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노니아 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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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판노니아 속주는 기원전 4세기 이후 켈트족의 침략을 받은 지역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일리리쿰 속주에 병합되었다가 분할되었다. 로마 이전 시대에는 켈트족과 판노니아인, 그리고 스코르디스키족 등의 부족들이 거주했으며, 로마의 정복 이후에는 판노니아 수페리오르와 판노니아 인페리오르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주요 도시로는 아퀴쿰, 사바리아, 시르미움 등이 있었으며, 농업과 목재, 맥주 생산이 이루어졌다. 종교적으로는 유피테르 숭배와 함께 유대교, 기독교, 신비 종교 등이 존재했으며, 3세기 말 기독교 박해에도 기독교는 널리 퍼졌다. 판노니아라는 지명은 현대의 판노니아 평원에 그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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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노니아 속주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판노니아 속주 |
로마자 표기 | Pannonia (판노니아) |
시대 | 고전 고대 |
역사 | |
시작 | 일리리쿰에서 분리되어 설치 (8/9년) |
종료 | 서로마 제국이 판노니아를 훈족에게 공식적으로 양도 (433년) |
지리 | |
위치 | 현재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바키아 지역 |
수도 | 카르눈툼 시르미움 사바리아 아퀸쿰 포에토비오 빈도보나 |
인구 | |
민족 | 판노니아인 |
기타 | |
별칭 | 판노니아 |
2. 역사
기원전 35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 지역을 처음으로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그 전에는 대체로 인도유럽인 혈통의 켈트족이 거주하고 있었다.[13] 기원전 14년 로마 제국은 시르미움을 정복하여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기원후 6년 판노니아의 여러 부족들은 달마티아인들과 함께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바토니안 전쟁이라 부른다. 이 반란은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에 의해 3년에 걸쳐 진압되었다.[29] 티베리우스는 반란을 진압한 후 판노니아를 별도의 속주로 삼고 3개 군단을 주둔하게 했다.[29]
102년에서 107년경 트라야누스 황제는 판노니아 속주를 '''판노니아 수페리오르'''(서쪽)와 '''판노니아 인페리오르'''(동쪽)로 재분할했다.[37]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이 때의 분할 경계선은 북쪽의 아라보나(Arrabona, 현 죄르)에서 남쪽의 세르비티움(Servitium, 현 :en: Gradiška)을 잇는 선이었지만, 나중에는 경계선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판노니아는 4개로 분할되었다.[51]
- '''판노니아 프리마''' (Prima) - 북서부, 수도는 사바리아 (Savaria, 현 솜바트헤이)
- '''판노니아 발레리아''' (Valeria) - 북동부, 수도는 소피아나에 (Sopianae, 현 페치)
- '''판노니아 사비아''' (Savia) - 남서부, 수도는 시스키아 (Siscia, 현 시사크)
- '''판노니아 세쿤다''' (Secunda) - 남동부, 수도는 실미움 (Sirmium, 현 스렘스카 미트로비차)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현재의 슬로베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을 판노니아에서 제외하여 노리쿰 속주에 편입했다.[51]
5세기 중반,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 시대에 판노니아 속주는 훈족에게 할양되어 로마 제국의 속주에서 제외되었다.[52] 아틸라 사후, 이 지역은 동고트 왕국, 랑고바르드족, 아바르인, 슬라브족, 마자르족, 합스부르크 군주국, 오스만 제국 등 다양한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로 분할되었다.
2. 1. 로마 이전 시대

판노니아에는 원래 일리리아인에 가까운 부족인 판노니아족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이후, 이 지역은 많은 켈트족 부족의 침략을 받게 되지만, 그 당시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7]
기원전 35년, 당시 판노니아는 달마티아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초대 로마 제국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침공하여 시스키아(Siscia, 현 시사크)를 정복했다. 기원전 9년, 판노니아는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일리리쿰 속주에 병합되어 국경선이 도나우강까지 확장되었다.[8]
초기 철기 시대에 트란스다뉴비아에는 판노니아인 또는 판노니족이 거주했는데, 그들은 일리리아인 부족의 집단이었다. 켈트족은 후기 철기 시대에 침략해 왔고, 갈리아-로마 문화의 역사가 폼페이우스 트로구스는 켈트족이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트란스다뉴비아 남부를 점령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일부 부족들은 델포이까지 진출했고, 스코르디스키족은 철수를 강요받은 후 시르미아에 정착했다(기원전 279년). 켈트족의 트란스다뉴비아 도착은 발트해 지역에서 호박길을 통해 일리리아인으로 향하는 호박의 흐름을 방해했다. 그들은 많은 마을을 건설했다. 경제적으로 두드러진 중요성을 지닌 마을들은 ''오피둠''으로 발전했다. 독립 부족들은 지도자들의 얼굴을 새긴 자체 주화를 주조했다. 처음에는 마케도니아 주화의 형태를 본떴고, 나중에는 로마 통화를 본떴다.
