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다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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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 사다하루는 일본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195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1루수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외다리 타법'을 개발하여 1962년부터 홈런왕과 타점왕을 휩쓸며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했다. 1977년에는 세계 신기록인 756호 홈런을 기록하며 국민적인 영웅으로 자리매김했고, 선수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조감독과 감독을 거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6년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현재는 소프트뱅크 호크스 구단 회장 및 특별팀 어드바이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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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다하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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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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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 18 |
포지션 | 1루수 / 감독 |
출생일 | 1940년 5월 20일 |
출생지 | 도쿄도 스미다구 |
타석 | 좌타 |
투구 | 좌투 |
데뷔 리그 | NPB |
데뷔일 | 1959년 4월 11일 |
데뷔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최종일 | 1980년 10월 12일 |
최종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통계 리그 | NPB |
타율 | .301 |
홈런 | 868 |
안타 | 2,786 |
타점 | 2,170 |
도루 | 84 |
선수 경력 | |
선수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감독 | 요미우리 자이언츠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
임원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현재) |
수상 | |
선수 | 11× 일본 시리즈 우승 (1961, 1963, 1965–1973) 9× 센트럴 리그 MVP (, , , , , , , , ) 2× 일본 트리플 크라운 (1973, 1974) 3×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1974, 1976, 1977) 1963년 4월 25일 사이클링 히트 달성 요미우리 자이언츠 #1 영구 결번 |
감독 | 2× 일본 시리즈 우승 (1999, 2003) |
프런트 | 7× 일본 시리즈 우승 (2011, 2014, 2015, 2017–2020) |
기록 | |
NPB/세계 기록 | 868개 커리어 홈런 (세계 기록) 1.079 커리어 OPS (일본 기록) 2,170 커리어 타점 (일본 기록) |
명예의 전당 | |
헌액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94년, 일본) |
출신 학교 | |
학교 | 와세다 실업학교 |
감독・코치 경력 | |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년 - 1988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995년 - 2008년) 일본 대표 (2006년) |
일본어 표기 | |
로마자 | Ō Sadaharu |
가나 | おう さだはる |
한자 | 王 貞治 |
한국어 | 오 사다하루 |
중화권 인물 정보 | |
이름 | 왕 貞治 |
본적지 | 저장성칭톈현 |
간체자 | 王 贞治 |
번체자 | 王 貞治 |
병음 | Wáng Zhēnzhì |
통용 병음 | Wang2 Chên1-chih4 |
라틴 문자 | Wang Jenjyh |
주음 부호 | ㄨㄤˊ ㄓㄣㄓˋ |
일본어 이름 | 오 사다하루 |
발음 | 왕 쳰즈 |
2. 어린 시절
오 사다하루는 1940년 5월 10일 도쿄도 스미다구에서 중화민국 국적의 아버지 오 시후쿠(王仕福)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란성 쌍둥이 형제가 있었으나, 호적상의 출생일은 5월 20일이다. 실제 출생일과 다른 이유는 부모가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출생 신고를 미뤘기 때문이다. 오 사다하루는 "3살 때까지 서는 것조차 힘들었고 4살 때에 겨우 튼튼하게 자랄 수 있었다"라고 회상했다.[221]
6남매 중 차남으로, 형 데쓰조(鉄城)와 누나 유키에(幸江), 준코(順子)가 있었고, 쌍둥이 누나 히로코(廣子)는 1세 3개월에, 막내 동생 요시코(佳子)는 몇 달 만에 사망하여 막내로 자랐다.[222] 태평양 전쟁 중에는 어머니의 옛 성 '도즈미(當住)'를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이방인의 아이는 따돌림을 당하는 일이 많았지만, 오 사다하루는 중학생 때 이미 키가 175cm 전후로 컸고, 호전적인 성격 덕분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오 시후쿠는 중화요리점 '고주반'(五十番)을 경영하며 이웃과의 교류가 좋아, 아버지 덕분에 따돌림을 피할 수 있었다고도 회고했다.[223]
초등학생 시절 요코즈나 요시바야마 준노스케에게서 스모 선수가 되라는 권유를 받을 정도로 스모에 재능이 있었다. 혼조 중학교에서는 육상부와 탁구부에 소속되기도 했다.
야구는 어릴 적 신사 경내나 골목에서 하던 동네 야구가 시작이었다.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것은 게이오기주쿠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형 데쓰조의 권유로 야구부 합숙에 따라간 것이 계기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들과 팀을 만들었고, 턱걸이나 팔씨름은 못했지만 야구는 잘해서 투수 겸 4번 타자를 맡았다.
스미다구립 혼조 중학교에는 야구부가 없어서 지역 공장 아저씨가 만든 고등학생 주축 야구 클럽 '우마욘 케이프하츠'에 들어갔다. 여기서 연상의 상급생들과 함께 활동하며 실력을 키웠다. 같은 중학교 친구가 포수를 맡으면서 '혼조 중학교에 대단한 선수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도쿄도 야구 대회 초청장을 받아 급히 팀을 꾸려 참가, 우승까지 차지했다.
'우마욘 케이프하츠'는 '스미다구 우마야바시(厩橋) 4번가'(현: 스미다구 혼조)에서 유래했고, '케이프하츠'는 1950년 일본에 온 미국 팀 이름을 빌린 것이었다. 이 팀에서 훗날 오 사다하루의 코치가 되는 아라카와 히로시를 만나게 된다.
(아라카와 히로시와의 만남,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진학 부분은 하위 섹션 내용과 중복되므로 생략)
2. 1. 아라카와 히로시와의 만남
중학교 2학년 때, 오 사다하루는 아라카와 히로시 코치를 만났다. 아라카와 코치의 조언에 따라 오 사다하루는 좌타자로 전향했고, 이는 그의 야구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 사다하루는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3.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시절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야구부와는 사다하루가 중학교 시절에 소년 야구팀인 ‘우마욘’ 멤버들과 함께 훈련에 참가한 적이 있다. 이때 구보타 다카유키 총감독·미야이 가쓰나리 감독과도 만났고, 중학생 답지 않은 왼손잡이 투수로 이름이 알려지게 됨에 따라 입단 권유도 있었다. 그 외에도 메이지 고등학교와 니혼 대학 제3 고등학교 등 당시 강호교에서도 권유가 있었지만 처음으로 말을 걸어 줬던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 대해 감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234] 그래서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야구부에 들어갔다.
이때 야구부에는 3학년으로 훗날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한 도쿠타케 사다유키,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한 다이고 다케오가 있었다. 입단 한 달 후인 5월에는 3학년 에이스인 오이 다카오를 대신해서 1956년 춘계 간토 대회 도쿄도 예선 결승전에 선발 등판했다. 같은 해 춘계 선발 대회(제28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에이스 나미키 데루오를 앞세운 니혼 대학 제3 고등학교를 4대 0으로 완봉승을 거뒀다. 경기 직후 글러브를 높이 던지며 기뻐했지만, 경기를 관전하러 온 형 데쓰조에게서 “너는 홈런을 맞은 상대방의 심정을 생각해 본 적이 있냐”라고 꾸중을 들었고 아버지 시후쿠도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다. ‘일본에 와서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을 잊지 말고 우쭐하거나 화를 내어 남에게 반감을 사는 일이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한다. 사다하루는 그 이후로 기쁠 때나 눈물을 흘리는 일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됐다.[235] 춘계 간토 대회 준결승에서도 다카사키 고등학교(군마현)에게 완봉승을 했고 결승전에서는 오이가 등판하여 가나가와 쇼코 고등학교(가나가와현)를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2개월 후, 하계 고시엔 대회 도쿄도 예선에 출전하여 사다하루는 좌익수 겸 예비 투수로 선발 명단에 들어갔다. 1학년이면서도 3번·도쿠타케, 4번·다이고 다음으로 타순이 5번으로 되면서 1학년 여름부터는 주전으로 들어갔다. 준결승전에서는 당시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의 최대 라이벌인 메이지 고등학교(이때 에이스 투수는 무라타 겐이치이며 훗날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해 사다하루에게서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홈런을 맞았다)를 2대 1로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후 결승전에서는 세이케이 고등학교를 13대 1로 꺾으면서 와세다 실업고등학교는 하계 고시엔 대회(제3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 사다하루는 한신 고시엔 구장의 흙을 처음으로 밟게 됐다. 1차전 상대인 신구 고등학교(와카야마현)전에서 5번·좌익수로 출전하여 팀은 순조롭게 승리한 뒤 2차전에서는 1학년임에도 처음으로 선발 기용됐다. 하지만 같은 해 춘계·하계 고시엔 대회에 연속해서 준우승을 차지한 강호교인 기후 상업고등학교(기후현)의 좌완 에이스 기요사와 다다히코와 투수전을 펼친 끝에 1대 8로 졌다. 이때 사다하루로서는 몰랐던 것이 나중에 2년 선배이자 배터리를 구성했던 다이고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경기 전날 밤에 주장인 다이고가 구보타 총감독·미야이 감독으로부터 다음 경기에 1학년인 사다하루를 선발로 기용하겠다고 통보를 받았다. “왜 3학년생인 자신이 주전 투수가 아니냐”며 불만스러운 듯한 말투로 묻자, “다음 봄부터 앞날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경기 주심을 맡은 야마모토 에이이치로(후의 일본 야구 연맹 회장)는 이 경기에서 야마모토 주심은 볼이 되는 공을 연발한 사다하루의 투구에 ‘어째서 컨트롤이 나쁠까’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236]
그해 가을부터는 1학년임에도 팀의 에이스가 됐는데 컨트롤이 나쁜 것에 대해서는 구보타·미야이 양 감독의 지도 하에 던질 때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지 않는 ‘노 와인드업 투구법’으로 제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투구에 안정감을 더했다. 때마침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 투수 돈 라센이 퍼펙트 게임을 노 와인드업에서 이루었던 것으로 사다하루의 투구법을 ‘라센 따라하기’라는 형용사가 붙었다. 사다하루는 라센의 존재를 그보다도 먼저 아라카와의 자택에서 8밀리짜리 필름 영상을 보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퍼펙트 경기로 유명세를 타기 이전에 그 투구법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고 한다.[237]
1957년 두 번째 고시엔 대회에 출전한 춘계 선발 대회(제29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준결승까지 3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뒀다. 4월 7일에 열린 결승전에서는 훗날 프로에서 팀 동료가 되는 고치 상업고등학교(고치현)의 고마쓰 도시히로와 좌완 맞대결이 성사됐다. 이 경기에서는 8회에 3점을 빼앗겨 4경기 연속 완봉승을 놓쳤지만 5대 3으로 완투 승리하여 우승을 이끌었다. 이 경기에서는 사다하루의 왼쪽 중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의 물집이 터지면서 피로 물들 정도의 공을 던진 활약을 보였다. 간토 지방에선 처음으로 선발 대회 우승기를 가져와 인기를 모았다. 2학년 때인 하계 고시엔 대회(제3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2차전 상대인 네야가와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연장 11회를 완투,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연장전에서의 노히트 노런 달성은 고시엔에서 춘계와 하계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훗날 사다하루는 “고교 2학년 시절이 투수로서의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이후 배팅은 좋아졌으나 피칭은 어디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딘가 이상해졌다”라고 말했다. 이 대회 준준결승에서 오가와 히로시, 가토 마코토를 타선의 중축으로 내세운 호세이 대학 제2 고등학교에게 1대 2로 석패했다.
