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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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콜럼버스 이전 시대
- 3. 스페인 식민 시대 (1516년~1810년)
- 4. 독립 전쟁과 내전 (1810년~1829년)
- 5. 로사스 시대 (1829년~1852년)
- 6. 자유주의 정부와 국가 통합 (1853년~1880년)
- 7. 보수 공화국 시대 (1880년~1916년)
- 8. 급진당 정부 시대 (1916년~1930년)
- 9. "불명예스러운 10년" (1930년~1943년)
- 10. 1943년 혁명 (1943년~1946년)
- 11. 페론주의 시대 (1946년~1955년)
- 12. "자유 혁명" (1955년~1958년)
- 13. 불안정한 급진당 정부 시대 (1958년~1966년)
- 14. "아르헨티나 혁명" (1966년~1973년)
- 15. 불안정의 심화 (1969년~1976년)
- 16. "국가 재조직 과정" (1976년~1983년)
- 17. 민주주의 시대 (1983년~현재)
- 참조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다양한 원주민 부족의 삶으로 시작되었고, 15세기에는 잉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에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1810년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했다. 독립 이후에는 중앙 집권과 연방주의 간의 갈등, 군부 쿠데타, 경제 위기를 겪었다. 1916년 급진 시민 연합의 집권, 페론주의 시대, 군부 독재, 그리고 민주주의 시대를 거치며 현재에 이르렀다. 한국과는 1898년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경제, 문화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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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은 1970년대 초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한 극우 준군사 조직으로, 호세 로페스 레가를 중심으로 반공 및 반페론주의를 내세워 좌익 인사 등을 대상으로 테러와 암살을 자행했다. - 아르헨티나의 역사 - 프로파간다 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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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의 역사 |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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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시대 이전 | |
| 선사 시대 | 기원전 11,000년경 - 기원후 15세기 |
| 원주민 | 케추아족 마푸체족 테우엘체족 과라니족 |
| 식민지 시대 | |
| 스페인 식민지 | 1516년 - 1810년 |
| 라플라타 부왕령 | 1776년 - 1810년 |
| 독립 | |
| 5월 혁명 | 1810년 |
| 독립 선언 | 1816년 7월 9일 |
| 독립 전쟁 | 1810년 - 1829년 |
| 독립 이후 | |
| 아르헨티나 내전 | 1814년 - 1880년 |
| 로사스 시대 | 1829년 - 1852년 |
| 아르헨티나 공화국 | 1853년 이후 |
| 콘키스타 델 데시에르토 | 1878년 - 1885년 |
| 80년대 세대 | 1880년 - 1916년 |
| 급진당 시대 | 1916년 - 1930년 |
| 불명예스러운 10년 | 1930년 - 1943년 |
| 페론주의 시대 | 1946년 - 1955년 |
| 군사 독재 시대 | 1966년 - 1973년, 1976년 - 1983년 |
| 더러운 전쟁 | 1976년 - 1983년 |
| 포클랜드 전쟁 | 1982년 |
| 민주화 시대 | 1983년 이후 |
| 기타 | |
| 관련 문서 | 아르헨티나의 역사 연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목록 |
2. 콜럼버스 이전 시대
아르헨티나에 최초로 인간이 정주한 증거는 파타고니아에서 발견되며 기원전 11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는 인디오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과라니족들은 유카, 고구마, 예르바 마테 농업을 발전시켰고, 중부와 남부 지역은 유목민들이 지배하다가 17세기에 마푸체인들이 통일했다.[1]
15세기 초 잉카 제국은 오늘날 아르헨티나 북서부를 정복하여 코야수유 지역에 포함시켰다. 15세기 말, 잉카 제국은 우마와카 협곡의 원주민 부족을 정복하여 금속 공급을 확보하려 했다. 잉카의 지배는 1536년 스페인인들이 도착할 때까지 약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4]
우루과이의 고고학자 라울 캄파 솔레르는 아르헨티나의 원주민을 도자기 발달이 없는 기본적인 사냥꾼과 채집인, 진보된 채집인과 사냥꾼, 그리고 도자기를 사용하는 기본적인 농부의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3]
2. 1. 선(先) 잉카 시대

아르헨티나에 최초로 인간이 정주한 증거는 파타고니아에서 발견되며 기원전 11000여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에는 국가 없이 인디오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1] 과라니족들은 유카, 고구마, 예르바 마테 농업을 발전시켰다. 중부와 남부 지역(팜파스와 파타고니아)는 유목민들이 지배했으며 17세기에 마푸체인들이 통일시켰다.
현재 아르헨티나로 알려진 지역은 유럽 식민지 시대 이전까지는 비교적 인구 밀도가 낮았다. 인간의 삶의 가장 초기의 흔적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중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에도 흔적이 남아있다.[1]
15세기 이전 선 잉카 시대 산악 지대에는 케추아족, 아이마라족 원주민(인디오)이, 케추아어로 팜파라고 불린 초원 지대나, 차코라고 불린 북부 사바나 지대에는 차루아족이나, 과라니족과 같은 수렵 민족, 그리고 원시적인 농경을 하는 부족이 거주했다.
2. 2. 잉카 제국의 정복
파차쿠텍 왕이 통치하던 잉카 제국은 1480년에 공격을 시작하여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북서부를 정복하고 코야수유 지역에 포함시켰다.[112]3. 스페인 식민 시대 (1516년~1810년)
1516년 유럽인들이 처음 이 땅에 들어왔다. 스페인은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설치했다. 이 영향으로 스페인어가 아르헨티나의 공용어로 쓰이고 있고 로마 가톨릭이 주요 종교이다. 이 지역은 주로 스페인 이민자들과 크리오요라는 그들의 후손, 토착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의 나라였다. 식민 시대 정착민 중 1/3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다른 도시에 모여 살았으며, 나머지는 가우초라 하여 ''팜파스''에서 살았다. 토착민들은 아르헨티나의 다른 지역에서 살았다. 1806년~1807년에 영국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두 번 침공했으나 크리오요들은 그들을 물리쳤다.[12]
리오 데 라 플라타 하구의 자연 항구들은 모든 선적이 리마 근처의 카야오 항구를 통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사용될 수 없었고, 이는 아순시온, 부에노스 아이레스, 몬테비데오와 같은 도시에서 밀수가 상업의 일반적인 수단이 되게 했다.[10]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스페인 왕 페르디난드 7세가 붙잡히자 부왕령 전체에 큰 우려가 생겼다. 왕이 없으면 아메리카의 사람들이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추키사카 혁명, 라파스 혁명, 몬테비데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지역 당국을 제거하려는 여러 시도로 이어졌는데, 모두 단명했다. 1810년의 새로운 성공적인 시도인 5월 혁명은 스페인의 모든 지역(카디스와 레온 제외)이 정복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을 때 일어났다.
3. 1. 스페인 탐험과 초기 정착
1502년 곤살루 코엘류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끄는 포르투갈 탐험대가 현재의 아르헨티나 지역에 처음 도착했다.[6][7][8] 1512년경, 주앙 드 리스보아와 에스테방 드 프로이스는 현재 아르헨티나에 있는 리오 데 라 플라타를 발견하고 그 하구를 탐험했으며, 차루아족과 접촉했다. 이들은 현지 원주민으로부터 "산의 사람들", 즉 잉카 제국에 대한 첫 소식을 가져왔고, 파타고니아 북부 해안의 산 마티아스 만(42ºS)까지 남쪽으로 항해했다.[6][7][8] 1516년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가 현재의 아르헨티나 영토를 방문했다. 1536년 페드로 데 멘도사는 현재 부에노스 아이레스 위치에 작은 정착지를 건설했으나, 1541년에 버려졌다.[9]1580년 후안 데 가라이에 의해 두 번째 정착지가 건설되었고, 1573년 헤로니모 루이스 데 카브레라에 의해 코르도바에 정착지가 세워졌다. 이 지역들은 수도가 리마였던 페루 부왕령의 일부였으며, 정착민들은 리마에서 왔다. 남아메리카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리오 데 라 플라타 하구의 식민지화는 금광 붐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에 채굴할 귀금속이 없었기 때문이다.
3. 2.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
1516년 유럽인들이 이 땅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스페인은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설치했다.[11] 이 영향으로 스페인어가 아르헨티나의 공용어로 쓰이고 있고 로마 가톨릭이 주요 종교이다. 이 지역은 주로 스페인 이민자들과 크리오요라는 그들의 후손, 토착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의 나라였다. 식민 시대 정착민 중 1/3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다른 도시에 모여 살았으며, 나머지는 가우초라 하여 ''팜파스''에서 살았다. 토착민들은 아르헨티나의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살았다.스페인은 1776년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을 설립하여 이 지역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이 부왕령은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볼리비아의 많은 부분을 포함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새로운 정치적 하위 구역의 관세를 갖게 되었고, 포토시에서 얻는 수입, 귀금속보다는 상품 측면에서 증가하는 해상 활동, 가축 생산을 통한 가죽 및 기타 제품의 수출 등 여러 이유로 점차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 중 하나가 되면서 번성하는 항구가 되었다.[11]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유입된 돈과 정치적 권력에도 불구하고, 부왕 법정의 구성원들만이 일반 대중이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누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여전히 발전 단계에 있었고, 정규 대학 학위, 직업 선택, 섬유, 자립 등이 부족했다. 가장 부유한 가족조차도 가구와 기본적인 가정용품이 부족했는데, 유일한 스페인 선박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면 고급 도자기와 같은 물품은 깨져버렸기 때문이다.[11]
그러나 이 부왕령은 여러 지역 간의 내부적 결속력 부족과 스페인의 지원 부족으로 인해 수명이 짧았다. 스페인 함대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스페인이 패배하여 영국 해상 우위를 차지한 후 다시 희귀해졌다.
