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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마 시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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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시마 시게오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미스터 자이언츠'로 불리며 많은 기록을 세웠다. 릿쿄 대학 시절 도쿄 6대학 리그에서 활약하며 프로 구단의 주목을 받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후 수위 타자 6회, MVP 5회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ON포' 시대를 이끌었다. 감독으로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두 차례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선수와 감독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겨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에는 문화공로자 및 국민영예상을 수상했으며, 한국 야구에도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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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마 시게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문화훈장 수훈 시 공표된 나가시마 시게오의 초상 사진
문화훈장 수훈 시 공표된 나가시마 시게오의 초상 사진
원어 이름나가시마 시게오 (長嶋 茂雄)
로마자 표기Nagashima Shigeo
출생일1936년 2월 20일
출생지지바현 인바군 우스이정(현: 사쿠라시)
신장178cm
체중76kg
利き腕오른손
타석오른손
수비 위치3루수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연도1958년
첫 출장1958년 4월 5일
마지막 경기1974년 10월 14일 (은퇴 경기)
선수요미우리 자이언츠 (1958–1974)
감독 및 코치 경력
감독요미우리 자이언츠 (1975–1980, 1993–2001)
국가대표일본 대표 (2003–2004)
수상 내역
일본 시리즈 우승 (선수)11회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일본 시리즈 우승 (감독)3회 (1994, 1996, 2000)
신인왕센트럴 리그 신인왕 (1958)
최우수 선수센트럴 리그 MVP (1961, 1963, 1966, 1968, 1971) 5회
일본 시리즈 MVP4회 (1963, 1965, 1969, 1970)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1971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 결번3
통계
타율0.305
홈런444
안타2,471
타점1,522
승패 기록1,034승 948패
승률0.521
명예의 전당
헌액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88)
헌액 유형일본

2. 어린 시절과 아마추어 야구 경력

나가시마는 사실 어린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라이벌인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었다.[193] 지바현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릿쿄 대학에 입학하여 팀의 주전 3루수가 되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 2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으며, 3루수 부문에서 5시즌 연속 베스트 나인상을 수상했다.

도쿄 6대학 야구에서의 나가시마의 활약을 보도하는 『아사히 신문』 1955년 9월 11일자 조간


대학 3학년 나가시마. 대학 본관 앞에서.


1957년 봄 6대학 대회에서 우승. 왼쪽부터 스기우라 타다시, 모토야시키 킨고, 나가시마.


그의 마지막 해에는 모든 프로팀의 스카우트들이 나가시마를 영입하려 했고, 특히 난카이 호크스와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그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려 했다. 그는 호크스와 계약하는 것으로 거의 결정되었지만, 1957년 11월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그는 자이언츠와 1,800만 엔의 계약을 맺었는데, 이는 당시 야구 선수 최고 연봉이었다.

1954년, 릿쿄 대학 경제학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같은 해 6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가장을 잃은 나가시마의 집안은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당시 인바 지구에서는 채소 행상 수가 늘어나 어머니가 게이세이 본선게이세이 지바선을 이용해 지바와 도쿄로 가서 채소 행상을 하는 등 생계를 유지했다.[201]

야구부에서는 스나오시 감독의 총애를 받아 조 디마지오요기 베라 등의 플레이를 참고로 한 메이저리그식 연습과 스나오시의 자택에서 연습을 하는 등 ‘특별 대우의 맹훈련’을 거듭한 끝에 주전 3루수가 됐다.[26]

스나오시가 물러난 이후 쓰지 다케시의 지휘 하에서 입단 동기 스기우라 타다시 투수, 주장을 맡은 모토야시키 긴고 내야수(한큐 브레이브스, 한신 타이거스)와 함께 ‘릿쿄 3인방’이라고 불리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1956년 춘계 리그전과 1957년 추계 리그전에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고 1955년 추계 대회부터 1957년 추계 대회까지 5시즌 연속으로 리그 베스트 나인(3루수 부문)에 선정됐다. 1957년에는 도쿄 6대학 리그의 통산 신기록이 되는 8호 홈런을 때려냈다. 1955년에는 제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도쿄 6대학 야구 리그 선발 팀)로 발탁됐다. 도쿄 6대학 리그전 통산 9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할 8푼 6리(304타수 87안타), 8홈런, 39타점, 22도루[203]를 기록했다.

2. 1. 어린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는 1936년 2월 20일 지바현 인바군 우스이정(현: 사쿠라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4남매(형 1명, 누나 2명) 중 막내로 태어났다.[191] 생가는 농가였지만 토지는 대출하였고 아버지는 동사무소의 회계 담당 책임자나 조역을 하고 있었고[191] 어머니는 의지가 강할 정도의 견실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도큐 플라이어스오시타 히로시, 한신 타이거스의 소속 선수였던 후지무라 후미오의 활약상을 보면서 야구 선수에 대한 꿈을 가졌다.[192] 당시 간토 지방 거주자로는 드물게 어린 시절에는 한신의 팬이었다.[193]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형의 영향을 받아 야구를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종전 직후라는 점도 있어 장비가 그다지 갖추지 못해서 어머니가 구슬로 이용한 단단한 천으로 공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194] 또한 글러브도 어머니가 손수 만든 것이고,[194] 처음 쥐었던 방망이대나무를 깎아 만든 수제 방망이였다.[195] 초등학교 6학년 때 형이 소속됐던 지역 청년 야구단 ‘하야테 클럽’에 입단하여 형밑에서 유격수로서 활약했다.

2. 2. 중학교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는 중학교에 우스이 이초 조합립 중학교(현: 사쿠라 시립 사쿠라 중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들어갔다.[18] 종전 직후 야구의 인기가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3년 동안 같은 담임 교사였고 졸업 시에는 옷장을 선물할 만큼 학생들로부터 존경받았는데, 한 학생이 선수의 브로마이드를 갖고 온 것이 발단이 되면서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196] 이전에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적게 하면 대부분 ‘프로 야구 선수’라고 적은 걸 보고 너무나 야구에 열중하는 모습에 ‘좀더 장래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해라’라고 하면서 학생 전원을 책상 위에서 정좌시킨 적이 있다.[196] 훗날 그 선생은 “나가시마가 프로 야구의 대스타가 되리라곤 생각치도 못했었다. 아이의 꿈을 무조건에 부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반성했다.[196][18]

2. 3. 고등학교 시절

1951년 4월, 나가시마 시게오는 고시엔 출전 경험이 있는 지바 현립 지바 고등학교 대신 지바 현립 사쿠라 제1 고등학교(현 지바 현립 사쿠라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게이세이 전철 게이세이 본선 게이세이우스이역 - 게이세이사쿠라역 구간을 이용해 통학했다.[19] 2학년 때 4번 타자를 맡았으며, 고교 시절에는 거의 무명이었지만, 마지막 대회인 지구 예선에서 승리하여 미나미칸토 대회에 지바현 대표로 출전했다.

1953년 8월 1일, 오미야 구장에서 열린 구마가야 고등학교와의 1차전에서, 경기 전 부상당한 3루수 스즈키 히데미를 대신해 3루수를 맡았다.[20] 유격수로서 잦은 실책을 범했던 것이 이유였으며, 이후 3루수로 정착했다. 경기에서는 패했지만, 6회초에 상대 투수 후쿠시마 이쿠오로부터 고교 대회 유일한 홈런을 때려냈다.[21] 이 날카로운 라이너성 타구의 홈런은 비거리가 약 107m로 추정되었다.

이 홈런으로 나가시마는 야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아사히 신문 기자 구보타 다카유키가 이 홈런을 목격했고, 구보타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호치 신문 기자 다나카 시게미쓰가 후지 제철 무로란 야구부 매니저 오노 히데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22] 오노는 나가시마에게 입사를 권유했지만, 아버지의 대학 진학 희망과 상부의 홋카이도 출신 신인 내정 통보로 인해 포기했다.[23] 대신 오노는 릿쿄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스나오시 구니노부 감독의 교육 방침에 감명을 받은 나가시마의 아버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입단 제의를 나가시마에게 알리지 않고 거절했고, 프로 입단을 희망했던 나가시마는 이에 화를 냈다.

같은 해 11월 하순, 이토 스타디움에서 열린 릿쿄 대학 야구부 선발 시험에서 펜스 직격 포함 3안타(스기우라 다다시에게서도 안타)를 기록, 80명 중 20명이 고시엔 출전자인 가운데 추천 순위 2위로 합격했다(1위는 모토야시키 긴고, 3위는 스기우라).[24]

2. 4. 대학교 시절

1954년, 릿쿄 대학 경제학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같은 해 6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가장을 잃은 나가시마의 집안은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당시 인바 지구에서는 채소 행상 수가 늘어나 어머니가 게이세이 본선게이세이 지바선을 이용해 지바와 도쿄로 가서 채소 행상을 하는 등 생계를 유지했다.[201]