2학년이던 그 해에 와세다 실업고등학교는 시즈오카 국체(제12회 국민 체육 대회) 경식 야구 고교 부문에 선출됐으나 당시 국적 규정(중화민국 국적) 때문에 출전할 수 없었다(현재 이 국적 규정은 폐지됐다). 사다하루는 자신의 저서 《회상》에서 “생애 가장 억울했던 일”이라고 말했지만 훗날 인터뷰에서는 “고교 야구 선수는 고시엔이야말로 목표이고 국민 체육 대회에는 그렇게까지 동기부여는 없었다. 지금 되돌아봐도 ‘그런 일도 있었지’ 정도였다. 고시엔 대회에서 그런 규정이 있었다면 후회해도 분통을 차마 다 풀진 못했을 테지만”이라고 말했다. 국체에서는 사다하루의 동료인 가와하라다 아키라가 등판했지만 1차전에서 구라시마 게사노리가 소속된 우에다 고등학교(나가노현)에게 졌다.
이듬해 1958년, 3학년 때인 선발 야구 대회(제30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타자로서도 맹활약하는 등 30년 만에 2경기 연속 홈런을 때려냈다(당시 한신 고시엔 구장은 럭키 존이 있었지만 고교 야구에도 나무 배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금속 배트 사용이 인정된 것은 1974년부터이다). 이 대회 8강전에서 세이세이코 고등학교(구마모토현)에 패하여 탈락했다. 3학년 여름에는 도쿄도 대회의 결승전인 메이지 고등학교와의 맞대결에서 1대 1로 맞이한 연장 12회초에 4점을 내줬고 그 뒤에 5점을 빼앗기는 등 역전 끝내기 패배를 당해 5시즌 연속 고시엔 대회 진출은 무산됐다. 이때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야구부장의 인솔로 고시엔 본대회를 향해서 오사카로 출발하는 메이지 고등학교 선수들을 와세다 실업고 야구부원 전원이 도쿄역에서 전송했다.
4.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5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오 사다하루는 초반 3년간 '삼진왕'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부진했다.[203] 그러나 1962년 아라카와 히로시 코치의 지도로 외다리 타법을 개발하면서 홈런왕, 타점왕을 석권하며 요미우리 V9 시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204]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ON포'로 불리며 막강한 타격을 과시했다.
1964년에는 당시 일본 신기록인 시즌 55홈런을 기록했고, 1973년과 1974년에는 2년 연속 타격 3관왕에 올랐다. 1977년에는 통산 756호 홈런을 기록하며 당시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고, 국민영예상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206]
1980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통산 868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203]
4. 1. 1959-61년: 침체기
오 사다하루는 소케이 실업고등학교 시절 투수와 타자를 겸업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투수로서 최고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이후 투구에 어려움을 겪으며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후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은 성적이 좋지 않아 슬럼프를 겪었다.[50][51][52][53][54]4. 2. 1962-63년: 외다리 타법으로 타격 전환


1961년 시즌 종료 후 아라카와 히로시가 요미우리의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247] 아라카와 코치의 취임은 당시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에서 에노모토 기하치를 키웠기 때문에 히로오카 다쓰로가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에게 건의하여 추천한 것이었다. 가와카미는 아라카와와 이전까지 안면이 없었지만 에노모토를 키운 아라카와의 타격 코치로서의 수완을 믿고 오 사다하루를 맡겼다.[248] 가와카미는 사다하루에 대해서 “타율 3할, 25홈런은 충분히 칠 수 있는 소질이 있다”고 기대했으며, 성적이 생각처럼 늘지 않는 이유는 연습 부족과 그로 인한 자신감 결여, 그리고 이것이 다시 연습 부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와카미가 아라카와에게 가장 강하게 기대했던 것은 사다하루에게 연습에만 전념하도록 의식 개혁을 시키는 것이었다. 1961년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 오랜만에 사다하루를 본 아라카와는 “심하다”, “뭐야, 이런 스윙에서는 피구공에도 못 맞히겠다”, “노는 것은 능숙했는지 몰라도 야구가 서툴렀다”라고 지적했다.[246] 사다하루는 울컥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카와는 동시에 “이만큼 나쁜 타격 자세로도 2할 7푼을 때려낸 적도 있으니까 역시 소질은 뛰어나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이듬해 1962년 스프링 캠프에서 아라카와는 ‘백스윙에 들어가는 타이밍이 늦으니까, 칠 때 방망이가 나오는 것도 늦는거다’라고 판단하여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 다양한 폼을 시도했다. 그 중 하나가 ‘'''외다리 타법'''’(一本足打法일본어)이었는데, 사다하루는 훗날 자신의 저서인 《더 멀리! 나의 이력서》에서 스프링 캠프 와중인 2월 12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나의 스윙은 오른발 스텝의 타이밍에 대해서 상반신의 움직임이 너무 늦었다. 이를 연동시키는 것이 외다리였다”라고 기술했다.[249] 스프링 캠프에서는 몇 차례나 시도했던 타법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서 겨우 2, 3일 정도 연습했을 뿐이었다. 사다하루는 오른쪽 다리를 올렸을 때에 손목을 돌리는 나쁜 버릇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스텝한 상태를 만들어 두면 그 나쁜 버릇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 아라카와의 목적이었다.[250] 아라카와는 1962년 1월부터 훗날 ‘아라카와 노트’라 불린 코치 일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첫 날인 1월 20일 항목에서 당시 사다하루의 배팅에 대해 “방망이와 몸이 제각각”, “티배팅 할 때 팔만 쓰는 방망이 스윙에서 방망이 밑에서부터 나온다”라고 기술했다.[251]
1962년 시즌 개막전(4월 7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가와카미는 전년도 일본 시리즈에 이어 공식전에선 처음으로 22세인 사다하루를 4번 타자로 기용했다. 나가시마 시게오가 출루하고 사다하루의 장타가 득점으로 연결되기를 기대했지만, 개막 후 3개월 동안 홈런은 불과 9개에 그치는 등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고, 특히 6월 후반에는 극도의 부진에 빠졌다. 자신감을 잃은 사다하루는 아라카와와의 연습에도 열중하지 않았다고 한다. 팀도 흐름을 타지 못하고 2위와 3위를 오갈 정도로 침체된 상태였다. 주력 타자인 나가시마가 부진했고, 투수진도 그 해에 입단한 신인이자 개막전 선발 투수였던 조노우치 구니오가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보였으며, 작년 1961년에 팀내 최다승을 기록했던 나카무라 미노루도 부진했다. 2년 전에 신인으로서 최다승을 기록했던 호리모토 리쓰오도 예전의 힘을 보여주지 못했고, 에이스였던 후지타 모토시는 전성기가 지났으며, 전년도에 고시엔 대회를 휩쓴 시바타 이사오도 기대 이하(후에 야수로 전향)의 활약을 보였다. 내야에서는 유격수 히로오카 다쓰로는 나아지고 있었지만 쓰치야가 빠지면서 시오바라 아키라, 후지모토 신, 스도 유타카 등이 2루를 지켰지만 눈에 띈 활약은 없었다. 외야에서는 요나미네를 주니치에 방출하고 미야모토 도시오, 사카자키, 구니마쓰, 그리고 포수에서 외야수로 변경된 후지오가 있었다. 그러나 사카자키를 5번 타자로 고정했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 후지오는 몸에 맞는 볼 부상에 시달렸고 미야모토 역시 승부엔 강하지만 부진에 허덕이는 등 야수진들의 침체가 계속된 와중에 중심 타자는 나가시마 혼자였다.
6월 30일 다이요 웨일스전(14차전, 가와사키 구장)에서(외다리 타법으로 치기 전날 밤 경기) 가와카미는 사다하루를 3번 타자로 기용했지만 2타수 2삼진 1볼넷에 그쳤고, 팀도 이틀 간격의 좌완 스즈키 다카시에게 눌려 안타는 스도의 텍사스 안타 1개, 볼넷은 2개로 완봉패를 당했다. 6개의 피안타로 완투하고 있던 후지타를 지원하지 못하고 9회말 다이요의 선두 타자 모리 도루의 홈런으로 0대 1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이로써 사다하루는 시즌 개막 이후부터 6월 30일까지 타율 2할 5푼 9리, 홈런은 겨우 9개였다.