3. 3. 영국의 침공과 크리오요의 저항
1806년과 1807년에 영국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두 차례 침공했지만, 크리오요 민병대는 이들을 물리쳤다.[12] 산티아고 데 리니에르스는 영국군의 침공을 두 번 모두 격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2] 본토 스페인의 도움 없이 거둔 이 승리는 도시의 자신감을 높였다.[12]영국의 침공 시도는 아르헨티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스페인 왕 페르디난드 7세가 붙잡히자 부왕령 전체에 큰 우려가 생겼고, 왕이 없으면 아메리카의 사람들이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났다.[12] 이러한 상황에서 1810년 5월 혁명이 일어나, 아르헨티나는 독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4. 독립 전쟁과 내전 (1810년~1829년)
1820년 자유 연맹은 남아메리카 통합주 군대와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으며, 이 주는 남아메리카 통합주로 귀속되었다.[16] 1825년 볼리비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1826년 아르헨티나는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는 시스플라티나 주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발발했다. 1828년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의 결과 시스플라티나 주가 우루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16] 이 전쟁의 정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총독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상했는데, 연방주의자인 그는 공포 정치를 펴고 불안한 연맹을 계속 유지했다.[16]
4. 1. 5월 혁명과 독립 선언
1810년 5월 25일, 페르디난도 7세가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은 5월 혁명으로 1차 의회를 조직했다.[16] 이로 인해 현재의 아르헨티나를 이루는 남아메리카 합주국(1810년)과 자유 연맹(1815년) 두 나라가 생겨났다.[16] 다른 주들은 자치론자와 중앙집권론자들의 의견 차이로 통합 국가에 귀속되는 데 시간이 걸렸고, 파라과이는 1811년 독립을 선언하며 분리했다.[16]호세 데 산 마르틴은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군사 작전을 지휘하면서 독립을 점차 현실로 만들었다.[16]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16] 산 마르틴과 그의 군대는 1817년 안데스를 넘어 칠레와 페루의 왕당파를 무찔러 독립을 공고하게 다졌다.[16]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스페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16]
4. 2. 독립 영웅과 국가 건설의 갈등
호세 데 산 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군사 작전을 지휘하면서 독립은 점차 현실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16] 산 마르틴과 그의 군대는 1817년 안데스를 넘어 칠레와 페루의 왕당파를 무찔러 독립을 공고하게 다졌다.[16]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스페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16]스페인군의 패배 이후, 국가의 조직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할에 대한 내전이 통일파와 연방파 사이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통일파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강력한 중앙 정부의 수장으로서 덜 발달된 지방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연방파는 미국처럼 자율적인 지방의 연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20년 세페다 전투에서 통일파가 패배하면서 최고 통치자의 권한과 1819년 헌법이 종결되었다.[16] 1826년 헌법을 제정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으나,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가 시스플라틴 전쟁의 부실한 관리로 인해 사임했고 1826년 헌법은 폐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주지사는 전쟁과 채무 지불을 포함하여 연방의 국제 관계를 관리할 권한을 받았다. 이 기간의 지배적인 인물은 연방주의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였으며, 그는 아르헨티나의 다양한 역사적 흐름에 의해 여러 각도로 묘사된다. 자유주의 역사는 그를 독재자로 간주하는 반면, 수정주의자들은 국가 주권 수호를 이유로 그를 지지한다.[16]
1852년 로사스 총독이 축출되자 중앙집권당(Unitarios)과 연방주의자(Federales)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미래의 내분을 미리 막게 된다.[16]
4. 3. 연방 동맹과 독립 전쟁의 전개
호세 데 산 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군사 작전을 지휘하면서 독립은 현실이 되었다.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에서 스페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16]스페인군의 패배 이후, 국가 조직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할에 대한 내전이 통일파와 연방파 사이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통일파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강력한 중앙 정부의 수장으로서 덜 발달된 지방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연방파는 미국처럼 자율적인 지방의 연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16]
1814년 호세 아르티가스에 의해 반다 오리엔탈, 엔트레 리오스 주, 코리엔테스 주, 산타페 주, 코르도바 주로 구성된 연방 동맹이 설립되었다. 1815년 6월 29일 연방 동맹은 몬테비데오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군을 몰아내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에서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가 정식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연방 동맹은 이 의회에 참여하지 못했다.
1817년 1월 9일 산 마르틴은 칠레 독립 지도자 베르나르도 오히긴스와 함께 안데스를 넘어 칠레 원정에 출발했다. 2월 12일 차카부코 전투에서 왕당파 군을 격파하고, 1818년 4월 5일 마이푸 전투에서 왕당파 군을 격파하여 칠레 독립 전쟁이 종결되었다.
1820년 2월 1일 엔트레 리오스 주의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라미레스 장군이 세페다 전투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중앙 정부는 붕괴되었다.
4. 4. 브라질과의 전쟁과 우루과이 독립
호세 데 산 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군사 작전을 지휘하면서 독립은 점차 현실이 되었다.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에서 스페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1820년 자유 연맹(Liga Federal)은 남아메리카 통합주 군대와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으며, 이 주는 남아메리카 통합주로 귀속되었다.1825년 볼리비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1826년에 아르헨티나는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는 시스플라티나 주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결과, 당시 브라질의 속주였던 시스플라티나 주의 독립을 막으려는 브라질과 무력 충돌하여 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었다. 1828년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정전을 맺고 그 결과 시스플라티나 주가 우루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16] 이 정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총독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상했는데, 그는 연방주의자로서 공포 정치를 펴고 불안한 연맹을 계속 유지했다.
5. 로사스 시대 (1829년~1852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18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 취임하여 권력을 잡았고, 1835년에는 다시 주지사가 되어 사법, 입법, 행정의 삼권을 장악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113] 그는 카우디요와 대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연방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를 시행했다.
로사스의 통치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는 외세의 간섭과 국내의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 1838년 프랑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봉쇄했고, 우루과이 내전에도 개입했다.[113] 이러한 상황은 로사스 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37년의 세대'로 불리는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등의 자유주의자들은 칠레로 망명하여 로사스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113]
결국 로사스는 1852년 카세로스 전투에서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에게 패배하고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독재 정권은 막을 내렸다.[113]
5. 1. 로사스의 권력 장악과 연방주의 통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18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 취임하면서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113] 1835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의회의 간청으로 다시 주지사에 취임, 사법, 입법, 행정의 삼권을 모두 장악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113]로사스는 연방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카우디요와 대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그의 통치 방식은 '37년의 세대'라 불리는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이들은 칠레의 산티아고데칠레로 망명하여 로사스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는데,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바르톨로메 미트레,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113]
로사스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국내외의 반대 세력을 억압했다. 1838년에는 프랑스 함대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위하기도 했고, 우루과이 내전에도 개입했다. 1845년에는 사르미엔토가 『파쿤도』를 출판하여 로사스의 독재와 가우초, 인디오 문화를 비판하며 유럽 문명의 우월성을 주장했다.[113]
그러나 로사스의 독재는 결국 1852년 카세로스 전투에서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에게 패배하면서 막을 내렸다. 로사스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1877년 사우샘프턴에서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다.[113]
5. 2. 로사스의 경제 정책과 외세의 간섭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18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에 취임하여 사법, 입법, 행정의 삼권을 장악하는 독재를 시작했다.[113] 로사스는 카우디요와 대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연방주의자였으며, 보호무역 정책을 통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려 했다.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외세의 간섭을 불러왔다. 1838년, 프랑스는 자국민의 징병 문제를 빌미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봉쇄하고 파타고니아 식민지화를 시도했다.[113] 1845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아르헨티나를 봉쇄하기도 했다. 이러한 외세의 압력은 로사스 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로사스는 우루과이 내전에도 개입했다. 1839년 우루과이 콜로라도당의 프루투오소 리베라 대통령이 아르헨티나 자유주의 망명자들과 함께 로사스 정권에 선전포고하면서 대 전쟁이 발발했다.[113] 로사스는 우루과이 블랑코당의 마누엘 오리베를 지원하여 1843년부터 몬테비데오를 포위했다. 1845년에는 로사스가 파견한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 장군이 인디아 무에르타 전투에서 콜로라도당 군에 승리하면서 전선이 우루과이로 이동했다.[113]
1849년과 1850년,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로사스와 평화 협정을 맺고 철수했다. 그러나 우루과이를 아르헨티나에 병합하려는 시도는 브라질의 개입을 불렀다. 브라질은 우르키사를 지원했고, 1851년 우르키사 군은 몬테비데오를 포위하던 아르헨티나 군을 격파하고 대 전쟁을 종결시켰다. 1852년 카세로스 전투에서 우르키사에게 패배한 로사스는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독재 정권은 막을 내렸다.[113]
5. 3. 로사스의 몰락과 자유주의 세력의 등장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는 엔트레 리오스 주의 강력한 지도자로, 코리엔테스 주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851년, 브라질 제국은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에 통합되는 것을 우려하여 우르키사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에는 우루과이의 콜로라도당도 포함되었다. 우르키사 군은 몬테비데오를 포위하고 있던 아르헨티나 군을 격파하며 대 전쟁을 종식시켰다.[113]1852년 2월 3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카세로스 전투에서 우르키사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를 격파했다. 로사스는 딸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여, 1877년 사우샘프턴에서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다. 카세로스 전투는 아르헨티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113]
로사스의 몰락 이후, 우르키사가 실권을 쥐고 아르헨티나 연합을 수립했다.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를 비롯한 "37년의 세대" 자유주의자들이 망명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1852년 9월 16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는 우르키사의 지배에 반발하여 연합에서 이탈했다. (로사스와 마찬가지로 우르키사 역시 연방파였다.) 이후 엔트레 리오스 주의 주도 파라나가 아르헨티나 연합의 수도가 되었다.
6. 자유주의 정부와 국가 통합 (1853년~1880년)
1835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에 다시 취임하면서 사법, 입법, 행정의 삼권을 장악하는 독재를 시작했다.[113] 1837년에는 로사스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문학 살롱이 추방되었는데, 이들은 훗날 "37년의 세대"로 불리며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바르톨로메 미트레,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 등이 대표적이었다.
