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본명: 차량융, 1924년 ~ 2018년)은 중국의 소설가, 언론인, 정치인이다. 그는 무협 소설의 대가로, 1955년 《서검은구록》을 시작으로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녹정기》 등 15편의 작품을 발표하며 중화권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김용의 소설은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제작되었으며,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김용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는 또한 홍콩의 언론사 명보를 창간하고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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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金庸)의 본명은 차량용(查良鏞)으로, 1924년 3월 10일 중화민국저장성하이닝시에서 태어났다.[7] 그는 명말청초의 저명한 문인들을 배출한 해닝 차씨(海寧查氏) 가문 출신으로,[8] 할아버지는 청나라 과거 시험에 급제했으며, 아버지는 서양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1950년대 초 중국 공산당 정부에 의해 반혁명 분자로 몰려 처형당했다가 1980년대에 사후 복권되었다.[9]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무협소설을 접하며 문학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학창 시절, 중일전쟁으로 피난 생활을 겪었으며, 중국 국민당 파견 인사의 폭압을 풍자하는 글을 썼다가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10] 이후 외교관을 꿈꾸며 국립정치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11]둥우 대학 법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했다.
1947년 상하이의 《대공보》(大公報)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1948년 홍콩 지사로 옮겼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외교관이 되려 했으나 사상적 차이와 아버지 문제로 좌절되었다.[47] 홍콩으로 돌아와 《신만보》(新晚報) 부편집장으로 일하던 중 동료 량위성(梁羽生)의 영향을 받아 1955년 첫 무협소설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을 연재하며 작가로 데뷔했다.[14]
1959년, 고등학교 동창 심보신(沈寶新)과 함께 《명보》(明報)를 창간하여 사장이자 주필로서 활동했다. 《명보》에 무협소설을 연재하는 동시에 날카로운 시사 평론을 쓰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47] 1972년 《녹정기》(鹿鼎記)를 끝으로 소설 집필 중단을 선언하고, 이후 기존 작품 개작에 몰두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홍콩 정계에도 참여하여 홍콩 기본법 기초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나, 1989년 천안문 사건에 항의하며 위원직을 사퇴했다.[16] 1993년 《명보》의 모든 지분을 매각하고 경영 일선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학문 연구를 계속하여 200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2010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2][33][34] 2013년에는 베이징 대학에서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3]
세 번 결혼했으며, 두 번째 부인 주매(朱玫)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다. 1976년 장남 차전협(查傳俠)이 미국 유학 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픔을 겪었다.[25][26]
2018년 10월 30일, 오랜 투병 끝에 홍콩의 홍콩 사나토리움 병원에서 향년 94세로 별세했다.[27] 장례는 비공개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란타우섬 보린사에 안치되었다.[29][30]
그의 문학적, 사회적 공헌을 기려 대영 제국 훈장(OBE),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홍콩 대자형훈장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으며,[31][82]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와 명예 교수직을 수여받았다. 소행성 10930 Jinyong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17]
김용 탄생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중국신문사. (金庸诞辰百年:香江寻踪_走进查大侠的江湖人间)
김용의 본명은 자량융(查良鏞)으로, 1924년 3월 10일(음력 갑자년 3월 6일) 중화민국저장성하이닝시 원화진(袁花鎮)에서 태어났다.[47] 그는 명망 높은 해령 사씨(海寧查氏) 가문의 22대손이었다.[7] 해령 사씨는 저장성 서부(浙西) 지역에서 많은 문인과 관리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했는데,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걸쳐 진사 22명, 강희제 연간에는 진사 10명과 한림학사 5명을 배출하여 "일문십진사 숙질오한림"(一門十進士,叔侄五翰林)이라 불릴 정도였다. 조상 중에는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사승(查昇), 사규(查揆)[55], 그리고 명말청초의 저명한 문인인 차기좌(查繼佐, 1601-1676), 차신행(查慎行, 1650-1727), 차사정(查嗣庭, 사망 1727) 등이 있다.[8] 그의 할아버지 차문청(查文清)은 청나라 시대 과거 시험에서 삼등 급제(同進士出身)를 했다.
