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동방식민운동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동방식민운동(Ostsiedlung)은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중부 및 동유럽으로 독일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역사적 과정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초기 중세 시대의 게르만족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동방 정책을 배경으로 시작되었으며, 특히 샤를마뉴 시대에 국경 지역에 변경백령이 설치되면서 기반이 마련되었다. 동방식민운동은 독일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인, 덴마크인, 스코틀랜드인 등 다양한 민족이 참여했으며, 토지 소유권과 법적 지위 향상 등의 특권을 제공받은 정착민들은 북동부 독일, 보헤미아, 프로이센, 헝가리 등지로 흩어져 정착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도시법의 도입과 기독교화가 이루어졌으며, 슬라브족과의 언어 및 문화 교류도 발생했다. 14세기 후반 흑사병과 후스 전쟁 등으로 인해 둔화되었으며, 19세기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팽창주의적 해석을 낳기도 했다. 20세기 전쟁과 민족주의 정책으로 인해 동유럽의 민족 구성이 변화하면서, 독일인 추방과 영토 변경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구독일 동부 영토 - 동프로이센
    동프로이센은 발트해 연안에 위치했던 역사적 지역으로, 튜턴 기사단,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을 거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로 분할되었다.
  • 구독일 동부 영토 - 포젠주
    포젠주는 대폴란드 지역에 위치했던 프로이센 왕국 및 독일 제국의 주로,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았으나 폴란드 민족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 대부분의 지역이 폴란드에 할양되었다.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역사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은 1815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국에서 승격되어 독일 제국의 주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 혁명으로 대공이 퇴위하며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자유주가 되었다가 나치에 의해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와 통합되어 현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일부가 되었다.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역사 - 노이브란덴부르크구
    노이브란덴부르크구는 1952년 동독 행정 구역 개편으로 신설되어 동독 북동부에 위치했으며, 1990년 독일 재통일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와 브란덴부르크 주에 편입되었다.
  • 신성 로마 제국 -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은 30년 전쟁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위해 활약한 보헤미아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했으나 독자적인 행보로 인해 암살당했다.
  • 신성 로마 제국 - 괴팅겐 대학교
    1737년 조지 2세에 의해 설립된 괴팅겐 대학교는 독일 니더작센주에 위치한 공법상 재단 형태의 종합대학교로, 수학, 자연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들과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연구 중심 대학이다.
동방식민운동
개요
명칭동방 식민 (東方植民)
독일어 명칭Ostsiedlung (오스트지들룽)
의미동쪽 정착
다른 독일어 명칭Ostkolonisation (오스트콜로니자치온)
라틴어 명칭Germania Slavica (게르마니아 슬라비카)
시기중세 시대 (주로 12세기 ~ 14세기)
대상 지역엘베강잘레강 동쪽의 슬라브족 거주 지역
동유럽
배경
인구 증가서유럽의 인구 증가
농업 기술 발전농업 기술의 발전
정치적 동기동유럽 통치자들의 장려 정책
과정 및 특징
정착민주로 독일인
일부 네덜란드인, 플랑드르인
유치현지 영주들이 정착민 유치
세금 감면, 자치권 부여 등의 혜택 제공
식민 방식계획적인 도시 건설
농촌 지역의 개간 및 정착
법적 지위독일법 (Magdeburger Recht) 적용
자치적인 공동체 형성
영향
문화적 영향독일 문화의 동유럽 전파
도시 계획, 건축 양식 등에 영향
경제적 영향농업 생산성 향상
상업 및 무역 활성화
정치적 영향독일 세력 확장
슬라브족과의 갈등 심화
인종 구성 변화동유럽 지역의 인종 구성 변화
논쟁
역사적 해석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긍정적 평가
원주민에 대한 차별 및 억압 강조
용어 사용'Ostsiedlung' 용어의 적절성에 대한 논쟁
'동방 확장' (Osterweiterung)과의 구분 필요성
같이 보기
관련 항목독일기사단
한자 동맹
신성 로마 제국
독일의 역사
동유럽의 역사

2. 역사적 배경

민족 이동 이후 게르만족의 정주 지역 동쪽 경계는 대략 엘베강과 그 지류인 잘레강, 보헤미아의 숲과 바이에른 경계를 잇는 선이었으며, 그 이동은 슬라브족의 거주지였다. 10세기 이후, 이 지역의 기독교 교회가 정력적으로 활동을 펼쳐 다수의 주교좌가 건설되었다.[83]

동시대 서유럽에는 동방 식민 외에도 레콩키스타십자군 운동과 같은 대량 이동 현상이 있었다. 9세기 이후 농업 기술의 진화로 인구가 증가하여 서유럽 세계가 팽창하였고, 영주 간의 항쟁에서 패배한 기사 계층과 도망 농민이 동방 식민의 주체가 되었다.[83]

영방 제후와 기사단은 식민 사업을 Lokator|로카토르영어라는 청부인에게 위임했다. 로카토르는 독일 본국에서 식민자를 모집하여 이끌고 식민 마을을 건설했다. 로카토르는 촌장으로서 재판권 등의 특권을 부여받아 촌민으로부터 지대를 징수하여 영주인 제후와 기사단에 납부했다. 발트해 연안의 해항 도시나 비교적 큰 상업 도시처럼, 한자 동맹 도시나 본국의 도시가 모도시가 되어 상인단이 딸 도시(Tochterstadt)를 건설한 곳도 있지만, 내륙의 중·소 도시는 대부분 로카토르의 청부로 건설되었다.

2. 1. 초기 중세 유럽 (4세기 ~ 9세기)

민족 대이동 시대인 4세기와 5세기에, 게르만 민족은 쇠퇴하는 서로마 제국을 장악하여 그 안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한편, 과거 게르만족의 영토였던 동유럽과 오늘날의 동부 독일 지역에는 슬라브족이 정착했다.

2. 2. 동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9세기 ~ 12세기)

8세기에서 9세기 동안 프랑크족의 카롤링거 제국 통치자 샤를마뉴는 여러 국경 지역, 즉 변방(Marken)을 만들었다.[9][10] 이 변방 지역의 상당 부분에서 나중에 동방식민운동(Ostsiedlung)이 일어났다. 샤를마뉴 치하에서 기록되고 계획된 최초의 "동방 정책"은 프랑크 제국의 동부 국경을 보호하고 북쪽의 오보트리테스와 빌체스, 튀링겐 동쪽의 소르브족과 체코 부족 공작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여 동쪽에서의 입지를 굳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슬라브족과 게르만 부족 사이에 민족적, 언어적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으므로, 슬라브족의 정착은 튀링겐과 북부 바이에른에서 계속되었고, 심지어 개별 슬라브족은 라인 분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13]

이러한 변경백령에 거주하는 부족들은 일반적으로 제국의 믿을 수 없는 동맹국이었으며, 후계 왕들은 그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군사 작전을 수행했지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다.

843년, 카롤링거 제국은 샤를마뉴의 세 손자 사이에서 분할 상속 관습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장자 상속을 도입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인해 세 개의 독립 왕국으로 분할되었다.[14]

루트비히 독일인은 동프랑크를 상속받았는데, 이는 라인강 동쪽과 이탈리아 북쪽에 있는 모든 영토를 포함하며, 이는 대략 독일 줄기 공국의 영토와 일치하며, 이들은 초대 왕 사냥꾼 하인리히(919년에서 936년) 아래에서 연방을 형성했다. 동프랑크(962년 이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 내에 살았던 슬라브족은 통틀어 벤드 또는 "엘베 슬라브족"이라고 불렸으며, 큰 정치적 실체를 거의 형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부 알프스 산맥과 보헤미아에서 잘레강과 엘베강에 이르는 선까지 정착하는 다양한 작은 부족들을 구성했다. 동프랑크 왕국이 확장되면서, 오보트리테족과 같이 동프랑크와 정복하거나 동맹을 맺은 다양한 벤드 부족들이 서게르만족 작센족을 물리치는 데 프랑크족을 도왔다.[15] 제국의 주변부에 변경백령을 설치하는 카롤링거 왕조의 전통은 11세기와 12세기 동안 동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왕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루트비히 독일인과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왕의 통치 하에, 최초의 민간인 가톨릭 정착민들은 프랑크족과 바이에른족에 의해 파노니아(오늘날의 부르겐란트, 헝가리,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로 이끌렸다.

