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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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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정은 기독교 신학에서 논의되는 주제로, 신이 인간의 운명을 미리 결정했다는 이론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4-5세기의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며, 종교개혁 시기에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의 관계, 이중 예정론의 존재 여부, 그리고 다른 기독교 교파들의 입장 등 다양한 쟁점을 포함한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무조건적인 선택을 강조하는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조건적인 선택을 강조한다.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등 다른 기독교 교파들은 예정론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이며, 현대 신학에서는 예정론을 재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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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
기독교 교리
유형기독교 교리
관련선택
다양한 관점
아르미니우스주의조건적
칼뱅주의무조건적
보편주의적 구원론보편적
몰리니즘신성한 예지

2. 역사

기독교 역사에서 구원의 주체와 방식에 대한 논쟁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특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단독설과 인간의 자유의지 및 협력을 중시하는 합력설의 대립이 핵심적인 흐름을 형성했다.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4~5세기에 있었던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단독설을,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했으며,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로 인해 단독설은 '어거스틴주의'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이후 로마교회 내에서는 점차 합력설에 가까운 입장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어거스틴주의적 관점이 다시 부각되었다. 루터는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고 본 에라스무스의 합력설적 주장을 비판하며,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강조하는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데 세르보 아르비트리오la)을 저술하여 단독설 입장을 분명히 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었다. 17세기에는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를 따르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개혁주의 진영은 도르트 회의를 열어 칼뱅주의 5대 강령을 확립하며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반박하고 단독설에 기반한 정통 교리를 재확인했다.

18세기에는 성공회 사제이자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합력설을 주장하며 예정론 논쟁의 역사에 참여했다.[55]

2. 1. 초기 기독교

예정설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부 학자들은 구약 외경인 에녹서가 결정론적 세계관과 이원론을 결합하고 있다고 보며,[2] 희년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결정론을 조화시키려 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3] 반면, 벤 시라는 신이 인간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능력을 주었다며 자유 의지를 강조했다.[4]

제2성전 시대 유대교 내에서도 예정론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존재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1세기 유대교의 주요 분파들은 예정과 자유 의지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졌다. 에세네파바리새파는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인간사를 주관한다고 믿었지만, 바리새파는 인간에게 선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반면 사두개파는 섭리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학자 N. T. 라이트는 요세푸스의 설명이 다소 단순화된 것이며, 당시 논쟁은 철학적인 예정론보다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에세네파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반면,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인간이 협력해야 한다고 믿었다고 본다. 존 M. G. 바클레이 역시 요세푸스의 설명이 단순화되었을 수 있지만, 분파 간에 복잡한 견해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프랜시스 왓슨 역시 4 에스라와 같은 문헌을 근거로, 당시 유대교의 예정론적 믿음은 주로 일부 유대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었다고 주장했다. 쿰란 공동체 문서 중 하나인 1QS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된 자들이) 거룩한 자들의 몫을 상속받게 하셨다"는 구절이 있어, 이들이 예정론을 믿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5]

신약성경에서는 로마서 8장에서 11장까지가 예정론과 관련된 핵심 본문으로 여겨진다. 특히 로마서 8장 28-30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경 학자들은 이 구절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봉사에 관한 것이며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톨릭 성경 주석가 브렌던 번은 이 구절에서 언급된 예정은 개인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가톨릭 주석가인 조셉 피츠마이어는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보편적 구원을 예정하셨다고 가르친다고 기록했다. 개신교 성경 해석가인 더글러스 무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특정 사람들을 구원으로 예정하셨고 나머지 인류를 유기 (지옥으로의 운명)로 예정하셨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읽는다. 마찬가지로, 라이트의 해석은 이 구절에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라이트는 또한 바울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 의지나 책임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신 라이트는 바울이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을 통해 구원을 이루도록 역사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3세기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저술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개인에게까지 미친다고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의 예정은 모든 개인의 현재 삶 또는 전생에서의 공적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믿었다. 길과 그레그 앨리슨은 로마의 클레멘스가 구원에 대한 예정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6][7] 솔로몬의 오데스의 일부 구절은 에세네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쓴 것으로, 하나님이 구원받아 천국에 갈 사람을 선택한다는 예정론적 세계관을 시사할 수 있지만, 가르침에 대한 논쟁이 있다.[8][9][10] 솔로몬의 오데스는 하나님이 "존재하기 전에 선택된 자의 얼굴에 인을 새겼다"고 말한다.[10] 토마스파는 자신을 빛의 자녀로 여겼지만, 선택된 공동체의 일부가 아닌 사람들은 어둠의 자녀였다. 따라서 토마스파는 일종의 선택 또는 예정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빛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을 선택받은 자로 여겼다.[10] 영지주의 지도자 발렌티누스는 예정론의 한 형태를 믿었는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사람 안에서 어떤 요소가 우세하냐에 따라 세 가지 본성 중 하나로 태어난다. 발렌티누스의 견해에서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악에 너무 기울어져 있어 결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어떤 사람들은 선과 악이 섞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 구원을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 선에 기울어지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11] 이레네우스는 또한 불공정하다고 주장하면서 발렌티누스가 제시한 예정론 교리를 공격했다. 이레네우스에게 인간은 구원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12] 유스티누스 순교자는 일부 그리스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예정론적 견해를 공격했다.[13]

