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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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촐라 제국은 9세기 중반 비자얄라야에 의해 부활하여 13세기 말까지 존속한 타밀 왕조이다. 초기에는 판디아, 팔라바 왕국과 경쟁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시기에 스리랑카, 몰디브,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며 최전성기를 맞았다. 촐라 제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 무역을 장악했으며, 찰루키아 왕조와 벵기 지역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12세기 이후 쇠퇴하여 판디아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촐라 제국은 중앙 집권적인 행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농업과 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드라비다 양식의 건축과 조각, 타밀 문학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힌두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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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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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촐라 제국 |
국가 이름 | 인도 |
존속 기간 시작 | 848년 |
존속 기간 끝 | 1279년 |
수도 | 탄자부르 (848년 ~ 1025년) 강가이콘다 촐라푸람 (1025년 ~ 1279년) |
공용어 | 중세 타밀어, 산스크리트어 |
공용 문자 | 타밀 문자 |
국교 | 힌두교(사실상) |
기타 종교 | 불교, 자이나교 |
주신 | 시바, 비슈누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지도자 칭호 | 황제 |
지도자 이름 | 비자얄라야(초대) 라자라자 1세 라젠드라 1세 라젠드라 3세(말대) |
국성 | 촐란 |
지역 | 타밀라캄 |
데모님 | 촐라인 |
민족 | 타밀족 |
역사 | |
건국 | 848년 |
멸망 | 1279년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
이전 | |
이전 국가 1 | 팔라바 왕조 |
이전 국가 2 | 칼라브라 왕조 |
이후 | |
이후 국가 1 | 판디아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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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고대 촐라의 후손 비자얄라야는 848년에 촐라 왕조를 부활시켰다. 그는 850년에 판디아 제국과 팔라바 왕국 사이의 갈등을 틈타 무타라이야르 왕조로부터 탄자부르를 점령하고 중세 촐라 왕조의 제국적 노선을 확립했으며,[1][2] 탄자부르는 촐라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3]
아디티야 1세 치하에서 촐라는 팔라바와 판디아를 격파하고 칸나다 지방을 점령했으며, 서강가 왕조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후 팔라바 왕국을 멸망시키고 톤다이만달람을 점령했다. 파란타카 1세는 스리랑카를 정복하고 라슈트라쿠타를 물리쳤지만,[4] 이후 라슈트라쿠타에게 패배하여 톤다이만달람 지역을 빼앗겼다.
파란타카 2세 치하에서 촐라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판디아를 무찌르고 톤다이만달람을 수복했다. 그의 뒤를 이은 웃타마 촐라와 라자라자 1세가 즉위하였다.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시대는 촐라 제국의 최전성기였다. 이 시기 촐라는 남쪽의 스리랑카섬과 몰디브 제도에서 북쪽의 고다바리-크리슈나강 유역, 콘칸 해안, 말라바르 해안, 동남아시아의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하였다. 라자라자 1세는 촘촘한 행정망을 구축하고 지방 자치를 강화했으며, 1000년에 토지 측량을 실시하고 1010년에는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건립했다.[8] 몰디브 제도와 스리랑카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정복하고,[9] 강에 댐을 건설하고 무역을 지원하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라젠드라 1세는 스리랑카섬을 완전히 정복하고 벵골 지역의 팔라 제국을 격파하여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출했으며,[10] 1025년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을 건설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11] 동남아시아의 스리위자야를 공격하여 인도양 제해권을 장악했으며,[12] 이는 스리위자야의 쇠퇴를 야기했다. 그의 원정은 말레이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13][14] 칸나다 지역도 정복했으며, 동인도 해안의 왕국들은 촐라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1016년, 1033년, 1077년에 3개의 촐라 외교 사절이 송나라에 파견되었다. 비라라젠드라 촐라는 서찰루키아를 물리치고 비크라마디트야 6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11세기 후반에는 케다를 정복하였다.
라자라자 1세 시대부터 촐라는 서찰루키아와 벵기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동찰루키아와의 동맹으로 촐라는 서찰루키아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며, 두 제국은 퉁가바드라강을 경계로 대립했다.
라자디라자 1세와 라젠드라 2세도 찰루키아를 격파하고 벵기와 칼링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1061년 이후 서찰루키아는 다시 벵기를 장악하려 했으나, 비라라젠드라는 벵기를 공격해 비자야디티야 7세의 아들을 죽였다. 비라라젠드라는 찰루키아 왕자를 설득해 자신의 사위로 삼고 칼야니의 왕위를 차지하게 하여 서찰루키아 왕국을 분열시켰다. 1070년 비라라젠드라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암살당하면서 비자얄라야 촐라 계통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라자라자 1세의 벵기 침공으로 동찰루키아와 혼인 및 정치적 동맹이 시작되었다. 라자라자의 딸과 라젠드라의 딸은 동찰루키아 왕자와 결혼하였다.[8] 3대에 걸쳐 동찰루키아 왕족들은 촐라 황실과 결혼했고, 동찰루키아 왕조만큼이나 촐라 왕조에 대한 소속감을 느꼈다. 1070년 비라라젠드라 촐라의 아들 아티라젠드라 촐라가 암살되자, 라젠드라 찰루키아는 쿨로퉁가 1세로 촐라 황제에 즉위하면서 후기 촐라 시대를 시작하였다.[20]
쿨로퉁가 1세는 삼촌과 화해하고 벵기를 평생 통치하도록 허락했다. 1075년 비자야디티야가 죽으면서 동찰루키아 왕조는 끝났고, 벵기는 촐라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쿨로퉁가 1세는 아들들을 대리인으로 보내 속주를 통치했다. 쿨로퉁가 1세와 비크라마디티야 6세 사이에 오랜 싸움이 벌어졌다. 쿨로퉁가의 통치는 성공과 번영으로 특징지어졌지만, 스리랑카 섬과 판디아 영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후기 촐라 왕조는 쿨로퉁가 1세, 비크라마 촐라, 라자라자 2세, 라자디라자 2세, 쿨로퉁가 3세와 같은 유능한 통치자들이 이끌었다. 찰루키아와의 전쟁은 주로 카르나타카나 텔루구 지역에서 벌어졌으며,[21] 호이살라, 세부나, 카카티야와 같은 봉신국들이 성장하며 찰루키아를 대체하였다. 쿨로퉁가 3세 치하의 촐라는 호이살라를 지원하며 서찰루키아를 물리쳤다.