일련의 징벌적 조치로, 서쪽의 엘베, 잘레, 나아브 강과 동쪽의 오데르, 보버, 크비사, 블타바 강 사이의 북동부의 넓은 영토가 정복되었고 (라크사 전투 참조), 이 지역에 국경 변경백령이 설치되었다. 요새가 점령되고 새로운 성이 건설되었으며, 군사 통제를 행사하고 공물을 징수하기 위해 군대가 보강되었다. 민간인 정착민은 이러한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 기독교화는 뤼베크, 브란덴부르크 또는 하벨베르크와 같은 선교 교구의 설립으로 제한되었다. 본당 교회 시스템의 개발은 12세기 후반부터 독일 식민지 개척민들의 정착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이미 정복된 지역에 대한 통제는 반복적으로 상실되었다. 983년의 슬라브족 반란과 1066년의 오보트리테족 봉기는 특히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16][17]

2. 3. 본격적인 동방 식민 (12세기 ~ 14세기)

게르만인의 정주 지역 동쪽 경계는 대략 엘베강과 그 지류인 잘레강, 보헤미아 숲과 바이에른 경계를 잇는 선이었으며, 그 이동은 슬라브인의 거주지였다. 10세기 이후, 이 지역의 기독교 교회가 정력적으로 활동을 펼쳐 다수의 주교좌가 건설되었다.[83]

동시대 서유럽에는 동방 식민 외에도 레콩키스타십자군 운동과 같은 대량 이동 현상이 있었다. 9세기 이후 농업 기술의 진화로 인구가 증가하여 서유럽 세계가 팽창하였고, 영주 간의 항쟁에서 패배한 기사 계층과 도망 농민이 동방 식민의 주체가 되었다.[83]

영방 제후와 기사단은 Lokator|로카토르영어라고 불리는 청부인에게 식민 사업을 위임했다. 로카토르는 독일 본국에서 식민자를 모집하여 이끌고 식민 마을을 건설했다. 로카토르는 촌장으로서 재판권 등의 특권을 부여받아 촌민으로부터 지대를 징수하여 영주인 제후와 기사단에 납부했다. 발트해 연안의 해항 도시나 비교적 큰 상업 도시처럼, 한자 동맹 도시나 본국의 도시가 모도시가 되어 상인단이 딸 도시(Tochterstadt)를 건설한 곳도 있지만, 내륙의 중·소 도시는 대부분 로카토르의 청부로 건설되었다.

테라 마리아나(중세 리보니아, 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Livonian Crusade|리보니아 십자군영어 이후 식민지화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는 브란덴부르크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1164년 작센 공작 하인리히 3세는 메클렌부르크 영토를 얻었다. 1181년 프리드리히 1세 황제 시대에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라니아 (현 폴란드)는 신성 로마 제국이 되었다.

1226년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는 이교도 프로이센인에 대한 정벌과 교화에 어려움을 겪고[84], 쿨름란트 영유권과 교환하여 당시 헝가리에 있던 독일 기사단을 초빙했다.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정복하여 기사단국 영토가 되었다.

13세기, 전 유럽을 뒤흔든 몽골의 유럽 침공영어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모든 기독교도에게 이교도 침략과 싸우라는 칙서를 발했다. 기사 수도회는 방어를 명령받았다.

몽골의 폴란드 침공과 폴란드의 내전 또한 동방 식민을 진전시켰다. 국왕의 도시화 촉진 정책으로 유대인도 독일 상인과 함께 초빙되었다.

식민지 각지에서 독일 도시법마그데부르크법이 채택되어 동방 식민의 목적으로 도시와 공방을 건설, 각지에 시를 형성하여 국가의 근대화가 수행되었다.

1308년 포메렐리아까지 영지를 확대했다. 1346년 덴마크 왕은 에스토니아 왕국을 기사단에 매각했다.[85]

3. 주요 정착 지역

테라 마리아나(리보니아 십자군 이후 중세 리보니아, 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식민지화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알브레히트 1세는 브란덴부르크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1164년 작센 공작 하인리히 3세는 메클렌부르크 영토를 얻었다. 1181년 프리드리히 1세 황제 시대에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라니아 (현 폴란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사자공 하인리히는 많은 플랑드르인들을 메클렌부르크에 정착시켰다. 한자동맹의 결성은 발트해북해에서 지배적인 무역 공화국이 되었고, 해안 도시에서 더 많은 독일인들이 정착할 수 있게 했다.[28]

벤드 십자군 이후, 알브레히트 곰은 1157년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건설하고 확장하였다. 이 지역은 983년 이후 헤벨리와 루티치 부족이 지배했던 전 북부 변경백국의 대략적인 영토였다. 반란을 일으킨 루티치 부족이 점령했던 하펠베르크 주교구는 벤드를 기독교화하기 위해 재건되었다.[29]

1226년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는 이교도 프로이센인에 대한 정벌과 교화에 어려움을 겪고[84], 쿨름란트 영유권과 교환하여 당시 헝가리에 있던 독일 기사단을 초빙했다.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정복하여 기사단국 영토가 되었다. 1308년 포메렐리아까지 영지를 확대했으며, 1346년 덴마크 왕은 에스토니아 왕국을 기사단에 매각했다.[85]

1410년 독일 기사단 영토


독일 기사단 국가는 리보니아 십자군, 프로이센 십자군과 전반적인 북방 십자군의 결과로 프로이센, 포메라니아, 리보니아 지역에 형성되었다. 1207년 2월 2일[39]에 신성 로마 제국의 공국으로 설립되었으며[40], 1215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교황청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선포되었다.[41]

헝가리의 이슈트반 1세는 독일인 사제, 수도원장 등을 초청하여 수도원을 세우고 헝가리의 개종을 장려했다. 이 독일인들의 후손들은 상인, 사무원, 농부 등이 되었고 자유 농민의 지위를 받았다. 1149년 헝가리의 게저 2세는 남부 트란실바니아에 독일인 정착민들을 초청했다. 기록에는 그들을 "플라망", "튜턴", "라틴"이라고 불렀으며, "작센"이라는 용어는 1206년에 나타나 1231년에는 현지 독일인들의 공식 용어가 되었다. 이 용어는 국적보다는 법적 지위를 나타냈다.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은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도자기, 예술, 그리고 전례는 통일되지 않았다. 12세기와 13세기에 더 많은 독일인들이 헝가리에 도착하여 Königsboden|쾨니히스보덴de이라고 알려진 분산된 마을에 살았다. 13세기 중반까지, 그들의 무역 (특히 포조니, 페슈트, 너지솜바트)과 금과 은 광업 (특히 베스테르체와 로드나)에서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슈트반 1세가 바이에른의 기젤라와 결혼했을 때, 많은 독일 기사들이 헝가리로 와서 군대에 합류했으며, 종종 넓은 영지와 귀족 신분으로 보상을 받았다. 1224년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는 왕국 내 독일인들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헌장을 서명했다. 왕은 세금 납부, 군 복무, 왕과 그의 관리들의 숙소 제공과 같은 그들의 의무를 정의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와 관리들을 독립적으로 선출할 수 있었고, 그들의 상인들은 관세에서 면제되었으며, 시장 또한 과세되지 않았다. 군주와 헤르만슈타트 백작만이 관할권을 가진 독일 땅에서는 외부인이 마을이나 영지를 받을 수 없었다.

3. 1. 북동부 독일과 홀슈타인

1108년,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의 측근에 있는 플랑드르 성직자"로부터 벤드족을 상대로 한 십자군 원정 요청이 있었다. 이 요청은 새로운 정착민들에게 수익성 있는 토지를 약속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21][22]

1124년에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출신의 첫 정착민들이 도착했지만, 이들은 아이더 강 남쪽에 정착했다. 1139년 바그리 지역 정복, 1143년 뤼베크 건국, 샤우엔부르크의 아돌프 2세 백작의 동부 홀슈타인과 포메라니아 정착 요청이 이어졌다.[23][24]

3. 2. 보헤미아

스피티흐네프 1세 공작이 모라비아의 종속에서 벗어나 895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동프랑크 왕 카린티아의 아르눌프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보헤미아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시작되었다.[31] 973년 프라하 주교구가 창설되면서 마인츠 대주교구에 종속되었고, 이는 독일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11세기에 브레티슬라프 1세는 폴란드를 상대로 원정을 벌여 실레시아를 재정복[32]하고, 성 아달베르트의 유물을 프라하로 옮겨 프라하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고자 했다. 이로 인해 독일 왕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와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고, 결국 브레티슬라프는 폴란드에서의 정복을 포기하고 하인리히를 자신의 주권자로 인정해야 했다.[33] 이후 보헤미아는 또 다른 침략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북쪽과 남쪽으로의 폴란드와 헝가리의 팽창주의 때문에 독일에 충성을 유지했다. 독일의 서임권 투쟁 시대에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폴란드-보헤미아의 적대감을 이용하여 독일-보헤미아 관계를 결정적으로 고정시켰다. 1080년, 황제의 기치 아래 싸운 브라티슬라프 1세는 플라르하임 전투에서 교황의 대립왕 라인펠덴의 루돌프의 황금 창을 빼앗았다. 이러한 충성에 대한 보헤미아의 보상은 6년 후인 1086년에 이루어졌는데, 하인리히 4세는 공작을 왕의 지위로 격상시켰다.[34]