4세기와 5세기 후반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또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하신다고 가르쳤다. 396년 이전,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이 개인들이 믿을지 여부에 대한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기초한다고 믿었고,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동의에 대한 보상"이었다. 나중에 펠라기우스에 대응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의 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하나님이 우리 안의 가치 있는 무엇인가 때문에 (그분의 미리 아심 속에서) 우리를 선택한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말했고,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가 일으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이 이중 예정, 즉 하나님이 구원뿐만 아니라 멸망을 위해 몇몇 사람들을 선택한다는 믿음을 함축하는지 여부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가톨릭 학자들은 그가 그러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일부 개신교 및 세속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중 예정을 실제로 믿었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이의를 제기했다.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의 생각을 교회에 도입하고 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레랭의 빈센트에게 이것은 충격적인 혁신이었다. 이 새로운 긴장은 마침내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대결로 명백해졌으며,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해석한 대로) 펠라기우스주의가 정죄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펠라기우스는 자유 의지의 행위로 구원이 달성된다는 것을 확언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에 대한 견해를 부인했다.

5세기 후반의 아를 공의회는 "어떤 사람들은 죽도록 정죄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생명을 위해 예정되었다"는 입장을 정죄했지만,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처럼 보일 수 있다. 529년의 오렌지 제2차 공의회는 또한 "어떤 사람들은 신의 능력에 의해 진실로 악으로 예정되었다"는 입장을 정죄했다.

8세기에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예정 교리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으며, 사람들의 의지에서 나오는 행동은 하나님의 섭리에 전혀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다마스쿠스는 사람들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과 협력하여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에 의해 야기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아퀴타니아의 프로스페르(390 – c. 455 AD)는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을 옹호했다.[14]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였던 마리우스 메르카토르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하는 다섯 권의 책과 예정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썼다.[15] 러스페의 풀겐티우스와 아를의 카이사리우스는 하나님이 믿을 자유로운 선택을 주신다는 견해를 거부하고 대신 예정을 믿었다.[16] 카시아누스는 예정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따라 예정할지 결정한다고 믿었다.[17]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제 이 현대 이단자들에 맞서 새로운 근심으로 변호되고 있는 이 예정의 믿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라고 말했다.[18]

2. 2. 중세 시대

8세기의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예정 교리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를 강조하며,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과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이 직접 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9세기 작센 출신 수도사 오르베의 고트샬크는 하나님이 일부 사람을 천국으로 예정하는 것처럼 지옥으로도 예정한다는 이중 예정설을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여러 종교 회의에서 비난받았으나 그의 견해는 여전히 영향력을 가졌다. 아일랜드 신학자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고트샬크를 반박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을 버리고, 신의 예정은 인간의 선택에 대한 신의 미리 아심(예지)과 같다고 주장했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이 피조물의 선함이 아닌 자신의 선함에 근거하여 특정 사람들을 지복 직관으로 예정한다고 가르쳤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선택에 있어 자유로우며, 스스로 죄를 짓고 그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직접적으로 선을 의도하고, 간접적으로 선한 것의 악한 결과를 의도하며, 악은 오직 허용할 뿐이다. 아퀴나스는 신이 악을 허용할 때, 그것이 행해지거나 행해지지 않도록 의도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같은 13세기의 윌리엄 오컴은 신이 인간의 선택을 유발하지 않으며, 예정을 신의 미리 아심과 동일시했다. 오컴은 신이 인간의 예견된 행위에 근거하여 예정하지만, 신의 의지가 이에 구속받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 외에도 중세 시대에 예정을 믿었던 신학자들로는 라트람누스 (868년 사망), 토마스 브래드워딘 (1300–1349), 리미니의 그레고리 (1300–1358), 존 위클리프 (1320년대–1384), 요한 루흐라트 폰 베젤 (1481년 사망),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52–1498), 요하네스 폰 슈타우피츠 (1460–1524) 등이 있다.

