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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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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26 사건은 1936년 2월 26일에 일본 육군의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이 사건은 파벌 대립, 청년 장교들의 정치화, 정치 폭력 등의 배경 속에서 일어났으며,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쇼와 유신'을 통해 천황 친정 체제를 확립하고 국가를 개혁하려 했다. 반란군은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등 정부 요인들을 습격했으나, 천황의 진압 명령으로 실패했다. 이후 특설군법회의를 통해 가담자들을 처벌하고, 군부 내 통제파가 세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가속화하고,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쇼와 천황에게도 깊은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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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사건
기본 정보
사건명2·26 사건
다른 이름2–26 사건, 니니로쿠 지켄
발생일1936년 2월 26일 - 2월 28일
발생 장소도쿄시 (현재 도쿄도 신주쿠구)
목표히로히토 천황 중심의 직접 통치 복원
도세이파 숙청
결과봉기 진압
고도파 영향력 상실
정부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 증가
주요 관련자
반란군 지도자노나카 시로(자살)
고다 기요사다(처형)
안도 테루조(처형)
고노 히사시(자살)
구리하라 야스히데(처형)
무라나카 다카지(처형)
이소베 아사이치(처형)
나카하시 모토아키(처형)
사카이 나오시(처형)
정부 측 지도자히로히토 (쇼와 천황)
간인 고토히토 친왕
가와시마 요시유키
스기야마 하지메
가시이 고헤이
와타나베 조타로(전사)
병력 규모
반란군1,483 ~ 1,558명
정부군23,841명 (일본 제국 해군 병력 제외)
피해 규모
반란군 사상자19명 총살형
수십 명 투옥
여러 명 자살
정부군 사상자정부 관료 4명 사망
경찰관 5명 사망
사건 배경
원인육군 내부 고도파와 도세이파의 파벌 대립
중신, 군벌, 재벌에 대한 불만
정당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실망과 증오
사건 전개
목표천황 측근으로 간주된 중신 (오카다 케이스케, 사이토 마코토, 다카하시 고레키요, 스즈키 간타로, 와타나베 조타로, 마키노 노부아키) 습격
국회의사당, 경시청, 총리관저 등 수도 기능 핵심 시설 점거
사망자마쓰오 덴조(내각총리대신 비서관 사무취급)
다카하시 고레키요(대장대신)
사이토 마코토(내대신)
와타나베 조타로(교육총감)
부상자스즈키 간타로(시종장)
관여 세력기타 잇키
니시다 미쓰구
마자키 진자부로
혼조 시게루 외 고도파 장성
진압 과정
대응주모자 재판
사형 및 징역형
결과쇼와 천황의 원대복귀 명령 및 계엄령 선포로 명분 상실
기타
1936년 2월 26일, 니부 마사타다 중위와 그의 중대
반란군 (구리하라 야스히데 육군 보병 중위 (중앙 망토 차림))와 하사관·병사
나가타 정 일대를 점령한 황도파 장교들

2. 배경

구 일본군 내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들은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쇼와 유신)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원로 중신들을 제거하고 천황 친정이 실현되면 정·재계의 부정부패나 농촌의 피폐가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근위보병 제3연대, 보병 제1연대, 보병 제3연대, 야전중포병 제7연대 등 소속의 청년 장교들은 1936년 2월 26일 새벽, 부대를 이끌고 궐기했다.

쇼와 시대 초기부터 일본 육군 내에서는 통제파황도파 간의 이념 대립이 있었고, 해군에서도 함대파조약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통제파의 중심인물이었던 나가타 데쓰잔 등은 이미 1926년 제1차 와카쓰키 내각 시기부터 여러 나라의 국가총동원법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후 들어선 이누카이 내각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 마사키 진자부로 교육총감 등 소련과의 대결을 주장하는 황도파를 중용했다. 황도파 성향의 젊은 장교들(주로 20대 위관급) 중 일부는 당시 정치 부패와 농촌 빈곤의 원인이 원로 중신들에게 있다고 보고, 이들을 살해하면 천황 친정이 실현되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쇼와 유신”, “존황토간(尊皇討奸)”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에 이어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암살된 후, 사이토 내각은 젊은 장교들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도 암묵적으로 이용하는 한편, 관료적 절차를 통해 군비 확장과 총력전 체제를 지향하는 통제파(남진 정책 추진)를 우대하기 시작했다. 1934년에는 사법성이 나치 법을 선전하기 시작했고, 제국 변호사회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탈퇴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통제파인 하야시 센주로가 육군대신에 취임하면서 황도파는 점차 군 중심에서 밀려났다. 1935년 7월, 황도파의 핵심 인물인 마사키 진자부로가 교육총감에서 사실상 경질되자, 이에 반발한 아이자와 사부로 육군 중좌가 육군성 내에서 통제파의 핵심인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을 살해하는 아이자와 사건이 발생했다. 오카다 내각과 하야시 등 육군 수뇌부는 이 사건 이후, 황도파 장교들이 다수 소속된 제1사단의 만주 파병을 결정했다.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만주 파병이 실행되기 전인 1936년 2월 26일 새벽, 약 1,500명의 하사관과 병력을 이끌고 궐기했다. 이들은 보병 제1연대, 보병 제3연대, 근위 보병 제3연대, 야전 중포병 제7연대 등의 일부 부대를 지휘하여 오카다 게이스케(내각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시종장), 사이토 마코토(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대장대신), 와타나베 조타로(교육총감), 마키노 노부아키(전 내대신) 등을 습격하고, 총리대신 관저, 경시청, 육군성, 참모본부, 도쿄 아사히 신문사 등을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이 살해되었으나, 오카다 게이스케 수상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궐기 장교들은 하야시 센주로 등 육군 수뇌부를 통해 쇼와 천황에게 쇼와 유신의 실현을 호소했으나, 천황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격노하며 직접 근위 사단을 이끌고 진압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에 사건 초기 청년 장교들에게 다소 동정적이었던 육군 수뇌부도 결국 이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무력 진압을 결정했다. 포위된 반란 부대에게 항복 권고가 내려지자, 반란 장교들은 하사관과 병사들을 원대 복귀시키고 일부는 자결했으며, 다수는 항복하여 법정 투쟁을 선택했다. 그러나 히로타 내각 하에서 데라우치 주이치 육군대신 주도로 진행된 일심제 특별 군법회의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건 주모자들과 그들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민간 사상가 기타 잇키 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 내부에서 쿠데타를 통해 국가 개조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사건 발생 후 한동안은 “불상사건”, “제도 불상사건[149]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여 226사건, 2·26사건[150][151][152]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2. 1. 파벌 대립

아라키 사다오, 황도파의 지도자


대일본제국 육군 내 고위 장교들 사이에는 메이지 시대번벌 간 경쟁에서 비롯된 오랜 파벌주의의 역사가 있었다.[4][155] 1930년대 초, 육군 지휘부는 크게 두 개의 비공식 파벌로 나뉘었다. 하나는 아라키 사다오 대장과 그의 동맹자 마자키 진자부로 대장을 중심으로 하는 '''황도파'''(皇道派|고도하일본어)였고, 다른 하나는 나가타 데쓰잔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통제파'''(統制派|토세이하일본어)였다.[4][5][6][155][156][157]

황도파는 천황 중심의 일본 문화와 정신주의를 물질적 가치보다 우위에 두었으며,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소비에트 연방 공격(북진론)을 주장했다.[7] 반면, 통제파는 당시 나치 독일 참모본부의 국가총력전 사상에 영향을 받아 중앙집권적 경제 및 군사 계획, 기술의 현대화와 기계화를 중시하고 중국 대륙으로의 확장(남진론)을 지지했다.[7][178]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황도파는 육군 내 주요 직책을 차지하며 우세를 보였으나, 아라키의 사임 이후 많은 황도파 인사들이 통제파 장교들로 교체되면서 두 파벌 간의 갈등은 깊어졌다.[7][8][158][159]

한편, 육군 내에는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장교들과 육군사관학교만 졸업한 비엘리트 장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육대 출신들은 육군성, 참모본부, 교육총감부 등 중앙 기관에서 근무하며 승진 가도를 달렸지만, 육사 출신 장교들은 주로 일선 부대에서 근무하며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160] 이러한 비엘리트 '대부 장교'들 중 다수는 점차 정치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는데, 이들은 '청년 장교' 그룹(국체원리파)을 형성했다.[161][162]

청년 장교들이 정치적 사상을 갖게 된 배경에는 당시 일본 제국 농촌의 극심한 빈곤 문제가 있었다. 징병제로 입대한 농촌 출신 병사들과 직접 생활하며 그들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접한 청년 장교들은 사회 구조적 모순에 눈뜨게 되었다.[163] 보병 제3연대 소속이었던 다카하시 타로 소위는 훗날 옥중 수기에서 신병의 누이가 매춘부가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암담함을 느끼며 "국가의 현실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적었다.[163] 이들은 육대 출신 엘리트들이 농촌의 고통을 모른다고 비판하며[165], 기타 잇키국가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기타 잇키가 저술한 『일본개조법안대강』은 '군측의 간신'을 제거하고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쇼와 유신)를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는 청년 장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66][167] 이들은 정재계 유착, 정치 부패, 경제 불황 등을 타파하고 특권 계급을 배제한 천황 친정(親政)을 통해 국체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믿었다.[167] 니시다 미쓰기는 이 그룹의 비공식 지도자 역할을 했다.[161]

황도파와 청년 장교 그룹(국체원리파)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별개의 그룹으로 상호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관계였다. 황도파는 청년 장교들의 급진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고, 청년 장교들은 황도파를 통해 군 상층부에 접근할 수 있었다.[170][171][172]

파벌 간의 갈등은 여러 사건을 통해 더욱 격화되었다. 1932년 5·15 사건에서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했으나 가벼운 처벌에 그치자, 육군 청년 장교들은 병력을 동원한 쿠데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20][177] 1934년 육군사관학교 사건(11월 사건)에서는 국체원리파의 핵심 인물인 무라나카 다카지 대위와 이소베 아사이치 일등 주계가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되었으나 결국 정직 처분을 받고 면관되었다. 이들은 이 사건을 통제파의 탄압으로 규정하고, 군부 내 부패를 고발하는 「숙군에 관한 의견서」를 배포하며 군 상층부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21][22][23][186][190][191][192][188]

1935년 7월, 황도파의 마지막 고위직이었던 마자키 진자부로 교육총감이 파면되면서 갈등은 극에 달했다. 청년 장교들은 아라키 사다오에 대한 실망 이후 마자키를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기에[24][25][26] 이 파면에 크게 분노했다. 또한, 이 파면 과정이 육군삼장관 합의라는 관례를 무시하고 하야시 센주로 육군대신이 단독으로 천황에게 상주하여 재가를 얻은 방식으로 이루어져, 천황의 통수권을 침해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193][194][195] 무라나카와 이소베 등은 마자키 파면을 비난하며 나가타 데쓰잔을 공격하는 문서를 다시 배포했다.[196][197][198]

같은 해 8월 12일, 마자키 파면에 앙심을 품은 황도파 장교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가 육군성 군무국장실에서 나가타 데쓰잔을 살해하는 아이자와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시작된 아이자와의 공판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황도파와 국체원리파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장이 되었다. 아이자와는 '순수한 애국자'로 미화되었고, 이는 청년 장교들의 과격 행동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27][28]

청년 장교들은 통제파가 추진하는 군부 주도의 국가총력전 체제 구축[178]을 단순한 권력 장악 시도로 보고 강하게 반발했다. 통제파 역시 청년 장교들의 '쇼와 유신' 사상을 위험하게 보고 헌병을 동원해 감시하는 등[186] 양측의 골은 깊어만 갔다. 청년 장교들은 통제파가 3월 사건, 10월 사건 등 과거 쿠데타 미수 사건 관련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복귀시키려 한다고 비판하며[183], 통제파 역시 '군측의 간신'으로 간주했다.

