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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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어, 빙하기 이후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우랄어족 언어를 사용하는 핀족이 이주해 왔고, 신석기 시대를 거치며 농경 문화가 발달했다. 청동기 및 철기 시대를 거치며 스칸디나비아, 발트해 연안과 교류했고, 중세 시대에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으며 기독교를 수용했다. 스웨덴 제국 시대에는 종교 개혁과 행정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18세기 대북방 전쟁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세기에는 핀란드 민족주의가 부흥하며 핀란드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었고, 러시아화 정책에 저항했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이후 독립을 선언하고 내전을 겪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과 두 차례 전쟁을 치렀다. 전후에는 서방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복지 국가를 건설했고, 냉전 시대에는 중립 정책을 유지했다. 1995년 유럽 연합에 가입했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나토에 가입하여 안보 정책에 큰 변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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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역사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국가 | 우리 땅 |
수도 | 헬싱키 |
공용어 | 핀란드어 스웨덴어 |
면적 | 338,440.84 제곱킬로미터 |
인구 | 5563970명 (2024년 1월 31일) |
정치 | |
정치 체제 | 공화국 |
대통령 | 알렉산데르 스투브 |
총리 | 페테리 오르포 |
의회 | 핀란드 의회 |
역사 | |
형성 | 12세기 |
스웨덴의 지배 | 1280년대 ~ 1809년 |
러시아 제국의 자치 대공국 | 1809년 ~ 1917년 |
독립 선언 | 1917년 12월 6일 |
공화국 선언 | 1919년 7월 17일 |
유럽 연합 가입 | 1995년 1월 1일 |
북대서양 조약 기구 가입 | 2023년 4월 4일 |
경제 | |
통화 | 유로 (€) |
기타 정보 | |
시간대 | EET (UTC+2) |
섬머 타임 | EEST (UTC+3) |
ISO 3166-1 alpha-3 | FIN |
국가 코드 | FI |
인터넷 최상위 도메인 | .fi |
전화 지역 번호 | +358 |
핀란드의 역사 (핀란드의 력사) | |
로마자 표기 | Pindullandŭi Yeoksa |
フィンランドの歴史 (핀란드의 력사) | |
로마자 표기 | Finrando no Rekishi |
2. 선사 시대
핀란드 땅에는 빙하기 이후 석기 시대인 기원전 9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첫 거주자들은 수렵 채집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5000년 전부터는 토기도 발견된다.[5] 핀우그리아어파 사용자들이 동쪽으로부터 핀란드에 들어왔으며, 북부의 소수민족인 사미인들이 사용하는 사미어는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다.
기원전 3200년경 핀란드 남부에 '전부(전투용 도끼) 문화'(혹은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들어온 것이 신석기 시대 농경문화의 발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후로도 북부와 동부에서는 수렵과 어업이 주로 행해졌다.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년-500년)와 철기 시대(기원전 500년-서기 1200년)에는 스칸디나비아와 루스 북부, 발트 해 연안 지방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유물도 발견된다. 3세기 이후로는 수장과 같은 귀족 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화려하게 장식된 무덤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이킹 시대 때도 중앙 권력 사회로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1. 석기 시대
빙하기 때 핀란드 땅을 덮었던 얼음이 녹으면서, 기원전 9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5] 이들은 주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했다.[7]

만약 사실로 확인된다면,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고고학 유적지는 오스트로보트니아, 크리스티네스타드에 있는 늑대 동굴이 될 것이다. 이 유적지는 지금까지 북유럽에서 발견된 유일한 빙하기 이전 시대(네안데르탈인) 유적지이며, 약 12만 5천 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6]
라흐티의 리스톨라 지역과 오리마틸라에서 기원전 8900년경의 빙하기 이후 인류 정착지의 가장 오래된 증거가 발견되었다.[8] 발굴된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어망인 안트레아의 그물은 기원전 8300년경의 유물이다.