한편, 중세 시대의 카타리파와 같은 일부 집단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19]

2. 3.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예정론은 다시금 중요한 신학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는 4세기5세기에 있었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에서 다루어졌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다는 '단독설'과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구원에 기여한다는 '합력설' 간의 논쟁이 다시 불붙은 것이었다.[53] 카르타고 회의에서 어거스틴의 단독설이 채택되었으나, 이후 로마교회는 점차 합력설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 과정에서 어거스틴의 사상을 다시 주목하며 예정론을 강하게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합력설적 입장을 보인 에라스무스를 비판하며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데 세르보 아르비트리오la)을 저술했다. 루터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했고,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일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든다면,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실 때 당신은 불평하면 안 됩니다."[53]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을 역설했다.

존 칼빈은 루터의 예정론을 더욱 발전시켜 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뿐 아니라 멸망할 사람까지 미리 정하셨다는 이중 예정설을 주장했다. 이는 칼뱅주의 5대 강령 중 하나인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의 핵심이 되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죄를 직접 만들지는 않지만, 그의 계획 안에서 죄를 허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라고 설명했다. 그는 멸망받는 자들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지만, 구원받는 자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예정론은 1561년 벨기에 신앙 고백 제16조에도 반영되어, 하나님께서 영원하고 변치 않는 계획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명시했다. 칼뱅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택함받은 자'는 결코 구원을 잃지 않으며(성도의 견인), 선한 행실을 통해 자신이 택함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울리히 츠빙글리 역시 칼뱅과 유사하게 이중 예정론적인 견해를 가졌다.

개혁주의자들은 예정론의 성경적 근거로 로마서 9장, 에베소서 1장, 잠언 16장 등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로마서 9장 16절("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달렸음을 보여주는 구절로 해석되었다.

2. 4.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 이후에도 예정설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계속되었다. 17세기에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기존의 칼뱅주의 예정설에 반대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보편 구원설을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주장했다. 이는 구원에 있어 신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합력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개혁파 교회는 1610년 도르트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인간의 전면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으로 요약되는 칼뱅주의 5대 강령을 확립하며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정통 교리를 공고히 했다. 이 시기 네덜란드 칼뱅파 내부에서는 구원의 예정 시점이 인간의 타락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두고 '''타락 전 예정설'''과 '''타락 후 예정설''' 간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타락 전 예정설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8세기에는 성공회 사제이자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여 합력설을 지지하며 칼뱅주의 예정론을 비판했다.[55] 이는 칼뱅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던 조지 화이트필드와의 신학적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잉글랜드의 감리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전통을 따르게 되었으나, 화이트필드의 영향을 받은 웨일스의 감리교는 칼뱅주의적 입장을 유지했다[47]. 웨일스의 칼뱅주의 감리교는 헌팅던 백작 부인과 같은 인물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도르트 회의 이후에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의 신학적 논쟁은 지속되었지만,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하면서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예정론 논쟁은 이전보다 중요도가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48]. 그러나 20세기에 신정통주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등장은 그의 신학에 대한 반발과 함께 예정론 논쟁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50]. 일본에서는 리버럴 신학의 성서관에 맞서 성서 신앙을 강조하는 칼뱅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협력하여 성서 신앙 운동을 전개하는 모습도 나타났다[49]. 이러한 협력은 카를 바르트의 성서관에 대한 공동의 반발 심리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50]

3. 주요 쟁점 및 다양한 견해

제2성전 시대 유대교 내에서 예정론에 대한 견해는 다양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1세기 유대교의 주요 세 종파는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에세네파바리새파는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인간사를 주관한다고 믿었지만, 바리새파는 인간이 선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반면 사두개파는 섭리 교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성서학자 N. T. 라이트는 요세푸스의 설명이 다소 부정확하며, 당시 유대교 논쟁은 철학적인 예정론보다는 이스라엘 해방이라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관점 차이였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에세네파가 하나님의 개입을 수동적으로 기다린 반면, 바리새파는 유대인이 하나님과 협력하여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다고 설명한다. 존 M. G. 바클레이는 요세푸스의 설명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종파 간에 복잡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신학자 프랜시스 왓슨은 1세기 문서인 4 에스라를 근거로, 당시 유대교의 예정론적 믿음은 주로 일부 유대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었다고 주장했다. 쿰란 공동체의 일부 문헌, 예를 들어 1QS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된 자들이) 거룩한 자들의 몫을 상속받게 하셨다"고 언급하며 예정론적 사상을 시사하기도 한다.[5]