경기 종료 후 사다하루는 가와사키 구장에서 아라카와 코치의 차에 동승해 아라카와의 자택으로 가서 특훈을 받았다. 사다하루는 훗날 “상대 투수가 던진 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막히던 나쁜 습관이 있어서 아라카와 코치로부터 ‘아무튼 내일 경기에서는 투수가 다리를 들면 이쪽도 다리를 들고, 시동을 빠르게 걸어 보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라고 말했다.[252] ‘아라카와 노트’의 6월 30일 항목에서는 “지금까지도 일정한 포인트가 잡히지 않는다. 상체로만 휘두르고 있으니까… 그 타이밍을 놓쳐 헛스윙한다. 팔로 휘두르지 않고 몸전체로 휘두르거나 아니면 무릎을 사용한다거나 어느 쪽으로든 방망이를 휘두르는게 좋다”라고 적었다.[253]
그 다음날인 1962년 7월 1일, 다이요 웨일스와의 더블헤더(15·16차전, 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전날 밤부터 당일 낮까지 우천의 영향으로 경기 개시가 30분 지체됐다. 이날 요미우리는 경기 시작 전 타격 연습을 10분간 연장했고, 첫 번째 경기에서 가와카미는 사다하루를 1번 타자로 기용했다. 이날 경기를 앞둔 코칭 스태프 회의에서 벳쇼 다케히코 수석 코치가 화풀이를 하듯 아라카와에게 “사다하루가 못 치니까 이기지 못한다”라고 말했고, 아라카와도 화를 내며 “나는 사다하루에게 3관왕을 시켜주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지도하고 있다. 홈런만이라면 언제라도 때리게 해준다”라고 맞받아쳤다(아라카와는 훗날 ‘3관왕을 시킨다’고 말한 것은 허풍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벳쇼는 “그 홈런만이라도 좋으니까 치게 하라”고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난감해하며 화가 난 아라카와는 안색을 바꾸고 방을 뛰쳐나간 뒤 사다하루를 잡고선 “오늘부턴 외다리 타격을 하되 삼진을 두려워 하지마라”고 명령했다.[254][255]
‘아라카와 노트’ 7월 1일 항목에서는 이 경기 전에 가진 회의에서 ‘3번 사다하루·4번 나가시마·5번 사카자키’의 클린업 타자가 못 치면 우승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나눴고, 특히 사다하루의 배팅은 지금 이대로는 장거리 타자도 3할 타자도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려 폼이 경직되고 스텝을 밟을 때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처지거나 어깨가 너무 들어간다는 등의 문제점이 나왔다고 한다.[253]
사다하루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경기에서 사다하루는 처음으로 외다리 타법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백네트 뒤에 있던 취재진들은 이 특이한 타법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음날 신문에서 외다리 타법에 관한 기사는 전혀 없었다.[257]
사다하루는 다이요 선발이자 신인이던 우완 이나가와 마코토로부터 1회초 첫 번째 타석에 2스트라이크 노 볼에서의 3구째 바깥쪽 커브를 우전 안타, 3회초 두 번째 타석에서 초구를 몸쪽 낮은 직구를 우측 관중석에 선제 10호 솔로 홈런(통산 47호, 16경기 68타석째)을 때려냈다. 6회초 네 번째 타석에서는 다이요의 세 번째 투수인 좌완 곤도 마사토시로부터 2사 만루 2-3 풀카운트에서 커브를 받아쳐 중견수 왼쪽으로 향하는 안타를 기록해 누상에 있던 주자를 모두 불러 들이는 활약을 보여 5타수 3안타 4타점을 기록했다. 경기에서 사다하루(3회초 솔로 홈런), 모리 마사히코(4회초 솔로 홈런), 시오바라 아키라(5회초 솔로 홈런), 후지모토 신(8회초 3점 홈런) 등의 타자들이 총 4개 홈런을 포함한 13안타의 맹공과 나카무라 미노루 투수의 2루를 허용하지 않는 3피안타 완봉승에 힘입어 요미우리는 10대 0으로 승리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도 사다하루는 1번 타자로 기용돼 4타수 무안타였지만 2회에 유격수 겸 8번 타자인 후지모토가 1사 만루 상황에서 시마다 겐타로로부터 우익수 앞에 선제 2점 적시타를 날렸고, 7회에 미야모토 도시오가 아키야마 노보루를 상대로 좌익 폴대에 솔로 홈런을 날렸다. 투수진은 미야타 유키노리(3이닝)에서 호리우치 쇼(6이닝)의 계투로 프랜시스 아그윌리의 3피안타만, 7회 우익 폴대에 솔로 홈런의 실점으로만 막아내면서 끝까지 지킨 끝에 팀은 3대 1로 연승했다. ‘아라카와 노트’에는 이날 “지금까지의 타이밍을 잡는 법을 더 크게 할 수 있도록 사다하루에게 가르쳤는데 (가와카미)감독이 ‘이거라면 칠 수 있어, 정말 믿음직하다’라고 말해줘서 좀 안심했다… 이 타이밍을 잡는 법은 예전부터 벳토와 오시타 등 여러 유명 선수들이 했던 방법이다. 정말로 살아난 것 같았고 큰 도움이 됐다”라고 기술했다.[258] 후에 아라카와는 “그날 안타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외다리 타법은 그만뒀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어서 단 하루 만에 사다하루의 운명이 좌우된 것이다. 다만 이 때의 사다하루는 타격폼을 바꾸는 것이 드물지 않아서 7월 1일 경기에 있어서 타격폼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튿날 신문에는 요미우리 구단의 모회사인 요미우리 신문을 비롯해서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7월에 들어가면서 사다하루가 연거푸 2개, 3개로 홈런 페이스가 올라간 점에서 “그러고 보니 이상한 타법을 하고 있다”라며 떠들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즌 개막 후 4월부터 6월까지 9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사다하루는 7월 한 달에만 10개의 홈런을 날리면서 단번에 홈런 양산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7월 1일부터 시즌 종료까지 사다하루는 타율 2할 8푼 2리, 홈런은 29개였다.
사다하루 자신도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오자, 외다리 타법에 진지하게 임하며 연습에 들어갔다. 이 때의 연습의 가혹함, 연습량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서 ‘연습에 사용한 방의 다다미가 닳아서 줄어들고 끝이 잘게 갈라졌다’[259], ‘연습 이튿날 아침에 얼굴을 씻으려고 하면 팔을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방망이를 휘두르는 바람에 손과 발에서 피가 났다’[260]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검도가인 하가 준이치의 문하에 제자로 들어가 앉은 채로 칼을 뽑는 것을 배움과 동시에 가타나에 의한 거동의 지도를 받았다.[261]
특히 유명한 에피소드로서 ‘천장에서 늘어뜨린 실의 끝에 붙인 종이를 가타나로 자른다’라는 연습이 있었다. 이것은 외다리 타법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외다리 타법은 투구 타이밍을 늦추면 통용되지 않는 약점이 있었다. 7월 1일에 외다리 타법을 보여줬지만 그 후에 고쿠테쓰의 가네다 마사이치에게서 이같은 약점을 간파 당해 너무나도 빨리 벽에 부딪히게 됐다. 예를 들면 가네다는 직구를 던지는 시늉을 해서 느린 공을 던지는 등으로 타격 타이밍을 비켜가는 투구를 보였던 것이다. 아라카와도 그 약점을 파악하고 있어서 약점이 간파되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거기서 외다리로 서서 교묘하게 투구를 해도 대응할 수 있는 훈련을 사다하루에게 지도했다. 이것은 기술로서 가타나로 종이를 자를 정도로 타격을 예민하게 한다는 이상으로 타석에서의 집중력을 높이는 것으로서 불필요한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이라는 정신 단련의 목적도 있었다.
당시 팀 동료였던 히로오카, 후지타는 사다하루의 연습을 지켜본 것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로오카:
후지타:
난카이 호크스 시절의 노무라 가쓰야도 자신의 저서 《교진군론》에서 사다하루의 연습의 굉장함을 회상했다. 어느 날 사다하루와 노무라가 각각 친구와 함께 긴자의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밤 10시가 되자 사다하루가 “노무 상(ノムさん일본어, 노무라의 애칭), 미안하지만 아라카와 코치랑 연습을 하기로 해서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노무라가 만류해도 사다하루는 연습을 하러 갔다. 그 때 노무라는 “아… 언젠가 저 녀석이 날 뛰어 넘겠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 후 노무라가 아라카와 코치에게 부탁하여 사다하루의 연습을 견학해 본 결과, 단지 ‘대단하다’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고 사다하루에게 도저히 건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사다하루의 휘두르는 방망이에 비교하면 내 것은 그냥 놀이였을 뿐이다”, “사다하루가 그토록 이렇게 연습을 열심히 하니까 세계 기록을 세워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라고 밝혔다. 더욱이 노무라는 사다하루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해에 38홈런과 85타점을 기록하여 처음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획득했다. 이후 사다하루는 은퇴할 때까지 외다리 타법을 고수하면서 이 타법으로 82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77년 가지와라 잇키와의 대담[262]에서는 ‘두 다리라면 타율 4할도 노릴 수 있다’라고 말한 가지와라에게 ‘한 다리로 안되면 은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신인 시절인 1959년 시즌에는 사다하루를 잘 속였던 곤도 히로시도 외다리 타법이 된 사다하루의 변화에 놀란 반응을 보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곤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훗날 이 타법으로 홈런 기록을 달성하면서 미국 언론에서는 ‘홍학 타법’(フラミンゴ打法일본어)이라고 불렀다. 메이저 리거 중에서는 ‘플라밍고 사다하루 오’(フラミンゴ・サダハル・オー일본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듬해 1963년에는 처음으로 타율 3할과 40홈런을 기록하여 2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다. 나가시마와의 콤비를 ‘'''ON포'''’라고 불리기 시작하면서 이들 간판 선수의 대활약으로 이 시즌에는 2년 만에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사다하루는 그해 처음으로 타율 3할, 홈런 40개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다. 나가시마는 그 해에 타격왕과 타점왕을 연거푸 차지하며 시즌 종반까지 홈런 부문에서도 1위를 기록하여 한때는 타격 3관왕이라는 소리도 나왔지만 볼넷으로 인한 부상으로 홈런은 37개로 끝났다. 또한 4월 25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역대 23번째의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지만 당시 사이클링 히트의 개념은 알려지지 않았다(일본에서 사이클링 히트가 기록의 대상인 것으로 알려진 것은 2년 후인 1965년 역대 24번째의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한큐 브레이브스 소속이던 다릴 스펜서의 발언이 계기가 됐다).
4. 3. 1964년: 시즌 55호 홈런 달성
오 사다하루는 1963년에 이어 1964년에도 홈런 신기록을 세우며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자리매김했다.1964년, 오 사다하루는 5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했다.[262] 이는 종전 기록을 크게 뛰어넘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오 사다하루의 홈런 페이스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특히, 상대 팀들이 오 사다하루를 막기 위해 특별한 수비 시프트인 '오 시프트'를 가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홈런을 양산해냈다.
하지만 오 사다하루는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위타자 경쟁에서는 에토 신이치에게 밀려 타격 3관왕 달성에는 실패했다.
4. 4. 1965-67년: 타격 3관왕 도전
오 사다하루는 1964년에 5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대기록을 세웠지만, 이 시즌 오프부터 시범 경기까지 3개월 동안 두 다리 타법으로 돌아갔던 경험을 통해 외다리 타법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재확인했다.[268]1964년 시즌, 오 사다하루는 도쿄 올림픽 개최로 인해 3월 20일에 시즌 개막을 맞이했다. 고쿠테쓰와의 개막전에서 가네다 마사이치를 상대로 3회말 2사 1루 상황에서 우측 장외로 2점 홈런(통산 116호)을 날렸다. 이 홈런은 비거리가 151m로 추정될 정도로 엄청났다.[269] 가네다는 이 홈런에 대해 “놓치면 볼이었고 오 사다하루에게 삼진을 빼앗을 수 있는 절대적인 공”이었다고 평가했다.
5월 3일, 한신 타이거스전(7차전)에서는 사상 최초로 한 경기 4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회 | 투수 | 상황 | 구종 | 결과 | 비고 |
---|---|---|---|---|---|
1회 | 오타 고이치 | 1사 1루 | 커브 | 우측 장외 2점 홈런(14호) | 약 150m |
4회 | 오타 고이치 | 선두 타자 | 직구 | 솔로 홈런(15호) | |
6회 | 와코 도모오 | 선두 타자 | 커브 | 솔로 홈런(16호) | |
7회 | 혼마 마사루 | 1사 2루 | 직구 | 2점 홈런(17호) |
모두 130m 이상의 대형 홈런이었다.