1852년 카세로스 전투에서 로사스가 패배하고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그의 독재는 막을 내렸다. 이 전투는 아르헨티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로사스의 실각 이후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가 실권을 잡고 아르헨티나 연합이 수립되었으며, "37년의 세대" 자유주의자들이 망명에서 귀국했다.
6. 1. 1853년 헌법 제정과 국가 통합
1852년 카세로스 전투에서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패배하면서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가 아르헨티나 연합의 실권을 장악했다.[113] 1852년 7월 26일, 우르키사는 아르헨티나 연합을 수립하고,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를 비롯한 "37년의 세대" 자유주의자들은 해외 망명에서 귀국했다. 그러나 1852년 9월 16일, 부에노스아이레스주는 우르키사의 지배에 반발하여 연합에서 탈퇴했고, 이후 엔트레리오스주의 주도 파라나가 아르헨티나 연합의 수도가 되었다.6. 2. 자유주의 개혁과 경제 발전
1870년대부터 해외 투자와 이민이 밀려 들어오면서 농업은 근대적으로 발전했고 아르헨티나 사회와 경제는 새롭게 재편되어 국가 통합이 강화되었다.[94] 1880년과 1929년 사이 아르헨티나는 경제 성장을 계속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부유한 10개국 중 한 곳이었으며 농업 수출 경제로 이익을 보았다.[94] 이민이 늘고 사망률이 떨어지면서 아르헨티나 인구는 5배로 늘었고, 경제는 15배로 확대되었다.[94]6. 3. 삼국 동맹 전쟁과 "사막 정복"
삼국 동맹 전쟁 이후 아르헨티나가 겪은 본격적인 전쟁은 건국 이래 최초로 패배한 말비나스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아르헨티나인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94] 유럽 국가들이 영국을 지원하고, 제3세계, 특히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아르헨티나를 지지한 것은 "남미의 유럽"을 자처하던 아르헨티나인들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94] 또한, 많은 희생자를 낸 패전으로 건국 이래 유례없는 반군 감정이 고조되었다.[111]7. 보수 공화국 시대 (1880년~1916년)
1880년부터 191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보수 세력이 집권하며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를 겪었다.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는 국민 자율당(PAN)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집약적 농업에서 산업 농업으로 전환하고, 유럽 이민의 아르헨티나 유입이 늘면서 경제가 크게 성장했다. 1884년에는 공통 교육법 1420을 제정하여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 의무, 비종교 교육을 제공하려 했으나, 가톨릭 교회의 반발로 교황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칠레와 푸나 데 아타카마 분쟁 등 국경 분쟁을 겪었지만, 칠레-아르헨티나 간의 1881년 경계 조약과 1902년 일반 중재 조약을 통해 일시적으로 해결했다.
로카의 뒤를 이어 미겔 후아레스 셀만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레안드로 알렘, 바르톨로메 미트레, 후안 B. 후스토 등이 이끈 공원 혁명으로 사임했다. 이후 시민 연합은 국민 시민 연합(아르헨티나)과 급진 시민 연합으로 분열되었고, 이폴리토 이리고옌이 급진 시민 연합을 이끌었다. 카를로스 페예그리니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여 "폭풍 항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898년, 로카는 다시 대통령이 되었지만, 사회적 갈등에 직면했다. 1904년, 알프레도 팔라시오스는 아르헨티나 최초의 사회주의 하원 의원이 되었고, 노동법 제정에 기여했다.
로케 사엔스 페냐 대통령은 1912년 사엔스 페냐 법을 통해 남성 보통 선거를 도입했지만, 이는 급진 시민 연합의 이폴리토 이리고옌이 1916년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로 이어져, 국민 자율당의 헤게모니를 종식시켰다.
7. 1. 로카의 집권과 과두 정치 체제

사막 원정의 성공으로 인기를 얻은 훌리오 로카는 1880년 국민 자율당(PAN)의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로카는 재임 기간 동안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고, 1880년대 아르헨티나 정치판을 거의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데 기여한 여러 조치를 시행했다. 뛰어난 정치적 전략으로 그는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17]
아르헨티나 경제는 집약적 농업에서 산업 농업으로 변화하고, 유럽 이민의 아르헨티나 유입으로 이익을 얻었지만, 산업화로의 강력한 움직임은 아직 없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외국인 투자를 유치했다. 이러한 경제 확장 속에서 1884년 공통 교육법 1420은 모든 어린이에게 보편적이고, 무료이며, 비종교적인 교육을 보장했다. 이 법안 및 기타 정부 정책은 아르헨티나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교황청이 수년간 아르헨티나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지속적인 교회-국가 갈등의 무대가 마련되었다.[18]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1899년 푸나 데 아타카마 분쟁, 칠레-아르헨티나 간의 1881년 경계 조약 및 1902년 일반 중재 조약을 통해 칠레와의 국경 분쟁을 일시적으로 해결했다.[19][20][21] 로카 정부와 그 뒤를 이은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과두 정치, 특히 대지주들과 뜻을 같이 했다.

1886년, 로카가 헌법상 재선될 수 없게 되자 미겔 후아레스 셀만이 대통령이 되었다. 셀만은 로카의 정치 장악력을 줄이려 했고, 이는 그의 전임자의 반대에 부딪혔다. 로카는 셀만에 대한 대규모 반대 운동을 이끌었고, 이는 장기 불황이 아르헨티나 경제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과 결합되어 시민 야당이 쿠데타를 시작할 수 있게 했다. 이 쿠데타는 나중에 공원 혁명으로 알려지게 된다. 혁명은 레안드로 알렘, 전 대통령 바르톨로메 미트레, 온건 사회주의자 후안 B. 후스토가 이끌었다. 비록 주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지만, 혁명은 후아레스 셀만의 사임을 강요했고, 80년대의 세대의 쇠퇴를 알렸다.
1891년, 로카는 시민 연합이 다음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를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미트레가 이끄는 그룹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알렘이 이끄는 그룹은 반대했다. 이로 인해 시민 연합은 국민 시민 연합(아르헨티나)과 급진 시민 연합으로 분열되었다. 로카는 시민 연합을 분열시키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계획을 완료하고 제안을 철회했다. 알렘은 1896년에 자살했고, 급진 시민 연합의 통제는 그의 조카이자 제자인 이폴리토 이리고옌에게 넘어갔다.
셀만의 몰락 이후, 그의 부통령 카를로스 페예그리니가 정권을 잡고 국가를 괴롭히던 경제 위기를 해결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폭풍 항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7. 2.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
1870년대부터 해외 투자와 이민이 밀려 들어오면서 농업은 근대적으로 발전했고 아르헨티나 사회와 경제는 새롭게 재편되어 국가 통합이 강화되었다.[17] 1880년과 1929년 사이 아르헨티나는 경제 성장을 계속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부유한 10개국 중 한 곳이었으며 농업 수출 경제로 이익을 보았다.[17] 이민이 늘고 사망률이 떨어지면서 아르헨티나 인구는 5배로 늘었고, 경제는 15배로 확대되었다.[17]이러한 경제 확장 속에서 1884년 공통 교육법 1420은 모든 어린이에게 보편적이고, 무료이며, 비종교적인 교육을 보장했다.[17] 이 법안 및 기타 정부 정책은 아르헨티나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교황청이 수년간 아르헨티나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게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지속적인 교회-국가 갈등의 무대가 마련되었다.[17]
7. 3. 국경 분쟁과 과두 정치의 위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칠레와의 국경 분쟁을 겪었으나, 1899년 푸나 데 아타카마 분쟁, 칠레-아르헨티나 간의 1881년 경계 조약(1842년부터 존재했던 동 파타고니아, 티에라델푸에고 및 마젤란 해협 분쟁 해결) 및 1902년 일반 중재 조약을 통해 일시적으로 해결했다.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정부와 그 뒤를 이은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과두 정치, 특히 대지주들과 뜻을 같이 했다. 1886년, 미겔 후아레스 셀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레안드로 알렘, 바르톨로메 미트레, 후안 B. 후스토 등이 이끈 공원 혁명으로 인해 사임했다. 이 혁명은 80년대의 세대의 쇠퇴를 알렸다.
1891년, 시민 연합은 국민 시민 연합(아르헨티나)과 급진 시민 연합으로 분열되었다. 이폴리토 이리고옌이 급진 시민 연합을 이끌게 되었다.
카를로스 페예그리니는 경제 위기를 해결하여 "폭풍 항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898년, 로카는 다시 대통령이 되었으나,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8. 급진당 정부 시대 (1916년~1930년)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 시기(1916~1922) 아르헨티나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켰다. 이는 미국이 중앙 열강에 선전포고를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결정이었다.[24] 중립 정책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유럽, 특히 영국으로 상품을 수출하고 교전국에 신용을 제공하며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이 1917년 4월 4일 아르헨티나 민간 선박 ''몬테 프로테히도''호와 ''토로''호를 침몰시켰지만, 외교적 노력으로 카를 폰 룩스부르크 독일 대사 추방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24] 이리고옌은 미국이 아메리카 국가들을 유럽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것에 반대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중립국 회의를 조직했고, 아우구스토 산디노의 니카라과 저항을 지원했다.[24]
1920년대 초, 유럽 이민자와 추방자들의 유입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이 부상하면서 아르헨티나에는 새로운 좌익 활동이 나타났다. 이들은 급진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점진적 진보주의를 거부하고 즉각적인 행동을 선호했다. 세베리노 디 지오반니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폭력과 '행동 선전'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928년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 방문 중 암살 시도와 1929년 이리고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은 이러한 폭력 사태의 절정이었다.
