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중국의 황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중국의 황제는 중국 역대 왕조의 군주를 칭하는 용어로,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처음 사용했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로 여겨져 제정일치 권력을 행사했으며, 황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으나, 황제 개인의 역량, 왕조,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황제는 세습되었으며, 장자 상속이 일반적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경우 황태후가 섭정했다. 1912년 선통제의 퇴위로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황제 제도는 종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국의 황제 - 한림아
    한림아는 유복통에 의해 소명왕으로 추대되어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주원장에게 살해된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일원이다.
  • 중국의 황제 - 진우량
    진우량은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에 가담하여 서수휘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대한을 건국했으나 주원장과의 파양호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한 인물이다.
중국의 황제
기본 정보
진 시황
진 시황, 중국 최초의 황제 (기원전 221–210년). 19세기 중반 묘사
공식 칭호황제
원어 명칭(Huángdì)
스타일폐하 (陛下, Bìxià)
통치 영역중국
수도자금성 (1406년 - 1912년) 등
시작기원전 221년
종료1912년 2월 12일
전국옥새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스타일폐하 (陛下), 황상 (皇上), 성상 (聖上), 천자 (天子), 대군 (大君), 어가 (御駕), 지존 (至尊), 만승 (万乗), 만세 (萬歲)
최초의 군주진 시황
마지막 군주푸이
기타 정보
잠재적 계승자진윈장
스타일 정보
호칭폐하 (陛下)
영어 스타일His Majesty the Emperor (황제 폐하), His Imperial Majesty (H.I.M.) (황제 폐하)

2. 역사

중국의 황제는 진 시황제가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기존의 칭호 대신 처음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전설상의 삼황오제에서 글자를 따와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었다.[28] 황제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로 여겨졌으며, 이론적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다. 진 시황제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한족 왕조뿐 아니라 몽골족원나라, 만주족청나라와 같은 정복 왕조들도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중국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들은 고유의 등의 칭호와 함께 중국식 황제 칭호를 병용하기도 했다. 황제 제도는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이후 1934년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잠시 부활했으나 1945년 만주국 멸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예외적으로 당나라고종은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30] 중국 황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 권한도 가졌으며, 천명 사상은 황제 통치의 정당성 근거이자 동시에 역성혁명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황제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경우 태상황으로 불리기도 했다.

2. 1. 기원과 초기 역사

진 시황제 암살 시도 (서기 3세기)


중국에서 군주의 전통적인 호칭은 (王)이었다. 주나라 시대에는 천자(天子)만이 왕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주변의 제후들은 오등작에 따라 각기 다른 호칭을 받았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 천자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여러 제후국들이 스스로 왕을 칭하기 시작하여 결국 모든 국가의 군주가 왕을 자처하게 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왕이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후, 기존의 왕과 차별화되는 더 높은 권위를 상징하는 새로운 칭호를 원했다. 이에 따라 전설상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각각 '황'(皇)과 '제'(帝) 글자를 따와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새롭게 만들었다.[28] 이전까지 '황'(皇)은 신화 속 인물이나 신격화된 조상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주로 사용되었고,[6] '제'(帝)는 본래 제정일치 사회였던 상나라에서 숭배 대상인 조상신을 일컫는 호칭이었다.[29] 진 시황제는 이 두 글자를 합쳐 왕보다 높은 권위를 나타내는 새로운 군주 칭호로 삼았으며,[28] 이후 '제'는 황제의 약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황제의 아들은 왕이나 친왕으로 봉해졌다.

중국의 황제는 이전 주나라의 왕처럼 하늘의 명을 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 즉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로 여겨졌다.[5] 진 시황제가 황제 칭호와 관련 제도를 정립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의 군주를 황제라 칭하였다. 이는 한족이 세운 왕조뿐만 아니라, 이후 중국을 통치하게 된 몽골족원나라만주족청나라와 같이 다른 민족이 세운 정복 왕조들도 중국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채택한 방식이었다. 이들은 기존에 등 고유한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중국식 황제 칭호를 함께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쿠빌라이 칸은 몽골의 카간인 동시에 중국의 황제이기도 했다.