5월 5일, 히로시마와의 더블헤더 2차전(8차전)에서는 시라이시 가쓰미 감독이 7회말 1사 상황에서 ‘오 시프트’(王シフト일본어, 시라이시 시프트(白石シフト일본어))라는 수비 체제를 가동했지만, 오 사다하루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가리 미치오에게서 18호 홈런(통산 133호)을 때려냈다.
7월 19일, 고쿠테쓰와의 경기(21차전)에서는 7회에 한자와 시로에게서 백스크린을 넘기는 150m급 37호 2점 홈런(통산 152호)을 기록했다. 이는 고라쿠엔 구장 개장 이래 최초의 백스크린을 넘긴 홈런이었다.
9월 6일, 다이요와의 더블헤더 1차전(24차전)에서 1회에 스즈키 다카시에게서 52호 솔로 홈런, 6회에 미네 구니야스에게서 53호 홈런을 기록하며 전년도 노무라 가쓰야의 시즌 홈런 기록(52개)을 넘어섰다.
9월 21일, 히로시마와의 28차전에서 6회에 아니야 소하치에게서 54호 2점 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53호 홈런 이후 37타석 만의 홈런이었다.
9월 23일, 다이요와의 최종전인 더블헤더 2차전(28차전)에서 5회말에 사사키 기치로에게서 시즌 55호 홈런(통산 170호)을 기록했다. 이는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깨지지 않는 일본 프로 야구 기록으로 남았다.
오 사다하루는 55개의 홈런 중 24개가 비거리 400피트(약 122m) 이상으로, 메이저 리그 구장에서도 충분히 중간까지 뻗는 대형 홈런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 해 센트럴 리그 홈런 부문 2위는 36개의 마이크 크레스닉(당시 다이요)이었고, 양대 리그 합쳐 홈런 2위는 41개를 기록한 노무라 가쓰야(당시 난카이)였다.
1964년 시즌, 요미우리는 우승하지 못했지만 오 사다하루는 시즌 MVP로 선정됐다. 55홈런은 2022년 무라카미 무네타카에 의해[270] 경신(56홈런)되기 전까지 일본 출신 선수에 의한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271]
‘시즌 55홈런’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오 사다하루는 외다리 타법이야말로 자신의 타격 스타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268]
오 사다하루는 ‘나는 타율을 신경쓰는 타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상대 배터리의 경계로 볼넷과 고의사구가 늘어나면서 타율도 높아졌다. 1964년에는 에토 신이치와 마지막까지 수위 타자 타이틀 경쟁을 벌였다. 이 해에 통산 2번째 타점왕을 획득했지만, 수위 타자 경쟁에서는 3리 차이로 에토 신이치에게 밀려 3관왕은 놓쳤다.
4. 5. 1968-70년: 라이벌 대결
1968년에는 개인 통산 세 번째이자 3년 만에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1969년과 1970년에도 2년 연속으로 수위 타자를 차지하여 3년 연속 수위 타자가 되었다.[79]4. 6. 1971-74년: 슬럼프, 그리고 타격 3관왕
1968년, 처음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고 1970년까지 3년 연속 수위 타자를 차지했다. 모두 홈런왕을 차지했지만 타점왕은 3년 연속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밀려 3관왕은 달성하지 못했다. 1969년과 1970년에는 2년 연속 MVP를 차지하여, MVP 5회를 기록하며 나가시마 시게오(4회)를 넘어섰다.4. 7. 1975-76년: 홈런 기록에의 도전
王貞治일본어는 1974년에 이어 1975년에도 타율 0.332, 49홈런, 107타점으로 2년 연속 3관왕을 달성했다.[273] 그러나 당시 요미우리는 근소한 차이의 경기에 약해 王貞治일본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우승 경쟁에서 고전했고, 1974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에게 센트럴 리그 10연패를 저지당했다.1975년, 王貞治일본어는 나가시마 시게오의 은퇴와 상대 팀들의 집중 견제에 시달렸다. 특히 1973년 볼넷 124개(고의 사구 38개), 1974년 볼넷 158개(고의 사구 45개)라는 기록은 타 구단의 경계가 王貞治일본어에게 집중되었음을 보여준다.[273] 1974년에는 볼넷, 고의 사구, 출루수 294, 장타율 0.761(일본 프로 야구 시즌 최고 기록)을 기록했으며, 비공식 기록으로는 출루율 0.532, OPS 1.293, 홈런율 7.86, RC27 14.9825(시즌 최고 기록)를 기록했다. 결국 요미우리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76년, 요미우리는 하리모토 이사오를 영입하여 王貞治일본어와 함께 'OH포'를 구축했다. 王貞治일본어는 그해 통산 700홈런을 돌파하고, 베이브 루스의 714홈런 기록을 넘어섰으며, 14번째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4. 8. 1977년: 756호 홈런
1977년 9월 3일, 오 사다하루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 스즈키 야스지로 투수로부터 좌측 담장을 넘기는 2점 홈런을 쳐내며, 행크 에런의 종전 기록(755개)을 넘어선 세계 신기록(당시 기준)인 통산 756호 홈런을 달성했다.[3] 이 홈런으로 오 사다하루는 세계적인 홈런왕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일본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려 국민영예상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했다.[3] 오 사다하루는 홈런을 맞은 투수 스즈키 야스지로를 격려하기도 했다.[3]4. 9. 1978-80년: 현역 말기
1978년에는 타격 부진을 겪었고, 1979년에는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지만 3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했다.[274] 1980년에는 체력이 더욱 떨어지면서 그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했다.[275] 통산 868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고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276] 은퇴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였던 호리우치 쓰네오와 대결했고, 결과는 삼진이었다.5. 감독 시절
오 사다하루는 현역 은퇴 후 지도자로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감독을 역임했다.[205]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요미우리 조감독을,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요미우리 감독을 맡아 1987년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는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을 맡아 퍼시픽 리그 우승 3회(1999년, 2000년, 2003년), 일본 시리즈 우승 2회(1999년, 2003년)를 달성했다.
2006년에는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205] 2008년 시즌 종료와 동시에 소프트뱅크 감독직에서 물러나면서 소프트뱅크 구단 최고 고문으로 발탁되었고, 2009년 1월 1일부터는 이사회 회장으로 있다.[205] 2009년 제2회 대회에서는 감독 자문역, 2013년 제3회 대회에서는 특별 고문을 맡았다.[207]
요미우리 감독 퇴임 이듬해인 1989년부터 요미우리 시절 등번호 '1'번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고, 다이에·소프트뱅크 감독 시절 등번호 '89'번은 감독 퇴임 이듬해 2009년부터 준영구 결번으로 취급되고 있다.[205]
5. 1. 요미우리 조감독과 감독 시절
1980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오 사다하루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조감독으로 취임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후지타 모토시 감독을 보좌하며 팀을 이끌었다.1984년,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뒤를 이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감독 첫 해, 팀은 센트럴 리그 2위를 기록했다.[285] 1987년에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286]
198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시즌 초반부터 부진을 겪었고, 결국 오 사다하루는 시즌 중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는 사실상 해임이었다.[287]
5. 2. 다이에·소프트뱅크 감독 시절
1995년, 오 사다하루는 네모토 리쿠오의 권유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후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개명)의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오 사다하루는 호크스를 이끌고 1999년, 2000년, 2003년에 퍼시픽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99년과 2003년에는 일본 시리즈에서도 우승을 거머쥐었다.[6] 특히 2000년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이끄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이른바 'ON 감독 대결'이 성사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그러나 다이에 감독 시절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1999년 9월 26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패배한 뒤 숙소로 돌아가던 중, 분노한 팬이 던진 날계란에 맞는 이른바 '날계란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팬들의 과격한 비난 여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2006년, 오 사다하루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초대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쿠바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7] 같은 해 7월 5일, 위 종양으로 인해 무기한 휴식을 선언했으며,[7] 7월 17일에는 위와 주변 림프절 제거를 위한 복강경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종양은 암으로 확인되었으나 초기 단계에서 발견되었다.[8] 이후 호크스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2008 시즌을 끝으로 체력적인 문제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호크스의 프런트 오피스 역할을 맡게 되었다.[6]
6. 감독 퇴임 후
NHK 야구 해설자를 맡았고 세이부, 야쿠르트, 닛폰햄, 요코하마 등 여러 구단으로부터 감독직 제의를 받았지만 세계 소년 야구 추진 재단의 업무를 이유로 거절했다.[291][292] 2009년 1월 1일부터 소프트뱅크 이사회 회장으로 있다. 2006년에는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9년 제2회 대회에서는 감독 자문역, 2013년 제3회 대회에서는 특별 고문[207]을 맡았다. 현재 소프트뱅크 구단 대표이사 회장 겸 종신 GM, 일본 프로 야구 조직(NPB) 커미셔너 특별 고문, 요미우리 자이언츠 OB회 고문(2014년까지 회장),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고문, 세계 소년 야구 대회를 주최하는 세계 소년 야구 추진 재단 이사장, 외무성에서 위촉된 야구 특별 대사, 규슈 국립박물관 평의원 등을 맡고 있다.
7. 선수·감독으로서의 특징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선수 겸임 코치, 1981년부터 3년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수석 코치를 맡았으며, 감독 후지타 모토시, 수석코치 마키노 시게루와의 트로이카 체제로 1981년 일본 시리즈 우승, 1983년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83년 11월 8일 후지타로부터 감독직을 이어받아 요미우리 자이언츠 제11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전년도 리그 우승팀을 물려받았음에도 3년간 우승에 실패하여 팬들과 평론가들로부터 감독으로서의 자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1985년에는 자신의 홈런 기록에 근접한 랜디 바스에 대한 고의사구를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감독 취임 4년째인 1987년, 주포 하라 다쓰노리가 개막 직전 근육 파열을 일으켜 개막전에 출장하지 못했고,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주니치 드래건스가 영입하는 등 팀은 전에 없던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주니치와의 개막전에서 니시모토 다케시의 완봉승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워렌 크로마티를 4번 타자로 기용하고, 마무리 투수로 전환한 가토리 요시타카와 2년 차 19세의 에이스 구와타 마스미, 부활한 에가와 스구루를 중심으로 젊은 투수진이 약진했다. 공격 면에서도 시노즈카 도시오, 요시무라 사다아키, 나카하타 기요시, 복귀한 하라와 크로마티 등 5명이 3할 타율을 기록하며 강력한 타선을 구축하여 독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87년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에게 2승 4패로 패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은 놓쳤고, '자이언츠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높지 않았다.
