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믈라카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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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믈라카 술탄국은 1402년경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국 왕자 파라메시와라가 건국한 말레이 반도의 이슬람 왕국이다.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아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동해안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믈라카는 16세기 초 포르투갈의 침략으로 멸망했지만, 말레이 문화와 말레이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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믈라카 술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15세기 [[만수르 샤]] 통치 기간 동안의 술탄국의 범위.
15세기 만수르 샤 통치 기간 동안의 술탄국의 범위.
공식 명칭크술타난 믈라유 믈라카
일반 명칭믈라카 술탄국
종교수니 이슬람
존속 기간1400년경–1511년/1528년
수도믈라카 (1400년—1511년)
빈탄 (1511년—1526년)
캄파르 (1526년—1528년)
공용어고전 말레이어
정치 체제절대 군주제
통화주석 잉곳, 천연 금 및 은화
현재 국가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민족믈라카인
술탄
초대 술탄파라메스와라 (이스칸다르 샤 (이름 논쟁 있음)) (1400–1414)
2대 술탄메가트 이스칸다르 샤 (1414–1424)
3대 술탄무함마드 샤 (1424–1444)
4대 술탄아부 샤히드 샤 (1444–1446)
5대 술탄무자파르 샤 (1446–1459)
6대 술탄만수르 샤 (1459–1477)
7대 술탄알라우딘 리아야트 샤 (1477–1481)
8대 술탄마흐무드 샤 (1481–1511)
9대 술탄아흐마드 샤 (1511–1513)
10대 술탄마흐무드 샤 (1513–1528)
븐다하라 (재상)
초대 븐다하라툰 페르파티흐 베사르 (1400–1412)
2대 븐다하라툰 알리 (1445–1456)
3대 븐다하라툰 페락 (1456–1498)
4대 븐다하라툰 페르파티흐 푸티흐 (1498–1500)
5대 븐다하라툰 무타히르 (1500–1510)
6대 븐다하라툰 함자흐 (1510–1511)
역사
건국1400년경
멸망믈라카 점령 (1511년)
분할조호르 술탄국과 페락 술탄국으로 분할 (1528년)
이전
이전 국가싱가푸라 왕국
이후
이후 국가조호르 술탄국
페락 술탄국
포르투갈령 믈라카
인구
1417년경약 2,000 - 6,000명
16세기 초약 100,000명
외교
조공국명나라의 조공국
기타

2. 건국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 마자파힛 왕국의 내전에 휘말린 수마트라섬 남부 팔렘방의 슈리비자야 왕국 왕자 파라메스와라가 말레이 반도로 피신하면서 믈라카 술탄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파라메스와라 일행은 처음에는 투마시크(현재의 싱가포르)로 피신했으나, 그곳은 해적 출몰과 아유타야 왕조의 공격 위협으로 안전하지 못했다.[81][83] 이에 15세기 초, 말라카 해협의 해상 민족 '오랑 스라트'(또는 바자우)의 도움을 받아 촌락을 건설하고 '말라카'로 명명, 파라메스와라가 왕위에 올랐다.[84]

건국 시기는 1402년으로 추정되나, 14세기 말 건국 가능성도 제기된다.

파라메스와라의 아들 이스칸다르 샤는 사모드라 파사이 왕국 공주와 혼인하여[130] 마자파힛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파사이 이슬람교도들의 믈라카 이주를 유도했다. 그는 주변 해적과 어부들에게도 믈라카 이주를 권장하여, 재위 3년 차(1416년-1417년경)에는 인구가 2,000명에서 6,000명으로 증가했다.[86]

믈라카 발전에는 명나라의 사적 무역 금지로 동남아시아 섬 지역에 잔류하게 된 중국인 공동체도 기여했다. 이들은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을 조직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고유의 조선 기술을 결합한 정크선을 건조하여 해양 무역에 참여했다.

2. 1. 건국 신화와 초기 역사

수마트라섬 남부 스리비자야 왕국의 왕자 파라메시와라(파두카 스리 마하라자 파라메시와라)[144]는 마자파힛 왕국의 침공을 피해 말레이 반도를 전전하다가 1402년믈라카 해협의 '오랑 라웃'이라고 불리는 바다 백성의 협력을 얻어 믈라카를 건국했다. 믈라카는 당시 소규모 어촌이었지만, 명나라 영락제가 파견한 제1차 정화 함대가 내항하면서 동서 무역의 중계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남중국해인도양에서의 통상 패권을 목표로 한 정화 함대는 믈라카를 근거지로 삼았고, 믈라카는 명나라에 조공 사절을 보내 충실한 조공국이 되었다. 파라메시와라는 이슬람 상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파라메시와라, 이스칸다르 샤흐, 무하마드 샤흐는 정화 함대를 타고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144]

믈라카 건국은 일반적으로 1400년경으로 여겨진다.[3] 믈라카 지역은 11세기에 촐라 제국에 의해 약화되기 전까지 스리위자야 제국이 지배했다. 13세기 말에는 자바의 싱가사리와 마자파힛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라젠드라 촐라 1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세리 테리 부아나라는 팔렘방 출신의 왕자가 1299년에 테마섹에 상륙했다.[10] 오랑 라우트는 스리위자야에 대한 충성으로 그를 싱가푸라의 왕으로 만들었다. 싱가푸라는 14세기에 원나라와 강력한 관계를 맺은 국제 무역 중심지로 성장했다.

1370년대, 팔렘방의 말레이 통치자는 멜라유 왕국을 되살리기 위해 명나라 홍무제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는 중국에 조공 체제를 재개하도록 요청했지만, 마자파힛의 하얌 우루크 왕은 말라유가 자신의 봉신이라고 황제를 설득했다.[11] 1377년, 마자파힛은 팔렘방에 대한 해상 공격을 감행하여[12] 팔렘방 왕자들과 귀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14세기 후반, 싱가푸라 왕국은 부유해졌지만, 아유타야 왕국과 마자파힛의 공격을 받았다. 1398년, 싱가푸라는 약탈당했고,[13][14][15] 싱가푸라의 마지막 왕은 말레이 반도 서해안으로 도망쳤다.

말레이와 포르투갈 자료는 싱가푸라의 멸망과 마지막 왕에 대한 서로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 포르투갈 자료에서는 그를 파라메스와라라고 부르며 팔렘방 출신이지만 싱가푸라의 왕위를 찬탈했다고 하고, 말레이 자료에서는 싱가푸라의 다섯 번째 왕이 된 세리 테리 부아나의 후손인 이스칸다르 샤라고 한다.[16] 파라메스와라는 무아르, 우종 타나, 비아왁 부수크를 거쳐 버탐 강(오늘날의 믈라카 강) 어귀의 어촌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오랑 라우트에 속했고,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1370년대부터 난민들이 늘어났다. 파라메스와라가 1400년대 초 믈라카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다문화적인 분위기를 풍겼다.[17]

전설에 따르면, 파라메스와라는 믈라카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을 때 사냥개가 생쥐사슴에게 속아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왕국 건설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이 상징적인 사건을 목격하면서 기대고 있던 나무의 이름을 따서 정착지를 지었다고 한다. 오늘날 생쥐사슴은 현대 믈라카의 문장의 일부이다. "믈라카"라는 이름은 믈라카 나무(, 학명 ''Phyllanthus emblica'')에서 유래되었다.[18] 믈라카의 이름은 술탄 무하마드 샤(재위 1424년 ~ 1444년) 통치 기간 동안 아랍 상인들이 그 왕국을 "말라캇"(아랍어로 "상인들의 회중")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19]

조호르 왕국에서 편찬된 연대기 『세자라 믈라유』(Sejarah Melayu영어)에 따르면, 믈라카 왕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인도촐라 왕국의 왕과 바다의 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을 시조로 한다.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에 걸쳐 마자파힛 왕국에서 일어난 내전(파르그루그 전쟁)에 휘말린 슈리비자야 왕국의 왕자 파라메스와라가 말레이 반도로 도망친 것이 왕국의 기원이다.

1405년에 명에 조공을 시작하여 동서 무역의 중계항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파라메스와라의 아들 이스칸다르 샤는 사모드라 파사이 왕국과 혼인 관계를 맺어[130], 적대 관계에 있던 마자파힛과의 관계가 호전되었고, 파사이의 이슬람교도들이 말라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스칸다르 샤는 주변 지역의 해적, 어부에게 말라카로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유했고, 그의 치세 3년째(1416년 - 1417년경)에는 인구가 2000명에서 6000명에 달했다.[86]

말라카의 발전에는 명이 실시한 사적 무역 금지로 인해 동남아시아 각지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 중국인 커뮤니티도 기여했다.

2. 2. 명나라와의 관계

1402년믈라카 해협의 '오랑 라웃'(Orang Laut)이라고 불리는 바다 백성의 협력을 얻어 믈라카가 건국되었을 당시, 소규모 어촌이었던 믈라카에 명나라 영락제가 파견한 제1차 정화 함대가 내항했다.[144] 남중국해인도양에서의 통상 패권을 목표로 한 정화 함대는 믈라카를 근거지로 삼아 기반을 닦았다. 믈라카는 명에 여러 차례 조공 사절을 보내 충실한 조공국이 되었고, 파라메스와라는 이슬람 상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명의 정화 함대의 보호 하에 믈라카는 동서 무역의 중계항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파라메스와라, 이스칸다르 샤흐, 무하마드 샤흐는 정화 함대에 동승하여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1403년부터 1413년 사이에 명은 믈라카에 6차례 사신을 파견했는데, 그 대부분은 정화가 이끄는 함대였다.[123] 1405년 9월, 믈라카의 사신은 명의 환관 윤경과 함께 명의 궁정을 방문했다. 믈라카의 조공을 기뻐한 영락제는 파라메스와라의 왕위를 인정했고,[130] 1411년에는 파라메스와라 자신이 처자와 가신을 데리고 정화 함대에 동승하여 명을 방문했다.[124]

명의 대함대 지휘관인 정화는 믈라카에 "관창"이라는 기지를 건설했다. 믈라카의 왕이 안심하고 조공의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관창에 힘입은 바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125]

믈라카는 명과의 관계를 통해 교역 외에도 아유타야 왕조의 공격을 막는 데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123] 1407년, 1421년, 1426년부터 1433년 사이에 3차례 아유타야의 침입을 받았지만, 그 때마다 명이 아유타야에 경고를 보내 왕국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3. 번영

믈라카는 15세기 중후반부터 포르투갈의 점령 전까지 영광의 절정에 달했다. 무자파르 샤 술탄의 통치 기간 동안 딘딩스와 조호르 사이의 지역이 영토로 병합되었고, 말레이 반도의 서쪽과 동쪽 끝 모두에 권위를 행사했다.[28] 왕국은 중요한 요충지인 말라카 해협에서 세계 무역의 한 부분을 통제하여, 항구 도시는 지역 및 국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나라, 류큐 왕국, 페르시아인, 구자라트인, 아랍인과 같은 주요 국가의 상인들이 믈라카를 찾았다.[44]

만수르 샤의 통치는 술탄국의 주요 확장을 보여주었다. 술탄국에 할양된 초기 영토 중 하나는 파항으로, 인다라푸라가 수도였다. 이 지역은 거대한 강과 풍부한 금 매장량을 가진 미개척지였고 리고르 왕의 친척인 마하라자 데와 수라가 통치했다. 술탄은 툰 페라크와 19명의 말라카 훌루발랑이 이끄는 20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파항에 도착하자 전투가 벌어졌고, 파항인들은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왕실 전체가 포로로 잡혔다. 믈라카 함대는 데와 수라와 그의 딸 완앙 세리를 데리고 귀환했고, 그들은 만수르 샤 술탄에게 넘겨졌다. 술탄은 툰 함자를 파항을 통치하도록 임명했다.[45][46] 쌀의 꾸준한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만수르 샤는 나중에 리고르와의 화해 정책을 시작했다.[39]

만수르 샤는 마자파힛을 방문했을 때도 전사들과 동행했다. 당시 마자파힛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고 믈라카 술탄국의 부상하는 힘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의 궁정에서 믈라카의 군사적 위력을 과시한 후, 마자파힛의 왕은 더 많은 영토를 잃을까 두려워 그의 딸 라덴 갈루 센데라 키라나를 만수르 샤 술탄과 결혼시키고 인드라기리, 잠비, 퉁칼, 시안탄에 대한 통제권을 믈라카에 넘겨주기로 동의했다.[47][48] 만수르 샤는 또한 수마트라의 시악을 봉신으로 삼을 수 있었다. 나중에 그의 통치 기간에 파항, 캄파르, 인드라기리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진압되었다.[28]

중국과 믈라카 간의 우호 관계는 만수르 샤 술탄의 통치 기간 동안 격화되었다. 술탄은 툰 페르파티 푸티를 수석 사절로 중국에 파견하여 술탄이 황제에게 보낸 외교 서한을 전달했다.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툰 페르파티는 술탄 만수르 샤의 명성과 위엄으로 중국 황제를 감동시켜 황제가 그의 딸 항 리 포를 술탄과 결혼시키라고 명령했다. ''말레이 연대기''는 또한 국무 고위 대신과 500명의 시녀가 "공주"를 믈라카에 동행했다고 주장한다. 술탄은 이후 부킷 시나("중국 언덕")로 알려진 언덕에 새 배우자를 위한 궁전을 지었다. 무역이 번성하고 믈라카가 더욱 번영함에 따라 만수르 샤는 믈라카 언덕 기슭에 크고 아름다운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왕궁은 믈라카의 부, 번영, 권력을 반영하고 말레이 건축의 탁월함과 독특한 특징을 구현했다.[49]