독일 정착민들은 주로 상인, 광부, 농부, 수도사였다. 프라하의 무역 박람회는 유럽 전역의 많은 상인들을 끌어모았고, 많은 독일인들이 프라하에 정착하여 프라하 전체 인구의 거의 4분의 1을 차지하기도 했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그들에게 중요한 특권을 부여했는데, 특히 자신들이 선출한 치안 판사 아래에서 자치권을 갖는 권리와 독일 법에 따라 생활할 권리가 그것이었다.[34] 12세기 후반과 13세기 초에 산악 국경 지대(일명 ''수데텐란트'')에 독일인들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이는 오늘날 북동부 독일의 성공적인 정착으로 인해 발생했다. 최초 정착 산악 지역은 에거란트였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남쪽 가장자리가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동맹이었던 디폴트 3세의 통제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발트자센 수도원은 에거 계곡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최초의 독일 마을은 1196년에 세워진 페네리트와 노이도르프였다. 바이에른인과 오스트리아인은 남쪽 가장자리에, 동프랑크는 중앙 가장자리에, 작센 광부는 북쪽 가장자리, 특히 에르츠게비르게에 정착했다. 메클렌부르크,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과는 달리, 독일의 정착은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으며, 동독에서처럼 많은 체코인들이 동화되지도 않았다. 독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매년 더 많은 정착민들이 도착하자 소베슬라프 2세는 독일로부터 체코인들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껴 오스트리아 공작 헨리 2세에게 특정 보헤미아 영토에 대한 주장을 포기할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이어진 전쟁에서 패배했다. 이로 인해 소베슬라프의 후계자 프리드리히와 콘라트 2세는 혼란의 시기에 통치하게 되었다. 이는 13세기 동안 더 많은 정착을 가능하게 했으며, 많은 체코 도시들조차 너무 많은 독일 정착민들을 받아들여 사실상 독일화되었고 독일인이 다수가 되었다.[35] 귀족들에게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면서, 즈비코프 성이 "부르크 클링겐베르크"로 변경되는 등 많은 성과 마을 이름이 독일화되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의 통치하에, 가장 두드러진 군사 기사단인 구호 기사단조차 독일 정착민들을 보헤미아 땅으로 데려와 정착시키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 기간 동안, 독일 정착민들은 지역 기반 시설 유지 관리와 같은 다양한 의무가 포함된 현지 주판 법에서 면제되었다. 1219년, 리토미에르지체 (Leitmeritz|라이트메리츠de)는 보헤미아에서 마그데부르크 법의 특권을 받은 최초의 독일 도시였다.[36] 13~14세기 동안 독일 정착민 6명 중 1명이 보헤미아로 향했는데, 이는 상부 작센, 루사티아, 하부 슐레지엔보다 낮지만, 여전히 상당한 수치이다.[37]

3. 3. 프로이센과 발트 지역

사자공 하인리히는 많은 플랑드르인들을 메클렌부르크에 정착시켰다. 한자동맹의 결성은 발트해북해에서 지배적인 무역 공화국이 되었고, 해안 도시에서 더 많은 독일인들이 정착할 수 있게 했다.[28]

벤드 십자군 이후, 알브레히트 곰은 983년 이후 헤벨리와 루티치 부족이 지배했던 전 북부 변경백국의 대략적인 영토인 1157년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건설하고 확장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루티치 부족이 점령했던 하펠베르크 주교구는 벤드를 기독교화하기 위해 재건되었다.[29]

1164년, 작센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가 페르헨 전투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보트리테와 포메라니아 공작들을 마침내 물리친 후, 데민과 슈테틴의 포메라니아 공작령은 작센 봉토가 되었고, 오보트리테 영토는 메클렌부르크성의 오보트리테 주거 수도의 이름을 따서 메클렌부르크가 되었다. 사자공 하인리히가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의 내부 투쟁에서 패배한 후,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라니아는 1181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가 되었다.[30]

1164년 작센 공작 하인리히 3세는 메클렌부르크 영토를 얻었다. 1181년, 프리드리히 1세 황제 시대에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라니아 (현 폴란드)는 신성 로마 제국이 되었다.

1226년,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는 이교도 프로이센인에 대한 정벌과 교화에 어려움을 겪고[84], 쿨름란트 영유권과 교환하여 당시 헝가리에 있던 독일 기사단을 초빙했다.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정복하여 기사단국 영토가 되었다. 1308년, 포메렐리아까지 영지를 확대했다. 1346년, 덴마크 왕은 에스토니아 왕국을 기사단에 매각했다.[85]

독일 기사단 국가는 리보니아 십자군, 프로이센 십자군의 결과와 전반적으로 북방 십자군의 결과로 프로이센, 포메라니아, 리보니아 지역에 형성되었다. 1207년 2월 2일[39]에 신성 로마 제국의 공국으로 설립되었으며[40], 1215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교황청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선포되었다.[41]

독일 기사단 국가는 포괄적인 행정 구조를 확립했으며, 이 지역의 오래된 전통적인 부족 구조를 현대화했다. 기사단의 핵심 부분은 이교도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 외에도,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 독일인 정착민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독일인 정착민은 주로 그루지옹츠(Graudenz), 엘블롱크(Elbing), 리가와 같은 도시로 갔다.[42][43] 정착민들은 또한 독일어로 ''Vorwerke''라고 불리는 수많은 농촌 정착지를 건설했다. 대부분의 정착민은 라인란트 지역에서 왔다. 독일 기사단은 정복한 영토를 통합하기 위해 칼리닌그라드와 같은 인구 밀집 지역 근처에 수많은 성과 기타 토지를 건설했다. 동프로이센은 독일화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리보니아는 내륙 정착 시도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인구가 매우 적었다. 리보니아의 독일인들은 주로 행정 목적을 위해 거기에 있던 독일 기사단의 직원 또는 해안 도시에 정착한 한자 동맹의 상인이었다.[44]

3. 4. 헝가리

헝가리의 이슈트반 1세는 독일인 사제, 수도원장 등을 초청하여 수도원을 세우고 헝가리의 개종을 장려했다. 이 독일인들의 후손들은 상인, 사무원, 농부 등이 되었고 자유 농민의 지위를 받았다. 1149년, 헝가리의 게저 2세는 남부 트란실바니아에 독일인 정착민들을 초청했다. 기록에는 그들을 "플라망", "튜턴", "라틴"이라고 불렀으며, "작센"이라는 용어는 1206년에 나타나 1231년에는 현지 독일인들의 공식 용어가 되었다. 이 용어는 국적보다는 법적 지위를 나타냈다.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들은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도자기, 예술, 그리고 전례는 통일되지 않았다. 12세기와 13세기에 더 많은 독일인들이 헝가리에 도착하여 Königsboden|쾨니히스보덴de이라고 알려진 분산된 마을에 살았다. 13세기 중반까지, 그들의 무역 (특히 포조니, 페슈트, 너지솜바트)과 금과 은 광업 (특히 베스테르체와 로드나)에서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슈트반 1세가 바이에른의 기젤라와 결혼했을 때, 많은 독일 기사들이 헝가리로 와서 군대에 합류했으며, 종종 넓은 영지와 귀족 신분으로 보상을 받았다. 1224년,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는 왕국 내 독일인들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헌장을 서명했다. 왕은 세금 납부, 군 복무, 왕과 그의 관리들의 숙소 제공과 같은 그들의 의무를 정의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와 관리들을 독립적으로 선출할 수 있었고, 그들의 상인들은 관세에서 면제되었으며, 시장 또한 과세되지 않았다. 군주와 헤르만슈타트 백작만이 관할권을 가진 독일 땅에서는 외부인이 마을이나 영지를 받을 수 없었다.

4.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독일 왕국의 인구는 약 400만 명에서 1,20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46][47] 이 시기에는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산림 지역을 개간하는 대대적인 영토 개척이 이루어졌다.[48] 그러나 새로운 토지와 정착촌 건설에도 불구하고 인구 수요를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또한, 상속 자격이 없는 귀족 자녀들은 십자군 전쟁 이후 제국 주변 지역에서 새로운 토지를 얻을 기회를 찾았다.[56]

초기 식민지화 단계에서는 독일법을 가져온 독일 정착민들이 동부 중부 지역에 많이 유입되었다. 이들 외에도 왈론인, 유대인, 네덜란드인, 플랑드르인, 폴란드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이주해 왔다.[49] 발저인들은 스위스 영토에서 고대 로마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이주하여 알프스 계곡 고지대에 마을을 세웠다.[50]

중세 온난기와 함께 삼포식 농법 도입, 쟁기 사용 등 농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구가 전반적으로 증가했다.[51] 새로운 정착민들은 농업과 수공업 분야의 신기술과 장비를 가져왔고, 대규모 산림 지역 개간으로 경작지가 크게 늘었다.[51] 도공들은 새로운 용기 형태와 경질 소성 공정을 도입하여 도자기 품질을 향상시켰다.[53] 건축 분야에서는 통나무집과 반목골조 양식이 결합된 새로운 유형의 주택이 등장했다.[53]

게르마니아 슬라비카 개발은 도시 설립과 관련이 있었다. 슬라브족 성곽 도시가 이미 존재했지만, 12세기 말부터 새로운 정착민과 확장을 통해 도시가 실질적으로 성장했다.[58][65] 독일 도시법 도입으로 도시는 광범위한 행정 및 사법 권한을 부여받았고, 도시민들은 개인적 자유와 재산권을 누렸다.[59] 마그데부르크법과 뤼베크법은 대부분 도시에서 모델 역할을 했다.[60]

오토 1세 황제 통치 시기부터 벤드족에 대한 기독교화 시도가 있었지만, 슬라브족 봉기로 인해 중단되었다.[62] 1150년경부터 새로운 정착민들의 유입으로 엘베 강과 오데르 강 사이 지역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졌다.[62] 시토회는 신앙 전파와 정착지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2]

동방 식민 운동은 독일어와 슬라브어 사이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언어 접촉은 직접적이거나 무역, 정치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슬라브어 단어가 독일어에 차용되거나, 반대로 독일어 단어가 슬라브어에 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도시 이름도 언어 교환의 영향을 받았다.

