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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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탄불의 역사는 인류가 신석기 시대부터 정착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 초기에는 리고스, 비잔티움으로 불리며 번성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상업, 문화, 종교의 중심지로 번영했으나, 1204년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어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앙카라로 수도가 이전되었고, 20세기 후반부터 인구가 급증하며 현대 도시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게지 공원 시위, 쿠데타 시도, 테러 등 다양한 사건을 겪었으며, 새로운 이스탄불 공항 개항과 시리아 난민 유입 등 변화를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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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에 건설하여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천 년 이상 번영했던 전략적 요충지였으나, 현재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터키의 주요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 이스탄불의 역사 - 게지 공원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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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역사 | |
---|---|
개요 | |
지리적 위치 |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도시 |
현재 이름 | 이스탄불 |
이전 이름 | 뤼고스 (Lygos) 비잔티온 (Byzantion) 콘스탄티노폴리스 (Constantinopolis) 이슬람볼 (İslambol) |
초기 역사 | |
기원 |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인들이 비잔티온 건설 기원전 660년경: 메가라의 그리스인 정착민들이 비잔티온 건설 |
뤼고스 | 비잔티움의 이전 이름 |
플리니우스 장로 언급 | 플리니우스 장로: "이전에는 뤼고스라고 불렸던 자유 도시 비잔티움" |
로마 시대 | |
로마 제국 편입 | 196년: 로마 제국에 의해 파괴 이후 재건 |
중요성 증대 | 콘스탄티누스 1세: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재건 및 수도 이전 |
비잔티움 시대 | |
콘스탄티노폴리스 | 동로마 제국의 수도 테오도시우스 성벽 건설 유럽 최대 도시 |
인구 | 5세기: 400,000 ~ 500,000명 6세기: 500,000명 12세기: 약 500,000명 |
라틴 제국 점령 | 1204년 ~ 1261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점령 |
비잔티움 제국 재건 | 1261년: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가 도시를 탈환 |
인구 감소 | 13세기 말: 100,000명 이하로 감소 1453년: 50,000명 |
오스만 제국 시대 | |
오스만 제국 점령 |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메흐메트 2세가 점령 |
수도 이전 | 에디르네에서 콘스탄티니예로 수도 이전 |
이스탄불로 개칭 | 공식적으로 개칭되지는 않았으나 널리 사용됨 |
인구 증가 | 1500년경: 200,000명 16세기 말: 500,000명 (유럽 최대 도시) |
문화적 중심지 | 모스크, 궁전, 분수, 목욕탕 건설 술탄의 권력 강화 |
근대화 | 19세기: 철도, 전차, 전력 도입 |
터키 공화국 시대 | |
수도 이전 | 1923년: 앙카라로 수도 이전 |
인구 증가 | 20세기 후반: 급격한 인구 증가 |
경제, 문화 중심지 | 터키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발전 |
유적 발견 | |
예니카프 발굴 | 마르마라이 프로젝트 중 고고학적 유물 대량 발견 |
발견 내용 | 신석기 시대 유물, 항구, 난파선 등 |
2. 선사 시대
현재 이스탄불로 알려진 지역에는 적어도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해 왔으며, 이는 예니카피 지하철역 공사 등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18][19][20] 또한 인근 카디쾨이(칼케돈)에서는 페니키아인 시대의 항구 정착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21]
2. 1. 신석기 시대 유적
인류는 현재 이스탄불로 알려진 지역에 적어도 신석기 시대부터 거주해 왔다. 가장 초기의 정착지는 기원전 67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2008년 예니카피 지하철역과 마르마라이 터널 건설 공사 중 유럽 측의 역사적인 반도에서 발견되었다.[18][19][20] 아나톨리아 측에서는 가장 초기의 정착지로 기원전 5500년에서 3500년 사이의 유물이 발견된 구리 시대의 피키르테페 언덕이 있다.[21]3. 리고스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도시의 첫 번째 이름은 ''리고스''(Lygos)였다.[22] 이 도시는 인근의 세미스트라(Semystra)와 함께 트라키아 부족에 의해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23]
3. 1. 리고스의 유적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도시의 첫 번째 이름은 ''리고스''(Lygos)였다.[22] 리고스는 인근의 세미스트라(Semystra)와 함께 트라키아 부족에 의해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23] 현재까지 리고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몇 개의 벽과 기초 구조물 일부가 사라글리오 곶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6] 이곳은 현재 톱카프 궁전이 자리한 곳이다. 리고스와 세미스트라는 당시 이스탄불의 유럽 지역에 있었던 유일한 정착지였으며, 아시아 쪽에는 페니키아 식민지가 존재했다.4. 비잔티움
비잔티움(Βυζάντιον|비잔티온grc, 라틴어 표기: ''Byzantium'')은 이 도시의 초기 이름으로, 트라키아어 또는 일리리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6][24]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메가라 출신의 전설적인 왕 비자스가 도시의 창건자로 여겨진다. 기원전 667년, 메가라에서 온 그리스인 정착민들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연안, 고대 항구 정착지 ''리고스''가 있던 자리에 도시를 세웠다.[23] 이후 로마 제국 시기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의 갈등으로 인해 서기 196년에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기도 했다.[15] 이 시기 아크로폴리스는 오늘날의 톱카프 궁전 자리에 위치했다.