사건 직전, 이소베 아사이치 등은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 야마시타 도모유키 군사조사부장 등 군 수뇌부와 접촉하며 그들의 의중을 떠보았다. 이들의 애매한 태도나 동정적인 발언을 쿠데타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로 해석했으며[235][201], 마자키 진자부로로부터 자금 지원 약속을 받기도 했다. 또한, 쇼와 천황이 마자키 파면에 대해 하야시 육군대신과 나가타 군무국장을 비판했다는 정보(진위 여부는 불확실함)[204]는 청년 장교들에게 자신들의 거사가 천황의 뜻에 부합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정적으로 제1사단만주 파병 결정은 청년 장교들에게 거사를 서두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파병을 '쇼와 유신'을 방해하려는 통제파의 의도로 해석하고[176], 정예 부대가 도쿄를 떠나기 전에 '간신'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186] 일부 신중론도 있었으나[176], 결국 1936년 2월 26일 새벽을 거사일로 정하게 된다.

2. 2. 청년 장교들의 정치화

일본군 장교는 교육 과정에 따라 육군사관학교(육사) 출신과 명문 육군대학교(육대) 출신으로 나뉘어 인사상 경로가 달랐다. 육대 졸업자는 장교단의 엘리트를 형성하며 육군성, 참모본부, 교육총감부 등 중앙 기관을 중심으로 근무했지만[160], 육사만 졸업한 장교들은 전통적으로 고위 참모직으로의 승진이 사실상 제한되었다.[9][10]

이러한 차별적 대우를 받는 육사 출신 장교들 중 상당수가 '청년 장교'(青年将校)라 불리는, 정치적으로 매우 활동적인 젊은 장교 집단을 형성했다.[9][10][161][162] 이들은 주로 대위부터 소위까지의 위관급 장교들이었으며, 특히 부대에 직접 배속되어 근무하는 대위급 장교(隊付将校)들이 많았다.

이들 청년 장교가 정치적 사상을 갖게 된 주요 배경 중 하나는 당시 농촌의 극심한 빈곤 상황이었다. 징병으로 입대한 농촌 출신 병사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그들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목격하고, 국가 현실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2.26 사건 참가자인 다카하시 타로(高橋太郎) 소위는 옥중 수기에서 신병의 누이가 가난 때문에 매춘부가 된 사실을 알고 암담함을 느꼈으며, "국가의 현실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적었다.[163] 청년 장교들은 육대 출신 엘리트들이 농어촌의 진정한 고통을 외면한다고 비판하며, 병사들과 함께하는 자신들만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주장했다.[165]

청년 장교들은 일본이 직면한 문제들이 일본 본래의 국체(國體, 천황과 국가의 관계 방식을 의미하는 추상적 용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특권 계급"(정치 지도자, 재벌, 군벌, 관료 등)은 국민을 착취하여 농촌 지역에 광범위한 빈곤을 초래하고, 천황을 속여 그의 권력을 빼앗고 일본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보았다.[11] 그들의 해결책은 약 70년 전의 메이지 유신을 본뜬 "쇼와 유신"이었다. 즉, 청년 장교들이 직접 나서 "군주 측근의 간신"(君側の奸)들을 제거함으로써 천황이 다시 권력을 되찾고, 천황이 직접 나서 국민을 착취하는 자들을 숙청하여 국가에 번영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11][167]

이러한 신념은 당시 국수주의 사상, 특히 전 사회주의자였던 기타 잇키(北一輝)의 정치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11] 기타가 저술한 『일본개조법안대강』은 "군주 측근의 간신" 사상을 바탕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 방안을 제시했으며, 쇼와 유신을 꿈꾸는 청년 장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66] 이들은 "존황토간"(尊皇討奸, 천황을 높이고 간신을 베다) 등의 구호를 내걸고, 정치 부패와 농촌 빈곤의 책임을 원로 중신과 특권 계층에게 돌렸다.

느슨하게 연결된 청년 장교 그룹의 규모는 다양했지만, 도쿄 지역 장교들을 중심으로 약 100명의 정규 회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룹의 비공식적인 지도자는 니시다 미쓰기(西田税)였다. 전직 육군 소위이자 기타 잇키의 제자였던 니시다는 1920년대 후반부터 확산된 민간 국수주의 단체의 저명한 회원이었다. 그는 이 육군 내 그룹을 "국체원리파"(国体原理派)라고 불렀다.[13][14][15][161][168][169] 국체원리파는 1931년 3월 사건과 10월 사건 등 당시의 정치적 폭력에 어느 정도 관여했으나, 이후 군부 내 파벌은 민간 국수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점차 정리했다.[161][168][169]

국체원리파는 황도파(皇道派)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황도파는 국체원리파를 보호하고 접근 경로를 제공하는 대신, 과격한 청년 장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영향력을 얻고자 했다. 이 두 파벌은 때때로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당시 기록과 구성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는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별개의 동맹 관계에 가까웠다.[17][18][19][170][171][172]

비교적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체원리파는 그들이 일으킬 수 있는 정치적 테러의 위협 때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참모본부와 황족 사이에도 동조자들이 있었는데, 특히 천황의 동생이자 당시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였던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은 니시다 및 다른 국체원리파 지도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또한 국체원리파는 강한 반자본주의 성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자이바쓰 지도자들로부터 불규칙적인 자금 지원을 받기도 했다.[16][173]

1934년 육군사관학교 사건(11월 사건)은 청년 장교들의 급진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서 국체원리파의 핵심 인물인 무라나카 다카지(村中孝次) 대위와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浅一) 일등 주계가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군법회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지만, 육군 수뇌부는 행정 처분을 통해 무라나카와 이소베를 정직시킨 후 면관시켰다. 이는 장교의 신분 보장을 규정한 육군 내규에 어긋나는 부당한 처분으로 받아들여졌다.[186][190][191][192] 두 사람은 이 사건이 청년 장교들에 대한 통제파(統制派)의 공격이라고 확신하고, 육군 내 부패를 비판하고 군 개혁을 주장하는 '숙군에 관한 의견서'[188]를 작성하여 육군 삼장관 등에게 발송하고 전군에 배포했다. 이 의견서에서 그들은 통제파의 핵심 인물인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을 "주요 악당"으로 지목하며 강하게 비판했다.[21][22][23]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육군 상층부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극도로 커져갔다.

2. 3. 정치 폭력

2·26 사건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젊은 장교들과 그들의 민족주의 동료들이 정치적 반대파에 대해 일련의 폭력적인 폭발 사태를 일으킨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32년5·15 사건으로, 젊은 해군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한 사건이다.[20] 이 사건은 육군 청년 장교들에게 쿠데타 시도에서 군대를 활용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며[20], 이전의 3월 사건이나 10월 사건과 마찬가지로 가담자들은 비교적 가벼운 금고 15년 이하의 형을 받았을 뿐이었다.[177]

2·26 사건의 직접적인 전주곡은 1934년 군사학교 사건(11월 사건)과 그 결과였다.[21] 이 사건에서 국체원리파의 주요 인물인 무라나카 다카지 대위와 이소베 아사이치 일등 주계는 사관학교 생도들과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21] 무라나카와 이소베는 쿠데타 논의는 인정했지만 실행 계획은 부인했다.[21] 군법회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으나[21], 육군은 이들을 정직 처분했다.[21][186] 두 사람은 이 사건이 청년 장교들에 대한 통제파의 공격이라고 확신하고, 육군을 "청소"하고 나가타 데쓰잔을 "주요 악당"으로 지목하는 내용의 「숙군에 관한 의견서」 등의 문서를 배포하기 시작했으며[22][188], 결국 면관(免官) 처리되었다.[23][186] 이러한 부당한 처분[186][189][190][191][192]은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 육군 상층부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웠다.

1935년 7월, 황도파 장교로서 교육총감 지위에 있던 마자키 진자부로 대장이 파면되면서 황도파와 통제파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24] 당시 청년 장교들은 육군대신 시절 아라키 사다오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마자키를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기에[24], 그의 파면에 크게 분노했다.[25] 이 파면은 천황의 대권을 침해하는 통수권 침범이라는 비판도 받았다.[193] 무라나카와 이소베, 그리고 니시다 미쓰기는 마자키 파면에 대해 나가타를 비난하는 새로운 문서를 발표했다.[26][196][197][198]

같은 해 1935년 8월 12일, 아이자와 사건이 발생했다. 국체원리파 일원이자 마자키의 친구였던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가 보복으로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을 육군성 사무실에서 살해한 것이다.[27] 1936년 1월 말 시작된 아이자와의 공판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으며, 아이자와와 국체원리파는 이를 자신들의 이념을 선전하는 기회로 활용했다.[28] 언론에서는 아이자와의 "도덕성과 애국심"을 칭찬했고, 그는 "진정한 국체 원리에 따라 군과 국가를 개혁하려 했던 순수한 군인"으로 묘사되기도 했다.[27][28][199][200]

3. 궐기 계획

구 일본군 내 보수적 파벌인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주로 20대 대위~소위)들은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쇼와 유신)와 정·재계 부패 청산, 농촌 곤궁 해결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1936년 2월 26일 새벽, 근위보병 제3연대, 보병 제1연대, 보병 제3연대, 야전중포병 제7연대 등 예하 부대를 동원하여 궐기할 계획을 세웠다.

