은 성전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바리새파에 대한 유혈 탄압으로 끝난 짧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왕은 임종 시 두 세력 간의 화해를 촉구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어 그의 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녀의 오빠는 바리새파 지도자 시몬 벤 세타흐였다. 그녀가 죽자, 그녀의 맏아들 히르카누스 2세는 바리새파의 지원을 구했고, 그녀의 막내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사두개파의 지원을 구했다.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간의 갈등은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 역사에서 로마 시대를 시작하면서 종식된 내전으로 이어졌다.

요세푸스는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바리새파에게 매우 호의적이었고, 특히 산헤드린으로 알려진 기관에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녀의 통치 하에 엄청나게 커졌다고 증언했다. 미쉬나와 탈무드와 같은 후기 텍스트는 희생 제물, 기타 성전 의례, 불법 행위, 형법 및 통치와 관련하여 바리새파에 기인하는 수많은 판례를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파가 평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하게 유지되었고, 유대 율법에 대한 그들의 판결은 많은 사람들에게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비록 이러한 텍스트들이 이 시대가 한참 지난 후에 쓰여졌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들이 제2성전 시대의 역사에 대한 상당히 신뢰할 만한 기록이라고 믿는다.

하스몬 왕조의 세습 체제에 대해, 처음에는 하스몬 가문의 대 시리아 전쟁에 협력적이었던 유대교 경건파 등이 비판으로 돌아섰다. 이때, 경건파 중에서 율법에 대한 충실성을 특징으로 하는 바리새파가 발생했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는 바리새파가 아닌, 사두개파와 접근하여 통치 체제에 편입시킴으로써 유대교 지도층을 묶어두려 했다.[98]

2. 7. 2. 내전

요한 히르카누스는 사마리아이두매를 정복했고,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갈릴리 영토를, 알렉산더 얀나이우스는 이투레아 영토를 정복하는 등 하스몬 왕조는 주변 지역으로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하스몬 왕조 통치자들은 처음에는 반군 지도자, 이후에는 대제사장, 에트나르크를 거쳐 바실레우스(왕)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62]

히르카누스 1세 사후,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감옥에 가두고 어머니를 굶어 죽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국의 독립을 주장하며 '왕(바실레우스)' 칭호를 처음 사용한 하스몬 왕조 사람이 되었다.[62] 그러나 그는 통치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했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 알렉산더 얀나이우스가 왕이자 대제사장으로 통치했다. 그는 이투레아를 정복하고, 유대교로 개종을 강요했다.[63][64] 그의 통치 기간 중,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데메트리우스 3세 에우카이루스와 관련된 6년 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얀나이우스는 유대인 반군 800명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했다.[65]

가다라 전투에서 나바테아인에게 패배한 후, 얀나이우스는 예루살렘에서 격렬한 유대인 반대에 직면했고, 획득한 영토를 나바테아인들에게 양도해야 했다.[65]

알렉산더 얀나이우스 사후,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통치했다. 그녀는 제2성전 시대의 유일한 섭정 유대인 여왕이었다.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바리새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

살로메 알렉산드라 사후, 그녀의 아들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사이에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이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66]

2. 8. 로마의 개입

하스몬 왕조는 유다 마카베오셀레우코스 제국 군대를 격파한 지 20년 만에 그의 동생 시몬 마카베오의 주도로 성립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공격한 후 시리아와 페니키아 지방을 엄격하게 통치하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사마리아인의 종교 및 문화적 관습을 탄압하고, 헬레니즘 관행을 강요했다. 이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기원전 167년), 로마 공화국파르티아 제국 등 신흥 강대국들의 공격을 받아 약해진 셀레우코스 제국의 붕괴로 유대인들은 독립 국가를 세웠다.

기원전 63년, 하스몬 왕국은 로마 공화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시몬의 증손인 요한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대왕의 대리전에서 볼모가 되었다. 폼페이우스(기원전 48년 사망)와 카이사르(기원전 44년 사망)의 죽음과 관련된 로마 내전으로 인해 로마의 하스몬 왕국 지배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어 파르티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자치권을 잠시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독립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로마군에 의해 곧 무너졌다.

