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시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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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시아는 이베리아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스페인의 자치 지방으로, 라틴어 '갈라이키아'에서 유래되었다. 1978년 자치 지역으로 인정받았으며, 4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선사 시대부터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 시대를 거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갈리시아어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경제는 어업, 제조업, 관광 등 다양한 분야로 이루어져 있으며, Inditex와 같은 대형 기업의 본사가 위치해 있다. 정치적으로는 자치 정부를 운영하며, 갈리시아 의회를 통해 입법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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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시아주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지도 | |
| 개요 | |
| 유형 | 스페인의 자치 지방 |
| 별명 | 갈리시아 |
| 모토 | (없음) |
| 국가 | 스페인 |
| 지리 | |
| 총 면적 | 29,574.42 km² |
| 면적 순위 | 7위 (스페인의 5.8%) |
| 해안선 길이 | 1,660 km |
| 행정 구역 | |
| 수도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 주요 도시 | 비고 라 코루냐 |
| 하위 구역 | 주 |
| 주 | 아 코루냐 주 루고 주 오렌세 주 폰테베드라 주 |
| 인구 | |
| 전체 인구 | 2,701,819명 |
| 인구 조사 기준 연도 | 2020년 |
| 인구 순위 | 5위 (스페인의 6%) |
| 인구 밀도 | 91 명/km2 |
| 인구 통계 | 갈리시아인 |
| 갈리시아어 | galego, -ga |
| 스페인어 | gallego, -ga |
| 정부 | |
| 정치 체제 | 입헌 군주국 내 권한 위임 정부 |
| 통치 기관 | 갈리시아 자치 정부 (Xunta de Galicia) |
| 집권 정당 | 갈리시아 국민당 (PP) |
| 수반 직함 | 수반 (President) |
| 수반 이름 | 알폰소 루에다 |
| 경제 | |
| GDP (총액) | 759억 3천만 달러 (2022년) |
| GDP (1인당) | 28,170 달러 (2022년) |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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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 " ("소나무") |
| 기타 정보 | |
| 시간대 | CET |
| UTC 오프셋 | +1 |
| DST | CEST |
| DST UTC 오프셋 | +2 |
| ISO 3166 코드 | ES-GA |
| 지역 번호 | +34 98- |
| 자치 법규 | 1936 |
| 공용어 | 갈리시아어 스페인어 |
| 인터넷 TLD | .gal |
| 수호 성인 | 성 야고보 |
| 의회 | 갈리시아 의회 |
| 스페인 의회 (하원) | 350석 중 23석 |
| 스페인 의회 (상원) | 265석 중 19석 |
| 인간 개발 지수 (HDI) | 0.911 (2021년) |
| 웹사이트 | xunta.gal |
2. 역사
갈리시아라는 이름은 라틴어의 갈라이키아에서 유래되었다. 1978년 에스파냐의 자치지역으로 인정받았다.
=== 중세 ===
5세기 초, 로마 제국의 쇠퇴로 중앙 유럽의 여러 부족들(수에비족, 반달족, 알라니족)이 라인강을 건너 406년 12월 31일에 로마 제국 영토를 침략했다. 이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하자 로마는 수에비족이 갈리시아에 정착하여 제국의 동맹국으로서 통치하도록 하는 조약(''포에두스'')을 체결했다.[29] 409년부터 갈리시아는 수에비족의 지배를 받았고, 411년에는 로마 제국 멸망 전 유럽 최초로 세워진 중세 왕국이자, 로마 영토에서 최초로 화폐를 주조한 게르만 왕국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브리튼족의 식민지와 주교구(마일로크 참조)가 북부 갈리시아(브리토니아)에 세워졌는데, 아마도 수에비족의 포에데라티이자 동맹국이었을 것이다.[30] 585년, 서고트족의 레오비길드 왕은 수에비 왕국 갈리시아를 침략하여 격파하고 서고트족의 지배하에 두었다.
이후 무슬림이 스페인을 침략(711년)했지만, 아랍인과 무어인은 갈리시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못했고, 갈리시아는 이후 확장하는 기독교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병합되었다. 무슬림 연대기 저술가들과[31] 많은 유럽 동시대인들은 갈리시아를 갈라시아 또는 갈리시아(''Yillīqiya'' 및 ''Galīsiya'')로 불렀다.[32] 이 시대에 갈리시아는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사회로 굳어졌다. 다음 세기 동안 갈리시아 귀족들은 북부 포르투갈을 점령하여 871년에 코임브라를 정복함으로써 고대 갈리시아의 최남단 도시로 여겨지는 곳을 해방시켰다.
9세기, 사도 야고보에 대한 숭배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일어나면서 갈리시아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특별한 상징적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레콩키스타'' 기간 내내 유지되었다. 중세 시대가 진행되면서 산티아고는 주요 순례지가 되었고, 산티아고 순례길 (Camiño de Santiago)은 주요 순례길이 되어 로마네스크 미술과 음유시인의 노래와 음악이 전파되는 길이 되었다. 10세기와 11세기에는 갈리시아 귀족들이 왕족과 관계를 맺게 되면서, 갈리시아는 때때로 자체적인 토착 왕이 통치했으며, 바이킹(현지에서는 ''Leodemanes'' 또는 ''Lordomanes''로 알려짐)이 가끔 해안을 습격했다. 카토이라[33] (폰테베드라)의 탑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대한 바이킹의 습격을 막기 위해 요새 시스템으로 건설되었다.
1063년, 카스티야의 페르디난드 1세는 자신의 왕국을 아들들에게 나누었고, 갈리시아 왕국은 갈리시아의 가르시아 2세에게 주어졌다. 1072년, 가르시아의 형제 레온의 알폰소 6세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었으며, 그 이후 갈리시아는 같은 군주 아래 레온 왕국과 통합되었다. 13세기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는 카스티야어(스페인어)를 표준화하고 궁정과 정부의 언어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갈리시아 왕국에서는 갈리시아어가 유일한 사용 언어였으며, 정부와 법률, 그리고 문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 동안, 갈리시아 문제에 대한 왕의 점진적인 무관심은 왕국을 지방 기사, 백작, 주교의 손에 넘어가게 했으며, 이들은 자신의 봉토를 늘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땅을 약탈하기 위해 자주 서로 싸웠다. 동시에, Cortes에서 왕국의 대표자들의 소집이 중단되었다. 갈리시아 왕국은 왕의 통제에서 벗어나, 한 세기 동안 재정적 불복종으로 대응했다.
한편, 왕국 내 효과적인 왕실 사법 제도의 부재는 ''이르만디냐스 전쟁'' ('형제단 전쟁')으로 알려진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 이 전쟁은 농민과 시민들의 연합이 왕국의 많은 성을 무너뜨리고 잠시 귀족들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로 몰아낸 사건으로, 여러 기사, 귀족의 지원과 먼 곳에 있는 왕이 제공한 법적 보호를 받았다. 15세기 말,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라 벨트라네하의 후아나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갈리시아 귀족의 일부는 후아나를 지지했다. 이사벨의 승리 후, 그녀는 연대기 작가 제로니모 수리타가 "갈리시아 왕국의 정복"으로 정의한 행정 및 정치 개혁을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은 지방 정부와 법원(''Real Audiencia del Reino de Galicia'')을 설립하고 귀족을 복종시키는 동시에 대부분의 갈리시아 수도원과 기관을 카스티야의 통제하에 두었으며, 이는 중앙 집권화 과정으로 비판받았다. 동시에 왕들은 왕국의 도시 대표 또는 대표자들의 회의인 ''Xunta'' 또는 ''Cortes'' of the Kingdom of Galicia를 소집하여 금전 및 군사 기여를 요청했다. 이 회의는 곧 왕국의 목소리와 법적 대표가 되었으며, 왕국의 의지와 법을 보관하는 곳이 되었다.
=== 근세 및 근대 ===
갈리시아 왕국의 근세는 1480년에서 1486년 사이에 갈리시아에 파견된 카스티야 군대에 의해 페드로 마드루가와 같은 강력한 갈리시아 영주들이 패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는 모든 무장 저항을 물리치고 카스티야 군주의 왕권 확립을 확고히 했다. 전반적인 반란을 두려워한 군주는 나머지 주요 영주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29]
1480년 산타 에르만다드의 설립과 1500년 갈리시아 왕국 왕립 아우디엔시아의 설립은 왕의 직접적인 대표자인 총독-대장군이 지휘하는 재판소이자 집행 기관으로, 한 세기 동안의 불안과 재정적 불복종 이후, 초기에 왕국을 왕실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1480년부터 1520년까지 갈리시아 왕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하여 카스티야 왕관 전체 수입의 10% 이상을 기여했는데, 이는 경제적 관련성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스페인 제국의 나머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16세기는 1580년까지의 인구 증가로 특징지어졌으며, 이 시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과의 동시적인 전쟁으로 갈리시아의 대서양 무역이 방해받았다.[29]
15세기 말에 갈리시아어의 서면 형태는 스페인어로 대체되면서 느린 쇠퇴를 겪기 시작했고, 이는 대략 16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언어의 "어두운 세기"(Séculos Escuros)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 기간 동안 서면 갈리시아어는 개인적 또는 우발적인 용도를 제외하고 거의 완전히 사라졌지만, 구어는 마을과 도시에서도 사람들의 일반적인 언어로 남아 있었다.[29]
스페인 제국의 아메리카 확장에 작은 정도로 참여했던 갈리시아는 스페인이 프랑스 및 영국과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벌인 대서양 전쟁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략선들이 해안 지역을 공격했지만, 해안선이 험난하고 항구가 쉽게 방어되었기 때문에 주요 공격은 흔하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공격은 1585년과 1589년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에 의한 비고 시 공격과 1589년 잉글랜드 무적함대에 의한 아 코루냐 포위 공격이었다. 갈리시아는 또한 바르바리 해적의 가끔 있는 노예 습격을 받았지만 지중해 연안 지역만큼 빈번하지는 않았다. 가장 유명한 바르바리 공격은 1617년 캉가스 마을에 대한 약탈이었다. 당시 카스티야의 인적 및 경제적 고갈로 인해 왕의 돈과 군대에 대한 청원이 더욱 빈번해졌고, 갈리시아 왕국 자치 정부(지역 "코르테스" 또는 대표 의회)는 처음에 이러한 청원에 호응하여 막대한 자금을 모금하고, 왕국의 남성 징병을 수용했으며, 심지어 왕국의 수입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해군 함대를 위임했다.[29]
포르투갈 복원 전쟁과 카탈루냐와의 전쟁이 중단된 후, "자치 정부"는 태도를 바꾸었는데, 이번에는 포르투갈과의 전쟁에 연루되어 갈리시아의 고갈로 인해 바뀌었다. 17세기 후반에 "자치 정부"는 군주의 초기 청원을 자주 거부하거나 상당 부분 줄였으며, 잦은 도시 폭동이 있었다.[29]
=== 현대 ===
1833년 스페인 영토 분할은 갈리시아 왕국에 공식적인 종말을 고하고 스페인을 단일 중앙 집권 군주국으로 통합했다. 7개의 주와 지역 행정부 대신 갈리시아는 현재의 4개 주로 재편되었다. "역사적 지역"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지위는 엄격히 명예로운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갈리시아 민족주의와 연방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자유주의 장군 미겔 솔리스 쿠에토스는 권위주의 정권 라몬 마리아 나르바에스에 대항하여 1846년에 솔리스 봉기를 이끌었다. 솔리스와 그의 군대는 1846년 4월 23일 카체이라스 전투에서 패배했고, 솔리스 자신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총살당했다. 그들은 갈리시아의 기억 속에서 카랄의 순교자 또는 단순히 자유의 순교자로 자리 잡았다.
군사적 전선에서 패배한 갈리시아인들은 문화로 눈을 돌렸다. ''렉스르디멘토''는 사회적, 문화적 표현의 수단으로서 갈리시아어의 부활에 초점을 맞췄다. 이 운동과 관련된 작가들로는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마누엘 무르구이아, 마누엘 레이라스 풀페이로, 에두아르도 폰달 등이 있다.
20세기 초에는 카탈루냐의 솔리다리다트 카탈라나를 모델로 한 ''솔리다리다드 갈레가''(1907-1912)가 등장하면서 민족주의 정치로의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왔다. 솔리다리다드 갈레가는 실패했지만, 1916년에 문화 단체로 시작하여 곧 본격적인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한 ''이르만다데스 다 팔라''(언어의 형제단)가 등장했다. 빈센테 리스코와 라몬 오테로 페드라요는 이 운동의 뛰어난 문화적 인물이었고, 1920년에 창간된 잡지 ''노스''('우리')는 가장 주목할 만한 문화 기관이었으며, 로이스 페냐 노보는 뛰어난 정치적 인물이었다.