야구부에서는 스나오시 감독의 총애를 받아 조 디마지오요기 베라 등의 플레이를 참고로 한 메이저리그식 연습과 스나오시의 자택에서 연습을 하는 등 ‘특별 대우의 맹훈련’을 거듭한 끝에 주전 3루수가 됐다.[26] 이듬해 대학 선배인 오사와 마사요시 등이 ‘스나오시 배척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야구부 환경 한편 쓰보우치 미치노리는 자신의 저서 《풍설 속의 야구 반세기》(1987)에서 “스나오시 감독의 스파르타 훈련 방식에 싫증이 나서 그런 것 같다”고 밝혔다.}}에 싫증이 나서 1955년 무렵에는 동기인 스기우라 타다시(난카이 호크스)와 함께}} 야구부 합숙소를 빠져나와 아이치현에 연고지를 둔 주니치 드래건스 훗날 스기우라는 쓰보우치에게 그 발언의 진위를 물었더니 ‘그런 적이 있었지요’라고 대답한 것 외에 나가시마도 다카다와 친분이 있던 곤도 다다유키로부터 이 일에 대해 질문을 받고 동요했다.}} 구단 사무소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나가시마는 “군대 같은 분위기의 릿쿄 야구부가 싫어졌기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주니치에서 야구를 해서 돈을 벌고 싶다. 계약금은 필요 없다”라고 입장을 밝혔지만 응대한 주니치 구단 대표 한편 곤도는 (중략) 다카다 가즈오(당시 구단 대표 대행)에게서 “두 사람은 2학년 말쯤에 나고야의 주니치 본사에 갑자기 찾아와서 ‘주니치에 입단시켜 주었으면 한다’라고 신청했다. (중략) 조언했다”라는 증언을 했다.}}로부터 제의를 거절당했다. 또한 곤도(2006)는 “주니치는 나가시마와 스기우라를 스스로 무료라도 좋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놓쳐버렸다”며 쓰보우치(1987)도 “(만약 주니치에 입단했다면)나가시마는 ‘미스터 드래건스’가 됐을텐데 (중략) 있었다”라고 밝혔다. 주니치 신문사가 발행하는 ‘주니치 스포츠’ 기자 마스다 마모루(2020)는 “요미우리와 난카이에서 모두 신인왕이 될 두 사람(나가시마와 스기우라)을 그대로 입단시켰다면 틀림없이 주니치, 아니 그보다는 프로 야구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중략) 심정이다”라고 말했다.[202]}}

스나오시가 물러난 이후 쓰지 다케시의 지휘 하에서 입단 동기 스기우라 타다시 투수, 주장을 맡은 모토야시키 긴고 내야수(한큐 브레이브스, 한신 타이거스)와 함께 ‘릿쿄 3인방’이라고 불리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1956년 춘계 리그전과 1957년 추계 리그전에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고 1955년 추계 대회부터 1957년 추계 대회까지 5시즌 연속으로 리그 베스트 나인(3루수 부문)에 선정됐다. 1957년에는 도쿄 6대학 리그의 통산 신기록이 되는 8호 홈런을 때려냈다. 1955년에는 제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도쿄 6대학 야구 리그 선발 팀)로 발탁됐다. 도쿄 6대학 리그전 통산 9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할 8푼 6리(304타수 87안타), 8홈런, 39타점, 22도루[203]를 기록했다.

타격뿐만 아니라 수비, 빠른 발도 야구 관계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시이 렌조는 대학 시절 나가시마의 수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프로 입단이 확실시돼 여러 구단에서 나가시마와의 접촉을 꾀하고 있었다.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는 195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2] 데뷔 경기에서 카네다 마사이치를 상대로 4타석 모두 삼진을 당했지만,[2] 시즌 중반에는 팀의 클린업 히터로 자리 잡으며 리그 챔피언십 우승에 기여했다.[2]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홈런(29개)과 타점(92개)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신인상을 수상했다.[2]

1958년, 나가시마의 데뷔에 관한 신문 기사, 1958년 카네다 마사이치와의 경기에서 4타석 모두 삼진을 당했다.

3.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나가시마 시게오는 195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2] 데뷔 경기에서 카네다 마사이치를 상대로 4타석 모두 삼진을 당했지만,[2] 시즌 중반에는 팀의 클린업 히터로 자리 잡으며 리그 챔피언십 우승에 기여했다.[2]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홈런(29개)과 타점(92개)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신인상을 수상했다.[2]

1954년 릿쿄 대학 경제학부 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같은 해 6월 아버지가 급서하면서 가계를 위해 채소 장사를 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야구부에서는 조 디마지오요기 베라를 참고한 메이저리그식 연습과 혹독한 훈련을 통해 정 3루수로 성장했다. 1955년에는 선배들의 감독 배척 운동과 괴롭힘 속에서도 스기우라 타다시와 함께 주니치 드래곤즈 입단을 시도했지만, 구단 대표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쓰지 타케시 감독 부임 이후, 스기우라 타다시, 모토야시키 킨고와 함께 ''''릿쿄 삼총사''''로 불리며 도쿄 6대학 야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56년 춘계 리그전과 1957년 추계 리그전에서 수위 타자를 획득하고, 5시즌 연속 리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57년에는 6대학 리그 통산 신기록인 8홈런을 기록했다.

고교 시절부터 사회인 야구 진출이 예상되었으나, 여러 구단의 러브콜 속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가족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입단이 결정되었다. 등번호는 지바 시게루가 달았던 ''''3''''번을 받았다. 계약금은 당시 최고액인 1,800만 엔이었다.

3. 2. 신인 시절 (1958년)

나가시마 시게오는 1958년 도쿄 6대학 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골든 보이' 또는 '허리케인'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큰 기대를 받았다.[208] 데뷔전인 4월 5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 3번 타자로 선발 출전했지만, 가네다 마사이치에게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했다.[2] 하지만 이후 가네다를 상대로 안타와 홈런을 기록하며 통산 타율 3할 1푼 3리, 18홈런을 기록했다.

데뷔 이틀 후인 4월 7일 고쿠테쓰전에서 미쓰바야시 세이지를 상대로 첫 안타를, 4월 10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곤도 마사토시로부터 첫 홈런을 기록했다.[208] 8월 6일부터는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대신해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9월 19일 히로시마전에서는 우가리 미치오에게서 신인 기록(당시)인 28호 홈런을 쳤지만 1루 베이스를 밟지 않아 홈런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있었다.[208][209] 다음날 9월 20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28호 홈런을 기록하며 신인 신기록을 달성했지만, 이듬해 구와타 다케시가 31홈런을 기록하며 경신했다.

나가시마는 1958년 시즌에 홈런 29개, 92타점으로 홈런왕타점왕을 석권했고, 최다 안타 (153개)와 리그 2위의 도루 (37개)를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208] 수위 타자 경쟁에서는 다미야 겐지로에게 밀려 타율 2위(.305)에 머물렀다. 신인으로서 전 이닝 출전 기록은 센트럴 리그 최초였다.[35]

3. 3. 천황 참관 경기 (1959년)

1959년 6월 25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전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천황 참관 경기(천황이 관전한 경기이며 당시는 쇼와 천황)로 치러졌다.[36] 이 경기에서 한신이 먼저 1점을 얻었지만, 5회에 나가시마와 5번 타자인 사카자키 가즈히코가 연속으로 홈런을 때려내며 요미우리가 역전했다. 6회에는 한신이 3점 홈런을 기록하면서 승부를 뒤집었지만 7회에 6번 타자 오 사다하루가 2점 홈런을 때려내면서 동점을 만들었다. 4 대 4로 맞선 9회말, 선두 타자 나가시마는 무라야마 미노루를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쳤다.[36]

이 경기는 대학 야구 시절부터 슈퍼스타였던 나가시마가 때려낸 끝내기 홈런이었던 점과 그 드라마성으로 인해 크게 보도되면서 나가시마의 강한 승부 근성이 일본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 때까지는 대학 야구가 가장 인기여서 돈으로 야구를 하는 프로 야구는 경멸하는 면이 있었는데 이후에는 일본 국내에서 프로 야구의 인기가 높아져 갔다. “이 경기에서 프로 야구의 융성은 시작됐다”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211]

당시 나가시마의 끝내기 홈런은 좌측 폴대 상단에 꽂힌 것이어서 무라야마는 1998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그 홈런은 원래 파울볼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경기에서는 당시 신인이었던 오 사다하루도 홈런을 기록했다. 이것은 ‘ON 동반 홈런’ 제1호이다.

같은 해, 나가시마는 2년 차 시즌 도중까지 퍼시픽 리그의 가쓰라기 다카오와 함께 3관왕을 노렸지만, 후반에 홈런과 타점이 늘지 않았다. 2위 이이다 도쿠지의 2할 9푼 6리를 크게 따돌리는 타율 3할 3푼 4리를 기록하며, 생애 첫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홈런은 리그 3위인 27홈런, 타점은 리그 4위인 82타점을 기록했다.

3. 4. ON포 시대

나가시마는 1962년에 타율 2할 8푼 8리를 기록하여 리그 5위에 머물렀지만, 홈런과 타점은 리그 2위, 도루는 리그 3위를 기록했다. 이 해부터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ON포'''(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로 불리게 되었다.[212] 이는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미키 맨틀로저 메리스를 칭하는 '''MM포'''에 비유한 것이다. 요미우리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 시리즈 9연패(V9)를 달성했는데, 이 두 선수는 당시 팀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통상적으로 3번 오사다하루·4번 나가시마였지만 두 선수의 컨디션에 따라 나가시마는 3번, 오사다하루는 4번으로 자주 바뀌기도 했다.

‘ON포’라 불리던 오 사다하루(오른쪽)와 나가시마(1963년 촬영)


1963년 나가시마는 타율 3할 4푼 1리, 37홈런, 112타점으로 수위 타자와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했고, 2년 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하며 통산 2번째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212] 1964년에는 리그 3위인 31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1965년에는 오 사다하루에 이어 리그 2위인 80타점을 기록했다.[212]

1966년에는 타율 3할 4푼 4리로 통산 5번째 수위 타자를 획득했고, 26홈런과 105타점은 각각 오 사다하루에 이어 리그 2위였다. 또한 통산 3번째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그해 가을, 미일 야구 대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회장이 나가시마의 영입을 요청했지만, 쇼리키 마쓰타로 구단주가 "나가시마가 없어지면 일본 야구는 10년 늦는다"라며 거절하여 메이저 리그 이적은 무산되었다.[212]

1971년, 나가시마는 6번째 타격 타이틀을 획득한 후, 갑작스러운 타격 슬럼프에 빠졌다. 팀은 그에게 더 많은 타석을 주면서 그를 되살리려 했지만, 나가시마는 젊은 시절 보여줬던 성공을 더 이상 거두지 못했다. 1974년, 주니치 드래건스가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우승을 막고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나가시마는 10월 14일 드래건스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치렀으며, 마지막 타석에서 짧은 땅볼을 쳐 더블 플레이를 기록했다.