신약 성경에서는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11장 사이에 예정론에 대한 언급을 남겼다. 특히 로마서 8장 28-30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봉사에 관한 것이며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톨릭 성경 주석가 브렌던 번은 이 구절에서 언급된 예정은 개인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가톨릭 주석가인 조셉 피츠마이어는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보편적 구원을 예정하셨다고 가르친다고 기록했다. 개신교 성경 해석가인 더글러스 무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특정 사람들을 구원으로 예정하셨고 나머지 인류를 유기 (지옥으로의 운명)로 예정하셨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읽는다. 마찬가지로, 라이트의 해석은 이 구절에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라이트는 또한 바울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 의지나 책임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신 라이트는 바울이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을 통해 구원을 이루도록 역사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3세기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개인에게 미치며, 예정은 각 개인의 현세 또는 전생에서의 공적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로마의 클레멘스 역시 구원에 대한 예정론적 견해를 가졌다는 주장이 있다.[6][7] 솔로몬의 오데스 일부 구절은 예정론적 세계관을 암시하며,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미리 선택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8][9][10] 토마스파는 자신들을 '빛의 자녀'로 여기고 선택받지 못한 이들을 '어둠의 자녀'로 구분하며 일종의 선택 사상을 가졌다.[10]

영지주의 지도자 발렌티누스는 인간이 세 가지 본성 중 하나를 타고나며, 이에 따라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는 형태의 예정론을 믿었다.[11]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발렌티누스의 예정론이 불공정하다며 비판하고 인간에게는 구원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12] 유스티누스 역시 일부 그리스 철학자들이 가졌던 예정론적 견해를 비판했다.[13]

4-5세기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조화시키려 하며 예정론을 발전시켰다. 초기에는 예정이 인간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한다고 보았으나, 이후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거치며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후대에 많은 논쟁을 낳았으며, 이중 예정론을 함축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그의 예정론은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나 레랭의 빈센트 등으로부터 비판받기도 했으나,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주의가 정죄되면서 그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후 아를 공의회(475)와 오렌지 제2차 공의회(529)에서는 극단적인 형태의 예정론을 정죄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은 아퀴타니아의 프로스페르,[14] 마리우스 메르카토르,[15] 러스페의 풀겐티우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16] 등에 의해 옹호되었다. 반면 카시아누스는 하나님이 인간의 반응을 미리 아시고 예정 여부를 결정한다고 보았다.[17]

8세기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인간 의지의 자유를 강조하며 예정론에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9세기에는 오르베의 고트샬크가 명시적인 이중 예정론을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고,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이를 반박하며 예정은 신의 예지와 같다고 주장했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자신의 선함에 근거하여 예정한다고 가르치면서도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을 강조했다. 같은 시기 윌리엄 오컴은 예정이란 신의 예지와 같으며, 하나님이 인간의 선택을 유발하지는 않는다고 가르쳤다. 중세 시대에 예정을 믿었던 다른 신학자들로는 라트람누스(868년 사망), 토마스 브래드워딘(1300–1349), 리미니의 그레고리(1300–1358), 존 위클리프(1320년대–1384), 요한 루흐라트 폰 베젤(1481년 사망),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그리고 요한 폰 슈타우피츠(1460–1524) 등이 있다. 한편, 중세의 카타리파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했다.[19]

종교개혁 시기 장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이어받아 예정론을 강조했으며, 특히 구원과 멸망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을 주장했다. 그는 이를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여겼다. 울리히 츠빙글리를 포함한 다른 개혁가들도 이중 예정론적 견해를 가졌다.

3. 1. 이중 예정론

개혁주의 예정론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구원에 관한 오직 은혜(Sola Gratia) 사상을 배경으로 한다. 이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음에도 타락하여 스스로 회개하기를 거부하며(전적 타락), 이러한 상태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라는 이해에 기반한다. 마르틴 루터는 이를 '인간의 의지는 의 노예'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개혁주의 예정론은 하나님이 세상 창조 이전, 시간을 초월한 영역에서 인간의 타락과 멸망을 미리 아시고 그 가운데 일부를 조건 없이 선택하여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교리이다. 이는 동시에 구원받지 못할 이들을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셨다는 의미를 포함하므로 이중 예정론이라고 불린다. 이중 예정론은 운명론과 구별되는데, 운명론이 과거 시점에서의 미래 결정이라면 이중 예정론은 시간을 초월한 신의 영역에서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어거스틴에게서도 나타나 '어거스틴주의'라 불리기도 했으나(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 참조), 신학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종교개혁 시기 개혁자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마르틴 루터의 《노예의지론》은 이중 예정론을 변호하는 중요 저작이며, 이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주요 특징이자 칼뱅주의 5대 강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중 예정론은 칼뱅주의 5대 강령 중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항목에 명시되어, 구원이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멸망받는 자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예정론은 모든 인류가 멸망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중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는 자신의 구원을 자랑할 수 없고, 멸망받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루터는 "만일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든다면,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실 때 당신은 불평하면 안 됩니다."[53]라고 말했다.