하스몬 왕국은 기원전 37년헤로데 왕국에 항복하기 전까지 103년 동안 존속했다. 헤롯 대왕(이두메안)을 왕으로 세움으로써 유다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하스몬 왕국은 멸망하였다.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우스는 반대자에게 극형을 가했기 때문에, 그의 공포 정치에 하스몬 왕조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이 더욱 높아졌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재위: 기원전 76년 - 기원전 67년)가 왕위를 이었고,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재위: 기원전 67년 - 기원전 63년)가 뒤를 이었다. 원래 대제사장이었던 형 요한 히르카누스 2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무력으로 이를 빼앗았다. 이 형제의 다툼이 하스몬 왕조 시대의 종말을 앞당기게 된다.

왕위에서 쫓겨나고 대제사장 직도 박탈당한 히르카누스 2세는 이두매인 안티파트로스의 지원으로 체제를 재건하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의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중동에 진출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로마군이 유대에 도착했기 때문에, 양 세력은 앞다투어 이에 접근했다. 폼페이우스는 유능한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위험시하고, 무능한 히르카누스 2세를 괴뢰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로마로 연행하고,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복직시켰다 (예루살렘 공방전).

2. 8. 1. 폼페이우스 대왕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이는 이 신성한 장소에 대한 두 번째 침입이었다. 유대 속주는 로마에 조공을 바치고 시리아의 로마 총독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67]

''Pompey in the Temple of Jerusalem'', by Jean Fouquet


이 내전 동안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폼페이우스의 이름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시리아로 갔다.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형제는 각자 선물과 약속으로 스카우루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스카우루스는 400 탈렌트의 선물에 마음이 움직여 아리스토불루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폼페이가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기원전 63년), 폰토스 왕국과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대로 승리하여 "아시아 정복자" 칭호를 받은 폼페이는 유대를 로마의 지배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그는 히르카누스가 이드마야인 안티파테르와 거의 같은 동기로 로마의 보호령으로서 아리스토불루스보다 더 낫다고 판단했다. 폼페이는 500 탈렌트 가치의 황금 포도나무를 선물받았음에도 결정을 미루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폼페이의 의도를 간파하고 군대를 소집했으나, 폼페이는 여러 번 그를 격파하고 도시들을 점령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알렉산드리움 요새에 웅크렸지만, 곧 항복하고 예루살렘을 인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애국자들은 로마인들에게 성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고, 포위 공격이 시작되어 도시가 점령되었다.

기원전 63년에 유대는 로마의 보호령이 되었다. 총독의 행정 아래 유대는 왕을 허용받았고, 총독의 임무는 무역을 규제하고 세수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67] 기원전 57~55년에 시리아의 집정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옛 하스몬 왕국을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로 나누고, "산헤드린"(그리스어: συνέδριον, "synedrion")으로 알려진 5개의 법률 및 종교 협의회를 두었다.[68][69]

왕위에서 쫓겨나고 대제사장 직도 박탈당한 히르카누스 2세는 이두매인 안티파트로스의 지원으로 체제를 재건하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의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중동에 진출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린 폼페이우스와 로마군이 유대에 도착했기 때문에, 양 세력은 앞다투어 이에 접근했다. 폼페이우스는 유능한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위험시하고, 무능한 히르카누스 2세를 괴뢰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로마로 연행하고,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복직시켰다.