범주영어독일어폴란드어체코어슬로바키아어헝가리어
행정시장Bürgermeister|뷔르거마이스터deburmistrz|부르미스트시plpurkmistr|푸르크미스트르csrichtár|리흐타르sk / burgmajster|부르그마이스테르skpolgármester|폴가르메스테르hu
행정변경백Markgraf|마르크그라프demargrabia|마르그라비아plmarkrabě|마르크라베csmarkgróf|마르크그로프skőrgróf|외르그로프hu
공예벽돌Ziegel|치겔decegła|체그와plcihla|치흘라cstehla|테흘라sktégla|테글러hu
음식프레첼Brezel|브레첼deprecel|프레첼plpreclík|프레츨리크cspraclík|프라츨리크skperec|페레츠hu
음식기름Öl|욀deolej|올레이plolej|올레이csolej|올레이skolaj|얼러이hu
농업방앗간Mühle|뮐레demłyn|므윈plmlýn|믈린csmlyn|믈린skmalom|멀롬hu (mahlen|말렌hu)
무역(수레) 짐Fuhre|푸레defura|푸라plfůra|푸라csfúra|푸라skfurik|푸리크hu
기타플루트Flöte|플뢰테deflet|플레트plflétna|플레트나csflauta|플라우타skflóta|플로터hu



슬라브 및 벤드 지명이 광범위하게 채택되면서 동독 지명과 지명의 상당수가 독일식으로 바뀌었다. 새로 만들어진 마을에는 독일어 이름이 부여되기도 했다. 독일 성씨의 약 25%가 슬라브어 기원인 것으로 추정된다.[71][72]

가장 흔한 순서부터 적은 순서대로[73]
성씨기원과 의미
노바크(Nowak)슬라브어, now-/nov- 새로운 (Neu|노이de) + -ak로 "새로운 정착민" (Neuansiedler|노이안지들러de)을 의미한다.
노아크(Noack)소르브어, nowy 새로운 (Neu|노이de) + -ak로 "새로운 정착민" (Neuansiedler|노이안지들러de)을 의미한다.
크레취머(Kretschmer)체코어, krčmář는 "선술집 주인"을 의미한다.
밀케(Mielke)슬라브어, mil- "사랑스러운, 소중한" (Lieb, Teuer|리프, 토이어de) + -ek가 붙은 별칭
슈텐젤(Stenzel)폴란드어 별칭 스타니스와프(Stanisław)
카민스키(Kaminski)폴란드어, 정착지 이름 - kamień "돌" (Stein|슈타인de) + -ski
비에초레크(Wieczorek)폴란드어, wieczor "저녁" (Abend|아벤트de) + -ek
코발스키(Kowalski)폴란드어, 정착지 이름 또는 kowal "대장장이" (Schmied|슈미트de) + -ski
그라보프스키(Grabowski)폴란드어, 정착지 이름 + -ski
얀코프스키(Jankowski)폴란드어, 정착지 이름 또는 별칭 야네크(Janek) + -owski


4. 1. 기술 및 농업 발전

중세 온난기가 11세기에 시작되어 중부 유럽의 평균 기온이 상승하면서 방앗간 건설, 삼포식 농법, 곡물 재배 증가 등 농업 분야의 기술 발전이 이루어져 전반적인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51]

새로운 정착민들은 농업과 수공업 분야에서 수십 년 안에 적응된 새로운 기술과 장비를 가져왔다.[51] 대규모 산림 지역이 개간되면서 경작지가 증가했는데, 토지 증가 정도는 지역별로 달랐다. 11세기 초 실레지아에서는 경작지가 전체 면적의 두 배(16%)로 늘었고, 16세기에는 30%에 달했으며, 14세기에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동방식민운동'' 기간 동안 많은 실레지아 지역의 경작지 총면적이 7배에서 20배까지 증가했다. 농업 혁신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농지 배치와 정착지 구조화(토지 분할 및 분류)가 도입되었다. 농지는 ''Hufende''(영국 하이드)으로 분할되었고, 4~8개의 농가로 구성된 이전의 소규모 마을을 대체하여 대규모 마을이 등장하면서 ''이전의 정착지 구조가 완전히 변환''되었다. 중세 정착 과정에 의해 형성된 동유럽 중부의 문화적 경관은 오늘날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되고 있다.[51]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정착민들은 12세기 초 메클렌부르크로 이주한 최초의 이민자 중 하나였다. 숙련된 수리 기술자들이었던 그들은 엘베강 동쪽의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의 정착지에서 높은 수요를 받았다. 이 지역은 작은 배수로 네트워크를 만들어 물을 주요 배수로로 배출하여 배수되었다. 정착민의 개별 농장을 연결하는 도로는 이러한 주요 참호를 따라 이어졌다.[52]

이랑(ridge and furrow)이 있는 삼포제(Three-field system)


슬라브족은 독일 정착민이 도착하기 전에 쟁기 및 농기구를 사용했다. 13세기 중반에는 삼포제가 엘베강 동쪽에 도입되었다. 이 새로운 경작 방식은 흙을 깊게 파서 한 번에 뒤집는 무거운 쟁기날 쟁기의 사용을 필요로 했다. 귀리와 호밀의 파종과 재배가 장려되었고, 곧 이 곡물은 가장 중요한 종류의 곡물이 되었다. 쟁기날 쟁기를 사용한 농부들은 이중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51]

도공들은 또한 농촌 지역에 정착한 최초의 장인 집단에 속했다. 서부 정착민들의 유입으로 새로운 용기 형태가 도입되었으며, 이에는 도자기 품질을 향상시키는 경질 소성 공정이 포함되었다. 이 유형의 도자기는 '경질 회색 도기'(Hard Grayware)로 알려졌으며, 12세기 말까지 엘베강 동쪽으로 널리 퍼졌다. 이는 13세기까지 포메라니아에서 광범위하게 생산되었는데, 이때 터널 가마와 같은 더 진보된 제조 방법이 도자기 가정용품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에는 나무로 만들어졌던 냄비, 물병, 주전자, 그릇과 같은 가정용품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새로운 판매 시장의 발전을 촉진했다.[53]

쇤나의 목골조 주택


엘베강 동쪽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소르브족)은 주로 통나무집을 지었는데, 이는 해당 지역의 기후에 적합했고 대륙 지역에 목재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이 지역으로 진출한 독일 정착민들은 주로 프랑코니아와 튀링겐 출신으로, 게르만 민족에게 이미 알려진 목재 절약형의 견고하고 안정적인 건축 방식인 반목골조 양식을 가져왔는데, 이는 다층 건물을 가능하게 했다. 두 가지 건축 방식을 결합하는 것은 어려웠는데, 통나무 방의 수평으로 쌓인 목재는 틀의 수직 기둥보다 높이에서 다르게 팽창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1층 블록 주위에 목조 틀을 갖춘 새로운 유형의 반목골조 주택이 생겨났고, 이는 2층을 지탱할 수 있었으며, 2층은 반목골조로 만들어졌다.[53]

4. 2. 도시 발전과 도시법

게르마니아 슬라비카la의 개발은 도시의 설립과 관련이 있었다. 이미 슬라브족 성곽 도시가 존재했으며, 상인 구역은 요새화된 거점(grad)에 교외를 형성했다. 벤디쉬-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은 발트해 연안에 제조 및 무역 정착지(emporia)를 설립했다. 주요 도시로는 9,000명의 인구에 달하는 슈체친, 크라쿠프브로츠와프가 있었으며, 중세 폴란드의 주요 도시이자 권력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2세기 말부터 새로운 정착민과 확장을 통해 실질적인 성장을 경험했다(locatio civitatisla). 예를 들어 하펠베르크에 주교구를 설립하면 도시가 발전하게 되었지만, 노이브란덴부르크와 같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도시가 설립되기도 했다. 도시의 특징은 주요 거리, 교차축 및 중앙 시장이 있는 기하학적 또는 래스터화된 평면도였다. 서로 다른 정착 단계는 "새 도시" 또는 "구 도시"와 같은 쌍둥이 도시 이름에 반영되었다.[58][65]

Ostsiedlungde 동안 설립된 도시는 "자유 도시"(civitates liberaela)였으며, 당시에는 "새 도시"라고 불렸다. 도시 수가 급증하면서 "동유럽 중부의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새로운 도시는 이전 도시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달랐다.