1988년에는 도쿄 돔이 홈구장이 되었다. 크로마티, 요시무라, 전년도 MVP 야마쿠라 등의 부상 이탈과 에가와 은퇴로 인한 투수진 쇠퇴로 인해 우승팀 주니치에게 12경기 차로 뒤진 2위에 그쳤다. 감독 5년간 리그 우승 1회를 포함하여 A클래스를 유지했지만, 프런트로부터 책임을 추궁받는 형태로 9월 29일에 사임(사실상 해임)이 발표되었고, 후지타가 다시 지휘봉을 이어받았다. 등번호 1은 선수 시절의 공적을 기려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1991년 이후에는 일본방송협회(NHK)의 야구 해설자를 맡았다. 세이부, 야쿠르트, 니혼햄, 요코하마 등 여러 구단으로부터 감독 취임 제의를 받았지만 세계소년야구추진재단의 일을 이유로 거절했다.[109][110]
1994년 10월 12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요미우리 감독직을 용퇴하고 나서 야구 유니폼을 입지 않게 되자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이 시기에 네모토 리쿠오로부터 권유를 받은 것이 계기라고 밝혔다.[293] 1993년에도 네모토로부터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요청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294] 그 해 다이에는 4위에 머물렀지만 승수와 패전 수가 9로 약진했고, 1995년에는 케빈 미첼을 비롯해 세이부 라이온스로부터 구도 기미야스, 이시게 히로미치가 입단하는 등 전력에 대한 기대는 컸지만 주력 선수들의 잇단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결국 5위에 그쳤다.
1996년 5월 9일, 닛폰 생명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 버펄로스전에서 당시 최하위에 머물고 있는 다이에팬으로부터 오 사다하루와 구단 대표 세토야마 류조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현수막이 내걸렸다. 경기는 1회 아키야마 고지의 홈런으로 선취점을 따냈지만 선발 요시다 도요히코가 역전을 허용했고, 9회초 요시나가 고이치로의 홈런으로 1점 차까지 따라갔지만 2대 3으로 긴테쓰에게 패했다. 그 후 구장에서 나온 선수들이 탄 버스에 ‘너희들 프로가 맞냐?’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연쇄적으로 계란이 투척되는 '''날계란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295] 이 때 사다하루는 “우리가 계란을 되던지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이것을 팬들의 의견이라 받아들인다면 이기는 길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요미우리 감독 사임 당시와는 달리, ‘팀의 팬으로부터’ 무정한 처우를 당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사다하루는 “나는 그만두지 않는다”, “우리는 이길 수 밖에 없다. 이기면 팬들도 박수로 맞이해준다”라고 발언하면서 계속 참았다.
1998년에는 예전 팀 동료였던 구로에 유키노부를 수석코치로 맞이하여 정규 시즌 남은 5경기까지 우승 가능성을 남기는 분투를 보였다. 그 5경기를 전패했지만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동률로 21년 만에 A클래스(1~3위)에 해당되는 3위를 차지했다. 1998년 시즌 종료 후 오바나 다카오 투수 코치의 초빙으로 투수진을 정비했고, 1999년 개막을 앞두고 네모토 구단 사장으로부터 “너희들 뭘 그렇게 경계하고 있어? 이 사람은 지금이야 ‘세계의 오’(世界の王일본어)라고 불렸지만 옛날엔 라면 가게의 아들이었거든. 너희들하고 다를게 전혀 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임해달라”라는 말에 사다하루와 코치진, 선수 사이의 틈이 메워졌다고 전해진다.[296][297] 사다하루도 “선수라는 건 상상 이상으로 나의 안색을 살핀다. 그래서 나도 험한 표정을 되도록 하지 않고 선수들이 실패를 두려워 않고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이라고 선수들에게 다가가는 발언을 했다.
감독 경험을 쌓은 힘이 결실을 맺어 1999년에는 구단 창설 11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우승하며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양대 리그 우승 감독은 미하라 오사무, 미즈하라 시게루, 히로오카 다쓰로, 노무라 가쓰야에 이어 역대 5번째이다. 이듬해 2000년에는 리그 우승을 이끌어 2연패를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에게 패했다. 3년 뒤인 2003년에는 리그 우승과 동시에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한 시즌의 상대 팀 감독은 모두 호시노 센이치였다).
2000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을 맡는 요미우리와의 일명 ‘'''ON 감독 대결'''’로 주목을 받았다.
2001년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의 터피 로즈가 사다하루의 현역 시절에 맞먹는 시즌 최다 홈런 기록에 육박하여 사다하루는 경기 전의 연습 때 직접 로즈에게 다가가 홈런 신기록을 갈아치워 줄 것을 희망한다는 말을 걸었다. 로즈는 기록 경신에 도전했지만 다이에는 코치의 주도에 의해 로즈를 고의 사구하여 저지, 이를 말리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2년 드래프트에서 스캔들이 발각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지명을 회피당한 다다노 가즈히토의 사건과 관련된 사실을 알고도 획득하려고 하여 고쓰카 다케시 구단 사장도 ‘GO’사인을 내보냈지만 구단주인 나카우치 다다시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영입은 무산됐다. 그 해에는 세이부 라이온스의 알렉스 카브레라가 홈런 기록에 올랐지만 다이에는 고의 사구 공세를 펼쳤다.[298]
2003년에는 전년도에 아키야마가 은퇴한 것과 와카타베 겐이치의 이적이 있었고 개막 직전에 ‘정신적 지주’이자 주포였던 고쿠보 히로키가 큰 부상을 당하는 등 시즌이 절망적일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왔지만 전년도 드래프트 자유 획득 범위로 입단한 와다 쓰요시, 아라카키 나기사 등 두 명의 투수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 사이토 가즈미의 시즌 20승이나 무라마쓰 아리히토, 가와사키 무네노리의 타격이 개선되는 등 전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타격 코치에는 아라이 히로마사를 초빙했다.[299]
2004년 6월 7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했다. 2005년 1월 28일, 소프트뱅크에 정식으로 양도한 것에 따라 팀 이름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변경됨과 동시에 부사장 겸 총감독으로 취임(감독도 그대로 겸임)하였다. 지휘를 잡은 호크스는 2003년부터 3년 연속으로 정규 시즌 1위를 기록했지만 플레이오프 제도가 도입된 2004년과 2005년에 2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제2 스테이지에서 최종전까지 진출했는데도 불구하고 2004년에는 세이부에게, 2005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에게 리그 우승을 내줬다.
2005년 시즌 종료 후 오바나 다카오가 퇴단했고 후임 투수 코치로는 2군 투수 코치였던 스기모토 다다시가 부임했다.[300]
- -|]]|섬네일|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감독 시절(2006년)]]
2005년 10월 10일,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여 2006년 3월 21일에 열린 결승전에서 쿠바를 10대 6으로 누르고 일본을 초대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12월 12일, 마이니치 스포츠인상 ‘감동상’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과 함께 수상했다. 12월 20일, 일본 프로 스포츠 협회로부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로서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개인으로서 일본 프로 스포츠 특별상도 동시에 수상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기간 중 시범 경기 감독 대행은 수석 코치 겸 내야 수비 주루 코치인 모리와키 히로시가 맡았다.
2006년 7월 5일, 세이부와의 경기가 끝난 후에 기자회견을 열어 위에 종양이 생긴 사실을 밝혔다. 다음날부터 위암 치료를 위해 팀을 떠나 휴양에 들어갔다. 감독 대행은 모리와키가 맡았다. 7월 18일,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서 복강경하에 위전적 Roux en Y법 재건과 2군까지의 림프절 제거가 이뤄졌다. 8월 2일에 퇴원하여 “여러분의 격려에 힘입어서 살 수 있었다”라는 소감을 말했다. 9월 29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호크스 2006년 최종전 행사에 참석해 85일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2007년 봄 미야자키 스프링 캠프부터 감독에 복귀했다. 2007년 시즌 성적은 3위였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제1 스테이지에서 패했다. 경기 종료 후 선수들에게 “다음 시즌을 마지막 시즌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성적에 따라 2008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날 뜻을 시사했다.
2008년 5월 6일, 천수이볜 총통으로부터 무임소 대사로 임명됐다.[301] 2001년에도 임명된 바 있다.
2008년 6월 6일, 교류전에서 현역 시절 일본 시리즈에서 5차례나 맞붙었던 ‘난카이 호크스’의 복각 유니폼을 입고 팀을 지휘했다. 7월 8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세이부의 포수 호소카와 도루의 블로킹을 주루 방해라고 주장하며 약 5분가량 심판단에게 항의했다. 사다하루는 “저런 거친 플레이는 안 된다. 전 세계에 저 영상을 보여줘도 분이 안 풀릴 정도다”라고 격노했지만 2007년 세이부와의 경기에서도 다무라 히토시가 마찬가지로 홈에서의 블로킹을 피해 빠져나가다가 부상을 당했던 일이 있는 만큼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7월 26일, 일본 프로 야구 역대 8번째로 감독 통산 1300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강행했던 가와사키 무네노리가 피로골절을 당하는 등 선수들의 부상이 잇따랐고, 팀 평균 자책점은 5위, 구원 투수진의 평균 자책점도 12개 구단 중 최하위인 4.42를 기록했다. 시즌 막판인 9월과 10월에는 27경기 중 21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겨 12년 만에 최하위(6위)로 떨어졌다.
9월 23일, 경기 종료 후 기자회견을 열어 체력적인 문제를 주된 이유로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0월 7일, 시즌 최종전인 K스타 미야기에서의 라쿠텐전이 마지막 경기가 됐다. 경기 종료 후에는 적지에도 불구하고 사다하루의 은퇴식이 열리면서 현역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라쿠텐의 노무라 가쓰야 감독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2507경기에 출전하여 1315승(일본 프로 야구 역대 8위) 74무 1118패를 기록했다. 승리 내역을 보면 요미우리 시절에는 347승, 다이에·소프트뱅크 시절에는 968승이다.[303]
- -|]]|섬네일|세계소년야구추진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타이베이 국제 꽃 박람회’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2011년)
- -|]]|섬네일|도쿄 돔에서 나가시마 시게오 및 마쓰이 히데키의 국민영예상 시상식에서(2013년 5월 5일 촬영)
- -|]]|섬네일|타이베이 돔에서 개최된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의 시구자로 등장했을 때의 모습(2023년 12월 2일)
감독 퇴임 후인 2008년 10월 8일 소프트뱅크 구단 대표이사 최고 고문으로 취임, 2009년 1월 1일부터 구단 대표이사 회장으로 직책이 변경됐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에서는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 자문역을 맡았다. 마쓰다 노부히로가 개막전에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골절로 전치 2개월 진단을 받아 팀 편성을 재고해야 했는데, 구단 회장인 사다하루가 “개막 엔트리에 누락된 선수보다도 일본 야구계를 알고 있는 외국인 선수 쪽이 좋다”라고 제언해 호세 오티스를 영입했다.[304] 오티스는 시즌 도중에 입단하면서 타율 2할 8푼 2리, 20홈런, 74타점 등의 결과를 남겼다.