아버지 자슈칭(查樞卿)은 대지주였으며, 서양식 교육을 받아 상하이의 저단대학(震旦大学)을 졸업했다.[56] 어머니 수루(徐祿)는 5남 2녀를 두었으며, 자량융은 그중 둘째 아들이었다. 1937년, 일본이 화남 지방을 침략하면서 당시 13세였던 자량융의 집안은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아버지는 구슈잉(顧秀英)과 재혼하여 4남 2녀를 더 두었다. 아버지 자슈칭은 1950년대 초반 중국 공산당 정부에 의해 반혁명 분자로 몰려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나, 1980년대에 사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9]
어린 시절, 아버지 자슈칭은 매일 아들에게 고명도(顧明道)의 무협소설 《황강녀협(荒江女俠)》을 읽어주었는데, 이는 자량융이 무협 장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수호전》, 《칠협오의》와 같은 작품들을 찾아 읽으며 훗날 무협 소설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1937년 자량융은 가흥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38년, 일본군이 저장성을 침략하자 학교는 수백 마일 남쪽의 리수이(麗水)시로 이전해야 했고, 학생이었던 자량융 역시 이불과 옷 한 벌만 챙겨 하루에 약 96.56km에서 약 112.65km씩 걸어서 피난길에 올랐다.
1941년, 그는 재학 중이던 학교에서 중국 국민당이 파견한 훈련 책임자의 학생들에 대한 폭압적인 태도를 풍자한 "앨리스의 모험"이라는 글을 썼다가 퇴학당했다.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위기 중 하나로 회고했는데,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잃었을 뿐 아니라 당장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장인통(張蔭桐) 교장의 도움으로 취저우 제1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시작하여 1943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10]
처음에는 외교관을 목표로 삼았던 그는 국립정치대학에서 외교학을 공부했으나, 부정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제적당했다. 이후 항저우의 『동남일보(東南日報)』에서 취재 기자와 영어 국제 방송 수신 담당으로 일했으며, 쑤저우의 동오대학(東吳大學) 법학원에서 국제법 과정을 수학했다.
2. 2. 학업과 언론 활동
1929년 고향 하이닝현 위안화진 소학교(海寧縣袁花鎮小學중국어)에 입학하였고, 1936년 자싱 제일중학교(嘉興一中중국어)에 진학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의 침략으로 위항구, 린안구, 리수이시 등지를 오가며 피난 생활을 해야 했으며, 1938년 성립 연합 고등중학교 초중부에 들어갔다.[57] 이후 여러 차례 학교를 옮겨 1943년 저장성 취저우 제일중학을 졸업하였다.
1944년 충칭의 중앙정치대학 외교과에 입학하여 중국국민당 학생 당원이 되었으나, 국민당의 학생 통제 정책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다가 퇴학당했다.[58] 처음에는 외교관을 목표로 했으나[11] 이 사건으로 인해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항저우의 『동남일보』(東南日報중국어)에서 기자 및 영어 국제 방송 수신 담당으로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47] 이후 1946년 상하이의 둥우 대학 법학원(법과대학)에 입학하여 국제법을 전공하였고[59][11], 1948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대공보』(大公報중국어)의 전신 번역 시험에 합격하여 홍콩 지사로 파견되었다. 『대공보』의 자매지인 『신만보』(新晩報중국어)가 창간되자 『오후차좌』(下午茶座중국어) 코너의 편집을 맡았고, '임환'(林歓중국어)이라는 필명으로 영화 평론을 쓰기도 했다.[47]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베이징을 찾아 외교관 임용을 요청했으나, 그의 사상이 공산당과 맞지 않고 부친이 반동 지주로 체포되는 등의 사건으로 인해 거절당하면서 외교관의 꿈을 완전히 접게 되었다.[47]
홍콩으로 돌아와 기자로 복직한 김용은 동료였던 량위성(梁羽生)의 영향으로 1955년 『신만보』에 첫 무협소설 『서검은구록』(書剣恩仇録중국어)을 연재하며 소설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59년에는 독립하여 『명보』(明報중국어)를 창간했다. 초기 『명보』는 김용의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일반적인 가십 기사, 경마 정보 등을 다루는 상업 신문이었으나, 1962년 중국 대륙 난민이 홍콩으로 대량 유입된 사건을 계기로 점차 중도적 논조를 강화하며 홍콩의 외성인(外省人중국어)들에게 지지받는 유력 신문으로 성장했다.[47] 김용은 『명보』에 사설과 무협소설을 꾸준히 연재하며 인기 작가이자 영향력 있는 논객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특히 문화대혁명 발발 당시 류사오치 국가주석의 실각을, 말기에는 린뱌오의 실각을 예견하는 등 정치 평론가로서의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47] 1972년 『녹정기』(鹿鼎記중국어) 연재 종료와 함께 돌연 소설 집필 중단을 선언했다.[47]