3. 5. 난투극 사건 (1968년)

1968년 9월 18일 한신과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요미우리가 5대 0으로 앞선 4회초, 오 사다하루에게 한신 투수 진 바크가 2구 연속 위협구를 던졌다. 사다하루는 항의하려 했으나 바크의 손가락 미끄러짐 등의 몸짓을 보고 타석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순간 3루 코치 아라카와 히로시가 바크에게 달려들었고, 요미우리 선수들이 바크에게 덤벼들면서 양 팀 선수들이 뒤엉킨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난투극으로 바크와 아라카와 코치는 퇴장당했고, 아라카와는 상해죄로 기소되었다. 바크는 이 사건으로 오른손가락이 골절되어 시즌을 제대로 뛰지 못하고 은퇴하게 되었다. 바크를 대신해 곤도 마사토시가 등판했지만, 사다하루의 머리 뒷부분을 맞추는 사구를 던졌다.

경기는 20분 동안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고, 난투극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가시마는 곤도가 던진 커브를 받아쳐 3점 홈런(시즌 35호)을 기록했다. 8회에도 2점 홈런을 추가하며 팀 승리에 기여했다.

나가시마는 1968년 시즌에 사다하루에 이어 타율 2위(0.318), 홈런 3위(39개)를 기록했고, 125타점으로 타점왕을 차지했다. 39홈런은 2019년 사카모토 하야토에게 추월당하기 전까지 요미우리의 토박이 일본인 우타자 한 시즌 최다 기록이었다. 또한 통산 4번째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3. 6. 현역 후반기 (1970년대)

1970년에는 타율이 리그 10위에 머물면서 침체됐지만, 리그 5위 타이기록인 22홈런과 리그 최다인 105타점을 기록해 3년 연속 타점왕을 차지했다.[215] 1971년 1월 20일에는 요미우리 13대 주장으로 발탁되었고, 같은 해 5월 25일 야쿠르트전에서 상대 투수 아사노 게이시로부터 역대 5번째가 되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215] 1708경기에서의 2000안타 달성은 가와카미 데쓰하루에 이어 가장 빠른 기록(역대 2위)이며 우타자로서는 역대 최고 속도 기록이다.[215] 또한 대졸자로서 프로에 들어간 프로 야구 선수로서는 첫 달성자가 됐다. 1971년 시즌에는 2위 기누가사 사치오와의(2할 8푼 5리) 격차가 크게 벌어진 3할 2푼의 타율을 남기는 등 통산 6번째의 수위 타자가 됐다.[215] 35세 나이에 수위 타자 획득은 당시 가와카미 데쓰하루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 최고령 기록이었다.[215] 34홈런과 86타점은 각각 오 사다하루에 뒤를 이은 리그 2위였다.[215] 시즌 종료 후인 12월 27일에는 다음 시즌부터 코치를 겸임하는 것으로 공식 발표했고 통산 5번째인 센트럴 리그 MVP에 선정됐다.[215]

플레잉 코치로서 맞이한 1972년 시즌에는 92타점(리그 3위)과 27홈런(리그 4위)을 기록한 반면 타율은 10위권에서 벗어났다.

이듬해 1973년에도 타율 0.269, 20홈런, 76타점을 남기면서 성적이 점점 떨어졌다.[215] 힘이 쇠약해진 나가시마는 이미 4번 타자의 자리를 오 사다하루에게 내줬지만 9월에 있은 야쿠르트전에서 결정적인 수모를 당했다.[215] 야쿠르트는 4번 타자인 오 사다하루를 5연타석 고의 사구로 내보냈고 모든 타석에서 5번 타자였던 나가시마와 승부를 걸었다.[216] 그러나 결과는 1안타에 그쳤지만 득점 기회가 있던 타석에서 모두 범퇴로 물러났다.[215][216] 적장의 지휘에 어쩔 수 없는 스스로를 알게 됨으로써 야구계의 중심이 나가시마에서 오 사다하루로 바뀐 것을 알게 됐다.[217] 10월 11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전에서 3루 수비 도중 고토 가즈아키의 타구에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맞아 골절상을 입어 남은 경기에 결장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1루 코치로서 출전했다.

나가시마는 한신과의 직접 대결을 하루 앞둔 그해 10월 9일, 감독 가와카미 데쓰하루와 히라카와초의 음식점에서 회식 자리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가와카미 데쓰하루로부터 올해 말까지 현역에서 은퇴하고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나가시마는 다음 시즌에도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가와카미 데쓰하루도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듬해인 1974년에도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감독을 맡게 되면서 나가시마는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가게 됐다.

3. 7. 현역 은퇴 (1974년)

1974년 10월 12일, 주니치 드래건스의 리그 우승이 확정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리그 10연패 달성이 무산되자 나가시마 시게오는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218] 은퇴 기자회견에서 나가시마는 "나는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야구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경기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남은 2경기에 출전할 것을 밝혔다.[195] 다른 인터뷰에서는 “'내일은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 날 최선을 다해도 잘 안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믿고 그저 열심히 방망이를 휘둘러 왔다. 후회는 없다”라고 회고했다.[195]

10월 14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와의 더블헤더는 나가시마의 은퇴 경기로 치러졌다.[46] 주니치는 리그 우승 기념 퍼레이드로 인해 요나미네 가나메 감독을 포함한 주력 선수들이 불참하고 백업 선수들이 출전했다.[219] 1차전에서 3번·3루수로 선발 출전한 나가시마는 두 번째 타석에서 무라카미 요시노리로부터 현역 마지막 홈런(통산 444호)을 기록했다.[46] 이 경기에서 오 사다하루도 홈런을 쳐, 통산 106번째 'ON 동반 홈런'을 기록했다.[46] 1차전 종료 후 나가시마는 외야 펜스를 따라 눈물을 흘리며 팬들에게 인사했다.[46] 2차전에서는 4번·3루수로 출전하여 5회말 중전 안타(통산 2471번째 안타)를 기록했고, 8회말 마지막 타석에서는 유격수 앞 병살타로 물러났다.[46]

경기 종료 후 은퇴식에서 나가시마는 “'''우리 요미우리는 영원히 불멸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47][48]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나가시마는 타구가 야수의 정면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힘의 쇠퇴를 느꼈고, 지난해 오프 때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49][221]

나가시마의 은퇴는 1974년 요미우리 신문 선정 10대 뉴스 4위에 오를 정도로 사회적인 사건이었다. 같은 해 11월 21일, 그의 등번호 '''3'''번은 영구 결번으로 제정되었다.[222]

4. 감독 시절

1974년 11월 20일, 미일 야구 대회의 모든 일정이 종료된 후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튿날 11월 2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고라쿠엔 구장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가와카미의 후임으로 나가시마 시게오가 차기 감독으로 부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나가시마는 ‘'''클린 베이스볼'''’(クリーン・ベースボール일본어)을 표방했다. 전임 감독이던 가와카미가 구축한 확률 야구(스스로의 실책을 줄이면서 상대방의 실책을 권한 뒤 거기를 이용해서 승리하는 스타일)를 버리고 투타의 역량 차이가 그대로 승패로 연결된다는 신념 하에서 팀을 재편했다. 실수를 한 선수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감점주의를 폐지하고 좋은 플레이를 연봉에 반영하는 가점주의로 전환했다.[50] 그 때문인지 수석 코치로 세키네 준조, 투수 코치에는 미야타 유키노리, 수비·주루 코치 보좌에는 구로에 유키노부, 배터리 코치에 오고 히로시 등을 각각 초빙했고(구로에, 오고는 현역 은퇴 후부터 잔류) 가와카미는 작전 코치 마키노 시게루, 투수 코치 후지타 모토시를 팀에 남아달라고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51] 모리 마사히코를 코치로 남고, 호리우치 쓰네오를 트레이드로 내보내라고 조언했지만[52] 나가시마는 가와카미 감독 시절의 코치진을 거의 일소시켰다. 나가시마와 모리는 견원지간이었다.[53] 구로에의 말에 의하면 나가시마는 ‘가와카미 같은 무더운 야구는 하고 싶지 않다’[54]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로운 등번호를 ‘90’번으로 정했는데 이 ‘90’번은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 가즈시게의 아이디어라고 알려져 있는데 “현역으로 있을 때 3이라는 숫자가 세 개가 있었다는(타순은 3번, 등번호는 3번, 수비 포지션은 3루수) 것으로부터 3을 3개 더하면 9. 이것을 0을 붙여서 90번으로 하면?”이라는 가즈시게의 발언이 계기가 됐다(당시 등번호 9번은 요시다 다카시가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가시마는 현역 마지막 연도인 1974년 시점에서는 은퇴하자마자 바로 감독 취임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현역 생활을 2, 3년은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또한 은퇴 후 2, 3년은 백네트뒤에서 야구를 연구하거나 코치를 경험하고 나서 감독 취임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팀내 사정을 고려해서 은퇴하자마자 감독 취임을 곧바로하는 단계로 이어졌다.[55]