개혁주의자들은 이중 예정론의 성경적 근거로 다음 구절들을 제시한다:

  •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로마서 9:11, 공동번역)
  •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9:16, 공동번역)
  •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하십니다. (로마서 9:18, 공동번역)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페소서 1:5-6, 공동번역)
  • 야훼께서는 모든 것을 각각 쓰임에 맞게 만드셨으니 불의한 사람은 재앙이 내리는 날에 재앙받을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잠언 16:4, 공동번역)


존 칼뱅은 하나님이 죄악을 단순히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정하신다고 보았으나,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여기지는 않았으며, 피조물에게 죄를 가하는 방식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라고 여겼다. 그는 예정이 구원과 멸망 모두에 적용되지만, 멸망은 당사자의 죄 때문이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고 가르쳤다. 울리히 츠빙글리 등 다른 개신교 종교개혁가들도 유사한 견해를 가졌다.

1561년 벨기에 신앙 고백 제16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계획 안에서, 순전히 그의 선하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모든 자"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고 보존하신다"고 명시했다. 칼뱅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를 선택하셨다고 믿으며, 택함받은 자는 구원을 잃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확신하게 된다고 보았다.

예정론은 칼뱅주의무조건적 선택 교리와 밀접하며, 주로 구원의 확신과 오직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는 목회적 가치를 지닌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적 결정은 그 자신 외에 의존하지 않으며, 인간의 결정은 하나님의 결정의 결과로 이해된다. 칼뱅주의는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와 인간의 책임 및 자유를 모두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일부 극단적인 칼뱅주의(Hyper-Calvinism)는 하나님이 멸망시킬 자를 예정하는 의도와 구원할 자를 예정하는 의도가 동일하다고 주장하여 비판받기도 하며, 때로는 인종 차별적 함의를 띠기도 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신학자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는 유대인의 비택자론을 주장했고, 남아프리카 일부 네덜란드 정착민들은 흑인들이 함의 저주를 받았다며 인종적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려 했으나(아프리카너 칼뱅주의 참조), 이는 다른 칼뱅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일반적으로 칼뱅주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풀거나 거두실 사람들을 특별히 인식하신다고 가르친다. 구원받는 자들은 믿음, 성례, 기도, 선행 등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심판받는다고 본다.

칼뱅주의 내에서는 예정의 논리적 순서에 따라 전락후 예정론(Infralapsarianism, 또는 하위계약설 Sublapsarianism)과 전락전 예정론(Supralapsarianism, 또는 상위계약설)으로 나뉜다.

  • 전락후 예정론: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예견하시고,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고 본다(선택은 타락에 대한 반응).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며, 하나님이 죄의 직접적 원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 전락전 예정론: 하나님이 구원할 자와 멸망시킬 자를 먼저 선택하시고, 그 결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타락을 예정하셨다고 본다(타락은 선택 계획의 일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칼뱅 자신은 주로 전락후 예정론자로 간주되나,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는 전락전 예정론자였다.


많은 칼뱅주의 신학자들은 이 논쟁이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고 교리 전체에 큰 영향이 없다고 본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을 시간 순서로 묘사하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며, 은혜를 베푸는 방식(선택)과 은혜를 거두는 방식(유기, reprobation)을 구별한다.

이중 예정론은 하나님이 선택된 자들의 구원뿐 아니라, 일부 사람들의 유기(reprobation), 즉 저주를 적극적으로 예정하신다는 교리이다. 칼뱅은 이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 관해 일어날 것을 스스로 결정한 영원한 섭리"로 정의하며, "모두가 동등한 조건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며, 일부는 영생을, 다른 일부는 영원한 정죄를 받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고 설명했다.[36]

이러한 명시적인 이중 예정설은 9세기 오르베의 고트샬크와 14세기 리미니의 그레고리에게서 나타난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서도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그가 명확히 이중 예정설을 주장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인류가 구원 또는 저주로 예정되었다고 묘사했지만, 모든 인간이 "유기된 자"로 태어나지만 그 상태에 머물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40]

예정설에 따르면 구원은 개인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미리 결정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며 일방적인 은총이다. 구원받은 자는 특정한 선택된 사람에 한정되며,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짓더라도 결국 하나님께 돌아온다고 여겨진다[42]. 이는 성도의 견인 교리와 관련된다[43][44]. (도르트 신조, 알미니우스주의 참조)

이중 예정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책임 문제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며 많은 논쟁을 낳았다. 칼뱅 자신은 성경이 구원받은 자를 위해 기록되었으므로, 멸망보다는 구원에 대한 선택을 더 강조했다.