  • 독일 도시법의 도입으로 도시에 광범위한 행정 및 사법 권한이 부여되었다. 도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유로웠고 광범위한 재산권을 누렸으며, 도시의 관할권에만 속했다. 도시에 부여된 특권은 때로는 약간의 변경을 거쳐 뤼베크 법[59], 마그데부르크 법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 현대 작센, 루사티아, 실레지아, 북부 보헤미아, 북부 모라비아 및 튜턴 기사단령, 보헤미아 남서부의 뉘른베르크 법, 모라비아의 브륀 법(브르노)은 비엔나의 헌장에 근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광산 지역의 이글라우 법(지흘라바)에 복사되었다.[60] 이러한 기본 도시법 외에도 여러 개의 개정된 도시 헌장이 있었다.[60]
  • 영구 시장의 도입으로 이전에는 시장이 주기적으로만 열렸지만, 이제 도시 사람들은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었고, 시장은 새로운 도시의 중심적인 특징이 되었다.
  • 레이아웃: 새로운 도시는 일반적으로 레이아웃이 직사각형이므로 계획된 도시였다.[61]


도시 권한의 부여는 독일인 정착민을 유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 헌장은 새로운 거주민과 기존의 교외 정착지에 시장을 특권으로 부여했으며, 공식적인 도시 헌장을 받은 후 재건축되거나 확장되었다. 심지어 원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정착지조차도 결국 이러한 새로운 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 기존의 교외 정착지와 관계없이, 새로운 도시를 완전히 건설하기 위해 입지자들이 위촉되었으며, 목표는 새로운 번성하는 인구 중심지를 만들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유치하는 것이었다.

독일 도시법 중 마그데부르크법과 뤼베크법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다소 수정된 형태로 모델 역할을 하여 새로운 정착지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지역적으로 중요한 다른 도시법으로는 뉘른베르크법, 메클렌부르크법, 이글라우법 등이 있다. 1188년의 뤼베크법은 13세기와 14세기에 발트해 전체 무역 지역의 약 100개 도시의 모델 역할을 했다. 15세기 초에는 약 35만 명이 뤼베크법에 따라 살았다. 마그데부르크의 비히만 대주교가 부여한 특권에서 유래한 마그데부르크법은 처음에는 브란덴부르크, 작센, 루사티아로 퍼져나갔다. 마그데부르크 모델에 기초한 법률(예: 쿨름/헬름노법 및 노이마르크트/슈로다법)은 실레시아, 튜튼 기사단 영토, 보헤미아, 모라비아 및 그 너머의 폴란드에 도입되었다.

식민지 각지에서 독일 도시법마그데부르크법이 채택되어 동방 식민의 목적으로 도시와 공방을 건설, 각지에 시를 형성하여 국가의 근대화가 수행되었다.

4. 3. 종교적 변화

오토 1세 황제의 통치와 엘베 강 동쪽에 교구를 설립하면서, 이교도 벤드족은 기독교화 시도의 대상이 되었다. 983년 슬라브족의 봉기로 이러한 노력은 거의 200년 동안 중단되었다.[62] 서기 1000년 이전에 기독교화된 체코인과 폴란드인과는 대조적으로, 엘베 슬라브족에 대한 개종 시도는 처음에는 폭력을 동반했다. 1150년경부터 새로운 정착민들의 유입은 엘베 강과 오데르 강 사이 지역의 시민 기독교화를 이끌었다.[62] 새로운 정착민들은 처음에는 나무로, 나중에는 밭에서 나는 돌로 마을에 교회를 지었다. 브란덴부르크의 성 마리아 교회와 레닌 수도원과 같은 일부 예배 장소는 이교도 신사 위에 지어졌다.[62] 교회 당국이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시토회는 신앙 전파와 정착지 개발을 결합했으며, 국제적인 연결망을 가진 그들의 수도원은 지역 사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2]

10세기 이후, 이 지역의 기독교 교회는 정력적으로 활동하여 다수의 주교좌를 건설했다.

4. 4. 언어 및 문화 교류

"동방 식민 운동"은 독일어와 슬라브어 사이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직접적인 접촉은 언어 사용자들이 가까이 살거나 양쪽 언어를 모두 사용하면서 이루어졌고, 멀리 떨어진 접촉은 무역이나 정치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원시 게르만어와 원시 슬라브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를 들어 슬라브어 단어 는 거의 모든 슬라브어에서 발견됩니다. 독일어는 주로 공예, 정치, 농업, 음식과 관련된 슬라브어 단어를 받아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지 독일어 cihlagoh, 중고 독일어 ziegalagmh, ziegelgmh (벽돌)은 라틴어 'tegula'의 발음 변화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반대로 슬라브어에서 게르만어로 차용된 예로는 "국경"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중고 독일어에서는 Grenizegmh라고 불리는데, 이는 옛 체코어 단어 granicĕcs 또는 폴란드어 단어 granicapl를 빌려온 것입니다.

도시 이름도 언어 교환, 발음 변화, 슬라브어 제2구개음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레겐스부르크(Regensburgde)는 체코어로는 Řeznocs, 원시 슬라브어로는 라고 불립니다. 집중적인 언어 접촉으로 인해 관용구도 전파되었습니다. 체코어와 폴란드어의 예로는 na vlastní pěstcs / na własną rękępl ('스스로'), ozbrojený po zubycs / uzbrojony po zębypl ('이빨까지 무장')이 있으며, 헝가리어에서는 saját szakállárahu ('자신의 수염으로'), állig felfegyverzetthu ('턱까지 무장')로 표현되는데, 단어는 다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68][69]

범주영어독일어폴란드어체코어슬로바키아어헝가리어
행정시장Bürgermeisterdeburmistrzplpurkmistrcsrichtársk / burgmajsterskpolgármesterhu
행정변경백Markgrafdemargrabiaplmarkraběcsmarkgrófskőrgrófhu
공예벽돌Ziegeldecegłaplcihlacstehlasktéglahu
음식프레첼Brezeldeprecelplpreclíkcspraclíkskperechu
음식기름Öldeolejplolejcsolejskolajhu
농업방앗간Mühledemłynplmlýncsmlynskmalomhu (mahlenhu)
무역(수레) 짐Fuhredefuraplfůracsfúraskfurikhu
기타플루트Flötedefletplflétnacsflautaskflótahu



슬라브 및 벤드(Wendish) 지명이 광범위하게 채택되면서 동독 지명과 지명의 상당수가 독일식으로 바뀌거나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ow'' (독일식 -aude, 슈판다우(Spandau)와 같이), ''-vitz'' 또는 ''-witz'', 때로는 ''-in''과 같은 어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마을에는 북쪽의 -dorfde 또는 -hagende, 남쪽의 -rodede 또는 -hainde과 같이 독일어 이름이 부여되었습니다. 정착민의 출생지 이름(예: 플랑드르의 리히터펠데(Lichtervelde)) 또한 지명의 일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독일 정착지가 벤드 정착지와 함께 세워진 경우, Wendendorfde의 이름도 독일 마을에 채택될 수 있었으며, 이후 추가적인 부분을 통해 구분이 이루어졌습니다(예: 벤덴도르프(Wendendorf)의 경우 Klein-de 또는 Wendisch-de / Windisch-de, 독일의 경우 Groß-de 또는 Deutsch-de).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는 상속된 대부분의 성씨가 Ostsiedlungde 시대 이후에 형성되었으며, 많은 독일 성씨는 독일화된 벤드 지명입니다. 독일 성씨의 약 25%가 슬라브어 기원인 것으로 추정되며,[71][72] 대부분은 폴란드어입니다.

가장 흔한 순서부터 적은 순서대로[73]
성씨기원과 의미
노바크(Nowak)슬라브어, now-/nov- 새로운 () + -ak로 "새로운 정착민" ()을 의미합니다.
노아크(Noack)소르브어, nowy 새로운 () + -ak로 "새로운 정착민" ()을 의미합니다.
크레취머(Kretschmer)체코어, krčmář는 "선술집 주인"을 의미합니다.
밀케(Mielke)슬라브어, mil- "사랑스러운, 소중한" () + -ek가 붙은 별칭
슈텐젤(Stenzel)폴란드어 별칭 스타니스와프(Stanisław)
카민스키(Kaminski)폴란드어, 정착지 이름 - kamień "돌" () + -ski
비에초레크(Wieczorek)폴란드어, wieczor "저녁" () + -ek
코발스키(Kowalski)폴란드어, 정착지 이름 또는 kowal "대장장이" () + -ski
그라보프스키(Grabowski)폴란드어, 정착지 이름 + -ski
얀코프스키(Jankowski)폴란드어, 정착지 이름 또는 별칭 야네크(Janek) + -owski


5. 동화와 갈등

독일의 동방 팽창 895–1400


''동방 식민 운동''(Ostsiedlung)은 중앙 및 동유럽 전역에서 급격한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12세기와 13세기 동안 인구 밀도가 상당히 증가했는데, 이는 이주민의 유입과 정착 이후 슬라브 인구 증가 때문이었다.[54] 서유럽과 달리 이 인구 증가는 14세기의 흑사병 팬데믹으로 인해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55]