기원전 5300년경에는 빗살무늬 토기 문화가 나타나 핀란드의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생계는 여전히 수렵과 어업에 기반을 두었다. 기원전 5천년기 동안 핀란드와 북동부 유럽 전역에 광범위한 교환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샤머니즘적이고 토테미즘적 신념 체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발견되었으며, 특히 핀란드 동부 아스투반살미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3500년에서 2000년 사이에는 거인의 교회()라고 불리는 기념비적인 석조 울타리가 오스트로보트니아 지역에 건설되었다.[9] 울타리의 목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9]
최근 몇 년 동안, 이이 강의 울루 북쪽에 있는 키에리키 유적지에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핀란드 신석기 시대 석기 문화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다. 이 유적지는 연중 거주지였으며, 그 거주민들은 광범위하게 교역을 했다. 키에리키 문화는 또한 빗살무늬 토기 문화의 하위 유형으로 간주된다. 매년 더 많은 유적지가 발굴되고 있다.[10]
기원전 3200년 이후, 핀란드 만 남쪽에서 온 강한 문화적 영향으로 전투 도끼 문화가 핀란드 남서부에 정착했다. 이 문화는 핀란드 밖에서 농업과 축산업을 실천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핀란드에서 농업의 가장 초기의 확인된 흔적은 기원전 2천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 내륙 지방에서는 사회가 당분간 수렵-채집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11]
전투 도끼 문화와 빗살무늬 토기 문화는 결국 융합되어, 기원전 23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존재했던 키우카이넨 문화를 낳았다.
2. 2. 청동기 시대 및 철기 시대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핀란드의 해안 지역은 북유럽 청동기 문화의 일부였으며, 내륙 지역은 러시아 북부 및 동부의 청동기 사용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12] 기원전 500년부터 서기 1200년까지의 철기 시대에는 스칸디나비아와 루스 북부, 발트 해 연안 지방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3세기 이후로는 수장과 같은 귀족 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화려하게 장식된 무덤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이킹 시대 때도 중앙 권력 사회로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 중세 시대
12세기와 13세기에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북방 십자군의 영향으로 핀란드에 대한 기록이 많아졌다.[13] 이 시기 핀란드나 핀란드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언급된 '페니'에 대한 묘사, 룬 문자,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사가, 12세기와 13세기의 교황 서한 등 외래 기원의 자료들이 남아있다.[13] 이러한 자료들에는 고대 핀란드 왕과 지명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어, 핀란드를 왕국으로 정의하고 핀란드인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수오미'(핀란드어로 핀란드)라는 단어가 언급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741년에서 829년 사이에 쓰인 프랑크 제국 연대기이다. 811년, 연대기에는 평화 협정과 관련하여 수오미라는 인물이 언급되어 있다.[14][15] 현재 핀란드를 언급하는 가장 오래된 스칸디나비아 문서는 스웨덴 쇠데르비의 finlontnon (U 582) 비문과 고틀란드의 finlandinon (G 319) 비문으로, 11세기에 쓰여진 두 개의 룬 문자이다.[16]
핀란드 철기 시대는 유럽의 역사적 중세 시대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에, 핀란드 시대의 주요 정보 출처는 고고학적 발견[13]과 DNA 분석[17] 또는 전산 언어학과 같은 자연 과학적 방법의 현대적 적용에 기반한다. 핀란드 철기 시대 동안 철의 생산은 동쪽, 서쪽, 남쪽의 인접 문화에서 도입되었으며, 최초의 수입 철기 유물이 등장한 시기와 거의 같다.[13]
3. 1. 스웨덴의 지배
12세기와 13세기에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북방 십자군의 영향으로 핀란드는 스웨덴 왕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13] 스웨덴은 12세기 초부터 핀란드를 기독교화하기 시작했으며, 에리크 9세는 1155년 또는 1157년에 북방 십자군을 일으켜 투르쿠를 중심으로 한 핀란드 남서부를 지배했다고 전해진다.[124] 그러나 당시의 사료는 없고, 단기간의 무력 행사와 기독교 포교가 이루어졌지만 정복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추측된다.[125] 포교를 한 주교 헨리크|헨리크sv는 농민에게 살해되었고, 에리크 9세와 함께 칭송되었다.[125]
투르쿠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13세기 초에 스웨덴의 세력권에 들어가 가톨릭 주교좌가 설치되었다.[126][123] Hämeenlinna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서쪽의 투르쿠에서 온 가톨릭과 동쪽의 노브고로드 공국에서 온 동방 정교회 양쪽으로부터 포교를 받았다.[126]
스웨덴과 노브고로드 사이에서는 12세기부터 분쟁(스웨덴-노브고로드 전쟁)이 계속되었고, 러시아 측 기록에 따르면 1240년에 네바 강에서 노브고로드의 알렉산드르가 네바 강 전투에서 스웨덴에 승리했다.[126] 스웨덴은 약 9년 후에 반격했고, 13세기 중반까지 Hämeenlinna는 스웨덴의 지배하에 놓였다.[126][127] 13세기 말 스웨덴은 카렐리야 서부를 획득하고, 비푸리에 비보르크 성|비보르크 성sv을 세웠다.[126] 1323년, 오레셰크 강화 조약|오레셰크 강화 조약sv에 의해 카렐리야 지협을 분할하는 형태로 노브고로드와의 경계선이 정해졌다.[126][127]
영토가 확정되면서 핀란드인 지주, 승려, 관료들의 자치 집회가 성립되었고, 1362년에 스웨덴 국왕을 선출하는 8개의 지역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128] 이들은 스웨덴인에게 동화되었지만, 핀란드인의 문화는 농민들 사이에 남았다. 이 시대에 스웨덴에서 이주한 스웨덴인들은 스웨덴계 핀란드인이라고 불리며, 19세기 초까지 이어진 "스웨덴-핀란드"를 형성했다.