1150년에서 1280년 사이에 촐라는 판디아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또한 칼링가의 동강가, 싱할라인들과도 싸웠지만, 쿨로퉁가 1세 시대까지 랑카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라자디라자 2세는 랑카 왕의 도움을 받은 판디아 제후 연합을 제압했고, 쿨로퉁가 3세는 랑카 및 마두라이의 반란을 진압하고 타밀 국가, 동부 강가바디, 드라크샤라마, 벵기 및 칼링가의 전통적인 영토를 유지하였다.
라자라자 3세와 라젠드라 3세 시기에 촐라 제국은 쇠퇴하였다. 카다바 족장 코페룬칭가 1세는 라자라자 3세를 인질로 잡기도 하였다.[22] 호이살라는 타밀 국가들의 정치에 분열을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 라젠드라 3세는 촐라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비라 소메슈와라 치하의 호이살라는 판디아의 편으로 돌아서며 촐라를 격퇴하였다.[23]
남부의 판디아 왕조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호이살라와 촐라를 모두 패배시켰다.[24]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칸나누르 쿠팜에서 호이살라를 물리치고 그곳을 점령했다.[24] 1279년, 라젠드라 3세의 마지막 기록 이후 촐라 왕조는 멸망했다.[24]
2. 1. 초기 (9세기 중반 - 10세기)
비자얄라야는 848년에 고대 촐라의 후손으로서 촐라 제국을 세워 촐라 왕조를 부활시켰다. 850년에 판디아 제국과 팔라바 왕국 사이의 갈등을 틈타 무타라이야르 왕조로부터 탄자부르를 점령하고 중세 촐라 왕조의 제국적 노선을 확립했다.[1][2] 탄자부르는 촐라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3]
885년 아디티야 1세 치하의 촐라 제국은 팔라바 제국과 함께 마두라이의 판디아 왕조를 격파하고 칸나다 지방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으며 서강가 왕조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후 아디티야 1세는 팔라바 왕국을 멸망시키고 톤다이만달람을 점령했다. 925년 아디티야 1세의 아들 파란타카 1세는 스리랑카를 정복했으며, 발랄라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의 크리슈나 2세를 물리쳤다.[4] 그러나 이후 파란타카 1세는 타크콜람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의 크리슈나 3세에게 패배했고, 그의 아들 라자디티야 촐라는 톤다이만달람 지역을 빼앗겼다.
파란타카 2세 치하에서 촐라는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황태자 아디티야 카리칼란이 지휘하는 촐라군은 판디아를 무찌르고 톤다이만달람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아디티야 카리칼란은 정치적 음모로 암살당했고, 파란타카 2세 이후 웃타마 촐라가 촐라 황제가 되었으며, 웃타마 촐라 이후 라자라자 1세가 즉위하였다.
2. 2. 전성기 (10세기 - 12세기)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치세는 촐라 제국의 최전성기로, 이 시기 촐라 제국은 남쪽의 스리랑카섬과 몰디브 제도에서부터 북쪽의 고다바리-크리슈나강 유역, 바트칼의 콘칸 해안, 말라바르 해안(체라 국가), 동남아시아의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하였다. 라자라자 1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지닌 통치자였으며 전쟁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열의로 통치 임무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왕실의 통제 하에 촘촘한 행정망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지방 자치를 강화하였다. 1000년에 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 1010년에는 오늘날 남인도 지역의 대표적인 사원들 하나인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짓는 등 힌두교 지원에도 힘을 쏟았다.[8] 몰디브 제도를 공격해 정복하고, 스리랑카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정벌해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파괴하는 등 정복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9] 강에 댐 등의 시설 등을 건설하거나 무역 지원이나 광산 및 염전 시설들을 건설하는 등 촐라 제국의 내정에도 힘썼다.
1014년부터 촐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라젠드라 1세는 1017년에 스리랑카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정복한 후 아누라다푸라 국왕 마힌다 5세를 생포하였다. 1019년부터 1024년까지는 북쪽의 오디샤를 정복하고 벵골 지역의 팔라 제국을 물리침으로써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10]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025년 타밀나두 지역에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이라는 도시를 건설한 후 촐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11] 이후 해군을 통해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스리위자야 해군을 무찌르며 인도양 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는 스리위자야의 쇠퇴를 야기했다.[12] 당시 기록에 의하면 스리위자야의 수도인 팔렘방을 비롯해 탐브라링가, 케다 등 스리위자야 도시 14곳이 촐라 제국에 의해 점령되거나 약탈당했다고 한다. 라젠드라 1세의 원정은 말레이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은 중세 말레이어 연대기 《세자라 멜라유》에도 기록되었다.[13][14] 칸나다의 라슈트라쿠타, 찰루키아, 탈라크카드, 콜라르 등의 영토를 정복했다.[15] 라젠드라의 영토에는 갠지스-후글리-다모다르 분지, 스리랑카와 몰디브가 포함되었으며, 동인도 해안을 따라 갠지스강까지 이르는 왕국들은 촐라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1016년, 1033년, 1077년에 3개의 촐라 외교 사절이 송나라에 파견되었다. 비라라젠드라 촐라는 서찰루키아 제국의 소메슈바라 2세를 물리치고 비크라마디트야 6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11세기 후반에는 스리위자야의 영토인 케다를 정복하였다.
2. 2. 1. 해상 정복
라자라자 1세는 여러 해전을 치르며 스리랑카, 몰디브 제도, 말라바르 해안을 함락하기 시작하였다.[17] 라젠드라 1세는 스리위자야 항구와 미얀마의 페구 왕국에 대한 해군 공습을 시작하였다.[18] 촐라 비문에는 그가 팔렘방, 탐브라링가, 케다로 확인되는 14곳을 점령하거나 약탈했다고 나와 있다.[19] 두 번째 침공은 11세기 후반 말레이시아의 스리위자야 케다를 정복한 비라라젠드라가 이끌었다.[16] 촐라의 침공은 스리위자야의 부를 약탈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단기적인 침략이었기 때문에 스리위자야에 대한 직접 지배를 확립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침공으로 스리위자야의 패권이 심각하게 약화되며 지역 왕국들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타밀 무역상이 전통적으로 말레이 무역상이 지배하던 스리위자야 영역을 잠식하고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섬 북부 해안에서 타밀 길드의 영향력이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2. 2. 2. 촐라-찰루키아 전쟁
라자라자 1세 시대부터 촐라 제국은 서찰루키아와 벵기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동찰루키아 왕자 비말라디티야와 라자라자의 딸 쿤타바이의 결혼으로 촐라와 동찰루키아는 동맹 관계를 맺었으나, 서찰루키아는 벵기가 자신들의 영향권에 있다고 여겼다. 촐라는 서찰루키아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으며, 두 제국은 퉁가바드라강을 경계로 대립했다.라자디라자 1세는 1044년~1045년에 벵기로 원정군을 이끌어 서찰루키아 군대를 격퇴하고 칼야니와 벵기 사이의 콜리파카 요새를 불태웠다. 라젠드라 2세는 찰루키아 왕 소메슈바라 1세를 격파하고 벵기와 칼링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1061년 라자라자 나렌드라가 사망하자 서찰루키아는 다시 벵기를 장악하려 했다. 비자야디티야 7세는 벵기를 점령했고, 촐라 공주 암망가이와 라자라자 나렌드라의 아들 라젠드라 찰루키아는 촐라 하렘에서 자랐다. 비라라젠드라는 벵기를 공격해 비자야디티야 7세의 아들 사크티바르만 2세를 죽였다.