독일 정착민들과 함께 새로운 세금 제도가 도입되었다. 기존의 벤드(Wendish) 십일조는 마을 규모에 따라 결정되는 고정세였지만, 독일의 십일조는 실제 작물 수확량에 따라 결정되었다. 따라서 정착민들은 벤드족보다 더 높은 세금을 징수했지만, 정착 초기 몇 년 동안은 세금 납부에서 일부 면제되었다.[51][56]

5. 1. 동화

벤디시 십자군 이후, 알브레히트 곰은 983년 이후 헤벨리와 루티치 부족이 지배했던 전 북부 변경백국의 대략적인 영토인 1157년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건설하고 확장했다. 반란을 일으킨 루티치 부족이 점령했던 하펠베르크 주교구는 벤드족을 기독교화하기 위해 재건되었다.[29]

1164년, 작센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가 페르헨 전투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보트리테와 포메라니아 공작들을 마침내 물리친 후, 데민과 슈테틴의 포메라니아 공작령은 작센 봉토가 되었고, 오보트리테 영토는 메클렌부르크성의 오보트리테 주거 수도의 이름을 따서 메클렌부르크가 되었다. 사자공 하인리히가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의 내부 투쟁에서 패배한 후,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라니아는 1181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가 되었다.[30]

''동방 식민 운동''(Ostsiedlung)은 중앙 및 동유럽 전역에서 즉각적인 급격한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12세기와 13세기 동안 인구 밀도가 상당히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는 한편으로는 이주민의 유입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착 이후 슬라브 인구의 증가로 인한 것이었다. 정착은 예를 들어 오데르강 동쪽 지역, 포메라니아 공국, 서부 대폴란드, 실레시아,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프로이센트란실바니아에서 인구 증가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중앙 및 동유럽의 더 넓은 지역에서는 토착 인구가 성장의 원인이었다. 저자 피스코르스키(Piskorski)는 "부족한 중세 자료에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한, 적어도 일부 동유럽 지역에서는 인구가 상당히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이주의 직접적인 결과인지, 그리고 농업 생산성 증가와 도시화 속도 증가에 얼마나 기인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라고 썼다.[54] 서유럽과 달리 이 증가된 인구는 14세기의 흑사병 팬데믹으로 인해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55]

독일 정착민들과 함께 새로운 세금 제도가 도입되었다. 기존의 벤드(Wendish) 십일조는 마을 규모에 따라 결정되는 고정세였지만, 독일의 십일조는 실제 작물 수확량에 따라 결정되었다. 따라서 정착민들은 벤드족보다 더 높은 세금을 징수했지만, 정착 초기 몇 년 동안 세금 납부에서 일부 면제되었다.[51][56]

정착민의 대다수는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인이었다. 상당수의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특히 12세기 초 중부 엘베강 주변 지역에 참여했다.[63] 덴마크인, 스코트인 또는 현지 벤드족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론인들도 참여했다. 정착민 중에는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는 귀족 가문의 토지 없는 자녀들도 있었다.[64]

1925년 중부/동유럽의 독일계 민족


작센슈피겔에 묘사된 동방 식민 운동(Ostsiedlung). 토지 할당자(Lokator)가 영주로부터 촌락 헌장을 받고 촌락 재판관 역할을 한다. 정착민들은 숲을 개간하고 집을 짓는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정착민의 특정 모집, 토지 분배 및 정착지 건설을 토지 할당자(Lokator)에게 위임했다. 일반적으로 하위 귀족이나 도시 부르주아 출신인 이들은 광고, 장비 및 운송, 토지 개간 및 정착지 준비를 포함하는 정착 열차를 조직했다. 'Lokator 계약'은 토지 할당자와 새로운 정착민의 권리와 의무를 정했다.[65]

도시가 설립되어 독일 도시법이 부여되었다. 이민자들의 농업, 법률, 행정 및 기술 방법과 현지 주민들의 성공적인 기독교화는 슬라브 공동체가 독일 문화를 채택함에 따라 정착 지역의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독일 문화와 언어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일부 지역에서 지속되었다.[1]

14세기 중반, 흑사병의 결과로 이주 과정이 상당히 둔화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인구가 감소했고 경제적으로 변두리에 있는 정착지, 특히 포메라니아와 서 프로이센 해안에 위치한 정착지가 버려졌다. 불과 한 세기 후, 포메라니아, 서 프로이센 및 실레시아의 현지 슬라브 지도자들은 다시 독일 정착민들을 초대했다.

정착은 수 세기에 걸쳐 지속된 동화 과정의 구실이었다. 동화는 지역과 다수 인구에 따라 양방향으로 일어났으며, 슬라브족과 게르만족 정착민들은 서로를 동화시켰다.

카르파티아 (''소폴란드'') 15세기 독일인


크라쿠프포즈난의 독일인 정착민들의 폴란드화 과정은 약 2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이 공동체는 독일 지역으로부터의 신규 이주민이 계속 유입되어야만 고립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르브인 또한 독일인 정착민들을 동화시켰지만, 동시에 소규모 소르브 공동체는 주변의 독일어 사용 인구에 의해 동화되었다. 많은 중부 및 동유럽 도시들은 다민족 용광로로 발전했다.

5. 2. 벤드족과의 관계

1108년,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의 측근으로 추정되는 플랑드르 성직자가 벤드족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요청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21][22] 1124년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출신의 첫 정착민들이 도착했지만, 아이더 강 남쪽에 정착했다.[23][24] 이후 1139년 바그리 지역 정복, 1143년 뤼베크 건국, 샤우엔부르크의 아돌프 2세 백작의 동부 홀슈타인과 포메라니아 정착 요청이 이어졌다.[23][24]

내부 갈등과 전쟁으로 약화된 벤드족은 군사적 저항 능력을 상실했다. 1119년부터 1123년까지 포메라니아는 루티치 영토의 북동부를 침략하여 정복했다. 1124년과 1128년, 폴란드의 봉신이었던 포메라니아 공작 바르티슬라프 1세는 밤베르크의 오토 주교를 초청하여 포메라니아인과 루티치인을 기독교화했다.[25][26] 1147년, 북방 십자군의 일환으로 작센 공국에서 벤디시 십자군이 조직되어 데민과 슈체친으로 향했으나, 이미 기독교화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파괴와 학살을 초래했다.[27]

벤디시 십자군 이후, 알브레히트 곰은 1157년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건설하고 확장했다. 하펠베르크 주교구는 벤드를 기독교화하기 위해 재건되었다.[29] 1164년, 사자공 하인리히가 페르헨 전투에서 오보트리테와 포메라니아 공작들을 물리친 후, 데민과 슈테틴의 포메라니아 공작령은 작센 봉토가 되었고, 오보트리테 영토는 메클렌부르크가 되었다. 사자공 하인리히가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의 내부 투쟁에서 패배한 후,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라니아는 1181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가 되었다.[30]

독일 정착민들과 함께 새로운 세금 제도가 도입되었다. 기존의 벤드족 십일조는 마을 규모에 따라 결정되는 고정세였지만, 독일의 십일조는 실제 작물 수확량에 따라 결정되었다. 따라서 정착민들은 벤드족보다 더 높은 세금을 징수했지만, 정착 초기 몇 년 동안 세금 납부에서 일부 면제되었다.[51][56]

벤드족에 대한 차별은 동방식민운동(Ostsiedlung)의 일반적인 개념의 일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벤드족은 낮은 과세 방식의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새로운 정착민만큼 수익성이 높지 않았다. 비록 정착민의 대다수가 독일인이었지만, 벤드족과 다른 부족들도 정착에 참여했다. 새로운 정착민은 중세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개념인 민족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인력과 농업 및 기술적 노하우 때문에 선택되었다.

대부분의 벤드족은 점차 동화되었다. 그러나 벤드족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외딴 시골 지역에서는 그들의 문화를 계속 유지했다. 이들은 뤼네부르크 황무지 동쪽의 드레바니 폴라비아인, 남부 메클렌부르크의 야벨하이데 드레바니, 동부 포메라니아의 슬로빈치아인과 카슈브인, 그리고 루사티아소르브인이었다. 루사티아는 19세기 말까지 많은 수의 소르브족이 거주했으며, 언어적 동화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났다.