3. 2. 칼마르 동맹
1397년 칼마르 동맹이 성립되면서 덴마크의 통치 관여로 스웨덴의 압박은 줄었지만,[129] 에리크 7세의 과도한 세금 부과로 스웨덴과 핀란드 모두 고통받았다.[128] 칼 8세 크누트손은 동맹 왕의 지위를 두고 크리스티안 1세와 다투었고,[130] 칼의 뒤를 이은 조카 Sten Sture the Elder|대 스텐 스투레영어는 스웨덴의 섭정을 맡았다. 대 스텐 스투레는 1471년 크리스티안 1세와 싸워 승리했고, 1483년까지 핀란드를 지배했다.[128][129]1507년 덴마크는 올란드 제도를 공략했고, 1509년에는 포르보와 투르크를 공격했다.[131][132] 핀란드 귀족과 농민은 스투레 가문에 협력했지만, 1520년 Sten Sture the Younger|소 스텐 스투레영어가 전사하고 스웨덴은 항복했다.[130][132] 승리한 크리스티안 2세가 스톡홀름 대학살로 불리는 숙청을 하자, 이에 대항하여 구스타브 바사가 달라나에서 거병했다. 구스타브 바사는 1523년에 스웨덴 왕으로 선출되었고, 뤼베크의 협력으로 덴마크를 물리치고 스웨덴을 독립시켰다.[130][132]
4. 스웨덴 제국 시대 (16세기 ~ 18세기)
1521년 칼마르 연합이 와해되고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스웨덴을 독립 왕국으로 만들면서 핀란드는 스웨덴에 포함되었다. 구스타브 1세의 지배 아래 핀란드에서도 루터교로 개종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13] 1560년 구스타브 바사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이 돌아가며 왕이 되었고, 에리크 14세는 영토 확장 정책을 펴 에스토니아의 탈린을 스웨덴 왕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후 160년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리보니아)를 두고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 모스크바 간에 전쟁이 계속되었다.[13] 핀란드인들은 징집과 높은 세금으로 고생하였고, 1596년에는 '곤봉 전쟁'이라 불리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으나 잔혹하게 진압되었다.[13]
16세기에는 농경지가 확대되었고, 스웨덴 왕실은 사보(Savo) 주의 농민들이 핀란드 중부를 개간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로 인해 원래 있던 사미인들은 밀려나고, 카렐리야인들은 수렵, 어업지대를 빼앗기기도 했다. 1580년대에는 핀란드인 농민들과 카렐리야인들 간에 게릴라식 유혈 충돌도 벌어졌다.[13]
1676년에 스웨덴은 절대왕정이 되었다.[13] 핀란드 중부와 동부에서는 타르가 대규모로 생산되어 수출되었다. 1697년-1699년에는 기후로 인한 기근으로 핀란드 인구의 30%가 사망했다.[13]
1788년 구스타브 3세가 러시아와 전쟁(1788-1790)을 하는 틈을 타 핀란드 장교들이 무장봉기 하기도 했다.[146]
4. 1. 종교 개혁과 행정 개혁
미카엘 아그리콜라는 마르틴 루터에게 수학하고 신약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하여 1551년 출판하는 등 핀란드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다.[13] 1642년에는 성경 전체가 핀란드어로 출판되었다.[13]구스타브 1세 바사의 통치 아래 1550년 헬싱키가 건설되었으나, 초기 200년간은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13] 1637년-1640년과 1648년-1654년에는 페르 브라헤 백작이 핀란드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수많은 개혁과 도시 건설을 통해 핀란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13] 1640년 브라헤 백작의 건의로 크리스티나 여왕은 핀란드 최초의 대학인 오보 아카데미를 투르쿠에 설립했다.[13]
4. 2. 발트 제국으로의 성장
1630년 스웨덴 군이 유럽 중부에서 벌어지던 30년 전쟁에 개입하면서, 핀란드의 경기병대 '하카펠리탓'은 용맹성과 잔혹성으로 이름을 떨쳤다.[13]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끝나면서 스웨덴은 유럽의 강대국(스웨덴 제국)으로 떠올랐다.1637년-1640년과 1648년-1654년에는 페르 브라헤 백작이 핀란드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많은 개혁을 추진하고 여러 도시를 건설하여 핀란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13] 1640년에는 브라헤 백작의 건의로 크리스티나 여왕이 핀란드 최초의 대학인 오보 아카데미(Åbo Akademi)를 투르쿠에 설립했다.[13] 1642년에는 성경 전체가 핀란드어로 출판되었다.[13]
그러나 높은 세금, 계속되는 전쟁, 소빙하기로 인한 추위는 핀란드인들에게 힘든 시기를 안겨주었다. 1655년-1660년 전쟁으로 핀란드 군인들은 리보니아, 폴란드, 덴마크 전장에 투입되었다.[13]
4. 3. 대북방 전쟁과 러시아의 부상