2. 8. 2.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기원전 63년, 하슈모나이 왕국은 로마 공화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분열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시몬의 증손인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대왕의 대리전에서 볼모가 되었다. 폼페이우스(기원전 48년 사망)와 카이사르(기원전 44년 사망)의 죽음과 관련된 로마 내전으로 인해 로마의 하슈모나이 왕국 지배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어, 파르티아 제국이 뒷받침하는 자치권을 잠시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짧은 독립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로마군에 의해 급속히 무너졌다.[67]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이름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시리아로 갔다. 두 형제는 그에게 호소하며, 각자 선물과 약속으로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처음에는 스카우루스가 400탈렌트의 선물에 마음이 움직여 아리스토불루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아레타스는 유대에서 군대를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퇴각하는 동안 아리스토불루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폼페이가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기원전 63년), 상황이 달라졌다. 소아시아에서 폰토스 왕국과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아시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받은 폼페이는 유대를 로마의 지배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그는 히르카누스의 능력에 대해서도 같은 견해를 가졌고, 안티파테르와 거의 같은 동기에 의해 움직였다. 로마의 보호령으로서 히르카누스는 아리스토불루스보다 더 받아들여질 것이었다. 따라서 형제들과 더불어, 하스몬 왕조의 분쟁에 지쳐 왕조의 멸망을 바라는 백성들의 대표단이 폼페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500탈렌트 가치의 황금 포도나무를 아리스토불루스로부터 선물 받았음에도 결정을 미루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폼페이의 의도를 간파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폼페이는 여러 번 그를 격파하고 그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알렉산드리움 요새에 웅크렸지만, 곧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로마의 첫 번째 소환에 항복하여 예루살렘을 그들에게 인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애국자들은 로마인들에게 성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고, 포위 공격이 시작되어 도시 점령으로 끝났다. 폼페이는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이는 누군가가 감히 이 신성한 장소에 침입한 두 번째 경우였다. 유대 속주는 로마에 조공을 바쳐야 했고, 시리아의 로마 총독의 감독을 받았다.[67]

기원전 57~55년에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시리아의 집정관은 옛 하스몬 왕국을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로 나누고, "산헤드린"(그리스어: συνέδριον, "synedrion")으로 알려진 5개의 법률 및 종교 협의회를 두었다.[68][69]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히르카누스 2세와 안티파테르에 대항하여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지지했다. 히르카누스의 약점과 아리스토불루스의 야망 사이에서 유대(Judea)는 독립을 잃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로 포로로 잡혀갔고, 히르카누스는 대제사장으로 재임명되었지만 정치적 권한은 없었다. 기원전 5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히르카누스와 안티파테르로부터 유대 통제권을 빼앗기 위해 아리스토불루스와 그의 가족을 자신의 협력자로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이자,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은 아리스토불루스를 로마에서 독살하고 안티오크에서 알렉산더를 처형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하수인들은 곧 다른 편으로 돌아설 기회를 얻었다.[70]

안티파테르와 히르카누스의 시기 적절한 지원으로 승리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이전 충성을 했던 아리스토불루스의 젊은 아들 안티고누스 2세의 주장을 무시하고 히르카누스와 안티파테르의 권한을 확인했다.[71]

기원전 47년 히르카누스가 민족 군주로 복원된 것은 카이사르가 안티파테르를 첫 번째 로마 속주 총독으로 임명한 시점과 일치하며, 안티파테르가 자신의 가문의 이익을 증진할 수 있게 했다.[72]

안티파테르는 자신의 아들들을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임명했다. 파사엘은 예루살렘 총독이 되었고, 헤로데는 갈릴리 총독이 되었다. 이로 인해 히르카누스와 안티파테르 가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헤로데의 통치에서 발생한 학대에 대한 재판으로 이어져 헤로데는 기원전 46년에 망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헤로데는 곧 돌아왔고, 안티파테르 가문에 대한 영예는 계속되었다. 히르카누스의 무능함과 약점은 너무나 분명했기에, 그가 산헤드린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앞에서 헤로데를 변호했을 때, 후자는 히르카누스에게서 그의 명목상의 정치적 권한과 그의 칭호를 박탈하고, 그 두 가지를 모두 피고에게 부여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에 암살되었고, 유대를 포함한 로마 세계 전역에 불안과 혼란이 퍼졌다.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테르는 기원전 43년에 나바테아 왕 말리쿠스 1세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말리쿠스는 히르카누스의 술 따르는 자 중 한 명을 매수하여 안티파테르를 독살했다. 그러나 안티파테르의 아들들은 유대와 아버지의 꼭두각시 하스몬 왕가인 히르카누스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2. 8. 3. 파르티아의 침공,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에 암살된 후, 로마 공화주의 장군이자 파르티아 제국 주재 대사였던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해방자 내전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지지했다. 그들이 패배한 후 라비에누스는 파르티아에 합류하여 기원전 40년에 로마 영토 침공을 도왔다. 파르티아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고 라비에누스는 시리아 주변의 마르크 안토니우스의 로마 수비대를 설득하여 그의 편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었다. 파르티아는 군대를 나누어 파코루스 1세 휘하에서 레반트를 정복했다.