6. 동방 식민의 종말과 유산

983년 빌룽 변경백과 북부 변경백에 거주하던 폴라비아 슬라브족의 반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으나, 내부 분열과 외부 침략으로 이 지역은 12세기까지 폴라비아 부족의 지배하에 있었다.[38]

14세기 후반과 15세기 초, 흑사병후스 전쟁 등의 요인으로 정착이 둔화되었다. 1300년 이후 소빙기로 인한 기후 악화, 14세기 중반의 농업 위기, 1347년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 등이 동방식민운동의 종말에 영향을 미쳤다.[74]

19세기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동방식민운동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되었다. 독일과 일부 슬라브 국가, 특히 폴란드에서는 동방식민운동이 팽창주의와 독일화 노력의 전조로 인식되었으며, Drang nach Osten|동방 진출de이라는 슬로건이 사용되었다.[75][76] 그러나 포메라니아에서의 독일인 정착은 실용적인 요구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19세기의 민족주의적 역사학이 중세의 동방식민운동에 슬라브-게르만 대조를 소급하여 구성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77]

빅토르 크레스, 전 러시아 톰스크주 주지사, 독일계 출신


20세기 전쟁과 민족주의 정책은 중부 및 동유럽의 민족 및 문화 구성을 크게 바꾸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2 폴란드 공화국의 독일인들은 폴란드 회랑, 상실레지아, 포즈난 동부 지역을 떠나라는 압력을 받았다.[6][7][8]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는 나치-소련 인구 이동을 통해 발트 독일인 등 오래된 정착 지역을 파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방 계획de에 따라 폴란드인과 다른 슬라브족을 제거하거나 노예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78][79] 200만 명의 폴란드인 추방이 시작되었고 독일계 민족de이 1944년까지 합병된 영토에 정착했다.[80]

포츠담 회담은 체코슬로바키아 독일인 추방, 폴란드 및 헝가리에서 독일인 추방을 승인했다.[80] 붉은 군대의 진격과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배로 중부 및 동유럽과 동중부 유럽의 민족 구성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거의 모든 독일인이 추방되었고, 소련이 세운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구 동독 영토의 대부분을 합병했으며, 동프로이센의 북반부는 칼리닌그라드주가 되었다. 이전 독일 정착 지역은 해당 후계 국가의 민족 시민에 의해 재정착되었다. 그러나 오스트지들룽de 과정에서 정착하고 독일화된 일부 지역은 여전히 현대 독일의 북동부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81][82]

중세 시대에 정착되어 나중에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부 지방을 구성하게 된 지역에는 20세기 초에 약 3천만 명의 독일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19년에 시작하여 1945년에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서쪽으로의 정치적 경계 철수는 약 1,500만 명이 현재의 독일 국경 내로 재정착하는 결과를 낳았다.[82]

6. 1. 동방 식민의 종말 (14세기 이후)

983년, 빌룽 변경백과 북부 변경백에 거주하던 폴라비아 슬라브족은 엘베강에서 발트해에 이르는 지역에서 새롭게 세워진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지배와 기독교 선교에 대항하는 반란에 성공했다. 새롭게 얻은 독립에도 불구하고 오보트리테, 라니, 류티치안, 헤벨리 부족들은 곧 내부 분열과 전쟁에 직면했고, 동쪽에서는 새롭게 구성되고 확장되는 피아스트 왕조(초기 폴란드) 국가, 북쪽에서는 덴마크, 서쪽에서는 변경백령을 재건하려는 제국의 침략을 받았다. 이 지역은 12세기까지 폴라비아 부족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식민지화되지 않고 기독교화되지 않았다.

결국 14세기 후반과 15세기 초에는 독일 흑사병후스 전쟁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정착이 둔화되었다.[38]

동방식민운동(Ostsiedlung)에는 명확한 원인이나 특정 시점의 종착점이 없다. 그러나 정착 운동의 둔화는 1300년 이후에 관찰되었으며, 14세기에는 독일어 사용 정착민이 참여하는 새로운 정착지가 거의 설립되지 않았다. 동방식민운동의 종말에 대한 설명에는 다양한 요인이 포함되어야 하며, 이를 명확하게 평가하거나 구별할 수는 없다. 1300년경부터 시작된 "소빙기"의 시작으로서의 기후 악화, 14세기 중반에 시작된 농업 위기, 1347년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의 여파로 심각한 황폐화 과정이 발생했다. 여기서 명확한 연관성이 확립될 수 있다면, ''동방식민운동''의 종말은 14세기의 위기의 일부로 이해될 것이다.[74]

6. 2. 동진 정책 (Drang nach Osten)

19세기,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중세의 과정은 민족주의적으로 재해석되었다. 독일과 일부 슬라브 국가, 특히 폴란드에서는 Ostsiedlung|동방 식민de이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동시대의 팽창주의와 독일화 노력의 전조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을 위해 사용된 슬로건은 Drang nach Osten|동방 진출de이었다.[75][76]

> 포메라니아에서의 독일인 정착 과정은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도 따르지 않았고, 다른 이주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포메라니아에서의 독일인 정착은 전적으로 실용적인 요구에 의해 형성되었다... 19세기 중반 경에 확립된 민족적 역사학은 중세 성기의 Ostsiedlung|동방 식민de 과정에서 슬라브-게르만 대조를 소급하여 구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 시대가 아니라 19세기의 이데올로기였다... 정착은 "cuiuscunque gentis et cuiuscunque artis hominesla"('어떤 기원과 기술을 가진 사람이든')이어야 했는데, 이는 포메라니아 공작과 뤼기 공자(Rügish princes)가 발행한 수많은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 -부흐홀츠(Buchholz)[77]

6. 3. 유산



20세기 전쟁과 민족주의 정책은 중부 및 동유럽의 민족 및 문화 구성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재건된 폴란드의 독일인들은 폴란드 회랑, 상실레지아, 포즈난의 동부 지역을 떠나라는 압력을 받았다.[6][7][8]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는 나치-소련 인구 이동을 시작하여 발트 독일인, 베사라비아의 독일인 등 오래된 정착 지역을 파괴하고 점령된 폴란드의 미래 영토에 재정착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방 계획de이 나치의 레벤스라움de 개념에 따라 폴란드인과 다른 슬라브족을 제거하거나 노예화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78][79] 독일의 영토 주장을 강화하고 비게르만 민족에 대한 독일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이 시대의 후자(비게르만 민족)의 문화, 도시 및 과학적 성과는 훼손되거나 거부되었으며 독일의 성과로 제시되었다.[6][7][8] 중부 및 동유럽을 독일 식민지로 완전히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거대한 계획의 추가 실현은 전쟁의 전환으로 인해 방지되었지만, 200만 명의 폴란드인 추방이 시작되었고 독일계 민족de이 1944년까지 합병된 영토에 정착했다.[80]

포츠담 회담 (미국, 영국, 소련 지도자들의 회담)은 체코슬로바키아 독일인 추방, 폴란드 및 헝가리에서 독일인 추방을 승인했다. 붉은 군대의 진격과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배로, 중부 및 동유럽과 동중부 유럽의 민족 구성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거의 모든 독일인이 중부 및 동유럽 전역의 모든 소련이 점령한 독일 정착 지역뿐만 아니라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구 제국 영토, 특히 실레지아, 동프로이센, 동브란덴부르크, 포메라니아 지방에서도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세운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이 지역의 대부분을 합병했고, 동프로이센의 북반부는 소련이 차지하여 러시아 SFSR의 월경지인 칼리닌그라드주가 되었다. 이전 독일 정착 지역은 해당 후계 국가의 민족 시민(구 주데텐란트의 체코인과 실레지아 및 포메라니아의 폴란드인)에 의해 재정착되었다. 그러나 오스트지들룽de 과정에서 정착하고 독일화된 일부 지역은 여전히 현대 독일의 북동부 지역을 형성하고 있으며, 예를 들어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브란덴부르크, 작센의 연방주de홀슈타인(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일부)의 작센 변경지la 동쪽에 있다.[81][82]

중세 시대에 정착되어 나중에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부 지방을 구성하게 된 지역에는 20세기 초에 약 3천만 명의 독일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19년에 시작하여 1945년에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서쪽으로의 정치적 경계 철수는 약 1,500만 명이 현재의 독일 국경 내로 재정착하는 결과를 낳았다. 12세기(그리고 부분적으로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역만이 언어와 문화에서 독일어로 남아 1945년 이후의 동독오스트리아의 일부로 남았다.[82]