1921년, 반혁명 성향의 ''로히아 헤네랄 산 마르틴''이 창설되어 1926년 해산될 때까지 군대에 민족주의 사상을 확산시켰다.[31] 1924년, 로베르토 데 라페레레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를 본뜬 ''공화국 연맹''(Liga Republicana)을 창설했다.[31] 아르헨티나 우파는 스페인 작가 마르셀리노 메넨데스 이 펠라요와 프랑스 왕당파 샤를 모라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31] 1922년, 파시스트로 전향한 시인 레오폴도 루고네스는 리마에서 '검의 시대'로 알려진 연설을 통해 군사 쿠데타와 군사 독재 수립을 촉구했다.
1928년, 이리고옌은 대통령으로 재선되어 노동자 권리 증진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보수 세력의 반발을 더욱 강화시켰고, 월가 대폭락 이후 대공황으로 아르헨티나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930년 9월 6일, 친파시스트 장군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이리고옌 정부는 전복되었고, 악명 높은 10년으로 알려진 시대가 시작되었다. 대공황 시기 냉동 쇠고기 수출은 감소했지만, 특히 영국으로의 수출은 외화 획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2]
8. 1. 이폴리토 이리고옌 정부의 개혁
이폴리토 이리고옌을 중심으로 한 급진 세력은 1916년 보통 남자 선거권 하에서 치러진 최초의 전국 선거를 통해 아르헨티나 정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리고옌은 득표율 45%만을 얻었고, 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행정부가 제안한 80건의 법안 중 보수 세력이 다수였던 의회에서 통과시킨 것은 26건에 불과했다.[23] 온건한 농업 개혁안과 이자 소득세, 그리고 중앙 은행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화국 은행 설립은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급진 시민 연합(UCR)은 공정한 선거와 민주주의 제도를 강조하며 아르헨티나의 팽창하는 중산층과 이전에는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사회 집단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리고옌의 정책은 농업 수출 모델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개혁을 시행하여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었다.[25] 이리고옌 정부는 사회 운동에 대한 탄압과 온건한 사회 개혁을 번갈아 가며 진행했다. 1918년, 코르도바 대학교에서 시작된 학생 운동은 대학 개혁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라틴 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26]
1919년 1월,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연맹(FORA)이 경찰 발포 사건 이후 총파업을 촉구하면서 비극적인 주간이 시작되었으며, 700명이 사망하고 4,000명이 부상을 입었다.[27] 루이스 델레피아네 장군은 민간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군했다. 그 후 사회 운동은 ''라 포레스탈'' 영국 회사와 파타고니아에서 계속되었으며, 엑토르 바렐라가 아르헨티나 애국 동맹의 지원을 받아 군사적 탄압을 주도하여 1,500명이 사망했다.[28]
이리고옌 행정부는 1921년 파업권을 규정한 노동법을 제정하고 최저 임금 법과 단체 협약을 시행했다. 1922년 6월에는 국영 석유 회사인 ''일반 석유 채굴국''(YPF)의 설립을 시작했다. 급진주의는 계급 투쟁을 거부하고 사회 화해를 옹호했다.[29]
1922년 9월, 이리고옌 행정부는 소련에 대항하여 시행된 ''위생선'' 정책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전쟁 후 오스트리아에 제공한 지원을 바탕으로 소련에 의 지원을 보내기로 결정했다.[30]
8. 2. 보수 세력의 반발과 사회적 혼란
이폴리토 이리고옌을 중심으로 한 급진 세력이 1916년 아르헨티나 정치를 장악했지만, 보수 세력은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유지하며 이리고옌 정부의 개혁 시도에 제동을 걸었다.[23] 온건한 농업 개혁안, 이자 소득세, 공화국 은행 설립 등은 의회에서 부결되었다.이러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 사회적 혼란도 가중되었다. 1919년 1월, 비극적인 주간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발포 사건 이후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연맹(FORA)이 총파업을 촉구하면서 700명이 사망하고 4,000명이 부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졌다.[27] 루이스 델레피아네 장군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군하여 질서를 회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이리고옌에 대한 쿠데타 시도도 있었다.
파타고니아에서는 영국 회사 ''라 포레스탈''과 관련된 사회 운동이 군사적 탄압으로 이어져 1,500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28]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이리고옌 정부는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1921년에는 파업권을 규정한 노동법을 제정하고, 최저 임금 법과 단체 협약을 시행했다.[29] 또한 1922년에는 국영 석유 회사인 ''일반 석유 채굴국''(YPF)을 설립하여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29]
8. 3. 알베아르 정부와 군부 쿠데타
마르셀로 토르쿠아토 데 알베아르는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급진시민연합(UCR) 소속이었던 알베아르는 그의 임기 동안 아르헨티나가 경제적 번영을 누렸지만, 동시에 정치적 긴장도 고조되는 시기를 경험했다.알베아르 정부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 후반에는 우파 세력이 성장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1929년에는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고, 이는 정치적 불안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1930년,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 장군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리고옌 정부가 전복되었다. 이 쿠데타는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후 군부의 정치 개입이 빈번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9. "불명예스러운 10년" (1930년~1943년)
대공황으로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이 시기부터 선거 사기, 정치 야당 탄압, 만연한 정부 부패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수치스러운 10년"이 시작되었다.[33]
우리부루는 조합주의를 헌법에 포함시키려 했으나, 이는 파시즘적인 움직임으로 여겨져 보수 세력의 지지를 잃었다. 결국 1932년 부정선거를 통해 아구스틴 P. 후스토가 대통령이 되었다. 후스토는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국가 성장을 희생하고 상류층에게만 혜택을 주는 정책이었다. 특히 로카-런시먼 조약은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소고기 생산자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악명 높은 결정이었다.
이후 국제 무역이 붕괴되면서 수입 대체 산업화가 이루어져 경제적 독립성은 강화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우익 파시스트와 좌익 급진주의자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군사 지향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정부를 통제했다. 1937년 로베르토 마리아 오르티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부통령 라몬 카스티요가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고, 1942년에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9. 1. 군부 독재와 정치적 탄압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침체와 아나키스트들의 폭력 사태는 1930년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의 배경이 되었다. 쿠데타로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이 축출되고, 우리부루는 극좌 단체를 탄압하여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 단체 회원 2,000명을 불법 처형했다.[33] 1931년 세베리노 디 지오반니의 처형은 아르헨티나 아나키즘 쇠퇴의 상징적 사건이었다.우리부루는 조합주의를 포함한 헌법 개정을 시도했으나, 파시즘으로 비춰져 보수적 후원자들의 지지를 잃고 1932년 부정선거로 아구스틴 P. 후스토가 대통령이 되었다. 후스토의 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상류층에게만 혜택을 주었고, 로카-런시먼 조약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부유층에게만 이익을 주는 대표적인 실정이었다.
1935년 리산드로 데 라 토레 상원의원은 소고기 산업 부패를 조사하며 후스토 정부 관료들을 고발하려 했으나, 국회 조사 중 친구 엔조 보르다베레가 살해당했다. 조사는 중단됐지만 데 라 토레는 ''앵글로'' 육류 회사 대표를 투옥시켰고, 1939년 자살했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수입 대체 산업화로 경제적 독립을 강화했지만, 파시스트와 좌익 급진주의자 간 대립, 군부의 정치 개입으로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1937년 로베르토 마리아 오르티스 대통령 당선 후 건강 문제로 라몬 카스티요가 권력을 승계했다.
9. 2. 경제 위기와 수입 대체 산업화
대공황의 여파로 1929년 이후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1930년 군사 쿠데타로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이 축출되고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가 집권하면서, 선거 사기, 정치 야당 탄압, 정부 부패 등으로 얼룩진 "수치스러운 10년"이 시작되었다.[33] 우리부루는 조합주의를 도입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32년 아구스틴 P. 후스토가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되었다.후스토는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상류층에게만 유리했고 국가 성장을 저해했다. 특히 로카-런시먼 조약은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소고기 생산자들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1935년, 리산드로 데 라 토레 상원의원은 소고기 산업의 부패를 폭로하고 후스토 정부의 각료들을 고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데 라 토레의 동료 엔조 보르다베레가 암살당했고, 소고기 조사는 중단되었지만, 데 라 토레는 부패 혐의로 ''앵글로'' 육류 회사 대표를 투옥시키는 데 성공했다. 데 라 토레는 1939년에 자살했다.
국제 무역 붕괴는 수입 대체 산업화를 촉진하여 경제적 독립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은 심화되었고, 파시스트와 급진주의자 간의 대립, 군사 지향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정부 통제가 이어졌다. 로베르토 마리아 오르티스가 1937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라몬 카스티요가 권력을 잡았다.
9. 3. 군부 내 갈등과 중립 정책 유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아르헨티나는 중립 정책을 유지했다.[33] 군부 내에서는 친(親)연합군 세력과 친(親)추축국 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다.
1930년, 아르헨티나 애국 동맹의 지지를 받은 군사 쿠데타로 이폴리토 이리고옌이 권좌에서 축출되고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가 그를 대신했다.[33] 이 쿠데타에 대한 지지는 아르헨티나 경제 침체와 급진적 아나키스트 관련 폭탄 공격 및 총격 사건으로 강화되었다. 이는 아르헨티나 사회의 온건파를 소외시키고 군의 행동을 촉구해온 보수 우파를 분노하게 했다. 이 군사 쿠데타는 선거 사기, 정치 야당(주로 UCR) 탄압, 정부 부패로 특징지어지는 "수치스러운 10년"의 시작이었다.[33]
우리부루는 대통령 재임 동안 아나키스트와 극좌 단체를 탄압하여 2,000명의 아나키스트 및 공산주의자를 불법 처형했다. 1931년 1월 체포되어 2월 1일에 처형된 세베리노 디 지오반니의 처형은 당시 아르헨티나 아나키즘 쇠퇴의 상징이었다.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우리부루는 조합주의를 포함하는 헌법 개정을 시도했다. 이러한 파시즘적 움직임은 쿠데타의 보수적 후원자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춰졌고, 그들은 1932년 부정선거로 대통령직을 얻은 온건 보수파 장군 아구스틴 P. 후스토에게 지지를 보냈다.