황제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경우 태상황(太上皇)으로 불렸는데, 이 관행은 진 시황제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후에 이 칭호를 추존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평민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황제인 자신에게 예를 갖추는 것을 원치 않아, 처음으로 생존한 아버지에게 태상황 칭호를 부여했다고 전해진다.[7][8]

2. 2. 중국의 황제



중국의 황제는 진 시황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주나라 시대에는 천자만이 (王)을 칭했으나,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며 여러 제후들이 왕을 자칭하게 되었다. 중국을 다시 통일의 시황제는 기존의 왕과 차별화되는 칭호를 원했고, 삼황오제에서 '황(皇)'과 '제(帝)'를 따와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었다.[28] '제(帝)'는 본래 상나라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조상신을 일컫는 말이었으나[29], 황제 칭호가 만들어진 후 황제의 약칭으로도 사용되었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 여겨졌으며[5], 하늘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았다는 천명(天命) 사상에 기반했다.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황제 칭호와 각종 용어를 정립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의 군주를 황제라 칭하였다. 이는 한족이 세운 왕조뿐 아니라,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원나라, 만주족청나라와 같은 비한족계 정복 왕조들도 마찬가지였다.[19] 이들은 고유한 등의 칭호와 함께 중국식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쿠빌라이 칸은 몽골의 카간이면서 동시에 중국의 황제였다. 황제 제도는 1912년 청나라 멸망으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1934년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서 잠시 부활했다가 1945년 만주국 멸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예외적으로 당나라고종은 황제 대신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30]

중국의 황제는 이론적으로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황제의 말은 신성한 명령(성지, 聖旨)으로 여겨졌고, 그의 서면 포고는 '상유(上諭)'라 불렸다. 황제는 모든 평민, 귀족, 심지어 황족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었다. 또한 황제는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 권한도 독점하여, 유럽 중세의 교황과 세속 군주의 역할이 분리된 것과 달리 제정일치적 성격을 가졌다. 이러한 천명 사상은 황제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황제가 덕을 잃고 폭정을 행하면 하늘이 그 명을 거두어 다른 이에게 넘긴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유교에서는 이를 강조했으며,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따라 황제의 통치가 잘못되면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발생한다고 믿어 황제의 권력을 도덕적으로 제약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 황제의 권력은 시대와 황제 개인의 역량에 따라 크게 달랐다. 진시황, 한 고조, 당 태종, 강희제 등 왕조를 창건하거나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한 황제들은 비교적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반면, 황제가 어리거나 무능할 경우, 황태후나 외척, 강력한 신하, 혹은 환관(예: 명나라위충현)이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다.[16] 송나라 시대에는 재상의 권한이 황제를 능가할 정도로 강하기도 했다. 명·청대 황제의 권력은 동시대 조선 국왕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전제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이는 조선이 군신공치(君臣共治) 이념 아래 신하들의 발언권이 비교적 보장된 것과 달리, 중국 황실은 황제 중심의 권력 구조가 더욱 강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통치 방식에는 법가 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황제의 지위는 반란으로 폐위되지 않는 한 세습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황후의 맏아들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황후에게 아들이 없거나 여러 황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해 계승 분쟁이 자주 발생했다. 이를 막기 위해 황제는 생전에 황태자(太子)를 지명하기도 했으나, 때로는 이것이 오히려 정치적 암투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청나라 옹정제처럼 후계자 지명을 비밀리에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가 사후에 공개하는 방식(태자밀건법)도 사용되었다.

살아있는 황제의 아버지는 태상황(太上皇)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칭호는 진 시황제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후에 추증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한 고조 유방이 평민 출신이었던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사용했다.[7][8]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군주는 다수 존재했으며, 그 정확한 숫자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다.[13][12][25] 역사적으로 유명한 황제로는 진 시황제, 한 고조, 한 무제, 수 문제, 당 태종, 쿠빌라이 칸, 홍무제, 영락제, 강희제 등이 있다.[14][26]