4. 1. 비잔티움의 기원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 라틴어화된 이름으로는 ''비잔티움''은 이 도시의 초기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트라키아어 또는 일리리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정착 이전에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6] 이는 트라키아 혹은 일리리아인의 개인 이름인 ''비자스''에서 파생되었을 수도 있다.[24] 그리스 신화에서는 메가라 식민지 주민들의 지도자이자 도시의 이름을 딴 창시자로 전설적인 왕 비자스를 언급한다.기원전 685년, 메가라에서 온 그리스인 정착민들은 칼케돈의 케이프 모다 지역에 처음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기원전 667년, 비자스 왕의 지휘 아래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에 비잔티온을 식민지로 건설했다. 비잔티온은 '리고스'라는 고대 항구 정착지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23] 비잔티온 시대의 아크로폴리스는 오늘날 톱카프 궁전이 위치한 곳에 있었다.
비잔티온은 로마 제국 시대에 페스체니우스 니게르의 편을 들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대항했다가 포위되었고, 서기 196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15] 이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기리기 위해 도시 이름을 일시적으로 ''아우구스타 안토니나''로 바꾸기도 했다. 비잔티움은 빠르게 이전의 번영을 되찾았다.
4. 2. 비잔티움의 발전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grc)은 이후 라틴어화되어 ''비잔티움''(Byzantiumla)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이름은 트라키아어나 일리리아어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고대 그리스의 정착 이전에 이미 존재했음을 시사한다.[6] 트라키아나 일리리아의 개인 이름인 ''비자스''(Byzasund)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4] 그리스 신화에서는 메가라 식민지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를 세운 전설적인 왕 비자스를 도시 이름의 기원으로 언급한다.기원전 667년, 메가라에서 온 그리스인 정착민들은 비자스 왕의 지휘 아래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에 비잔티온을 건설했다. 이는 기원전 685년 칼케돈에 첫 식민지를 세운 이후의 일이다. 비잔티온은 ''리고스''(Lygosund)라는 고대 항구 정착지 자리에 세워졌다.[23] 비잔티온 시대의 아크로폴리스는 현재의 톱카프 궁전 자리에 위치했다.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 시대에 페스체니우스 니게르를 지지하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맞섰다가 포위 공격을 받아 서기 196년에 도시가 크게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15] 그러나 이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재건되었고, 황제는 자신의 아들(카라칼라)을 기리기 위해 도시 이름을 일시적으로 ''아우구스타 안토니나''(Augusta Antoninala)로 바꾸기도 했다. 이 재건을 통해 비잔티움은 빠르게 이전의 번영을 되찾았다.
5. 콘스탄티노폴리스
324년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비잔티움의 전략적 위치에 주목하여, 크리소스폴리스 전투 승리 후 이곳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330년, 도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공식 수도가 되었으며,[25] 395년 로마 제국 분열 이후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25]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번영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공인과 테오도시우스 1세의 국교화 이후에는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으며,[26] 성 소피아 대성당과 같은 대표적인 건축물이 세워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현재까지도 동방 정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남아있다.