대북방 전쟁(1700-1721)에서 핀란드는 스웨덴의 칼 12세의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인해 모스크바의 침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18세기에는 모스크바 군대에 점령당했고, 우시카우풍키 조약을 통해 비푸리를 포함한 핀란드 남동부 지역이 모스크바에 넘어갔다.[13] 이 전쟁으로 스웨덴은 강대국의 지위를 잃었고, 모스크바가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다. 당시 스웨덴은 절대 왕정이 끝나고 입헌 군주제가 시행된 상태였다.5. 러시아 제국 시대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중 1808년 핀란드 전쟁에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군대에 의해 핀란드가 점령되었다. 이후 핀란드는 1917년까지 제정 러시아의 속령인 핀란드 대공국이 되었다. 1812년에는 카렐리야가 핀란드에 반환되었다.
이 기간 핀란드 농민들은 러시아 농노들과 달리 자유로웠는데, 이는 구스타브 3세의 1772년 헌법이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에는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19세기에는 핀란드 민족주의가 부흥했다. 중세에는 독일어, 라틴어, 스웨덴어가, 16세기와 17세기 이후에는 스웨덴어가 핀란드의 행정과 교육에서 주요 언어로 쓰였지만, 핀란드어 사용이 증가했다. 스웨덴어를 쓰던 권력층은 핀란드어와 핀란드 문화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1906년에는 보통 선거제로 선출되는 일원 국회가 출범했는데, 유럽 최초로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
5. 1. 핀란드 대공국
나폴레옹 전쟁 중 1808년 핀란드 전쟁에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군대가 핀란드를 점령했다. 이후 핀란드는 1917년까지 러시아 황제를 대공으로 하는 핀란드 대공국이 되었지만, 구스타브 3세의 1772년 헌법이 유지되어 핀란드 농민들은 러시아 농노들과 달리 자유를 누렸다.[31] 1812년에는 카렐리야가 핀란드에 반환되었고, 19세기에는 산업화가 시작되었다.19세기 핀란드에서는 민족주의가 부흥했다. 중세에는 독일어, 라틴어, 스웨덴어가, 16세기와 17세기 이후에는 스웨덴어가 핀란드의 행정과 교육에서 주요 언어로 사용되었지만, 민족주의와 함께 핀란드어 사용이 증가했다. 스웨덴어를 사용하던 권력층은 핀란드어와 핀란드 문화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엘리아스 뢴로트는 1835년-1849년에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31] 1892년 핀란드어는 스웨덴어와 동등한 공식 지위를 얻었고, 곧 정부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1906년에는 보통 선거제로 선출되는 일원 국회가 출범했는데, 유럽 최초로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31]
5. 2. 민족주의의 부흥
19세기 핀란드에서는 민족주의 부흥이 일어났다. 엘리아스 뢴로트는 1835년-1849년에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121] 1892년 핀란드어는 드디어 스웨덴어와 대등한 공식 지위를 얻게 되었고, 곧 핀란드어가 정부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중세에는 독일어, 라틴어, 스웨덴어가, 16세기와 17세기 이후에는 스웨덴어가 핀란드의 행정과 교육에서 주요 언어로 쓰였지만, 핀란드어가 쓰이는 비중은 민족주의와 함께 커졌다. 스웨덴어를 쓰던 권력층들은 핀란드어와 핀란드 문화를 장려하기 시작했다.1807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틸지트 조약에서 나폴레옹의 대영국 대륙 봉쇄에 참여하는 대가로 핀란드 영토 획득을 승인받았다. 1808년 러시아 제국은 선전 포고(핀란드 전쟁)를 했고, 핀란드인들은 스웨덴인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지만, 핀란드군은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스웨덴군은 러시아군에 대패하여 궤멸되었고, 1809년 봄에 러시아군은 핀란드 전역을 제압했다. (프레데릭스하메 조약). 알렉산드르 1세는 핀란드 대공이 되었고, 핀란드를 입헌 군주제의 대공국(핀란드 대공국)으로 만들었다. 내정은 핀란드인이 담당했고, 공용어는 스웨덴어였으며, 이후 핀란드인들이 염원하던 핀란드어가 추가되었다. 개명적인 계몽 군주였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자유의 시대"를 구가하며, 핀란드인의 민족적 기초가 착실히 다져졌다. 지금도 핀란드인들은 알렉산드르 2세를 존경하며, 그의 동상과 이름을 딴 알렉산테린 거리(Aleksanterinkatu)가 유명하다. 그러나 문화도 종교도 이질적인 러시아인에게 지배당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족으로서 독립된 정신은 명실상부하게 확립되었고, 핀란드 문화도 정점에 달한다. "우리는 스웨덴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인이 될 수도 없다. 그래, 핀란드인으로 살아가자 (Ruotsalaisia emme enää ole, venäläisiksi emme voi tulla; meidän täytyy olla suomalaisia.)"라고 읊어진 것은 이때였다. 1848년 유럽 혁명(1848년 혁명)의 해, 덴마크에서 절대 왕정이 붕괴하고 민주주의가 성립되자 핀란드인들 사이에서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과 민족주의가 높아졌고, 학생 축제에서 "우리 땅"이 불려졌다. 민주주의가 침투하고 있는 서쪽과 절대 왕정을 유지하는 동쪽이라는 대비 아래, 핀란드인들 사이에서 북유럽으로의 복귀에 대한 여론이 강해지게 되었다.(범스칸디나비아주의)