소설 집필 중단 이후에도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은 계속되었다. 1999년부터 저장 대학 인문학원 원장을 역임했으며[47], 2005년 81세의 나이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당나라 초기 황위 계승 제도」 연구로 역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2010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당나라 성세기의 황위 제도」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60][61][12] 또한 2009년 베이징 대학 중문과 박사 과정에 입학하여 2013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13] 이러한 학문 및 언론 활동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싱가포르 국립대학 동아연구소 명예 학회원으로 선정되었으며, 홍콩 대학, 홍콩 이공대학, 홍콩 개방대학,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UBC), 국립정치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47]베이징 대학, 홍콩 대학, 난카이 대학, 저장 대학, 중산 대학, 쓰촨 대학, 화둥 사범대학, 항저우 대학, 쑤저우 대학, 국립 칭화 대학, 지린 대학 등 다수의 대학에서 명예 교수로 추대되기도 했다.[47]
2. 3. 작품 활동과 《명보》 창간
1946년 가을 상하이로 간 김용(본명 자량융, 查良鏞)은 《대공보》(大公報)에서 국제 전보 번역 일을 시작했다. 1948년에는 홍콩 지사로 옮겼으며, 1950년 베이징으로 가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에 취직하려 했으나, 당시 외교 정책에 대한 불만과 그의 사상이 공산당과 맞지 않아 거절당했다. 아버지마저 반동 지주로 몰려 체포되는 일을 겪자 외교관의 꿈을 접고 다시 《대공보》 홍콩 지사로 돌아왔다. 1952년에는 《신만보》(新晚報)로 옮겨 부편집장이 되었고, 같은 해 《절대가인》, 《난화화》 등의 영화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량위성(梁羽生, 본명 천원통)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14]
1954년, 오씨태극권의 우공위(吳公儀)와 백학권의 쩐커푸(陳克夫)가 마카오에서 벌인 대련은 중화권 전체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공보》 편집장 루오푸(羅孚)는 새로운 무협 소설 연재를 기획했고, 량위성의 《용호투경화》(龍虎鬥京華)와 함께 김용에게도 '김용'이라는 필명으로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을 연재하게 했다. 두 작품 모두 큰 호평을 받으며 무협 소설 붐을 일으켰다. 1955년 《신만보》에 《서검은구록》을 발표하며 무협 작가로 데뷔한 김용은 단숨에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56년, 무협 소설의 인기가 더욱 높아지자 량위성, 김용, 그리고 백검당주로 알려진 쩐판(陳凡)은 함께 《삼검루수필》(三剑楼随笔)을 발표하며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미한 새로운 스타일의 무협을 선보였다. 같은 해 김용은 《홍콩상보》에 《벽혈검》(碧血劍)을 연재하기 시작했다.[62] 1957년에는 무협 소설 연재를 계속하면서 기존 직장을 그만두고 대성영화(大成電影, Great Wall Movie Enterprises Ltd)와 봉황영화(鳳凰電影公司, Phoenix Film Company)에서 각본가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1953년부터 1958년 사이에는 '임환'(林歓) 등 다른 필명으로 영화 각본 작업을 했는데, 장성전영공사의 영화 대본 《절대가인》은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로부터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시기 《유녀회춘》(有女懷春), 《왕노호창친》(王老虎搶親) 같은 대본도 썼다.[63]
1959년, 김용은 고등학교 동창인 심보신(沈寶新)과 함께 홍콩에서 《명보》(明報)를 창간했다. 창간 초기에는 김용의 무협 소설을 매일 읽을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독자를 모았고, 《명보》에 《신조협려》(神鵰俠侶)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후 《명보만보》(석간), 《명보월간》, 《명보주간》을 차례로 창간하고 명보출간사 등 출판사도 운영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1991년 1월에는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명보기업유한공사가 되었고, 같은 해 3월 홍콩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명보 그룹의 1991년 이익은 1억홍콩 달러에 달했다.[64]