후스토는 상류층에 혜택을 주고 국가 성장을 희생하여 정치 및 산업 부패를 허용하는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시작했다. 후스토 정부의 악명 높은 결정 중 하나는 영국 경제와 아르헨티나 부유층 소고기 생산자에게 이익을 준 로카-런시먼 조약 체결이었다.
1935년, 진보 민주당 상원 의원 리산드로 데 라 토레는 아르헨티나 소고기 생산 산업 내 부패 혐의를 조사하면서 후스토의 농업부 장관 루이스 두하우와 재무부 장관 페데리코 피네도를 정치 부패 및 사기 혐의로 기소하려 했다. 국회 조사 중 두하우는 상원 의원들 간 싸움을 벌였고, 그의 경호원 라몬 발데스-코라는 데 라 토레를 죽이려다 실수로 그의 친구이자 정치적 파트너 엔조 보르다베레를 쏘았다. 소고기 조사는 중단되었지만, 데 라 토레는 부패 혐의로 ''앵글로'' 육류 회사 대표를 투옥시켰다. 데 라 토레는 1939년에 자살했다.
국제 무역 붕괴는 수입 대체 중심의 산업 성장을 이끌어 경제적 독립성을 강화했다. 우익 파시스트와 좌익 급진주의자 간 대립, 군사 지향적 보수주의자들의 정부 통제로 정치적 갈등이 증가했다. 로베르토 마리아 오르티스는 1937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부통령 라몬 카스티요가 뒤를 이었다. 카스티요는 1940년 실질적 권력을 잡았고, 1942년 공식적으로 지도자가 되었다.
10. 1943년 혁명 (1943년~1946년)
1943년 혁명은 군부 내 통일 장교단(GOU)이라는 비밀 조직이 일으킨 쿠데타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라몬 카스티요 대통령의 정책, 특히 선거 사기, 열악한 노동권, 파트론 코스타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34]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하려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연합국에 가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군부와 국민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우려와 함께 반대 기류가 형성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여론과도 일치했다.
1943년 쿠데타 이후 페드로 파블로 라미레스가 권력을 잡았고, 추축국과의 관계를 끊었다. 1944년에는 에델미로 파렐로 교체되었는데, 파렐 정부는 초기에는 중립 정책을 유지했으나, 전쟁 말기에 아르헨티나가 승리하는 쪽에 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1945년 3월 27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34]
10. 1. 군부 쿠데타와 페론의 부상
1943년 6월 4일, 페드로 파블로 라미레스, 아르투로 라우손, 에델미로 파렐, 후안 페론 등 군 지도자들이 통일 장교단(GOU)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카사 로사다로 진격, 라몬 카스티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 몇 시간 후 대통령은 사임했으며, 이 사건은 악명 높은 10년의 공식적인 종말로 여겨진다.[34]쿠데타 이후 라미레스가 집권하여 추축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1944년, 라미레스는 파렐로 교체되었다. 파렐은 처음에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전쟁 말기에 승리하는 쪽에 붙는 것이 이익이라고 판단, 1945년 3월 27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34]
후안 페론은 노동자 및 노동 조합과의 관계를 통해 큰 인기를 얻었다. 해임되어 마르틴 가르시아 섬에 구금되기도 했지만, 1945년 10월 17일 대규모 시위로 석방, 복귀했다. 이후 페론은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0. 2. 파렐 정부와 페론의 구금
후안 페론은 노동자 및 노동 조합과의 관계를 관리하며 매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해임되어 마르틴 가르시아 섬에 구금되었다.[34] 1945년 10월 17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정부는 페론을 석방하고 그를 다시 복귀시켜야 했다.[34] 페론은 그 직후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 대사 스프루일 브래이든은 반(反) 페론주의 정당을 지지하며 아르헨티나 정치에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11. 페론주의 시대 (1946년~1955년)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페론은 페론주의라는 자신만의 정치 이념을 내세웠다. 그의 정책은 파멸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페소화는 1948년 초부터 1950년 초까지 가치의 약 70%를 잃었고, 1951년에는 인플레이션이 50%에 달했다.[38] 페론 정부는 고립주의 외교 정책을 따랐고, 미국 등 다른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줄이려고 시도했다.
페론은 반대파를 탄압하여 투옥하고 일부는 고문했다.[39] 그는 많은 유능한 고문들을 해고하고, 개인적인 충성심을 기준으로 관리들을 승진시켰다. 1955년 에두아르도 로나르디가 주도하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원한 쿠데타(''해방 혁명'')로 페론은 축출되어 프랑코 시대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11. 1. 페론의 집권과 에바 페론의 역할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아르헨티나에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35] 그는 노동자 계급의 힘을 강화하고 노조 노동자 수를 늘리는 등 사회 및 교육 정책을 펼쳤다.[37]
그의 아내 에바 페론("에비타"로 잘 알려졌다.)은 페론의 두 번째 임기까지 영부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5] 그녀는 페론의 성공으로 노동 계급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47년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복지 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초로 정부가 빈민 구제에 관심을 가진 사건이었으며, 기존의 과두정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에비타는 무뚝뚝한 페론과 그의 지지자 사이의 "사랑의 다리"로 여겨졌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얻어냈으며, 페론주의 여성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페론의 두 번째 임기 동안 그의 경제학자들은 산업과 도시 발전을 장려했다. 그러나 1952년 에비타가 3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페론 행정부는 점차 가톨릭 교회와 자신의 정치 운동 사이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55년 쿠데타가 일어나 페론은 스페인으로 망명했다.[39]
11. 2. 페론주의 정책과 경제적 어려움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사회 및 교육 정책을 폈으며 노동자 계급의 힘을 강화하고 노동조합 가입자 수를 늘렸다.[37] 그의 아내 에바 페론(에비타)은 페론의 두 번째 임기까지 영부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7년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복지를 실시했다.[35] 1952년 에비타가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페론 행정부는 점차 어려움에 처했다.페론은 정부 지출을 확대했고, 그의 정책은 파멸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페소화는 1948년 초부터 1950년 초까지 가치의 약 70%를 잃었고, 1951년에는 인플레이션이 50%에 달했다.[38] 그의 정부는 고립주의 외교 정책을 따랐고, 다른 국가, 특히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줄이려고 시도했다.
반대파는 투옥되었고, 일부는 고문을 당했다.[39] 그는 많은 중요하고 유능한 고문들을 해고하는 한편, 개인적인 충성심을 기반으로 관리들을 승진시켰다. 1955년 에두아르도 로나르디가 주도하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원한 쿠데타(''해방 혁명'')로 페론은 축출되었다. 그는 망명길에 올라 결국 프랑코 시대 스페인에 정착했다.
11. 3. 군부 쿠데타와 페론의 망명
후안 페론이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의 포퓰리즘 정책은 페론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에바 페론은 1952년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35] 페론은 언론을 검열하고,[36] 노동조합 가입자 수와 정부 프로그램을 늘렸다.[37] 그의 정부는 고립주의 외교 정책을 추구하며, 특히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 정부 지출 확대로 인해 페소화 가치가 폭락하고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졌다.[38]반대파는 투옥되거나 고문을 당했고,[39] 페론은 유능한 고문들을 해고하고 충성심을 기준으로 관리들을 승진시켰다. 1955년 에두아르도 로나르디가 주도하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원한 쿠데타(''해방 혁명'')로 페론은 축출되었다. 그는 망명길에 올라 프랑코 시대 스페인에 정착했다.
12. "자유 혁명" (1955년~1958년)
1950년대와 1960년대 아르헨티나는 잦은 쿠데타와 경제 성장의 변동(1950년대 낮은 성장, 1960년대 높은 성장)으로 특징지어졌다. 지속적인 사회적, 노동적 요구에 직면했으며, 안토니오 베르니의 작품은 ''비야스 미세리아''(빈민가)의 삶을 묘사하며 이 시대의 사회적 비극을 반영했다.
''자유 해방 혁명'' 군사 쿠데타 이후 에두아르도 로나르디가 잠시 권력을 잡았고, 페드로 아람부루가 그 뒤를 이었다. 1956년에는 페론주의 장군들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관련자들이 처형되거나 암매장되는 등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로나르디와 아람부루의 집권 및 페론주의자들의 쿠데타 시도와 학살 참조)
1956년, 헌법 개정을 위한 특별 선거가 치러졌으나, 페론주의 정당의 항의로 많은 백지 투표가 나왔다. 리카르도 발빈이 이끄는 급진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아르투로 프론디지가 이끄는 급진당 좌파는 헌법 의회를 탈퇴하여 의회에 타격을 주었다. 결국 1853년 헌법을 복원하고 사회적 권리를 명시한 제14조 ''비스''만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12. 1. 로나르디와 아람부루의 집권
에두아르도 로나르디는 자유 해방 혁명 군사 쿠데타 이후 잠시 권력을 잡았다. 1955년 11월 13일, 페드로 아람부루가 로나르디의 뒤를 이어 1958년 5월 1일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40]1956년 6월, 후안 호세 바예와 라울 탄코 등 두 명의 페론주의 장군은 아람부루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들은 육군의 대규모 숙청, 사회 개혁 철폐, 노동조합 지도자 박해를 비판하며 봉기를 일으켰고, 모든 정치 및 노동 활동가의 석방과 헌정 질서 복귀를 요구했다.[40]
그러나 봉기는 빠르게 진압되었다. 바예 장군과 다른 군인들은 처형되었고, 20명의 민간인이 자택에서 체포되어 레온 수아레스 매립지에 시신이 버려졌다. 5월 광장 폭격과 더불어, 레온 수아레스 학살은 폭력의 악순환을 시작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1970년, 페드로 아람부루는 이 학살로 인해 페르난도 아발 메디나, 에밀리오 앙헬 마사, 마리오 피르메니치 등에 의해 납치되어 처형되었으며, 이들은 이후 몬토네로스 운동을 결성했다.[40]
12. 2. 페론주의자들의 쿠데타 시도와 학살
1955년 9월 16일 페드로 에우헤니오 아람부루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인 자유 해방 혁명 이후, 에두아르도 로나르디가 잠시 권력을 잡았다. 이후 페드로 아람부루가 1955년 11월 13일부터 1958년 5월 1일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1956년 6월, 후안 호세 바예와 라울 탄코를 비롯한 두 명의 페론주의 장군은 아람부루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시도했다.[40] 이들은 육군의 대규모 숙청, 사회 개혁 철폐, 노동조합 지도자 박해를 비판하며 일어났고, 모든 정치 및 노동 활동가의 석방과 헌정 질서 복귀를 요구했다. 봉기는 빠르게 진압되었다.[40] 바예 장군과 다른 군인들은 처형되었고, 20명의 민간인이 자택에서 체포되어 시신이 레온 수아레스 매립지에 버려졌다.[40]5월 광장 폭격과 더불어, 레온 수아레스 학살은 폭력의 악순환을 시작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40] 페드로 아람부루는 이후 1970년, 이 학살로 인해 페르난도 아발 메디나, 에밀리오 앙헬 마사, 마리오 피르메니치 등에 의해 납치되어 처형되었으며, 이들은 이후 ''몬토네로스'' 운동을 결성했다.[40]
13. 불안정한 급진당 정부 시대 (1958년~1966년)
1958년부터 196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민간 정부 통치 하에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페론주의는 여전히 금지되어 발언과 대변이 허용되지 않았다.[41]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 UCRI의 아르투로 프론디시가 당선되었고, 1963년에는 급진 인민당의 아르투로 일리아가 대통령이 되었다.