레 타인 통의 통치 기간 동안 믈라카와 대월 사이의 짧은 분쟁은 이미 이슬람 왕국이었던 참파에 대한 1471년 베트남의 침공 직후 시작되었다. 중국 정부는 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참파 왕을 임명하기 위해 1474년에 감찰관 천 준을 참파에 파견했지만, 베트남 군인들이 참파를 장악하고 그의 입국을 막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대신 믈라카로 향했고, 그 통치자는 중국에 조공을 보냈다.[50] 1469년, 중국에서 돌아오던 믈라카 사절단은 베트남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젊은이들이 거세되고 노예가 되었다. 중화 왕조가 중국의 보호령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믈라카는 어떠한 보복 행위도 삼갔다. 대신 믈라카는 1481년 베트남의 공격과 믈라카에 대한 침략 계획을 보고하고, 또한 명나라 궁정에 있던 베트남 사절단을 대면하기 위해 중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그 사건이 몇 년 전 일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알렸고, 중국 성화 황제는 베트남 통치자에게 그 사건에 대해 질책하는 서한을 보냈다. 황제는 또한 베트남이 공격할 경우 믈라카가 폭력적인 힘으로 보복할 수 있도록 허가했는데, 이러한 사건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51] 근거 없는 중국 기록에 따르면 레 타인 통이 9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란 상을 침공했지만, 이 군대는 믈라카 군대에 의해 쫓겨났고 3만 명의 대월 군인이 참수당했다.[52]

전설적인 말레이 영웅 항 투아의 청동 부조.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만수르 샤의 팽창 정책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유지되었고, 나중에 캄파르와 시악을 그의 영토에 추가했다.[53] 그는 또한 군도의 여러 국가를 자신의 제국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국가의 통치자는 즉위 후 믈라카에 와서 믈라카 술탄의 축복을 받았다. 전복된 통치자들도 믈라카에 와서 술탄에게 왕위를 되찾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예 중 하나는 친척들에게 전복된 파사이의 자이날 아비딘 술탄이었다. 그는 믈라카로 도망쳐 만수르 샤 술탄에게 그를 다시 통치자로 임명해 달라고 간청했다. 믈라카 군대가 즉시 파사이로 파견되어 찬탈자들을 물리쳤다. 파사이는 이후 믈라카의 통제를 받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믈라카의 중요성과 이 지역의 지도자 및 국가 간에 확립된 상호 지원을 크게 보여주었다.[47] 만수르 샤 술탄은 믈라카가 영광의 절정에 있었던 1477년에 사망했다.

말라카 술탄 궁전의 복제품


믈라카의 번영 시대는 그의 아들 알라딘 리아얏 샤 술탄의 통치하에 계속되었고, 이 지역의 더 많은 외국 통치자들이 믈라카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적들에게 패배한 몰루카스의 통치자, 로칸의 통치자, 테렝가누의 투안 텔라이라는 통치자가 있었다. 알라딘 리아얏 샤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큰 중요성을 두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복을 확장하여 리아우-링가 제도를 포함시켰다.

제7대 술탄 알라우딘 리아얏 샤의 치세는 26세에 젊은 나이에 독살로 막을 내렸다. 그의 아들 마뭇 샤는 어린 나이에 술탄으로 옹립되었지만,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교역항으로서의 믈라카는 최성기를 맞이한다. 당시 인도의 구자라트 이슬람교 지역이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였으며, 남 인도의 타밀인이나 자와섬의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중국은 해금정책을 이어갔었지만, 금지령을 어기며 내항하는 중국인 밀무역 상인도 적지 않았다. 교역물로는 인도의 면직물,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 수마트라섬의 금과 후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티모르섬의 백단 등이 주를 이루었다. 왕국에는 내항하는 상선이 입항세를 지불했다.

3. 1. 이슬람교 수용과 무역 발전

무자파르 샤가 이슬람교를 국교로 정하고, 타이 아유타야 왕조의 침공을 물리쳐 믈라카는 말레이 반도 전역과 수마트라섬 동해안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동서 무역의 중계항으로 번영하기 시작했다.[41] 다음 대의 만수르는 믈라카 국왕으로서 처음으로 술탄이라고 칭하였고, 아유타야의 속국인 파항을 함락하고 자와섬 북안에 성립한 드막(Demak), 자파라(Japara), 투방(Tubang), 수라바야 등의 이슬람 항구도시와 협력해 마자파힛 왕국을 더욱 약화시켰다.

1405년, 명나라영락제인칭(Yin Qing)이 이끄는 사절단을 믈라카로 보냈다.[21] 2년 후, 제독 정화는 여섯 번의 방문 중 첫 번째 방문을 믈라카에 했다.[22] 정화는 믈라카에 들러 파라메스와라를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믈라카 통치자로서의 그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정기적인 조공의 대가로 중국 황제는 믈라카를 (Siam)의 끊임없는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중국의 개입으로 인해 믈라카는 다른 중요하고 확립된 항구를 대체하는 핵심 항구로 성장했다.[23] 중국 상인들은 믈라카 항구에 들르기 시작했고 믈라카에 해외 무역 기지를 개척했다. 다른 외국 상인, 특히 아랍인, 인도인, 페르시아인들이 무역 기지를 설립하고 믈라카에 정착하여 인구를 2,000명으로 늘렸다.[24]

1405년 정화 제독의 상륙 지점을 기념하는 바위


초기 믈라카 통치자들의 연대기는 말레이, 중국, 포르투갈 자료에 포함된 불일치(이름, 통치자 수, 통치 세부 사항 등)로 인해 불확실하다.[27]

다양한 자료에 따른 믈라카 술탄국의 초기 통치자
말레이 연대기
Raffles MS
Bustan al-Salatin
1638
동방견문록
1512–1515
명사
1425–1455
술탄 이스칸다르 샤스리 라마 아디케르마
(Raja Iskandar Shah)
파라메스와라
(Paramicura)
파라메스와라
(拜里迷蘇剌)
라자 케칠 베사르
(술탄 메갓)
라자 베사르 무다
(술탄 아흐마드)
이스칸다르 샤
(Chaquem Daraxa)
메갓 이스칸다르 샤
(母幹撒于的兒沙)
라자 텡아
(술탄 무하마드 샤)
라자 텡아스리 마하라자
(西里馬哈剌者)
라자 이브라힘
(술탄 아부-샤히드)
라자 케칠 베사르
(술탄 모하마드 샤)
스리 파라메스와라 데와 샤
(息力八密息瓦兒丢八沙)
라자 카심
(술탄 무자파르 샤)
라자 카심
(술탄 무자파르 샤)
술탄 무자파르 샤
(Sultan Modafaixa)
술탄 무자파르 샤
(速魯檀無答佛哪沙)



이러한 차이로 인해 믈라카의 초기 통치자들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중국 자료의 파라메스와라와 《말레이 연대기》의 이스칸다르 샤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많은 저자들은 또한 유사한 이름의 메갓 이스칸다르 샤를 파라메스와라의 아들로 받아들인다.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에 걸쳐 마자파힛 왕국에서 일어난 내전에 휘말린 슈리비자야 왕국의 왕자 파라메스와라가 수행원을 데리고 말레이 반도로 도망쳤다. 1405년에 명에 조공을 시작하여 동서 무역의 중계항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메갓 이스칸다르 샤의 통치 기간 동안 왕국은 계속 번성했으며, 술탄의 지배는 쿠알라 링기에서 쿠알라 케상으로 확대되었고, 이는 오늘날 믈라카에 해당한다.[28] 이 기간 동안 왕국의 경제 원천이 다양화되었으며, 도시 북부에서 두 개의 주석 채굴 지역, 과수원에서 사고 팜(sago palm)과 하구 및 해변을 따라 니파 야자(nipah palm)가 발견되었다. 잠재적 침략자로부터 도시의 방어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메갓 이스칸다르 샤는 도시를 둘러싸고 네 개의 경비 출입구가 있는 벽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국가의 재무 및 물품이 보관된 도시 중심부에 울타리가 쳐진 요새도 건설되었다.[29]

믈라카의 성장은 북쪽의 아유타야의 세력이 커지는 것과 일치했다. 예방 조치로 왕은 1418년 중국을 방문하여 그 위협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영락제는 1419년 10월 사절단을 보내 샴 통치자에게 경고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30][31][32] 믈라카 왕자들이 이끈 1420년, 1421년, 1423년에 여러 사절단을 중국으로 보내 믈라카와 중국 간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33]

1424년에서 1433년 사이에, 세 번째 통치자인 라자 텡아(일부 자료에서는 스리 마하라자로 명명됨)의 통치 기간 동안 두 번의 왕실 방문이 중국에서 이루어졌다.[34][35][27] 라자 텡아의 통치 기간 동안, 사이이드 압둘 아지즈라는 울라마(ulama)가 이슬람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믈라카에 왔다고 한다. 국왕은 왕족, 고위 관리, 믈라카의 백성과 함께 그의 가르침을 들었다.[36] 얼마 지나지 않아 라자 텡아는 울라마의 조언에 따라 무슬림 이름인 무하마드 샤를 채택하고 ''술탄''(Sultan)이라는 칭호를 받았다.[37] 그는 행정, 즉 관습, 왕실 의례, 관료 제도, 상업을 이슬람 원칙에 맞게 이슬람화하기 시작했다. 믈라카가 국제 무역 중심지로 점점 더 중요해짐에 따라 무역의 공정한 규제는 지속적인 번영의 열쇠였으며, 술탄 무하마드 샤의 통치 기간 동안 공포된 ''운당-운당 라우트 믈라카''(Undang-Undang Laut Melaka)(믈라카 해상법)는 이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또한 항구의 서로 다른 공동체를 위해 네 명의 ''샤반다르''(Shahbandar)를 임명한 것도 마찬가지였다.[38]

믈라카 초대 통치자인 파라메스와라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는지는 그가 그랬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알려지지 않았다. 16세기 포르투갈 작가 토메 피레스는 파라메스와라의 뒤를 그의 아들 메갓 이스칸다르 샤가 이었고, 그는 72세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반면에, ''말레이 연대기''는 세 번째 통치자 무하마드 샤의 통치 기간 동안 통치 계급과 그들의 신민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믈라카의 이슬람화가 실제로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슬람은 무자파르 샤의 통치 기간 동안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여겨진다.[72]

믈라카 주변 지역의 이슬람화는 15세기와 16세기 사이에 믈라카강 북쪽 둑에 있는 우페 지역의 연구 센터를 통해 점차 심화되었다. 이슬람은 믈라카에서 수마트라의 잠비, 캄파르, 벵칼리스, 시악, 아루 및 카리문 섬,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 자바 및 필리핀으로 퍼져 나갔다. ''말레이 연대기''는 믈라카와 파사이의 궁정들이 서로 신학적 질문과 문제들을 제기했다고 언급한다. 자바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책임이 있는 소위 왈리 상가 중 적어도 두 명인 수난 보낭과 수난 칼리자는 믈라카에서 공부했다고 한다.[72] 토메 피레스는 그의 ''수마 오리엔탈''에서 수마트라 동해안의 캄파르와 인드라기리의 통치자들이 술탄 무자파르 샤의 영향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믈라카에서 종교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말레이 연대기''는 또한 믈라카 왕실 궁정에서 다양한 술탄의 교사이자 상담역으로 활동한 여러 학자들을 언급한다. 마울라나 아부 바카르는 술탄 만수르 샤의 궁정에서 봉사했으며 메카의 아랍 학자의 저작에서 번역된 신학 텍스트인 ''키타브 다룰 만줌''을 소개했다. 마울라나 카디 사르다르 요한이라는 학자는 술탄 마흐무드 샤와 그의 아들 모두에게 종교 교사로 봉사했다. ''키타브 다룰 만줌'' 외에도, ''말레이 연대기''는 아부 나스르 알-사라즈의 10세기 수피즘에 관한 논문인 ''키타브 알-루마' 피 타사우프'( '번개의 책')도 언급한다.[73]

이슬람 전통과 지역 문화를 혼합한 정교한 의식들도 믈라카 술탄국에서 만들어졌다. 한 가지 예는 무하마드 샤의 통치 기간 동안 기록되었다. 특별한 의식이 열렸는데, 이는 라마단의 27번째 밤인 ''라이라트 알-카드르''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이것은 템궁이 코끼리를 타고 술탄의 기도 매트를 강제 야간 기도 후에 수행되는 타라위를 위해 모스크로 운반하는 낮 행렬로 시작되었다. 다음 날 술탄의 터번이 행렬에 의해 모스크로 운반되었다. 비슷한 의식들이 ''하리 라야 아이딜피트리''와 ''하리 라야 아이딜라하''의 성대한 축제와 함께 치러졌다.