ואנטיגונוס ... הסית את הפרתים לפלוש לסוריה ולפלשתינה, [ו]היהודים תמכו בלהיטות בצאצאי בית חשמונאי והדיחו את השנואים|안티고누스는... 파르티아인들을 선동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략하게 했고, 유대인들은 마카베오 가문의 후손을 열렬히 지지하며 증오스러운 이두메인들과 그들의 꼭두각시 유대인 왕을 몰아냈다.he

האידומים ואת מלך יהודה הבובה שלהם. המאבק בין העם לרומאים החל ברצינות, ואנטיגונוס, שהפרתים הושיבו על כס המלכות, שמח על תחייתו של בית חשמונאי, בזז והתעלל ביהודים, וחשב שעידן חדש של עצמאות הגיע.|백성과 로마인 사이의 투쟁은 진지하게 시작되었고, 파르티아인들이 왕위에 앉힌 안티고누스는 유대인들을 약탈하고 괴롭히면서 하스몬 왕조의 부활을 기뻐했지만, 독립의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he[73]

파사엘과 히르카누스 2세가 파르티아로 사절단을 보냈을 때, 파르티아는 대신 그들을 붙잡았다. 그 자리에 있던 안티고누스는 히르카누스가 대제사장직에 부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귀를 잘랐고, 파사엘은 죽임을 당했다.

히브리어 이름이 마타티아스인 안티고누스는 헤롯, 즉 그의 가장 위험한 적을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자 대제사장의 이중 칭호를 단 것은 3년뿐이었다. 헤롯은 망명하여 마르크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구했다. 헤롯은 기원전 40년에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지명되었다. 안토니우스는

tum [Herodem] regem Judaeorum esse decreverit, ... [senatui] dixit, utile esse, Herodem regem esse, ad bellum Parthicum, ita ut omnes suffragium ferrent. Senatus dimissus, Antonius et|그때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만들기로 결심했고... [원로원]에게 헤롯이 왕이 되는 것이 파르티아 전쟁에서 그들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으므로 그들은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원로원이 해산되자 안토니우스와la

Augustus [Caesar Augustus] egressi sunt, Herode inter eos, et praecedebant consules et reliqui magistratus, ut sacrificia [diis Romanis] offerrent, et decreta in Capitolio ponerent. Antonius quoque convivium Herodi, primo die regni sui, fecit.|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을 사이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집정관과 나머지 행정관들은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법령을 카피톨 언덕에 바치기 위해 그들 앞에 나아갔다. 안토니우스는 또한 헤롯의 통치 첫날에 잔치를 열었다.la[74]

그 후의 투쟁은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주 로마군은 파르티아를 격파하는 데 전념했고 헤롯을 지원할 추가 자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파르티아의 패배 후 헤롯은 기원전 37년에 그의 라이벌을 물리쳤다.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넘겨졌고 그 직후 처형되었다. 로마는 헤롯의 유대인 왕 선포에 동의했고, 이는 유대 지역에 대한 하스몬 왕조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헤로데 대왕의 예루살렘 점령, 기원전 36년 (sic)