비라라젠드라는 찰루키아 왕자 비크라마디티야 4세를 설득해 자신의 사위로 삼고 칼야니의 왕위를 차지하게 하여 서찰루키아 왕국을 분열시켰다. 1070년 비라라젠드라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디라젠드라가 암살당하면서 비자얄라야 촐라 계통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2. 3. 후기 (12세기 - 13세기)
동찰루키아와의 혼인 및 정치적 동맹은 라자라자 1세가 벵기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라자라자의 딸은 찰루키아 왕자 비말라디티야와 결혼하였고,[8] 라젠드라의 딸 암만가 데비는 동찰루키아 왕자 라자라자 나렌드라와 결혼하였다.[8] 3대에 걸쳐 동찰루키아 왕족들은 촐라 황실과 결혼했고, 동찰루키아 왕조만큼이나 촐라 왕조에 대한 소속감을 느꼈다. 벵기의 찰루키아 왕자 라젠드라 찰루키아를 찬양하는 서사시 칼링가투파라니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을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에서 보냈고 촐라국의 왕자들과 사람들에게 친숙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비라라젠드라 촐라의 아들 아티라젠드라 촐라가 1070년 내란으로 암살되자, 라젠드라 찰루키아는 쿨로퉁가 1세(1070–1122)로 촐라 황제에 즉위하면서 후기 촐라 또는 찰루키아-촐라 시대를 시작하였다.[20]쿨로퉁가 1세는 삼촌 비자야디티야 7세와 화해하고 벵기를 평생 통치하도록 허락했다. 1075년 비자야디티야가 죽으면서 동찰루키아 왕조는 끝났고, 벵기는 촐라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쿨로퉁가 1세는 아들들을 대리인으로 보내 속주를 통치했다. 쿨로퉁가 1세와 비크라마디티야 6세 사이에 오랜 싸움이 벌어졌다. 쿨로퉁가의 긴 통치 기간은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고 신하들의 존경을 받는 성공과 번영으로 특징지어졌다. 쿨로퉁가의 성공은 이후 100년 동안 제국의 안녕을 가져왔지만, 스리랑카 섬의 영토를 잃고 판디아 영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후기 촐라 왕조는 쿨로퉁가 1세, 그의 아들 비크라마 촐라, 라자라자 2세, 라자디라자 2세, 칼링가, 일람, 카타하를 정복한 쿨로퉁가 3세와 같은 유능한 통치자들이 이끌었다. 쿨로퉁가 1세와 비크라마 촐라와 같은 후기 촐라 황제 치하에서도 벌어지던 찰루키아와의 전쟁은 주로 카르나타카의 찰루키아 영토나 벵기, 카킨나다, 아난타푸르, 구티와 같은 텔루구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그 후 이전의 호이살라, 세부나, 카카티야와 같은 봉신국들이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며 마침내 찰루키아를 대체하였다.[21] 비슈누바르바나 지배하의 호이살라에 의한 북부 중앙 카르나타카에 있는 다르와르 점령과 함께, 1149년경 호이살라의 수도인 드와라사무드라를 관리하는 아들 나라심하 1세와 함께 1150년에서 1151년경까지 35년 넘게 찰루키아의 수도를 점거한 칼라추리의 대두와 함께 찰루키아 왕국은 이미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쿨로퉁가 3세 치하의 촐라는 촐라 황제의 사위인 비라 발랄라 2세가 지배하던 호이살라를 지원하며 찰루키아의 해체를 가져오는데 협력하였으며, 1185년부터 1190년까지 소메슈바라 4세와의 일련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서찰루키아를 물리쳤다. 마지막 찰루키아 왕의 영토에는 찰루키아의 이전 수도인 바다미, 만야케타 또는 칼야니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로써 1135-1140년 이후로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찰루키아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1150년에서 1280년 사이에 촐라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는 전통적인 영토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판디아 제후였다. 이 기간 동안 촐라와 판디아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 촐라는 칼링가의 동강가와 정규전을 치렀고, 촐라의 지배에서 거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던 벵기를 보호하였으며, 또한 자신의 봉신국들인 텔루구 촐라, 벨라난티 촐라, 레난두 촐라 등과 함께 동부 해안을 지배하였다. 또한 항상 촐라의 랑카 점령을 전복하려고 시도한 싱할라인들과도 지속적으로 싸웠지만 이후 촐라 황제 쿨로퉁가 1세 시대까지 촐라는 랑카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이후 촐라 황제인 라자디라자 2세는 그들의 전통적인 친구인 랑카의 왕의 도움을 받은 5명의 판디아 제후 연합을 제압할 만큼 충분히 강했다. 쿨로퉁가 3세는 랑카 및 마두라이의 반란과 소란을 진압하여 촐라의 지배를 강화하고 카루부르에서 비라 발랄라 2세 휘하의 호이살라 장군을 물리쳤으며, 타밀 국가, 동부 강가바디, 드라크샤라마, 벵기 및 칼링가의 전통적인 영토를 유지하였다. 그 후, 그는 비라 발랄라 2세와 촐라 공주를 혼인시켜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호이살라와의 우호 관계를 개선시켰다.