2008년 12월 7일, 나가시마 시게오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교진군 OB회 회장으로 선출됐고, 2009년 12월 13일에는 가네다 마사이치의 후임으로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2009년 9월 21일, 도쿄도내 병원에서 장폐색, 담낭 적출 수술을 받았다.
2010년 1월 5일, 소프트뱅크 구단에 신설된 ‘편성 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취임(위원장은 가사이 가즈히코 구단주 대행)하여 구단 편성과 관련한 총지휘를 맡게 됐다. 같은 해 7월 3일, 후쿠오카 돔내에 사다하루의 공적을 기리는 박물관인 ‘오 사다하루 베이스볼 뮤지엄’이 개관됐고, 2010년 10월 26일에는 다년간 야구계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305][306]
2012년 5월 22일, 자신의 출신지인 도쿄도 스미다구에 위치한 도쿄 스카이트리 개장식에 참석하여 테이프 커팅과 함께 인사를 했다.[307]
2013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을 때 과거 랜디 바스, 터피 로즈, 알렉스 카브레라 등의 고의사구건이 언론에 보도됐지만[308] 남은 경기 수가 많은 점도 있어 56호 홈런을 달성하여 최종적으로 60홈런이라는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달성했다.
2015년 1월, 중화민국의 야구 전당·중화민국 봉구명인당에 선출돼[309] 그해 11월, 중화민국에서 시상식이 거행됐다.[310]
2016년 11월, 중화민국에서 열린 중화민국 OB와의 경기에 출전했다.[311][312][313]
2018년 5월 30일, 일반인 여성(당시 60세)과 재혼하여 이틀 후인 6월 1일에 언론 보도가 나왔다.[314]
2021년 8월 7일,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정식 경기로 복귀한 야구에서 일본이 전승 우승을 하여 금메달을 석권했을 때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특별고문을 맡은 사다하루는 “나는 야구를 국기라고 생각한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것은 더욱 특별하다. 지금까지 도전하면서 얻을 수 없었던 것을 자국 개최를 통해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정말 기쁘다”라고 말했다.[315]
2021년 10월 29일, 소프트뱅크 호크스 대표이사 회장 외에 특별팀 어드바이저로 겸임한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기자회견에서 사다하루는 “감독·코치와의 접촉을 포함하여 선수들도 지금까지 이상으로 깨달은 것을 다각도로 소통해 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316]
7. 1. 선수로서
一本足打法일본어'(一本足打法일본어)이라 불리는 독특한 타법으로 통산 홈런 수, 당시 시즌 홈런 개수의 일본 기록을 세웠다.[203] ON포의 일원으로서 팀에 크게 기여했고,[204]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 황금시대를 이끈 주역으로서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 사다하루가 기록한 통산 홈런 868개는 행크 에런이 보유하고 있던 당시 메이저 리그 통산 홈런 기록인 755개를 넘어선 세계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일본 프로 야구의 대기록을 남겼다.나카지마 하루야스, 노무라 가쓰야에 이어 NPB 역대 세 번째이자 센트럴 리그 최초의 3관왕 달성자이며, 세계 기록인 정규 시즌 통산 홈런 868개를 기록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 달성에 공헌했다. 시즌 볼넷(158개), 시즌 고의사구(45개), 시즌 출루율(0.532), 시즌 OPS(1.293), 통산 득점(1,967득점), 통산 루타(5,862루타), 통산 타점(2,170타점), 통산 볼넷(2,390개), 통산 고의사구(427개), 통산 출루율(0.446), 통산 장타율(0.634), 통산 OPS(1.080) 등의 NPB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발렌틴, 무라카미 무네타카에 이어 NPB 역대 3위의 시즌 최다 홈런 기록(55홈런)을 가지고 있으며, NPB 아시아인으로서는 무라카미에 이어 NPB 역대 2위이다. NPB 최다 기록인 홈런왕 15회, 타점왕 13회, 최다 출루수(현 최고 출루율) 12회를 획득했고, 일본 프로 야구 최다 기록인 최우수 선수를 9회 수상했다. 센트럴 리그 최다 기록인 베스트 나인도 18회 수상했으며, 센트럴 리그 최초로 최다 출루수를 획득, 센트럴 리그 최초의 1루수 부문 다이아몬드 글러브상(현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205]
1977년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의 첫 번째 수상자(현재까지도 외국 국적자 중 유일한 수상자)이며,[206] 2010년 10월 26일에는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현역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감독을 역임하는 등 지도자로서도 활동했다. 2008년 시즌 종료와 함께 소프트뱅크 감독직에서 물러나 소프트뱅크 구단 최고 고문으로 발탁되었고, 2009년 1월 1일부터는 이사회 회장으로 있다. 2006년에는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2009년 제2회 대회에서는 감독 자문역, 2013년 제3회 대회에서는 특별 고문[207]을 맡았다.
요미우리 시절 등번호 ‘'''1'''번은 요미우리 감독 퇴임 이듬해인 1989년부터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있고, 다이에·소프트뱅크 감독 시절 등번호 ‘'''89'''번은 감독 퇴임 이듬해인 2009년부터 준영구 결번으로 취급되고 있다. 1994년에는 일본 야구 전당에 헌액됐다.
‘'''세계의 오'''’(世界の王일본어), ‘'''왕 짱'''’(ワンちゃん일본어) 등 여러 별명을 가지고 있다.[217]
홈런을 쳐도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홈런을 친 후 홈베이스에서 기뻐하는 오 사다하루를 본 형 데쓰조가 "홈런을 맞은 상대방의 심정을 생각해 봐라"라고 꾸짖은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이후로 홈런을 쳐도 기뻐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데쓰조는 "고등학생이었으니 좀 더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도 괜찮았을 텐데 괜히 미안한 짓을 했다"라고 회고했다.[246] 다만, 한큐 브레이브스와 맞붙었던 1971년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 역전 끝내기 홈런을 날렸을 때는 손뼉을 치며 기뻐서 날뛰었던 예외도 있다. 715호나 756호 홈런을 쳤을 때는 ‘만세’ 포즈를 취했는데, 구니마쓰 아키라 코치의 제안으로, 평소와 달리 퍼포먼스를 고심한 끝에 생각해낸 포즈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적극적으로 지도를 받았으나, 실적이 쌓이면서 야구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졌다.[317] 극심한 타격 부진을 겪을 때 타인의 조언을 들어도 "나보다 잘 치는 사람의 말이라면 듣겠지만요"라고 말하며 연장자의 말도 흘려듣곤 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이 "불안정한 타격폼(외다리 타법)은 그만하고 기본인 양발 타법으로 돌아가면 어떻겠나? 너의 역량이라면 4할 타율도 충분히 노려볼 만하다"라고 제안했지만, 외다리 타법에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오 사다하루는 이를 거절했다. 선수 생활 말년의 나가시마 시게오가 타격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묻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 재능있는 사람이 왜 남의 말을 쉽게 듣지? 치는 사람은 자신이니까 남의 이야기를 섣불리 듣다가는 오히려 선수 생명이 짧아지는 법이다"라며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반면 가와카미 감독은 완강한 태도를 보인 오 사다하루에 비해 자신의 조언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나가시마가 타격의 비법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내렸다.[318]
노무라 가쓰야는 "오 사다하루는 항상 겸허하고 주변을 염려하는 신사적인 성격을 가졌다. 특히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데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1960년대 중반 요미우리에서도 사인 훔치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당시 요미우리 선수였던 아이바 요시히로에 따르면, 나가시마는 ‘몸쪽 슈토가 올 때만 가르쳐달라’고 말한 반면, 오 사다하루는 “일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된다”라며 응했다고 한다. 노무라는 이를 두고 "사인 등을 훔치다가 다음 공을 사전에 알지 못해도 대응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배팅 기술을 갖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정의감이 강한 사다하루인 만큼 ‘스파이 행위’ 자체를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바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사다하루의 확실한 기술력과 인간성의 훌륭함에 새삼 감탄했다"라고 말했다.[319]
연습에 관해서는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완고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남보다 열렬하게 연습했던 선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 노무라 역시 "나가시마와 사다하루의 연습하는 모습은 누구나 본받았다"라고 말했다.[320]
노무라는 오 사다하루의 타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볼배합을 읽는다든가, 구종을 읽는다든가 하는 일은 일절 없다. 날아오는 공을 친다. 이상적인 타자이지만 직구밖에 기다리지 않는다", "가장 강한 코스는 바깥쪽 꽉 찬 공과 한가운데의 딱 중간 높이쯤", "누구라도 ‘홈런 타자 = 몸쪽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다하루와 같은 홈런 타자에게는 바깥쪽 위주의 볼배합이 된다. 하지만 사다하루는 그 점을 오히려 노림수로 이용한다", "이 때문에 센트럴 리그 투수들은 바깥쪽 중심으로 공격해 나갔다가 공이 조금이라도 몰리면 통타당하는 경향이 있었다".[321][322]
워런 크로마티는 2019년 언론을 통해 일본인 타자 역대 1위로 오 사다하루를 꼽았는데, 그 이유로 외발 타법이라면 변화구와 강속구, 몸쪽 공격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밝혔다.[323]
7. 2. 감독으로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감독을 역임했다. 요미우리 감독 시절 초반에는 주위의 조언을 듣지 않는 독단적인 운영으로 비판을 받았다.[324] 그러나 다이에·소프트뱅크 감독 시절부터는 주변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그 결과, 팀의 황금 시대를 구축하고 선수 육성에도 재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325]지도자 초기에는 고마다 노리히로 등에게 자신의 외다리 타법을 가르치려 했으나, 선수에게 맞지 않아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이후 선수에게 맞는 지도를 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최고의 감독으로 존경하며, 프로 야구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 승리에 대한 집념을 배웠다고 밝혔다.[324][325]
전화를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시무라 사다아키 영입을 위해 적극적으로 전화를 걸었고, 오바나 다카오를 코치로 초빙할 때도 직접 전화를 걸어 설득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를 맡았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요미우리의 감독을 맡아 1987년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1988년 시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6]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후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1999년, 2000년, 2003년에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1999년과 2003년에는 일본 시리즈 우승도 차지했다.
2006년에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승을 이끌었다. 같은 해 7월 위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 후 복귀하여 2008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다.
감독 퇴임 후 2008년 소프트뱅크 구단 최고 고문에 취임했고, 2009년부터는 구단 이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감독 자문역을 맡았다.