궐기에 참여한 청년 장교들은 주로 도쿄 수비대제1사단 소속이었는데, 제1사단의 만주 파병이 결정되자 이를 '쇼와 유신'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내부에서는 아이자와 사건 재판을 활용해 중신과 군벌 등의 부패를 폭로하여 유신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신중론도 있었으나[176], 결국 제1사단이 만주로 떠나기 전인 1936년 2월 26일 새벽에 거병하기로 결정했다. 키타 잇키(北一輝), 니시다 제이(西田税) 등 민간인 사상가나 일부 장교들은 시기상조라며 신중론을 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병에 소극적이었던 안도 데루조 대위는 노나카 시로 대위 등 동료들의 설득과 압박 끝에 2월 22일 참여를 결심했다.[202] 기타 잇키니시다 미쓰기의 직접적인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장교는 소수였으며, 오히려 노나카 시로 대위가 아이자와 사건 이후 소위급 장교들을 규합하여 거병을 주도한 측면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202]

또한, 천황이 마사키 진자부로 교육총감 경질과 관련하여 하야시 센주로, 나가타 데쓰잔 등을 비판했다는 정보가 혼죠 시게루 시종무관장을 통해 일부 청년 장교들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204] 이 정보는 천황이 자신들의 행동을 지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시켜 궐기 결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204]

스가나미 사부로는 청년 장교들의 거병 동기를 제1사단의 만주 파병 저지와 당시 군 중앙부가 계획하던 북중국 침략(전쟁)을 막고, 국내 정치 개혁과 민생 안정을 우선하려는 데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186][205]

한편, 도쿄 헌병대 특고과장이었던 후쿠모토 카메지 소좌는 청년 장교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사건 직전 혼죠 시게루 시종무관장에게 임박한 위험을 보고하며 사전 저지를 건의하기도 했다.

반란 계획의 일환으로, 청년 장교들은 궐기의 명분을 담은 '결기취의서'(蹶起趣意書)를 작성하여 천황에게 전달하고,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등 특정 군 고위 인사들의 체포 및 구금, 하야시 센주로 등의 파면을 요구할 예정이었다. 또한,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 등 주요 인물들에 대한 습격 계획도 세웠다. 습격 목표 선정 과정에서는 일부 이견이 있었으며, 최종 목표는 2월 22일에 확정되었다.[235] (세부 내용은 하위 문단 참고)

3. 1. 결기취의서

반란군은 궐기 이유를 담은 蹶起趣意書|결기취의서일본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천황에게 전달하고자 했다.[39][40] 이 문서는 명목상 음모에 가담한 최고위 장교였던 야나카 시로(野中四郎) 대위의 이름으로 작성되었으나,[39] 실제로는 야나카가 작성한 초안을 기타 잇키(北一輝)가 대폭 수정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다른 자료에서는 무라나카 코우지(村中孝次)가 초안을 작성하고 니시다 제이(西田税)와 논의하여 수정했다고도 한다. 1936년 2월 13일, 안도 데루조(安藤輝三)와 야나카는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소장의 집을 방문하여 결기취의서를 보여주었고, 야마시타는 내용을 읽고 몇 군데 수정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결기취의서는 고쿠타이겐리하(國體原理派)의 이상을 반영하여 작성되었다.[39] 내용은 짐무 천황의 건국과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의 발전을 찬양하고,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완성하는 국체(國體)야말로 일본의 본질임을 강조하며, 일군만민론(一君万民論)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 문서는 '''겐로'''(元老), 중신, 군벌, 정당 등이 국체 파괴의 원흉이며, 이들이 사리사욕과 천황에 대한 불경으로 '''고쿠타이'''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39] 구체적으로는 런던 해군 조약 체결과 교육총감 경질에서의 통수권 침해, 3월 사건 처리 미흡, 천황기관설을 지지하는 학자(學匪) 및 관료(官匪), 오모토교(大本教) 등의 음모 사례를 거론하며, 이들이 반성 없이 사리사욕(私權自慾)을 추구하며 쇼와 유신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러한 간적(奸賊)들을 주멸(誅滅)하여 대의를 바로 세우고 국체를 옹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목숨(肝腦)을 바치겠다고 선언하며 직접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39]

결기취의서의 내용에 따라 "고쿠타이를 위협하는" 7명의 암살 대상이 선정되었다.

이름직책선정 이유[42]
오카다 게이스케총리런던 해군 조약 지지, 고쿠타이의 "기관 이론" 지지.
사이온지 긴모치겐로, 전 총리런던 해군 조약 지지, 천황으로 하여금 부적절한 내각을 구성하게 함.
마키노 노부아키전 궁내대신, 전 외무대신런던 해군 조약 지지, 당시 후시미 친왕이 천황에게 항의하는 것을 막음, 사이토와 함께 궁정 파벌을 형성함.
스즈키 간타로시종장런던 해군 조약 지지, "황실의 미덕을 방해함"
사이토 마코토내대신, 전 총리런던 해군 조약 지지, 마자키 해임에 연루됨, 마키노와 함께 궁정 파벌을 형성함.
다카하시 고레키요대장대신, 전 총리당파 정치에 연루됨, 군부 약화 시도, 기존 경제 구조 유지.
와타나베 조타로마자키의 군사 교육 감찰관 후임고쿠타이의 "기관 이론" 지지,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사임 거부.



이 중 사이온지, 사이토, 스즈키, 마키노는 가장 영향력 있는 황실 고문이었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다. 오카다와 다카하시는 군부를 견제하려 했던 온건파 정치 지도자였다. 와타나베는 도세이하(統制派)의 일원으로 마자키 해임에 관여했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다.[43][44] 사이온지는 최종적으로 명단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논란이 있다. 일부 장교 동조자들은 그를 살려두어 천황에게 마자키를 총리로 임명하도록 설득하는 데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일반적으로 이유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浅一)는 나중에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고 사이온지 공격 준비를 계속했다고 증언했으며, 공격 계획은 작전을 담당하기로 했던 아이치현 도요하시 군사 학교 교관(작전 수행을 담당했던 장교들)들이 작전에 사관생도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취소되었다고 주장했다.[45][46]

이소베는 옥중 수기에서 런던 조약 체결과 마자키 교육총감 경질로 통수권이 두 번이나 침해당했으며, 천황기관설을 신봉하는 학자들과 관료들이 궁중에 만연하여 천황의 지위를 위태롭게 했기 때문에 참지 못하고 간신들을 처단했다고 주장했다.[203] 그는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의 말을 인용하며 "대의를 명확히 하고, 민심을 바로잡으면, 황도(皇道)가 일어나지 않을 걱정이 없다"는 것이 유신의 정신이자 청년 장교 봉기의 참된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봉기가 특정 개조 법안 실현이나 마자키 내각 수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통수권 침해의 적을 베기 위한 군대의 비상한 독단 행동이었다고 명시했다.[203]

3. 2. 습격 목표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들은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쇼와 유신)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원로, 중신, 군벌, 정당 등이 나라의 근본(고쿠타이)을 해치고 있다고 보았다.[39][40] 이들은 1936년 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연쇄 회의를 통해 반란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핵심은 '고쿠타이(國體)를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적들'을 암살하고, 수도의 행정 중심지와 황궁을 장악한 뒤, 특정 장교들의 해임과 마자키 진자부로가 이끄는 새 내각 임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36]

반란군은 자신들의 의도와 불만을 담은 '궐기취의서'(蹶起趣意書)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천황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문서는 음모에 연루된 최고위 장교였던 노나카 시로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며(실제 작성자는 무라나카 다카지 또는 기타 잇키 수정설 등이 있음), 겐로(元老), 정치 지도자, 군부 파벌, 자이바츠(財閥), 관료, 정당 등이 이기심과 천황에 대한 불경으로 고쿠타이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직접 행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39][40]

이러한 명분 아래, 반란군은 "고쿠타이를 위협하는" 인물들을 암살 대상으로 선정했다. 2월 21일, 이소베 아사이치와 무라나카 다카지는 야마구치 이치타로 대위에게 1차와 2차로 나뉜 습격 목표 목록을 보여주었다. 초기에는 사이온지 긴모치 원로 암살도 강력히 주장되었으나, 마자키 진자부로 내각 구성을 위해 그를 이용하려는 의견 등으로 인해 최종 목표에서는 제외되었다. 하야시 센주로 대장 암살도 논의되었으나 군사참의관에서 물러났다는 이유로 포함되지 않았다. 2월 22일, 최종적으로 암살 목표를 1차 목표로 압축했으며, 천황기관설을 지지하는 훈시를 했다는 이유로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이 목표에 추가되었다.[235]

최종적으로 선정된 주요 습격 목표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름직책선정 이유[42]
오카다 게이스케내각총리대신런던 해군 조약 지지, 고쿠타이의 "천황기관설" 지지.
사이온지 긴모치겐로, 전 내각총리대신런던 해군 조약 지지, 천황으로 하여금 부적절한 내각을 구성하게 함. (최종 목표에서 제외됨)
마키노 노부아키내대신, 전 외무대신런던 해군 조약 지지, 당시 후시미 친왕이 천황에게 항의하는 것을 막음, 사이토 마코토와 함께 궁정 파벌을 형성함.
스즈키 간타로시종장런던 해군 조약 지지, "황실의 미덕을 방해함"
사이토 마코토내대신, 전 내각총리대신런던 해군 조약 지지, 마자키 진자부로 해임에 연루됨, 마키노 노부아키와 함께 궁정 파벌을 형성함.
다카하시 고레키요대장대신, 전 내각총리대신당파 정치에 연루됨, 군부 약화 시도, 기존 경제 구조 유지.
와타나베 조타로마자키 진자부로의 교육총감 후임고쿠타이의 "천황기관설" 지지,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사임 거부.



이들 중 사이온지 긴모치, 사이토 마코토, 스즈키 간타로, 마키노 노부아키는 가장 영향력 있는 황실 고문이었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다. 오카다 게이스케다카하시 고레키요는 군부를 억제하려 했던 온건파 정치 지도자였으며, 와타나베 조타로는 통제파의 일원이자 마자키 진자부로 해임에 연루되었고 천황기관설을 지지했기 때문에 목표가 되었다.[43][44]

사이온지 긴모치의 이름은 최종 습격 목표 목록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논란이 있다. 일부에서는 그를 살려두고 천황이 마자키 진자부로를 총리로 임명하도록 설득하는 데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제외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소베 아사이치는 나중에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고 사이온지 공격 준비를 계속했다고 증언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공격 계획은 아이치현 도요하시의 군사 학교 교사들이 작전에 사관생도를 동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 결국 취소되었다고 한다.[45][46][207][235]

이 외에도 초기 논의 과정이나 2차 목표로 고토 후미오 내무대신, 이치키 기토쿠로 추밀원 의장, 이자와 다키오 귀족원 의원, 미쓰이 타카마사, 이케다 시게아키, 이와사키 코야타 등 재벌 총수들이 거론되기도 했다.[235]

4. 사건 경과

1936년 2월 26일 새벽,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육군 청년 장교들이 국가 개조와 쇼와 유신 단행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제1사단근위사단 병력 약 1,500명을 동원하여 도쿄 중심부에서 동시다발적인 습격을 감행했다.