3. 2. 자유 의지와의 관계

개혁주의 예정론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오직 은혜에 의한 구원을 배경으로 한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졌음에도 원죄로 인해 타락하여 스스로 회개하기를 거부하며(전적 타락), 마르틴 루터는 이를 '인간 의지의 노예 상태'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오직 은혜).[53]

이러한 배경에서 개혁주의 예정론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인간의 타락과 멸망을 미리 아시고 그중 일부를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여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고 본다. 이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유기될 사람) 역시 정해졌음을 의미하기에 이중예정론이라고 불린다. 이 사상은 어거스틴에게서 비롯되어 '어거스틴주의'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종교개혁 시기에 마르틴 루터의 《노예 의지론》 등을 통해 체계화되어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이중예정론은 칼뱅주의 5대 강령 중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53]

흔히 이중예정론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부정한다고 오해하지만, 예정론은 인간의 선택권 자체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에 대한 이론이다. 즉,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이 주어졌음은 분명하나, 원죄로 타락한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 선택권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 계속된다. 자연인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항상 죄의 종노릇하는 길을 택한다. 따라서 이중예정론은 자연인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자유선택권을 인정하면서도, 그 "원하는 바"(의지)는 죄의 지배를 받는다는 노예의지론을 가르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에서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해왔다.

  • '''합력설''' (Synergism|시너지즘영어):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고 본다. 즉,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입장이다. 넓게는 알미니안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 '''단독설''' (Monergism|모너지즘영어):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할 뿐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하다고 본다. 즉,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입장이다. 어거스틴주의와 개혁주의 예정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에라스무스는 단독설에 대해 "그렇다면 누가 노력하며 자기 삶을 개선하려 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54] 이에 루터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할 수 없다! … 선택 받은 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들이, 성령에 의해 개선될 것이다. 나머지는 개선되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라고 답했다.[54] 또한 에라스무스가 "누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믿겠는가?"라고 묻자, 루터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할 수 없다!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이 믿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믿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라고 답했다.[54]

합력설을 따르는 알미니안주의는 보통 구원이 인간의 결정에 달려있으므로 한번 얻은 구원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단독설을 따르는 개혁주의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므로 한번 시작된 구원은 취소되거나 실패할 수 없다고 본다(성도의 견인). 오늘날 장로교와 개혁교회는 어거스틴주의(단독설)를 따르며, 그 외 다수 교파는 알미니안주의(합력설)를 따른다.

루터교는 역사적으로 구원에 대한 무조건적 선택을 지지하지만, 칼뱅주의와 달리 저주에 대한 예정(유기)은 믿지 않는다.[30] 루터교는 영원한 저주가 죄의 용서를 거부하고 믿음을 거부한 결과라고 가르친다.[31] 루터의 예정설에 대한 입장은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에 관하여》에 대한 반박으로 쓴 《노예 의지론》(1525)에 잘 나타나 있다.

칼뱅주의에서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할 사람들을 선택하셨으며(택함),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이중 예정). 존 칼뱅은 구원받은 사람(택자)은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원받았음을 알게 된다고 보았다. 칼뱅주의 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 작정이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타락 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수프라랍사리아니즘la, 상위단계설)과 타락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타락 후 예정설(Infralapsarianism|인프라랍사리아니즘la, 하위단계설)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38] 타락 전 예정설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칼뱅 자신은 하위단계설에 가까웠던 것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는 상위단계설을 주장했다. 많은 칼뱅주의 신학자들은 이 논쟁이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며 교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본다.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예정론에 반대하며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정립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예지(미리 아심)에 근거한 예지 예정설을 주장한다. 즉, 하나님은 누가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을지를 미리 아시고 그에 따라 선택하신다는 것이다(조건적 선택).[32] 이는 개인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은 1618-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칼뱅주의 5대 강령(TULIP)이 확립되었다.