스페인 제2공화국은 1931년에 선포되었다. 공화국 기간 동안 파르티도 갈레기스타 (PG)는 갈리시아 민족주의 정당의 가장 중요한 정당이었다. 갈리시아 자치 헌장에 대한 국민 투표 이후, 갈리시아는 자치 지역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갈리시아는 스페인 내전의 최악의 참화를 겪지 않았다. 전쟁 발발 당시의 초기 쿠데타 시도가 성공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 전쟁 기간 동안 국민주의자(프랑코의 군대)의 손에 남아 있었다. 격렬한 전투는 없었지만, 탄압과 죽음이 있었다. 모든 정당이 폐지되었고, 모든 노동 조합과 갈리시아 민족주의 단체도 마찬가지였다. 갈리시아의 자치 헌장은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이 정복된 후 무효화되었다. 카를로스 페르난데스 산탄데르에 따르면, 최소 4,200명이 재판 없이 또는 즉결 재판 후 살해되었으며, 여기에는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 갈리시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가 포함되었다.[39] 희생자에는 갈리시아 4개 주의 민간 지사, 코루냐 지사의 아내인 후아나 카프데비에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앙헬 카살과 같은 시장(파르티도 갈레기스타), 페롤의 하이메 킨타닐라와 비고의 에밀리오 마르티네스 가리도와 같은 저명한 사회주의자, 인민 전선 국회의원,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로헬리오 카리다드 피타 장군과 엔리케 살세도 몰리누에보 장군, 안토니오 아사롤라 제독과 같은 군인, PG의 창립자인 알렉산드르 보베다와 빅토르 카사스, 그리고 언론인이나 의사와 같은 공화주의자 및 민족주의자와 유사한 다른 전문가들이 포함되었다. 많은 다른 사람들은 망명을 강요당하거나 다른 보복의 희생자가 되어 직위에서 해고되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 - 스스로 페롤 출신의 갈리시아인 -은 내전에서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독재자로 통치했다. 프랑코의 중앙 집권 정권은 신생아의 갈리시아어 이름 사용을 포함하여 갈리시아어의 공식적인 사용을 억압했지만, 일상적인 구두 사용은 금지되지 않았다. 저항 시도 중에는 호세 카스트로 베이가("O Piloto")와 베니그노 안드라데("Foucellas")가 이끄는 것과 같은 작은 좌익 게릴라 단체가 있었으며, 이들은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40][41] 1960년대에는 마누엘 프라가 이리바르네와 같은 장관들이 오푸스 데이와 관련된 테크노크라트들이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용이하게 하는 방식으로 행정을 현대화하도록 허용하는 일부 개혁을 도입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갈리시아는 스페인 나머지 지역에 원자재와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에 갇혀 환경을 파괴하고 베네수엘라와 유럽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는 물결을 일으켰다. 페노사, 독점적인 전력 공급 업체는 수력 발전 댐을 건설하여 많은 갈리시아 강 계곡을 침수시켰다.
갈리시아 경제는 마침내 비고에 프랑스 시트로엥 공장, 통조림 산업 및 어업 선단의 현대화, 그리고 결국 소규모 농민 관행, 특히 암소 우유 생산의 현대화로 시작하여 현대화되기 시작했다. 오렌세 주에서는 사업가이자 정치인 에울로히오 고메스 프랑케이라가 코페라티바 오렌사나 S.A. (Coren)를 설립하여 가축 및 가금류 사육에 박차를 가했다.
프랑코 통치 말기에 갈리시아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다시 일어났다. 1970년대 초는 대학생, 노동자, 농민들 사이에서 불안이 있던 시기였다. 1972년, 비고와 페롤에서 발생한 총파업으로 아마도르 레이와 다니엘 니에블라가 목숨을 잃었다.[42] 나중에 몬도녜도-페롤의 주교인 미겔 앙호 아라우호 이글레시아스는 바잔(페롤)에서 두 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시위에 대해 프랑코 정권에 의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목회 서한을 썼다.[43]
1975년 프랑코 사망 이후 민주주의로의 전환의 일환으로 갈리시아는 1981년 자치 헌장과 함께 스페인 내에서 자치 지역의 지위를 되찾았으며, 자치 헌장은 "역사적 국적 갈리시아는 스페인 헌법과 현재 헌장에 따라 자치 정부에 접근하기 위해 자치 공동체로 구성된다"로 시작한다. 스페인의 민족주의와 지역주의에 대한 다양한 정도의 민족주의 또는 독립주의 정서가 정치적 수준에서 나타난다. ''블로케 나시오날리스타 갈레고'' 또는 BNG는 갈리시아의 정치적 지위를 국가로 주장하는 좌익 정당과 개인의 집합체이다.
1990년부터 2005년까지 프랑코 독재 시대의 전 장관이자 대사인 마누엘 프라가는 갈리시아 자치 정부인 준타 데 갈리시아를 주재했다. 프라가는 설립 이후 ''파르티도 포풀라르'' ('국민당', 스페인의 주요 전국 보수 정당)과 연관되었다. 2002년, 유조선 프레스티지가 침몰하여 갈리시아 해안을 기름으로 덮었을 때 프라가는 풀뿌리 운동 ''누카 마이스''("다시는")로부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5년 갈리시아 선거에서 '국민당'은 절대 다수를 잃었지만, 총 투표의 43%를 얻어 의회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남았다. 그 결과 권력은 스페인의 주요 사회 민주 정당인 ''파르티도 소시알리스타 오브레로 에스파뇰''(PSOE,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민족주의 ''블로케 나시오날리스타 갈레고''(BNG)의 연방 자매 정당인 ''파르티도 도스 소시알리스타스 데 갈리시아''(PSdeG)('갈리시아 사회주의자'당)의 연합으로 넘어갔다. 새로운 연합의 선임 파트너로서 PSdeG는 지도자 에밀리오 페레스 투리뇨를 갈리시아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지명하고, BNG의 지도자 안호 킨타나를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2009년, PSdG-BNG 연합은 선거에서 패배했고, PSdG-BNG 연합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민당(보수)으로 돌아갔다.
2. 1. 선사 시대 및 고대
갈리시아에서 인간 존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증거는 트리아카스텔라 자치구의 에이로스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이곳에는 중기 구석기 시대의 동물 유해와 네안데르탈인의 석기가 보존되어 있다. 상당한 건축 흔적을 남긴 가장 초기의 문화는 신석기 시대와 금석 병용 시대에 걸쳐 서유럽 해안을 따라 확장된 거석 문화이다. 수천 개의 거석 고분이 전국에 분포되어 있으며, 대부분 해안 지역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24] 각 고분 안에는 지역적으로 "안타"(돌멘)라고 알려진 석조 묘실이 있으며, 종종 복도가 앞에 있다. 갈리시아는 이후에 종 모양 비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주석과 금의 풍부한 광물 매장량은 청동기 시대 야금술의 발전을 이끌었고, 서유럽 대서양 연안 전체에서 청동과 금 제품의 상업화를 이끌었다. 대서양 청동기 시대 동안 이 지역에서 공유된 엘리트 문화가 발전했다.
거석 시대 말부터 청동기 시대까지 많은 석조 조각(암각화)이 야외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보통 컵 앤 링 마크, 미로, 사슴, 청동기 시대 무기, 승마 및 사냥 장면을 나타낸다.[25] 이러한 석조 조각은 투론과 캄포 라메이로와 같은 장소에서 리아스 바이샤 지역에서 대량으로 발견될 수 있다.

철기 시대에 카스트로 문화[26]('성 문화')가 발전했으며, 기원전 1천년 후반에 번성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대서양 청동기 시대의 지역적 진화로 간주되며, 로마 시대까지 발전과 영향이 겹쳐졌다. 지리적으로는 로마인들이 갈라이시라고 불렀던 사람들과 일치하며, 그들은 ''아르타브리'', ''브라카리'', ''리미치'', ''켈티치'', ''알비오네스'' 및 ''레마비''를 포함한 일련의 여러 국가 또는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유능한 전사였다. 스트라본은 그들을 루시타니아를 정복하는 데 로마인들이 만난 가장 어려운 적이라고 묘사했으며, 아피아누스[27]는 그들의 호전적인 정신을 언급하며 여성들이 남편과 나란히 무기를 휴대하며 포로로 잡히는 것보다 죽음을 선호한다고 언급했다. 폼포니우스 멜라에 따르면 해안 지역의 모든 주민은 켈트족이었다.
갈라이시는 ''카스트로''에 살았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동심원 토벽 또는 석벽이 있고 각 벽 앞에 참호가 있는 고리형 요새였다. 그들은 종종 언덕이나 해안 절벽 및 반도에 위치했다. 파주로, 산타 테그라, 바로냐, 오 네이손과 같은 해안에서 잘 알려진 "카스트로"를 찾을 수 있으며, 내륙에서는 산 시브라오 데 라스, 보르네이로, 카스트로마오, 빌라동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문화와 관련된 사원, 목욕탕, 저수지, 전사 조각상 및 장식 조각과 같은 다른 특징들과 풍부한 금 및 금속 세공 전통이 발견되었다.
로마 군단은 기원전 137–136년에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아래 처음으로 이 지역에 들어갔지만,[28] 이 나라는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29년 – 기원전 19년)에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로마인들은 갈리시아의 광물 자원, 특히 금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로마 통치하에서 대부분의 갈리시아 언덕 요새는 때때로 강제로 버려지기 시작했고, 갈라이시는 로마군에서 보조 병력으로 자주 복무했다. 로마인들은 새로운 기술, 새로운 여행 경로, 재산 조직의 새로운 형태, 그리고 새로운 언어인 라틴어를 가져왔다. 로마 제국은 아퀴스 케르케니에스, 치아델라 진지 또는 루쿠스 아우구스티(루고), 길(''비아'')과 헤라클레스 탑으로 알려진 등대와 같은 기념비와 같은 진지(''카스트라'')를 통해 갈리시아에 대한 통제력을 확립했다. 코루냐에서, 그러나 금광이 생산성을 멈춘 서기 2세기 이후 이 나라의 외딴곳과 관심 부족으로 인해 ''로마화''의 정도가 덜했다. 3세기에는 갈라이시아라는 이름으로 지방이 되었으며, 북부 포르투갈, 아스투리아스, 그리고 오늘날 카스티야 이 레온으로 알려진 지역의 상당 부분을 포함했다.
2. 2. 중세
5세기 초, 로마 제국의 쇠퇴로 중앙 유럽의 여러 부족들(수에비족, 반달족, 알라니족)이 라인강을 건너 406년 12월 31일에 로마 제국 영토를 침략했다. 이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하자 로마는 수에비족이 갈리시아에 정착하여 제국의 동맹국으로서 통치하도록 하는 조약(''포에두스'')을 체결했다.[29] 409년부터 갈리시아는 수에비족의 지배를 받았고, 411년에는 로마 제국 멸망 전 유럽 최초로 세워진 중세 왕국이자, 로마 영토에서 최초로 화폐를 주조한 게르만 왕국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브리튼족의 식민지와 주교구(마일로크 참조)가 북부 갈리시아(브리토니아)에 세워졌는데, 아마도 수에비족의 포에데라티이자 동맹국이었을 것이다.[30] 585년, 서고트족의 레오비길드 왕은 수에비 왕국 갈리시아를 침략하여 격파하고 서고트족의 지배하에 두었다.이후 무슬림이 스페인을 침략(711년)했지만, 아랍인과 무어인은 갈리시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못했고, 갈리시아는 이후 확장하는 기독교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병합되었다. 무슬림 연대기 저술가들과[31] 많은 유럽 동시대인들은 갈리시아를 갈라시아 또는 갈리시아(''Yillīqiya'' 및 ''Galīsiya'')로 불렀다.[32] 이 시대에 갈리시아는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사회로 굳어졌다. 다음 세기 동안 갈리시아 귀족들은 북부 포르투갈을 점령하여 871년에 코임브라를 정복함으로써 고대 갈리시아의 최남단 도시로 여겨지는 곳을 해방시켰다.
9세기, 사도 야고보에 대한 숭배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일어나면서 갈리시아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특별한 상징적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레콩키스타'' 기간 내내 유지되었다. 중세 시대가 진행되면서 산티아고는 주요 순례지가 되었고, 산티아고 순례길 (Camiño de Santiago)은 주요 순례길이 되어 로마네스크 미술과 음유시인의 노래와 음악이 전파되는 길이 되었다. 10세기와 11세기에는 갈리시아 귀족들이 왕족과 관계를 맺게 되면서, 갈리시아는 때때로 자체적인 토착 왕이 통치했으며, 바이킹(현지에서는 ''Leodemanes'' 또는 ''Lordomanes''로 알려짐)이 가끔 해안을 습격했다. 카토이라[33] (폰테베드라)의 탑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대한 바이킹의 습격을 막기 위해 요새 시스템으로 건설되었다.
1063년, 카스티야의 페르디난드 1세는 자신의 왕국을 아들들에게 나누었고, 갈리시아 왕국은 갈리시아의 가르시아 2세에게 주어졌다. 1072년, 가르시아의 형제 레온의 알폰소 6세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었으며, 그 이후 갈리시아는 같은 군주 아래 레온 왕국과 통합되었다. 13세기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는 카스티야어(스페인어)를 표준화하고 궁정과 정부의 언어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갈리시아 왕국에서는 갈리시아어가 유일한 사용 언어였으며, 정부와 법률, 그리고 문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 동안, 갈리시아 문제에 대한 왕의 점진적인 무관심은 왕국을 지방 기사, 백작, 주교의 손에 넘어가게 했으며, 이들은 자신의 봉토를 늘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땅을 약탈하기 위해 자주 서로 싸웠다. 동시에, Cortes에서 왕국의 대표자들의 소집이 중단되었다. 갈리시아 왕국은 왕의 통제에서 벗어나, 한 세기 동안 재정적 불복종으로 대응했다.