1962년 프론디지 정부가 군부의 개입으로 붕괴된 후, 상원 의장인 호세 마리아 기로가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을 주장했다. 그러나 군부 내 우익 세력은 1963년 아르헨티나 해군 반란을 일으켜 정부 통제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3. 1. 아르투로 프론디시 정부

1958년 아르투로 프론디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프론디시는 페론 지지자들의 지원을 일부 얻었으며, 그의 정책은 에너지와 공업 분야에 필요한 투자를 장려하여 아르헨티나가 이 두 분야에서 자립할 수 있게 했다.[41] 그러나 군부는 보수주의자들의 이익을 위해 자주 정치에 간섭했으며, 프론디시는 1962년 사임했다.[41]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 UCRI의 후보였던 프론디지는 약 400만 표를 얻어 리카르도 발빈에 250만 표를 앞섰다. 카라카스에서 페론은 프론디지를 지지하며 지지자들에게 그에게 투표할 것을 요청했다.[41]
프론디지는 강력한 농업계와 다른 보수 세력을 달래기 위해 알바로 알소고라이를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알소고라이는 페소화를 평가절하하고 신용 통제를 부과했다.
프론디지는 세속주의 프로그램을 따랐고, 이는 가톨릭 민족주의 세력 사이에서 우려를 불러일으켜 1960년부터 1962년 사이에 극우 타쿠아라 민족주의 운동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타쿠아라는 도시 게릴라 단체[42]로서, 1960년 모사드에 의한 아돌프 아이히만 납치 이후 여러 반유대주의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 1962년 2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아르헨티나 방문 동안 타쿠아라는 그를 상대로 민족주의 시위를 주도하여 여러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다.[43]
프론디지 정부는 일련의 지방 선거에서 페론주의 후보가 승리한 후 1962년 군부의 개입으로 막을 내렸다.
13. 2. 아르투로 일리아 정부
1963년 아르투로 일리아가 대통령에 선출되어 확장 정책을 폈다.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그가 페론주의자들을 정계에 끌어들이려 하자 군부는 1966년 쿠데타로 대통령을 축출했다.[41]1963년 아르헨티나 해군 반란 이후 치러진 1963년 선거에서는 페론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모두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다. 급진 인민당의 아르투로 일리아가 이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의 지방 선거와 보궐 선거는 페론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타쿠아라는 1965년 일리아에 의해 불법화되었으며, 그 구성원 중 일부는 조 백스터와 같이 페론주의 좌파로 전환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베르토 에스쿠라 우리부루와 같이 트리플 A와 협력하는 등 극우적 입장을 유지했다.
일리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국가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1966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14. "아르헨티나 혁명" (1966년~1973년)
1966년 쿠데타로 일리아 대통령이 축출되고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 장군이 집권하면서 아르헨티나 혁명이 시작되었다.[112] 옹가니아는 정치 활동과 모든 정당을 금지하고, 학생 및 노동조합 조직을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 통치를 했다.[112] 노동총연맹(CGT)은 초기에는 옹가니아를 지지했지만, 군부의 경제 합리화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1969년 코르도바소로 알려진 대규모 시위와 폭동은 옹가니아의 권위를 흔들었다.[112]
14. 1. 옹가니아의 권위주의적 통치
1966년 쿠데타로 일리아 대통령을 몰아내고 집권한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 장군은 강력한 권위주의 통치를 시작했다.[112] 옹가니아는 아르헨티나 혁명을 선언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며,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학생 및 노동조합 조직을 탄압했다.[112]옹가니아 정권 초기, 노동총연맹(CGT)은 옹가니아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군부는 경제 합리화 정책을 추진하며 노동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1969년 코르도바소로 알려진 대규모 시위와 폭동이 발생하면서 옹가니아의 권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112]
14. 2. 노동 운동 탄압과 대학생 저항
1966년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투로 움베르토 일리아 대통령을 축출하고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112] 옹가니아는 '아르헨티나 혁명'을 선언하고, 미국의 지원 아래 반공주의, 친미, 친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했다.옹가니아 정권은 노동 운동을 탄압하고, CGT(전국노동총연맹)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국외로 추방했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는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
1966년 7월 29일, 옹가니아 정권은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교수와 학생들을 탄압하는 '긴 곤봉의 밤' 사건을 일으켰다.[112]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 군경이 투입되어 교수와 학생들을 폭행하고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연구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1969년 5월, 코르도바에서 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인 '코르도바소'가 발생했다. 코르도바소는 노동자, 학생, 시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봉기로, 옹가니아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었다. 코르도바소 이후 아르헨티나에서는 사회 운동이 확산되었고, 노동 운동과 학생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15. 불안정의 심화 (1969년~1976년)
1966년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시작된 '아르헨티나 혁명'은 실패했다. 사회는 불안정해졌고, 좌익과 우익 세력 간의 충돌이 격화되었다.
1969년 코르도바에서 노동자 총연맹과 아구스틴 토스코가 주도한 대규모 봉기인 코르도바소가 발생하면서 전국적인 시위가 촉발되었다.
1973년 엑토르 캄포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후안 페론이 망명에서 돌아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페론은 1974년 사망했고, 그의 부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사벨 페론 정부는 경제난과 좌우익 극단주의자들 간의 폭력 사태로 어려움을 겪었다.
1973년 6월 20일, 페론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군중에게 극우 무장 세력이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에세이사 학살이 일어났다.
1976년 3월 24일, 군사 쿠데타로 이사벨 페론 정부는 무너졌다.
15. 1. 게릴라 활동과 정치적 혼란
1969년 4월, 이전 혁명 공산당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해방 무장군(Fuerzas Armadas de Liberación)''이 이끄는 다양한 무장 활동이 발생하여 FAL 구성원들이 체포되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에서 최초의 좌익 도시 게릴라 활동이었다. 같은 해 CGT de los Argentinos와 그 코르도바 지도자 아구스틴 토스코가 촉발한 코르도바소 봉기가 전국적인 시위를 촉발했다. 같은 해, 트로츠키주의 노동자 혁명당의 군사 조직으로서 인민 혁명군(ERP)이 결성되어, 고위층 부유한 아르헨티나인들을 납치하고 몸값을 요구했다.[49][50]마지막 "사실상" 군사 대통령인 알레한드로 라누세는 1971년에 임명되었으며, 지속적인 페론주의 노동자들의 항의 속에서 민주주의를 재건하려 했다. 저항의 물결이 높아지는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군사 정부는 페론주의 금지령을 해제하고 1973년에 공개 선거를 실시하며, 판자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택 사업을 지원하는 등 양보를 했다.[51]
15. 2. 엑토르 캄포라 정부
엑토르 캄포라는 1973년 3월 11일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급진 시민 연합 후보를 누르고 49.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52] 캄포라는 국가 재건을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 운동을 펼쳤다. 1973년 5월 25일, 캄포라는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취임했다. 취임식에는 쿠바 대통령 오스발도 도르티코스 토라도와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참석했다.[52]캄포라 정부는 국민 시장 지원과 부의 재분배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페론주의 경제 정책을 따랐다. 경제부 장관 호세 베르 겔바르드는 노동자 임금 인상을 단행했다. 그러나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52]
캄포라 정부에는 진보적인 인물뿐만 아니라, 호세 로페스 레가와 같이 노동 및 정치 우익 페론주의 파벌 인사들도 포함되었다. 페론의 추종자들은 의회에서 강력한 다수를 차지했다. 캄포라 취임 첫 달 동안 거의 600건의 사회 갈등, 파업, 점거가 발생했다. 군부는 캄포라의 승리를 인정했지만, 파업과 폭력 사태는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캄포라를 정부에, 페론을 권력에" (Cámpora al gobierno, Perón al poderes)라는 구호는 대중의 열망을 대변했다.[52]
15. 3. 페론의 귀환과 이사벨 페론 정부
1973년 자유 선거를 통해 엑토르 캄포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망명 중이던 후안 페론이 스페인에서 돌아와 대통령이 되었다.[52] 그러나 페론은 1974년 7월에 사망했고, 그의 셋째 부인이자 부통령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사벨 페론은 페론주의자 파벌 사이의 타협으로 선택되었지만, 좌우익 극단주의자 사이의 폭력 사태와 재정 위기가 발생했다.[54]1973년 6월 20일, 페론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200만 명이 에세이사 공항에 모였으나, 극우 무장 세력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최소 13명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부상당하는 에세이사 학살이 발생했다.[53]
1973년 9월 23일, 페론은 61.85%의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이 되었다. 페론주의 우익 파벌은 트리플 A를 결성하여 폭력 행위를 지속했다. 1973년 9월 25일, CGT 노동조합 사무총장이자 페론의 친구인 호세 이그나시오 루치가 몬토네로스에 의해 암살되었다.