2. 3. 황제 권력의 변화

중국 황제의 권력은 황제 개인이나 왕조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이론적으로 황제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로 여겨졌으며, 제정일치적인 성격을 지닌 절대 권력자였다. 유럽처럼 종교 지도자(교황)와 세속 군주가 분리된 것과 달리, 중국 황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권한을 독점한 유일한 존재였다.[29] 황제의 말은 성스러운 조칙인 '성지'(聖旨)로, 그의 서면 선포는 '상유'(上諭)로 불렸으며, 이론상 즉각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황제는 모든 평민, 귀족, 심지어 황실 가족 구성원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 황제에게는 격식을 갖추고 자신을 낮추는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 황제의 권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크게 달랐다. 일반적으로 왕조를 세운 초대 황제들은 강력한 독재 권력을 행사하며 제국을 통합했다. 진 시황제, 한나라고조와 광무제, 당나라의 태종, 쿠빌라이 칸, 청나라강희제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26] 이들은 치세 동안 절대군주로서 중앙 집권적 권력을 확립하고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제의 권력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제약받거나 약화되기도 했다. 유교에서는 천명 사상을 통해 황제가 덕을 잃으면 하늘이 천하를 거두어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고 보아 역성혁명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황제의 실정(失政)이 가뭄, 홍수, 전란과 같은 재앙을 부른다는 천인감응설 역시 황제의 절대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실제 정치 운영에서도 황제는 대부분의 의사 결정을 문관 관료(재상부, 중서성), 군대, 감찰원 등에 위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왕조에서는 재상의 권한이 매우 강해져 황제의 권력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었다.[16] 반면, 한 무제나 명나라홍무제처럼 일부 황제들은 신하들의 권력 강화를 경계하여 고위 관료들을 빈번하게 교체하거나 최고위직을 공석으로 두기도 했다.[15]

황제의 지위는 반란으로 폐위되지 않는 한 세습되었고, 보통 장자 상속 원칙을 따랐다. 이로 인해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황제들이 많았는데, 이 경우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섭정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나라의 여태후, 청나라서태후와 동태후가 대표적인 예이다. 황태후의 세력이 약하거나 외척의 반대가 심할 경우, 조정 대신들이나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특히 환관은 황제의 측근으로서 신임을 얻어 국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명나라위충현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환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때로는 다른 귀족이 섭정으로 권력을 잡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황제의 권력은 조선의 국왕과 비교할 때 훨씬 강력하고 전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군신공치(君臣共治) 이념에 따라 국왕이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함께 정치를 운영하는 구조를 지향했다. 그러나 명나라청나라의 경우, 황제와 신하의 권력 비율은 대략 황제 7, 신하 3 정도로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능지처참과 같은 잔혹한 형벌이 조선에서는 일찍이 금지된 반면, 중국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시행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천자의 절대적인 권위를 과시하려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명나라나 청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나타난 노론 중심의 세도정치처럼 신하가 국왕을 압도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어려웠다.

중국의 황제들은 표면적으로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실제 통치 방식에는 법가적인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파와는 구분되는 지점이다. 황제들은 스스로 다스리는 국가를 성조(聖朝), 즉 성인이 다스리는 이상적인 왕조라고 칭했지만, 현실에서 그들이 행사한 권력은 인간 사이의 평등이나 우애와 같은 가치와는 거리가 먼, 매우 강력하고 절대적이며 권위적인 것이었다.

2. 4. 황제 제도의 종말

청 황제의 황실 기장


1911년, 중국을 입헌 군주제로 전환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황제를 보좌하는 내각 총리 직함이 만들어졌다.

푸이는 선통제로서 1912년 2월 12일 퇴위하면서 2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어져 온 청나라와 황실 전통을 종식시켰다. 이는 신해혁명의 결과로, 중국의 오랜 황제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전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홍헌제라 칭하며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왕조 통치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국내외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83일 만인 1916년 3월 22일 퇴위하며 실패로 끝났다.[3]

푸이는 1917년 군벌 장쉰의 복벽 운동으로 잠시 12일 동안 복위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곧바로 실패하고 다시 축출되었다. 이후 그는 자금성에 머물도록 허락받았으나, 1924년 펑위샹의 쿠데타로 인해 궁에서 쫓겨나 톈진의 일본 조계지로 피신했다. 1934년, 그는 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만주국이 멸망하면서 그는 소련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 치타 등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

1950년, 푸이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도되어 푸순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59년 정식으로 사면되어 석방되었고, 이후 베이징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하거나 문사연구위원회에서 문학과 역사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1967년 사망했다.[9]