이슬람의 중심지로서의 믈라카의 부상은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첫째, 이슬람은 왕권의 개념을 변화시켜 술탄을 더 이상 신성한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할리파''로 간주하게 했다. 둘째, 이슬람은 믈라카가 오스만 제국을 포함한 다른 이슬람 정치체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 무슬림 상인들을 믈라카로 유치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73] 셋째, 이슬람은 믈라카 사회와 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궁극적으로 말레이 정체성의 결정적인 표식이 되었다.[6][7]

3. 2. 전성기와 영토 확장

무자파르 샤가 이슬람교를 국교로 정하고, 타이 아유타야 왕조의 침공을 물리쳐 말레이 반도 전역과 수마트라섬 동해안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믈라카는 동서 무역의 중계항으로 번영하기 시작했다.[87]

다음 대의 만수르는 믈라카 국왕으로서 처음으로 술탄이라고 칭하였고, 아유타야의 속국인 파항을 함락하고 자와섬 북안에 성립한 드막, 자파라, 투방, 수라바야 등의 이슬람 항구도시와 협력해 마자파힛 왕국을 약화시켰다.

말라카 술탄 궁전의 복제품은 ''말레이 연대기''에서 얻은 정보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건설되었으며, 1458년부터 1477년까지 통치했던 술탄 만수르 샤 시대의 궁전 건설 및 건축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

말라카는 15세기 중후반부터 포르투갈의 점령 전까지 영광의 절정에 달했다. 무자파르 샤 술탄의 통치 기간 동안 딘딩스와 조호르 사이의 지역이 영토로 병합되었고, 말레이 반도의 서쪽과 동쪽 끝 모두에 권위를 행사했다.[28] 왕국은 중요한 요충지인 말라카 해협에서 세계 무역의 한 부분을 통제했다. 항구 도시는 지역 및 국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지역 상인뿐만 아니라 명나라, 류큐 왕국, 페르시아인, 구자라트인, 아랍인과 같은 주요 국가의 상인들을 끌어들였다.[44]

만수르 샤의 통치는 술탄국의 주요 확장을 보여주었다. 술탄국에 할양된 초기 영토 중 하나는 파항으로, 인다라푸라가 수도였으며, 이 지역은 거대한 강과 풍부한 금 매장량을 가진 미개척지였고 리고르 왕의 친척인 마하라자 데와 수라가 통치했다. 술탄은 툰 페락과 19명의 말라카 훌루발랑이 이끄는 20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파항에 도착하자 전투가 벌어졌고, 파항인들은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왕실 전체가 포로로 잡혔다. 말라카 함대는 데와 수라와 그의 딸 완앙 세리를 데리고 귀환했고, 그들은 만수르 샤 술탄에게 넘겨졌다. 술탄은 툰 함자를 파항을 통치하도록 임명했다.[45][46] 쌀의 꾸준한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만수르 샤는 나중에 리고르와의 화해 정책을 시작했다.[39]

마자파힛을 방문했을 때도 만수르 샤는 이러한 전사들과 동행했다. 당시 마자파힛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고 말라카 술탄국의 부상하는 힘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의 궁정에서 말라카의 군사적 위력을 과시한 후, 마자파힛의 왕은 더 많은 영토를 잃을까 두려워 그의 딸 라덴 갈루 센데라 키라나를 만수르 샤 술탄과 결혼시키고 인드라기리, 잠비, 퉁칼, 시안탄에 대한 통제권을 말라카에 넘겨주기로 동의했다.[47][48] 만수르 샤는 또한 수마트라의 시악을 봉신으로 삼을 수 있었다. 나중에 그의 통치 기간에 파항, 캄파르, 인드라기리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진압되었다.[28]

중국과 말라카 간의 우호 관계는 만수르 샤 술탄의 통치 기간 동안 격화되었다. 술탄은 툰 페르파티 푸티를 수석 사절로 중국에 파견하여 술탄이 황제에게 보낸 외교 서한을 전달했다.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툰 페르파티는 술탄 만수르 샤의 명성과 위엄으로 중국 황제를 감동시켜 황제가 그의 딸 항 리 포를 술탄과 결혼시키라고 명령했다. ''말레이 연대기''는 또한 국무 고위 대신과 500명의 시녀가 "공주"를 말라카에 동행했다고 주장한다. 술탄은 이후 부킷 시나("중국 언덕")로 알려진 언덕에 새 배우자를 위한 궁전을 지었다. 무역이 번성하고 말라카가 더욱 번영함에 따라 만수르 샤는 말라카 언덕 기슭에 크고 아름다운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왕궁은 말라카의 부, 번영, 권력을 반영하고 말레이 건축의 탁월함과 독특한 특징을 구현했다.[49]

레 타인 통의 통치 기간 동안 말라카와 대월 사이의 짧은 분쟁은 이미 이슬람 왕국이었던 참파에 대한 1471년 베트남의 침공 직후 시작되었다. 중국 정부는 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참파 왕을 임명하기 위해 1474년에 감찰관 천 준을 참파에 파견했지만, 베트남 군인들이 참파를 장악하고 그의 입국을 막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대신 말라카로 향했고, 그 통치자는 중국에 조공을 보냈다.[50] 1469년, 중국에서 돌아오던 말라카 사절단은 베트남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젊은이들이 거세되고 노예가 되었다. 중화 왕조가 중국의 보호령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말라카는 어떠한 보복 행위도 삼갔다. 대신 말라카는 1481년 베트남의 공격과 말라카에 대한 침략 계획을 보고하고, 또한 명나라 궁정에 있던 베트남 사절단을 대면하기 위해 중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그 사건이 몇 년 전 일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알렸고, 중국 성화 황제는 베트남 통치자에게 그 사건에 대해 질책하는 서한을 보냈다. 황제는 또한 베트남이 공격할 경우 말라카가 폭력적인 힘으로 보복할 수 있도록 허가했는데, 이러한 사건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51] 근거 없는 중국 기록에 따르면 레 타인 통이 9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란 상을 침공했지만, 이 군대는 말라카 군대에 의해 쫓겨났고 3만 명의 대월 군인이 참수당했다.[52]

전설적인 말레이 영웅 항 투아의 청동 부조는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만수르 샤의 팽창 정책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유지되었고, 나중에 캄파르와 시악을 그의 영토에 추가했다.[53] 그는 또한 군도의 여러 국가를 자신의 제국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국가의 통치자는 즉위 후 말라카에 와서 말라카 술탄의 축복을 받았다. 전복된 통치자들도 말라카에 와서 술탄에게 왕위를 되찾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예 중 하나는 친척들에게 전복된 파사이의 자이날 아비딘 술탄이었다. 그는 말라카로 도망쳐 만수르 샤 술탄에게 그를 다시 통치자로 임명해 달라고 간청했다. 말라카 군대가 즉시 파사이로 파견되어 찬탈자들을 물리쳤다. 파사이는 이후 말라카의 통제를 받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말라카의 중요성과 이 지역의 지도자 및 국가 간에 확립된 상호 지원을 크게 보여주었다.[47] 만수르 샤 술탄은 말라카가 영광의 절정에 있었던 1477년에 사망했다.

말라카의 번영 시대는 그의 아들 알라딘 리아얏 샤 술탄의 통치하에 계속되었고, 이 지역의 더 많은 외국 통치자들이 말라카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적들에게 패배한 몰루카스의 통치자, 로칸의 통치자, 테렝가누의 투안 텔라이라는 통치자가 있었다. 알라딘 리아얏 샤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큰 중요성을 두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복을 확장하여 리아우-링가 제도를 포함시켰다. 그는 아들 마흐무드 샤 술탄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즉위 당시 십 대 소년이었다. 따라서 말라카는 벤다하라 툰 페락이 다른 고위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관리했다. 툰 무타히르가 벤다하라로 임명된 후 말라카는 외국 상인들의 유입으로 계속 번영했다. 이는 그의 효율적이고 현명한 행정 능력과 더 많은 외국 상인들을 말라카로 유치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다. 1500년경 말라카는 권력과 영광의 절정에 달했는데, 이는 마흐무드 샤가 아유타야와 쇠퇴하는 마자파힛의 종주권을 거부한 것으로 예를 들 수 있다.[28] 말라카는 인도 천, 중국 도자기와 실크, 말레이 향신료 무역의 주요 중심지였으며 말레이 군도에서 무슬림 활동의 본부였다. 말라카는 1506년 켈란탄을 정복했을 때까지 영토를 확장하려 했었다. 전설적인 군웅 레당 공주는 마흐무드 샤의 통치 기간에 살았으며 한때 술탄 자신이 구애했다고 한다.[5]

제7대 술탄 알라우딘 리아얏 샤의 치세는 26세에 젊은 나이에 독살로 막을 내렸다. 그의 아들 마뭇 샤는 어린 나이에 술탄으로 옹립되었지만,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교역항으로서의 믈라카는 최성기를 맞이한다. 당시 인도의 구자라트 이슬람교 지역이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였으며, 남 인도의 타밀인이나 자와섬의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중국은 해금정책을 이어갔었지만, 금지령을 어기며 내항하는 중국인 밀무역 상인도 적지 않았다. 교역물로는 인도의 면직물,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 수마트라섬의 금과 후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티모르섬의 백단 등이 주를 이루었다. 왕국에는 내항하는 상선이 입항세를 지불했다.

4. 멸망

1511년 포르투갈의 침공으로 믈라카가 함락되자 술탄 마뭇 샤는 말레이 밀림으로 피신하여 남쪽으로 이동,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고, 그의 자손들은 조호르 등 말레이 각지의 술탄이 되었다. 마뭇 샤는 무아르를 거쳐 파항으로 이동했고, 빈탄 섬에서 체제 정비를 꾀하며 1512년부터 5차례에 걸쳐 믈라카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믈라카 해협 지역의 항만 도시들은 대(對)포르투갈 연합을 결성하여 항전했지만, 믈라카를 탈환하지는 못했다. 마뭇 샤의 아들 알라우딘 리아야트 샤는 파항 왕가의 협력으로 조호르에 조호르 왕국을 건설했다.

마뭇 샤는 수도를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포르투갈군은 보복으로 술탄을 파항으로 몰아냈다. 이후 술탄은 빈탄으로 건너가 수도를 세우고 흩어진 말레이 군대를 규합하여 포르투갈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공격과 봉쇄를 조직했다. 잦은 믈라카 습격은 포르투갈인들에게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했고, 망명한 술탄의 군대를 파괴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여러 차례 말레이 군대 진압 시도가 있었지만, 1526년 포르투갈군이 빈탄을 파괴할 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술탄은 수마트라의 캄파르로 후퇴했고, 2년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무자파 샤와 알라딘 리아야트 샤 2세 두 아들을 남겼다.

무자파 샤는 반도 북부 지역 주민들의 초청을 받아 통치자가 되었고, 페락 술탄국을 세웠다. 한편, 마흐무드 샤의 다른 아들 알라딘은 부친의 뒤를 이어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다. 믈라카는 1641년 1월 연합 군사 작전에서 네덜란드에 의해 정복되었다. 포르투갈 요새는 네덜란드나 조호르의 무력이 아닌 기근과 질병으로 인해 생존 인구가 감소하면서 무너졌다.[69] 1606년 네덜란드와 조호르 간의 상호 합의 결과, 믈라카는 네덜란드에 넘겨졌다.

4. 1. 포르투갈의 침입

16세기희망봉을 거쳐 인도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은 동방에 관심을 가지면서 향신료의 원산지인 말루쿠 제도를 정복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중계지가 되는 믈라카는 포르투갈에게 가장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1509년 9월 11일, 디오구 로페스 드 세케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원정대가 믈라카에 처음 도착했다.[145] 그러나 당시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의 해상 세력과 대립하던 이슬람계 상인들의 선동으로 인해 왕국은 포르투갈인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포르투갈의 침입을 막아냈다. 포르투갈 함대는 몇 명의 포로를 남긴 채 인도로 돌아갔다.[145]

이 소식을 들은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1511년 7월, 19척의 군함과 1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믈라카 정복에 나섰다.[146] 수 개월 간의 공방전 끝에 믈라카는 함락되었다.[146] 술탄 마뭇 샤는 말레이의 밀림으로 피신하여 남쪽으로 이동,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고, 그의 자손들은 조호르 등 말레이 각지의 술탄이 되었다.

1509년 포르투갈 원정대가 도착했을 당시, 믈라카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중앙 시장으로 기능했지만, 믈라카 함락으로 인해 교역 거점으로서의 기능은 동남아시아 각지의 항만 도시로 분산되었다.

4. 2. 믈라카 함락의 영향

1511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에 의해 믈라카가 함락되면서, 믈라카 술탄국은 멸망하고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여러 영향이 나타났다.