참조

[1] 서적 The North-Eastern Frontiers of Medieval Europe: The Expansion of Latin Christendom in the Baltic Lands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 서적 The Expansion of Central Europe in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3] 서적 The German Myth of the East: 1800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OUP Oxford
[4] 서적 Ostsiedlung – ein gesamteuropäisches Phänomen https://www.grin.com[...] GRIN Verlag 2002
[5] 서적 '"The Slippery Memory of Men": The Place of Pomerania in the Medieval Kingdom of Poland' https://books.google[...] Brill
[6] 서적 The Slippery Memory of Men (East Central and 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450–1450)
[7] 서적 "The historiography of the so-called 'east colonisation' and the current state of research" in: 'The Man of Many Devices, Who Wandered Full Many Ways ...: Festschrift in Honor of Janos M.Bak' https://books.google[...]
[8] 서적 The Holocaust as Colonial Genocide: Hitler's 'Indian Wars' in the 'Wild East' https://books.google[...]
[9] 서적 Charlemagne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
[10] 서적 Castles and Fortified Cities of Medieval Europe: An Illustrated History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15
[11] 서적 A History of the Church in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2
[12] 서적 Conflicting Loyalties in Early Medieval Bavaria: A View of Socio-political Interaction, 680–900 https://books.google[...] Ashgate
[13] 서적 The Germans and the East Purdue University Press
[14] 웹사이트 Treaty of Verdun (843) https://www.research[...] 2020-07-26
[15] 서적 A Brief History of the Western World https://books.google[...] Harcourt Brace Jovanovich College Publishers
[16] 서적 Germany in the Early Middle Ages c. 800–1056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4-06-06
[17] 서적 Early Ukraine: A Military and Social History to the Mid-19th Century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16
[18] 서적 Der slawische Aufstand von 983: eine Schicksalswende in der Geschichte Mitteleuropas https://books.google[...]
[19] 웹사이트 The Medieval Elbe – Slavs and Germans on the Frontier https://medievalelbe[...] University of Oregon 2020-07-25
[20] 서적 Feudal Germany https://books.google[...] F. Ungar Publishing Company
[21] 서적 The Popes and the Baltic Crusades: 1147–1254 https://books.google[...] Brill
[22] 서적 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500–1300) (2 vols) https://books.google[...] Brill 2019
[23] 서적 The German Hansa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4] 서적 The Czech Lands in Medieval Transformation https://books.google[...] Brill 2011-11-11
[25] 서적 The Life of Otto Apostle of Pomerania 1060–1139 https://books.google[...] Cosimo, Inc. 2007
[26] 서적 Pomerania, oder, Ursprunck, Altheit und Geschicht der Völcker und Lande Pomern, Cassuben, Wenden, Stettin, Rhügen in vierzehn Büchern https://books.google[...] Auf Kosten des Herausgebers, in Commission bey E. Mauritins
[27] 서적 The Origins of Modern Germany https://books.google[...] W.W. Norton 2023-07-12
[28] 서적 The Origins of Modern Germany https://books.google[...] W.W. Norton 2023-07-12
[29] 서적 Poland and the Baltic: The Problem of Poland's Access to the Sea https://books.google[...] Polish Institute for Overseas Problems
[30] 서적 Germany in the High Middle Ages: c. 1050–120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31] 간행물 Medieval German Expansion in Bohemia https://www.jstor.or[...] 1926-03
[32] 서적 The History of the Czech Republic and Slovakia ABC-CLIO
[33] 백과사전 Cambridge Medieval History:Victory of the Papa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7
[34] 서적 Feudal Germany Frederick Ungar Publishing
[35] 서적 Feudal Germany Frederick Ungar Publishing
[36] 서적 Feudal Germany Frederick Ungar Publishing
[37] 논문 At the Margin of Community: Germans in Pre-Hussite Bohemia https://www.cambridg[...] 2009
[38] 서적 The Expansion of Central Europe in the Middle Ages https://www.taylorfr[...] Routledge
[39] 서적 Latvian-Russian relations: documents https://books.google[...] The Latvian legation
[40] 서적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Robert Appleton Company
[41] 서적 The Church in Latvia https://archive.org/[...] Drauga vēsts
[42] 서적 Uses of the Written Word in Medieval Towns Brepols Publishers
[43] 서적 The Archaeology of the Prussian Crusade: Holy War and Colonisation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23-07-14
[44] 논문 Making Livonia: actors and networks in the medieval and early modern Baltic Sea region Informa UK Limited 2021-01-02
[45] 서적 The Expansion of Central Europe in the Middle Ages Routledge 2017
[46] 서적 Idealization XIII: Modeling in History https://books.google[...] Rodopi
[47] 서적 A Concise History of German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8] 서적 Agrarwirtschaft, Agrarverfassung und ländliche Gesellschaft im Mittelalter https://books.google[...] Oldenbourg
[49] 간행물 The Germans and the East
[50] 논문 Migration in the Swiss Alps and Swiss Jura from the Middle Ages to the mid-20th century – Migratory movements and their chronologies, 2. https://journals.ope[...] Open Edition 2020-09-28
[51] 서적 The Man of Many Devices, who Wandered Full Many Ways: Festschrift in Honour of J nos M. Bak – Piskorski, Jan Maria – "The Historiography of the So-called "East Colonisation" and the "Current State of Research" pp. 654–667 https://books.google[...]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1999
[52] 서적 Ostsiedlung und Landesausbau in Sachsen: die Kührener Urkunde von 1154 und ihr historisches Umfeld p. 95 https://books.google[...] Leipziger Universitätsverlag
[53] 서적 Die bäuerliche Ostsiedlung des Mittelalters in Nordostdeutschland: Untersuchungen zum Landesausbau des 12. bis 14. Jahrhunderts im ländlichen Raum https://books.google[...] Lang
[54] 서적 The Germans and the East – Piskorski, Jan Maria. "Medieval Colonization in Europe" pp. 27–37 https://books.google[...] Purdue University Press
[55] 서적 Die Geschichte des Dorfes: von den Anfängen im Frankenreich zur bundesdeutschen Gegenwart https://books.google[...] Ulmer
[56] 웹사이트 Iure Theutonico ? German settlers and legal frameworks for immigration to Hungary in an East-Central European perspective https://www.research[...] 2020-09-28
[57] 서적 Archäologie der westlichen Slawen. Siedlung, Wirtschaft und Gesellschaft im früh- und hochmittelalterlichen Ostmitteleuropa Walter de Gruyter
[58] 웹사이트 Anna Paner, Jan Iluk: Historia Polski Virtual Library of Polish Literature, Katedra Kulturoznawstwa, Wydział Filologiczny, Uniwersytet Gdański. http://literat.ug.ed[...]
[59] 서적 Das Mittelalter. Geschichte im Überblick UTB
[60] 서적 Archäologie der westlichen Slawen. Siedlung, Wirtschaft und Gesellschaft im früh- und hochmittelalterlichen Ostmitteleuropa Walter de Gruyter
[61] 서적 Archäologie der westlichen Slawen. Siedlung, Wirtschaft und Gesellschaft im früh- und hochmittelalterlichen Ostmitteleuropa Walter de Gruyter
[62] 웹사이트 Er schuf die Grundlage für die Stadt- und Landeshistorie https://www.maz-onli[...] MAZ 2020-09-29
[63] 간행물 Die Rolle der Niederländer in der Ostsiedlung, in: Ostsiedlung und Landesausbau in Sachsen, 2008.
[64] 웹사이트 Transylvania and the Transylvanian Saxons https://sibiweb.de/g[...] 2020-09-28
[65] 서적 Die deutsche Ostsiedlung im Mittelalter https://books.google[...]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66] 웹사이트 V. Internationale Germanistische Konferenz: "Deutsch im Kontakt der Kulturen. Schlesien und andere Vergleichsregionen" – Tomasz Czarnecki: Die deutschen Lehnwörter im Polnischen und die mittelalterlichen Dialekte des schlesischen Deutsch https://docplayer.or[...] Doc Player 2020-09-28
[67] 웹사이트 Geschichte des deutsch-slawischen Sprachkontaktes im Teschener Schlesie https://epub.uni-reg[...] Uni Regensburg 2020-09-28
[68] 웹사이트 Germanismy v Běžné Mluvě Dneška https://is.muni.cz/t[...] "[[Masaryk University]] Philosophy Faculty" 2020-09-28
[69] 논문 Die Ostbewegung der deutschen Sprache https://www.jstor.or[...] 2020-09-30
[70] 서적 Lehrbuch der allgemeinen Geographie. Volume 6. Allgemeine Siedlungsgeographie I Walter de Gruyter
[71] 서적 "'Names and Their Environment' Proceedings of the 25th International Congress of Onomastic Sciences, Volume 3: Anthroponomastics" University of Glasgow
[72] 간행물 Die wichtigsten Suffixe in slawischen Familiennamen und ihre Eindeutschungsergebnisse – ein Überblick https://journals.quc[...] 2019
[73] 서적 Kleiner deutscher Familiennamenatlas https://www.degruyte[...] De Gruyter 2023-01-30
[74] 웹사이트 Siedlungsforschung Archäologie-Geschichte-Geographie, Band 13 – pp. 67–77 https://www.kulturla[...] Verlag Siedlungsforschung Bonn 2020-09-30
[75] 서적 Der "deutsche Drang nach Osten": Ideologie und Wirklichkeit eines politischen Schlagwortes https://books.google[...]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76] 웹사이트 Hitler's Plans for Eastern Europe http://www.dac.neu.e[...] archive 2020-09-29
[77] 서적 Deutsche Geschichte im Osten Europas: Pommern / hrsg. von Werner Buchholz. ... https://books.google[...] Siedler
[78] 서적 Empire, Colony, Genocide: Conquest, Occupation, and Subaltern Resistance in World History. Berghahn Books
[79] 논문 The Forgotten Holocaust: The systematic genocide on the Slavic people by the Nazis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ttps://web.archive.[...] Leiden University 2021-06-25
[80] 웹사이트 Generalplan Ost" zur Versklavungosteuropäischer Völker http://www.rosalux.d[...] Archive 2020-09-29
[81] 웹사이트 Die Geschichtliche Stellung der Mittelalterlichen Deutschen Ostbewegung https://www.degruyte[...] De Gruyter 2020-09-29
[82] 웹사이트 The Expulsion of the German Communities from Eastern Europe at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https://cadmus.eui.e[...]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Florence 2020-09-29
[83] 문서 「改訂版 世界の民族地図」 1997-12-20
[84] 서적 東欧史 山川出版社 1977
[85] 서적 Danish Medieval History & Saxo Grammaticus Museum Tusculanum Press 198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