감리교는 존 웨슬리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정설을 비판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른다.[47] 이로 인해 칼뱅주의자인 조지 휫필드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잉글랜드 감리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 계통이지만, 휫필드의 영향을 받은 웨일스 감리교는 칼뱅주의적 성격을 띤다.
기업적 선택(Corporate Election|코퍼릿 일렉션영어)은 하나님이 개인을 직접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는 공동체 자체를 선택하셨다는 견해이다.[41] 개인은 믿음을 통해 이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선택의 혜택을 누리게 되며, 공동체에 속할지 여부는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에 달려있다고 본다. 이는 일부 비전통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강조했으며, 하나님이 구원할 자들을 미리 선택하셨다고 가르쳤다. 개혁교회는 이를 예정설로 해석한다.[45][46] 그러나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성인으로 공경하면서도 그의 견해를 칼뱅주의적 예정설과는 다른 것으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어머니 모니카의 사후 구원을 위해 기도한 점 등을 근거로, 그의 은총론이 결정론적인 예정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3. 3. 다른 기독교 교파의 입장

동방 정교회는 예정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51] 동방 정교회의 관점은 주교 테오판 은둔자가 "신의 섭리와 우리의 자유 의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한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하느님의 은총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즉,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작용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어떻게 행동할지를 미리 알고 그에 따라 섭리하며, 신의 결정이 인간의 삶에 달려있지 인간의 삶이 결정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는 하느님의 예지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20] 이러한 입장은 17세기에 열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확인되었는데, 이 공의회에서는 칼뱅주의의 예정설을 포함한 여러 교리를 부정했다.[52] 동방 정교회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하느님의 협력, 즉 협동을 중시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예정론 교리를 가르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께 모든 시간은 즉각적으로 현존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영원한 '예정'의 계획을 세우실 때, 그분은 각 사람의 은총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을 그 안에 포함하신다"고 설명한다.[21] 따라서 가톨릭의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응답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가톨릭 예정론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인간이 구원을 위해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해야 한다고 보았지만[45][46], 동시에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은총과 자유 의지에 관하여"에서 하느님이 성경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이 있음을 드러내셨다고 밝혔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따라, 예정이 하느님의 섭리의 일부이며,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목표에서 벗어나도록 허용된다고 설명했다. 이를 '유기(reprobation)'라고 부르며, 이는 하느님이 사람이 죄에 빠지도록 허용하고 그 죄로 인해 벌을 부과하려는 의지를 포함한다고 보았다.[2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교회를 통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제공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은총은 각 사람이 자유로운 협력을 통해 구원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고 보았다.[23]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칼뱅주의적 예정설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며, 얀센주의와 같이 이중 예정론을 주장한 내부 움직임도 비판받았다.

슈테판 로흐너, ''최후의 심판'', c. 1435.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 쾰른.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LDS 교회)는 예정설을 거부하지만, 예정(foreordination)이라는 개념은 중요한 교리로 받아들인다.[33][34] 이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전세에서 특정 개인들을 선택하여 현세에서 특정한 사명이나 부름을 수행하도록 예정하셨다. 예를 들어, 선지자들은 주님의 종이 되도록, 신권 소유자들은 그 부름을 받도록, 그리고 예수는 속죄를 이루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예정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현세에서 선택의지(moral agency),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능력을 가지며, 예정된 역할을 수행할지 여부는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35]

4. 예정설과 관련된 사회적, 윤리적 문제

예정설은 신의 절대 주권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핵심 교리이지만, 단순히 신학적인 논의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사회와 개인의 삶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회적, 윤리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특히 칼뱅주의의 예정설은 구원받을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믿음 때문에, 신자들이 현세에서의 삶의 의미와 태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고민은 개인의 직업 윤리나 경제 활동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막스 베버는 그의 유명한 저서에서 칼뱅주의 예정설이 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에서의 성공을 구원의 증표로 삼으려는 심리적 동기를 부여했으며, 이는 근면, 성실, 금욕과 같은 덕목을 강조하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예정설은 경제 시스템의 형성 과정과도 연결되어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예정설은 사회복지와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논쟁적인 지점을 안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의 작정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다는 교리는 사회적 성공이나 실패를 개인의 운명이나 신의 선택으로 돌리게 만들 수 있으며,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조적인 지원과 연대의 필요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해석을 둘러싸고 정치적, 사회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며, 사회복지 정책의 방향성과 공동체적 책임의 범위에 대한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27][26]

4. 1. 예정설과 자본주의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칼뱅주의의 예정설이 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베버에 따르면, 예정설은 구원받을 사람이 이미 신에 의해 정해져 있고 현세에서의 선행이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교리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사람들을 허무주의나 운명론에 빠뜨릴 수 있었다. 자신이 구원받을지 여부를 알 수 없고, 현세에서 어떻게 살든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삶의 의욕을 잃거나 쾌락만을 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칼뱅주의 신자들은 이러한 교리 앞에서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고 베버는 분석했다. 그들은 "전능한 신에게 구원받도록 선택된 인간은 금욕적으로 자신의 천명(독일어: Beruf|베루프de, 이 단어에는 '직업'이라는 의미도 있다)을 충실히 수행하고 성공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내면적 확신을 가지려 노력했다. 즉, 자신이 구원받을 선택된 사람이라는 증거를 현세의 성공과 성실한 삶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자들은 시간을 아껴 부지런히 일하고, 사치와 향락을 멀리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했다. 노동을 통해 얻은 부는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소비하기보다 다시 생산 활동에 투자하는 경향을 보였다.