5. 3. 러시아화 정책

핀란드의 러시아화 정책(1899~1905년 및 1908~1917년, 핀란드어로는 sortokaudetfi/sortovuodetfi ('억압의 시기/해')라고 불림)은 핀란드 대공국의 특별 지위를 제한하고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제국에 완전히 통합하려는 러시아 차르의 정책이었다.[64] 핀란드인들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소극적 저항과 핀란드 문화적 정체성 강화로 맞섰다.[65]
1871년 독일 제국 성립 이후, 러시아는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며 제국 내 각 민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894년 러불 동맹으로 러시아와 독일의 관계가 악화되자, 러시아는 다가올 독-러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강경책을 더욱 강화했다.
1899년 니콜라이 2세가 서명한 2월 칙령은 핀란드인의 자치를 박탈하고 핀란드어 사용을 금지했으며, 공용어로 러시아어를 강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66]
- 1899년 2월 선언: 제국 정부가 핀란드 지역 입법 기관의 동의 없이 핀란드를 통치할 권리를 주장.
- 1900년 언어 선언: 러시아어를 핀란드의 행정 언어로 지정.
- 1901년 징병법: 핀란드 군대를 제국 군대에 편입시키고 핀란드 징집병을 러시아 훈련소로 보냄.
20세기에 들어 러시아 제국 내 각 민족의 민족 의식이 높아졌고, 강압적인 정책은 오히려 제국 내 혼란을 야기했다. 핀란드인 역시 민족 의식을 자각하고 러시아에 대한 반발을 강화했다. 러일 전쟁 중인 1904년 6월 17일, 핀란드 민족주의자 오이겐 샤우만(Eugen Schauman)이 핀란드 총독 니콜라이 보브리코프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47] 러일 전쟁 이후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2세는 "핀란드의 자치권 폐지 선언"을 철회했다.
6. 20세기: 독립과 내전,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7년, 핀란드는 독일 제국의 공국인 헤센카셀(Hessen-Kassel)가를 핀란드의 왕가로 받아들여 독일로부터 책봉을 받는 형식상의 제후국이 되었다. 1918년에는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핀란드는 좌우 진영으로 갈라져 핀란드 내전을 치렀다. 이 내전은 핀란드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짧은 기간 안에 공산주의·무정부주의 연합 반란 세력(적군)이 패배했지만, 핀란드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69]
핀란드 정부는 반란 세력 진압에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았으나, 그해 11월 11일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독일의 위성 국가가 될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핀란드는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핀란드와 소련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특히 내전 이후 핀란드 내에는 반공 감정이 강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핀란드는 소련과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 동유럽, 북유럽의 일부를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이 의정서에서 핀란드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 이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발트 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에게도 영토 일부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핀란드는 이를 거절하였고, 1939년 겨울 전쟁이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소련은 발트 3국과 마찬가지로 핀란드도 간단히 점령한다는 계획이었으나, 핀란드는 국가의 생존을 걸고 저항하였다.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장군의 지휘 아래 핀란드는 선전했지만, 1940년 끝내 패배하여 원래 소련의 요구보다 많은 영토를 내주어야 했다.