김용은 20여 년간 《명보》의 사설도 직접 집필하며 "왼손엔 사설, 오른손엔 소설"을 쓰는 바쁜 생활을 했다. 1960년대 중소 분쟁 당시에는 중국의 안보를 위해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사설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핵무장 정책을 지지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대공보》 등을 영국과 미국을 숭상하고 중국에 반대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57] 그러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로 인해 그의 책들은 중국 본토에서 한동안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65] 그는 문화대혁명의 진정한 목적이 류사오치(劉少奇) 타도에 있으며, 말기에는 린뱌오(林彪)의 실각을 예견하는 등 정치 평론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1972년, 김용은 마지막 무협 소설 《녹정기》(鹿鼎記) 연재를 마친 후 돌연 소설 집필 중단을 선언했다. 이후 10여 년간은 기존 작품들을 편집하고 수정하는 데 집중했으며, 그의 작품 첫 완전판은 1979년에 출간되었다. 1980년에는 오공조(吳公藻)의 태극권 고전 《오가태극권》(吳家太極拳)에 후기를 쓰며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서부터 이어지는 중국 무술의 사상적 배경을 설명하기도 했다.[14] 그의 무협 소설들은 중국어권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홍콩, 대만, 중국 본토에서 영화,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로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김용이 창간한 《명보》는 1962년 중국 대륙 난민의 홍콩 유입 사건을 계기로 단순 상업지에서 벗어나 중도적 논조를 강화하며 홍콩의 외성인(外省人, 중국 본토 출신 이주민)들에게 지지받는 언론으로 성장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민주파 지지 성향의 매체로 자리 잡았으며, 2014년 우산혁명 당시에는 전 편집장이 괴한의 습격을 받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66]
이 작품들 중 《월녀검》을 제외한 14개 작품 제목의 첫 글자를 따면 '''飛雪連天射白鹿, 笑書神俠倚碧鴛''' (비설련천사백록, 소서신협의벽원)이라는 대련(對聯)이 만들어진다. 이는 김용이 《녹정기》 후기에서 직접 밝힌 것이다.
이 외에도 수필집 《삼검루수필》(량위성, 백검당주 공저), 전기 《원숭환평전》(袁崇煥評傳), 이케다 다이사쿠와의 대담집 《욱일의 세기를 구하여―탐구 하나의 찬란한 세기》 등이 있다.
2. 4. 정치 활동과 은퇴
1959년 홍콩에서 《명보》를 창간한 김용은 이후 《명보만보》(석간), 《명보월간》, 《명보주간》을 연이어 창간하며 언론 활동을 넓혔고, 명보출간사 등 출판사도 운영했다. 1991년 1월에는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명보기업유한공사로 만들었고, 그해 3월 홍콩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명보 그룹은 1991년에 1억위안에 달하는 이익을 기록했다.[64]
김용은 20여 년간 《명보》의 사설을 직접 집필하며 "왼손엔 사설, 오른손엔 소설"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1960년대 중소 분쟁 당시에는 중국의 안보를 위해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고, 중국공산당의 핵무장 정책에 반대하는 《대공보》 등을 서방을 숭배하고 중국에 반대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57] 그러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명확한 반대 입장을 취했으며, 이 때문에 그의 책들은 중국 본토에서 한동안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65] 21세기에 들어 《명보》는 민주파를 지지하는 성향의 언론 매체로 자리 잡았으며, 2014년 우산 혁명 당시에는 전 편집장이 괴한에게 습격당하는 사건도 있었다.[66]
1973년 봄, 김용은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타이완을 방문하여 당시 행정원 원장이었던 장징궈와 회담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인 1981년부터 1984년 사이에는 베이징을 방문하여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을 만났다.[67] 이 만남으로 김용은 덩샤오핑과 단독으로 회담한 최초의 홍콩 인사가 되었다.[68] 이를 계기로 김용은 홍콩 특별행정구 기본법 기초위원회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되었으며, 주로 경제제도 소위원회에서 활동했다.[69]
1988년, 김용은 자지밍(查濟民)과 함께 예비적인 "정치제도 협조방안"을 제안했다. 이 방안은 당시 다른 의견들에 비해 보수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민주와 진보를 요구하던 홍콩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홍콩 시민들은 김용의 타협적인 안보다는 민주파인 민주당 소속 리추밍 등이 제시한 방안을 더 지지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 정부는 홍콩과 국제 사회의 여론을 고려하여 일국양제와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정치 제도 방안을 확정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이 발생하자, 김용은 인민해방군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학생들이 희생된 것에 깊은 슬픔과 실망감을 표출했고,[70]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기본법 기초위원회 위원직을 사퇴하며 정치 활동에서 은퇴했다.