현재 청나라 황실 가문인 아이신 교로 가문의 수장이자 명목상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진위장이다. 그는 중국의 여러 지방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활동했으며, 군주제 부활에는 관심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10]

3. 황제의 권력과 권한

황제의 말은 신성한 조칙(聖旨)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서면 선포는 '상유(上諭)'라고 불렸다. 이론적으로 황제의 명령은 즉시 복종해야 했다. 그는 모든 평민, 귀족, 황실 가족 구성원보다 위에 있었으며, 황제에게 보내는 연설은 가장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라 할지라도 항상 격식을 갖추고 자기를 낮추는 표현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 황제의 권력은 황제 개인과 왕조에 따라 크게 달랐다. 일반적으로 왕조 교체 과정에서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황제는 비교적 강력한 독재 권력을 행사하며 제국을 통합했다. 예를 들어 진시황, 한나라의 고조와 광무제, 당나라태종, 쿠빌라이 칸, 청나라강희제 등이 이러한 황제들이었다.[15] 이들은 치세 동안 절대 군주로서 군림하며 중앙 집권적인 국가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권력을 통합하고 유지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 중 하나는 황제의 가족 구성원들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세대에 걸쳐 지방 통치자로 임명된 가족 구성원들 간의 유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었고, 그들의 충성심을 보장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이들이 징수한 세금은 중앙 정부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한 무제 시대에 두드러졌는데, 그는 자신의 조상인 고조에 의해 봉해졌던 거의 모든 황실 친척들의 특권을 박탈하고 제거하기까지 했다.[15]

일부 매우 활동적인 군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황제는 의사 결정을 문관 관료(주로 재상부중서성), 군대, 그리고 특정 시기에는 감찰원에 위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무제나 명나라홍무제와 같이 권력 유지에 민감했던 황제들은 고위 정부 관료들을 자주 교체하거나 최고위직을 공석으로 두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반면, 다른 시기에는 특정 문관 관료가 황제보다 더 큰 실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송나라 시대에는 재상의 권력이 매우 강했다.[16]

황제의 지위는 반란으로 폐위되지 않는 한 항상 세습되었으며, 보통 장자 상속 원칙을 따랐다. 이 때문에 많은 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어린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에는 황태후(황제의 어머니)가 외척과 함께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실제로 중국 황실 역사에서 여성 통치자의 대부분은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으로 통치하며 권력을 잡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한나라의 여태후와 청나라 시대에 공동 섭정을 했던 서태후와 자안 황태후가 있다. 만약 황태후가 정치적으로 약하거나 그녀의 친족 세력이 강한 반대에 부딪힐 경우, 조정의 신하들이나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환관들은 황제가 종종 그들을 측근으로 신뢰하여 많은 궁정 문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권력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일부 시기에는 환관들이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는데, 명나라 시대의 위충현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환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때로는 다른 귀족들이 섭정으로서 권력을 잡기도 했다.

중국 황제가 실제로 통치하는 지역의 범위는 왕조에 따라 달랐다. 남송 시대처럼 동아시아의 정치적 권력이 여러 정부로 분열된 경우에도, 단 하나의 정통성 있는 통치자만이 존재한다는 정치적 허구는 유지되었다.

4. 황제의 계승

황제의 지위는 기본적으로 세습되었으며, 반란으로 폐위되지 않는 한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계승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일반적으로 장자 상속 원칙이 적용되었다.

대부분의 왕조에서는 황후가 낳은 첫째 아들, 즉 적장자(嫡長子)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였다. 만약 황후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 황제가 다른 후궁(측실)에게서 얻은 아들이 계승할 수도 있었는데, 이때 황제의 모든 아들은 생모와 관계없이 법적으로 황후의 아들로 간주되었다. 황제에게 아들이 전혀 없을 경우에는 남동생이 황위를 잇는 예도 있었다.