2. 3. 1. 쇠퇴
라자라자 3세와 그의 후계자인 라젠드라 3세 시기에 촐라 제국은 여러 문제에 직면하며 쇠퇴하였다. 카다바 족장 코페룬칭가 1세는 라자라자 3세를 인질로 잡기도 하였다.[22] 12세기 말, 찰루키아 왕조가 쇠퇴하고 호이살라 왕조가 성장했지만, 세우나 왕조와 칼라추리 왕조 등 새로운 경쟁자들의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호이살라 왕조는 촐라 왕조와 혼인 관계를 맺은 비라 발랄라 2세를 통해 촐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는 라자라자 3세 시기까지 이어졌다.[23]호이살라는 타밀 국가들의 정치에 분열을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 그들은 타밀 왕국들 간의 단결 부족을 이용하여 촐라와 판디아가 모두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라자라자 3세 시기에 촐라 편을 들던 호이살라는 카다바 족장 코페루징가와 판디아를 물리치고 타밀 국가에서 영향력을 확립하였다. 라젠드라 3세는 촐라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북쪽으로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고,[22]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를 포함한 두 명의 판디아 왕자를 물리치고 판디아를 잠시 촐라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비라 소메슈와라 치하의 호이살라는 판디아의 편으로 돌아서며 촐라를 격퇴하였다.[23]
남부의 판디아 왕조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호이살라와 촐라를 모두 패배시켰다.[24]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칸나누르 쿠팜에서 호이살라를 물리치고 그곳을 점령했다.[24] 라젠드라 3세의 통치 말기에 판디아 제국은 번영의 절정에 있었고, 외국인 관찰자들은 촐라 제국이 판디아 제국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았다.[24] 1279년, 라젠드라 3세의 마지막 기록 이후 촐라 왕조의 뒤를 이은 황제에 대한 증거는 없다.[24]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에 의해 호이살라가 1279년경 칸나누르 쿠팜에서 패배하고, 같은 전쟁에서 마지막 촐라 황제 라젠드라 3세가 패배하면서 촐라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24]
3. 행정
촐라의 행정 시스템은 매우 조직적이고 효율적이었다. 황제는 행정의 중심이었고 모든 권한은 황제가 임명한 벨리르들이 행사했다. 현장 업무는 존경받는 장관들과 관련된 암발라카라르(지역 추장 또는 판차야트 지도자)가 처리했다.
촐라 관료제는 다른 관료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고도로 조직화되어 중앙 통제와 지방 분권 사이에 균형을 이루었다. 지방 정부에 대한 불간섭은 신성불가침이었다.
촐라의 정부 체제는 전제군주제였으며,[30] 촐라 군주는 "삼계의 황제"(트리부바나차크라바르티갈)로 불리며 절대적인 지위를 누렸다. 정부에서 황제의 역할은 진술이 있을 때 담당 관리들에게 구두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명령은 보통 사원 벽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며, 티루만디라 올라이 나야감이라는 특별 관리인이 구두 명령을 즉시 종려나무 잎에 기록했다. 촐라 중앙 정부의 각 부처 이름은 비문에서 발견되지만, 중앙 정부와 관련된 장관이나 관리에 대한 위원회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강력한 관료 집단이 황제의 행정 업무와 명령 집행을 도왔다. 현대적 의미의 입법부나 입법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군주 명령의 공정성은 사람의 선함과 법에 대한 믿음, 즉 공정함과 정의감에 달려 있었다. 촐라 황제는 사원을 짓고 막대한 부를 부여했다. 사원은 예배 장소일 뿐만 아니라 경제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여 지역 사회 전체에 혜택을 주었다. 왕국 전역 마을 생산물의 일부는 사원에 주어졌고, 사원은 정착지에 대한 대출로 축적된 부의 일부를 재투자했다. 촐라 제국의 행정 구역은 8개의 만달람(주)으로 세분화되었고,[30] 만달람은 발라나두(군), 발라나두는 코람(현) 등으로 세분화되었으며, 코람은 행정의 가장 작은 단위인 몇 개의 촌락으로 세분화되었다.[30]
라자라자 1세 이전까지 촐라 영토 상당수는 촐라 통치자와 느슨한 동맹을 맺은 세습 영주와 지역 제후가 통치했다. 그 후, 1133년 비크라마 촐라 치세에 이르러 촐라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까지, 이들은 사실상 촐라 기록에서 사라졌고 종속적인 관리로 바뀌었다. 이들을 통해 행정부가 개선되었고 촐라 황제들은 제국의 여러 지역을 더 세밀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특히 라자라자 1세 이후 행정 구조가 확대되었다. 당시 정부에는 계정 유지에 주로 관심이 있는 여러 계층으로 구성된 대규모 토지 수입 부서가 있었다. 세입의 평가와 징수는 우르, 나두, 사바, 나가람과 같은 단체와 때때로 세입을 중앙에 전달하는 지역 추장이 수행했다. 라자라자 1세 통치 기간 동안 국가는 대규모 토지 조사 및 평가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제국을 발라나두로 알려진 행정 단위로 재편성했다.
황제의 명령은 집행관이 먼저 지방 당국에 전달했으며, 그 후 거래 기록이 작성되고 지역 유력자나 정부 관리인 여러 증인이 이를 증명했다.[31]
촌락에서는 행정, 물 관리, 사법 등 마을에 필요한 위원회를 마련한 후, 각 위원회 운영에 참여할 만한 식견을 갖춘 사람의 이름을 나뭇잎에 적어 어린아이가 제비뽑기를 하는 방식으로 운영 위원을 선출했다. 촐라 제국의 이 같은 자치 제도는 마을 고유의 행정과 문화가 유지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2]
4. 사법
촐라 제국의 사법 제도는 중앙 집권적인 행정 체제와 지방 자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경미한 범죄는 벌금형이나 자선 기부로 처벌되었고, 중대한 범죄는 황제가 직접 재판하여 처형이나 재산 몰수 등의 형벌을 내렸다.[2] 민사, 형사 구분 없이 다양한 범죄를 다루었으며, 촌락회의와 나아야타르 위원회 등 지방 자치 기구에서 지역 분쟁을 해결했다.[1]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군주의 말에 동의해야 했다. 사법 절차나 법원 기록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다르마아사나라는 곳에서 벌금을 냈다. 절도, 간음, 위조와 같은 범죄는 심각한 범죄로 간주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형벌은 사찰에 영구등을 켜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살인도 벌금형에 처해졌는데, 라젠드라 2세는 군대 지휘관을 찌른 범인에게 이웃 사원의 등불을 위해 96마리의 양을 기부하도록 명령한 적도 있다. 1급 살인의 경우에도 사형은 드물었으며, 현재까지 사용 가능한 모든 기록에서 단 한 번의 사형 집행 사례만 발견되었다.