[71] 같은 해, 《명보》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는 사장직에서도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1991년 명보기업유한공사가 주식 시장에 상장되자 김용은 회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1993년에는 당시 홍콩의 총독이었던 크리스 패튼과 만나 "정치 개혁 방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같은 해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가 동시에 열리는 양회 기간 중 베이징을 방문하여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였던 장저민을 만나기도 했다.[67] 이 해 4월, 명보기업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곧 전면적인 은퇴를 선언했다.[72]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김용은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1994년에는 고향 자싱시에 있는 자싱이중 개교 90주년 행사에 참석하여 김용도서관을 기증했으며,[73]항저우의 서호 인근에 운송서사(雲松書舍)를 건립하여 1996년 완공했다. 또한 옥스퍼드 대학교의 객원 교수로 초빙되거나, 홍콩 특별 행정구 준비 위원회에 홍콩 측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99년부터는 절강대학 인문학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2002년부터는 자신의 무협 소설 15편에 대한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김용은 2018년 10월 30일, 홍콩의 양화병원에서 향년 94세로 별세했다.[48]
2. 5. 별세
홍콩 문화박물관의 김용관
2018년 10월 30일 오후 5시 반 무렵, 김용은 홍콩의 양화의원(홍콩 사나토리움 병원)에서 향년 94세로 별세하였다.[74][27] 유족은 김용이 "오후가 되니 매우 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언론에 전했고,[75] 이후 생전에 남긴 시 "풍모는 바로 대협객의 정을 품었고, 욕심 없이 정계를 단호히 논평하였으며, 오온이 모두 공임을 깨달아, 웃으며 학수레를 타고 하늘로 오르네"(有容乃大俠客情,無慾則剛論政壇,看破放下五蘊空,含笑駕鶴倚天飛)를 발표하였다.[76]
장례는 2018년 11월 13일, 홍콩 장례식장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치러졌다.[77][28] 생전에 가까웠던 작가 주아람(蔡瀾), 토우짓(陶傑), 리춘언(李純恩), 니꽝(倪匡), 칩 자오(蔡志忠), 베니 리, 영화감독 장기중(張紀中), 배우 황효명(黃曉明), 전 홍콩폴리텍대학교 총장 푼 충광(潘宗光), 이미지 디자이너 티나 리우(Tina Liu), 전 홍콩 행정장관 동지화(董建華), 정치인 에드워드 렁(利國偉), 알리바바 그룹 창업주 마윈(馬雲) 등 각계 인사가 장례에 참여하였다.[77][28] 정오에 그의 관은 란타우섬 보린사로 옮겨져 화장되었고, 유골은 해영탑(회의탑)의 납골당에 봉안되었다.[77][29][30]
2004년 캠브리지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당시, 김용은 정식 학생으로 공부해 정식 박사 학위를 받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32] 이후 실제로 캠브리지 대학원에서 수학하여, 2010년 7월 캠브리지대학 세인트존스칼리지에서 초기 당나라의 황위 계승에 관한 논문으로 동양학(중국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33][34]
3. 작품 세계
김용은 주로 소설 작품을 남겼으며, 시사평론, 산문 등도 집필했다. 1955년 《서검은구록》을 시작으로 1972년 《녹정기》까지 약 17년간 총 15편의 무협 소설과 자전적 단편 소설 《월운》 1편을 포함하여 총 16편의 허구적인 작품을 썼다.[35][36]
그의 소설 대부분은 명보 등 신문에 연재된 후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과정에서 연재판, 구판, 개정판, 신개정판 등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다. 김용의 작품은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중국 전통 문화(전통 한의학, 중국 무술, 유교, 불교, 도교 등)와 중국 민족주의 등의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면서도 문학적 완성도를 갖추어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단순한 무협 소설을 넘어 역사 소설의 성격도 지니며, 지식인 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김용학(金庸學)이라는 학문 분야까지 생겨났다. 그의 소설들은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각색되어 중화권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1. 소설
김용의 소설은 대부분 일간지나 월간지 등에 연재되었으며, 연재 종료 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홍콩뿐만 아니라 마카오, 타이완, 싱가포르 등 중화권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많은 작품이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었다.[87] 그의 무협 소설은 기존 장르가 다루던 강호 세계의 무술, 은원, 사랑 이야기에 실제 역사적 사실을 가미하여 흥미를 더했다.