당시 육군 내부는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신자부로를 중심으로 정신주의와 북진론을 강조하는 '''황도파'''와, 나가타 테츠잔 등을 중심으로 총력전 체제와 남진론을 주장하는 '''통제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155][156][157] 아라키가 육군대신에서 물러난 후 황도파는 실세에서 밀려났고, 이에 불만을 품은 청년 장교들이 봉기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158][159]

반란군은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 등 정부 및 군부의 요인들을 습격 목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다카하시, 사이토, 와타나베가 살해되었고, 스즈키는 중상을 입었다. 오카다 총리는 매부인 마쓰오 덴조 대령이 대신 희생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55] 또한 반란군은 총리 관저, 육군성, 참모본부, 경시청 등 주요 관청을 점거하고 나가타초 일대를 장악했으며[57][58][85][86], 아사히 신문사를 습격하기도 했다.[65]

사건 초기 육군 수뇌부는 혼란에 빠졌고 일부 황도파 동조 장성들은 반란군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나[61][62], 천황은 반란군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즉각적인 진압을 명령했다.[92][93] 해군 역시 조기에 강경 진압 입장을 표명했다. 육군 내부의 의견 대립으로 초기 대응이 지연되자 천황은 군부를 강하게 질책했고, 결국 2월 27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2월 29일, 정부는 무력 진압 방침을 확정하고 대대적인 선무 공작과 함께 반란군을 포위 압박하여 항복을 유도했다. 대부분의 하사관과 병사들이 원대 복귀하고 주동 장교들이 체포되거나 자결하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4. 1. 습격 및 점거

구 일본군의 황도파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주로 20대 대위~소위)들은 천황 친정(쇼와 유신)을 명분으로 원로 중신들을 제거하면 정·재계 부정부패와 농촌 곤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제1사단, 근위사단, 제3보병연대 등 소속 부대를 이끌고 1936년 2월 26일 새벽에 봉기했다.

초기 공격 지도


2월 25일 밤, 도쿄에는 폭설이 내렸다. 이는 1860년 사쿠라다몬 사건 당시 이이 나오스케 암살을 연상시켜 반란군 장교들의 사기를 높였다.[52] 6개 그룹으로 나뉜 반란군은 03시 30분에서 04시 사이에 막사를 출발하여 05시경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육군성, 경시청 본부 등을 동시에 공격했다.[53]

습격 대상에는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 마키노 노부아키 전 내대신,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 등이 포함되었다. 이 중 사이토, 다카하시, 와타나베는 살해되었다.
주요 인물 습격
2.26 사건 당시 수상 관저 앞 반란군


구리하라 야스히데 중위가 이끄는 제1보병연대 병력 280명이 총리 관저를 포위했다.[54] 경비 경찰 4명이 저항하며 총격전을 벌였으나 모두 사살되었고, 이 과정에서 반란군 6명도 부상을 입었다. 총격 소리에 위험을 감지한 오카다 총리는 매부인 마쓰오 덴조 대령의 도움으로 숨었다. 오카다와 용모가 비슷했던 마쓰오 대령은 반란군에게 발견되어 오카다로 오인받아 살해되었다. 반란군은 마쓰오의 얼굴을 총리 사진과 비교하고 임무 완수를 확신했다.[55] -- 오카다 총리는 경찰관들의 희생과 마쓰오 대령의 죽음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다음 날인 27일, 후쿠다 코우 총리 비서관, 사쿠미즈 히사츠네 총리 비서관, 헌병들의 기지로 조문객으로 위장하여 관저를 탈출했다.[209][210] 구리하라 부대는 이후 제3근위사단 병력 60명과 합류하여 관저 주변을 경비했다.[56]
다카하시 고레키요(Korekiyo Takahashi)


나카하시 모토아키


나카하시 모토아키 중위(제3근위사단)가 이끄는 135명의 병력이 아카사카의 다카하시 자택을 습격했다. 나카하시 중위와 나카지마 간지 소위는 침실에 있던 다카하시를 권총과 일본도로 살해했다.[68][69] 다카하시는 육군 예산 삭감을 추진하여 군부의 반감을 샀던 인물이다. 다카하시 살해 후 나카하시 부대 일부는 총리 관저로 이동했고, 나머지는 황궁으로 향했다.[70]
사카이 나오 중위(제3보병연대)가 이끄는 120명의 병력이 요츠야의 사이토 자택을 습격했다. 경비 경찰을 제압한 후, 병사들은 2층 침실에서 사이토와 부인 하루코(春子)를 발견하고 사이토에게 총격을 가했다. 부인 하루코는 남편을 보호하려다 총상을 입었지만, 병사들은 사이토에게 계속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76] 시신에서는 40발 이상의 탄환이 발견되었다. 사이토는 5·15 사건 이후 총리를 지냈고, 사건 당시 천황의 측근인 내대신이었다. 사이토 살해 후, 부대 일부는 와타나베 교육총감 자택으로 향했고, 나머지는 육군성 북동쪽에 배치되었다.[77]
안도 테루조 대위(제3보병연대)가 이끄는 200명의 병력이 고지마치의 스즈키 자택을 습격했다. 경비 경찰을 무장 해제시킨 후 침실에서 스즈키를 발견하고 총격을 가했다. 안도 대위가 일본도로 마무리하려 했으나, 부인 타카(たか)의 간청과 스즈키가 치명상을 입었다고 판단하여 중단했다. 안도는 부인에게 사과하고 부하들에게 스즈키에게 경례하도록 명령한 뒤 철수했다.[78][79] 스즈키는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안도는 이전에 스즈키를 만나 시국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80] 스즈키 부인 타카는 사건 직후 궁내청에 직접 전화하여 의사 파견을 요청했고, 이것이 천황에게 전달된 첫 습격 보고였다.[211]

  •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Jōtarō Watanabe)의 시체


사이토 내대신 습격 후, 다카하시 타로 소위와 야스다 유타카 소위가 이끄는 20명의 병력이 오전 7시경 오기쿠보의 와타나베 자택을 습격했다. 다른 습격이 있은 지 2시간이 지났음에도 와타나베에게는 아무런 경고가 전달되지 않았다.[81][82] 병사들이 진입하려 하자 군경의 사격을 받았고, 야스다 소위 등 2명이 부상당했다. 뒷문을 통해 강제 진입한 병사들은 2층에서 와타나베를 발견했다. 와타나베가 권총으로 저항하자 경기관총으로 사격하고 일본도로 찔러 살해했다. 그의 9살 딸 카즈코(和子)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83][84] 와타나베는 마사키 진자부로의 후임으로 교육총감이 된 후 천황기관설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청년 장교들의 분노를 샀다.
고노 히사시 대위가 이끄는 7명(민간인 포함)의 팀이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의 이토야(伊藤屋) 여관 별관 코후소(興風荘)에 머물던 마키노를 습격했다. 오전 5시 45분경, 이들은 여관에 침입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경호 경찰관 미나가와 요시타카(皆川芳隆)는 마키노 일행을 뒷문으로 피신시키고 응전하다 순직했다. 마키노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습격대는 건물을 방화하고 마키노가 자결한 것으로 오인했다. 고노 대위는 총격전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63][64] 마키노는 서구 협조주의 노선을 취했고 천황의 측근이었기에 표적이 되었다.
주요 기관 습격 및 점거

  • '''육군성 및 참모본부'''

고다 기요사다 대위, 무라나카 코지, 이소베 아사이치 등이 이끄는 160명의 병력이 육군대신 관저, 육군성, 참모본부를 장악했다. 오전 6시 30분,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을 만나 봉기취의서를 낭독하고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요구 사항에는 복고(Restoration) 추진, 반란군에 대한 무력 사용 금지,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다테카와 요시츠구 체포, 도세이하 핵심 인물(무토 아키라, 네모토 히로시, 가타쿠라 다다시) 파면, 아라키 사다오관동군 사령관 임명 등이 포함되었다.[57][58] 이소베는 육군성 밖에서 마주친 가타쿠라 소령에게 총을 쏘아 부상을 입혔다.[59][60] 마사키 진자부로, 야마시타 도모유키 등 반란에 동조적인 장성들이 출입하며 가와시마에게 요구 수용을 촉구했다. 가와시마는 오전 9시경 천황에게 보고하겠다며 황궁으로 향했다.[61][62]
다카하시 대장대신 살해 후, 나카하시 모토아키 중위와 75명의 병력은 오전 6시경 황궁 서쪽 한조몬(半蔵門)을 통해 경내로 진입했다. 나카하시는 경비대장에게 문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속이고, 천황 거처(宮殿) 앞 사카시타몬(坂下門) 확보를 시도했다. 그의 목표는 천황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는 것이었으나, 동료들과 연락에 실패하고 오전 8시경 반란 가담 사실이 발각되어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그의 병사들은 오후 1시까지 문에 남아 있었으나, 정부의 공식 반란군 수에는 포함되지 않았다.[73][74][75]

  • '''경시청'''

2·26 사건 당시 경찰 본부에 집결한 반란군 병사들


노나카 시로 대위가 이끄는 제3보병연대 병력 약 500명이 황궁 남쪽의 경시청 본부를 공격했다. 목표는 통신 장비 확보와 경찰 특별경비대 파견 저지였다. 경찰은 육군에 상황을 맡기기로 결정했는지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당했다. 노나카 부대의 큰 규모는 황궁 진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85][86] 경시청 점거 후, 스즈키 긴지로 소위가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인근 고토 후미오 내무대신 관저를 공격했으나, 고토는 부재중이어서 화를 면했다. 이 공격은 스즈키의 독자적 판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87] 경시청은 비상벨을 통해 즉시 습격 사실을 인지했고, 오구리 가즈오 경시총감 등 지휘부는 고지마치 경찰서를 거쳐 간다 니시키쵸 경찰서에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경찰은 육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후방 치안 유지에 주력하기로 결정했다.
반란군을 이끄는 구리하라 야스히데


오전 10시경, 구리하라 야스히데 중위와 나카하시 모토아키 중위는 60명의 병력을 이끌고 총리 관저에서 아사히 신문 사옥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일본적이지 않은 신문을 만든 것에 대한 천벌"이라 외치며 직원들을 내쫓고 활자판을 뒤엎어 신문 발행을 일시 중단시켰다.[65] 이후 봉기 선언문을 인근 신문사에 배포하고 총리 관저로 복귀했다.[66][67]
점거 지역
2.26 사건 당시 나가타초와 아카사카 지역을 점령한 반란군