최대 영토 당시의 파르티아 제국, 기원전 60년경

2. 9. 헤로데와 왕조의 종말

기원전 63년, 하슈모나이 왕국은 로마 공화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분열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시몬 마카베오의 증손인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대왕의 대리전에서 볼모가 되었다. 폼페이우스(기원전 48년)와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44년)의 죽음과 관련된 로마 내전으로 말미암아 로마가 하슈모나이 왕국에 대한 지배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어 파르티아 제국이 뒷받침하는 자치권을 잠시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 짧은 독립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로마군들에 의해 급속히 무너졌다.[73]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44년에 암살된 후, 로마 공화주의 장군이자 파르티아 제국 주재 대사인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해방자 내전에서 브루투스카시우스를 지지했다. 그들이 패배한 후 라비에누스는 파르티아에 합류하여 기원전 40년에 로마 영토 침공을 도왔다. 파르티아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고 라비에누스는 시리아 주변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로마 수비대를 설득하여 그의 편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었다. 파르티아는 군대를 나누어 파코루스 1세 휘하에서 레반트를 정복했다. 안티고누스는 파르티아인들을 선동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략하게 했고, 유대인들은 마카베오 가문의 후손을 열렬히 지지하며 이두메인들과 그들의 꼭두각시 유대인 왕을 몰아냈다.

히르카누스 2세가 파르티아로 사절단을 보냈을 때, 파르티아는 대신 그들을 붙잡았다. 그 자리에 있던 안티고누스는 히르카누스가 대제사장직에 부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귀를 잘랐고, 히르카누스 2세 지지자였던 파사엘은 죽임을 당했다.[74]

히브리어 이름이 마타티아스인 안티고누스는 헤로데를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자 대제사장의 이중 칭호를 단 것은 3년뿐이었다. 헤로데는 망명하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구했다. 헤로데는 기원전 40년에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지명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헤롯이 왕이 되는 것이 파르티아 전쟁에서 그들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원로원에 말했고, 원로원은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그 후의 투쟁은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주 로마군은 파르티아를 격파하는 데 전념했고 헤롯을 지원할 추가 자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파르티아의 패배 후 헤롯은 기원전 37년에 그의 라이벌을 물리쳤다.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넘겨졌고 그 직후 처형되었다. 로마는 헤롯의 유대인 왕 선포에 동의했고, 이는 유대 지역에 대한 하스몬 왕조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하지만 안티고누스는 마지막 하스몬 왕조 인물은 아니었다. 헤로데 치하에서 남은 가문의 남성 구성원들의 운명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리스토불루스 3세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장남 알렉산더의 손자였는데, 잠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헤로데의 질투심 때문에 곧 처형되었다(기원전 36년). 그의 누이 마리암네는 헤로데와 결혼했지만, 역시 그의 질투의 희생양이 되었다. 헤로데가 낳은 그녀의 아들들인 아리스토불루스 4세와 알렉산더 역시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에 의해 처형되었다.

히르카누스 2세는 기원전 40년부터 파르티아인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기원전 36년까지 4년 동안 그는 바빌론 유대인들 틈에서 살았고, 그들은 그에게 모든 존경을 표했다. 그해 헤로데는 히르카누스가 파르티아인들이 그의 왕좌를 되찾도록 도울 수 있다고 두려워하여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했다. 바빌론 유대인들은 헛되이 그에게 경고했다. 헤로데는 그를 모든 존경으로 맞이하여 그의 식탁에서 첫 번째 자리를 주고 국무회의 의장으로 임명했지만, 그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하스몬 왕조 인물로서 히르카누스는 헤로데에게 너무 위험한 경쟁자였다. 기원전 30년, 아라비아 왕과 공모했다는 혐의로 히르카누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후기 헤로데 왕조의 통치자들인 아그리파 1세와 아그리파 2세는 모두 하스몬 왕조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그리파 1세의 아버지가 아리스토불루스 4세였고, 그는 헤로데와 마리암네 1세 사이의 아들이었지만, 그들은 직접적인 남성 후손은 아니었다. 헤로데는 혈통상 하스몬 왕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스몬 왕조는 상속에 대한 명확한 규칙이 없었고, 아그리파는 그의 할머니 마리암네 1세를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3. 하스몬 왕조의 지도자들

하스몬 왕조 가계도


하스몬 왕조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1]