스코르디스키족의 철수와 정착 이후, 그들과 다르다니족 (다르다니아)은 서로에게 대항하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다르다니족은 끊임없이 마케도니아를 침략했고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필리포스 5세는 다르다니족의 맹렬한 적이었고, 스코르디스키족과 동맹을 맺어 기원전 179년에 바스타르나이족 (다뉴브 삼각주)에게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가는 길에 그들을 정복하도록 설득했다. 필리포스가 기원전 197년 로마인에게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바스타르나이족이 다르다니-바스타르나이 전쟁에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다르다니족의 세력은 마케도니아와 스코르디스키족의 압력으로 붕괴되었다. 결국 페르세우스가 그들을 궤멸시켰고, 그 결과 발칸반도에서 스코르디스키족의 백 년 간의 패권이 열렸다. 이 시기에 부족은 새로운 마케도니아 속주를 침략하기 시작했고 —스트라보에 따르면— 파이오니아, 일리리아 및 트라키아까지 확장되었다.
기원전 181년 아퀼레이아의 건립은 로마가 판노니아를 점령하는 첫 단계였다. 이 도시는 호박길의 출발점이자 그 방향으로의 공격 지점으로 기능했다. 스코르디스키족은 달마타이족과 동맹을 맺고 기원전 156년과 기원전 119년 이른 시기부터 로마와 무력 충돌을 벌였다. 두 전쟁에서 로마는 핵심적 위치에 있던 시스키아(현재 시사크)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실패 이후 로마는 철과 은광이 모두 있는 노리쿰으로 방향을 돌렸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일어난 새로운 켈트족 이동의 일환으로, 보이족은 북부 이탈리아를 떠나 다뉴브 강 유역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포세이도니우스의 킴브리족 이동 기록(스트라보가 보존)에 따르면, 그들은 처음에는 보이족에게, 그 다음에는 스코르디스키족에게, 그 다음에는 타우리시족에게 쫓겨 헬베티족으로 향했다. 이것은 그 지역의 세력 균형을 묘사한다. 기원전 1세기 초에 다키아인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했다. 다뉴브 강과 티사 강 사이의 지역에 대한 그들의 지배는 느슨했지만, 그 너머의 영토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88년,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기원전 83년 집정관)는 스코르디스키족을 너무 심하게 격파하여 그들이 시르미아 동부로 물러났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다키아 왕 부레비스타는 기원전 65년에서 50년 사이에 그들을 정복했고, 그 후 보이족과 타우리시족도 정복했다. 이러한 세력의 쇠퇴 덕분에, 여러 지역 부족들이 독립과 영향력을 되찾았다.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가 북쪽에서 이탈리아를 침략하려던 미완의 계획(기원전 64년)의 맥락에서, 그가 건너려던 영토는 판노니아에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레비스타의 죽음 직후 (기원전 44년경), 다키아의 왕국도 붕괴되었고, 로마가 용인할 만한 세력은 이 지역에 남지 않았다.