5. 군사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치세는 촐라 제국의 최전성기로, 이 시기 촐라 제국은 남쪽의 스리랑카섬과 몰디브 제도에서부터 북쪽의 고다바리강-크리슈나강 유역, 콘칸 해안, 말라바르 해안, 동남아시아의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하였다.[8][9] 라젠드라 1세는 스리위자야 해군을 무찌르고 인도양 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기도 했다.[12]
라자라자 1세에 의해 시작된 촐라 제국은 영토 확장과 유지를 위해 육군과 해군에 의존하였으며, 촐라 군주가 촐라군을 총체적으로 지도하였다.
촐라의 군대 모집 방법이나 군대의 영구 병력 수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봉건 시대에 전사와 군인의 자녀는 기사도 정신과 타밀 무술 전통에 따라 쉽게 군대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매우 강한 무술 전통을 가진 훈련된 세력이었으며, 일부 연대는 군 관습과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높은 수준의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상감 시대 타밀어에 카다감이라고 불리는 군주가 있다는 것은 정기적인 훈련과 군사 관행이 타밀 무술 전통의 일부로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5. 1. 육군
촐라 육군은 기병대, 전투 코끼리 군단, 보병 부대로 구성되었다.[33] 이들은 평상시에 전국 곳곳에 설치된 군사 시설인 코다감에 주둔하였다. 하우더를 얹은 전투 코끼리는 촐라 육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투 코끼리에 탄 병사들은 장거리에서 화살을 쏘고 근거리에서 창으로 싸우는 역할을 하였다.[33] 고대 힌두 문학에서 발견된 전통적인 전차 군단의 증거는 없으며, 대신 궁병(빌라리갈)과 같은 다른 병과들이 있었다.최전성기의 촐라군은 총 200만 명의 병사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 송나라의 지리학자 조여괄은 1225년경에 쓴 글에서 촐라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原文|원문|독음중국어 이 국가는 인도 서부 왕국과 전쟁 중이다. 정부는 높이가 7~8 피트인 6만 마리의 코끼리를 소유하고 있다. 이 코끼리와 싸울 때 이 코끼리는 집을 등지고, 이 집은 원거리에서 화살을 쏘고 가까운 곳에서 창으로 싸우는 병사들로 가득 차 있다.[33]
촐라 군인들은 강철로 만든 칼, 활, 투창, 창 및 방패와 같은 무기를 사용했으며,[34] 특히 남인도는 다마스쿠스 강으로도 알려진 "우츠 강"의 주요 원산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우츠 강"으로 만든 철제 무기 또한 사용되었다. 촐라 군대는 다양한 카스트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지만 카이콜라르와 벨라라르 카스트 출신의 전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촐라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대인 "벨라이카라파다이갈"도 촐라 군대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5. 2. 해군
촐라 함대는 고대 인도 해군력의 절정을 상징한다. 촐라를 포함한 모든 타밀 왕국들은 무기고에 일종의 해군을 지녔으며, 촐라는 고대 전통을 이어가고 해군력을 키우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35] 촐라 해군은 촐라 제국의 해군과 다른 여러 해군 군기로 구성되었는데, 초기에는 무역선 기반의 선박을 전함으로 사용하였지만 후기부터는 전투용으로 제작한 선박을 전함으로 사용하였으며, 정규 해군(카팔-파다이) 외에도 해상 전투에 투입되도록 편제된 보조부대가 존재하였다. 전성기 촐라 해군은 대양해군으로서의 자질과 100만의 병력을 보유한 아시아 최대의 해군이었다.[36]9~11세기 중세 촐라 시기에 촐라 해군의 규모는 점차 커지고 지위 또한 높아지면서 당시 아시아 전역에서 강력한 해양 및 외교 부대로 성장하였고 해상 무역로 또한 아라비아에서 중국으로 확장되었다. 파란타카 1세 치세에도 스리랑카의 수많은 침략에 상당한 해군이 관여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라자라자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의 치세 동안 촐라 해군에는 100만 이상의 해군 병사가 있었다.[37] 라자라자 1세(985-1014)의 치세 동안 촐라의 영토는 확장을 거듭해 몰디브에서 안드라프라데시의 고다바리 강 유역까지 뻗어 있었으며,[37] 1010년부터 1153년까지 라자라자 1세의 후계자들은 계속 확장하여 촐라 제국을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군사, 경제 및 문화 강국으로 만들었다.[38] 이 기간 동안 촐라 해군은 갠지스강을 따라 팔라 제국의 파탈리푸트라 원정과 서기 1025년 촐라의 스리위자야 침공을 통해 제국 확장을 도왔으며,[39] 지속적으로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라젠드라 촐라의 해군이 스리위자야에서 거둔 승리는 수세기의 해군 전통의 절정을 상징하였으며, 이 다차원적 힘을 통해 촐라는 몰디브에서 필리핀과 북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해양 제국과 로마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해상 무역로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스리랑카와 몰디브의 정복 및 중국에 파견된 대사관은 촐라 해군의 성공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동시기에 수많은 동남아시아 왕국에서 촐라 제독들이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3세기부터 촐라와 남인도 안드라-칸나다 지역의 찰루키아 간의 육상전이 벌어지고 판디아 또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촐라 해군은 점차 쇠퇴하였지만,[40] 이들의 활동으로 동남아시아의 언어, 예술, 건축 및 종교에 인도 문화의 유산이 지속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등 그 영향력은 여전하며, 이는 오늘날 발리 힌두교와 참 문화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경제
촐라 제국의 주요 수입원은 토지세와 무역세였다.[41] 농산물의 3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었는데, 화폐나 현물로 납부했다. 토지는 생산물에 따라 다르게 분류되었고, 세금은 생산량에 따라 결정되었다.[42] 이 외에도 무역, 광산, 염전 등에서 얻는 세금도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농부들은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으며,[46] 경제적으로 강력한 벨라라르 공동체를 형성하여 촐라 제국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기도 하였다.[46] 농업이 중요했기 때문에 촐라 황제들은 카베리강에 댐을 건설하고 호수를 만들어 농업 생산량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촐라 전국 각지에는 조직화된 상인 길드가 대내 상업을 주도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금속 산업과 보석상 예술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길드인 나나데시는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해 용병들을 고용하였으며, 칸치푸람과 마말라푸람과 같은 대규모의 항구 도시에는 "나가람"이라고 불리는 상인들의 현지 조직들도 존재하였다.