1941년-1944년에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영토 회복을 위한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 (일명 '계속 전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영토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소련의 반격에 다시 잃었다. 결국 1944년에 핀란드는 소련에게 영토를 더 내어주는 정전 협정을 맺어 소련은 과거 휴전 조약에 따른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더불어 핀란드 동부 거의 대부분 영토를 병합하였다. 1944년-1945년에는 같은 편이던 독일군을 핀란드 북부에서 몰아내기 위한 라플란드 전쟁이 벌어졌다.[81][82]
6. 1. 핀란드 독립 선언
러시아 2월 혁명 이후 핀란드는 새로운 핀란드 원로원과 핀란드 의회와 동일한 권력 분배를 가진 연립 내각을 얻었다. 1916년 총선을 기반으로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근소한 다수를 차지했고, 사회민주당 출신 오스카리 토코이가 총리가 되었다. 새 원로원은 러시아 임시 정부와 협력하려 했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핀란드는 차르의 퇴위 이후 러시아와의 인적 동군 연합이 종료되었다고 간주했다. 핀란드인들은 차르의 후임자로 임시 정부의 권한을 인정하여 새로운 총독과 원로원을 임명하는 것을 수용함으로써 임시 정부를 사실상 인정했지만, 차르의 권한이 핀란드 의회로 이전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러시아 제헌 의회에서 해결할 것을 제안했다.핀란드 사회민주당에게 부르주아는 핀란드의 독립과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으로 가는 길 모두에서 장애물처럼 보였다. 토코이 원로원의 비사회주의자들은 의회의 대부분 비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 제안(소위 "권력 법안")이 너무 광범위하고 도발적이라고 거부했다. 이 법안은 핀란드의 국내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한했지만, 국방 및 외교 문제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권한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임시 정부에게 이것은 너무 과격하여 의회의 권한을 초과했고, 따라서 임시 정부는 의회를 해산했다.
새로운 선거는 비사회주의자들에게 다수를 차지할 기회를 약속했고, 그들은 이를 통해 러시아와의 이해를 맺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비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당의 권력이 커져 선거권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이나 토지 개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러시아 임시 정부와 협력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다수는 임시 정부가 의회를 해산할 권리가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권력 법안을 고수했고 의회 해산 포고 공포에 반대했지만, 비사회주의자들은 이를 공포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 권력 법안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사회민주당은 원로원에서 탈퇴했다. 1917년 8월 여름 휴회 이후 의회가 다시 소집되었을 때 권력 법안을 지지하는 그룹만 참석했다. 러시아 군대가 회의장을 점거했고, 의회는 해산되었으며,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는 (근소한) 비사회주의자 다수와 순수한 비사회주의자 원로원이었다. 권력 법안의 탄압과 핀란드 비사회주의자와 러시아 간의 협력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큰 쓴맛을 불러일으켰고 수십 건의 정치적 동기 부여 공격과 살인을 초래했다.


1917년 10월 혁명은 핀란드 정계를 뒤집어 놓았다. 이제 의회의 새로운 비사회주의 다수는 완전한 독립을 원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점차 소비에트 러시아를 따라야 할 본보기로 여기게 되었다. 1917년 11월 15일, 볼셰비키는 러시아 민족에게 완전한 분리 권리를 포함한 자결권을 선언했다. 같은 날 핀란드 의회는 핀란드에서 일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러시아와 핀란드의 전개 상황에 우려한 비사회주의 상원은 의회가 핀란드의 독립을 선언할 것을 제안했고, 이는 1917년 12월 6일 의회에서 투표로 결정되었다. 12월 18일(그레고리력 12월 31일) 소비에트 정부는 핀란드의 독립을 승인하는 법령을 발표했고, 12월 22일(1918년 1월 4일)에는 최고 소비에트 행정 기관(VTsIK)의 승인을 받았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지체 없이 뒤를 이었다.