비잔틴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재위 527–565) 통치 아래 최대 영토를 확보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으나,[28] 7-8세기에는 성상 파괴 논쟁으로 내부 분열과 서방 교회와의 갈등을 겪었다.[30][31] 또한 9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키예프 루스와 교류 및 충돌을 반복하며 복잡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에게 도시가 점령 및 약탈당하고 라틴 제국이 세워지는 등 쇠퇴의 길을 걸었다.[32] 1261년 비잔틴 제국이 도시를 되찾았지만,[32]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인구가 크게 감소하는 등 쇠락하였다. 결국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5. 1.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건설
비잔티움의 전략적 위치는 324년,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주목을 끌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예언적인 꿈을 꾼 후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는데, 이는 아마도 324년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크리소스폴리스(현재의 위스퀴다르)에서 경쟁자 리키니우스를 상대로 거둔 최종적인 승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전투는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들 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사두정치 체제를 완전히 마무리 짓는 계기가 되었다. 사두정치 하에서는 니코메디아(현재의 이즈미트, 이스탄불 동쪽 100km 지점)가 로마 제국의 최고 수도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비잔티움을 "노바 로마"(새로운 로마)로 개명했으며, 곧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즉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되었다. 337년 통치 말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세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로마 제국을 공동 상속하도록 했으나,[25] 아들들은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했고 군사적 경쟁으로 인해 제국은 사실상 발칸 반도를 따라 남북으로 나뉘었다. 이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다른 아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제국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분할되었다.[25]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제국의 권력이 집중되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은 이 도시가 상업, 문화, 외교, 전략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리스 세계의 중심지였으며, 비잔틴 시대 대부분 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2년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으며,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 통치 기간에는 니케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번성하는 종교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26]
5세기 동안 서로마 제국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쇠퇴하며 사실상 멸망했고, 마지막 서방 황제는 476년 게르만 용병에게 폐위되었다. 반면 동방의 제국은 번영을 누렸다. 역사가들은 이 번성하는 동로마 제국을 이전 로마 제국과 구별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으로 부른다.[27] 이 제국은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로마와의 분열 이후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에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대성당이었던 성 소피아 대성당을 비롯한 웅장한 교회들이 세워졌다. 동방 정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자리는 오늘날까지도 이곳에 남아있다.
5. 2. 비잔틴 제국의 중심지
비잔티움의 위치는 324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는 324년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의 크리소스폴리스 전투(위스퀴다르)에서 리키니우스를 상대로 최종 승리를 거둔 후, 이 도시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 전투는 로마 공동 황제들 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사두정치 체제를 완전히 끝냈다. 이전 사두정치 체제 하에서는 니코메디아(현재의 이즈미트)가 로마 제국의 최고 수도였다. 비잔티움은 "노바 로마"로 개명되었고,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즉 "콘스탄티누스의 도시"가 되었으며, 330년에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되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이 제국을 공동으로 상속받았으나,[25] 평화롭게 통치하지 못하고 군사적 경쟁 끝에 제국은 발칸 반도를 따라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다른 아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제국은 공식적으로 분할되었다.[25]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제국의 권력 중심지이자 유럽과 아시아, 나아가 아프리카 등지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상업, 문화, 외교, 전략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은 그리스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비잔틴 시대 대부분 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개종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를 이끌었고,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 통치 기간 동안 니케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국교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번성하는 종교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26]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여 476년 마지막 황제가 폐위된 반면, 동로마 제국은 번영을 누렸다. 역사가들은 이 번성하는 동로마 제국을 기존 로마 제국과 구별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으로 분류한다.[27] 이 제국은 문화적으로 뚜렷한 그리스적 특징을 가졌으며, 로마와의 분열 이후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대성당이었던 성 소피아 대성당을 비롯한 많은 웅장한 교회들이 건설되었다. 동방 정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자리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비잔틴 황제 중 한 명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스페인 끝자락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그의 다른 업적으로는 유명한 성 소피아 대성당 건설과 534년에 완성된 체계적인 법률 시스템인 법전 편찬이 있다.[28]