2. 2. 로마의 정복
기원전 35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 지역을 처음으로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그 전에는 대체로 인도유럽인 혈통의 켈트족이 거주하고 있었다.[13] 드라바 강 북쪽의 부족들은 이 싸움이나 그 이후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같은 해, 옥타비아누스는 이아피데스와 판노니아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벌여 한 달간의 포위 끝에 시스키아를 점령하고 사바 강 계곡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13] 이것은 카이사르가 다키아 침공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려던 계획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의 암살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다키아의 위협"이라는 사기극을 핑계로 제2차 삼두정치에서 많은 토지를 확보하는 데 이용했다.[13]
기원전 15년, 훗날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는 스코르디스키족을 격파하여 동맹으로 만들었다. 이는 전년도의 판노니아인과 스코르디스키족의 침입에 대한 대응이었다.[14] 기원전 14년, 판노니아인들이 봉기하자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 지역으로 파견되었고, 기원전 13년 또 다른 반란 이후, 원정은 티베리우스가 이어받아[16] 기원전 11년에 개선식을 거행했다.[17] 일리리쿰 속주는 사바 강과 아드리아해 사이에 설립되었다.[17]
기원전 10년, 티베리우스는 판노니아인과 달마타이인의 새로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돌아왔다. 기원전 9년에 승리한 후, 그는 브레우치족과 아만티니족의 젊은이들을 이탈리아에서 노예로 팔았으며[18] 환호를 받았다. 기원전 12년에서 9년 사이의 그의 작전에는 드라바 강 북쪽 지역에 대한 끊임없는 원정이 포함되었으며, 거의 확실하게 트란스다누비아 전체를 로마의 지배 아래 두었다.[19]
기원전 10년, 판노니아는 다키아인들의 침략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제국의 국경을 확보하고 위협받는 새로운 땅을 방어하기 위해 도나우강을 통해 원정을 시작했다. 기원후 6년, 판노니아의 여러 부족들은 달마티아인들과 함께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바토니안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에 의해 3년에 걸쳐 진압되었다. 반군들은 이탈리아와 마케도니아를 침략하려 했지만, 실패하여 시르미움 (현재의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을 포위하기 위해 연합했다. 그곳에서 카에키나 세베루스가 반군을 격파했고, 그들은 프루슈카 고라 산맥으로 후퇴했다.[23] 티베리우스는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는데[25]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와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를 전쟁터로 보냈다.
기원후 9년, 판노니아는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일리리쿰 속주에 병합되어 국경선이 도나우강까지 확장되었다. 이후 일리리쿰 속주는 판노니아 속주와 달마티아 속주로 분할되었다. 분할 시기는 20년에서 50년 사이로 추정된다.
2. 3. 로마 제국의 통치
기원전 35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 지역에 진출하여 개척하기 시작했다.[29] 기원전 14년 로마 제국은 시르미움을 정복하여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였다.[29] 기원후 6년 판노니아의 여러 부족들은 달마티아인들과 함께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에 의해 3년에 걸쳐 진압되었다.[29] 티베리우스는 반란을 진압한 후 판노니아를 별도의 속주로 삼고 3개 군단을 주둔하게 했다.[29]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바토니아 전쟁'으로 다뉴브 강과 아드리아 해 사이의 모든 민족을 격파했다.[29] 판노니아의 징집 가능한 젊은이들은 다른 속주로 징집되어 지휘를 받았다.[29] 반란에 참여한 공동체는 이후 재정착되었고 군사적 감독하에 ''치비타테스''로 조직되었다.[29]
두 번째 황제 티베리우스는 속주에 여러 개의 ''콜로니아''를 설립하고 도로망을 개발했다.[29] 그러나 이 땅은 경작에 적합하지 않아 퇴역 군인들을 설득하여 정착시키는 것은 어려웠다.[29]
판노니아 점령을 완료하고 ''리메스'' 건설을 시작한 것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였다.[31]
처음 로마 행정부의 주요 목표는 속주 외부 야만족과의 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네로 시대에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엘리아누스에 의해 10만 명의 야만족이 판노니아에서 모에시아로 이주되었고,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에 의해 5만 명이 판노니아에 정착했을 수 있다.[32]
네 명의 황제의 해 (서기 69년)는 판노니아에서 평화롭게 지나갔다. 플라비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며 그의 군단을 이끌고 비텔리우스에 맞서 이탈리아로 진군했다.[33]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리메스"(국경 방어선) 건설에 많은 투자를 했다.[33]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 동안 야만족과의 비싼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군사적 중점은 다뉴브 국경으로 이동했다.[34]
103년에서 107년 사이, 트라야누스 황제는 속주를 판노니아 인페리오르와 판노니아 수페리오르로 분할했다. 이로써 제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게르만족과 사르마티아 부족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었다.[37]
로마 다키아 건설은 판노니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라야누스 다키아 전쟁에서 이아지게스는 로마와 동맹을 맺어 데케발루스에 의해 추방된 올테니아를 유지하려 했다.[39]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조용한 통치하에, 새로운 원정의 종결이 아닌 새로운 콰디족 왕의 임명을 통한 ''포에데라투스'' 관계의 재확립을 선전하는 몇몇 동전이 발행되었다.[4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 기간에 묻힌 것으로 보이는 동전 호드의 발견은 야만족의 공격으로 인한 혼란을 증명한다.[43]
전쟁의 두 번째 단계는 177년에 시작되었다. 공격하는 야만족은 제지되었고, 마르쿠스와 그의 아들인 새로 즉위한 코모두스 황제가 판노니아로 왔다.[47]
오황제의 해 (193년) 동안 판노니아에 대한 공격은 없었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군대를 이탈리아로 진군시켜 왕위를 차지하기 전에 협상을 통해 야만족을 진정시켰다.[50] 202년에 황실은 판노니아를 대대적으로 방문했다. 이 방문과 세베루스 치세 동안 속주는 많은 건설 혜택을 받았다.[51]
판노니아 수페리오르는 이전 단일 속주를 관리했던 집정관 레가투스(Legatus)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세 개의 군단을 통제했다. 판노니아 인페리오르는 처음에는 단일 군단을 주둔시킨 프라에토리아누스 레가투스(Legatus)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에는 집정관 레가투스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여전히 군단 하나만 주둔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아엘리아 무르시아와 아엘리아 아퀴쿰 두 식민지를 건설하여 도나우 강 전선을 보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지역을 4개로 분할했다.[51]
- 북서부에 위치한 판노니아 프리마는 수도가 사바리아였으며, 판노니아 수페리오르와 라바 강과 드라바 강 사이의 중앙 판노니아 대부분을 포함했다.