한편, 왕국 내 효과적인 왕실 사법 제도의 부재는 ''이르만디냐스 전쟁'' ('형제단 전쟁')으로 알려진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 이 전쟁은 농민과 시민들의 연합이 왕국의 많은 성을 무너뜨리고 잠시 귀족들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로 몰아낸 사건으로, 여러 기사, 귀족의 지원과 먼 곳에 있는 왕이 제공한 법적 보호를 받았다. 15세기 말,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라 벨트라네하의 후아나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갈리시아 귀족의 일부는 후아나를 지지했다. 이사벨의 승리 후, 그녀는 연대기 작가 제로니모 수리타가 "갈리시아 왕국의 정복"으로 정의한 행정 및 정치 개혁을 시작했다. '그것은 갈리시아의 굴복이 시작된 때였는데, 지방 영주와 기사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매우 대담하고 호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은 지방 정부와 법원(''Real Audiencia del Reino de Galicia'')을 설립하고 귀족을 복종시키는 동시에 대부분의 갈리시아 수도원과 기관을 카스티야의 통제하에 두었으며, 이는 중앙 집권화 과정으로 비판받았다. 동시에 왕들은 왕국의 도시 대표 또는 대표자들의 회의인 ''Xunta'' 또는 ''Cortes'' of the Kingdom of Galicia를 소집하여 금전 및 군사 기여를 요청했다. 이 회의는 곧 왕국의 목소리와 법적 대표가 되었으며, 왕국의 의지와 법을 보관하는 곳이 되었다.
2. 3. 근세 및 근대
14세기와 15세기 동안, 갈리시아 문제에 대한 왕의 점진적인 무관심은 왕국을 지방 기사, 백작, 주교의 손에 넘어가게 했으며, 이들은 자신의 봉토를 늘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땅을 약탈하기 위해 자주 서로 싸웠다. 동시에, Cortes에서 왕국의 대표자들의 소집이 중단되었다. 갈리시아 왕국은 왕의 통제에서 벗어나 한 세기 동안 재정적 불복종으로 대응했다.[29]한편, 왕국 내 효과적인 왕실 사법 제도의 부재는 ''이르만디냐스 전쟁'' ('형제단 전쟁')으로 알려진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 이 전쟁은 여러 기사, 귀족의 지원과 먼 곳에 있는 왕이 제공한 법적 보호를 받으며 농민과 시민들의 연합이 왕국의 많은 성을 무너뜨리고 잠시 귀족들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로 몰아낸 사건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15세기 말,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라 벨트라네하의 후아나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갈리시아 귀족의 일부는 후아나를 지지했다. 이사벨의 승리 후, 그녀는 연대기 작가 제로니모 수리타가 "갈리시아 왕국의 정복"으로 정의한 행정 및 정치 개혁을 시작했다. '그것은 갈리시아의 굴복이 시작된 때였는데, 지방 영주와 기사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매우 대담하고 호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은 지방 정부와 법원(''Real Audiencia del Reino de Galicia'')을 설립하고 귀족을 복종시키는 동시에 대부분의 갈리시아 수도원과 기관을 카스티야의 통제하에 두었으며, 이는 중앙 집권화 과정으로 비판받았다. 동시에 왕들은 왕국의 도시 대표 또는 대표자들의 회의인 ''Xunta'' 또는 ''Cortes'' of the Kingdom of Galicia를 소집하여 금전 및 군사 기여를 요청했다. 이 회의는 곧 왕국의 목소리와 법적 대표가 되었으며, 왕국의 의지와 법을 보관하는 곳이 되었다.[29]
갈리시아 왕국 자치 정부 참조
갈리시아 왕국의 근세는 1480년에서 1486년 사이에 갈리시아에 파견된 카스티야 군대에 의해 페드로 마드루가라고 불리는 페드로 알바레스 데 소토마요르와 로드리고 엔리케스 오소리오와 같은 강력한 갈리시아 영주들이 패배하면서 시작되었다. 많은 갈리시아 귀족들에게 찬탈자로 여겨진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는 모든 무장 저항을 물리치고 카스티야 군주의 왕권 확립을 확고히 했다. 전반적인 반란을 두려워한 군주는 페드로 데 볼라뇨, 디에고 데 안드라데 또는 로페 산체스 데 모스코소와 같은 나머지 주요 영주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29]
1480년 산타 에르만다드의 설립과 1500년 갈리시아 왕국 왕립 아우디엔시아의 설립은 왕의 직접적인 대표자인 총독-대장군이 지휘하는 재판소이자 집행 기관으로, 한 세기 동안의 불안과 재정적 불복종 이후, 초기에 왕국을 왕실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1480년부터 1520년까지 갈리시아 왕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하여 카스티야 왕관 전체 수입의 10% 이상을 기여했는데, 이는 경제적 관련성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스페인 제국의 나머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16세기는 1580년까지의 인구 증가로 특징지어졌으며, 이 시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과의 동시적인 전쟁으로 갈리시아의 대서양 무역이 방해받았고, 이는 주로 정어리, 목재, 소 및 일부 포도주를 수출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29]
15세기 말에 갈리시아어의 서면 형태는 스페인어로 대체되면서 느린 쇠퇴를 겪기 시작했고, 이는 대략 16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언어의 "어두운 세기"(Séculos Escuros)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 기간 동안 서면 갈리시아어는 개인적 또는 우발적인 용도를 제외하고 거의 완전히 사라졌지만, 구어는 마을과 도시에서도 사람들의 일반적인 언어로 남아 있었다.[29]
그 시점부터 스페인 제국의 아메리카 확장에 작은 정도로 참여했던 갈리시아는 스페인이 프랑스 및 영국과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벌인 대서양 전쟁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략선들이 해안 지역을 공격했지만, 해안선이 험난하고 항구가 쉽게 방어되었기 때문에 주요 공격은 흔하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공격은 1585년과 1589년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에 의한 비고 시 공격과 1589년 잉글랜드 무적함대에 의한 아 코루냐 포위 공격이었다. 갈리시아는 또한 바르바리 해적의 가끔 있는 노예 습격을 받았지만 지중해 연안 지역만큼 빈번하지는 않았다. 가장 유명한 바르바리 공격은 1617년 캉가스 마을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약탈이었다. 당시 카스티야의 인적 및 경제적 고갈로 인해 왕의 돈과 군대에 대한 청원이 더욱 빈번해졌고, 갈리시아 왕국 자치 정부(지역 "코르테스" 또는 대표 의회)는 처음에 이러한 청원에 호응하여 막대한 자금을 모금하고, 왕국의 남성 징병을 수용했으며, 심지어 왕국의 수입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해군 함대를 위임했다.[29]
포르투갈 복원 전쟁과 카탈루냐와의 전쟁이 중단된 후, "자치 정부"는 태도를 바꾸었는데, 이번에는 해상 작전이나 해외 작전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사상자와 난민을 낳고 지역 경제와 상업을 심각하게 방해한 포르투갈과의 지칠 줄 모르는 전쟁에 연루되어 갈리시아의 고갈로 인해 바뀌었다. 따라서 17세기 후반에 "자치 정부"는 군주의 초기 청원을 자주 거부하거나 상당 부분 줄였으며, 긴장이 포르투갈이나 카탈루냐에서 경험했던 수준으로 치솟지는 않았지만, 잦은 도시 폭동이 있었고 일부에서는 심지어 갈리시아 왕국의 분리를 요구했다.[29]
2. 4. 현대
1978년 에스파냐의 자치지역으로 인정받았다.1933년 스페인 영토 분할은 갈리시아 왕국에 공식적인 종말을 고하고 스페인을 단일 중앙 집권 군주국으로 통합했다. 7개의 주와 지역 행정부 대신 갈리시아는 현재의 4개 주로 재편되었다. "역사적 지역"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지위는 엄격히 명예로운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갈리시아 민족주의와 연방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자유주의 장군 미겔 솔리스 쿠에토스는 권위주의 정권 라몬 마리아 나르바에스에 대항하여 1846년에 솔리스 봉기를 이끌었다. 솔리스와 그의 군대는 1846년 4월 23일 카체이라스 전투에서 패배했고, 솔리스 자신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총살당했다. 그들은 갈리시아의 기억 속에서 카랄의 순교자 또는 단순히 자유의 순교자로 자리 잡았다.
군사적 전선에서 패배한 갈리시아인들은 문화로 눈을 돌렸다. ''렉스르디멘토''는 사회적, 문화적 표현의 수단으로서 갈리시아어의 부활에 초점을 맞췄다. 이 운동과 관련된 작가들로는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마누엘 무르구이아, 마누엘 레이라스 풀페이로, 에두아르도 폰달 등이 있다.
20세기 초에는 카탈루냐의 솔리다리다트 카탈라나를 모델로 한 ''솔리다리다드 갈레가''(1907-1912)가 등장하면서 민족주의 정치로의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왔다. 솔리다리다드 갈레가는 실패했지만, 1916년에 문화 단체로 시작하여 곧 본격적인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한 ''이르만다데스 다 팔라''(언어의 형제단)가 등장했다. 빈센테 리스코와 라몬 오테로 페드라요는 이 운동의 뛰어난 문화적 인물이었고, 1920년에 창간된 잡지 ''노스''('우리')는 가장 주목할 만한 문화 기관이었으며, 로이스 페냐 노보는 뛰어난 정치적 인물이었다.
스페인 제2공화국은 1931년에 선포되었다. 공화국 기간 동안 파르티도 갈레기스타 (PG)는 갈리시아 민족주의 정당의 가장 중요한 정당이었다. 갈리시아 자치 헌장에 대한 국민 투표 이후, 갈리시아는 자치 지역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갈리시아는 스페인 내전의 최악의 참화를 겪지 않았다. 전쟁 발발 당시의 초기 쿠데타 시도가 성공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 전쟁 기간 동안 국민주의자(프랑코의 군대)의 손에 남아 있었다. 격렬한 전투는 없었지만, 탄압과 죽음이 있었다. 모든 정당이 폐지되었고, 모든 노동 조합과 갈리시아 민족주의 단체도 ''세미나리오 데 에스투도스 갈레고스''와 마찬가지였다. 갈리시아의 자치 헌장은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이 정복된 후 무효화되었다. 카를로스 페르난데스 산탄데르에 따르면, 최소 4,200명이 재판 없이 또는 즉결 재판 후 살해되었으며, 여기에는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 갈리시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가 포함되었다.[39] 희생자에는 갈리시아 4개 주의 민간 지사, 코루냐 지사의 아내인 후아나 카프데비에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앙헬 카살과 같은 시장(파르티도 갈레기스타), 페롤의 하이메 킨타닐라와 비고의 에밀리오 마르티네스 가리도와 같은 저명한 사회주의자, 인민 전선 국회의원 안토니오 빌바투아, 호세 미뇨네스, 디아스 비야밀, 이그나시오 세오아네와 전 국회의원 에라클리오 보타나,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로헬리오 카리다드 피타 장군과 엔리케 살세도 몰리누에보 장군, 안토니오 아사롤라 제독과 같은 군인, PG의 창립자인 알렉산드르 보베다와 빅토르 카사스, 그리고 언론인 마누엘 루스트레스 리바스나 의사 루이스 포사 파스트라나와 같은 공화주의자 및 민족주의자와 유사한 다른 전문가들이 포함되었다. 많은 다른 사람들은 망명을 강요당하거나 다른 보복의 희생자가 되어 직위에서 해고되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 - 스스로 페롤 출신의 갈리시아인 -은 내전에서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독재자로 통치했다. 프랑코의 중앙 집권 정권은 신생아의 갈리시아어 이름 사용을 포함하여 갈리시아어의 공식적인 사용을 억압했지만, 일상적인 구두 사용은 금지되지 않았다. 저항 시도 중에는 호세 카스트로 베이가("O Piloto")와 베니그노 안드라데("Foucellas")가 이끄는 것과 같은 작은 좌익 게릴라 단체가 있었으며, 이들은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40][41] 1960년대에는 마누엘 프라가 이리바르네와 같은 장관들이 오푸스 데이와 관련된 테크노크라트들이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용이하게 하는 방식으로 행정을 현대화하도록 허용하는 일부 개혁을 도입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갈리시아는 스페인 나머지 지역에 원자재와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에 갇혀 환경을 파괴하고 베네수엘라와 유럽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는 물결을 일으켰다. 페노사, 독점적인 전력 공급 업체는 수력 발전 댐을 건설하여 많은 갈리시아 강 계곡을 침수시켰다.
갈리시아 경제는 마침내 비고에 프랑스 시트로엥 공장, 통조림 산업 및 어업 선단의 현대화, 그리고 결국 소규모 농민 관행, 특히 암소 우유 생산의 현대화로 시작하여 현대화되기 시작했다. 오렌세 주에서는 사업가이자 정치인 에울로히오 고메스 프랑케이라가 코페라티바 오렌사나 S.A. (Coren)를 설립하여 가축 및 가금류 사육에 박차를 가했다.