8. 에피소드
오 사다하루는 진지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야구 도구를 매우 소중히 다루었으며, 특히 글러브는 직접 손질하고 관리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예의범절을 중시했으며, 딸들에게도 엄격한 아버지였다.[150]
대식가로도 유명한데, 특히 라면과 가쓰동을 즐겨 먹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직접 라면을 만들어 먹을 정도로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150] 취미는 피아노 연주, 요리, 그리고 하코네 역전 경주 관전이었다.[151][152][153]
국적은 중화민국이다. 이는 중국 대륙의 중국 국민당이 중화민국 국호를 사용하던 시절, 화교·화인들이 모두 중화민국 국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물러난 후에도, 오 사다하루는 정치적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아버지의 유지를 존중하여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했다.[154][155][156] 딸 오 리에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 당시 해외 언론의 질문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일본인"이라고 답했다.[335][336][337]
넓은 교우 관계를 유지했는데, 가수 미소라 히바리와는 의남매라고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157] 스모 선수 다이호 고키와는 같은 해 5월생으로 오랜 친분을 쌓았고,[158][159][160] 프로 골퍼 다카스 나미오, 아오키 이사오,[161][162] 정치가 니카이 도시히로와도 친분이 있었다.[163]
미국에서도 그의 존재는 일찍부터 평가받았다. 1976년에는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Japanese Homerun king'으로 소개되는 등, '일본의 홈런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2006년에는 《타임》 아시아판의 '60년의 아시아 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9.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王仕福|오 시후쿠중국어 | 중국 저장성 칭톈 현 출신. 1985년 사망. |
어머니 | 王登美|오 토미일본어 | 일본인 (옛 성은 토즈미 當住|도즈미일본어). 2010년 폐렴으로 사망 (향년 108세).[348] |
형 | 오 데쓰조 | 2008년 호흡 부전으로 사망 (향년 78세). 오 사다하루의 위암 수술 당시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 입원 및 수술 집도 의뢰.[246] |
전처 | 小八重恭子|고바에 교코일본어 | 1966년 12월 1일 결혼. 2001년 10월 사망.[349][350] 2002년 유골 도난 사건 발생. |
장녀 | 오 리에 | |
차녀 | 이름 불명, 이름에 理 포함 | |
삼녀 | 이름 불명, 이름에 理 포함 | |
후처 | 일반인 여성 | 2018년 5월 30일 재혼 (당시 60세).[351][352][353] 후쿠오카현 나카스의 유명 고급 요리점 여주인 출신. |
10. 수상 및 타이틀 경력
王貞治일본어는 선수 시절 수위 타자 5회, 홈런왕 15회, 타점왕 13회, 최고 출루율 12회, 최다 안타 3회를 기록했다. 특히 홈런왕 15회와 13년 연속 기록은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다 기록이다. 최우수 선수(MVP) 9회, 베스트 나인 18회,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9회를 수상했으며, 1994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77년에는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고, 2010년에는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205][206]
그 외에도 쇼리키 마쓰타로상 4회, 올스타전 MVP 3회,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일본 시리즈 타격상 1회, 일본 시리즈 기능상 6회, 월간 MVP 1회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마이니치 스포츠인상 등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 경력이 있다.
2004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 ‘오 사다하루 기념 그라운드’가 준공되었고,[182] 고라쿠엔 구장과 도쿄 돔의 1번 게이트는 그의 등번호를 따 ‘왕 게이트’로 불리고 있다.
10. 1. 타이틀
王貞治일본어는 선수 시절 다음과 같은 타이틀을 획득했다.타이틀 | 횟수 | 획득 연도 |
---|---|---|
수위 타자 | 5회 | 1968년 ~ 1970년, 1973년, 1974년 |
홈런왕 | 15회 | 1962년 ~ 1974년, 1976년, 1977년 |
타점왕 | 13회 | 1962년, 1964년 ~ 1967년, 1971년 ~ 1978년 |
최다 출루수 | 12회 | 1967년 ~ 1978년 |
최다 안타 | 3회 | 1969년, 1970년, 1973년 |
- 수위 타자 5회는 역대 4위 타이 기록이자 센트럴 리그 역대 2위이며, 센트럴 리그 좌타자 최다 기록이다. 3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이다.
- 홈런왕 15회와 13년 연속은 모두 역대 최다 기록이다.
- 타점왕 13회와 8년 연속은 모두 역대 최다 기록이다.
- 최다 출루수 12회와 12년 연속은 모두 역대 최다 기록이며, 출루율은 1962년부터 1979년까지 18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 최다 안타 3회는 1994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되었다.
10. 2. 수상
상 | 횟수 및 연도 | 비고 |
---|---|---|
MVP | 9회 (1964년, 1965년, 1967년, 1969년, 1970년, 1973년, 1974년, 1976년, 1977년) | 최다 기록[354] |
베스트 나인 | 18회 (1962년 ~ 1979년) | 센트럴 리그 최다 기록, 18년 연속 수상은 역대 최다 기록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 9회 (1972년 ~ 1980년) | 1972년부터 시상, 1루수 부문 9년 연속 수상은 역대 최장 기록, 9회 수상은 고마다 노리히로 다음으로 1루수 역대 2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1994년 | |
쇼리키 마쓰타로상 | 4회 (1977년, 1999년, 2003년, 2006년) | 1977년에는 선수로서 수상 |
국민영예상 | 1977년 | |
올스타전 MVP | 3회 (1963년 2차전, 1977년 3차전, 1979년 1차전) |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1회 (1963년) | |
일본 시리즈 타격상 | 1회 (1972년) | |
일본 시리즈 기능상 | 6회 (1965년, 1966년, 1968년, 1970년, 1971년, 1973년) | |
월간 MVP | 1회 (1976년 5월) |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대상 | 3회 (1974년, 1976년, 1977년) |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특별상 | 1회 (2008년)[355] |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공로상 | 1회 (2008년) |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대상(야구 부문 센트럴 리그) | 2회 (1976년, 1977년) |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특별 공로상 | 1회 (2000년) | |
베스트 파더 옐로 리본상 | 1991년 | |
마이니치 스포츠인상 그랑프리 | 1999년 | |
마이니치 스포츠인상 감동상 | 2006년 | |
마이니치 스포츠인상 문화상 | 2008년 | |
베스트 스마일 오브 더 이어 | 1999년 | |
와세다 대학 추천 교우 | 2000년[356] | |
중화민국 3등 경성훈장 | 2001년[357] | |
자수포장 | 2006년, 2009년 | |
아사히 스포츠상 | 2006년 | |
후쿠오카현 영예상 | 2006년[358] | |
후쿠오카시 스포츠 영예상 | 2006년[359] | |
후쿠오카현 현민영예상 | 2008년[360] | |
도쿄도 명예도민 | 2009년[361] | |
중화민국 2등 경성훈장 | 2009년 | |
문화공로자 | 2010년 | |
와세다 대학 스포츠 공로자 | 2011년[362] | |
중화민국 야구 전당 경기 부문 | 2015년 | |
유머 대상 | 2018년 | |
수위 타자 | 5회 (1968년 ~ 1970년, 1973년 ~ 1974년) | |
최다 홈런 | 15회 (1962년 ~ 1974년, 1976년 ~ 1977년) | |
최다 타점 | 13회 (1962년, 1964년 ~ 1967년, 1971년 ~ 1978년) | |
최고 출루율 | 12회 (1967년 ~ 1978년) | |
최다 안타 | 3회 (1969년, 1970년, 1973년) | |
미쓰이 골든 글러브 레전즈 | 1루수 부문 |
10. 3. 영예
수상 경력 | |
---|---|
수위 타자 | 5회 (1968년 - 1970년, 1973년 - 1974년) ※ 5회는 역대 4위, 센트럴 리그 역대 2위, 센트럴 리그 좌타자 최다. 3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타이기록 |
최다 홈런 | 15회 (1962년 - 1974년, 1976년 - 1977년) ※ 최다 기록, 13년 연속은 최장 기록 |
최다 타점 | 13회 (1962년, 1964년 - 1967년, 1971년 - 1978년) ※ 최다 기록, 8년 연속은 최장 기록 |
최고 출루율 | 12회 (1967년 - 1978년) ※ 1967년부터 표창. 최다 기록, 12년 연속은 최장 기록, 출루율은 1962년 - 1979년까지 18년 연속 1위. |
최다 안타 | 3회 (1969년, 1970년, 1973년) ※ 당시 연맹 표창 없음, 1994년부터 표창 |
11. 개인 기록
오 사다하루의 통산 타격 기록은 다음과 같다.
통산 | |||||||||||||||||||||
---|---|---|---|---|---|---|---|---|---|---|---|---|---|---|---|---|---|---|---|---|---|
2831경기 | 9250타수 | 1967득점 | 2786안타 | 422 2루타 | 25 3루타 | 868홈런 | 5862루타 | 2170타점 | 84도루 | 59도루실패 | 12희생번트 | 100희생플라이 | 2390볼넷 | 427고의사구 | 114몸에 맞는 공 | 1319삼진 | 159병살타 | .301타율 | .446출루율 | .634장타율 | 1.080OPS |
- '''굵은 글씨'''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기록이다.
연도 | 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59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61 | .262 | .316 | .569 |
1960 | .270 | .375 | .448 | .823 | |
1961 | .253 | .358 | .444 | .802 | |
1962 | .272 | .376 | .565 | .941 | |
1963 | .305 | .452 | .640 | 1.092 | |
1964 | .320 | .456 | .720 | 1.176 | |
1965 | .322 | .490 | .666 | 1.156 | |
1966 | .311 | .495 | .715 | 1.210 | |
1967 | .326 | .488 | .723 | 1.211 | |
1968 | .326 | .475 | .722 | 1.197 | |
1969 | .345 | .472 | .690 | 1.162 | |
1970 | .325 | .476 | .713 | 1.189 | |
1971 | .276 | .435 | .597 | 1.032 | |
1972 | .296 | .435 | .654 | 1.089 | |
1973 | .355 | .500 | .755 | 1.255 | |
1974 | .332 | .532[373] | .761 | 1.293 | |
1975 | .285 | .451 | .573 | 1.024 | |
1976 | .325 | .479 | .725 | 1.204 | |
1977 | .324 | .477 | .706 | 1.183 | |
1978 | .300 | .436 | .611 | 1.048 | |
1979 | .285 | .415 | .565 | .980 | |
1980 | .236 | .342 | .462 | .803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작은따옴표 안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오 사다하루는 통산 2786안타(센트럴 리그 기록), 통산 최다 출루율(.446), 통산 최다 출루수(5290개)를 기록했다. 특히 1974년에는 시즌 최다 출루수(294개)와 시즌 최고 출루율(.532)[373]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13번의 시즌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했으며, 이는 장훈의 16회에 이어 역대 2위이자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그는 선수 생활 동안 총 868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 기록이다. 주요 홈런 기록은 다음과 같다.