페론은 1974년 7월 1일에 사망했고, 그의 아내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사벨 페론 정부는 경제 붕괴, 페론주의 내부 갈등, 반군 및 준군사 조직의 테러 행위 증가로 어려움을 겪었다. 호세 로페스 레가는 1975년 6월 이사벨 페론의 고문직에서 물러났고, 1975년 8월에는 육군 참모총장 누마 라플라네 장군이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으로 교체되었다.[54]
1976년 3월 24일, 군사 쿠데타로 이사벨 페론 정부는 축출되었다.
16. "국가 재조직 과정" (1976년~1983년)
1973년 군사 정권은 자유 선거를 요구받았고, 후안 페론이 스페인에서 돌아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페론은 1974년 7월에 사망했고, 그의 셋째 부인이자 부통령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사벨 페론은 페론주의자 파벌 간의 타협으로 선택되었으나, 좌우익 극단주의자 간의 폭력 사태와 재정 위기로 인해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군사 정권은 스스로를 국가 재조직 과정이라 칭하며, 잔혹하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파와 좌파를 탄압하는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비밀정보국은 칠레 비밀경찰 및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협조하여 콘도르 작전을 수행했고, 수천 명의 반체제 인사들이 '행방불명'되었다. 더러운 전쟁에 연루된 많은 군부 독재자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그중에는 아르헨티나 독재자 로베르토 비올라와 레오폴도 갈티에리도 있었다.
16. 1. 군부 독재와 "더러운 전쟁"

이사벨 페론에 대한 쿠데타 이후, 군부는 1983년 12월 10일까지 비델라, 비올라, 갈티에리, 비그노네가 차례로 이끄는 군부를 통해 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들 ''사실상''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정부 프로그램을 "국가 재건 과정"이라고 칭했다. '''더러운 전쟁'''(guerra sucia|links=noes)은 군사 정부 또는 '''아르헨티나 시민-군사 독재'''(dictadura cívico-militar de Argentina|links=noes)가 아르헨티나에서 콘도르 작전의 일환으로[56] 1974년부터 군 및 보안군과 우익 암살단인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Triple A)[57]이 국가 테러 시기 동안 (또는 그렇게 의심되는) 정치적 반체제 인사와 사회주의와 관련이 있거나 콘도르 작전에 의해 지시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추적하는 데 사용한 이름이다.[58][59] 약 3만 명이 실종되었으며, 국가 테러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실종 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 대상은 학생, 활동가, 노동조합원, 작가, 언론인, 예술가였으며, 좌익 정치 활동가로 의심되는 사람이었고, 페론주의 게릴라도 포함되었다.[60] "실종자"(군사 정부에 의해 납치, 고문, 살해되어 시신이 은폐된 희생자)는 군사 정부에 정치적 또는 이념적으로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심지어 애매모호하게라도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포함했으며,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 반대를 침묵시키려는 군부의 시도로 살해되었다.[61]

심각한 경제 문제, 늘어나는 부패 혐의, 대중의 불만,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게 1982년 패배한 것(아르헨티나의 1982년 포클랜드 침공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이후)은 모두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강력한 대중의 압력으로 군부는 정당에 대한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점진적으로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를 회복했다.
군부의 대부분의 구성원은 현재 반인륜적 범죄와 집단 학살 혐의로 수감되어 있다.
16. 2. 경제적 어려움과 포클랜드 전쟁
1975년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발전하여 빈곤율이 7%로 낮아졌다.[55]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은 여러 공공 사업을 벌였지만, 잦은 임금 동결과 금융 규제 철폐로 생활 수준이 급격히 떨어지고 외채가 늘어났다.[55]
산업 위축, 페소화 붕괴, 실질 이자율 하락과 더불어 전례없는 부패는 민중들이 군사독재정권의 인권 유린에 맞서게 했다.[55] 결국 1982년 군사 정부가 영국과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하며 신뢰를 잃고 1983년 자유 선거를 치르게 된다.[55]
심각한 경제 문제, 부패 혐의 증가, 대중의 불만, 그리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게 패배한 것은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을 불신하게 만들었다.[62]
17. 민주주의 시대 (1983년~현재)
1983년 10월 30일,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대통령, 부통령, 그리고 국가, 지방 및 지역 공무원을 선출하기 위해 투표에 참여했다. 국제 참관인들은 이 선거가 공정하고 정직했다고 평가했다. 급진 시민 연합(Unión Cívica Radical, UCR)의 후보인 라울 알폰신은 대통령 선거에서 5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었고, 아르헨티나는 헌법 통치로 복귀했다. 그는 1983년 12월 10일에 6년 임기를 시작했다.
라울 알폰신 정부는 '행방불명자'를 찾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군대에 대한 민간 통제 및 민주적인 통합 조직을 세웠다. 그러나 과거 정권의 외채 문제와 경제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89년 통화 위기로 5개월 일찍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카를로스 메넴은 1989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사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1990년에 두 번째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은 후 도밍고 카바요를 경제학자로 기용하여 1991년 페소화 환율을 달러화에 고정시키고, 시장 기반 정책을 통해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외채 증가와 경제 위기로 인해 1999년 임기 말에는 인기가 하락했다.
페르난도 데 라 루아는 1999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으나 카를로스 메넴 정권으로부터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악화된 수출 경쟁력을 물려받았다. 2001년 12월 20일 아르헨티나는 최악의 사회 및 경제 위기에 봉착했고, 결국 데 라 루아 대통령도 사임하게 되었다.[112][113]
2002년 1월 2일, 아르헨티나 의회는 에두아르도 두알데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66] 두알데 대통령은 해외 채무에 대한 채무 불이행(default)을 선언하고, 페소화의 달러 연동제를 폐지했다. 중도 좌파 성향의 페론주의자인 두알데는 경제학자인 로베르토 라바냐를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2003년 5월 사회민주주의 페론주의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산타크루스 주지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키르치네르 정부는 산업 부흥, 수입대체와 수출 증가에 기반을 둔 새 정책을 실행했고, 재정과 무역 면에서 안정적으로 흑자를 보였다. 키르치네르 시기에 아르헨티나는 채무를 재조정하고, 2005년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모든 외채를 갚았다.[68]
2007년 12월 10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44%의 득표율로 2007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남편으로부터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70] 그녀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직접 선거로 뽑힌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됐다. 2008년 7월 16일 부통령 훌리오 코보스는 상원의장으로서 여당에 반대표를 던져서 대통령의 정책을 좌절시켰다. 2011년 선거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54.11%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었다.
2015년 11월 22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장이었던 마우리시오 마크리는 2015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78]
2019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정의당 소속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마우리시오 마크리를 꺾고 2019년 12월 10일 대통령에 취임했다.[81] 2021년 아르헨티나 입법 선거에서 집권 페론주의 정당 연합인 모두를 위한 전선(Frente de Todos)이 거의 40년 만에 처음으로 의회 과반수를 잃었다.[83][84] 2023년 4월,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23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85]
2023년 12월 10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국회의원 하비에르 밀레이가 2023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87] 아르헨티나는 2024년 1월 1일에 브릭스에 가입할 예정이었으나, 가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89]
17. 1. 라울 알폰신 정부
라울 알폰신 정부는 '행방불명자'를 찾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군대에 대한 민간 통제 및 민주적인 통합 조직을 세웠다. 군사독재정권 출신자들은 고발되어 종신형을 선고받는 처벌을 받았다.[64] 그러나 과거 정권이 떠안은 외채는 그대로 남아 국제통화기금과 개인 채권자들은 아르헨티나 경제에 몇몇 조건을 내렸으며, 국가는 우선 공공 사업과 국내 신용을 희생하고 외채를 갚아야 했다. 알폰신은 경제 악화를 해결하지 못하여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뒤이어 갑자기 닥친 1989년 통화 위기로 물가는 15배나 껑충 뛰었으며, 그는 5개월 일찍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5일 후, 그는 아르헨티나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가 이끄는 실종자 조사 국가 위원회(CONADEP)를 설립했다. 그러나 군부의 압력 속에서 1983년 12월 10일 이전에 저질러진 모든 행위에 대해 사면을 허용하는 1986년 12월 24일 "종료법"이 알폰신 대통령 재임 기간에 통과되었다. 2005년 6월 아르헨티나 대법원의 결정으로 모든 사면법이 뒤집히기 전까지 조사가 다시 시작될 수 없었다.[64]
알폰신 행정부에서 칠레와 1984년 칠레-아르헨티나 평화 우호 조약이 체결되었고 메르코수르 무역 블록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1985년과 1987년 중간 선거에서 많은 투표율은 강력하고 활기찬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지속적인 대중의 지지를 보여주었다. UCR이 이끄는 정부는 군사 통치 기간 동안 실종된 사람들을 밝히고, 군에 대한 민간 통제를 확립하고, 민주적 제도를 통합하는 것을 포함하여 국가의 가장 시급한 문제 중 일부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군부와의 끊임없는 마찰, 군사 독재에서 물려받은 여러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점, 노동 조합의 거센 반대는 알폰신 정부의 효율성을 약화시켰고, 페론주의 후보 카를로스 메넴이 1989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6개월 일찍 퇴임했다.