하지만 황후 소생 장남의 계승 원칙이 항상 순조롭게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많은 황제가 여러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아들들 사이에서 황위 계승을 둘러싼 경쟁이나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사후 분쟁을 피하고자 황제는 생전에 후계자인 황태자(太子)를 미리 지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황태자를 명확히 지명하더라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황태자가 황제에 대해 음모를 꾸미거나, 형제들끼리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는 일이 발생하여 지명이 무시되기도 했다. 청나라옹정제와 같은 일부 황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황태자 지명 제도를 없애고, 후계자 이름을 적은 문서를 상자에 넣어 봉인했다가 자신이 사망한 뒤에야 열어 발표하게 하는 방식(태자밀건)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본의 천황제와는 달리, 중국의 정치 이론에서는 통치 가문, 즉 왕조가 바뀔 수 있음을 인정했다. 이는 천명(天命) 사상에 기반한다. 천명 사상에 따르면, 황제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로서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지만, 이는 황제가 백성을 잘 섬기는 동안에만 유효하다. 만약 홍수나 기근 같은 자연재해가 반복되거나 통치의 질에 문제가 생겨 백성이 고통받으면, 황제는 천명을 잃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에 반란이 일어나 왕조를 교체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중국의 유일한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의 18세기 묘사


이러한 천명 사상은 왕조 교체 또는 왕조 순환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원칙 덕분에 한나라고조명나라의 홍무제처럼 평민 출신도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었고,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와 같이 외부 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정복 왕조를 세우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했다. 누가 천명을 받았는지는 통치자의 도덕적 청렴성과 백성을 아끼는 자비로운 리더십으로 판단되었다.

중국 역사상 합법적인 여성 황제는 당나라를 잠시 자신의 무주 왕조로 대체했던 측천무후 한 명뿐이다. 그러나 황태후와 같이 섭정으로서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 역할을 한 여성은 역사적으로 다수 존재했다. 주요 사례로는 한나라의 여태후, 송나라의 유태후, 그리고 청나라의 서태후 등이 있다.

5. 황제의 칭호와 의전

진 시황이 전국 시대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전까지, '황(皇|황lzh)'과 '제(帝|제중국어)'는 중국 신화나 선사 시대의 전설적인 통치자들, 특히 삼황오제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황'은 신과 같은 권능을 지닌 존재를, '제'는 상나라에서 숭배하던 신격화된 조상을 의미했다.[6] 진 시황은 자신을 이전의 '왕(王)'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여기고, 이 두 글자를 합쳐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 즉 첫 번째 황제라 칭했다. 이 칭호는 신성한 군주라는 의미를 내포했으며[6], 황제는 하늘의 명을 받아 통치하는 '천자(天子)'로도 불렸다.[5]

황제는 법적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가졌으므로, 신하들은 황제 앞에서 최대한의 존경을 표해야 했다. 황제의 옥좌에 나아갈 때는 삼배구고두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대화 시 자신을 황제와 동등하게 여기는 것은 금지되었다. 황제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었으며(避諱), 심지어 황제의 어머니조차 황제를 직접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황제'나 '兒|얼중국어'(아들)이라고 칭해야 했다. 글을 쓸 때도 황제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다른 글자로 대체하거나 획을 생략하기도 했다.

황제를 직접 부를 때는 '陛下|폐하중국어', '皇上|황상중국어', '聖上|성상중국어', '天子|천자중국어' 등의 존칭을 사용해야 했으며, '당신'과 같은 평범한 2인칭 대명사는 사용할 수 없었다. 신하들은 황제를 '萬歲爺|만세야중국어'라고 부르기도 했다. 황제는 자신을 '朕|짐중국어'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본래 고대 중국어의 1인칭 대명사였으나 진시황 이후 황제 전용의 칭호가 되었다. 신하들 앞에서는 스스로를 낮추어 '寡人|과인중국어'이나 '孤|고중국어'라고 칭하기도 했다. 황제를 3인칭으로 언급할 때는 '皇帝陛下|황제 폐하중국어'나 '當今皇上|당금황상중국어'이라고 했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대청 황제 폐하, 황상, 성상, 천자, 만세야'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때로는 황제를 에 비유하여 완곡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황제는 통치 기간을 나타내기 위해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한 무제가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명나라 이전까지는 황제가 재위 중에 여러 번 연호를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는 한 황제가 하나의 연호만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황제들은 종종 연호로 불린다(예: 홍무제).