프랑코 통치 말기에 갈리시아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다시 일어났다. 1970년대 초는 대학생, 노동자, 농민들 사이에서 불안이 있던 시기였다. 1972년, 비고와 페롤에서 발생한 총파업으로 아마도르 레이와 다니엘 니에블라가 목숨을 잃었다.[42] 나중에 몬도녜도-페롤의 주교인 미겔 앙호 아라우호 이글레시아스는 바잔(페롤)에서 두 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시위에 대해 프랑코 정권에 의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목회 서한을 썼다.[43]
1975년 프랑코 사망 이후 민주주의로의 전환의 일환으로 갈리시아는 1981년 자치 헌장과 함께 스페인 내에서 자치 지역의 지위를 되찾았으며, 자치 헌장은 "역사적 국적 갈리시아는 스페인 헌법과 현재 헌장에 따라 자치 정부에 접근하기 위해 자치 공동체로 구성된다"로 시작한다. 스페인의 민족주의와 지역주의에 대한 다양한 정도의 민족주의 또는 독립주의 정서가 정치적 수준에서 나타난다. ''블로케 나시오날리스타 갈레고'' 또는 BNG는 갈리시아의 정치적 지위를 국가로 주장하는 좌익 정당과 개인의 집합체이다.
1990년부터 2005년까지 프랑코 독재 시대의 전 장관이자 대사인 마누엘 프라가는 갈리시아 자치 정부인 준타 데 갈리시아를 주재했다. 프라가는 설립 이후 ''파르티도 포풀라르'' ('국민당', 스페인의 주요 전국 보수 정당)과 연관되었다. 2002년, 유조선 프레스티지가 침몰하여 갈리시아 해안을 기름으로 덮었을 때 프라가는 풀뿌리 운동 ''누카 마이스''("다시는")로부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5년 갈리시아 선거에서 '국민당'은 절대 다수를 잃었지만, 총 투표의 43%를 얻어 의회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남았다. 그 결과 권력은 스페인의 주요 사회 민주 정당인 ''파르티도 소시알리스타 오브레로 에스파뇰''(PSOE,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민족주의 ''블로케 나시오날리스타 갈레고''(BNG)의 연방 자매 정당인 ''파르티도 도스 소시알리스타스 데 갈리시아''(PSdeG)('갈리시아 사회주의자'당)의 연합으로 넘어갔다. 새로운 연합의 선임 파트너로서 PSdeG는 지도자 에밀리오 페레스 투리뇨를 갈리시아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지명하고, BNG의 지도자 안호 킨타나를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2009년, PSdG-BNG 연합은 선거에서 패배했고, PSdG-BNG 연합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민당(보수)으로 돌아갔다.
3. 지리
갈리시아는 이베리아반도의 최북서단에 위치하며, 남쪽은 포르투갈, 동쪽은 카스티야레온과 아스투리아스, 서쪽과 북쪽은 대서양에 접해 있다.
갈리시아의 면적은 29,574 km2이다.[44] 최북단 지점은 에스타카 데 바레스 곶(Estaca de Bares)이며, 스페인의 최북단 지점이기도 하다. 최남단 지점은 바이샤 리미아-세라 도 쑤레스 자연 공원의 포르투갈 국경에 위치한다.[44] 최동경은 오렌세와 카스티야 이 레온의 사모라의 경계에, 최서경은 피스테라(Fisterra)의 아 나베 곶과 아 코루냐 지방의 토리냰 곶 두 곳에 위치한다.[44]
내륙은 언덕이 많은 지형으로, 비교적 낮은 산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1000m 미만이지만 동부 산에서는 2000m까지 솟아 있다. 실 강은 미뇨강 다음으로 갈리시아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강이다.
갈리시아 지형의 두드러진 특징은 해안을 따라 많은 피오르와 같은 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빙하기 이후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긴 하구이다. 이것들을 ''리아스''라고 부르며, ''Rías Altas'' ("높은 리아스")와 ''Rías Baixas'' ("낮은 리아스")로 나뉜다. ''Rías Altas''에는 리바데오, 포스, 비베이로, 오 바르케이로, 오르티게이라, 세데이라, 페롤, 베탄소스, 아 코루냐, 코르메 이 라헤 및 카마리냐스가 있다. 피스테라 남쪽에 있는 Rías Baixas에는 코르쿠비온, 무로스 에 노이아, 아로사, 폰테베드라 및 비고가 있다.
대서양의 침식은 많은 곶에 기여했다. 북쪽 끝에 있는 에스타카 데 바레스는 대서양과 칸타브리아 해를 구분하며, 다른 주목할 만한 곶으로는 오르테갈 곶, 카보 프리오르, 푼타 산토 아드라오, 카보 빌란, 카보 투리냔 (갈리시아의 최서단), 피스테라 곶 또는 피스테라가 있다.
갈리시아 해안을 따라 다양한 ''리아스'' 입구 근처에 여러 군도가 있다. 이 군도들은 보호된 깊은 항구를 제공하며 바닷새들의 서식지를 제공한다. 2007년 조사에 따르면 갈리시아 해안에는 316개의 군도, 작은 섬 및 독립된 암석이 있다.[45] 이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시에스, 온스, 살보라 군도이며, 갈리시아 대서양 제도 국립공원을 구성한다.
갈리시아는 산악 지형으로, 특히 내륙에서 통신을 방해하며 농촌 지역을 고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주요 산맥은 마시조 갈라이코 (세라 도 에이세, 세라 다 라스트라, 세라 도 쿠렐)이다. 주목할 만한 산맥으로는 오 시스트랄 (북부 루고), 세라 도스 안카레스, 오 쿠렐, 오 에이세, 세라 데 케이샤, 오 파로, 코바 다 세르페, 몬테마이오르, 몬테스 도 테스테이로, 세라 도 수이도, 파로 데 아비온 등이 있다.
갈리시아의 최고 지점은 트레빈카 또는 페나 트레빈카(2124m)이며, 세라 도 에이세에 위치하고 오렌세, 레온 및 사모라 주의 경계에 있다. 다른[46] 높은 봉우리로는 세라 도 에이세의 페나 수르비아(2112m), 오스 안카레스의 오 무스탈라(1935m), 그리고 스키 리조트가 있는 세라 데 케이샤의 카베자 데 만자네다(1782m)가 있다.
갈리시아는 "천 개의 강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크고 중요한 강은 미뇨로, 길이는 307.5km이고 초당 419m3의 유량을 보이며, 지류인 실은 웅장한 협곡을 만들었다. 나비아, 울라, 탐브레, 리미아만이 100km 이상의 유로를 가지고 있다.
갈리시아는 울창한 숲을 일부 보존하고 있다. 비교적 오염되지 않았으며, 녹색 언덕, 절벽, 그리고 '리아스(rias)'로 구성된 풍경은 일반적으로 스페인 풍경으로 이해되는 것과는 다르다.
산림 벌채와 산불은 많은 지역에서 문제이며, 유칼립투스 나무의 지속적인 확산도 마찬가지다. 갈리시아는 스페인에서 숲이 더 많은 지역 중 하나이지만, 유칼립투스나 소나무를 재배하는 갈리시아 농장의 대부분은 공식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47] 특히 ''Eucalyptus globulus''의 대규모 유칼립투스 농장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시대에 시작되었다.
유럽 늑대를 포함한 동물군은 가축 소유주와 농부들의 행위, 서식지 손실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며, 토종 사슴 종은 사냥과 개발로 인해 감소했다.
유출된 기름은 주요 문제이다. 2002년 프레스티지호 유류 유출 사고는 알래스카에서 발생한 엑손 발데스호 유류 유출 사고보다 더 많은 기름을 유출했다.[49]
갈리시아에는 2,800종 이상의 식물 종과 31개의 고유 식물 분류군이 있다. 유칼립투스 농장과 혼합림이 서부와 북부에서 우세하며, 소수의 참나무 숲이 남아 있다. 내륙 지역에서는 참나무와 관목지가 우세하다. 갈리시아에는 262종의 척추동물이 등록되어 있다.[50]
갈리시아는 서유럽에서 가장 큰 이베리아 늑대 개체군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다. 갈리시아의 숲과 산에는 토끼, 산토끼, 멧돼지, 노루도 서식한다.
갈리시아는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여 위도에 비해 매우 온화한 기후를 보이며, 해양의 영향이 주 전역에 영향을 미친다. 겨울은 특히 온화하고 지속적인 강우가 특징이다. 해수면에서는 눈이 드물게 내리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드물다. 반면, 동부 산지에서는 11월부터 5월까지 눈이 정기적으로 내린다. 전반적으로 갈리시아의 기후는 태평양 북서부와 비슷하다.
해안 지역의 여름은 온화하며, 비고의 일 최고 기온은 평균 25°C이다.[55] 아 코루냐에서는 기온이 더 낮아 22.8°C가 일반적이다.[56] 오렌세와 같은 내륙 지역에서는 기온이 훨씬 높아 30°C를 넘는 날이 잦다.
갈리시아 지역은 쾨펜 기후 구분에서 두 가지 다른 지역으로 분류된다:[57]
- 남부 지역(오렌세 주와 폰테베드라 주): 온난 여름 지중해성 기후(''Csb'')
- 서부 및 북부 해안 지역(루고 주와 아 코루냐 주): 해양성 기후 (''Cfb'')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연평균[59] 강우일수가 129일이며 연간 1787mm의 강수량을 보인다. 루고는 연평균 일조 시간이 1,759시간이며,[60] 강수량이 총 901.54mm에 달하는 117일의 강우일수를 보이며, 연간 서리 일수는 40일이다. 오렌세 주와 루고 주의 산악 지역은 겨울철에 상당한 적설량을 기록한다. 일조량이 가장 많은 도시는 폰테베드라로, 연간 2,223시간의 일조 시간을 기록한다.
갈리시아의 일부 지역에 대한 기후 데이터(1981–2010년 평균):[61]
| 도시 | 7월 평균 기온 | 1월 평균 기온 | 강수량 | 강우일수(연간/여름) | 서리 일수 | 일조 시간 |
|---|---|---|---|---|---|---|
| 아 코루냐 | 1014mm | 130 / 18 | 0.1 | 2,010 | ||
| 루고 | 1052mm | 126 / 16 | 50 | 1,821 | ||
| 오렌세 | 811mm | 97 / 11 | 27 | 2,054 | ||
| 폰테베드라 | 1613mm | 129 / 17 | 2 | 2,247 | ||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1787mm | 139 / 19 | 13 | 1,911 | ||
| 비고 | 1791mm | 131 / 18 | 4 | 2,169 |
4. 행정 구역
갈리시아는 4개의 주로 나뉜다.
1833년 스페인 영토 분할 이전에는 7개의 주 (아 코루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베탄소스, 몬도녜도, 루고, 오렌세, 투이)로 구성되었으나, 1833년부터 4개의 주로 통합되었다.[65]
갈리시아는 53개의 코마르카, 315개의 지방 자치체(아 코루냐 93개, 루고 67개, 오렌세 92개, 폰테베드라 62개) 및 3,778개의 교구로 더 세분화된다. 지방 자치체는 '알데아'(작은 마을) 또는 '루가레스'(지역)로 더 나뉠 수 있는 교구로 나뉜다. 이러한 작은 지역으로의 분할은 스페인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특이하다. 스페인에서 명명된 인구 단위의 대략 절반이 갈리시아에 있으며, 갈리시아는 국토 면적의 5.8%만을 차지한다. 갈리시아에는 100만 개가 넘는 명명된 지역이 있으며, 그중 40,000개 이상이 공동체인 것으로 추정된다.[66]
역사적으로 갈리시아에는 7개의 현(베탄소스, 라코루냐, 루고, 몬도녜도, 오렌세, 산티아고, 투이)이 있었지만, 현재는 4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3개의 코마르카 (자치주와 자치체 중간 단위), 314개의 자치체, 3778개의 교구로 나뉜다.
| 현 | 현도 | 면적 (km2) | 인구 (명) | 인구 밀도 (명/km2) | 자치체 수 |
|---|---|---|---|---|---|
| 아 코루냐 현 | 아 코루냐 | 7950.4km2 | 1,146,458 | 144.2 | 93 |
| 루고 현 | 루고 | 9856.1km2 | 353,504 | 35.9 | 67 |
| 오렌세 현 | 오렌세 | 7273.4km2 | 335,219 | 46.1 | 92 |
| 폰테베드라 현 | 폰테베드라 | 4494.5km2 | 962,472 | 214.1 | 62 |
| 계 | 29574.4km2 | 2,797,653 | 94.6 | 314 |
갈리시아 주의 수도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다. 인구가 많은 주요 자치체는 다음과 같다. 항만 도시인 비고가 가장 크다.
| 순위 | 자치체 | 현 | 인구 |
|---|---|---|---|
| 1 | 비고 | 폰테베드라 현 | 299,088 |
| 2 | 아 코루냐 | 아 코루냐 현 | 246,047 |
| 3 | 오렌세 | 오렌세 현 | 108,673 |
| 4 | 루고 | 루고 현 | 97,635 |
| 5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아 코루냐 현 | 94,824 |
| 6 | 폰테베드라 | 폰테베드라 현 | 81,891 |
| 7 | 페롤 | 아 코루냐 현 | 73,638 |
| 8 | 나론 | 아 코루냐 현 | 38,285 |
| 9 | 빌라가르시아 데 아로사 | 폰테베드라 현 | 37,926 |
| 10 | 오레이로스 | 아 코루냐 현 | 33,550 |
11위부터 20위까지도 아 코루냐 현의 자치체가 6곳, 폰테베드라 현의 자치체가 4곳으로, 연안부와 내륙부 간의 인구 격차가 해마다 확대되고 있다. 상위 7위까지를 7개 도시(sete cidades)라고 부른다.