600년대부터 전쟁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력은 부침을 겪었다. 7-8세기에는 비잔틴 교회와 로마 교회가 여러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유럽과의 관계가 점차 멀어졌다. 특히 성상 사용 문제는 두 교회를 가르는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성상은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 등의 이미지로, 비잔틴 제국의 동방 정교회 신자들에게 단순한 그림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며 신성한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29] 많은 비잔틴인들이 성상을 숭배했지만, 일부는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반대했다. 결국 726년, 황제 레오 3세는 모든 성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성상 파괴 운동은 제국 내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30] 성상 파괴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강경한 입장은 성상에 관용적이었던 교황의 입장과 충돌했고, 이는 결국 두 교회의 분리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31] 이 분열은 두 교회 간의 불신을 키웠고 협력을 어렵게 만들었다.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발전된 국가 중 하나였던 키예프 루스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키예프 루스의 발전, 문화,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키예프 공작들이 비잔틴 황제의 딸들과 결혼했으며, 이러한 관계는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로 이어져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에 의해 동유럽이 동방 정교회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관계가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400년 동안 키예프 공작들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고, 그 결과 키예프에 유리한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러한 내용은 원초 연대기 등 역사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루스-비잔틴 전쟁 참조). 비잔틴 제국은 키예프, 폴란드, 불가리아 등 당시 유럽 국가들을 서로 견제하도록 유도하는 외교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1204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제3차 십자군 원정 실패 이후, 서유럽의 라틴 기독교인들은 다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했으며, 이번에는 비잔틴 제국까지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1204년, 서방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하여 막대한 보물을 빼앗았다.[32]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을 비난했지만, 십자군에게 1년 동안 도시 점령을 공고히 하도록 명령했다. 십자군은 플랑드르의 보두앵 1세를 새로운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황제로 세우고, 다른 공작들 및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제국을 분할했다.[32]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워진 이 새로운 라틴 제국은 1261년 미하일 8세가 이끄는 비잔틴 군대가 도시와 일부 영토를 탈환할 때까지 지속되었다.[32] 그러나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번성했던 대도시는 여러 마을의 집합체로 변모했고, 이븐 바투타가 언급했듯이 성벽 안에 경작지가 있는 반쯤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될 당시 도시 인구는 이전 전성기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5. 3. 비잔틴 제국의 발전과 쇠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상업, 문화, 외교, 전략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은 그리스 문화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비잔틴 시대 대부분 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개종과 테오도시우스 1세 통치 기간 동안 니케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지정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번성하는 종교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26] 5세기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멸망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번영을 이어갔다.[27] 제국은 문화적으로 뚜렷한 그리스적 특징을 지녔으며, 로마와의 분열 이후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성당이었던 성 소피아 대성당을 비롯한 웅장한 교회들이 세워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자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비잔틴 제국의 가장 유명한 황제 중 한 명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 (재위 527–565) 시대에 제국은 최대 영토를 확보하여 팔레스타인에서 스페인 끝자락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건축하고 534년에 법전을 편찬하는 등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28]
그러나 7세기부터 계속된 전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7세기와 8세기에는 성상 사용 문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비잔틴 교회와 로마 교회의 갈등이 깊어졌다. 당시 많은 비잔틴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 등의 성상이 신성한 힘을 지니고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29] 하지만 일부에서는 성상 숭배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보았다. 결국 726년, 황제 레오 3세는 모든 성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성상 파괴 운동은 제국 내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지만,[30] 성상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교황과의 갈등을 격화시켜 교회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31]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발전된 국가 중 하나였던 키예프 루스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키예프 루스의 문화 및 정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키예프 공작들이 비잔틴 황제의 딸들과 결혼했다. 이러한 관계는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와 동유럽의 동방 정교회 확산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양측의 관계가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않아서, 키예프 공작들은 400년 동안 여러 차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며, 비잔틴 제국은 키예프에 유리한 조약을 맺어야 했다(루스-비잔틴 전쟁 참조). 비잔틴은 때때로 키예프, 폴란드, 불가리아 등 주변 유럽 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1204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력은 더욱 쇠퇴했다. 제3차 십자군이 실패한 후, 서방의 라틴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려는 목표와 함께 비잔틴 제국까지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도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하여 귀중한 보물들을 빼앗아갔다.[32]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을 공식적으로 비난했지만, 십자군에게 도시 점령을 공고히 하도록 지시했다. 십자군은 플랑드르의 보두앵 1세를 새로운 라틴 황제로 세우고, 다른 공작들과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제국 영토를 분할했다.[32] 이 라틴 제국은 1261년 미하일 8세가 이끄는 비잔틴인들이 도시를 되찾을 때까지 지속되었다.[32]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재정복 이후에도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한때 번성했던 대도시는 여러 개의 작은 마을로 나뉘었고, 이븐 바투타가 기록했듯이 성벽 안에 경작지가 들어선 반쯤 유령 도시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최종적으로 함락될 당시, 도시의 인구는 전성기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6. 오스만 제국의 수도
오스만 튀르크어로는 ''Ḳosṭanṭīnīye''(قسطنطينيه|코스탄티니예ota, 아랍어 형태 القسطنطينية|알쿠스탄티니야ar) 또는 이스탄불로 알려졌으며, 기독교 소수 민족이나 유럽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계속 불렀다. 이 도시는 1453년 메흐메트 2세의 정복 이후부터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제국의 수도였다.