호수 | 달성일 | 상대팀 | 구장 | 이닝 | 투수 | 결과 | 비고 |
---|---|---|---|---|---|---|---|
1 | 1959년 4월 26일 | 고쿠테쓰 스왈로스 | 고라쿠엔 구장 | 7회초 | 무라타 겐이치 | 우월 선제 결승 2점 홈런 | 첫 안타 |
4 | 1959년 6월 25일 | 오사카 타이거스 | 고라쿠엔 구장 | 7회말 | 고야마 마사아키 | 우월 동점 2점 홈런 | ON 동반 제1호 홈런(천황 참관 경기) |
47 | 1962년 7월 1일 | 다이요 웨일스 | 가와사키 구장 | 3회초 | 이나가와 마코토 | 우월 선제 솔로 홈런 | 외다리 타법 제1호 |
600 | 1974년 5월 30일 | 한신 타이거스 | 한신 고시엔 구장 | 3회초 | 다니무라 도모히로 | 우월 3점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700 | 1976년 7월 23일 | 다이요 웨일스 | 가와사키 구장 | 8회초 | 우자와 다쓰오 | 우중간에 2점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714 | 1976년 10월 10일 | 한신 타이거스 | 고라쿠엔 구장 | 7회말 | 후루사와 겐지 | 우월 솔로 홈런 | 세계 2위 타이 기록 |
715 | 1976년 10월 11일 | 한신 타이거스 | 고라쿠엔 구장 | 8회말 | 야마모토 가즈유키 | 우월 2점 홈런 | 세계 2위 단독 |
750 | 1977년 8월 23일 | 히로시마 카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3회초 | 이케가야 고지로 | 우월 솔로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755 | 1977년 8월 31일 | 다이요 웨일스 | 고라쿠엔 구장 | 1회말 | 미우라 미치오 | 우월 선제 2점 홈런 | 세계 타이 기록 |
756 | 1977년 9월 3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고라쿠엔 구장 | 3회말 | 스즈키 야스지로 | 우월 솔로 홈런 | 세계 신기록 수립 |
800 | 1978년 8월 30일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 고라쿠엔 구장 | 6회말 | 오카와 히로시 | 우월 솔로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850 | 1980년 6월 12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고라쿠엔 구장 | 1회말 | 가네다 도메히로 | 우월 솔로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868 | 1980년 10월 12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고라쿠엔 구장 | 6회말 | 간베 도시오 | 우월 솔로 홈런 | 현역 마지막 홈런 |
오 사다하루는 야구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가수 미소라 히바리와는 의형제처럼 지냈으며, 스모 선수 다이호 고키와는 오랜 친구였다. 프로 골퍼 다카스 미나오를 통해 아오키 이사오와도 친분을 맺었으며, 정치인 니카이 토시히로와도 40년 이상 친분을 유지했다.
11. 1. 첫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59년 4월 11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1차전(고라쿠엔 구장), 7번·1루수로서 선발 출장
- 첫 타점: 1959년 4월 13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3차전(고라쿠엔 구장), 8회말에 미야지 요시토모로부터 우익수 희생 플라이
- 첫 안타·첫 홈런: 1959년 4월 26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6차전(고라쿠엔 구장), 7회초에 무라타 겐이치로부터 우월 선제 결승 2점 홈런
11. 2. 기록 달성 경력
기록 | 달성일 | 상대팀 | 구장 | 비고 | |
---|---|---|---|---|---|
통산 1000안타 | 1967년 7월 10일 | 다이요 웨일스 | 가와사키 구장 | 역대 65번째[1] |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66년 8월 24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116번째[1] | |
통산 볼넷 1000개 | 1968년 10월 11일 | 주니치 드래건스 | 고라쿠엔 구장 | 사상 최초[1] | |
통산 1000타점 | 1969년 10월 6일 | 다이요 웨일스 | 가와사키 구장 | 역대 7번째[1] | |
통산 3000루타 | 1970년 6월 26일 | 주니치 드래건스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7번째[1] | |
통산 1000득점 | 1970년 7월 28일 | 주니치 드래건스 | 주니치 스타디움 | 역대 6번째[1] | |
통산 1500경기 출장 | 1970년 8월 11일 | 야쿠르트 아톰스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32번째[1] | |
통산 1500안타 | 1970년 10월 6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역대 27번째[1] | |
통산 3500루타 | 1972년 6월 6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역대 6번째[1] | |
통산 2루타 300개 | 1972년 10월 7일 | 한신 타이거스 | 한신 고시엔 구장 | 역대 11번째[1] | |
통산 4000루타 | 1973년 9월 19일 | 한신 타이거스 | 한신 고시엔 구장 | 역대 4번째[1] | |
통산 1000삼진 | 1974년 4월 23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메이지 진구 야구장 | 역대 3번째[1] | |
통산 2000경기 출장 | 1974년 6월 29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8번째[1] | |
통산 1500타점 | 1974년 7월 30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메이지 진구 야구장 | 역대 2번째[1] | |
통산 2000안타 | 1974년 8월 4일 | 한신 타이거스 | 한신 고시엔 구장 | 역대 8번째[1] | |
통산 4500루타 | 1975년 8월 16일 | 다이요 웨일스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2번째[1] | |
통산 2루타 350개 | 1975년 9월 24일 | 주니치 드래건스 | 주니치 스타디움 | 역대 8번째[1] | |
통산 5000루타 | 1977년 7월 13일 | 주니치 드래건스 | 나고야 구장 | 역대 2번째[1] | |
통산 2500경기 출장 | 1978년 6월 3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2번째[1] | |
통산 2500안타 | 1978년 6월 27일 | 주니치 드래건스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3번째[1] | |
통산 2000타점 | 1978년 9월 22일 | 주니치 드래건스 | 나고야 구장 | 사상 최초[1] | |
통산 2루타 400개 | 1979년 5월 31일 | 주니치 드래건스 | 고라쿠엔 구장 | 역대 6번째[1] | |
통산 5500루타 | 1979년 6월 12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고라쿠엔 구장 | 사상 최초[1] | |
통산 희생 플라이 100개 | 1980년 10월 10일 | 주니치 드래건스 | 나고야 구장 | 역대 2번째[1] |
11. 3. 홈런 달성 일지
호수 | 달성일 | 상대팀 | 구장 | 이닝 | 투수 | 결과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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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959년 4월 26일 | 고쿠테쓰 스왈로스 6차전 | 고라쿠엔 구장 | 7회초 | 무라타 겐이치 | 우월 선제 결승 2점 홈런 | 첫 안타 | |
4 | 1959년 6월 25일 | 오사카 타이거스 11차전 | 고라쿠엔 구장 | 7회말 | 고야마 마사아키 | 우월 동점 2점 홈런 | ON 동반 제1호 홈런(천황 참관 경기) | |
47 | 1962년 7월 1일 | 다이요 웨일스 15차전 | 가와사키 구장 | 3회초 | 이나가와 마코토 | 우월 선제 솔로 홈런 | 외다리 타법 제1호 | |
50 | 1962년 7월 11일 | 주니치 드래건스 12차전 | 주니치 스타디움 | 8회초 | 곤도 히로시 | 우월 솔로 홈런 | ||
100 | 1963년 7월 28일 | 히로시마 카프 17차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1회초 | 오이시 기요시 | 우중간에 선제 2점 홈런 | 32번째 | |
150 | 1964년 7월 16일 | 히로시마 카프 22차전 | 고라쿠엔 구장 | 7회말 | 이케다 히데토시 | 좌월 2점 홈런 | 17번째 | |
200 | 1965년 9월 19일 | 다이요 웨일스 20차전 | 고라쿠엔 구장 | 9회초 | 미네 구니야스 | 우월 2점 홈런 | 12번째 | |
250 | 1966년 8월 18일 | 다이요 웨일스 22차전 | 가와사키 구장 | 4회초 | 니하리 신지 | 우월 솔로 홈런 | 4번째 | |
300 | 1967년 8월 31일 | 산케이 아톰스 22차전 | 고라쿠엔 구장 | 3회말 | 무라타 겐이치 | 우월 3점 홈런 | 3번째 | |
350 | 1968년 9월 21일 | 주니치 드래건스 21차전 | 주니치 스타디움 | 6회초 | 오가와 겐타로 | 우월 2점 홈런 | 3번째 | |
400 | 1969년 10월 18일 | 주니치 드래건스 25차전 | 주니치 스타디움 | 1회초 | 도야마 히로시 | 우월 선제 3점 홈런 | 2번째 | |
450 | 1971년 4월 18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4차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3회초 | 소토코바 요시로 | 우중간에 솔로 홈런 | 2번째 | |
500 | 1972년 6월 6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5차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3회초 | 니시카와 가쓰히로 | 우월 2점 홈런 | 2번째 | |
550 | 1973년 6월 21일 | 주니치 드래건스 11차전 | 주니치 스타디움 | 4회초 | 이토 히사토시 | 우월 솔로 홈런 | 2번째 | |
600 | 1974년 5월 30일 | 한신 타이거스 11차전 | 한신 고시엔 구장 | 3회초 | 다니무라 도모히로 | 우월 3점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
650 | 1975년 7월 11일 | 한신 타이거스 9차전 | 한신 고시엔 구장 | 8회말 | 야마모토 시게마사 | 우월 2점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
700 | 1976년 7월 23일 | 다이요 웨일스 16차전 | 가와사키 구장 | 8회초 | 우자와 다쓰오 | 우중간에 2점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
714 | 1976년 10월 10일 | 한신 타이거스 22차전 | 고라쿠엔 구장 | 7회말 | 후루사와 겐지 | 우월 솔로 홈런 | 세계 2위 타이 기록 | |
715 | 1976년 10월 11일 | 한신 타이거스 23차전 | 고라쿠엔 구장 | 8회말 | 야마모토 가즈유키 | 우월 2점 홈런 | 세계 2위 단독 | |
750 | 1977년 8월 23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차전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3회초 | 이케가야 고지로 | 우월 솔로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
755 | 1977년 8월 31일 | 다이요 웨일스 22차전 | 고라쿠엔 구장 | 1회말 | 미우라 미치오 | 우월 선제 2점 홈런 | 세계 타이 기록 | |
756 | 1977년 9월 3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23차전 | 고라쿠엔 구장 | 3회말 | 스즈키 야스지로 | 우월 솔로 홈런 | 세계 신기록 수립 | |
800 | 1978년 8월 30일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3차전 | 고라쿠엔 구장 | 6회말 | 오카와 히로시 | 우월 솔로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
850 | 1980년 6월 12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9차전 | 고라쿠엔 구장 | 1회말 | 가네다 도메히로 | 우월 솔로 홈런 | 일본 프로 야구 최초 | |
868 | 1980년 10월 12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26차전 | 고라쿠엔 구장 | 6회말 | 간베 도시오 | 우월 솔로 홈런 | 현역 마지막 홈런 |
11. 4. 연도별 타격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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