6. 2. 핀란드 내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핀란드는 좌우 진영으로 나뉘어 1918년 핀란드 내전을 겪었다. 이 내전은 핀란드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된다.[69]
내전은 백군과 적군 간의 대립이었다. 백군은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중상류층, 농부, 토지 소유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핀란드 북부 지역을 지배하며 보수적인 시각으로 사회주의를 거부했다. 반면, 적군은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도시 노동자와 토지가 없는 농촌 소작농으로 구성되었으며,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을 선포하고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급진적인 시각을 가졌다.[69]
제1차 세계 대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백군은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아 적군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스웨덴은 중립을 지켰고, 러시아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내전 결과, 약 37,000명이 사망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포로 수용소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 내전 이후 백군 농민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 핀란드의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다.
6. 3. 제2차 세계 대전
핀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과 두 차례 전쟁을 치렀다. 1939년 8월, 나치 독일과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어 핀란드를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합의했다. 소련은 핀란드에 영토 일부를 요구했으나 핀란드는 이를 거절했고, 1939년 11월 소련의 침공으로 겨울 전쟁이 시작되었다.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장군의 지휘 아래 핀란드는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1940년 3월 모스크바 강화 조약을 통해 결국 영토 일부를 잃었다.[77]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계속 전쟁이 발발했다. 핀란드는 독일과 협력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 했으나, 1944년 소련의 반격으로 다시 영토를 잃고 정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핀란드는 북부 지역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한 라플란드 전쟁을 치렀다.[81][82]


핀란드는 소련에 점령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냈지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비푸리를 포함한 영토를 잃었다.[84] 핀란드는 1944년 9월 소련과 별도의 휴전 협정을 맺어, 전쟁 후에도 독립을 유지한 소련의 인접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핀란드는 소련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서유럽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발전시켰다. 소련과의 원만한 무역 관계는 핀란드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유지하며 북유럽 국가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외교적으로는 중립 정책을 선언하여 핀란드화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했다.
1995년 1월 1일 핀란드는 오스트리아, 스웨덴과 함께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였다.[54] 2023년 4월 4일에는 31번째 나토 가입국이 되었다.
7. 1. 냉전 시대의 중립 정책
핀란드는 냉전 시대 동안 민주적인 헌법과 자유 경제를 유지했다. 소련과의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을 통해 핀란드는 독일 또는 그 동맹국의 공격이 있을 경우 소련과 협의하고 지원을 받을 의무를 지녔다. 그러나 이 조약은 자동적인 소련의 개입을 의미하지는 않았다.[54] 핀란드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며 누구와도 동맹을 맺지 않았고, 이는 핀란드화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했다.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대통령은 소련이 핀란드를 통해 공격받지 않도록 하는 것을 외교 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핀란드는 북유럽 이사회 국가들과 1952년 여권 동맹을 체결하여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되었고, 많은 핀란드인들이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았다. 핀란드는 1955년 국제 연합에 가입하고, 포르칼라 반도를 반환받았다.
핀란드는 서방 세계와 소련 사이의 회색 지대에 위치하여 냉전 첩보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KGB와 CIA 모두 활동했다.[90][91][92][93][94] 핀란드 보안 정보국(''SUPO'', Suojelupoliisi)은 방첩, 대테러 및 국가 안보를 담당했다.[95] 핀란드는 유럽 자유 무역 연합 준회원(1961년), 정회원(1986년), 유럽 공동체와의 협정(1973년)을 통해 자유 무역에 참여했다.
핀란드는 헬싱키 협정과 OSCE 창설에 기여하며 냉전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했다.[54]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을 개최하고, 소련에 대한 배상을 완료한 후 복지 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그러나 소련의 내정 간섭과 쿠데타 위협으로 국내 정세는 불안정했으며, 대소련 비판은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핀란드의 독립 유지를 위한 노력이었으며, "핀란드화"라는 용어를 낳았다.
7. 2. 경제 발전과 복지 국가 건설
전후 핀란드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소련과의 무역 관계는 핀란드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서유럽과의 관계가 더 긴밀했다. 핀란드는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협력하면서도 외교적인 중립 정책을 유지했는데, 이를 핀란드화라고 부르기도 한다.1860년 이전에는 해외 무역 회사와 토지 소유주들이 산업 투자를 위한 자본을 축적했다. 1860년 이후 정부는 경제법을 자유화하고 항구, 철도, 전신선 건설 등 인프라 구축에 힘썼다. 국내 시장은 작았지만, 1860년 이후 산림 자원과 농촌 노동력을 활용하는 수출 산업이 빠르게 성장했다. 산업화는 19세기 중반 임업에서 시작되어 산업, 광업, 기계 분야로 확장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핀란드의 번영에 기여했다.