6. 1.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년 5월 29일, "정복자" 술탄 메흐메트 2세는 53일간의 포위전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2세 성벽에 거대한 구멍을 낸 대포를 동원하여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수도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4월 6일에 포위전을 시작했다. 그는 이 작전을 위해 특별히 대포와 폭탄을 제작할 기술자들을 고용했으며,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학자들과 이맘들을 동원했다.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따라 메흐메트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재위 1449–1453)에게 도시를 항복할 기회를 세 번 주었다.[39] 그는 항복할 경우 도시 주민들의 재산, 신앙, 명예를 보장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를 거부했다.[33]
한 달 이상 전투가 지속되자 메흐메트의 고문들 사이에서는 회의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메흐메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총공격 전날 밤, 그는 이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 시도들을 연구하며 효과적인 전략을 모색했다. 1453년 5월 29일 아침, 술탄은 아잔(기도의 부름)을 명령했다.[34]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기도를 넘어, 오스만 군대 전체가 일제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잔틴 군대의 사기를 꺾으려는 심리전의 일환이었다.[34]
전투는 48일간 치열하게 이어졌다.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이에 교황청은 증원군과 보급품을 실은 배 다섯 척을 파견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골든 혼 입구를 쇠사슬로 막아 오스만 함대의 진입을 저지하는 방어 전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기름칠한 통나무 길을 만들어 갈라타 지역을 통해 80척의 배를 육로로 옮겨 골든 혼 안쪽, 비잔틴 함대의 배후에 배치하는 대담한 작전을 감행했다. 이어진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는 비잔틴 함대를 격파했다.[35]
이 패배에도 비잔틴 군대가 항전을 계속하자, 술탄은 거대한 이동식 공성탑을 투입했다. 이 탑은 도시 성벽 높이까지 병사들을 실어 날라 성벽 돌파를 용이하게 했다. 처음에 성벽을 넘어 도시에 진입한 오스만 병사들은 즉시 사살당했고 일부 병력은 후퇴하기도 했으나, 술탄의 독려에 힘입어 다시 공격에 나섰다. 결국 오스만 군대는 성벽 두 곳을 돌파하고 도시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직접 칼을 들고 싸우다 전사했다.[36]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메흐메트 2세는 현재 톱카피 문으로 알려진 문을 통해 도시에 입성하여 즉시 하기아 소피아로 향했다. 그는 하기아 소피아의 약탈을 중지시키고, 그곳에서 이맘을 만나 샤하다(이슬람 신조)인 "나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예언자임을 증언합니다"를 선언하게 했다.[37] 이로써 정교회 대성당이었던 하기아 소피아는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공고화되었다. 메흐메트는 이후 사흘간 도시 약탈을 허용했다.[38]
약탈이 끝난 후, 메흐메트 2세는 도시의 방어 시설 복구와 인구 재정착에 주력했다. 성벽 수리, 요새 건설, 새로운 궁전 건설 등 재건 사업이 즉시 시작되었다.[39] 그는 제국 전역에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9월까지 5천 가구를 이주시킬 것을 요구했다.[40]
6. 2. 오스만 제국의 번영
오스만 튀르크어로는 ''Ḳosṭanṭīnīye'' (قسطنطينيهota) 또는 이스탄불로 알려진 이 도시는, 기독교 소수 민족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계속 부르고, 프랑스어, 영어, 그리고 다른 유럽 언어 사용자들도 그렇게 불렀으며, 1453년 정복 이후 1922년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메흐메트 2세는 도시 재건과 부흥에 힘썼다. 1459년까지 술탄은 도시 곳곳에 모스크, 신학 대학, 학교(마드라사), 공공 부엌 등으로 구성된 경건한 재단(와크프)을 설립하여 도시 번영의 기틀을 마련했다.[39][41] 같은 해, 메흐메트는 전쟁 등으로 도시를 떠났던 모든 그리스인들에게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39]
그러나 비잔틴 제국 말기에 크게 줄어든 인구를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메흐메트 2세에게 정복은 첫 단계였고, 두 번째는 옛 도시에 완전히 새로운 국제적인 사회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비잔틴 인구의 나머지 대부분(약 3만 명)은 추방되었다. 터키 연대기 작가 아쉬크파샤자데에 따르면, 메흐메트는 제국 전역에 사절을 보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스탄불로 와서 집과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공표했으나[43] 도시 인구는 쉽게 늘지 않았다. 결국 술탄은 제국 내 모든 지역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강제로 가족 단위 이주를 명했고, 이를 통해 도시는 점차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43] 메흐메트 2세는 수도 건설에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여, 성 사도 교회가 있던 자리에 파티흐 모스크와 대학을 건설하도록 명했다. 이를 통해 도시는 점차 기독교 도시에서 이슬람 도시로 변모했지만, 20세기 후반까지도 완전히 무슬림 도시가 되지는 않았다. 다양한 기술을 가진 슬라브족,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도시에 정착하여 "알렘 페나"(우주의 피난처)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무슬림 9,486가구, 그리스인 3,743가구, 유대인 1,647가구, 크림 출신 기독교인 267가구, 집시 31가구가 거주했다. 메흐메트는 또한 정교회 총대주교청을 재건하여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유지하도록 했다. 갈라타 타워 지역에는 이탈리아 공동체도 존재했는데, 이들은 도시 함락 전에 항복하여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오스만 궁정에 통역관과 외교관을 배출했다.