수도 산티아고(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공항), 비고(비고 공항), 아 코루냐(아 코루냐 공항)에는 공항이 있으며, 스페인 주요 도시 외에도 인근 국가에서 출발하는 항공편도 있다. 2012년에는 아 코루냐-오렌세 간 고속 철도 AVE가 개통되었다.
5. 인구
갈리시아에는 갈리시아인과 에스파냐인, 포르투갈인이 거주한다.[79] 19세기 이후 갈리시아인들은 남아메리카와 중앙 유럽으로 이주했으며,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서 인구 중심지와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갈리시아의 인구는 스페인의 다른 지역보다 더 느리게 성장해 왔다. 1857년 갈리시아는 스페인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았으며 전국 인구의 11.5%를 차지했지만, 2007년에는 6.1%만이 거주하고 있다.
200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갈리시아의 출산율은 여성 1명당 1.03명으로, 전국 평균 1.38명보다 낮으며 인구 유지를 위한 2.1명에도 미치지 못한다.[79] 루고 도 및 오렌세 도는 각각 0.88명과 0.93명으로 스페인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인다.[79]
1999년 이후 갈리시아의 출생자 수는 증가하고 있다. 2006년 갈리시아에서는 21,392명의 출생이 등록되었으며,[80] 이는 2005년보다 300명 더 많은 수치이다. 1981년 이후 갈리시아의 기대 수명은 더 높은 삶의 질 덕분에 5년 증가했다.[81][82]
- 출생률 (2006년): 1,000명당 7.9명 (스페인 전체: 1,000명당 11.0명)
- 사망률 (2006년): 1,000명당 10.8명 (스페인 전체: 1,000명당 8.4명)
- 출생 시 기대 수명 (2005년): 80.4세 (스페인 전체: 80.2세)
- * 남성: 76.8세 (스페인 전체: 77.0세)
- * 여성: 84.0세 (스페인 전체: 83.5세)
INE에서 조사한 갈리시아 지방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
| 연도 | 인구 |
|---|---|
| 1900 | 1,980,515 |
| 1910 | 2,063,589 |
| 1920 | 2,124,244 |
| 1930 | 2,230,281 |
| 1940 | 2,495,860 |
| 1950 | 2,604,200 |
| 1960 | 2,602,962 |
| 1970 | 2,683,674 |
| 1981 | 2,811,942 |
| 1991 | 2,731,669 |
| 2001 | 2,695,880 |
| 2011 | 2,772,928 |
| 2021 | 2,698,177 |
20세기 중반에는 아 코루냐, 비고를 비롯하여 오렌세, 폰테베드라 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같은 다른 주요 갈리시아 도시에서 인구가 급증했지만, 스페인 내전 이후 농촌 인구는 감소했다. 경제 발전과 농업의 기계화로 인해 농지가 버려졌고, 대부분의 인구가 주요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동했다. 서비스 산업과 지식 기반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가 상당히 증가했다.
갈리시아의 주요 도시 및 인구는 다음과 같다.
| rowspan=13 width:100| | style="text-align:center;"| | 지방 자치 단체 | 도 | 인구 (2021년) | style="text-align:center;"| | 지방 자치 단체 | 도 | 인구 (2021년) | |
|---|---|---|---|---|---|---|---|---|---|
| 1 | 비고 | 폰테베드라 도 | 292,374 | 13 | 카르발료 | 아 코루냐 도 | 31,414 | ||
| 2 | 아 코루냐 | 아 코루냐 도 | 244,700 | 14 | 쿠예레도 | 아 코루냐 도 | 30,758 | ||
| 3 | 오렌세 | 오렌세 도 | 103,756 | 15 | 레돈델라 | 폰테베드라 도 | 29,192 | ||
| 4 | 루고 | 루고 도 | 97,211 | 16 | 리베이라 | 아 코루냐 도 | 26,839 | ||
| 5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 아 코루냐 도 | 98,179 | 17 | 캉가스 데 모라소 | 폰테베드라 도 | 26,708 | ||
| 6 | 폰테베드라 | 폰테베드라 도 | 82,828 | 18 | 캄브레 | 아 코루냐 도 | 24,616 | ||
| 7 | 페롤 | 아 코루냐 도 | 64,158 | 19 | 마린 | 폰테베드라 도 | 24,248 | ||
| 8 | 나론 | 아 코루냐 도 | 38,913 | 20 | 폰테아레아스 | 폰테베드라 도 | 22,942 | ||
| 9 | 빌라르시아 데 아로사 | 폰테베드라 도 | 37,545 | 21 | 아 에스트라다 | 폰테베드라 도 | 20,261 | ||
| 10 | 올레이로스 | 아 코루냐 도 | 37,271 | 22 | 라린 | 폰테베드라 도 | 20,199 | ||
| 11 | 아르테이소 | 아 코루냐 도 | 33,076 | 23 | 오 포리뇨 | 폰테베드라 도 | 20,212 | ||
| 12 | 아메스 | 아 코루냐 도 | 32,095 | 24 | 모아냐 | 폰테베드라 도 | 19,496 | ||
갈리시아는 서유럽의 많은 농촌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이주로 역사가 특징지어진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는 바르셀로나, 빌바오, 사라고사, 마드리드와 같은 스페인의 산업 도시로 상당한 내부 이주가 이루어졌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멕시코, 브라질, 쿠바로 이민을 갔다.
갈리시아 외부에 갈리시아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은 두 도시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인근 몬테비데오이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 스페인 시대에는 갈리시아에서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국 등 다른 유럽 국가로의 새로운 이주 물결이 있었다.
갈리시아의 외국 출생 인구 비율은 2.9%에 불과하다. 갈리시아에 거주하는 외국 국적자 중 17.93%는 포르투갈인, 10.93%는 콜롬비아인, 8.74%는 브라질인이다.
6. 언어
갈리시아어(Galego)는 라틴어와 사촌지간되는 언어로, 에스파냐어보다는 포르투갈어와 가깝다. 4세기 동안 갈리시아어는 갈리시아의 유일한 공용어였다. 하지만 20세기말에 갈리시아어는 에스파냐의 공식어 지위를 얻게 되었고, 에스파냐어와 갈리시아어가 갈리시아에서 사용되었다.[88]
초기 갈리시아포르투갈어(Galego-Português)는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로 나뉘었으며, 이 두 개 언어는 갈리시아와 포르투갈에서 사용된다.[87]
갈리시아에는 두 개의 공용어가 있는데, 갈리시아어(galegogl)와 스페인어(스페인에서는 ''Castellano'', 즉 "카스티야어"라고도 함)는 모두 로망스어군에 속한다. 갈리시아어는 지역적으로 기원했고, 카스티야어는 카스티야와 관련이 있었다. 갈리시아어는 갈리시아 자치 규약에서 갈리시아의 ''lingua propia'' ("고유 언어")로 인정받고 있다.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는 갈리시아-포르투갈어로 알려진 중세 시대의 공통 단계를 공유한다.[87] 중세 후기부터 포르투갈의 독립은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가 발전하면서 갈라지도록 했다.[88] 갈리시아에서는 독립된 언어로 간주되지만,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 사이의 공유된 역사는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2014년 갈리시아 의회는 포르투갈어 진흥 및 루소포니와의 관계에 관한 법률 1/2014를 승인했다.[89]
공식 갈리시아어는 문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갈리시아 왕립 아카데미(갈리시아어: Real Academia Galega)에 의해 표준화되었다. 지역 방언이 존재하지만, 갈리시아 언론은 이 표준 형태를 따르며, 이는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교육에서도 사용된다. 전 세계에 3백만 명이 넘는 갈리시아어 사용자가 있다.[88] 갈리시아어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150개 언어 중 하위 순위에 속한다.[44]
4세기가 넘는 카스티야 지배 기간 동안, 스페인어는 갈리시아의 유일한 공용어였다. 갈리시아어는 도시 지역에서 일상적인 사용에서 사라졌다. 스페인 민주주의 재건 이후, 특히 ''Lei de Normalización Lingüística'' ("언어 정상화법", Ley 3/1983, 1983년 6월 15일)의 통과와 시행 이후, 대중 교육을 받은 첫 세대 학생들은 갈리시아어로 수업을 들었다. (스페인어도 가르치고 있다.)
20세기 후반과 갈리시아 자치구의 설립 이후, 갈리시아어는 부활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대부분 제2 언어로 사용된다.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갈리시아 인구의 99.16%가 이 언어를 이해하고, 91.04%가 말하며, 68.65%가 읽을 수 있고, 57.64%가 쓸 수 있었다.[90] 처음 두 숫자는 (이해와 말하기) 10년 전의 응답과 거의 같았다. 그러나 갈리시아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인구의 비율은 크게 증가했다. 10년 전에는 인구의 49.3%만이 갈리시아어를 읽을 수 있었고, 34.85%만이 쓸 수 있었다. 프랑코 시대에는 갈리시아어 교육이 금지되었다. 오늘날 노인들은 그 시대 때문에 언어를 말할 수는 있지만 쓰기 능력은 없을 수 있다.[90] 스페인의 지역 언어 중에서 갈리시아어는 인구에서 가장 높은 사용률을 보인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자치 공동체의 국민당의 행위는 갈리시아어로 학교에서 교육을 차량 언어로 하고 일부 과목의 학습에 사용하는 가능성을 금지하여, 갈리시아어의 단일 언어 사용과 언어 대체가 증가하고 있다.
갈리시아-포르투갈어로 된 가장 초기의 알려진 문서는 1228년에 작성되었다. ''Foro do bo burgo do Castro Caldelas''는 레온의 알폰소 9세가 Allariz 마을의 헌법을 모델로 하여 카스트로 칼델라스의 부르고 마을에 부여했다.[91] 뚜렷한 갈리시아 문학이 중세 시대에 등장했다. 13세기에는 갈리시아-포르투갈어로 로망스 정경에 중요한 기여가 이루어졌으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음유 시인 마르틴 코닥스, 사제 아이라스 누네스, 포르투갈의 디니스 왕, 그리고 스페인어 표준화 과정을 시작한 군주인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인 ''알폰소 오 사비오''("현명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시대에 갈리시아-포르투갈어는 이베리아 로망스어 언어 문화에서 사랑의 시의 언어로 여겨졌다. 코닥스와 다른 대중 문화 인물들의 이름과 기억은 현대 갈리시아에 잘 보존되어 있다.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주로 갈리시아인에 의해 갈리시아어가 사용되며, 카스티야어(스페인어)와 함께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초등 교육에서는 갈리시아어와 카스티야어 모두 가르치며, 갈리시아어로 고등 교육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
갈리시아어는 카스티야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과 마찬가지로 속라틴어에서 변화한 로망스어군의 하나이다. 특히 포르투갈어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중세 이후 포르투갈이 독립하여 지역이 정치적으로 분리되기 이전에는 하나의 언어 공동체(갈리시아-포르투갈어)를 형성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독립 이후,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는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주로 발음과 어휘 면에서 차이가 생겼기 때문에, 현재는 다른 두 언어로 간주된다. 특히 정치적으로 분리되기 전에 언어적 일체성을 가지고 있던 두에로강 이북의 포르투갈어와는 음운적으로도 공통점이 많아, 이 지역의 포르투갈어 화자와 갈리시아어 화자는 의사 소통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한다.
민주화 이후의 교육으로, 현재 거의 모든 주민이 갈리시아어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일상적으로 갈리시아어를 사용하는 화자 인구는 감소 추세에 있다. 특히, 해안 지역의 아 코루냐, 페롤, 폰테베드라, 비고 등의 도시의 시가지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반대로, 내륙부의 산티아고, 루고, 오렌세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2010년, 일상적으로 갈리시아어만 사용하거나, 주로 갈리시아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50%를 밑돌았다는 보고가 있었다.
7. 문화
갈리시아 요리는 생선과 조개류를 자주 사용한다. 엠파나다는 고기 또는 생선 파이로, 빵과 같은 밑면, 윗면, 껍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기 또는 생선 속은 보통 양파와 마늘을 포함한 토마토 소스에 들어 있다. 칼도 갈레고는 감자와 그렐로(브로콜리 라베)라는 지역 채소를 주재료로 하는 푸짐한 수프이다. 그렐로는 돼지 어깨살을 그렐로스, 감자, 초리소와 함께 삶아서 만드는 카니발 요리인 ''라콘 콘 그렐로스''에도 사용된다. 센톨라는 킹크랩과 같으며, 산 채로 삶아 껍질처럼 몸통을 열고 내장을 격렬하게 섞어 조리한다.