믈라카 함락 이후, 포르투갈은 130년 동안 믈라카를 통치했다. 그들은 A Famosa라는 석조 요새를 건설했지만, 자급자족이 불가능했고, 자금과 인력 부족, 행정적 혼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58] 믈라카의 망명 술탄이 세운 조호르 술탄국 등과의 경쟁으로 인해 아시아 상인들은 믈라카를 우회했고, 믈라카는 무역 항구로서 쇠퇴하기 시작했다.[59]

믈라카 함락은 동남아시아의 무역 구조를 변화시켰다. 이전에는 믈라카 해협을 감시하며 상업적 교통의 안전을 유지했던 중앙 집중식 교환 항구가 있었지만, 믈라카 함락 이후에는 해협에서 서로 경쟁하는 여러 항구가 있는 분산된 무역 네트워크로 대체되었다.[59] 이슬람 상인들은 믈라카 해협 대신 말레이 반도를 육로로 횡단하여 수마트라 섬 서해안을 남하하는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조호르, 파타니, 파항, 아체, 반텐 등의 항구 도시들이 급속히 성장했다.[93]

믈라카에서 추방된 이슬람 상인들은 새롭게 발전한 항구 도시들로 도망쳐 반(反)포르투갈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아체 왕국은 이슬람 상인들의 유입으로 정치적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93]

포르투갈의 믈라카 정복은 명나라의 분노를 일으켰다. 정덕제는 망명한 술탄 마흐무드의 사신을 접견하고 포르투갈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다.[62] 토메 피레스가 이끈 포르투갈 사절단은 투옥, 고문, 처형되었고, 제1차 타마오 전투와 제2차 타마오 전투에서 포르투갈 함대는 중국 함대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관계는 점차 개선되었고, 1557년 명나라는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했다.[68]

믈라카의 몰락은 브루나이와 같은 다른 왕국에도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브루나이 항구는 새로운 무역 중심지로 부상했고, 브루나이 통치자의 이슬람교 개종 이후 포르투갈 점령에서 도망친 많은 무슬림 상인들을 끌어들였다.[70][71]

5. 행정 및 사회

믈라카 술탄국은 잘 정의된 법률 체계를 갖춘 정부를 운영했으며, 사회는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술탄국의 최고 통치자는 술탄이었다. 술탄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초기 스리비자야의 군주제 개념에 따라 혈통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슬람 도입 이후에는 '다울라트'(주권)라는 개념이 재도입되었다.[38]

술탄 다음으로는 벤다하라라는 재상과 유사한 직책이 있었고, 평민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었다. 벤다하라는 외교 관계를 담당했으며, 툰 페락과 같이 전쟁과 외교에 능한 인물이 임명되기도 했다. 벤다하라 아래에는 국고 담당관인 "펜굴루 벤다하리", 공공 경찰 및 국가 안보 책임자인 테멩궁, 해군 수장이자 술탄의 수석 특사인 라크사마나 등의 관리가 있었다. 특히 항 투아는 뛰어난 라크사마나로 이름을 알렸다. 항구에는 각 지역 출신 상인들을 관리하는 샤반다르('항만 관리자')가 있었다. "오랑 베사르"라는 하위 관리와 "만둘리카"라는 총독도 존재했다.[38]

초기에는 왕족이 요직을 맡았으나, 만수르 샤 술탄 시대부터는 왕족이 요직에서 배제되었다.[96] 왕 다음 지위는 파두카 라자였지만, 실제로는 벤다하라(재상)가 국왕 다음이었다. 벤다하라, 푼글 부다하리(재무장관 겸 왕실 관리), 라크사마나, 툼공(경찰청장) 등은 왕족이나 건국 공신인 해상민 귀족이 맡았다.[97] 귀족들은 문투리(만다리)라 불렸고, 영지 경영, 과수원, 구역 세금 징수 등으로 수입을 얻었다.[97] 벤다하라와 푼글 부다하리는 종신 및 세습직이었으며, 특정 가문(벤다하라는 빈탄 섬 리아우족 출신)에서 선출되었다.[98] 역대 국왕은 벤다하라 가문의 딸과 결혼하는 관례가 있었다.[99]

믈라카의 군사력은 전쟁 노예, 외국인 용병, 울바란(무사 또는 기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울바란 부사르라는 장이 있었고, 15세기 중반 항 투아가 초대 라크사마나로 임명된 후 라크사마나가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100]

믈라카 개발에는 해상민이 동원되었고, 부족의 힘과 왕국 편입 시기에 따라 다른 노역이 부과되었다. 리아우족 등 유력 부족은 전사로 봉사하고 고위 관직에 올랐으며, 하위 부족은 왕가의 개를 돌보는 등의 노역을 맡았다.[102]

수마트라 섬 동해안 영지(일칸, 루판, 삼포칸, 퉁칼 등)는 믈라카 파견 귀족이 통치했다. 삼포칸을 제외한 도시 주민은 오랑 슬라트였고, 어업과 해적 행위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공납 대신 병력 제공 의무를 졌다.[103]

믈라카 관리들은 정액 급여가 없어 뇌물과 부패가 만연했다. 왕국은 『운당-운당 믈라카』(믈라카 법), "후쿰 카눈 믈라카", "리잘라트 후쿰 카눈", 『운당-운당 라우트 믈라카』(믈라카 해양법) 등의 법률로 통치되었다. 이 법은 노예에게도 권리를 보장했으며, 당시 사형 집행 빈도가 높았다.

5. 1. 행정 제도

믈라카는 잘 정의된 법률 체계를 갖춘 정부를 운영했다. 술탄국의 위계질서 최상위에는 절대 군주인 술탄이 있었다. 왕의 통치권이 정당한 혈통에 근거하는 초기 스리비자야의 군주제 개념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고,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다울라트'(주권)라는 이름으로 재도입되었다. 믈라카의 법전은 술탄이 임명한 네 명의 주요 국가 관리들을 명시했다.[38]

술탄 아래에는 벤다하라가 있었는데, 이는 재상과 유사한 직책으로 술탄의 고문 역할을 했다. 벤다하라는 믈라카에서 평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위직이었다. 벤다하라는 또한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는 책임을 맡았다. 믈라카의 다섯 번째 벤다하라였던 툰 페락은 전쟁과 외교 모두에서 뛰어났다. 무자파르 샤 술탄의 통치 기간 동안 툰 페락은 믈라카에 대한 시암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적으로 믈라카 군대를 이끌었다. 만수르 샤 술탄이 왕위에 오르자 툰 페락의 조언에 따라 그는 시암에 평화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동의했다. 툰 페락은 또한 술탄에게 믈라카의 전통적인 적이었던 마자파힛 왕의 딸과 결혼하라고 조언했다.[5]

벤다하라 다음은 "펜굴루 벤다하리"라고 불리는 국고 담당관이 있었다. 그 다음은 공공 경찰 및 국가 안보 책임자와 비슷한 테멩궁이었다. 테멩궁 다음은 라크사마나가 있었다. 라크사마나는 해군의 수장이자 술탄의 수석 특사였다. 그는 믈라카 해협의 안전을 보장하고 "운당-운당 라우트 믈라카"(믈라카 해양법)를 시행했다. 믈라카의 가장 유명한 라크사마나는 항 투아였다. 이 귀족 구조의 맨 아래에는 항구에 있는 다양한 공동체를 위한 네 명의 샤반다르('항만 관리자')가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구자라트 상인의 업무를 전담했고, 다른 한 명은 남인도, 벵골, 버마, 파사이의 상인을 담당했다. 세 번째는 동남아시아의 상인, 네 번째는 안남, 중국, 류큐 제도에서 온 상인을 담당했다. 더 낮은 직함의 국가 관리들도 임명되었다. 그들은 "오랑 베사르"로 알려졌다. 또한 "만둘리카"라고 불리는 총독은 정복을 통해 부속된 분봉지 및 영토의 행정을 감독했다.[38]

술탄국은 여러 법률 체계로 통치되었다. 전통적인 믈라카의 공식 법률은 "운당-운당 믈라카"(믈라카 법), 다양한 "후쿰 카눈 믈라카" 및 "리잘라트 후쿰 카눈"과 "운당-운당 라우트 믈라카"(믈라카 해양법)로 구성되었다. 법률 요약에 기록된 법률은 진화 과정을 거쳤다. 결국 진화한 법적 규칙은 초기 비토착 힌두/불교 전통, 이슬람, 토착 "아다트"라는 세 가지 주요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다.[38]

궁정에는 참의원과 같은 왕의 시정을 보좌하는 기관은 없었으며, 왕은 신하들과의 합의로 정무를 수행했다.[95] 병약하여 정무를 수행하는 데 지장을 겪거나, 혹은 국정에 관심이 없는 왕은 신하에게 정무를 일임했지만, 정력적인 왕은 국사의 전권을 장악했다.[95] 초기에는 왕족이 요직을 맡아 국왕을 보좌했으나, 술탄 만수르의 치세에 왕족은 요직에서 배제되었다.[96]

왕 다음의 지위에 있는 부왕은 파두카 라자가 불렸지만, 그 지위에 오른 것은 라자 푸테 한 명뿐이었으며, 실질적으로 국왕 다음의 입장에 있던 관직은 벤다하라(재상)였다. 벤다하라 외에 푼글 부다하리(재무장관과 왕실의 가령을 겸임), 라크사마나(해군 총사령관), 툼공(경찰청장) 등이 주요 관직이었으며, 이 요직은 왕족 혹은 건국에 협력한 해상민의 자손인 귀족으로 채워졌다.[97] 귀족은 문투리(혹은 만다리)라 불렸으며, 말레이 반도 남해안의 영지 경영, 믈라카 주변의 과수원과 믈라카 내에 각각 할당된 구역에서 징수된 세금을 수입으로 삼았다.[97] 벤다하라, 푼글 부다하리는 종신 및 세습직이었으며, 특정 일족(분다하라는 빈탄 섬의 리아우족 출신 한 집안)에서 선출되었다.[98] 벤다하라는 스리 마하라자의 치세에 이미 설치되었으며, 그들은 무알을 영지로 삼았고, 역대 국왕은 벤다하라 집안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99] 벤다하라 중에서 유명한 인물로는 아유타야의 공격을 물리친 툰 페락, 왕조 말기에 활약하며 국왕과 외국 상인 양쪽으로부터 두터운 대우를 받은 스리 마하라자가 꼽힌다.

믈라카의 전쟁에서는 전쟁 노예와 외국인 용병 외에, 믈라카 외에 거주하는 울바란이라는 무사나 기사에 비유되는 신분의 자들도 전선에서 싸웠다. 그들 중에서 울바란 부사르라는 장이 선출되었고, 15세기 중반에 울바란 부사르를 보좌하는 역할로 라크사마나가 창설되었으며, 항 투아가 초대 라크사마나에 임명되었다. 그 후 라크사마나가 실질적인 울바란의 지도자가 되었고, 울바란 부사르는 실권을 갖지 않는 명예직이 되었다.[100] 라크사마나는 해전 외에도 권한을 가졌으며, 초대 라크사마나 항 투아는 육전에서도 무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101] 이처럼 라크사마나가 강대한 권한을 가졌던 것은, 믈라카가 해상 국가와 교역 거점의 2가지 역할을 겸비했기 때문에, 해군의 중요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01]

믈라카의 개발에 즈음하여 해상민이 동원되었고, 그들에게 부과되는 노역은 부족의 힘과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시기에 따라 달랐다. 리아우족을 중심으로 하는 유력 부족은 전사로서 왕에게 봉사했고, 그 중 특정 일족은 고위 관직에 올랐다. 부족의 지위가 낮아질수록 노무는 사소한 것이 되었으며, 최하위 부족에게는 왕가가 기르는 개의 돌봄이 부과되었다.[102]

수마트라 섬 동해안의 영지, 일칸, 루판, 삼포칸, 퉁칼 등의 항만 도시의 지배에 관해서는, 믈라카에서 파견된 귀족이 원래 그들 도시를 지배했던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포칸을 제외한 도시의 주민은 오랑 슬라트였으며, 그들은 주로 어업과 해적 행위로 생계를 유지했다. 각 도시는 믈라카에 대해 공납 의무는 부과되지 않았지만, 대신 전시에 병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103] 믈라카의 관리에게는 매달 정액의 급여가 지급되지 않아, 뇌물과 부패가 만연하는 원인이 되었다.

5. 2. 법률

믈라카는 잘 정의된 법률 체계를 갖춘 정부를 운영했다. 술탄국의 위계질서 최상위에는 절대 군주인 술탄이 있었다. 왕의 통치권이 정당한 혈통에 근거하는 초기 스리비자야의 군주제 개념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고,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다울라트'(주권)라는 이름으로 재도입되었다.[38]

술탄 아래에는 벤다하라가 있었는데, 이는 재상과 유사한 직책으로 술탄의 고문 역할을 했다. 벤다하라는 믈라카에서 평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위직이었다. 벤다하라는 또한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는 책임을 맡았다. 믈라카의 다섯 번째 벤다하라였던 툰 페락은 전쟁과 외교 모두에서 뛰어났다.[5]

벤다하라 다음은 "펜굴루 벤다하리"라고 불리는 국고 담당관이 있었다. 그 다음은 공공 경찰 및 국가 안보 책임자와 비슷한 테멩궁이었다. 테멩궁 다음은 라크사마나가 있었다. 라크사마나는 해군의 수장이자 술탄의 수석 특사였다. 그는 믈라카 해협의 안전을 보장하고 "운당-운당 라우트 믈라카"(믈라카 해양법)를 시행했다. 믈라카의 가장 유명한 라크사마나는 항 투아였다.[38]

술탄국은 여러 법률 체계로 통치되었다. 전통적인 믈라카의 공식 법률은 "운당-운당 믈라카"(믈라카 법), "후쿰 카눈 믈라카", "리잘라트 후쿰 카눈", "운당-운당 라우트 믈라카"(믈라카 해양법)로 구성되었다. 법률 요약에 기록된 법률은 진화 과정을 거쳤다. 결국 진화한 법적 규칙은 초기 비토착 힌두/불교 전통, 이슬람, 토착 "아다트"라는 세 가지 주요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다.[38]

왕국에서는 토착 관습과 이슬람 법이 결합된 『믈라카 법』이 편찬되었다. 이 법률은 노예에게도 일정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었다. 형법에 관해서는 당시 믈라카에서는 사형 집행 빈도가 높았다고 한다.