쉴레이만 1세(재위 1520년-1566년) 시대는 예술과 건축이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유명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은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비롯한 수많은 모스크와 웅장한 건물들을 도시 곳곳에 설계했으며, 도자기와 서예 등 오스만 예술도 함께 번성했다. 그랜드 바자르(1455년)와 톱카프 궁전(1459년) 역시 오스만 정복 초기에 건설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종교 재단은 파티흐 모스크(1463년)와 같은 모스크 및 관련 시설(학교, 공중 목욕탕 등) 건립과 운영을 지원했다.
1517년 이집트 정복 이후 술탄이 칼리파 지위를 겸하게 되면서 이스탄불은 이슬람 세계에서 더욱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쉴레이만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건설한 모스크들은 도시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특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했다. 다양한 종교 및 민족 공동체들은 각자의 구역에서 자치적으로 생활하며 공존했다. 16세기 중국의 지리 기록에는 이스탄불에 대해 "두 개의 성벽이 있고, 머리 수건을 쓴 무슬림과 통역관이 있다"는 언급이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이스탄불이 다언어, 다문화 국제 도시였음을 시사한다.[44] (다만, 해당 기록에 "한족이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44])



수피 교단은 도시 정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정복 후 많은 수피 수행자들이 수도에 정착했다. 오스만 시대에는 100개가 넘는 테케(수피 수행 장소)가 이스탄불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 다수는 오늘날 모스크나 박물관으로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파티흐 지역의 제라히 테케, 쉼뷜 에펜디와 라마잔 에펜디 모스크 및 튀르베, 베이욜루의 갈라타 메블레비하네시, 베시크타스의 야흐야 에펜디 테케, 카디쾨이의 베크타시 테케(현재 알레비 무슬림의 제메비로 사용) 등이 있다.
18세기까지 이스탄불의 생활 수준은 유럽 대부분 지역과 비슷하거나 더 높았으며, 특히 도시 장인의 임금 수준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남부 및 중부 유럽과 유사한 발전 추세를 보였다.[45]
6. 3.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1870년대부터 이스탄불은 다리의 건설, 적절한 수도 시스템의 구축, 전등 사용, 그리고 전차와 전화의 도입으로 현대화되었다.7. 터키 공화국 시대
1923년 10월 29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끈 터키 독립 전쟁 끝에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는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앙카라로 이전되었다. 이로 인해 이스탄불은 정치적 수도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터키의 주요 경제 및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수도 이전과 더불어 공화국 초기의 강화된 민족주의는 도시의 인구 구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14년 약 112만 명에 달했던 인구는 1924년 약 50만 명으로 급감했으며, 특히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등 소수 민족 인구가 크게 줄었다. 도시의 이름 또한 변화를 겪었다. 오랫동안 국제적으로 사용되던 '콘스탄티노플' 대신, 터키인들이 사용하던 '이스탄불'(εἰς τὴν Πόλιν|이스 틴 폴린el, "도시로")이라는 명칭이 1928년 라틴 문자 도입 이후 터키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국제 사회에도 사용을 권고했다.[48][49][50][51] 1955년 발생한 이스탄불 포그롬은 남아있던 소수 민족, 특히 그리스계 주민들의 이탈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화국 초기, 새로운 수도 앙카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이스탄불은 1940년대 후반부터 대대적인 도시 개발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역사적 건물이 철거되기도 했으나, 탁심 광장과 같은 새로운 광장과 대로가 건설되며 현대적인 도시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대규모 인구 유입으로 도시 인구가 급증했으며, 이는 도시 외곽 지역의 급격한 팽창으로 이어졌다.