반란군은 주요 인물 및 기관 습격과 더불어, 일본 정치의 중추인 나가타초, 가스가세키, 아카사카, 미야케자카 일대를 점령했다. 이들은 점령 지역을 통제하며 쇼와 유신 실현을 위한 자신들의 요구 사항 관철을 시도했다.
습격 요약

목표시간지휘관병력피해
총리 관저오전 5시 10분경약 300명
다카하시 재무대신 자택오전 5시 05분약 100명
도쿄 아사히 신문사오전 8시 55분경병사 60명, 군용 트럭 3대, 기관총 2정약 3만 손해
사이토 내무대신 자택오전 5시 05분경150명
와타나베 교육총감 자택오전 6시 00분경약 30명
시종장 관저오전 5시 10분경150명
육군대신 관저오전 5시 00분경150명없음
육군성 및 참모본부오전 9시 30분위와 같음위와 같음
경시청오전 5시 00분경약 400명없음
내무대신 관저오전 6시 35분경약 60명없음
유가와라 코후소
(마키노 전 내무대신 거주지)
오전 5시 40분경~
오전 6시 20분경
지휘관 포함 8명


해군의 대응습격당한 오카다 총리, 스즈키 시종장, 사이토 내대신이 모두 해군 대장 출신이었기에, 해군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반란 부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252] 해군성은 즉시 전시 경비 태세에 돌입했고, 26일 오후에는 요코스카 진수부해군육전대 4개 대대를 도쿄 시바우라 부두에 상륙시켰다. 또한 제1함대를 도쿄만에 급파하여 27일에는 기함 나가토 등 함선의 주포를 반란군 점거 지역에 조준하며 무력 진압 의지를 보였다. 해군령부 정보에 따르면 해군은 사건 발생 일주일 전에 이미 반란 계획과 대상자 명단까지 파악하고 있었으나, 이 정보는 차관급에서 은폐되었다고 한다.[251] 또한 사건 직후 쇼와 천황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해군 군령부 총장을 만나 해군의 반란 가담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하고 해상계엄령 발동 준비를 지시한 사실도 해군 극비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250]

4. 2. 군 수뇌부의 대응

사건 발생 직후, 황궁과 육군 수뇌부는 혼란 속에서 상황 파악과 대응에 나섰다. 오전 5시경, 반란 장교들을 지지했던 야마구치 이치타로 대위는 그의 장인이자 황도파 성향의 혼죠 시게루 시종무관장에게 전화로 반란 사실을 알렸다.[88][89] 혼죠는 즉시 천황에게 보고했고, 천황은 혼죠에게 사건을 조속히 해결하라고 지시했으나 구체적인 방법은 명시하지 않았다.[88][89] 비슷한 시각,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피습 소식을 접한 키도 고이치 내대신 비서관장은 유아스 쿠라헤이 궁내대신, 히로하타 타다타카 시종차장 등과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반란 진압에 전력을 다하고, 오카다 내각의 사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황에게 조언했으며, 이는 천황의 결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90][91]

한편, 오전 6시 30분경 고다 기요사다 대위, 무라나카 코우지, 이소베 아사이치 등 반란 주도 장교들은 육군성 관저에서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을 만났다. 그들은 봉기 취지서를 낭독하고,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등 특정 인물 체포, 통제파 핵심 인물 해임, 아라키 사다오관동군 사령관 임명 등 요구 사항이 담긴 문서를 전달했다.[57][58] 오전 9시 이전까지 마사키 진자부로, 야마시타 도모유키, 사이토 류 등 반란군에 동조적인 장교들이 관저를 드나들었으며, 특히 사이토 류 소장은 가와시마에게 젊은 장교들의 기개를 칭찬하며 요구를 수용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61][62]

오전 9시 30분, 가와시마 육군대신은 천황을 알현하여 반란군의 요구 사항을 보고하고 "국체를 명확히 하고 국민 생활을 안정시키며 국방을 충실히 하기 위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천황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가와시마에게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라고 명령했다.[92][93] 천황은 사건 초기부터 반란군을 "적군"으로 지칭하며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고[219], 이는 반란군의 가장 큰 오산이 되었다. 이후 오카다 총리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남은 각료들이 사임을 시도했을 때도, 천황은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92][93]

천황의 진압 명령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 내에서는 여전히 온건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26일 오후, 아라키 사다오, 마사키 진자부로, 하야시 센주로 등 군사참의관들은 비공식 회의를 열어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고자 했다. 그 결과, 가와시마 육군대신 명의로 다음과 같은 고시가 발표되었다.[235]

:一、蹶起ノ趣旨ニ就テハ天聽ニ達セラレアリ (궐기의 취지에 대해서는 천황 폐하께 전달되었다)

:二、諸子の眞意ハ國體顯現ノ至情ニ基クモノト認ム (제군들의 진의는 국체 현현의 지극한 정성에 기초한 것으로 인정한다)

:三、國體ノ眞姿顯現ノ現況(弊風ヲモ含ム)ニ就テハ恐懼ニ堪ヘズ (국체의 참모습 현현의 현 상황(폐단 포함)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四、各軍事參議官モ一致シテ右ノ趣旨ニヨリ邁進スルコトヲ申合セタリ (각 군사참의관도 일치하여 이 취지에 따라 매진할 것을 합의했다)

:五、之以外ハ一ツニ大御心ニ俟ツ (이 외에는 오로지 천황 폐하의 뜻에 따른다)

이 고시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소장을 통해 육군성 관저의 반란 장교들에게 전달되었다. 모호한 내용이었지만, 직후 군사과장 무라카미 케이사쿠 대좌가 "혁신 대조안"을 작성 중이라고 알리면서, 반란 장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인정받았다고 오해하게 되었다.[235] 정오, 헌병 사령부에 있던 무라카미 케이사쿠 군사과장, 카와무라 산로우(河村参郎) 소좌, 이와쿠라 고우오우(岩畔豪雄) 소좌에게 “혁신 대조”의 초안 작성이 명령되었다. 오후 3시경 무라카미 과장이 쓰다 만 초안을 가지고 육상성 관저로 차를 몰고 초안을 보여주고, 혁신 대조 환발도 임박했다고 전했다고 한다.

26일 오후 3시 도쿄 경비사령관카사이 코우헤이 중장은 반란 부대의 점령 지역도 포함되는 제1사관에 전시 경비를 명령했다(7월 18일 해제). 전시 경비의 목적은 병력을 이용하여 중요 물건을 경비하고, 아울러 일반 치안을 유지하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반란 부대는 제1사단장 호리 타케오 중장의 지휘 아래에 들어가게 되어, 정규 통수 체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후 3시, 전술한 고시가 도쿄 경비사령부에 의해 인쇄·하달되었다. 그러나 이때 제2조의 “제자의 진의는” 부분이

:諸子の'''行動'''ハ國體顯現ノ至情ニ基クモノト認ム (제군들의 '''행동'''은 국체 현현의 지극한 정성에 기초한 것으로 인정한다)

라고 “행동”으로 바뀌었다. 반란 부대에 참가자를 많이 내놓은 제1사단 사령부에서는 현황이 승인된 것으로 생각하고 이 고시를 반겼지만, 근위 사단에서는 오히려 괴문서로 취급하는 상황이었다.[236]

오후 4시, 전시 경비령에 근거한 제1사단 명령이 내려졌다. 이 명령에 의해 반란 부대는 보병 제3연대 연대장의 지휘 아래에 두었지만, 명령의 끝에는 군사참의관 회의의 결정에 근거한 다음과 같은 구술이 첨부되었다.

:一、敵ト見ズ友軍トナシ、トモニ警戒ニ任ジ軍相互ノ衝突ヲ絕對ニ避クルコト (적으로 보지 않고 우군으로 삼아, 함께 경계에 임하고 군 상호 간의 충돌을 절대 피할 것)

:二、軍事參議官ハ積極的ニ部隊ヲ說得シ一丸トナリテ活潑ナル經綸ヲ爲ス。閣議モ其趣旨ニ從ヒ善處セラル (군사참의관은 적극적으로 부대를 설득하여 하나가 되어 활발한 경륜을 행한다. 각의도 그 취지에 따라 잘 처리될 것이다)

전술한 고시와 이 명령은 일시적으로 반란 부대의 반란을 인정한 것으로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반란 부대에는 상관이나 친구 장교가 격려하러 계속 모여들었고, 식량이 원대에서 운반되었다.

오후가 되자 마침내 각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오후 9시 고토 후미오 내무대신이 총리대리로 지명되었다. 고토 총리대리는 각료의 사표를 모아 천황에게 제출했지만, 시국의 수습을 우선하라고 명령받아 일시 보류했다. 그 후, 각의가 열려 오후 8시 40분에 계엄령 시행이 각의 결정되었다. 처음 경시청이나 해군은 군정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하여 이 계엄령에 반대했다.[237] 그러나 신속한 진압을 바랐던 천황의 의향을 받아, 추밀원의 소집을 거쳐 다음 날 27일 새벽 마침내 계엄령이 시행되었다. 행정계엄이었다.

오후 9시, 주요 반란 부대 장교는 육상성 관저에서 황족을 제외한 아라키·마사키·아베·하야시·우에다·테라우치·니시 등 군사참의관과 회담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반란군에 동조적인 장교인 스즈키 테이이치, 하시모토 킨고로, 만이 사키치가 참석했다. 이소베는 수기에서 이때의 모습을 부모가 자녀의 뒷수습을 해주려는 ‘호의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235] 마사키는 “여러분은 나를 내각의 수반으로 기대하는 것 같지만, 우선 나는 그 자리가 아니다. 또 이런 불상사를 일으킨 후에, 너희들의 추천으로 내가 총리가 되는 것은 상전에게 강요가 되고,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 두려울 따름이므로, 단호히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했다.[238]

한편, 통제파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이시하라 간지 참모본부 작전과장은 사건 초기부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26일 새벽 스기야마 겐 참모차장에게 즉각적인 계엄령 선포를 건의했으며[227], 육군성 관저에서는 반란 장교들에게 "이런 짓은 당장 그만두라, 그만두지 않으면 군기를 가지고 토벌하겠다!"라고 호통치기도 했다.[228] 또한 아라키 사다오 대장에게 "당신 같은 바보 대장이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직언하여 충돌을 빚기도 했다.[233] 이시하라는 오후 군사참의관 회의 후 가와시마 육군대신에게 사태 확산을 막기 위해 전국 계엄령을 강력히 주장했다.[239]