5. 3. 왕권

믈라카는 잘 정의된 법률 체계를 갖춘 정부를 운영했다. 술탄국의 위계질서 최상위에는 절대 군주인 술탄이 있었다. 왕의 통치권이 정당한 혈통에 근거하는 초기 스리비자야의 군주제 개념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고,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다울라트'(주권)라는 이름으로 재도입되었다.[38]

술탄 아래에는 벤다하라가 있었는데, 이는 재상과 유사한 직책으로 술탄의 고문 역할을 했다. 벤다하라는 믈라카에서 평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위직이었다. 벤다하라는 또한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는 책임을 맡았다. 믈라카의 다섯 번째 벤다하라였던 툰 페락은 전쟁과 외교 모두에서 뛰어났다.

벤다하라 다음은 "펜굴루 벤다하리"라고 불리는 국고 담당관이 있었다. 그 다음은 공공 경찰 및 국가 안보 책임자와 비슷한 테멩궁이었다. 테멩궁 다음은 해군의 수장이자 술탄의 수석 특사였던 라크사마나가 있었다. 믈라카의 가장 유명한 라크사마나는 항 투아였다.

궁정에는 참의원과 같은 왕의 시정을 보좌하는 기관은 없었으며, 왕은 신하들과의 합의로 정무를 수행했다.[95] 병약하여 정무를 수행하는 데 지장을 겪거나, 혹은 국정에 관심이 없는 왕은 신하에게 정무를 일임했지만, 정력적인 왕은 국사의 전권을 장악했다.[95]

왕 다음의 지위에 있는 부왕은 파두카 라자가 불렸지만, 실질적으로 국왕 다음의 입장에 있던 관직은 분다하라(재상)였다. 분다하라, 푼글 부다하리(재무장관과 왕실의 가령을 겸임), 라크사마나(해군 총사령관), 툼공(경찰청장) 등의 요직은 왕족 혹은 건국에 협력한 해상민의 자손인 귀족으로 채워졌다.[97]

믈라카의 전쟁에서는 전쟁 노예와 외국인 용병 외에, 울바란이라는 무사기사에 비유되는 신분의 자들도 전선에서 싸웠다. 15세기 중반에 울바란 부사르를 보좌하는 역할로 라크사마나가 창설되었으며, 항 투아가 초대 라크사마나에 임명되었다. 그 후 라크사마나가 실질적인 울바란의 지도자가 되었다.[100]

6. 경제

믈라카의 주석 덩어리, 쿠알라룸푸르의 말레이시아 국립 역사 박물관에서 촬영.


믈라카는 자체 생산품이 거의 없었지만, 주석 덩어리는 믈라카 고유의 무역 통화였다. 각 블록은 곡괭이 모양으로 주조되었으며 무게는 1파운드가 조금 넘었다. 10개의 블록은 "작은 묶음", 40개의 블록은 "큰 묶음"을 이루었다.[44] 금화와 은화도 믈라카에서 발행되었다.

15세기 초 정화 함대에 의해 전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20] 믈라카 왕국은 독자적인 주석 화폐를 주조했는데, 2대 군주 이스칸다르 샤는 명나라 조정에 즉위를 알리면서 주석 화폐 주조 허가를 받았다.[120]

그 외 인도 각지의 화폐, 사제 화폐, 조개껍데기, 금속 조각 등이 화폐로 사용되었으나, 당시 동남아시아 무역권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통화는 없었다. 16세기 초 동남아시아 항구 도시들은 기항지에서 물품을 판매하고 현지 화폐를 얻어 필요한 물품을 조달했는데, 이 거래 방식으로 재산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거래해야 했다.

16세기 포르투갈 상인 프란체스코 델 보치에르는 믈라카 왕국에서 상거래는 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지 상인은 금화, 은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동남아시아에서는 국내 시장과 국외 시장 간 차이가 커서, 국제 교역 도시 믈라카에서는 가치 차이가 작은 금이 필요했다.

6. 1. 무역

믈라카는 중계 무역항으로, 15세기 초부터 한 세기 동안 국제 무역 중심지로 빠르게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은 믈라카 해협에 위치한 전략적 위치와 동서양 상품에 대한 수요 증가 덕분이었다. 중국, 류큐 열도, 자바, 말루쿠 제도 등 동쪽에서 온 배들은 12월에서 1월 사이 북동 계절풍을 타고 왔고, 인도 해안, 홍해, 동아프리카로 가는 배들은 남서 계절풍을 이용했다.[44]

믈라카 해협에는 케다, 잠비, 팔렘방 등 다른 항구들도 있었지만, 믈라카는 안전하고 유리한 무역 환경을 조성하여 이들보다 우위를 점했다. 15세기 중반 중국 기록에 따르면 믈라카는 효과적인 보안 조치와 잘 관리된 항구를 갖춘 무역 중심지로 번성했다. 상인들을 위해 창고와 상품 운송용 코끼리 등 시설이 제공되었고, 상인들은 지역별로 4명의 샤반다르 중 한 명의 관할 하에 있었다.[44]

믈라카는 자체 생산품이 거의 없었다. 소량의 주석, 건어물을 생산했지만, 소금조차 다른 지역에서 조달해야 했다. 채소, , 생선 등 기본적인 상품은 무역 파트너들이 제공했고, 은 주로 수입되었다. 믈라카는 말루쿠 제도의 정향, 육두구, 메이스와 구자라트, 코로만델 해안, 말라바르 해안, 벵골의 면화 직물 재분배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중국산 도자기, 실크, , 캄포, 백단향, 향신료, 생선, 생선알, 해초와 같은 말레이 제도의 천연 제품, 등나무, 수지, 뿌리, 왁스, 금, 주석과 같은 산림 제품이 거래되었다.[44]

주석 덩어리는 믈라카 고유의 무역 통화였다. 각 블록은 곡괭이 모양으로 주조되었고 무게는 1파운드가 조금 넘었다. 금화와 은화도 믈라카에서 발행되었다.

믈라카 술탄국의 직할지는 믈라카를 중심으로 하는 말레이 반도 서안으로, 서쪽의 링기(링기 강)와 동쪽의 Muar (district)|무알영어(무알 강) 사이, 내륙은 구눙 레당에 이르는 좁은 범위였다.[94] 그 주변의 주석 산지인 시뇨중(스르가이 주글라), 클랑, 브루남, 민장, 페락, 불라스 등과 해상 민족의 본거지인 싱가포르, 루바트, 리아우 제도, 링가 제도 등은 왕국의 속령이었다.[94] 인드라길리, 로칸, Kampar Regency|캄파르영어, Siak Regency|시아크영어, 퉁갈 등 수마트라 섬 동해안 제국과 말레이 반도 동해안의 파항은 믈라카 왕국의 속국이었다.[94]

믈라카는 인도와 중국 간 항해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중간 지점에 위치했으며,[111] 동쪽의 인도네시아 섬들과 중국, 서쪽의 인도와 아랍 세계 상인들이 방문하는 국제 도시였다.[89] 구자라트의 무슬림힌두교 상인, 남인도의 타밀인, 자바 섬 사람들이 주요 무역 상대였고, 중국 밀수 상인들도 왕래했다. 믈라카는 계절풍의 교차점에 위치했으며,[112] 일본의 동남아시아사 연구가 이시이 요네오는 교역항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족했다고 말했다.

각국 상인들은 구매한 물품을 자국에 유통시켰고, 유럽에는 베네치아 등을 경유하여 전달되었다.[89] 왕국은 상품 판매세와 관세로 이익을 얻었고, 술탄과 고관들은 상인들의 헌금으로 부를 축적했다.[89] 믈라카 상인들은 계약서 없이 구두 약속으로 거래를 성사시켰다.

외국인과의 상거래는 샤반다르라는 외국 상인 출신 관리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바르보사는 샤반다르의 역할을 각국 영사에 비유했다.[113] 믈라카 최성기에는 4명의 샤반다르가 각각 출신 지역 상인들을 돌봤으며,[114] 직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자도 있었다. 4명은 각각 구자라트, 페구와 파사이 등 왕국 서부 항만 도시, 자바 및 필리핀 등 동부 섬들, 중국과 류큐를 포함한 동아시아 상인들을 통솔했다. 직무는 창고 할당, 상품 가격 산정 및 반입 알선, 상인 간 분쟁 조정이었다.[80]

외국인이 재정에 등용된 것은 샤반다르 직뿐만이 아니었다. 술탄 만수르는 힌두교 금융업자를 발탁하여 금융 조직화를 꾀했으며,[115] 팔렘방 출신의 비이슬람교 노예를 재정 담당관으로 기용했다.[115]

믈라카는 타국보다 낮은 관세를 책정하여 선박을 유치했다. 주변 항구가 12% 관세를 부과한 반면, 믈라카는 6%의 세율(식량에는 세금 부과 안 함[116])과 약간의 헌금을 설정했고, 자바, 수마트라, 중국 등 동방 선박에는 관세를 면제하고 헌금만을 요구했다.[117] 항구, 항로 인프라 정비 외에 상인과 선원이 필요로 하는 일용품과 휴식 공간도 제공했으며, 각국의 음식점이 즐비했다.[118]

피르스(Tomé Pires)의 《동방 제국 기행》에는 믈라카와 다른 국가 간 거래된 상품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구자라트, 코로만델 지방, 벵골 지방 등 인도 방면에서는 면포와 의류가 수입되어 수출 주력 상품이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공예품과 향료 외에 서민들이 구매하는 일용품도 수입되었다.

  • 명, 류큐: 후추, 정향, 육두구, 향료, 상아, 주석, 용뇌, 알로에, 푸쇼(약재가 되는 카슈미르산 나무 뿌리), 염주, 소목, 모직물
  • 아유타야: 중국 및 아라비아, 페르시아 수입품, 노예, 백단향, 향신료(후추, 육두구, 메이스), 금속류(수은, 진사), 용뇌, 푸쇼, 소안패
  • 페구: 중국 수입품, 금, 금속류(수은, 구리, 진사, 주석), 향신료(후추, 육두구, 메이스), 진주 모패
  • 자바 섬: 캄바야(구자라트 지방 항구 도시) 수입품, 직물
  • 브루나이: 인도산 의류, 중국산 놋쇠 팔찌, 캄바야 수입 유리 구슬과 염주
  • 몰루카 제도: 캄바야 수입품, 직물
  • 반다 제도: 인도 방면 생산 직물
  • 티모르 섬: 흰색 직물


말라카는 타국에서 수입한 상품을 다른 나라에 수출했다. 수출 품목 중 유일한 국토 내 산물은 종속국에서 납입된 금, 귀족 공납과 채굴로 얻은 주석이었다.[119] 페락 등 말레이 반도 서해안에서 산출된 주석이 인도, 태국, 버마 방면으로 수출되었다.

6. 2. 화폐



믈라카는 무역할 국내 생산품이 거의 없었지만, 주석 덩어리는 믈라카 특유의 무역 통화였다. 각 블록은 곡괭이 모양으로 주조되었으며 무게는 1파운드가 조금 넘었다. 10개의 블록은 "작은 묶음"이라고 불리는 한 단위를 이루었고, 40개의 블록은 "큰 묶음"을 이루었다.[44] 금과 은화도 믈라카에서 술탄국 내 무역 통화로 발행되었다.

15세기 초 정화 함대에 의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중국 전이 통화로 주로 사용되었다.[120] 믈라카 왕국에서는 독자적인 화폐도 주조되었는데, 말레이 반도에서 채굴이 용이한 주석이 화폐에 사용되었다. 2대 군주 이스칸다르 샤는 명나라 조정에 즉위를 알리러 갔을 때 주석으로 화폐를 주조하는 허가도 받았다.[120] 실제로 주석 화폐가 왕국 내에서 유통되었다.

그 외에 인도 각지의 화폐, 사제 화폐, 조개껍데기, 금속 조각 등이 화폐로 사용되었으나, 당시 동남아시아의 무역권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통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16세기 초 동남아시아 항구 도시의 교역 형태는 기항한 곳에서 물품을 판매하고 현지 화폐를 얻어 그 화폐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형태였는데, 이 거래 방법으로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거래를 계속해야 했다.