문어는 삶아서(전통적으로 구리 냄비에) 나무 접시에 담아 작게 썰어 올리브 오일, 바다 소금, 피멘톤(스페인 파프리카)을 뿌려 먹는다. 이 요리는 ''pulpo a la gallega''(풀포 아 라 갈레가) 또는 갈리시아어로 ''polbo á feira''(폴보 아 페이라)라고 불리며, '박람회 스타일 문어'로 번역된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치즈를 생산하는데, 가슴 모양에서 유래된 테티야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빌라바의 산 시몬 치즈와 아르수아-울로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크림 치즈도 유명하다. 고전적인 요리로는 밀가루, 육수 또는 우유, 달걀로 만든 크레이프와 같은 팬케이크인 ''필로아스''가 있다. 돼지 도살 축제에서 요리할 때는 동물의 피가 들어갈 수도 있다. 타르타 데 산티아고(성 야고보의 케이크)는 아몬드를 주재료로 하는 갈리시아의 대표적인 디저트로, 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갈리시아 전역에서 생산된다.
갈리시아는 원산지 명칭(Denominación de orixe, D.O.)을 가진 30개의 제품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데노미나시온 데 오릭세 프로테히다''(Denominación de Orixe Protexida, D.O.P.)를 획득했다.[95] D.O.와 D.O.P.는 스페인 최고 생산자들의 품질과 지리적 원산지를 규제하는 시스템의 일부이다.
갈리시아는 알바리뇨, 리베이로, 리베이라 사크라, 몬테레이 및 발데오라스를 포함한 여러 가지 고품질 갈리시아 와인을 생산한다. 사용되는 포도 품종은 지역 고유종이며 갈리시아와 북부 포르투갈 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우가르덴테는 '불타는 물'을 의미하는 증류주로, 스페인과 국제적으로는 오루호로, 갈리시아에서는 카냐로 불린다. 이 술은 포도 포도 찌꺼기를 증류하여 만든다.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의 전통 음악은 칸타브리아 인접 지역과 유사한 특징적인 민속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백파이프 사용이 두드러진다. 대표적인 음악가와 그룹은 다음과 같다.
- 루아르 나 루브: 전통 갈리시아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밴드. 마이크 올드필드 등과 협업했다.
- 카를로스 누녜스: 더 치프턴스와의 오랜 친분으로 유명하다.
- 수사나 세이바네: 뛰어난 기교를 가진 파이퍼. 파이프 제작자 집안 출신으로, 어린 시절 인형 대신 파이프를 선호했다고 한다.
- 밀라도이로
- 크리스티나 파토: 백파이퍼이자 요요 마의 실크로드 앙상블 멤버.
- 탄수게이라스
- 베로게토
- 상그레 데 무에르다고: 전설적인 갈리시아 네오 크러스트 펑크 밴드 에카이아의 멤버인 파블로 C. 우르수손이 이끄는 포레스트 포크 밴드.
- 안드레스 수아레스: 페롤 출신의 싱어송라이터로, 시적이고 통찰력 있으며 종종 낭만적인 가사로 알려져 있다.
- 로스 수아베스: 1980년대 초부터 활동해온 오렌세 출신의 하드 록/헤비 메탈 밴드
- 딜럭스: 호엘 로페스가 이끄는 아 코루냐 출신의 팝/록 밴드
- 시니에스트로 토탈: 펑크 록
- 오스 레센티도스: 1980년대 안톤 레이샤가 이끌었음
- 에레데이로스 다 크루스: 갈리시아어로 노래하는 록 밴드
- 이반 페레이로
- 호엘 로페스
- 발라
- 트리안굴로 데 아모르 비사로
- 아리트미아
- 브로아
- 치차론
- 디오스 케 테 크루: 사회 비판적인 가사를 담은 강력한 힙합 밴드.
- 에제타에르레
- 말란드로메다
- 레벨리옴 도 인프라문도
갈리시아-포르투갈어는 12세기와 13세기에 문학 언어로 등장하여 갈리시아-포르투갈어 서정시의 풍부한 서정시 전통이 발전했고, 15세기까지 법률 및 개인적인 텍스트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530년부터 18세기 말까지 ''세쿨로스 에스쿠로스''(Séculos Escuros, "암흑 시대") 동안 스페인어에 밀려 주요 문학 및 법적 기록에서 사라졌다.

18세기, 특히 19세기(''렉수르디멘토'' ''부활'')에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마누엘 무르기아, 마누엘 레이라스 풀페이로, 에두아르도 폰달과 같은 작가들과 함께 문학 언어로 부활했다. 20세기에는 스페인 내전 전에 ''이르만다데스 다 팔라''(Irmandades da Fala, "언어의 형제애")와 ''노스 그룹''(Grupo Nós)에 비센테 리스코, 라몬 카바닐라스, 카스텔라오 등이 활동했다.
프랑코 독재 기간 동안 갈리시아어의 공적 사용은 크게 억압되었지만, 민주주의 회복 이후 다시 부활했다. 노벨상 수상자 카밀로 호세 셀라는 주로 카스티야어로 작품을 썼지만, ''두 명의 죽은 남자를 위한 마주르카'' 등 일부 작품은 갈리시아를 배경으로 하며 갈리시아 민속, 관습, 언어를 자주 언급한다. 발레-인클란, 웬세슬라오 페르난데스 플로레스, 에밀리아 파르도 바잔, 곤잘로 토렌테 바예스테르 등도 스페인어로 글을 썼지만 갈리시아를 주제로 다루었다. 갈리시아어로 활동하는 현대 작가로는 호세 루이스 멘데스 페린, 마누엘 리바스, 추스 파토, 수소 데 토로 등이 있다.
주요 기념일 및 축제는 다음과 같다.
- 산 호세의 날gl (세인트 조셉의 날): 3월 19일 (엄격한 종교적 휴일)
- 노동절gl (메이데이): 5월 1일
- 갈리시아 문학의 날gl: 5월 17일
- 갈리시아 국가의 날gl (갈리시아 국경일, 성 야고보 축일): 7월 25일
- 우리 성모의 날gl: 8월 15일 (엄격한 종교적 휴일)

- ''Entroido'' 또는 사육제는 갈리시아의 전통 축제로서,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에 의해 금지되기도 했다. 라사, 베린, 신소 데 리미아에서 유명하다.
- 코르푸스 크리스티 축제는 폰테아레아스에서 1857년부터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 주말 이후에 열리며, 꽃 카펫으로 유명하다. 1968년 관광 관심 축제, 1980년 국가 관광 관심 축제로 지정되었다.
- 페이라 프랑카는 9월 첫째 주말에 폰테베드라에서 열리는 1467년 야외 시장 재현 행사이다. 15, 16세기 폰테베드라의 번영을 기념하며 역사 재현, 연극, 애니메이션, 예술 활동 시연 등이 진행된다. 2000년부터 매년 개최된다.
- 아르데 루쿠스는 6월에 열리며, 루고의 켈트족과 로마 역사를 기념하며 켈트족 결혼식, 로마 서커스 등을 재현한다.
- 성 요한 축제인 ''Noite de San Xoán'' 또는 ''Noite da Queima''는 켈트 시대부터 하지를 기념해 온 축제로, 성 요한 축일 전날에 기독교화되었다. ''메이가스''(악의적인 마녀)를 쫓아내는 불꽃이 특징이며, 아 코루냐에서 특히 중요하여 스페인 국가 관광 관심 축제로 지정되었다. 도시 전체가 각 구역에서 큰 불꽃을 만들고, 리아소르와 오르잔 해변에서 축제가 열린다. 구운 정어리도 유명하다.
- 사부세도에서 열리는 Rapa das Bestas ("짐승의 털깎이")는 7월 첫째 주말에 열리는 행사로, 1963년 국가 관광 관심 축제로 지정되었다. 야생 망아지를 산에서 몰아와 ''쿠로''라는 폐쇄된 지역에서 갈기를 자르고 표식을 새기며, 겨울을 보낸 동물들을 돕는다. 사부세도에서는 ''알로이터도레스''("격투가")가 도움 없이 임무를 수행한다.
- 페스티벌 데 오르티게이라 (오르티게이라 켈트 세계 축제)는 7월에 오르티게이라에서 4일 동안 열리는 축제로, 1978–1987년에 처음 열리고 1995년에 부활했다. 켈트 문화, 민속 음악, 스페인과 세계 각지의 다양한 사람들의 만남을 기반으로 하며, 10만 명 이상이 참석하는 국가 관광 관심 축제이다.
- 페스타 다 도르나: 7월 24일, 리베이라에서 열리는 축제로, 1948년에 설립되었으며 2005년 갈리시아 관광 관심 축제로 지정되었다. 친구 그룹의 농담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란 프릭스 데 카릴라나스(수제 보트 경주), 이카루스 무동력 비행상, 칸시온 데 타스카(음악 경연) 등이 진행된다.
- 페스타스 도 아포스톨 산티아고 (사도 야고보 축제): 갈리시아의 수호 성인을 기리는 행사로 보름 동안 열린다. 종교적 축하는 7월 24일에 열리며, 불꽃놀이와 성당 정면 모양의 불꽃놀이 성이 특징이다.
- 로메리아 바이킹가 데 카토이라 ("카토이라 바이킹 축제"): 8월 첫째 일요일에 열리는 세속 축제로, 1960년부터 개최되었으며 2002년 국제 관광 관심 축제로 지정되었다. 갈리시아의 역사적 방어와 노르만 및 사라센 해적 공격으로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보물을 기념한다.
- 페스타스 다 페레그리나: 8월 둘째 주에 폰테베드라에서 열리며, 폰테베드라의 순례 성모를 기념한다. 투우 축제도 함께 열리며, 폰테베드라는 영구적인 투우장이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 페스타 데 산 프로일란: 10월 4–12일, 루고시의 수호 성인을 기념하는 국가 관광 관심 축제이다. 2008년에는 1,035,000명이 참석했으며,[96] 문어 요리인 ''폴보 아 페이라''를 제공하는 부스가 유명하다.
- 페스타 도 마리스코 (해산물 축제): 10월, 오 그로브에서 열리는 축제로, 1963년에 설립되었으며 1980년대에 국가 관광 관심 축제로 지정되었다.
2015년 갈리시아에서는 단 다섯 번의 투우가 열렸다.[97]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갈리시아인의 92%가 투우에 반대하며, 이는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갈리시아 메요르 센 투라다스'' ("투우 없는 갈리시아가 더 좋다")와 같은 단체들은 정치인들이 투우 폐지 약속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특히 PP와 PSOE가 통치하는 지방 의회의 코리다 보조금 지급을 비판한다. 폰테베드라 지방 정부는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고 "투우 없는 곳"으로 선언했으며,[98] 아 코루냐 지방 정부는 투우 폐지를 지지하는 문서를 승인했다.[99]
갈리시아는 20세기 초 스페인 스포츠 클럽 창설과 함께 오랜 스포츠 전통을 가지고 있다. 가장 인기 있는 팀은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와 셀타 비고이며, 두 팀의 경기를 갈리시아 더비라고 한다. 데포르티보는 1999-2000 시즌 라 리가에서 우승했다.
폰테베드라의 폰테베드라 CF와 페롤의 레이싱 페롤, CD 루고, SD 콤포스텔라도 주목할 만한 클럽이다. 갈리시아 축구 연맹은 국제 경기를 위해 국가대표팀을 구성한다.
축구 외에 인기 있는 팀 스포츠는 풋살, 핸드볼, 농구이다. 농구에서는 오브라도이로 CAB가 가장 성공적인 팀이며, 현재 리가 ACB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갈리시아 팀이다. CB 브레오간, 클럽 오렌세 발론체스토, OAR 페롤도 있다. 핸드볼에서는 클럽 발론만 캉가스가 최상위 리그 (리가 ASOBAL)에서 활동하며, 폰테베드라 지방에서 특히 인기가 많다. SD 테우크로 (폰테베드라), 옥타비오 필로테스 포사다 (비고), SD 차펠라 (레돈델라)는 상위 두 디비전에 속해 있다.
롤러 하키에서는 HC 리세오가 유럽 및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을 차지하며 가장 성공적인 갈리시아 팀이다. 풋살 팀으로는 로벨레 산티아고와 아즈카르 루고가 있다.
갈리시아는 조정, 요트, 카누, 서핑 등 수상 스포츠 참여 전통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비드 칼, 카를로스 페레스 리알, 페르난도 에차바리 등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갈리시아 트라이애슬론 선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고메스 노야와 이반 라냐는 세계 챔피언이었다. 2006년 사이클 선수 오스카 페레이로는 미국 선수 플로이드 랜디스가 실격되면서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했다. 추스 라고는 산소 보충 없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세 번째 여성이다.
2022년에는 사이클 경주 오 그란 카미뇨가 처음 개최되었고,[100] 스페인 전설 알레한드로 발베르데가 우승했다. 이후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자 요나스 빈게고르가 시즌 데뷔를 하는 장소로 유명해졌으며, 2023년과 2024년에 모두 우승했다.