6. 1. 수공업
우라이유르는 초기 촐라 왕국의 수도로서 면직물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이곳에는 면직물 산업을 담당하는 직공 길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43] 모든 도시에서 직공들은 자체 주거 부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기에는 살리야르와 카이콜라르 주축의 직공 공동체들이 면직물 산업을 주도하였다. 촐라 제국 시대에 비단 직물은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칸치푸람은 비단 직물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44][45] 쳄비안 마데비와 같은 촐라 군주들이 금속 장인들에게 후원을 확대하면서 금속 산업 또한 발달하여 제철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가공된 우츠 강은 후에 다마스쿠스 강으로 알려지며 중동 및 유럽에도 전파되는 등 촐라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6. 2. 대외 무역
촐라 제국은 광범위한 해상 무역을 통해 번영하였다. 중국의 당나라, 샤일렌드라 왕조 치하의 스리위자야,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국은 촐라의 주요 무역 상대였다.[47] 9세기 말부터 촐라 제국은 동남아시아에 광범위한 해양 및 상업 활동을 전개하였는데,[47] 이때 촐라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한 마니그라맘과 아야볼레 등의 길드들이 대내외 무역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했다.[47] 라젠드라 1세때 촐라 제국이 스리위자야와 스리랑카섬으로 진출하면서 마니그라맘과 아야볼레 등의 길드들이 촐라 본토뿐만 아니라 스리위자야 지역에도 길드 거점을 형성해 활동하기도 하였다.[47]1025년 라젠드라 1세가 이끄는 촐라 해군이 동남아시아의 해상 강국인 스리비자야 해군을 격파한 이후 촐라는 인도양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며,[47][12] 중국, 스리위자야, 아바스 칼리파국 등과 주로 교류하기 시작하였다.[12]
면직물은 촐라 제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는데,[43] 초기 촐라 왕국의 수도였던 우라이유르는 면직물의 주요 생산지였으며,[43] 이곳의 면직물 산업을 담당하는 직공 길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43] 촐라 제국 시대에 비단 직물은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칸치푸람은 비단 직물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44][45] 쳄비안 마데비와 같은 촐라 군주들이 금속 장인들에게 후원을 확대하면서 금속 산업 또한 발달하여 제철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가공된 우츠 강은 후에 다마스쿠스 강으로 알려지며 중동 및 유럽에도 전파되는 등 촐라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촐라 전국 각지에는 조직화된 상인 길드가 대내 상업을 주도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금속 산업과 보석상 예술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길드인 나나데시는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해 용병들을 고용하였으며, 칸치푸람과 마말라푸람과 같은 대규모의 항구 도시에는 "나가람"이라고 불리는 상인들의 현지 조직들도 존재하였다.
특히 코끼리와 말을 얻으려 촐라 제국에 방문한 중국 상인들에게 숙박시설과 선물, 경비원들을 제공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과의 무역이 꽤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48] 송나라의 기록에는 1077년에 촐라 사절단이 중국 지역을 방문했다는 내용이 존재하는데 해당 기록에는 촐라의 군주를 티화키아로로 지칭하고 있으며, 이 사절단은 무역 벤처로서 이들은 유리 제품과 향신료를 포함한 일부 조공품을 바친 대가로 81,800현의 구리 동전을 회사품으로 가지고 귀환하였다. 당시 촐라 제국의 황제였던 쿨리안훙가 1세에 대해서도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중국과의 무역 활동뿐만 아니라 사신들을 파견하는 외교 관계 또한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촐라 제국의 사신들이 유리와 향신료를 포함한 공물을 조공으로 바치고 대신에 송나라 화폐를 얻어오는 등 일종의 조공 무역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수마트라에서 발견된 단편적인 타밀 비문에는 촐라국에서 가장 유명한 상인 길드인 나나데사 티사이야이라투 아인누트루바르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문은 1088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촐라 시대에 활발한 해외 무역이 있었음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7. 사회
촐라 시대에는 여러 길드, 지역 사회 및 카스트가 등장했다. 길드는 남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였으며 상인들은 길드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마니그라맘과 아야볼레 길드가 가장 잘 알려져 있었지만, 안주반남과 발란지야르와 같은 다른 길드도 존재했다. 농부들은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는데, 이들은 귀족층인 벨라라르 공동체를 구성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강력한 그룹이었다. 벨라라르 공동체는 촐라의 지배층 세속 귀족 계급으로, 재판관, 군 장교, 관료제 하층 계급, 농민 상류층 대부분이 이 공동체 출신이었다. 벨라라르 일부는 스리랑카 북부로 이주해 정착하기도 하였다. 울라바르 공동체는 농업과 관련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농민은 칼라마르로 알려졌다.
카이콜라르 공동체는 직조자이자 상인이었지만 군대에서도 활동하였다.[49] 촐라 제국 시기에 직공 및 상인과 같은 하위층들이 성장하면서 성전 관리와 토지 소유권에 큰 변화가 있었다. 본래 브라만들만 담당하던 성전 관리에 비브라만 카스트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토지 소유권 또한 브라만과 벨라라르만이 아닌 다른 계급 출신의 사람들도 지닐 수 있도록 바뀌었다. 촐라 제국에는 신분 제도가 존재했지만 계급 간의 통혼이 허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었다. 여성의 지위도 비교적 좋은 편으로 사회·종교적 행사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등 힌두 사회의 수많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상속권이 보장되어 여성도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촐라 제국에서는 여성의 사티가 그리 성행하지 않았으며 결혼은 대체로 일부일처제였다.
8. 교육 및 의료
촐라 제국은 만디르 주변을 중심으로 교육 기관과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등 인프라 발전에 적극적으로 힘썼다.
촐라 제국 시대에 기록된 비문은 촐라인들의 수준 높은 문해력을 보여준다. 비문의 내용은 궁정 시인이 작성했으며 재능있는 장인이 새겼다. 현대적 의미의 교육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부 마을 협의회가 어린이들에게 읽고 쓰기의 기초를 가르치는 학교를 조직했다는 정황 증거가 있지만, 대중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의 기록은 없다.[50] 직업 교육은 아버지가 자신의 기술을 아들에게 전수하는 훈련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중을 위한 교육의 매개체로 타밀어를 활용하였으며, 힌두교 수도원은 교육의 중심지로서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비라라젠드라 촐라 시기의 촐라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시설들은 베다, 샤스트라, 문법을 가르치고 학생들을 위한 병원, 연구를 위한 사원 내 자난나만다파의 학교를 유지하였는데, 학생들은 토요일에 음식, 목욕용 기름 및 애완동물용 기름을 제공받았다.