1955년 처녀작 《서검은구록》 연재를 시작으로 1972년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절필할 때까지 총 15편의 무협 소설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뛰어난 문학적 표현과 짜임새 있는 전개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김용의 소설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화권에서 국민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김용의 무협 소설은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으며, 장대한 역사적 배경 속에 실제 역사 인물들을 등장시켜 허구와 사실이 혼재된 독특한 세계를 창조했다. 이는 단순한 무협 소설을 넘어 장대한 역사 서사 문학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특히 작품 속에서 민족 간의 갈등이 자주 그려지지만, 전통적인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여러 국가와 민족을 객관적이고 평등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거 무협 소설은 저속한 대중 문학으로 치부되어 지식인들에게 외면받는 경향이 있었으나, 김용의 작품은 풍부한 교양과 서구 소설의 영향을 바탕으로 지식인 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작품 세계를 연구하는 "금학(金學)"이라는 학문 분야까지 생겨났으며, 무협 소설을 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무협 소설의 제1인자"로 불린다. 그의 작품들은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재창조되어 중화권 대중문화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1995년 '20세기 중국문학 대사 문고' 선정 당시 루쉰, 심종문, 바진에 이어 4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용은 14편의 주요 무협 소설 제목 첫 글자를 따서 다음과 같은 대련을 만들었다고 《녹정기》 후기에서 밝혔다. (단편인 《월녀검》은 이후에 쓰여 포함되지 않는다.)
:'''비설련천사백록 소서신협의벽원''' (飛雪連天射白鹿 笑書神俠倚碧鴛중국어)
김용의 작품들은 중화권(중국 대륙,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 등)에서 수없이 많은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게임, 만화 등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원작 팬들이 많아 각색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반면, 각색 과정에서 원작과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아 김용 본인은 영상화된 작품 대부분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영상화 작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 작품 문서 또는 관련 분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2. 작품의 특징과 주제
김용의 소설들은 《백마소서풍》과 《협객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월녀검》의 주인공 아청은 《사조영웅전》 등장인물 한소영의 조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천룡팔부》는 《사조영웅전》의 이전 시대를 다루며, 개방 방주 홍칠공은 《천룡팔부》의 교봉(소봉)의 뒤를 이은 인물이고, 단예는 훗날 《사조영웅전》에서 일등 대사가 되는 단지흥의 조상이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는 흔히 '사조 삼부작'으로 불리며 김용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세 작품은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다. 독고구패의 중철검은 《신조협려》의 양과가 사용했으며, 이후 《의천도룡기》의 핵심 물건인 의천검과 도룡도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곽양은 의천검을 물려받아 아미파를 창시하고 후대에 전한다. 《소오강호》의 주인공 영호충은 화산파 검객 풍청양에게 독고구패의 독고구검을 배운다. 또한 《소오강호》의 일부 등장인물과 문파는 《벽혈검》에서도 언급된다. 《녹정기》에서는 소림사 승려 징관이 과거 검술의 정해진 틀을 따르지 않은 위대한 검객으로 독고구패와 영호충을 떠올리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벽혈검》의 주요 등장인물 몇몇이 《녹정기》에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서검은구록》의 여러 등장인물은 《비호외전》에도 등장하며, 《비호외전》의 주요 인물들은 《설산비호》로 이어진다.
김용은 1955년 첫 작품 『서검은구록』을 시작으로 1972년 『녹정기』까지 총 15편의 무협 소설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중화권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김용의 소설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널리 읽혔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무협 소설을 넘어,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실제 역사와 허구를 엮어낸 장대한 역사 서사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작품 속에서는 민족 간의 갈등이 자주 다뤄지지만,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민족을 객관적이고 평등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용의 소설은 중국 민족주의 또는 애국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중국이 한족이 아닌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에게 점령당하거나 위협받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자기 결정과 정체성의 문제를 탐구한다. 초기 작품에서는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점차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는 관점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사조영웅전』에서는 무능한 송나라 관료들과 대비하여 칭기스칸과 같은 비한족 지도자들의 긍정적인 면모를 묘사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는 전통 한의학, 침술, 중국 무술, 중국 음악, 서예, 바둑, 중국 차 문화 등 다양한 중국 전통 문화 요소가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 사상과 중국 역사 지식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역사적 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함께 등장하여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다.