2011년부터 게일 축구 팀이 창설되었다. 필로스 데 브레오간(아 코루냐)을 시작으로 아르타브로스(올레이로스), 이르만디뇨스(아 에스트라다), SDG 코르보스(폰테베드라), 수에비아(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창설되었으며, 갈리시아 리그 창설이 논의되었다.[101] 갈리시아는 GAA에 의해 국가대표로 인정받는 게일 축구팀을 구성하여 2012년 7월 브르타뉴를 꺾었고, 이는 스페인 전국 언론에 보도되었다.[102]
럭비 유니온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지만, 지역 팀의 성공은 지중해 연안이나 대도시에 기반을 둔 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 출신의 숙련된 외국인 선수들의 부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갈리시아는 자체 여성, 어린이, 남성 리그를 조직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럭비 연맹을 가지고 있다. 또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다른 지역과의 친선 경기를 위해 국가대표팀을 구성했다. 브라질 살바도르에 있는 갈리시아 출신 외국인 선수들은 현지 축구 클럽의 자매 팀인 갈리시아 럭비도 결성했다.

금색 성배가 청색 바탕에 새겨진 문장은 13세기부터 갈리시아를 상징해 왔다. "성배"와 ''Galyce'' (고대 노르만어로 "갈리시아")의 음운적 유사성 때문에 말장난 문장으로 시작되었으며, 13세기 유럽의 모든 기독교 왕국을 나타내는 영국의 중세 문장 롤인 ''Segar's Roll''에 처음 기록되었다.
이후 갈리시아 문장은 다양하게 변화했다. 다양한 모양과 여러 개의 성배(처음에는 3개, 나중에는 1개 또는 5개)가 사용되었고, 16세기에 성배 수가 하나로 고정되었다. 수 세기 후 청색 배경에 십자가가 추가되었고, 나중에는 은색 성체도 추가되었다. 그 이후 왕국의 문장은 지금까지 유지되었다.
갈리시아 왕국의 고대 기는 19세기까지 주로 문장을 기반으로 했다. 1833년 스페인 정부가 왕국을 폐지하고 4개의 주로 분할하면서 갈리시아 문장과 기는 법적 지위와 국제적 효력을 잃었다. 19세기 후반, 일부 갈리시아 지식인(민족주의 정치인 및 작가)이 새로운 국가적 단결의 상징으로 흰색 배경에 대각선 줄무늬가 있는 새 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기는 프랑코 독재 정권 몰락 후인 1984년에 "갈리시아 공식 기"로 지정되었다. 갈리시아 왕립 아카데미는 갈리시아 정부에 고대 왕국 문장을 현대 기에 통합할 것을 요청했고, 이후 기에 문장이 포함되었다.
갈리시아는 문장과 기 외에도 자체적인 국가를 가지고 있다. "왕국의 장엄 행진곡"은 수 세기 동안 비공식적인 국가였지만, 현재의 갈리시아 국가는 1907년에 창작되었으며(작곡은 1880년에 시작), "오스 피노스" ("소나무")라는 제목으로 에두아르도 폰달이 가사를 쓰고 파스쿠알 베이가가 작곡했다. 쿠바 아바나의 갈리시아 이민자들에 의해 1907년에 처음 연주된 이 국가는 1927년부터 1977년까지 여러 스페인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고, 1977년 갈리시아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다.
Dolmen axeitos.JPG|아세이토스(Axeitos)의 ''안타'' (돌멘) , 리베이라. 수백 개의 거석 기념물이 갈리시아에 보존되어 있다.
Cabo Fisterra desde o Monte Pindo.jpg|''피스테라'' 또는 피스테레 곶(Cape Finisterre), '대륙의 끝'을 의미하며 유럽 대륙의 최서단 지점 중 하나이다.
Breogan e Torre de Hércules.jpg|헤라클레스의 탑(Torre de Hércules), 로마 시대의 등대이자 세계 유산 기념물, 아 코루냐
Muros_de_San_Cibrao_de_Las.jpg|철기 시대 오피덤의 문, 산 시브라오 데 라스(San Cibrao de Las)는 갈리시아에서 가장 큰 ''카스트로'' 중 하나이다.
Gaiteiros em romaria galega.jpg|''가이테이로스'', 즉 백파이프 연주자. ''가이타'' ('백파이프')는 가장 대표적인 갈리시아 악기이다.
Queimada_Galicia_4.jpg|''케이마다'', 현지 ''아과르덴테''(grappa)를 부분적으로 태운 후 얻는 전통 음료
2015 Hórreo de Lira. Carnota. Galiza 2.jpg|''오레오'' 또는 ''카바세이로'' 또는 ''카나스트로'', 전통적이고 흔한 곡물 창고
Iglesia de San Jorge, La Coruña, España, 2015-09-25, DD 42.jpg|아 코루냐(A Coruña)의 ''크루세이로'' 또는 길가 십자가, 그리고 산 수르소(San Xurxo) 교회
Ciervo cuernos.jpg|수천 년 된 암각화, 캄포 라메이로의 ''라세 도스 카르바요스'', 이 세부 묘사에는 여러 창에 맞은 사슴이 묘사되어 있다.
Pontevedra 13 Praza da leña.jpg|레냐 광장(Plaza de la Leña), 폰테베드라
Castelo (Monforte de Lemos).jpg|몬포르테 데 레모스의 성과 산 비센테 도 피노 수도원(Monastery of San Vicente do Pino)
Muralla.Lugo.Galicia.jpg|루고 로마 성벽, 세계 유산 기념물
Dorna a vela.jpg|리아 데 아로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어부 배인 ''도르나''
Faro Silleiro.jpg|바이오나의 카보 시에이로(Cabo Silleiro)의 바위 해안


- 갈리시아인
- 갈리시아주의
- 갈리시아 민족주의
현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아 코루냐, 비고에는 대학교가 있으며, 약 10만 명의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교육은 갈리시아어 및 카스티야어로 진행된다.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학교(Universidade de Santiago de Compostela): 1990년에 아 코루냐 대학교와 비고 대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유일한 대학교였으며, 갈리시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대학교이다. 캠퍼스는 산티아고 시내, 구시가지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두 곳과, 루고에도 있다.
; 아 코루냐 대학교(Universidade da Coruña): 1990년 창립. 캠퍼스는 시내에 여러 곳과, 페롤에 있다.
; 비고 대학교(Universidade de Vigo): 1990년 창립. 캠퍼스는 시내에 두 곳, 항만 지구와 시 외곽의 대학 도시, 그리고 폰테베드라와 오렌세에 있다.
갈리시아 지방의 와인 원산지
- D.O. 리아스 바이샤스 - 폰테베드라현. 알바리뇨 품종의 백포도주가 유명하다.
- D.O. 리베이로 (D.O. 리베이로) - 오렌세현 서부. 백포도주, 적포도주. 트레이샤두라 품종(백) 외.
- D.O. 발데오라스 (D.O. 발데오라스) - 오렌세현 동부. 멘시아 품종의 적포도주가 대부분. 고데요 품종의 백포도주도 있다.
- D.O. 리베이라 사크라 (D.O. 리베이라 사크라) - 루고현 남부와 오렌세현 북부. 멘시아 품종의 적포도주가 주종이다.
- D.O. 몬테레이 (D.O. 몬테레이) - 오렌세현 남부. 고데요 품종의 백포도주가 대부분. 멘시아 품종의 적포도주도 있다.
- 아우가르덴테(증류주)
- 케이마다
- 수제 맥주 - 에스트레야 갈리시아, 갈라에키아
- 갈리 콜라(갈리 콜라) - 청량 음료
어패류를 사용한 요리가 유명하다.
8. 경제
섬유, 어업, 축산업, 임업, 자동차 제조는 갈리시아 경제의 가장 역동적인 부문이다. 코루냐현에 본사를 둔 기업들은 갈리시아 기업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67] 아르테이쇼는 코루냐 대도시권의 산업 도시로, 세계 최대 패션 유통업체인 Inditex의 본사가 있다. Inditex의 8개 브랜드 중 자라(Zara)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스페인 브랜드이기도 하다.[68] 2022년 Inditex는 326억유로의 매출과 41억유로의 순이익을 기록했다.[69] 이 회사의 회장인 아만시오 오르테가는 스페인[70]과 유럽[71]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순자산이 450억유로에 달한다.
갈리시아의 주요 경제 부문은 어업이며, 주요 항구는 아 코루냐, 마린-폰테베드라, 비고 및 페롤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럽 어업 통제 기구는 유럽 연합 해역의 어업 통제를 조정하며 비고에 본부를 두고 있다.
갈리시아는 경제적 대조를 이루는 곳이다. 주요 인구 중심지와 어업 및 제조업이 있는 서부 해안은 번영하고 인구가 증가하는 반면, 내륙 지역인 오렌세와 루고는 '미니푼디오'라고 불리는 소규모 토지 소유에 기반한 전통적인 농업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관광, 지속 가능한 임업, 유기농 및 전통 농업의 부상은 자연 자원과 지역 문화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갈리시아 경제에 다른 가능성을 가져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갈리시아는 주로 농업과 어업에 의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경제의 3차 산업(서비스업)이 가장 크며, 2002년 현재 지역 전체 노동자 1,072,000명 중 582,000명이 종사하고 있다.
2차 산업(제조업)에는 비고, 마린-폰테베드라 및 페롤의 조선업, 아 코루냐의 섬유 및 화강암 가공이 포함된다. 아 코루냐는 또한 자동차를 제조한다. 1958년에 설립된 프랑스 ''PSA 푸조 시트로엥 비고 센터''는 연간 약 450,000대의 차량을 생산하며(2006년에는 455,430대),[72] 2007년에 생산된 시트로엥 C4 피카소는 9백만 번째 차량이었다.[73]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상당한 매출을 올리는 다른 기업으로는 폰테베드라에 본사를 둔 건설 부문의 '''산 호세''', 아 코루냐에 본사를 둔 가디사와 베고, 폰테베드라에 본사를 둔 프로이즈가 있으며, 이들은 소매 부문과 관련되어 있다.[67]
갈리시아에는 저축 은행과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두 개의 상업 은행인 방코 에체베리아(가장 오래됨)와 방코 파스토르가 있으며, 2011년부터 방코 포풀라르 에스파뇰의 소유이다.
갈리시아는 수십 년 동안 스페인을 휩쓸었던 관광 붐을 늦게 따라갔지만, 해안 지역(특히 리아스 바이샤스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은 현재 중요한 관광지가 되었으며, 대부분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서 온 방문객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 2007년 갈리시아를 방문한 관광객은 5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8% 증가했으며, 이 부문의 지속적인 성장 패턴의 일부이다.[74] 갈리시아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85%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방문한다.[74] 관광은 갈리시아 GDP의 12%를 차지하며 지역 노동력의 약 12%를 고용한다.[74]
2018년 자치 공동체의 국내총생산(GDP)은 626억유로로 스페인 경제 생산량의 5.2%를 차지했다. 구매력 기준 조정된 1인당 GDP는 같은 해 24900EUR 또는 EU27 평균의 82%였다. 종업원당 GDP는 EU 평균의 95%였다.[75]
실업률은 2017년에 15.7%였으며 전국 평균보다 낮았다.[76]
| 연도 | 2006 |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
| 실업률(%) | 8.3 | 7.6 | 8.6 | 12.4 | 15.3 | 17.3 | 20.5 | 22.0 | 21.7 | 19.3 | 17.2 | 15.7 |

갈리시아 주의 주요 공항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공항이다. 2014년에 2,083,873명의 승객이 이용했으며, 스페인 내 도시뿐만 아니라 여러 주요 유럽 도시와도 연결된다. 갈리시아에는 아 코루냐 공항 - 알베드로 및 비고-페이아도르 공항 등 2개의 다른 국내 공항이 있다.
가장 중요한 갈리시아 어항은 비고 항구이다. 유럽의 주요 어항 중 하나로, 연간 어획 가치는 15억유로에 달한다.[77][78] 2007년 이 항구는 732951MT의 어류 및 해산물과 약 4000000MT의 기타 화물을 처리했다. 다른 주요 항구로는 아 코루냐, 마린-폰테베드라, 페롤, 빌라가르시아 데 아로사 등 작은 항구와 폰테베드라 시의 주요 레크리에이션 항구, 부렐라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갈리시아에는 120개의 다른 조직화된 항구가 있다.