통치 기간이름직위비고
기원전 170년–기원전 167년마타티아스
기원전 167년–기원전 160년유다 마카베오
기원전 160년–기원전 143년요나단 아푸스대제사장기원전 152년부터 대제사장
기원전 142년–135년시몬 타시에트나르크, 대제사장
기원전 134년–104년요한 히르카노스 1세에트나르크, 대제사장
기원전 104년–103년아리스토불로스 1세왕, 대제사장
기원전 103년–76년알렉산드르 얀나이오스왕, 대제사장
기원전 76년–67년살로메 알렉산드라여왕
기원전 67년–66년히르카노스 2세왕, 대제사장기원전 76년부터 대제사장
기원전 66년–63년아리스토불로스 2세왕, 대제사장
기원전 63년–40년히르카노스 2세 (복위)대제사장, 에트나르크기원전 63년부터 대제사장, 기원전 47년부터 에트나르크
기원전 40년–37년안티고노스왕, 대제사장
기원전 36년아리스토불로스 3세대제사장



4. 가계도



마타티아
유다 마카비, 엘르아자르, 시몬, 요한, 요나탄
요한 히르카누스 1세
아리스토불루스 1세, 알렉산데르 야나이, 살로메 알렉산드라
요한 히르카누스 2세, 아리스토불루스 2세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스, 안티고노스
헤로데 대왕, 미리암네 1세, 아리스토불루스 3세
헤로데 왕조


5. 외국의 관점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하스몬 왕국의 건국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Oriente subiecto, petita ab Iudaeis venia; nam Aegyptiis quoque morbo foedatis oraculum Hammonis preces expetendas Israelem iubere dicebatur.''la

''Quibus Assyrii, Medi, Persae imperitarunt, Iudaei servorum viles habiti; postquam Macedones praepolluere, rex Antiochus demere superstitionem et mores Graecorum induere adnisus, quominus teterrimam gentem in melius mutaret, Parthico bello prohibitus est, nam ea tempestate Arsaces desciverat. Tunc, sublatis Macedonibus nondum adultis Parthis, Romanis procul agentibus, Iudaei reges suos posuere, qui, pulsi per mobile vulgus, resumpta per vim dominatione, fugas civium, urbium eversiones, fratrum, coniugum, parentum neces, aliaque solita regibus ausi superstitionem fovebant, quia honor sacerdotii firmamentum potentiae adsumebatur.''la[75]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동방이 아시리아, 메디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유대인들은 그들의 가장 비천한 신하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인들이 지배력을 얻은 후 안티오코스 4세 왕은 유대교의 미신을 없애고 그리스 문명을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파르티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그는 이 가장 비열한 백성을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시기에 아르사케스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후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약해지고 파르티아가 아직 강성해지기 전, 그리고 로마인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틈을 타 유대인들은 스스로 왕을 선출했다. 이들은 변덕스러운 군중에 의해 차례로 쫓겨났지만, 무력으로 왕위를 되찾아 시민들을 추방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형제, 아내, 부모를 살해했으며, 주저 없이 모든 종류의 왕실 범죄를 감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적 미신을 장려했는데, 이는 그들이 시민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제직을 맡았기 때문이다.[75]

6. 유산과 학문

하스몬 왕조는 독립적인 유대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고, 왕조는 마카비 형제들이 얻었던 민족주의적 추진력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77]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후기 하스몬 왕조가 왕권을 주장한 것은 결국 멸망으로 이어졌는데, 그 칭호는 오직 다윗 왕의 후손만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77] 하스몬 왕조는 관료 조직을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채웠으며, 결국 매우 헬레니즘화되어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유대인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78][79] 잦은 왕조 내 분쟁 또한 후대 유대인들이 후기 하스몬 왕조를 타락했다고 여기는 데 기여했다.[80] 요세푸스는 이러한 시각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으로, 그의 기록은 하스몬 왕조에 대한 정보의 유일한 출처인 경우가 많다.