구단으로서는 전후 최초로 비일본계의 외국인 선수인 내야수 데이비 존슨을 영입해 나가시마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3루수에 기용했다. 존슨은 메이저 리그 관련 정보를 나가시마에게 전달한 적도 있어 종종 나가시마 가족들에게 메이저 리그 경기를 녹화한 것을 추려서 나가시마 가족들과 함께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1975년)에 주력 선수들의 성적 부진과 신통치 않은 팀 성적으로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최하위('''6위''', 47승 7무 76패)로 추락하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당시 요미우리 선수였던 시바타 이사오는 “나가시마가 은퇴하고서는 모리 마사히코, 구로에 유키노부도 줄줄이 은퇴하면서 팀 전력에 차질이 빚어진 것도 있었지만 코치진을 완전히 갈아엎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야구를 하고 싶다는 건지 모르겠다”[56], “코치진과 잘 해나갈 수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57]라고 말했다. 이때 나가시마는 자신의 야구 인생을 ‘파란만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1975년 시즌 종료 후 ‘'''그린 베이스볼'''’(グリーン・ベースボール일본어), ‘'''챌린지 베이스볼'''’(チャレンジ・ベースボール일본어)을 표방하여 이기는 야구에의 변화를 도모했다.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투수 다카하시 가즈미와 내야수 도미타 마사루와의 맞트레이드로 일명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이 알려질 정도로 닛폰햄의 간판 타자였던 하리모토 이사오를 영입했고, 더 나아가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부터 선발도 마무리도 모두 할 수 있는 가토 하지메도 영입했다(이때 히가시오 오사무도 트레이드 후보였다). 팀내에서는 외야수 다카다 시게루를 3루수로 변환됐는데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변환하면서 존슨을 본래의 2루로 이동하는 등 팀 전력 강화에 착수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한신의 에나쓰 유타카는 물밑에서 이적을 타진시켜 요미우리 관계자와 협의했지만 신문사에 의해서 폭로돼 결국은 파담이 됐다.[58] 코치진도 작년부터 1군 코치로 유임한 것은 구로에뿐이었고 타격 코치에는 2군 감독이었던 구니마쓰 아키라가 발탁됐고 투수 코치로 부임한 스기시타 시게루는 스즈키 류지 센트럴 리그 회장으로부터의 요청으로 취임했다.[59] 프런트는 한층 더 극비로 진행하여 수석 코치로 나가시마와는 동년배이자 난카이의 선수 겸임 감독이던 노무라 가쓰야를 극비 접촉했다. 요미우리의 구단 상무와 홍보 담당이 연쇄적으로 협상을 벌였고 ‘선수 겸임 수석 코치’를 맡아달라는 오퍼를 타진했다. 당시 팀내 파벌 싸움 논란에 휘말려 궁지에 몰렸던 노무라는 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정작 나가시마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요미우리·노무라 가쓰야’는 수포로 돌아갔고 노무라는 선수 겸임 감독으로 난카이에 잔류했다.[60]

이듬해 1976년에는 작년 시즌에서의 최악의 부진을 뒤집어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77년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구라타 마코토와의 맞트레이드로 아사노 게이시를 영입했다(아사노는 당시 ‘요미우리 킬러’라는 별명이 불리기도 했다). 1977년에는 2위와 15경기 차이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1976년 일본 시리즈197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맞대결에서 2년 연속 완패를 당하는 등 우승 달성에 실패했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에는 다이요 웨일스로부터 존 시핀을 영입해 주전 2루수로 기용했다.

1978년에는 시즌 초부터 침체가 계속되면서 8월 후반에는 한때 팀이 선두 자리에 들어섰지만 결국 2경기 차이로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게 정규 시즌 우승을 빼앗겼다. 1978년 시즌 종료 직후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 문제와 요미우리 입단을 둘러싼 소동(통칭 에가와 사건)이 일어나면서 팀내 에이스인 고바야시 시게루가 에가와의 맞트레이드로 한신에 이적했다.

1979년에는 5위로 끝났는데 그 해 오프 시즌에 퇴단한 하리모토는 침체의 원인에 대한 신문기자의 질문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팀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하리모토는 그 이유를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인용문|

떠나가는 새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헤어진 여자의 뒷담화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코치진의 자기방어가 눈에 띄었다. 나가시마 감독을 곁에서 도와줄려고 하지 않은 코치가 프런트에게 아첨을 피우고 지위를 지킬려고 했다. 요미우리의 코치라면 급여나 연봉도 높고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지고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나가시마 감독은 ‘넘버2’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코치진을 하나로 묶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은 마지막 시즌에서 5위로 내려 앉은 나가시마 감독의 다음은 사다하루다. 사다하루에게 바짝 다가가는 무리도 나왔다. 내가 잘못된 방향이라고 한 것은 그런 팀내 분위기를 말한 것이다.|하리모토 이사오[61]}}

나가시마는 V9 시대를 모르는 젊은 선수들을 ‘'''신데렐라 보이'''’(シンデレラ・ボーイ일본어)라고 불리면서 이토 스타디움의 추계 스프링 캠프에 집결시켰다. 이것은 나중에 ‘지옥의 이토 캠프’(地獄の伊東キャンプ일본어)라고 불리게 됐다. 캠프에서 열린 연습 경기에서 젊은 선수들이 전혀 활약하지 않았던 반면 베테랑 선수들만이 활약한 적도 있어서 당초에는 ‘1976년 오프의 재래’라고도 말해졌지만 이 캠프에서 젊은 선수들의 결속력이 높아져 훗날 후지타 모토시 감독 시절의 주력 선수가 된다.

또 1979년 시즌 종료 후에는 하리모토가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하였고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한 로이 화이트를 영입해 화이트는 하리모토를 대신해서 1980년 시즌 도중 40세가 되는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을 담당하는 간판 선수로서 기대됐다. 코칭 스태프 쪽에서는 나가시마의 이해 당사자이자 요미우리의 선배인 아오타 노보루를 수석 코치로 임명하는 등 팀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오타 수석 코치는 유력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폭력단과 자신의 접촉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면서 이 발언으로 인한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졌다(아오타 코치의 문제성 발언 사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아오타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야구 매스컴이나 팬들 사이에서는 영광의 V9 시대를 그리워하는 가운데 가와카미 데쓰하루 전 감독의 대망론이 서서히 급부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가와카미파’라 불리는 요미우리 OB가 나가시마의 팀 꾸리기에 간섭(앞에서 말한 1976년 오프 당시 시바타의 트레이드 실패 등)하면서[62] 1976년 오프 시즌 훈련 당시 파트너이자 자신이 감독이 될 당시 코치로 발탁했던 오고 히로시를 하라 다쓰노리 드래프트 소동으로 잃는가 하면(하라의 자택에서 나가시마의 비밀편지를 갖고 갔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1979년 오프 시즌에는 앞에서 말한 소동으로 아오타 노보루를 잃는 등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프런트가 11명의 코치(후쿠다 마사히사, 스도 유타카, 세키네, 미야타, 오고, 나카무라 미노루, 다키 야스하루, 구로에, 구니마쓰, 마치다 유키히코, 스즈키 쇼스케)들을 해임시켰다.[63] 구로에는 1978년에 퇴단했지만 나가시마에게서 “한 팔로서 잘해줬지만 구단의 생각이다. 정말 미안하지만 그만둬라”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대해 구로에는 눈물을 흘리며 나가시마에게 “한 팔의 구로에를 자르신다면 자신도 그만두겠다라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고 말했다.[64]

나가시마의 비판에 대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는 와중에 1980년 8월 가와카미 본인이 아오타 노보루, 마키노 시게루, 후지타 모토시, 구니마쓰 아키라 등이 참석한 슈칸 분슌의 좌담회를 열어 취재를 담당하던 다키 야스하루에게 오프 더 레코드라는 조건으로 나가시마의 후임 감독에 대해서 다양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기사가 게재되면서 나가시마에 대한 비판 또는 자신의 하차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구단주인 쇼리키 도루가 아닌 요미우리 신문사 무타이 미쓰오 사장이 1980년 시즌 종료에 앞서 나가시마 감독을 해임시키기로 결정했다. 구단이 A급을 확보하면 연임하겠다고 공언했던 것이 완전히 뒤집히게 되자 이를 ‘음모’라며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가와카미파의 거듭된 비난에 시달리던 나가시마는 이를 가와카미(와 그 일파들)에 의한 수 년간 꾸민 뒷공작의 결과로 간주해 가와카미에 대한 나가시마의 악감정을 갖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67] 가와카미가 OB회 회장이 된 뒤로는 OB회에 연속으로 불참하다가 ‘1990년에 올해도 참석하지 않으면 제명된다’는 OB회의 권고를 받고서야 마지못해 얼굴을 내비쳤는데 이를 계기로 가와카미와 전격으로 ‘화해’했다. 나가시마는 사임이라는 명목의 ‘실질적 해임’ 이후 쇼리키 도루한테서 프런트 입문 권유를 받았지만 프런트는 자신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고 이후 개인 사무소 ‘오피스엔’을 설립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떠돌이 시대'''’를 시작했다.

후임 감독은 후지타 모토시가 맡았는데,[68] 후지타는 위에서 말한 좌담회에도 참석했고 그 좌담회에서 가와카미가 후임 감독 이름을 언급한 탓에 ‘나가시마파’의 언론으로부터 공격 대상이 됐다. 1981년에 팀이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른 이후에도 ‘후지타 때리기’는 계속됐다. 1980년 오프에는 세이부네모토 리쿠오 감독으로부터 “세이부 감독을 맡아주지 않겠나”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69]

4. 1. 제1기 감독 시대 (1975년 ~ 1980년)

1974년 11월 20일, 미일 야구 대회의 모든 일정이 종료된 후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튿날 11월 2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고라쿠엔 구장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가와카미의 후임으로 나가시마 시게오가 차기 감독으로 부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나가시마는 ‘'''클린 베이스볼'''’(クリーン・ベースボール일본어)을 표방했다. 전임 감독이던 가와카미가 구축한 확률 야구(스스로의 실책을 줄이면서 상대방의 실책을 권한 뒤 거기를 이용해서 승리하는 스타일)를 버리고 투타의 역량 차이가 그대로 승패로 연결된다는 신념 하에서 팀을 재편했다. 실수를 한 선수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감점주의를 폐지하고 좋은 플레이를 연봉에 반영하는 가점주의로 전환했다.[50] 그 때문인지 수석 코치로 세키네 준조, 투수 코치에는 미야타 유키노리, 수비·주루 코치 보좌에는 구로에 유키노부, 배터리 코치에 오고 히로시 등을 각각 초빙했고(구로에, 오고는 현역 은퇴 후부터 잔류) 가와카미는 작전 코치 마키노 시게루, 투수 코치 후지타 모토시를 팀에 남아달라고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51] 모리 마사히코를 코치로 남고, 호리우치 쓰네오를 트레이드로 내보내라고 조언했지만[52] 나가시마는 가와카미 감독 시절의 코치진을 거의 일소시켰다. 나가시마와 모리는 견원지간이었다.[53] 구로에의 말에 의하면 나가시마는 ‘가와카미 같은 무더운 야구는 하고 싶지 않다’[54]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로운 등번호를 ‘90’번으로 정했는데 이 ‘90’번은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 가즈시게의 아이디어라고 알려져 있는데 “현역으로 있을 때 3이라는 숫자가 세 개가 있었다는(타순은 3번, 등번호는 3번, 수비 포지션은 3루수) 것으로부터 3을 3개 더하면 9. 이것을 0을 붙여서 90번으로 하면?”이라는 가즈시게의 발언이 계기가 됐다(당시 등번호 9번은 요시다 다카시가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가시마는 현역 마지막 연도인 1974년 시점에서는 은퇴하자마자 바로 감독 취임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현역 생활을 2, 3년은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또한 은퇴 후 2, 3년은 백네트뒤에서 야구를 연구하거나 코치를 경험하고 나서 감독 취임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팀내 사정을 고려해서 은퇴하자마자 감독 취임을 곧바로하는 단계로 이어졌다.[55]