병원은 정부가 그 목적을 위해 땅을 제공한 촐라 왕에 의해 유지되었다. 티루무쿠달 비문은 비라솔란이라는 병원이 비라 촐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음을 보여주며, 촐라 황후 쿤다바이는 탄자부르에 병원을 설립하고 영구 유지 관리를 위해 토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51][52] 많은 질병이 병원의 의사들에 의해 치료되었으며, 주치의는 매년 80칼람의 논, 8카수스 및 토지 보조금을 지급받았다. 의사 외에 다른 유급 직원에는 간호사, 이발사(경미한 수술을 수행하는 사람) 및 뱃사공이 포함되었다.[53] 비라솔란 병원에서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다섯 개의 침대가 제공되었으며, 쌀, 의사, 외과 의사, 환자 간호를 위한 2명의 하녀 및 병원의 일반 하인들이 있었다.[54]
9. 관개 및 치수
촐라 제국 시기에는 타밀나두 전역, 특히 카베리 분지에서 농업이 크게 확장되었다. 우야콘단 운하, 라젠드란 바으칼(Rajendran vaykkal), 셈비안 마하데그비 바으칼(Sembian Mahadegvi vaykkal) 등 카베리 강의 운하 대부분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55]
마을 단위에서부터 잘 발달되고 효율적인 치수 관리 시스템이 운영되었다. 에리-바리암(탱크 위원회) 및 토타-바리암(정원 위원회)과 같은 위원회는 토지, 인력, 자금 등 막대한 자원을 가진 사원과 함께 작동했다. 촐라 시대에 건설된 수조는 매우 많다.[55]
특히 라젠드라 1세는 수도인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에 솔라강감이라는 거대한 물탱크를 건설했는데, 길이가 약 약 25.75km에 달했으며 인근 지역에 관개용 수로를 제공했다. 파란타카 촐라가 남 아르콧 카툼안나르코일 인근에 건설한 비라나메리 또한 오늘날에도 중요한 관개 시설로 이용되고 있으며, 이 외에도 마두란타캄, 순다라-촐라페레리, 쿤다바이-페레리 등의 유명한 호수들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55]
10. 문화
촐라 통치 아래 타밀 지역은 예술, 종교, 음악 및 문학 분야에서 새로운 수준의 우수성에 도달했다.[66][67][68][69] 촐라 시대는 팔라바 시대 초기에 시작된 여러 움직임들의 정점을 찍었으며, 장엄한 사원 형태의 기념비적 건축물과 석조 및 청동 조각은 이전 시기의 인도에서 달성하기 어려웠던 수준에 이르렀다.[15]
촐라는 카다람(케다)과 스리비자야를 정복하고 중화 제국과 지속적으로 상업적 접촉을 하면서 지역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56] 오늘날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되는 힌두교 문화의 영향은 촐라의 유산으로 인한 것이며, 인도네시아 프람바난의 거대한 사원 단지는 남인도 건축과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57][58] 믈라카 술탄국의 통치자들은 말레이 연대기 《세자라 멜라유》에서 자신들이 촐라 황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고,[59] 오늘날 말레이시아에는 페락주의 라자 쿨란처럼 이름이 촐란 또는 출란으로 끝나는 많은 왕자가 존재한다.[60]
촐라 제국 시대는 타밀 문학의 황금기로, 《라자라제스바라 나타캄》, 《비란우카비얌》, 《칸니바나 푸라남》 등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힌두교 부흥은 수많은 사원 건설을 촉진시켰고, 이는 시바파와 비슈누파 경전 문학을 낳았다.[61][62][63]
촐라의 주류 종교는 힌두교였다. 팔라바와 판디아 왕조처럼 불교와 자이나교의 부상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초기 촐라 시대의 힌두교도인 코센간난은 상감 문학에서 리쉬로 묘사되며 시바파 힌두교도들에게 칭송받았다.[64]
촐라 제국은 주신인 시바를 모시는 만디르들을 많이 지었지만, 아디티야 1세가 시바와 비슈누를 위한 만디르를 지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촐라 제국이 시바파 힌두교만을 믿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파란타카 2세는 카베리강 유역에 있는 안빌의 비슈누 신봉자로, 비슈누에게 많은 선물과 장식을 봉헌하거나 시바와 비슈누를 위한 수많은 만디르들을 건축하였으며, 전쟁을 시행하기 이전에 비슈누에게 기도를 올렸다. 라자라자 1세는 스리비자야 왕의 요청에 따라 나가파티남에 있던 불교 수도원인 추다마니 비하라를 개축하기도 하였다.
후기 촐라 시대에 비슈누파, 특히 종교 지도자인 라마누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10. 1. 건축 및 미술
촐라는 팔라바 왕국의 만디르 건축술을 물려받아 드라비다식 만디르 건축술을 크게 발전시켰다.[61] 촐라 제국은 카베리강변에 많은 시바파 힌두교 만디르를 지었으며, 후세 사원의 양식은 아디티야 1세와 파란타카가 공식화시켰다. 촐라 사원 건축은 팔라바 왕조가 물려준 과거의 풍부한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그 웅장함과 섬세한 솜씨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건축 역사가 제임스 페르구손은 "촐라 예술가들은 거인처럼 잉태되어 보석상처럼 완성되었다"고 말했다.[62] 후기 드라비다 건축을 대표하는 촐라 예술의 새로운 발전은 판디아 왕조 시대에 점차 형태를 취하고 성숙해진 사원의 외곽에 고푸람이라는 거대한 관문을 추가한 것이다.[63] 촐라의 건축 및 예술은 동남아시아로 확산되며 동남아시아의 건축과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64]사원 건축은 라자라자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의 정복 및 천재성으로 큰 자극을 받았다. 촐라 건축의 성숙함과 웅장함은 탄자부르와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의 두 사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09년경에 완공된 탄자부르의 장엄한 시바파 만디르인 브리하디스와라 만디르는 라자라자 시대의 물질적 업적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당시 모든 인도 사원 중 가장 크고 높은 규모를 지니며 남인도 건축의 정점에 서 있다.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에 있는 강가이콘다촐리스바람 사원은 라젠드라 1세가 전임자를 능가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탄자부르 사원이 건설된 지 불과 20년 후인 1030년경에 같은 양식으로 완성되었으며, 외관이 더 정교해짐에 따라 라젠드라가 통치하는 촐라 제국이 더 풍요로워진 상태임이 증명되었다. 이 두 사원은 다라수람에 위치한 아이라바테스바라 사원과 함께 대 촐라 사원이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오늘날에도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65]

촐라 시대는 조각품과 청동으로도 유명하다. 촐라 시대의 조각품은 힌두교의 유지의 신 비슈누와 그의 배우자 락슈미나 파괴의 신 시바의 다양한 모습들을 묘사한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에 의해 확립된 도상학적 관습을 따랐지만 조각품에 고전적인 우아함과 웅장함을 가미하려고 하던 11세기 및 12세기의 촐라 조각가들은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작품들을 조각하였으며, 이 양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한 사례로 춤추는 나타라자 동상을 들 수 있다.