16세기 포르투갈 상인 프란체스코 델 보치에르는 믈라카 왕국에서의 상거래는 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지 상인은 금화, 은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고했지만, 정치적으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동남아시아에서는 국내 시장과 국외 시장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국제적인 교역 도시인 믈라카에서의 거래에서는 가치 차이가 작은 금이 필요했다.

7. 외교

믈라카 술탄국은 류큐 왕국과 활발한 교류 관계를 맺었다. 류큐 왕국의 외교 문서인 『역대보안』에 따르면, 1463년 류큐 국왕 쇼토쿠는 믈라카에 무역선을 파견하여 술탄 만수르에게 서신을 보내 교역 편의를 요청하고 비단, 허리칼, 부채, 청자 등의 물품을 보냈다.[126][127] 류큐 사절단은 정사 오실견과 부사 나가가메이타이로 구성되었다. 이후에도 류큐는 믈라카 국왕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냈으며, 1470년에는 만수르 술탄도 류큐 선박에 서신을 맡겨 류큐 국왕에게 답례하고 면직물(인도 면) 등의 물품을 보냈다. 『역대보안』에 기록된 류큐 국왕의 믈라카 파견 선박은 총 20척에 달하지만, 1511년에 교류가 종료되었다.[128]

7. 1. 명나라와의 관계



1405년, 명나라영락제인칭이 이끄는 사절단을 믈라카로 보냈다.[21] 인칭의 방문은 믈라카와 중국 간의 우호 관계 수립의 길을 열었다. 2년 후, 제독 정화는 여섯 번의 방문 중 첫 번째 방문을 믈라카에 했다.[22] 정화는 믈라카에 들러 파라메스와라를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믈라카 통치자로서의 그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정기적인 조공의 대가로 중국 황제는 믈라카를 (Siam)의 끊임없는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중국의 개입으로 인해 믈라카는 다른 중요하고 확립된 항구를 대체하는 핵심 항구로 성장했다.[23] 중국 상인들은 믈라카 항구에 들르기 시작했고 믈라카에 해외 무역 기지를 개척했다. [24] 1411년, 파라메스와라는 540명의 왕실 일행을 이끌고 정화 제독과 함께 명나라 궁정을 방문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25]

1403년부터 1413년 사이에 명나라는 믈라카에 6차례 사신을 파견했는데, 그 대부분은 정화가 이끄는 함대였다.[123] 정화 함대의 내항에 앞서 1403년에 명나라 환관 윤경이 믈라카에 왔고, 믈라카는 그로부터 조공을 요청받았다. 이에 따라 파라메스와라는 사신을 파견했고, 1405년 9월에 믈라카의 사신은 윤경과 함께 명나라 궁정을 방문했다. 믈라카의 조공을 기뻐한 영락제는 파라메스와라의 왕위를 인정했고, 이후 믈라카는 명나라에 여러 번 조공 사절을 보내는 충실한 조공국이 되었다.[130] 1411년에는 파라메스와라 자신이 처자와 가신과 함께 정화 함대에 동승하여 명나라를 방문했고,[124] 명나라 궁정에서는 축연이 열렸으며, 파라메스와라가 귀국할 때 사절단에 금품이 하사되었다. 파라메스와라, 이스칸다르 샤, 모하메드 샤 등 왕국 성립 직후의 지도자는 스스로 중국을 방문했고, 그 횟수는 5번에 달했다.[123]

명의 대함대 지휘관인 정화는 믈라카가 기항하기에 적합한 입지, 해안 근처에 있는 큰 우물(삼보정)이 식수 보급에 편리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믈라카에 "관창"이라는 기지를 건설했다. 명나라의 조공국 중에서 국왕 자신이 빈번하게 조공한 나라는 믈라카 외에는 없었고, 믈라카의 왕이 안심하고 조공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관창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믈라카에도 삼보성, 삼보정, 삼보돈 등 정화와 관련된 유적이 존재한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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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믈라카는 먼저 성립된 주변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 조공 무역에서 이익을 얻었지만,[123] 명나라와의 관계는 교역 외에도 아유타야의 공격을 막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1407년, 1421년, 1426년부터 1433년 사이에 3차례 아유타야의 침입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명나라가 아유타야에 경고를 보내 왕국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1414년, 《명사》에는 믈라카 초대 통치자의 아들이 영락제에게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명나라 궁정을 방문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26]

믈라카 왕자들이 이끈 1420년, 1421년, 1423년에 여러 사절단을 중국으로 보내 믈라카와 중국 간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33]

1424년에서 1433년 사이에, 세 번째 통치자인 라자 텡아의 통치 기간 동안 두 번의 왕실 방문이 중국에서 이루어졌다.[34][35][27]

1430년대에 중국은 해상 확장의 정책을 뒤집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믈라카는 스스로를 방어할 만큼 군사적으로 강해졌다.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믈라카를 높이 평가했음을 시사한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을 포함한 대부분의 외국을 속국으로 간주하는 것이 중국의 관행이었지만, 믈라카와의 관계는 두 주권 국가 사이에서와 같은 상호 존중과 우정으로 특징지어졌다.[39]

만수르 샤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과 말라카 간의 우호 관계는 격화되었다. 술탄은 툰 페르파티 푸티를 수석 사절로 중국에 파견하여 술탄이 황제에게 보낸 외교 서한을 전달했다.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툰 페르파티는 술탄 만수르 샤의 명성과 위엄으로 중국 황제를 감동시켜 황제가 그의 딸 항 리 포를 술탄과 결혼시키라고 명령했다. ''말레이 연대기''는 또한 국무 고위 대신과 500명의 시녀가 "공주"를 말라카에 동행했다고 주장한다. 술탄은 이후 부킷 시나("중국 언덕")로 알려진 언덕에 새 배우자를 위한 궁전을 지었다. [49]

레 타인 통의 통치 기간 동안 말라카와 대월 사이의 짧은 분쟁은 이미 이슬람 왕국이었던 참파에 대한 1471년 베트남의 침공 직후 시작되었다. 중국 정부는 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참파 왕을 임명하기 위해 1474년에 감찰관 천 준을 참파에 파견했지만, 베트남 군인들이 참파를 장악하고 그의 입국을 막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대신 말라카로 향했고, 그 통치자는 중국에 조공을 보냈다.[50] 1469년, 중국에서 돌아오던 말라카 사절단은 베트남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젊은이들이 거세되고 노예가 되었다. 중화 왕조가 중국의 보호령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말라카는 어떠한 보복 행위도 삼갔다. 대신 말라카는 1481년 베트남의 공격과 말라카에 대한 침략 계획을 보고하고, 또한 명나라 궁정에 있던 베트남 사절단을 대면하기 위해 중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그 사건이 몇 년 전 일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알렸고, 중국 성화 황제는 베트남 통치자에게 그 사건에 대해 질책하는 서한을 보냈다. 황제는 또한 베트남이 공격할 경우 말라카가 폭력적인 힘으로 보복할 수 있도록 허가했는데, 이러한 사건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51] 근거 없는 중국 기록에 따르면 레 타인 통이 9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란 상을 침공했지만, 이 군대는 말라카 군대에 의해 쫓겨났고 3만 명의 대월 군인이 참수당했다.[52]

포르투갈의 믈라카 정복은 망명한 술탄 마흐무드의 사신을 접견한 정덕제를 격분시켰다.[62] 격노한 중국 황제는 무력으로 대응하여 30년 동안 중국에서 포르투갈인에 대한 박해를 초래했다.

가장 초기의 희생자 중에는 1516년 토메 피레스가 이끈 포르투갈 사절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극심한 적대감과 의심을 받았다.[63] 중국은 피레스 사절단이 소유한 포르투갈 재산과 상품을 모두 몰수했다.[64] 많은 사절들이 투옥, 고문, 처형되었다. 피레스 자신도 중국 감옥에서 사망한 사람들 중 하나로 여겨졌다.[65] 1521년과 1522년에 중국으로 향하던 두 척의 포르투갈 함대는 제1차 타마오 전투와 제2차 타마오 전투에서 공격받아 패배했다.

포르투갈의 해적 행위와 푸젠성의 우위 섬, 장저우의 위에 항구, 저장성의 솽위 섬, 광둥성난아오현에 불법 기지를 설치한 것에 대응하여, 명나라 우부제독 주완은 해적을 모두 처단하고 솽위 포르투갈 기지를 파괴했으며, 무력을 사용하여 외국과의 해상 무역을 금지했다.[66] 더욱이, 중국 상인들은 믈라카가 포르투갈의 통제 하에 놓인 후 믈라카를 보이콧했으며, 자바의 일부 중국인들은 도시를 침략하려는 무슬림의 시도를 지원하기까지 했다.[67]

관계는 점차 개선되었고, 중국 해안을 따라 일본 왜구 해적에 대항하여 지원이 이루어졌다. 1557년까지 명나라는 포르투갈인들이 새로운 포르투갈 무역 식민지인 마카오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동의했다.[68]

7. 2. 주변국과의 관계

믈라카는 15세기 중후반부터 포르투갈에 점령되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무자파르 샤 술탄 통치 기간 동안 딘딩스와 조호르 사이 지역이 영토로 병합되었고, 말라카의 첫 번째 통치자는 말레이 반도의 서쪽과 동쪽 끝 모두에 권위를 행사했다.[28] 왕국은 중요한 요충지인 말라카 해협을 통제하며 세계 무역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항구 도시에는 지역 상인뿐만 아니라 중국 명나라, 류큐 왕국, 페르시아인, 구자라트인, 아랍인 등 주요 국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44]

만수르 샤의 통치는 술탄국의 주요 확장을 보여주었다. 파항은 술탄국에 할양된 초기 영토 중 하나였으며, 리고르 왕의 친척인 마하라자 데와 수라가 통치했다. 술탄은 툰 페락과 19명의 말라카 훌루발랑이 이끄는 200척의 함대를 파견하여 파항을 정복했다. 말라카 함대는 데와 수라와 그의 딸을 포로로 잡아 만수르 샤 술탄에게 바쳤고, 술탄은 툰 함자를 파항 통치자로 임명했다.[45][46] 쌀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만수르 샤는 이후 리고르와 화해 정책을 시작했다.[39]

마자파힛은 당시 쇠퇴하고 있었고 말라카 술탄국의 부상하는 힘을 극복할 수 없었다. 만수르 샤는 마자파힛 왕에게 그의 딸을 술탄과 결혼시키고 인드라기리, 잠비, 퉁칼, 시안탄에 대한 통제권을 말라카에 넘겨주도록 하였다.[47][48] 만수르 샤는 수마트라의 시악을 봉신으로 삼았고, 파항, 캄파르, 인드라기리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28]

중국과 말라카 간의 우호 관계는 만수르 샤 술탄의 통치 기간 동안 강화되었다. 술탄은 툰 페르파티 푸티를 수석 사절로 중국에 파견하여 외교 서한을 전달했다.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툰 페르파티는 중국 황제를 감동하게 하여 황제가 그의 딸 항 리 포를 술탄과 결혼시키라고 명령했다. ''말레이 연대기''는 또한 국무 고위 대신과 500명의 시녀가 "공주"를 말라카에 동행했다고 주장한다. 술탄은 부킷 시나("중국 언덕")에 새 배우자를 위한 궁전을 지었다.[49]

레 타인 통 통치 기간 동안 말라카와 대월 사이의 분쟁은 참파에 대한 베트남의 침공 직후 시작되었다. 중국 정부는 1474년에 감찰관 천 준을 참파에 파견했지만, 베트남 군인들이 참파를 장악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대신 말라카로 향했고, 그 통치자는 중국에 조공을 보냈다.[50] 1469년, 중국에서 돌아오던 말라카 사절단은 베트남인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중화 왕조가 중국의 보호령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말라카는 어떠한 보복 행위도 삼갔다. 대신 말라카는 1481년 베트남의 공격과 말라카 침략 계획을 보고하고, 중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그 사건이 몇 년 전 일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알렸고, 중국 성화 황제는 베트남 통치자에게 그 사건에 대해 질책하는 서한을 보냈다. 황제는 또한 베트남이 공격할 경우 말라카가 보복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51]

만수르 샤의 팽창 정책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유지되었고, 캄파르와 시악을 그의 영토에 추가했다.[53] 그는 또한 군도의 여러 국가를 자신의 제국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전복된 통치자들도 말라카에 와서 술탄에게 왕위를 되찾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예 중 하나는 친척들에게 전복된 파사이의 자이날 아비딘 술탄이었다. 말라카 군대가 파사이로 파견되어 찬탈자들을 물리쳤다. 파사이는 이후 말라카의 통제를 받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말라카의 중요성과 이 지역의 지도자 및 국가 간에 확립된 상호 지원을 보여주었다.[47]

말라카의 번영 시대는 알라딘 리아얏 샤 술탄의 통치하에 계속되었고, 이 지역의 더 많은 외국 통치자들이 말라카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알라딘 리아얏 샤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성을 두었고, 리아우-링가 제도를 포함하도록 정복을 확장했다. 그의 아들 마흐무드 샤 술탄이 즉위했을 때, 말라카는 벤다하라 툰 페락이 관리했다. 툰 무타히르가 벤다하라로 임명된 후 말라카는 외국 상인들의 유입으로 계속 번영했다. 1500년경 말라카는 권력과 영광의 절정에 달했는데, 이는 마흐무드 샤가 아유타야 왕조와 쇠퇴하는 마자파힛의 종주권을 거부한 것으로 예를 들 수 있다.[28] 말라카는 인도 천, 중국 도자기와 실크, 말레이 향신료 무역의 주요 중심지였으며 말레이 군도에서 무슬림 활동의 본부였다.