구단으로서는 전후 최초로 비일본계의 외국인 선수인 내야수 데이비 존슨을 영입해 나가시마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3루수에 기용했다. 존슨은 메이저 리그 관련 정보를 나가시마에게 전달한 적도 있어 종종 나가시마 가족들에게 메이저 리그 경기를 녹화한 것을 추려서 나가시마 가족들과 함께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1975년)에 주력 선수들의 성적 부진과 신통치 않은 팀 성적으로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최하위('''6위''', 47승 7무 76패)로 추락하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당시 요미우리 선수였던 시바타 이사오는 “나가시마가 은퇴하고서는 모리 마사히코, 구로에 유키노부도 줄줄이 은퇴하면서 팀 전력에 차질이 빚어진 것도 있었지만 코치진을 완전히 갈아엎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야구를 하고 싶다는 건지 모르겠다”[56], “코치진과 잘 해나갈 수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57]라고 말했다. 이때 나가시마는 자신의 야구 인생을 ‘파란만장’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1975년 시즌 종료 후 ‘'''그린 베이스볼'''’(グリーン・ベースボール일본어), ‘'''챌린지 베이스볼'''’(チャレンジ・ベースボール일본어)을 표방하여 이기는 야구에의 변화를 도모했다.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투수 다카하시 가즈미와 내야수 도미타 마사루와의 맞트레이드로 일명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이 알려질 정도로 닛폰햄의 간판 타자였던 하리모토 이사오를 영입했고, 더 나아가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부터 선발도 마무리도 모두 할 수 있는 가토 하지메도 영입했다(이때 히가시오 오사무도 트레이드 후보였다). 팀내에서는 외야수 다카다 시게루를 3루수로 변환됐는데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변환하면서 존슨을 본래의 2루로 이동하는 등 팀 전력 강화에 착수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한신의 에나쓰 유타카는 물밑에서 이적을 타진시켜 요미우리 관계자와 협의했지만 신문사에 의해서 폭로돼 결국은 파담이 됐다.[58] 코치진도 작년부터 1군 코치로 유임한 것은 구로에뿐이었고 타격 코치에는 2군 감독이었던 구니마쓰 아키라가 발탁됐고 투수 코치로 부임한 스기시타 시게루는 스즈키 류지 센트럴 리그 회장으로부터의 요청으로 취임했다.[59] 프런트는 한층 더 극비로 진행하여 수석 코치로 나가시마와는 동년배이자 난카이의 선수 겸임 감독이던 노무라 가쓰야를 극비 접촉했다. 요미우리의 구단 상무와 홍보 담당이 연쇄적으로 협상을 벌였고 ‘선수 겸임 수석 코치’를 맡아달라는 오퍼를 타진했다. 당시 팀내 파벌 싸움 논란에 휘말려 궁지에 몰렸던 노무라는 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정작 나가시마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요미우리·노무라 가쓰야’는 수포로 돌아갔고 노무라는 선수 겸임 감독으로 난카이에 잔류했다.[60]

이듬해 1976년에는 작년 시즌에서의 최악의 부진을 뒤집어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77년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구라타 마코토와의 맞트레이드로 아사노 게이시를 영입했다(아사노는 당시 ‘요미우리 킬러’라는 별명이 불리기도 했다). 1977년에는 2위와 15경기 차이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1976년 일본 시리즈197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맞대결에서 2년 연속 완패를 당하는 등 우승 달성에 실패했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에는 다이요 웨일스로부터 존 시핀을 영입해 주전 2루수로 기용했다.

1978년에는 시즌 초부터 침체가 계속되면서 8월 후반에는 한때 팀이 선두 자리에 들어섰지만 결국 2경기 차이로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게 정규 시즌 우승을 빼앗겼다. 1978년 시즌 종료 직후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 문제와 요미우리 입단을 둘러싼 소동(통칭 에가와 사건)이 일어나면서 팀내 에이스인 고바야시 시게루가 에가와의 맞트레이드로 한신에 이적했다.

1979년에는 5위로 끝났는데 그 해 오프 시즌에 퇴단한 하리모토는 침체의 원인에 대한 신문기자의 질문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팀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하리모토는 그 이유를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인용문|

떠나가는 새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헤어진 여자의 뒷담화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코치진의 자기방어가 눈에 띄었다. 나가시마 감독을 곁에서 도와줄려고 하지 않은 코치가 프런트에게 아첨을 피우고 지위를 지킬려고 했다. 요미우리의 코치라면 급여나 연봉도 높고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지고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나가시마 감독은 ‘넘버2’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코치진을 하나로 묶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은 마지막 시즌에서 5위로 내려 앉은 나가시마 감독의 다음은 사다하루다. 사다하루에게 바짝 다가가는 무리도 나왔다. 내가 잘못된 방향이라고 한 것은 그런 팀내 분위기를 말한 것이다.|하리모토 이사오[61]}}

나가시마는 V9 시대를 모르는 젊은 선수들을 ‘'''신데렐라 보이'''’(シンデレラ・ボーイ일본어)라고 불리면서 이토 스타디움의 추계 스프링 캠프에 집결시켰다. 이것은 나중에 ‘지옥의 이토 캠프’(地獄の伊東キャンプ일본어)라고 불리게 됐다. 캠프에서 열린 연습 경기에서 젊은 선수들이 전혀 활약하지 않았던 반면 베테랑 선수들만이 활약한 적도 있어서 당초에는 ‘1976년 오프의 재래’라고도 말해졌지만 이 캠프에서 젊은 선수들의 결속력이 높아져 훗날 후지타 모토시 감독 시절의 주력 선수가 된다.

또 1979년 시즌 종료 후에는 하리모토가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하였고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한 로이 화이트를 영입해 화이트는 하리모토를 대신해서 1980년 시즌 도중 40세가 되는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을 담당하는 간판 선수로서 기대됐다. 코칭 스태프 쪽에서는 나가시마의 이해 당사자이자 요미우리의 선배인 아오타 노보루를 수석 코치로 임명하는 등 팀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오타 수석 코치는 유력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폭력단과 자신의 접촉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면서 이 발언으로 인한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졌다(아오타 코치의 문제성 발언 사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아오타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야구 매스컴이나 팬들 사이에서는 영광의 V9 시대를 그리워하는 가운데 가와카미 데쓰하루 전 감독의 대망론이 서서히 급부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가와카미파’라 불리는 요미우리 OB가 나가시마의 팀 꾸리기에 간섭(앞에서 말한 1976년 오프 당시 시바타의 트레이드 실패 등)하면서[62] 1976년 오프 시즌 훈련 당시 파트너이자 자신이 감독이 될 당시 코치로 발탁했던 오고 히로시를 하라 다쓰노리 드래프트 소동으로 잃는가 하면(하라의 자택에서 나가시마의 비밀편지를 갖고 갔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1979년 오프 시즌에는 앞에서 말한 소동으로 아오타 노보루를 잃는 등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프런트가 11명의 코치(후쿠다 마사히사, 스도 유타카, 세키네, 미야타, 오고, 나카무라 미노루, 다키 야스하루, 구로에, 구니마쓰, 마치다 유키히코, 스즈키 쇼스케)들을 해임시켰다.[63] 구로에는 1978년에 퇴단했지만 나가시마에게서 “한 팔로서 잘해줬지만 구단의 생각이다. 정말 미안하지만 그만둬라”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대해 구로에는 눈물을 흘리며 나가시마에게 “한 팔의 구로에를 자르신다면 자신도 그만두겠다라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고 말했다.[64]

나가시마의 비판에 대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는 와중에 1980년 8월 가와카미 본인이 아오타 노보루, 마키노 시게루, 후지타 모토시, 구니마쓰 아키라 등이 참석한 슈칸 분슌의 좌담회를 열어 취재를 담당하던 다키 야스하루에게 오프 더 레코드라는 조건으로 나가시마의 후임 감독에 대해서 다양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기사가 게재되면서 나가시마에 대한 비판 또는 자신의 하차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구단주인 쇼리키 도루가 아닌 요미우리 신문사 무타이 미쓰오 사장이 1980년 시즌 종료에 앞서 나가시마 감독을 해임시키기로 결정했다. 구단이 A급을 확보하면 연임하겠다고 공언했던 것이 완전히 뒤집히게 되자 이를 ‘음모’라며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가와카미파의 거듭된 비난에 시달리던 나가시마는 이를 가와카미(와 그 일파들)에 의한 수 년간 꾸민 뒷공작의 결과로 간주해 가와카미에 대한 나가시마의 악감정을 갖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67] 가와카미가 OB회 회장이 된 뒤로는 OB회에 연속으로 불참하다가 ‘1990년에 올해도 참석하지 않으면 제명된다’는 OB회의 권고를 받고서야 마지못해 얼굴을 내비쳤는데 이를 계기로 가와카미와 전격으로 ‘화해’했다. 나가시마는 사임이라는 명목의 ‘실질적 해임’ 이후 쇼리키 도루한테서 프런트 입문 권유를 받았지만 프런트는 자신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고 이후 개인 사무소 ‘오피스엔’을 설립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떠돌이 시대'''’를 시작했다.