결국 26일 오후 9시, 고토 후미오 내무대신을 총리대리로 한 임시 내각 회의에서 계엄령 시행이 결정되었다. 해군 등 일부에서는 군정(軍政)으로 이어질 위험을 우려하여 반대했지만[237], 신속한 진압을 원하는 천황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추밀원의 형식적인 자문을 거쳐 2월 27일 새벽, 도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4. 3. 진압



사건 발생 직후, 쇼와 천황과 궁중 그룹은 반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2월 26일 오전, 천황은 혼죠 시게루 시종무관장에게 신속한 사건 해결을 지시했으며[88][89], 궁내부 대신 비서실장 키도 고이치, 궁내성 장관 유아사 쿠라헤이 등 궁중 관료들은 반란 진압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천황에게 조언했다.[90][91]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이 반란군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며 새 내각 구성을 권고하자, 천황은 이를 거부하고 "속히 사건을 진압하라"고 단호히 명령했다.[92][93][234] 또한 오카다 케이스케 총리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 남은 각료들이 사임하려 하자 반란 진압 전까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92][93]

육군 내부에서는 대응 방식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황도파에 동정적이었던 마사키 신자부로, 야마시타 도모유키 등 일부 군사참의관들은 사태를 온건하게 수습하려 했다. 26일 오후, 군사참의관 회의 결과 카와시마 육군대신 명의로 "궐기 취지는 천황께 전달되었으며, 제자(諸子)의 진의는 국체 현현의 지정(至情)에 기초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고시가 발표되었다.[235] 이 모호한 고시는 반란군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인정받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반란 부대가 소속된 제1사단 사령부에서는 이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236] 오후 3시, 도쿄 경비사령관 카사이 코우헤이 중장은 반란 부대 점령 지역을 포함한 제1사관구에 전시 경비를 명령하여, 형식적으로 반란 부대를 제1사단장 호리 타케오 중장의 지휘 하에 두었다.

그러나 참모본부스기야마 겐 참모차장과 작전과장 이시하라 간지 대좌 등은 처음부터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227][239] 이시하라는 26일 저녁부터 계엄령 선포를 강력히 주장했다.[239] 한편, 습격당한 오카다 총리, 스즈키 시종장, 사이토 내대신이 모두 해군 출신이었기에 해군은 사건 초기부터 봉기 부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252] 26일 오후, 요코스카 진수부해군육전대가 도쿄 시바우라 부두에 상륙했고, 제1함대가 도쿄만에 진입하여 유사시 포격 태세를 갖추었다. 해군 정보부는 사전에 반란 계획 정보를 입수했으나 차관급에서 은폐했던 사실도 후에 밝혀졌다.[251]

26일 밤, 각의에서 계엄령 시행이 결정되었고, 추밀원 회의를 거쳐 27일 오전 3시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237] 구단회관에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고 카사이 코헤이 중장이 계엄사령관, 이시하라 간지 대좌가 계엄참모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 초기 명령에서는 반란 부대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 등, 군 상층부의 온건 수습 시도는 계속되었다.

천황의 분노는 진압을 망설이는 군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27일 오전 8시 20분, 천황은 "계엄사령관은 즉시 주둔 부대를 철수시키고 원대 복귀시켜야 한다"는 봉칙명령을 재가했다. 혼죠 시종무관장이 반란 장교들의 정신만이라도 인정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천황은 "내가 의지하는 노신들을 죽인 흉폭한 장교들에게 용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240] 오후에는 카와시마 육군대신에게 "내가 직접 근위사단을 이끌고 진압에 나서겠다"며 격렬하게 질타하고 철저한 진압을 재차 지시했다. 같은 날 오후, 오카다 총리가 무사히 구출되면서[241] 반란군 진압으로 상황은 급격히 기울었다.

27일 오후, 마사키 등 군사참의관들이 다시 반란 장교들을 설득했고, 노나카 시로 대위 등 일부는 원대 복귀 의사를 밝혔으나[238], 안도 테루조 대위 등의 강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2월 28일, 봉칙명령 하달이 예정되었으나, 황도파로 분류되던 카사이 계엄사령관은 설득 시간을 벌기 위해 이를 보류했다.[207] 그러나 스기야마 참모차장 등 강경파의 반대로 설득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무력 진압 방침이 확정되었다. 오후, 야마시타 소장이 반란 부대에 봉칙명령 임박을 알리자, 쿠리하라 야스히데 중위 등은 장교 자결과 하사관 병의 귀영을 제안하며 칙사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천황은 "자살한다면 마음대로 하라. 칙사 따위를 보낼 수 없다"며 거절했다.[244][245] 오후 11시, 계엄사령부는 "계작명 14호"를 발령하여 반란 부대를 공식적으로 "반란 부대"로 규정하고 무력 진압을 명령했다.[207] 반란 부대 역시 수상 관저, 산노 호텔 등을 거점으로 포위군에 맞설 준비를 했다.

2월 29일, 오전 5시 10분 토벌 명령이 내려지고, 8시 30분 공격 개시 명령이 하달되었다. 계엄사령부는 대대적인 선무 공작을 펼쳤다. 비행기로 "병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항복 권고 전단을 살포하고[247], 라디오 방송을 통해 "칙명이 내려졌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원대 복귀하라. 저항하는 자는 역적이니 사살하겠다. 너희 부모 형제는 울고 있다"고 호소했으며[248], "칙명 내리다, 군기에 향하지 말라"고 적힌 애드벌룬을 띄웠다. 직속 상관들도 직접 나서 눈물로 설득했다.

이러한 선무 공작과 압박에 하사관과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오후 2시경까지 대부분 원대로 복귀했다.[312] 지휘관을 잃은 반란 장교들은 육군대신 관저에 모였다. 노나카 시로 대위는 권총으로 자결했고(타살설도 제기됨), 코우노 히사시 대위도 자결했다.[63][64] 남은 장교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오후 5시경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키타 잇키, 니시다 미츠기 등 사상적 지도자들도 같은 날 체포되면서 쿠데타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5. 재판 및 처벌

1936년 3월 4일, 쇼와 천황은 봉기 관련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특설군법회의(特設軍法会議, tokusetsu gunpō kaigi)를 설치하는 긴급칙령(緊急勅令)에 서명했다.[131][207] 특설군법회의는 상설군법회의와 달리 판사 기피 불가, 1심 재판, 비공개, 변호인 없음 등의 특징을 가졌으며[207], 이는 신속하고 엄한 처벌을 원했던 천황과 육군 통제파(統制派)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267][207] 특히 이전 아이자와 사건 재판이 공개적으로 진행되어 피고인의 주장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었던 점을 고려하여[267], 이번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심리 내용도 사건 발생 나흘간의 행동에만 국한되어, 반란 동기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진술 기회는 봉쇄되었다.[267]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파악된 1,483명 전원이 심문을 받았으나, 최종 기소된 인원은 장교 19명, 부사관 73명, 병사 19명, 민간인 10명 등 총 124명이었다. 이 중 장교 전원, 부사관 43명, 병사 3명, 민간인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131]

반란 주모자들에 대한 주요 재판은 4월 28일에 시작되었다. 피고인들은 반란죄(反乱罪, hanran-zai)로 기소되었으며, 자신들의 행동이 육군성 성명과 계엄군 편입으로 승인되었고 황실의 공식적인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6월 4일 평결, 7월 5일 형을 선고했다.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7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132][133]

이 외에도 각 공격에 가담한 하사관 및 병사들, 마키노 노부아키 습격에 가담한 민간인들에 대한 재판이 별도로 열렸으며, 간접 지원 혐의로 기소된 37명 중 24명도 유죄 판결을 받고 다양한 형량을 선고받았다. 주요 인물로는 야마구치 이치타로(山口 一太郎, 무기징역), 사이토 류(斎藤 瀏, 징역 5년), 미쓰이 사키치(三井 為吉, 징역 3년) 등이 있다.[134]

기타 잇키(北一輝)와 니시다 미쓰기(西田税)는 반란 주모자로 별도 재판을 받았다. 전화 지원 등 간접적인 역할만 했기 때문에 기소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지적(수석 판사 요시다 이사오(吉田悳) 소장)도 있었으나[135][136], 당시 육군을 장악한 통제파는 이들의 영향력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135][136] 결국 증거 불충분에도 불구하고[135] 1937년 8월 14일 사형이 선고되었다.[135][136] 요시다 재판장은 기타와 니시다의 사형 판결에 대해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内)의 압력이 있었음을 시사했다.[238]

마자키 진자부로(真崎甚三郎) 대장은 반란 방조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37년 9월 25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당시 수상이었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137][138] 마자키는 재판 전인 1936년 3월 10일 이미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군 중심부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그가 반란의 배후였다는 의혹은 계속 제기되었으나[280], 본인은 이를 부인했으며[235],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관련 증거 부족으로 기소되지 않았다.[277]

사건 관련자 21명은 2월 29일과 3월 2일 자로 파면되었고, 3월 2일에는 위계 반납 및 훈장 박탈 명령이 내려졌다.

=== 자결 ===

계급성명직명연령육사기
보병 대위노나카 시로보병 제3연대 제7중대장32세36기
항공병 대위카와노 히사시소자와 육군비행학교 조종과 학생28세40기


  • 고노(河野) 대위는 마키노 노부아키 암살 실패 후 부상으로 입원 중 3월 5일 자살을 시도하여 다음 날 사망했다.
  • 근위기병대대 아오토 겐키치(青戸健吉) 기병 중위는 2월 29일 자택에서 군도로 자결했으며, 그의 부인도 뒤따라 자결했다.[286]
  • 보병 제1연대 오카자와 가네요시(岡沢包能) 군조는 2월 29일 권총 자살했다.
  • 도쿄헌병대 고지마치(麹町) 헌병분대 다나베 쇼조(田辺省三) 헌병 상등병은 3월 2일 분대 내에서 권총 자살했다.
  • 전신 제1연대 이나바 고로(稲葉五郎) 군조는 3월 16일 연대 내에서 기병총으로 자결했다.
  • 다나카 야야(田中弥) 보병 대위는 10월 18일 자택에서 권총 자살했다. 그는 3.15 사건, 10월 사건에도 연루되었으며, 2.26 사건 직전 동지들에게 봉기 요청 전문을 보내려다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책임을 지고 자결한 것으로 추정된다.[287][288]
  • 고가 시게루(古賀繁) 소위는 아버지인 육군성 인사국장 고가 렌(古賀廉) 소장이 내린 부당한 인사 조치(오기시 요시요시 대위의 예비역 편입)에 항의하여 자살했다는 주장이 있다.[289]