현대 이스탄불은 여러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을 경험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는 훗날 터키의 주요 정치 지도자가 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스탄불 시장을 역임했다.[53] 2013년에는 게지 공원 시위가 발생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분출되었고,[54] 2016년에는 2016년 터키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55] 2019년 시장 재선거에서는 야당인 공화 인민당의 에크렘 이마모글루 후보가 당선되어 정치적 변화를 보여주었다.[56]
도시 기반 시설도 크게 확충되어, 2018년에는 새로운 이스탄불 공항이 개항하여 기존의 아타튀르크 공항을 대체하고 세계적인 허브 공항으로 발돋움했다.[57][58][59] 그러나 2022년 이스티크랄 거리에서 발생한 2022년 이스탄불 폭탄 테러[60]와 같이 테러의 위협에 노출되기도 했으며, 시리아 내전의 영향으로 2023년 기준 53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이 거주하는 등[61] 현대적인 과제들도 안고 있다.
7. 1. 터키 공화국 수립과 이스탄불의 변화
터키 공화국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당시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주도로 터키 독립 전쟁 중인 1923년 10월 29일에 건국되었다. 공화국 수립과 함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앙고라(현 앙카라)로 이전되었다. 이 결정은 이스탄불의 인구에 큰 영향을 미쳐, 1914년 약 1,125,000명으로 추정되던 인구가 1924년에는 약 500,000명으로 급감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인구는 다시 꾸준히 증가하여 2000년에는 수도권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도시의 현재 이름인 '이스탄불'(εἰς τὴν Πόλιν|이스 틴 폴린el, "도시 안으로" 또는 "도시로"라는 의미)은 중세 그리스어 구절에서 유래하여 터키어식으로 변형된 이름으로,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국제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이 계속 사용되었으나, 1928년 터키가 라틴 문자를 공식 문자로 채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터키 정부는 다른 국가들에게 터키어식 이름인 '이스탄불'을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1929년, 로이즈 보험 조합은 각국 대리점들에게 전보 주소를 "이스탄불" 또는 "스탐불"로 표기해야 한다고 통지했다. 당시 영국의 ''더 타임스''는 우편물이 여전히 "콘스탄티노플"로 배달될 수 있다고 보도했지만,[48]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같은 해 "콘스탄티노플" 주소의 우편물 배달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전했다.[49]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영어권에서도 콘스탄티노플 대신 이스탄불을 사용하도록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며,[50] 미국 국무부는 1930년 5월부터 공식적으로 "이스탄불"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51]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강화된 민족주의 분위기와 수도 이전의 영향으로, 이스탄불에 거주하던 많은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도시를 떠났다. 특히 1955년 포그롬(소수 민족에 대한 집단 폭력) 사건은 남아있던 소수 민족들의 이탈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 포그롬은 주로 그리스계 주민들의 상점을 표적으로 삼았으며, 많은 상점이 파괴되었다. 이는 이스탄불과 터키 전체에서 그리스인들의 이주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등 다른 소수 민족들도 이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공화국 초기, 이스탄불은 새로운 수도 앙카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에 걸쳐 대대적인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역사적 건물이 철거되기도 했지만, 탁심 광장과 같은 새로운 광장과 넓은 대로들이 건설되면서 도시 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다.
1970년대부터 이스탄불의 인구는 다시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했고, 이들은 주로 도시 외곽에 새로 건설된 공장 지대에서 일했다. 이러한 인구 유입은 주택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고, 과거에는 도시 외곽이었던 많은 마을과 숲 지역이 이스탄불 대도시권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3월에는 가지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한 알레비 종교 지도자가 무장 괴한의 공격으로 살해된 후 시작되었으며, 시위는 가지 구역과 아시아 쪽의 위므라니예 구역으로 확산되었다. 경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2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52]
훗날 터키 총리와 터키 대통령을 역임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이스탄불 시장으로 재직했다.[53]
2013년, 탁심 광장은 게지 공원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위는 처음에는 게지 공원 재개발 계획에 대한 반대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언론, 표현, 집회의 자유 침해 문제와 정부의 세속주의 원칙 훼손에 대한 광범위한 항의로 발전했다.[54]
2016년 7월에는 2016년 터키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다. 일부 군부 세력이 정권 장악을 시도했으나 몇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쿠데타에 가담했던 일부 병력은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대교에서 항복하기도 했다.[55]
2019년 6월에 치러진 이스탄불 시장 재선거에서는 주요 야당인 공화 인민당(CHP)의 후보 에크렘 이마모글루가 승리하여 새로운 이스탄불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여당에 대한 중요한 정치적 변화를 시사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았다.[56]
이스탄불의 새로운 관문인 이스탄불 공항은 2018년 10월에 개항하여 2019년 4월부터 본격적인 여객 운송을 시작했으며, 2022년 2월에는 화물 운송 기능까지 완전히 이전했다. 이 신공항은 기존의 아타튀르크 공항을 대체했으며,[57] 여객 처리 능력 면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공항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58][59]
2022년 11월, 이스탄불의 번화가인 이스티크랄 거리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6명이 사망하고 80명 이상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터키 당국은 이 테러의 배후로 불법으로 규정된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과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YPG)를 지목했지만, PKK 측은 관련성을 부인했다.[60]
2023년 8월 기준으로, 이스탄불에는 53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내전 난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터키 내 도시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61]
7. 2. 현대 이스탄불의 발전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초기에는 새로운 수도 앙카라에 비해 이스탄불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부터 이스탄불은 대대적인 도시 구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역사적 건물이 철거되었고, 탁심 광장과 같은 새로운 광장, 대로, 가로들이 건설되었다.