후임 감독은 후지타 모토시가 맡았는데,[68] 후지타는 위에서 말한 좌담회에도 참석했고 그 좌담회에서 가와카미가 후임 감독 이름을 언급한 탓에 ‘나가시마파’의 언론으로부터 공격 대상이 됐다. 1981년에 팀이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른 이후에도 ‘후지타 때리기’는 계속됐다. 1980년 오프에는 세이부네모토 리쿠오 감독으로부터 “세이부 감독을 맡아주지 않겠나”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69]

4. 2. 제2기 감독 시대 (1993년 ~ 2001년)

1990년 가와카미 데쓰하루와 화해했고 1991년 무타이 미쓰오가 사망하면서 와타나베 쓰네오가 요미우리 신문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나가시마의 감독 복귀가 기정사실화 됐다.[254] 1992년 오프에는 호치 신문 객원 해설위원직을 사임했고 같은 해 10월 12일에 제13대 감독으로서 기자회견을 열어 등번호를 ‘33’(3을 두 개로 합친 것을 의미함)번으로 결정했다.[78] 같은 해 11월 21일에 열린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세이료 고등학교의 마쓰이 히데키를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했다.[79] 나가시마의 감독 복귀는 다음 해에 출범을 앞둔 J리그의 대책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감독으로 복귀한 나가시마는 오랫동안 ‘'''스피드 & 충전'''’(‘スピード&チャージ일본어’, 후에 ‘'''충전 & 충전'''’)을 표방했고 낭인 시대에 감명을 받은 쿠바 야구의 실천을 목표로 했다.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했던 제시 바필드를 입단시켰고 또 아들인 가즈시게를 야쿠르트로부터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 부자지간에 요미우리의 일원이 됐다.

감독 복귀 첫 해인 1993년에는 2년 연속 우승한 야쿠르트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3위로 끝났는데 투수진은 사이토 마사키 등의 분투로 호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라 다쓰노리, 고마다 노리히로 등 베테랑들의 잇단 부진, 이 해에 타격 코치로 발탁한 나카하타 기요시가 재기하지 못했고 팀 타선이 부진을 겪으면서 팀 타율은 12개 구단 가운데 최하위였다. 시즌 종료 후 프로 야구에 자유계약선수제도(FA)가 도입되면서 주니치에서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영입에 성공했다. 고마다는 FA로 요코하마에 이적했다.

이듬해 1994년에는 주니치와 리그 동률을 이루면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주니치와 상대하여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경기 직전에 나가시마는 이 경기를 ‘국민적 행사’라고 발언하여 후에 ‘'''10.8 결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의 명승부가 됐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퍼시픽 리그 5연패를 달성한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맞대결을 벌였는데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세이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평판을 내렸지만[255] 4승 2패의 성적으로 감독 부임 이후 처음으로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시즌 종료 후 일본 야구계의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1995년에는 도민 문화 영예장을 받았다. 그해 FA를 통해 야쿠르트에서 히로사와 가쓰미와 자유 계약이 된 잭 하웰, 히로시마에서도 FA로 가와구치 가즈히사, 메이저 리그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셰인 맥을 4억 엔의 계약금으로 획득하는 등 ‘30억 보강’이라고 불릴 정도의 대대적인 보강을 단행했다. 그러나 히로사와, 마쓰이 등 대형 타선이 오치아이를 제외한 전체적으로 컨디션을 끌어올리지 못했고, 구와타 마스미의 부상에 의한 장기 이탈 등 팀의 전력이 극도로 저하되는 악재가 겹쳐서 당시 리그 선두를 지키고 있던 야쿠르트의 뒤를 쫓아 3위에 끝났다.

1996년에는 최대 11.5경기차로 벌어졌던 히로시마를 제치고 선두 자리를 탈환하면서 리그 우승을 달성했는데 작년에 달성할 수 없었던 2년 넘는 ‘메이크도라마’(メークドラマ일본어)를 완성시켰다(1999년은 ‘메이크 미라클’(メークミラクル일본어), 2001년에 ‘미라클 어게인’(ミラクルアゲイン일본어)이라는 표어를 각각 내걸었지만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끄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오릭스의 홈구장인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1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그 해 시즌 종료 후 아들 가즈시게에게 스스로 방출 통보를 전하면서 현역을 은퇴시켰다.

1997년에는 FA를 통해 세이부에서 기요하라 가즈히로,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에릭 힐만, 긴테쓰 버펄로스로부터 맞트레이드로 이시이 히로오를 영입하는 등 대형 보강을 단행했지만 보강 전력이 부진이나 부상에 시달렸고 더 나아가 에이스인 사이토 마사키의 부진도 있어서 4위에 끝나는 등 젊은 선수들의 부진 등으로 나가시마에 대한 비판도 커졌다.

1998년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출신의 거물 신인 다카하시 요시노부의 입단으로 야수의 연령이 낮아지면서 개막 5연승을 장식하는 등 순조롭게 시즌을 맞이했지만 6월 이후 사이토와 구와타 등 베테랑 투수진들이 컨디션 난조로 부진에 시달렸다. 7월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게 7점차로 역전패를 당했던 경기가 있는 것을 계기로 이후에는 3위로 시즌을 마쳤다. 개막 첫 4번 타자의 자리를 잡은 마쓰이가 프로 첫 타이틀로 홈런왕, 타점왕에 오르면서 타격 2관왕을 획득했다.

그 사이에도 나가시마는 계속해서 감독직을 맡고 있었지만 시즌이 종료될 때마다 후임 감독 후보로서 호리우치 쓰네오 1군 수석 코치(당시)나 모리 마사아키, 에가와 스구루 등 요미우리 OB의 이름이 유력하게 거론됐다. 그런 와중에 후임으로 지도하기 위해 1998년부터 하라 다쓰노리를 1군 코치로 초빙시켰다(하라는 2000년, 2001년에 1군 수석 코치). 한편 하라는 코치 시절에 대해 “나가시마에게서는 여러 가지 조언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모두 나가시마가 결단을 했다. 무책임한 것 같았지만 3년간 나 자신은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256]

1998년 7월 31일 한신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발비노 갈베스가 깃타카 아쓰시 주심을 향해 공을 내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가시마는 감독으로서의 책임으로 구단 사장 와타나베 쓰네오에게 사표를 제출했지만 구단 측의 만류로 한신전이 종료된 다음날에 머리를 깎았다고 밝혔다.[257]

1999년에는 거물 신인 우에하라 고지가 시즌 20승을 올렸고 같은 신인이던 니오카 도모히로도 유격수로 정착, 프로 2년차인 다카하시는 3할 대의 타율과 30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젊은 선수들의 활약이 있었지만 구와타나 사이토, 갈베스 등을 비롯한 베테랑 투수진의 부진이 이어졌고 시즌 종반에는 그 해에 호조를 보였던 다카하시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됐다. 다카하시와 마쓰이가 아닌 부진에 시달렸던 기요하라를 4번 타자로 계속 기용했던 나가시마의 지휘 스타일에 의문이 커지자, 결국에는 2위로 끝나면서 우승을 놓쳤다.

2000년에는 FA로 입단한 에토 아키라에게 등번호 33번을 양보하고 나가시마는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3번으로 변경했다. 당초에 이 등번호 3번을 나가시마는 유니폼 위에 옷을 덧입어 언론과 팬에게는 숨기고 있었다. 세간에는 등번호 3번을 착용한 나가시마가 보고 싶다고 하는 분위기가 고조됐을 무렵에 유니폼을 공개하여 당시에 화제성이 결여돼 있던 팀의 화제몰이에 크게 기여했다. 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부터 FA로 입단한 구도 기미야스, 한신에서 자유 계약 선수로 있던 대럴 메이, 드래프트에서는 다카하시 히사노리를 영입했다. 그 해엔 4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일본 시리즈 상대팀이자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끄는 전년도 일본 시리즈 우승팀 다이에였는데, 일명 '''ON 대결'''로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1·2차전 연속으로 패하는 등 고전했지만 그 후 4연승을 기록하여 자신으로서는 통산 두 번째의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이듬해 2001년에는 이 해를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9년 간의 감독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9월 28일에 감독 퇴임과 동시에 종신 명예 감독으로 취임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258][259] 나가시마의 용퇴 및 당시 1군 수석 코치였던 하라를 차기 감독으로 부임했다는 내용의 발표가 이루어진 기자 회견장에서 요시다 신이치로(닛폰 TV 아나운서)가 “나가시마에게 있어서 야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야구라는 스포츠는 인생 그 자체입니다'''”(野球というスポーツは人生そのものです일본어) 라고 말했다.

5. 은퇴 이후

요미우리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나가시마 시게오는 야구 뿐만 아니라 스포츠 전반의 지도자적 역할, ‘스포츠 외교관’적 역할을 보여주었다.[245] 1981년 2월에는 쿠바 문화 시찰, 같은 해 6월 중국봉루협회에서의 야구 지도, 10월에는 월드 시리즈 관전을 했다.[245] 1982년 1월에는 KBO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 세미나의 강연자로 나서기도 했다.[245] 당시 나가시마는 "한국 프로 야구도 일본과 깊은 유대관계를 갖는 것이 발전을 촉진하는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245]

같은 해 1월 호치 신문의 객원 평론가로 부임함과 동시에 닛폰 TV 계열에서도 프로 야구 중계 해설자로서 연수 경기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스포츠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는데 독특한 캐릭터로 호평을 받아 재미있는 아저씨 이미지를 가질 정도였다.