=== 사형 집행 ===

죄명계급이름직책육사 기수나이
반란죄(수괴)보병 대위香田清貞보병 제1여단 부관37기
반란죄(수괴)보병 대위安藤輝三보병 제3연대 제6중대장38기
반란죄(수괴)보병 중위栗原安秀보병 제1연대(기관총대) 부41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중위竹嶌継夫도요하시 육군교도학교 보병 학생대 부40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중위対馬勝雄도요하시 육군교도학교 보병 학생대 부41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중위中橋基明근위 보병 제3연대(제7중대) 부41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중위丹生誠忠보병 제1연대(제11중대) 부43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중위坂井直보병 제3연대(제1중대) 부44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포병 중위田中勝야전중포병 제7연대(제4중대) 부45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공병 소위中島莞爾철도 제2연대 부(육군포공학교 분견)46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포병 소위安田優야포병 제7연대 부(육군포공학교 분견)46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소위高橋太郎보병 제3연대(제1중대) 부46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소위林八郎보병 제1연대(기관총대) 부47기
반란죄(수괴)전 보병 대위村中孝次37기
반란죄(수괴)전 일등 주계磯部浅一38기
반란죄(군중 지휘 등)전 사관후보생渋川善助39기
반란죄(수괴)北一輝(北輝次郎)52세
반란죄(수괴)전 기병 소위西田税육사 34기34세
사형미즈카미 겐이치(水上源一)마키노 노부아키 암살 미수 가담 민간인27세


  • 1936년 7월 12일, 무라나카 고지, 이소베 아사이치를 제외한 장교 13명과 민간인 미즈카미 겐이치(水上源一) 등 총 15명에 대한 사형이 도쿄 육군 형무소(현 시부야구 우다가와초)에서 총살형으로 집행되었다.[283] 집행 당시 외부로 총성을 감추기 위해 인근 요요기 훈련장에서 부대 훈련이 실시되었다고 전해진다.[283]
  • 1937년 8월 19일, 기타 잇키, 니시다 미쓰기, 무라나카 고지, 이소베 아사이치의 사형이 같은 장소에서 집행되었다.[275]
  • 처형된 장교 대부분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지나, 이소베 아사이치는 쇼와 천황을 비판하는 수기를 남겼고, 기타 잇키는 만세 삼창을 거부했다.[284]


=== 금고형 및 징역형 ===

죄명계급이름직책육사 기수
무기금고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소위무기야 기요즈미(麦屋清済)보병 제3연대(제1중대) 부특지
무기금고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소위도키와 미노루(常盤稔)보병 제3연대(제7중대) 부47기
무기금고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소위스즈키 긴지로(鈴木金次郎)보병 제3연대(제10중대) 부47기
무기금고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소위기요하라 야스헤이(清原康平)보병 제3연대(제3중대) 부47기
무기금고반란죄(군중 지휘 등)보병 소위池田俊彦보병 제1연대(제1중대) 부47기
금고 4년보병 소위이마이즈미 요시미치(今泉義道)근위 보병 제3연대(제7중대) 부47기



죄명계급성명직명육사기
무기금고반란자를 이롭게 함보병 대위야마구치 이치타로보병 제1연대 제7중대장33기
금고 4년반란자를 이롭게 함보병 중위야나기시타 요지(柳下達)보병 제3연대(기관총대) 부45기
금고 6년사령관 군대를 이끌고 이유 없이 배치된 장소를 떠남보병 중위아라이 이사오(新井勲)보병 제3연대(제10중대) 부43기
금고 6년반란 예비일등 주계스즈키 고로(鈴木五郎)보병 제6연대 부38기
금고 4년반란 예비보병 중위이노우에 다쓰오(井上辰雄)토요하시 육군교도학교 부43기
금고 4년반란 예비보병 중위시오타 스케오(塩田資夫)보병 제8연대 부44기



죄명계급성명직명육사기
징역 3년보병 중좌만이 사키치(満井佐吉)육군대학교 병학 교관26기
징역 5년보병 대위스가나미 사부로보병 제45연대 제1중대장37기
징역 4년보병 대위오쿠라 에이이치(大蔵栄一)보병 제73연대 제2중대장37기
징역 4년보병 대위스에마쓰 타이헤이(末松太平)보병 제5연대 보병포 대장39기
징역 3년보병 중위시무라 리쿠죠(志村陸城)보병 제5연대 부44기
징역 1년 6개월보병 중위시키 다카토(色部孝)보병 제13연대 부44기
징역 5년예비 소장사이토 류12기
징역 2년코시무라 스테지로(越村清治)
징역 3년후쿠이 코우(福井晃)
징역 3년마치다 센조(町田専三)
징역 1년 6개월미야모토 마사유키(宮本正之)
징역 2년(집행유예 4년)카토 하루미(加藤治廉)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4년)사토 마사조(佐藤正三)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4년)미야모토 세이조(宮本精三)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4년)스기타 쇼고(杉田省吾)



죄명계급이름비고나이
무기징역반란죄(모의 참여)가메가와 데쓰야(亀川哲也)
징역 3년반란죄(제반의 직무에 종사)나카하시 데루오(中橋輝夫)



죄명계급이름소속부대나이
징역 15년예비보병소장나카지마 기요하루(中島清治)28세
징역 15년예비보병소장미야타 아키라(宮田晃)27세
징역 15년군조우지노 도키미(宇治野時参)보병 제1연대24세
징역 15년예비보병상등병구로다 아키라(黒田昶)25세
징역 15년일등병구로사와 쓰루이치(黒沢鶴一)보병 제1연대21세
징역 15년와타히키 쇼조(綿引正三)22세
징역 10년예비보병소위야마모토 마타(山本又)42세



=== 무죄 ===

죄명계급이름직명육사기
무죄반란자를 이롭게 함대장마자키 진자부로군사참의관9기



사건 이후, 처형된 이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옛 도쿄 육군 형무소 부지(현 시부야구 우다가와정)에 세워졌다. 또한 미나토구 모토아자부의 겐소지(賢崇寺)에도 묘비가 있으며 매년 위령제가 열린다.[285]

6. 사건의 영향

2·26 사건은 쿠데타 자체는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일본의 정치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정치적 발언권이 급격히 강화되었으며, 특히 육군 내 통제파황도파 세력을 숙청하고 군부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히로타 고키 내각 출범 과정에서의 노골적인 인사 개입과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부활 등으로 이어져, 일본이 군국주의 체제를 강화하고 전쟁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사건 과정에서의 인명 피해와 사회적 혼란, 쇼와 천황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재고 등 다방면에 걸쳐 깊은 파장을 남겼다.

6. 1. 정치적 영향

2·26 사건은 쿠데타 자체는 실패했지만, 역설적으로 군부가 민간 정부에 미치는 영향력을 크게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건의 여파로 오카다 내각1936년 3월 9일 총사퇴했다.[140]

후임 총리로는 오카다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히로타 고키가 지명되었다.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는 처음에는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으나, 고노에는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이치키 기토쿠로 추밀원 의장이 히로타를 추천했고, 사이온지도 동의하여 히로타에게 총리 지명이 내려졌다.[255] 그러나 새 내각 구성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육군은 "신내각은 자유주의적 색채를 띠어서는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256]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육군성 군무국 중좌 무토 아키라는 조각 본부를 찾아가 시모무라 히로시, 나카지마 치쿠헤이, 카와사키 타쿠키치, 오하라 나오, 요시다 시게루 등을 자유주의 성향으로 지목하며 각료 후보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새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내정된 테라우치 히사이치 역시 일부 인사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며 외무대신으로 요시다 시게루 대신 아리타 하치로를 임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140] 결국 히로타는 육군의 요구에 굴복하여 일부 인사를 교체하고 나서야 내각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255]

내각 인선 개입에 이어, 군부는 1936년 5월 18일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부활시켰다. 이전까지 예비역이나 퇴역 장교도 임명될 수 있었던 육군대신과 해군대신 자리에 오직 현역 장교만 임명될 수 있도록 변경한 것이다. 이는 군부가 정치에 관여했던 예비역 장성들의 복귀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군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내각이 들어설 경우 현역 장교 중에서 후임 대신 후보를 추천하지 않거나, 현직 대신을 사임시키는 방식으로 내각을 합법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확보하게 된 것을 의미했다. 이는 사실상 군부가 정부 정책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길을 열었고, 군부 독재 체제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실제로 히로타 내각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테라우치 육군대신이 국회 해산을 거부한 히로타 총리와의 갈등 끝에 사임하고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으면서 붕괴되었다.[141][142]

사건 이후 육군 내부에서는 대대적인 숙군 인사가 단행되었다. 이는 사건 처리와 군 기강 확립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통제파가 정적인 황도파를 군부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었다. 황도파의 거두였던 아라키 사다오, 마사키 진자부로, 아베 노부유키, 하야시 센주로 등 육군대장 4명은 3월 10일 자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사건 당시 천황의 시종무관장이었던 혼조 시게루 대장 역시 반란군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4월에 예비역으로 물러났다. 사건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가와시마 요시유키와 계엄사령관이었던 가시이 고헤이 중장도 책임을 지고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황도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 소장은 한직인 보병 제40여단장으로 좌천되었다.

반면, 통제파는 2·26 사건을 통해 조성된 정치적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여 군부 내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통제파와 대립했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봉기는 결과적으로 통제파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셈이다. 당시 관동군 헌병사령관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만주에 있던 황도파 군인들을 철저히 숙청하며 세력을 확장했다.[264] 또한, 도미나가 교지와 같은 인물들은 황도파 숙청 과정에서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통제파 내에서 입지를 다지며 이후 군부 내 핵심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265][266]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와 파시즘은 더욱 노골화되고 강화되었다.

한편, 귀족원에서는 육군성이 반란군에게 점령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에 대한 육군의 책임을 추궁하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되었다.[243]

히로타 내각은 집권 후인 5월 29일, 사상범 보호관찰법을 제정하여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6. 2. 군 내부의 변화

통제파는 2·26 사건을 계기로 군 내부의 황도파 세력을 제거하고 군부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기회로 삼았다. 사건 수습 과정에서 통제파는 정치 개입을 노골화했으며,[254] 육군 내부에서는 대대적인 숙군(肅軍) 인사를 단행하여 황도파를 축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통제파에게 가장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일본 군국주의가 더욱 심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54]

사건 직후 오카다 내각이 총사퇴하자, 육군은 후임 히로타 고키 내각 구성 과정에 개입하여 "자유주의적 색채를 띠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256] 육군성 군무국의 무토 아키라 중좌는 조각 본부에 직접 관여하여 특정 각료 후보자들을 '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배제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히로타 총리는 결국 육군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에 직접 가담했던 청년 장교들은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2월 29일자로 20명, 3월 2일에는 야마모토(山本) 전 소위를 포함하여 총 21명이 파면되고 위계와 훈장을 박탈당했다.