10. 2. 문학
촐라 제국 시대는 타밀 문학의 황금기로, 《라자라제스바라 나타캄》, 《비란우카비얌》, 《칸니바나 푸라남》 등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만들어졌다.[66][67][68][69] 힌두교 부흥은 수많은 사원 건설을 촉진시켰고, 이는 시바파와 비슈누파 경전 문학을 낳았다.[70][71][72] 자이나교와 불교 문학가들도 존재했지만, 이전 시대보다 그 수는 적었다. 티루타카테바르의 《지바카친타마니》와 톨라몰리의 《술라마니》는 비힌두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대표적인 촐라 문학이다. 촐라의 불교 문학에서는 타밀어 문법에 "비라솔리얌"이라는 텍스트를 썼다. 주석은 전쟁의 윤리를 언급하는 《톨카피얌》이라는 작품에 사용되었다. 《페리아푸라남》은 촐라 제국의 국민 서사시로, 촐라 제국 백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쿨루퉁가 촐란 치세 동안 번성한 촐라 문학가인 쿨반은 발미키의 《라마야나》를 타밀 문학으로 재구성한 《라마바타람》을 저술했다. 이 서사시에서 라마찬드라가 다스리는 코살라는 촐라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겨졌다. 자얌콘다르가 저술한 《칼링가투파라니》는 역사와 가상의 관습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그리는 서사시로, 쿨루퉁가 1세 때 칼링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쟁을 묘사하고 전쟁의 화려함과 참혹함을 모두 담았다. 또 다른 촐라 시인인 오타쿠탄은 촐라 황제들의 미덕을 칭찬하는 시인 《쿨루퉁가 촐란 울라》를 썼다.
《난눌》은 촐라 시대의 타밀어 문법을 다루는 문학으로, 타밀어의 주요 5가지 문법을 모두 다루며 오늘날 가장 유명한 타밀어 문법 규범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촐라 제국에서는 타밀 문학뿐만 아니라 텔루구어 문학 또한 발전했다. 티캇나 소마야지, 아빈나바 단디 케타나, 마라나 및 소마나 등의 저명한 텔루구어 시인들이 이 시대에 활동하며 텔루구어 문학을 번성시켰다. 티캇나는 마하바라타를 텔루구어로 번역한 카비트리얌 중 한 명이다.[74]
작가 | 작품 |
---|---|
티캇나 소마야지 | 《니르바차노타라 라마얀나무》, 《안드라 마하바라타무》[73] |
아빈나바 단디 케타나 | 《다사쿠마라차리트라무》, 《비즈난네스와라무》, 《안드라 바샤브샤나무》[73] |
마라나 | 《마르칸데바 푸라나》[73] |
소마나 | 《바사바 푸라나》[73] |
신앙 문헌 중에서 시바파 정경을 11권으로 정리한 것은 10세기 말에 살았던 남비 안다르 남비의 작품이다. 후기 촐라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슈누파 작품이 작곡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에 대한 통치자의 명백한 적대감 때문일 것이다.
10. 3. 종교
촐라의 주류 종교는 힌두교였다. 팔라바와 판디아 왕조의 왕들처럼 불교와 자이나교의 부상에 흔들리지 않았다. 초기 촐라 시대의 힌두교도인 코센간난은 상감 문학에서 리쉬로 묘사되며 시바파 힌두교도들에게 칭송받았다.[75]촐라 제국은 주신인 시바를 모시는 만디르들을 많이 지었지만, 촐라 제국의 황제인 아디티야 1세가 시바와 비슈누를 위한 만디르를 지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촐라 제국이 시바파 힌두교만을 믿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890년대의 촐라 비문에 따르면 아디티야 1세는 서강가 왕국 서부의 스리랑가파트나에 있는 랑가 나타 사원 건축에 기여했는데, 이 지역은 그의 봉토였으며 결혼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파란타카 2세는 카베리강 유역에 있는 안빌의 비슈누(Vadivu Azhagiya Nambi) 신봉자로서 비슈누에게 많은 선물과 장식을 봉헌하거나 시바와 비슈누를 위한 수많은 만디르들을 건축하였으며, 칸치와 아코트를 되찾기 위해 라슈트라쿠타를 공격하거나 판디아와 스리랑카에 대한 원정대를 파견하는 등의 전쟁을 시행하기 이전에 비슈누에게 기도를 올렸다. 라자라자 1세는 스리비자야 왕인 스리 출라마니바르만의 요청에 따라 나가파티남에 존재하던 불교 수도원인 추다마니 비하라를 개축하기도 하였다.
후기 촐라 시대에 비슈누파, 특히 그들의 종교 지도자인 라마누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크리미칸타 촐라라고 불리는 촐라 황제는 라마누자를 박해했다고 하며, 17세기 문학인 <파르파난나므리탐>에서도 크리미칸다가 치담바람 나타라자 만디르에서 고빈다라자 신상을 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6] 일부 학자들이 크리미칸타 촐라를 쿨루퉁가 2세와 동일시하지만, 스리랑감 사원의 기록에 따르면 쿨루퉁가 2세는 크리미칸타 촐라의 아들로 크리미칸타와 달리 비슈누파를 지지하였고,[77][78] 라마누자는 쿨루퉁가 2세를 그의 조카인 다사라티의 제자로 삼았으며 그 후 왕은 라마누자의 소원에 따라 다사라티와 그의 후손들에게 랑가나타스와미 사원의 관리를 허락했다고 한다.[79][80] 역사가 닐라칸타 샤스트리는 크리미칸타 촐라와 아디라젠드라 촐라, 비라라젠드라 촐라를 구별하였다.[81][82] 1160년의 비문에 따르면 비슈누파와 사회 관계를 가진 시바파 힌두교 사원의 관리인은 재산을 몰수당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만, 이것은 촐라 황제가 공식적으로 선포한 칙령이 아닌 시바파 힌두교 공동체에서 규정한 규범으로 보인다. 촐라 황제가 시바를 위해 촐라 내에서 가장 큰 힌두교 사원을 지었고 라자라자 1세와 같은 황제가 "시바파다세카란"라는 별칭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들의 비문에서 촐라 황제는 촐라 제국이 시바파 힌두교만을 믿거나 시바파 힌두교가 촐라 제국의 국교라고 명시한 내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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