베버는 바로 이러한 금욕적인 직업 윤리와 합리적인 자본 축적 방식이 결과적으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4. 2. 예정설과 사회복지 (한국의 관점)

예정설, 특히 칼뱅주의에서 강조하는 무조건적 선택과 유기(버림) 교리는[27] 사회복지 정책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낳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의 주권적 작정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다는 이 교리는 현세의 성공이나 실패를 신의 선택 혹은 유기의 결과로 해석할 여지를 제공하며, 이는 사회 구조적 문제 해결보다는 개인의 운명이나 상태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연대를 목표로 하는 사회복지의 기본 가치와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개신교 내에서도 예정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래 표는 주요 교파별 '선택' 교리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 차이를 요약한 것이다.[26]

주제루터교칼뱅주의알미니우스주의
선택오직 루터교의 무조건적인 구원에 대한 선택오직 구원에 대한 무조건적 선택과 유기(버림)[27]예측된 믿음 또는 불신앙을 고려한 조건적 선택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도 예정설에 대한 해석은 입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칼뱅주의적 예정설이 사회적 불평등이나 차별을 신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여 사회 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이는 사회 연대와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복지 정신과 배치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반면,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예정설이 반드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논리로 귀결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개인이 신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책임감과 근면 성실 같은 덕목을 강조하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 관점에서는 예정된 운명 속에서도 인간의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처럼 예정설은 단순한 신학적 교리를 넘어, 한국 사회의 복지 정책 방향과 사회적 연대에 대한 논의에 영향을 미치며, 각기 다른 정치적, 사회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5. 현대 신학의 논의

현대 신학에서는 전통적인 예정론을 재해석하거나 수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논의로 공동체적 선택(기업적 선택)과 중간 지식 개념을 들 수 있다.
공동체적 선택 (기업적 선택)기업적 선택은 전통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와는 다른 관점에서 예정론을 이해하는 방식이다.[41] 이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특정 개인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 전체를 선택하셨다. 즉, 하나님은 어떤 유형의 사람들을 구원할 것인지를 정하셨다는 의미이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1장 4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선택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음을 뜻한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히 영원한 운명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리자로서의 역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인은 교회의 구성원이 될지 여부에 대해 완전한 자유 의지를 가진다.[41] 기업적 선택은 하나님의 전지에 대한 열린 유신론적 입장과도 연결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중간 지식중간 지식은 예수회 신학자 루이스 데 몰리나가 발전시킨 개념으로, 몰리나주의의 핵심 교리이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조화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왔다. 중간 지식은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가진 모든 피조물이 가능한 모든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참된 반사실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어떤 사람이 특정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를 하나님은 미리 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반사실적 지식은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명령(즉, 세상을 만들기 전)보다 앞서고, 논리적 진리에 대한 지식보다는 뒤에 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중간 지식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자유 의지를 가진 모든 피조물(예: 모든 개별 인간)이 가능한 모든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자유롭게 할 것인지를 아셨다. 그리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하나님은 여러 가능 세계 중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뜻과 가장 잘 맞는 세계, 즉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실제 세계를 선택하여 실현하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만약 자유로운 존재 A가 상황 B에 놓인다면, 하나님은 중간 지식을 통해 A가 선택지 Z 대신 Y를 자유롭게 선택할 것임을 아신다.
  • 만약 자유로운 존재 A가 상황 C에 놓인다면, 하나님은 중간 지식을 통해 A가 선택지 Y 대신 Z를 자유롭게 선택할 것임을 아신다.


이러한 중간 지식을 통해 하나님은 A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에 맞는 선택을 자유롭게 하도록 상황 B에 놓이는 세계를 실현할 능력을 가지신다. 만약 하나님께서 A가 Z 대신 Y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에 가장 부합한다고 판단하셨다면, 하나님은 A가 상황 B에 처하는 세계를 실제로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간 지식은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모두 인정하는 칼뱅주의, 가톨릭, 루터교 등 다양한 신학적 전통과 양립 가능하며,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잠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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