이전에 다이요, 닛폰햄, 야쿠르트, 세이부, 오릭스 등 타 구단으로부터 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연달아 있었지만 요미우리를 생각해서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246][247][248]

국민영예상 시상식에서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오른쪽)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있는 모습. 왼쪽은 마쓰이 히데키(2013년 5월 5일, 도쿄 돔)


2002년 2월 20일에 미야자키시 명예시민, 같은 해 3월에는 사쿠라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됐고 4월 22일에 아테네 올림픽을 목표로 하는 일본 대표팀의 강화위원장으로 부임했다. 7월에는 릿쿄 학원 영예상(제1호)을 수상했고 같은 해 12월 2일에 아테네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정식 부임했다. 이듬해 2003년 11월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과 중국, 중화 타이베이 등 아시아 각국들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는 등 올림픽 본선 진출이 확정됐다. 그러나 이듬해 2004년 3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260] 한때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지만 우반신에 마비가 남아있어 언어 능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나카하타 기요시가 감독 대행을 맡아 대표팀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5년 7월 3일, 나가시마는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 히로시마전을 관전하면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약 1년 4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5년 11월 3일에는 2005년도의 문화공로자(스포츠 진흥)로 선정됐고 이듬해 2006년에는 소년 야구 교실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재활훈련의 성과도 있어 조금씩 활동을 재개했다.

2013년 4월 1일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국민영예상 수여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262][263][264] 같은 달 16일에 일본 정부는 나가시마와 마쓰이를 국민영예상 공동 수상자로 결정했다.[265] 5월 5일 도쿄 돔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나가시마는 “국민영예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2014년 8월, 도쿄도 명예도민으로 선정되면서[274] 10월 1일에 시상식이 열렸다.[275]

2018년 7월 초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는데 정밀 검사에서 담석이 발견돼 그대로 치료를 진행했다.[277] 같은 해 말에는 퇴원하여 자택에서 요양, 재활 치료를 계속했다.[278]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었지만[279] 담석으로 인한 장기 입원으로 근력이 쇠퇴해 참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280] 하지만 도쿄 올림픽 개최가 2021년으로 연기되면서, 2021년 7월 23일 올림픽 개막식 성화 봉송에 오 사다하루,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참가했다.[283]

2021년 10월 26일, 일본 정부는 나가시마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키로 발표했다.

2024년 5월 3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대 한신전은 교진군 창설 90주년 기념 특별 경기 ‘나가시마 시게오 DAY’라는 이름으로 개최돼 5회말 종료 시에는 나가시마 본인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284]

6. 플레이 스타일

6. 1. 타격

나가시마 시게오는 가네다 마사이치, 무라야마 미노루, 곤도 히로시, 아다치 미쓰히로, 에나쓰 유타카, 반도 에이지, 이나오 가즈히사 등의 투수와 포수 노무라 가쓰야에게 ‘계산 할 수 없는 타자’라는 평가를 받았다.[285][286] 곤도와 아다치는 칠 수 없을 것 같은 코스도 쳐내는 타자였다고 평가하며, 오 사다하루와 비교했다.[285][286] 에나쓰는 타석마다 왜 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고, 노무라는 “날아오는 공을 칠 수 있는 천재”라고 극찬했다.[287]

나가시마의 타격폼은 아웃 스탭이 특징이었으나, 허리와 어깨를 벌리지 않고 높은 타점에서 공을 끌어당겨 강하게 칠 수 있었다.[288]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타고난 능력으로 여러 공에 대응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고, 가네다 마사이치는 방망이의 머리가 마지막까지 남아있어 방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오 시프트’를 만든 도요 공업 컴퓨터는 나가시마에게는 특징적인 경향을 찾을 수 없어 ‘나가시마 시프트’를 만들 수 없었다. 오카자키 미쓰요시는 이를 두고 나가시마의 대단함을 평가했다.

나가시마는 호쾌한 헛스윙으로 팬들을 열광시켰지만, 실제로는 슬러거로서 삼진이 적은 편이었다. 삼진 비율은 통산 40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 중에서도 낮은 편에 속했다.

수위 타자를 획득한 시즌에는 모두 안타 개수에서도 리그 1위였으며, 시즌 최다 안타 10회는 현재도 프로 야구 기록이다. 리그 평균 타율이 낮았던 시대에 활약했음에도 세이버매트릭스 지표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미일 야구에서도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오 사다하루에게 홈런왕 타이틀을 양보했지만, 타율과 타점에서 2관왕을 차지한 시즌도 있었고, 오 사다하루의 3관왕을 저지하기도 했다. 통산 기록에서도 우타자로서 높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큰 무대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일본 시리즈 MVP를 통산 4차례 획득했으며, 천황 참관 경기에서도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포수의 ‘속삭임 전술’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고, 대학 시절에는 유명 선수들의 연속 사진을 연구하며 타격 폼을 익혔다.

나가시마는 고의 사구를 많이 받았으며, 이에 항의하기 위해 맨손으로 타석에 들어선 적도 있다. 몸쪽 슈토를 어려워했지만, 히라마쓰 마사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공을 잘 쳐냈다.[295][296]

6. 2. 수비

나가시마 시게오는 평범한 3루수보다 1.5미터 정도 뒤에서 수비했으며, 좌우(1루쪽) 수비 범위가 넓어 유격수와 투수의 수비 범위에 있는 타구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297]호리우치 쓰네오/堀内恒夫일본어가 증언했다.[297] 나가시마는 “그 범위의 타구는 3루수 최대의 멋진 장면”이라며 타격보다 “팬과 일체가 될 수 있는 수비를 좋아했다”라고 말했다.[297] 땅볼에는 15가지 종류가 있어 잡기 어려운 땅볼을 간단하게 잡아내는 것이 프로라고 말하는 한편, “거꾸로 솟아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단순한 땅볼을 어렵게 잡은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297] 플라이는 한 가지 종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유격수 구로에 유키노부에게 맡겼는데, “그냥 플라이볼은 놀이나 기예가 필요없기 때문에 잡아도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297] 송구 후 오른손을 팔랑거리는 독특한 움직임은 가부키의 움직임에서 따온 것이다.[297]

실책하는 장면이 자주 방송되어 수비의 명수로 언급되기보다는 화려함이나 재치 넘치는 플레이가 화제에 자주 올랐지만, 실제로는 수비 능력이 매우 높은 선수였다.[297] 통산 수비율 9할 6푼 5리는 스미 후지오의 9할 7푼 5리에 이은 센트럴 리그 역대 2위(1,000경기 이상 선수 대상)이며, 1,500경기 이상 및 4,500차례 수비 기회를 대상으로 했을 경우에는 3루수로서 프로 야구 역대 1위이다.[297] 데뷔부터 은퇴할 때까지 7,353차례 수비 기회를 포함하여 경기수, 플라이 아웃, (1루)송구 아웃, 병살 등 실책 수를 제외한 모든 통산 수비 기록에서 다른 3루수들을 압도하고 있다(모두 3루수로서의 프로 야구 역대 1위).[297]

시즌 수비 지표 RRF(레인지 팩터)로 데뷔 이후 7년 연속을 포함하여 3루수 리그 1위를 통산 8차례(1958년 ~ 1964년, 1967년) 기록했다.[297] 1968년부터는 플러스 수치가 적어지고 1970년 이후에는 1973년을 제외한 4시즌에 마이너스를 기록, 34세 이후부터 수비에 대한 쇠퇴가 보였다.[297] 리그 1위를 7년 연속, 통산 8차례는 모두 3루수 역대 1위의 성적이며 플러스였던 시즌의 합계치도 3루수 역대 1위이다.[297] 전성기에는 타구를 아웃시키는 능력이 아주 높고, 수비 범위가 넓은 3루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297] 시즌 214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이라는 3루수 프로 야구 기록도 보유하고 있었다(연속 시즌에서는 2012년에 미야모토 신야가 경신).[297]

릿쿄 대학 시절 스나오시 구니노부 감독이 도입·연구한 메이저 리그의 스텝이나 글러브 다루기 등 당시의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 연습했다. 젊은 시절엔 유격수외야수로서도 출전했다.[297]

히로오카 다쓰로는 나가시마의 수비에 대해 “프로 3년 차까지는 잘했다. 수비 범위도 넓었고, 무서운 녀석이 들어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4년 차부터 움직일 수 없게 됐다”[298][299]라고 평가했다.

6. 3. 주루

나가시마 시게오는 젊은 시절 뛰어난 준족과 과감한 주루를 자랑했다. 1958년 일본 시리즈를 포함하여 런닝 홈런을 세 번이나 기록했는데, 특히 1960년 7월 17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고의 사구성 공을 치고 나서 러닝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124] 1960년 8월 21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는 1사 1, 2루에서 오 사다하루가 때린 좌익수 플라이 때 1루 주자였던 나가시마가 2루로 귀루하려던 2루 주자 후지오 시게루를 앞질러 아웃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신인 시절에는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37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도루도 많았다. 나가시마는 “달리는 것이 너무 좋다”라고 말하면서도 1루에서 3루까지의 거리감을 선호했다고 한다. 통산 74개의 3루타(역대 8위, 우타자 중에서는 히로세 요시노리에 이어 역대 2위)를 기록했고, 1960년 5월에는 4경기 연속 3루타라는 일본 기록도 세웠다.[124][300] 나가시마는 3루타야말로 관객들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인 시절의 ‘홈런 취소 사건’ 역시 3루타를 노리고 전력 질주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30세 전후까지 단타성 타구에도 적극적으로 다음 루를 노려 3루타뿐만 아니라 2루타도 많았다(통산 418개는 역대 7위이며, 우타자에서는 야마우치 가즈히로, 사카모토 하야토에 이어 역대 3위). 리그 최다 2루타를 통산 3차례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홈스틸은 6차례 시도하여 2번 성공했다. 1루 주자로서 후속 타자의 외야 플라이로 2루를 돌아간 지점에서 귀루할 때 2루를 밟지 않고 통과하여 1루로 되돌아가는 ‘삼각 베이스 사건’을 1960년, 1964년, 1968년에 세 차례나 일으켰다.

7. 에피소드

나가시마 시게오는 ‘'''長嶋'''일본어’ 와 ‘'''長島'''일본어’ 두 가지 성 표기를 모두 본명으로 사용했다.[301] 출생 당시 호적에는 ‘長嶋일본어’로, 프로 입단 전 언론에서는 ‘長嶋일본어’와 당용한자로 표기한 ‘長島일본어’가 혼용되었다.[301] 1958년 프로 입단 당시 기자 클럽과 합의하여 보도 시에는 ‘長島일본어’로 통일하기로 했고,[301] 본인도 사인할 때 ‘長島일본어’를 사용했다.[302] 《거인의 별》, 《도카벤》 등 창작물에서도 ‘長島일본어’로 표기되었다.