황제가 사망하면 사후에 묘호(廟號)나 시호(諡號)가 주어졌다. 시호는 황제의 생전 업적을 평가하여 신하들이 올리는 존호로, '孝武皇帝|효무 황제중국어'[27]와 같은 형식이다. 묘호는 황제가 종묘에 모셔질 때 사용되는 칭호로, 왕조의 창건자나 중흥 군주에게는 '祖|조중국어', 그 외 황제에게는 '宗|종중국어'을 붙였다. 당나라 이후 시호가 점점 길어지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워지자, 묘호가 황제의 업적을 평가하고 사후에 부르는 호칭으로 더 널리 쓰이게 되었다. 때로는 묘호와 시호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예: 강희제의 '聖祖仁皇帝|성조인황제중국어').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황제에게는 묘호나 시호가 주어지지 않았다(예: 전한의 폐제 유하).

황제의 죽음은 '駕崩|가붕중국어'이라고 표현했으며, 사망 직후의 황제는 '大行皇帝|대행황제중국어'라고 불렀다.

때때로 황제가 즉위했을 때 아버지가 살아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 아버지는 '태상황(太上皇)'으로 불렸다. 이 관습은 진시황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후에 이 칭호를 부여한 것에서 유래했으며, 을 건국한 유방은 평민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원치 않아 생전에 태상황 칭호를 부여했다.[7][8]

6. 황실과 후궁

황실은 황제와 그의 정실 배우자인 황후(皇后중국어)로 구성되었다. 황후는 국모(國母중국어)로 여겨졌다.

황제는 황후 외에도 여러 명의 후궁(嬪妃중국어)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들은 중요도에 따라 계급이 나뉘었다. 황후는 이 후궁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다. 각 왕조마다 후궁의 수와 구성에 대한 규칙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청나라 시대의 후궁 등급과 정원은 다음과 같았다.

등급정원
황후1명
황귀비1명
귀비2명
4명
6명
귀인무제한
상재무제한
답응무제한



법적으로는 황제가 최고 지위에 있었지만, 궁궐 내에서는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皇太后중국어)가 전통적으로 가장 큰 존경을 받았다. 황태후는 황실 내부의 많은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가졌으며, 특히 어린 황제가 즉위했을 때는 섭정으로서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황제의 자녀인 황자(皇子중국어)와 공주(公主중국어)는 태어난 순서에 따라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예: 맏황자, 셋째 공주). 황자들은 성인이 되면 작위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황제의 형제나 숙부들도 법에 따라 조정에서 직책을 맡았으며, 다른 관리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황제는 나이나 세대에 관계없이 항상 황실 내 다른 모든 구성원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였다.

7. 황제와 관련된 논란

전통적인 정치 이론에 따르면 정당한 천자는 한 시대에 오직 한 명만 존재해야 했다. 그러나 삼국 시대와 같이 중국이 여러 세력으로 나뉘었던 분열기에는 누가 진정한 황제인지 가리는 것이 항상 논란거리였다. 예를 들어, 삼국 시대에 조위와 촉한 중 어느 쪽이 정통성을 가졌는지, 또는 송나라가 언제 원나라에게 정통성을 넘겨주었는지 등이 대표적인 논쟁점이다.[11] 이러한 이유로 정통 황제의 정확한 숫자는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청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유럽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진시황부터 강희제까지 150명의 황제가 있었으며[12], 이후 논란의 여지가 없는 8명의 황제를 더하면 진시황부터 마지막 황제 선통제까지 총 158명의 황제가 있었다고 계산된다.