작품 전반적으로 유교적 가치관, 특히 군신, 부자, 형제, 사제 간의 관계와 의리, 명예, 충성 등이 강조된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이러한 전통적 가치를 구현하는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신조협려』에서 스승 소용녀와 제자 양과의 사랑을 통해 전통적인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현대 사회에서의 가치관 변화에 대한 고민도 엿볼 수 있다.
마지막 작품인 『녹정기』는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파격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주인공 위소보는 탐욕스럽고 게으르며 무술 실력도 없는 반영웅으로, 기존의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다. 김용은 의도적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난 인물을 통해 기존 작품들에 대한 풍자를 시도하고 독자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0]
김용은 이전까지 저속한 대중문학으로 여겨지던 무협 소설을 풍부한 교양과 문학적 기교를 바탕으로 지식인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금학(金學)"이라는 학문 분야까지 생겨났으며, "무협 소설의 제1인자"로 칭송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재창조되어 중화권 대중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용이 작품을 모두 완성한 후, 14편의 제목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다음과 같은 대련(對聯)이 팬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번체:
飛雪連天射白鹿
笑書神俠倚碧鴛
;간체:
飞雪连天射白鹿
笑书神侠倚碧鸳
;대략적인 번역:
하늘 가득히 눈 날리니 흰 사슴을 쏘고 (飛雪連天射白鹿)
웃으며 신선하고 의협적인 자를 쓰니 푸른 원앙새에 기댄다 (笑書神俠倚碧鴛)
이는 각 작품 제목의 첫 글자를 딴 것(飛: 비호외전, 雪: 설산비호, 連: 연성결, 天: 천룡팔부, 射: 사조영웅전, 白: 백마소서풍, 鹿: 녹정기, 笑: 소오강호, 書: 서검은구록, 神: 신조협려, 俠: 협객행, 倚: 의천도룡기, 碧: 벽혈검, 鴛: 원앙도)으로, 김용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팬들이 그의 작품 전체를 기억하는 데 유용한 기억술로 사용되고 있다. 단편인 《월녀검》은 이 대련에 포함되지 않는다.
3. 3. 김용학(金庸學)
중화 문학계에서 《홍루몽》을 연구하는 홍학처럼, 김용의 문학, 특히 그의 무협소설을 연구하는 김용학(金庸學, Jinology)이라는 학문 분야가 생겨났다.[91]
김용은 1955년 『서검은구록』부터 1972년 『녹정기』까지 총 15편의 무협소설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문학적 표현과 기교 있는 서사로 홍콩, 중국 본토, 타이완, 동남아시아 등 중화권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김용의 소설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위상을 확립했다. 김용 소설은 격동기를 배경으로 실제 역사와 허구를 엮어 장대한 서사를 만들고, 전통적인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여러 민족을 비교적 객관적이고 평등하게 묘사하는 특징을 보인다. 과거 저속한 장르로 여겨지던 무협소설은 김용의 풍부한 교양과 서구 소설 기법의 영향을 통해 지식인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문학의 경지로 격상되었고, 이는 김용에게 "무협소설의 제1인자"라는 칭호를 안겨주었으며 그의 작품 세계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김용학' 탄생의 배경이 되었다.
김용학 연구는 여러 지역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타이완성 계엄령 해제 후 원류출판사는 금서였던 김용 소설을 출판하며 해설서 《김학연구총서》를 발간했다.[92] 홍콩에서는 전익출판그룹과 명창출판사가 전 홍콩 입법회 의원 마거릿 응(吳靄儀 응오이이)의 김용 소설 분석서들과 작가 양싱안(楊興安)의 《김용의 붓으로 펼친 세계》(金庸筆下世界) 등을 출간했다. 중국 본토에서도 정식 출판 이후 소설 내용, 인물, 역사 배경, 무공, 음식 등 다방면에 걸친 연구와 비평이 활발해졌다. 김용의 친구이자 공상과학 소설가인 니황(倪匡)은 김용 소설 속 인물과 세계를 분석한 비평서 ''김용 소설을 읽다(我看金庸小說)''를 저술하여 김용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김용의 소설 중 일부는 정치적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1970년대 중국 본토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과 문화대혁명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대만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져 일부 작품이 금지되었다. 현재 이 금지 조치들은 모두 해제되었으며, 덩샤오핑(鄧小平) 등 양안의 많은 정치인들도 그의 독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학은 학계를 넘어 사회 문화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2003년 산시성의 한 방송국은 화산에서 화산논검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93] 2004년 말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교육출판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천룡팔부'' 발췌문을 포함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대중 문학의 교육적 가치에 대한 찬사와 폭력성 및 비현실성에 대한 우려가 공존했다. 비슷한 시기 싱가포르 교육부도 중고등학교 중국어 교재에 그의 작품을 포함시켰다.[41]
김용의 작품은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끊임없이 재창조되며 중화권 대중문화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1995년 '20세기 중국문학 대사 문고'에서 루쉰, 심종문, 바진에 이어 4위에 선정되며 그의 문학사적 위상을 공고히 했다.