공화국 수립과 함께 고조된 민족주의 분위기 속에서, 수도 지위를 잃은 이스탄불에서는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상당수 도시를 떠났다. 특히 1955년 9월 발생한 이스탄불 포그롬은 이러한 흐름을 가속화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그리스계 주민들의 사업체가 파괴되었고, 이는 그리스인들의 대규모 이탈로 이어졌다. 이 포그롬은 그리스계뿐만 아니라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등 다른 소수 민족들 또한 표적으로 삼았다.
1970년대부터는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 온 인구가 급증하면서 이스탄불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주로 도시 외곽에 새로 건설된 공장 지대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 증가는 주택 수요를 폭증시켰고, 과거 도시 외곽의 마을이나 숲이었던 지역들이 광대한 이스탄불 대도시권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 이스탄불은 여러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을 겪으며 발전해왔다. 1995년 3월에는 가지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2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등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52] 훗날 터키의 주요 정치 지도자가 되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이스탄불 시장을 역임했다.[53] 2013년에는 탁심 광장을 중심으로 게지 공원 시위가 일어나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문제 및 정부의 세속주의 원칙 침해 등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저항이 표출되었다.[54] 2016년 7월에는 2016년 터키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몇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55] 2019년 6월 이스탄불 시장 재선거에서는 주요 야당인 공화 인민당(CHP) 소속의 에크렘 이마모글루 후보가 당선되어 주목받았다.[56]
도시 기반 시설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2018년 10월 개항하여 2019년 4월부터 본격적인 여객 운송을 시작한 새로운 이스탄불 공항은 기존의 아타튀르크 공항을 대체하며 세계적인 규모의 공항으로 자리매김했다.[57][58][59]
그러나 도시는 테러의 위협에 노출되기도 했다. 2022년 11월에는 번화가인 이스티크랄 거리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6명이 사망하고 8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60] 또한, 시리아 내전의 영향으로 2023년 8월 기준으로 이스탄불에는 53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터키 내 도시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61]
7. 3. 최근 사건
1995년 3월, 가지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2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인근 여러 커피숍에 대한 무장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알레비 종교 지도자가 살해되었다. 시위는 가지 구역과 이스탄불 아시아 지역의 위므라니예 구역에서 일어났고, 경찰은 총으로 대응했다.[52]2013년에는 탁심 광장이 게지 공원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위자들은 언론, 표현, 집회의 자유 문제와 정부의 세속주의 원칙 침해 등 광범위한 우려를 제기하며 항의했다.[54]
2016년 7월, 2016년 터키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다. 일부 군부 세력이 정권 장악을 시도했으나 몇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쿠데타 시도에 가담했던 병력 중 일부는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대교에서 항복했다.[55]
2018년 10월에는 새로운 이스탄불 공항이 개항했다. 2019년 4월부터 여객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2022년 2월에는 화물 서비스도 개시했다. 이 신공항은 기존의 아타튀르크 공항을 대체했으며,[57] 여객 처리량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공항 중 하나이다.[58][59]
2019년 6월에 치러진 이스탄불 시장 선거 재선거에서는 주요 야당인 공화 인민당 (CHP) 소속의 에크렘 이마모글루 후보가 승리하여 새로운 이스탄불 시장으로 당선되었다.[56]
2022년 11월, 이스탄불의 번화가인 이스티크랄 거리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6명이 사망하고 8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터키 당국은 이 사건의 배후로 불법 단체인 쿠르디스탄 노동자당 (PKK)과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 (YPG)를 지목했으나, PKK는 관련성을 부인했다.[60]
2023년 8월 기준으로, 이스탄불에는 시리아 내전을 피해 온 난민이 53만 명 이상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터키 내 도시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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