본격적인 숙청은 황도파 고위 장성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인물직책 (사건 당시)조치시기
아라키 사다오육군대장, 군사참의관예비역 편입1936년 3월 10일
마자키 진자부로육군대장, 군사참의관예비역 편입1936년 3월 10일
아베 노부유키육군대장, 군사참의관예비역 편입1936년 3월 10일
하야시 센주로육군대장, 군사참의관예비역 편입1936년 3월 10일
혼죠 시게루시종무관장사직 후 예비역 편입1936년 4월
카와시마 요시유키육군대신예비역 편입 (책임 추궁)1936년 3월 30일
카시이 코헤이중장, 계엄사령관예비역 편입 (책임 추궁)1936년 7월
야마시타 토모유키소장, 육군성 군사조사부장보병 제40여단장 (일제강점기 조선 용산 주둔)으로 좌천사건 이후



특히, 혼죠 시게루 시종무관장은 사위인 야마구치 이치타로(山口一太郎) 대위가 사건에 연루되었고, 사건 당시 반란군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쇼와 천황의 의중과 다른 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사직 압력을 받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황도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야마시타 토모유키 소장은 조선 용산으로 좌천된 이후 중앙의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숙청과 더불어, 통제파는 황도파 출신 장성들이 다시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어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히로타 고키 내각 시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부활시켰다. 이 제도는 표면적으로 군의 정치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현역 군인만이 육군·해군 대신이 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군부가 내각의 구성과 존립 자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한편, 사건 당시 만주에 있던 관동군 헌병사령관 도조 히데키는 통제파의 핵심 인물 나가타 테츠잔 피살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 내 황도파 군인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투옥하는 등 숙청 작업을 주도했다.[264] 또한, 육군 인사국의 토미나가 쿄지는 황도파 장교들의 예비역 편입 실무를 원활하게 처리하여 통제파, 특히 도조 히데키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265][266]

사건 발생과 진압 과정에서의 육군 지휘부 책임 문제는 귀족원 등에서 제기되었으나, 결국 아무도 책임을 지거나 처벌받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243]

사건에 동원되었던 하사관과 병사들은 대부분 상관의 명령에 따라 합법적인 출동으로 믿고 행동했으나, 사건 이후 반란 가담자로 취급받는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 군법회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병사들조차 원대 복귀 후 '군기를 더럽힌 불충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만주 등 최전선으로 보내져 사실상 '죽음으로 명예를 회복하라'는 압박 속에 많은 이들이 전사했다. 특히 안도 테루조(安藤輝三) 대위의 중대원들은 거의 대부분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에는 훗날 유명 라쿠고가이자 인간문화재가 된 5대 야나기야 코산 (당시 고바야시 모리오 이등병), 사이타마현 지사와 일본사회당 중의원을 지낸 하타 카즈 (당시 하타 카즈 이등병), 영화감독 혼다 이시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2·26 사건은 군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통제파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이는 구 일본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군국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6. 3. 사회적 영향

사건으로 인해 장관들을 경호하던 경찰관 5명이 순직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훈팔등 백색동엽장과 경찰관리 및 소방관리 공로기장을 받았으며, 희생된 경찰관들에 대한 국민적 추모 열기도 뜨거웠다. 전국에서 조문 편지 10만 통과 조의금 219833JPY이 모였고, 조의금 접수 중단 발표 후 신문사에 항의가 쇄도할 정도였다.[257] 쓰키지 본원사에서 열린 합동 경시청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조문했다.[258]

순직 및 중상 경찰관 명단
이름계급소속상태비고
무라카미 요시모에몬(村上嘉茂左衛門)순사부장경시청 경무부 경호과 (총리 관저 배치)사망후쿠시마현 출신. 5.15 사건 당시 비번으로 화를 면함.[259]
도이 기요마쓰(土井清松)순사경시청 경무부 경호과 (총리 관저 배치)사망이시카와 미츠히로(石川光陽)와 동료였음.
시미즈 요시로(清水与四郎)순사경시청 스기나미서 겸 고지마치서 (총리 관저 배치)사망피 묻은 잔디가 경시청 경호과 창가에 보존됨.[260][261]
고다테 기요마쓰(小館喜代松)순사경시청 경무부 경호과 (총리 관저 배치)사망
미나가와 요시타카(皆川義孝)순사경시청 경무부 경호과 (마키노 노부아키 예우 수위)사망
타마키 히데오(玉置英夫)순사아자부 도리이자카 경찰서 겸 고지마치 경찰서 (재무대신 관저 배치)중상



한 경찰 관계자는 이 사건에서의 경찰관 피해가 전후 육상자위대가 경시청 공안부의 감시 대상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262] 이 외에도 진압 과정에서 보병 제15연대 병사 4명이 난방용 숯불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는 등, 진압 측 부대 병사 총 6명이 사망했다.[263]

사건에 연루된 하사관 및 병사들은 대부분 상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인정되어 군법회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부대로 복귀한 이들은 '군기를 더럽힌 불충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특히 만주로 파병된 제1보병연대와 제3보병연대 소속 병사들은 새로 부임한 연대장들로부터 "명예 회복을 위해 군무에 정진하고 백골이 되어 돌아오라", "오명을 씻기 위해 모두 백목 상자에 담겨 돌아오라"는 식의 훈시를 들어야 했다. 이는 사실상 죽음으로 사죄하라는 강요였으며, 많은 병사들이 이후 중국 등 최전선에 투입되어 전사했다. 반란에 가담하게 된 병사 중에는 훗날 인간국보로 지정된 라쿠고가(落語家) 5대째 야나기야 코산(당시 고바야시 모리오 이등병)과 사이타마현 지사 및 일본사회당 중의원을 지낸 하타 카즈(畑和) 이등병, 영화감독 혼다 이시로(本多猪四郎) 등이 있었다.

사건 이후 군부 내에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 황도파의 거두였던 아라키 사다오, 마사키 신자부로, 아베 노부유키, 하야시 센주로 등 육군 대장 4명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 사건 당시 반란군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혼죠 시게루 시종무관장도 사직 후 예비역이 되었다. 카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과 카시이 코헤이 계엄사령관 역시 책임을 지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황도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야마시타 봉문 소장은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반면, 관동군 헌병사령관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만주에 있던 황도파 군인들을 철저히 탄압하며 세력을 키웠고[264], 토미나가 쿄지는 황도파 숙청 실무를 처리한 공로로 도조의 신임을 얻어 중용되는 계기를 마련했다[265][266].

이러한 숙청과 함께,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부대신 현역무관제가 부활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군부가 후임 육군대신 추천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내각의 존립을 좌우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사건 당시 반란군에게 육군성과 참모본부가 점령당했던 것에 대한 육군의 책임 문제는 귀족원에서 추궁되었으나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243].

사건 전후로 관련자들의 자살도 잇따랐다.


  • 아오야마 키요시(靑山淸) 근위보병 중위 부부: 2월 29일 자택에서 자결.[286]
  • 오카자와 카네요시(岡澤金芳) 군조: 2월 29일 민가에서 권총 자살.
  • 타나베 쇼조(田邊庄藏) 헌병 상등병: 3월 2일 분대 내에서 권총 자살.
  • 이나바 고로(稻葉五郎) 군조: 3월 16일 연대 내에서 기병총 자살.
  • 다나카 야(田中彌) 보병 대위: 10월 18일 자택에서 권총 자살. 사건 관련 기소 중이었으며, 배후 관계 은폐를 위한 자살로 추정됨.[287][288]
  • 고구 죠로(古莊次郎) 소위: 사건과 직접 관련 없는 오기시 요시오(荻州立兵) 대위가 예비역 편입된 것에 항의하여 자살. (자살 동기에 다른 설도 있음)[289]


2.26 사건 위령비(도쿄도 시부야구 우타가와정)


사건으로 처형된 장교와 민간인 등 사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비가 도쿄도 시부야구 우타가와정의 옛 도쿄 육군 형무소 부지(현 시부야 합동청사 부지)에 세워져 있다. 또한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자부의 켄슈지(賢崇寺)에도 묘비가 있으며, 매년 2월 26일과 7월 12일에 합동 위령제가 열린다.[285] 처형된 이들 중 이소베 아사이치는 쇼와 천황을 비난하는 수기를 남겼고, 키타 잇키는 처형 직전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284]

6. 4. 쇼와 천황에 대한 영향

쇼와 천황1936년 2월 26일 오전 5시 40분경 사건 발생 보고를 받고, 즉시 혼죠 시게루 시종무관장에게 반란 진압을 지시했다.[88][89] 이후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사망,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 중상 소식을 접한 천황은 남은 측근인 키도 고이치 비서실장, 유아사 쿠라헤이 궁내대신 등의 강경 진압 조언을 받아들였다.[90][91] 천황은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이 반란 장교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며 신 내각 구성을 권고하자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반란 진압을 재차 명령했으며,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의 사임 요청도 반란 진압 전까지 불허했다.[92][93]

반란을 일으킨 청년 장교들은 '쇼와 유신'을 내걸고 천황 친정을 명분으로 삼았으며, 마사키 진자부로 교육총감 파면 당시 천황이 통제파에 분노하고 황도파에 동정심을 가졌다는 정보[204](혼죠 시종무관장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추정)를 믿고 천황이 자신들의 거사를 인정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204] 그러나 쇼와 천황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청년 장교들이 "나를 이용하지만 나의 진의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다"[284]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그들이 자신의 동생인 지치부노미야를 옹립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284] 또한 사건 보고를 받고 "일본도 러시아처럼 되었군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291], 이는 니콜라이 2세 일가 처형과 같은 황실의 비극적 운명을 우려했음을 시사한다. 반란 장교 중 한 명인 이소베 아사이치는 옥중 수기에서 이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291]

대일본제국헌법 하에서 천황은 국무대신의 보필 없이는 국정을 결정할 수 없었고, 쇼와 천황 역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 원칙을 교육받았다. 특히 장작림 폭살 사건 처리 과정에서 다나카 기이치 총리를 질책하여 사임시킨 이후 이러한 태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2.26 사건은 총리, 시종장, 내대신이 부재한 비상 상황에서 천황이 직접 사태 수습에 나서야 했던 이례적인 경우였다. 전후 쇼와 천황은 자신의 치세 중 입헌주의의 틀을 넘어 행동해야 했던 예외적인 사례로 이 사건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 어전회의에서의 항복 결정을 꼽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쇼와 천황은 입헌군주로서의 역할을 벗어나는 일에 더욱 신중해졌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

사건이 쇼와 천황에게 남긴 충격과 트라우마는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 발생 41년 후인 1977년 2월 26일 밤, 천황은 측근에게 "치안에 문제는 없느냐"고 물었으며[292], 1981년 경시청 청사 시찰 시에는 경시총감에게 "2.26과 같은 난폭한 침입에 대비해 중요 시설 방호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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