4. 영향 및 평가
김용의 작품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김용학(金庸學, Jinology)'이라는 독자적인 학문 분야를 탄생시켰다. 수많은 독자와 비평가들이 그의 무협 세계를 분석하고 토론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특히 김용의 친구이자 공상과학 소설가인 니황(倪匡)의 비평이 유명하다. 니황은 김용 소설의 열렬한 팬으로서, 작품 속 인물과 세계관을 분석한 비평집 ''김용 소설을 읽다(我看金庸小說)''를 저술했다.
김용 소설은 큰 인기를 누렸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일부 지역에서는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1970년대 중국 본토에서는 일부 작품이 마오쩌둥(毛澤東)과 문화대혁명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반대로 대만에서는 다른 작품들이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져 금지되었다. 현재 이러한 금지 조치는 모두 해제되었으며, 김용의 전 작품은 중국 본토, 홍콩, 대만에서 여러 차례 출판되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한 양안의 많은 정치인들도 그의 작품을 즐겨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말, 중국 인민교육출판사(人民教育出版社)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천룡팔부''의 일부를 수록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대중적인 문학 작품을 교과서에 포함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작품 속 폭력 묘사나 비현실적인 무술 내용이 고등학생에게 부적절하다는 우려를 표했다. 비슷한 시기에 싱가포르 교육부 역시 중고등학교 중국어 교재에 김용의 작품을 포함시키는 조치를 발표했다.[41]
김용의 무협소설은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으며, 방대한 역사적 사실과 실제 역사 인물을 등장시켜 허구와 현실이 어우러진 독특한 세계를 창조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단순한 무협소설을 넘어 장대한 역사 서사 문학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특히 작품 속에서 민족 간의 갈등이 자주 다뤄지지만, 전통적인 중화사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여러 국가와 민족을 객관적이고 평등하게 묘사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과거 무협소설은 저속한 대중 문학으로 치부되어 지식인들에게 외면받는 경향이 있었으나, 김용의 작품은 풍부한 교양과 서구 소설의 영향을 바탕으로 지식인 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작품 세계를 연구하는 '금학(金學)'이라는 학문 분야(앞서 언급된 '김용학'과 같은 의미)까지 생겨났으며, 김용은 무협소설을 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무협소설의 제1인자'로 칭송받는다. 1995년 중국의 대표 작가를 선정하는 "20세기 중국문학 대사 문고"에서 김용은 루쉰, 심종문, 바진에 이어 4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용의 작품은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끊임없이 재창조되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중화권 대중 오락 문화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의 무협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TV 드라마는 90편이 넘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후금취안 감독의 ''소오강호''(1990년)와 속편 ''소오강호2''(1992년), 왕정 감독의 ''녹정기''(1992년)와 속편 ''녹정기 2: 신룡교''(1992년),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1994년) 등이 있다. 또한 ''영웅문'' 시리즈를 비롯한 수십 개의 롤플레잉 비디오 게임도 김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만화로 각색된 작품 중 영어로 번역된 것으로는 마영성이 그린 ''의천도룡기'', 토니 웡(Tony Wong)의 ''신조협려(전설의 커플)'', 위톈벵(Wee Tian Beng)의 ''신조협려'' 등이 있으며, 2001년 중국 CCTV에서 방영된 드라마 ''협객행''은 DVD로 출시되어 영어 자막으로도 제공되었다.
1955년 첫 작품 『서검은구록』 연재를 시작으로 1972년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집필을 마칠 때까지, 김용은 총 15편의 무협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은 뛰어난 문학적 표현과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홍콩과 중국 본토는 물론 타이완과 동남아시아 화교 사회에서도 널리 읽혔다.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김용의 소설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중화권에서 민족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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