산업화는 헬싱키에서 시작되었다. 알프레드 킬만(Alfred Kihlman, 1825–1904)은 루터교 목사이자 학교 교장으로, 금융가이자 의회 의원이었다. 그는 1869년 유한 파트너십을 조직하여 1871년 노키아 회사 설립을 이끌었다.[55] 1890년 이후 산업 생산성이 정체되었지만, 러시아화는 기계 분야에서 큰 러시아 시장을 열었다.
1940년 이전 핀란드는 가난한 농업 국가였지만, 1950년까지 노동자의 절반이 농업에 종사했고 도시 인구는 3분의 1에 불과했다.[99] 제조업, 서비스업, 무역 분야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면서 도시로 인구가 빠르게 이동했다. 여성 1인당 출산율은 1947년 3.5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1973년 1.5명으로 감소했다.[99] 베이비 붐 세대가 노동 시장에 진입하면서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고, 많은 핀란드인들이 스웨덴으로 이민을 갔다.[99]
1990년대에는 농업 노동자들이 다른 직업으로 옮겨갔고, 소규모 농장주들만 남았다.[100] 2000년에는 사회 구조가 노동자 계급, 중산층, 상위 계층으로 구성되었고, 이들 간의 사회적 경계는 뚜렷하지 않았다. 이는 대중 문화, 국제적 기준, 사회 이동성, 복지 국가의 영향이었다.[101]
복지 시스템은 의무적인 노령 및 장애 보험을 제공하고,[102] 국가 정부는 실업 보험, 출산 수당, 가족 수당, 보육 시설을 제공한다. 건강 보험은 외래 진료 비용의 대부분을 보장하며, 1972년 국민 건강법에 따라 모든 지방 자치 단체에 무료 건강 센터가 설립되었다.[10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핀란드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사회·정치적 안정을 겪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업 사회에서 높은 생활 수준을 갖춘 기술 선진국으로 변모했다. 1991년 불황을 겪었지만, 마셜 플랜 거부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노력과 스웨덴의 원조로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을 개최하고 복지 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냉전 시대에는 중립을 유지하며 노르딕 밸런스를 구성했지만,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과 소련의 내정 간섭으로 불안정한 요소가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 핀란드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1995년 유럽 연합에 가입하여 유럽 연합 및 북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정보 통신 산업에서 활로를 찾은 핀란드는 IT 혁명에 매진하여 21세기 초 세계 최고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7. 3. 유럽 연합 가입
1995년 1월 1일 핀란드는 오스트리아, 스웨덴과 함께 EU에 가입하였다.[108] 핀란드를 EU로 이끈 것은 당시 집권했던 중앙당-보수당 에스코 아호 정부의 주요 업적으로 여겨진다.1991년까지 마우노 코이비스토 대통령과 3대 주요 정당 중 두 곳인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은 유럽 연합 가입에 반대하고 유럽 경제 지역 조약에 참여하는 것을 선호했다.[108] 그러나 스웨덴이 1991년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고 그 해 말에 소련이 해체된 후 핀란드는 1992년 3월에 EU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가입 절차는 격렬한 대중 토론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의견 차이는 정당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세 정당 모두 연합 가입을 지지했지만, 모든 정당의 구성원들이 가입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EU 가입에 대한 국회의 결정 전에 1994년 4월 16일에 자문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으며, 이 투표에서 56.9%가 가입에 찬성했다. 가입 절차는 1995년 1월 1일에 완료되었다.
경제 정책에서 EU 가입은 많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인들이 이자율 설정을 담당했던 반면, 핀란드 은행은 핀란드가 유로존에 가입할 때까지 인플레이션 목표를 설정하는 임무를 받았다.[105] 파보 리포넨 총리의 두 차례의 연속적인 정부 (1995–2003) 동안 여러 대형 국영 기업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민영화되었다.[109]
7. 4. 21세기 핀란드
1995년 1월 1일 핀란드는 오스트리아, 스웨덴과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54] 2023년 4월 4일에는 31번째 나토 가입국이 되었다.8.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핀란드의 안보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8. 1. NATO 가입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핀란드는 오랫동안 유지해 온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NATO 가입을 추진하게 되었다.[148]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외무부는 핀란드가 NATO 가입을 시도할 경우 "군사적, 정치적 결과"를 경고했지만,[115] 핀란드 내에서 NATO 가입에 대한 여론 지지율이 크게 상승하였다.[3]2023년 4월 4일, 모든 NATO 회원국이 핀란드의 가입 신청을 비준하면서 핀란드는 31번째 NATO 회원국이 되었다.[116] 2024년 3월 1일에는 NATO를 지지하는 알렉산데르 스투브가 핀란드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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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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