마자파힛과 아유타야 왕조는 교역 상대이자 식량 수입처로서 중요한 관계에 있었고, 적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건국 초기 믈라카 술탄국은 마자파힛에 대항하기 위해 아유타야에 종속되어 매년 공납을 행했다. 파라메스와라는 믈라카 건국 이전에 아유타야 왕의 사위인 투마세크(싱가포르)의 왕을 살해했기 때문에 아유타야의 남하를 초래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건국 후인 1407년에도 믈라카는 아유타야의 공격을 받았다. 2대 왕인 이스칸다르는 의동생을 아유타야에 수호 사절로 보내 공납과 교환하여 식량 공급을 받는 협약을 맺지만[122], 명이 남해로의 함대 파견을 중단한 후에 아유타야로부터의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87] 무자파르 샤 시대에 믈라카는 말레이 반도의 동해안, 슬랑고르 등 주석 생산지인 서해안으로 세력을 뻗어갔지만, 세력 확장에 이르러 아유타야와의 이해관계 대립이 현저해져 1446년 아유타야의 침입으로 이어진다.

이스칸다르 샤는 건국 당시에 적대 관계에 있던 마자파힛과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여, 파사이(Pasai)를 통해 마자파힛과의 국교를 수립했다. 이스칸다르 이후의 대 마자파힛 정책으로서, 《수잘라 믈라유》에는 만수르 샤가 마자파힛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직접 자바(Java)로 향했다는 기록이 있다.

7. 3. 류큐 왕국과의 관계

류큐 왕국의 외교 문서를 기록한 『역대보안』에 따르면, 류큐 국왕 쇼토쿠는 1463년에 믈라카에 무역선을 파견하여[126] 믈라카 국왕(술탄 만수르)에게 서신을 보내 해당 선박의 교역 편의를 봐줄 것을 요청하고, 비단, 허리칼, 부채, 청자 등의 물품을 보냈다.[127] 이때 류큐 사절은 정사 오실견, 부사 나가가메이타이였다. 그 후에도 류큐에서 믈라카 국왕 앞으로 보내는 서신은 여러 번 기록되었으며, 1470년에는 만수르도 류큐 선박에 서신을 맡겨 류큐 국왕에게 답례를 표하고 면직물(인도 면) 등의 물품을 보냈다. 『역대보안』에 기록된 류큐 국왕으로부터 믈라카로 가는 선박은 합계 20척에 달하지만[128], 1511년에 종료되었다.

8. 종교

믈라카 술탄국의 종교는 이슬람교였다. 말라카 해협에서의 교역 활동은 이슬람교 세력의 항구 도시를 오가는 이슬람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81] 믈라카로 이슬람 상선의 내항을 장려하기 위해[129] 국왕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믈라카 술탄국에서는 이슬람 전통과 지역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의식들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무하마드 샤 통치 기간에는 라마단의 27번째 밤인 라이라트 알-카드르를 기념하는 특별한 의식이 열렸다. 이 의식은 템궁이 코끼리를 타고 술탄의 기도 매트를 타라위를 위해 모스크로 운반하는 행렬로 시작되었고, 다음 날에는 술탄의 터번이 행렬에 의해 모스크로 운반되었다. 이와 유사한 의식들이 하리 라야 아이딜피트리와 하리 라야 아이딜라하 축제와 함께 거행되었다. 믈라카 말레이 사회는 이슬람적 세계관에 깊이 스며들어, 믈라카 함락 전날 궁정 전사들은 전투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이슬람 영웅 서사시 ''히카얏 아미르 함자''와 ''히카얏 무하마드 하나피아''의 사본을 요청하기도 했다.[73]

이슬람 중심지로서 믈라카의 부상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슬람은 왕권 개념을 변화시켜 술탄을 신성한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할리파로 여기게 했다. 둘째, 이슬람은 믈라카가 오스만 제국 등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기여하여 무슬림 상인들을 믈라카로 끌어들였다.[73] 셋째, 이슬람은 믈라카 사회와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말레이 정체성의 중요한 표식이 되었다.[6][7]

그러나 당시 믈라카에서는 이슬람 계율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고, 말단 소부족에게는 이슬람 신앙이 완전히 침투하지 못했다.[134] 토메 피레스는 『동방 제국기』에서 포르투갈에 점령된 직후 믈라카 주민들이 음주를 즐겼다고 언급했으며,[135] 15세기 말 아랍 항해자 이븐 마지드는 개고기 섭취와 음주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믈라카를 비문화적이라고 비판했다.

8. 1. 이슬람교의 수용과 확산

믈라카의 초대 통치자 파라메스와라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아들 메갓 이스칸다르 샤는 72세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는 기록이 토메 피레스에 의해 남아있다.[72] 반면, ''말레이 연대기''는 세 번째 통치자인 무하마드 샤() 때부터 통치 계층과 백성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믈라카의 이슬람화가 정확히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이견이 있지만, 무자파르 샤() 통치 시기에 이슬람교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72]

15세기와 16세기 사이, 믈라카 주변 지역의 이슬람화는 믈라카강 북쪽 둑에 있던 우페 지역의 연구 센터를 통해 점차 확대되었다. 이슬람교는 믈라카에서 수마트라의 잠비, 캄파르, 벵칼리스, 시악, 아루 및 카리문 섬,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 자바 및 필리핀으로 퍼져 나갔다.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믈라카와 파사이의 궁정들은 서로 신학적 질문과 문제들을 주고받았으며, 자바에 이슬람교를 전파한 왈리 상가 중 수난 보낭과 수난 칼리자는 믈라카에서 공부했다고 한다.[72] 토메 피레스는 ''수마 오리엔탈''에서 수마트라 동해안의 캄파르와 인드라기리의 통치자들이 술탄 무자파르 샤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믈라카에서 종교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말레이 연대기''는 또한 믈라카 왕실 궁정에서 다양한 술탄의 교사이자 상담역으로 활동한 여러 학자들을 언급한다. 마울라나 아부 바카르는 술탄 만수르 샤의 궁정에서 봉사했으며 메카의 아랍 학자의 저작에서 번역된 신학 텍스트인 ''키타브 다룰 만줌''을 소개했다. 마울라나 카디 사르다르 요한이라는 학자는 술탄 마흐무드 샤와 그의 아들 모두에게 종교 교사로 봉사했다. ''키타브 다룰 만줌'' 외에도, ''말레이 연대기''는 아부 나스르 알-사라즈의 10세기 수피즘에 관한 논문인 ''키타브 알-루마' 피 타사우프'( '번개의 책')도 언급한다.[73]

믈라카 술탄국에서는 이슬람 전통과 지역 문화를 융합한 의식들이 만들어졌다. 무하마드 샤 통치 기간 동안 라마단의 27번째 밤인 ''라이라트 알-카드르''를 기념하는 특별한 의식이 열렸다. 이 의식은 템궁이 코끼리를 타고 술탄의 기도 매트를 타라위를 위해 모스크로 운반하는 행렬로 시작되었다. 다음 날에는 술탄의 터번이 행렬에 의해 모스크로 운반되었다. 비슷한 의식들이 ''하리 라야 아이딜피트리''와 ''하리 라야 아이딜라하'' 축제와 함께 치러졌다. 믈라카 말레이 사회는 이슬람적 세계관에 깊이 스며들어, 믈라카 함락 전날 궁정 전사들은 전투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이슬람 영웅 서사시 ''히카얏 아미르 함자''와 ''히카얏 무하마드 하나피아''의 사본을 요청하기도 했다.[73]

이슬람 중심지로서 믈라카의 부상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슬람은 왕권 개념을 변화시켜 술탄을 신성한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할리파''로 여기게 했다. 둘째, 이슬람은 믈라카가 오스만 제국 등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기여하여 무슬림 상인들을 믈라카로 끌어들였다.[73] 셋째, 이슬람은 믈라카 사회와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말레이 정체성의 중요한 표식이 되었다.[6][7] 이 정체성은 문학, 건축, 요리 전통, 전통 의상, 공연 예술, 무술 및 왕실 궁정 전통 등 말레이 전통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믈라카가 설정한 기준을 통해 더욱 풍부해졌다.[74]

말라카 해협에서의 교역 활동은 이슬람교 세력의 항구 도시를 오가는 이슬람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81] 말라카로 이슬람 상선의 내항을 장려하기 위해[129] 국왕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인도네시아 국정 교과서는 초대 파라메스와라를 이슬람교로 개종한 최초의 국왕으로 기록하고 있다.[130] 믈라카의 왕은 이슬람 국가에서 사용되는 술탄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술탄을 칭한 것은 5대 무자파르 샤로 여겨진다.[131]

믈라카의 이슬람화는 15세기에 들어서 시작되었지만, 중국 측 사료와 피레스의 기록을 고려하면 이슬람의 정착과 이슬람 학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무자파르 샤(재위 1446년 - 1459년) 시대라고 여겨진다.[132] 15세기 중반부터 믈라카는 파사이의 이슬람 학자들과 교류하며 교리 해석에 대한 토론을 벌였고,[132] 만수르 샤는 파사이의 학자 마흐둠 파타칸에게 철학서 『두르르 만줌』의 말레이어 번역을 의뢰했다. 믈라카의 이슬람화는 말레이 반도 연안부와 수마트라 섬에 이슬람교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132] 이슬람 상인의 교역 네트워크 확대와 함께 이슬람 종교가의 활동 범위도 넓어졌다. 16세기 초에는 파항, 인드라기리, 캄파르 등 수마트라, 자바의 연안부, 브루나이 등 주변 지역 지배자 대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했고,[133] 필리핀에도 이슬람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당시 믈라카에서는 이슬람 계율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고, 말단 소부족에게는 이슬람 신앙이 완전히 침투하지 못했다.[134] 피레스는 『동방 제국기』에서 포르투갈에 점령된 직후 믈라카 주민들이 음주를 즐겼다고 언급했으며,[135] 15세기 말 아랍 항해자 이븐 마지드는 개고기 섭취와 음주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믈라카를 비문화적이라고 비판했다.

8. 2. 종교적 관용

믈라카의 초대 통치자 파라메스와라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는지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어 확실하지 않다. 16세기 포르투갈 작가 토메 피레스는 파라메스와라의 아들 메갓 이스칸다르 샤가 72세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언급했다. 반면, ''말레이 연대기''는 세 번째 통치자 무하마드 샤(1424-1444 재위) 때 통치 계급과 백성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믈라카의 이슬람화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무자파르 샤(1445-1459 재위) 때 이슬람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72]

15세기 중반부터 믈라카는 파사이의 이슬람 학자들과 교류하며 교리 해석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132] ''술라라 믈라유''는 무자파르 샤의 뒤를 이은 만수르 샤가 파사이의 학자 마흐둠 파타칸에게 철학서 『두르르 만줌』의 말레이어 번역을 의뢰했다고 전한다. 믈라카의 이슬람화는 말레이 반도 연안부와 수마트라 섬에 이슬람교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72]

믈라카 주변 지역의 이슬람화는 15세기와 16세기 사이에 믈라카강 북쪽 둑에 있는 우페 지역의 연구 센터를 통해 점차 심화되었다. 이슬람은 믈라카에서 수마트라의 잠비, 캄파르, 벵칼리스, 시악, 아루 및 카리문 섬,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 자바 및 필리핀으로 퍼져 나갔다. ''말레이 연대기''는 믈라카와 파사이의 궁정들이 서로 신학적 질문과 문제들을 제기했다고 언급한다. 자바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책임이 있는 왈리 상가 중 수난 보낭과 수난 칼리자는 믈라카에서 공부했다고 한다.[72] 토메 피레스는 ''수마 오리엔탈''에서 수마트라 동해안의 캄파르와 인드라기리의 통치자들이 술탄 무자파르 샤의 영향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믈라카에서 종교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말레이 연대기''는 믈라카 왕실 궁정에서 다양한 술탄의 교사이자 상담역으로 활동한 여러 학자들을 언급한다. 마울라나 아부 바카르는 술탄 만수르 샤의 궁정에서 봉사했으며 메카의 아랍 학자의 저작에서 번역된 신학 텍스트인 ''키타브 다룰 만줌''을 소개했다. 마울라나 카디 사르다르 요한이라는 학자는 술탄 마흐무드 샤와 그의 아들 모두에게 종교 교사로 봉사했다. ''키타브 다룰 만줌'' 외에도, ''말레이 연대기''는 아부 나스르 알-사라즈의 10세기 수피즘에 관한 논문인 ''키타브 알-루마' 피 타사우프'( '번개의 책')도 언급한다.[73]