구단 공식 명단에는 1964년부터 1965년에만 신문사 요청으로 ‘長島일본어’를 사용했고, 그 외에는 ‘長嶋일본어’로 표기했다.[302] 은퇴 경기에서도 고라쿠엔 구장 전광판에 ‘長嶋일본어’가 사용되었다.[303] 은퇴 후 1992년 두 번째 감독 취임 시 본인 요청으로 ‘長嶋일본어’로 표기했고, 문화훈장 수상 발표 시 문부과학성은 본명(長島)과 예명(‘長嶋일본어’)을 병기했다.

나가시마는 ‘미스터 자이언츠’(ミスタージャイアンツ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은퇴 후에는 ‘미스터 프로 야구’(ミスタープロ野球일본어), ‘미스터’(ミスター일본어)로도 불렸다. 팀 동료들은 ‘쵸 상’(チョーさん일본어), 그 외 ‘허리케인’(ハリケーン일본어), ‘불타는 남자’(燃える男일본어), ‘황실남’(皇室男일본어), 고교 시절에는 ‘인바’(インバ일본어) 등으로 불렸다.

오 사다하루와 대조적인 성격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라는 증언도 있다.[304] 나가시마는 자신의 성격을 “성급하지만 일을 내팽개치지 않고 한 걸음씩 계속하는 습관이 있다”라고 말했다. 좌우명은 ‘쾌타세심’(快打洗心일본어)이며, 도비타 스이슈의 ‘일구입혼, 쾌타세심’(一球入魂、快打洗心일본어)에서 빌려왔다.

릿쿄 대학 감독 스나오시 구니노부의 ‘개성 중시’와 조 디마지오의 플레이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니노미야 손토쿠이며, 나가시마 가 마당에는 그의 석상이 있다.

1961년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저희는 보수당 편”이라고 발언하여 물의를 빚었다.

독특한 감각과 화법으로 유명하며, 현역 시절에는 주어와 술어가 반복되는 ‘나가시마 화법’(長嶋話法일본어), 감독 시절에는 ‘으응’(うーん일본어), ‘이른바’(いわゆる일본어) 등을 즐겨 사용했다.[305] 바디랭귀지를 활용한 커뮤니케이션을 선호하며, 의미 없는 블록 사인을 내는 경우도 있었다.

가케후 마사유키, 마쓰이 히데키에게 전화로 타격 지도를 한 적이 있으며, 의음을 많이 사용하는 나가시마의 야구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수도 있었다. 노무라 가쓰야는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의 연습 자세를 본보기로 언급했다.[306]

1964년 11월 26일 약혼 발표 기자회견에서의 나가시마와 니시무라 아키코


1964년 나가시마 아키코(본명 니시무라 아키코)와 약혼,[307] 1965년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아키코는 2007년 사망했다. 장남 나가시마 가즈시게는 전 프로 야구 선수, 차녀 나가시마 미나는 스포츠 캐스터, 차남 나가시마 마사오키는 환경운동가이다. 나가시마 일가는 ‘야구계의 로열 패밀리’로 불렸다.[309] 공식 석상에서 시게오, 아키코, 가즈시게는 ‘長嶋일본어’, 미나, 마사오키는 ‘長島일본어’를 사용했다.[310]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나가시마 소유의 세타가야 집을 빌려 1980년대 초부터 2001년까지 거주했다. 대학 4학년 때 다카기 모리미치를 지도했고,[311] 10.8 결전에서 감독으로 맞대결을 펼쳤다.

이시하라 유지로, 이시하라 신타로 형제와 친구였고, 타카쿠라 켄과도 친분이 있었다. 빌리 마틴과 막역한 사이였고, 후카사와 히로시와 절친한 친구였다. ‘반짝반짝회’ 대변인은 와타나베 쓰네오였다.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고, 1988년 바티칸 유공 십자훈장을 받았다.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니우라 히사오의 도움에 감사하며 진돗개를 선물받았다. 아베 신타로와 친분이 있었다.[314] 2015년 시오미 산세이와 재활훈련을 함께했다.[315][316] 호리우치 쓰네오 부부의 중매를 맡았다.[317]

요도가와 나가하루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취향을 밝혔고,[318] 쇼기 명예 3단, 5단을 받았다.[319] 우도 유미코와 만났을 때 NHK 뉴스를 잘 보고 있다고 말했다.[320] 도큐 문화 회관에 단골 이발소가 있었다.

1959년 천황 참관 경기에서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끝내기 홈런을 쳤고, 이후 두 사람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1966년 무라야마는 1500탈삼진을 나가시마에게서 뺏겠다고 선언했고, 나가시마는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두 사람은 은퇴 후 ‘쵸 상’(チョーさん일본어), ‘무라 상’(ムラさん일본어)으로 불렀다.

히로오카 다쓰로의 경기 도중 귀가 사건 이전에 나가시마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1985년부터 일본 트라이애슬론 연맹 회장을 맡았고, 아마쿠사시에 ‘나가시마 시게오 야구장’이 있다. 사쿠라시에 ‘나가시마 시게오 기념 이와나 야구장’이 있다.[322]

고라쿠엔 구장 3번 게이트는 ‘나가시마 게이트’(長嶋ゲート일본어)로 불렸고, 도쿄 돔에도 부활했다. ‘이른바’(いわゆる일본어), ‘하나의’(ひとつの일본어) 등 관용구를 자주 사용하고, ‘미스터 잉글리시’(ミスターイングリッシュ일본어)라는 별명이 붙었다.

프리티 나가시마는 나가시마와 닮아 연예계에 입문했다. 오 사다하루의 외다리 타법을 ‘플라밍고’라고 표현했다. 오쿠보 히로모토에게 고등어를 ‘물고기 변에 블루’(さかなへんにブルー일본어)라고 했다.[331] ‘피로의 피로’(疲労の疲れ일본어) 등 반복 표현을 사용했다.[332]

나가시마 가즈시게를 야구장에 두고 온 일화가 있다. 2002년 자택에 괴한이 침입했다.[333] 세가 사미 홀딩스의 골프 대회 명예회장이다. 나리타 공항 문제 해결에 협력했다.[334][335] ‘대타 모토키’(代打元木일본어) 실수, 1996년 환갑 잔치에서 애매모호한 말을 남겼다.[336]

이즈노쿠니시에 ‘나가시마 시게오 로드’가 조성됐다.[337] 가이텐 기념관에 나가시마 휘호 비석이 있다.[338] 네부타가 발표됐다.[339] 호리우치 쓰네오 등의 중매를 맡았다.[340]

구와타 게이스케 등 나가시마를 경애하는 인사가 많다. 은퇴 당일, 나가시마 가즈시게는 치과 치료를 받았다.[342] 노무라 가쓰야는 나가시마의 감독 역량을 비판했다.[343] 야마모토 가즈요시에 의하면 나가시마는 경기 전 데이터 노트를 확인했다.[344] 미쓰이 야스히로는 나가시마가 전력분석원을 불렀다고 증언했다.[345] 수박 윗부분만 먹는 등 편식가였다.[346]

8. 수상 및 기록

나가시마 시게오는 선수 시절과 감독 시절 모두 다양한 수상 및 기록을 남겼다.
선수 시절 주요 기록


  • 개인 타이틀:
  • 수위 타자: 6회(1959년 ~ 1961년, 1963년, 1966년, 1971년) ※ 우타자 및 센트럴 리그 기록, 3년 연속은 우타자 및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347]
  • 홈런왕: 2회(1958년, 1961년)[347]
  • 타점왕: 5회(1958년, 1963년, 1968년 ~ 1970년) ※ 센트럴 리그 우타자 기록[347]
  • 최다 안타: 10회(1958년 ~ 1963년, 1966년, 1968년, 1969년, 1971년) ※ 6년 연속 및 통산 10회는 일본 기록[347]
  • 최고 출루율: 3회 (1959년 - 1961년)
  • 수상 경력:
  • MVP: 5회(1961년, 1963년, 1966년, 1968년, 1971년) ※ 역대 2위 타이, 우타자 최다 타이 기록[347]
  • 신인왕(1958년) ※ 홈런왕, 타점왕과 동시 수상은 사상 유일[347]
  • 베스트 나인: 17회(1958년 ~ 1974년) ※ 신인부터 은퇴까지 전 시즌 수상은 유일[347]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2회(1972년, 1973년) ※ 센트럴 리그 3루수 부문 초대 수상자[347]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988년)[347]
  • 일본 시리즈 기록:
  • MVP: 4회(1963년, 1965년, 1969년, 1970년) ※ 역대 1위[347]
  • 우수 선수상: 2회(1966년, 1972년)[347]
  • 타격상: 2회(1969년, 1970년)[347]
  • 통산 타율: .343(265타수 91안타, 역대 1위)[347]
  • 통산 홈런: 25개(역대 2위)[347]
  • 통산 타점: 66타점(역대 1위)[347]
  • 올스타전 기록:
  • 17년 연속 팬 투표 1위 선정 (1958년-1974년)
  • 통산 타율: .313(150타수 47안타, 130타수 이상 역대 1위)[347]
  • 통산 홈런: 7개(역대 1위)[347]

  • 기타 기록:
  • 통산 끝내기 안타: 14개(역대 4위 타이, 센트럴 리그 우타자 기록)[347]
  • 통산 끝내기 홈런: 7개(역대 6위 타이, 센트럴 리그 우타자 기록)[347]
  • 5년 연속 개막전 홈런(1970년 ~ 1974년, 일본 기록)[347]
  • 통산 개막전 홈런: 10개(일본 기록)[169][347]
  • 정규 시즌, 일본 시리즈, 올스타전 모두 통산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일본 프로 야구 유일)[347]

감독 시절 주요 기록
선수 및 감독 외 수상

9. 한국 야구와의 관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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