갈리시아 도로망에는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오토피스타'' 및 ''오토비아''와 나머지 지방 자치 단체로 연결되는 국도 및 지방도가 포함된다. Autovía A-6는 아 코루냐와 루고를 마드리드와 연결하며, 페드라피타 도 세브레이로에서 갈리시아로 진입한다. Autovía A-52는 오 포리뇨, 오렌세 및 베나벤테를 연결하며, 아 구디냐에서 갈리시아로 진입한다. 두 개의 오토비아가 건설 중이다. Autovía A-8은 칸타브리아 해안에서 갈리시아로 진입하여 바아몬데 (루고 주)에서 끝난다. Autovía A-76은 발데오라스에서 갈리시아로 진입한다. 이는 기존 N-120을 오렌세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갈리시아 내에는 페롤에서 포르투갈까지의 Autopista AP-9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오렌세까지의 Autopista AP-53(처음에는 갈리시아 자치 정부에서 건설했기 때문에 AG-53으로도 알려짐)이 있다. 추가 건설 중인 도로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루고까지의 Autovía A-54, 폰테베드라를 통과할 Autovía A-57, 루고에서 오렌세까지의 Autovía A-56이 있다. 갈리시아 자치 정부는 언급된 AG-53, 아 코루냐와 카르바요를 연결하는 Autovía AG-55 또는 폰테베드라와 산셴소를 연결하는 AG-41과 같이 코마르카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갈리시아 최초의 철도 노선은 1873년 9월 15일에 개통되었다. 이 노선은 빌라가르시아 다 아로사의 오 카릴에서 콘소의 코르네스까지 운행되었다. 1875년에는 아 코루냐와 루고를 연결하는 두 번째 노선이 개통되었다. 1883년, 갈리시아는 오 바르코 데 발데오라스를 통해 철도로 처음으로 스페인의 다른 지역과 연결되었다. 오늘날 갈리시아는 약 1100km의 철도 노선을 보유하고 있다. Adif 및 렌페 오페라토라가 운영하는 여러 노선은 갈리시아의 모든 주요 도시를 연결한다. FEVE가 운영하는 노선은 페롤을 리바데오 및 오비에도와 연결한다. 기존 전철 노선은 폰페라다-몬포르테 데 레모스-오렌세-비고 노선이다. 여러 고속철도 노선이 건설 중이다. 이 중에는 2011년에 부분적으로 개통된 올메도-사모라-갈리시아 고속철도 노선과 주요 갈리시아 대서양 연안 도시인 아 코루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폰테베드라 및 비고를 포르투갈과 연결하는 AVE 대서양 축 노선이 있다.
갈리시아 요리는 생선과 조개류를 자주 사용한다. ''엠파나다''(empanada)는 고기 또는 생선 파이로, 빵과 같은 밑면, 윗면, 껍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기 또는 생선 속은 보통 양파와 마늘을 포함한 토마토 소스에 들어 있다. ''칼도 갈레고''(Caldo galego)는 감자와 그렐로(브로콜리 라베)(grelo (broccoli rabe))라는 지역 채소를 주재료로 하는 푸짐한 수프이다. 후자는 또한 전형적인 카니발 요리인 ''라콘 콘 그렐로스''(lacón con grelos)에도 사용되는데, 돼지 어깨살을 ''그렐로스'', 감자, 초리소와 함께 삶아서 만든다. ''센톨라''(Centolla)는 킹크랩과 같다. 산 채로 삶아 껍질처럼 몸통을 열고 내장을 격렬하게 섞어 조리한다. 또 다른 인기 요리는 문어로, 삶아서(전통적으로 구리 냄비에) 나무 접시에 담아 작게 썰어 올리브 오일, 바다 소금, ''피멘톤''(스페인 파프리카)을 뿌린다. 이 요리는 ''pulpo a la gallega''(풀포 아 라 갈레가) 또는 갈리시아어로 ''polbo á feira''(폴보 아 페이라)라고 불리며, '박람회 스타일 문어'로 대략 번역되며, '갈리시아 스타일 문어'로 가장 일반적으로 번역된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치즈를 생산한다. 가장 잘 알려진 치즈는 가슴 모양에서 유래된 ''테티야''(tetilla)이다. 다른 유명한 종류로는 빌라바의 산 시몬 치즈와 아르수아-울로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크림 치즈가 있다. 고전적인 요리로는 밀가루, 육수 또는 우유, 달걀로 만든 크레이프와 같은 팬케이크인 ''필로아스''(filloas)가 있다. 돼지 도살 축제에서 요리할 때는 동물의 피가 들어갈 수도 있다. ''타르타 데 산티아고''(Tarta de Santiago) (성 야고보의 케이크)라고 불리는 유명한 아몬드 케이크는 갈리시아의 달콤한 특산품으로 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갈리시아 전역에서 생산된다.
갈리시아는 ''데노미나시온 데 오리헤''(Denominación de orixe) (D.O.)를 가진 30개의 제품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데노미나시온 데 오릭세 프로테히다''(Denominación de Orixe Protexida) (D.O.P.)를 가지고 있다.[95] D.O.와 D.O.P.는 스페인 최고 생산자들의 품질과 지리적 원산지를 규제하는 시스템의 일부이다. 갈리시아는 알바리뇨, 리베이로, 리베이라 사크라, 몬테레이 및 발데오라스를 포함한 여러 가지 고품질 갈리시아 와인을 생산한다. 사용되는 포도 품종은 지역 고유종이며 갈리시아와 북부 포르투갈 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갈리시아에서 유명한 것은 ''아우가르덴테''(Augardente)라는 증류주인데, 그 이름은 '불타는 물'을 의미하며, 스페인과 국제적으로는 오루호로, 갈리시아에서는 카냐로 불린다. 이 증류주는 포도 포도 찌꺼기를 증류하여 만든다.
갈리시아의 주요 기업은 다음과 같다:
- 노바 카이샤 갈리시아 - 2010년 11월 29일 카이샤 갈리시아와 카이샤노바의 합병으로 탄생.
- 갈리시아 은행
- 파스토르 은행 -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은행.
- 에체베리아 은행 -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
- 페스카노바
- 칼보
- 인디텍스 - 자라(갈리시아어: Zara)를 세계적으로 전개. 본사는 아 코루냐 근교의 아르테이쇼에 있다.
- 아돌포 도밍게스
- 로베르토 베리노
- 나반티아
스페인의 대표적인 전력 회사 우니온 페노사의 전신 회사 중 하나인 페노사(FENOSA, Fuerzas Eléctricas del Noroeste S.A)는 아 코루냐에서 설립되었다.
9. 정치



갈리시아는 1978년 3월 16일에 설립되고 1981년 4월 28일에 비준된 갈리시아 자치 헌장에 의해 자치 정부 형태의 부분적인 자치를 누리고 있다. 삼권 분립에 따라 갈리시아 훈타[62] (행정부), 갈리시아 의회 (입법부), 갈리시아 고등 법원과 하위 법원 (사법부)의 세 정부 기관이 있다.
갈리시아 정부는 행정 및 관리 권한을 가진 집단으로, 대통령, 부통령 1명, 그리고 1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행정 권한은 대부분 산하 기구에 위임되며, 아 코루냐, 폰테베드라, 오렌세, 루고에 있는 지방 의회()의 활동을 조정한다. 대통령은 정부의 행위를 지휘하고 조정하며, 자치 지역과 갈리시아의 스페인 국가를 대표한다. 대통령은 의회 구성원이며, 의원들에 의해 선출된 후 스페인 국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임명된다.
갈리시아 의회[63]는 보통 선거로 선출된 75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비례 대표제를 따른다. 국외 거주 갈리시아인도 선거권을 가지며, 선거는 4년마다 실시된다. 2020년 7월 12일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64]
- 갈리시아 국민당(PPdeG): 42석 (47.96%)
- 갈리시아 민족주의 블록(BNG): 19석 (23.79%)
- 갈리시아 사회당(PSdeG-PSOE): 14석 (19.39%)
갈리시아에는 314개의 지방 자치체()가 있으며, 각 자치체는 concellogl라 불리는 시장-의회 정부에 의해 운영된다. Entidade local menorgl라는 하위 지방 자치 단체도 있는데, 자체 의회(xunta veciñalgl)와 시장(alcalde da aldeagl)을 가진다. 갈리시아에는 아홉 개의 이러한 단체가 있다: 아르코스 다 콘데사, 벰브리브, 캄포산코스, 첸로, 모르가단스, 파소스 데 레이스, 케이마델로스, 빌라소브로소, 베란.
갈리시아는 전통적으로 약 3,700개의 민간 교구로 세분되며, 각 교구는 ''빌라''(도시), ''알데아''(마을), ''루가레스''(작은 마을), ''바리오스''(지구) 중 하나 이상으로 구성된다. 갈리시아의 이익은 국정에서 하원의 국회의원 25명과 상원의 상원의원 19명(16명 선출, 3명은 갈리시아 의회 임명)에 의해 대표된다.
1975년 프랑코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 물결이 갈리시아에도 찾아왔으나, 다른 주와 달리 1977년 총선에서 중도 우파 민주 중도 연합(UCD)이 승리하여 자치주 정부 설립과 자치주 헌장 제정에 나섰다. 1979년 총선에서도 UCD가 압승했다.
1980년 자치주 헌장안이 주민투표에서 승인되었고, 1981년 제1회 주 의회 선거에서 우파 국민 동맹(AP, 후기 프랑코 정권 각료 다수 소속)이 승리했다. 제2당은 UCD였다.[108] 이후 자치주 의회는 "언어 정상화법", "갈리시아의 깃발", "갈리시아의 날" 등을 제정했다. 자치주는 몇몇 분야에서 자유 재량이 인정된다.
갈리시아는 전통적으로 독립 자영 농민이 많고 보수적인 지역이다. 고유 언어(갈리시아어)를 가졌지만, 바스크나 카탈루냐처럼 보수적 민족주의 정당이 성장하지 못하고, 주로 좌파가 민족주의 정당 중심이다. 결과적으로 민족주의 정당 힘은 양 주에 비해 약하고, 보수적 국민당 지반이 되고 있다. 1990년부터 15년간 프랑코 정권 말기 각료이자 국민 동맹(후의 국민당) 창설자인 마누엘 프라가 이리바르네가 주 수상을 역임했다.
2005년 주 선거에서 주 의회 75석 중 국민당 지역 정당 갈리시아 국민당(PPdeG) 37석, 사회노동당(PSOE) 지역 정당 갈리시아 사회주의자당(PSdeG) 25석, 민족주의 정당 연합 갈리시아 민족주의 블록(BNG) 13석으로 국민당이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이에 갈리시아 사회당(사회노동당)과 갈리시아 민족주의 블록 연립 정권이 탄생, 주 수상에 갈리시아 사회당 에밀리오 페레스 토우리뇨(Emilio Pérez Touriño), 부수상에 갈리시아 민족주의 블록 안쇼 킨타나(Anxo Quintana)가 선출되었다. 2009년 3월 1일 주 선거에서 갈리시아 국민당이 과반수 38석을 얻어 PSdeG와 BNG (각각 25석, 12석)를 누르고 여당 지위를 되찾았다. 갈리시아 국민당 당수 알베르토 누녜스 페이호(Alberte Núñez Feijóo)가 주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 주요 정당
- 엔 마레아: 2015년 총선을 위해 설립된 선거 연합. Anova, EU 외에, 같은 해 지방 선거에서 약진한 마레아 아틀란티카, 콤포스텔라 아베르타, 페롤 엥 콤문, 전국 정당 포데모스로 구성.
- 아노바-일만다데 나시오날리스타 (Anova): 갈리시아 민족주의 정당.
- 에스퀘르다 우니다 (EU): 전국 정당 통일 좌익의 갈리시아 주 연합 정당, 중핵 정당은 갈리시아 공산당.
- 알테르나티바 가레가 데 에스퀘르다 (AGE): Anova와 EU가 2012년 주 선거를 위해 설립한 선거 연합.
- 갈리시아 국민당 (PPdeG): 국민당 지부 정당.
- 갈리시아 사회주의자당 (PSdeG): 스페인 사회노동당 지부 정당.
- 갈리시아 민족주의 블록 (BNG): 갈리시아 민족주의 정당.
- 기타 정당
- 갈리시아 인민 전선 (FPG)
- 갈리시아주의당 (Partido Galeguista)
- 갈리시아의 땅 (Tega)
- 노스-우니다데 포풀라 (Nós-UP)
전 총리이자 국민당 당수 마리아노 라호이 브레이는 갈리시아 출신이다.
: 1981-2009년 출처: Argos(Subdirección de Análisis y Políticas Públicas de la Presidencia de la Generalitat)[111]。2012년 출처: Xunta de Galicia[112]。
| 대 | 성명 | 기간 | 정당 | 비고 |
|---|---|---|---|---|
| 1 | 안토니오 로손 페레스 | 1977년 - 1979년 | UCD | 자치주 창설 전 갈리시아 주 수상 |
| 2 | 호세 키로가 수아레스 | 1979년 - 1981년 | UCD | 자치주 창설 전 갈리시아 주 수상 |
| 3 | 제랄도 페르난데스 알보르 | 1982년 1월 22일 - 1987년 9월 26일 | AP | 초대 갈리시아 자치주 수상 |
| 4 | 페르난도 곤살레스 라체 | 1987년 9월 26일 - 1990년 2월 5일 | PSOE | 제2대 갈리시아 자치주 수상 |
| 5 | 마누엘 프라가 이리바르네 | 1990년 2월 5일 - 2005년 8월 2일 | PP | 제3대 갈리시아 자치주 수상 |
| 6 | 에밀리오 페레스 투리뇨 | 2005년 8월 2일 - 2009년 4월 16일 | PSOE | 제4대 갈리시아 자치주 수상 |
| 7 | 알베르토 누녜스 페이호 | 2009년 4월 16일 - | PP | 제5대 갈리시아 자치주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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