하스몬 왕조의 동전은 고대 히브리어 문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페니키아어에서 파생되어 히브리어를 표기하는 데 쓰였다. 동전은 청동으로만 주조되었다. 동전에 사용된 기호는 메노라, 풍요의 뿔, 종려 가지, 백합, 닻, 별, 석류, 드물게 투구 등이 있다. 대부분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별 기원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85] 하스몬 왕조 동전은 유대에서 인간이나 동물을 새기지 않은 최초의 동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요나탄 아들러는 이를 하스몬 왕조가 십계명에 따라 "새긴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 최초의 유대 당국이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86]

6. 1. 유대 민족주의

유다 마카베오가 마카비 전쟁 때 셀레우코스 군을 격파한 지 20년 만에, 그의 동생 시몬 마카베오의 주도로 하슈모나이 왕국이 성립되었다.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 제1권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과 그 사원을 파괴하고, 유대인사마리아인의 종교 및 문화적 관습을 탄압하고, 헬레니즘 관행을 강제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기원전 167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붕괴와 맞물려 유대인들이 독립 국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하스몬 왕조는 독립적인 유대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고, 왕조는 마카비 형제들이 얻었던 민족주의적 추진력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

하슈모나이 왕국의 멸망은 유대인의 자치 통치의 종말을 의미했지만, 유대 민족주의와 독립에 대한 열망은 로마 통치 하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는 서기 6년 퀴리니우스 인구 조사로 시작되어 1~2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유대-로마 전쟁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대반란(서기 66-73년), 키토스 전쟁(115-117년), 바르 코흐바의 반란(132-135년)이 있다.[3]

전쟁 기간 동안 임시적인 연방이 수립되기도 했지만, 결국 로마에 굴복했다.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 휘하의 로마 군단은 예루살렘 파괴를 통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했으며, 헤롯 성전(서기 70년)과 유대인의 요새(특히 67년의 가믈라와 73년의 마사다)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또한 많은 유대인을 노예화하거나 학살했다. 로마 제국에 대한 유대인 반란의 패배는 많은 유대인이 국가를 잃고 흩어지거나 제국 전역에서 노예로 팔려나가면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규모와 지리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3]

다니엘 R. 슈워츠는 마카베오기 상과 하의 주제적 차이가 유대인이 종교 중심이 되어야 할지, 정치 중심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이념적 분열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는 유대인 신정 정치 및/또는 세속적 민족주의의 형태를 띤다.[4]

6. 2. 유대 종교적 관점과 실천에 대한 영향

셰이 J. D. 코헨의 1999년 저서 『유대교의 시작』에 따르면, 유대교 정체성이 처음으로 유대 민족성을 초월하여 종교적 정체성이 된 것은 하스몬 왕조가 인접 민족을 정복하고 유대교로 개종시키기 시작한 기원전 2세기 후반이다.[81] 라인하르트 그레고어 크라츠의 2013년 저서 『역사적 및 성서적 이스라엘』(2015년 영어로 번역 출판)은 고대 시대에 "성서적" 및 "비성서적" 이스라엘/유대교 전통이 수세기 동안 존재했으며, 성서적 유대교는 하스몬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지배적이 되었다고 주장했다.[82] 존 J. 콜린스의 2017년 저서 『유대교의 발명』은 기원전 2세기 중반이 현대 문학이 유대교 율법(''할라카'')의 특정 질문에 집중한 최초의 시기라고 밝혔다.[83] 요나탄 아들러의 2022년 저서 『유대교의 기원』은 ''코셔'' 및 의례적 정결 유지와 같은 많은 표준 유대교 종교 관습이 하스몬 왕조 통치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했다.[84]

6. 3. 화폐학



하스몬 왕조의 동전은 고대 히브리어 문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페니키아어에서 파생되어 히브리어를 표기하는 데 쓰였다. 동전은 청동으로만 주조되었다. 동전에 사용된 기호는 메노라, 풍요의 뿔, 종려 가지, 백합, 닻, 별, 석류, 드물게 투구 등이 있다. 대부분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별 기원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85] 하스몬 왕조 동전은 유대에서 인간이나 동물을 새기지 않은 최초의 동전으로 알려져 있다. 요나탄 아들러는 이를 하스몬 왕조가 십계명에 따라 "새긴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한 최초의 유대 당국이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8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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