하지만 단순히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던 인물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한 기록에 따르면,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황제를 자칭한 사람은 총 557명에 달하며, 여러 명이 동시에 황제를 주장하는 경우도 많았다.[13] 이자성, 황소, 원술과 같은 인물들은 스스로 황제 또는 천자를 칭하며 자신만의 제국을 세우고 기존 황제의 권위에 도전했다.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합법적인 여성 황제는 당나라를 잠시 중단시키고 자신의 무주 왕조를 세웠던 측천무후 한 명뿐이다. 그러나 황태후의 자격으로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 역할을 했던 여성들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한나라의 여태후, 송나라의 유태후, 그리고 청나라 말기 47년 동안 실권을 행사했던 서태후 등이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현대의 민족 개념을 과거 역사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중국 황제는 한족 출신으로 여겨지지만, 요나라의 거란족, 금나라의 여진족, 원나라몽골족, 청나라만주족과 같이 다른 민족 출신의 황제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들 정복 왕조에 대해, 전통적인 역사관에서는 이들이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천명 사상을 수용하며 중국의 전통적인 황실 의례를 따르는 등 한화(漢化)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신청사학과 같은 수정주의적 관점에서는 민족 간의 상호작용이 훨씬 복잡했으며, 이들 왕조가 기존 중국의 황제 통치 전통과는 다른 독자적인 요소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중국의 전통을 변화시키기도 했다고 주장한다.[19]

8. 같이 보기


  • 중국의 군주 목록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Chinese History Routledge 2017
[2] 웹사이트 German prince’s coup attempt recalls China’s last emperor Aisin-Gioro Puyi, who was reinstated and removed, twice https://www.scmp.com[...] South China Morning Post 2024-09-19
[3] 웹사이트 The legacy of Yuan Shikai, China’s disastrous first president https://thechinaproj[...] China Project 2024-09-19
[4] 웹사이트 Baxter–Sagart Old Chinese Reconstruction http://crlao.ehess.f[...] 2013-12-22
[5] 서적 The Great Empires of the Ancient World Getty Publications
[6] 서적 The Wiley-Blackwell Companion to Chinese Religion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Chichester) 2012-12-22
[7] 문서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ttps://ctext.org/di[...] Sima Qian
[8]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of China
[9] 웹사이트 Puyi https://www.britanni[...] Britannica 2024-09-19
[10] 웹사이트 Just call me Jin, says the man who would be emperor https://www.smh.com.[...] Nine Entertainment 2022-10-02
[11] 문서 Chinese History, a New Manual 2018
[12] 문서 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1687
[13] 서적 The Forbidden City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4] 문서 看版圖學中國歷史 Chung Hwa Book Company
[15] 간행물 Mapping Time in the ''Shiji'' and ''Hanshu'' Tables Brill 2016
[16] 서적 A Dictionary of Official Titles in Imperial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5
[17] 간행물 Historical demography: achievements and prospects
[18] 간행물 Demographic systems in historic China: some new findings from recent research
[19] 웹사이트 Sinicization vs. Manchuness: The Success of Manchu Rule https://ucsdmodernch[...]
[20] 문서 宣統帝の甥であるが、本人は皇帝位は請求しておらず、金姓を名乗り愛新覚羅氏の姓は名乗っていない。よって名目上の皇位請求者ということになる。
[21] 웹인용 清朝皇室后裔 http://www.bj.xinhua[...]
[22] 문서 退位後も溥儀は清室優待条件に基づいて1924年まで称号としての皇帝の肩書を維持した。また、袁世凱が中華帝国 (1915年-1916年)|中華帝国皇帝を称したが短期間で即位を取り消し、溥儀は、1917年に復位を宣言する(張勲復辟)が12日間で取り消し、1934年から1945年までは日本の傀儡として満洲国皇帝を称したが、これらは僭称として扱われることが多い。
[23] 웹사이트 Sinicization vs. Manchuness: The Success of Manchu Rule http://ucsdmodernchi[...]
[24] 서적 The Wiley-Blackwell Companion to Chinese Religion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Chichester) 2012-12-22
[25] 서적 The Forbidden City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6] 문서 看版圖學中國歷史 Chung Hwa Book Company
[27] 문서 一般的には武帝と称されるが、これは漢王朝のほとんどの皇帝が孝〇皇帝という諡号であり、便宜的に省略がなされてきたためである。
[28] 문서 《사기 (역사서)|사기》6권 진시황본기 시황 26년
[29] 서적 中国の歴史 講談社 1974
[30] 문서 上元元年 ~(중략)~ 八月壬辰,皇帝稱天皇,皇后稱天后。(상원 원년 팔월 임진일(역주:율리우스력 674년 9월 20일), 황제가 천황이라 칭하고 황후를 천후라 칭했다.) 《신당서》(新唐書) 〈본기 제3 고종〉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