- 북동부에 위치한 판노니아 발레리아는 수도가 소피아나에였으며, 라바 강, 드라바 강, 도나우 강 사이의 중앙 판노니아의 나머지를 포함했다.
- 남서부에 위치한 판노니아 사비아는 수도가 시스치아였다.
- 남동부에 위치한 판노니아 세쿤다는 수도가 시르미움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또한 오늘날 슬로베니아의 일부를 판노니아에서 분리하여 노리쿰에 통합했다.[51] 서기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판노니아의 경계를 동쪽으로 확장했다.
4~5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교구 중 하나가 판노니아 교구로 알려졌다. 수도는 시르미움이었다.
2. 4. 로마 이후 시대
4세기 로마인들은 빌라를 요새화하고 야만족을 변방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358년에는 사르마티아인에 대한 대승을 거두었지만, 약탈은 끊이지 않았다. 401년에는 서고트족이 훈족을 피해 이 지역으로 도망쳐 왔고, 변경을 지키던 민족들은 그들을 피해 이탈리아로 도망쳤지만, 동 판노니아의 양도와 맞바꿔 울딘에게 패배했다. 433년 로마는 부르군트족이 로마 갈리아를 공격하는 것을 진압하기 위해 이 지역을 아틸라에게 완전히 넘겨주었다.[52]
5세기 민족 이동 시대 동안, 433년 서로마 제국의 군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 의해 판노니아의 일부가 훈족에게 할양되었다.[52] 454년 훈족 제국이 붕괴된 후, 많은 수의 동고트족이 황제 마르키아누스에 의해 포에데라티로서 이 지역에 정착했다.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동안 6세기에 판노니아 남부를 통제했다. 판노니아 비잔틴 속주는 시르미움을 수도로 일시적으로 부활했지만, 역사적 판노니아의 작은 남동부 지역만을 포함했다.
이후 560년대에 아바르족이 다시 침략했고, 처음에는 480년대에 정착했지만 7세기부터 독립한 슬라브족도 침략했다. 790년대에는 프랑크족이 침략했으며, 이들은 새로 형성된 국경 지역인 판노니아 변경백령을 지정하기 위해 "판노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판노니아라는 용어는 하부 판노니아와 같은 슬라브족 정체에도 사용되었으며, 이는 프랑크 제국의 봉신이었다.
로마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서 판노니아 라틴어라고 불리는 라틴어 방언이 발전했지만, 여러 주요 정치적 변동으로 인해 6세기경에 소멸되었다.[53]
5세기 중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시대에, 판노니아 속주는 훈족에게 할양되어, 로마 제국의 속주가 아니게 되었다.
훈족의 왕 아틸라의 사후, 이 지역은 차례차례 지배자가 바뀌었다: 동고트 왕국 (456년 - 471년), 랑고바르드족 (530년 - 568년), 아바르인 (560년대 - 약 800년), 슬라브족 (480년경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800년경 - 900년경은 독립을 달성했다), 마자르족 (현 헝가리인)(900년 또는 901년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국, 및 오스만 제국 (1526년 - 1878년). 제1차 세계 대전 후,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로 분할되었다.