이슬람 전통과 지역 문화를 혼합한 정교한 의식들도 믈라카 술탄국에서 만들어졌다. 한 가지 예는 무하마드 샤의 통치 기간 동안 기록되었다. 라마단의 27번째 밤인 ''라이라트 알-카드르''를 기념하는 특별한 의식이 열렸는데, 이는 템궁이 코끼리를 타고 술탄의 기도 매트를 강제 야간 기도 후에 수행되는 타라위를 위해 모스크로 운반하는 낮 행렬로 시작되었다. 다음 날 술탄의 터번이 행렬에 의해 모스크로 운반되었다. 비슷한 의식들이 ''하리 라야 아이딜피트리''와 ''하리 라야 아이딜라하''의 성대한 축제와 함께 치러졌다. 믈라카 말레이 사회는 이슬람적 세계관에 깊이 스며들어 믈라카 함락 전날, 궁정의 전사들은 다음 날 전투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이슬람 영웅 서사시 두 편인 ''히카얏 아미르 함자''와 ''히카얏 무하마드 하나피아''의 사본을 요청했다.[73]

이슬람의 중심지로서의 믈라카의 부상은 여러 가지 함의를 가졌다. 첫째, 이슬람은 왕권의 개념을 변화시켜 술탄을 더 이상 신성한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할리파''로 간주하게 했다. 둘째, 이슬람은 믈라카가 오스만 제국을 포함한 다른 이슬람 정치체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 무슬림 상인들을 믈라카로 유치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73] 셋째, 이슬람은 믈라카 사회와 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궁극적으로 말레이 정체성의 결정적인 표식이 되었다.[6][7]

그러나 당시 믈라카는 이슬람의 계율이 엄격하게 지켜졌다고 보기 어려웠고, 말단의 소부족에게는 이슬람 신앙이 완전히 침투하지 못했다.[134] 피레스는 『동방 제국기』에서 포르투갈에 점령된 직후 믈라카 주민들이 음주를 매우 즐겼다고 언급했으며,[135] 15세기 말 아랍 항해자 이븐 마지드는 개고기 섭취와 음주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계율이 느슨한 믈라카를 비문화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9. 문화

믈라카 술탄국의 초대 통치자 파라메스와라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아들 메갓 이스칸다르 샤는 72세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세 번째 통치자 무하마드 샤 때부터 통치 계급과 백성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믈라카의 이슬람화가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무자파르 샤 통치 기간에 이슬람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여겨진다.[72]

15세기와 16세기 사이에 믈라카강 북쪽 둑에 있는 우페 지역의 연구 센터를 통해 믈라카 주변 지역의 이슬람화가 점차 심화되었다. 이슬람은 믈라카에서 수마트라의 잠비, 캄파르, 벵칼리스, 시악, 아루 및 카리문 섬,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 자바, 필리핀으로 퍼져 나갔다. ''말레이 연대기''는 믈라카와 파사이의 궁정들이 서로 신학적 질문과 문제들을 제기했다고 언급한다. 자바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책임이 있는 왈리 상가 중 수난 보낭과 수난 칼리자는 믈라카에서 공부했다고 한다.[72] 토메 피레스는 ''수마 오리엔탈''에서 수마트라 동해안의 캄파르와 인드라기리의 통치자들이 술탄 무자파르 샤의 영향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믈라카에서 종교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말레이 연대기''는 믈라카 왕실 궁정에서 다양한 술탄의 교사이자 상담역으로 활동한 여러 학자들을 언급한다. 마울라나 아부 바카르는 술탄 만수르 샤의 궁정에서 봉사했으며 메카의 아랍 학자의 저작에서 번역된 신학 텍스트인 ''키타브 다룰 만줌''을 소개했다. 마울라나 카디 사르다르 요한이라는 학자는 술탄 마흐무드 샤와 그의 아들 모두에게 종교 교사로 봉사했다. ''키타브 다룰 만줌'' 외에도, ''말레이 연대기''는 아부 나스르 알-사라즈의 10세기 수피즘에 관한 논문인 ''키타브 알-루마' 피 타사우프'( '번개의 책')도 언급한다.[73]

이슬람 전통과 지역 문화를 혼합한 정교한 의식들도 믈라카 술탄국에서 만들어졌다. 무하마드 샤의 통치 기간 동안 라마단의 27번째 밤인 ''라이라트 알-카드르''를 기념하는 특별한 의식이 열렸다. 이 의식은 템궁이 코끼리를 타고 술탄의 기도 매트를 강제 야간 기도 후에 수행되는 타라위를 위해 모스크로 운반하는 낮 행렬로 시작되었다. 다음 날 술탄의 터번이 행렬에 의해 모스크로 운반되었다. 비슷한 의식들이 ''하리 라야 아이딜피트리''와 ''하리 라야 아이딜라하''의 성대한 축제와 함께 치러졌다. 믈라카 말레이 사회는 이슬람적 세계관에 깊이 스며들어, 믈라카 함락 전날 궁정의 전사들은 다음 날 전투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이슬람 영웅 서사시 ''히카얏 아미르 함자''와 ''히카얏 무하마드 하나피아''의 사본을 요청하기도 했다.[73]

이슬람의 중심지로서 믈라카의 부상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다. 첫째, 이슬람은 왕권의 개념을 변화시켜 술탄을 더 이상 신성한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할리파''로 간주하게 했다. 둘째, 이슬람은 믈라카가 오스만 제국을 포함한 다른 이슬람 정치체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 무슬림 상인들을 믈라카로 유치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73] 셋째, 이슬람은 믈라카 사회와 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말레이 정체성의 중요한 표식이 되었다.[6][7] 이 정체성은 문학, 건축, 요리 전통, 전통 의상, 공연 예술, 무술 및 왕실 궁정 전통에서 믈라카가 설정한 기준을 통해 더욱 풍부해졌다.[74]

왕국의 해양 무역에는 주로 적재 능력이 뛰어난 정크선이 사용되었다. 왕국 말기인 16세기 초에 사용된 정크선의 적재량에 대해 프랑스의 동남아시아사 연구자 피에르-이브 망겡은 평균 400~500톤으로 계산했다.[136] 포르투갈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속도, 조종성, 화력 모두 부족한 거대한 정크선은 도태되었고, 선박의 소형화가 진행되었다.

무역과 전쟁에 사용되는 선박은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된 선박 외에, 목재와 기술자가 풍부한 페구 왕조의 마르타반에서 구매되기도 했다. 알부케르케는 말라카를 점령한 후 조선소 대목 60명을 인도에서 사용하기 위해 데려갔을 정도로 말라카 조선소 대목의 기술은 높았다.

16세기 초 말라카 왕국에서는 선주들에 의해 독자적인 해양법(웅단 웅단 란트)이 고안되었고,[137] 선박 소유자들은 이 법을 기록했다.[136] 이 법은 이슬람 율법(샤리아)보다 우선시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후에 부기스족이 제정한 항해법에도 영향을 미쳤다.[137] 항해법에는 선원에게 보장된 여러 권리, 출항 시의 선박 조건, 정박 시의 목적과 책임 등이 규정되어 있으며,[138] 항해를 돕는 수로 안내인의 성격을 정의하기도 했다.

수로 안내인은 선조들의 지혜와 자신들의 견문을 바탕으로 제작한 독자적인 해도(海圖)를 사용했고, 알부케르케는 1511년에 입수한 자바인 수로 안내인의 해도를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의 지도라고 칭찬했다.[139] 이 해도에는 동쪽에 말루쿠 제도, 중국인과 류큐(오키나와현)인의 항로가, 서쪽에 페르시아 만, 홍해, 포르투갈, 희망봉, 브라질이 그려져 있었지만, 해도가 적재되어 있던 배의 난파와 함께 소실되었다.[139]

''스자라 믈라유''와 ''믈라카 법''에는 당시 믈라카 주민들이 즐겼던 오락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세기 믈라카에서는 이미 중국에서 전래된 카드 게임이 도박으로 즐겨졌으며, ''믈라카 법''은 카드 게임을 좋지 않은 도박 중 하나로 취급했다. 인도에서 전래된 체스 또한 도박의 대상이 되었으며, ''스자라 믈라유''에 따르면 술탄 만수르 통치 시대에 체스가 성행했던 파사이 왕국의 명인이 믈라카를 방문하여 믈라카의 기사들을 모두 이겼다고 한다.

도박 요소가 없는 오락으로는 세팍 라가( 세팍타크로도 참조)라는 족구와 비슷한 구기 종목이 행해졌으며, ''스자라 믈라유''에는 술탄 알라웃딘 리야트 샤 시대에 믈라카의 귀족과 몰루카의 왕이 세팍 라가를 즐기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9. 1. 언어

믈라카를 중심으로 한 교역은 왕국의 상업 공용어인 말레이어 사용 지역을 넓히고 어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본래 믈라카 해협의 한 지역에서 사용되던 말레이어가 믈라카 상인들이 방문한 토지에 퍼져 아랍어, 페르시아어, 타밀어, 자바어 등 교역 상대국에서 사용되던 언어의 단어가 말레이어 어휘에 더해졌다[136]. 포르투갈이 믈라카에 내항한 16세기 초에는 수마트라 동해안부 주민의 다수가 말레이어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페르디난드 마젤란1521년필리핀에 도달했을 당시에도 현지 주민들은 마젤란이 데리고 있던 수마트라 출신 노예가 구사하는 말레이어를 통해 소통할 수 있었다고 한다[136].

9. 2. 문학

믈라카 왕국 시대에 발달한 말레이 문학(말라카 해협 주변 지역에서 탄생한 이슬람 문학)의 한 형태로 영웅담을 들 수 있다.[1] 항 투아, 항 레키르, 항 주밧 등 군인의 활약을 그린 설화가 왕국 내에서 생겨났다.[1]

항 투아의 동상

9. 3. 건축

이스칸다르 샤 시대에 항구 옆 부킷 믈라카(믈라카 언덕)에 말레이 양식의 왕궁이 세워졌다[127]。왕궁은 , 아유타야 왕조, 류큐 왕국 등 동시대 아시아 국가의 궁궐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믈라카의 왕에게는 충분한 크기였다[127]。또한, 최성기 믈라카에는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궁전을 신축하는 관습이 있었다[140]

왕궁 외에 석조 모스크와 왕묘가 건설되었지만, 모두 포르투갈 점령 후에 왕궁과 함께 해체되어 부킷 믈라카에 세워진 성채의 자재로 사용되었다[141]

10. 유산

말라카 술탄국은 말레이 세계의 황금기를 열었으며, 16세기에 극동 지역의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토메 피레스는 "말라카의 주인이 되는 자는 베니스의 목을 움켜쥘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번성했다.[75] 이 술탄국은 특히 말레이 문화와 말레이시아의 역사에서 지속적이고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말라카는 지역 해양 강국으로 성장한 최초의 말레이 무슬림 국가였다. 케다, 사무드라 파사이, 아루 왕국과 같이 잘 정비된 항구를 가진 이전의 무슬림 왕국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어느 곳도 말라카가 이 지역에서 영토와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한 것만큼은 아니었다. 말라카는 또한 토착적이고 힌두-불교적 사상을 통합하고 그것들을 이슬람 사상과 가치관으로 광범위하게 층을 이루게 함으로써 이슬람을 기반으로 하는 공통 말레이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76] 말라카 궁정은 전통, 법률, 왕실 의식과 관습을 통해 이 지역의 후대 무슬림 술탄국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를 제시했다.

말라카는 말레이시아라는 현대 국가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말라카는 말레이 반도 전체를 통치 아래 통합한 최초의 중앙 집권적 정치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할 때문에 말라카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레이시아의 정신적 발상지로 여겨진다.[77] 말라카 술탄국이 1511년 포르투갈에 멸망한 후, 마흐무드 샤는 수마트라, 캄파르 섭정으로 후퇴했다. 그는 술탄 알라딘 리야트 샤 2세라는 왕자를 남겼고, 이 왕자는 이후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다.

말라카 술탄국은 또한 그 전신인 싱가푸라 왕국과 슈리비자야가 자바 기반의 경쟁 세력에 맞서 벌인 역사적인 투쟁을 이어가는 주요 기지로 부상했다.[78] 15세기 중반, 마자파힛은 말라카 해협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력을 확보하고 수마트라로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말라카의 부상하는 힘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주요 중계 무역항으로서 말라카는 전 세계 각지에서 온 무슬림 상인들을 끌어들였고 동남아시아 해양 전역에 이 종교를 전파하면서 이슬람의 중심지가 되었다. 15세기에 이슬람이 자바 내륙으로 확산되면서 마자파힛은 점차 쇠퇴했고, 결국 16세기 초에 부상하는 현지 무슬림 세력에 굴복했다. 동시에 말라카의 문학 전통은 결국 이 지역의 ''공용어''가 된 고전 말레이어를 발전시켰다. 이슬람의 출현과 말레이어를 의사 소통 수단으로 사용하는 번성하는 무역은 동남아시아 해양에서 말라카와 기타 후대 말레이-무슬림 술탄국의 지배로 이어졌다. 일부 학자들이 언급했듯이, 이 지역의 역사적인 말레이-자바 경쟁은 현대에도 지속되었으며, 말레이 중심의 말레이시아와 자바 기반의 인도네시아 간의 외교 관계를 계속 형성하고 있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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