17. 2. 카를로스 메넴 정부
카를로스 메넴은 사유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1990년에 두 번째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은 후 도밍고 카바요를 경제학자로 기용했다. 1991년 페소화 환율을 달러화에 고정시키고, 시장 기반 정책을 통해 사유화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무역 장벽과 기업 규제를 철폐했다.[1] 이러한 개혁은 1990년대 거의 내내 물가 안정을 가져왔고 투자와 성장을 확대시켰다.[1] 그러나 페소화는 시장에 달러화가 밀려들어와 가치를 유지하지 못했고, 외채가 다시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1] 1998년에 발생한 일련의 국제 금융 위기와 고정 페소화의 지나친 고평가는 점차 경제 위기로 이어졌다.[1] 1990년대에 팽배했던 경제 안정에 대한 기대는 갑자기 무너졌고, 1999년 임기 말에 누적된 문제들과 부패 보고로 메넴은 인기를 잃었다.[1]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국내 정책의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다.[2] 대규모 구조 개혁은 아르헨티나 경제 생활에서 국가의 역할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2] 아이러니하게도, 페론주의자 메넴은 페론이 국유화했던 많은 산업의 민영화를 감독했다.[2]
논란이 많은 의제를 추진하는 결단력 있는 지도자인 메넴은 국회가 자신이 제안한 개혁에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때 "긴급" 칙령(공식적으로는 ''필요성과 긴급 칙령'')을 발동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3] 1994년 야당인 급진 시민 연합과의 이른바 올리보스 협약의 결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이러한 권한은 어느 정도 축소되었다.[3] 이 협약은 메넴이 1995년 3자 구도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50%의 득표율로 재선을 모색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3] 피케테로 운동이 일어났다.[3]
1995년 선거에서는 중도 좌파 프레파소 정치 연합이 등장했다.[4] 아르헨티나의 두 전통 정당에 대한 이 대안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특히 강세를 보였지만 페론주의자와 급진 시민 연합의 전국적인 기반은 부족했다.[4] 아르헨티나의 정치 생활에서 중요한 발전으로, 1999년 선거에서 3개 주요 정당 모두 자유 시장 경제 정책을 지지했다.[4]
17. 3. 페르난도 데 라 루아 정부와 경제 붕괴
페르난도 데 라 루아는 카를로스 메넴 정권으로부터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악화된 수출 경쟁력을 물려받았다. 정치 연합은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고, 도밍고 카바요가 다시 경제 장관으로 돌아오자 이는 금융 파생상품 시장에 의한 위기로 해석되었다. 이에 카바요는 자본 이탈 흐름을 막고 긴급한 채무 위기를 막기 위해 은행 계좌를 동결하는 조치(코랄리토)를 시행했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은 계속되었고 2001년 12월 20일 아르헨티나는 1890년 대불황 이래 최악의 사회 및 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거리에서는 폭력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과 충돌하여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위 군중 사이로 점차 "모두 꺼져라"라는 구호가 퍼져나갔으며, 결국 데 라 루아 대통령도 사임하게 되었다.[112][113]17. 4. 에두아르도 두알데 정부와 경제 회복
2002년 1월 2일, 아르헨티나 의회는 에두아르도 두알데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66] 두알데 대통령은 해외 채무에 대한 채무 불이행(default)을 선언하고, 11년간 지속된 페소화의 달러 연동제를 폐지했다. 이로 인해 페소화 가치가 크게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중도 좌파 성향의 페론주의자인 두알데는 2002년 말까지 실업률이 25%에 달하고 실질 임금이 지난 60년간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금융 및 사회경제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 위기로 인해 대중은 정치인과 제도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이듬해 시위가 득세했으며, 2002년 말부터 경제가 안정되기 시작했고 그해 12월 은행 인출 제한이 해제되었다.
두알데 대통령은 혼란에 빠진 국가를 마주했다. 그의 행정부는 중산층의 카세롤라소와 실업자 피케테로 시위에 대처해야 했고, 폭력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실업률 증가와 빈곤의 형태로 위기의 영향이 나타나자, 두알데는 온건하고 조용한 경제학자인 로베르토 라바냐를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시행된 경제 조치로 인플레이션이 억제되었다.
1년 후, 두알데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판단하고, 특정 정치적 요인에 압박을 받아 2003년 4월, 산타 크루스의 중도 좌파 페론주의 주지사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권력으로 이끄는 선거를 실시했다.[66]
17. 5. 키르치네르 정부 (2003년~2015년)
2003년 5월 사회민주주의 페론주의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산타크루스 주지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환율 평가절하 정책 덕택에 정부는 산업을 부흥시켰으며, 수입대체와 수출 증가에 기반을 둔 새 정책을 실행했고, 재정과 무역 면에서 안정적으로 흑자를 보였다. 키르치네르 시기에 아르헨티나는 대부분의 채권에 높은 할인율(약 66%)로 채무를 재조정했다. 또한 2005년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모든 외채를 갚았다.[68] 공익 사업을 재조정하고 90년대 민영화된 기업 중 일부를 국유화했다. 그의 경제부 장관인 로베르토 라바냐는 강력한 소득 증진 정책과 공공 사업 투자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아르헨티나는 경제위기에서 벗어나 경제 성장을 계속 하게 되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2003년 5월 25일에 취임했다.[67] 그는 군 수뇌부를 개편하고, 1976~1983년 독재 정권의 관계자들을 기소로부터 보호했던 논란이 많은 사면법을 뒤집었으며, 대부분의 대통령 임기 동안 라바냐를 경제 장관으로 유임시켰다. 키르치네르 행정부는 강력한 경제 회복을 보였고, 대외 부채 재조정을 단행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2007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 대신,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상원의원이 출마하여 당선됐다. 페르난데스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직접 선거로 뽑힌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됐다. 여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은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뤄진 총선과 지방선거에 승리해서 의회를 다수 차지했다. 2007년 12월 10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44%의 득표율로 선거에서 승리한 후 남편으로부터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70]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임기 동안 매우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남았다. 언론은 두 사람을 함께 지칭하기 위해 "대통령 부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71] 일부 정치 분석가들은 이러한 유형의 정부를 양두 체제와 비교했다.[72]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농업 수출세 인상 계획을 펴려고 하자, 2008년 3월부터 7월까지 농업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직장폐쇄로 반발했다. 농업 부문의 심각한 셧다운에 직면해야 했다. 129일 동안 이어진 시위는 빠르게 정치화되었고, 그녀의 행정부에 있어서 분기점이 되었다. 이 제도는 결국 부통령 훌리오 코보스의 반대표로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2008년 7월 16일 부통령 훌리오 코보스는 의회의 가부 동수(同數) 결과에서 상원의장으로서 여당에 반대표를 던져서 대통령의 정책을 좌절시켰다. 2008년 10월 세계 금융 위기가 닥치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남편의 정책대로 국가가 직접 경제에 개입했다.
2010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사망으로 정부의 정치 스타일이 변화했다.[73]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정의당의 전통적인 구조로부터 서서히 거리를 두었고, 대신 그녀의 장남 막시모 키르치네르가 이끄는 젊은 지지자 그룹인 ''라 캄포라''를 선호했다.
2009년 6월 총선에서 집권연합 승리를 위한 전선이 패해 과반수를 잃었다. 2009년 10월 아르헨티나 상하원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개 업체가 소유할 수 있는 방송 면허의 수를 제한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미디어 개편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미디어 개편법안에 대해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온 클라린을 겨냥했다는 평가도 있다.[114]
2011년 선거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에르메스 비너를 상대로 54.11%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었다. 산루이스를 제외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와 모든 주에서 승리했고(연방 헌신 후보 알베르토 로드리게스 사아가 승리),[74] 1983년 라우울 알폰신 이후 처음으로 유권자 과반수를 확보한 후보가 되었으며, 투표 처리가 완료된 후 승리 차이(37.1%)는 후안 페론이 1973년에 기록한 36%의 기록을 넘어섰다.[75]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재선된 최초의 여성 국가 원수가 되었다.[76]
17. 6. 마우리시오 마크리 정부 (2015년~2019년)
2015년 11월 22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장이었던 마우리시오 마크리는 결선 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뒤를 이었다. 공화주의 제안(PRO)당의 대표로서 시민 연합 ARI와 급진 시민 연합으로 구성된 Cambiemos(변화합시다)라는 연합을 통해 다니엘 시올리를 꺾고 대통령이 되었다.[77] 마크리는 그해 12월 10일에 대통령직을 인계받았다. 그의 정부는 이전 시대와는 다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78]마크리는 파나마 페이퍼스 스캔들에 등장한 정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다른 지도자들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한 여러 개의 역외 회사를 소유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현재까지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았다.[79][80]
17. 7.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정부 (2019년~2023년)

2019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정의당 소속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마우리시오 마크리를 꺾고 2019년 12월 10일 대통령에 취임했다.[81]
2021년 11월 14일, 2021년 아르헨티나 입법 선거에서 집권 페론주의 정당 연합인 모두를 위한 전선(Frente de Todos)이 거의 40년 만에 처음으로 의회 과반수를 잃었다.[83][84] 중도 우파 연합인 변화를 위한 함께(Juntos por el Cambio)의 승리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남은 임기 2년이 어려워졌다. 상원 통제권 상실로 사법부 등 주요 임명이 어려워지고, 야당과의 협상이 필요하게 되었다.[83][84]
2023년 4월,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23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85]
17. 8.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 (2023년~현재)

2023년 12월 10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국회의원 하비에르 밀레이가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87] 취임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는 연 143%의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통화 가치는 폭락했으며, 국민 10명 중 4명이 빈곤층이었다.[88]
아르헨티나는 2024년 1월 1일에 브릭스에 가입할 예정이었으나, 가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밀레이 대통령이 서방과의 긴밀한 관계를 선호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89]
2024년 1월 아르헨티나의 빈곤율은 57.4%에 달했다가, 49.9%로 떨어졌다.[90] 이는 2004년 이후 가장 높은 빈곤율이다.[91]
참조
[1]
문서
Santillán, p. 17
[2]
간행물
Mid-Holocene paleoenvironments and the archeological record of southern Mendoza, Argentina
2005
[3]
문서
Santillán, pp. 18–19
[4]
서적
Insight Guide Argen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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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I, 아르헨티나 미디어 개편법안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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