3. 주요 도시
국가 | 도시 | 위치 |
---|---|---|
오스트리아 | 카르눈툼, 빈도보나 | 페트로넬, 바트 도이치-알텐부르크, 빈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살다에, 세르비눔, 카스트룸과 카나베아 | 브르치코, 그라디슈카, 도보이 |
크로아티아 | 아드 노바스, 안다우토니아, 아쿠아 비바, 아쿠아이 발리사에, 체르티사, 치발라이, 코르나쿰, 쿠키움, 할리카눔, 이오비아, 마르소니아, 무르사, 시스치아, 토이토부르기움 | 즈마예바츠, 쉬치타리에보, 페트리야네츠, 다루바르, 자코보, 빈코브치, 소틴, 일로크, 스베티 마틴 나 무리, 루드브레그, 슬라본스키 브로드, 오시예크, 시사크, 달 |
헝가리 | 아드 플렉섬, 아드 무레스, 아드 스타투아스, 알리스카, 알타 리파, 아퀴쿰, 아라보나, 브리게티오, 카이사리아나, 캄포나, 키르피, 콘트라-아퀴쿰, 콘트라 콘스탄티암, 고르시움-헤르쿨리아, 인테르치사, 이오비아, 루기오, 루소니움, 마트리카, 모르겐티아나에, 무르셀라, 콰드라타, 살라, 사바리아, 스카르반티아, 솔바, 소피아나에, 울키시아 카스트라, 발쿰 | 모숀마자르오바르, 아치, 바슈푸스타, 바르돔브, 세크사르드, 톨나, 오부다, 죄르, 쇠니, 발라차, 나지테테니, 두나보그다니, 부다페스트, 두나케시, 타츠, 두나우이바로시, 사크치, 두나세크초, 두나쾨멜뢰드, 사즐할롬바타, 튀슈케바르, 모리치히다, 레베니, 잘라뢰뵈, 솜바트헤이, 쇼프론, 에스테르곰, 페치, 센텐드레, 페네크푸스타 |
세르비아 | 아쿠민쿰, 아드 헤르쿨라에, 바시아나에, 보노니아, 부르게나에, 쿠숨, 그라이오, 오나그리눔, 리티움, 시르미움, 타우루눔 | 스타리 슬란카멘, 초르타노브치, 도니 페트로브치, 바노슈토르, 노비 바노브치, 페트로바라딘, 스렘스카 라차, 베게치, 수르두크, 스렘스카 미트로비차, 제문 |
슬로바키아 | 게룰라타 | 루소프체 |
슬로베니아 | 첼레아, 네비오두눔, 포에토비오 | 첼레, 드르노보, 프투이 |
판노니아의 주요 도시는 대부분 로마 제국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원주민 시절에는 여러 마을이 모여 주를 형성했다.
4. 경제
이 지역은 꽤 생산성이 높았으며, 특히 프로부스와 갈레리우스가 거대한 숲을 개간한 이후 더욱 발전했다. 그 이전에는 목재가 가장 중요한 수출품 중 하나였다. 주요 농산물은 귀리와 보리였으며, 주민들은 이것으로 '사바에아'라는 일종의 맥주를 양조했다. 포도와 올리브 나무는 거의 재배되지 않았다. 판노니아는 사냥개의 품종으로도 유명했다. 고대 문헌에는 광물 자원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철과 은 광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판노니아의 노예 제도는 초기에 설립된 속주들보다 경제에서 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유한 시민들은 집안일을 하는 노예를 두었고, 토지를 하사받은 군인들은 노예를 시켜 경작하게 했다. 노예들은 주로 서부 도시의 작업장에서 부유한 사업가들을 위해 일했다. 아퀴쿰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노예가 해방되었다.[1]
5. 종교
판노니아에는 제국의 공식 신인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를 위한 신전이 있었고, 고대 켈트 신들을 위한 신전도 있었다. 아퀴쿰에는 어머니 여신을 위한 신전이 있었다. 황제 숭배도 존재했다. 또한, 유대교와 동방의 신비 종교도 나타났으며, 후자는 미트라, 이시스, 아누비스, 세라피스를 중심으로 했다.[1]
기독교는 2세기에 속주 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3세기 말의 대규모 박해 기간에도 인기가 줄어들지 않았다. 4세기에는 바실리카와 장례 예배당이 세워졌다. 사바리아의 성 퀴리누스 교회와 아퀴쿰, 소피아네, 페네크푸스타에서 수많은 초기 기독교 기념물이, 그리고 차코프에서 아리안 기독교 기념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
6. 유산
고대 지명인 판노니아(Pannonia)는 현대 용어인 판노니아 평원에 남아있다.
참조
[1]
서적
Lonely Planet Vienna
https://books.google[...]
Lonely Planet
[2]
웹사이트
The third book of history: containing ancient history in connection with ancient geography
https://books.google[...]
[3]
서적
The Archaeology of Roman Panno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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